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고린도전서

[스크랩] 고린도전서 (5 : 1~13)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0:48
고린도전서 5장


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ㅇ너희 중에...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 '음행'('포르네이아)이라
는 말은 문자적으로 다른 사람의 육욕을 위해 자신의 몸을 파는 행위를 뜻하지만 보
편적인 의미로는 불법적인 성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헬라어 본문에 의하면
'심지어'(홀로스)가 본문 초두에 나와 있는데 이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
는 일들이 이미 벌어졌음을 시사한다. 바울은 본서에서 두가지를 강조하고 있다. (1)
그들 가운데 음행이 성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2)이 추악한 음행을 그들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널리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당시의 부도덕한 성행위가 보편화되
지 않고 일부 사람들에게만 행해지는 제한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고린도 교
회에서 보다 심각한 문제는 그러한 범죄가 교회로 부터 정죄(定罪)되지 않았다는 것이
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 속에 음행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또한 바
울에게까지 소식이 들릴 만큼 그 행위는 공공연한 것이었다. 한편 '들었다'에 해당하
는 헬라어 '아쿠에타이'는 '아쿠오'(듣다)의 현재
수동태로서 '...라는 소문이 들리더라'는 것이다. 이는 고린도 교회로부터 들었다는
것인지, 아니면 고린도 교회에 음행이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었다는 것인
지 분명하지 않지만, 대체적으로 글로에의 집 식구들에 의해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
다(1:11, Farrar). 뿐만 아니라 이것은 널리 퍼져 있는 사실이기에 여러 경로(소문)를
통해서 들었을 것으로 여겨진다(Lenski).
ㅇ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 - 유대인의 율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자는 돌로쳐 죽이라
고 명시되어 있다(레 18:8;신 22:30). 이러한 율법의 내용을 알고 있는 바울이 구태여
여기서 이방인과 비교한 것은 더 이상 재고의 가치도 필요없는 아주 경멸스런 행위로
취급하기 위함이다. 당시 고린도 지방은 성적 문란과 방종으로 소문난 곳이었으나 바
울은 그 이방인의 문란보다 더 큰 죄악이라고 규정함로서 자신의 분노를 반영(反映)하
고 있다. 한편 바울이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고 말한것은 이방인들은 이러한
범죄를 전혀 저지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본절은 당시 이방인들 사이에서
도 가장 치욕스러운 죄로 취급하는 추악한 행위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Calvin).
ㅇ그 아비의 이내를 취하였다 - 바울은 이 사건을 '간통'이나 '근친 상간'이라는 말
로 표현하지 않고 '그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고 하여 음행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서술
하고 있다. 여기서 '그의 어머니'라고 표현하지 않고 '아비의 아내'라는 표현을 쓴 것
으로 보아 그 음행이 최소한 '그의 어머니'(친모)와의 관계속에서 빚어진 음행은 아닌
것 같다(L. Morris). 사실 본문에는 그 여인의 정체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
지만 그 대상이 '아비의 아내' 였다는 점과 '아내'로 번역된 헬라어 '귀나이카'
란 뜻으로 '계모'(메트뤼이아)라는 말과 거의 뜻을 같
이 하기 때문에 '아내'는 아버지의 첩이거나 의붓 어머니일 수 있다(Farrar, Calvin).
한편 '취하였다'라는 헬라어 본문 '에케인'은 현재 부정사로 이 음행 사
건이 단회 적이지 않고 지금도 지속적(持續的)인 반복 행위임을 시사한다. 따라서 여
기서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는 말은 계모와의 관계에서 성적 부정이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의미한다(Harris).

