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고린도전서

[스크랩] 고린도전서 (7 : 1~40)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0:48

고린도전서 (7 : 1~40)

 


1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ㅇ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 이와 유사한 구절들은 어떤 특정한 주제를 도입할 때
사용되었다(25절;8:1;12:1;16:1, 12 등). 또한 이것은 고린도인들이 바울에게 이와 비
슷한 주제들에 대하여 질문하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5 : 9 주석
참조). 아마도 사도와 고린도 교인들은 본서신이 씌어지기 전에 서로의 소식을 주고
받는 서신을 교환(交換)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ㅇ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 이 말은 먼저 보낸 서신에서 고린도 교인
들이 썼던 내용일 수도 있고 바울이 언급한 적이 있는 주제일 수도 있다.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영지주의의 영향으로 금욕주의에 물들어 있거나 이와 반대로 쾌락주의에 빠
져 있었을 것인데(Farrar), 만약 금욕주의자라면 그들은 '가까이 하는 것이 좋지 않
다'라고 주장했을 것이며, 쾌락주의자였다면 '가까이 하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를 성
적인 방종으로 이해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본절에서 혼인을 금하는 것과 같은
이단 종파의 교리(딤전 4:3)를 지지하지 않으며 방종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한편 '가
까이 함'(하프테스다이)은 '성적 관계를 갖는다'는 말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으로 합법적인 결혼을 뜻한다(Morris).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이 결혼에 대하
여 반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남자가 여자에게 가까이 하는 결혼
그 자체를 나쁘거나 죄악스러운 것으로 취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Calvin).

2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ㅇ음행의 연고로 - 앞절이 결혼에 대한 근본적인 반대의 표현이 아님이 곧 증명되었
다. 바울은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부 고린도 교인
들에게 결혼의 합리성을 피력한다. 본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타스 포르네이아
스'는 문자적으로 '음행하는 일들이 생기게 때문에'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결혼을 음행(淫行)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시하지만, 이것이 결
혼을 권장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이유는 아니다. 바울은 타락하고 음란한 고린도의
일반 생활 문화로부터 어떻게 그들 자신을 거룩하게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말하
고 있다(Morris). 따라서 본절은 칼빈(Calvin)의 말대로 결혼이 꼭 필요한 자들을 위
한 것이다.
ㅇ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 일반적인 원리이다. 라이트푸트(Lightfoot)는 이것
을 일부 일처제에 대한 규정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문맥이 일부 일처제
를 설명하기 위한 논지는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바울은 타락한 고린도에서 순결을
지키며 도덕적 질서를 유지 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 뜻이 결코
결혼을 음행이나 간음을 방지하는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인간의 욕
망 속에 항상 존재하는 정욕을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 제도 내에서 충족시키지 않으
면 불법적인 음행에 빠질 것을 염려하고 있다. 따라서 한 여자와 한 남자의 결혼은 영
적 원리에 근거한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며 육체적인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Barrett).

3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찌라

ㅇ의무를 다하고 - '의무'의 헬라어 '오페일렌'은 '빚', '채무'를 뜻하
며 본절에서는 부부가 서로에게 져야 할 '의무', 특히 성생활에서의 의무를 뜻한다.
'다하고'의 헬라어 '아포디도토'('다하라')는 '아포디도미'
의 명령형으로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강제적인 명령으로서 충실한
책임 수행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당시의 고린도 교인들이 올바른 부부의 의무를 이행
하지 않고 서로에 대한 무관심과 비도덕적인 음행을 자행함으로 결혼의 고귀한 가치를
망각한 자들이 많았음을 시사한다.

