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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느헤미야

[스크랩] 느헤미야 (2 : 1~20)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7. 20:59
느헤미야 (2 : 1~20)


1 아닥사스다왕 이십년 니산월에 왕의 앞에 술이 있기로 내가 들어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의 앞에서 수색이 없었더니

ㅇ아닥사스다 이십 년 니산 월 - '니산월'은 유대 종교력으로 정월에 해당된다. 그
리고 '하나니'등이 페르시아에 도착했던 '기슬르 월' 9월이다(1:1). 그렇다면 1:1의
'기슬르 월'이 '아닥사스다 제 이십 년'이었다고 할 경우, 본절의 '니산 월'은 '아닥
사스다 이십 일 년'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본절에 '이십 년'이라고 표기된 까닭
은, 그 당시 느헤미야가 왕의 재위년수를, '디스리 월'(양력으로 9-10월)부터를 새해
로 간주하는 유대 민간력을 좇아 계산하였기 때문이다(Fensham ). 따라서 '기슬르'(1:
1)이나 본절의 '니산 월'은 동일한 년도에 속하는 셈이 된다.
ㅇ왕의 앞에 술이 있기로 - 이것은 그당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음을 암시해주는 문
구이다(Williamson, Fensham ). 사실 페르시아의 왕들은 이와 같은 잔치를 매우 자주
베풀었었다(Fensham, 에 1:3; 5:6). 또한 이것은 고대 중근동 국가들의 일반적 관습이
기도 하였다. 아마도 그때 아닥사스다 왕은 바벨론에서의 월동을 마치고, '니산 월'
(양력으로 3-4 월), 즉 봄이 되었기 때문에 느헤미야가 있던 '수산 궁'으로 다시 돌아
왔을 것이다(1:1). 아무튼 왕이 베푼잔치는 '술 관원'이었던 느헤미야가 왕에게 나아
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1:11). 한편, 느헤미야는 민족적 재난에 관한 소식을
듣고서 그토록 가슴아파 하면서도 결코 성급하게 서두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느헤미
야는 자신의 요청을 올릴 가장 적절한 기회를 찾으면서 계속 하나님께 기도해 왔음이
분명하다(Edwin Yamauchi).
ㅇ내가 들어 왕에게 드렸는데 - 어떤 이들은 바사 왕실에 술 관원이 여럿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서, 본절에서 느헤미야가 술을 올릴 차례가 온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
다.
ㅇ이전에는 내가 왕의 앞에서 수색(愁色)이 없었더니 - 이것에 대해서는 (1) 여기의
'없었더니'(로)를 '진실로'(루)로 보고 '진실로 내가 그의 면전에서
근심했었다'라고 하는 해석(Myers, LXX), (2) '왕의 앞에서'(레파나
이우)를 '전에'(레파님)로 보고 '내가 전에는 근심하지 않았다'라고 하
는 해석(Rudolph), (3) 맛소라 본문을 그대로 유지하되 '왕의 앞에서'(레파나이우)의
'왕'을 비인칭으로 번역한 '그것'으로 보고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그 소식앞에
서 근심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해석(Fensham), (4) 맛소라 본문을 그대로 인정하여
개역성경의 번역처럼 받아들여야 한다는 해석(Williamson, Rawlinson, Schultz, Keil)
등이 있다, 이처럼 (1) (2) (3) 의 견해는 모두 맛소라 본문의 수정을 주장하지만 그
것을 입증치 못한다는 점에서 (4)의 견해가 가장 타당성이 있다. 그렇다면 여기의 이
문구는 느헤미야가 그 전에는 항상 밝은 얼굴로 자기의 소임을 다했음을 말해 준다고
볼 수 있다.

