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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학개(2): 다가올 영광 (2장)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8. 23:52

학개(2):  다가올 영광 (2장)


2. 다가올 영광(2장)

 

 

2-1. 하나님의 격려(2:1-5)

 

  "칠월 곧 그 달 21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1), 너는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백성에게 고하여 이르라(2).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자 곧 이 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이 없지 아니하냐?(3) 그러나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찌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찌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찌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4).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찌어다(5)."

  학개의 두 번째 메시지는 7월 21일에 선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레 23:39-44)을 보면, 이 날은 수확의 마지막 절기인 장막절 제 7일임을 알 수 있다. 성전 재건을 시작한 지 거의 한 달이 지나갔다. 많은 사람들은 이 성전과 솔로몬의 성전을 비교하고 있었다. 백성들에게는 선지자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권면에 응답하여 성전 건축을 시작한 후, 그들이 낙심하지 않게 하기 위한 희망과 격려가 필요했다. 학개 1장에서는 이 민족의 냉담과 무관심에 대하여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예언이 필요했다. 이제 그들에게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그들의 손과 결심을 굳게 할 격려와 위로의 말이 필요했다.

  다시 한 번 이 민족의 세속지도자와 종교지도자, 그리고 바벨론에서 돌아온 남은 자들에게 메시지가 주어진다. 하나님께서 친히 솔로몬의 성전과 지금 건축 중에 있는 성전을 비교하신다. 하나님은 그들 중에 누가 첫 성전의 영광을 기억하느냐고 묻고, 그 성전과 비교할 때에 이 성전이 보잘 것 없어 보이지 않느냐?고 물으신다. (에스라 3:8-13)은 하나님의 이 질문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기록하고 있다. 에스라서에는 두 번째 성전을 건축할 때에 그 기초를 놓는 일에 제사장들이 함께 하여 찬양의 시편으로 노래하고, 나팔을 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젊은 세대는 기쁨과 환희의 소리를 외친 반면, 첫 성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았던 노인들은 눈물을 흘렸다. (2;3)에 기록된 선지자의 말은 특히 후자의 무리를 향한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의 이전 영광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솔로몬이 지은 것이든, 스룹바벨에 의해 지은 것이든, 후일 헤롯이 지은 것이든, 시온산 위에 지어진 하나님의 집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백성들의 재산이 한정되어 있었고, 법궤와 같은 보물이 없었기 때문에, 스룹바벨의 성전은 사실 많은 사람들의 눈에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 때문에 실망하여 작업을 멈추는 일이 있어야 하겠는가? 그렇지 않다. "굳세게 하라!"는 말이 스룹바벨, 여호수아, 그리고 모든 백성에게 세 번에 걸쳐 주어졌다. 두 성전의 차이저을 생생하게 비교하신 하나님은, 또한 건축의 속개를 위한 영적 자극을 주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2:3)의 비교는 그들을 낙심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게다가 하나님의 평가는 우리의 평가와는 크게 다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시리라는 거듭된 확신을 가지고 그 일을 게속하라는 요구를 받는다(1:13). 또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시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충분한 근거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해 내실 때에 그들과 계약을 맺은(문자 그대로는 "자른", 계약을 비준하기 위해서 희생 제물을 자르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말씀을 지키셨다. 여기에서 시내산에서의 계약이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은 개입하실 때마다 약속을 지키시므로 지금도 그 약속을 지키시리라고 믿을 수 있다. 그렇다! 하나님의 영은 그 순간에도 여전히 그들과 함께 거하고 계셨다. 그들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일하고 계시는데, 누가 능히 그들을 대적하겠는가?


2-2. 더욱 큰 영광(2:6-9)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6),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7).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8).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9)."

