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고린도전서

[스크랩] 고린도전서 (9 : 1~27)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0:49

고린도전서 (9 : 1~27)

 


1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ㅇ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 여기서의 '자유'는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영적
인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에서 벗어난 사람이었으므로 다
른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믿음의 범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
고 있었다. 그러나 8:13에서 그 자신이 고백한 대로 형제를 위해 그의 자유를 포기하
였다.
ㅇ사도가 아니냐 - 이 말 속에는 혹자의 말대로 사도인 바울이 사도로서 자신의 권리
를 마음껏 행사할 수 있다는 뜻이 들어 있다(Godet). 동시에 바울 자신의 사도성을 주
장하는 근거로 두 가지 사실을 제시하였다. 즉 자신이 부활한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것
과 고린도인들이 자신의 전도로 인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ㅇ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 '못하였느냐'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키'
는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 말로서 바울이 본절에서 던진 네 개의 질문 가운데 이 구절
에서만 사용 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된 근거로 먼저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목격
한 사실을 제시하는데, 이 단어가 그 사실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그가 예수 그리스
도를 보았다고 하는 것은 혹자의 말대로 행 9:3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다메섹 도상(道
上)에서 목격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Godet, Grosheide).
ㅇ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 이 말은 바울이 자신의 사도성을 주장
하는 두번째 근거이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최초로 설립하였고 또한 자신이
뿌린 씨앗의 열매가 바로 고린도 교인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사도로서의 근거는 명백하
다고 주장한다. 3:7의 말씀과 같이 바울 자신이 씨를 뿌렸다해도 하나님의 인정하심이
없었다면 어떠한 열매도 맺을 수 없었을 것이다.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찌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ㅇ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
는 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그의 사도권을 의심할 근거가
적당치 않았다. '인'(印)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프라기스'는 어떤
일정한 모양을 새기는 도구를 가리키거나 그 도구를 사용하여 진흙이나 밀납 등에 새
긴 소유권과 증명의 표시를 말한다. 바울로 인하여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
하게 되었고, 그들이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바울이 사도라는 사실을 입증하
는 분명한 증거였다. 엄격히 말해 사람들의 회개는 성령의 역사이다. 하지만 바울의
복음 전파로 말미암아 교회가 생긴 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사도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Hodge).

3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

ㅇ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發明)할 것이 이것이니 -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
앞 구절을 지시할 수도 있고 뒷 구절을 지시할 수도 있다. 혹자는 이를 뒷절에 연결시
켜 바울이 자신의 언행을 본으로 보이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언급하는 가운데 자기
사도권을 변호하는 것이라 한다(Grosheide). 그러나 뒷절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입증하
는 것이 아니라 사도권이 입증된 후에 말할 수 있는 사실들을 열거한 것이므로 앞 구
절에 연결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Morris). '힐문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
나크리누신'은 '엄밀히 조사하다', 혹은 '심문하다'의
뜻이며 '발명할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로기아'는 '답변하
다'의 뜻으로서 둘 다 법률 용어이다. 즉 바울은 그의 반대자들이 심문하듯이 자신의
사도권을 따진다면 앞에서 말한 내용들, 곧 자신이 부활한 그리스도를 목격하였으며,
이방인인 고린도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회심시킨 뚜렷한 사도됨의 증거들을 법정에
서 증인이 되어 증명하듯이 단호하게 답변하겠다는 것이다.

4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ㅇ우리가 - 본절에서 복수 1인칭 동사 '에코멘'('우리는 가지고 있
다')을 사용한 것은 바울이 자신의 동역자 바나바를 의식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바울
은 바나바와 함께 자비량 선교를 하였다(6절). 혹은 '우리' 속에 실라와 디모데를 포
함시켰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고린도 교회를 위해 바울과 협력하였으며 바울의 삶의
방식을 따랐었다(Godet).
ㅇ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 '권'(權)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수시안'
은 '권리'(right, NIV)를 뜻한다. 이는 바울이 고리도 교인들로부터 생계에 필요한 물
질적 원조를 받을 권리가 있었음을 뜻한다(고전 9:9-11).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권리
를 주장하지 않았다.