4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ㅇ본절은 개역 성경을 따를 경우 마치 3절의 이유인듯 느껴진다. 그리고 카우프만
(Kaufmann)같은 학자는, 본절을 1-3절에 기록된 긴급조치에 대한 설명으로 보고 5절
이하의 인구조사는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시킨 에스라의 개혁 조치(스 10장)와 관련
시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본절과 5절 이하 내용과는 직접적인 연관성
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본절은 느헤미야가 5절 이하에서 인구 조사하게 된
이유에 해당된다(Williamson, Fensham, Myers). 즉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거민의 수효
가 극히 적었던 관계로 전체 귀환자의 현황을 조사하여 예루살렘으로 이주 시킴으로써
방어상의 취약점을 보강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11:-36).
ㅇ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 의무의 이행은 남편과 아내 각자에게 요구되는 것으
로 제시한다. 부부는 상호 책임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에 자기 몸에 대한 자기 주장
을 하지 않고 배우자와의 합당한 관계 속에서 정상적인 성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다. 그래서 부부는 자신의 몸을 전적으로 자기 의사에 따라 사용할 수 없다. 순결(純
潔)한 결혼 생활은 부부의 평등한 의무가 항상 행해질 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며 부부
의 권리도 그 의무 속에서 동등하고 상호적으로 요구될 수 있을 것이다.

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ㅇ막 표현되었다. 당시의 고린도 교인들이 금욕주의의 영향을 받아 성관계를 부정한
것으로 여겨 부부 간에 지켜야 할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거나, 사도 바울을 추
종하여 결혼은 했어도 혼자 사는 것처럼 절제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분방(奔
放)하지 말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아포스테레이테'는 '빼앗지 말
라' 또는 '강탈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이 명령형은 보다 일반적인 표현으로서 부부
사이의 권리나, 의무를 빼앗지 말라는 것이다(Farrar). 즉 부부가 서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권리와 의무를 지키라는 것이다. 바울은 때때로 아내가 싫어지는 약점을 간파하
여 서로간의 의무를 사려깊게 다루고 있다(Calvin). 결국 본문은 부부 간의 의무를 성
실히 수행하라는 명령으로 금욕 주의에 빠지지 않게 하고, 이로 인해 시험에 들지 않
게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ㅇ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 부부가 분방할 수 있는 경우
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기도하는 틈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기도할
때는 언제나 분방해야 된다는 것이나 기도하는 동안은 절대로 부부 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틈을 얻기 위하여'라고 번역된 '히나 스콜라세테'
는 '몰두할 수 있는 여가를 얻기 위하여'라는 뜻이며 이는 일상적인
기도라기 보다는 집중적인 노력을 필요로 하는 기도를 염두에 둔 것이다. 칼빈
(Calvin)은 이러한 기도가 '재난'이나 '진노의 날' 또는 '매우 어려운 문제' 등을 결
정해야 할 때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의 기간은 한정되어 있으
며 그것은 또한 부부의 합의하에 행해져야 한다.

