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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스가랴

[스크랩] 스가랴(1): 위로의 메시지 (1-4장)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8. 23:54

스가랴(1):  위로의 메시지 (1-4장)


1장 위로의 메시지(1-4장)

 

 

1. 스가랴와 그의 메시지(1장)

 

  스가랴의 이름은 "하나님(여호와)께서 기억하시다"는 의미이다. 구약 성경에는 이러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 약 29명 등장한다. 스기랴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 이후에 활동한 위대한 선지자이다. 포로 후에 활동한 선지자들은 학개와 스가랴, 그리고 말라기이다. 그는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 바벨론에서 태어났으며, 고레스의 허락으로 약 5만명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때에 함께 돌아왔다. 그의 아버지가 일찍이 죽었으므로 그는 조부 잇도의 자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예레미야와 에스겔처럼 선지자이면서 동시에 제사장이었다. (슥 2:4)을 보면 그는 특별히 연령을 밝히지는 않았으나, 소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유대교 전승에 의하면 그는 대회당의 일원으로서 포로기 이후의 유대인의 신성한 기록물과 전승들을 수집하고 보존했다고 여겨지고 있다. 스기랴는 학개가 예언 사역을 시작한 지 2개월 후에 사역을 시작했다(학 1:1, 슥 1:1 비교). 이것이 다리우스 히스타페스 통치(주전 521-485) 2년, 즉 주전 520년의 일이었다. 그의 활동 기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스가랴에서는 시간에 대한 기록이 세 번 언급되어 있다. 학개와 마찬가지로 그의 사역은 귀환한 백성들의 성전 건축을 격려하는 것이었으며, 모든 대적들을 이기는 승리의 시기가 오리라는 희망을 주는 것이었다. 스가랴의 사역의 범위는 학개의 사역 범위를 초월하는 것이었다. 스가랴의 예언적 시각은 다른 소선지자들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 스가랴에서는 많은 환상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의 계시록이라 불리어진다. 그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활동을 다른 소선지자들보다 훨씬 자세히 설명했다.

  스가랴의 예언은 유대교 해석가들이나 기독교 해석가 모두가 난해하다고 여기고 있다. 그의 환상들과 신탁들이 가장 메시야적이라는 것은 모두 인정하고 있다. 그것들을 해석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스가랴가 포로기 이후의 선지자라는 사실(따라서 미래의 영광에 대한 약속은 바벨론으로부터의 귀환을 말하는 것이 될 수 없다)과 문체의 유사성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그가 이전 시대 선지자의 문체를 많이 사용했다는 것을 명심한다면, 이런 어려움은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환상을 제외하고 본다면, 스기랴서의 문체는 단순하고 직설적이다. 스기랴서는 크게 두 부분(1-8장과 9-14장)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에는 특히 스가랴 시대의 사람들을 염두에 둔 8가지 예언적 환상이 기록되어 있다. 두 번째 부분은 이스라엘의 종말적 사건들과 천년 왕국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스가랴는 주전 516년에 성전 건축이 완성될 것을 예언했지만, 스가랴서의 마지막 장들에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예언들이 기록되어 있다. 스가랴의 예언을 간략하게 개관하면 1) 환상들(1-6장), 2) 질문들(7-8장), 3) 경고들(9-14장)로 나눌 수 있다. 스가랴는 포로 귀환으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이스라엘의 완전한 영적인 역사, 그리고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관계에 대한 역사를 묘사하고 있다. 메시야와 예루살렘은 스가랴의 모든 예언의 메시지가 이루어지는 중심점이다. 스가랴의 예언에는 세 개의 제국, 즉 바사(1,7장의 다리우스), 그리이스(9장의 알렉산더), 그리고 로마(12,14장에서 암시적으로)이 등장하고 있다.


1-1. 회개를 촉구함(1-6)

  "다리오왕 이년 팔월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1), 나 여호와가 무리의 열조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2).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3).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않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4). 너희 열조가 어디 있느냐?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5) 내가 종 선지자들에게 명한 내 말과 내 전례들이 어찌 네 열조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돌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하였다 하셨느니라! 하라(6)."

  스가랴의 첫 예언적 메시지는 다리오 왕 통치 제 2년에 선포되었다. 그가 이방 제국의 통치 연대를 밝히고 예언을 시작한 것은 (느부갓네살의 통치로 시작된) 이방인의 통치 시대가 이미 시작되어 진행 중이었다는 것을 명백하게 나타내준다. (1:1-6)에 기록된 회개하라는 권면은 아마 모든 백성들에게 전파되었을 것이다. 스가랴는 강력한 어조로 자기 시대 백성들에게 열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한다. 이러한 책망을 불러 일으킨 원인은 성전 건축을 게을리 한 것뿐 아니라, 그들의 일반적인 영적 상태였다. 포로생활로부터 귀환한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의뢰하며 살아야 했다. 그 동안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샀으며, 이로 인해 나라가 멸망되고 70년 동안이나 포로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은 지나간 죄를 회개하고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와야 했다. 스가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축복받을 수 있는 길에 대해서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축복해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1:1-6)에 보면 독특한 하나님의 칭호가 나타나고 있다. 이 곳에서 스가랴는 하나님을 "만군의 주"라고 부르고 있다. 이 용어는 학개, 스가랴, 그리고 말라기에서 80여회나 등장하는 특별한 칭호이다. 헬라어 번역 성경에서는 이 칭호를 "전능자"(The Almighty)로 번역했다. 하나님은 별들의 주님이시며, 하늘의 권세이시며, 온 우주의 힘이시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포함한 포괄적인 칭호이다.

  사람들은 나쁜 행위를 쉽게 따라 행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스가랴는 포로 후 백성들에게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던 포로 전 조상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는 초기 선지자들이 했던 말들이 모두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스가랴는 말씀을 선포하던 사람들(선지자들)과 사역을 받던 사람들(조상들)이 이미 사라졌지만, 종들을 통해 주셨던 하나님의 메시지는 예루살렘과 그 백성들의 황폐한 상태를 통해서 분명하게 입증되었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선포는 그것이 성취되어지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증명한대로 문자 그대로 모두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지만 그것을 전한 선지자들은 유한하여 모두 죽고 말았다. 바벨론 포로 생활은 포로 이전의 선지자들의 메시지가 진리였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따라서 스가랴 시대의 백성들은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고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할 필요가 있었다.


