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구약/요나

[스크랩] 요나서(2): 회개와 사랑 (3-4장)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8. 23:42

요나서(2): 회개와 사랑 (3-4장)


3. 하나님의 뜻을 따른 선지자(3장)

3-1. 다시 주어진 사명(3:1-2)

  "여호와의 말씀이 두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1),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2)."

  하나님께서 요나를 징계하신 것은 그로 하여금 자신에게 분명히 맡겨진 사명을 보다 더 잘 수행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요나를 징계하고 다시 구원해 주신 후에 다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요나, 베드로, 요한, 마가에게 하셨던 것처럼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주신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종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기꺼이 두 번째 사명을 주시는 일은 감사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은 요나가 기력을 회복한 후에 그에게 일어나서 다시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명을 선포하라고 지시하셨다. 사탄은 하나님의 사람이 진리를 선포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그것을 왜곡되게 만든다.


3-2. 순종하는 선지자(3:3-4)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길이라(3).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4)..."

  요나는 고난받은 후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명령을 준행하기 위해 니느웨로 갔다. 니느웨 성은 극히 큰 성읍이었으며 3일을 걸어서 돌 수 있는 도시였다. 니느웨는 매우 큰 성읍으로 그 둘에는 약 60마일이나 되었다고 한다. 고대의 한 작가는 니느웨의 둘레가 480스타디엄(96km)이라고 묘사했다. 이 도시는 바벨론보다 훨씬 더 큰 도시였다. 그 성벽의 높이는 100피트였으며, 그 성벽 위로는 3대의 마차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만큼 넓었다. 또한 이 성에는 1,500개의 높은 탑이 있었다. 이 성읍에 120,000명 이상의 어린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에(4:11), 총 인구는 수십만명이 되었을 것이다. 이 정도의 규모는 고대 도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였다. 니느웨는 결코 적은 도시가 아니었으며,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사랑은 그 안에 있는 모든 거주민에게 미쳤다.

  요나는 니느웨 성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지시하신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요나는 그 성에 들어가서 하룻길을 걸어가면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라고 선포했다. 요나는 당시에 통용되었던 언어로 메시지를 선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메시지는 더욱 더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 그는 3일 길이 되는 성읍에서 하루 동안만 메시지를 전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주로 시험과 연단과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다(창 7:4,12; 출 24:18; 왕상 19:8), 하나님은 니느웨의 심판을 일정 기간 동안 연기했다. 니느웨 사람들은 반은 인간이고, 반은 물고기 형상을 한 다곤 신을 섬겼다. 재미 있는 일은 다곤의 화신들 중 하나의 이름이 "오안네스"인데, 이 단어 앞에 "I"를 붙이면 신약 성경에서 "요나"를 표기하는 단어가 된다. 그리고 앗수르에는 "느비 유나스"라는 작은 신이 있었는데, 그 뜻은 "선지자 요나"라는 뜻이다. 고고학자인 보타는 이 두 이름을 연관시켜서 이 옛 도시의 성벽을 발굴해냈다고 한다. 요나는 하나님께 불순종 했다가 징계를 받고 구원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다.


3-3. 니느웨의 회개(3:5-9)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5).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6).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7),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8).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9)."

  예수께서는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요나서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표적이 되었다. 요나는 친히 하나님께서 거역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회개하는 자는 용서하시다는 것을 체험했다. 이러한 점에서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심판과 구원의 산 표적이 되었다. 요나가 니느웨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을 때에, 그들은 그 경고를 받아들였고,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요나를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신 하나님을 믿었으며, 금식을 선포하고 모든 사람들이 굵은 베를 입었다. 또한 요나의 선포는 백성들뿐 아니라 왕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요나의 메시지는 먼저 백성들에게 전달되었고, 그 백성들을 통해서 다시 왕에게 전달되었다. 왕은 요나의 소식을 듣고 보좌에서 일어나서 왕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았다. 이러한 행동은 일반적으로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행동이었고, 재를 뒤집어 쓰는 것은 극도의 슬픔을 상징하는 행동이었다. 이러한 태도로 보아 당시의 니느웨 왕은 매우 겸손한 태도로 요나의 선포를 받아들였던 것이 분명하다.