6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

ㅇ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 - '권도'(슁그노멘)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는 본절에만 나오는 고대 단어로 '용서' 또는 '양보'라는 뜻으로 사
용되었다(Robertson). 바울은 교회 공동체 속에서 같은 동료로서 자기의 의견을 피력
하고 있는 것이지 종속 관계 속에서 명령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곧 공동체의 질서를
추구하는 그의 사랑의 표현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권도'가 무엇에 대한 것
인가 하는 문제는 쉽지 않다. 그것은 '이 말을 함'이라는 것이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
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이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하나
는 앞 부분에 서술한 모든 부부 생활에 대한 의무를 지시할 수도 있으며(Barrett),
(2) 하나는 다음 절에 기록된 것과 같이 결혼이냐 독신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 그가 제
시하는 견해일 수도 있다(Farrar). 전자를 주장하는 자는 보다 구체적으로는 5절 전체
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기도하기 위하여 분방하는 것이나
또는 잠시 후에 서로 다시 합하는 것이 명령이 아니요 권도라는 것이다. 후자를 주장
하는 자는 자신과 같이 독신으로 지내기를 원하는 바울의 소신(所信)이 권도이지 명령
이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서 부부 생활에 대한 명령은 모두 강조적인
요구라고 할 수 있으나 결혼에 대한 견해, 즉 결혼을 할 것이냐 독신으로 살 것이냐에
대한 견해는 권도라는 주장이다. 사실 성경에 제시된 결혼의 질서를 생각해 볼 때 부
부에 대한 의무를 단순한 권고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따라서 본절에 제시된
그의 권도는 후자를 향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바람직할 것 같다. 그는 결혼한 사
람의 의무에 대하여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Morris). 그러나 바울이 자신
의 주장에 대한 겸손의 표현으로 '권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이
말'은 바울이 제시한 모든 복음적 내용들을 지시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ㅇ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 이것이야말로 결코 명령이 될 수 없는
'권고'요 '하나의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당시의 박해와 시련 속에서 그리
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고대하는 심각한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구절이다. 본절
의 문자적인 뜻은 '나와 같이 결혼하지 않은 사람으로 있기를 바란다'는 간절한 요청
이지만 광의적인 의미에서 그 뜻은 다음 구문과 연결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ㅇ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각자 자신들에
게 베풀어주신 은사를 따라 결혼하거나 독신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이는 바울과 같
은 독신의 삶이 하나님께서 주신 독특한 은사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은사를
받지 못한 자는 결혼해야 한다. 그렇다고 결혼의 은사를 받은 자만 결혼을 해야 한다
는 의미는 아니다. 결혼이나 독신은 하나님께서 각 자에게 주시는 선물로서 하나님 편
에서 그것은 언제나 동일한 은사이다. 결혼이 완전한 결혼으로서 육체적인 욕구가 충
족되어야 하듯이 독신도 완전하고 성결한 삶으로서 영위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
은 어떠한 삶의 형태를 취하든지 음욕의 유혹으로부터 그들의 거룩한 신분을 보존시켜
야 한다는 점이다. 한 사람은 결혼이라는 은사를 통해서 또 다른사람은 독신이라는 은
사를 통해서 순결한 삶을 유지할 때 비로소 '바울과 같이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독신의 삶이 순결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타락한 고린도의 상황속에서
'나와 같기를' 바란다 라고 말한 바울의 표현은 결혼이냐 독신이냐 하는 선택의 문제
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실제적인 삶에서 음란한 유혹으로부터 순결을 유지했던 삶의 모
범을 본받으라고 하는 말이다. 따라서 결혼한 자들이 바울을 본받는다는 것은 무질
서한 방종으로부터 결혼의 순결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8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ㅇ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 본절의 '나와 같이'라는 표현은 앞절의 광
