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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스가랴

[스크랩] 스가랴(2): 악의 제거 (5-8장)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8. 23:54

스가랴(2):  악의 제거 (5-8장)


2장 악의 제거 (5-8장)

 


1. 날아가는 두루마리의 환상: 일곱 번째 환상(5장)

 

  스가랴서의 일련의 예언 중에 남아 있는 환상들, 즉 5장에 기록된 두 가지 예언과 6장의 한 가지 예언은 심판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스가랴 4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모습을 바라보았으나, 5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실제 상태를 바라보고 있다. 심판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 개개인에게(5:1-4), 그리고 다음에 이스라엘 나라에게(5:5-11), 그리고 마지막으로 열방에게(6:1-8) 임할 것이다. 스가랴는 환상의 영역 안에 그 시대로부터 지상에 메시야 왕국이 세워지기 바로 직전, 즉 악인들이 심판을 받게될 마지막 말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다섯 번째 환상 뒤에 다시 눈을 든 그는 날아가는 두루마리, 또는 쪽지를 보았다. 고대인들은 나무껍질, 즉 파피루스와 다듬은 동물 가죽 두루마리에 문서를 기록하였다. 아마 여기에서는 후자가 사용되었던 것 같다. 심판이 신속하게 죄인들에게 임하리라고 선포하기 때문에, 두루마리는 날아가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펼쳐져 있었거나 또는 그 내용과 크기를 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해석하는 천사는 스가랴에게 무엇을 보고 있느냐고 묻는다. 그래서 그는 날아가는 두루마리에 대해서 묘사한다. 그것은 길이가 30피트요, 넓이가 15피트나 되는 거대한 두루마리였으며, 그 안에는 수많은 저주가 기록되어 있었다. 어떤 사람은 크기에 대한 묘사는 흔히 있는 일로, 아무 의미가 없는 단순한 묘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세의 성막 안의 성소와, 솔로몬의 성전의 문(여기에서 보통 율법을 읽었다)도 이 두루마리와 같은 크기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환상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소의 거룩성이 죄를 판단하는 기준이며,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될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1-1. 저주와 그 영향(1-4)

  "내가 다시 눈을 든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보이더라(1).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되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장이 이십 규빗이요 광이 십 규빗이니이다(1).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 무릇 도적질하는 자는 그 이편 글대로 끊쳐지고 무릇 맹세하는 자는 그 저편 글대로 끊쳐지리라(3).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것을 발하였나니, 도적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그 나무와 그 돌을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4)."

  5:3에서 해석하는 천사는 스가랴에게 두루마리가 땅 위로 날아가듯이 저주가 선포된다고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은 그것을 거역하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선포하는 언약이었다. 저주라는 단어는 집합명사로서 율법에 있는 모든 저주를 나타낸다. 여기에 언급된 지면은 온 세상의 지면이 아니라 유다 땅의 지면을 말한다. 왜냐하면 율법은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 두루마리는 율법관들과 흡사하게 양면에 기록되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들을 담고 있는 첫째 판의 계명을 범한 것이다. 도둑질은 인간에 대한 의무를 기록하고 있는 둘째 판의 계명의 위반이다.

  도둑질과 거짓 맹세가 그들이 십일조와 헌금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데 대한 언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 구절들을 이러한 뜻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다. 첫째 판의 위반자들은 하나님께 대해 거짓되었으며, 둘째 판의 위반자들은 인간에 대해 이 두 가지 범죄가 강조된 것은 그것들이 그 당시에 특별히 많이 행해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두루마리의 규정에 의하면 범죄자는 끊어지도록 되어 있다. 즉 추방되어지고, 쓸려 없어지고, 제거될 것이다. 이와 동일한 표현이 (렘 30:11, 사 3:26)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친히 저주를 선포하시고 황폐케 하실 것이다. 죄인들은 저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문을 잠그고 집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저주가 그들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 파괴는 아주 철저한 것이어서 마치 문둥병자들의 집들처럼 이스라엘의 모든 집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저주는 그 세력을 계속 뻗어나가 결국 그대로 성취될 것이다. 이 저주의 효과에 대하여는 의문의 여지가 없으며, 집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불에 태워지게 될 것이다.

  죄는 개인적이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도 역시 개인적이라고 볼 수 있다. "머무른다"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는 "밤을 지낸다"는 뜻이지만, "영구적으로 남는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이 단어는 바로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속지 말라! 죄만큼 치명적인 것은 없다. 궁극적으로 죄는 승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에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가랴 선지자의 시대에 죄는 파멸을 초래했으며, 그에 대한 심판은 중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아주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있으며, 또 의로우신 메시야의 통치 이전에 있을 경건치 못한 자들의 멸절을 바라본다. 그러므로 이 환상은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5장에 기록된 다른 환상과 융합된다.


1-2. 에바 안에 앉은 여인의 환상(5-8)

  "내게 말하던 천사가 나아와서 내게 이르되 너는 눈을 들어 나오는 이것이 무엇인가 보라 하기로(5), 내가 묻되 이것이 무엇이니이까? 그가 가로되 나오는 이것이 에바니라. 또 가로되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라(6). 이 에바 가운데에는 한 여인이 앉았느니라 하는 동시에 둥근 납 한 조각이 들리더라(7). 그가 가로되 이는 악이라 하고 그 여인을 에바 속으로 던져 넣고 납 조각을 에바 아구리 위에 던져 덮더라(8)."

  5:5에서 해석하는 천사가 나아온 것은 하나님께서 스가랴에게 또 하나의 환상을 보여주실 것이며, 따라서 그에 대한 해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스가랴는 에바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이 스가랴 5장에서 움직임이 몇 번이나 나타나는지를 유의해보라! 세상의 도덕적 세력들은 정지 상태, 또는 정체된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진보를 하든지 아니면 후퇴를 하게 마련이다. 스가랴가 이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불어본 것은 에바의 의미를 물은 것이었다. 그는 에바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 그에게 전해져서 그를 통해 다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하려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기를 원했던 것이다. 에바란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측량 기구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약 1부셀(약 2말 정도)를 담는 것이었다. 천사는 그 에바가 그 땅에 있는 사악한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에바 속에 곡식의 낟알을 담는 것처럼, 그 땅의 죄인들도 모두 모을 것이다. 에바는 무한히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측량하신 죄에 대한 심판을 의미한다. 혹 어떤 사람들은 에바가 교역과 상업의 상징이므로, 에바는 상인들의 죄악을 지적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에 대한 근거를 (약 5장, 계 18장)에 나타난 사악한 상업주의의 심판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에바가 언급하고 있는 것을 이처럼 제한할 필요는 없다. 두루마리 환상에서 위반 사항들이 전체 죄악성을 대표한 것처럼, 여기에서 에바가 상징하는 것도 전반적인 악이다. 여기에서도 땅은 주로 유대 땅을 의미한다. 스가랴는 주로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그 시대 백성들에 대한 메시지를 받고있다. 그들은 죄의 중함과 비참함을 깨달아야 했다.

