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3장 주석
=====33:1
화 있을진저...사람이 속이리라 - 앞에서 유다에게 내려진 '화'(* ,호)가 본
장에서는 '유다를 학대하며 속이는 자', 곧 앗수르에게 선고된다. 이러한 변화는 '인
간(애굽)의 도움을 의뢰하는 자의 결국은 파멸이나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의 결국은 구
원이다'는 선지자의 일관된 확신에서 기인한 것이다(Oswalt). 이것을 구체적인 역사의
배경 속에서 고찰하면 이해하기 쉽다. 히스가야 왕 14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은 군대를
이끌고 유다를 공격하였다. 히스가야 왕은 막대한 양의 공물을 받쳐 그 침입을 저지하
려 하였다, 산헤립을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언약을 깨고 재차 예
루살렘을 포위하였다(왕하 18:13-17). 이 절대 절명의 위기 앞에서 히스가야 왕은 무
릎을 꿇고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했으며 하나님은 그 종 이사야를 보내어 응답하셨다.
스미스(G. A. Smith)는 그것이 본장에 기록된 것이라 한다. 선지자는 언약을 파기한
앗수르에 대해 재앙을 선포하는데, 그 내용은 '악인은 그 행한 대로 보응을 받는다'는
한마디로 요약 가능하다.
=====33:2
여호와여...우리의 구원이 되소서 -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응에 대한 깨달음은 기도
를 통해서 주어질수 있으므로 선지자는 문득 예언을 중단하고 기도를 삽입시킨다. 여
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성도의 기도의 자세가 잘 나타나 있다. (1)스스로에게
아무런 공적도 없음을 겸손히 시인하고,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의지하듯이 참으로
무력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은혜를 베푸소서'). (2)하나님의 도우심을
소망하고 믿음으로 인내해야 한다('주를 앙망하오니').
=====33:3
진동 시키시는 소리로 인하여...열방이 흩어졌나이다 - '진동시키는 소리'와 '주의
일어나심'은 성도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현재의 위기 상황에 개입하셔서 그 원수
들을 물리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청각적, 시각적으로 묘사한 말이다. '진동시키는 소
리'에 대하여는 30:30;삼상 2:10;7:10;욥 37:4,5;40:9;시 18:13;29:3-9;77:18;104:7;
단 10:6;계 1:10을 '주의 일어나심'에 대하여는 민 10:35;시 68:1을 참조하라. 본문은
아마도 산헤립의 군대가 여호와의 사자에 의해서 하룻밤에 궤멸된 사건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37:36)
=====33:4
황충의 모임같이...뛰어 오르리라 - '황충'이라고 번역된 '하실'(* )은 '잘
라 먹다', '탐식하다'는 뜻의 '하살'(* )에서 파생된 명사로, 메뚜기의 일종을
의미한다(신 28:38;왕상 8:37;시 78:46;욜 1:4).이들은 떼로 몰려 다니면서 곡식을 남
김없이 갉아먹었다. 비유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 메뚜기떼가 들판을 휩쓸고 나면 아
무것도 남지 않는 것처럼, 앗수르군의 노략을 또한 그처럼 신속하고도 철저하게 유다
백성들에 의해 노획될 것이다.
=====33:5
여호와께서는 지존하시니...시온에 충만케 하심이라 - 승이의 결과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아지실 것을 묘사한 말로 본장의 서론부(1-6절)는 일단락된다
(Delitzsch,Oswalt). '지존하시다'로 번역된 '니스가브'(* )는 '사가브'
(* ) 동사의 수동 분사형으로, 높아지신 상태만이 아니라 높임을 받으시게 된
변화를 또한 암시한다(Alexander). 지극히 '높은 데'에 거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스스로 높은자로 자처하실 뿐 아니라, 한편 그 백성에 대하여는 당신의 영광
을 밝히 드러내셔서 시온 곧 예루살렘에 의와 공평을 충만하게 하신다(Calvin).