2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이는 필연네
마음에 근심이 없음이로다 그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ㅇ왕이 이르시되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 이것은 느헤미야의 기도(1:11)
가 응답 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이다. 사실 술 관원이 흥(興)을 최고조로 돋우
어야 할 직책에 있으면서 도리어 연회장에서 슬픈 얼굴을 하고 다니는 것은,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것을 주최한 왕에 대한 도전으로 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처럼 왕이 느헤미야에게 연민어린 관심을 보인 것은,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
를 입게 하옵소서'라는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 결과로밖에 볼수 없다.
ㅇ근심(로아으) - 이는 앞의 '수색'과 어근에 있어서는 동일하며, 전 7:3에
서는 '슬픔'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ㅇ그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 본절은 느헤미야가 왜 이 같은 감정을 갖게 되었는
지를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이유는 (1) 왕이 연회장내에서 느헤미야가 슬픈 얼
굴을 한 것으로 인해 진노하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 (2) 왕이 느헤미야의 간청을 듣고
오히려 진노하지 아니할까 하는 염려 등으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Fensham). 그러나
느헤미야의 '수색'에 대한 왕의 반응이 사뭇 동정적이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2)의 것
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느헤미야는 왜 자신의 간청에 대해서 아닥사스다가
진노할 것으로 염려했을까? 그것은 예루살렘의 성벽 재건사업이 아닥사스다의 명령에
따라 그의 즉위 초기에 중단됐음을 느헤미야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스 4:
11, 21). 따라서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의 일로 예루살렘에 가겠노라고 아닥사스다 왕
에게 요구하는 일은, 곧 아닥사스다에게 그가 내렸던 이전의 명령을 번복하라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또한 이는 왕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문제라는 점에서 대단히 위험 부담
이 뒤따랐다.

3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색이 없사오리이까

ㅇ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고대 중근동의 왕들에 대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찬사
형의 인사이다(Rawlinson, Schultz, 왕상 1:31; 단 24:4; 3:9; 5:10; 6:6, 21). 그럼
에도 불구하고 이 인사에 왕의 호감을 사려는 느헤미야의 의도가 담겨 있음을 배제할
수는 없다,
ㅇ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 - '열조의 묘실', 즉 '조상의 무덤'은 고대 중근동 사
회에서는 매우 중요시 되었다. 특히 왕족 및 귀족들에게는 더욱 그러하였다. 따라서
이 같은 언급은 아닥사스다 왕으로 하여금 '성읍' 곧 '예루살렘'을 외부의 침입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곳으로 간주토록 유도하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아닥사스다 왕
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에 따라 '예루살렘'(스 4:20 )이라는 고유 지명 대신 '성읍
'이 사용되고 있다. 만일 느헤미야가 여기서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을 사용했다면, 아
닥사스다 왕으로 하여금 자신이 이전에 사마리아 관리들의 요청에 따라 그곳에 성벽
쌓는 일을 중지시켰던 사실을 쓸데없이 상기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을지도 모른다. 또
한 본 문구는 느헤미야가 유다 지파 출신으로서, 그의 조상들이 예루살렘에 살았었음
암시해준다(1:6).
ㅇ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사오니 - '황무하고'(하레바)는 '말라불다'
혹은 '죽이다'의 뜻을 갖는 동사 '하레브'에서 온 형용사로서, 인간 혹은
자연의 피조물 등이 특별한 원인에 의해서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 상태를 가리
킬 때 사용된다(시 106:9; 사 19:5; 34:10; 렘 26:9; 겔 6:6). 따라서 이것은 '하나니
'가 예루살렘의 형편을 느헤미야에게 보고할 때(1:3) 사용한 단어, '훼파되고'(파라
츠) 보다 더 강력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있다. 또 '소화되었사오니'
(에클루 바에쉬)는 문자적으로 '불에 의해서 먹혔다'의 뜻으로서 1:3의 '소화되었다
'(니체투 바에쉬) 보다 강조적인 의미를 갖는다.

4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ㅇ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이것은 느헤미야에게 간청할 기회를 주기 위한 질문이다.
이때 아닥사스다 왕은 이미 느헤미야를 위해 어떤 배려라도 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
었던 것 갈다.
ㅇ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黙禱)하고 -여기서 '묵도하고'(에트
팔렐)는 '간청하다' 혹은'기도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팔랄'의 재귀적 강의
형으로서, 간절한 소원을 품고서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기도로써 매어 달리는 것을 가
리킨다(삼상 1:17; 왕상 8:33; 왕하 19:20; 20:2). 느헤미야의 이 같은 기도는 (1) 자
신의 소원이 아닥사스다 왕에게 정확하게 전달되며, (2) 전달된 자신의 소원이 왕에
의해서 호의적으로 가납될 수 있기를 바래서 드려졌음이 분명하다.

5 왕에게 고하되 왕이 만일 즐겨하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

ㅇ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 - 이것은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간청했던 것
의 핵심적 내용이다. 다른 것들은 '성 중건'의 부차적 요소들일 뿐이다. 이는 구체적
으로 '성벽의 복구'를 뜻한다(3절).

