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사도행전

[스크랩] 사도행전 (26 : 1~32)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0:36
사도행전 26장


1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ㅇ아그립바가...허락하노라 -
   지금은 청문회가 아그립바릉 위하여 열린 것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25:22) 바울에
대한 청문의 주도권은 아그립바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진행된다. 사실상 베스도가 자
신은 유대의 종교적 배경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으므로 바울에 대한 심문을 아
그립바에게 일임한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하겠다.
ㅇ바울이 손을 들어 - 바울의 항소가 받아들여진 이상 재판은 끝난 것이며 바울이 자
신을 위해서건 아니면 청중들의 호기심을 위해서건 다시 변증을 해야 할 의무는 없었
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 기회를 자신의 무죄됨을 주장할 수 있는 기회로 삼기 보
다는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로 보았기 때문에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손을 들어
'라는 표현은 21:40처럼 청중들을 조용하게 하거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취한 행동
이 아니라 연설을 시작하면서 예의(禮意)를 표시한 것이라고 본다.가이사랴의 최고
권력자들과 학식있는 자들이 위엄있게 앉아있는 자리앞에 사슬에 묶인 채(29절) 손을
들어 연설을 시작하는 바울의 모습은 차라리 비장하다고 할 수 있겠다.

2 아그립바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ㅇ다행히 여기옵나이다 -
   바울은 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정중하면서도 간결한 예의를 갖추고 있다(24:10).
그러나 여기서 아그립바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이 다행스럽다고 한 것은 의례적인 인
사 치례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3절 주석 참조).

3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ㅇ유대인의 모든 풍속...아심이니이다 -
   2절에서 다행스럽다고 말한 이유이다. 아그리바는 유대인으로서유대의 종교적인
사정을 잘 알았기 때문에 바울의 설명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베스도가 선뜻 판결을 내리지 못한 데에는 유대의 종교적 배경에 대한 무지가 작용했
을 것이라고 볼 때 당시 바울의 심정은 상당히 답답하였으리라 본다. 바울은, 베스도
가 이미 그에게 정치적인 죄를 정할 수 없음을 확인하였기 때문에(25:25), 더이상 그
것에 대해서 변명할 필요는 없었고 여기서는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서만 변명하면 되었
다(R.N. Longenecker).

4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바라

ㅇ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 -
   '생활한 상태'로 번역된 '비오시스'는 '생활 방식'(manner of
Life, KJV)을 뜻한다. 바울의 고향은 '다소'였으나 실질적인 그의 정신적 배경은 예루
살렘이었다(22:3). 바울이 구체적인 그의 성장 배경이나 삶의 방식에 대해서 유대 사
회에 두루 알려져 있는 바임을 힘주어 말한 것은 그의 바리새적 배경과 유대교적 열정
이 얼마나 강했던가를 먼저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5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ㅇ우리 종교 -
   '종교'로 번역된 '드레스케이아'는 '경건하다'는 뜻인 '드레스
코스'에서 유래한 말로 단순한 외적 의식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내적 경건성까지 내포하는 말이다. 여기서 바울이 유대 종교를 '우리 종교'로 표현한
것은 아그립바와 자신의 동족성(同族性)을 은연중 확인시킴으로써 공감대를 넓혀 보려
는 의도가 있다고 보여지며(4절의 '다 아는 바라'는 말과 연결됨) 또한 그곳에 있는
대부분의 청취자들이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 의도도 엿보인
다.
ㅇ가장 엄한 파...바리새인 - 이는 바울이 한때 유대교적인 정통성에 누구 못지않게
철저했음을 말하기 위한 진술이다. 바울은 이것을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갈 1:13, 14;
빌 3:5, 6). 실제로 바울은 힐렐(Hillel) 학파의 가말리엘로부터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았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바리새인이라 하면 가장 엄격하고 완벽에 가까운 종교 생
활을 하는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6 이제도 여기 서서 신문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ㅇ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
   바울은 과거에 대한 언급을 간단하게 끝내고 심문을 받고 있는 현재의 상태를 주목
하게 한다.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란다 함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어느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에 철저히 뿌리를
둔 것임을 의미한다. 그 약속한 것이 무엇인지 명료(明瞭)하게 언급되지는 않고 있으
나 메시야와 부활에 관한 것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8, 23절). 다시
말해서 바울은, 구약의 언약들과 예언들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도
온전히 성취되어 갈 것이기 때문에 문제의 초점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러한 성취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맞춰져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7 이 약속은 우리 열 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ㅇ열 두 지파...이 소망을 인하여 -
   본절에서 바울은 자기를 송사한 유대인들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즉 바울이 말하
는 이 소망은 전체 이스라엘이 간절히 바라마지 않던 것인 바, 이 소망을 인하여 다른
민족이 아닌 바로 유대인에게 송사를 받았다는 것을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바울
은 자기가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25:25) 종교적으로 허물이 없음을 먼저 분명히 하
고 있다. 한편 '소망'이라는 말은 바울의 변호연설 가운데 자주 등장하는 핵심적인 용
어이다(23:6;24:15;28:20).

