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고린도후서

[스크랩] 고린도후서 (3 : 1~18)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0:54

고린도후서 (3 : 1~18)


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ㅇ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 본절의 `아니오'라는 답변을 기대하는 질문의 이면에는
바울에 대한 두 가지 비난이 함축되어 있다. 하나는 바울이 자신의 업적을 지나치게
되풀이하여 선전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울이 천거서를 받지 못한 거짓 선지자
라는 것이다. 틀림없이 바울에 대한 이런 도전은 적대자들에 의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바울을 가리켜 자기를 칭찬하는 일에 열을 올리며 천거서도 받지 못한 거짓 사
도라고 비난함으로써 자기들의 거짓됨을 은폐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을 통
해 바울은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ㅇ어떤 사람 -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적어도
이들이 선교사들로서 누가 보아도 현혹당하기 쉬운, 찬사로 가득찬 추천서를 소지(所
持)하고 있었고, 바울과 아무런 상관없이 고린도에 와서 바울이 전한 것과 다른 복음
을 전하였던 자들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아마 이들은 2:17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의 말
씀을 변질시키는 자들의 범주에 들 것이다. 혹자는 이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주의
적인 교인들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일 것이라고 본다(Harris).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모세의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근본이라고 믿었던 자들
로, 율법보다 믿음을 중요시했던 바울을 못마땅히 여겼을 것이다.
ㅇ천거서 - 이것은 당시에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일종의 소개장으로 어떤 사람의 직
분과 권한에 대한 위임장 또는 신임장 역할을 하였다(행 9:2;18:27;고전 16:3, 10).
바울의 적대자들은 이 추천서를 가지고 있었으나 바울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바울이
이 추천서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그의 사도직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의 위임에 근거
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직접 위임받은 것이기 때문이다(행 26:12-18). 여하튼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이 추천서를 가지지 못한 거짓 사도라고 악선전을 하고 다녔
음에 틀림없다. 바울은 이 추천서 자체를 무시하거나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도 필요에
따라서는 추천서를 이용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8:16-24;롬 16:1, 2;고전 16:3, 10,
11). 그러나 바울은 사람의 칭찬과 승인과 위임보다 하나님의 승인이 훨씬 더 우위에
있고 또한 한통의 추천서보다는 사도 자신의 깨끗한 양심과 성도를 통해 나타나는 열
매에 사도로서의 그의 진정성(眞正性)이 확인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바울은 어디서
추천서를 얻어다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여주거나, 그들로부터 추천서를 받아서 다른
곳으로 가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2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바라

ㅇ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 고전 9:2에서 이와 유사한 의미의 구절이 발견된다. 거기
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무시한 자들에게 그들이 바로 자신의 전도사역의 열매임을
강조함으로써 그의 사도권을 논증한 바 있으며, 이러한 상황이 본절에서도 동일하게
전개되고 있다. 특히 앞절의 내용과 연관지어 생각할 때,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비
방하는 자들이 가졌다고 자랑하는 추천서와 자신의 마음속에 고린도 교인들로 인해 새
겨진 추천서를 대조시키고 있다. 이것은 몇가지 점에서 비교된다. (1) 적대자들이 지
니고 있는 추천서는 파피루스 종이에 쓰여진 것이나 바울의 것은 마음에 쓰여진 것이
다. (2) 적대자들의 추천서는 잉크로 쓰여진 것이나 바울의 것은 하나님의 영(靈)으로
쓰여진 것이다(3절). (3) 적대자들이 가진 추천서는 종이에 쓰여진 것이므로 몇몇 제
한된 사람에게만 보여질 수 있으나 바울의 것은 '모든 사람들'이 알수 있는 것이다.
ㅇ마음에 썼고 - 혹자는 이 구절에서 렘 31:33의 새 계약 즉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
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
여'가 암시되어 있다고 본다(Barrett). 이것은 다음 절(3절)의 '돌비'와 '육의 심비'
의 대조와 연관시켜 볼 때 적절한 제시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천거서에 대한 논쟁을
`율법과 복음', '육과 영'이라는 신학적 차원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ㅇ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니 - 본절은 적대자들의 천거서가 사람에게서 유래한 반
면 바울의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유래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달리 표현하면, 바울의
사도직이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 의한 것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가시적(可視的)인 증거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의 사역(事役)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으
로 세움받았기 때문이다. 한편 본절의 '그리스도의 편지'
(에피스톨레 크리스투)에서 '그리스도의'는 표면상 소유격이지만 실제로는 주격의 의
미를 갖는다. 즉 고린도 교인들 자체가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라는 점을 말해준다(R.
Martin).
ㅇ돌비...심비 -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은 먹으로 쓰인 천거서를 가지고 율법을 강요
하기 때문에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고 도리어 교회에 분열을 일으키지만, 바울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추천서를 가지고 있고 복음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
에 고린도 교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였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하나님께서 돌판에 써
서 모세에게 수여한 옛 계명에(출 24:12) 매여있는 반면,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심
령 속에 성령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 즉 새 계명을 새겨 넣은 것이다(렘 31:33;겔
11:19;36:26). 이로써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 제기된 추천장 문제는 바울의 일방적 승
리로 끝나게 되었다. 적대자들은 율법을 강요했으나 바울은 복음을 선포했다는 점과,
적대자들은 분열이라는 악한 열매를 맺었으나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구원하는 생명
의 열매를 맺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분명해진다.

