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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스가랴

[스크랩] 스가랴(3): 전쟁과 평화의 왕 (9-11장)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8. 23:54

스가랴(3):  전쟁과 평화의 왕 (9-11장)


제 3장 전쟁, 그리고 평화의 왕(9-11장)

 


1. 수리아의 멸망 (9장)

 

  모세 오경과 이사야서, 그리고 다니엘서에 대한 오랜 연구를 통해 성경을 분석하는 기술에 익숙해진 자유주의 성서비평주의자들은 (슥 9-14장)을 스가랴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익명의 다른 기자가 쓴 것으로 본다. 그러나 주의 깊게 이 책들을 연구해 보면 이러한 주장은 무리하고, 철 없고, 근거 없는 주장에 불과하다. 가장 오래된 구약성경의 번역본(헬라어역)의 증거와 유대교 정경의 편집자들은 (슥 9-14장)이 스가랴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은 그릇되며 찬성할 수 없다. 우리는 (슥 1-14장)이 모두 성령에 감동된 한 저자에 의해 쓰여졌다고 확신한다. 건전한 성경적 초자연주의는 모든 회의적인 자연주의를 치료하는 가장 좋은 해독제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슥 1-8장)은 스가랴가 자신의 시대에 일어난 일을 언급하고 있으며, 그 목적은 성전 재건을 독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스가랴의 두 번째 부분(9-14장)은 미래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1-8장보다 후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1-8장은 메대-파사 치하의 이스라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9-10장은 이스라엘이 헬라의 통치를 받을 때를 다루고 있으며, 11장은 로마 지배 하의 이스라엘을 다루고 있고, 12-14장은 앞으로 도래할 이스라엘 민족사의 마지막 시대를 다루고 있다. 9:1-8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이 묘사되어 있다. 그의 성공이 9:1-7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으며, 9:8에는 예루살렘의 구원을 다루고 있다. 알렉산더는 잇수스 전투 후에 바로 다메섹, 시돈, 두로를 정복했다. 그리고 가사, 아스글론, 에그론과 아스돗도 정복하였다. 주전 332년에 있었던 그의 승리의 원정은 오른테 강 계곡 남쪽에 있는 수리아 북방에서부터 다메섹과 베니게와 블레셋 해안을 따라 이어졌다.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라는 표제는 별로 사용되지 않는 표현으로서, (슥 12:1)과 (말 1:1)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말씀", 또는 "신탁'으로 번역되기도 했으나, "경고"라는 표현이 임박해오는 심판에 대한 위협적인 예언 사상을 가장 잘 전해준다고 할 수 있다. 스가랴는 먼저 하드락 땅에 대한 징벌을 예고했다. 어떤 사람들은 하드락이 바사 제국을 가리킨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들은 그것이 나라를 의미하는 지, 아니면 성읍 또는 왕을 의미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것은 설형문자의 비문들에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는 성읍인 핫타리카라고 알려져 왔다. 이곳은 하맛과 알렙보 사이에 있었다. 하맛과 알렙보에 대한 언급으로 미루어 보면 하드락은 다메섹 근방에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앗수르가 이 곳을 정복하기 위해서 주전 772년에서 755년 사이에 세 번이나 원정했던 것을 보면, 이곳은 매우 중요한 도시였음이 분명하다. 경고가 하드락에 임했으나 그 경고의 최종 목적지는 수도인 다메섹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이 중요한 도시를 정복한 후에 이 도시의 원주민들은 다시는이 성을 통치하지 못했다. 이스라엘과 그 주변국가들에 대한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의 이 곳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시선을 하나님께 돌렸다. 대제사장 아두아 시절에 유대인들은 정복자에게 충성을 바치기를 거부했다. 예레미야는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침략한 직후에, 다메섹과 하맛에 대하여 예언을 했다. 그리고 예레미야(25:20)와 에스겔(25:15-17)은 블레셋에 임할 심판에 대해 선포했다. 스가랴는 알렉산더 대왕이 이끄는 헬라인들의 손에 의해 그들이 심판을 받게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다메섹에 인접해 있었던 하맛도 동일한 운명을 맞게 될 것이다. 후에 안티오쿠스 4세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이 도시를 에피파니아라고 명명했다. 이 도시는 오늘날의 함마로서 다메섹 북방 약 120마일, 오른태강 유역에 있는 도시이며, 지금도 중요한 상업 중심지로 남아있다.


1-1. 베니게 멸망(1-3)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가 하드락 땅에 임하며 다메섹에 머물리니 세상 사람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 봄이니라(1). 그 접경된 하맛에도 임하겠고 두로와 시돈은 넓은 지혜가 있으니 그들에게도 임하리라(2).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보장을 건축하며 은을 티끌 같이, 정금을 거리의 진흙 같이 쌓았은즉, 주께서 그를 쫓아내시며 그의 바다 권세를 치시리니 그가 불에 삼키울찌라(3)."

