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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스가랴

[스크랩] 스가랴(4): 전쟁과 평화의 왕 (12-14장)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8. 23:55

스가랴(4):  전쟁과 평화의 왕 (12-14장)


제 4장 이스라엘의 속죄의 날(12-14장)

 


1. 예루살렘의 포위 (12장)

 

1-1. 예루살렘의 포위와 구원(1-4)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1),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국민에게 혼취케 하는 잔이 되게 할 것이라. 예루살렘이 에워싸일 때에 유다에까지 미치리라(2). 그 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으로 모든 국민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무릇 그것을 드는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 만국이 그것을 치려고 모이리라(3).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모든 말을 쳐서 놀라게 하며 그 탄 자를 쳐서 미치게 하되, 유다 족속은 내가 돌아보고 모든 국민의 말을 쳐서 눈이 멀게 하리니(4)..."

  스가랴 예언의 후반부에 나오는 첫 번째 경고는 9-11장에 기록되어 있으며, 두 번째 경고는 12-14장에 나타나고 있다. 이 부분은 이스라엘 역사의 종말을 다루고 있는 점에서 예언서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슥 12장에 언급된 악한 동맹과 전쟁은 14장에 나오는 예고들과 비교되어야 한다. 그 동안 이 구절은 바벨론 포로 전에 있었던 느부갓네살 왕의 침략을 언급한 것으로 설명되어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여러 가지 이유로 불가능하다. 특히 본문에 언급된 전쟁의 결과는 전혀 느부갓네살 때와 일치하지 않는다. 어떤 학자들은 슥 12:1-9을 9장에 기록된 마카비 정복과 연관시켜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에 본문에 기록된 민족들의 동맹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이 일은 심지어 1세기의 로마 전쟁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과거보다는 미래에 일어날 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슥 12장은 열국들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결정적인 죽음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포위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일은 메시아께서 통치하시기 직전의 상황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때에 하나님은 그들의 악한 계획을 멸하실 것이다. 이러한 무겁고 위협적인 예언은 이스라엘의 이익과 축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점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으로 볼 수 있다. 이 예언은 이스라엘의 대적들에게는 위협적인 것이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영원한 축복을 약속하고 있다. 12:1에서 하나님은 하늘을 펴시며 땅의 기초를 세우시고, 사람의 안에 심령을 지으신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표현들은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자기의 창조 세계를 보존하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창조자와 보존자로 장엄하게 묘사한 것은, 앞으로 예고될 여러 가지 일에 대한 의심과 불신앙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획하신 일을 능히 성취하실 능력을 갖고 계신다.

  열국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러 올 때에, 하나님은 그 도시로 하여금 그 적들을 취하게 만드는 잔이 되게 하실 것이다. 여기에서 잔은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과거에 이스라엘도 범죄한 후에 이 잔을 마신 적이 있었다. 대적들은 예루살렘을 비롯해서 여러 곳을 공격할 것이나, 그들은 치명적인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대적의 패배가 극히 크기 때문에, 슥 12:3에서 이를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무거운 돌이되게 하여 그 돌을 들려고 하는 자는 크게 상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육상 경기와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제롬에 의하면, 당시에는 젊은이들에게 무거운 돌을 들게 함으로 그들의 힘을 측정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읍과 백성을 치려는 자들을 궤멸시킬 것이다. 이에 대한 분명한 과거의 예로써 주전 701년에 있었던 산헤립의 예루살렘 공략을 들 수 있다. 천하만국이라는 표현은 이 악한 동맹의 규모가 얼마나 큰 것이지를 보여준다. 당시 팔레스타인 전쟁에서는 기병이 주력 부대를 형성했다. 대적은 훌륭한 군사력을 갖춘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무기를 파괴적인 무기로 바꾸어 버림으로 그들이 힘을 잃게 만드실 것이다. 대적의 말들은 공포에 떨고 장님이 되고, 말탄 자들은 미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대적들에게 이와 같이 치명적인 혼란과 소동을 일으키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크신 사랑과 동정의 눈을 가지고 예루살렘과 그 백성들을 바라보실 것이다. 그러나 지상의 열국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상에서 완전히 없애려고 한 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1-2.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5-6)

  "유다의 두목들이 심중에 이르기를 예루살렘 거민이 그들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다 할찌라(5). 그 날에 내가 유다 두목들로 나무 가운데 화로 같게 하며 곡식단 사이에 횃불 같게 하리니, 그들이 그 좌우에 에워싼 모든 국민을 사를 것이요 예루살렘 사람은 다시 그 본 곳 예루살렘에 거하게 되리라(6)."

