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사도행전

[스크랩] 사도행전 (28 : 1~31)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0:36
 사도행전 28장


1 우리가 구원을 얻은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ㅇ안즉...멜리데라 하더라 -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육지에 상륙하고 난 후에야 그
곳이 멜리데라는 섬인 것을 알았다. 멜리데는 오늘날의 말타(Malta)
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 섬은 시실리 남쪽 약 98Km, 아프리카 북동쪽 약
320Km 지점에 위치한 섬으로, 전체 길이가 약 29Km 되고 너비가 15Km 정도 되는작은
섬이다. B.C. 1000년경 페니키아인들은 이섬에 이주하여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나
B.C. 218년 로마가 제 2차 카르타고 전쟁 초기에 이곳을점령하여 다스려 왔다. 아우
구스투스는 이 섬을 관할(管轄)하는 행정관을 세웠는데, 그 명칭은 '멜리데의 자치에
있어서 모든 일을 관할하는 우두머리'라는 뜻의 '멜리테시움 프리무스 옴니움
'(Melitesium Primus Omnium)이었다. 뿐만아니라 그는 이 섬에 많은 수의 퇴역 군
인과 그들의 가족들을 이주시켰기 때문에 이 섬은 상당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한
편 '멜리데'의 위치에 대해서 현재의 말타(Malta)라고 보는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들은 '멜리데'가 달마티아(Dalmatia) 해안 앞에 있는 '멜레다
'(Meleda)라고 이해한다(Bryent, Papulus). 그러나 '멜레다'(Meleda)가 멜리데
(Malta)의 북동쪽에 위치한 아드리아 해(Adriatic Sea)의 북동쪽 달마티아 해안에 있
다는 것은 다음 기항지가 '수라구사'라는 것(12절)과 조화를 이루지못한다. 왜냐하면
수라구사는 멜리데(Malta)바로 위에 있는 시실리 섬의 항구 도시이기 때문이다. 결국
후자의 견해는 '아드리아의 바다'(the sea of Adria, 27 : 27)fmf '아드리아 해'(the
Adriatic sea)로 오해한 데 기인한 것일 뿐 정당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아무튼 이
렇게 해서 바울의 예언은 성취되었음이 확인되었다(27 : 26, F.F. Bruce).

2 토인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비가 오고 날이 차매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ㅇ토인들이...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 '토인들' 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이 바르바로이'는 의성어로 멜리데 섬의 토착민들이
사용하는 페니키아어가 '바르'(Bar)- '바르'(Bar)로 들렸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
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단어에서 영어의 '야만인'(Barbarian)이 파생되었기 때문에,
문명화되지 못한 미개인을 나타내는 것으로 오해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 용법상 야만인이라는 뜻이 아니다. 헬라인들이 그 말을 쓸 때 의미하는 바는 헬라
민족이 아닌 '타민족'을 가리킨다(롬 1 : 14). 이러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NIV에
서는 '섬 사람들'(islanders)로, RSV에서는 '원주민들'(natives)로 번역하고 있음
을 볼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 섬에 사는사람들은 배에서 내린 바울 일행에게 적
대 행위를하지 않고 동정을 베풀어 불을 피워준 뒤 추위에 지친 몸을 녹이도록 배려
(配慮)해 주었다. 더구나 그들이 베풀어준 친절은 일상적인 것이 아닌 특별한 친절
이었다. 본문이 보여주는 사건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다(27 : 24,25).
여기서 '우리'가 뜻하는 것이 276명 전체를 가리키는지(27 :37) 아니면 바울과 함께
한 기독교인의 소그룹을 뜻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276명 전체가 하나의 불을 피워 놓
고 둘러앉아 몸을 녹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Haenchen). 그리고 이야기의 초점이 바울에게 모아져야 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적당한 규모로 무리를 지어 불을 지폈을 것이다(Richard N.
Longenecker).

