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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선교회

신약/고린도후서

[스크랩] 고린도후서 (1 : 1~24)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0:53

고린도후서 (1 : 1~24)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ㅇ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 - 바울은 빌립보서, 데살
로니가전 후서, 빌레몬서를 제외한 모든 서신에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임을
밝힘으로써 서두를 시작하고 있다. 바울 자신은 그리스도에 의해 택함받은 열 두 제자
들 중 한 사람은 아니었지만(막 3:14-19), 그가 개심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특
별한 계시에 근거하여(행 9:15) 열 두 졔자들과 동등한 사도라고 주장하였다
(11:5;12:11;갈 2:6, 7). 그런데 바울이 본서신의 서두에서 자신의 사도직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바울이 본 서신에서 바울이 중요
하게 다루는 주제 가운데 하나는, 그를 대적하는 자들이 그의 사도권에 대해 도전해
오는 것에 대응하여 자신의 사도됨의 정당성(正當性)을 밝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2:14-7:4).
ㅇ디모데 -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소스데네를 공동 발신인으로 언급한 것(고전 1:1)
과 달리 디모데를 본 서신의 공동 발신인으로 언급한 것은 디모데가 본서신의 공동 저
자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에게 디모데의 권위를 회복시키기 위함
이다.디모데는 바울로부터 고린도에 파송되어 사역 감당했던 일이 있었지만, 그는 나
이가 젊고 담대하지 못하였고(딤전 4:12;딤후 1:7;2:1), 고린도 교회의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역은 미미한 성과밖에 거두지 못였거나 거의 실패했었다
(고전 4:17;16:10, 11). 이런 일에 대하여 바울은 그의 신앙의 아들이자 가장 절친한
동역자로서 자신과 함께 계속 사역해야 할 디모데의 권위를 다시금 세워주어야할 필요
를 절감하였을 것이다(Harris). 또한 비록 과거에 디모데가 고린도에서 바울 반대파로
인해 별로 좋지 않은 경험을 했던 일이 있지만(고전 16:10, 11), 그럼에도 블구하고
바울이나 디모데는 그들에 대하여 여전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본 서신의
서두에서 보여주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한편 디모데는 헬라인 아버지와 유대
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고 주변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모범적인 젊은이였으며(행
16:1, 2), 바울에게는 아들이라고 불릴만큼 각별한 사랑을 받았고(딤전 1:2;딤후
1:2),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 전 후서, 빌레몬서의 서두에 언급될 만큼 절친
한 동역자이기도 했다(행 16:1-3;빌 2:19-22).
ㅇ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 여기서 '하나님의'라는 소유격은 교회의 소유자가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고린도 교회에 침입해 들어와 바울의 권위를 깍아 내리고 추천
장을 내세워 자기들의 권위를 주장하며 자기들만이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고 주장하여
고린도 교회에 문란을 일으켰던 적대자들과(3:1;4:2;10:7), 그에 동조했던 사람들은
교회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것임을 알아야 했다. 한편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
회'라 함은 본 서신의 수신자가 고린도 교인들뿐만 아니라 고린도 지역과 그 주변에
있는 교인들이 모두 해당함을 암시한다. 즉 이 표현은 여러 수신처를 포괄(包括)하는
대표적인 언급이라 하겠다. 이러한 견해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첫번째 서신의
초두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문구에 이어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
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고전 1:2)라는 언
급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도 충분히 지지될 수 있다(Tasker). 바울은 두 개의 고린도
서신이 고린도와 그 이외의 지역에서도 읽혀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ㅇ아가야 - 로마가 헬라를 지배할 당시 로마는 헬라 전체를 마게도냐(Macedonia)와
아가야(Achaia) 두 지역으로 구분하여 통치하였다. 에피루스(Eqirus), 데살리
(Thessaly), 갈시디스(Chalcidice)를 포함하는 중북부 지역이 마게도냐에 속하고 아덴
(Athens)과 펠로폰네수스(Peloponnesus)를 포함하는 남부 지역은 아가야에 포함되었고
아가야의 행정 수도는 고린도(Corinth)였다. 바울이 본 서신을 보내면서 고린도뿐만
아니라 고린도를 포괄하는 아가야 전지역의 성도들이 읽기를 희망했던 것은 아덴에 그
리스도인들이 있었다는 행 17:34의 기록과 겐그레아에 한 교회가 있었다는 롬 16:1의
기록과 부합되는 것이니, 아덴과 겐그레아는 모두 아가야 지역 내에 위치한 곳이었다.
ㅇ성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오스'는 원래 '분리하다', '구
별하다'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카다쉬'에서 유래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
라엘은 다른 이방 민족들과 구별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었고(민 23:9;시
147:20), 따라서 그들의 삶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제사장 직분의 삶이어야 했다(레
11:44;신 7:6). 신약의 성도는 성별된 구약 이스라엘의 영적 계승(繼承)자로서(벧전
2:9,10) 소극적으로 죄악으로부터 분리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헌신, 봉사
해야 할 자들이다.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ㅇ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은혜와 평강이 - 본절에서 하나님
은 아버지로 불리며 예수는 주와 그리스도로 불리는데, 이는 '주'(퀴
리우)가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지칭할 때 사용된 것임을 고려할때(아도나
이) 예수는 곧 하나님이심을 제시하는 것이며 따라서 본절은 삼위일체의 근거가 되는
구절이다. 본절과 동일한 내용과 형식을 가진 구절이 고전 1:3에도 나오는데 이는 전
통적인 헬라식 문안 인사말과 히브리식 문안인사말을 결합한 바울 특유의 전형적인 인
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은혜'(카리스)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존재
근거인 하나님의 선재적(先在的)인 행위로, 받는 자의 행위나 자격에 의해 정당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호의' 또는 '선물'이다. 특히 여기서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세상과 화목하시기 위하여 사람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고 예
수께 지우신 것을 의미한다(5:19,20). '평강'(에이레네)은 하나님
의 은혜의 결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구원이 보증된
영혼의 평안한 상태를 가리킨다(롬 1:7;빌 4:7).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ㅇ찬송하리로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로게토스'라는 '칭
찬하다'는 뜻의 '율로게오'에서 온 말로 구약에서 하나님을 찬양하
는 경우에 사용된 히브리어 '바룩'('찬양하다')과 같은 의미이다. '바룩'
은 후기 유대교의 제의적 자료, 특히 회당 예배에서 사용되는 열 여덟 개의 축복문에
눈에 띄게 나타난다(Barrett).
ㅇ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 이 말은 '찬송하리로다'라는 표현이 더
이상 유대교적인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더 나아
가 이 표현은, 유대교 찬양문에 나오는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는 형식이 기독교적
인 형태로 발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Barrett). 즉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 조
상들의 하나님'으로 알려진 것에 비해 신약성경에서는 '세상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의 아버지'로 묘사되었는데(갈 4:4) 이것은 초대 교회에 널리 사용된 독특하고 특징적