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ㅇ그리하고도...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 그들은 도대체 어떤 지식과 신앙
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방인들도 정죄하는 음행을 저지르면서도 원통하게 생각하지 아
니하고 오히려 교만할 수 있었는가? 그들은 그리스도의 공동체 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
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옛 이방인의 생활 습관을 미처 다 버리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괴이한 악행 가운데서도 여전히 회개할
줄 몰랐고 버젓이 그리스도인 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F. W. Farrar). 그
들은 음행 사건으로 인하여 적어도 수치스러워하며, 그들의 공동체 속에서 발생한 불
미스러운 일들로 인하여 자신들을 되돌아 보아 최소한 통한히 여기는 모습으로 주의
용서와 은혜를 구했어야 했다. 여기서 '통한히 여기지'의 헬라어 '에펜데사테'
는 '죽은 자로 인하여 애통한다'는 의미로 죄에 대한 선자들의 반응이
어떻게야 되는지를 나타낸다. 즉 그들은자신들이 주장한 자유와 방종으로(6:12;10:23)
인하여 죄악이 성행하게 되었다는 공동체적인 책임을 느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공동체적인 책임은 고사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영의 사람이 됨으로 말미암아 모든 육체
적 일들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는 또 다른 교만과 거짓으로 더 큰 죄악을 범하고 있었
다. 이처럼 형제의 죄악을 보고 애통할 수 있는 사랑을 잊어버린 교회가 분열과 분쟁
을 격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추악한 성적 타락으로 인하여 고
통당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은, 음행한 자에 대해
무관심 내지 방조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죄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만 가운데 있던
고린도 교인들을 크게 책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1)그리스도인들의 연대적(連帶
的) 책임성과 지체 의식 (2)무관심과 교만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을 방해하는 범
죄라는 점 (3)어떠한 죄악 가운데서도 회개의 은총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5절).

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ㅇ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 '떠나 있다'(아폰)라는
표현은 그의미가 매우 선명하다. 그는 지금 고린도 지방을 떠나 제3차 전도 여행 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 있다'로 번역된 헬라어 '파론'은 '곁에
있다', '가까이 있다' 또는 '왔다'라는 뜻을 가진 '파레이미'의 현
재 분사형이다. '파레이미'는 공관 복음서에서 '왔다'(눅 11:6)라는 의미로 사용되었
며, 행 17:6에서는 '이르렀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본절에서는 몸이 떨어져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영은 그들과 '함께 있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골 2:5). 한편
'영'이라는 표현은(토 프뉴마티) 바울에게 있어서 주로 하나님
의 영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나(롬 8:9;고후 3:17;갈 4:6) 여기서는 바울 자신의
'영'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마음'(카르디아)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
다(Farrar). 즉 멀리 떨어져 있는 교회와 영으로, 곧 마음으로 함께 있음을 의미한
것이다. 아울러 본절의 심각성을 생각할때 바울이 영으로 그들과 함께 하여 문제를 해
결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심정이 강하게 암시되어 있다.
ㅇ거기 있는 것 같이...이미 판단하였노라 - 음행한 자들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매우
단호하다. 그는 '에고'('내가')의 강조 용법과 함께 '에데'('이
미')라는 부사와 '판단하다', '정죄하다', '심판하다'(크리노)의 완료
직설법 능동태인 '케크리카'('판단하였다')를 사용함으로써 그들을
향한 심판이 이미 선고되었음을 강조한다. 한편 헬라어 본몬에서 '함께 있어서'
(파론)라는 말에 이어 다시 한번 반복된 '호스 파론'('거기
있는 것 같이')이라는 표현은 판결의 순간에 그들과 함께 실제로 있었던 것과 같은 확
실성과 자신이 함께 한 심판의 권위가 다시 번복(飜覆)될 수 없다는 절대성을 강조하
고 있다.

