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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고린도전서

[스크랩] 고린도전서 (1 : 1~31)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0:47
고린도전서 1장


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ㅇ하나님의 뜻을 따라...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친
히 부르셨다는 주장이 필수적으로 변화되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 이유는 고린도 교
회에 여러 당파들이 있어서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12
절;9:1-12). 여기에서 '사도'(아포스톨로스)라는 말은 '보냄을
받은 자'란 의미로 전권(全權)을 위임받은 특사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사도'라는
직분은 원래 오직 그리스도가 임명을 해서 직접 보낸 열 두 제자만을 가리켰다. 그러
다가 초대 교회에서는 이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갖게되었다(Cole). 여기에서 바울은 자
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직접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실을 근거로 해서(행
9:15) 자신의 사도됨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따라 된 것임을 명백히 한다. 그는 자
신이 전하는 복음의 권위를 옹호하기 위하여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이 본서의 첫머리에서 자신의 신분을 사도라고 밝힌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ㅇ형제 소스데네 - 헬라어 본문에서 '형제'의 헬라어 '아델포스'
앞에 정관사 '호'가 있어서 소스데네가 '형제들'가운데 하나임을 의미한다
(Farrar). 그가 바울과 함께 본서신을 집필하였다는 증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나 고
린도 교인들이 소스데네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언급했을 것이다. 소
스데네는 고린도의 유대인 회당의 회당장이었으며, 유대인들이 총독 갈리오에게 바울
을 송사(訟事)했을 때 바울 대신에 그들에게 매를 맞은 사람이었다(행 18:12-17). 그
런데 소스데네라는 이름은 당시에 흔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그가 반드시 본절의 인물과
동일하다고 보기는 어렵다(Hodge, Alford, Morris).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ㅇ고린도에 있는 - 고린도는 기원전 146년에 무미우스(Mummius)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그로부터 80년 후인 기원전 44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에 의해 복구되
었다. 그후 고린도는 급속히 재건되어 아우구스토 황제에 이르러 아가야(Achaia)의 수
도가 되고 바울 당시에는 인구 60만을 헤아리는 대도시로 발전했다. 당시에 이 도시는
상업의 도시로 번창했으나 반면에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극히 암담하고 무질서하였다.
그 도시인들은 다신교를 숭배했고(행 17:16-22) 그들의 생활은 음란했다. 따라서 '고
린도화 하다'라는 말은 '아프로디트(Aphrodite) 여신을 숭배하며 추악한 음행을 행한
다'는 의미가 될 정도였다.
ㅇ하나님의 교회 - 바울이 고린도라는 지명과 함께 '하나님의 교회'를 언급한 것은
기독교의 고귀한 이상과 우상 숭배의 허탄함을 극명하게 대조해 주는 역설적인 표현이
다(Bengel).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에게 속한 교회임을 나타내는 이 표현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과 하나님의 교회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려는 바울의 겸손함을
잘 드러내 준다. 바울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모이는 교회를 헬라 세계의 세속
적인 '엑클레시아'와 구별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Mare).당시
의 세속적인 세상의 총회(엑클레시아)는 공공, 이익에 관련되는 문제를 토의하고 결정
하기 위해 도시 국가의 시민들이 모이는 집합체였다(행 19:39).
ㅇ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와 영적으로 연합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묘사한
다. '거룩하여지고' 의 헬라어 '헤기아스메노이스'는 완료형
분사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고 그 결과 이루어진 상태가 현재에도 계속 유지됨을
의미한다(Grosheide).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 등이 하나님의 소유로서 거
룩하다고 불리워졌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을 지칭하여 거룩
한 자들이라고 불렀다(30절;6:11). 바울이 여기에서 고린도인들을 '성도'와 '거룩하여
진' 자들로 칭했다고 해서 고린도 교인들 모두가 참 신자였다고 말할 수 는 없다.의심
할 바 없이 고린도시가 부패했던 것처럼 교회도 교리와 실천에 있어서 상당히 부패했
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인정하고 있다
(Calvin).
ㅇ또 각처에서...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 '각처에서'라는 말은 이
서신이 고린도 교회 이외의 다른 교회에서도 읽혀진 것을 목적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에 대해 혹자는 본서와 같은 특정한 내용의 서신 다시 말하면 특정한 교
회의 개별적인 문제를 취급한 편지가 일반 교회를 상대로 하여 쓰여졌다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고 한다(Robertson, Plummer). 그러나 본 서신이 비록 고린도 교회에 보내진
것이라할지라도 다른 교회들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배제(排除) 할 수 없다
(Lightfoot).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다루는 바울의 서신은 하나님의 교회의 근본적인
성격을 원리적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ㅇ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 이 구절은 전형적인 바울의 인사 형식이다. 당시 헬라 세
계의 일반적인 인사말은 삼인칭을 사용했지만 바울은 일인칭이나 이인칭을 사용하여
휠씬 가까운 친밀감을 표현하였다. 한편 바울이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사람들을 창조하셨고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을 보여
준다.