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ㅇ다른 사도들 - 사도행전에서는 사도가 예수의 열 두 제자와 바울과 한 두 사람이
더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행 14:4,14). 본절에서도 사도의 범위가 사도행전
의 언급보다 그리 확대되지 않았을 것이다.
ㅇ주의 형제들 -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하는 의문에 대해 몇 가지 견해가 있
다. (1)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하기 전에 전처(前妻)에게서부터 태어난 예수의 형들도
포함한다는 것이다(Lightfoot). (2) 예수님의 사촌 형제 즉 마리아의 동생과 남편 알
패오의 소생일 가능성도 있다(마 10:3). (3) 가장 분명한 것은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아들들로서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이 네 사람들이다(마 12:46;13:55;행
1:14;갈 1:19).
ㅇ게바 - 바울은 다른 사도들과 구분하여 '게바' 곧 '베드로'를 따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베드로가 탁월한 사도이므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두드러진 본보기가 되기 때문
이다. 그가 탁월한 사도였다는 것은 고린도 교회 내에 '게바파'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1:12). 또한 본절은 베드로가 아내가 있는 자임을 추
측케 한다(막 1:30).
ㅇ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 - '자매된 아내'라는 말은 헬라어의 관용구로서 '자
매'와 '아내' 이 두 단어가 서로 동격(同格)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자매'라는 말 속
에는 '믿는 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Lenski). '데리고 다닐'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아게인'('사방으로 데리고 다니다')은 '관례적인 선교 여
행'에만 적용시킬 수 있는 용어로 당시의 사도들이 아내를 대동시키면서 도움을 받았
음을 시사한다. 2세기 말엽,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나 4세기 로마 교회의
부제(副祭)였던 암브로시에스터(Ambrosiaster)에 의하면 요한과 바울을 제외하고 모든
사도들에게 아내가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결혼한 사도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딸린 식
솔까지 교회로부터 공궤를 받을 권리가 있었다.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도 역시 다른 사
도들과 마찬가지로 결혼할 권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ㅇ일하지 아니할 권 - 본절은 사도들이 교회로부터 그들의 생계비를 받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이러한 것을 결코 반대하지 않았다(딤전
5 : 18). 그러나 바울과 그의 제1차 전도 여행시 동역자였던 바나바는 이러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생계를 위한 기술을 한가지씩 익히는 관습이
있었다. 더욱이 철저한 유대인이었던 바리새인들은 모두 스스로 생계비를 벌었는데 바
울 역시 그리하였다. 그러나 헬라인들은 육체적인 노동을 천하게 생각하였으므로, 혹
자는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이러한 삶의 방식을 매우 특이하게 생각하였을 것이라고
한다(Grosheide).

7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ㅇ누가 자비량하고...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 바울은 본절에서 두 가지 예를 들
고 있는데 그것은 군인들이 자신의 비용으로 봉사 하지 않는다는 것과 일꾼들이 포도
원이나 목장에서 일을 할 때에 보수를 기대하고 일을 한다는 것이다(신 20:6). 바울은
이 같은 실생활의 예를 들어 그들이 보수를 받는 것이 당연한 순리임을 가르치고 있
다. 그러므로 바울 자신도 교회로부터 생계비를 보조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
다. 복음의 역군들(딤후 2 : 3, 4)과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농부(3:6) 그리고 양떼를
인도하는 목자(요 21:15)들이 보수를 받고 신령한 일에 참여하는 것은 결코 세속적이
거나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자비량(自備糧) 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옵소니오이스'는 '옵손'('양식')과 '오네오마이'
('구입하다')의 합성어로 문자적인 뜻은 '스스로 구입한 양식'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후에 '군인들의 봉급'을 뜻하는 말로 굳어졌다. 바울은 이러한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자신의 수고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을 피력한다.