  이어서 나오는 2장의 4절(2:6-9)은 메시야에 대한 언급이다. 이 구절에는 (슥 9:9-10, 사 61:1-3, 단 9:24-27)과 같이 이스라엘의 왕이시며,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이 함께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은 머지 않아 하늘과 땅과 바다와 땅의 모든 나라들을 진동시키실 것이다. 이러한 일은 자연계에서의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의 과시일 뿐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건에 포함된 여러 가지 의미 중에서 지극히 일부분만을 본 것이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진술은 (2:4-5)에 언급된 하나님의 약속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다. 유대인들은 열방의 하나님께서 메시야 왕국 건설을 준비하기 위해서 능력을 베풀어서 세상 나라들을 전복시킬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확신을 통해서 성전 재건 작업을 계속할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이 구절은 바사와 헬라 제국 시대에 있었던 반란들을 의미한다고 생각되어 왔다. 물론 이 나라들이 통치할 때에 그러한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통치가 흔들리고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게 될 긴 과정의 시초에 지나지 않는다. (2:7)에 나오는 "많국의 열방"(영어 흠정역), 또는 "만국의 보배"(영어 표준역)로 번역된 말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제시되어 왔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기도 한다. "이방인들이 자기들이 기뻐하는 것들을 가지고 올 것이다." 또는 "만국 중에서 가장 좋은 나라가 될 것이다." 이러한 번역들의 의미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성전의 외관을 장식하는 데 부족한 것은 만국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영광스럽게 만들기 위해서 가져올 많은 값진 예물로 충분히 채워질 것이다. 그들은 참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기꺼이 이러한 일을 행할 것이다. 이 말은 새 언약 중에서 "장차 일어날 좋은 일들"에 관한 것으로 생각된다. 대다수의 초기 기독교 해석자들도 이 구절을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언급이라고 간주해 왔다. 그리고 유대교의 전승에서도 이것을 메시야와 연관시키고 있다. 우리는 교회에 얽매이지 말고, 만국의 열방은 그들이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구속자에게 대한 기다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종종 구상 명사가 추상 명사로 대치된다. 그러므로 이 말도 메시야를 의미할 수 있다. 첫 성전은 영광의 구름으로 충만했었다. 재건되는 이 성전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나라들이 진동될 것이라고(회개가 아님) 약속하고 계신다. 이 진동은 주님이 초림의 준비로 시작되어 재림 때에 완성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자신의 집을 말로 할 수 없는 영광으로 채우실 것이다. 학개는 (2:8)에서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 짓고 있는 성전에 보석들(솔로몬 성전의 지성소에는 값으로 환산하면 1000만불 이상 되는 금이 덮여 있었다)이 없다고 걱정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쉽게 해결해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초림과 재림의 영광을 통해서 처음에는 감추어져 있다가, 후에는 드러내어 그 성전을 더 아름답게 만드실 것이다.

  당시의 남은 자들은 가난했기 때문에, 재건된 성전을 장식하고 꾸밀 재물이 없었다. 그러나 은과 금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이 집의 나중 영광은 이전 영광을 능가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 곳에 평화를 내려 주실 것이다. "나중 영광"에 대해서는 (2:3)의 "이전 영광"이라는 진술과의 대조를 보라!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은 다른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째 성전에 임재하시므로 그 영광이 솔로몬의 성전의 영광을 능가하게 될 것이다. 나중 영광이 (겔 40-48장)에 묘사된 성전의 천년 영광을 의미한다는 견해도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성경이 여러 단계를 거친 성전들간의 연속성을 어떻게 보고 있는 지를 살펴보았다. 따라서 이러한 입장을 배제할 수 없다. 헤롯이 스룹바벨의 성전을 재건할 때에, 그 기초까지 완전히 파괴했지만, 그의 성전은 여전히 두 번째 성전으로 간주되었다. 여기에 언급된 평강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오늘날의 신자들에게도 내려주시는 영적 평화일 뿐 아니라, 평강의 왕으로서 가져 오실 궁극적인 외적 평화이기도 하다. 이로써 우리는 (2:3)의 낙담한 상황에 대한 충분한 대답을 얻었다. 하나님은 미래를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을 남겨두셨다. 그것은 신앙의 눈으로만 분별할 수 있다.


2-3. 원인과 결과(2:10-)

  "다리오왕 이년 구월 이십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10),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11),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니라(12). 학개가 가로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13)."