의적인 의미와는 달리 보다 개인적인 의미로서 독신의 모든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제한된다. 그의 요구는 앞절과 같은 적극적인 요
청이 아니다. 그는 단지 그들이 현재 있는 상태 그대로 있으라고 충고한다. 혹자는 이
와 같이 그대로 있기를 바라는 바울의 위치를 홀아비와 같은 상황이라고 이해하기도
한다(Barrett). 이에 대한 근거로는 (1) 결혼이 유대인들에게는 의무적인 규례였다는
것과 (2) 그가 한때 산헤드린의 회원으로서 투표를 하였다는 점이다(행 26:10). 만약
그가 실제 산헤드린의 회원이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결혼을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산
헤드린의 회원은 반드시 결혼을 한 자들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또한 본절에서
'혼인하지 아니한 자'(아가모이스)는 남성 복수로서 '과부'
(케라이스)라는 말과 동격이며 그 뜻은 '홀아비'라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홀
아비들과 과부들에게 나와 같이 그냥 있으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는 결혼한 적이 있
는 홀아비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가모스'는 헬라어의 관용적인 특성상
남녀 모두를 포함 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이러한 해석은 불가능
하며, 또한 '아가모스'는 32절에서 단순히 '장가가지 아니한 사람'을 뜻하는 말로 사
용된 것으로 보아 '홀아비'라는 해석은 더욱 불가능하다. 혹자는 이러한 난제를 극복
하기 위하여 바울이 결혼했으나 지금은 결혼하지 않은 자와 같은 상태에 있다는 현재
적 의미를 강조하기도 한다(Farrar). 그는 바울이 알롄산드리아의 클레멘트, 루터 등
과 같이 상처(喪妻)한 이후에 혼자 지내게 되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초대 교
부들(Tertullian, Jerome)과 칼빈은 이와 같은 바울의 결혼설에 대하여 단호히 부정한
다. 칼빈(Calvin)은 만약 그가 결혼한 사람이었다면, 아내와 자식들을 아무렇게나 팽
개쳐 놓고서 어떻게 부부에 대한 의무와 가정에 대한 질서와 사랑을 그토록 고조된 표
현으로 강조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하며 바울이 율법주의자들과 같이 스스로는 질수
없는 법들을 이웃들에게만 강요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ㅇ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 바울은 성적인 욕구 그 자체를 금욕주의자들과
같이 금지하지 않는다(Morris). 그렇다고 해서 결혼 그 자체를 욕망의 도피처로 삼지
도 않는다. 그는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를 최대한으로 존중한다.
ㅇ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 '나으니라'의 헬라어 '크레잎톤'은 독신보
다 결혼이 더 낫다거나 결혼보다 독신이 더 낫다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에
게 주신 은사의 분량에 순종하는 것이 제일 낫다는 의미이다. 한편 '절제한다'는 것과
'불같이 탄다'는 말은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절제'(엥크라튜
온타이)는 '스스로를 제어하는 것'을 의미하며 '불같이 타는 것'은 실제적인 욕망에는
굴복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내적으로는 욕망이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 솟아오르는 욕망을 바울과 같이 절제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은
사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10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11 (만일 갈릴찌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ㅇ갈리지 말고...버리지 말라 - 결혼한 자들에게 주어진 절대적인 명령은 서로 이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선언 하신 것으로서(마 19:4-9) 음행한 연고
외에는 절대로 이혼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령 그 이유가 모세 율법에 기록된
방식을 따른다 할지라도 이혼은 블가능하다. 물론 본절의 배경이 부부가 모두 그리스
도인인 것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이 윤리는 창조 질서로서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법칙이다. 한편 '갈리지 말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 코리스데나이'
는 수동태 부정사로서 '분리되어지지 말라'는 의미이다. 이혼에 대
한 여자의 능동적인 의사를 규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남자의 능동적 의지를 규제하
는 표현으로 '버리지 말라'(메 아피에나이)고 하고 있어서 이혼에
대한 규제가 남녀 모두에게 똑같이 중요한 의미로 주어졌음을 시사한다.

