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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요나

[스크랩] 요나의 외침 - 하나님의 긍휼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8. 23:41

요나(Jonah) 외침


- 하나님의 긍휼 -

"하믈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 만 여명이여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욘4:11,참조 욘3:4)

지난 반세기 이상 우리는 요나서를 향한 어떤 태도를 유발시킨 철학적 분위기를 경험해왔다. 이러한 때에 물고기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들을 무시한 채 요나서를 읽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은 물고기의 배가 얼마나 큰지를 규명하는 데 너무 몰두해서 하나님의 계시의 깊이를 이해하는 데는 여유가 없는 것 같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고찰을 3장부터 시작하고자 하는 이유이다. 만일 내가 그 역사적 사실성을 의심하기 때문에 처음 두장을 생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매우 유감스런 일이다. 하나님에 대한 나의 지식으로는 이러한 의심이 용납될 수 없다. 특히 본문 중 네 번에 걸쳐 나타나는 하나님에 관련된 서술의 사실성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그러므로 물고기,박 넝쿨,벌레,동풍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은 나에게 결코 난점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훨씬 더 관심을 갖는 것은 이 글의 교훈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나는 그 교훈이 내가 본문으로 택한 말씀 속에 번뜩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큰 성읍, 니느웨를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이는 큰 성읍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을 잘 알면서도 그에게 반역하여 득죄한 자, 요나에게 주어진 말씀이었다. 그는 니느웨로 갈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했다. 왜냐하면 니느웨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그곳에 임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 때문이다. 그는 니느웨가 멸망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림설명 / 요나를 토해내는 물고기 : 얀 브뤼겔이 그린 요나의 모습으로 뮌헨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거대한 이 물고기는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라고 생각 되었다.

요나서 자체는 하나의 장엄한 계시이다. 엄밀히 말해 이는 예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언적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요나와 같이 자기 민족을 제외하고는 어느 민족도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없다는 배타성이 죄에 빠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쓰여진 글이다. 요나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에 관한 사실들과 잘 화합되어야 했다. 요나는 이러한 일을 겪었을 때, 자신의 실패한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용감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같은 실패를 범치 않도록 경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하나님의 이 말씀은 한 큰 성읍에 관한 것이다. 여러 해 전에 비스마르크 경은 "대도시는 국가의 커다란 환부이다"라고 말했었다. 나는 어떠한 사람도 이 선언을 뒤집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성경에 따르면,최초의 성읍은 에녹이었는데, 살인자에 의해 건설되었다. 우리가 성경이나 그밖의 문헌에서 도시의 역사를 추적해 보면, 즉 지금의 런던까지를 살펴본다면,도시의 거대함과 웅장함에도 불구하고 이 진술이 옳은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위해 하나님에 계획하신 것이다. 다시 한 번 성경으로 돌아가 보면, 우리는 성령이 시골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지만, 도시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음을 발견케 된다. 창세기로부터 계시록까지의 전체 이야기는 인간이 도시를 건설하려는 시도에 대한 것이다. 우주의 유일한 중심이신 조물주에게 반역하는 것을 동산에서 실패한 인간은 도시를 건설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럼으로써 늘 인간은 하나님의 질서는 고사하고 하나님의 뜻도 깨닫지 못해왔다.

역사상,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12만 명이나 있는 니느웨라는 성이 존재했었다. 이 도시는 걸어서 가로지르는 데 사흘이 걸릴 정도로 큰 도시였다. 하나님으니 이 도시를 주목하시고 그 죄악을 아셨다.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은 바로 이 도성에 관한 것이었다.

이 큰 성읍, 니느웨를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4:11)

이처럼 우리는 여기에서 율법의 계약과 무관한 도시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밝히는 계시를 접하게 된다. 이 도시는 바울이 피조물 속에서 보여준 영원히 빛나느니 빛에 반역하는 죄를 범한 도시이다. 또 우리가 알듯, 백년 후 자신의 회개를 다시 돌이킴으로써 멸망할 때까지,임박한 파멸로부터 구제되었던 도시이다. 바로 지금, 여호와께서 그의 사자에게 말씀하시는 가운데 이 주목할 만한 말씀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계시다.