ㅇ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 '예수 그리스도'란 말은 본장의 1절부터 9절까지 아홉번이
나 반복되었다.바울의 문체의 독특성 중의 하나는 핵심되는 단어를 계속하여 되풀이하
는것이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이 바로 그리스도이
심을 명백히 보여준다. 한편 전치사 '좇아(아포)는 하늘의 은사들이 그리스도
때문에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ㅇ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 이런 형식의 인사말은 바울이 자주사용하는 문구
이다(롬 1:7;갈 1:3;엡1:2;빌1:2). '은혜'(카리스)란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값으로 계산 불가한 것을 대가없이 주시는 선물이다.그리고 '평강'
(에이레네)은 히브리인들의 일반적인 인사말 '샬롬'('평화')
에서 온말로 분쟁과 싸움이 없다는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축복이 있어서
풍요로운 영적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Morris).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은
혜와 평강'을 기원한 것은 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고
(고후 8:9;엡 2:8,9) 그리스도께서 그의 구속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
셨기 때문이다(롬 5:1;엡 2:14). 본절에서 바울은 비록 은혜와 평강을 얻는 방편인 믿
음을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 믿음을 소유한 모든자들에게는 이 은사가 주어지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ㅇ그리스도 예수안에서...은혜를 인하여 - 바울은 다른 편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사
말에 이어 수신자들을 위한 감사를 드린다(롬 1:8;빌 1:3-7;골 1:3-8). 혹자는 본서에
서의 감사는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비난한 본서의 내용에 비추어 보면 풍자적인 면
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될 수 있는 대로 격려와 칭찬을 자주 하곤 했다
(Morris). 비록 고린도 교인들의 삶에 많은 결함이 나타났을지라도 그들은 다른 고린
도 시민들과는 명백한 차이가 있었음이 분명했다(Lightfoot). 따라서 바울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다고 말할수 있다. 한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엔 크리스토 예수)라는 말은 바울의 서신에 164회나 나타나며 옥중 서
신(獄中書信)에 특히 많고 본서에서도 11회나 쓰였다(2,4절;3:1;4:10,15,17;15:18,19,
22,31). 바울이 여기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문구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일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영역 안에서 특정하게 주어진다는 것
을 말하기 위함이다.
ㅇ내가...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 '항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토테'
와 '감사하노니'(유카리스토)는 현재형으로 쓰여 바울의 계
속적이고 규칙적인 기도 생활을 시사한다.바울은 그가 가르쳤던 교회들을 위해 정규적
으로 중보의 기도를 드렸다(엡 1:16;빌 1:3). 원문에는 본절의 첫머리에 '하나님께 감
사하노니'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열거될 수 있는 모든 영적인 축복들이 하나님의 선
물이자 그분에게서만 유래되는 것임을 암시해 준다(Grosheide).

5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ㅇ너희가...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 고린도 교회에 내려진 하나님 은
혜가 각 방면에서 풍족하게 드러났음을 의미한다. 본절에서 '모든...풍족하므로'
(판티 에플루티스데테)는 사실상 양보다 질을 말하고
있으며 '하나도 빠짐없이 전체'라는 의미라기보다는 '가능성있는 모든 측면에서'라는
의미가 더 타당하다. 한편 '구변'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고'는 '교리'혹은
'진리'를 의미한다(Calvin, Hodge). 그리고 '지식'에 해당하는 헬라어 '그노세이'
는 영지주의(Gnosticism)에서 언급하는 감추어진 신비한 지식을 말하는 것
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기초한 구체적인 지식을 말한다(Mare). 즉 바울
이 말하는 '지식'이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빌 3:8) 곧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실재 위에 기초한 구체적인 지식을 말하고 있다. 한편 '풍족
하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플루티스데테'는 '플루티
조'의 부정과거 수동태로 신약 성경에서는 바울 서신에서만 나타
난다(고후 6:10,11). '풍족하다'는 말은 본절에서 개종이나 세례가 풍부하다는 말이
아니라(Mare) 그리스도에 대한 일들을 알고 말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풍성히 축복
하여 주신 것을 지칭한다. 이 단어가 부정과거 시제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 고린도교인
들의 삶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가 뚜렷했음을 알 수 있다.

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ㅇ그리스도의 증거가...견고케 되어 - '그리스도의 증거'란 바울이 4년 전에 고린도
에 머무르면서 전했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말한다. 그리고 '견고케 되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베바이오데'는 '베바이오오'
의 부정과거 수동태로 앞절의 '풍족하다'와 동일하게 강조되고 있다.

