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사도행전

[스크랩] 사도행전 (25 : 1~27)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0:36
사도행전 25장

1 베스도가 도임한지 삼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ㅇ도임한 지 삼일 후에 -
   '도임한 지'(에피바스 테에파르케이아)는 직
역하면 '도(province)에 발을 올려 놓은 지'가  된다. '에피바스'는
'발을 올려 놓다'는 뜻의 '에피바이노'의 제2부정 과거형이고 '에
파르케이아'는 '도'(都)를 뜻하는 후기 헬라어 단어이다. 결국 통
치할 땅에 발을 올려 놓는 것으로 취임을 표현한 것이다. 베스도는 58-60년경에 총독
으로 부임하여 62년경 사망하기 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삼일 후에'라는 표현은 제3
일째를 가리키는 유대적 어법이다. 그러니까 베스도 신임 총독은 부임한 다음 날 하루
를 쉬고 사흘째 되는 날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이다. 새로운 곳에 처음 부임한 베스
도로서는 자기 관할 구역의 실태를 하루라도 빨리 파악하는 것과 지역의 유지들과 친
밀한 관계를 여는 것이 급선무였고 예루살렘이 유대의 수도이자 종교적  중심지였으므
로 그곳부터 방문한 것이다.

2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쌔

ㅇ대제사장들과...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의 대제사장은 파비(Phabi)의 아들 이스마엘이었다.
헤롯 아그립바 2세(Herod Agrippa II)가 벧릭스 통치 말기에 이스마엘로 하여금 아나
니아의 대 제사장직을 계승하게 하였기 때문이다(Jos, Angiq. XX, 179,
194, 196).그의 임기에 대해서는 탈무드의 기록과 요세푸스의 기
록이 각각 다른데 전자에 의하면 10년으로 되어 있고, 후자에 의하면 베스도 통치 기
간에 아그립바 2세가 대제사장직을 다시 이스마엘에서 요셉으로 교체시켰다 한다. 요
세푸스에 따른다면 이스마엘의 재임 기간은 2년이 채 못되는 셈이다. 한편 '대제사장
들'이라는 복수형은 전임자(前任者)들까지도 포함하여 나타내는 것이다. 본래 대제사
장은 한 명이고 종신제이며 자손에게 계승되었으나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부터는
권력자들에 의해 자주 바뀌게 되었다. 그런데 전직 대제사장들도 동일한 명칭으로 불
리었고 그 위치가 존중되었으므로 통상 이들을 같이 부를 때는 대제사장들이라고 불렀
다. 그리고 '높은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지시하는 바에 대해서는 산헤드린의 영향력
있는 회원들을 가리킨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15절). 한편 신임 총독이 관할 지방의
유력자들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이 상례(常例)라는 사실을 잘 알았던 유대 지도자들
은 이 기회를 십분 이용하여 다시금 바울을 공격하고 나섰다. 산헤드린이 바울을 잡아
죽이려는 의지가 얼마나 집요한 것인지는, 그들이 무려 2년이 지나도록 바울을 죽이려
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데서 잘 드러난다.

3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러라

ㅇ베스도의 호의로...죽이고자 -
   대제사장들 이하 산헤드린은 구체적인 증거를 들어 바울을 죽일 수 없음을 확인한
바 있으므로 불법적으로 살해하려 한다. 그들은 새로 부임한 베스도가 아무것도 모르
는 것을 악용하여 다시 바울에 대한 재판을 청구하되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열도록 요
청하였다. 그리고 그 요청이 받아들여져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올 경우 자객을 매
복(埋伏)시켰다가 중간에서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 것이다.

4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미구에 떠나갈 것을
말하고

ㅇ베스도가...미구에 떠나갈 것을 말하고 -
   베스도는 결코 호락호락한 관리가 아니었다. 그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인
간적 우호와 행정적인 일의 처리를 구분할 줄 알았다. 어쩌면 전임자인 벧릭스가 베스
도에게 바울 사건에 대한 개요를 일러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그들의 요청을 정중히 거절하였다. 첫째,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금되어 있는 만큼 그가
도주할 염려는 없다. 둘째, 베스도 자신이 '미구(未久)에' 가이사랴로 떠나갈 것이므
로 굳이 바울을 불러올릴 필요가 없다. 여기서 '미구'(타케이)는 '빠른
'의 의미인 '타코스'의 여격 단수형으로, 일정한 방향을 향해 빨리 나아
감을 뜻한다.