3 바울이 한뭇 나무를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을 인하여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ㅇ독사가...손을 물고 있는지라 - 계속해서 불을 피우려면  많은 나무가 필요했으
므로 사람들은 불을 쬐는 틈틈이 마른 나무를 주워 모아야 했을 것이다. 바울은 죄
수 신분이기 매문에도 그렇지만 그의 성실한 생활 태도 때문에도 열심히 마른 나무들
을 주워다 넣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마른 나믓가지를 한아름 주워다 불에 넣고
옆에 앉아 불을 쬐려니까 그 나무 속에있던 독사 한 마리가 뜨거움을 참지 못하고 뛰
어나와 바울의 손가락을 무는 사건이 발생했다. 여기서 '독사'
(에키드나)는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들에게 사용한 단어이며(마 3: 7 ; 눅 3 :7), 예수
께서도 사용한 바 있는 말이다(마 12 :34 ;23 :33). 그런데 혹자는 오늘날  멜리
데 섬에 독사가 없다는 조사 결과와(Preuschen), 바울이 물렸으나 아무런 문제가 발생
하지않은 것에 비추어(5, 6절), 바울의 손에 달린 뱀이 독이 없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Loisy). 그러나 원주민들이 독사와 독이 없는 뱀을 구분하지 못했을 리
없고 의사인 누가가 그런 정도의 구별을 못했을 리 없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그 섬
에 독사가 없다고 해서 오랜 과거에도 없었다고 단정하기 힘들다. 따라서 독사가 아
닐 것이라는 견해는 타당하다고 할 수 없다. 문명이 발달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생
태계에 변화가 일어나고 그 결과 상당수의 생물이 멸종하거나 도태되어 버리는 것이
일반적인 자연 현상이고 보면, 이곳 멜리테 섬의 독사도 이렇게 도태되어 없어진 경우
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Ramsay).

4 토인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달림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 하더니

ㅇ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 - 원주민들은 틀림
없이 바울이 독사에게 물린것을 확인했고 따라서 그가 죽는 것은 자명한 사실로 여겼
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이 바다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왔으나 끝내 독사에게 물려 죽
게 되는 것은 필경 그가 살인자이기 때문이라고 여긴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공의'
(헤 디케)가 끝까지 응보한 것이라고 여겼다. '디케'라는 표현은 원
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인과 응보적 정의의 신개념을 나타내는 것인데 누가가 헬라적
배경에서 정의의 신을 일컫는 이름인 디케(Dike)를 사용하여 표현한 듯하다(Lenski).
그러나 정확하게 무엇을 가르키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아마도 멜리데 섬의 토속 신앙
의 대상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濟藤篤美)

5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ㅇ바울이...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 바울은 당황하지 않고 태연히 손을 흔들어 뱀
을 불속에 떨어버렸다. 바울은 독사에게 물렸고, 원주민들은 바울이 죽을 것으로 기
대했지만, 바울에게는 이상한 일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이것은 막 26 : 18의 약속이
'성취된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본절에서 '짐승' 으로 표현된 '데리온'은 위험한
짐승 특히 뱀을 가리킬때 사용된 말로 입증되었다(Bauer, Worterb).

6 그가 붓든지 혹 갑자기 엎드러져 죽을 줄로 저희가 기다렸더니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려 생각하여 말하되 신이라 하더라

ㅇ그가 붓든지...신이라 하더라 - 바울이 뱀에 물렸으므로 당연히 그의 손이 부어오
르고 조금 있다가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 했는데 그들이 기대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았
다. 이런 현상은 그 원주민들에게는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다. 원주민들은 달리 해명
할 길이 없게 되자 바울더러 신(神)이라고 칭하였다. 신의 심판을 받은 자임에 틀림
없다고 단정했던 그들이 이제는 정반대로 바울을 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멜리데
섬의 원주민들은 루스드라에서(14 : 11-18)와는 달리 바울을 신으로 경배하려 하거나
당연히 신에게 취해야 할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아마 그들의 말은 바울이 '신의
사랑을 받은 자'라는 의미였을것이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 뱀에 물렸으나 기적적으
로 생명을 잃지 않은 클레오메네스(Cleomenes)에 대해 '신이 사랑하는 자'
(데오필레스) 라고 묘사한 풀루타크의 기록이 있다. 그래서인지 바울은 그들의 생
각에 대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바울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이고 그분의 은총
을 입고 있다는것을 모르는 원주민들로서는 그 이상 달리 생각할수는 없었을 것이다
(Haenchen).

7 이 섬에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유숙하게 하더니

ㅇ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 - '제일 높은 사람' 이 이 섬의 토착민 추장을 가리키
는지, 아니면 이 섬의 최고 행정 책임자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으나 '영수' (領袖)
를 뜻하는 '프로토스'가 로마에서 파견한 최고 행정관을 가리키
는 것으로 사용된 용례가 있음을 감안할 때(CorpusInscripionum Latinarum
10.7465),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잇다. 그의 이름 '보블리오'
(포플리오스)는 라틴계 이름으로 보이며 '푸블리우스'(Publius)나 '포
필리우스'(Popilius)를 그렇게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Ramsay, Haenchen, Bruce). 는
누가가 이 사람의 이름만을 기술한 것에서, 석달 동안 바울 일행이 그곳에 머물면서
바울, 누가 그리고 보블리오 사이에 친밀한 관계가 형성 되었음을 추측하기도 한다
(Zahn). 아무튼 이 사람은 바울 일행을 자기집에 영접하여 사흘간 친절한 대답을 하
였다. 아마 이 사람은 꽤 많은 토지를 소유하여 소작인들을 거느닐 만큼 여유가 있었
을 것이다.