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ㅇ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 '은사'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구원(롬
5:15),일반적인 하나님의 선물(롬11:29), 성령의 특별한 능력(12:4) 등의 의미로 사용
되었다. 여기에서는 전체 문맥을 고려해 볼 때 그리스도의 증거가 고린도 교회에 좋게
받아들여져서 나타난 열매을 의미하는 것 같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믿음, 지식과 같은
내적인 은사뿐 아니라 이적행함과 병고침, 방언과 예언같은 외적인 은사들이 풍성하였
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ㅇ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 '나타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칼립신'은 문자적으로 '뚜껑을 열다', '수건을 벗
긴다'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종말론적인 용어로서 감추었던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의
미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참뜻은 현재에는 비밀에 속한 것인데 종말에는 비로소 완
전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한편 '기다림이라'의 헬라어 '아페크
데코메누스'는 바울이 주로 사용한 단어로 초대 교
회 교인들의 종말론적 삶을 잘 표현해 준다.본절에서 이 단어는 강하고도 진지하게 기
다리며 경성한다는 의미를 지니며 '간절하게 기다리면서'(eagerly waiting for, NIV)
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그들의 간절한 기대는 주님의 종말(終末)에 관한 말
씀(마 24:30,34)에 근거한 것이다.초대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가능하면 그들이 살아 있
을 동안에 주님께서 재림하시기를 바랐다(15:51;살전 1:9,10;약 5:8,9;벧전 4:7;요일
2:18;계 22:20).

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ㅇ주께서...그리스도의 날에 - '주께서'라는 인칭관계대명사 '호스'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정확하지 않다. 7절을 미루어 볼 때 그리스도인 듯 하지만(Origen,
Meyer, Robertson), 9절에서 하나님의 미쁘심을 언급한 것으로 비추어 볼 때 하나님
아버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Calvin, Alford, Bengel, Hodge,
Mare). 만약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날에 견고케 하시리라'고
말하는 격이 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주의 날'이라는 표현은 바울 서신에서 그리스
도의 재림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표현이다.
ㅇ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 '책망할 것이 없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넹클레투스'는 '고소하다', '비난하다'의 '엥칼
레오'와 부정 접두어 '아'의 합성어로 아무도 비방할 수 없을
만큼 흠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Robertson, Plummer).이처럼 흠없는 상태가 될 수 있
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보증하는 자들을 고소할 만한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롬
8:33, Morris). 따라서 본절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일깨워 주고 있다. 한편 '견고케 하시리
라'의 헬라어 '베바이오세이'는 6절의 '견고케 되어'와 같은
동사인데 그곳에서는 교리적인 면을 묘사했다면 본절에서는 실제 생활에 적용되는 실
천적인 면을 묘사한다(Grosheide).

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ㅇ너희를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다 - '미쁘시도다'의 헬라어 '피스토스'
가 원문에는 문두에 나와서 강조적으로 쓰였다. 이 말은 바울이 즐겨 사용
하는 말로써 그의 자신의 근거가 되는 말이고(고전 10:13;살전 5:24), 신약 성경 전체
에 걸쳐 사용되는 중요한 용어 가운데 하나이다(히3:2;10:23;벧전 4:19;요일 1:9;요삼
1:5;계 1:5;3:14). 바울은 본 서신의 첫머리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사도
가 되었다고 밝혔는데 본절에서는 모든 신자들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대상으로 간
주한다. 이 부르심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교제하여 그들을 거룩케 하기 위함이
었다(롬 3:29). 여기서 '교제'(코이노니안)란 연합과 교통을 포함
하는 말로 함께 참여함을 의미하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된다.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ㅇ형제들아 - 바울은 그의 편지의 서론을 마치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자기의 집필
목적에 따라 고린도 교회의 구체적인 문제에 관하여 언급하기 시작한다. 본론에 들어
가는 첫 부분에 나와 있는 반의어 접속사 '데'('그러나',개역성경에는 생략됨)
는 전체적인 흐름을 잘 표현해 준다. 즉 뒤에 나오는 내용이 앞에서 진술했던 내용과
상당히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형제들아'라는 호칭은 바울 서신에서
자주 사용되는 말로 부드럽고 사랑이 가득 담긴 어조이다. 바울은 종종 중요한 사실을
말하려고 할 때 이 칭호를 사용하였다(고전 7:29;14:20, Meyer).
ㅇ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 주님의 칭호(稱號)를 모두 다 사용한 것
은 그의 호소가 얼마나 진지하고 엄숙한지를 보여 준다(Morris).
ㅇ너희를 권하노니 - '권하노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칼로'
는 '격려하다', '권고하다'의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고 좀더 강조해서 '간청하다'
, '탄원하다'의 어조를 띨 수도 있다.이 문맥에서는 후자의 의미로보이며 강한 권면을
하려는 바울의 심정이 엿보인다.
ㅇ다 같은 말을 하고 - '말을 하고'의 헬라어 '레게테'는 현재 능동
태 가정법으로 엄격하고 고전적인 표현이다. '같은 말을 한다'는 표현은 정치적인 공
동체가 분열이나 파당이 생기지 않고 상호간에 우호적인 관계에 있을 때 사용된다
(Lightfoot). 바울이 이처럼 고전적인 헬라어의 분위기를 나타낸 것으로 보아 그가 이
미 헬라 문화권에 친숙하게 젓어 있음을 알 수 있다(Robertson).