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ㅇ당신들은...여기나이까 -
   여기서 '당신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가 분명치 않다. 바울이 유대교적 배경에 대
한 이해가 거의 없을 이교도들에게 이러한 주장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는 아그립바와 버니게 외에도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참여해 있었다는 것이 된다.
유대인들을 향한 바울의 이 질문은 그 특유의 치밀하고 예리한 논증을 보여준다. 즉
만일 그자리에 바리새인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당연히 부활을 배척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 질문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권능'이라고 하는 일반론적 차원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긍정
의 답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의 진정한 초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맞춰져 있음은 물론이다(H. Marshall)

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줄 스스로 생각하고

ㅇ나도 나사렛...행하여야 될 줄 -
   여기서 '나도'는 강조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예수
의 부활을 믿지 않고 오히려 적대했던 과거를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의 증언을 믿지 않
는 사람들을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도 있다는 투로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 자신도
극적인 변화를 받았듯이 반대자들의 태도가 궁극적으로는 바뀌어야함을 역설하려는
준비 작업일 뿐이다. 바울은 복음의 탄압자에서 선포자로 바뀌는 극적인 반전(反轉)
을,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강렬한 인상과 설득력을 유발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잘
활용하고 있다(22:3, 4;딤전 1:13). 그러나 이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극적인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원만하고 점진적인 신
앙을 키워가는 것이 비정상적이라는 뜻도 아니다. 다만 바울의 경우에는 극적인 전환
이 복음을 전함에 있어 강한 설득력을 주는 힘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하
여야 될'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인'은 어떤 필요성이나 의무를 뜻하는 비
인칭 동사 '데이'의 부정사로서, 바울이 한때 그리스도인들을 잔인하게 핍박
했던 데에는 나름대로의 투철한 종교적 의무감이 작용했음을 시사한다.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ㅇ가편 투표를 하였고 -
   바울은 자기가 기독교를 어떻게 박해했는가를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가편 투표를
하였고'(카테넹카 프세폰)를 직역하면 '자갈(검은
색)을 아래로 던졌고'가 된다. 이 표현은 고대에 재판할 때 배심원들이 피고가 무죄라
고 판단될 때는 흰 자갈을, 유죄라고 판단될 경우에는 검은 자갈을 던졌던 판결 방식
에서 유래한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재판할 때 사형에 처하는 판결에 투표를
하였다는 진술은 이곳이 처음이다. 이에 대하여 학자들은 바울이 산헤드린의 회원이었
다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Robertson, Meyer, Holtzmann). 그러나 산헤드린의 회원이
되려면 일단 기혼자로서 30살이 넘어야 했는데 바울이 결혼을 했었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과, 자기의 바리새인됨을 여러 차례 강조했던 그가 산헤드린의 회원이었음을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은 그러한 추측에 회의를 갖게 한다. 그리하여 혹자는 본문을