  수리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은 계속 전진해 나갔다. 두로는 두 도시 중에서 더 중요한 도시로 취급되고 있다. 이는 고대 도시 두로가 시돈을 능가하는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넓은 통찰력을 가졌지만, 주전 332년에 정복되고 말았다. 두로인들은 세상적인 지혜가 많기로 유명했다. 상인으로서의 그들의 지혜는 외교문제에서도 발휘되었다. 9:3은 두로인들이 세상적인 지혜를 어떻게 발휘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능력을 다해서 자기를 위해 요새를 쌓았으며, 수많은 금과 은은 쌓아놓았다. 두로는 베니게의 상업과 부의 중심지였다. "요새"라는 뜻의 히브리 원어와 두로라는 말에는 언어유희가 있다. 앗수르는 5년 동안이나 두로를 포위했지만 그 성을 정복하지 못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역시 두로를 13년 동안이나 포위했지만 결국 그 성을 공략하는 데 실패했다. 이교도 역사가인 디오도루스 시클루스는 "두로는 섬나라라는 지리적 위치와, 요새화된 지형, 그리고 비축해 둔 풍족한 저장물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두로를 멸망시키기 위해 선택한 하나님의 도구였다. 그는 난공불락의 성이었던 두로를 정복했다. 알렉산더 대왕은 옛 성의 잔해를 가지고 육지에서 섬에 이르는 다리를 건설했다. 그리고 7개월간 그 성을 포위한 후에 그 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는 수천 명의 두로인을 살해했으며, 많은 사람들을 노예로 삼았고, 그 성을 불에 태워버리고 말았다. 그는 그 성을 약탈하고 재물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불로 도시를 태우고, 두로인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한 도시가 지상에서 영원히 번영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1-2. 블레셋의 멸망(4-8)

  "아스글론이 보고 무서워하며, 가사도 심히 아파할 것이며, 에그론도 그 소망이 수치가 되어 역시 그렇게 될 것이라. 가사에는 임금이 끊어질 것이며 아스글론에는 거민이 없을 것이며(5), 아스돗에는 잡족이 거하리라. 내가 블레셋 사람의 교만을 끊고(6), 그 입에서 그 피를, 그 잇사이에서 그 가증한 것을 제하리니, 그도 남아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유다의 한 두목 같이 되겠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 같이 되리라(7). 내가 내 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포학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8)."

  이제 스가랴는 블레셋의 멸망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한다. 블렛세의 5성읍 중에서 가드만이 심판에 대한 언급에서 빠져있다. 일부 학자들은 가드가 내륙에 있었기 때문에 알렉산더의 원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아스글론과 가사는 자신의 힘으로 침략자를 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아스글론에는 거민이 사라질 것이며, 가사는 몇 달로 동안 포위되었다가 마침내 함락될 것이다. 에글론은 블레셋 성읍 중에서 가장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두로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들은 두로가 헬라군을 이겨서 자신들이 침략군의 공격을 받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희망은 두로가 정복됨으로 여지 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알렉산더 대왕의 기록에 의하면 가사의 왕은 성이 정복된 후에 포로로 잡혀 갔다고 한다. 이 불쌍한 왕은 마차에 묶여서 온 성읍으로 끌려다니다가 죽고 말았다. 이로 인해 가사는 독립을 잃고 말았다. 이 성읍들에 대해서는 (렘 25:20, 암 1:6-8, 습 2:4-7)을 참고하라! 이 침략 기간 동안에 아스돗에는 원주민이 사라지고 잡족이 거하게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정복된 여러 민족들을 혼합시켜 버렸다. 그들의 교만함은 정치적 독립, 성읍, 그리고 신전을 잃고 나서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그들은 그 동안 의지해왔던 모든 것들을 한 순간에 모두 잃고 말았다. 9:7에서 스가랴는 마지막 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우상의 제물을 그 피와 함께 먹는 의식을 행했다.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일을 금하셨다. 여기에 언급된 가증한 것은 우상에게 제물로 드렸던 것이다. 그러나 장차 그들은 우상을 섬기던 관습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여부스 족속처럼 남은 자에 합류하게 될 것이다. 여부스 족속은 여호수아 때에 이스라엘과 평화 조약을 맺고 이스라엘에 포함된 족속이다. 그들은 유다 백성들과 함께 수도에 살면서 이스라엘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면서 살 수 있었다.

  수리아, 베니게, 블레셋에 이처럼 소란과 전쟁이 있는 동안에 하나님은 적군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주변에 진을 치시고 그들을 지켜주시는 눈이 되어 그들을 적군으로부터 지켜주실 것이다. "내 집"에 대한 언급은 성전, 거룩한 땅,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등으로 이해되어 왔다. 여기에서 "내 집"은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것이 포함되지만, 이 부분에서는 마지막 의미,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실제로 알렉산더 대왕은 사마리아를 정복했고, 또한 원정하는 도중에 여러 차례 예루살렘을 지나갔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에는 전혀 해를 입히지 않았다. 스가랴는 9:9에서 예언적 암시의 법칙에 따라 가까운 미래로부터 아주 먼 미래, 이스라엘이 억압자로부터 해방될 마지막 구원의 때로 눈을 돌리고 있다. 예루살렘은 최후의 대적들과 그들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사 60:18과 겔 28:24를 참고하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보호 아래서 누리는 안전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1-3. 메시야와 그의 통치(9-10)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9).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10)."