ㅇ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 '분쟁'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키스마타'
는 (1)갈라진 틈(LXX 욘 2:6;LXX 사 2:19,21) (2) 옷이 찢어짐(마 9:16) (3) 의
견의 차이로 일어나는 분쟁(요 7:43; 9:16) (4) 몸이 조화를 이루지 못함(고전 12:25)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본절에서는 각기 다른 지도자를 따름으로 인한 분열을 가리킨
다. 즉 같은 교회 내에서 서로 느낌이 달라 당을 짓는 형편을 묘사한다.
ㅇ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 '온전히 합하라'의 헬라어 동사 '카테르
티스메노이'는 어떤 것을 올바른 상태로 회복시킨다는
의미인데, 그물을 수선하거나(마 4:21) 신앙의 부족함을 채운다는 정신적인 의미로도
사용된다(살전 3:10). 본절에서는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의 온전한 통일된 몸을 이루라
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마음과 뜻을 하나로 하는 연합(聯
合)을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사랑으로 이루기를 권하고 있는 것이다.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ㅇ내 형제들아 - 이제부터 바울은 자신이 권면을 하게 된 배경을 제시한다. 10절과는
달리 여기에서는 '내 헝제들'이라고 하는데 이는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자비를
보여준다.
ㅇ글로에의 집 편으로서...내게 들으니 - '글로에의 집'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클로
에스'는 문자적으로 '글로에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정확하
게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수 없다. 다만 글로에는 고린도 교회에 잘 알려진 상업에 종
사하는 여인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을 뿐이다(Hodge).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그녀로부터 직접 들었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그녀의 집에 속한 종들이나
가족 중의 한사람이 바울에게 정보를 제공했을 것이다(Grosheide). 그들은 적어도 그
리스도인들이었을 것이고 고린도 교회의 교인이면서 교회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이다.
ㅇ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 '분쟁'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리데스'
는 10절에서 말한 '분쟁'(스키스마타)의 결과로 의
견이 분분하게 된 상태를 말하며 '말다툼'(quarrels, NEB, NIV)혹은 '논쟁'(contenti-
ons, KJV)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는 고린도 교회가 분열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어도
그들의 견해가 '심각한 차이'(serious differences, JB)를 보이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들은 각기 자기의 의견만 옳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의 관점은 경멸하였다.

12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ㅇ너희가 각각 이르되 - '너희가 각각'의 헬라어 '헤카스토스 휘몬'
은 각자가 자기 입장을 취하였음을 시사하는 말로 분쟁의 문제가 얼마나 넓
게 확산되었는지 알려준다. 그들의 문제는 신학적인 견해 차이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
라 몇몇 지도자들에 대한 지나친 충성심 또는 편파심 때문에 조성된 것이었다. 여기에
서는 그 분파를 넷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그것이 전부였는지 혹은 그 외에도 더 많은
분파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본문에 소개된 네분파의 내용을 살펴보자.
ㅇ바울에게 - 바울에게 속했다고 하는 자들은 주로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한 자들이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기 때문에 이
방인 개종자들이 모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여튼 그들은 바울을 너무 존경한 나머
지 다른 지도자들을 배격(排擊)하면서까지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변호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향한 바르지 못한 충성심을 배격하고 비난했다.
ㅇ아볼로에게 -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학자로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
한 자였고 웅변적인사람(행 18:24-28;딛 3:13)인 것 외에 그를 알 수 있을 만한 자료
는 없다. 다만 고전3:16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라는 말로보아 그가
고린도 교회에서 상당한 역할을 한것으로 보인다. 그의 풍부한 학식으로 인해 지식층
의 사람들이 그를 추종하였을 것이고 그들은 곧 바울을 멀리하고 아볼로를 지도자로
세우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과 아볼로가 대립적이 거나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는 증거는 없다.
ㅇ게바에게 - '게바'(케파스)는 '바위'(rock)라는 의미를 가진 아람어
'게바'의 음역으로 베드로의 아람어식 이름이다. 그가 당시에 고린도에 있
었는지의 여부는 알 길이 없다. 혹자는 이 파를 바울에 대항하는 율법주의 부류로 보
기도 한다(Baur).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분쟁이 신학적인 것이 아니며 단순한 편당심
리에서 발생된 것이므로 이러한 해석은 무리가 있다. 오히려 이 파는 베드로에게 예루
살렘에서 지도를 받은 유대인 신자들이 그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자연스럽게 모여
그를 추종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것은 베드로의 이름을 헬라식으로 부르지
않고 아람어로 부른 사실이 뒷받침해 준다.