12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13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ㅇ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버리지 말라 - 이제 바울은 부부 중에 어느
한쪽이 불신자일 경우에 대하여 설명한다. 이는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실제적으로 발
생한 문제로서 선교지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특히 한쪽이 불신자일 경우
그가 당시의 타락한 문화 속에서 음란한 성적 방종에 빠져 살아가는 것을 대수롭지 않
게 여겼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가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에게 피차
'버리지 말라'(메 아피에토)고 명령한다. 이는 10, 11절에 사용된
부정사와 동일한 의미로서 쓰여졌다. 그러나 이교도 배우자에 대한 이혼 문제는 앞의
그리스도인 부부에게 주어진 절대적인 의미와는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서 이들에게
있어서 이혼 문제는 이교도인 배우자에게 달려 있는데 만약 그가 결혼 생활을 계속하
기를 '좋아하면'(쉬뉴도케이) 믿는 배우자는 능동적인 자세로
이혼을 요구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는 불신 배우자가 이혼을 원할 경우 기꺼이 응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15절). 따라서 본절의 전체적인 의미는 믿는 배우자들에게
소극적(消極的)인 태도를 요구하는 것으로서 불신 배우자의 의사를 존중하고 그들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도우라는 의미를 포함한다(16절).

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ㅇ거룩하게 되나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기아스타이'는 완료 수
동태로서 그들의 신분적 변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믿는 배우자로 인하여 불신 배우자
가 거룩한 신분이 되었다는 의미는 결코 이해하기 쉬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거룩
한'(하기오스), '성별하다'(하기아조)등과 같은 단어는 성도의
구별된 신분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사역을 통하여 얻게 되는 신분이기 때문이
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적 신앙을 근거로 하여 획득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
이다. 그러나 성도의 거룩한 사귐은 그 이웃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Morris). 칼
빈(Calvin)은 이에 대하여 신자의 거룩함은 불신자의 불경건함이 결혼을 더럽히려는
것보다 더 능력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ㅇ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 전반절에서 갈리울 것을 용인한 후에
화평(和平)할 것을 언급한다. 다시 말해서 성도와 불신 배우자의 관계 속에서 지속적
으로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은 종교적인 이유로 불신 배우
자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없으며, 불가피하게 극단적인 형편이 되었을 경우가 아니면
평화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혹자는 본절을 근거로 하여 평화를 위해 이혼을 해도 무
방하다고 한다(Barrett). 그러나 본절에서는 이혼에 대해 긍정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수동적이어야 하며, 이로 인해 신앙을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전제하고 있
다. 즉 배우자가 신앙의 문제로 먼저 이혼할 것을 제안하고 떠나간 경우 신자는 그로
인해 구속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16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ㅇ아내된 자여...어찌 알 수 있으리요 - 성도가 불신 배우자의 구원을 위하여 애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아예 처음부터 불신자와 결혼하여 개종시키고자
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즉 구원에 대한 확실한 보장도 없이 불신 배우자와 결혼하
는 것은 욕구 불만과 불필요한 긴장감만을 초래할 뿐이다(Morris). 그러나 일부 학자
들은 오히려 본절에 나타난 불신 배우자의 구원 가능성을 강조한다. 즉 그들은 14절의
의미를 보다 강조하며 평화와 인내를 통하여 계속된 결혼 생활이 불신자를 거룩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Barrett, Lenski). 더 나아가 불신 배우자와 결혼하는 것을 기
피하는 행위는 선교적 기회를 회피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Barrett). 그러나 본절의
주제가 이미 '불신자와 결혼한 자들에 대한 충고'라는 것과 불신자가 결혼 생활을 계
속 유지하는 것을 '좋아하거든'이라는 조건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을(12절) 염두에 둘
때 이와 같은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바울의 이러한 가르침으로 불신자와의 결
혼을 정당화할 필요는 없다.

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ㅇ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그대로 행하라 - 이 구절은 결혼 생활뿐만 아니
라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영역에 구체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
들에게 주신 능력과 소명은 그것이 종교적인 것이든지 또는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필
요로 하는 사회적인 것이든지 간에 서로의 화평을 도모하는 곳에 사용 되어야 한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스스로 만족하라는 자족의 의미 라기보
다는 자신이 처한 삶을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주권을 중시하라는 의미가 더 강하
다(Morris, Barrett).