인 기독교적 어법인 것이다(벧전 1:3). 그러나 이스라엘 조상들의 하나님과 예수 그리
스도의 하나님은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연속(連續)되는 것이며, 조상들의 하나님에 대
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이어진다. 또한 본문에는 하나님
이 어떤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아버지가 되시는가 하는 것이 규정
되어 있는데(Backmann), 하나님은 이제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이 그것이다.
ㅇ자비의 아버지시요 - 이 문구는 유대교의 회당에서 널리 사용되던 기도문 형식의
표현이다. 즉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고백할 때에 '오, 우리의 아버지, 자비로우신
아버지여'(압 하라하밈)라는 말로 시작한다(A. Marmorstein).
이처럼 유대인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한 이 표현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단순히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뜻 외에 '자비(오이크
티르모스)가 하나님께로부터 유래되며 하나님이 자비의 창조자요 근원이심을 의미한다
(시 86:15;미 7:18).
ㅇ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 여기서 '모든'(파세스)은 '완전하다'는
뜻도 있으나 그보다는 '풍부하고 충분하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위로'
(파라클레세오스)는 하나님의 내적 속성인 자비가 외적 행위
로 구체화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의 위로는 단지 심리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환난으로부터 실제적으로 구해냄을 받은 것을 포함한다(8-10절). 바울은 그 자
신이 환난 가운데서 붙드시고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직접 체험하였다(롬 8:
35).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ㅇ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 본절의 '우리'는
일차적으로 본 서신의 발신인인 바울 자신을 가리키며 넓게는 본 서신을 읽게 되는 전
체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Barrett, Lowery). 본서에서 바울이 아홉 차례나 사용하
고 있는 '환난'(들립세이)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인의 실존(實存)이
환난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해준다(8절;2:4;4:17;6:4;7:4;8:2, 13). 세상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게 마련이다(요 15:19
,20).그러나 이러한 환난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주어진다. 본절의 '위로하
사'(파라칼론)는 '안위하다',`위로하다'는 뜻의 '파라칼레오'
의 현재 분사형으로,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중단없이 계속됨
을 뜻한다. 연속되는 환난과 그에 상응하여 계속되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역설적으로
결합됨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규정하고 있다.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다가 여
러 차례 극심한 환난을 겪었으나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안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함
께 하심을 체험하였다(행 14:19;16:19-26). 그리하여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
라"(12:10)고 고백하였다. 한편 본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환난 가운
데 내버려두지 않고 위로하기는 중요한 목적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뿐
만 아니라 위로받은 자가 환난에 처한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培
養)시켜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섬기는데 사용되어야 함을 말한 것과 같다(벧전
4:10).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ㅇ그리스도의 고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파데마타 투 크리스투'
는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이 아니라 '그리
스도의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자가 한결같이 받는 고난'을 의미한다(Martin, Ewald).
모든 고난이 다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다만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일 때 의미가 있
고 위로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신의 잘못에서 결과되는 것이 아니
라 무고한 고난이며(눅 22:52,53;23:22-24), 그 고난의 결과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
는 '메시야적 고난'(헤블레 함마쉬아흐)이 되는 것이다. 바울
은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한 이런 고난은 필연적(必然的)인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는 것이라고 했고(골 1:8),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하여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롬 8:17).사
실상 바울은 이러한 고난을 당했다. 복음을 증거하다가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에게 돌
로 맞아 거의 죽을 지경까지 갔었고(행 14:19),빌립보에서는 귀신들린 여종을 낫게 해
주었다가 도리어 고소를 당해 매를 맞고 투옥되기도 했고, 유대인 자객단에 의해 살해
당할 위험도 겪었었다(행 23:12-15).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고난에 비할수 없는 위로
를 받았으므로 고난에 비례하는 위로에 대해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6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ㅇ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견디게 하느니라 -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당한 숱한 고
난과 고린도 교회가 받은 위로 사이의 관계에 대해 논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구속적
인 것이었듯이 사도 바울의 고난도, 비록 동질(同質)의 것은 아니더라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위한 것이었다. 바울은 사도로서 이것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가 당하는 고난을 극복하게 하는 하나님의 위로 또한 그의 서신을 읽게 될 고린도교인
들과 아가야의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즉 바울은 그가 환난을 당하든지 위로
를 받든지 여전히 고린도 교인들에개 유익이 됨을 확신한다(4:8-12, 15). 왜냐하면 그
들이 고난과 핍박을 받을 때에 먼저 고난을 경험한 바울의 예로부터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을 목격하고 위로를 받으며 지혜롭게 처신해 나감으로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ㅇ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 - 바울이 고난 가운데서 고린도 교인들을 격려
할 수 있었던 것은 `소망'때문이었다. `소망'(엘피스)은 문자적으로 '강
한 확신'을 의미한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소망이 무엇인지 밝혀지지
는 않았지만 바울은 그것이 견고하다고 말한다. 아마 그것은 고린도교회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 즉 이단의 문제, 바울의 사도권에 관한 문제(3:1;4:2;5:11,
12;7:2;10:7, 11;11:6), 교회의 분열에 관한 문제에 대해(1:10이하) 다소의 혼란이 있
었지만 결국에는 바울과 그의 가르침이 참되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는 소망이 있었을
것이고, 이러한 확신은 고린도를 다녀온 디도를 통하여 기쁜소식을 들음으로써 더욱
얻게 되었을 것이다(7:6, 7). 바울이 이러한 소망을 굳게 갖게 된 것은 적어도 본서의
독자들인 고린도교회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였다고 보았고 그것은 자신의 경험으
로 확신하건대 하나님의 자비와 위로가 주어지는 전제였기 때문이다. 현실의 삶 속에