=====33:6
너의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 - 선지자는 계속
해서 히스가야 왕의 통치하에서 백성들은 '안정감'(* ,에무나)을 잃지 않고
'구원과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을 향유하게 되리라고 말하는데, 이 모든 것은 '여호와
의 경외함이 너의 보배'라는 결론적인 말속에 담겨 있다. '여호와 경외'(*
,이르아트 야훼)는 하나님을 무서워한다기보다는 그의 본성을 바르게 인식함
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기꺼이 복종하고 공경하려는 마음으로 그를 예배하고자 하는 내
적인 자세를 가리킨다. 다른 곳에서 이것은 '지혜의 근본(실체)'이라 불리기도 한다
(시 111:10;잠 1:7;9:10). 이같이 영적으로 개화되는 시대에 있어서는 하나님과의 교
통이 끊이지 않을 뿐더러 금과 은 같은 보물 대신 하나님 경외함을 그 즐거운으로 삼
게 된다. 메시야 시대의 영적 속성들을 기록한 11:2과 비교하라.
=====33:7
보라 그들의 용사가...평화의 사신들이 슬피 곡하며 - 선지자는 앞에서 간략한 형
태로 본장의 주체를 소개한 뒤에 다시 그것을 세부적으로 확대하는 방식으로 진술한
다. 그느 먼저 아무데서도 도움받을 길 없는 현재의 비참함을 슬퍼하는 용사의 애가로
시작한다(7-9절). 언급된 '용사'(* ,에르엘람)는 평행하는 '평화의 사신들'
과 동의어로서, 평화 협상을 위해서 산헤립이 평화의 조건으로서 내세운 금과 은을가
지고 갔으나(왕하 18:14), 산헤립은 평화의 조건으로서 다시 예루살렘의 완전 항복을
요구하면서 언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33:8
대로가 황폐하여 행인이 끊치며 - 앗수르의 침공으로 인해 유린당하는 유다의 형편
을 묘사한다. 대로가 황폐하여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자 끊기고 여행객도 보
이지 않으며 장사하는 이들의 자취도 찾아볼 수 없는 것(삿 5:6)은 전쟁 상황에서 쉽
게 찾아볼 수 있는 풍경이다.
대적이 조약을 파하고 성읍들을 멸시하며 - 어떤이는 '성읍들'(* ,아림)을
'중인들'(* ,아딤)로 수정해서 읽을 것을 제안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언약을
파기했다'는 말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Duhm, Oswalt, J. Watts). 그러나
'성읍들'로 읽어도 뜻이 통하는 터에 굳이 맛소라 본문을 바꿀 필요는 없는 듯이
보인다.
=====33:9
땅이 슬퍼하고...목엽(木葉)을 떨어치는도다 - 유다의 참상이 땅에 반영된다. 가장
비옥한 땅으로 일컬어지던 대표적인 네 곳들-레바논, 사론, 바산, 갈멜-이 하나같이
황폐해진다. 백향목과 전나무로 꽉차 있어서 언제나 울창한 이스라엘 북쪽의 레바논은
바짝 말라 볼품 없는 모양이 될 것이며(2:13), 감멜 산 남쪽 기슭에서 욥바에 이르는
지중해 연안의 넓은 평원으로서 아름다운 들풀과 목초지를 자랑하던 사론(대상 27:29)
은 아무것도 자랄 수 없는 사막과 같이 될 것이며, 동과 서에 위치한 비옥하고 기름
진 땅들로서 과일 나무와 삼람으로 유명한 바산 (2:13;렘 50:19;미 7:14;슥 11:2)과
갈멜은 나뭇잎들을 떨어뜨리게 될 것이다.
=====33:13
너희 먼데 있는 자들이...가까이 있는 자들아 - '먼데 있는 자들'과 '가까이 있는
자들'은 '멀고 가까움을 막론하고 모든 곳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Alexander). 앗
수르를 파멸시킨 하나님의 권능에 너무나 놀랍고 위대한 것이어서 모든 사람들의 주목
을 끌기에 족하다는 말이다.
=====33:14
시오의 죄인들이 두려워하며...함께하리요 하도다 - '시온의 죄인들'곧 '경건치 아
니한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 중에 거하면서도 그 행위와 습성이 앗수르와 별로 다를바
없는 불법하고 불의한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앗수르를 삼킨 하나님의 심판의
불이 그들 또한 삼킬 줄 모른다는 극도의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33:15
앞절에서 제기된 물음에 대한 답으로서 선지자는 그가 이상으로 삼고 있는 한 인간
의 모습을 그려 보인다. 시 15편; 24:3-6과 유사한 내용이다.