18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ㅇ할례자...무할례자 -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하여 새 사람이 된 자들에게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초대 교회에서 이방인의 할례 문제는 교회 구성
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불만족스러운 처사였다.
특히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가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주장한 바울의 견해는 대부분
의 선교지에서 오해의 원인이었으며 교회 분쟁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또한 헬라의
생활 방식에 적응한 유대인 중에는 할례의 흔적을 감추려 하거나 없애려 하는 자들도
있었다(Lenski, Farrar).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의 주장은 보다 설득력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생활의 이기적 유익을 위하여 할례를 행하기
도 하고 없애버리기도 하는 할례의 의미는 더 이상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
들에게 필요한 것은 율법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다. 여
기서 '계명'(엔톨라이)은 모세의 율법과 같은 법적 규제가 아니
라 부르심을 받은 형편과 처지를 따라 복음에 순종하며 믿음과 사랑으로 자신이 처해
있는 생활 여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랑의 계명
안에(요 15:12-14) 거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유대주의적 관행(慣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20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ㅇ그 부르심 그대로 - '부르심'(헤 에클레데)은 17절에서 사
용된 '소명' 이라는 주제와 다른 관점에서 사용되었다. 신약 성경에서 '클레시스'
('부르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실제로 부르신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지만(롬 11:29;히 3:1), 본절에서는 이 세상에서 처해있는 처지까지도
포함한다(Boice). 또한 앞절들(17, 18절)과 비교해보면 앞 구절에서는 소명에 대한 하
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였으나 본절에서는 부르심을 받은 '그때의' 상태에 역점을 두고
있다(Barrett).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ㅇ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 고린도 교
인들의 신분이 대부분 낮은 사회적 지위에 있었다는 것은 바울의 다른 진술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1:26, 27). 그들의 사회적 신분은 교회 내에서 서로 시기하고 무시하
는 근거가 되었으며 실제로 이러한 신분의 차이로 말미암아 고린도 교회 내의 분쟁은
더 심화되었다. 그러나 결코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요 더
이상 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종이나 자유자의 신분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속했느냐 속하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
이다. 특히 22절에 사용된 그의 역설적 표현은 노예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가 되고
자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중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들 양자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종인 동시에 자유자라는 뜻이다. 그 근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차라
리'(말론)라는 부사가 단순한 반전이나 양자 택일의 유익을 시사하는 뜻으
로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현실적인 노예 신분을 버리고 자유인이 되라는 표현은 아니
다. 오히려 이 말은 '자랑스럽게', 또는 '자신있게' 등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서 종
의 직분을 긍정적으로 사용하라는 의미이다. (2) '사용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레
사이'는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너 자신을 위해 사용하라'는 의미
이다. 따라서 노예된 상태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에게 유익이 되게 하라는 의미
를 갖는다. 이러한 근거들 때문에 주 안에서 자유자가 된다는 것은 현실 신분의 종된
상태에서 벗어나라고 종용(慫慂)하는 것이 아니고, 비록 신분이 종이긴 하나 주 안에
서 자유자이므로 자유자로서 살고, 궁극적으로 주님의 종된 삶을 살라는 가르침이다.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ㅇ값으로 사신 것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의 피로써 산 바 되었다(6 : 20)
는 것을 전제하는 구절이다. 당시에는 노예를 값으로 사고 파는 것이 관례였으며 일반
적으로 값을 치른 노예는 문서상으로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더 이상 이전 주인의 노
예 상태로 있지 않았다. 본절에서는 이러한 사회 상황을 비유로 하여 성도들을 값으로
샀다고 말한다. 성도들을 값으로 산 것은 금이나 은과 같은 현실적인 재화로 산 것이
아니라(벧전 1:18)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역사적이고 단회적인 사건으로 이
루어졌다. 따라서 그로 말미암아 산 바 된 자들은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에
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24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ㅇ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 '하나님과 함께'의 헬라어 '파라 데
오'는 '하나님과 동행한다' 또는 '하나님의 곁에' 있다는 의미를 나
타내기도 하지만 그것은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그의 신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신분이 하나님으로 말미 암아 주어진
것이듯이(갈 1 : 1) 모든 성도들의 신분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밝히며 그 가운
데서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Godet). 이것은 단순히 그들로 하
여금 노예 신분을 계속 유지하라는 희생의 요구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
람임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의 삶이 질서 속에서 그리스도에게 봉사하는 과정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25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ㅇ처녀에 대하여는...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 처녀의 결혼 문제에 대한 바울의 태
도는 매우 신중하다. 그는 사도적 권위나 주께로부터 받은 계명을 강조하지 않고 주의
자비와 자신의 신실한 양심을 앞세운다. 이렇게 하여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강조하
면서 동시에 모든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 중심이 주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
다(Morris). 한편 '처녀'(파르데논)는 때로 '성경험이 없는 남성'을
의미하기도 하였지만(계 14:4), 28절에서 남자의 장가가는 것을 따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본절의 '처녀'는 부모의 견해에 따라 결혼 문제가 결정되는 당시의 '미혼
여성'을 가리킴이 분명하다(Barrett).

26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ㅇ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 바울은 종종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언급하지만, 살후
2 : 2에서는 임박했다고 하는 주의 강림의 소문에 대해 회의적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재림이 있기 전에 발생할 일들에 대해 이미 말씀하셨다(마 24:8). 따라서 환난과 재림
은 연속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본절의 '환난'(아낭켄)
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직접 관계된 고난이냐 하는 문제는 분명치 않다. 혹자는 그리스
도인들이 현실적으로 겪는 고난이 곧 선취(先就)된 종말론적 재난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Barrett). 하지만 본절의 '환난'은 바울과 당시의 교인들이 받았던 현실적인 '박
해들'로 해석 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Morris). 환난은 바울 시대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성도들이 현재적으로 겪게 된다(Calvin).