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參預)하는 자들에게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위로가 넘칠 것
이고 결국 거기에는 확고한 소망이 있게 될 것이다(벧전 5:9, 10).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ㅇ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 - 본문에서 논의의 초점이 되는 것은 '아시아'가 구
체적으로 어디인가 하는 것과 '환난'이 어떤 종류의 것을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이다.
전자의 문제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1) '아시아'가 에베소를 가리킨다고 본다
(Haenchen, Robertson, Farrar 등). 이렇게 보는 근거는 고전 15:32의 맹수와의 싸움
에 대한 비유적 표현과 행 19:23-40에 언급된,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일으킨 소란에 두
고 있다. (2) '아시아'가 리쿠스 계곡을 가리킨다고 본다(Harris, Duncan). 이렇게 보
는 이유는, 바울이 매를 맞아 거의 죽게 된 일에 대해 기록한 고후 11:24을 이곳에서
있었던 일로 보기 때문이며(Lowery), 또 다른 이유는, 만약 '아시아'가 에베소를 가리
킨다면 고전 15:32나 16:8에서 처럼 '에베소'라는 지명을 밝혔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
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두 견해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제시하나 모두 하나의 추측에 불
과하다. 오히려 본절에서 '아시아'가 가리키는 곳은 에베소와 리쿠스 계곡을 제외한
다른 어떤 장소 일지도 모른다(Charles, Hodge, Tasker). 바울은 그의 생명을 노리는
수많은 대적들로부터 여러차례 시련을 겪었고, 이러한 사실이 모두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바울이 고난을 당한 장소
가 아니라 그가 당한 고난이 얼마나 극심한 것이었던가 하는 것인 만큼 이에 대해 집
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편 바울이 당한 극심한 '환난'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
키는지에 대해서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바울이 구체적인 사실을 언급하지 않은 것
은 이미 고린도교인들이 알고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고전 15:32과
16:9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Harris). (2) 심한 질병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Knox, Ruckert). 이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은 바로 다음 절의 '우리 마음
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9절)라는 내용이 자기들의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고
본다. 그러나 '환난'에 해당하는 헬라어 '들립시스'는 심한 질병에
적용하기에는 적합치 않으므로 이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3) 본문의 맥락에서 볼 때
이미 고린도 교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우며 그 이후에 있었
던 새로운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 판단하여 행 19:23-40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
다(Theodoret, Calvin). 위의 견해 중 세번째 견해가 타당한 것으로 보이며, 여기에
바울의 첫번째 편지에 대한 고린도 교회의 부정적인 반응으로 인해 바울이 정신적으로
고통받은 것을 지칭한다는 파라(Farrar)의 견해가 첨가될 수 있을 것이다.
ㅇ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 마치 너무 많은 짐을 실
은 배가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가라앉듯이 바울에게 가해지는 고난의 무게는 그 자신
의 힘으로는 견디어내기 어려운 혹심(酷甚)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절망적인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여기서 '끊어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사포레데나이'
는 급작스러운 고뇌로 모든 소망을 상실케 되며 마침내 죽
음의 문턱에까지 이르게 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와 같은 강렬한 경험을 생생
하게 회상하고 있다.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ㅇ사형 선고 - 이 문구(토 아포
크리마 투 다나투)에 대한 해석은 분분(紛紛)하다. (1) 행 19:23-41에 기술된 에베소
의 데메드리오 폭동 사건(Silanus, Duncan). (2) 법과 질서를 어긴 사람을 원형경기장
의 맹수들에게 주어 생명을 빼앗게 하는 심각한 위험(Malherbe, Warfield). (3) 법정
에서 내려진 사형의 판결(Deissmann, Stanley). (4) 복음을 증거하다가 겪는 육체적
고난(Strachan, Martin). (5) 12:7의 '육체에 가시'와 연관되는 것으로서 심각한 건강
상의 문제(Clavier, Barrett). 이중에서 (3)과 (4)의 해석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왜
냐하면 이 문구는 용어상 재판에서 사용되는 표현이며 전후 문맥상 5절의 `그리스도의
고난' 및 8절의 '환난'과 긴밀하게 연계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바울은 본문을 통해 자
신이 경험했던 절망감의 최종적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ㅇ받은 줄 알았으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스케카멘'은
`가지다',`소유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동사 '에코'의 완료형이다(had
received). 이것이 완료형으로 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는 (1) 과거에 경험한 것에 대한
생생한 회상으로 보는 견해와(Robertson), (2) 단지 과거에 대한 회상을 넘어 현재에
도 효력을 가지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는 바울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가
아직 집행만 되지 않았을 뿐 여전히 효력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유일한 희망이
부활에 있음을 뜻한다고 본다(Haenchen). 위의 두 견해 중 첫번째가 더 타당한 듯하
다.
ㅇ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뢰 - 바울이 절망하여 사형 신고를 받은 것으
로 생각한 것은 더이상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어떤 구원에의 능력도 기대할 수 없음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 누구보다도 신뢰할 만한 것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바울도(빌
3:4), 고린도 교회에서 맛본 좌절, 신체적인 질병, 거듭되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
(11:23-27) 자신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때 비로소 그는
참된 위로와 구원과 신뢰가 인간의 한계 상황인 죽음 너머로부터 역사해 오시는 하나
님께 있음을 통감하게 되었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전적으로 포기(抛棄)할 때 하나님
에 대한 신뢰를 배울 수 있게 된다. 아마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이것을 알게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이 교훈은 철저한 환난 가운데 배우게 되는 것이며 이것 역시
고린도 교인들이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었음에 틀림없다.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ㅇ큰 사망에서...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 '큰 사망'
(텔리쿠투 다나투)은 '어려운 죽을 고비'(공동번역)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과거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함을 받은 바울은 그것을 현재와 미래에 있을 환난에서
의 구원을 확증해 주는 예표로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경
험적 신앙으로부터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을 위로할 수 있었고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
하라는 교훈을 줄 수 있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의지하는 자를 구원하시되 시간과 회수
에 제한없이 영원히 보살피신다(전 3:14;딤후 4:18).