  스가랴로 하여금 에바 속에 무엇이 있는 지를 보게 하기 위해서 에바의 입구를 덮은 한 달란트 무게가 나가는 납뚜껑이 열려졌다. 달란트는 히브리인들이 사용하는 무게 단위 중에서 가장 무거운 단위이다. 에바의 뚜껑이 열렸을 때에 스가랴는 에바 속에 악을 상징하는 여인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악을 여인에 비유한 것은 (잠 2;16, 5:3-4)에서도 볼 수 있다. 히브리어에서 여성형은 추상적 개념들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문맥상으로 보아 이 여인이 (계 17-18장)에 나오는 큰 음녀라고 할 필요는 없다. 어떤 주석가들은 그것이 우상숭배(인격화한 악)를 언급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우상숭배야 말로 가장 증오할만한 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에바가 상징하는 악은 모든 종류의 악을 방라하는 것이며, 물론 우상숭배도 이에 포함된다. 포로기 이후에도 우상숭배가 있었다는 사실은 (에스라 9장, 사 57장, 65:1-7, 66:17)을 통해 알 수 있다. 에스라서에 기록된 내용은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킨 에스라의 종교 개혁 이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이사야에 있는 기록들은 포로기 이후 시대의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그것은 주전 8세기 이사야 시대 사람들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악을 여인의 모습으로 의인화 한 것은, 불법의 사람으로 묘사된 사단이 행하는 악과 비교해 보아야 한다. 스가랴가 보고 있을 때에 천사는 여인을 에바 속으로 던져놓고,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그녀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에바의 입구 위에 가장 무거운 납뚜껑을 덮어놓았다.


1-3. 에바를 시날 땅으로 옮김(9-11)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두 여인이 나왔는데 학의 날개 같은 날개가 있고 그 날개에 바람이 있더라! 그들이 그 에바를 천지 사이에 들었기로(9),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그들이 에바를 어디로 옮겨 가나이까 하매(10), 내게 이르되 그들이 시날 땅으로 가서 그를 위하여 집을 지으려함이니라. 준공되면 그가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 하더라(11)."

  5:9-11에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관련된 악의 최종적인 처리가 기록되어 있다. 두 여인이 에바와 그에 대한 경고를 옮기기 위해 앞으로 나온다. 사람들은 예언의 미래 시제에 대한 언급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며, 지나치게 상세한 것까지 찾아내려고 하기 때문에, 이 두 여인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제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 앗수르와 바벨론이라는 사실을 간과할 때가 많다. 이 여인들은 환상을 생생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계획의 계시를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상징이다. 그것들은 이미 묘사된 이미지와 일관성을 갖고 있다.운반되어야 할 에바의 무게 때문에 두 여인이 필요했다. 바람의 역할은 대단히 빠른 속력으로 그들이 짐을 나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여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학과 같은 날개를 갖고 있었다. 학은 크고 넓은 날개를 가진 철새이다. 이 새의 생태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의 견해에 의하면, 학은 매년 이동할 때에 유대에서 시날까지의 거리보다 더 멀리 날아간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환상의 모든 특징은 에바를 이스라엘의 한 가운데에서 먼 것으로 옮기는 역할을 한다. 비행의 목적지가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스가랴는 그것에 대해 묻는다(5:10). 그에 대한 대답은 지극히 완전하고 충분한 것이다. 1) 악은 시날 땅으로 옮겨질 것이다. 2) 그 곳에 그녀를 위해 집이 세워질 것이다. 3) 그녀는 자신의 처소에 머물게 될 것이다.

  시날 땅은 바벨론을 가리킨다. 이곳은 사람들이 최초로 연합하여 하나님께 반역을 도모했던 곳이다. 성경 전체에서 이 곳은 영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혼란, 우상숭배, 영적인 부정을 상징한다. 창 11장에 나타난 것과 동일한 바벨론의 영이 (계 18장)에 기록된 바벨론에도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 곳은 유다가 포로로 잡혀간 땅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바벨론이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기 위해서 일을 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하박국 선지자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고 말한다. 바벨론은 자기의 이기적인 목표에 전념하고 있었다. 바벨론에서는 하나님의 그의 의로우신 지상 통치에 반대되는 모든 것들이 절정에 달했다. 이 환상은 바벨론의 최후 멸망과 심판을 말하는 것이다. 시날 땅이 과거 바벨론 포로 기간에 이스라엘이 전 세계에 흩어졌던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이것과 병행하는 구절이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 구절이 이미 포로기에 문자 그대로 이루어진 어떤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 예언이 가리키는 전체적인 방향은 미래이기 때문이다.

  이 환상은 우상숭배의 심각성 이상의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려고 계획되어진 것이다. 70여년의 포로 생활은 하나님의 지도 아래 잘 수행되었다. 하나님은 모든 악이 두렷한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서 마침내 하나님께 대한 도전을 상징하는 쪽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밝히고 계신다. 이상하게도 시날 땅의 집에 대한 언급이 그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위풍당당한 신전을 의미한다고 이해되어져 왔다. 영운한 처소는 우상숭배를 위해 건축된 일종의 우상신전(바벨론에서는 지구랏츠라고 불려짐)이라고 해석되어져 왔다. 그들은 (신 4:19, 29:25-26)에 기록된 것처럼, 이방 땅에서는 다른 신을 섬겨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의 주이시며, 모든 열방의 신이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을 인정하신 적이 없다. 이는 수많은 성경 구절들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스가랴는 악이 어떤 특정한 장소에서 절정에 달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리고 죄는 그 곳에서 영원한 처소에 머물게 될 것이다. 집을 짓는 것은 장기간의 체류를 의미한다. 이는 집을 짓는 것이 유대인의 장기간의 포로생활을 의미한 것과 같다(렘 25:9). 더욱이 바벨론은 원래 죄악의 처소이기 때문에, 악이 그 곳에서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악은 자신이 최초에 발생했던 곳, 자신이 항상 속해있던 곳에 머물게 될 것이다. 이로 인해 악의 순환이 완성되고, 모든 형태의 불신앙이 발상지로 돌아오게 된다. 이 예언의 환상은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다. 이 예언은 죄가 이스라엘에서 근절되는 때, 즉 백성들이 자기들의 메시야이신 왕께 돌아오는 그 때에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1-4. 소멸하는 죄의 세력

  성경 어디에도 스가랴 5장처럼 충실하게 인간생활에 초래한 무시무시한 파괴를 묘사하는 곳이 없다. 죄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존재, 또는 우리가 존재하기를 원하는 모든 것을 파괴시킨다. 이것은 퇴치 불가능한 해독이다. 그러나 퇴치 불가능하다는 것은 인간적인 차원에서의 일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죄악된 마음에 반드시 필요한 구원과 치료를 영원하고 적절하게 예비해 주실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유효한 약속이며, 소망의 비전이라고 할 수 있다.


