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 eJtevrou"(헤테루스)는 "기타, 다른"의 뜻으로 열 두 제자와 분명히 구분되게 하기 위해서 사용한 말이다. 칠십인은 사본에 따라서 72인과 70인으로 기록되었다. 이것은 성경 사본들이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전해 내려오기 때문에 정확하게 어느 한쪽을 택하여 옳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또한 주석가들도 두 부분에 대해서 모두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추세여서 우리는 숫자에 너무 치중하면 안될 것 같다. 이런 혼란은 이스라엘 장로들이 모두 합하여 70인으로 보는 견해(출24:1, 민11:16-17, 24-25)와 70인에 엘닷과 메닷을 포함하여 72인으로 보는 견해(민11:26)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에는 70개의 민족들이 있다고 여겨졌는데(창10장), 구약을 헬라어로 변역 한(예수님 때 번역되어 사용한 구약성경) LXX역에서는 세계의 민족을 72민족으로 보고 있다. 또한 산헤드린 구성원은 70인 이었는데 70인역을 준비한 장로들은 모두 72명이었다. 그리고 외경 에녹3서 17:8, 18:2-3에는 세계에는 72왕자와 72언어가 있다고 여겨졌다. 둘씩 열 두 제자를 파송할 때처럼(막6:7) 두 사람씩 짝을 이루어 보내신다. 이것은 서로 돕고 증인되게 하시기 위해서였다(민35:30, 신19:15, 전4:9, 마18:16, 딤전5:19). 이러한 파송은 후에 초대교회의 선교 모델이 되었다(행3:1, 행4:1, 행13:1-3, 행15:27). 이들에게 예수께서는 조금 다른 형태이기는 하지만 전에 사용하신 말씀으로 지시하신다(마9:37, 요4:35). 2절 추수할 것은 많되는 너무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며 일군이 적으니는 이들이 결코 지체해서는 안되며 현재의 70인 제자보다도 더 많은 제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4절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는 12제자를 파송 하실 때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눅9:3)와 같은 의미로 전달한 것이다. 신을 가지지 말며는 맨발로 가라는 뜻이 아니라 이들은 여행을 위해 보통 여유 있게 하나 정도의 신발을 더 가지고 다녔다. 언제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사람들이 여행에서 필요한 것들 때문에 여행을 지체해서는 안되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여행용품에 의지하는 것을 경계하고 계신다. 9, 11절 가까이 왔다 h[ggiken(엥-기켄)는 "가까이 오고 있다가 아니라 가까이에 와 있다"란 뜻(마3:2, 마4:17, 마10:7, 마26:45, 막1:15, 막14:42, 눅21:8, 20, 롬13:12, 벧전4:7). 10절 영접지 아니하거든 devcwntai(데코마이)는 "영접하다"인데 사신들을 환영하거나 그들이 전달해 주는 통지문을 환영하는 것을 묘사한 말이다. 이것은 제자들이 개인의 자격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권위로서 대언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10:13-16 예수를 영접치 않는 자들의 운명
v 13절 화 있을찐저 Oujai(우아이)는 보복을 선언한 것이 아니라 슬픔에 대한 탄식으로 [아 슬프도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고라신은 가버나움 북쪽 4km 지점, 요단강 서쪽 갈릴리해 북쪽에 있는 마을로 성경에 오직 이 말씀에만 나온다.(같은 사건 마11:21참고). 이곳에서의 사역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없으나 가버나움에서 4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분명히 많은 역사가 있었음을 말씀하신다. 벳새다는 오병이어가 일어났던 곳으로(눅9:10-18, 막6:45, 요1:44) 많은 병자들도 고치셨다. 두로와 시돈은 갈릴리 북쪽의 해변에 위치한 성읍들로 페니키아 제국의 상업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죄악에 빠져 있어서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경고하셨으나 그들은 순종하지 않아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사23장, 겔26-28장 참고). 베옷 savkkw(삭코-)는 염소 털로 만든 거친 옷으로 회개나 애도의 표시로 입었다(왕하21:27). 재 spodw'/(스포도-)도 애도의 표시(욥2:8, 욘3:6, 마6:16)로 '삼베'와 연결되어 사용하기도 했다. 15절 가버나움에서는 얼마나 많은 일들을 행하시고 거하셨는지 예수께서는 본(本) 동리라고 부르실 정도였다(마9:1).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그들은 스스로 하늘 가까이에까지 높아진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로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고 하셨다(사14:13-15 참고). 여기서 하늘과 음부는 대칭으로 천국과 지옥을 표현하고 있다.
10:17-24 칠십 인의보고
17절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이들의 사역이 매우 성공적이었음을 가리킨다. 이들이 예수님이 하시던 귀신들을 제어하는 능력을 체험하게 된 것은 큰 기쁨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최종적인 목적은 귀신을 제어하는 것뿐만이 아니요 결국은 이름이 20절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신다. 하늘에는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생명 책을 가리킨다(출32:32, 시69:28, 단12:1, 히12:23, 계13:8, 계20:12). 기록된 ejggevgraptai(엥게그랍타이)은 "기록하다, 등록하다"의 뜻으로 동사 gravfw(그라포) "새기다"의 완료 수동태로 하늘에 이름이 기록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 적인 것임을 말한다.