ㅇ그리스도에게 - 이 파가 어떤 성격인지 알기가 매우 곤란하다. 혹자는 고린도 교회
내의 가장 보수적인 태도를 지닌 한 분파라고 한다. 그러나 전술했듯이 고린도 교회의
분파문제는 신학적인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것은 설득력이 없다. 추측하건대 이
파는 위의 세파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교훈을 들은 사람들이 중
심이 되어 만든 당파인듯하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이야말로 그리스도에게만 속하였
다고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 역시 불확실하다. 분
명한 것은 그 곳에 당파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그러한 당파를 만든 그 정신을
책망하고 있다.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ㅇ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 ' 나뉘었느뇨'의 헬라어 '메메리스타이'
는 완료시상 형태로 '그리스도께서 이미 나뉘어지셨고 지금도 회중
안에서 계속 나뉘어진 상태로 있느냐'라는 뜻으로 번역이 가능하다. 본절을 혹자는 단
지 문자적으로 '그리스도가 나뉘어졌다'라고 긍정적인 표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Lachmann, Meyer). 그러나 이 문장은 부정적인 대답을 예상하는 수사적 의문문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아무튼 이구절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리
스도께서 나뉘어진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ㅇ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 바울은 인간 지도자를 중심으로 당
쟁을 일삼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값을 무효화(無效化)시키며 그리스도만이 가지
는 구주로서의 권위를 무시하는 결과임을 보여준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아무도 그리스도의 자리에 설수 없다는 것
을 지적한다.
ㅇ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 이질문은 고린도 교인들이 세례의 의미
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여기에서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유일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름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토 오노마'
는 전치사 '에피'(행 2:38)나 '엔'(행 10:48)과 함께 쓰인
용법보다 강한 표현으로 영적인 결합의 상태로 들어감을 가리킨다.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나 삼위일체 하나님과 견준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14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ㅇ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 '그리스보'는
행 18:8에 나타나는 '회당장 그리스보'와 동일한 인물로 보여진다. 그리고 본절의 '가
이오'라는 이름은 행 19:29에 나오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는 다르지만 롬 16:23
에 언급된 모든 고린도 교회를 접대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요삼 1:5, 6
에 나오는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가이오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Robertson). 여하튼 바울은 이 두 사람과 스데바나 집 사람(16절)에게만 예외로 세례
를 베풀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이 아주 중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바울이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맥의 흐름에 비추어 볼때 타당하지 않다(Morris).
바울이 제한적으로 세례를 베푼 이유는 구태여 밝히고 있지 않지만, 바울이 이들에게
만 세례를 베푼 것을 '감사한'것을 보면 고린도 교회에서는 몇몇 당파의 지도자들이
자기 파의 세력를 확장하기 위하여 서로 다투어 가며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들은 세례의 본래 의미를 잃고 세례를 단순히 당파 확장의 도구
로 사용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사명이 세례를 베푸는데 있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
는 데 있었기 때문에 몇몇 소수의 사람에게만 세례를 주었을 것이다. 이 사실이 바
울 자신이 제자를 만들고 있다는 비방을 막을 수 있어서 그는 기뻐하였다.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ㅇ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 본절에서
바울은 자기가 당파적 정신을 가지고 행동하지 않았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만약 그들
이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으면 그들은 '바울파'임을 주장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세례를 몇 사람에게만 베풀었던 것을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로 보아 감사의 제목으로
삼았다(14절). 이렇듯 바울은 성도들을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묶으려는 어떤 시도도 배
제하였고 도리어 그리스도와 구속받은자들 사이에 있게 되는 교제와 연대 의식을 중요
시했다. 결국 본절에서 바울이 자신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갖도록 성도들에게 말했거나
시도했다는 실마리를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
게 하였다(Morris).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ㅇ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 '스데바나'와 그의 가정은 아가
야에서 최초의 열매였다(16:15). 당시 스데바나는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와 함께 에베소
에서 바울과 같이 있었다(16:17). '집'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콘'은
거처(居處) 즉 눈에 보이는 건물을 의미하기도 하지만(눅12:39) 본절에서는 가족이나
식구를 구성하는 개개 사람들을 의미한다. 아마도 이 말에는 그의 혈육 친척들과 종들
까지도 포함된 것 같다(Mare)
ㅇ그 외에는...알지 못하노라 - '그 외에는'의 헬라어 '로이폰'은 '그
밖의 것에 대해서는' 이란 뜻으로 '알지 못하노라'와 연결되어 바울이 언급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은 한사람도 빼놓지 않으려 했음을 시사한다(Robertson).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ㅇ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 바울이 고린도에
서 제한적으로 세례를 배푼 이유는 새로 들어온 고린도 교인들이 겨우 교리 문답을 공
부해야 할 단계 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아볼로(행 19:1)에게 적당한 때에 그리
스도를 증거하는 성례식을 거행하라고 맡겼기 때문일 수도 있다(Mare). 어쨌든 본 구
절에서 바울은 그의 본질적인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고 진술한다(행 26:17, 18).
여기서 '복음을 전케 하려'의 헬라어 '유앙겔리제스다이'
는 현재형으로 사용되어 바울의 복음전하는 행위가 계속적이며 다른 무엇보다 중
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ㅇ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 '말의 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피아 로구'
는 '말의 명석함으로'라고 번역될 수 있다(Mare). 당시 고린도의
어떤 신자들은 인간의 지혜와 달변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였다. 그들은 전형적인 헬
라인으로서 수사학과 철학 연구에 지나칠 정도로 몰두하였다.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여
바울은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가 받은 사명이 아님을 주장한다.