1-2. 첫째 환상: 말들의 환상(7-11)

  "다리오왕 이년 십일월 곧 스밧월 이십 사일에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니라(7). 내가 밤에 보니 사람이 홍마를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홍마와 자마와 백마가 있기로(8), 내가 가로되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이들이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매(9),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10). 그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에게 고하되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보니 온 땅이 평안하여 정온하더이다(11)."

  밤에 본 8개의 환상들은 모두 같은 날 밤에 본 것이다. 그리고 이 계시들은 중요하기 때문에 날짜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첫 번째 메시지가 있은 지 3개월이 지난 후에 일어났다. 첫째 환상은 8개의 환상들을 푸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스가랴는 환상 중에 골짜기에서 홍마를 타고 있는 사람을 보았으며, 그 뒤에 홍마, 자마, 그리고 백마가 있는 것을 보았다. (1:11-12)을 보면 홍마를 탄 사람은 하나님의 천사임을 확인할 수 있다. 구약 성경에는 종종 인간의 형태를 지닌 천사가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바벨론의 탈무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 사람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축복받은 분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쟁의 사람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골짜기는 아마 스가랴가 잘 알고 있는 장소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주위에는 화석류로 덮힌 골짜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골짜기에 있는 화석류 나무들은 지상의 열국 중에 처한 이스라엘의 낮은 지위와 타락한 위치,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향기를 발하는 상태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그러면 말들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 그것들이 천군들, 즉 천사들을 상징한다는 주장이 있으나, 그보다는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의 상징이라고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나타난 색깔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른 선지서를 놓고 유추해 볼 때에 색깔의 차이는 말들과 말을 탄 사람들에 의해 수행되어질 임무의 차이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붉은 색은 전쟁과 피흘림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며, 여기에서는 이스라엘의 대적들에 대한 복수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 말 위에 하나님의 천사가 타고 있는 것은 당시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자색은 흰색과 붉은 색을 혼합한 색이다. 흰색은 승리와 정복을 나타낸다. 색깔을 혼합하는 것은 바벨론이 패배한 메데-파사 전쟁을 말하는 것으로, 그 전쟁으로부터 초래된 혼란한 상태를 나타낸다. 바사 제국 최후의 새 왕조 설립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자세하게 논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스가랴와 대화를 한 천사는 환상을 해석하는 천사였다(계 1:1, 22:16 참고). 스기랴가 말들과 말탄 사람들의 의미에 대해서 질문했을 때에, 하나님의 천사는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을 살펴보는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대답한다. 하나님은 지상의 상황에 대해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이시는 분이시며, 특히 지상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계신다. 말을 탄 사람들은 온 세상이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보고한다. 바사 제국의 역사를 보면 다리오 왕 통치 초기에는 반란이 거듭되었지만, 그 후에 모든 반란이 평정되었다. 그러나 학개는 열국들이 진동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종을 통해서 하셨던 이러한 경고와 약속들을 반드시 그대로 실행하실 것이다.


1-3. 여호와의 사자의 기도(12-17)

  "여호와의 사자가 응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려나이까? 이를 노하신지 칠십년이 되었나이다! 하매(12), 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13).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14),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만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15).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16).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안위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셨다 하라(17)."

  하나님의 백성들은 여전히 이방인의 권세와 지배 하에서 억압된 상태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열국들의 평온과는 큰 대조르 이루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자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나님께 중재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 그는 70년 동안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온 예루살렘과 유대 성읍들에게 하나님께서 기꺼이 긍휼을 베푸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다. 주전 606년부터 주전 536년까지(고레스가 성전 재건을 명한 때) 포로 시대는 계속되었다.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 풍성하게 대답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축복을 예고하시는 위로의 말씀으로 대답하셨다. (1:14-17)은 위로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들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예비된 축복들이다. 일곱 번에 걸쳐 기록된 위로의 말은 1)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끝없는 질투, 2) 열국들에 대한 하나님의 격렬한 진노, 3) 하나님께서 자비롭게 예루살렘에 돌아오심, 4) 성전의 재건, 5) 파괴된 성읍의 재건, 6) 그 땅 거민들이 넘치도록 풍부하게 됨, 7) 시온의 안위와 예루살렘의 선택 등이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이스라엘의 번영을 위하여 질투하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동시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친 열국들에게 크게 노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잠시 동안 진노하신 반면, 열국들은 이스라엘을 진멸시키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열국들이 향유하고 있는 평화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 아니라는 의미가 여기에 드러나 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이기심과 사악한 의도를 이미 간파하셨다. 이스라엘을 징계하라는 사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명을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 수행했다. 그들은 나쁜 의미에서 안일했으며, 부주의하고 교만했다. 지상의 열국들의 큰 죄는 옛적부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증오해왔고 또 증오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스 1장)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12장과 14장의 사건들 속에서 절정에 달했다. 열국들이 이스라엘을 다루는데 있어서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를 유빌했는지 유의하라. (1:15)에서 중요한 초점인 시온은 특별히 다윗이 건설하였던 성읍의 남동쪽에 있는 언덕을 말한다. 시온이란 성전이 있었던 북편 언덕을 지칭하는 것이며, 따라서 예루살렘과 동의어가 되는 수도를 지칭한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가지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셨다는 증거는 성전의 재건 속에 명백히 나타나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성전은 이미 건축 중에 있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못했다. 이 성전은 다리오 왕 6년에 완성되었다. 과거에는 성읍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다림줄을 드리웠지만, 이제는 건축을 에비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위에 다림줄이 드리워질 것이다. 더욱이 모든 유다의 성읍들은 그릇에 물이 넘쳐 흐르듯이 넘치도록 풍성하게 될 것이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마카비 시대에 이스라엘의 인구가 크게 증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시온에 대한 위로를 통해서 자신의 변하지 않는 선택의 속성을 나타내셨다. 따라서 스가랴는 미래의 축복에 대한 약속의 말로 결론을 맺는다. 이러한 예언이 그 당시에도 예비하신 길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말씀들은 영광스러운 이스라엘의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시대에 완전히 이루어지고,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성경의 증거는 확실하다. 

  "오 주여 얼마나 오래니이까?"

  이 말은 영광스러운 이스라엘의 도래를 바라는 많은 믿는 사람들의 신앙의 부르짖음이다. 열국들 중에 처한 이스라엘의 궁핍하고 비참한 상황은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하시겠다고, 즉 그것을 치료하시기 위해 많은 일을 하시기로 약속하셨다.