2. 왕이시며 제사장이신 메시야(6장)
 

2-1. 병거들의 환상: 여덟 번째 환상(1-3)

  "내가 또 눈을 들어본즉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왔는데 그 산은 놋 산이더라(1). 첫째 병거는 홍마들이, 둘째 병거는 흑마들이(2), 셋째 병거는 백마들이, 넷째 병거는 어룽지고 건장한 말들이 메었는지라(3)."

  스가랴 6장에 기록된 병거들의 환상은 스가랴가 하룻밤에 본 일련의 환상들의 결론을 짓는다. 여덟 번째이자 마지막인 이 환상은 첫째 환상에 계시된 사상을 완성한다. 첫째 환상에서 말 탄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자에게 자기들이 본 것을 보고하고 있었다. 마지막 환상의 병거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앞으로 나온다. 병거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선고를 실행에 옮긴다. 이리하여 진리의 순환이 완성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 환상이 다른 환상들을 위해서 필요하지만, 가장 애매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전 장에서 한 것 같은 원칙을 적용하면 이 환상에 대해서도 적절한 설명을 얻을 수 있다. 스가랴는 환상 중에서 네 병거가 두 개의 논 산 사이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병거들은 전차로서 그것들의 궁극적 목적을 암시해 준다. 본문을 연구하는 많은 독실한 해석자들은 이 네 병거가 다니엘이 예언한 네 개의 세상 왕국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1:18이 이 네 개의 제국을 염두에 둔 것이지만, 그것들이 여기에 제시되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병거들이 하늘의 네 바람이라고 정의되어져 있다. 2) 네 개의 지리적 표기들은 다니엘 2장과 7장에서의 네 왕국과 일치하지 않는다.

  네 병거들은 각기 이스라엘을 악하게 대했던 열국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행인들을 상징한다. 환상에서 언급된 두 개의 산은 분명하다(히브리어는 정관사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그것들은 확고부동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처소 앞에 있는 이상적인 산들, 하늘의 문들, 또는 메대와 바사제국을(이 제국으로부터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들이 열방들을 징계하기 위해 나아갔다) 의미한다고 여겨져 왔다. 성경에서 산들은 일반적으로 국가들을 상징하지만, 성경의 상징이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와 사단은 모두 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 의미는 아주 다르게 사용된다. 이 산들은 모리아 산과 감람산을 가리킨다. 병거들은 여호사밧 골짜기를 통과하였다. 그것들이 논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그 산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또 이것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안전한, 또는 하나님의 통치의 안전성을 나타내기 위한 것도 아니다. 이것들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성막과 성전 안에서 논을 사용한 것, 그리고 놋기구들이 사용되는 목적에 유의해보라.

  첫째 환상에서 말들의 색깔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처럼, 여기에서도 색깔은 중요하다. 전쟁과 피흘림, 재난과 고통, 승리와 기쁨, 그리고 천벌을 나타내는 붉은 색, 검은 색, 흰 색, 회색의 말들이 등장한다. 특히 넷째 병거의 말들은 마치 그들과 그들의 임무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기 위해서 건장하다고 강조되었다. 이 대리인들이 원수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행하는 임무를 마침으로써 나타나는 결과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행복이요, 하나님에게는 영광이 될 것이다.


2-2. 병거 환상의 설명(4-8)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4)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5). 흑마는 북편 땅으로 나가매 백마가 그 뒤를 따르고 어룽진 말은 남편 땅으로 나가고(6), 건장한 말은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고자 하니 그가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라 하매 곧 땅에 두루 다니더라(7). 그가 외쳐 내게 일러 가로되 북방으로 나간 자들이 북방에서 내 마음을 시원케 하였느니라 하더라(8)."

  스가랴는 병거들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때에 해석하는 천사는 그것이 하늘의 네 바람이며, 온 세상의 주님 앞에 소집되었다가 다시 나가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바람"으로 번역된 말은 흔히 "영"으로 번역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말을 네 명의 하늘의 영들, 또는 천사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 이에 대한 병행구절이 없기 때문에 이 견해를 따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언급이 없이는 네 바람을 네 천사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계 7:1)에 나오는 천사들은 정해진 목적으로 가지고 있다. (시 104;4)에 의하면 바람들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바람은 하나님의 진노의 도구, 즉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는 대리인으로 나온다.

  검은 색 말과 흰색 말은 북쪽 땅을 나갔다. 그 곳은 바벨론이 있는 곳이다. 어룽진 말은 남쪽 땅, 즉 애굽으로 나갔다. 바벨론과 애굽은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무자비한 원수들을 말한다. 여기에서 바벨론이 강조된 것은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고레스를 통해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남은 자들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해 내셨다. 그러나 고레스에 의해 정복된 바벨론은 다리오 왕 5년에 반란을 일으켜서 그 땅을 황폐하게 만들고, 인구를 감소하게 만들었다. 애굽 역시 다리오 왕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주전 485년에 크세르세스에 의해 정복되었다. 그리고 주전 332년에 알렉산더는 바사인들로부터 애굽을 탈취하였다.

  홍마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 즉 다리오 와의 원정에서는 많은 피를 흘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에서 난해한 것은 6:3에서는 어룽진 말이 건장한 말과 연합되어 있는 반면, 6:7-8에서는 분리되어 있는 점이다(6:6도 마찬가지이다). 홍마들도 역시 임무를 받지 않은 채 파견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땅을 두루 돌아다닌 말들은 첫째 병겨의 홍마들임이 분명하다. 이 말들의 임무가 세 번 언급되어진 것은 이 임무가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쟁과 피흘림이 도처에서 성행하게 될 것이다. 선지서들은 이러한 상황들이 어떻게 종말을 조망하는 지 잘 보여주고 있다. 6:7의 땅에 대한 언급이 팔레스타인 땅을 의미한다고 제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체 맥락에서 볼 때에 이 보다는 더 넓게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홍마들은 다른 세 종류의 말들이 시작한 작업들을 계속 완성해 나간다.