5 또 가로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송사하라 하니라

ㅇ유력한 자들은...송사하라 -
   '유력한 자들'은 15절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이라고 보며
(Overbeck), 그 의미는 '책임있는 대표자' 정도로 이해된다. 베스도는 그들의 재판 요
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토록 긴박하게 처리되어야 할 일이라면 그들 중 책임있
는 대표자들이 가이사랴에 내려가서 소송을 하라는 것이다. 사람을 보내서 바울을 호
송해오자면 여러 면에서 번잡스러우며 또 로마 시민으로서 가이사의 법정에 구류되어
있는 자를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에 데려와 재판한다는 것도 바람직스럽지 못하다고 판
단한 듯하다. 결국 베스도의 신중한 판단으로 바울은 다시 한번 죽음의 위기를 넘기게
된 셈이다.

6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일 혹 십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 오라 명하니

ㅇ팔일 혹 십일을 지낸 후 -
   베스도가 예루살렘에 머무른 기간에 대해 헬라어 성경(사본)들 가운데 약간씩 차이
가 있다. 예컨대 트리니티 성서 공회(The Trinitarian Bible Society)에서 발행한 헬
라어 성경에는 '10일 이상'으로 되어 있고(more than ten days, RSV), 화란의 네슬알
란드 성경(Nestle-Aland)에는 '8일 혹은 10일 이상을 지내지 않고'라 되어 있다(not
more than eight or ten days, RSV). 전통적으로는 한글개역성경 본문처럼 '8일 혹은
10일'을 지지한다.
ㅇ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 베스도가 재판장의 자리에 앉음으로써 공식적인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로써 바울은 이번 사건으로 인하여 공식적인 재판만 세 번
(22:30;24:1-22) 받는 셈이 되었고 또한 증거도 없는 억지 주장에 대해 자신의 무죄함
을 또다시 증명해 보여야 했다.

7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송사하되 능히 증명하지 못한지라

ㅇ유대인이 둘러서서...증명하지 못한지라  -
   유대인들은 이번에는 변사를 동원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바울에게 위압
감을 주며 그러한 분위기로 재판의 결과에 영향을 끼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고
소 내용은 더둘로의 것에 비해(24:5, 6) 더 새로운 것이 없었던 듯하며 여러 가지 중
한 죄목으로 송사(訟事)하였으나 단 한 가지도 능히 증명하지 못하였다. 특히 이 소송
사건이 무려 이 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설사 기소된 내용이 정당하다 할지라도 증인을
확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하물며 전혀 터무니없는 사실로써 모함하려 하니 증인이
없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8 바울이 변명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ㅇ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아니하였노라 -
   바울은 지금까지 자기에게 제기된 모든 고발을 집약적으로 종합하여 반박하고 있
다. 율법이나(21:21), 성전(21:28)은 유대인들과 관계된 것이고, '가이사에게'라 함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가리켜 반란자, 또는 소요를 일으키는 자라고 말한 것(24:5)에 대
한 요약적 변론이라고 할 수 있다.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는 단언은 유대
인의 입을 봉해버렸다. 그들은 더이상 바울의 변론을 반박하지 못하였다. 한편 '가이
사'는 원래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B.C. 102-44)의 속명(俗名)이었으나,
그의 양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가 B.C. 27년에 로마의 초대 황제로 즉위한 이후부터 가이사는 황제의 동
의어로 사용되었다. 참조로 역대 가이사를 살펴보면 이러하다. (1)가이사 아구스도
(B.C. 27-A.D. 14) (2) 디베료(14-37) (3) 칼리굴라(37-41), (4) 글라우디오 (41-54)
(5) 네로(54-68) (6) 갈바(68-69) (7) 오토(69) (8) 비텔리우스(69) (9) 베시파시아누
스(69-79) (10) 티투스(79-81) (11) 도미티아누스(81-96) (12) 네르바(96-98) (13)트
라야누스(98-117) (14) 하드리아누스(117-138).