1-4. 둘째 환상: 네 뿔과 공장들의 환상(18-20)

  "내가 눈을 들어 본즉 네 뿔이 보이기로(18), 이에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대답하되 이들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헤친 뿔이니라(19). 때에 여호와께서 공장 네 명을 내게 보이시기로(20)..."

  히브리어 구약 성경은 두 번째 환상에서부터  2장이 시작된다. 영적 성경은 헬라어역(라틴역) 구약 성경을 따르고 있다. 장의 구별이 다른 것은 이 환상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 스가랴는 눈을 들어 네 개의 뿔을 보았다. 성경에서 뿔은 능력을 상징한다. 이 비유는 힘이 뿔 속에 존재하는 황소와, 그밖에 뿔을 가진 동물들에서 유래된 것이다. 네 뿔들의 현시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4라는 숫자가 지구상의 사방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사방에서 위협해왔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북방의 사마리아, 동방의 암몬, 남방의 에돔, 서방의 블레셋과 두로 등이다.

  또 다른 주장은 범위를 최대한으로 확대하여 유다와 예루살렘과 접촉하고 있었던 모든 제국들을 언급하기도 한다. 즉 메시야의 최종적인 구원의 때까지 예루살렘과 유다를 억압할 제국들을 모두 말하고 있다.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 있는 상징들로부터 미루어 판단할 때에 그 구절들이 (단 2,7,8장)에 등장하는 네 개의 강대국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 강대국들은 유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수도와 더불어 전 민족), 흩었던 바벨론, 바사, 그리이스, 로마이다. 물론 스가랴의 시대에는 셋째와 넷째 강대국인 그리이스와 로마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언의 특권은 광범위한 견지에서 전체적인 사건들의 대략을 보는 것이다. 예언에서 함께 언급되어진 사건들은 각기 분리되어 성취된다.

  (1:20)에서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네 명의 노동자들, 혹은 공장들을 보여주셨다. "공장"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단어는 목재, 금속, 또는 석재를 다루는 데 능숙한 기술자를 의미한다. 공장들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짓밟고, 흩었던 열국들의 마음을 두려움으로 몰아넣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의 대적들의 전복을 초래하는 것이다. 공장들은 뿔들을 깨뜨려 산산조각을 내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들이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어떤 어떤 수단을 사용하셨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하나님은 징계해야 할 열국들을 치실 때에 인간이나 초자연적인 적절한 수단을 사용하셨다. 그러므로 공장은 하나님께서 모든 뿔을 파괴하실 대리자를 갖고 계신다는 것을 계시해 주고 있다.


1-5. 사람으로 능히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매(21)

  "내가 가로되 그들이 무엇하러 왔나이까? 하매, 대답하여 가라사대 그 뿔들이 유다를 헤쳐서 사람으로 능히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매 이 공장들이 와서 그것들을 두렵게 하고 이전에 뿔들을 들어 유다 땅을 헤친 열국의 뿔을 떨어치려 하느니라 하시더라(21)."

  이스라엘 백성들을 흩은 것은 사악한 분노에서 이루어졌으므로, 선지자는 아무도 그의 머리를 들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쇠약해진 상황과 대적들의 손아귀에서 고통 받은 상처들을 잘 나타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행위들을 간과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졸지 않고 깨어 계시면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돌아보고 계신다.


2. 하나님의 눈동자(2장)

2-1. 셋째 환상: 척량하는 자의 환상(1-2)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척량 줄을 그 손에 잡았기로(1),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척량하여 그 장광을 보고자 하노라 할 때에(2)..."

  스가랴 2장에는 일련의 환상 중 세 번째 환상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된 것과 관련되어 있다. 만일 두 번째 환상이 (1:15)에 기록된 사실의 확장이라면, 세 번째 환상은 (1:16)에 나오는 약속의 구체적 완성이다. 스가랴가 본 척량줄을 가진 사람은 다른 환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형상을 가진 천사이다. 이 사람은 부연된 설명에 의해서 더 명확하게 지적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의 천사일 수는 없다. 그는 스가랴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자신의 목적은 예루살렘의 크기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이라고 알려준다. 여기에 언급된 성읍은 미래의 성읍이 아닌 스가랴 시대의 성읍을 말한다. 여기에 언급된 예루살렘은 건축이 완성된 성읍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예루살렘은 완전한 회복의 견지에서 측량되어지고 있다. 이 환상은 미래의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이며,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완성에 대한 예언이다.


2-2. 영광의 약속(3-5)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가매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3),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그것이 성곽 없는 촌락과 같으리라(4).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5)."

  스가랴는 자기에게 임한 환상의 의미를 백성들에게 전해야 했다. 그러므로 천사는(그는 위치가 너무 열등하므로 하나님의 천사가 될 수 없다) 예루살렘의 미래에 대한 찬란한 약속을 듣기 위해서 다른 천사를 만나러 갔다.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 천사를 맞으면서 그에게 스기랴에게 전할 메시지를 전해 주었다. 다른 천사는 그 천사에게 절은 선지자에게 가서 장차 예루살렘의 지경이 넓어지고, 성곽이 없는 촌락처럼 많은 사람들과 육축들이 살게 될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성곽이 없이 사는 것은 평화와 안전을 의미한다. 여기에 예언된 바와 같이 인구의 증가는 바벨론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귀환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2:5)에 언급된 것처럼 아주 먼 미래의 날을 조망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이스라엘의 숙적들을 방어하기 위한 외형적인 성곽이 없어지더라도, 예루살렘은 보호 성곽이 없이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성곽이 되어 주시고, 그 가운데 영광이 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이 본문은 주전 445년 느헤미야의 지도 하에 행해진 예루살렘 성과 건축의 사기를 저하시키려는 의도로 한 말이 아니었다. 보호와 안전을 나타내는 불성곽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불기둥을 회상시켜 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과 보호의 성곽이 되실 것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여기에 약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예언의 성취는 미래에 완전히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 환상의 주제는 (1;16-17)에 기록된 것을 확증하는 것으로서 예루살렘의 재건과 정착이다. 그리고 이 예언의 완전한 성취로 말미암아 지상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읍으로서 예루살렘이 건설될 것이다. 이 날은 이스라엘과 앞으로 존재할 전 세계 백성들에게 축복의 날이 될 것이다.