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ㅇ사람의 예대로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안드로폰'
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인습(人習)이나 생각에 따라'의 의미이다. 이 말이 때로는 육
체의 그릇된 이해를 따른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지만(롬 3 : 5), 본절에서는 사람
들에게 익숙한 임금 지불의 도리가 당연하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6절에서 예를
든 것처럼 사람의 피습을 따른다 할지라도 일한 대가를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
다. 그러나 바울은 보다 더 결정적인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제시하였다.
ㅇ율법도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노모스'는 성경의 처음 다섯 권인
모세 오경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바울은 인간적인 생각과 하나님의 계시인 율법이 서
로 일치함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혹자는 인간을 만드신 분과 인간에게 계시를 주시는
분이 같은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Grosheide).

9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ㅇ곡식을 밟아 떠는 소 - 본절에서 인용된 구절은 신명기 25:4이다. '떠는'에 해당
하는 헬라어는 '알로온타'로서 '할론'('둥근 모습')에서
파생된 말이다. 동방의 여러 나라에서는 소를 이용하여 곡식을 터는 방아를 돌리거나,
혹은 일정한 반경(半徑) 안에 있는 곡식을 소로 하여금 발로 밟아 떨게 하였다. 혹자
는 이 때 이집트나 다른 이방 지역에서는 소가 곡식을 먹지 못하도록 그 입에 망을 씌
웠다고 한다(Lenski).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서는 이것을 금(禁)하였다. 소가 일을 할
동안에는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뿐만 아니라 짐
승들과 자연에게까지 관심과 사랑을 베푸시는 모습을 가르쳐 준다(욥 38:41;시 147:9;
마 6:26;눅 12:24).
ㅇ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 이 말은 하나님께서 소들을 염려하시지 않는다는 말
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마리 새에게도 관심과 애정을 갖고 계신다(마 6:26). 바울
의 의도는 일한 만큼 보상을 받는 것에 대하여는 가축도 율법에 의해 보장을 받는데
하물며 인간들이 일한 것에 대해 보상을 받는 것은 더욱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바
울은 구약에서 달리 인용할 말씀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신 24:15), 굳이 본절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이처럼 일꾼의 품삯을 예로 들지 않고 가축을 예로 든 것은 짐승
들도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은 더욱 소중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사람들 사이에 서로를 귀중하게 대우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Calvin).

10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ㅇ전혀 - 이 단어를 '전혀'(altogether, KJV), 혹은 '전적으로'(entirely,RSV)로 번
역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9절에서 바울이 인용한 구약의 계명은
인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전혀'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토스'
는 '확실히'(assuredly, certainly)로 번역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Hodge, Goert).
ㅇ소망을 가지고 - 바울은 본절에서 자신이 인용한 구약의 계명이 문자적인 뜻으로는
일하는 소에게 먹을 양식을 주라는 것이지만 내면적인 뜻은 인간을 위한 것으로서 밭
갈고 씨뿌리는 자들이 결실을 거두어 들이는 소망을 갖고 일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ㅇ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 10절에서는
모든 노동자들이 일한 대가로 그에 상당한 임금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으로 결
론을 맺었다. 이제 본절에서는 앞 구절의 비유들에 빗대어 바울이 자신의 행위에 대하
여 말하고 있다. 그는 '신령한 것'(타 프뉴마티카), 곧 한
없이 고귀한 영적인 씨앗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뿌렸으므로 그들에게 '육신의 것'
(타 사르키카) 즉 세상에 속한 것으로 영적인 것과 비교할 때 지극
히 미미한 것을 요구한다고 하는 것이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님을 역설한다.

12 다른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ㅇ하물며 우리일까보냐 - 베드로와 아볼로 등 다른 사도들은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생
계비를 보장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혹자는 이
러한 이유로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바울이 다른 사도들보다 낮은 등급의 사도이기
때문이라는 오해를 하게 했을 것이라고 한다(Morris).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처음 세운 자로서 자신이 그 어떠한 사람들보다 더욱 물질적인 권리를 요구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한다.
ㅇ범사에 참는 것은 - '참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테고멘'은 '스테
게'('지붕')에서 유래된 말로서 '덮다', '감추다', '참다'의 뜻을 갖는다.
신약 성경에서 바울만이 이 말을 사용한다.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모든 것을 참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
다. 바울은 온갖 종류의 곤궁함을 인내로써 참았다.
ㅇ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 바울은 복음이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권한을 행사
하려는 자들과 복음 전파를 통하여 이익을 얻으려는 자들에 의해 잘못 전달될 소지가
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어떤이게는, 신령한 일을 담당한 자가 물질에 얽매
여 산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실족함 없이 신앙 생활을 하도
록 하기 위하여 바울 스스로 모든 권리를 포기하였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4:2에서
'맡은 자의 구할 것은 충성'이 라고 하는 가르침을 몸소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기도
하였다(Grosheide).