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ㅇ간구함으로 도우라 -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의 기도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빌 1:19). 여기서 바울은 커다란 힘을 갖는 중보 기도를 부탁함
에 있어 자신이 사도로서 일방적으로 사역하는 자가 아니라 그들의 도움도 필요로 하
는 연약한 존재임을 밝힘으로써 그들이 바울에게 소중한 존재임을 확인시키는 동시에
서로 협력하여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도록 일치를 이루자고 권고하고 있다. 여
기서 '도우라'로 번역된 헬라어 '쉬뉘푸르군톤'
은 '함께 도와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바울 자신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중보 기도를
강력하게 부탁하고 있음을 시사한다(살후 3:1-3).
ㅇ많은 사람의 기도로...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 많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위하
여 기도하고 그 기도가 응답되어 바울에게 은혜가 내린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기도가
응답된 것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
론프로소폰'에서 대명사 '폴론'에 첨가된 '프로
소폰'은 '얼굴'을 뜻한다. 이 말이 헬레니즘 시대에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
도 하였으나 대체적으로는 '얼굴'을 뜻하는 것으로 쓰였다. 그 예로 본서에 이 단어가
11번 나오는데 그 가운데 최소한 여덟번은 '얼굴'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3:7, 13, 18;10:1, 7;11:20). 반면 본서 2:10과 4:6에서는 '사람' 또는 '얼굴'로
도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Robertson). 그런데 본문의 '프로소폰'이 어떤 의미로 사용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것에 대해서 헨헨(Hacenchen)은 '프로소폰'이 '사람'을 가
리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라는 구절에서는 대명사 '플론'
만으로 충분한데, 여기에 또다시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프로소폰'을
첨가하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이 말이 본래적 의미인 '얼
굴'로 쓰였다고 보아 많은 얼굴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향하는 것을 염두에 두
고 있거나 아니면 연극에서의 의미 즉 연극에는 다양하고 많은 인물이 나오지만 그 모
든 인물들이 하나의 결말(結末)을 위해 협력하며 그때 생겨나는 좋은 결과에 대해 다
같이 감사하는 것을 생각했을 것이라고 본다.