  또한 왕은 그 대신과 함께 조서를 내렸다. 왕이 대신들과 함께 조서를 내렸다는 것은 앗수르가 절대군주국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니느웨 왕이 내린 조서는 금식의 대상을 사람들 뿐만 아니라 짐승에게까지 확대했다. 왕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음식을 먹거나 물을 마시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왕은 사람과 짐승이 모두 다 굵은 베를 입고,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각자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라고 선포했다. 조서의 내용을 보면 그들의 회개는 단순한 겉치레가 아니라, 실제적인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진실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악한 길'은 율법과 양심이 정죄하는 것뿐 아니라, 모든 악을 포함하고 있다. 또 '강포'(헤하마스)는 율법을 어긴 구체적인 범죄로서 증거가 확보되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죄로서,  물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범죄를 모두 포함한다(창 16:5). 그러므로 악한 길과 강포로부터 돌아서라는 말은 크고 작은 모든 범죄로부터 돌아서라는 말이다. 당시의 앗수르는 군사 원정, 잔학한 행위, 약탈 등의 범죄를 자행했다. 이러한 죄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피하기 위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것들이었다. 왕은 이렇게 온 백성들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시고 그들을 멸망치 않게 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3-4. 용서받은 성읍(3:10)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10)."

  하나님은 왕의 말대로 그들이 자기의 죄악을 회개하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서 그들을 심판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죄인들이 진심으로 회개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들을 용서해 주신다. 그러나 니느웨의 회개는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이는 이 성이 구원 받은 후 100년도 지나지 않아서 결국 멸망한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니느웨 성 사람들은 요나의 시대 만큼은 진심으로 회개하였고, 이로 인해 멸망을 피할 수 있었다.


3-5. 적용; 요나서 3장의 의미

 * 이스라엘의 상징인 요나

  요나서 3장도 1-2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관계를 예시하고 있다. 요나는 다시 구원을 받은 후에 두 번째로 니느웨에 가서 메시지를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이스라엘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포로에서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거룩한 민족이 되게 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은 원래부터 열국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제사장 나라"로 부름을 받았다.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더 이상 제사장 나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이스라엘은 다시 이전의 영광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장차 요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것처럼, 국가적으로 크게 회복되게 될 것이다.

 * 자비로우신 하나님

  3장에는 회개하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자비를 깊이 묵상하는 일은 구원 받은 백성들에게 매우 큰 유익을 준다. 진실로 하나님은 악한 자들의 죽음이나, 길 잃은 자들이 멸망을 기뻐하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켜서 생명을 얻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슬픈 사실은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모든 민족들을 찾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불신자들에게도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한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더욱 무지하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그들의 원래 사명을 잃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가 되었다. 우리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와서 이전의 거룩한 영광을 회복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


4. 교훈을 받는 선지자(4장)

4-1. 분노한 요나(4:1);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1).."

  이 책이 성령에 의해 인도되지 않고 기록되었다면 이방인이 회개하는 절정에서 결론이 지어졌을 것이다. 사악한 니느웨가 회개하고 구원받음으로 이야기를 절정에 이르렀다. 하나님의 자비가 드러났고 요나는 그의 일을 완수했으며, 니느웨는 심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요나서는 여기에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직도 말해야 할 진정한 목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서 인간의 편협됨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요나서는 계속되어야만 했다.