8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웠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ㅇ열병과 이질 - 여기서 복수형 '푸레토이스'로 묘사된 열
병은 멜리데와 지브랄타의 지중해 해역에 오랫동안 널리 퍼져있던 말라리아와 같은 것
이다. 이 열병에 걸리면 그 고통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데 보통 4개월이상 고통을
당하였고 긴 경우에는 2-4년간 지속되기도 했으며 심하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이 병이 멜리데의 염소 젖을 먹고 발병한다는 것과 그 병원체가 미생물 '마이크로코쿠
스 멜리텐시스' (Micrococcus melitensis)라는 것이 의학적으로 규명된 것은 1887년
의 일이었다. 그리고 '뒤센테리오'으로 표현된 보블리
오의 부친이 앓고 있는 또다른 질병 '이질'은 곱똥이 나오고 뒤가 잦은 질병을 가리
킨다. 의사인 누가는 보블리오의 부친이 앓고 있는 질병을 정확하게 진단하였으나
병을 고치는것은 오직 바울의 기도와 안수의 결과였다. 바울이 병을 고치기 위하여
기도를 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의미도 있지만 자기를 알리는 의미도 있다고
본다.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병을 고침으로써 자신이 증거하는 복
음과 하나님께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는 기회로 삼고 있는 것이다(R. N. Longenecker).

9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ㅇ병든 사람들이...고침을 받고 - 보블리오의 부친을 고친 소문은 멜리데 섬 전체
에 금방퍼져 나갔고 그리하여 다른 병자들도 바울에게 몰려들어 병고침받기를 원했다.
본문의 '고침을받고'의 헬라어 표현 '데라퓨오'는 의학적 술
어이다. 이에 대해서 람세이(Ramsay)는 누가가 의사로서 치료를 했을 경우 '데라퓨
오'가 사용되고 바울이 안수하여 치유한 경우에는  '이아오마이'가
사용된다고 구분하며 더 나아가 하르낙(Harnack)은 본문의 병자들이 누가의 치료를 받
았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의학적인 치료와 기적적인 치유가 단어의 사용에 의해 드
러난다고 하는 람세이(Ramsay)의 분석은  일리는 있지만 보편성을 갖지는 못한다. 왜
냐하면 예수의 치유 행위에 대해서는 위의 두가지 동사가 모두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
다(눅6 :18 참조). 물론 본문에 나오는 치유에 대해서 의사인 누가가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려울것이다. 구태여 바울의 힘을 빌지 않더라도 누가가 가볍게 치
유할 수 있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하게 확인되어야 하는것은, 치유의
주체가 바울이라는 것이며 '치유를받았다' (에데라
퓨온토)는 의학적 표현은 바울의 이적적인 치유가 의학적으로 완치(完治) 판정을 받은
것임을 밝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0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올리더라

ㅇ후한 예로...대접하고 - 바울 일행과 섬 사람들 사이에 매우 아름다운 사랑의 행
위들이 있음을 보게 된다. 본문의 '후한 예'에 해당하는 헬라어 '티메'
는 의사의 치료에 대한 정당한 대가로서 사례금을 지급하는 의미로 볼 수도 있으나
(Bauer, Worterb), 그렇게 보는 것보다는 고마운 행동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표
현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Haenchen). 섬 사람들은 바울 일행이 머물때 뿐만
아니라 떠날 때에도 항해에 필요한 물품들을 제공해 주었다. 아마 식량과 의복 같은
필수품들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바울 한 사람에 의해 그와 함께 있던 275
명의 사람들도 겨울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시
고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해 주는 것이었다(27 : 24).

11 석달 후에 그 섬에서 과동한 알렉산드리아 배를 우리가 타고 떠나니 그 배 기호는
디오스구로라

ㅇ석 달 후에 - 당시에는 선박들이 겨울 철 3개월 동안 항해를 중단하는게 일반적
인 통례였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로마를 출발하여 가이사랴로 가는 사절들이
겨울철 항해중지 기간으로 인해 3개월간 중간에 머물러야했다(Josephus). 항해가
재개되는 시기에 대해서는 2월 8일에 서풍이 불면서 시작되었다는 기록(Pliny the
Elder, Natural History)과 3월 10일까지는 항해가 불가능했다는 기록이
(Vegetius, on Military Affairs iv. 39) 있다. 그런데 후자의 기록은 근
해 항해가 아니라 먼 바다의 항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Bruce),
따라서 전자의 기록에 의거해 볼 때 바
울 일행이 탄 배가 태풍을 만나 파선당한 것은 11월 초순경이었을 것이다.
ㅇ알랙산드리아 배...디오스구로. -  바울 일행은 마침 그곳 멜리데 섬에서 겨울을
지낸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날 수 있었다. 아마 그 배는 멜리데 섬의 '발레타
'(Valletta) 항구에서 겨울을 지냈을 것이다. 여기서의 '우리'가 276명 전체를 가
리키는지 아니면 백부장과 그의 부하 군인들과 죄수들 그리고 바울과 누가, 아리스다
고를 포함하는 그룹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 배도 곡물 수송선이었다면 후자일 가능
성이 있다. 누가는 이배의 이름을 '디오스구로' 라고
밝히고 있다. '디오스구로'는 제우스(Zeus)와 레다(Leda)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
이 아들 '카스토르'(Castor)와 '폴룩스'(Pollux)를 가리킨다. 이들 쌍동이 별자리
'제미니'(Gemini)는 폭풍 가운데서도 안전하게 해주는 항해의 수호자로 여겨졌다. 아
마 이 배의 앞 머리 양편에는 이 쌍동이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그 아래 '디오스구로
'라는 명칭이 씌어 있었을 것이다(Longenecker).