2-3. 피난하라는 경고(6-9)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하늘의 사방 바람 같이 흩어지게 하였거니와, 이제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망할찌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6). 바벨론 성에 거하는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할찌니라(7).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를 노략한 열국으로 영광을 위하여 나를 보내셨나니,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8). 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에게 노략거리가 되리라 하셨나니, 너희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리라(9)."

  스가랴는 세 번째 환상 후에 예언적 담화로 머리를 돌려 시기적으로 적절한 경고를 선포한다. 포로된 유대인들은 북방, 땅, 즉 바벨론으로부터 도망쳐야 한다. 비록 그들이 하늘의 사방 바람과 같은 폭력과 진노로 인해 국외로 흩어져 있었지만, 이제 그 사망의 땅에서 도망쳐 나오라는 경고를 받는다. 그들이 바벨론에서 도망쳐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1)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 자기들의 땅에서의 확실한 축복의 약속을 제시하셨기 때문이다. 2) 바야흐로 바벨론에 내리려는 재앙 때문이다(2:7-8). 다리오 왕의 정복군이 곧 바벨론을 정복하여 멸망시킬 것이며, 그때에 바벨론인과 유대인이 별 차이가 없게 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 흩어졌지만,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해 돌아와야 한다. 그들 중 얼마는 이미 귀환했지만,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귀환하지 않고 있었다. 그 이유는 불신앙, 조국의 황폐한 상황, 오랜 이국 생활로 인한 조국에 대한 애착심의 상실, 그리고 성읍과 성전이 황폐된 유대와는 대조적으로 바벨론은 안정과 번영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매우 급박했기 때문에, 그들은 두 번째로 피하라는 경고를 받고 있다.

  스가랴는 이제 급히 피해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영광을 위하여"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하며, 이에 대한 여러 가지 다양한 해석들이 있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것이 2:5에 언급된 영광의 때를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즉 주님께서 이스라엘 중에 거하기 위해서 영광 중에 귀환하시고, 그 후에 수 세기 동안 이스라엘을 약탈해 온 모든 대적들을 즉시 심판하실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견해에 대하여 두 가지 반대 이론이 제시되고 있다. 첫째, 이스라엘이 바라는 모든 소,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 중에 영광스럽게 거하시고 나타나시는 일은 이렇게 불명확한 방법으로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히브리 원전에는 "영광"이라는 단어가 정관사와 함께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다른 예언서들과 이 구절을 비교해 보면, 이 견해가 시간적으로 혼동된다는 주장이다.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시온에 거하시게 된 후에, 이스라엘의 약탈자들을 심판하신다고 말하지 않고, 그 전에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하나의 가능성으로 이 말씀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을 떠날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주신 일종의 좌우명, 혹은 표어라는 주장이 있다. 여기 이 표어는 (삿 5:14)에 나오는 "그 다음에 베냐민은"이라는 말과 비교된다. 이 견해는 억지 해석일뿐 아니라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증명하기 위해서(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운명과 불가분리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약탈한 열국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선지자가 아닌 메시야를 보내실 것이라고 선포하신다는 주장에 동조한다. 물론 여기에는 바벨론도 포함되지만, 열국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항대로 열국들을 심판하실 날을 말한다. (2:8-9)에 언급된 "보냄을 받은 자"는 나타난 사명의 성격이나 그가 행하는 행위에 나타나는 권세로 보아 메시야임이 분명하다.

  왜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이스라엘 안에서 증명하시려고 했을까? 그것은 이스라엘을 범하는 것은(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하나님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눈은 인간의 신체 중에서 가장 복잡하고 미묘한 기관 중에 하나이다. 눈동자는 가장 예민하며, 가장 쉽게 상처를 받고, 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눈동자를 다치면 회복이 불가능하게 된다. 빛이 눈동자를 통해서 망막에 오게 되기 때문이다. 눈동자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에 대한 적절한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억압했던 열국들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그들 위에 손을 움직이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들의 종이 되게 하실 것이다. 손을 움직이는 것은 일종의 위협의 표시이다. 그것은 전에 주인이었던 자들을 종이 되게 하고, 전에 종이었던 자들을 주인이 되게 만들 것이다. 이것이 완전하게 이루어질 때에, 열국들은 하나님께서 주의 사자인 메시야를 보내셨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될 것이다.

  스가랴가 자신이 활동하던 시대에서 메시야가 하나님의 목적을 완성하실 먼 미래까지 연속적으로 옮겨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삶이 담겨 있는 사건을 다루는 성경의 태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사건의 발생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장엄한 대단원을 향해 나아가는 사슬과 계단처럼 연결된 일련의 사건들이다. 선지자들은 어려움 없이 구원과 축복의 순간에서 메시야의 지상 통치 시대에 있을 마지막 사건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모든 과거 사건들은 말씀 안에서 마지막 축복된 시간을 지향하고 있다. 바사 변경에 있던 베히스툰의 바위에는 바벨론에 두 번에 걸친 큰 반란이 있었고, 그 반란은 다리오 왕과 그의 장군 인타프레스에 의해 강제로 진압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2-4. 주님의 오심(10-13)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10).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줄 알리라(11).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취하여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12),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13)."

  (슥 1-2장)에 기록되어 있는 축복의 약속은 주님께서 메시야를 통해서 자기 백성에게 돌아오실 것이라는 사상이다. 스기랴는 (슥 2:10)에서 다시 그 사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는 시온을 향해서 이러한 불멸의 기쁨을 노래하고 기뻐하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것은 실제로 장차 메시야 시대에 외쳐칠 선언이다.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 지상에 초림하셔서 자기 백성들 가운에 거할 것이다. 그러나 본문을 계속해서 읽어나가다 보면 이 구절이 강조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은혜로 시작된 것이 영광의 출현으로 완성된다. 이 이스라엘의 왕이 다스리게 될 때에 이스라엘의 메시야의 거룩한 사명과 사역의 증거로서 많은 나라들이 주님께 속하게 되고 그와 연합하게 될 것이다.