12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ㅇ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 바울은 사도로서의 자신의 진실
성을 굳게 단언함으로써 자신이 성실하지 못하다고 하는 비난에 대해 윤리적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거룩함'은 헬라어 '하기오테티'를 번역
한 것인데 어떤 사본에는 '하플로테티' 즉 '솔직함'으로 되어 있어
학자들 간에는 전자가 본래적(本來的)이라고 보는 입장(Farrar)과, 후자가 문맥상 본
래적이라고 보는 입장(Cowery, Barrett, Harris)으로 갈린다. 그런데 본문의 문맥이
바울의 윤리적 성실성을 주장하는 대목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후자의 의미가 더 가깝
다고 할 수 있다. 아마 바울이 '하기오테티'라는 용어를 썼다고 하더라도 윤리적 솔직
성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Barrett).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철저한 솔직성과 진
실성을 가지고 행동했다는 것이 본절의 요지이다.
ㅇ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 앞에서는 윤리적 측면에서
진술했다면 여기서는 신학적 측면에서 자신의 활동을 설명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육
체의 지혜'와 '하나님의 은혜'가 대비되어 제시된다. '지혜'(소피아)라
는 말은 본서보다는 고린도전서에 많이 나오며 본문의 '육체의 지혜'에 해당하는 병행
구로 '세상의 지혜'(고전 1:20;2:6;3:19), '인간의 지혜'(고전 2:5) 등이 나온다. '육
체의 지혜'는 자신을 신뢰케 함으로 사리사욕에 빠지게 하기 쉽고 결국은 자기 파멸로
이끌고 간다(롬 8:5, 6). 이에 반해 '하나님의 은혜'는 그분의 자유롭고 능동적인 사
랑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되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리
스도인들이 신앙적 삶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주는 끊임없는 보살핌이다(6:1).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사역은 육체의 지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은
혜에 의한 것이었다.
ㅇ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 바울의 행위가 윤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온전한 것이었음
을 그의 양심이 증거한다. '양심'(쉬네이데시스)이라는 말
은 당시 고린도 지방에 널리 사용되던 용어였을 것이다. 즉 고린도인들은 그들의 도덕
적 행위의 정당성을 증언할 때 '양심'에 호소하였던 것이다(고전 8:7, 10, 12;10:25,
27-29, Jewett).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의 양심'이 고린도 교회에 대
한 그의 행위가 참되다는 것을 증언해준다고 말하였을 것이다(Pierce). 한편 혹자는
본절에 나타난 바울의 자랑은 자신을 드러내려는 공명심(功名心) 때문이 아니라 고린
도교회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자기를 잘못된 방식으로 자랑하는 이들에게 자신을 올바
로 자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한 의도에서 언급되었다고 한다(고전 1:31;
고후 10:17, Barrett).