  우리가 요나서 4장을 읽을 때에 놀라게 되는 것은 요나가 니느웨의 구원을 싫어하고 화를 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겨우 살아나온 선지자가 어떻게 이러한 태도를 보일 수 있었을까? 어떤 사람은 그가 자기의 명성이 더럽혀지는 것을 싫어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선지자라면 그가 말한대로 40일만에 니느웨 성이 멸명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 성은 구원을 받아 그의 예언이 성취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태에서 요나는 거짓 선지자가 될 위험에 처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견해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요나가 분노한 진짜 이유는 (욘 4:2)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요나는 이방인인 니느웨 사람들을 형한 하나님의 풍성하신 자비와 은혜를 시기했던 것이다. 요나는 회개했을 때에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 용서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니느웨가 용서를 받는 것은 기뻐하지 않았다. 요나는 1만 달란트를 용서받고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는 사람처럼 무자비한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요나의 태도는 오늘날의 수많은 성도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더 세상을 잘 다르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죄인을 용서하는 것보다 심판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보다 더 공의롭다고 생각하고 있다. 요나는 니느웨 성읍이 구원받은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악'을 드러냈다. 우리말 성경에 '심히'라고 번역된 말(라아 그돌라)은 원래 '큰 악'(a great evil)을 의미하는 말이다. 처음에 이 단어는 니느웨 사람들의 악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4장에 와서는 요나의 무자비한 행위를 나타내는 용어가 되고 말았다. 요나는 하나님의 결정을 싫어하고 노했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 앞에 큰 악이 된다.


4-2. 기도하는 요나(4:2-5)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2).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4).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5)."

  요나는 성을 내기는 했지만, 기도를 멈추지는 않았다.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는 고국에서 하나님의 명을 받았을 때에 이미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용서하실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니느웨가 용서받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니느웨 반대편인 다시스로 도망을 치려 했었다. 이는 당시에 니느웨가 이스라엘에게 매우 위협적인 나라였으며 장차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나라였기 때문이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애가 커서, 니느웨를 심판하시려는 뜻을 돌이켜서 재앙을 내리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2). 요나 역시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물고기 뱃속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요나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인에게 베풀어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이러한 요나의 모습은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맏형의 모습과 비슷하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용서해주시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기도했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는 차라리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낫다고 항의했다(3). 이러한 요나의 태도는 매우 이기적이고 편협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요나가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보시고 인내를 가지고 그를 설득하셨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네가 성내는 것이 어찌 합당하냐?고 물으했다. 하나님은 요나의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요나는 이 말을 "내가 잠시 후에 니느웨를 심판할 것인데 네가 왜 화를 내느냐?"는 말로 생각한 것 같다. 그러므로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성 밖으로 나가서 동편에 자기를 위해서 천막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그 곳에 앉아서 니느웨 성이 어떻게 되는 지 지켜보고 있었다(5).


4-3. 박, 벨레, 바람(4:6-9)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6),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7).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8).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9)."

  요나가 천막을 지은 후에 하나님은 박넝쿨을 준비하여 기적적으로 빨리 자라게 하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불평하는 선지자를 위해 박넝쿨을 자라게 하여 그의 머리를 햇빛으로부터 가리어 주셨다. 이 부분에 오면 하나님에 대한 용어가 바뀌고 있다. (4:6)에 사용된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아도나이 엘로힘)은 요나서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하나님의 명칭이다. 요나서 1-2장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명칭으로 "주"(아도나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리고 3장에서는 "하나님"(엘로힘)이란 말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전능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4장에 이르면 두 말을 합친 용어를 사용하여 미묘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준비했다'는 말(예만)은 '정하다','제공하다','준비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로서, '물고기'(1:17)와 '박 넝쿨, 벌레(7), 바람(8절)'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신 목적은 요나로 하여금 니느웨를 용서해주신 이유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요나는 하나님이 준비해 주신 박넝쿨을 보고 심히 기뻐했다. 그는 아마도 이 박넝쿨을 보고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계시며, 결국 니느웨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벌레를 준비하여 다음 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셨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그 박넝쿨은 곧 시들고 말았다(7). 그리고 박 넝쿨의 잎이 벌레로 인해 사라지게 되자, 요나는 뜨거운 바람과 태양으로 인해 큰 고통을 당했다(8). 시로코(Sirocco)라고 부르는 팔레스타인의 동풍은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 연안으로 불어오는 열풍이다. 시로코가 불면 기운이 급상승하게 되며, 때로는 밤에도 기온이 올라가서 대낮의 기온을 유지한다. 그리고 동풍은 공기 중의 습기를 완전히 제거하여 사람들은 피부가 당기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되면 사람들의 불쾌지수가 극도로 높아져서 온순한 사람도 신경질적이 되고, 모든 초목도 한순간에 시들어 버린다. 요나는 뜨거운 바람과 햇빛을 인해 고통스러워 하면서 또 다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겠다"고 불평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또 다시 요나에게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해 성을 내는 것이 어찌 합당하냐?"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요나는 화나 가서 "내가 성을 내다 죽는다고 해도 합당하다"고 대답했다.