  하나님은 두 가지 방법으로 승리를 성취하신다. 우선 대적들을 압도하여 그들에게서 힘을 빼앗고,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시고 강하게 하여 대적들에게 저항하고 정복케 하신다. 스가랴는 그 승리가 초자연적이라는 것을 명백히 밝힌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힘을 주실 것이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열방들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할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 유다의 지도자들은 나무 가운데 있는 화로 같이 되고, 곡식단 사이에서 타는 횃불 같이 될 것이다. 그들은 사방에서 타는 불이 되어 적들을 나무처럼 태워버리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보호를 받고 대적들은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이스라엘을 결코 이기지 못할 것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완전한 승리를 구두게 되고, 그들은 자기 성읍인 예루살렘에서 다시 안전하게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1-3. 예루살렘의 구원(7-9)

  "여호와가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하리니 이는 다윗의 집의 영광과 예루살렘 거민의 영광이 유다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7).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거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8).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열국을 그 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9)."

  하나님은 모든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하실 것이다. 여기에서 유다 장막과 잘 정비된 수도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 때에 공격을 받기 쉽고 무력한 원방의 지역들을 먼저 구원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능력이 약하고 방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먼저 구원하여 구원이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리실 것이다. 인간은 항상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인간을 겸손하게 만드실 것이다. 12:8에서는 보증의 말씀과 방어의 방법이 동시에 제시되고 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방어하는 자가 되실 것이며, 동시에 그들을 강하게 하셔서 그들이 모든 능력과 한계들을 극복할 수 있게 하실 것이다. 그때에는 지극히 연약하여 비틀거리는 사람들도 다윗처럼 용맹한 용사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 다윗은 전쟁에서 가장 용맹한 용사의 상징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 날에 다윗 족속들은 하늘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진 하나님의 사자와 같은 힘을 부여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치러 오는 대적들을 멸하실 것이다. 12:9의 진술은 약점이 없는 인간, 특히 12:8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 때에 이스라엘에게 세계적인 축복을 주실 것이며, 이를 반대하는 열국들을 단호하게 징계하실 것이다.


1-4. 은총의 영(10-11)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10).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11)."

  하나님은 지금까지 열국들에 대한 자신의 의로운 심판을 알리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열국들 뿐 아니라 이스라엘 안에서 성취해야 할 일도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아직 축복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구세주이신 메시아를 신뢰하거나 메시아에게 순종하지 않고 있었다. 스가랴 는 12장의 나머지 부분에서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 보기 어려울만큼 생생한 회심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과거의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이러한 사건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이 구절은 다가올 이스라엘 역사의 한 시점에 성취될 것이다. 이는 국가적인 속죄의 날이 될 것이다. 이 날에 하나님은 왕궁과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거민들과, 그리고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실 것이다. 은총과 간구라는 말은 모두 동일한 히브리 어근에서 파생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능력 있게 임하실 성령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 날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확신의 영을 부어주실 것이며, 이로 인해 그들은 믿음의 기도를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때에 하나님께 용서와 은총을 구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완전히 파멸된 상태에서 자신이 찔렀던 메시아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들이 메시아를 진지하게 바라볼 때에 그들은 이전에 자신이 발견하지 못했던 일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은 메시아를 거부함으로 불순종했던 조상들의 태도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어급된 "찔림"을 "모욕"으로 번역해야 한다도 주장한다. 그러나 이 번역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구약 성경 전체에서 몸을 찌르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구절 이후에 나오는 애통함 역시 모욕으로 인한 애통함이라고 할 수 없다. 탈무드에서는 이 구절을 요셉의 아들로서 죽임을 당할 메시아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하는 사람에게 평화가 있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랍비들은 성경적인 근거 없이 다스리실 메시아와 고난 받으실 메시아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자세히 살펴 보면 이 구절이 메시아의 두 번에 걸친 도래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스가랴가 언급하고 잇는 것은 순교자가 아닌 미래에 오실 메시아이다. 이 구절을 연구한 가장 오래된 학자들은 이 구절을 이렇게 이해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장차 회개의 영을 받게 될 것이며, 이로인해 자신이 거부했던 메시아를 생각하고 애통하며 회개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애통함은 독자를 잃은 어미처럼 처절한 것이 될 것이다. 당시에 팔레스타인에서는자식을 잃은 것은 저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의 애통은 처절한 것이었다. 그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은 독자를 잃은 어미처럼 슬픔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12:10에서는 이러한 애통함이 개인적으로 가장 극심한 고통으로 비유되고 있고, 12:11에서는 가장 큰 국가적인 슬픔으로 비유되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재난은 히스기야 시대로부터 유대 국가가 멸망할 때까지 백성들에게 가장 신망을 받았던 요시야 왕이 애굽 왕 바로느고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말한다. 예레미야는 이 일을 위해서 특별한 장송곡을 만들기도 했다. '하다드림몬'이란 명칭은 수리아의 신 하다드와 림몬이라는 두 이름이 결합된 것이다. 이것은 므깃도 근처에 있는 에스드라 엘론 대평원의 남족에 있는 요새의 이름이다. 이 곳은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 중에서 유명했던 곳이며, (계 16:16)에 의하면 앞으로도 유명해질 곳이었다. 바로 이곳에서 그 유명한 아마겟돈 전쟁이라는 이름이 유래하게 된다. (제롬에 의하면) 초기 기독교 시대에 이 곳은 막시아오폴리스라고 불리웠다. 그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 예루살렘 사람들은 크게 슬퍼하며 애통했다. 이스라엘은 장차 이러한 애통함과 같이 자신들이 거부하고 찌른 메시아를 보고 슬퍼하며 통곡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건한 슬픔과 회개는 하나님이 부어주신 회개의 영으로 인해 일어나게 될 것이다.