  이제 스가랴는 무자비한 정복자 알렉산더의 활동에서 시선을 돌려서 장차 오실 이스라엘의 왕의 인격과 겸손하신 사역을 찬양하고 있다. 메시야에 대한 언급은 (마 21:5)과 모든 초기 유대교의 기자들에 의해 풍부하게 입증되어 진다. 유대교들과 기독교도들 모두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메시야 예언이라고 인식해 왔다. 민족을 대표하고 있는 시온과 예루살렘은 이 영광의 왕이 오심을 기뻐하면서 즐겁게 외치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이 진격했을 때에 열방들은 두려워 떨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왕이신 메시야의 출현을 기뻐해야 했다. 이는 메시아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오셔서 그들을 구원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은 그의 직무에 대한 세 가지의 자격 요건을 사랑스럽고 만족스럽게 고찰하신다. 그 분은 의로우시며 공의로우시다. 이것은 메시아의 기본 속성이다. "구원을 베풀며"라고 번역된 말은 문자 그대로는 "구원되어짐"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현대 주석가들은 이것이 메시아께서 사망에서 부활하는 것, 즉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이 말이 능동적인 의미에서 "구원하시는", 또는 "구세주"라는 뜻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아마도 이 말을 수동적인 의미로 보고 "구원을 위탁받은"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공의로우신 왕은 자기 백성을 위해서 공의로운 구원을 베푸실 것이다. 그 분의 완전하신 사역은 완전한 인격과 목적의 결과이다.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은 파괴와 파멸을 위해서 왔지만, 의로우신 메시아는 구원과 속죄를 위해 오실 것이다. 지상의 왕은 장엄하고 교만하게 오지만, 하늘에서 오시는 왕은 비천한 나귀를 타고 오실 것이다.나귀를 타신다는 말은 메시아의 성품과 사역이 겸손함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나귀는 평화로운 동물이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화려함과 외식은 메시아와는 거리가 멀었다.

  9:9은 메시아의 초림을 기록하고 있으며, 9:10은 메시아 재림의 목적과 완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 두 절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는 교회 시대가 있다. 스가랴는 이 교회 시대에 대해서는 예언하지 않고 있다. 겸손하신 왕께서 다시 오실 때에 그는 전쟁과 싸움을 물리치심으로 통치를 시작하실 것이다. 병거, 말, 그리고 활 등은 전쟁을 위한 모든 도구들과 무기들을 상징한다. 이러한 세상적인 도구들은 전혀 믿을 수 없는 것들이다. 평화의 길은 이러한 것들과는 거리가 멀다. 메시아는 이러한 무기들을 제거한 후에, 권위있게 열방을 향해 평화를 선포하실 것이다. 그가 평화를 명하심으로 세상에 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평화의 왕국은 전 세계로 확장될 것이다. "바다에서 바다까지"와 "강에서 땅끝까지"는 라는 말은 거룩한 땅만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이는 시 72:8과 그밖의 평행 구절, 이 문장 속에 정관사가 없는 사실, 그리고 예언서의 일반적인 의미를 고려해 볼 때에 분명하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메시아의 통치가 거룩한 땅을 중심으로 땅끝까지 확장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1-4. 마카비의 승리(13-17)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11),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너희는 보장으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날도 이르노라. 내가 배나 네게 갚을 것이라!(12)"

  스가랴는 영광스럽고 평화로운 메시아의 통치를 바라보다가 다시 싸움과 전쟁의 장면으로 시선을 옮긴다. 그것은 9장 첫 부분에 제시된 것과 같다. 하나님은 시온을 향해 말하기를 "언약의 피를 인해 여호와께서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아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그러면 여기에 언급된 언약의 피는 무엇을 말하는가? 일부 학자들은 이 언약이 모세의 언약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언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의 언약의 관계 속으로 들어오신 때를 의미한다. 그것은 합법적인 언약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언약을 위반하고 축복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여기에 언급된 언약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의미한다고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갇힌 자들은 여전히 고레스의 명을 어기고 바벨론에 남아서 살며 귀환하지 않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물 없는 구덩이는 당시에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스가랴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약속들과 소망을 주셨던 백성들, 즉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보장, 또는 시온으로 돌이키라고 권면하셨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들에게 주신 환난 대신에 한 없는 축복을 내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날처럼 가망이 없는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서 경건으로 이 행을 운행하신다.

  "내가 유다로 당긴 활을 삼고 에브라임으로 먹인 살을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을 격동시켜 헬라 자식을 치게 하며 너로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13). 여호와께서 그 위에 나타나서 그 살을 번개 같이 쏘아내실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리시며 남방 회리바람을 타고 행하실 것이라(14).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매 돌을 밟을 것이며 그들이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기를 술취한 것 같이 할 것인즉 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피 묻은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15).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면류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16).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소년은 곡식으로 강건하며 처녀는 새 포도주로 그러하리로다(17)."

  9:13-17은 주전 2세기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와 싸워 승리한 마카비 시대의 투쟁과 승리를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유다를 "활"로 삼고, 에브라임을 "화살"로 삼아 대적들을 물리치실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용사의 손에 든 칼이 될 것이며, 그들을 당할 사람들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예언은 마카비 시대에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전능자로 나타나셔서 번개와 천둥과 남방의 회리 바람으로 그들을 도우실 것이다. 이때에 그들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다. 그들은 대적들을 연약하고 하찮은 물맷돌처럼 짓밟게 될 것이다. 대적들은 많은 피를 흘리게 될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단 모퉁이와 성전 제물처럼 대적들의 피에 취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이길 뿐 아니라 영적으로 구원을 받게될 것이다. 그때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양떼가 될 것이며, 그 땅위에 빛나는 면류관(물맷돌과 같은 이방인과 대조됨)처럼 될 것이다. 스가랴는 메시아의 약속이 성취되는 평화와 번영의 시기에 하나님께서 나타내실 형통과 아름다움 그리고 강건함에 대해 선포하고 있다.


2. 메시야 통치의 축복(10장)


2-1. 기도하라는 권면(1)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1)."

  스가랴 10장은 내용상 9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9:17에 기록된 백성들은 하나님을 의자하게 될 때에 풍성한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제 곡식과 포도주의 풍성한 수확을 위해서 비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믿고 구하는 자에게 비를 내려 주실 것이다. 그들은 우상이나 마술에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비를 구해야 한다. 소나기가 내리는 시기는 봄(3-4월경)이며, 이 비는 곡식을 익게 만든다. 여기에서 스가랴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을 비로 비유하고 있다. 여기에 나타난 모든 물질적 축복들에는 영적인 축복의 상징들이 내포되어 있다. 비에 선행하는 번개는 비가 올 것이라는 확신을 줄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모든 심령의 궁핍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소낙비를 내려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풍성하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지만, 우리가 간구할 때에 그것을 주신다.
 