  학개 2장의 둘째 부분은 첫 메시지를 선포하고 나서 약 2달 후-다리오왕 2년 9월 24일-에 선포되었다. 이것은 이제 그들이 순종하였기 때문에 불순종 때문에 거두어가셨던 축복을 다시 주실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인과 관계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들의 과거의 불순종이 과거의 응징과 시련을 초래했고, 현재의 순종은 미래의 축복을 가져올 것이다. 학개는 백성들에게 당시의 제사장들에게 율법에 관하여 배우라고 교훈했다. 제사장은 백성에게 모세의 율법에 관한 문제들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율법을 해석하는 것이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는 일이었고(2:11-13), 학개는 이를 실제 생활에 적용함으로 자기의 의무를 행하였다(2:14). 1:11-13에서는 과거에는 있었던 일이지만, 앞으로는 다시 반복되지 않을 상태를 그 백성에게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 두 가지 질문이 있었다. 1) 만일 사람이 제물로 드릴 (거룩한) 고기를 가지고 가다가 다른 물건을 건드리게 되면, 그 건드려진 물건이 그 고기로 인해 거룩해 지거나 하나님의 몫이 되겠는가? 2) 만일 시체를 만진 연고로 부정해진 사람이 어떤 물건을 건드린다면, 그  의 부정으로 인해 그 물건이 부정해지겠느냐? 첫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이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다. 이 주제에 대한 구절들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모세의 율법은 도덕적 정결함은 전달될 수 없지만, 도덕적인 부정은 전달될 수 있다고 말한다. 율법적 부정은 율법적 정결보다 쉽게 전달된다. 건강한 아버지가 자신의 건강을 아픈 아이에게 줄 수는 없지만, 병은 아이는 그 병을 아버지에게 옮길 수 있다.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14). 이제 청컨대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 위에 첩놓이지 않았던 때를 추억하라(15). 그 때에는 이십석 곡식더미에 이른즉 십석 뿐이었고 포도즙 틀에 오십 그릇을 길으려 이른즉 이십 그릇 뿐이었었느니라(16).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폭풍과 곰팡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었느니라(17).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을 추억하여 보라 구월 이십 사일 곧 여호와의 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추억하여 보라(18). 곡식 종자가 오히려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었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19)."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또 전에는 성전의 일을 소홀히 했었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예물을 가져오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이 내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러한 예물들이 용납되지 앟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제 선지자는 그 이유를 설명한다. 제의적으로 부정한 사람은 자신이 건드리는 모든 것을 오염시켰다. 이와 같이 그들의 오랜 불순종은 하나님을 불쾌하게 했고, 그들이 한 모든 일이 아무 이익에 없게 만들었다. 또 희생 제사로 드리는 거룩한 고기가 그 제사에 쓰여지는 물건들 외의 어느 것에도 그 성결함을 전할 수 없듯이, 그들의 외적인 선행, 심지어 하나님의 제단에 제물을 드리는 일까지도 외적인 의식을 거행하는 일 외의 효과를 가져오지 못하며, 하나님의 축복이나 거룩한 기쁨도 얻어낼 수 없었다.