12 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ㅇ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 이 도시는 시실과 섬의 수도로 섬의 동해안 남
쪽에 있는 중요한 항구이다. 멜리데로부터 약 150K 떨어져 있고 성의 둘레가 35Km 되
는 번창한 도시였다. 이 도시는 유명한 수학자 아르키메테스(Archimedes)의 고향으
로도 유명하다.  B.C. 734년 고린도인들이 식민지로 건설하였고, B. C. 212년 이후로
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그런데 이 배가 왜 이곳 수라구사에서 사흘간 머물렀는지
는알 수가 없다. 이에 대해서는 (1) 멜리데에서 불어오던 남풍이 멈추었기 때문이
라는 견해와(Bruce) (2) 심한 역풍(逆風)을 만났거나 짐을 내리고 새 짐을 싣고 가기
위해서였다(Haenchen)는 견해가 있는데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13 거기서 둘러가서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난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러

ㅇ레기온 - 이는 오늘날의 '레기오 디카라브리아' (Reggio di Calabria)를 가리는
데 메시나(Messina) 해협의 이탈리아 반도 남쪽에있는 항구이다. 지리적 위치상 중요
한 항구로 여겨졌으나 현재는 폐항이 되었다. 이곳에서는 남풍이 불기를 기다리며 하
루를 묵었다.
ㅇ남풍이 일어나므로...보디울에 이르러 - 바로 다음날 남풍이 불어 주었기 때문에
더이상 지체하지 않아도 되었다. 레기온에서 340Km 떨어진 보디올까지 이틀만에 도
달할 수 있었다. '보디울'(Puteoil)은 '작은 샘' 이라는 뜻을 가지며 오늘날은 포주
올리(Pozzuoli)라고 부른다. 보디올은 나폴리 만에 위치한 네압볼리(Neapolis)의 외
항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수송해온 곡물들은 이곳에서 내려져 내륙으로 운반되었다.
보디올에 도착함으로써 바울은 긴 해상 여행을 끝내고 로마를 목전에 두게 되었다.
이제 로마까지는 불과 220Km 밖에 안 남았고 그 정도의 거리는 건강한 장정이 아피오
도로를 통해 걸어서 오 일이면 갈 수 있었다(Zahn).

14 거기서 형제를 만나 저희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유하다가 로마로 가니라

ㅇ믿는 사람...믿지 아니하는 사람 -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행한 바울의 증언은 노
력에 비해 충분한 것은 아니었지만 몇 사람의  믿는 사람을 얻었다. 대체로 학자들은
이때 믿는 사람보다 믿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았을 것이라고 본다(26, 27장). 유대인
동족(同族)에게 복음 증거하여 믿음을 갖게 하려는 바울의 노력이 극히 부분적으로만
성공을 거두었던 경우는 본서에 여러 차례 기록된 바이며(14 :4 ;17 : 4 ;19 :9)
그것에 대해서 바울은 실망하거나 좌절하지도 않았고 동족을 포기하지도 않았다(롬
9-11장)