토색한 재물을 가중히 여기는 자 - '토색한 재물'(* ,베차 마
아솨코트)은 다른 사람을 착취함으로 해서 얻어지는 부당한 소득을 가리키며, '가중히
여기다'(* ,마아스)는 말은 '거절하다', '멸시하다'는 뜻이다. 의로운 자는 자
신의 이익을 위하여 연야한 자를 이용하거나 억누르지 않으며 더 나아가 재물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히지 않으므로 그의 손은 언제나 깨끗하다.
=====33:16
그느 높은 곳에 거하리니...그 물은 끊이지 아니하리라 -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경
건한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그로부터 풍족한 사랑을
호흡하며 복된 삶을 영위해 나간다. 선지자는 그것을 두 가지로 표현한다. (1)하나님
께서 그를 지켜 모든 위협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몸소 그의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이
다. '높은 곳'(* ,메로밈)은 적의 위협이나 어떠한 자연의 재해도 접근 불
가능한 난공 불락의 요새 곧 가장 안전한 장소를 가리킨다(25:12). (2)하나님께서 일
상의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이다. '양식'(* ,레헴)과 '물'(* ,밈)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근본적으로 구비해야 할 필수품들을 총칭하는 말이
다.이러한 축복은 오직 하나님으로 주인을 삼고 그 보시기에 의롭고 경건하게 살기를
힘쓰는 자들에게만 허락되는 것이다. 그럴진대, 성도가 먼저 구할 것은 '하나님 나라
와 그의 의'(마 6:33)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33:17
너의 눈은...목도하겠고 - 선지잔는 계속해서 앞에서 말한 경건한 신자들을 향해
그들이 누릴 풍요한 미래의 모습을 말한다(17-24절).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여기 언급
된 '왕'(* ,멜렉)이 히스가야 왕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히스가야 왕은 유다의
위기 상황에서 찢긴 의복과 삼베옷을 입은 수치스런 모습을 보였으나(37:1) 위기가 끝
나고 적들이 물러간 이후에는 다시 존귀의 위엄을 회복한 영광스런 모습으로 백성들
앞에 나타날 것이다(Delitzsch, Alexander). 그러나 이것을 배타적으로 히스가야 왕에
게만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 않다. 왜냐하면 (1)동일한 문맥 속에서 선지자는 하
나님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분명히 묘사하고 있으며(22절), (2) '왕' 앞에 관사가 붙
어 있지 않다는 사살은 선지자가 역사상의 특정한 왕뿐 아니라 이상적인 왕을 염두해
두고 있음을 시사하며, (3)히스가야 왕이 다스렸던 협소한 영토와 본문에 언급된 '광
활한 땅'과는 문자적인 의미에서는 잘 조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히스
가야 왕은 메시야의 모형으로서 거론되었다는 견해를 취한다(Calvin).
=====33:18,19
너의 마음에는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하여 내리라...깨닫지 못하는 자니라 - 구원
받은 백성들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그들이 겪었던 두려웠던 순간들을 회고하게
될 때, 그들은 말할 수 없는 희열과 감격 속에서 승리의 환호성을 터트리게 될
것이다 :'지난날 우리를 그토록 괴롭히던 자들은 지금 어디 있느냐?...어디있느냐?'
(고전 1:20;15:55 참조). 한때 공물과 전리품들을 계산하고 장부에 기입하던 서기들
(* ,소페르)과 그 공물을 저울에 달아 무게를 재던 관리들(* ,쇼켈)과 탑
(망대)을 세워 도성을 습격하려던 계획을 세우던 앗수르 관리들(* -
, 소페르 에트-하미그달림)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더불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들을 지껄이며 길길이 날뛰던 '강포한 백성'(* ,암 노
아즈) 곧 앗수르인들 또한 꿈과 같이 사라질 것이다.