6 그 때에 왕후도 왕의 곁에 앉았더라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몇날에 행할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하고 왕이 나를 보내기를 즐겨하시기로 내가 기한을 정하고

ㅇ왕후도 곁에 앉았더라 - 고대 중근동 국가에서는, 왕이 국사(國事)와 관련된 귀빈
을 맞이하고 있을 때는 '왕후'가 내전(內殿)에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자리였던 관계로 인하여 '왕후'도 왕과 함께 있었다(Rawlinson). 이런
때에 '왕후'는 관례적으로 긴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는 왕의 발(足)
곁에서 왕의 얼굴을 쳐다보며 앉아 있었으며 왕과 왕비가 이런 자세로 있는 동안 신하
들은 그 주변에 모여 서 있었던 것 같다(Schultz). 그런데 느헤미야가 본절에서 '왕후
'가 함께 있었음을 특별히 밝힌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세가지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1) 왕이 느헤미야에게 호의적 반응을 보인데는 '왕후'의 영향력 행사가 있었음을 암
시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Myers, Rudolph, Widengren), (2) 느헤미야가 왕으로부터
팔레스틴으로 돌아가기 위한 허락을 받는 과정에서 '왕후'라는 장애물이 있었음을 암
시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Batten), (3)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자신의 소원
을알린 곳은 연회장이 아닌 은밀한 장소에서 였음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
(Kidner)등이 있다. 그렇지만 첫째, '왕후'는 왕의 명령이 있을 경우 왕과 함께 연회
장에 참석할 수 있고 또한 이것은 매우 보편적이었으며(Rawlinson, 에 1:11) 둘째, 아
닥사스다 당시에는 여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컸으며(Fensham) 셋째, 느헤미야 항상
왕궁에 거하므로 왕의 처첩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며 넷째, 5절과
6절은 왕이 왕후가 있었을 내전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추측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
등으로 볼때, 위의 세 견해 중 (1)의 것이 가장 타당성이 있는 듯하다. 한편, '왕후'
(쉐갈)에 대해서는 (1) 이와 동일한 아람어 단어가 왕의 첩들을 의미한다
는 사실(단 5:23)에 근거하여 왕의 많은 첩들 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소유한 여인이
라는 견해(Williamson, Batten). (2) 이 '히브리 단어가 시 45:9에서는 첩이 아닌 왕
비를 가리키고 있음을 근거로 해서 아닥사스다 왕의 유일한 정비(正妃)였던 '다마스피
아'(Damaspia)라는 견해(Myers, Fensham, Rawlinson, Schultz)등으로 그 해석이 갈라
진다. 그러나 첫째, '쉐갈'이라는 히브리 단어의 시편에서의 용례 둘째, '다마스
피아'라는 왕후가 실제 역사속에 존재했었음을 증명해주는 문헌 등으로 미루어 볼때,
위의 두 견해 중 (2)의 것이 더 타당하다.
ㅇ몇 날에 행할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 이것은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
으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얻고 있었음을 극명히 보여준다. 즉, 아닥사스다 왕은 느헤미
야를 자신의 곁에서 떠나 보내기를 아쉬워했던 것이다. 한편, 이 문구는 동의적 대구
법의 표현 방식이다. 따라서 '몇 날에 행할 길이며'와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는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데 소요되는 전(全)기간을 묻는 동일
한 의미를 지닌다. 아닥사스다 왕은 이러한 반복적 표현을 써서 느헤미야에 대한 자
신의 애정을 강렬하게 드러내고 있다.
ㅇ내가 기한을 정하고 - 이처럼 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가 다시 올 날을 직접 정하
지 않고, 느헤미야에게 직접 정하도록 한 것은 느헤미야에 대한 세심한 배려임이
분명하다(본 단락 주제 강해, '에스라 느헤미야의 약사'참조).

7 내가 또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즐겨하시거든 강 서편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저희로 나를 용납하여 유다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ㅇ강 서편 총독들 - 여기의 '총독들'(파하 우오트)은 작은 지역을 다스리
던 지방관리를 가리킨다(스 8:36). 유프라테스 강 서편에는 이러한 관리들이 많았었던
것 같다.
ㅇ조서를 내게 주사 유다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 에스라의 경우 와는 달리 느헤미야
는 다분히 정치적인 명목으로 귀환을 요청하고 있다(스 7:10과 비교). 따라서 그는
팔레스틴으로 가는 여행 길에 페르시아의 지방 관리, 특히 사마리아 관리로부터 적대
적인 대우를 받을 가능성이 상당히 많았다(Fensham). 그러므로 느헤미야가 자신에 대
한 적대 행위를 피하기 위해서 필요 적절한 증표를 왕에게 요구한 것은 당연한 것으로
이해된다.