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ㅇ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 바울
은 자신의 판단이 독단적이거나 판협된 것이 아님을 증거하고 그들이 스스로 모임을
갖고 자신들의 판단에 의하여 음행한 자들을 징계할 것을 촉구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 속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여야 하며 그곳에서 새로운 발전의 기회
를 모색 해야한다.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그들에게 용
기를 주고자 하였다. 여기서 '예수의 이름'과 '예수의 능력'은 (1)일차적으로 분열된
그들을 하나로 모으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며 (2)이차적 으로는 음행하는 자들을 추방
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한편 '너희가 함께 모여서'의 헬
라어 '쉬나크덴톤'은 부정 과거 분사로서 그 일들의 결정을
위한 단회적 모임을 시사하며, 동사 '쉬나고'('모이다')는 그리스도인
의 집회를 나타내는 전문적인 용어로 이 회집이 그리스도인들만의 회집임을 시사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예수의 이름과 능력(能力)이 함께 한다는 것을 강조함으
로써 그들의 판단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설명하고 음행한자에 대한 징계
가 정당하고 합법적임을 증거하며 나아가 교회의 징계는 인간의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
의 권위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Harris). 따라서 예수 안에서 자신의 영
이 그들과 하나되어 이미 그가 판단한 것과 같은 판단을 내려줄 것을 바울은 기대하였
다.

5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ㅇ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 본절은 3절의 '판단하였노라'(케크리
카)와 연결된 것으로서 연결의 엄숙한 조치를 가리킨다(Deissmann). 다이스만은 '내
어주다' (파라두나이)라는 단어를 이교도의 저주 의식에서 유
래한 말이라고 주장하여 사단에게 내어주는 행위가 저주의 선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
나 '내어주다'라는 말을 꼭 이방인의 저주 의식에서 유래된 단어라고 주장할 수만은
없다. 바울은 이 단어를 범죄자들에 대한 최종적인 선언으로서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Lenski). 따라서 바울은 교회가 책임있는 거룩한 공동체로서 그러한 자들을 출교시킬
것을 권고하였다(13절). 이러한 표현은 딤전 1:20에도 나타나는데 그들의 출교는 일차
적으로 그들의 죄악을 심판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다른 성도들을 보호한다는 의미
를 가진다. 고린도 교회의 순결한 영혼들을 훼방하지 못하도록 교회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한편 우리는 본절에서 중요한 하나의 원리를 발견하는
데 그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다스림과 보호하심 아래 머물러 있는
반면 교회 밖은 그리스도의 지배하심에서 떠난 사단의 영역이라고 생각하였다는 것
이다(Calvin). 따라서 출교는 사단에게 내어주는 멸망의 극단적인 조치로서 그들에게
있어서는 제일 큰 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토록 극단적인 조치가 취해질 수밖에 없
었던 것은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그들 가운데 있는 음행이 얼마나
심각한 죄악이었는가 하는 것을 반영해 준다.
ㅇ육신은 멸하고 영은...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 이 구절은 해석상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 유대교에서는 육체의 죽음을, 속죄받지 못한 죄들을 속죄하는 수단으로 취
급하기도 하였으나 본절에서 이와같은 원리를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다시 말
해서 육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견해는 성립될 수 없다는 뜻이
다. 성경에는 영과 육이 따로 분리되어 구원받거나 멸망받는 일에 대하여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둘다 구원받든가 둘다 멸망하든가 해야한다(Lenski).특히 바울은 다
른 모든 구절에서 속죄는 육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본절의 육신의 멸망과
영의 구원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칼빈(Calvin)은
전반부에 등장하는 '내어준다'라는 말의 법정적, 선언적 의미를 강조한다. 다시말해서
사단에게 내어주는 행위는 일시적(一時的)인 것으로서 궁극적인 심판과 구원에 선행하
는 임시 조치라는 뜻이다. 음행한 자들을 사단에게 내어주는 교회의 심판은 영원한 것
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이며 영원한 그리스도의 심판에 의하여 그의
운명은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참된 사랑의 원리인 징계를 나타냄
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다시 그들에게 미칠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하며 또한 올바
른 징계를 행함으로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야 한다.한편 바
울은 '주 예수의 날'이라는 구절을 첨가함으로써 그 징계받은 죄인들을 주의 백성들
가운데서 다시 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따라서 본절에서 범죄자에 대한 징계의 목
적을 살펴볼 수 있다. 즉 징계는 범죄한 영혼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이나 유기가 아니
라 회개와 돌이킴을 위한 일시적 고난이며 구원을 전제로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
이다. 본절은 특히 (1) 범죄자를 그대로 방치하는 행위는 사랑이 아니라 무관심의 소
치로서 그 사람을 멸망에 빠뜨리며 다른 사람들까지 함께 타락케 만드는 범죄라는 사
실과 (2) 참된 징계의 정신은 사랑이라는 점을 극명하게 교훈해 준다.