=====33:20
우리의 절기 지키는 시온성을 보라...그 줄이 하나도 끊이지 아니할 것이며 - 결코
정복되지 않는 도성 예루살렘은 그곳에서 하나님과 백성의 만남이 정기적으로 이루어
진다는 점에서 '축제(절기)의 성읍'(* ,키르아트 모아테누)이라 불
린다.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란 말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예루살
렘에 성소가 고정되기 전, 즉 광야를 떠들며 대적과 싸우던 불안정한 시절에는 하나님
과 백성의 관계가 '장막'(성막)이라는 협소하고 유동적인 공간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 장막은 본래 하나님의 거주하심을 상징하는 처소로 세워졌다(출 25:8;
29:44,45).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 '거주하심'은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는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다. '거주한다'는 말은 성경적 의미에서 '친밀하
게 연합함을 뜻한다(창 30:20; 시 5:4).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는
자력으로는 건널 수 없는 깊은 심연이 놓여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제사드리는 행위를
통하여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과 백성의 참교제는 그런 연후에라야
허락되었다. 이 경우 성막은 동물의 피를 뿌려 백성의 만남이 실현되는 '친교의 공간'
(* ,오헬 모예드)으로 기능하였다(출 40:2). 성막은 언제나 12지파의
한 가운데 위치하였으며 그들과 더불어 진퇴(進退)를 같이하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함께하시며(임마누엘의 원리), 와으로서 그들을 다스리심(신정의 이상)을 상징
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장막은 하나님의 통치(하나님의 나라)의 모형론
적인 표현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새것이 옛것을 대신하고 실재가 그림자를 대신하는
그때에는 응당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히 11:9,10).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적들로부터
구원하시는 미래의 그날에는 '임마누엘의 원리'(21절)와 '신정의 이상'(22절)은 더욱
완전한 형태로 구현될 것이다(G. Vos,Biblical Theology).
=====33:21
여호와께서는...넓은 하수(河水)나 강이 둘림 같을 거싱니라 - 참으로 '권능 있는
자'는 예루살렌을 위협하는 앗수르가 아니라 예루살렘과 함께하시며 그 도성을 지키시
는 여호와이시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과 함께하시면 그 도성은 큰 강이 빙 둘러서 아
무라도 접근할 수 없게 하는 천혜의 요새들처럼 그 영구한 안전을 보장받게 될 것이다
(시 46:4-5;겔 47:1-12;슥 14:8). 선지자는 아마도 유브라데 강에 둘러싸인 바벧론이
나 나일 강에 둘렀인 애굽의 테베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33:22
대저 여호와께서는 우리 재판장이시요...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 - 예루살렘과
함께하시며 그 권능으로써 도성을 방비하시는 여호와가 본문에서는 거의 동일한 뜻을
가진 세 가지 칭호로 불려진다. (1)그는 우리의 재판장이시다(* ,쇼푸테누).
그는 공의에 입각하여 백성들의 옳고 그름을 준열하게 판단하신다(11:3,4). (2)그는
우리의 율법 수여자이시다(* ,메호케케누). 그는 하나님으로서 마땅히
따라야만 되는 삶의 규범을 제정해 주신다(신 33:21). (3)그는 우리의 왕이시다(*
,말루케누). 그는 이스라엘을 통치하신다(삼상 12:12). 그에게 현대적 의미
의 입법권, 사법권, 행전권이 모두 속해 있다. 이는 그분만이 인생과는 질적으로 다른
완전한 분이시며, 우리의 참된 주관자이시며, 우리의 유일 무이한 구원자이심을 고백
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33:23
너의 돛대 줄이 풀렸었고...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이며 - 옛주석가들은 물론
현대의 많은 주석들까지도 21절의 '배'(앗수르를 가리킴)의 표상이 본문에서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데는 큰 난점이 따르니, 다른 데서 앗수르가 항
상 남성형으로 취급되는 반면, 본문의 '하발라이크'(* ,너의 돛대줄)의 어
미는 여성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앗수르가 아니라 유다가 언급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낫겠다(Delitzsch, Oswalt). 앞에서 승리자로 묘사되었던 유다가,
여기서는 정비조차 제대로 안 된 낙후한 배로 묘사된다. 그러나 '때가 되면'(* ,
아즈) 모든 것이 뒤바뀐다. 유다의 결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앗수르에게 대승을 거두
게 된다.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는 간명하다 : 승리는 외적인 조건에 달려 있지 않고
불가능을 가능케 만드시는 하나님의 권능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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