  이 환상의 마지막 말은 하나님 자신, 또는 하나님의 사자들에 의해 주어지는 바, 북방으로 나간 자들이 그 곳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혔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마음"이 "진노"를 나타내는 것은 (삿 8:3, 전 10:4, 사 33:11)에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 하던 이스라엘 중에 거하면서 그들에게 성전 재건과 미래에 대한 소망을 주셨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징벌은 이미 충분하게 바벨론에 임했다. 스가랴 5장에 기록된 환상에는 이스라엘 역사의 최후의 날에 궁극적으로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다. 바벨론은 정의와 진리로 통치하실 메시야의 통치 이전에 심판을 받아야 하며, 이는 반드시 이행되어질 것이다.


2-3. 바벨론에서 가져온 선물(9-1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9), 사로잡힌 자 중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들었나니, 너는 이 날에 그 집에 들어가서 그들에게서 취하되(10), 은과 금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11)..."

  스가랴가 밤에 본 여덟 개의 환상들은 아름답고 적절하게 끝을 맺는다. 환상에서 성취되지 않은 일이 스가랴를 통해서 수행되고 있다. 하나님은 스가랴에게 바벨론 포로민의 대표로 세 사람이 스바냐의 아들 요시야의 집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알려준다. 하나님은 스가랴에게 그 세 사람을 만나라고 명령하셨다. 6:10에 언급된 날은 스가랴가 환상을 받았던 1:7의 날과 같다. 그 사람들은 성전을 위해서 금와 은을 가지고 왔다. 스가랴는 이 선물을 가지고 대제사장 머리에 씌울 면류관을 만들어야 했다. 스가랴 3장에서와 같이 여기에서도 여호수아는 메시야의 이름과 직분을 상징하고 있다. 면류관은 여러 가지를 섞어서 만든 면류관(6:14의 동사는 단수형이다), 즉 하나의 면류관 위에 또 다른 면류관을 얹어서 만든 것이었다.

  레위기의 제사장직에는 이러한 규정이 없다. 면류관은 제사장의 직무에는 어울리지 않으며, 오히려 사제관이 어울릴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여기에 등장하는 대제사장은 앞으로 도래할 왕과 제사장으 겸할 메시야를 상징한다. 몇몇 해석자들은 원래 본문은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의 머리 위에", 또는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의 머리 위에"라고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스룹바벨의 머리 위에 면류관을 씌우는 것을 다윗 왕조의 회복을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도 당시의 상황에서는 맞지 않다. 개인, 민족,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예정에 따라 진행된다. 하나님은 결코 서두르시거나 일을 혼동하지 아니하신다.


2-4. 제사장이시며 왕이신 메시야(12-13)

  "고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12).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13)..."

  스가랴 6:12에 묘사된 메시야의 모습은 도래하는 이스라엘 왕에 대한 가장 포괄적이고 완전한 묘사라고 한다. 이것은 매우 아름답고 중요한 예언이다. 면류관을 쓰고 영광을 얻은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순이신 메시야, 왕이신 동시에 제사장이신 분을 상징한다. 구원자에 대한 이 묘사는 우리로 하여금 이스라엘 역사의 정점과 완성을 깨닫게 한다. (1-8절에 기록된 것처럼) 땅의 심판들이 시행되고,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지상 천년왕국의 통치가 따르게 될 것이다. 면류관을 쓴 여호수아에게 고한 스가랴의 말, 즉 "보라!....이 사람을!"이라고 한 말은 후에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앞세우고 한 말과 비슷하다.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그의 인격과 직무에 있어서 (스가랴 3장에 기록된 계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진 "인자", "순"을 상징하고 있다. 아람어 탈굼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의역하였다. "보라! 이 사람을. 그의 이름은 메시야요! 장차 나타나실 분이시다."

  순이 돋아난다는 말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후에 나사렛에서 어렵게 사실 메시야를 상징한다. 메시야는 마른 땅에서 자라난 순처럼 힘들고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나게 될 것이다. 스기랴는 메시야의 인격과 본성을 소개한 후에 그의 사역을 지적한다. 그는 하나님의 전을 건축할 것이다. 이것은 지금 스룹바벨이 건축하고 있던 성전이 아니다. 이것은 미래에 세워질 것으로 (겔 40-48장)에 계시된 미래의 성전을 의미한다. 메시야에 의한 성전의 건축은 반복해서 언급될만큼 중요한 주제임이 분명하다. 스가랴 6:13의 "그가"라는 시작은 강조적인 표현이다. 제사장이요 왕이신 분이 영광을 얻으실 것이다. 그는 갈보리에서의 복된 사역 후에 어느 정도의 영광을 얻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보좌에서 다윗 자손의 천년 왕국의 영광을 누릴 것이며, 이것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그는 참 멜기세덱으로서 자기의 보좌에 앉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메시야에 대한 이 충만한 말에는 영원, 안전, 구원의 완성 등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메시야는 보좌 위에 앉으실 대제사장이 되실 것이다. 그는 지금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이것은 (시 110:1, 히 1:3, 8:1, 10:12, 12:2, 계 3:21)에 의해 명백해 진다. 그는 통치하실 권리를 가진 분으로 오셔서 자기 보좌 위에 앉아 통치하실 것이다.

  세계는 평화와 공의의 통치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이 기쁨의 날을 오랫 동안 기다려오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아야만 한다. 메시야가 제사장이요 왕으로서 자기의 보좌에 앉으실 때에 이 둘 사이에는 평화의 의논이 있게될 것이다. "평화의 의논"과 "두 사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평화의 의논이란 마은 분명히 평화를 생산해 내는 의논, 즉 세속적으로나 영적으로 최고의 축복을 의미한다. 성경에는 여호수아와 스룹바벨 사이에 적대 감정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6:13(하))이 이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는 없다. 다른 주장에 따르면, 주 하나님과 메시야, 또는 메시야의 위격 안에 연합되어 있는 지배자와 제사장이라는 두 가지 속성들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스가랴는 아마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의도되어진 영광스러운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메시야 안에서 결합되어진 제사장적인 직무와 왕적인 직무, 즉 메시야의 권위들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극히 사랑스러우신 이스라엘의 메시야에 대한 묘사를 생각하는 것을 잠시 멈추고, 찬양을 돌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여러 가지 속성을 지니시고 풍부한 사역을 하시는 메시야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분이시다. 스가랴 시대의 모든 사건은 상징적이었다는 것을 다시 강조해야 한다. 이것은 다음의 사실들에 의해 증명된다. 1) 면류관은 대제사장이나 레위의 후손에게는 어울리지 않고, 유다 지파와 다윗 왕조에게만 어울리는 것이다. 2) 6:12에 말씀되어진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은 스가랴 3장에 기록된 메시야를 가리킨다. 3) 6:13에 그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미래에 오실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될 것이다. 4) 6:13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나타나는 영광을 그가 얻게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5) 6:13은 시 110편과 히 7장에 기록된 것처럼,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 즉 그가 자신의 보좌에 앉으셔서 제사장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2-5. 성전 안에 있는 기물들(14-15)