8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저로 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나의 거할 집을 위하여 들보 재목을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하고

ㅇ왕의 삼림 감독 아삽 - 여기의 '삼림'(파르데스)에 대해서는 (1) 레
바논의 삼림(Fensham, Myers, Patrick), (2) 예루살렘 근방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
는 페르시아 왕의 정원(Schultz, Rawlinson), (3) 유다 왕가의 왕실 재산(대상 27:28)
이었던, 평지의 감람 나무 밭(Williamson, Keil) 등의 세 가지 해석이 제시되고있다.
그러나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성전공사를 위하여 레바논으로부터 목재를 들여
온일이 있었으며(왕상 5:6; 스 3:7) 둘째, 예루살렘 성벽을 완전히 새로이 복구하기
위해서(3절) 필요한 막대한 양의 목재는 레바논 산지를 제외하고는, 적당한 조달처가
없었으리라는 점 그리고 셋째, 건축용으로 적절한 나무는 오직 레바논 산지에서 벌목
되는 백향목 뿐이라는 사실등으로 미루어 볼 때 위의 세 견해 중 (1)의 견해가 가장
타당성이 있다. 물론 여기에 대한 반론으로 (1) 삼림 감독이었던 '아삽'이 히브리식
이름의 소유자라는 점, (2) '삼림'이라는 단어가 고대 아리안어에서 온 것으로서 자연
림이 아닌 울타리나 담장 등으로 둘러 싸여 있는 숲이 울창한 공원을 가리킬 때 사
용된다는 점 등이 제시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반론은 첫째, 페르시아 왕이 멀리 유다
땅에 개인적인 공원을 두었을 가능성은 문헌적 입증이 없다는 점에서 매우 희박하며
둘째, '아삽'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식으로 볼 수도 있지만 '말'(馬)을 뜻하는 폐르시
아어 '아스파'에서 파생된 페르시아식 이름 '아스바다'(에 9:7)와 유사한 형태로도 볼
수 있다(Schultz)는 사실등으로 미루어 볼 때 타당성이 약하다.
ㅇ전에 속한 영문의 문 - 여기의 '영문'은 성전 북쪽에 위치 했었던 요새 혹은 망대
이다(Fensham, Williamson, Rawlinson). '하나넬 망대'(3:1)는 바로 이것의 한 부분
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성전의 보호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였다. 후대에 들어서서
는, 바로 이 자리에 헤롯왕(Herod the Great)에 의해서 '안토니아 영문'(Antonia
Fortress)이 세워졌었다(Williamson).
ㅇ성곽 - 성곽 건축에 목재가 직접적인 재료로 사용되지는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다
만 성을 쌓아 올리는 과정에서 필요하였을 것이며 '성곽'에 속한 여러 '문'(門)을 세
우는 데 필수불가결 하였을 것이다(3:3, 6). 아무튼 고대 중근동 사회에서 목재가 '성
곽' 건축과 관련해서 사용되었다고 하는 증거는 대단히 많다(R. Naumann, G. E. Wrig
ht).
ㅇ나의 거할 집을 위하여 - 이것은 문자적으로 '내가 들어 갈수 있는 한집을 위하여'
의 의미이다(Fensham). 그런데 '거할'(보)이 특정한 임무의 수행과 관련
해서도 사용된다는 점(대상 12:17, 23, 38; 16:33; 19:3)에서 볼 때, 여기의 '집'은
총독의 관저로 사용할 처소를 의미하는 듯하다(Schultz).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새로
이 지어질 '집'을 의미한다고는 볼 수 없다. 추측컨대 느헤미야는 자신의 형제 '하나
니'(1:2)와 더블어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됐을때 머무를 처소에 대해서도 상
의를 하였을 것이며, 이에 따라 이미 존재하고 있던 집을 수리해서 사용할 계획을 가
지고 있었을 것이다(Williamson).
ㅇ들보 재목을 주게 하옵소서 - 느헤미야가 왕의 질문(4절)에 대해 이처럼 즉각적으
로 필요한 것을 제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아닥사스다왕이 수산궁에 없는 동안
(1:1) 하나님께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위해 기도를 했음(1:4 - 11)은 물론이고 그 성
벽 재건을 위한 구체적 계획까지 세워 놓았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
다(Fensham).