1-5. 국가적인 애곡(12-14)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12),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13),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14)."

  스가랴는 민족적인 슬픔에 대해서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그는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특히 그는 민족적인 애통의 모습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때에 이스라엘은 보편적으로 애통하지만, 동시에 개인적으로 슬퍼하게 될 것이다. 스가랴는 그 민족이 각기 나뉘어져서 메시아를 거부한 일에 대해서 쓴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그때에 다윗의 족속이 애통하고 나단의 족속도 애통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나단이 선지자라고도 하고, 다른 이들은 다윗의 동생이라고 주장한다. 만일 전자가 옳다면 왕궁과 선지자들이 함께 애통한 것이 된다. 그러나 만일 후자가 맞다면 왕궁의 가장 높은 자들뿐 안라, 낮은 자들까지도 이 애통에 참여하게 된다는 의미가 된다. 어느 견해가 맞는지 정확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확증할 수는 없다.

  레위의 족속은 제사장의 가문을 의미한다. 시므이는 레위의 아들 게르손의 가문에 속한다. 서로 다른 제사장의 계급들이 여기에 함축되어 있다. 앞에서 지적한 지도자들, 그리고 그 땅의 평민들이 각기 따로 그 애통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이 구절들(12:11-14)에는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애곡할 것이라는 사실이 다섯 번이나 언급되었다. 이것은 아내들이 각기 따로 예배를 드릴 뿐 아니라, 따로 거처하는 유대인의 관습의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은 본문의 내적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스가랴가 의도한 것은 슬픔이 너무나 강렬하여 지상에서의 가장 가까운 관계인 남편과 아내 사이의 유대까지 초월한 것을 의미한다. 그때에 각 사람은 홀로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원할 것이다.


1-5. 나를 바라보라!

  우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의 길은 얼마나 단순하며 얼마나 영화로운가!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계획과 자아로부터 눈을 돌려 세상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 양에게로 향하고 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기쁜 회심의 시간에 이스라엘은 자기가 거부하고 찌른 메시아, 십자가에 못박힌 죄인들의 구주를 바라봄으로써 자기 죄가 용서받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 정결해진 땅 (13장)

2-1. 땅과 백성들이 성결케 됨(1-3)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1).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2) 사람이 오히려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 예언할 때에 칼로 찌르리라(3)."

  스가랴 13장과 12장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두 장은 모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는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구원을 받는 회복의 날에,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모든 백성에게 열리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샘이라는 상징은 아주 적절하다. 샘은 끊임없이 흐르기 때문에 계속해서 다시 물을 채워야 하는 성전의 대야와는 다르다. 정결하게 하는 샘은 오래 전에 갈보리 산에서 잠정적으로 열렸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을 위해서 열리게 될 것이다. "정결하게 하는 샘이 나의 앞에 있도다"라는 찬송은 이 구절을 토대로 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제 그들을 정결하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와 모든 더러움을 정결하게 할 계획을 세우셨다. 여기에서 스가랴가 언급하는 더러움은 의식적인 부정이 아니라 도덕적인 부정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칭의의 원리와 성화의 원리가 나타나고 있다. 그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사법적인 죄와 도덕적인 불의를 모두 제거하실 것이다. 지위와 계급을 넘어서 모든 사람들이 이 축복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죄와 더러움"이란 용어는 우상숭배와 관련되어 사용되어 왔다. 그러므로 13:2에서는 우상숭배에 대한 언급이 이어지고 있다. 죄와 부정을 정결케 하는 일이 있은 후에는 우상숭배를 페지하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때에 우상들, 거짓 선지자들, 그리고 더러운 영이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 땅에서 우상들이 끊어져서 다시는 그이름이 기억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들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우상들을 인정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우상 숭배를 금하셨지만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우상을 섬겨왔다. 그러나 그 날에는 이스라엘에서 우상 숭배가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더 이상 자기 마음대로 예언하여 백성들을 타락하게 만들지 못할 것이다.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하셔서 참 선지자도 필요없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힘을 주던 더러운 영과 함께 제거될 것이다.