4-4. 하나님의 마음(4:10-1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10),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11)"

  하나님께서 빨리 자라는 박을 주신 이유는 분명했다. 만일 하나님께서 천천히 자라는 식물을 주셨다면 요나는 그것에 물도 주고 가꾸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은 설득력이 감소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요나가 수고하거나 배양하지도 않은 박넝쿨을 주셨다. 그박넝쿨은 하룻밤에 났다가 바람 앞에서 금방 시들어 버리는 허무한 것이었다. 그러나 요나는 이러한 박 넝쿨을 매우 기뻐하고 아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큰 성읍, 즉 니느웨를 아끼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이 성 안에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이 12만명이나 되고, 가축도 많이 있다는 사실을 요나에게 상기시켜 주셨다.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해석이 제시되어 왔다.

 1) 니느웨의 사람들 중에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는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을 말한다

 2)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신체적으로 어린 아이들을 말한다.

 3) 두 견해를 합친 것으로 어린 아이들과, 영적으로 미숙한 모든 사람들을 말한다.

  위의 견해 중에서 3) 의 견해가 무난해 보인다. 이는 신체적으로 어리고 정신적으로도 미성숙한 모든 사람들을 통틀어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하나님은 판단 능력이 미숙한 사람들이나 어린 아이들이 다른 사람들의 죄로 인해 심판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을 아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그 성에는 가축들도 많이 있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로 인해 죄없는 수많은 짐승들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분노한 요나에게 이러한 방법으로 자신이 심판을 철회한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셨다.   이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선지자 요나는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입을 열어 항거하지 못한다. 요나서는 그 대답을 독자들이 직접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요나서를 읽는 독자들은 스스로 요나서를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을 용서하신 것이 지극히 합당하다고 대답하게 되는 것이다.


4-5. 적용: 요나서 4장의 의미

  이스라엘은 요나처럼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여 그들을 구원받게 하는 사명을 가진 나라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처음부터 "제사장 나라"라고 부르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일을 감당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싫어하고 분노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유대인 뿐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거부해 버렸다. 또한 처음에 주님의 제자들도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고 이방인에게로 가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박해를 통해서 그들을 흩어지게 하셨으며, 또한 초월적인 환상을 통해서 베드로를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보내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후에 사도 바울을 통해 복음은 이방인들에게 확산되었다. 그리고 그 복음으로 인해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러한 일을 보고 크게 분노하여 바울을 감옥에 가두고 죽여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수많은 이방인들을 결코 버리시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종을 보내어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그리고 이를 보고 시기하는 유대인들에게 적절한 환경과 설득으로 그들을 깨우쳐 주실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스라엘과 온 세상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C. 요약 및 적용

1. 요나서 1장의 의미: 이스라엘의 전형인 요나

  요나서 1장에는 예언적인 말은 한 마디도 없지만, 이스라엘에 관한 예언으로 가득차 있다. 요나는 이스라엘의 상징이었다. 요나와 같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되었다. 그리고 요나처럼 이스라엘도 이방인 구원의 사명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요나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그 사명에 순종치 않았다. 요나가 이방인 중에 누워있던 것 같이, 이스라엘도 불순종을 인해 흩어지게 되었다. 요나가 이교도들 중에 있을 때에 이교도들이 여호와를 알게 되었듯이, 이스라엘에 열국 중에 흩어져 살고 있을 때에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들어간 것같이 이스라엘도 이방 민족에게 포로가 되어 징계를 받았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고 구원을 받은 것처럼 이스라엘도 이방에 살며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회복될 수 있었다.