  그들의 이전 일들은 모두 영적 부정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전에 행하던 불순종하던 길로 돌아가서는 안된다. 그들은 과거에 행하던 일들을 그만두라는 경고를 받는다. 학개는 1:6,9-11에서 씨를 뿌리고 거두는 관전에서 간단히 설명했는데, 여기에서는 모세의 율법이라는 시각에서 인과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1:2)에 "이 백성", 2:14에 "이 백성...이 나라"라는 말이 많이 쓰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의 동일한 시간을 이갸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들이 하나님의 집에 대해 무관심했던 상태가 2:15-19에서 재고되고 있다. 그들은 다시 한 번 성전의 재건을 중단했을 때에 그들이 겪은 곤경을 생각해보라는 권고를 받고 있다. 그 환난의 날에 20석을 추수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곡식이 10석밖에 수확하지 못했다. 그리고50석의 포도주가 담겨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통에는 20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계속 응징하셨다. 아모스 시대처럼 하나님께서 극심한 한재로 인한 폭풍과 극심한 습기로 인한 곰팡이로 그들을 치셨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고도 남은 것은 우박으로 치셨다. 하나님의 불만을 나타내는 이러한 분명한 징조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회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 선지자의 외침은 숙고되고 또 숙고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삶의 긴요하고 중요한 관계들, 특히 만물의 하나님의 행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관계들을 소홀히 여긴다. 선지자가 말한 것들은 헛간과 창고를 조사해봄으로써 쉽게 증명할 수 있었다. 창고에는 씨앗이 없었고, 포도나무와 나무들은 열매를 맺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순종하는 날로부터 그들을 축복하겠다고 약속하신다. 축복을 거두어 가신 하나님은 믿음과 순종에 대한 응답으로 축복을 주권적으로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2-4. 스룹바벨과 메시야(20-23)

  "그 달 24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20),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21), 열국의 보좌를 엎을 것이며, 열방의 세력을 멸하고, 그 병거들과 그 탄 자를 엎드러뜨리리니, 말과 그 탄 자가 각각 그 동무의 칼에 엎드러지게 될 것이라!(22)"

  학개의 마지막 메시지는 스룹바벨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 메시지는 백성들의 부정과 축복받지 못함에 대한 메시지와 똑같은 날(24일)에 선포되었다. 당시의 통치자에게 주어진 그의 메시지는 장차 있을 열국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타난다. 이 부분에서는 마지막 때를 바라보면서 메시야의 인성에 대해서 예시해주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진동과 세상 세력의 전복은 2:6-7에 제시된 것과 동일하다. 이 구절은 주전 521년 다리오 왕이 통치하기 시작했을 때, 바사제국을 멸망시키려고 한 민족들과 속국들(바사, 바벨론, 메대, 아르메니아 등)의 반란과 전복이 있었던 때를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예언적인 것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보좌"가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표현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상에는 하나님에 의해 용인되고 사단에 의해 수행되는 하나의 지고한 통치가 있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통치로 대치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병거와 그 병거에 탄 자들, 말과 그 말을 탄 자들을 뒤엎으실 때에 열방의 세력은 멸망하게 될 것이다. 당시에 병거와 기병들은 동양 군대의 주된 전투력이었다. 이 멸망은 서로 동료들에게 칼을 들림으로 성취될 것이며, 이 일은 아마겟돈 전쟁 때에 일어나게 될 것이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로 인을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23)."

  그러나 스룹바벨은 진노가 아니라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는다. 하나님은 그를 높이시고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 약속은 그가 유다의 통치자로서 지녔던 직무에 적용되었다. 왜냐하면 그 약속이 스룹바벨 자신의 생애와 관련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생전에는 여기에 제시된 것과 같은 반란들이 없었다. "이 날에"가 아니라 "그 날에"라고 묘사한 것을 주시하라! 메시야는 다윗과 스룹바벨의 혈통을 통해서 오실 것이다. 여기에서 다윗의 보좌가 불운한 세상 왕조들과 생생하게 대조되고 있다. 스룹바벨은 두 개의 메시야 족보에 나타나는 영광을 누렸다. 그리스도는 진실로 다윗의 아들이며 스룹바벨의 아들이었다. 유대인 주석가들도 이 구절을 메시야에 관한 것으로 보았다. 종이라는 칭호는 메시야에 관한 것으로 잘 알려진 칭호였다. 하나님은 스룹바벨을 택하셨기 때문에, 그를 인(도장)으로 삼겠다고 약속하신다. 인은 영광과 권위의 표징이며, 보살핌과 즐거움의 대상이다. 인은 서신이나 문서에 서명 날인하는 데 사용되었으므로 그 것을 소유한 사람을 대표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인의 소유자가 인을 두고 다니는 것은 거의 없다. 이러한 점에서 인은 한 사람이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소유물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하고 있는 중요한 상징들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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