  "그 면류관은 헬렘과 도비야와 여다야와 스바냐의 아들 헨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전 안에 두라 하시니라(14). 먼데 사람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줄을 너희가 알리라. 너희가 만일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할진대 이같이 되리라(15)."

  그 면류관은 여호수아에게 씌워진 후에, 헬렘(헬데의 다른 이름), 도비야, 여다야, 그리고 헨(요시야의 다른 이름)이 하나님의 일에 보인 경건한 관심의 기념물로서 성전 안에 보관될 것이다. 메시야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까지 이 면류관이 성전 안에 보관되었다가, 후에 로마인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스가랴는 바벨론에서 온 대표들을 보고, 또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장차 이스라엘 국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 즉 이방인들이 와서 성전을 건축할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미시야의 거룩한 사명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가 될 것이다.

  첫째,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환하게 될 것이며, 그 후에 이방인들의 개정이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재앙과 화의 뿌리와 원천은 그들이 메시야의 사명과 사역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한 데에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 이스라엘이 메시야를 인식하여 알게되면, 이스라엘이 영적인 축복과 물질적인 번영이 도래할 것이다. 메시야의 오심과 사역은 확실하며 무조건적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축복과 은혜는 이스라엘의 순종이라는 조건 하에 주어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지 아니하면, 그들을 머리시겠다고 경고하신다.

 "너희가 만일 내게 청종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복된 말씀에 믿음과 순종으로 응답하기를 원하신다.성경 어디에도 믿고 따르지 않는 인간들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기록은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왕이요 제사장이신 구속자를 믿고 따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각각의 유대인들이 진심으로 믿고 순종한다면, 그 즉시 그들에게는 큰 축복이 임하게 될 것이다.


3. 금식인가? 경건인가? (7장)


3-1. 금식에 대한 질문(1-3)

  "다리오왕 사년 구월 곧 기슬래월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니라(1). 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 종자를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2),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여러 해 동안에 행한대로 오월간에 울며 재계하리이까? 하매(3)..."

  스가랴 7장의 예언은 다른 부분들과는 아주 판이하고 분명하게 구분된다. 스가랴는 스가랴서의 서두(1-6장)에서 이스라엘은 백성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복을 받으라고 전하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그리고 나서 그가 사역하였던 때부터 하나님의 백성들과 세상 위에 메시야가 즉위하실 때까지에 대한 일련의 8개의 밤의 환상들이 그에게 제시되었다. 그 잊지 못할 중요한 날 밤으로부터 약 2년이 경과하여 다리오 왕 4년, 즉 주전 518년이 되었다. 하나님의 영적 지시를 받은 학개와 스가랴의 사역, 그리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베푸신 격려의 덕택으로 백성들은 전심전력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했다. 예루살렘 성읍에는 새로운 가정들이 세워지는 등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고 있었다. 느부갓네살의 침략과 파괴의 흔적과 상처들은 서서히 아물어가고 사라져가고 있었다.

  "기슬레월"에 벧엘에서는 두 가지 목적으로 예루살렘 대표단을 파견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간구하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국가적 금식에 대해 질문하기 위해서였다. "벧엘"이란 말의 원래 의미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대표단이 벧엘이란 성전에 왔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성전이 "여호와의 집", 또는 "엘로힘의 집"이라 불리우기도 했지만, 결코 "벧엘"이라고 불리워진 일은 없었다. 한 때 우상숭배로 들끓었던 그 유명한 성읍이 이처럼 중요한 사명을 띠고 대표들을 보낸 것이다. 이전에 그 성읍에 살던 사람들 중 다수가 바벨론으로부터 귀환하였다. 대표단원의 명칭이 바벨론 사람들이라고 소개된 것은 그들이 바벨론으로부터 귀환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해서(문자대로는 "얼굴을 쓰다듬다") 한 태도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분명히 희생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당시 성전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제단은 세워진 상태였다.

  대표들은 제사장들에게 질문을 하기 위해 왔다. 이는 율법의 문제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 것이 제사장의 직무였기 때문이다. 이때에 응답을 맡았던 선지자들은 학개와 스가랴였다. 벧엘 사람들은 그들이 "여러해 동안", 즉 포로 시기에 해왔던 제 5월의 금식을 계속해서 해야하는 지를 알고싶어 했다. 이제 성전 건축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과거의 재난들을 기념하는 금식을 계속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금식을 한느 것은 그들에게 실증이 나고 짐이 되는 일이었다. 울면서 금식하면서 평소에 하던 일을 하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지루한 일이었다. 5월 10일의 금식은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이 불에 탄 것을 회상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금식은 지금까지도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금식에 속한다(속죄일에 하는 금식과는 다르다). 이러한 금식의 특징은 (요엘 2:12-13,16)에 언급되어 있다. 그 금식은 국가에 의해 제정된 것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직접 명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이러한 금식을 계속해야 하는 지, 또는 페지해야 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했다. 사람들은 항상 규칙들을 찾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령의 지시 하에ㅓ 그들에게 삶을 영위할 원리들을 주신다.


3-2. 과거를 통해 얻은 교훈(4-7)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4),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5) 너희의 먹으며 마심이 전혀 자기를 위하여 먹으며 자기를 위하여 마심이 아니냐?(6) 여호와가 이전 선지자로 외친 말을 너희가 청종할 것이 아니냐? 그 때에는 예루살렘과 사면 읍에 백성이 거하여 형통하였고 남방과 평원에도 사람이 거하였었느니라(7)."