9 군대 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나와 함께하게 하시기로 내가 강 서편에 있는
총독들에게 이르러 왕의 조서를 전하였더니

ㅇ본절의 내용과 왕의 허락 사이에 어느 정도의 시간적 공백이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
다. 요세푸스는 그 기간을 무려 5년으로 잡는다(Ant. X i 5). 그러나 몇 달 간의 기
도(2:1)와 안타까운 마음의 간청을 했던 느헤미야가 5년씩이나 참고 기다렸으리라고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극히 짧은 기간 내에 페르시아를 떠났다고
결론 내려야 할 것이다.
ㅇ군대 장관과 마병을 나와 함께 하게 - 이 같은 모습은, 페르시아 군대의 호위를
거절했던 에스라의 그것과는 분명하게 대조된다(스 8:22) 그러나 본절에서 느헤미야가
팔레스틴으로의 귀환 길에 폐르시아 군대를 대동한 것은 그가 에스라보다 불신앙적이
어서가 결코 아니었다. 다만 느헤미야의 역할이 에스라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즉, 느
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의 '총독'이라는 자격(5:14)으로 예루살렘에 간다는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율법 교육을 목표로 했던 에스라의 신앙적 차원의 여행과는
표면적으로는 달랐다(스 7:10). 틀림없이 아닥사스다 왕은 (1) 느헤미야가 자신의 '술
관원'이라는 특별한 신분의 소유자이며, (2) 유다 지역의 총독이라는 중대한 직분을
부여받은 자라는 점을 십분 감안하여 호위병들을 딸려 보냈을 것이다(Fensham).

10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케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ㅇ본절과 같은 이방인들의 반응은, 성전 재건 사업에의 참여 요청이 거부된 사건(스
4:1-6)이 있은 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냉전 상태가 매우 심화되었음을 잘 보
여 준다.
ㅇ호론 사람 산발랏 - 애굽 남부 지역인 '엘레판틴'(Elephantine)에서 발굴된 문서에
는 산발랏이 사마리아의 총독으로서 언급되며 또한 그의 두 아들과 함께 언급되고 있
다. 이 문서에 나타나는 두 아들의 이름에 공통적으로 '여호와'를 뜻하는 어미(語尾)
가 달려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유대의 대제사장 가문과 깊은 친교를 맺고 있었다는
점(13:28)에서, 이들은 나름대로 여호와를 섬겼던 자들로 추측된다(Fensham). 그러나
이들의 종교는 지극히 혼합주의적이었기 때문에(스 4:1, 2) 순수한 여호와 신앙을 지
녔던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서 용납될 수 없었다. 한편, 여기서 '호론'은 윗 벨호론과
아랫 벨호론(수 16:3, 5)중 어느 하나를 의미한다(Rawlinson, Myers). 이곳은 당시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차지하고 살던 지역이었다. 그리고 '산발랏'은 바벨론식 이름으로
서, '신(月神)이 생명을 주신다'의 뜻이다.
ㅇ종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 - 여기의 '종'(에베드)은 '신하' 혹은 '부하'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비야'는 '산발랏'의 휘하에 있던 인물이었던 셈이 된다
(6:17, 18). 한편 '암몬 사람'은 반드시 '도비야'가 암몬 지역 출신이었거나 혹은 암
몬 땅에 살고 있었음을 의미치는 않는다. 왜냐하면 '도비야'는 (1) 대제사장과 친밀하
게 연락하는 사이였던 것으로 보아 자신을 여호와를 섬기는 자로 자처하고 있었으리라
짐작되며(13:4), (2) 암몬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선하심'이라는 의미를갖는 유대식 '도
비야'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가능성은 다소 희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만 도
비야의 조상이 '암몬사람'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보는 편이 무난하겠다(Williams
on, Fensham).
ㅇ심히 근심하더라 - 사마리아 총독의 이같은 반응은 (1) 성벽재건의 방해 공작이 수
포로 돌아갈 가능성에 따른 두려움, (2) 예루살렘의 부흥으로 말미암아 사마리아가 유
다에 대한 상대적 우월성을 상실할 가능성에 따른 염려(Schultz) 때문이었다.

11 내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거한지 삼일에

ㅇ거한 지 삼 일에 - 이같이 예루살렘 도착 후 '삼 일'을 쉰 까닭은 (1) 오랜 여행에
따른 심신(心身)의 피로를 풀며, (2) 예루살렘의 정확한 상황을 청취하며, (3) 도모하
려는 사업의 성공을 위해 기도하기 위한 목적 때문일 것이다. 이 같은 모습은 에스라
에게서도 발견된다(스 8:15, 32).