ㅇ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헛되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
노데'는 이름과 형식만 남고 내용은 없어진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무력해지거나 효력없는 상태가 되
지 않게 하려 함이라는 의미이다. 만약 바울이 설교하면서 십자가의 도 대신에 인간의
지혜나 인본적(人本的)인 철학 따위로 대치하였다면 그의 설교는 무력하고 인간의 지
혜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ㅇ십자가의 도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로고스 호 투스타우루'
는 문자적으로 '그 십자가의 말씀'이라는 의미로 앞절에 있
는 '말의 지혜'와 대조를 이룬다. 여기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쟁에 대한 문제는
잠시 제쳐 두고 개심자들이 인간의 말과 지혜에 대해서 지나치게 찬사를 보내는 것이
잘못된 일임을 깨우쳐 주고 있다(Lightfoot). 결국 그가 여기에서 언급한 '십자가의
도'란 십자가에 관하여 전하는 말로서 십자가를 통하여 인류가 구원받는 진리를 의미
한다.
ㅇ멸망하는 자들에게는...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 '멸망하는'의 헬라어 '아폴뤼메
노이스'와 '구원을 얻는'의 헬라어 '소조메노이스'
는 둘 다 현재 분사형으로 쓰여 그 행위에 대한 즉각적인 결과가
계속적으로 일어남을 보여준다.그러므로 이 말은 '멸망하고 있는 자에게'와 '구원얻고
있는 우리에게'라고 번역할수 있다(Morris). 이처럼 바울은 구원을 과거의 사건(롬 8:
25), 현재의 상태(엡 2:5) 및 과정(고전 15:2),미래의 결과(롬 1:9) 등으로 묘사함으
로써 구원이 단편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계속적인 과정임을 설명하고 있다.
본절에서는 구원을 멸망과 대조하여 구원얻은 자들이 복음에 대해 보이는 반응이 하나
님께로부터 유래한 것임을 보여준다.
ㅇ하나님의 능력이라 - 본 구절은 롬 1:16과 동일한 표현으로 '십자가의 도'에는 하
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앞의 '미련한 것'과 대조시켜 강조한다(고전 4:20). '능력'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나미스'는 신체적, 영적, 지적 능력을 포함한
총체적 능력을 가리키며, 헬라 세계에서는 우주의 원리로서의 생명력을 의미하였다
(TDNT). 신약성경에서는 '뒤나미스'가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사용되며, 본절
에서는 인간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초월적인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다.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ㅇ기록된바...폐하리라 하였으니 - 바울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방법으로 인간의 지혜
를 채택하지 않고 버리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 29:14(LXX)을 인용하고 있다.
다만 70인역에서 '가리워지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립소'가 본절에
서는 '폐하리라'의 헬라어 '아데테소'로 대치되고 있다. 이사야서의
문맥을 살펴보면 인간이 입술로만 경배하고 마음은 멀리 떠났으므로(사 20:13) 인간의
지혜와 총명이 가리워진다고 되어 있다. 바울은 이 사상을 자신의 논쟁에 적용시킴으
로써 독특한 방법으로 자신의 논리를 펴나가고 있다. 본문에서 '지혜'와 '총명'은 차
이가 별로 없으나, 의미상 전자는 뛰어난 마음 상태를 뜻하며 후자는 어떤 일들을 분
별할 수 있는 지적 판단력을 의미한다(Morris). 이것들은 인간이 발휘할수 있는 독특
한 능력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없애버린다는 사실을 예로 들어 인간의 지혜가
상대적이고 의존적(依存的)이며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한다.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ㅇ지혜있는 자가...선비가...변사가 어디있느뇨 - 인간의 지혜가 갖는 한계를 명확히
제시한 후, 본절에서는 그렇다면 십자가의 도를 파악할 수 있는 '지혜 있는 자'가 어
디 있느냐고 질문한다. 여기서 '지혜 있는 자'란 바울이 헬라인을 염두에 두고 한 말
이다(22절). '선비'의 헬라어 '그람마튜스'는 '서기관'을 가
리키기도 하지만(막 23:2;눅 20:39;행 19:35), 율법에 능통하여 '율법을 가르치는 자'
(teacher of the law, NIV)를 지칭하기도 했다.이 용어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
기가 적절한 단어였다. 또한 '변사'의 헬라어 '쉬제테테스'
는 무슨 문제든지 인간의 이성으로 해결하려 드는 사람을 가리키며 본절에서는 지적
인 노력으로 구원을 획득하려는 유대인과 헬라인을 동시에 지칭한다(Mare). 이러한 용
어들을 번갈아가며 사용한 것은 당시 고린도 교회가 헬라인들과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헬라적 개념과 유대적 개념을 같이 사용해야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ㅇ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 '세상의'의 헬라어 '코스
무'는 앞 구절의 '세대'(아이오노스)와 동의어로 원래
질서 정연한 배열을 의미하다가 나중에는 비기독교적인 세계를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
되었다(Robertson). 또한 '아니뇨'(우키)는 '우'('아니')의 강조형
으로 본절에서는 의문문 초두(初頭)에 사용되어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수사적 의
문문이 되었다. 바울이 여기에서 염두에 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다. 즉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써 그를 믿는 모든자에게 구원을 주신 그리스도의 사역은 세상의 지
혜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ㅇ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
이 구절은 해석이 난해하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테
소피아 투 데우'는 '하나님의 지혜로' 혹은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등으로 직역할 수 있는데, 그 의미는 (1) '하나님의 섭리가운
데서' (2) '하나님의 지혜의 드러남 가운데서'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의 해석을 따
르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 곧 하나님의 지혜
라는 의미이다(Alford, Lightfoot). 또한 (2)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혜를 세
상에 나타내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셨으나(롬 1:20) 세상이 알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Chrysostom, Meyer). 이 가운데 (2)의 견해가 더욱 타당한 데, 이 견해를 따라 해석
하면 사람이 비록 창조와 섭리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에 둘러싸여 있을지라도 하나님
이 구원하시는 지식을 얻는데는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
(啓示)는 분명하지만, 인간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함
을 강조하고 있다. 즉 인간은 빛 가운데서도 눈이 먼 상태로 있고 자신의 지식 안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것이다(롬 1:28).