2-2.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2-3)

  "대저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치 않은 것을 보고 거짓 꿈을 말한즉, 그 위로함이 헛되므로 백성이 양 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2),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수염소들을 벌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그 무리 곧 유다 족속을 권고하여 그들로 전쟁의 준마와 같게 하리니(3)..."

  과거에 이스라엘은 물질적 번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은 방법을 의지했기 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패의 쓰라린 패배의 경험을 해야만 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드라빔, 복술자, 거짓 꿈꾸는 자들을 의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그들에게 물질적 정신적인 파멸을 가져왔다. 드라빔은 인간 형상으로 된 것으로 점을 치는 데 사용한 가정 수호신이다. 이것은 로마의 가정 수호신과 비슷했다. 사람들은 이것을 신당이나 침상에 보관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우상을 섬기다가 멸망하여 나라를 잃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포로에서 회복된 후에는 이러한 우상들을 섬기지 않았다. 또한 이스라엘은 이방 여인들과 결혼을 했으며, 이로 인해 그들은 타락한 이방 문화에 동화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그들은 나라의 파멸이라는 큰 징계를 받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로 후에도 이러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방 여인과의 결혼에 대한 경고는 계속되었다. 거짓 선지자, 복술자에 대한 내용은 (느 6:10-14, 말 3:5, 행 5:36-37,13:6)을 참조하라!

  이러한 구절들은 (슥 10:2)과 유사하지는 않다. 스가랴는 그들이 이방의 포로가 되게 만들었던 죄악들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불법적인 모든 수단들은 그들을 타락하게 만들었으며, 분명한 거깃으로 그들을 기만했다. 그들의 확신과 평안은 헛된 것이었다. 유다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은 방종으로 인해 모두 목자를 잃은 양처럼 왕을 잃고 포로가 되어 흩어져서 헤메며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스가랴를 통해서 유대인들에게 이러한 행동을 떠나라고 말씀하셨다.그들이 이러한 것들을 추구하는 한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하실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하기를 원하셨다. 그들이 흩어져서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에, 목자도 없었고 선지자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못했다. 하나님 나라의 왕과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 인도하지 못했다. 그들은 우상 숭배를 하는 백성들을 도왔으며, 이러한 일을 조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다.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셨으며, 이로 인해 그들은 이방인에 의해 큰 수모와 수치를 당하고 말았다.

  양떼의 우두머리인 수염소들은 이스라엘을 하나님 곁을 떠나게 한 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세상 지도자들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에는 이미 왕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므로 여기에 언급된 지도자들은 가련한 양떼들을 억압하고 핍박하던 열국의 왕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이 폭군들에게 지엄한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양떼들을 은혜 중에 보살피실 것이다. 10:3에는 양의 모습 대신에 전쟁에 능한 준마가 등장한다. 이 말은 하나님의 특별한 성원과 돌보심을 나타낸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특별한 대상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이 예언이 마카비 용사의 승리로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이것은 장차 이스라엘의 메시야께서 통치하실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이 스가랴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이다.
 

2-3. 메시야에 대한 약속(4-5)

  "모퉁이 돌이 그에게로서, 말뚝이 그에게로서, 싸우는 활이 그에게로서, 권세 잡은 자가 다 일제히 그에게로서 나와서(4), 싸울 때에 용사 같이 거리의 진흙 중에 대적을 밟을 것이라. 여호와가 그들과 함께한즉 그들이 싸와 말 탄 자들로 부끄러워하게 하리라(5)."

  어떤 학자는 10:4은 이 부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을 한다. 그러나 앞에서 스가랴가 왕이 없다고 한 것을 보면 이 구절은 전체 문맥에 잘 어울린다. 유대인들의 아람어 탈굼은 이 구절이 왕이신 메시아를 언급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10:4에는 "그로부터"라는 말을 4번 사용해서 이 말을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 모든 축복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여기에 언급된 "그"는 10:3에 나오는 "유다 족속"을 의미한다. 장차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는 이방인이 아니라 유다 족속에서 나오실 것이다.

  모퉁이 돌, 싸우는 활, 말뚝 등은 안정성, 신뢰성, 그리고 권세 등 메시아의 속성을 나타내주는 상징들이다. 모퉁이 돌은 지도자, 통치자를 상징하는 말로서 그를 기초로 하여 하나의 정부가 수립된다. 이것은 메시아를 나타내는 유명한 상징이다. 말뚝은 동방에서 천막에 사용되는 큰 못을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소망과 신뢰는 메시아에게 의존한다. 그는 그 민족의 훌륭한 지지자요, 의뢰할 수 있는 분, 참 엘리야김이다. 싸우는 활은 전쟁과 권력의 도구들을 상징하는 말이다.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군사 지도자이시다. 그는 용사시다. 이것은 그가 통치하기 위해 오실 때에 분명하고 명백하게 나타날 것이다.

  많은 해석가들은 "권세 잡은 자"가 메시아를 지칭하는 네 번째 명칭이라고 간주했다. 이 견해는 에디오피아의 말 중에서 비슷한 뜻을 가진 "네구스"(왕자, 또는 황제에 대한 존칭)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히브리어에는 맞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구약 성경에서 발견되는 많은 다른 경우에서와 같이 "압제자", 또는 "강요자"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그것은 또 하나의 메시아의 칭호가 아니라, 오히려 앞에 언급된 세 가지 칭호에 나타난, "그 분"의 임무와 사역의 결과를 의미한다. 그 분은 모퉁이 돌이시며, 말뚝이시고, 싸우는 화살이므로 모든 억압자, 강요자가 하나님의 백성에서 나올 것이다. "다 일제히"라고 덧붙인 것이 이것을 더욱 강조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메시아의 사역으로 이스라엘에게서 모든 강요자들이 제거될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이 사상은 9:8에 예고된 것과 관계가 있다.
 