9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ㅇ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심문을 받으려느냐 -
   원고측과 피고의 진술을 다 들은 베스도는 즉시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지금
까지 진행된 재판 과정에서 소송을 제기했던 유대인들의 고소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증명되었고(7, 8절), 따라서 바울에게 무죄 선언을 한 후 즉시 석방해야 했음에도 불
구하고 베스도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다시 심문을 받겠느냐고 묻는다. 베스
도가 이런 제의를 하는 것은, 만약 그가 바울을 석방할 경우 유대 지동자들의 반감을
살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부임(赴任) 초부터 유대의 지도자들과 부딪쳐 그들의
협조를 기대할 수 없게 된다면 그의 통치는 상당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더
구나 당시에는 총독 관할 지역의 주민들이 총독에 대한 불평을 황제에게 고할 수 있었
고, 그럴 경우 고발을 당한 총독은 정치적으로 치명타를 입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베
스도는 이런 경우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0 바울이 가로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에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ㅇ가이사의 재판 자리...행한 일이 없나이다 -
   바울은 베스도의 제의가 로마법의 절차에 어긋나는 것임을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있
다. 왜냐하면 로마 시민으로서 가이사의 재판대 앞에선 이상 끝까지 가이사의 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 로마 시민에 대한 재판권이 없는 유대의 산헤드린에 서야 할 이유
는 없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베스도의 제의를 거절하는 의미에서 이 사실을 확인시킨
뒤 자신의 무고함을 다시 한번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무고함을 총독
베스도 역시 잘 알고 있음을 비교급 '칼리온'('더 잘')을 써가며 진
술한다.

11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사죄를 범하였으면 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의 나를 송사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누구든지 나를 그들에게 내어
줄 수 없삽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호소하노라 한대

ㅇ만일 내가...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  -
   이는 바울이 지금 목숨에 연연하여 애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의를 문제삼고 있음
을 표현하는 것으로 당시의 관용적인 표현에 해당한다. 요세푸스가피고의 입장에서
자신을 변호한 것을 기록하고 있는 자료에도 이와 유사한 표현이 나온다.
ㅇ가이사께 호소하노라 - 바울은, 베스도가 자신을 예루살렘의 법정에  세우려 하는
의도를 보이자 즉시 가이사에게 항소(抗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예루살렘에는 심각
한 음모가 기다리고 있음을 능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3절;23:14-16). 로마 시민은
지방 행정장관의 판결에 불복하여 황제에게 항소할 수 있는 권리를 법으로 보장 받았
다. 특히 지방 행정관의 심한 압제를 받거나 중대한 재판 문제가 발생했을 때 황제에
게 직접 호소할 수 있었다. 그럴 경우 지방 관청은 그 호소자를 로마에까지 호송하여
황제의 재판을 직접 받도록 해야 했다. 그 당시 로마 황제는 네로였고 그는 54-68년에
걸쳐 황제의 자리에 있었다. 네로는 폭군으로 유명하나 통치 초기에는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Seneca)와 집정관 아프라니우스 부루스(Afranius Burus)등의 영향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바울이 황제에게 항소한 때는 네로가 선정(善政)을 베풀던 시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가이사(황제)에게 항소했을 때 그는 단지 공정한 재판만을 생각한 것
이 아니라 로마에 가고자 했언 자신의 희망과(19:21). 로마에서도 복음을 증거해야 할
소명923:11)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Robertson).