ㅇ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 '전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뤼그마토스'
는 선포하는 행위뿐만 아니라 선포하는 내용도 가리킨다. 본절
에서는 전하는 행동 자체보다는 그 내용에 중점을 두고 있다. 바울이 전한복음의 내용
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었던 바(롬 16:25) 바울은 이러한 복음 전파가 '미
련한 것'이라고 규정함으로써 기독교의 전도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음을 가르친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ㅇ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 '표적'은 구체적으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이한 현상을
의미하는데 유대인들은 종종 예수께 찾아와 표적을 구하였다(마 12:38;16:1;막 8:11,
12;요 6:30). 그들은 항상 증거를 요구했고 현상적인 것에 관심이 있어서 하나님을 생
각할때에도 역사 속에 표적과 큰 능력과 기사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분으로 여겼다. 그
러므로 십자가에 못박혀 저주 아래 있게 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ㅇ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 헬라인들은 이성적인 증거를 요구하였다. 그들은 이성적
으로 이해할 수 없는것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가장 큰 이상(理想)은 지혜 곧
철학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가 때로는 무의미한 궤변에 빠지기도 했음에도 불구
하고(행 7:21) 지적 요구에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들을 무시했기 때문에 복음이 들어
갈 자리가 없었다.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ㅇ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 본 구절은 앞 구절과 날카로운 대조
를 이룬다(Robertson). 헬라어 본문에 있는 '데'('그러나')는 본절이 앞 구절과
대조를 보이고 있음을 나타내고, 주격 대명사 '헤메이스'('우리')가
사용되어 행위의 주체자를 강조하고 있다. '십자가에 못박힌'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
스타우로메논'은 완료 수동태 분사형으로 그리스도께서
단 한번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가리키고 지금도 그 대속적인 효과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ㅇ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란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순이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란 조국을 구하고 이스라엘을 회
복하여 존재케 할 영광스런 왕이라고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메시야가 행악자
취급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최악의 모욕(侮辱)
이었다. 따라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걸림돌만 될 뿐이다(롬 9:33;
벧전 2:8).
ㅇ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 당시의 이방인들을 대표하는 헬라인들과 로마인
들은 십자가의 형벌을 가장 비천한 죄인들이나 받는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십자가
와 구세주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여겼다. 또한 헬라인들의 관점에 비추어 보면 하나
님이 육신을 입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고 그렇게 된다 해도 육신의 한계로 인해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본 구절을 통해 모든 인류가 빠짐없이 십
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거부했음을 말하고 있다.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ㅇ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원어 '클레토이스'
는 단순히 외형적으로만 초청을 받은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 효
과적으로 적용된 사람들을 가리킨다(Hodge). 여기서 바울은 '부르심'의 사상을 강조한
다. 자연인으로 있을 때는 누구나 십자가의 진리를 받아 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절대
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은 이진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게
되며 십자가가 곧 하나님의 능력임을 이해한다(Morris).다시 말해 부르심을 입은 자들
은 유대인과 헬라인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능력과 지혜를 헛된 것으로 돌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발견케 되는 것이다.

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ㅇ하나님의 미련한것이...사람보다 강하니라 - 인간이 교만하여 십자가에 담긴 하나
님의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일축했지만 도리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났다.
비록 십자가가 인간의 눈으로는 하나님의 패배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능력이 된 것이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ㅇ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 바울은 앞에서 논술한 내용을 바탕으로 고린도
교회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려 한다. '부르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레신'
은 하나님의 주체적이고 동적인 모습이 강조된 말로서 (롬 11:29;엡 1:18) 고린도 교
회의 부르심이 하나님으로 부터 왔음을 시사한다. 한편 '보라'의 헬라어 '블레페테'
는 문법상 직설법으로 볼 수도 있지만 본절에서는 명령형으로 보는 것
이 좋을 듯하다(Morris, Alford, Meyer).