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ㅇ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 본절에서 바울은 구약에서 언
급된 제사 의식과 이방 제사의 실례를 들어, 신약의 교회가 복음 사역자들에게 물질을
공급할 의무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제단 위에 드려지고 남은 고
기 중 일부를 그들의 몫으로 할당받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율범이 규정
하는 바였다(레 7:6, 8-10, 14, 18-36). 그러므로 바울이 자신의 권한을 주장할 수 있
는 것은 객관적으로도 합법적임을 보여주며 이에 바울이 자신의 권한을 자제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제단'에 해당하는 헬라어로 '보모스'가 있음에도
'뒤시아스테리오'을 사용하는 것은 '보모스'라는 용어에 너무 이
방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W.H. Mare).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ㅇ이와같이 주께서도 -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제사장들에 관하여 규정하신 것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의 보수에 대해 똑같은 규정을 허락하셨다.
ㅇ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이것은 마 10:10이나 눅 10:7에서
주어진 예수님의 명령을 바울이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그것은 구약의 제사장들이 성
전에서 나는 것으로 생활을 영위 하였던 것 같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그 복음을 믿
는 자들의 현금으로 생계를 꾸려가라는 예수님의 명령이다. 또한 이것은 예수님의 직
접적인 명령인 만큼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한 권위를 가진 증거였다. 이처럼 바울은 자
신의 권리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이 없었으나 고린도 교인들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려
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15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찌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ㅇ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 바울은 복음 전파자로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경제적인 보
조를 요구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권리를 결코 사용하지 않
았다.
ㅇ죽을지언정... - 바울은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경제적인 짐
을 주지 않겠다고 말한다.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에 있었을 때 겪은 여러가지 생생한
경험들의 기억으로 격한 감정이 되어 정상적인 방법으로 글을 잇지 못하고 파격 구문
(破格構文)을 사용했다.
ㅇ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 바울은 아무런 보상없이 복음
을 전파함으로써 자신을 의심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었고 또한
혹자의 말대로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축적했다(Hodge). 따
라서 물질적인 공급 없이 교회를 위하여 봉사한다는 것은 그가 전한 복음의 순수성을
입증하는 것이었으며 바울의 자랑이요 영광이었다.

16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ㅇ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일임이라 - '자랑할'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우
케마'는 '자신이 취한 행동에 대하여 도덕적인 가치를 느끼고, 그로 인
해 갖게 되는 즐거운 감정'을 의미한다(Heinrici). 사도 바울이 선교 사역을 감당한
것은 그 일을 통해서 갖게 되는 즐거움과 보람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사명이 그리스도
로부터 주어진 일이었고(행 26:16-18;갈 1 : 1 ; 빌 1:16) 그가 부득불(不得不)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열정적으로 헌신할 수 있었던 것
은 단지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예수(행 9:1-9)와 성령(행 13:2)에
사로잡혀 있었고 날마다 주의 계시에 민감하였다(행 22:21). 즉 그가 복음 전파 사역
을 감당할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ㅇ내게 화(禍)가 있을 것임이로라 - 바울은 소명(召命)에 있어서 다른 사도들과 큰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12사도들은 자발적인 믿음으로 그들의 소명을 받아들였다.그
러나 바울은 오히려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완악한 불신앙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의 소명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강압적인 역사였다(행 9: 5,
Godet).