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ㅇ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 본문은 바울이 결코
자화자찬하거나, 현상적으로 나타난 결과에 대해서 자신의 영광을 취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바울은 자신의 선교 활동을 통하여 많은 생명을 구원하였으나 자신의 확신의 근
거가 자신의 재능이나 성결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
고 있다. 그의 확신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심령 속에 불어넣어 주신 것이다. 혹자는 이
것을 "그것은 인간의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과 마주 대하여 말한 심정에서의 확신이요,
비판의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확신이다"고 하였다(F. G. Carver).

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민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ㅇ우리의 민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 바울은 자신의 확신이 자기로부터 나
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고 있듯이, 자기를 통해 일어난
모든 능력의 원천(源泉)이 하나님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자기 자
랑을 일삼는다는 비난을 의식하여 자기의 겸손을 의식적으로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언제나 자기 능력의 원천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빌 4:13).
한편 혹자는 본절이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랴'(욜 2:11)
는 구약의 구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Martin). 실로 하나님 존전에서 인
간은 자신의 연약함과 유한성을 인식하게 되며 그때 겸손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왜냐
하면 인간은 죽을 운명을 가진 유한한 존재에 불과하나, 하나님은 스스로 자족하시는
전능자(룻 1:20;욥 21:15;겔 1:24)이시기 때문이다.

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ㅇ새 언약의 일군 - '돌비와 심비'의 대조(3절)가 '율법과 복음'의 대비를 나타낸다는
것이 여기서 분명해진다. 바울은 자신을 '새 언약의 일군'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옛 언
약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적대자들과 자신을 뚜렷이 구별시키고 있다.
ㅇ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 '의문'(그람마)은
본래 알파벳의 '문자'를 나타내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점차 `기록된 것' 즉 '문서'나
'책'을 의미하는 말로 발전되었다. 이 말이 본문에서 뜻하는 바는 '율법'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영'(프뉴마)은 썩어질 육과 대비되는 `영혼', 혹은 '생
명'을 뜻하며 본문에서는 `복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바울은 본문에서 '의
문'과 '영'이라는 상징적 개념을 통해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대비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들을 다음과 같이 구체화 시킬 수 있다.
(1) 적응 대상에 있어서. 옛 언약은 육적 이스라엘(출 19:5, 6)에 적용됨로써 민족적
한계를 갖는 반면, 새 언약은 영적 이스라엘, 즉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됨으로써 민족적 한계를 넘어선다. (2) 언약의 성립 과정에 있어서. 옛
언약은 하나님께 대해 순종을 맹세하고 피의 희생제사를 드림으로써 성립된 반면, 새
언약은 예수그리스도께서 희생의 제물이 되심으로써 성립되었다. (3) 언약을 수행하는
방법에 있어서. 옛 언약은 행함으로 하나 새 언약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한다
(롬 10:9, 10;히 10:39). (4)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언약의 결과에 있어서. 옛
언약은 죽음을 낳지만 새 언약은 생명을 낳는다. 따라서 옛 언약에 대해 새 언약이 가
지는 의미는 단순히 시간적인 차이를 넘어 완전한 질적 차이를 가진다. 한편 혹자는
본문의 '의문'과 '영'을 '인간적인 것'과 '신적(神的)인 것'의 대비로 이해하기도 한
다(Barrett). 전자는 삶의 중심을 인간에 둠으로 인해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되고 후자는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둠으로써 생명을 얻는
것이다. 또한 칼빈(Calvin)은 '의문'이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외적인 설
교'를 뜻하고, '영'이란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사람의 마음속에 실제로 작용하는 '생
명력있는 가르침'을 뜻한다고 본다.