  더러운 영이란 표현은 신약성경에 종종 나타나지만, 구약 성경에는 오직 이 곳에만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더러운 영은 슥 12:10에 언급된 은총의 영과 완전히 대조를 이루고 있다. 어떤 사람은 바벨론 포로 이후에 이스라엘에서 우상숭배가 제거되었기 때문에, 이 말을 "지상"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회가 성립된 이후에 이스라엘에서 우상 숭배가 다시 나타나게 될 것이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다(마 12:43-45, 계 13:11-18을 참고할 것). 그때가 되면 "짐승으로 나타난 로마"(계 13:-10)에 의해 힘을 얻고, 또한 그와 관계된 모든 우상숭배나 거짓 선지자, 그리고 죄인들이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계 13:11-18). 거짓 선지자를 제거하는 일은 가혹한 조치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모세는 율법을 통해서 가족 중에서 거짓 선지자가 일어나도 그를 제거하라고 지시했다. 모세 율법은 이러한 거짓 선지자를 돌로 치라고 명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죄있는 자가 칼에 찔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혈연 관계를 넘어서서 거짓 선지자들을 제거하는 일에 동참할 것이다(신 13:6-10, 18-20).


2-2. 거짓 선지자(4-6)

  "그 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이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며(4),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라 할 것이요(5),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6)"

  거짓 예언은 오랫 동안 하나님의 백성에게 덫이 되어 왔다. 스가랴는 장차 이러한 영적인 염병이 완전히 제거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 날에 거짓 예언을 하던 그들의 뻔뻔함은 수치로 변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했던 거짓 예언에 대해 온갖 변명을 대면서 부인하려고 애쓰게 될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참 선지자들이 입었던 털 옷을 입지 않게 될 것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양의 옷을 입은 이리처럼 하나님의 사자인 거처럼 위장을 했었다. 참 선지자들은 검소한 생활을 위해서 털 옷을 입었다. 이 털 옷은 그들이 선포하는 슬픈 메시지와 조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작의 거짓 예언이 탄로날 것을 두려워 해서 털 옷을 입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의 악한 행위를 감추기 위해서 온갖 거짓말을 꾸며내게 될 것이다.

  13:5-6에는 거짓 선지자들을 색출해 내는 광경이 묘사되어 있다. 그는 백성들에 의해 거짓 선지자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을 말했다는 죄목으로 고소당하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이 거짓 선지자라는 사실을 드러나면, 하나님을 열성적으로 섬기는 자들이 자기를 죽일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거짓 선지자인이 드러난 후에 위험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수단을 다 강구하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선지자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고 발뺌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종으로 지내왔으며, 따라서 자신은 선지자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선지자의 역할을 할만큼 자유로운 신분이 아니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항상 종으로서 주인에게 매여 있었기 때문에, 선지자의 역할을 할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혐의를 받게 될 것이다. 그의 두 팔 사이에는 선지자 일을 할 때에 가졌던 상처가 있었다. 그때에 그는 자기 팔에 난 상처는 자기의 친한 친구 집에서 입은 상처라고 변명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본문에 언급된 거짓 선지자가 적 그리스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로 인해 거부된다. 첫째, 이 구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말은 일반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적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으로 볼 수 없다. 성경에서 적 그리스도를 언급할 때에는 반드시 그의 인물됨과 업적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11:15-17에 언급된 참 목자이신 메시아와 이 거짓 선지자가 얼마나 대조적인지 살펴보라! 둘째, 스가랴 13장에 언급된 예언의 시대에는 적그리스도가 예언 계획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것은 적 그리스도가 지상에 출현하여 최종적인 운명을 맞이하고 난 후에 일어나는 일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에 심문을 받고 있는 사람이 적 그리스도일 가능성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팔의 상처에 대한 언급을 근거로 이 사람이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다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예수 그리스도는 두 팔에 상처를 입지 않고 손과 발목, 그리고 옆구리에 입으셨다. 또한 그리스도는 친구 집에서 상처를 입지 않고 로마인에 의해 상처를 입으셨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어떠한 심문도 받으신 적이 없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과 함께 하시다가 즉시 하늘로 올라가셨다. 넷째로 주님은 자신이 선지자가 아니라고 부인한 적이 없으셨다. 주님은 선지자 중의 선지자였다. 다서째로 주님은 자신이 농부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주님은 잠시 부친 요셉을 도와 목수일을 한 적은 있었지만, 결코 농사 일은 하지 않으셨다. 여섯째로 주님은 결코 남의 집에서 종으로 태어나거나, 종 노릇을 하신 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주장은 시대적 배경이나 주변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전혀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2-3. 매맞은 목자(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7)."