온유적인 표현으로 보아 '찬동하다'의 뜻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Jackuier). 이의 견
해가 더 타당하다고 본다.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ㅇ모든 회당에서...형벌하여 -
   '모든 회당'은 예루살렘 내에 있는 회당들을 가리키는 듯하며(Bruce, Haenchen),
형벌'은 당시에 회당 형벌로 관례화 되어 있던 채찍질을 가리킬 것이다.
ㅇ강제로 모독하는 말 - 이것은 예수를 부인하거나 저주하는 말을 하게 하여 성도들
을 배교자(背敎者)가 되게 유도하려 했음을 뜻한다. 그런데 '강제로...하게 하고'의
'에낭카존'이 미완료로 되어 있는 것에서, 배교를 강요하는 바울
의 시도가 쉽게 성공하지는 못했으며, 그리하여 더 많은 사상자가 났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Bruce, Robertson). 어떤 특정한 집단을 탄압함에 있어서 그들이 믿고 있는 신조
나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하는 것은 가장 잔인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고대 수리
아의 폭군 안티오커스는 유대인들을 박해할 때 하나님을 모독하도록 강요한 일이 있었
다. 또한 트라얀(Trajan)에게 보내는 젊은 플리니(Pliny)의 보고서에는, 만약 기독교
인이라는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모독하면 그를 놓아 주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Epistle X. 96).
ㅇ외국 성까지도 - 바울이 기독교를 핍박할 때 유대지역 밖으로 나간 것으로 언급된
곳은 다베섹 뿐이었다(9:2;22:5). 그렇다면 '외국성'은 다메섹으로서 출장을 강조하여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Haenchen)
ㅇ핍박하였고 - 헬라어 '에디오콘'은 '사냥감을 쫓다', '적을 쫓다
'의 뜻을 가진 '디오코'의 미완료형으로, 반복되는 핍박 시도를 뜻한다.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것은 참으로 지독한 정도였으며 마치 사냥감을 쫓는 자
나 적을 섬멸하기 위하여 뒤쫓는 자와 같았다. 열심으로 말하면 바울은 자기를 죽이려
했던 유대인들을 능가하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12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ㅇ그 일로...권세와 위임을 받고 -
   '그일'이란 '그 용건', '그 목적' 즉 그리스도인들을 발본 색원(拔本塞源)하는 일
을 뜻한다. 본절에서부터 바울은 자기 생애에 있어 획기적 전환점이 되었던 결정적 순
간을 다시 언급한다. 이 진술은 9:1-19와 22:6-21에 이어 세번째에 해당하며 주된 이
야기의 흐름은 동일하나 세부 표현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1-23절 주제 강해
'바울의 회심 기사 비교 연구' 참조). 이러한 차이점은 이야기하는 당시의 상자황이나
청취자에따라 강조점을 다소 변화시켜 서술하는 누가의 문학적인 역량에 따른 것이라
고 볼 수도 있다(H. Marshall). 한편 본절에서 드러난 차이점을 보면 9:2;22:5에는 사
울이 '대제사장'으로부터 '공문'을 받아 간 것으로 언급된 반면, 여기서는 '대제사장
들'로부터 '권세와 위임'을 받은 것으로 표현된다. 본절의 표현이 더 강렬한 인상을
준다.

13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ㅇ정오 -
   22:6의 오정 쯤(메셈브리안)이 대략적인 시간(about noon)
을 나타내는데 비해 본문의 '헤메라스 메세스'는 정확한
시점, 곧 '한 날의 중간'(in the middle of the day)을 나타낸다. 팔레스틴의 정오는
매우 무덥기 때문에 대개 이때쯤이면 일손을 놓고 휴식을 취해야 할 정도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일을 위해 강행군을 하고
있었으니 그의 열성이 어떠했는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때가 한 낮이었다는 사
실은 그의 체험이 온전한 정신을 가진 상태에서 있었던 일임을 시사한다. 한편 본절
이하에는 강렬한 빛에 의해 바울의 눈이 멀게 되었다는 언급은 전혀 없으며, 모든 관
심은 주님이 하는 말씀에로 집중되어 있다.