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ㅇ의문의 직분 없어질 영광 - 바울의 논의의 주제가 언약에 관한 것에서 직분에 관
한 것으로 바뀌고 있다. 본절에 묘사되고 있는 장면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로
부터 십계명이 새겨진 두 개의 석판을 수여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오는 출
34:29-35의 장면이다. 그 논점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할 율법을 선포하는 직분을
부여받은 모세도 그 직분으로 인한 영광 때문에 사람들이 그 얼굴을 보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영혼을 살리는 복음을 전파할 직분을 가진 바울의 영광은 더할 나위 없이 크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돌에 새긴 것' 즉 '율법'이 본래는 선한 것이었고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었으나 사람들이 범죄하였기 때문에 결국에는 죽
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는 설명(롬 7:10-12)이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의문'은
곧 죽게 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아마 고린도 교인들도 그런 정
도의 전이해(前理解)는 되어 있었던 듯하다. 한편 본절의 '없어질 영광'은 바울이 모
세의 얼굴의 광채에 관한 유대교의 전승(Targum Ongelos)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유대
교의 전승에서는 모세의 얼굴의 광채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
은 이것을 반박하면서 그 광채는 '잠시 있다가 없어질 잠정적인것'이었음을 밝히고 있
다(Martin).

8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ㅇ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 의문의 직분에 주어지는 영광은 일
시적이지만,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는 직분의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하며 거
기에 비취는 광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하는 빛'(4:6)으
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빛이며 사람들의 마음속에 생명을 가져다 주는
빛이다. 한편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는 구절은 미래형이나 이를 시간적인 미래로
보아 주의 재림을 가리킨다고 이해해서는 안되며 다만 논리적인 미래로 보아야 한다.
영의 직분이 현재적인 것이듯이(1:22) 그 영의 영광도 현재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한
다.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돛프兌'(8절)이 '의의 직분'으로 대체되고 있다.율법은 하나님의 엄격한 요구 앞에
인간을 세워 율법의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인간의 행위를 정죄한다(롬 3:19, 20). 그
러나 복음은 인간의 죄를 사면해 주고 인간으로 하여금 의롭게 될 수 있게 한다. 따라
서 정죄의 직분에 영광이 있다면, 의의 직분에 얼마만큼의 영광이 있느냐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한편 본문에 나오는 '의'(디카이오쉬
네스)의 개념은 바울이 그 말을 사용할 때의 용법에 비추어 이해해야 하는 바, 윤리적
인 무죄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관계의 성립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에 기인한다(Barrett). 의의 직분 속에는 그것을 부여하
신 하나님의 능력이 현존하는 것이다(Kasemann).

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ㅇ더 큰 영광을 인하여 - 본절에서는 옛 언약에 대한 새 언약의 우월성이 극도로 부
각되고 있다. 마치 태양이 떠오르면 달의 밝기가 소멸되어 버리는 것처럼, 율법으로
말미암는 모세의 영광은 복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인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바울으로 인해 율법의 직능이 무효화되었다고 하는 바울의
율법 이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사도들은 더 이상 구속력을 갖지 못하는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법 아래 있게 된 것이다(히 8:7-13).