17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찌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ㅇ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 바울이 자발적인 선택으로 복음을 전
파한다면, 그것은 자랑할 만한 것이요 그에 대한 상이 있을 것이다. '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스도스'는 '보상'(reward, KJV, NIV)을 뜻한다. 그러나 바
울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리스도로부터 강압적으로 복음 전도의 소명을 부여받
았으므로 거기에 대해 어떠한 자랑거리나 보상이 있을 수 없다. 그는 단순히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수행할 뿐이었다(행 26:16).
ㅇ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노미안 페피스튜마이'
의 문자적인 뜻은 '나는 청지기직을 부여받았다'이
다. 여기의 '청지기'(steward)는 '자유인'('freeman)과 상반되는 말로서, 청지기들은
노예 계급에 속했었다(눅 12:42, 43). 노예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다고
하여 어떠한 보상도 기대할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을 때 엄한
처벌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므로 본절은 바울이 그의 사도직을 수행함에 있어서
'나는 노예로서 일을 수행할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입장을 견지(堅持)하
였음을 보여준다(Godet). 바울이 자신의 사명에 대해 이러한 태도를 취한 것은 그리스
도의 가르침에 근거하는 것임이 분명하다(눅 17 : 10).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 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ㅇ값 없이 전하고 - '값없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다파논'은 바울 자
신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대가로 아무런 물질적인 부담을 지우지 아
니한 것을 뜻한다.
ㅇ다쓰지 아니하는 것이로라 - '다 쓰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 '카타크레사스다
이'는 '남용하다'나 '오용하다'의 뜻이 아니라 '남김없이
소모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것에 대한 부정은 부분 부정이 아니라 전체 부정으로
'일체 사용하지 않다'의 뜻이 된다(Lenski). 바울은 청지기, 즉 아무런 대가를 기대할
수 없는 노예로서 복음 전하는 사명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노예도 주인으로부터 먹을
것과 입을 것은 공급받을 권리가 있었던 것 같이 바울도 그러한 권리를 고린도 교인들
에게 행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바울은 보상을 바라지 않고 봉사하는 것과 권리를
행사하지 아니하고 복음을 위해 희생하는 것 자체를 자랑이며 보상으로 여겼다.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ㅇ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잡혀(빌 3:12) 그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롬 1:1)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사람에게도 예속되지 않았다. 따
라서 그는 민족이나 종교, 국가, 사상, 인습, 유대교의 율법주의 등 그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었다.
ㅇ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 이것은 곧 완전한 자기 포기를 의미한다. 즉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된다면 자신의 모든 것이 없어져도 좋다는 뜨거운 사랑의
심정을 나타낸 것이다(11:24, 25;롬 9:3). 이것은 바울이 자신을 부정하는 원리이며
그의 모든 행위는 이러한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Godet).그가 스스로 종이 된 것은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함이다(고후 4:5).
ㅇ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 바울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포기한 이유
는 더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ㅇ내가 유대민과 같이 된 것은 - 바울은 먼저 유대인을 언급했다. 그는 베냐민 출신
으로 육체적으로는 완벽한 유대인이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관습과 명예를 포
기하였으며 진정한 유대인, 곧 영적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난 자들이라는
확신을 지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유대인처럼 행동하여 자
기의 동역자이며 제자였던 디모데에게 유대인의 상징인 할례를 시행하도록 하였으며
(행 16:3) 예루살렘에서는 결례(缺禮)를 행하였다(행 21 : 17-29).
ㅇ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율법 아래있는 자 같이 - '율법 아래 있는 자'가 누
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유대인'을 뜻하는 다른 표현 이다
(Thomas). (2)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로서 모세의 율법을 받아들인 자들이다
(Hodge, Godet).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율법
에 매여 있는 자'에 초점이 있으므로 그것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냐 하는 것은 그리 중
요한 문제가 아니다. 바울이 율법 아래 있는 자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것처럼 처신했
지만 사실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더 이상 그에게는 율법
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유대인과 같은 행동을 할 수 있
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과 같이 한 것은 그가 유대인 사이에서 소외(疏外)되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이나 혹은 이방인들을 구원하고자 함이었다
(롬 9 :3;갈 2:7). 이로 보건대 바울은 자유를 포기하고 스스로 자신을 구속할수 있는
자유를 소유한 진정한 자유자였다.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ㅇ율법 없는 자에게는 - '율법 없는 자'란 유대인과 같이 하나님의 계시(啓示)가 성
문화(成文化)된 모세의 율법을 갖지 않았던 이방인들을 말한다. 그러나 이방인들도 자
기들 나름대로의 법, 곧 양심의 법은 가지고 있었다(롬 2:14, 15).
ㅇ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 바울은 어떤 상황
에서는 이방인들처럼, 즉 율법 밖에 있는 것처럼 행동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법' 아래 있었기 때문에 '모세의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
이다(갈 6 : 12). 그렇다고해서 바울이 결코 '하나님의 법'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법'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의 율법'아래 있는 자였다. 그
런 바울이었으나 율법없는 이방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하여 유대인의 율법을
무시하고 그들의 문화적인 상황에 자신을 순응시켰다.