15 거기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저자와 삼관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저희를 보고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ㅇ압비오 저자 - 이는 압비우스 광장(Forum of Appius)을 가리키며 로마로 부터
65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압비아 대로상에 있다. 이 대로는 B.C. 312년 로마의 감찰
관 압비우스 글라우디오(Appius Claudius)가 이 도로의 건설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도로는 로마로 향하는 길 가운데 가
장 오래되고 완벽한 도로의 하나로 로마의 장군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의 입성을
할때, 군중들이 열열한 환영을 하며 맞이하던 길이었다.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으
로 그 길을 걷고 있지만 사실상 그 길은 복음으로 로마를 정복하기위한 영광의 길이었
다.
ㅇ삼관 - 이 지명은 '트리온타베르논'을 의역
한것으로 삼관(三館) 즉 '세 개의 숙소'(Tres Tabernae)라는 뜻이다. 이곳은 로마
로부터 50Km정도 떨어져 있다. 그러니까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두 곳에서 바울을 맞
기 위해 기다려고 있었던것이다.
ㅇ맞으러 오니...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 바울과 로마 교인들과의 만남
은 매우 감격적인 것이었다. 바울로서도 일찍이 와보려고 했었고(19: 21), 또한 주
님께서도 그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소명과 약속을 주신 일이있던(23:
11;27:24) 로마에 오게 되었으니 그 기쁨과 감사가 말할 수 없었을 것이고 또한 이곳
로마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어서 그를 환영해주었으니 마음이 든든했을 것이다.
본문의 '맞으러'는 '아판테신'으로 어떤 도시의 대표단이
나, 왕이나 장군을 맞이할 때 쓰는 단어임을 생각할때 로마의 성도들이 바울을 하나님
의 위대한 사도로서 얼마나 뜨겁게 환영했는지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이 담대
한 마음을 얻었다는 것은 그가 성도들을 만나기 전에는 절망을 하거나 두려움을 가지
고 있었다는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음으로 해서 낯선 곳에 대한
어색함이 없어지고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이 생겼다는 의미일 것이다
(Bruce).

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ㅇ로마에 들어가니 - 드디어 바울이 로마애 당도했다. 오래된 서방 사본에는 "백
부장이 죄수들을 시위 대장에게 넘겨주었"다는 문구가 첨가되어 있다. 바울이 가이
사에게 항소를 하였으므로(25 : 11) 황제 휘하의 부대 책임자에게 넘겨지는 것은 당연
한 일이라 할 수 있다.
ㅇ바울은...한 군사와 함께 따로 - 누가는 중간 과정에 대한 자세한 언급 없이 바
울이 한 군사에 의해 따로 감시를 받게 되었다는 결과 만을 언급하고 있다. 몸센
(Mommsen)에 의하면 군인에 의해 따로 감시받게 를 것은 감옥에  감금시키는 것보다
가벼운 형벌이었다. 아마 거기에는 베스도의 긍정적인 조서(25: 25; 26: 32), 그리고
호송 책임자였던 율리오가 바울에 대해 경험한 대로 작성한 긍정적인 보고서 등이 작
용했을 것이다. 로마법에 의해 군인의 한 손과 바울의 한 손이 사슬에 묶인 상태였는
지 아니면 자유롭게 활동수 있도록 허락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사람들을 초청하여
대화를 가질 수 있을 만큼 자유가 허용된 것은 사실이다(17-23절).

17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규모를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준바 되었으니

ㅇ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사람들을 청하여 - 바울이 로마에 도착 하여 제일 먼저 한
일은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 중 지도자급 되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이야기를 하는 것
이었다. 당시에는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하나의 통합(統合)된 공동체 기구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고 보며, 따라서 바울이 초청한 이들은 개별적 공동체들의 장로,
지도자, 회당장과 같은 사람들이었다고 본다(Wendt). 유대인들이 로마에 거주하기
시작한것은 마카비 시대(B.C. 166-63)부터 였고, B.C.63년 에는 폼페이가 유대의 독립
운동을 진압한 후 많은 유대인을 포로로 잡아오기도 했기 때문에 로마에는 제법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실례로 B.C. 6년 유대인들이 헤롯 아켈라오의 폭정을 로마
에 고소하기 위하여 50명의 대표를 파견 하였을 때 그곳에 거주하던 유대인이 무려
8,000명이나 동조하였다는 기록이있다(Josephus. Anitp. xii. 1 ). 바울이 유대인
지도자들을 자기의 숙소에 초청한 것은, 그가 죄수의 신분으로서 활동 공간이 한정되
어 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었고, 그들을 초청한 목적은 대략 다음의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1) 자신을 변호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바울은 그들이 자신에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로부터는 자기에 대해 어떤 소식을
전해들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야 거기에 적절히
대응하면서 자신을 변호할 수 었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바울에 대해 부정적인
소문을 듣고 그것을 사실로 판단하여 황실(皇室)에 뇌물을 주면서 부정적인 내용의
고소를 한다면 바울로서는 여간 괴로운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2) 바울은 자신
을 변호하는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기회로 삼고자 했다(23절).
바울 자신로서는 개인의 일신상의 안전을 염려하는 것보다는 무엇보다도 복음을 중거
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 전파는 가장중요한 목적이었
다.
ㅇ형제들아...배척한 일이 없는데 - 바울은 정중한 태도로 자신이 로마에 재판을
받기 위해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먼저 그는 자기가 동족인 유대인을 거스리
거나 유대의 관습을 반대한 일이 없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오해의 여지를 없게 하였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기에게 허위의 누명을 씌워 사형(死刑)을 가하려 했으나 로마 군
사들이 구해준 일(21: 32, 33)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다만 무죄하게 로마인의
손에 넘겨졌다고만 진술함으로써 가능한 한 반유대 감정을 배제하고 있다.