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ㅇ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
율법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말미암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지나간 시대에만 시한부
적으로 존재 의의를 가질 뿐(롬 10:4) 천국에는 없어질 것이었다. 그에 반해 복음은
영원한 것이고 다른 것에 의해 대체(代替)되지 않는 것이다(막 13:31). 이미 지나가버
린 것과 이제 시작되는 영원한 것의 영광을 비교하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ㅇ이같은 소망 - 바울이 가지고 있는 소망은 새 언약의 불변성과 절대 탁월성에 근거
한다.
ㅇ담대히 말하노니 - 바울의 소망의 근거가 불변하고 영원한 것이므로 바울은 말하고
행동함에 있어 솔직하고 두려움 없이 할 수 있었다. 본문의 '담대히'로 번역된 헬라어
'파르레시아'는 원래 '말을 함에 있어서의 솔직함' 또는 '두려움
없는 정직함'을 뜻하였으나, 말뿐만 아니라 행동에 있어서의 '솔직함'을 의미하게 되
었다.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ㅇ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 본절은 7절부터 시작된 바, 출 34:29-35에 관한 바울의
미드라쉬(Midrash)적인 해석의 연속이다. 여기서 쟁점이 되는 것은 모세가 왜 얼굴에
수건을 썼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모세의 얼굴
에 있던 광채가 사라졌을 때 그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져 그의 권위를 무시하는 일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Harris). (2)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모세의 얼굴에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Hughes).
(3) 구속사의 비밀을 깨달은 모세는 자기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이 일시적인 것임을 알
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보고 현혹되어 거기에 영원한 절대 가치를 부여하
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랬을 것이다. 이 가운데 첫번째와 세번째 견해일 가능성이 많
다. 이중에서 첫번째 견해가 타당하다고 볼 경우, 모세의 떳떳치 못함과 바울 자신의
떳떳함을 비교하는 윤리적인 문제가 대두되는데 바울이 그것을 말하려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바울이
모세가 하였던 것처럼 얼굴에 수건을 쓰지 않는다고 말한것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즉 모세는 그의 백성들이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할까봐 얼굴에
수건을 썼지만, 바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영광이 영원한 것이므로 사람들의
오해를 두려워할 필요없이 당당하게 공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ㅇ완고하여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 모세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얼굴의 영광 즉 율법의 영광이 곧 사라질 한시적(限時的)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것을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고함에 기인하는 것이었고 이 완고함으로 인해 그들의 눈
에는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하도록 하는 수건이 씌어지게 되었다. 여기서 '수건'
(칼륌마)은 유대인의 영적 무지와 오해, 예수그리스도를 거부하는 불신앙,
사랑이 상실된 편견과 엄격한 율법주의적 편견등을 상징한다.
ㅇ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 유대인들의 눈을 감싸고 있어 그들로 하여금 영
적 맹아 상태에 머물게 하는 그 수건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벗어질 수 있다. 그리
스도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실(마 5:17) 하나님의 은혜와 참된 영적 자유를 인간에게
가져오셨기 때문이다.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ㅇ모세의 글 - 바울이 앞에서는(14절) '구약'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모세의 글'이
라고 바꾸어 표현하고 있는 것은 지금 문제삼고 있는 것이 율법에 관한 것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ㅇ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 본구절은 유대인들이 계시의 본질을 바로 보
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마음' (카르디아)은 지적 활동
의 중심이며 인간의 인격과 애정이 자리잡는 곳이다. 유대인들은 이곳에 수건이 덮여
있으므로 여전히 옛 것만 보고 새 것은 보지 못하고 있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ㅇ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 본절은 당시 초대 교회에 자리잡은 기독
론적교리를 엿보게 한다. 왜냐하면 본절에 '주께로 돌아가면'이란 문구가 언급되기 때
문이다. 먼저, '주'(퀴리오스)는 과거 모세가 섬겼던 여호와 하나님
이시며 동시에 현재 모든 사람을 당신께로 초청하시는 동일하신 주님이시다. 즉 구약
시대의 여호와 하나님과 신약 시대의 예수 그리스도는 모두 '주'(Lord)로 불렸던 바,