  질문들이 1인칭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스가랴를 통한 "나", 즉 하나님의 대답은 모든 백성들에게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동일한 상황에 처해 있고, 같은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분명한 한 마디의 대답은 그들의 태도에서 겉치레와 위선을 산산히 제거하였다. 백성들과 제사장들은(제사장들도 역시 금식을 지루하게 여겼다) 그들이 금식하고 슬퍼하는 모든 행위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행해졌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하나님은 결코 금식을 제정하지 않으셨으며, 그들이 금식을 한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슬프게도 그들에게는 생활의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진정한 경건의 마음이 부족했다. 금식의 의미가 시간적인 요소보다 더 중요하다. 금식은 "언제하느냐?"보다는 "왜 하느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들의 금식 행위는 마음과 진실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가 없었다.

  그들의 질문은 5월의 금식에 집중되어 있었다. 스가랴는 7월의 금식에 관한 질문을 하나님의 말씀 속에 추가했다. 이 모든 금식들은 주전 586년의 예루살렘 멸망과 관계가 있었다. 10월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였으며, 4월에는 갈대아인들이 성읍을 침략하였고, 5월에는 느부사라단이 성전을 불로 태웠다. 그리고 7월에는 일부 사람들이 바벨론이 세운 유다 총독 그다랴를 죽이고 애굽으로 도망을 쳤다. 지금도 정통 유대교에서는 7월 3일을 그다랴의 금식일로 정해 지키고 있다. 7:5의 질문에 대해 예상되는 대답은 강한 부정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모든 행위는 자기 중심적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의 금식 행위 안에 존재하던 이러한 정신이 그들이 먹고 마시는 일에도 침투하게 되었다. 그들의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금식에 대한 스가랴의 질책은 (사 58:3-8)의 유명한 말씀을 기억나게 해준다. 독선과 자기 만족은 결코 거룩하신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

  스가랴의 어조가 거칠고 냉혹해 보이지 않는가? 그가 이런 태도를 보인 최초의 인물은 아니다. 포로기 이전의 선지자들 역시 이와 비슷한 태도로 예언을 했다. 그들이 금식을 한 원인이 된 재난들은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에 따른 결과였다. 왜 그들은 하나님께서 거듭 분명히 명하시는 말씀에 귀를 지울여야 하는 때에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일에 관심을 이울였을까? 그들은 그 땅에 백성들이 정착하여 거주했을 때, 즉 포로기 이전의 시대에 선포된 선지자들의 말씀에 순종해야만 했다. 이것이 자진해서 하는 모든 금식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은 금식보다 순종을 더 원하신다. 7:7에 언급된 남방은 유대 산지를 말하며, 평원(세펠라)은 유다 서부 지역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죄악 때문에 임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인해 금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들은 자기들이 당한 재난 때문에 금식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재난들은 그들이 범한 죄로 인해 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금식의 원인은 그들의 죄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러한 죄를 제거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금식할 필요가 없어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순종이 금식보다 낫다고 한 점은 옳다.


3-3. 공의를 행하라!(8-10)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여 이르시되(8), 만군의 여호와가 이미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9),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남을 해하려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10)..."

  스가랴는 과거의 선지자들이 선포했던 경고와 메시지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 조상들에게 제시되었던 경건의 길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 재판의 진행은 진리에 따라 행해져야 한다.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을 증오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공의의 재판관이시기 때문이다. 이웃간에는 서로 인애와 승휼을 베풀어야 하며, 모든 공적 사적인 관계들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본을 따라 행해져야 한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은 의지할 데 없는 연약한 사람들, 즉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궁핍한 사람들을 돌아보라고 명하고 있다. 또한 율법은 그들에게 이웃에 대해 노를 품지 말고, 그들을 해치려고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고 명하고 있다.

  이웃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못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올바르게 될 수 없다. 경건이 없는 신앙은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 대한 모독이다. 윤리가 결핍된 종교는 무익하며, 참된 신앙이 없는 윤리 역시 근거가 없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형식보다 내면의 진실을 원하시며, 그것이 이웃을 향해 나타나기를 원하신다. 스가랴 선지자가 그들에게 선포한 이러한 메시지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전부터 이러한 요구를 계속해서 해오셨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통치 원리는 과거나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3-4. 불순종에 대한 징계 (11-14)

  "그들이 청종하기를 싫어하여 등으로 향하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11),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신으로 이전 선지자를 빙자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노가 나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나왔도다(1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었노라.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은즉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고(13), 회리바람으로 그들을 그 알지 못하던 모든 열국에 헤치리라! 한 후로 이 땅이 황무하여 왕래하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으로 황무하게 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14)."

  하나님께서 그듭해서 경고하시고 권면하셨지만, 포로 전에 살았던 조상들은 그 경고와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은 완악함과 불순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첫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으며, 둘째로 그들은 하나님께 등을 돌렸다. 등을 돌리는 것은 멍에를 거부하는 황소의 태도에서 나온 비유이다. 그들은 멍에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황소처럼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주시는 권고의 말씀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셋째로 그들은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았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린 일만으로도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들은 귀를 막고 그 말씀을 듣지 않음으로 더욱 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그들의 마음을 금강석과 같이 굳게 하였다. 그들의 불순종과 거역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들은 게속해서 진리를 거부함으로 점점 더 마음이 완악해지고 냉혹해 졌으며, 둔감하기 이를 데 없게 되고 말았다.

  영적인 경화는 육적인 것만큼 사실적이며, 그 결과는 육적인 것보다 훨씬 더 비참하다. 생명의 근원인 마음이 병들면, 그 증세는 절망적인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성령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끝없이 대적했다. 여기에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진리가 있다. 첫째로 스가랴는 선지자들의 계시와 메시지를 모세의 율법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 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등급을 매길 수는 없다. 선지자들의 말과 율법은 동등한 권위를 갖는다. 인ㄴ 이 두 말씀이 모두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우리들은 이 두 가지 수단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유의해야 한다.여기에 언급된 "이전 선지자들'은 포로 이전에 이스라엘과 유다에서 활동했던 선지자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불순종은 하나님의 큰 진노를 불러 일으켰다. 하나님의 진노가 컸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내린 큰 징벌을 통해 알 수 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징계는 갑자기 이스라엘 위에 내려졌다. 하나님께서 인내하시면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자주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끝내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이 환난 중에 부르짖었지만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다. 곤경에 빠진 어린 아이가 어머니를 향해 도움을 요청할 때에 응답이 없다면 얼마나 슬프겠는가? 하나님은 환난 중에 부르짖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폭력과 회오리 바람을 일으켜서 그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이방 땅에 흩어 놓으셨다. 스가랴가 사역하던 시대에 이미 그들은 앗수르와 바벨론 등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앗수르와 바벨론 포로 이후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로 상태로 지냈으며, 여러 지역에 흩어져서 방황하며 살게 되었다. 하나님의 진노는 불순종한 백성에게 충만하게 임했다. 이스라엘 주변과 그들이 살고 있던 곳의 민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친절을 베풀거나 동정을 나타내려 하지 않았다.