이 큰 성읍,니느웨를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이 질문의 강조점은 "내가"에 있다. 요나와 그 민족은 니느웨를 전혀 긍휼히 여기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도 니느웨를 같은 식으로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를 묻고 계시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있어 요나서의 최고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이 질문과 이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어서 하나님의 교회는 그의 계시의 도구라는 점을 기억하여야 한다. 또 인간의 도시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무엇이든지, 그것이 교회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위 질문과 이에 대한 필연적인 대답은 인간과 인간의 도시를 향한 하나님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코 냉담하거나 무관심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니느웨를 향한 냉담과 무관심으니 바로 유다의 죄였으며, 요나 자신의 죄였다.

하나님은 도시를 아신다. 이는 물론 공감이 가는 일반적인 진술이다. 그런데 이를 보다 세부적으로 적용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나님은 니느웨를 아록 계셨다. 하나님은 런던을 알고 계시다. 50여년 전에 찰스 킹슬리느니 런던에 대하여 말하였다.

하나님은 런던을 아신다. 그는 웨스트 엔드(West End)의 야한 광채, 그 세속화된 불신앙, 부패 그리고 요동치는 혼란상을 알고 계시다.

반 세기가 지난 지금, 어느 누가 웨스트 엔드에 대한 이 묘사를 변경시킬 수 있겠는가? 그런데 킹슬리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또 하나님은 이스트 엔드(East End)의 처절한 가난과의 싸움, 그 추악한 부도덕,불결한 주거,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스러움과 극심한 고뇌 또한 알고 계시다.

이 말을 통해, 그는 하나님이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깨우치고 있다.이는 또 다음의 말을 통해서도 그러하다.

하나님의 눈 앞에는 모든 것이 벌거벗은 적나라한 상태로 드러난다.

요나의 이야기는 또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이를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이 말에 대해서도 알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말의 숫자가 런던 거리에서 점차 줄어들고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 뿐만이 아니라 "육축도 많이"있는 니느웨를 알고 계시다는 말씀 속에 드러난 사실을 변경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는 극히 적은 위로밖에는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단순한 지식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으니 단순히 하나님이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주의를 기울이신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훼이버(Faber)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네.
 하나님보다 이 세상의 슬픔을 더 잘 아는 이는.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네.
 하나님보다 이 세상의 약함을 더 자비롭게 판단하는
 이는.
나는 때때로, 인간의 상황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점과, 하나님이 인간에게 무심하지 않으시다는 점을 우리가 곧잘 잊어 버린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일들을 아시고, 느끼시며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염려하시고 괴로워하시기도 한다. 몇년 전에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준 매우 유능한 신학자가가 "냉정한(impassive)하나님"이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그의 주장은 하나님에게는 결코 어떤 형태로도 감정의 흔들림이 없음을 밝히려는 것이었다. 나는 그 글을 읽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하였으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아님을 하나님께 감사한다."보다 깊은 진리가 다음의 글귀 속에 있다.
 가슴을 짜는 고통 속에서도
 그리스도께서는 함께 하신다.
 여러 해 전에 한 시인이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죽었는데,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지구는 죽어 시체가 되어 누워 있다.
 그 주위에는
 어둠이 둘려 있다.
 구름과 천둥이
 그 수의이다.
 지구의 죽음은
 황혼의 죽음처럼 조용하고 평화로운 것이 아니다.
 힘 센 용사의 죽음처럼
 급작스런 것이다.
 지구는 죽어 시체가 되어 누워 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조객,
 그의 영욕을 목격한 유일한 조객이다.
 살아계신 하나님만이 죽음의 유일한 목격자.
 천지의 유일한 조객,
 한때 그렇게 자상하시던 하나님이.
이는 실로 가련하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시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노래한다.
 하지만 보라, 누군가가 다가온다.
 주검 곁으로.
 천사 가운데서 내려와 살며시 다가오신다.
 그는 왕으로서 오신다.
 죽은 자가 누운 곳으로.
 그는 힘차게
 오른 손을 뻗어 부드럽게 명하신다.
 일어나라, 잠에서 깨어나라,
 내가 죽음으로 너를 대속하리라.
 깨어 일어나라.
여기에서 우리는 지금 고찰하고 있는 논지에 도움을 주는 사항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고통받는 자, 죽어 가는 자 그리고 죽은 세계를 돌보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들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아신다. 인간의 주거,모든 남녀의 직업들이 모두 그의 감독 하에 있다. 인간의 정신적인 고통,이유를 알 수 없는 비참함, 비참의 신비스러움,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원한 것을 알지 못하는 영적인 죽음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시다. 럿셀 로웰이 "저주스런 슬픔의 산"으로 묘사했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마음 속에 가장 깊이 새겨져 있다. 인간이 상황이 어떨지라도, 그들의 죄악이 어떤 것일지라도, 하나님은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알고 계시고 돌보신다는 것 뿐만 아니라 그가 활동하신다는 명백한 사실,즉 그가 선지자를 보내시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시며, 다양한 수단과 방법으로 인간에게 말씀하사 그 말씀을 궁극적으로 완성시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지혜로 풀 수 없는 문제는 있을 수 없다. 그의 힘을 꺾을 정도로 강한 대적은 없다. 그의 빛을 가릴 수 있는 어두움은 없다. 또 그의 지각이 미치지 않는 사소한 일이란 없다.