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뒤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ㅇ히브리 방언으로 예수께서 -
   아람어로 말씀하셨음을 의미한다고 본다(21:40). 바울의 회심을 기록한 다른 곳에
는 '히브리 방언'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주님께서 바울의 이름을 '사울'
이라는 아람어로 불렀다는 사실이 암시되기는 하였다(9:4;22:7). 반면 9:1에는 '사울
로스라는 헬라어 이름이 사용된 것과 비교하라.
ㅇ가시채를...고생이니라 - 이 말은 헬라와 라틴 세계에 널리 알려진 속담과 같은 것
으로 본래적 의미는 '신을 대적하는 행동이 어리석고 무모하며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
리킨다. 이 말은 농경 문화에 배경에서 생겨났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가시채'는
끝에 뾰족한 쇠나 뼈를 박은 채찍을 가리킨다. 이 가시채는 밭을 갈 때 소나 말을 잘
듣지 않으면 때리기 위한 것이다. 만약 매를 맞은 소가 반항하여 뒷발질을 하면 할수
록 더욱 심하게 찔리고 상하여 고통을 당하게 된다. 한편 이 속담은 유대교내에서도
알려져 있었으며(솔로몬의 시가 16:4) 필로(Philo)는 양심이 어떻게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가를 언급한 바도 있다. 혹자는 본문의 말씀이 바울 스스로 양심과 싸우는 상태
를 묘사한 것이라 생각한다(Bruce). 즉 바울은 유대교적 열정으로써 기독교 핍박에 앞
장섰지만 날이 갈수록, 특히 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하고서 스스로 잘못된 길로 가고 있
다고 느끼며 점차 혼란과 번민에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는 감히 하나님
의 뜻을 대적하고 그 정해진 섭리를 거역했던 바울의 무모함과  어리석음을 꾸짖으신
말씀으로 이해함이 더 무난하겠다.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를 박해하다가 도리어 그리
스도의 사도가 된 것이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주권적(主權的) 역사에 의한
것임을 이속담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15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ㅇ네가 핍박하는 예수 -
   본절의 문구는 9:5와 문자적으로 일치하나 22:8에는 '나사렛'이란 말이 첨가되어
있다. 본문에 대한 보다 자세한 주해는 9:5;22:8 주석을 참조하라.