2-4. 하나님 안에서의 승리(6-7)

  "내가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하며 요셉 족속을 구원할지라.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그들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이 내게 내어 버리움이 없었음같이 되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그들을 들으리라(6). 에브라임이 용사 같아서 포도주를 마심 같이 마음이 즐거울 것이요, 그 자손은 보고 기뻐하며 여호와를 인하여 마음에 즐거워하리라(7)."

  스가랴는 다시 메시아 시대에 초점을 맞추고 대적을 정복한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묘사하고 있다. 10:5이 9:11-17에 기록된 예언의 주제라는 사실로부터 추론하여 이 승리가 마카비 시대의 승리를 나타낸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이 모든 사건들 안에 메시아가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양떼, 전쟁 준비를 갖춘 준비를 갖춘 준마로 제시되었던사람들은 이제 무적의 용사들로 나타난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받고 전쟁에서 진흙 속에서 원수들을 밟게될 것이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동방의 군대에서 기병은 매우 중요한 전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병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맹렬한 공격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 유다 족속과 요셉 족속은 재결합된 민족을 의미한다. 스가랴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될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었다. 성경에서 "요셉"이란 이름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였다. (창 49:22-26)에서는 요셉 개인에 대한 칭호로 사용되었으며, (삿 1:22-23)에서는 이것이 종족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때로 이 이름은 에브라임처럼 북 왕국 이스라엘(10지파)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약속은 기쁜 약속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고 본국으로 귀환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던 모든 일을 잊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순종할 때에,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실 것이다. (10:7)에는 에브라임에 대해 축복이 선포되고 있다. 북 이스라엘의 포로 기간은 남유다 보다 더 길었다. 그러나 에브라임도 유다처럼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그들은 포도주를 마실 것처럼 크게 즐거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 자손들 또한 그와 더불어 하나님이 주신 승리와 기쁨을 체험하고 증거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하나님이 주신 기쁨이 모든 백성들에게 미치게 될 것이다.
 

2-5. 다시 모인 만족(8-10)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 불어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 같이 번성하리라(8). 내가 그들을 열방에 뿌리려니와 그들이 원방에서 나를 기억하고 그들의 자녀와 함께 다 생존하여 돌아올찌라(9). 내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 돌아오며 그들을 앗수르에서부터 모으며 길르앗 땅과 레바논으로 그들을 이끌어 가리니 그 거할 곳이 부족하리라(10)."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스라엘은 본국으로 돌아와서 다시 하나가 될 것이며, 그때에 하나님의 권능이 그들에게 나타날 것이다. 이제 스가랴는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해 휘파람을 불어 그들을 모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다시 불러서 모으시는 사람을 북 이스라엘의 10지파로 제한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 중 대부분은 여전히 포로 상태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이스라엘이 전 세계에 흩어진 후에, 먼 훗날에 일어날 일을 바라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벌을 치는 사람이 휘파람을 불어 벌을 모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자기의 옛 백성을 불러 모으실 때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숫적으로도 크게 번성하게 될 것이다. 옛 이스라엘이 애굽에 살 때에 크게 번성했던 것처럼, 미래에도 그들은 크게 번성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귀환, 구속, 번영이 약속되고 있다. 10:9을 보면 스가랴는 이스라엘이 앗수르와 바벨론에서 돌아올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예고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가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열방에 뿌리실 것이며, 그들이 원방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뿌린다"는 말은 나쁜 의미나 심판의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 여기에서는 이 말이 확산과 번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하나님은 장차 씨를 뿌리듯이 그들을 온 세상에 흩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들은 멀리 흩어져 살면서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셨던 은혜를 기억할 것이며, 때가 되면 한 마음이 되어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드른 그 땅에 돌아와서 정치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바르게 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도 함께 돌아와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예비하신 것들을 누리게 될 것이다. 조상들과 자녀들이 모두 그 땅에서 돌아올 것을 증언하게 될 것이다. 10:10은 그들이 애굽과 앗수르로부터 돌아올 것을 예고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지리적인 언급에 집착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여기에 10지파의 애굽 포로 생활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북왕국의 쇠퇴기에 디글랏빌레셀이 침략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곳으로 도망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들은 프톨레미가 수리아를 정복했을 때에 많은 포로들을 데리고 갔으며, 그들 중에 북왕국에서 끌려간 사람들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많은 10지파 사람들이 북왕국이 망할 때에 도망쳤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후에 이러한 사람들 중에서 앗수르에 남아 있던 사람들도 돌아오게 될 것이다. 과거 이스라엘의 숙적이었던 이 두 땅은 하나는 남쪽에, 다른 하나는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이제 상징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이끌어내어 요단강 양 편에 있는 길르앗과 레바논에 정착시킬 것이다. 여기에는 모든 땅이 포함된다. 그들의 숫자가 대단히 많으므로 거할 땅이 부족하게 될 것이다. 앞에서 스가랴는 애굽을 이스라엘의 전형적인 억압자로 묘사했다. 이제 스가랴는 구원의 전형인 애굽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홍해에서 그들 앞에 가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젖지 않도록 지켜주셨던 것처럼, 장차 이스라엘의 회복의 길과 고국으로의 귀환을 막는 모든 것을 제거해 주실 것이다. 그때에는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질 것이며, 애굽 땅의 통치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2-6. 새 생명에 대한 만족(11-12)

  "내가 그들로 고해를 지나게 하며 바다 물결을 치리니 나일의 깊은 곳이 다 마르겠고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겠고 애굽의 홀이 없어지리라(11).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케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을 받들어 왕래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12)."