하나님에게는 오직 하나의 난점만이 있다. 이는 바로 인간의 의지이다. 반역하는 완악한 인간성은 하찮은 주먹을 쳐들어 하나님의 면전에 들이대곤 하였다. 이 반역은 아무래도 인간을 말살시키는 것으로 보응하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옛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한 선지자의 말씀을 상기해 보자. "내가 어떻게 너희를 포기할 수 있겠느냐?"요나가 벌받았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태도와 활동에 대한 반역 때문이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에 하나님을 표상하는 것이다.따라서 우리는 바로 인간의 도시들에 대해 책임을 느껴야 한다. 오늘의 도시에느니 그 활동을 지배하는 이기주의와 열정적인 탐욕이 넘쳐 흐른다. 인간은 어디서든지 적자생존만을 믿는 사악한 철학을 좇아 행동한다. 그러한 생각에느니 하나님이 존재할 리 만무하다. 하나님의 교회가 부여받은 소명은 하나님의 태도를 받아들여 드러내는 것이다. 즉 이기주의 대신에 자기를 적자 생존 대신에 부적자를 구원하는 것이 교회의 소명이다.

사도는 우리가 도성을 찾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때 그는 우리가 하늘을 향해 가고 있고, 거기에 도달하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도시를 추구하는 것은 세상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뜻을 위로 향하게 하고 또한 위에 것에 따라 행동하여야 할 것이다.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의 교회는 어떻게 이 책임을 담당할 수 있겠는가? 첫째는 하나님의 도성의 원리를 내적으로 실현함으로써이다. 그 도성은 네모반듯하고 어느 곳으로나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있으며, 투명한 순수성과 찬란한 아름다움을 특징으로 하는 도성이다.

개인적 입장에서 볼 때, 교회의 소명은 도시에서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공동체적 삶의 의미는 단순히 공존한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될 수 있느냐는 데에 있는 것이다. 교회는 가족의 역할을 하여야 한다. 저임금 근로자가 공장에서 하루 몇 시간 일하여야 하느냐의 문제는 사업주의 이윤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의 건강에 관한 문제이다. 어느 지역에 술집이 하나 있느냐, 백개 있느냐의 여부는 장사의 배당금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주민들의 생활 환경에 관한 문제이다. 이는 교회가 세상일에 종사하는 인간에게 관심을 가져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의 벽이 구원이 되고 우리의 문이 칭송의 대상이 되려면, 우리의 관리들이 친절해져야 하고 우리의 세무원들은 의로와져야 하는 것이다.

이는 바로 교회가 지속적으로 남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이룰 수 있게 함으리 그 소명으로 한다는 것으리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이 생각하신 것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 글 처음에 언급했듯이, 요나의 실패는 그가 하나님의 생각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하자.

우리의 주님은 자신에 대해 친히 이렇게 선포하셨다."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노라."요나와 그리스도의 차이는 분명히 드러난다. 그들은 둘 다 하나님을 알았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같은 생각을 하셨음에 반해, 요나는 그렇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성읍을 바라보시며 그것을 위해 우셨다.

결국, 오늘날 우리에게 들리는 요나의 음성은 하나님을 알라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같은 생각을 하라는 것이다. 그의 긍휼을 느끼고, 그가 하고자 하시는 바를 맡아 수행하며 그가 진실로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사람들에게 보이라는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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