12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화하사 예루살렘을 위하여 행하게 하신 일을 내가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두어 사람과 함께 나갈새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ㅇ내가 말하지 아니하고 - 이것은 느헤미야 자신의 성벽 재건 계획이 '산발랏'과
'도비야'에게 알려질 경우 그 사업이 미처 시작되기도 전에 심각한 난관에 봉착하거나
그 대적들이 보다 효과적으로 대응해 올 것을 염려하여 취해진 조처였다. 느헤미야가
심지어 자신의 동족에게 까지 말하지 아니한 까닭은, 그들의 상당수가 '산발랏' 및
'도비야'와 결혼 등 이모 저모로 인연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Schultz, 6:18; 13:
28).
ㅇ밤에 두어 사람과 함께 나갈새 - 간접적인 보고로만 들은 예루살렘의 형편을 직접
확인파악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느헤미야가 밤에 이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의 이
런 확인 활동이 '산발랏'과 '도비야'와 내통하고 있던 유대인에 의해서 감지되지 않도
록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의 '두어 사람'은 문자적으로 '소수'를 의미하
며, 구체적으로는 느헤미야의 형제 '하나니'등을 가리킬 것이다(1:2).
ㅇ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 오직 '느헤미야'만이 '짐승'을 탄 것
은, 최대한으로 대적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짐승'
(베헤마)은 일반적으로는 '말'과 '나귀' 모두를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은 콧소
리를 심하게 낸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여기서 느헤미야가 탄 '짐승'은 나귀였을 것이
다(Fensham).

13 그 밤에 골짜기 문으로 나가서 용정으로 분문에 이르는 동안에 보니 예루살렘
성벽이 다 무너졌고 성문은 소화되었더라

ㅇ골짜기 문으로 나가서 - 여기의 '골짜기 문'은 예루살롑의 남서쪽에 위치한 '힌놈
의 골짜기'가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한 문(門)이었다. 느헤미야가 하필 이 문을 택한
이유는 그 지경이 가장 인적이 드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ㅇ용정(龍井)으로 분문(糞門)에 이르는 동안 - 여기서 '용정으로'는 문자적으로 '용
정의 앞쪽으로'이다. 이 '용정'은 힌놈의 꼴짜기와 기드론계곡의 합류점에서 남쪽으
로 약 210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욥의 우물'(Jod's well)로 추측된다(William
son). 한편, '분문'은 '골짜기 문'에서 약 450m, 즉 1천 규빗의 거리에 있었다(3:13).
그런데 이곳은 예루살렘의 최남단에 위치했으며, 예루살렘에서 나온 온갖 쓰레기, 심
지어는 성전의 희생 제사 때 나온 짐승의 똥까지 이문을 통해서 힌놈의 골짜기에 버려
졌었다(롑 7:31, 32).
ㅇ성벽이 무너졌고, 성문은 소화되었더라 - 이같이 느헤미야가 직접 확인한 상황은
'하나니'의 보고 내용과 동일하다(1:3).

14 앞으로 행하여 샘문과 왕의 못에 이르러는 탄 짐승이 지나갈 곳이 없는지라

ㅇ앞으로 행하여 - 우측, 즉 동쪽으로 기드론 골짜기를 내려다 보면서 북쪽으로 나아
가는 것을 가리킨다.
ㅇ샘문과 왕의 못에 이르러는 - '샘문'은 '분문'에서 북쪽으로 대략 120m 정도에 위
치했으며 그 바로 앞에는 '실로암못'이 있었다(서론 도표, '성벽 재건의 모형도' 참
조). 한편 '왕의 못'은 3:15에서는 '셀라 못'으로 지칭되고 있는 '실로암 못'이다.
ㅇ탄 짐승이 지나갈 곳이 없는지라 - 이는 그곳이 무너져내린 성벽의 잔해및 온갖 쓰
레기 등으로 메워져 있었음을 시사한다. 오늘날의 고고학자들은 발굴 작업을 통하여
본절의 이 기록이 실제 사실이었음을 증명하였다.

15 그 밤에 시내를 좇아 올라가서 성벽을 살펴 본 후에 돌이켜 골짜기 문으로
들어와서 돌아 왔으나

ㅇ시내를 쫓아 올라가서 - 느헤미야가 나귀에서 내려서 걸어 올라간 것을 가리킨다.
즉, 그가 걸음을 걸을 수 있는 기드론 시내 쪽으로 내려간 후 그 시내를 따라서 북쪽
으로 향했음을 가리킨다.
ㅇ골짜기 문으로 들어와서 돌아왔으나 - 이것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북쪽으로 가
지않았음을 시사해준다. 어떤 학자들은 본절에는 생략되었으나 느헤미야가 성벽 탐사
를 계속 진행하여 끝까지 다 돌았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성벽의 북쪽과 북서쪽은
그다지 심각하게 훼손되지 않았기 때문에 본절에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느헤미야가 성벽의 북동쪽 모퉁이까지 살펴봄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고 여겼기 때문에 중도에서 돌아온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무난하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북쪽 성벽 지역에는 사람이 많이 살고 있어서 느헤미야 일행이 눈에
띌 가능성이 컸으리라는 추측 때문이다.