  선지자들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토 땅으로 귀환하여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라고 선포한다. 스가랴 10장은 그들의 구원과 행위를 묘사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영적으로 견고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받들어 왕래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모든 생활과 행동은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를 위한 배려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시고 보호하시는 손 아래에서 영원히 서게 될 것이다. 슥 10장은 이스라엘 왕이 통치하실 때에 이루어질 축복의 약속들을 묘사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과 성품에 일치하는 삶을 살 것이며, 이로 인해 이러한 축복의 약속은 온전히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예언의 절정이다. 주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에게 행복과 축복이 있을 것이다.
 

2-7. 그들이 살아서 돌아오리라!

  이스라엘,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예고하셨던 것들을 고려해보면, 우리는 진정 주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또 다시 정치적으로, 그리고 국가적으로 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온갖 교통 수단에 의지하여 놀라울만큼 많은 사람들이 귀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구약 성경의 선지자들의 예언들이 완전한 의미에서 성취된 것이 아니다. 선지자들은 그 민족의 영적인 삶을 살게 될 것이며,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하나님은 이 일이 완성될 때까지 결코 쉬지 아니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신망과 인식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축복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알려면 믿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만 한다.


3. 선한 목자(11장)


3-1. 그 땅에 임한 심판(1-3)

  "레바논아 네 문을 열고 불이 네 백향목을 사르게 하라(1). 너 잣나무여 곡할찌어다. 백향목이 넘어졌고 아름다운 나무가 훼멸되었도다. 바산의 상수리나무여 곡할찌어다. 무성한 삼림이 엎드러졌도다(2). 목자의 곡하는 소리가 남이여! 그 영화로운 것이 훼멸되었음이로다. 어린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가 남이여! 이는 요단의 자랑이 황무하였음이로다(3)."

  스가랴 11장의 예언은 스룹바벨의 성전이 완성된 지 오랜 후에 선포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언급된 사건들은 먼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다. 11장은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 가장 어두운 시대를 묘사하고 있다. 11:1-3에 기록된 황무함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 첫째 견해는 이 구절이 주전 586년에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사건을 의미한다는 견해이다. 이 견해가 맞다면 본문은 미래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이미 지난 과거의 일을 언급하고 있는 셈이 된다. 둘째 견해는 이 구절이 스가랴 4장에 기록된 예언, 즉 장래에 다른 민족들에 의해 이루어질 팔레스타인의 침략을 의미한다는 견해이다. 셋째 견해는 여기에 언급된 침략이 메시아를 거부한 이스라엘이 70년에 로마에 의해 멸망할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 중에서 어떤 의견이 옳은가? 먼저  문맥을 보면 이 구절은 이미 과거의 일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 구절은 장차 일어날 여러 민족들의 예루살렘에 대해 보편적인 음모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70년에 일어날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파괴 사건을 가리킬 수도 있다. 실제로 슥 14장은 70년에 일어날 멸망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을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으로 보는 경우에도,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상징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 구절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본분에 언급된 레바논이 성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레바논의 백향목들이 성전을 짓는 목재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대 랍비들의 주장이다.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백향목, 잣나무, 상수리 나무들이 힘과 위엄을 상징하거나, 중요한 사람들이나 이스라엘을 괴롭힌 교만한 민족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이 구절은 70년에 일어날 하나님의 심판, 즉 북방부터 남방까지 모든 나라들에 임했던 하나님의 심판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1장 서두에 나오는 명령은 앞으로 선포될 일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때에 레바논 숲은 하나님의 숲에 의해 타버리게 될 것이다. 장차 레바논에서 일어날 일은 다른 지역에서도 일어나게 될 것이다. 스가랴의 환상에서 언급된 레바논, 바산, 요단은 온 땅을 포함하고 있다. 가장 높은 것이 용서 받지 못한다면, 자연히 낮은 것도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에 이 심판으로 인해 여러 곳에서 통곡하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때에 목장이 파괴되고 양떼들이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양을 치던 목자들도 통곡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 어린 사자가 부르짖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이는 요단의 자랑, 즉 사자들의 잠자리인 요단강 둑에 있는 수풀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 이러한 심판이 임한 것은 바로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않은 그들의 죄때문이었다. 이 세상에서 인간에게 가장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만드는 것은 역시 죄이다.
 

3-2. 잡힐 양떼(4-6)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는 잡힐 양떼를 먹이라(4). 산 자들은 그들을 잡아도 죄가 없다 하고, 판 자들은 말하기를 내가 부요케 되었은즉 여호와께 찬송하리라 하고, 그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도다(5).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다시는 이 땅 거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사람을 각각 그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붙이리니, 그들이 이 땅을 칠찌라도 내가 그 손에서 건져내지 아니하리라 하시기로(6)..."