  (2:11)에서는 2장 중에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는 주님에 관한 세 번째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두 번의 언급은 2:5, 2:10에 나와 있다). "거하다"라는 말은 주님께서 지상에 거하시는 임재를 나타내는 것으로, 히브리어 "세키나"는 여기에서 유래된 말이다. 여기에서 열국들이 주님께 속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생활의 결과로서 개정자들이 유대교에 들어오거가, 혹은 이방인들이 교회에 모이게 되는 것이라고 오해되어 왔다. 그러나 스가랴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장차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는 것, 즉 메시야의 통치하에서 이루어지는 바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언약의 완성이다. 그러나 열국들을 축복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축복을 감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여호와의 소유요, 택하신 백성이 될 것이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잠시 방해를 받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히 살아있다.

  (2:13)에는 구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거룩한 땅"이라는 언급이 있다. 결론(2:13)에서 스가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을 위해서 개입하실 때를 기다리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소, 즉 하늘로부터 일어나셔서 자신의 뜻을 완전히 이루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모든 일들이 조용하게 진행되기 때문에(1:11), 마치 여호와께서 잠드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일어나심은 잠에서 깨어난 사자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대적들아! 이를 알고 조심할지어다!


3. 정결케 된 제사장 이스라엘(3장)

3-1. 여호수아와 고소자(1-3)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1).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2),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3)."

  스가랴는 앞에 언급된 세 가지 예언적 환상을 통해서 짓밟힌 하나님의 백성을 돌아보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자세히 다루었다. 이 부분에서 스가랴는 세 가지 주제, 즉 하나님의 백성의 축복을 구하는 메시야의 기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힌 열국들에 대한 심판의 예고, 그리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통한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과 이방인들의 개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축복들이 이스라엘에게 임하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변화되어야만 했다. 네 번째 환상의 의도는 제사장의 직무 수행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를 회복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곳에서 드리는 예배를 인정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겔 22:26)에 기록된 바와 같이 제사장직은 타락했기 때문에, 포로기 이전과 포로기 때에 제사장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스가랴에게 이 환상을 소개한 것은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셨다. 스가랴는 여호사닥의 아들인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천사 앞에 서 있고, 그를 대적하는 사탄이 그의 우편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사건들이 발생한 장소는 어디인지 나타나 있지 않다. 따라서 이 환상의 의미에서 그 장소를 추론할 수밖에 없다. 이 환상의 첫 부분에서 여호수아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입장이 아니라, 제사장 직무와 백성들을 대표하는 표본으로 서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했다. 환상의 결말은 궁극적으로 여호수아 개인에게도 위안을 주겠지만, 본문에서 그는 공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실로 증명할 수 있다. 1) 그가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3:1,5,8). 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는 불변의 근거에서 사단이 책망을 받고 있다(3:2). 3) 그 땅의 죄악이 제거될 것을 에시하기 위해서 여호수아를 정결케 하셨다(3:9). 그러므로 사건의 결과는 매우 흥미롭다. 만일 여호수아가 정결하게 된다면, 이스라엘의 국가도 정결케 될 것이다. 만일 그가 대제사장직을 뺏긴다면 이스라엘 민족도 제사장직을 박탈당할 것이다.

  천사 앞에 서 있는 것은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해석상에 문제가 제기된다. 이 말의 첫째 의미는 (신 10:8, 대하 29:11, 겔 44:15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대제사장이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서 있었다는 말은 그가 지성소 안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말의 둘째 의미는 재판을 받기 위해서 서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이 말이 여호수아가 바사의 법정에 고소를 당했거나, 아니면 고소 당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은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사자의 심판석 앞에 서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 환상에는 공식적인 재판 절차는 나와 있지 않다. 그러므로 가장 타당한 태도는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의미를 함께 고려해 보는 것으로 보인다. 여호수아는 성전에서 제사장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때에 그는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의 적인 사단이 자신을 하나님 앞에 고소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법정에서 일반적으로 오른쪽은 기소자의 위치이지만, 그것은 또한 피고의 위치이기도 하다. 유대교 주석가들은 이 환상에 대해서 근거 없는 해석을 펴고 있다. 탈굼과 랍비 문서들은 여호수아가 에스라서(10:18)와 느헤미야(13:28)서에 기록된 것처럼, 자기의 자손들이 이방 여인들과 결혼을 한 이유로 기소를 당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이러한 견해는 이 환상에서 등장하고 있는 여호수아의 공적인 입장을 고려해 볼 때에 타당성이 적다. 소수의 기독교 주석가들은 이 본문이 유다서 9절과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유다서 9절은 스가랴 3장과 내상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유다서에 기록된 바 유대인의 회중을 언급하는 "모세의 시체"라는 표현의 병행귀절은 구약 성경에는 사용되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를 의미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란 말은 전혀 다른 개념과 다른 관계에 근거한 것이다. 유다서에는 분명히 문자 그대로 모세의 시체를 말하고 있다.

  (3:2)에서 사단에게 한 대답을 보면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메시야는 사단과 사단의 한 고소에 대해서 두 번에 걸쳐 책망을 한다. 이와 같이 거듭해서 책망한 것은 사단의 고소를 파기시킬 것을 분명히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책망한다"는 표현은 책망받는 자들을 크게 꾸짖어서 침묵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전체적인 사건 처리에 있어서 가장 현저한 특징은 하나님께서 사단의 고소를 무효화 하신다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의롭거나 죄값을 지불하거나 잘하겠다고 약속하거나, 또는 사단의 주장이 아무 근거가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사단의 고소를 기각하신 것은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적인 은혜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하고 자기 백성을 삼으신 이스라엘을 향해 언약을 따라 은총을 베푸실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은 사단의 정죄를 이기고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만들 것이다.

  (3:2)에서 이스라엘은 타오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로 비유되었다. 이 비유는 나무가 불 속에 던져지거나 혹은 떨어졌다가 주인에 의해서 구출된다는 점에서 친밀감을 준다. 그 주인은 타다 남은 나무의 미래에 대해 어떤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타버리기 전에 그것을 꺼낸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벌하여 바벨론 사람들의 포로가 되게 하셨으나, 은혜 안에서 완벽한 파멸에서 그들을 구원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들이 불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아브라함과의 언약, 모세에게 임한 계시, 출애굽기에서의 구원,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심, 성막을 세우는 일, 광야 여행, 그밖의 많은 사건들이 불과 관련되어 있다. (3:3)에서 스가랴는 기소를 당해 하나님의 사자 앞에 서있는 여호수아의 실제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여기에서 더러운 옷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있는 죄인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더럽혀진 이스라엘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들은 겉으로는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었지만, 제사장의 사역에 관한한 그들은 타락할 가능성이 많았다. 그들은 불결한 바벨론 땅에서 게속된 생활로 인해 제사장직의 의식적인 면에서 불결 뿐 아니라, 도덕적인 불결도 의미한다. 여기에서 언급된 더러움은 도덕적 타락을 상징하는 바 육체적으로 가장 더러운 상태를 말한다.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았지만, 정결하게 되지는 못했다. 이 표현은(3:3)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3-2. 대제사장을 성결케 하심(4-5)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4),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5)."