18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놓으려 하였으나

ㅇ로마인은...놓으려 하였으나 - 로마인이라 함은 천부장 루시아의 총독 벧릭스 및
베스도를 가리키며 그들은 모두 바울의 무죄를 알고 있었다(23 : 29; 24: 22-26). 그
러나 이들이 바울을 석방하고자 했다는 것은 다소 과장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의 무죄를 알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적극적으
로 바울을 놓아주고자 한 일이 없고 베스도 같은 경우에는 도리어 바울을 유대인들에
게 내어주려고 했기 때문이다(25 : 9). 그렇다고 해서 바울의 진술이 결코 허위는
아니다. 다만 바울이 말하려 했던 것은, 자기가 지금 재판을 받기위해 로마에 이송
되어 온 것이 궁극적으로 유대인들의 적대감 내지는 오해 때문이었다는 것 즉 유대인
들이 원인 제공자라는 것과 거기에 비해 로마인들은 부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한편 로마인들은 바울을 놓아주려 했으나 유대인들이 방해했기 때문에 석
방되지 못하였다는 것은 예수의 모형을 염두에 두고 그것과 바울의 유사성을 보여줌으
로써 바울의 사도성을 부각시키려는 누가의 신학적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
다(3: 13 참조).

19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못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함이요 내 민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로라

ㅇ마지못하여...아니로다 - 본절에서도 바울은 계속해서 자신이 유대인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있다. 유대인들의 끊임없는 적
대 의식 때문에 불가피하게 가이사에게 상소(上訴)하기는 했지만, 조금도 동족을 미워
하지 않는다는 바울의 고백이 그것을 말해준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반대하여 그로 하
여금 가이사에게 호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갔지만 바울이 자신을 살해하려
한 동족을(23 : 2-15 ;25 : 3) 송사할 의사가 없다고 한 것은 예수께서 자신을 십자가
에 못박으라고 요구한 동족을 용서하신 사실을 연상시킨다(눅 23 : 34)

20 이러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바 되었노라

ㅇ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 이것은 공의회 에서도(23 : 6), 벧릭스 앞에서도
(24 : 15),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26 : 6) 증언 했던 내용이다. 여기서 '이
스라엘의 소망' 이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소망이다. 바울은 이 소망의 예수그리스
도에게 완성되었다고 하였으나 정치적이며 현세적 메시야를 기다렸던 일반 유대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차이 때문에 바울은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던 것이다.

21 저희가 가로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고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ㅇ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 편지에 해당하는 혤라어 '그람마' 의 본래적의미는
'그려지거나 씌어진 어떤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산헤드린에서
발송한 바울에 대한 공식 고소장을 가리킨다고 본다.
ㅇ누가 와서...고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 앞에서는 문서를 통한 연락이
없었음을 말했고 여기서는 사람을 통한 정보의 전달도 없었음을 밝히고 있다. 본문에
서 '고하든지' 의 '아펭게일렌' 은 공식적인 알림을 뜻
하고 '이야기한'의 '엘랄레센' 은 사적인 알림을 나타낸다.
결국 유대인 지도자들의 말은, 공식적인 문서를 통해서나 혹은 공식적인 임무를 띠고
온 사람을 통해서나 도무지 바울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은 바 없다는 것이고, 또한 여
행객을 통해 사적으로도 들은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이들의 말대로 하자면 바울은 그
들에게 베일에 싸인 인물인 셈이다. 만약 이들이 실제로 바울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면 그것은 아마 다음의 이유때문일 것이다. (1) 예루살렘의 반(反)바울적
유대 주의자들은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를 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리라고 미처 생각하
지 못하였고 그래서 로마에 미리 연락하지 못했다(Meyer). (2) 연락을 하려고 생각
했다 하더라도 바울의 이송이 거의 마지막 항해 시기였기 때문에(11절 주석 참조) 교
통원의 어려움이 있었다(Alford, Lumby). (3) 글라우디오의 유대인 추방령 이후 다
시 로마에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이 멀리 본국에서부터 온 것이 아
니라 가까운 지역에 흩어져  있다가 돌아오는 것이었으므로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바울
사건에 대해서는 알수가 없었을 것이다(Olshausen, Hervey). 이 가운데 첫번째 견해
는 타당성이 희박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하
더라도 반(反)바울적 유대 주의자들은 바울이 항소할 때 현장에 있었으므로(25 : 11),
그 때에라도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공문을 띄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면 두번째와 세번째의 견해가 타당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혹자는 로마의
유대 공동체 지도자들이 바울에 대해 아는 바도 들은 바도 없다고 한 것은 단지 외교
적 표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즉 로마의 유대인들이 바울과 유대인들 사이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어느징도는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견해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와 동방 간에는 정규적
인 왕래가 있었고, 바울이 연루된 문제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초의 관심사인 종교
에 관한 것이었으므로 그런 소문은 당연히 로마까지 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그들이 모른다고 한 것은, 아무런 유죄 증거가 없는 바울의 상소건에 대
하여 분란을 일으키는 것이 자기들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
다(Bruce). 종교적인 문제로 분란을 일으켜 로마로부터의 추방령을 받았던 쓰라린 경
험(18 :2)을 그들은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22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노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줄 우리가 앎이라 하더라