  히브리 문체의 표현 방법은 결과가 먼저 제시된 후에 원인이 제시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도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거절했다는 심판의 원인이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스가랴에게 하신 명령이 먼저 등장하고 있다. 그는 장차 메시아께서 하실 일을 상징적으로 대신 수행하고 있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주신 사명이었다. 메시아는 양떼를 먹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분은 장차 잡힐 운명에 처한 양떼들의 목자 역할을 담당해야 했다. 이 양떼는 자기 죄로 인해 로마에 잡혀 먹힐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약 150만명의 유대인이 로마와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이 민족은 아주 비참한 상태에 있었으나, 그들의 운명은 더욱 더 비참해지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시장에서 아무 감정이 없이 사고 팔리는 양과 같았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이 이방의 지배, 특히 로마의 지배하에서 겪은 모든 압제 수단들을 언급하고 있다. 이방의 억압자들은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일에 대해서 조그만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이러한 일을 아무런 어려움 없이 계속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양떼를 혹사함으로 얻을 이익을 생각하고 거짓으로 신을 믿는 척 했다.

  이러한 일만으로도 그들의 죄는 명백했다. 그러나 그들의 억압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방종한 지도자와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을 아끼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의 억울함을 신원해 주거나 슬픈 처지를 해결해 줄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더욱 더 슬픈 일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아 주지 않겠다고 선언한 데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이 전쟁과 내란에 휩싸여 고생하도록 내버려 두실 것이다. 메시아께서 지상에서 활동하셨을 때에 이스라엘에는 수많은 파당들이 존재해 있었다. 그들은 장차 한 임금의 손에 붙여지게 될 것이다. 여기에 언급된 임금은 그들 스스로 왕으로 삼은 로마 황제를 의미한다. 그때에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던 민족이 이스라엘을 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억압할 것이며,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복종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죄를 섬겼기 때문에, 장차 가혹한 왕을 섬기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로잡힐 양떼"라고 부르신 것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3-3. 목자의 사역(7-9)

  "내가 이 잡힐 양떼를 먹이리니 참으로 가련한 양이라. 내가 이에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락이라 하고 양떼를 먹일쌔(7), 한 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끊었으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8). 내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먹이지 아니하고 죽는 자는 죽는대로, 망할 자는 망할대로, 그 나머지는 피차 살을 먹는대로 두리라 하고(9)..."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위해 자신이 한 사역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메시아는 그들의 목자로서의 사역을 맡으셨다. 11:7에는 그 분이 양을 먹인다는 표현이 두 번이나 나타난다. 스가랴는 장차 메시아께서 오셔서 하실 일을 상징적으로 대행하고 있었다. 그 분은 장차 오셔서 가련하고 비참한 양떼를 진실하게 먹이실 것이다. 그 분은 그들 중에 있는 남은 자들을 위해서 그 양떼 모두를 먹이셨다.이 구절에서 남은 자들이 다른 많은 백성들과 구별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맹수들과 싸워 양들을 보호하기 위한 지팡이와, 양들을 어렵고 위험한 곳에서 구해내기 위한 지팡이를 가지고 다녔다.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메시야 역시 이러한 지팡이를 소유하실 것이다. 11:7에는 이 지팡이에 붙여진 이름이 소개되고 있다. 이 이름은 메시아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하실 사역의 목적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메이아께서 소유하신 첫 번째 지팡이의 이름은 미덕, 호의, 또는 은총이라고 불렀으며, 두 번째 지팡이는 띠, 유대, 또는 연락 등으로 불리어졌다. 은총의 지팡이는 열방이 이스라엘을 파멸시키기지 못하도록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나타낸다. 그리고 연락의 지팡이는 이스라엘 백성들 간에 있을 형제로서의 유대관계를 나타낸다. 하나님은 메시아를 통해서 열방의 백성들이 자기 백성을 해치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애로우신 돌보심으로 인해 그들의 형제애가 더욱 더 견고하게 될 것이다.

  목자의 사역의 결과가 곧 밝혀진다. 비교적 짧은 기간인 한 달 동안에 목자는 그 민족들을 다스리던 세 목자들을 제거해야 될 필요를 느꼈다. 그는 이 세 목자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은 이 목자를 미워하였다. 11:8에 대해서는 약 40여 가지나 되는 해석들이 제시되어 왔다.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 나오는 세 목자를 메시아 밑에 있는 하위 목자들로 보고 있다. 그들은 이 세 목자가 메시아의 생활과 사역을 통해서 백성들을 돕고 감독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해석은 이 세 목자들을 이스라엘의 세 지도자 계급, 즉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으로 보는 것이다. 그들은 메시아를 거부하고 서로 미워했다. 11:9에서 그 분은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민족 지도자들이 메시아를 통해 주어진 모든 은혜의 수단들을 거부하게 되자, 메시아는 그 민족이 죄악된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신다. 이로 인해 양들은 전염병과 기근으로 죽고, 전쟁에 살인에 의해 멸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재난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도 계속해서 서로 싸우게 될 것이다. 그들은 빛을 거부한 결과 어두운 밤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3-4. 잘리어진 은총의 막대기(10-11)

  "이에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취하여 잘랐으니 이는 모든 백성과 세운 언약을 폐하려 하였음이라(10). 당일에 곧 폐하매 내게 청종하던 가련한 양들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이었던줄 안지라(11)."

  메시아는 어떤 관계를 끊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은총이라고 부르는 지팡이를 잘라버리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들과 맺었던 은총의 언약을 파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모든 백성들"이라고 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만일 이것이 이스라엘을 의미한다면 이러한 행동은 이스라엘 내부 문제와 관계된 연락의 지팡이를 부러뜨리는 행위와 중복이 되게 된다. 스가랴는 여기에서 지상의 열방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스가랴의 언급은 매우 중요한 진리를 보여주고 있다.하나님은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과 관계가 있는 지상의 백성들과 언약을 세우셨다. 하나님은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해를 끼치거나 악하게 대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속박하셨다. 이 속박이 없어질 때에 로마가 그드의 성읍과 경제를 파괴하게 될 것이다.