6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ㅇ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 '자랑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우케
마'는 자랑하는 표면적 행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랑하는 내용을
의미한다. 헬라어로 '자랑하는 행위'는 '카우케시스'이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말한 것은 단순히 그들 교회가 분열과
음행으로 가득찬 교회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사를 가졌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음에도 그 사랑과 은사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은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은사를 죄악을 묵인하는
곳에 사용하였으며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곡해하여 죄악을 용납하고 그들과 더불어 죄
악에 빠지는 것에 사용하였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죄악의 행위를 묵인하는 것이 그들
의 자랑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L. Morris).
ㅇ적은 누룩이...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 누룩은 (1) 그리스도의 복음(마13:33;
눅 13:21).(2) 죄(출 12:15;갈 5:9)등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죄악을 상징하는 말로 사
용되었다. 본문의 상징적인 표현을 통해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누룩, 즉
죄악으로부터 구속함을 받은 새로운 존재임과 죄악의 파급적인 영향력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할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살전 5:22).
즉 바울은 그들의 자만이 결국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누룩'이라
는 하나의 실례를 들어 증명한다. 누룩은 아주 작은 미량의 효소로 그보다 몇 배나 더
큰 반죽 덩어리를 발효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 효력은 더욱
왕성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교회 내의 범법자는 처음에는 그 이웃을 감염시키지
만 결과적으로는 교회 전체를 부패시키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갈 5:9).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의 지혜와 은사에 비하여 악의 요소인 누룩이 작아 보였기에
자만 할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들 앞에 닥친 위협은 결코 작은 것만은 아니었다.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의 지혜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교회의
순결성(純潔性)을 유지하는 일이다(Harris).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ㅇ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 하나님의 백성은 이미 죄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이며 그
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기 전의 타락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
이다(Calvin).특별히 바울은 '누룩 없는 자이어야 한다'는 표현을 하지 않고 '누룩 없
는자'(아주모이 온테스)라고 선언하고있다. 그의 표현은 그
들이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 자체가 새
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강조한다(고후5:17).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만 하는 신분임을 상기시킨다(4:17). 만약 그들이 아직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
었다면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묵은 누룩을 제거하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누룩없는 상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제적인 상태로서 그들이 다시 묵은 누룩으로 돌
아갈 수 없는 신분임을 강조한다.
ㅇ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 하반절은 헬라어 원문에서 '가르'로
시작하는데 '왜냐하면'의 뜻을 가진 '가르'는 왜 묵은 누룩을 버려야만 하는것인가 하
는 문제와 그들이 어떻게 누룩 없는 자가 되었는가 하는 이유를 암시한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 희생양이 되셔서 그들의 백성의 죄를 다 도말하셨기 때문이라
는 주장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들을 멸망으로부터 이끌어내었으며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주셨다. 바울은 누룩으로 시작된 비유를 유월절의 무교병과 유월절 어
린 양이라는 또 다른 비유의 의미에 연결 시키면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성취된 무교
병에 참여한 자들은 더 이상 누룩 있는 떡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Lenski).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ㅇ우리가 명절을 지키되...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 칼빈(Calvin)
은 이 구절을 '영적(靈的)인 유월절을 지키자' 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당시
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새로운 유월절의 개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잡히
시기 전날 밤에 만찬에서 떡을 떼시고 포도주를 나누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다시 범죄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새로
운 명절에 참여한 자들은 옛 습관의 죄악된 누룩을 가지고 새 덩어리에 참여할 수 없
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새 명절을 지키고자 하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누룩이 아니
라 순전함과 진실함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적인 생활이다. 한편 '순전함'
(에일리크리네이아스)은 동기의 순수함을 나타내고 '진실함'
(알레데이아스)은 행동의 순수함을 나타낸다. 새로운 명절은 더
이상 종교적 의식과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누룩없는 새 명절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거룩한 삶으로 드려져야 할 성도의 순결한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롬12:1).그
러므로 바울은 '묵은 누룩'과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을 버려야 할 것을 권고한다. 여
기서 '묵은 누룩'과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이란 성도들이 그리스도께 속하기 이전에
지니고 있던 죄의 습성을 가리킨다. 그리스도 안에서 빚어진 성도들은 묵은 누룩이 뜻
하는 음란과 정욕, 술취함과 방탕,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엡 4:22;벧전 4:3)등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