  13:7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있다. 이 구절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묘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예언을 자신에게 적용하셨다. 여기에서 메시아의 죽음이 하나님의 역사로 간주되고 있다. 하나님은 칼을 깨워서 그 목자, 그 짝된 자를 치라고 명하실 것이다. 여기에서 칼은 사법적인 힘을 의미하며, 생명을 제거하는 수단을 대표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칼이 죄를 재판하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의미하고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검이라는 말이 종종 등장한다. 하나님은 "칼"이라는 말로 자신의 공의를 나타내셨고, 메시아를 "나의 목자"라고 부르심으로 독생자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셨다. 이스라엘의 목자 개념은 이미 11장에서 설명했기 때문에, 여기에서 더 이상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짝"이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매우 희귀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구약 성경에서 (슥 13장, 레 6:2, 18:20, 19:11,15,17, 24:19, 25:14)에만 나타나고 있다. 이 말은 법, 권리, 그리고 특권으로 연합된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다. 이 말은 원래 "함께 묶는다"는 뜻을 가진 동사에서 파생된 말이다. "백성"들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도 이 말과 어근이 같다.

  하나님은 메시아를 "나의 동료, 나의 동지, 나의 친구, 나의 신실한 친구, 나와 연합된 자, 나와 동등한 자, 나의 가장 가까운 혈족" 등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메시아에 대한 강력한 언급이라고 할 수 있다. 메시아가 아니고는 이러한 언급에 어울릴 사람은 없다. "짝된 자"란 말에서 "자"라는 말은 메시아의 인성을 의미하고 있으며, "짝된"이라는 말은 메시아의 신성을 상징하고 있다. 목자를 치면 그를 따르던 양들은 흩어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체포되셨을 때에 그의 제자들이 흩어진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 묘사는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이 흩어지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총을 베풀어서 자신의 손을 그들을 향해 드리우실 것이다. 하나님은 흩어진 양들을 위해서 친히 개입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남은 자들, 즉 이스라엘의 가련한 자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지켜 주시는 분이시며, 따라서 결코 어려움에 처해 흩어진 자기 백성들을 보호해 주실 것이다.


2-4. 남은 자를 연단하심(8-10)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8),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9).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10)."

  11장에서 스가랴는 이스라엘 민족이 메시아를 배척할 것과 환난 시대에 잇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언급했다. 하나님께서 목자를 치신 후에는 야곱의 환난이 뒤를 잇게 될 것이다. 13:7-8절 사이에는 큰 시간적인 간격이 있다.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환난의 날에 온 땅에서 2/3는 모두 심팝을 받고 사라질 것이며, 오직 1/3만이 세상에 남게 될 것이다. 이 1/3은 남은 자들을 가리키고 있다. 1/3이라는 말은 수학적으로 정확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 6:17)에서 남은 자가 1/3이나 된다고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남은 자들은 고된 시련을 통해서 금과 은처럼 연단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로마인에게 정복 당한 일이 아니다. 마지막 날에 이스라엘은 그 땅에 돌아와서 호된 시련을 겪을 것이며, 이를 통해서 그들은 정결케 될 것이다. 연단의 목적은 남은 자들의 신앙을 정화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구원을 받은 후에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새언약이 성취될 것이다. 이것은 완전하고 영원히 우상 숭배가 사라졋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절정이요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3. 메시야의 오심과 통치 (14장)

3-1. 최후의 예루살렘 공격(1-3)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1). 내가 열국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보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쳐지지 아니하리라(2).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열국을 치시되 이왕 전쟁 날에 싸운 것 같이 하시리라(3)."