  바벨론 포로 생활의 결과로서 이스라엘 땅은 버려진 황무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로 인해 이방 강대국들은 그 땅을 소유하지는 못했다. 그 땅에 살아야 할 적법한 사람들이 없는 때에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70년 후에 귀환할 것을 대비하여 그 땅을 보존시켜 주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불순종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고, 제 멋대로 행한 그들을 치기 위해 대적들을 사용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기 땅을 황폐케 했다는 책망을 받는다. 그 땅이 황무하게 된 것은 바로 그들의 죄때문이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땅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기꺼이 주셨던 땅, 곧 문자 그대로 "소망의 땅"이었다. 인간이 만든 폭탄 등의 파괴 도구들은 결코 죄만큼 치명적으로 땅을 황무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죄가 아름다운 가나안 땅을 파멸시켜 황무케 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로부터 인간 생활에 있어서 지가 얼마나 무서운 해악을 끼치는 지를 잘 알 수가 있다.


3-5.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라!

  스가랴 7장의 주제인 금식은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친숙한 것이다. 그들의 종교력에는 많은 금식일이 있다. 그 모든 금식일의 기저에 흐르고 있는 교훈은 민족사에 있어서 죄 때문에 닥쳐왔던 재앙과 파멸들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했더라면 얼마나 현명했을까? 그들은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된 말씀에 꾸준히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4. 금식을 위한 잔치 (8장)


4-1. 진리의 성읍, 예루살렘(1-3)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1),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3)."

  스가랴 8장에서는 7장의 사상이 계속되고 있다. 스가랴는 그들의 조상의 운명을 예로 들면서 순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8장에서는 그들 앞에 미래의 축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들을 제시하면서 7장에서 권고했던 마음들을 가지라고 권면하고 있다. 7장은 1:1-6에 대한 응답인 것처럼, 8장은 1:14-17과 병행한다. 8:2에서 하나님은 두 번씩이나 시온을 위해서 크게 질투하셨다. "질투한다"는 동사의 원래 의미는 "빚난다", "붙탄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마음은 자기 백성의 축복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크신 진노를 내리신다.

  이러한 약속들은 스가랴 1-2장에 기록된 것을 기억하게 해준다. 하나님은 시온에 축복을 주시기로 확정하셨기 때문에, 그 일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 가운데 거하실 때에 이루어질 결과는 거룩함과 진리이다.시온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은 항상 시온이 진리의 거룩한 도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슥 1:26, 사 1:10, 계 11:8을 비교해 보라).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이 바로 축복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4-2. 평화와 안전(4-5)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지아비와 늙은 지어미가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가 많으므로 각기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4), 그 성읍 거리에 동남과 동녀가 가득하여 거기서 장난하리라(5)."

  이스라엘의 영적 자세가 올바를 때에 하나님은 항상 그들에게 물질적 축복으로 함께 하신다. 영적인 평화는 물질적 평화의 선구자가 된다. 늙은 지아비와 늙은 지어미들이 손에 지팡이를 들고 예루살렘 거리에서 평화스럽고 두려움없이 앉게 될 것이다. 성읍 거리에는 동남과 동녀들이 가득하여 서로 장난을 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중간 연령층이 언급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이 제외된 것이 아니다. 이 이 이기에서 중간층은 자동적으로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쟁이 젊은이들의 목숨을 앗아가지 않을 것이다. 전쟁이 젊은이들의 목숨을 앗아가지 못할 것이며, 이스라엘 주민들은 장수하게 될 것이다. 거리에서 장난하는 동남 동녀들의 모습은 안전함과 후손이 많아졌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장수와 많은 후손을 약속하고 있다.

  이러한 약속들이 마카비 시대에 문자 그대로 이루어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축복의 장면들이 마지막에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스가랴의 예언은 지난 수 세기 동안 이스라엘이 겪고 알아왔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남은 자들(스가랴 시대의 백성들은 물론)은 이 예언의 성취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견해를 보여왔다. 그러나 인간 편에서는 이러한 약속들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은 없다. 그들은 감히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의 권능을 제한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께서, 그리고 그들의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4-3. 땅의 회복(6-8)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6).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을 동방에서부터, 서방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7), 인도하여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성실과 정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8)."

  이스라엘을 위한 미래와 천년왕국의 축복은 이스라엘이 회복되어 그 땅으로 귀환한 사실에 기초를 주고 설명해야 한다. 스가랴는 흩어졌던 그들을 하나님께서 다시 모으실 것이라고 예언한다. 어떤 사람들은 6절에 언급된 동방과 서방이 바벨론과 애굽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6절에 언급된 동방과 서방은 바벨론과 애굽이 아니라 세상의 사방 모든 나라를 의미한다. 앗수르와 바벨론 치하의 포로 생활과 유랑 생활은 동방을 의미하지만, 이것은 성경에서 증거되고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장차 전세계로 흩어질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흩어진 백성들을 세계의 사방에서 그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그 예고편에 불과하다. 특히 "서방'이란 말은 적적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주로 팔레스타인 서방에 있는 땅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귀환은 하나님에게로의 영적인 회복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귀환과 회복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와 공의에 따라서 참되고 의롭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상호관계를 명백하게 드러낼 것이다.


4-4. 성전 재건을 위한 격려(9-13)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집 곧 전을 건축하려고 그 지대를 쌓던 날에 일어난 선지자들의 입의 말을 이 때에 듣는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9). 그 날 전에는 사람도 삯을 얻지 못하였고 짐승도 삯을 받지 못하였으며 사람이 대적을 인하여 출입에 평안치 못하였었나니 이는 내가 뭇 사람으로 서로 치게 하였음이어니와(10),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이제는 내가 이 남은 백성을 대하기를 전일과 같이 아니할 것인즉(11), 곧 평안한 추수를 얻을 것이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산물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리리니 내가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12). 유다 족속아,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방 가운데서 저주가 되었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너희로 축복이 되게 하리니 두려워 말지니라. 손을 견고히 할지니라(13)."