동일하신 분이시다(Hughes). 바울은 본절에서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서 참된 자
유와 영안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다름 아니라 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것
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다음으로, '돌아가면'(에피스트렙세)은
'돌이키다', '회개하다' 등의 뜻을 지니고 있어 회심의 의미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누구라도 언제든지 회심하고 주께 돌아오면 마음의 수건이 벗
겨져 영적 무지와 오해, 불신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
으로써 없어지게되며(롬 10:4) 새로운 언약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복음의 시대
가 열려지게 된다.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ㅇ주는 영이시니 - 본절은 `의문(儀文)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는
6절 내용과 연관하여 바로 이해될 수 있다.즉 바울은 '의문'과 '영', '옛 언약'과 '새
언약', '율법'과 `복음'을 대조하면서 후자(後者)의 우위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않은 주석가들이 주장하듯이 본절의 내용이 삼위 일체론의 교리를 뒷받침한다고
도 볼 수 있지만(Bousset, Scott), 보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본절에서 관심을 두고 있
는 초점이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관계 및 대조에 있다는 사실이다(Hughes). 이렇게
볼 때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빛과 생명의 원천이시므로 그분께 돌아오면 사망에서 생명
으로 옮기운 바 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ㅇ자유함이 있느니라 - 주의 영이 있는 곳, 그리하여 마음의 수건이 벗겨지고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난 곳에는 복음 즉 새 언약으로 말미암는 자유가 있다. 바울은 다른 곳
에서, 옛 언약의 지배 아래 사는 사람을 '종의 자녀'로, 새 언약의 지배 아래 사는 사
람을 '자유자의 자녀'로 비유한 적이 있다(갈 4:24-31). 여기서의 '자유'는 율법의 지
배 하에서의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가리킨다. 고린도전서에서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졌던 '자비'에 대한 언급이(고전 9:1, 19;10:29) 후서에서는 이곳에서만 언급되
고 있다. 자신들의 마음속에 새 언약이 영으로 새겨진 그리스도인들은 정죄와 구속의
율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는데 이 자유는 확신(4절)과 담대함(12절)을 주는 자유
이다. 바울은 사도로서 이 자유의 영을 받았으므로 인간적인 추천서에 의존하고자 하
는 마음으로부터의 자유와 자기를 자랑하고자 하는 명예욕으로부터의 자유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1절).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ㅇ우리가 다 - 바울은 본장을 시작할 때는 자신의 사도직에 관한 주제를 언급하였으
나 이제 본장을 마감하는 시점에서는 출 34:29-35에 대한 그의 미드라쉬적인 해석을
배경으로 하여 새 언약의 우월성을 전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지시키고 있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보매 - 본문은 새 언약 가운데 살고 있는 성도
들은, 수건으로 덮인 마음(15절)을 가지고 아직도 율법을 읽고 있는 유대인들과는 달
리 벗은 얼굴로 복음의 거울 속에 비춰지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
다.
ㅇ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에 이르니 - 주의 영광을 바라보는 성도는 주의
형상으로 변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성도들의 존재가 신격화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
는 안 된다. 또한 마치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영광이 성도
들의 얼굴에서 빛으로 나타난다고 보아서도 안된다. 본문의 의미는 성도들이 그리스도
를 바라봄으로써 그에 대한 지식을 받고 그 내면이 변화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할
때 성도들은 점점 더 높은 단계의 영광으로 진전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주의 재림
이 실현될 때는 성도들의 몸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같은 완전한 영광의 형체(形
體)를 얻게 될 것이다(빌 3:21). 그런데 이렇게 변화되고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의문
의 율법이 아니라 주의 영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달리 말해서 성도들의 영광은 자신들의 노력이나 업적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과 은총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롬 8:29, 30).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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