  스가랴의 마지막 장은 12장처럼 열국들의 마지막 예루살렘 공격 장면으로 시작되고 있다. 12장과 14장의 시대적 배경을 동일하다. 어떤 사람들은 스가랴의 전체를 통해서 14장이 가장 모호하다고 주장해 왔으며, 이 14장의 구절들은 역사적 설명을 하기 어렵다고 생각해 왔다. 한 편으로는 이 예언을 주전 586년에 있었던 느부갓네살의 예루살렘 공격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공격의 모든 특징은 앞에서 언급된 두 가지 공격과는 분명히 다르다. 우리는 앞에서 아마겟돈 전쟁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다. 그 날은 특히 예루살렘의 재물이 성읍 한 가운데에서 나뉘어 지는 여호와의 날이다. 하나님은 그 날에 자신의 공의를 증명하시고, 악인들을 멸망시키려고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 날은 여호와의 날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그 날은 요엘, 스바냐, 말라기, 그리고 그밖의 다른 곳에서 언급되어진 여호와의 날이다.

  예루살렘은 전쟁의 초반에서 패배의 슬픈 소식을 전해 듣는다. 대적들은 자기들의 승리를 확신하고서 그 도시의 재물들을 그 성읍의 한 복판에서 나눌 것이다. 스가랴는 그 침략의 결과를 이미 서술했으며 이제 이 침략의 실상과 원인을 제시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열국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시 2편, 요엘 3장, 에스겔 38-39장, 요한계시록 16장,19장에 묘사된 전세계적인 열국의 군사 동맹이다. 스가랴 14:2에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대상이지만, (슥 14:9-11,16-21)에서 예루살렘을 축복의 대상이 된다. 침략을 받은 예루살렘 성은 점령을 당하고 집집마다 재물을 약탈 당하고, 여성들은 강간을 당한다. 백성들을 폴로로 잡혀 가게 되지만, 그 중에 얼마는 그 곳에 남아서 계속해서 함락된 성읍에서 살아간다. 이때에 있을 열국들의 동맹은 예언서들에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그때에는 북방 세력들의 동맹이 있을 것이며, 남유럽 국가들의 동맹, 북방의 왕, 그리고 동방이나 태양이 뜨는 나라의 왕들이 서로 협졍을 맺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전쟁의 첫 단계에서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다.


3-2. 메시야의 오심(4-5)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4),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미칠찌라. 너희가 그의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하리라(5)."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곤경에 처했을 때에 위대한 용사이신 메시아께서 전쟁터로나가는 왕들처럼 열국과 싸우기 위해서 싸우러 나오실 것이다. 하나님은 진정한 용사이시다. 이것은 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일에 대한 묘사가 아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마지막 전쟁 때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고이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찔림을 받았던 메시아의 발이 그 날에 예루살렘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다. 이 예언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지지 못할 이유가 없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홍해가 갈라졌듯이, 이제는 감람산이 둘로 갈라져서 그들은 대적을 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삼하 15:30)에서 이 산은 "감람산 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메시아는 자신이 승청하셨던 곳에 다시 오실 것이다. 고통의 장면이 변하여 메시아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다. 감람산이 동서로 갈라져서 그 산 절반은 북쪽으로, 절반은 남쪽으로 옮겨가서 큭 물줄기를 이루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진행 중인 심판 때문에, 포위된 사람들은 감람산이 갈라져서 생긴 골짜기 사이로 도망칠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도망치는 통로이지 피난처는 아니다. 그 구원의 길은 아셀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아셀은 아마도 예루살렘 동편 근처에 있는 지역일 것이다. 그 도피는 유다 왕 웃시야 시대에 지진이 발생했을 때, 백성들이 도망쳤던 것과 비슷하다. 그 지진은 아주 심각했었다. 그 지진은 발생한 후 2세기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스가랴가 비교를 위해 인용할 정도로 유명한 것이었다. 이제 스가랴의 시선은 메시아께서 친히 천사들과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 즉 거룩한 자들과 더불어 오시는 것을 바라본다. 그의 마음은 이 환상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그는 직접 화법으로 바꾸어 이야기 한다. 이렇게 거룩한 자들을 동반하여 임하시는 것은 (마 24:30-31(천사들), 고전 15:23, 살전 3:13, 4:14(구속된 자들)) 등에도 나타나 있다. 큰 능력과 영광 중에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3-3. 자연의 변화(6-8)

  "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자들이 떠날 것이라(6).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7).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8)."