  여호수아가 자신을 정결하고 순결케 하는 데 무력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자는 주권적으로 시중 드는 천사에게 대제사장의 더루운 옷을 벗기라고 명하신다. 이것은 인간의 도움이 필요없는 하나님의 독자적인 사역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자가 하나님이라는 또 하나의 분명한 증거가 나타난다. 더러워진 옷을 벗기는 것은 (3:4)에 언급된 옷을 입히심과 함께 용서, 용납, 그리고 특권 위치에로의 회복을 상징한다. 아름다운 옷을 입히신 것은 제사장직의 회복을 나타낸다. 이 상징은 (사 61:10)에서 인용한 듯하다. 스가랴는 그 의식이 진행되는 것을 보는 동안,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여 여호수아를 정결케 하고 제사장의 옷을 입히시기를 원하는 자신의 열망과 기도를 표명한다. 대제사장의 관, 혹은 터어번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말이 새겨진 정금의 패가 부착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사자는 인자한 모습으로 그들에게 배풀어지는 절차와 은혜를 지켜보면서 그 곁에 서 있었다.


3-3. 여호수아에게 주어진 명령(6-7)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수아에게 증거하여 가로되(6),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중에 왕래케 하리라(7)."

  정결케 된 대제사장에게는 새로운 임무가 필요하다. 이것이 (3:7)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사자는 여호수아에게 명령을 선포한다. 그는 우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라는 개인적인 경건에 관한 지시를 받았다. 그리고 나서 그의 공적인 임무를 수행할 것을 지시받았다. 봉사는 경건생활로부터 흘러나와야 한다. 만일 이러한 일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분할하여 그가 일부를 다스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집이란 당시에 건축 중이던 성전을 말한다. 제사장의 임무에는 정결함과 부정함을 결정하고 판단하는 일이 포함된다. 뜰 역시 부정한 것으로부터 지켜져야만 했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성전에 들어가서 허용되지 못한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았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제사장의 일 중에서 가장 고귀한 것은 하늘 천사의 사이를 왕래하는 허락을 받은 것이다. 이 약속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교제를 의미한다. 이것은 의식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정결한 제사장들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민족을 대표하는 여호수아는 책임있는 위치에 있다. 만일 그가 신실하다고 판명되면, 그는 하나님의 면전에 있는 안전한 장소를 약속받게 될 것이다.


3-4. 메시야의 오심(8-10)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8).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10)."

  (3:8)에서 스가랴는 이스라엘의 완전한 대제사장의 미래에 대한 말씀을 받는다. "들으라!"는 명령은 이제 계시될 말씀의 중요성을 나타낸다. 여호수아와 동료 제사장들은 예표의 사람들로 지명된다. 이것은 예표들을 맡은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그드을 위해 예표가 만들어진 것도 아니며, 선지자들의 난해한 말들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들도 아니다. 그것은 예표의 사람들, 즉 상징적인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 사자는 제사장의 직무는 이스라엘에서 제사장직 자체를 위해 행해온 것과는 달리 예언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이어서 하나님의 종 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몇몇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 순은 결코 스룹바벨을 가리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스룹바벨은 이미 역사의 무대에 등장해 있었지만, 순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정황을 살펴볼 때에 이 순은 메시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장차 오실 이스라엘의 구원자의 이름과 같다. 그의 동료 제사장들은 신자들을 상징하는 반면에, 그는 대제사장이신 메시야를 상징한다. 제사장직은 위대한 원형이신 메시야가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여기에 언급된 "내 종"은 메시야를 가리키는 특수한 명칭이다. 그리고 순이란 앞으로 오실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라소 다윗 계보에서 나올 새 순이다. 장차 오실 메시야의 부드러움, 겸손, 인간성 등이 더욱 자세히 언급된다. (3:9)에서는 메시야에 대한 세 번째 이름인 "돌"이 사용되고 있다. 이로 인해 메시야에 대한 삼부작, 또는 삼중주가 형성되고 있다. 여기에 제시된 돌에 대하여 많은 해석들이 있다. 성전의 주춧돌, 성전의 갓돌, 메시야의 면류관에 박힌 보석, 그 당시 건축 중이던 성전의 모든 돌들, 수룹바벨, 제단, 대제사장의 가슴받이, 혹은 면류관에 박힌 보석, 또는 완성된 성전 등의 다양한 해석이 있다.

  여기에 돌이 소개된 방법이나 이에 대한 진술을 보면, 이 돌은 평범한 돌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이미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돌은 메시야를 가르킨다. 이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는 (창 49:24, 시 118:22, 사 28:16, 마 21:42, 행 4:11, 벧전 2:6)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돌 위에 있는 일곱 눈은 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이라기 보다는(4:10 참조), 오히려 지식의 완전성, 또는 그 돌의 전지하심을 가리킨다. 돌에 새긴다는 것은 메시야의 아름다움, 재능, 은혜, 그리고 귀중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성전 건축의 완성과 성전 봉헌의 날과는 관계가 없으며, (레 23:27)의 국가적 속죄의 날과도 관계가 없다. 그것은 메시야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대속사업을 완성하시어 이스라엘로 구원받을 수 있게 하신 날과 관계가 있다. 더 나아가서 이 날은 이러한 구원이 실현되는 때, 즉 (12:10)의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속죄의 날과 관계가 있다.

  (3:10)의 "그 날에"란 말은 다시는 그러한 일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의 사역은 오직 한번 뿐이다. 이제 어찌하여 여호수아와 동료 제사장들이 예표의 사람인지 명백해졌다. 용서하시는 은혜와 정결의 행위는 그 민족이 잠재적으로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구원을 받으며, 그들의 죄악이 영원히 제거되어질 메시야의 행위를 향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영적 상태에 있을 때에-이것은 구약성경의 공통된 증거이다-항상 물질적인 변영이 이스라엘에게 약속되었다. 그러므로 (3:10)은 평화와 번영의 시기를 나타낸다. 오 주여, 그 날이 속히 임하게 하옵소서!