16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ㅇ일어나 네 발로 서라 -
   본문에서는 '아나니아'에 대한 이야기가 생략되고 대신 아나니아를 통해 받은 소명
에 관한 이야기를 바울이 직접 주님으로부터 들은 것으로 진술되고 있다. 누가에게 있
어서 바울이 소명의 인식을 아나니아를 통해 전해 받았건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았건
그것 자체가 중요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누가는 상황에 맞추어 요점을 분명히 하기 위
하여 부수적인 것들은 언급하지 않고 핵심적인 내용만을 전달하고자 했다. 가령 아나
니아에 관한 이야기는, 유대인을 상대로 말할 때는 자신의 유대교적 경건성과 정통성
을 증거하기 위해 꼭 해야 하는 이야기였지만 지금과 같이 헬라적 청중들까지 포함된
상황에서 변증할 때는 유대교적 경건과 정통성을 그렇게 중시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
다. 다만 여기서는 불가항력적인 주님의 부르심에 바울이 어떻게 이끌림을 당했는가를
증언하는데에 초점이 맞춰졌다. '네 발로 서라'는 말씀은 에스겔과 예레미야의 소명을
상기시킨다(겔 2:1, 3;렘 1:7, 8). 뿐만 아니라 바울의 소명 내용도(18절) 사 42:5-7
에 나오는 여호와의 종의 소명과 유사한 면을 보여준다.
ㅇ나를 본 일...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 - 주께서 바울을 부르신 것은 그를 일꾼으
로 삼아 보고 들은 바를 증거하게 하려함이었다. 여기서 '나를 본 일'은 지금 다메섹
에서 경험한 것을 가리키며, '장차...나타날 일'은, 앞으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보
여질것(16:9, 10;18:9;22:17, 18;23:11;27:23;고후 12:1-4, 7)을 가리킨다. 이는 바울
이 두려움과 외경심에만 사로잡혀 있을 것이 아니라 주께 받은 사명을 적극적으로 수
행해 나가도록 명령받았음을 시사한다.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ㅇ구원하여 -
   헬라어 '여사이루메노스'는 '여사이레오'
의 현재 중간태 분사로, '선택하여'로도 번역이 가능한 단어이다. 가령 고대 헬라어
와 70인역 사 48:10에서는 '선택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파피루스 문서들에서는 두
가지 의미 모두로 다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학자들 간에는 '선택하여'(Overback,
Randall)로 보는 견해와 '구원하여'(Bruce, Haenchen, Meyer)로 보는 견해로 갈린다.
그런데 본서의 다른 곳에서(7:10, 34;23:27)이 단어가 '구원하다'의 뜻으로 사용된 사
례가 있다는 점에서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리라 본다. 사실상 바울은 과거 여러 차
례의 위기 상황에서 구원함을 받았었다(9:23-25;21:30-32;23:12-24;25:3).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ㅇ눈을 뜨게 하여...빛으로 -
   이 본문은 사 42:6, 7의 말씀을 연상시킨다. 빛으로 세워진 하나님의 종이(사
42:6) 어두움에서 헤매이고 있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여 빛의 세계로 인도해야 하듯이
바울도 사람들의 소경된 영안을 뜨게 하여 죄악과 방탕한 어두움의 생활에서(롬 1:24;
엡 5:18) 벗어나 빛을 발견케 해야 할 사명을 받았다(요 8:12;요일 1:5).
ㅇ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 어두움이 사단의 권세를 뜻한다면 빛은 하나님의 지
배를 뜻한다. 이것을 골 1:13에서는 흑암의 권세와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대비시킨다. 흑암의 세계에서는 죄의 지배를 받으나 하나님의 지배 아래서는 죄사함을
받고 그의 자녀로서 기업을 얻게 된다. 한편 본절에서 사용된 신학적 언어는 개종의
특성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전통적인 이해를 반영하며 아그립바가 유대교적 테두리에서
제대로 이해하기는 무리였을 것이다(H. Marshall).

19 아그립바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ㅇ하늘에서 보이신 것...거스르지 아니하고 -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결코 자의적인 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거역
할 수 없는 사명임을 강조하고 있다(렘 20:9). 그가 그리스도인된 것이 자신의 능력이
나 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진 것처럼(13-18절), 복음을 증거하는 것도 거역할 수 없는
소명이었다. 만일 그가 자기의 본 바를 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
하는 셈이었다. 만일 그가 자기의 본 바를 전하지 않는다면, 거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
역하는 셈이었다. 바울은 이런 논리로 자기 사역의 정당성을 납득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청중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논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그의 삶을 불
가항력적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은 그의 삶의 일관된 내용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하나
님의 주권과 영원한 예정(豫定)을 이야기할 수 있었고(롬 9:19-24;엡 3:9-11),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강하심(고전 15:43), 자신의 죄악됨과 하나님의 거룩하심(딤전
1:15)에 대해 말할 수 있었다.

20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ㅇ다메섹...예루살렘...유대 온 땅과 이방인 -
   마치 예루살렘 교회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유대에서 사마리아로, 사마리
아에서 땅 끝까지 점진적으로 확대되어 전파된 것과 같은 형태로 서술한 듯하다. 실제
로 바울은 다메섹의 회심 이후 먼저는 다메섹에 있는 사람들에게(9:19), 다음에는 예
루살렘 사람들에게(9:28, 29) 복음을 전파했다. 그런데 '유대 온 땅'이라는 표현은 갈
1:22 등으로 미루어 다소 과장된 듯하다(Bruce, Marshall, Haenchen).
ㅇ회개하고...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회개의 촉구는 가
장 기본적인 일이다. 세례 요한도 그랬고(마 3:2), 예수님도 그랬으며(마 4:17), 초대
교회의 사도들도 회개를 선포했다(행 3:19). 회개는 단순히 과거의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그릇된 행실을 중지하고 나아가 삶의 방향을 완전히 전환시켜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18절) 옮겨가는 것으로 복음의 중요한 부분이 된
다.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는 표현은 마 3:8의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를
상기시키는데, 바울은 이를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로 표현한 바 있다(갈 5:22, 23).
진정한 의미에서의 회개와 구원은 그 열매로써 증거된다 하겠다.