16 방백들은 내가 어디 갔었으며 무엇을 하였는지 알지 못하였고 나도 그 일을 유다
사람들에게나 제사장들에게나 귀인들에게나 방백들에게나 그 외에 일하는 자들에게
고하지 아니하다가

ㅇ느헤미야의 조사 활동이 이처럼 비밀리에 진행 됐던 까닭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벽 재건 계획이 누설될 가능성이 매우 큰 때문이었다(12절 주석 참조).
ㅇ방백들(세가님) - 광범위하게 사용된 단어였기 때문에 한마디로 그
의미를 정의하기 곤란하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것을 회중들에 의해서 선출된
백성의 대표들로 본다(Widengren, Fensham, Rawlinson). 그런데 이 단어는 스9:2
에서는 '두목'이라 번역되었다. 이것은 또 다른 의미의 '방백'(사림)보
다는 한 계급 낮은 신분으로 묘사된다(스 9:2). 한편, 이들의 역할에 대해서는 구체적
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ㅇ유다사람 제사장 귀인 방백 - 이들은 당시 유다공동체를 구성했던 대표적인 네
계층으로 이해될수 있을 듯하다. 여기의 '유다 사람'은 반드시 유다 지파 사람만을 의
미치 않는다.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유다 지파 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이 인구수에
있어서 가장 컸던 까닭에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이처럼 표현했을 뿐이다. 그리고 '제
사장'은 포로 후 시대라는 그 당시 상황에서는, 행정 및 경제의 측면에서 상당한 영향
력을 행사하고 있던 신분이었다(Williamson). 그러나 여기서는 이스라엘 공동체 중 종
교적 세력을 대표하는 신분으로 암시되는 듯하다. 한편 '귀인'(호림)은
그 문자적 의미로는 '자유로운 자'이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신분이었으며 또
한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를 알수 없다. 다만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어느정도의 권세
를 갖고 있던 신분 정도로 추측될 뿐이다(Fensham). 또한 '방백'은 본절 초두의 '방
백'과 동일하다. 이들은 '제사장'과는 달리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행정 분야를 관장
하던 신분이었던것 같다.
ㅇ그 외에 일하는 자들 - 성벽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한자들을 가리킨다(Pulpit
Commentary).

17 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바라 예루살렘이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
하고

ㅇ본절과 같은 느헤미야의 발언(發言)이 암행 탐사가 있었던 때로부터 얼마의 기간이
경과한 후에 행해졌는지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팔레스틴으로
돌아온 후삼일 간 숙고할 기회를 가졌었고(11절), 직접적인 자신의 조사 활동을 통해
서 모든 정황을 파악했을 것이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암행탐사 그 다음 날에 본
절과 같은 발언이 있었을것이 분명하다.
ㅇ우리의 당한곤경 - 여기서 '우리'는, 귀환한지 3일밖에 되지 않은 느헤미야가 본토
의 유대인들과 깊은 연대의식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Fensham). 한편, '곤경'
(하라아)은 1:3에서는 '환난'으로 번역된 단어로서, 성벽을 갖고 있지 못했던
예루살렘 거민들이 이방인들의 상습적인 노략으로 인해 처하게 된 어려운 상황을 가리
킨다(1:3).
ㅇ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수치를 받지 말자 - 유다의 다른 주요 성읍들은 나름대로
의 방어용 성벽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Fensham). 그러나 오직 유다의 심장부이
자, 신앙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만 방어용 성벽이 없어 노략을 계속 당한다는 사실은
그 도시의 주민 뿐 아니라 다른 곳에 사는 백성들에까지 수치일 수밖에 없었다.

18 또 저희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고하였더니 저희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ㅇ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성벽 재건 사업에
참여토륵 한 신앙적 원동력이 되었다(스 7:6).
ㅇ왕이 내게 이른 말씀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성벽 재건 사업에 참여케 한 정
치적 원동력이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벽 재건을 주저하고 있었던 현실상의
이유는 (1) '산발랏'과 같은 사마리아 관리의 방해(스 4:7 - 16), (2) 사마리아 관리
의 참소에 따른 아닥사스다 왕의 성벽재건 중지령(中止令 )등의 정치적인 것들이었
다.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성벽 재건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느헤미야에 대해서 아닥사스다 왕이 호의를 베풀었던 사실은 상당한 용기를 불어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2-9절).
ㅇ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 이는 문자적으로 '선한 일을 위하여 자신들
의 손을 스스로 강하게 했다'의 의미이다(삼하 2:7). 본절은 성벽 재건 사업이 미미
하기는 하지만 이미 시작되었음을 암시해준다(JB).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실
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여러 차례에 걸쳐 성벽 재건을 시도했었다(스 4:12).