13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끝까지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ㅇ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 본문은 고린도
교인들 중에 바울의 서신이 진실하지 못하고 모종의 저의가 숨겨져 있다는 적대자들의
논리에 동조하는 이들이 있었음을 시사하며, 그것에 대해 바울은 자신의 서신은 표면
적으로 드러난 의미외에는 다른 의도가 전혀 숨겨져 있지 않다는 것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14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것 같이 우리 주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

ㅇ본절은 다소 완곡어법적(婉曲語法的)인 표현으로 되어 있다. 이는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목회가 다소 어려움이 있음을 엿보게 한다. 즉 지금은 완전한 상호 신뢰
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미래에의 기대를 바울이 본절을 통해 서술하고 있는 것이
다.
ㅇ대강 우리를 아는 것같이 - 여기서 '대강'(메루스)이라는 표현이
바울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의 수를 나타내는지(Farrar), 아니면 바울을 이해하고 있는
정도를 나타내는지(Barrett) 분명치 않으나 후자의 의미가 정확하다고 본다. 그들은
바울을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을 뿐 온전히 알지 못했다.
ㅇ우리 주 예수의 날에 - 이 날은 모든사람이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서게 될 날이다
(5:10;고전 1:8;5:5;빌 1:6;2:16;살전 5:2;살후 2:2). 고린도 교인들이 지금은 바울을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지만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심판의 날에는 바울의 진실됨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ㅇ우리의 자랑 너희의 자랑 - 이는 심판의 날에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 간에 상호
신뢰의 관계가 형성될 것임을 의미한다. 아울러 본구절은 장래에 고린도 교인들이 신
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될 것임을 바울이 이미 믿고 있고 또한 그렇게 될 때에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은 바울의 피땀어린 사도적 사역에 힘입은 것임(고전 4:4-10;11:1)을 암
시한다.

15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ㅇ이 확신을 가지고 - 바울은 자신의 여행계획이 변경되었다고 하여 그의 신실성을
비난하였던 고린도인들에게 먼저 자신과 고린도 교인들 사이의 존경과 애정의 관계성
을 확인시키고 있다. 바울과 고린도 교인 사이에 생겨난 모든 오해들은 이 전제를 토
대로 하여 풀어져야 했다.
ㅇ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 `두 번 은혜'
에 해당하는 헬라어 '듀테란 카린'에 대해서
는 '두번째의 은혜'(a second benefit)로 해석하는 견해와(KJV, Barrett) '두번의 기
쁨'(a double pleasure)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RSV, Moffatt, Harris). 전자를 주
장하는 자들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두 번 방문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고후 12:14을 보면 바울이 본절을 쓰는 시점 이전에 이미 고린도 교회를 두 번
방문하였으므로 전자의 견해는 지지를 받지 못한다. 본절의 '먼저'라는 단어는 바울이
마게도냐를 가기에 앞서 고린도를 방문할 것임을 시사하고 16절 내용 또한 마게도냐
방문 전후에 각각 고린도 방문이 있을 것을 보여주므로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
바울은 마게도냐를 다녀가는 길과 오는 길에 두 번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여 그들과 은
혜와 기쁨을 나누고자 했다.

16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보내줌으로 유대로 가기를 경영하였으니

ㅇ너희가 보내줌으로 - 여기에는 배에 승선하는 곳까지 동행해 준다는 것 이상의 의
미가 있는 듯하다. 바울은 이방인 교회에서 모금한 구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 교회
에 가는 길에 고린도 교회의 대표단이 자기와 함께 동행해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Martin).
ㅇ유대로 가기를 경영하였으니 - '경영하였으니'(불로메
노스)는 '계획을 했다'는 뜻이다. 최종 목적지가 유대로 되어 있는데 이는 바울이 예
루살렘 교회를 구제하기 위한 헌금(롬 15:26;고전 16:3, 4)을 가지고 가려고 계획했음
을 보여준다.