27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ㅇ매였느냐...놓였느냐 - 두 동사는 완료 수동태로서 그들의 신분이 수동적으로
확장된 상태임을 시사한다. 기혼자는 기혼자의 신분 가운데서 환난을 잘 견뎌야 한다.
고통스런 박해를 피하기 위해 아내를 버리거나 남편을 버리는 일은 합당하지 않다. 이
는 미혼자에 대한 그의 충고와(26절)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르심을 받은 그
대로 지내라'(17, 20, 24절)는 주제를 지지하는 것이며, 또한 결혼 생활에 대한 바울
의 견해와(엡 5: 22, 23) 일맥 상통한다.

28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ㅇ너희를 아끼노라 - 바울은 비교적 독신 생활을 권장하고 있다. 그는 박해로 인하여
당하게 될 육체의 고난을 상기하며 결혼으로 인하여 가중될 책임과 고난으로부터 보호
되길 기대한다(Harrison).

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ㅇ때가 단축하여진 고로...없는 자 같이 하며 - '때'(카이로스)라
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분분하다. (1) '때'는 26절의
'환난'과 같이 당시 고린도 교인들이 처해 있던 상황을 의미한다(Morris). (2) '때'
는 성도의 개인적 종말을 고하는 죽음을 의미한다(Calvin). (3) '때'는 예수 재림 전
의 시대를 의미한다(Barrett, Lenski). 본절에서는 (3)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개인적 종말과 박해의 시대 등을 모두 포괄하는 견해이기 때문이
다. 바울은 예수의 재림이 불과 몇 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위기 의식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다. 그것은 '없는 자 같이 하며'라는 표현 속에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이는 금욕이나
절제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이나 재물이나 그 외의 세상 것들이 성도의 궁극적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Grosheide). 성도는 세상에 있으나 세속에 속하지 않은
자이며(5:10), 세상의 자랑거리로 자신을 치부할수 없는 자들이다(고후 6 : 10).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ㅇ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 '지나감'(파라게이)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스쳐 지나간다'는(마 20:30)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본절에서 그 의미는
보다 고조되어 '없어지다' 또는 '소멸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세상은 영원한 것
이 아니라 임시적 이며 무상한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는 그 형상조차도 무너
지고 말 것이다(시 103:15). 한편 혹자는 이것을 사회나 상업 제도 등과 같은 세상의
외적 구조가 변화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Barth). 물론 '형적'(스케마)이라
는 단어가 세상사에 나타나는 외형적 형태를 의미 하기도 하지만 본절에서는 종말에
멸망할 수밖에 없는 세상의 특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상 타당하다 하겠다.

32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33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ㅇ주를 기쁘시게 할꼬...아내를 기쁘게 할꼬 - '기쁘시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레
스코'는 상대방을 향한 헌신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즉 기혼자는 아
내로 인하여 주께 향한 헌신의 자세를 반감(半減)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인이 세상의 염려로부터 자유함을 받아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살아야 하는 것
이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그 일을 위하여 독신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은 부당한 요구
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결혼이나 외적인 제도 등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리스도 안에서의 자유함으로 참 하나님을 섬기느냐 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결혼하지
않은 자라 할지라도 그가 정욕에 매여 있다면 그 역시 하나님을 향한 헌신을 잃어버린
자에 불과하다(Calvin). 기혼자이든지 미혼자이든지 간에 그는 주어진 자유를 선용(善
用)할 때만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

34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ㅇ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 '거룩하게 하다'라는 말은 고상한 도덕적 성취
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Morris).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자세로서 모든 성도
들이 결혼을 했건 안 했건 간에 거룩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6:13, 15;롬 6: 12;
12:1;고후 4 : 10 ; 갈 6:17). 다시 말해서 결혼하지 않은 처녀만이 '거룩하다'고 말
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적 생활을 삼가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뜻을 염
두에 두고 사는 삶의 자세이다.