10:25-28 영생에 대한 율법사의 질문
마22:34-40, 막12:28-34 비교하라 마태와 누가는 율법사가(마22:35)로 마가는 "서기관"으로 기록했다. 이 둘은 잘못 기록된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은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들로 이미 바뀌어 있었다(☞ 서기관을 참고하라). 마태와 누가는 시험하는 율법사로 나오는 반면 마가는 진지한 바른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마태와 마가에서의 질문은 "모든 계명을 중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였다. 그런데 누가는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로 나온다. 27절에서 마가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나오는데 여기서는 율법사가 대답한 것으로 나온다. 이 사건의 경우는 세 복음서의 입장으로 전체적으로 다시 정리해야 한다. 이 율법사는 분명히 예수께 나아와 질문한 것은 틀림없다. 그런데 시험하려고 온 것인지, 바른 대답을 듣기 위해서 나온 것인지 마태, 누가와 마가의 경우가 다르게 기록되었으니 혼란스럽다. 마태, 누가의 두 기자가 함께 시험하기 위해서 나온 것으로 되어있어서 여기에 마가의 것을 넣어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그렇게 볼 때 이 사람은 강한 악의를 강조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종교 지도자가 그렇지 못한 예수께(그들의 입장에서) 올바른 대답을 줄 수 있는지를 물은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는 방식을 종합하면 처음에 율법사는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마22:36, 막12:28)와 연이어서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25절)를 함께 질문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 그이게 먼저 질문을 던진다. 26절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하였다. 당시의 율법사들은 모세 오경의 핵심을 담은 경문을 이마나 손목에 작은 함에 묶어 가지고 다녔는데 예수께서 이 경문을 가리키신 것으로 보인다. 이 사람은 27절 대답하여 ... 사랑하라 하였나이다고 대답했다. 신명기 6:5의 전반주의 내용을 요약하여 가지고 다닌 것을 말한 것 같다. 그리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레19:18의 인용으로 십계명 후반부를 인용하여 말한 것으로 보인다. 이 대답을 이끌어 내신 뒤 마가의 것처럼 막12:29-31 "이스라엘아 들으라"고 하시고 다시 한번 강조하신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편집자에게 이 사건의 경우 한가지를 선택하라면 마가의 것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것은 이 율법사가 마가에서 말한 것처럼 "선생님 옳소이다"로 고백한 것처럼 이 율법사의 입에서 이렇게 바르게 정리되어 말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는 사건의 정황보다 더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과 서로 사랑하라"하신 계명을 지켜 행하는 일이다. 틴텔주석에서는 이 사건을 별도의 사건으로 보고 있다. 비슷한 주제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시간적으로 차이가 있으며 마태나 마가에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셨지만 여기서는 율법사가 요약하고 있다는 사실에 별개의 것으로 보고 있다. )
10:29-37 선한 사마리아인
이 비유는 누가복음에만 나타난다. 이 율법사는 여기서 마치지 않고 계속해서 예수님께 질문공세를 폈다. 그것은 이웃에 대한 개념이었다. 유대인이 생각하는 범주란 유대인 안에서만 존재하며 이방인은 하나님의 사람에서 제외하였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 속에 있는 이웃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지 못했다. 30절 예수께서는 직접적인 대답을 주시지 아니하시고 한 여행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므로 스스로 깨닫게 하셨다. 이 비유의 이야기는 본문의 문자그대로 이해해도 어려움이 없다.
10:38-42 마리아와 마르다
저희가 길 갈 때에 요한복음 11:1에 예루살렘에서 2마일 떨어진 베다니에 살고있는 자매이다. 집으로 영접한 것은 마르다였다. 마르다의 자연스런 영접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예수와 이들은 초면이 아니었음을 암시한다(요11:5). 마르다는 마리아의 언니이자 나사로의 동생이다(요11:19, 20, 요12:2, 3). 나사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일이 있으며(요11, 12장) 이 마리아는 예수의 몸에 향유를 부은 주인공이다. 그는 예수를 집으로 영접하고 많은 일 때문에 진정 예수의 영접에 합당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와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식사준비를 분주하게 하고있음이 역력하다. 42절 혹 한가지만 eJno;"(헤노스)는 "하나, 풍부히"의 뜻으로 한 그릇의 한 반찬만 있어도 충분하다는 말일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마리아는 이 좋은 편 th;n ajgaqh;n merivda(텐-아가렌-메리다) "최상의 그릇, 요리"라는 뜻으로 이것을 택하였으니 아무리 많은 일과 바쁜 일이 있다고 해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 최상의 요리보다 나은 것이 될 수 있다는 의미도 있다. 사실적으로는 마리아는 번거로운 많은 요리에 관심이 없고 맛깔스런 한가지 음식을 준비해 놓고 있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