17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 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ㅇ경홀히 있었겠느냐 - 앞절에 언급된 바울의 여행 계획이 변경된 것에 대해 고린
도교회의 바울 적대자들은 그것을 바울을 비난하는 빌미로 삼았다. 아마 그들은 바울
이 진실되지 못하고 경솔하며 이랬다 저랬다 한다고 사람들을 선동했을 것이다(12절).
바울은 그의 적대자들이 자기에 대하여 그와 같이 비난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
며 이는 대적들의 비난과 중상(中傷) 가운데서 바울이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경홀히'
(엘라프리아)란 말과 두 번 거듭 언급된 '예'(나이),'아
니'(우)라는 말에서 잘 나타난다. 한편 적대자들의 비난에 대한 바울의 반박
은 반어법적인 수사법으로 되어 있다. 바울의 어조를 살려 본문을 재해석하면, "내가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이 경솔한 일이었습니까? 또는 인간적인 동기로 계획을 세워 편리
할대로 이랬다 저랬다 하려는 줄 압니까?"(공동번역)가 된다. 바울은 '육체'
(사륵스), 곧 자기 이익을 따라 임의로 계획을 변경하기 보다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했고 성도들의 유익을 구하였다(2:1-3;행 16:6;고전 16:7).

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ㅇ하나님은 미쁘시니라 - '미쁘시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피스토스'
는 사업의 거래나 공적 의무의 수행에 있어서 `신실한'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미쁘시니라'는 표현은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란 뜻이다. 구약에서 '신실하신 하나님
'(하엘한네에만)은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하는 하나님의 명칭이
기도 하다(신 7:9;사 49:7).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신실함을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거하여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사
2:2-4;눅 1:68-79;고전 1:9), 이것이 바울의 신실함의 근거가 된다면 그의 신실함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바울은 매우 효과적이고도 담대(膽大)하게 자
신을 변증하고 있다.
ㅇ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한 말
은 그의 여행 계획뿐만 아니라 그의 사역까지도 포함되는 것으로 보인다(13절). 이렇
게 볼 때 바울은 그의 사역을 수햄함에 있어 매사에 하나님의 종된 자로서 신실함으로
일관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ㅇ실루이노 - 이는 '실라'의 로마식 이름이다(살전 1:1). 그는 예루살
렘 교회의 유력자 중 한 사람이었고(행 15:22),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에 동참했던
동역자이자 친구였다(행 15:36-41).
ㅇ너희 가운데 전파된...예수 그리스도 - 바울, 실루아노, 디모데가 고린도에 복음을
증거한 것은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 기간이었는데 먼저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
했고(행 18:1-4),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나중에 합세하였다(행 18:5). 이들 세 사람은
고린도에 1년 6개월간 머물면서 교회를 세우고 세례를 베풀었다(행 18:7-11).
ㅇ저에게는 예만되었느니라 - 바울과 실루아노, 디모데 세 사람의 삼중 증거에 의해
전해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결코 모순과 우유부단함과 이중성
이 없음을 단언하고 있다. 여기서 '되었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고넨'
은 강조적 현재 완료형(Intensive Perfect)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은 영원한 현실로서 동일한 효력을 나타냄을 보여준다
(Harris).

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ㅇ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서 선지자들이나 당신의 종들을 통해 주신 약속의 성취자이고(롬 1:3;갈 3:16). 이스
라엘의 전역사가 지향해 온 목적을 완성하신 분으로 모두의 의롭다함을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롬 10:4). 이러한 사실은 구체적으로 예수의 인격과 사역 속에서 실현
되었고(눅 5:17-26;7:18-23), 성도들과 교회는 그것의 증거이다.
ㅇ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 '아멘'은 '진실로 그렇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이루어 주소서'라는 의미를 갖는 말로 구약성경에서도 사용되었고('아
멘', 신 27:15, 16;렘 11:5;시 41:13) 유대교를 거쳐 기독교에서도 예배시에 사용되었
으며 현재도 사용되고 있다. 성도들의 '아멘'은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된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의미가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예'
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의미하는 것처럼,성도들의 '아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을 표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된다. 바
울의 헌신적인 사도적 수행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아멘'의 한 전형(典型)이라 할 수
있다.

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ㅇ견고케 하시고 -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 사이의 관계는 신실하신 하나님에 의해 결
정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진실만이 있을 뿐이다. 이렇듯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을
그리스도 안에 굳건히 세우신 분이 바로 신실하신 하나님이실진대, 그리고 그들의 믿
음을 강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더욱 풀요롭게 하실 분이 하나님이실진대
양자 사이에 사소한 일로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본문에 함축된 의미이다.
ㅇ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 '기름을 부으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리사스'는 `기름을 붓다', '신성하게 하다'는 뜻의 헬라어 동사 '크
리오'에서 온 말로 구약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그리스도'
(크리스토스)와 같은 어원을 갖는다. 또한 구약에서 기름을 붓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람들을(선지자, 왕상 19:16;왕, 왕상 1:39;제사장, 출 29:7) 구별하여 소명
을 부여하는 것을 뜻한다.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 하나님께서 바울과 고린도 교인
들에게 기름을 부었다고 하는 것은 위의 두 경우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그들의 기름부음 받음은 하나님께서 사명을 부여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
고, 그 사명은 그리스도의 기름부음 받음 즉 그리스도의 소명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
것은 육체적인 것이나 개인적인 신념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의해 확증받
는 것이다.