19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비웃어 가로되 너희의 하는 일이 무엇이냐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 하기로

ㅇ산발랏 도비야 - 이들에 대해서는 10절 주석을 참조하라.
ㅇ아라비아 사람 게셈 - '아라비아 사람'은 앗수르 시대부터 페르시아 시대에 이르기
까지 요단 동부 지역의 지배 계급이었다(본 단락 주제 강해, '아라비아 사람' 참조).
한편 '게셈'이라는 이름은 애굽 땅에서 발견된 B. C. 5세기말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은 그릇에 그 아들 '카이누'(Qaynu)와 함께 여신 '한-일라트'(Han-'ilat)에게 헌신한
자로서 새겨져 있다. 뿐만 아니라 아람어 비문에서는 '게달의 왕'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사실을 통해서 볼 때, '아라비아 사람 게셈'은 요단 동쪽및 남쪽
지역을 다스리던 자였던 것 같다(Rawlinson). 이처럼 '게셈'이 '도바야'와는 달리 '산
발랏'의 휘하에 있었던 한 관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6:2에서 이 '게셈'이 사마리아의
총독 '산발랏'과 함께 느헤미야에게 대면(對面) 요청을 했다는 점을 통해서도 자명해
진다.
업신여기고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 하기로 - 대적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벽 재
건 시도를 중단시키기 위해 사용한 두 가지 무기이다. 즉, 하나는 '조롱'이며 또 하나
는 '협박'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업신여기고'(얄라구)는 '조롱하다'
등의 뜻이 있는 '라아그'의 사역형으로서, 마땅히 귀중히 여겨져야 할 어떤
대상을 오히려 우습게 여기는 태도를 가리킨다(대하 30:10; 22:7; 잠 17:5). 한편, '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라는 질문은, 일찍이 아닥사스다 왕이 사마리아 관원들의 참소
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벽 복구사업을 중지시켰던 역사적 사실을 그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그러한 협박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벽
재건사업은 중지령을 내렸던 아닥사스다왕의 새로운 허락과 명령에 따라 시행되는 것
이기 때문이다.

20 내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 그의 종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명록도
없다 하였느니라

본절에서 느헤미야는 산발랏 등의 적대적 태도에도 블구하고 자신이 아닥사스다 왕
으로부터 부여받았던 사항(7-9절)들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느헤미야의 이 같은 태
도는 인간의 어떠한 훼방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중단시킬 수 없다는 강한 확
신을 반영한다. 아울러 산발랏 일당이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느헤미야에게 허락된 사
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을, 느헤미야가 이미 간과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
다면 산발랏 일당은 도리어 왕의 명령을 무시하면서까지 성벽 재건을 방해하고자 기
를 썼던 셈이 된다.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 - 이 같은 느헤미야의 확신에 찬 응답은
(1)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궁극적으로 보호하고 형통케 하실 것이라는 굳건한 믿
음과 (2)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었던 실제적 체험(1:11)에 근거하였다.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명록(名錄)도 없다 - 이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다의
문제에 대해서 간섭할 하등의 명분이나 이유가 없음을 강조하는 말이다(스 4:2,3). 여
기서 '기업'(헬레크)은 이스라엘의 땅 분배와 관련해서 사용된 법정적 용어
이다. 그런데 이용어는 자신의 반역 의사를 표명할 때도 사용되었다는 점에서(삼하
20:1; 왕상 12:16) 볼 때, 여기의 '기업도 없고'는 산발랏 등이 이스라엘 백성의 일에
절대적으로 참여할수 없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문구라고 할 수 있다(Brockington). 한
편, '권리'(체다카)는 행정 구역으로서의 유다에 대해 어떤 영향력을 행
사할 수있는 법적 권리를 가리킨다(Williamson, Fensham). 앞의 '기업'이 시민권의 문
제와 관련 있다면, 이것은 행정권과 관련이 있다고 할수 있을것이다(Williamson). 마
지막으로 '명록'(지카론)은 종교적 의식에의 참여권을 가리키는 듯하
다(Fensham, Williamson).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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