12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가로되 네가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ㅇ배석자들과 상의하고 -
   '배석자'(쉼불리온)란 배심원 회의의 위원들을 가리키며
의회의 판사들, 법 전문가들, 그리고 총독의 고문들로 이루어졌다(Haenchen). 최종적
인 결정은 총독이 내리지만 배석자(陪席者)들과 얼마든지 상의할 수 있었다. 지금 이
들이 상의한 것은 바울의 항소를 인정하느냐 마느냐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과연 바울
에 대한 고소가 중대한 것인가의 여부가 논의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대한 소송건
일 경우에 그 항소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바울을 반란 죄로 고소하였고(24:5), 반란죄는 그 무엇보다 중대한 제목이었으므로 바
울의 항소는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러나 베스도가 바울의 무죄한 바울을 석방하지 않
고 바울의 항소를 받아들인 것은 유대인들과의 관계 문제가 그에게많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이며(9절 주석 참조), 이 불편한 재판에 대한 판결을 황제에게 넘김으로써
자신이 정치적으로 손상을 입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13 수일 후에 아그립바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ㅇ아그립바 왕 -
   아그립바 세의 아들이자 헤롯 대왕의 증손인 '마르쿠스 율리우스 아그립바 2세'
(Marcus Julius Agrippa II, A.D. 27-100)이다. 그는 어려서 로마의 글라우디우스
(Claudius)황실에서 성장하였고 그의 부친처럼 친로마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다. A.D.
44년 그의 아버지가 별세했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17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아버지
의 영토를 이어받아 다스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팔레스틴은 로마 행정관
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러다가 A.D. 50년경에 글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 아그립바 2세
는 갈기스(Chalcis)의 왕으로 임명되었고 이때부터 그는 팔레스틴의 통치자로 부상되
었다. 그후 글라우디우스는 그에게 더 많은 영톡를 맡겼는데, 빌립의 관할 지역, 아빌
라(Abila), 트라코니티스(Trachonitis), 아크라(Acra)등이 그것이다. 아그립바의 통치
지역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네로에 의해 갈릴리, 다리게아(Tarichea), 디베랴
(Tiberias)등에 까지 확장되었다(Jos., Wars II). 아그립바는 매우 친로마적이어서 유
대인들이 반로마 감정을 가지지 않도록 공작을 하였고, 66-70년에 걸쳐 있었던 전쟁
기간에는 더욱 철저히 로마에 충성했던 관계로 전쟁 후 더 많은 영토를 부여받았다.
이처럼 아그립바 왕은 로마와의 밀착된 관계 속에서 특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
운 로마 총독이 부임할 때마다 예방(禮訪)하여 경의를 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ㅇ버니게 - 이 여인은 아그립바 2세의 한 살 아래 누이이자 벧릭스 전(前) 총독의 처
인 드루실라(24:24)의 언니이다. 그녀는 일찍이 철학자 필로(Philo)의 조카인 마르쿠
스와 약혼한 적이 있었으나 결혼을 하지는 못했다. 후에 그녀는 삼촌인 헤롯과 첫번째
결혼을 하였으나 48년에 남편이 죽자 오빠인 아그립바 2세의 집에서 살았다. 그후 그
녀는 길리기아 왕 폴레몬(Polemon)과 두번째 결혼을 하였으나 곧 이혼하고 다시 오빠
에게 돌아왔다. 이때 이들 사이에는 근친상간(近親相姦)의 불륜이 저질러졌다는 소문
이 널리 퍼졌었다. 70년 이후에는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Vespasian)의 아들인 티투스
(Titus)와도 애정 행각을 벌였으나 여론의 악화로 끝내는 헤어지고 말았다. 오빠와 함
께 베스도의 취임을 축하하러 온 지금은 아마 첫번째 결혼에 실패한 후 오빠 집에서
함께 거할 때였을 것이다.

14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ㅇ여러 날을 있더니...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의 베스도 문안이 다소 길어진 듯하다. 베스도는 아그립바의
명성과 권위로 보아 바울에 관하여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판단하고서 바울
이야기를 화제로 꺼냈던 것 같다. 아그립바 왕이 직접 유대를 통치하지는 않았지만 그
에게는 글라우디우스 황제가 '성전의 후견인'의 자격과 대제사장의 임명 및 파면권,
그리고 성전 창고와 제사장의 예복을 관리하는 권한을 부여해 주었기 때문에 유대 사
회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5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ㅇ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
   베스도는 자기가 겪은 사건의 줄거리를 아그립바에게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는 새
로운 사실이 제시되는데 그것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단지 바울을 고소만 한 것이
아니라(2절), 재판도 시작하기 전에 유죄 판결을 요구했다는 사실이다.

16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어주는 것이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ㅇ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
   본문에서는 유대 지도자들의 억지 주장과 총독 베스도의 법적 공정성이 대조된다.
로마의 사법 관행은 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것이며, 피고는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할 기
회를 부여받을 수 있도록 규정되었다. 베스도는 사사로운 감정에 매이지 않고(3절) 법
을 준수함으로써 로마법의 정의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베스도의 진술은 자신이 법에
의해 직무를 충실히 수행했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다소 과장된 표현을 하고 있다. 왜냐
하면 처음에 그가 예루살렘에서의 재판 요구를 거절할 때 제시한 이유는 지금과 달랐
으며(4절), 재판 과정에서도 유대인들을 의식함으로써(9절) 완전한 불편 부당(不偏不
黨)함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17 그러므로 저희가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 왔으나

ㅇ지체하지 아니하고 -
   사실상 베스도는 재판을 신속하게 열었었다(6절). 그는 재판을 지연시키면서 직무
를 유기(遺棄)하거나 뇌물을 기대하지 않고 공정한 재판을 하였다는 것을 넌지시 강조
한다. 이는 전임자인 벧릭스의 우유부단한 처사와 대조된다(24:22).