4. 세상의 빛, 이스라엘(4장)

4-1. 네 번째 환상: 순금 등대의 환상(1-3)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깨우임 같더라(1).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2),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하고(3)..."

  스가랴 3장의 네 번째 환상은 대제사장인 여호수아에게 그의 대제사장 직이 성결케 되었으며, 대제사장의 특권과 직무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재 확신시켜 주고,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격려가 필요한 것같이, 세속 지도자들에게도 격려가 필요했다. 유다 총독이었던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은 거의 20년 동안 성전 건축을 위해 노력했지만, 완성을 하지는 못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노력에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환상과 직접적인 예언의 말씀에 의해 확신이 주어진다. 하나님은 어떠한 일도 하실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가지신 분이다. 이것은 스룹바벨이 의지해야 할 사실이며,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예비된 것이다.

  넷째 환상과 다섯째 환상 사이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경과한 후에, 해석하는 천사는 스가랴에게 돌아왔다. 그는 아마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지시를 듣고 돌아왔을 것이다. 이번에 천사는 잠자는 사람을 깨우는 것처럼 스가랴를 깨웠다. 본문에서 예언의 사자에게 환상이 제시되지 않는 기간은 잠자는 것으로 비유되고 있다. 이번에 천사는 스가랴가 묻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먼저 질문을 시작한다. 스가랴는 환상에서 하나의 황금 등대, 또는 촛대 정확히 말하면 램프받이를 보았다.

  (출 25:31-40)과 (37:17-24)에 기록된바 모세의 성막 안에 있었던 등대가 이 환상의 기초가 되었다. 로마에 있는 디도의 개선문 위에 있는 것은 주후 70년에 로마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약탈해간 것이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이 등대가 이스라엘의 새로운 상태도 등장한다는 것이다. 스가랴의 환상에 등장하는 촛대는 모세의 성막에 있던 것과 솔로몬의 성전에 있었던 것과는 네 가지 점에서 다르다. 그것은 주발 하나와 등잔들과 감람나무들과 두 개의 황금 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 등은 오늘날에도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매우 단순하고 납작한 그릇으로서 바깥쪽 가장자리에 심지가 나와 있는 것이다.

  스가랴 4장에서 일곱이라는 숫자에 유의하라! 7은 충만함, 또는 완전의 숫자이다. 4:2에는 일곱 개의 등잔과 일곱 개의 관이 기록되어 있으며, 4:10에는 일곱 개의 눈이 기록되어 있다. 이 등대는 완전한 순수함과 귀중함을 암시하는 순금으로 되어 있었다. 혹 헬라어나 라틴어 역 구약성경에 따라 한 개의 관을 가진 일곱 등잔만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에는 숫자가 중복되어 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의 등잔에 일곱 개의 관들이 있었다. 모두 49개의 관이 있었다고 한다. 이 모든 묘사는 성막과 성전에서의 등대들처럼 연료를 공급하는데 있어서 인간적인 수단이 필요 없는 무한한 공급이라는 사상을 전달해 주려고 의도되어진 것이다. 기름 관들의 숫자가 많을수록 등대의 빛은 더 밝아진다. 이 환상의 목적은 4:6에서 명백하게 밝혀진다.

  등대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당시 그들이 건축하고 있던 성전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장되어져 왔다. 교회와 이스라엘을 구분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것은 성경에서 가장 명백한 구분 중의 하나이다)은 이것이 교회를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계 1:12,20)에서 등대가 교회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은 사실이다. 또 (빌 2:15)에서는 교회가 빛에 비유되고 있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교회가 예언의 주제가 되지는 못했다. 교회는 신약 성경 (마 16:18)에 처음으로 예견되어졌다. 스가랴의 예언에 등장하는 이 상징은 하나님께서 당초에 의도하신대로 하나님께로 돌아와 세상을 밝힐 빛의 수단으로 회복된 이스라엘을 언급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제사장들의 나라와 거룩한 민족으로 만드시려고 계획하셨다. (출 19:6)을 보라!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나타내는 이상적인 묘사이다. 4:3에는 필요한 기름을 주발에 공급해주는 두 그루의 감람나무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있다. 이 감람나무들은 등대에 있는 몇 개의 등잔에 관을 통하여 기름을 공급해 준다. 이처럼 표상들이 풍부하게 표현된 것은 등잔이 빛을 발하기까지의 중요한 전체 과정과 아낌없는 공급이라는 사실을 전하려는 의도이다.


4-2. 전능하신 하나님의 성령(4-6)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4) 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5).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6)."

  4:4에서 스가랴가 질문을 한 것은 그가 등대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 비품들을 통해서 이러한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3:2-3의 모든 환상이 특정한 시기에 무엇을 의미하는 지 물어본 것이다. 스가랴가 살던 당시에 그것은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할 것인가? 해석하는 천사의 질문은 스가랴의 어리둥절한 상태를 더욱 증가시킨다. 천사의 질문에는 스가랴가 그 환상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는 암시가 짙게 깔려 있다. 분명히 그는 스가랴가 그 환상의 의미를 알 것으로 기대하였다. 4:6에서 해석하는 천사는 rm 환상이 하나님의 말씀, 즉 예언의 상징적인 형태라는 것을 설명한다.

  4:6에 기록된 것은 그 환상에 대한 열쇠를 제공해준다. 어떤 사람들은 스룹바벨이 자기의 과업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그 일에 대한 반대, 그 과업이 큰 일인 동시에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한 재정이 너무 적은 것 등의 이유로 낙담했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 상황에는 심한 절망을 자아낼 충분한 요소들이 있었다. 스룹바벨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는 그 과업의 성공과 완성이 인간의 능력과 힘에 달려있지 않고, 오직 성령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능"이란 단어는 "군대"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군대라는 뜻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실제로 힘과 능 사이에는 별로 큰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 힘이란 인간이 사용 가능한 모든 힘, 즉 육체적, 정신적, 또는 도덕적 힘을 의미한다. 이것들은 아무리 해도 하나님을 위한 일이나 작업을 하기에는 불충분한 것이다. 인간의 연약함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적인 힘을 공급해서 맡은 일을 감당할 수 있게 해주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공급된 것은 기름으로 묘사된 하나님의 영의 은혜와 힘이었다. 이 말씀은 오늘날 복잡하고 다양한 위원회, 운동, 계획, 조직, 경기, 예산, 광고주, 그룹 등에 대한 적절한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수단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하는 데 결정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일은 성령에 의해 주도되며, 따라서 오류와 실패가 없이 진행된다. 육체를 신뢰하는 사람은 때로 넘어지지만,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은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


4-3. 스룹바벨에거 주어진 격려의 메시지(7-10)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찌어다 하리라! 하셨고(7),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8),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9).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10)."