9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ㅇ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 헬라어 '에그랖사'('내가 쓰다')는 부정
과거 능동태로서 (1)이미 그가 썼던 과거의 한 편지를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Calvin,
Meyer, Godet). (2)서신서에 등장하는 부정 과거의 특징적인 성격을 생각할 때 '내가
지금 쓰고 있는 한 편지'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와 같은 견해에 반대한다(Lenski, Barrett, Morris). 만약 이 편지가 지금 쓰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면 아직 받지 않은 편지를 두고 그들이 어떻게 오해할 수가 있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편지는 앞서 고린도 교회에 보내진 편지로서 지금 우리에게는
발견되지 않은것들 중 하나라고 보는 것이 학자들간에 널리 알려진 정설이다(Calvin,
Meyer, Godet, Harris).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쓴 서신 중에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
지 않은 것이 있으므로 우리들이 갖고 있는 성경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했던 영감서인 신 . 구약 66권으로 된 완
전한 성경을 갖고 있다. 그외 성경 기자들의 다른 저작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자연
스레 소실(消失)되거나 성경에 수룩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1) 의 견해
를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Robertson).

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ㅇ만일 그리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 많은 사람들은 본절이 세상과의
분리나 은둔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이해한다(Barrett, Lenski, L. Morris). 그
러나 본절이 세상과의 타협과 동화를 뜻하는 말이 아님도 기억해야만 한다. 바울이 고
린도에 보낸 서신들의 전체적인 주제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세상의 음행한 것들과
타협함으로 말미암아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 서신은 타락한 도시 고
린도로부터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구별되어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가
에초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바울의 전체적인 의도를 망각하고
그들 나름대로의 판단에 따라 행동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바울의 훈계가 너
무 지나친 것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에 (1) 어떤 자들은 오히려 세상과 하나되어 그리스
도를 포기하고자 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취했으며 (2) 또 다른 자들은 아예 세상으로
부터 떠나 은둔과 도피적(逃避的)인 삶을 선택하게 되었다. 또한 그들 중에 일부는 이
세상과의 구별을 단순히 고린도라는 한 도시를 떠나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였으
며 또 어떤자들은 세상과의 분리를 은둔이나 수도라는 의미보다 더 가혹한 죽음이라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오해들이 세상과 그리스도인의 관
계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며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자체와 그 세
상 가운데 있는 추악한 것들을 바로 구별하지 못한 데서 발생한 것임을 발견한다(J.
Calvin). 이것은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에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니이
다"(요 17:15)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의 분리
는 음행하는 고린도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가는 것도 아니며 또한 타락한 도시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악한 본을 보이는 자들과
의 관계를 포기하는 것이며, 그 관계의 포기로 말미암아 초래되는 온갖 사회적, 경제
적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오히려 그들의 악을 미워하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고난의 삶을 선택하는 일이다(Chrysostom). 한편 상반절에 나열된 세상의 추악한 모습
은 음행이나 탐심이나 토색이나 우상숭배라는 서로 다른 형태로 나타났지만, 보다 근
본적인 문제에 있어서 이러한 행악(行惡)은 온 세상을 주관하고 있는 악한 자, 곧 공
중에 권세 잡은 자에 의하여 발생하게 되는 문제임을 기억해야 한다(엡 2:2).