35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ㅇ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 바울의 의도는 보다 확실하게 드러났다. 기혼자이든
미혼자이든지 간에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질서 속에서 주를 섬기는 일이다. 이
러한 가르침을 통해 바울이 의도한 목적이 있었다. 즉 (1) 고린도 교인들의 신실한 신
앙과 빛된 생활을 촉구하고 (2) 그리스도 안에서 지속적으로 완전한 헌신을 하도록 하
려는 것이며 (3) 구차한 논쟁에 말려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36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하라 이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혼인하게
하라

ㅇ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혼인하게 하라 - 본절에서 언급하는 결혼이 어떠한 종
류의 결혼인가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분분하다. (1) 혹자는 당시 고린도 지방의 관
습으로 지켜진 '정신적 결혼' 또는 '영적 결혼' 등을 말한다고 하는데, 이 견해에 의
하면 성적 결합이 없는 결혼을 유지하느니 차라리 통상적인 결혼 생활을 영위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5절의 서로 분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설명해 주지 못
하고, 이런 정신적인 결혼의 관습은 2세기에 들어서야 생겨난 것으로, 본 견해를 뒷받
침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Morris). (2) 혹자는 처녀의 보호자된 아버지가 정년기에
접어든 딸의 결혼을 추진하는 것으로 이해한다(Calvin). (3) 혹자는 젊은 과부가 그
형제들에게 시집가는 '수혼'을 권장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Barrett). 그 외에 약혼자
가 독신을 서약한 후에 부득이한 일이 생기면 결혼하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
러나 본절에서는 (2)의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 당시 자녀의 결혼에 대한 결정권(決定
權)을 가지고 있었던 보호자에게 자녀의 결혼을 권장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Morris, Lenski).

37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38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 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 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

ㅇ부득이한 일 - 결혼을 시켜야만 하는 부득이한 일은 결혼 서약과 같은 대외적인 의
무와 책임을 가리킨다(Morris). 이를 보아 결혼에 있어서 쌍방의 서약을 중요하게 생
각하고 공적인 인정도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
ㅇ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시집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 - 본문은 처녀를 가진 부모에대한 권면으로 처녀가 결혼하길 원치 않
을 경우에 앞 구절(36절)과는 대조적으로 시집보내지 않는 것이 더 좋다는 결론을 내
린다. 성도는 창조 질서 속에서 거룩함을 유지해야하며 죄의 오염으로부터 자신을 보
호해야 한다. 성도의 삶에 대한 평가 기준은 결혼을 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지 않고
못했느냐에 달려 있다. 본절의 더 잘하는 것이라고 칭찬하는 말은 바울의 의도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낸다.죄의 욕망으로부터 자신의 순결한 삶을 지킨 성도는 잘하였다는 칭
찬을 듣게 되며 그 칭찬은 결혼하지 않고 순결한 삶을 지키며 하나님께 헌신한 자에게
더 크게 작용한다(Calvin).

39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 갈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ㅇ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 과부들의 재혼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원리는 앞절에
서 기록된 처녀들의 경우와 동일하다. 그들은 다시 결혼하든지 혼자 그냥지내든지 자
신의 뜻에 따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또 하나의 조건이 추가되
었는데 그것은 '주 안에서만'하라는 것이다. 이는 불신자들과 이미 결혼한 자들에게
'그대로 행하라'고 말한 것과(12, 13절) 달리 새로운 결정을 해야 되는 과부들에게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지체된 자임을 기억하도록 요구한다. 이로써 그리스도 안에서의 가
정을 최선의 것으로 여겼고, 그 외의 경우에 파생적으로 발생된 문제에 대한 대책만을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0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ㅇ하나님의 명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는 것은 크게 두 가
지를 의미한다. (1) 사도 바울 자신이 독신으로 살 수 있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사
를 받은 것과 같이 너희도 그 은사를 사모하라는 것이다(Barrett). (2) 비록 주의 계
명에 이르지 아니한 내용이라 하더라도(25절)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다는 것이다(Morris). 즉 독신에 대한 바울의 견해는 하나
님의 영을 따라 된 것으로 하나님의 뜻과 부합(符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