  주님께서 오실 때에 심각한 자연 현상의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 날에는 빛이 없어지고, 하늘의 빛이 응결되고 응고되어 어두워질 것이며, 하늘의 별들도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그 날은 독특하고 특별한 날, 전무후무한 날이 될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날의 본질적인 특성을 아실 것이다. 그 날의 낮은 평범한 낮이 아닐 것이다. 14:6에서 스가랴는 빛이 사라진다고 말했다. 그 날은 밤도 평범한 밤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는 저녁 때에 이상한 빛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사해와 지중해를 향해 흘러나갈 것이다. 예루살렘은 세계에서 가장 메마른 성읍들 중의 하나이다. 어떤 이는 "시온"이란 건조한 곳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축복의 날, 메시아가 자기 백성에게 돌아오시는 그 날에 생수가 그 땅에 활력을 주게 될 것이다. 성경에서 물은 정화, 영적 생명, 그리고 소생의 상징이다. 그 물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끊이지 않고 흐를 것이요, 뜨거운 여름 볕에도 마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메시아가 임재하시는 곳에는 항상 영적 능력과 축복이 있을 것이다.


3-4. 메시야의 통치(9-11)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9), 온 땅이 아라바 같이 되되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편 림몬까지 미칠 것이며, 예루살렘이 높이 들려 그 본처에 있으리니 베냐민 문에서부터 첫문 자리와 성 모퉁이 문까지 또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왕의 포도주 짜는 곳까지라(10). 사람이 그 가운데 거하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안연히 서리로다(11)."

  다윗의 자손이 자기 조상 다윗의 보좌에 앉을 때, 주님은 온 세상의 왕이 되실 것이다. 그때에는 주님의 불변성과 영광이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홀로 온 우주에서 경배를 받게 될 것이다. 그때에 팔레스타인의 온 땅은 아라바처럼 되어 생수가 무한히 흐르게 될 것이다. 아라바나 요단 평야는 디베랴 바다에서부터 홍해의 엘라니틱만에까지 이어진다. 이제 스가랴는  변화가 일어날 곳이 어디인지 제시하고 있다. 게바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동쪽으로 6마일 떨어진 곳으로 지금의 에바이다. 림몬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남쪽으로 35마일 떨어진 곳에 있다. 그때에 예루살렘도 높이 들려서 그 본처(성읍의 북쪽에 있는 베냐민 문부터 첫 문에 이르는 곳)에 있게될 것이다.

  여기에 언급된 첫 문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성읍의 북서쪽 끝에 모서리 문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낡은 문이 바로 여기에 언급된 첫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때에 베냐민 문 근처 성벽의 북동쪽 모서리에 위치한 하나넬 망대로부터, 왕의 정원들과 실로암 연못 근처 성읍의 남동쪽에(이 곳에는 왕의 포도주를 짜는 기구가 있다) 이르는 성읍이 이전처럼 다시 건축되게 될 것이다. 그 성읍에는 다시 사람들이 살게될 것이며, 죄가 사라졋기 때문에 더 이상 그 곳에 저주가 머물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고통스럽고 힘든 현재의 상황과 많이 다를 것이다.


3-5. 침략자들의 운명(12-15)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이 이러하니 곧 섰을 때에 그 살이 썩으며 그 눈이 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 혀가 입속에서 썩을 것이요(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들로 크게 요란케 하시리니 피차 손으로 붙잡으며 피차 손을 들어 칠 것이며(13), 유다도 예루살렘에서 싸우리니 이 때에 사면에 있는 열국의 보화 곧 금 은과 의복이 심히 많이 모여질 것이요(14), 또 말과 노새와 약대와 나귀와 그 진에 있는 모든 육축에게 미칠 재앙도 그 재앙과 같으리라(15)."

  14:12은 다시 14장 서두에서 언급했던 주제(예루살렘에 대한 최후의 침략)를 다루고 있다. 이 곳에서는 14장 서두에서 다루지 않았던 상황들이 언급되고 있다. 그때에 하나님은 대적의 군대에게 초자연적인 질병을 내려서 이스라엘을 승리케 하실 것이다. 이로 인해 대적들의 육체가 썪고, 눈은 구멍에서 녹아 없어지며, 혀는 입 안에서 썪게 될 것이다. 그들의 육체는 살아있지만 죽어 있는 시체처럼 될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는 심각한 대혼란이 찾아올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크게 소란케 하실 것이며, 이로 인해 그들은 서로 싸우게 될 것이며, 그들은 내분에 의해 스스로 멸망하게 될 것이다.