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ㅇ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 여기서 '약한 자'(아스데네이스)란
복음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약한 양심의 소유자들로서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상태에 처한 사람들을 가리킨다(고전 8: 9; 살전 5 : 14). 바울은 복음을 바로 이해하
고 있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로서 믿음이 강한 상태에 있었지만 믿음이 연약한 자
들을 얻기 위하여 그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이해하였으며, 그들의 믿음에 상처를 주
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제한했다(19절).
ㅇ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 '여러 사람'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10:32) 유대인, 헬라인,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모든 그리스도인
가운데 약한 자들을 가리킨다 할 수 있다(Edwards). 바울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전도
하면서 그들의 다양한 모양대로 '여러 모양'이 된 것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ㅇ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 '모든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타'
가 어떤 사본(TR)에서는 '투토'('이것')라고 되어 있다. 즉
앞 구절에서 바울이 말한 것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여러 사람들과 여러 상황에 자신
을 순응시켜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장애가 없게 했다.
ㅇ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 '참예'에 해당하는 헬라어 '슁코이노노스'
는 원문에 '참예자'라는 명사로 되어 있다. 이 단어는 '쉰'
('...와 함께')과 '코이노노스'('공유자')의 합성어로서 '...와 함께 공
유(共有)한 자' 라는 뜻이다. 이 명사가 '기노마이'('되다')의 부정과
거 '게노마이'('되었다')와 함께 사용되어 본 구절의 문자적인 뜻은 '다
른 사람들과 함께 복음을 공유하는 자가 되고자'이다. 결국 바울은 자신이 소유한 복
음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어 같이 공유하고 싶다는 말로써 전도에 대한 의지
를 표명한 것이다.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ㅇ바울은 본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영광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는 절제와 노력이 필
요함을 권면하기 위하여 운동 경기를 비유로 들었다. 당시 고린도 지역에서 매 2년마
다 열렸던 '이스미안 경기'(Isthmian games)가 올림피안 경기(Olympian games), 피티
안 경기(Pythian games), 네미안 경기(Nemean games)와 함께 그리스 사대 경기 중 하
나이다. 이스미안 경기에는 주로 격투기, 경마 등이 진행되었다.
ㅇ운동장에서 - '운동장'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타디오'는 606.75피트
(feet)로 약 200m 길이의 단위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것이 경기장, 곧 '스타디움'
(Stadium)으로 뜻이 굳어졌다. 그 이유는 당시 그리이스 도시들에 있는 경기장들이 한
스타디오(약 200m)로 규격화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ㅇ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 이 말은
문자대로 육상 경기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상을 얻는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오직 한
사람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당시에는 운동 경기에서 승리하면 상금을
주지 않고 명예를 상징하는 월계관을 수여했는데, 모든 경주자는 이러한 명예를 획득
하기 위해 경기에 참가했다. 따라서 바울이 의미한 것은 경기에서 우승자가 질주하는
것같이 고린도 교인들도 상을 얻겠다는 목적 이외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그 목표만
을 향해 노력하라는 것이다(Godet).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ㅇ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 '이기기를 다투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아고니조
메노스'는 동사 '아고니조마이'('경쟁하
다', '격렬히 몸부림치다')에서 파생된 말로서 본절에서는 경주에 참가하는 모든 자
를 가리킨다.
ㅇ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 '절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엥크라튜에타이'
는 고대 그리스의 운동 경기자들이 사용했던 전문 용어였다. 그
들은 통상 10개월 가량의 고된 훈련을 받았으며 음식이나, 오락, 수면 시간 등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을 절제하여야 했다.
ㅇ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 고린도 지역에서 개최되었던 '이스미안 경기'에서는
승자에게 월계수나 솔잎, 또는 어린 파슬리(parsley) 잎을 엮어 만든 화환(wreath)을
머리에 씌워 주었으며 올림피안 경기에서는 우승자에게 야생 감나무 잎으로 엮은 화환
을 씌워 주었다. 이처럼 나뭇잎을 엮어 만든 그런 면류관은 경기자들에게 최고의 영예
(榮譽)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면류관은 금방 시드는 것이었고 그것을 쓴 우승
자의 영예 역시 덧없는 것이다.
ㅇ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 운동 경기자가 목표하는 면류관은 일시적인 것
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면류관은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이다. 따라서 그리스
도인들은 운동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들 못지 않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그 목표를 향
해 나아갈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것
같이 아니하여