ㅇ듣고자 하노니 이 파에 대하여는...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 - 유대인 공동
체의 지도자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기독교가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단 그들이 기독교에 대해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지고 일
음을 말해준다. 본문에서 '파'(하이레시스)는  '이단'으로도
번역되며(24 : 4), 이에 의거하여 기독교가 로마의 유대인들에 의해 이단시 되었다는
견해를 피력하는 학자도 있으나(Bronhauser), 본문에서 보여진 유대인들의 태도는
그렇지 않음을 말해준다. 그들은 바울에게 기독교에 대하여 '듣고자' 했다. 만약
그들이 기독교를 이단이라고 여겼다면 바울에게서 무엇을 듣고자 했을 리가 없다. 또
한 '하이레시스'의 보편적 의미는 '이단'이 아니라 '종파'라는 점에서 이 단어를
반드시 '이단'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아마 로마의 유대인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정
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했고 다만 유대교의 많은 종파 가운데 하나 정도로 이해하
고 있었던 듯하다.

23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ㅇ일자를 정하고...많이 오니 - 본문의 상황은 22 절에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의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먼저 왔던 사람들이(17절) 바
울에게 이야기를 듣고 흥미를 느껴 더많은 사람들을 데려왔는지 아니면 처음 만났을
때는 상견례(相見禮)만 하고 날짜를 따로 정하여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로 한것인지 분
명치 않다. 하지만 후자일 가능성이많다. 하여튼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숙소
에 모여왔고, 이렇게 하여 바울은 로마의 유대인에게 처음으로 복음올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혹자는 바울의 숙소를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처
음부터 많았거니와 점차 더욱 늘어났을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상당히 넓은 집을 얻었
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Zahn).
ㅇ하나님의 나라... 예수의 잎로 권하더라  -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하나님 나
라와 예수로 요약하며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핵심적이고 정확 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복음 선포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이다.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나라이며 그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현현되었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확증되었으며 그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선포이기 때문이다. 본절에서 바울이 먼저 증거한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지상 사역
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만큼(막 1 : 15) 당연히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유대인들이 기대해 왔던 유대 민족주의적이고 정치적인 것이 아
니라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통해 보여진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것이었다(요 18 :
36 ; 고후3 : 17 ; 계 21 : 1). 다음으로 바울이 증거한 것은 예수에 관한 것이었
다. 구약의 메시야 예언과 약속이 예수에게서 성취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기독교적 메시야관은 유대인들에게 낮선 것이었고 이해하기도 힘든 것이었으므로 그는
단지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이해시켜 설득하려 하고 있다. 그것은 '전
하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돈'이 '설복하다'는 뜻을 갖는
단어라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ㅇ믿는 사람...믿지 아니하는 사람 - 아침부터 저녁까지강행한 바울의 증언은 노
력에 비해 충분한 것은 아니었지만 몇 사람의 믿는 사람을 얻었다.대체로 학자들은
이때 믿는 사람보다 믿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았을 것이라고본다(26, 27장). 유대인 동
족(同族)에게 복음을 증거하여 믿음을 갖게 하려는 바울의 노력이 극히 부분적으로만
성공을 거두었던 경우는 본서에 여러 차례 기록된 바이며 (14 : 4 ;17 :4 ; 19 :9)
그것에 대해서 바울은 실망하거나 좌절하지도 않았고 동족을 포기하지도 않았다(롬
9-11 장).

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ㅇ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 -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로마의 유대인들
사이에 의견이 갈리고 마침내는 집회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하고 흩어지는 상황에 이
르렀다. 23 : 10에 있었던 유대인들 사이의 분쟁을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ㅇ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 사 6 ; 9,10의 인용으로, 이곳 외에도 신약에서 무려
여섯 번이나 인용된 말씀이다(마 13 : 14,  15; 막 4:12 ; 눅 8 : 10; 요 12 : 40  ;
롬 11 : 8). 본래 사 6 : 9, 10은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바울은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으로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한
다고 해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의 본래적 핵심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예언이었기 때문이다.