21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ㅇ성전에서 나를...죽이고자 -
   바울을 지금 심문받는 자리에 서게 한 직접적인 죄목은 소위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
이었다(21:26-28). 그런데 바울은 그 이야기를 생략하고 있다. 대신에 그는 자기가 유
대인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한 일과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 했던 일을 연관시켜
설명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적 핵심을 드러내고자 했다. 성전을 더럽혔다는 추측에 의한
정죄는(21:29 주석참조) 하나의 계기일 뿐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 했던 보다 궁극
적 이유는 그가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그
것을 실천한 까닭이다(22:21, 22). 유대인들의 배타적 선민 의식을 잘 알고 있던 아그
립바는 바울의 소명 즉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것
을 들었을 때 유대인들이 왜 그토록 바울을 죽이려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을 것이
다(Bruce).

22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것 밖에 없으니

ㅇ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죽음의 위험에 직면하였으나 구사일생
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다(21:31, 32;23:12-15).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었
으며 17절에 기록된 약속의 성취이기도 했다.
ㅇ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 앞에서는 복음이 민족의 차별을 뛰어넘어 유대인에게도
이방인에게도 전파되어야 함을 말했으며(17, 20절), 여기서는 복음이 신분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전파되는 것임을 밝힌다. 복음은 어떤 특정한 계급이나 집단의 이익을 대변
하거나 편파적(偏頗的)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이에게 공평
하게 혜택을 준다(요 3:16).
ㅇ선지자들과 모세 - '율법과 선지자'(13:15)와 같은 뜻의 표현으로 구약 전체를 요
약한 말이다. 바울이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은, 자기가 전파한 복음이 모세나 선지자들
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와 일치하며 따라서 유대인들이 자기를 반대해야 할 이유
가 없다는 사실이다(롬 1:2;16:26).

23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ㅇ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 -
   사 53장의 고난 받는 종에 대한 예언을 기독교는 예수께 적용하여 예수의 수난을
예언한 것으로 이해하였지만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메시야에게 적용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은 고난받고 죽임을 당하는 의미에서의 메시야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들이 기대한 메시야는 영웅적 존재로서 옛 유다 왕국의 영광을 재건하여 하나님의
공의로 통치할 지상적.정치적 인물이었다(막 8:27-38 주제 강해 '메시야 사상의 전개
';막 10:35-45 주제 강해 '메시야 예언의 양대 조류' 참조).
ㅇ먼저 다시 살아나사...빛을 선전하시리라 - 메시야가 이방 세계를 포함한 만방의
빛이 되시리라는 예언은 사 42:1-7;49:6;60:3 등에 나온다. 사두개인을 제외한 대부분
의 유대인들이 부활을 믿고 있었으나, 메시야가 고난을 받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그들로서는 메시야가 죽었다가 첫번째로 부활하리라는 생각 역시 할 수가 없었다. 그
러나 분명 예수는 메시야로서 고난을 당하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잠자는 자
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전 15:20). 뿐만 아니라 그 메시야는 유대 민족은 물론이고
모든 민족에게 빛을 선전하신다. 한편 '선전하시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탕겔로
'는 '공포하다', '선언하다', '전도하다' 등의 뜻을 지닌다.
빛을 선포한다 함은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것이요(약 1:17;요일 1:5), 어두움이 아니라
밝음을,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선포한다는 말이다(18절).