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ㅇ우리에게 인치시고 - `인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프라기사메노스'
는 '공문서의 효력을 보장해 준다'는 의미가 있다. 즉 이 인
(印)은 봉인된 서류가 변조되거나 수송 중에 내용물이 변경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며
또한 소유권의 표시이기
도 하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성령으로 인치셨다는 것은 성도들을 당신의 소
유로 확인하셨다는 것이며(set his seal of ownership on us, NIV)성도들에게 구원의
궁극적인 확실성을 부여해 주셨다는 것이다(엡 4:30).
ㅇ보증으로 성령을 - '보증'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라본'은 히
브리어 '에라본'에서 유래한 상업적인 단어로(창 38:18) 어떤 물건을
매입하기 위하여 지불해야 할 대금의 총액 중 '첫번째 분납금'(down payment)을 의미
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당신의 소유로 삼기 위해서 보증금을 지불하셨다. 사람
에게 있어서 계약을 체결하고 보증금을 지불하는 것이 반드시 소유를 확정지어 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형편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며 또 그 마음도 수시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보증금을 지
불하셨다는 것은 곧 그분의 완전한 소유(所有)가 되는 것을 뜻한다. 성도들은 완전한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것은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는 성령께서 증거하신다(롬
5:5;8:9;갈 4:6).

23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ㅇ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 바울은 자신의 여행 계획
이 어떠했고 그 계획이 왜 바뀌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가(15-17절) 자신의
여행 계획이 근거하고 있는 복음과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자기의 진실성을 먼
저 확인시킨 뒤(18-22절),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여행 계획을 재변경시킨 사유를 밝히
고 있다. 먼저 그는 자신의 영혼을 걸고 거의 맹세에 가까운 표현으로 자신의 진실성
을 자신있게 주장하고 있다. 바울은 가끔 그의 주장을 강력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하나
님을 증인으로 내세우고 있는데(롬 1:9;빌 1:8;살전 2:5, 10), 이러한 문구는 당시 헬
라 문학에서 사용되던 저주문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바울의 문구는 구약에 보편적으로 사용된 맹세문에서 그 선례를 찾을 수 있다(룻
1:17;삼상 14:44;삼하 3:35). 여기서 바울이 감히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은,
맹세가 아니라 그의 전 생애가 하나님 앞에 밝히 드러나 있다는 그의 신앙적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ㅇ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 바울이 계획을 바꾸어 고린도에 가지 않은 것은 결코 바울
자신의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고린도 교인들을 아끼는 마음 때문이었다. 만
약 바울이 그들을 아끼는 마음이 없이 본래의 계획대로 고린도를 찾아갔다면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마음 아픔뿐이었을 것이다(2:2, 3).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에는 벌을 받
아야 할 만큼 바울을 근심되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2:5-7).바울은 그들을
징계할 수도 있었을 것이나 그러기보다는 그들 스스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했다(2:7). 이것은 목회자로서의 바울이 매우 지혜롭고 인내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
해준다. 그러나 고린도의 문제 교인들은 바울의 인내와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을 왜곡
(歪曲)하여 도리어 그를 비난하였다.

24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ㅇ믿음을 주관하려는...기쁨을 돕는 자 - 여기에는 바울의 목회관이 나타난다. '주관
한다'(퀴리유오멘)는 것은 '지배한다'는 뜻이며(lord
over, NIV), 이는 바울이 자기의 복음 전도에 의해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 지배자
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신앙적 기쁨을 위해 돕는 봉사자로 나아가기를 원했음을
말해준다. 여기에는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그의 신학적 이해가 깔려 있다. 즉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여 신앙을 갖게 된 성도들에 대하여 일정한 사도적 권위를 가지기
는 하지만(10:2-8;고전 5:4, 5;딤전 1:20), 궁극적으로 신앙인의 실존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서만 규정된다고 보았다. 또한 신앙은 지배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것인 만큼 바울은 그들 스스로가 신앙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돕
는 것이 최선의 목회라고 보았다. 이처럼 바울이 사도적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고린도 교인들의 기쁨을 위해서 봉사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은 그가 자신의 육
체적 이익을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한다고 비난하는 자들의 주장이 어불성설(語不成說)
임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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