18 원고들이 서서 나의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사건은 하나도 제출치 아니하고

ㅇ원고들이...나의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 -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력한 산헤드린의 의원들이 바울을 고소했을 때, 그들의 사회
적 지위나 명망으로 보아 문제거리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소송을 제기한다고는 생각
지 않았을 것이다. 베스도는 필시 바울이라는 자가 상당히 중대한 악행을 법했으리라
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재판이 열리자 베스도의 짐작은 완전히 빗나갔다. 유
대인들은 바울을 로마법에 의해 유죄에 처할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였다(7절).

19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송사하는 것 뿐이라

ㅇ자기들의 종교와...죽은 것을 살았다고 -
   여기서 성전 모독에 관한 사항은(24:6) 제외되고 그 대신 부활에 관한 주제가 등장
한 것이(24:21) 흥미롭다. 베스도 자신이 말하듯이 부활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 범죄자
로 정죄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단순한 '부활'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에 관한 언급
은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부활에 관해서는 바리새인들도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예수
의 부활만큼은 그들을 포함한 유대교 지도자들 전체가 기를 쓰고 반대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러한 문제는 로마 법정에서 다룰 성질이 아님은 자명했다. 유대인들은 예수
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경우에도 종교적 문제로써 정치적 올가미를 씌우고
자 안감함을 썼을 뿐이다(눅 23:4, 14). 한편 '종교'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이시다이
모니아스'는 '미신'(superstition)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17:22). 대체로 로마 관리들은 종교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멸시하는 태도
를 보였으며 베스도 역시 예외는 아닌 듯하다. 그러나 지금은 이야기를 듣은 사람이
유대의 종교를 실질적으로 관할하고 있는 아그립바였으므로 그런 의미로 사용했으리라
고는 보기 어렵다.

20 내가 이 일을 어떻게 사실할는지 의심이 있어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ㅇ어떻게 사실할는지 의심이 있어서 -
   베스도는 9절에서와 달리 여기서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의 재판을 제의(提議)한
것이 자신의 종교 문제에 관한 무지 때문이었다고 밝힌다. 그러나 두 진술이 서로 모
순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가 바울을 석방하지 않고 머뭇거린 것은 무지
탓도 있었겠지만 그 배후에는 고소자들 앞에서 바울을 무죄로 선언하기를 원치 않은
심리가 작용했기 때문이다(Howard Marshall).

21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ㅇ황제 -
   헬라어 '세바스토스'는 라틴어 아우구스투스(augustus)에 해당
하는 형용사로서 '존엄한', '존경스러운'이란 뜻이다. 또한 이 말은 원래 '숭배하다',
'경외하다'는 뜻의 동사 '세바조마이'에서 유래했다. B.C. 27년
로마 최초의 황제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헬라어로는 '세바스토스
')라는 칭호를 받은 이후로 이는 '가이사'와 더불어 로마 역대 황제의 칭호로 사용되
었다.

22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가로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ㅇ나도...듣고자 하노라 -
   본절은 아그립바가 바울에 관하여 자세히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상당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것은 '나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표현 '카이아우토스'
(also myself)가 강조형으로 되어 있는 데서 드러난다. 바울은
아그립바 앞에서 다시 한번 증언을 하게 되었는데, 이는 로마의 총독(본디오 빌라도)
앞과 아그립바의 증조부인 헤롯 안티파스 앞에 섰던 예수의 경우(눅 23:8)를 연상시킨
다. 그러나 헤롯 안티파스는 예수에게 적대적인 행위를 했던 반면(눅 23:11), 아그립
바는 바울에게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23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의를 베풀고 와서 천부장들과 성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신문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ㅇ크게 위의를 베풀고...바울을 데려오니 -
   '위의'(偉儀)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타시아'는 '보이게 하다
'는 의미의 '판타조'에서 파생된 말로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위엄있고 호화 찬란하게 보이는 것을 묘사하는 말이다. 버니게의 사치와 화려함은 널
리 알려진 사실인데, 유대 전쟁의 긴장이 감돌던 시기에 그의 오빠 아그립바가 유대인
들에게 전쟁을 피하도록 권유하는 순간에도 사치스럽게 치장하고 오빠 옆에 앉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그립바 남매를 필두로 하여 천부장을 비롯하여 성중의 유력 인사
들이 뒤따라 들어오는 화려한 행렬은 이 날의 청문회가 얼마나 비중있는 것인가를 말
새준다. 한편 '신문소'(아크로아테리온)는 '청취자가 되다'는
의미의 '아크로아오마이'에서 파생된 말로 공개적으로 청취를 하
는 공청실(公聽室)을 뜻한다. 재판은 이미 끝났고 바울의 항소는 받아들여졌으므로 다
시 재판을 하는 것은 아니었고 아마 청문회의 형식이었을 것이다. 가이사랴 최고의 권
력자들과 실력자들의 위세와 화려함 앞에 서 있는 바울의 모습이 외소해 보이기도 하
지만 사실상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소개하는 스승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며 그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일이다(9:15).