  전쟁의 첫 국면에서는 전세가 예루살렘에 불리하게 전개될 것이다(14:1). 그러나 두 번째와 세 번째 국면에서는 이스라엘이 대적들을 이기게 될 것이다. 그때에 사면에 있던 모든 족속들이 모여서, 이 공동의 적에 대항해서 예루살렘을 방어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 대적은 많은 인명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동양 군대들은 행군을 할 때에 많은 금과 은을 가지고 다닌다.  특히 당시에 옷은 매우 귀했기 때문에, 종종 전리품 목록에 나타나 있기도 하다. 12절에 언급된 질병이 다시 적의 진영에 잇는 말, 노새, 낙타, 당나귀 등 모든 들짐승들에게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에는 침략군이 키우는 동물까지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3-6. 초막절(16-19)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16). 천하 만국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 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17),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 오지 아니할 때에는 창일함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열국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18). 애굽 사람이나 열국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의 받을 벌이 이러하니라(19)."

  전쟁의 연기가 걷히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구원될 때, 이방인들 중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매년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왕이신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초막절을 지키게 될 것이다. 열국들은 국가를 대표해서 사람들을 이 축제에 파견하게 될 것이다. 초막절은 천년왕국 시대의 절기이다. 이 절기는 모여서 쉬고 즐기며 찬양하고 감사하는 절기이다. 여기에서 유월절과 오순절이 언급되지 않은 것은 이것들의 원형이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초막절은 이스라엘이 곡식을 수확한 후에 드리는 감사의 절기였고, 또한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온 것을 기념하는 절기였다. 그때에는 모든 절기들이 원형을 회복하게 될 거이며, 초막절 역시 그 원형을 찾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왕이신 여호와를 경배하는 일을 거부하는 족속의 땅에는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열국들이 예루살렘에 오는 일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해왔다. 사람들은 이러한 일은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앞에서 생각해 본 것처럼 본문에서는 매년 모든 국가의 사람들에게 절기를 지키러 올라갈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 일은 국가적으로 자기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14:17-19은 이 시대에도 불순종이 있을 것이라고 전제한다. 그 이유는 (시 66:3)과 같은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곳을 보면 한 사람이 메시아 왕에게 거짓으로 순종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며, 이로 인해 그들은 크게 고생하 것이며, 다음 해의 수확에도 크게 부정적인 영행을 미친다. 스가랴는 그의 예언에서 애굽이 멸망당할 것을 예고했다. 애굽은 비에 의존하지 않고 매년 반복되는 나일강의 범람을 이용했다. 애굽 사람들은 자신들은 이 제앙에서 면죄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역시 벌을 내리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염병을 내리실 것이다. 여기에 언급된 염병은 14:1에 언급된 염병과 같은 것은 아니다. 어느 누구도 언제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에 도전할 수 없고, 그 명령에 도전할 경우엔 반드시 징계가 임할 것이다.


3-7. 여호와께 성결(20-21)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20),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21)."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은 불순종을 인해 심판을 받는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은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교회, 또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의 심령을 다루시는 위대한 목표이며 목적이다. 거룩함이 일상적인 생활과 예배에 얼마나 침투하는지에 대해서 마지막 두 구절이 말해주고 있다. 그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수 세기 동안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이었던 보편적인 거룩함을 알게 될 것이다. 장식으로 사용되는 말 방울에까지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의 가슴에 있는 보석에 새긴 말, 즉 "하나님께 성결"이라는 말이 새겨지게 될 것이다. 말은 보통 전쟁에 사용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게 될 것이다. 성전의 솥은 성전에서 가장 비천한 물건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메시아의 날에 그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희생 제물의 피를 뿌리는 제단 앞에 놓인 주발과 동등하게 거룩해질 것이다.

  거룩함이 널리 펴져 있는 곳에는 의식적인 신성함은 필요하지 않다. 이 예언서의 마지막 구절은 동일한 진리를 다른 각도에서 말한다. 만일 성소의 모든 기구들이 보편적인 성결로 인해 동일한 수준의 거룩함을 입는다면, 온 국가에 있는 모든 솥들도 동일하게 하나님께 드려지게 될 것이다. 가정 집의 솥들은 하나님의 집에서 예배를 위해서 사용될만큼 거룩하게 될 것이다. 그 날에 하나님의 집에는 가나안 사람이 없을 것이다. 가나안 사람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선원과 상인들이었던 가나안 북쪽의 베니게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기로 유명했으며, 여기에서는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사람들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모든 것이 거룩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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