2. 요나서 2장의 의미

 가. 요나와 이스라엘

  요나서 1장의 사건들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묘사했다면, 2장은 요나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의 특징을 더욱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물고기 뱃속의 요나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동시에 또한 하나님의 징계의 손 아래에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도 열국 중에 흩어져 사는 동안 이방 민족들의 박해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신 28장)은 온 세상에 흩어진 이스라엘의 상태를 충실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압박을 받고, 육체나 영혼이 평안함과 쉴 곳을 얻지 못하며, 생명은 항상 위험과 두려움에 빠질 것이다.

  요나가 육신의 생명이 끝나게 되었을 때에 거듭해서 두려워했듯이, 이스라엘도 거듭해서 국가의 존립에 대해 낙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징계를 하는 도중에도 이스라엘을 보호해 주셨다.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해서 열국을 도구로 사용하셨다. 그러나 그 일을 이루신 후에는 이스라엘을 압박했던 나라들을 다시 공의대로 심판하셨다. 하나님의 이러한 무서운 징계를 알기 때문에, 요나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열국 중에 흩어질 것을 예언하면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신 4:29)." 이스라엘은 장차 고난을 받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이로 인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나. 하나님의 구원

  오늘날 이스라엘은 무엇보다도 선지자 요나의 위대한 고백, 즉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마암는다"는 고백을 배울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이 위험한 때를 맞이했음을 알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은 에워싸고 있는 대적들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구원이 여호와께로부터 온다는 사실만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 나라들이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수단을 통해서 구원을 얻어보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우상과 군사력으로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오직 여호와를 통해서만 구원과 안전과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하나님은 요나의 고백처럼 그리스도를 통해서 친히 인류의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다.


3 요나서 3장의 의미

 가. 이스라엘의 상징인 요나

  요나서 3장도 1-2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관계를 예시하고 있다. 요나는 다시 구원을 받은 후에 두 번째로 니느웨에 가서 메시지를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이스라엘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포로에서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거룩한 민족이 되게 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은 원래부터 열국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제사장 나라"로 부름을 받았다.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더 이상 제사장 나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이스라엘은 다시 이전의 영광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장차 요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것처럼, 국가적으로 크게 회복되게 될 것이다.

 나. 자비로우신 하나님

  3장에는 회개하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자비를 깊이 묵상하는 일은 구원 받은 백성들에게 매우 큰 유익을 준다. 진실로 하나님은 악한 자들의 죽음이나, 길 잃은 자들이 멸망을 기뻐하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켜서 생명을 얻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슬픈 사실은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모든 민족들을 찾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불신자들에게도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한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더욱 무지하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그들의 원래 사명을 잃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가 되었다. 우리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와서 이전의 거룩한 영광을 회복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


4. 요나서 4장의 의미

  이스라엘은 요나처럼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여 그들을 구원받게 하는 사명을 가진 나라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처음부터 "제사장 나라"라고 부르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일을 감당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싫어하고 분노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유대인 뿐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거부해 버렸다. 또한 처음에 주님의 제자들도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고 이방인에게로 가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박해를 통해서 그들을 흩어지게 하셨으며, 또한 초월적인 환상을 통해서 베드로를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보내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후에 사도 바울을 통해 복음은 이방인들에게 확산되었다. 그리고 그 복음으로 인해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러한 일을 보고 크게 분노하여 바울을 감옥에 가두고 죽여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수많은 이방인들을 결코 버리시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종을 보내어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그리고 이를 보고 시기하는 유대인들에게 적절한 환경과 설득으로 그들을 깨우쳐 주실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스라엘과 온 세상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