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ㅇ이 백성에게...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 70인 역의 사 6 :9, 10과 내용이 일
치하는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완악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본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실 때 그가 어떠한 말을 하여도
백성들의 태도는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한 것이었다. 결국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완악하여 이사야의 말을 청종(聽從)치 아니함으로써 마침내는 바벧론
의 포로가 되는 것으로 성취되었다. 이제 바울은 그 말씀을 이사야 시대 백성의 후
손들에게 적응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에게 있어서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
성의 완고함과 그에 따른 심판을 말하려는 것이라기 보다는, 이스라엘이 구원의 복음
을(24절) 거부하였기 때문에 그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의 근거
로 사용되고 있다(28절). 그러나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바 있듯이 이 말씀은 유대
인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없어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유대인들도
구원에 참여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롬 11: 1-12).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ㅇ구원을 이방인에게로...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 하나님의 구원은 먼저 이스라
엘 백성들에게 제시 되었으나 그들이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구원은 이방인들에
게 보내어졌다. 이것은 바울이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는 논리이며(13: 48 ; 18:6),
자신의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을 확인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22 : 18, 21). 유대인들
은 '듣지 않을 것이나'(22: 18), 이방인들은 '들을 것이다'. 그 결과 유대인에게 주
어져야 할 구원이 이방인에게 돌아갈 것이다. 본서에서는 복음이이방인들 사이에
퍼져 나가는 과정과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역하는 것이 평행을 이루면서 기록되고 있는
데, 26-28절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결정적으로 확인되면서 하나의 결론부를 이루고 있
다.

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ㅇ몇몇 유력한 사본에는 본절이 빠져있으나 (A, B, E 등), 어떤 서방 사본에
는 "저가 이 말을 마칠 때에 유대인들이 서로 큰 논쟁을 하며 물러가더라" 는 구절이
삽입되어 있다. 이것은 후대의 삽입으로 추측된다.

29 (없음)

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ㅇ온 이태 - 누가는 구원이 이방인 에게 확산됨을 선언하는 것으로 본서를 종결짓고
있다. 그래서 로마에서의 바울의 생황을 간단하고도 대략적인 말로 묘사하고 있다
(25-31절). 본절에 의하면 바울은 만 2년 동안 로마에 머물렀는데, 본문의 2년은 석
방되기 이전 연금된 상태로 있었던 기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16절) 이것은 바울
에 대한 재판이 2년 동안이나 열리지않고 연기되었거나, 판결이 지연(遲延)되었음을
뜻한다. 유대인 고소자들은 재판의 승산이 없고 더구나 재판 과정에서 구체적인 증
거없이 사람을 괴롭히기 위한 고소로 여겨질 때는 그에 대향 응징을 받아야 했던 로마
법정의 절차가 두려워 법정 고소 만료일인 18개월이 지나도록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 결석(缺席) 재판으 로 진행되어 바울이 무죄 판결을 받아 석방되었을 것
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Ramsay, Bruce). 이 때는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61
년 중순부터 63년 까지의 기간이었을 것이다.
ㅇ셋집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스도마티'는 '삯'을
의미하는 '미스도스'에서 온 말로 바울이 머문 집은 무료 교도소
가 아니라, '세'(hire)를 내는 집이었음을 보여준다. 바울이 집세를 어떻게 부담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1)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돈으로 지불했다(Ramsay), (2) 장
을 만드는 일을하며 번 돈으로 지불했다(Bruce), (3) 빌립보교회에서 현금을 보내주어
지불할 수 있었다(빌4:18, Knowling) 등의 견해가 있으며 이중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
당성을 갖는다.
ㅇ영접하고 - 이에 해당하는 혤라어 '아페데케토는   '
아포데코마이의 미완료 과거형으로 바울을 찾는 사람들
이 그치지 않고 계속 되었음을 시사한다. 이 때 찾는 사람들은 이방인들이 주종을
이루었으리라고 추측된다(Wendt).

31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ㅇ담대히...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 바울은 자기를 방문 하는 모든 사
람을 영접하여 복음 즉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쳤다(23절 주석
참조). 그리고 로마 당국은 바울의 그러한 선교 행위를 방해 하지않았다. 누가는
복음이 로마 당국의 방해을 받지않고 계속 전파 될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Haenchen).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하고 방해했던 반면(21 ;27-36; 23
:1-15), 로마에서는 복음이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전파되었다. 이것은 바울에게
주어진 소명과 주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이다(22:21 ;23 : 11). 당시 세계의 중심지
였던 로마에서 복음이 성공적으로전파되기 시작 했으며, 누가는 본서를 매우 간략하게
끝을 맺고 있지만, 마침내 복음은 로마와 전세계에 퍼져나가게 될 것을 내다보는 원대
한 소망이 있었을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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