  우리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복된 전망들을 즐거워 할뿐 아니라, 이것을 제시하는 하나님의 지혜도 볼 수 있다. 스가랴가 과거의 비극에 초점을 맞추면서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다가 금식이라는 주제에서 너무 벗어났다고 염려할 필요는 없다. 이제 그는 이 모든 것의 초점을 그 당시의 상황에 맞추고 있다. 제시되어진 모든 진리는 그 당시 진행 중이었던 과업을 더 잘 수행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스가랴는 그들 앞에 놓인 작업과 장차 다가올 날들에 대해서 담대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다리오 왕 4년(7:1)에 백성들은 성전을 재건하고 있었으며, 그들에게는 격려가 필요했다.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말씀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선포되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그들의 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여호와의 집, 즉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 지대를 놓은 것을 언급한 것은, 건축 작업을 재개하여 완성할 것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성전 재건을 처음 시도했을 때에는 지대를 쌓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져서 성전이 완성될 때가 되었다. 그러나 그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격려하고 견고하게 해주셔야만 했다. 스가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집을 짓는 작업을 재개하기 전의 국가적 상황을 상기시켰다. 성전 재건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그들은 노동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러한 비참한 상황에서 그들은 밖으로 대적들의 공격에 시달렸고, 안으로 내란을 겪어야 했다. 그들은 어느 곳에서도 안전과 안녕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특히 사마리아인들은 다른 족속들과 연합하여 소수의 남은 자들을 괴롭혔다. 캄비세스가 팔레스타인을 거쳐서 애굽으로 원정한 일도, 유대인들에게는 어느 정도 고통을 주었음에 틀림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들의 생활은 불안정하고 불확실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이 하나님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낙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성전을 재건하라는 명령에 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해 주실 것이다. 이제 다시 땅이 소산을 낼 것이며, 그들은 평화 중에 추수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포도나무가 자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이며, 하늘에서는 적절한 이슬이 내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불순종할 때에 거두어 가셨던 물질적인 축복들을 남은 백성들에게 쏟아부어 주실 것이다. 이전에 그들은 열방 중에 저주거리가 되었지만, 앞으로는 열방 중에 축복이 될 것이다. 전에는 이스라엘이 저주의 상징었지만, 이제는 축복의 상징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일은 이스라엘의 희망과 약속이 성취되는 통일 국가 시대에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현재와 미래에 축복이 주어질것이므로 이제 이스라엘은 담대해질 필요가 있었다. 두려움으로 마음이 약할 때에는 그 손이 강해질 수가 없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힘을 잃고 낙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고무적인 메시지가 되었을 것이다.


4-5. 선한 교훈(14-1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전에 너희 열조가 나의 노를 격발할 때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고 뉘우치지 아니하였었으나(14), 이제 내가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지니라!(15)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16),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나의 미워하는 것임이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17)."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이전에 죄악된 길로 가기를 고집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시기를 결심하시고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기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보다는 축복하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이 선을 행하기만 한다면 즉시 징계를 바꾸어 복을 내려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해야 될 도덕적인 상황에 대해서 감당히 말씀하셨다. 그들은 이웃과 교제할 때에 진실을 말해야 하며, 성문에서 재판을 할 때에 평화롭고 공정한 재판을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팔레스타인에서는 성문이나 그 근처에서 일반적인 집회나 재판을 열였다. 무엇보다 그들은 마음에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도모를 금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 마음에 작은 증오라도 뿌리가 내리도록 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그들은 거짓 맹세를 하는 일을 금해야 했다. 경건한 자들은 마땅히 거짓 맹세를 미워해야 한다. 하나님은 불의와 악과 거짓 맹세를 미워하시므로, 그들도 마땅히 그것을 미워하고 피해야 한다. 스가랴는 경건과 윤리를 함께 결합하고 있다. 선한 윤리가 없는 종교는 거짓된 것이며, 참된 종교는 반드시 선한 윤리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참된 종교 개혁이 윤리적인 개혁을 가져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4-6. 금식이 선한 축제가 되게 하라!(18-20)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18),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과 시월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찌니라(1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후에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거민이 올 것이라(20)."

  이제 하나님은 스가랴 시대의 백성들이 궁금해 했던 금식에 대한 질문에 대해 적절한 답변을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동안 예루살렘의 함락을 기억하기 위해서 4월에 금식을 했으며, 성과 성전의 파괴를 기억하기 위해서 5월에 금식을 했고, 총독 그다랴가 암살당한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7월에 금식했고, 또한 예루살렘이 포위당한 일을 기억하기 위해서 10월에 금식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이 모든 금식일이 변하여 기쁨의 축제가 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있기 위해서 그들은 진실과 화평을 해야 했다. 어떤 해석가들은 스가랴가 금식을 폐지하기 위한 발언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18-20절에 선포된 스가랴의 메시지는 분명히 금식이 폐지되고 기쁨의 절기로 변하게 될 것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전승에 따르면 국가가 평화와 번영을 누릴 때에는 금식이 중단되었으며, 환난을 당할 때에는 다시 금식을 시행했다.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국이 된 주후 70년 이후에 이스라엘은 또 다시 이러한 금식(4월 17일, 5월 9일, 7월 3일, 7월 10일, 10월 10일 등)을 행하게 되었다.


4-7. 열방의 축복 이스라엘(21-23)

  "이 성읍 거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할 것이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21),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2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는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 열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23)."

  스가랴의 시선은 장차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에 나타날 기쁨과 축복의 절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스라엘이 회복된 후에 던 세계가 하나님께 돌아오게 될 것이다. 민족들은 서로 다른 민족들에 대해 선한 관심을 나타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자고 서로 권고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자원해서 자기의 성읍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게 될 것이다. 그때에 이스라엘 뿐 아니라 수많은 강대국들도 하나님께 경배하기를 간절히 원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 이스라엘은 열방의 우두머리와 지도자가 될 것이다. 스가랴는 이러한 사실을 열방사람 10명(10은 많은 수를 나타내는 숫자이다)이 유다 사람 한 사람의 옷자락을 붙잡고 함께 가자고 하는 행위로 묘사하고 있다. 열방 사람이 이렇게 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유다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옷자락을 잡는 것은 도움을 바라거나 간청하는 행위, 또는 유대인이 소유한 축복과 특권에 함께 참여하기를 원하는 갈망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장차 유대인들이 누리는 축복은 특별한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고레스를 통해 예루살렘에 귀환한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장차 이스라엘은 메시야 왕국이 되어 열방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4-8.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하신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살았던 시절, 즉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던 시절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에 거하실 때에 열방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던 시대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다.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를 거절하고, 이로 인해 각 나라로 흩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지금 나라를 다시 회복했지만 아직도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영접하는 순간, 그들은 다시 메시야의 백성의 축복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 그들은 임마누엘이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배반한 세계의 회복은 이스라엘이라는 중개자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실 때에 열방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될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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