  알렉산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폼페이 등은 이스라엘 국가의 존립을 해칠 수 있다는 허락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메시아께서 그 지팡이를 부러뜨리게 되자, 티투스와 그의 장군들은 성전을 와전히 파괴하고 말았다. 스가랴는 예언의 성취를 예상하면서 그 지팡이가 당일에 부러졌다고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메시지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가련한 양, 즉 그 백성들 중에 있는 경건한 사람들이었다. 과거나 지금이나 오직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이 자기 종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가 있다.
 

3-5. 은 30(12-14)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1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13), 내가 또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14)."

  백성들의 영적인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메시아의 사역과 봉사에 대한 그들의 감사를 시험하기 위해서 메시아는 자신이 그들 중에서 일한 대가로 임금을 달라고 민족들에게 요구한다. 그가기대한 대가는 당연히 하나님과 그 목자들에 대한 사랑, 순종, 그리고 헌신이었다. 그러나 메시아는 그들에게 이러한 것을 강요하지는 않으셨다. 만일 그들이 이러한 일을 꺼린다면 그들은 메시아의 사역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기꺼이 메시아와 그 사역을 평가하여 은 30을 메시아께 주었다. 출 21:33을 보면 이것은 돌에 받힌 한 사람의 값이었다. 자유인 한 사람의 값은 이것의 두 배였다. 이것은 얼마나 모욕적인 일인가? 그들은 메시아를 하잘 것 없는 종의 수준으로 평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찌 이처럼 천하고 배은망덕한 대접을 받으시겠는가? 스가랴는 그것을 하나님의 전에 있는 토기장이에게 던져 버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민족의 지도자들이 메시아, 즉 하나님의 아들을 평가한 데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전에서 행해짐으로써 더욱 엄숙하고 공개적인 일이 되었다. 메시아에게 매겨진 가격은 적고 모욕적인 것이었으며, 결국 이 돈은 토기장이에게 던져지고 말았다. 토기장이에게 물건을 던지는 것은 쓸데 없는 것을 버리는 것에 대한 격언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스가랴는 비꼬는 투로 이 값을 "준가"라고 불렀으며,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 값을 던져버렸다. (마 27:7-10)에서 복음서 기자는 가룟 유다가 그리스도를 배반한 일과, 그 결과를 인용하면서 이 구절을 인용했다. 그러나 마태복음 기자는 이 구절을 스가랴가 아닌 예레미야의 예언이라고 기록했다. 이러한 마태복음 기자의 기록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이 제시되어 왔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이 원래 스가랴에 기록된 것이 아니었다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다. 마태복음 기자가 살던 당시에 이 구절이 스가랴서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헬라어 구약 성경은 신약 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것인데, 이 성경에서도 이 예언이 스가랴서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마태복음의 기자가 (막 1:2)처럼 (말라기와 이사야처럼) 유명한 선지자의 이름을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가복음의 경우는 마태복음과 유사한 경우로 볼 수는 없다. 아마도 이 문제의 해결점은 예레미야의 이름이 선지자 집단의 첫 머리에 놓인 것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예언서는 예언서 중에서 첫 번째로 놓였으며, 이러한 주장을 증거해주는 유대교의 문서들도 발견할 수 있다. 11:4에서 스가랴는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최종적으로 끊으려는 목자의 이야기를 실제로 연출하고 있다. 그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가 단절된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연락이라는 지팡이를 잘라버렸다. 슬프게도 이것은 로마의 장군 티투스가 이끈 로마인들이 예루살렘을 침략했을 때에 성취되었다. 그때에 유대 백성의 사회 조직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이때에 내란과 내부적 갈등이 빈번이 일어났으며, 이러한 일은 결국 유대의 멸망을 초래하고 말았다.
 

3-6. 미련한 목자(15-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또 우매한 목자의 기구들을 취할찌니라(15).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키리니, 그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찐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16). 화 있을찐저 양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 팔에, 우편 눈에 임하리니 그 팔이 아주 마르고 그 우편 눈이 아주 어두우리라(17)."

  메시아를 거부하는 슬픈 사건은 성취되었다. 그러면 앞으로의 전망은 어떠한가? 하나님은 그 당시 자기 백성을 온 세계로 흩으셨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다시 교제하시는 것은 11:5-17에 언급된 일들이 일어난 후일 것이다. 그들에게 선한 목자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미련한 목자를 세우게 될 것이다. 미련한 목자는 스가랴의 시대로부터 유대 민족 멸망의 시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악한 통치자들을 마타낸다. 예를 들면 헤롯, 또는 프톨레미 4세 등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이는 (단 11:36-39, 요 5:43, 살후 2:1-12, 계 13:11-18)에 등장하는 적그리스도들을 의미한다.

  스가랴는 11:7의 지팡이와 관련하여 미련한 목자의 기구들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는다.그것들은 참 목자의 지팡이와 같지만, 사용자의 마음가짐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선한 목자는 이것을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지만, 악한 목자는 이것을 악한 일을 위해 사용했다. 성경에서 미련한 모습은 사악함을 상징한다. 구약 성경에서는 미련함이 도덕의 결핍과, 타락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은 미련한 목자가 마음대로 행하도록 내버려 두셨다. 그는 양들을 소홀하게 취급하고 그들을 잔인하게 학대했다. 그는 양을 위하는 마음이 없었으며, 그 마음에는 탐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심판에 그에게 임하게 될 것이다. 양을 돌보지 않은 그의 팔(힘의 기구)은 마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양들을 보살피지 않았던 그의 눈(지성의 기구)은 어둡게 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분명히, 그리고 신속하게 그에게 임할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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