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ㅇ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미쳤도다 -
   봇물이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바울의 말을 베스도가 가로막았다. 그러나 바울의 변
증은 이 부문에서 사실상 끝나고 있다(H. Marshall). 가이사랴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종교에 대해 문외한인 베스도는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부활
에 관한 이야기를 너무나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바울을 볼 때 순간적으로 그가 미
친 것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또한 베스도의 생각에는 바울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
에 그토록 몰두함으로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민족적 차원의 반감을 불러 일으키게끔
자초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Bruce). 이렇듯 현세적이고 실제적인 분야에만
주된 관심이 있는 베스도의 모습은 복음의 신령한 메시지에 초미(焦眉)의 관심을 보였
던 구브로 총독 서기오 바울과 대조를 이룬다(13:7, 12).
ㅇ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 베스도는 바울이 너무나 공부를 많이 해서 미친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베스도가 바울의 폭넓은 지식과 논리적이고 막힘이 없는 달변
에 깊은 감명을 받았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사실상 바울은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
에 정통하게 되었으며 그밖에는 희랍의 철학이나 당시의 최고 학문에 대해 폭넓으 지
식이 바울을 미치게 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베스도가 자신의 무지를 바울의 미친 탓
으로 돌렸을 분이었을 것이다. 복음에 대한 확신과 소명에 대한 철저한 헌신은 바울로
하여금 미친 자라는 소리까지 듣게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소리를 듣는 것에 개
의치 않았으며 도리어 하나님을 위하여 미친 자되었음을 고백하였다(고후 5:13). 주님
께서도 살아 생전에 미친 자라는 소리를 들으셨다(요 10:20).

25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ㅇ참되고 정신차린 말 -
   '정신차린'에 해당하느 헬라어 '스프로쉬네스'는 '건전
한', '올바른'을 뜻하는 '소스'와 '생각', '마음'을 뜻하는 '프렌'
의 합성어로 '건전하고 정상적인 마음'을 뜻한다. 자신의 무지를 바울의 미친 탓으로
돌리는 베스도의 비난에 대해 바울은 조금도 이성을 잃지 않고 정중한 태도로 자신의
온전함을 진술하고 있다. 이는 아나니아에게 심한 말로 맞섰던 것과는 대조가 되는 장
면이다.

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ㅇ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담대히 말하노니 -
   바울은 베스도가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함을 알고 더이상 그에게 말하지 않
는다.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 아그립바 왕에게 호소
했다. 바울은 결코 비굴하지 않게 모든 것을 '담대히' 말하고 있다. 여기서 '담대히
말하노니'의 헬라어 '파르레시아조메노스'는 '파르
레시아'에서 온 말인데, 이는 '모든'(all을 뜻하는 '판'과
'말'(word)을 뜻하는 '레시스'의 합성어로 '모든 것을 거리낌 없이 말
함'을 의미한다. 사실상 바울은 숨기거나 왜곡시키지 않고 진실대로 말했고, 아그립바
왕은 대제사장에 대한 임명권을 가진 성전의 보호자였고(Lenski), 유대교와 구약성경
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했으므로 바울의 증언을 충분히 이해하였을 것이다
ㅇ한편 구석에서...아니 로소이다 - 바울은 자기의 증언이 어떤 은밀한 종교 집단의
주관적인 주장이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진 생생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요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공공연하게 선포된 것임을 강조한다. 예수의 삶이 공개적인 것이었고
(눅 22:53). 그분의 죽음 또한 여러 증인들에 의해 목도 되었고(눅 23:26, 35-37). 예
수의 부활 역시 '빈 무덤'이라는 객관적 증거와 현현 체험자들에 의해 뒷받침되었던
것처럼(마 28:9-11;막 16:12, 14), 제자들의  복음  선포도  공개적으로 행해졌다(20
절;1:8;2:14;막 16:20).

27 아그립바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ㅇ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
   이 말 속에는 '선지자를 믿는다고 하면 예수의 메시야되심과 부활 또한 당연히 믿
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뜻이 담겨있다. 사실 경건한 유대인이라가면 누구나 선지
자를 믿는다. 아그립바는 성전의 보호자로서 선지자를 믿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었
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유대인으로서의 교육을 받았다고는 하나 그것은 피상적 지식
차원에 불과하였으므로 예언된 바 메시야에 관련된 구절들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Meyer). 따라서 이어지는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는 말은 그에게 마치 아
부 내지는 조롱의 어감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다.