ㅇ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 '향방 없는'의 헬라어 '아델로스'는 '목
표 없는', '불분명한'의 뜻을 갖는다. 달리기 선수들이 목표와 방향을 분명히 정하고
경기에 임하는 것을 비유로 삼으면서 바울 자신도 목표와 방향을 확고하고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음을 말한다.
ㅇ싸우기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퓌크튜오'는 '퓌그메'
('주먹')와 '퓌크테스'('권투 선수')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것은 '권투
시합'을 가리킨다. 바울은 여기에서 달리기 경주에서 권투 시합으로 비유를 바꾸어 표
현의 폭을 넓히고 있다.
ㅇ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 이것은 권투 선수들이 시합을 하기 전에 상대방 없
이 혼자서 연습하는 것을 표현한 말로 전문 용어로 '스키 아마키아'
('싸움')라고 하였다. 바울은 자신의 영적인 싸움이 상대방이 없는 공허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대적(對敵)이 있는 싸움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 같다.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ㅇ내가 내 몸을 쳐 - '쳐'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피아죠'는 '휘
포'('...아래')와 '옵스'('눈')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눈 아
래 부위를 친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매우 사실적인 표현으로서 당시 권투 선수들이
상대방의 얼굴 부위를 공격하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권투 시합을 연
상하면서 자신의 싸울 대상이 자기 몸이 라는 것을 보여준다. '몸'에 해당하는 '소
마'는 고린도전, 후서에서 '영'과 상반되는 개념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본
절에서는 세속적이고도 육체적인 욕구를 제어하여 그리스도를 섬기기 원하는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ㅇ복종하게 함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둘라고고'는 '둘로스'
('종', '노예')와 '아고'('데려오다', '끌고 오다')의 합성어로서
전쟁에서 승자가 패자를 종으로 끌고 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몸을 쳐서 패배시킨 후 이제는 온전히 복종시켜 종이 되게 하였다는 말이다. 바울은
그의 육체적인 본성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죄의 성향과 욕망까지 복종시키려고 하였다
(Hodge).
ㅇ남에게 전파한 후에 - '전파한'의 헬라어 '케뤽사스'는 헬라어 '케뤽
스'('전달자')에서 유래하였다. 운동 경기에서 '케뤽스'의 임무는 경기
규칙을 설명하고 선수들을 소집시키며 나팔을 불어 시합의 시작을 알리는 일 등을 하
였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모습을 전달자인 '케뤽스'에 비유하였다.
ㅇ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 '버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도키모스'
는 '도키마조'('조사하다', '시험하다')에서 파생된 말로서 '불합격
자'의 뜻을 갖는다. 또한 이 단어는 옛날 화폐로 사용된 주화의 무게를 달아서 제 무
게를 지닌 주파와 그렇지 못한 불량 주화를 가려내는 것과 관련하여 자주 사용되었다.
바울이 버림받는다고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 두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다. (1) '구원을 받지 못하고 버림받는다'는 의미이다(Lenski, Godet). (2)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상급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Morris).
위의 두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바울은 자신이 구원 얻은 자로서 주님을 마땅
히 섬기지 못할까 두려워한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