24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ㅇ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
   엄밀하게 말해서 바울을 송사한 사람은 유대교 지도자들이었다(William Neil). 다
만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직후에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의 충동으로 바울을 해
하려 했던 군중들을 감안한다면(21:27-36)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 무리들을 대표하는
자들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25 나는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저가 황제에게 호소한고로
보내기를 작정하였나이다

ㅇ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
   본문은 베스도가 바울의 무죄를 분명히 알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천부장 푸시
아도 그러했고(23:29), 벧릭스도 마찬가지였으며(24:22, 23), 지금은 베스도까지도 바
울의 무죄됨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석방되지 않고 있다. 매번
바울이 석방되지 않은 사유가 있었지만(9-12절;23:20-24;24:22), 사실상 그런 것들은
바울을 풀어줄 수 없는 정당한 사유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판결의 지연이 바울을
로마로 향하도록 하는 원인이 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23:11의 말씀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이것은 바울을 사도로 부르신 주님의 섭리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26 그에게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재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왕 당신 앞에 그를 내어 세웠나이다

ㅇ황제  -
   본문의 '황제'(퀴리오스)는 21절의 '세바스토스'
와 다른 칭호이다(21절 주석 참조). '퀴리오스'는 '주'(Lord or His Majesty)라는 뜻
의 칭호인데, 옥타비아누스나 디베료(Tiberius)는 이 칭호가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연
상케하는 권위주의적인 것이라 하여 사용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다가 이 칭호가 공식적
으로 용납된 것은 칼리굴라(Caligula) 때부터이고 도미티안(Domitian)에 이르러서는
공인된 칭호가 되었으며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는 자신의 동전에 이 칭호
를 새겨넣기까지 하였다. 본래 이 칭호는 통치자의 존엄성을 높이는 것이었으나 점차
신성과 관련되면서 황제 숭배로까지 발전하였다. 이것은 '퀴리오스'를 그리스도에게
적용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문제를 가져다 주었다.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게 적용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문제를 주었는데, 왜냐하면 그리스
도인들은 그리스도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주'라는 칭호를 부여할 수
없었고 그것을 우상 숭배로 여겼기 때문이다. 폴리갑(Polycarp)은 황제를 '주'라고
부르지 않아 순교당한 인물의 예이기도 하다.
ㅇ상소할 재료가 있을까 하여 - 본문에는 베스도의 난처한 입장이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바울의 무죄를 알고 있으면서도 유대인들의 비위를 거스리지 않기 위해(9절) 엉
뚱한 제의를 하였다가 바울의 항소를 받았고(11절). 그것을 수락하지 않을 수없게 되
었다. 그런데 문제는 바울을 최고 법정인 로마에 보낼 때 함께 보내야 할 혐의 사실이
확실치 않다는 것이다. 황제가 보아서 재판의 필요성을 인정할 만한 상소(上訴) 재료
도 없이 바울을 올려 보낸다면 그에게는 무능력가라는 낙인과 문책이 있을 것이다. 그
리하여 그는 상소(上訴) 재료를 찾기 위하여 이 청문회를 열기로 한 것이며 아그립바
의 심문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

27 그 죄목을 베풀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ㅇ죄목을 베풀지 -
   베스도는 천부장 루시아가 벧릭스에게 써보낸 것과 같은(23:26-29) 애매 모호한 조
서(調書)를 올려보내서는 안된다고 판단했다. '베풀지'(세마나이)는
'표시한다'는 뜻의 '세마이노'의 제1과거 능동태 부정사로 구체적인
죄목을 명시하는 것을 뜻한다.
ㅇ무리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로곤'은 부정 접두어 아와 '
이성'을 뜻하는 '로고스'의 합성어로 '이성이 없는', '이성에 위배된'의
뜻이다. 분명한 죄목도 없이 사람을 보내 재판을 받게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이성이 없
는, 즉 정신나간 일이 아닐 수 없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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