28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ㅇ적은 말로...그리스도인이 -
   본문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형용사 '올리고스'에 대한 해석 문제이
다. '올리고스'는 양적으로 '적은' 것을 나타내는 형용사이다. 그런데 이 말이 전치사
'엔'과 함께 쓰일 때는 시간의 연속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하여 '엔 올리고
'는 개역 성경과 같이 '적은 말로'도, RSV처럼 '짧은 시간 안에
'(in a short time)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그런데 29절과의 관련성 속에서 생각한다면
전자의 번역이 더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밖에는 '적은 노고'(Vincent)로 해석하는
견해와 '거의'(Luther)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다소 거리가 멀다. 아그립바왕의 대답은
상당히 애매하여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판별하기가 어렵다. 그리하여 혹자는 그의 대
답에는 냉소적(冷笑的)인 부정의 의미가 있다고 보기도 하며(Bauernfeind), 혹자는 간
접적인 긍정의 뜻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Overbeck, Haenchen).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만일 아그립바가 긍정의 뜻을 확실히 표현했다면 바울을 미친 자로 생각한 베스도
의 말이 마음에 걸렸을 것이고 전격적으로 부정했다면 유대인들의 눈이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바울의 말에 크게 동조도 않고 반대도 않는 미지근한 태도를 택
했으리라 본다.

29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ㅇ말이 적으나 많으나...모든 사람도...나와 같이 되기를 -
   여기서 '말이 적으나 많으나'는 '길거나 짧거나'(whether long or short)로도 번역
이 가능하다. 결정적인 의미의 차이는 없다고 본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의 대답이 부
정이건 긍정이건 간에, 그리스도인이자 복음 증거자로서의 자산에 대한 강력한 자부심
과 아울러 애정 어린 소망을 기원법의 동사(워사이멘)를 사용하여
진술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 자신과 같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뜻하며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게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18절). 바울의
마지막 말과 행동은 매우 감동적이다. 그는 가이사랴 최고의 군세가들 앞에 상대적으
로 왜소하고 초라해 보이는 모습으로 서 있다. 더구나 그의 손에는 사슬이 매여 있다.
그런 모습의 바울이 자기 앞에 앉아 있는 권세가들에게 자신에 찬 목소리로 진정한 영
적 자유에로의 초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슬 묶인 손을 들어 보이며 마지막 말을 맺
을 때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아마 깊은 감명을 받았을 것이다.

30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ㅇ왕과 총독과 버니게와...다 일어나서 -
   바울의 최후 진술이 끝나자 아그립바 왕과 총독과 버니게 그리고 함께 배석했던 사
람들이 일어섬으로써 그날의 청문회는 조용히 마감을 하게 되었다. 더이상 바울을  비
난하거나 미쳤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31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만한 행사가 없다 하더라

ㅇ심문소를 빠져나간 참속자들은 다른 장소로 옮겨가 바울의 증언에 대한 논의를 하였고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거나 결박하여 둘 만한 혐의점(嫌疑點)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바울의 무죄는 천부장 루시아(23:29), 베스도(25:25)에 이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32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뻔하였다 하니라

ㅇ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자기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을 하는 장면이 이어지는데, 여기서
바울의 무죄가 최종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않았다면 석방
이 되어도 무방하다는 것이 아그립바의 결론이다. 아그립바는 그밖에도 베스도가 항소
이유서를 작성할 때 여러가지 조언을 해주었을 것이다. 바울의 무죄가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석방되지 않는 것에 대한 표면적인 이유는 그가 가이사에게 항소를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바울이 석방되지 못하고 로마의 가이사에게 가야되는
현재 상황의 배후에는 주님의 뜻이 있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23:11). 바울의 석방
되지 못함은 도리어 그에게 가장 안전한 로마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