  스룹바벨에게 필요한 모든 격려가 4:6에서 주어졌다. 거기에서 그는 끊임없는 하나님의 영의 공급에 대해 알게 되었다. 스가랴는 4:7에서 이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약속을 가다듬고 있다. 그는 질문 형태를 사용하여 이 구절을 강조하고 있다. 산은 성전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만날 모든 어려움들을 상징한다. 이러한 장애물들에 대해서는 에스라 4-5장을 참고하라. 스가랴 3장에서 여호수아가 민족을 대표했던 것처럼, 여기에서 스룹바벨도 백성들을 대표한다.총독과 백성들 앞에 있는 모든 어려움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제거될 것이다. 4:9에 기록된 스룹바벨은 성전 건축을 완성하는 명예와 기쁨을 약속, 즉 머릿돌을 내어놓을 것이라는 역속을 받았다. 그 당시에나 오늘날이나 건축할 때에는 기초를 놓은 일과 아울러 머릿돌을 놓는 것이 관습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돌이신 메시야를 배출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에서 부자연스럽고 통일성을 파괴한다. 첫째, 돌을 내어 놓는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라 스룹바벨이다(여기에서는 머릿돌을 의미한다). 둘째, "메시야에게 은총이 있을지어다"라는 외침이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마지막으로 4:9에서의 내용은 당면한 문제가 성전 건축의 완성과 관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전의 기초를 통을 때에 기쁨의 외침이 있었던 것처럼, 성전 건축 완성에도 비슷한 기쁨의 외침이 있을 것이다. "은혜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집에 거하소서!" 스룹바벨이 자기의 과업을 수행하면서 실망하지 않게 하려고 4:9에 약속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가 성전 건축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가 완성할 것이다. 이 약속은 다리오 통치 제 6년에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다.

  4:9에서 "나를 보내었다"는 말씀은 스가랴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네가 알리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스가랴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사실에 대해서는 4:8도 유의해 보라! 여기에서 보어진 분은 2:9,11에 기록된 것처럼 메시야이다. 스가랴 3장은 하나님의 영은 여호수아와 그의 정결케 됨을 뛰어넘어 복되신 순의 죄를 사하시는 사역에 초점을 맟추었다. 4장에서도 성령께서는 스룹바벨과 선전 건축을 뛰어넘어 앞으로 세상을 다스리실 때에 선전을 완성하실 순에게로 스가랴의 시선을 이끌고 있다. 6:13을 보라. 성령께서 메시야를 등장시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성령께서는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없으며, 계시 속에서의 그의 사역이 이보다 더 큰 주제는 없다. 이보다 더 기쁜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에스라 3:12-13과 학개 2:3로부터 대적들 뿐 아니라, 그 백성들 까지도 불신앙으로 인해 성전 재건을 시작하는 일을 작은 일로 취급했다. "작은 일의 말'이란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한 후에 일어난 일들을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충만한 지식과 진지하신 일곱 눈으로 스룹바벨의 지도 하에 진행된 작업 과정과 완성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전에 작은 시작을 경멸했던 사람들이 그 작업이 되어 가는 것을 기뻐하게 될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온 세상을 두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눈은 성전 건축의 완성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의 돌보심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이미 주어진 이러한 특별하고 복된 보증들 외에 더 이상 무슨 보증이 스룹바벨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필요하겠는가?


4-4. 두 개의 은혜의 통로(11-14)

  "내가 그에게 물어 가로되 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고(11), 다시 그에게 물어 가로되 금 기름을 흘려내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12) 그가 내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대답하되 내 주여 알지 못하나이다(13). 가로되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하더라(14)."

  그러나 그 환상에 대해 완전히 스가랴에게 설명되어진 것은 아니다. 4:11에서 그는 두 개의 감람나무에 관하여 질문한다. 스가랴는 4:4,11-12에서 세 번에 걸쳐 질문한다. 4장에서 스룹바이 네 번 언급되었으나 등대에 기름을 공급해주는 주발의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두 감람나무가 그를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구약성경에는 흔히 사람을 나무에 비유하곤 한다. 4:12절에 언급된 황금 기름이 성령을 상징한다는 것은 4:6로 미루어 알 수 있다. 기름이 성령을 상징한다는 것은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 제사장, 왕에게 그 직무에 따라 기름을 부어주는 데에서 명백히 나타난다. 그러면 감람나무들은 누구를 의미하는가? 해석하는 천사가 두 감람나무가 온 세상의 하나님을 모시고 설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문자적으로는 기름의 아들을)을 상징한다고 지적함으로서 그 일의 절정과 결론에 이른다.

  앞에서 이스라엘에서 그 사역을 위해 어떤 사람들이 기름부음을 받았는지를 밝혔다.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신분은 주인으로부터 명령을 기다리는 종들의 위치이다. "온 세상의 주님"이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칭호이다. 두 명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은 모세의 제도와 그리스도의 제도를 언급하기 위해서, 또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언급하기 위해서 취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기름부음을 받고 성화된 두 사람을 칭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이 온 백성들에게 자신의 능력과 은혜를 나타낼 통로 역할을 하는 공적 지위에 있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가리킨다. 이 지도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은혜와 특권, 그리고 보호의 위치에 있다고 여겨진다.

  이와 같이 스가랴 3장과 4장은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인 스룹바벨 모두에 대한 기쁨이 함축된 말로 결론을 맺고 있으므로 상호보완적이다. 이 두 감람나무는 재미있게 각색되어 계시록 11:3-4에 등장한다. 만일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두 사람이 모세와 엘리야라면 그것들은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로서 상징되어진 세속 세력과 종교 세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들을 계시록 13장의 로마 짐승(세속적인 세력)과 거짓 선지자(종교적 세력)와 비교해보라. 4:14절의 궁극적인 완성은 왕이요 동시에 제사장인 메시야이다(6:11-13).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하나님의 영의 지혜를 따르며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시게 하소서!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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