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ㅇ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 바울은
앞절에서 나열한 악의 종류에 두 가지를 덧붙이고 있는데 하나는 '로이도로스'
('후욕하는 자')로서 다른 사람에 대한 욕설이나 비방을 서슴지 않고 행
하는 것이며(마 5:22) 또하나는 '술 취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일을 행하는 자
들이 형제라는 그리스도인의 명분을 가지고는 있으나 더 이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들이 아니라 악한 자의 손에 있는 자들임을 강조한다. '사귀지 말라'
(토토이우토)는 9절에서 사용된 것과 같이 그들 가운데 어울리지 말라는 뜻을
다시 반복한 것이며(엡 5:11) '메데 쉬네스디에인'
('함께 먹지도 말라')과 함께 '철저하게 관계를 단절할 것'을 요구하는 표현이다. 한편
본절에서 '쉬네스디에인'은 성만찬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만은 없다. 물론 그들
은 당연히 성만찬에서 제외될 것이다. 그러나 본절에서 '쉬네스디에인'은 보다 일상적
인 생활속의 자유스런 식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즉 고린도 교인들은 형제
라고 일컫는 자 중에 공공연히 범죄를 하고도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때 그
들과의 교제를 단절할 뿐 아니라 그들을 탈퇴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범죄자에
게 유익이 될 뿐만 아니라(5절) 교인들을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12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ㅇ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 바울은 앞절에서 제시
한 자신의 권리가 최선의 방법임을 다시 한번 호소 하면서 자신의 판단 범위의 한계와
고린도 교인들의 의무를 보다 명백하게 기록한다. 그는 교회밖에 있는 자들을 판단하
는 것은 자신의 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고린도 교인들도 교회 밖에있는 자들을
판단하는 것을 금지시킨다. 이는 심판의 특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며(13절)또한 저
들이 이웃을 심판하는 일 때문에 그들 역시 범죄하기 쉽기 때문이다(롬 2:1;14:4,10).
그는 성도들의 신앙 규범과 행동 원리를 교회 공동체 내에 한정(限定)시키면서 그들의
동료들 가운데서 발생한 문제들을 스스로 판단함으로써 책임을 다할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교회 공동체가 범죄자를 판단하는 행위를 그리스도인 개인이 성
도의 행위를 판단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Lenski). 왜냐
하면 교회는 교회의 순결성을 유지하기 위해 공동체를 훈계하고 권징하는 일을 교회적
차원에서 행하는 것이지 어느 개인에게 맡겨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
의 판단의 권위와 진실성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말씀과 권위에 순종할 때 더욱 명백해
질 것이다(Barrett).

13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ㅇ이 악한 사람은 너희중에서 내어 쫓으라 - '악한 자'를 뜻하는 헬라어 '호 포네로
스'는 한 행악자 개인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보다 총체적인 악의 개
념으로 앞에서 열거한 모든 행악자들을 의미한다(Calvin). 바울은 이 모든 자들이 교
회 공동체로부터 쫓겨나야할 것을 다시 경고한다. 교회는 그들 속에 있는 적은 누룩을
제거하지 못할 때에 결국 그 순결성을 잃게 되어 악의 무리들이 권세를 잡는 타락한
모습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순결성을 지키기 위
해 행하는 권징의 의미를 본절에 기록된대로 모든시대의 교회에 적용한다는 것이 용이
한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각 시대의 교회마다 다른 상황이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
다(Morris).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시대의 교회가 기억해야 할 것은 교회 내의 악의
존재가 묵인(黙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따라서 어느 형태로든지 악에 대한 권징
의 정당한 시행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한편 바울은 '내어 쫓으라'
(엑사라테)는 동사의 주체가 구약의 여러 곳에서는(신 19:19;22:21,24;24:7)
단수로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는 복수로 기록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의 판단이 교회 전체에 의하여 행사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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