ㅇ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능한 자가...문벌 좋은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 '육체
를 따라'의 헬라어 '카타 사르카'는 '육체를 표준으로 삼아'라
고 해석되는데, 대개 '육체'는 인성(人性)을 뜻하므로, 세속적인 관점으로 분별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 문구는 '지혜있는 자', '능한 자', '문벌 좋은 자'에 모두 적용된다.
'지혜 있는 자'(소포이)는 헬라의 철학자들처럼 높은 교육을 받은 지적인
사람들을 가리키고 '능한 자'(뒤나토이)는 정치적인 권력을 가진 자
를 의미하며, '문벌 좋은자'(유게네이스)는 사회적으로 상류 계급
에 속한 사람들을 지칭한다. 바울은 이 세 용어를 사용해서 지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유력한 사람들이 많
지 않다는 것은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 대부분이 상류 계급에 속하지 않았음을 보여주
고, 하나님의 부르심이 이러한 외적인 조건에 근거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ㅇ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 '택하사'의 헬라어 '엑셀렉사
토'는 '뽑아내다', '선택하다'라는 뜻의 '에클레고'
의 부정과거 중간태형으로 혼자서 스스로 선택한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이 28절
까지 반복적으로 제시되어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선택하셨다는 것을 강
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어리석고 약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선택하신 사실
은 외적인 조건들이 일시적이며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주며 구원과는 무관하다는 것
을 시사한다.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ㅇ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 '천한 것
들'의 헬라어 '아게네'와 '멸시받는 것들'의 헬라어 '엑수데네메나'
는 낮은 계급에 처한 사람들을 일컫는 용어로 사회적 신분
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선택이 적용됨을 강조한다. 이러한 표현은 당시 고린도에 노예
들이 많았기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이 처한 특별한 상황에 적합한 것이었다. 또한 바울
은 '없는 것들'(타 메 온타,the things that are not)이라는 표현
을 통해 사회적으로 전혀 가치가 없고 필요가 없는 자들까지도 선택의 대상임을 명백
히 보여준다.
ㅇ있는 것들을 폐하려 - '있는 것들'의 헬라어 '타 온타'는 세상에서
중요한 사람처럼 보이는자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리 유력
한 자일지라도 자신의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심'과 '폐하심'의 주체자로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이 대조법을 통
해 다시한번 인간의 지혜와 능력과 신분은 구원을 얻기위해 아무런 효력이 없음을 말
하고 있다(Mare).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ㅇ이는 아무 육체라도 - '아무 육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사 사륵스'
는 문자적으로 '모든 육체'를 가리키며 비유적으로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ㅇ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 '하나님께로 부터'에 해당
하는 헬라어 '엑스 아우투'에서 전치사 '엑스'는 하나님이 그의 백
성을 '그리스도 안에'있게 하시는 궁극적인 동인(動因)이 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헬라어 원문에 나와있는 반의적인 접속사 '데'('그러나')와 강조형 주
격 대명사 '너희'(휘메이스)는 본절이 앞절과 강한 대조를 이름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라는 말은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와 개인적
으로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음을 묘사한다.
ㅇ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 '하나님께로서 나와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 데
우'('하나님께로 부터')는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출처가 하나님이
심을 지시한다.
ㅇ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 바울은 그의 편지를 읽을
독자들에게 자신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신비로운 연합을 이
루었음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본절 초두에 언급한 바 있는 '너희'를 '우리에게'
(헤민)라고 바꿔 쓰고 있다. 본절에서 '지혜'라는 개념과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의 개념이 별개의 개념으로 이해될 수도 있으나 오히려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
속함'이 지혜를 설명하는 말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속죄
(贖罪)를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지혜가 '의, 거룩, 구속'의 개념으로 표현되는 것
이다(Alford, Mare, Morris, Meyer). 위에서 '의로움'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에
해당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의롭다함'을 입은 것, 곧 '칭의'
를 의미한다. 그리고 '거룩함'이란 그리스도와의 영적 고제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소
유가 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제 그리스도의 자녀가 된 자들은 부정과 불법에서 벗어
나 의의 종이 되는 것이다(롬 6:19). 마지막으로 '구속함'이란 적당한 값을 지불하고
노예를 자유롭게 한다는 뜻에서 전용(轉用)된 말로(출 21:8),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
수그리스도의 피를 대가로 인간을 죄의 속박에서 풀어놓으셨다는 뜻이다(엡 1:7;골 1:
14;히 9:15).

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ㅇ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나라 - 바울은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 렘 9:24을 인용함으로써 구약의 권위를 빌어 강하게 호소하고
있다. 우리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을 얻게 되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고 하나
님의 선하심에서 유래한다. 모든 선(善)은 하나님께만 있고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한 분만을 자랑해야 한다. 결국 바울은 고린도 교
인들이 구속받은 백성임을 인식시킨 후 그의 백성에 합당하게 주님의 영역 안에서 자
랑할것을 권고하는 것으로 결론짓는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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