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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느헤미야

[스크랩] 에스라-느헤미야(3): 느헤미야 (1-13장)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7. 20:57

에스라-느헤미야(3): 느헤미야 (1-13장)


8. 예루살렘 성벽 재건(느 1-7장)

 8-1. 제2 출애굽의 세 번째 물결

  스룹바벨과 에스라의 인도로 귀환한 1,2차 포로 귀환민들은 성전을 재건하고, 거룩한 공동체를 재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하나님의 집의 재건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예루살렘 성은 훼파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느헤미야의 관심은 예루살렘 시 자체에 있었다. 느헤미야는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1:3)"는 말을 들었다. 이에 그는 아닥사스다 왕에게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다(2:3,5)"고 이야기 한다. 이에 그는 예루살렘 시와 특히 성벽을 재건하라는 허락과 함께, 그에 필요한 물자를 왕이 공급해주겠다는 약속을 받는다(2:7-). 그리고 느헤미야는 이 일을 하기 위해서 포로민들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온다. 결국 느헤미야의 인도 아래 귀환한 포로민들은 제 2의 출애굽의 마지막 세 번째 물결을 형성하면서, 하나님의 집의 최종 건설 과정인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제 2의 출애굽

귀환

재건

첫 번째 물결

스룹바벨의 인도하의 귀환(스 1-2장)

성전 재건(스 3-6장)

 

60년간의 공백

건너 뜀: "이 일 후에"

두 번째 물결

에스라 인도하의 귀환(스 7-8장)

공동체 재건(스-9-10장)

세 번째 물결

느헤미야의 인도하의 귀환(느 1-2장)

성벽재건(느 3-7장)


 8-2. 예루살렘 성벽 재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동료들에게 한 호소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 하고(느 2:17)...." 여호와께서 애굽의 수치를 굴러내셨던 것처럼(수 5:9), 느헤미야는 열방의 수치를 이스라엘에서 굴려내고 싶었다. 그는 유다 공동체 자체의 상황, 특히 흩어진 여호와의 백성의 수도로서 예루살렘 시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도시, 그들의 왕의 옛 도시, "하늘 대왕의 도시"가 재건될 때에 전 세계의 유다인들이 다시 고개를 쳐들고 다닐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느헤미야에게 있어서 예루살렘 시는 단순히 유다인들의 국가적 정체와 긍지의 도시가 아니었다. 그것은 "거룩한 성"이었다(11:1,18).

  에스케나지가 지적한대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성전 건물의 확장"(an extension of building the temple)이었다. 예루살렘 성벽은 성전과 거룩한 하나님의 자손과 함께 하나님의 집을 형성하는 3대 구성 요소였다. 따라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 건설에 그토록 큰 에너지를 소비한 것이다. 예루살렘 시 성벽이 하나님의 성전 건물의 확장이라는 개념은 느헤미야 1-13장의 여러 특이한 요소들을 잘 설명해 준다. 성벽을 건설하면서 먼저 성별의 과정(느 3;1)을 밟은 것은 성벽을 성전의 일부로 보아야만 설명이 가능하다.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느 3:1)...."

  대제사장이 성벽 건축을 성별화 한 것은 이 작업이 종교적 성격의 일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성벽을 건축한 후에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인들을 성문 문지기로 삼은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느 7;1). 예루살렘 시 전체가 전에 성전을 지키던 자들에 의해 지켜지게 된 것이다. 예루살렘을 "거룩한 성"이라고 부른 것(느 11:1)은 바로 성벽이 완공된 후임을 주목해야 한다. 결국 예루살렘 성벽이 완공되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집이 완공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성전을 재건할 때에 반대에 직면했던 것처럼, 느헤미야도 사마리아인들을 비롯한 인근 백성들에게 성전 건설 참여의 기회를 주지 않자, 이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느헤미야는 천신만고 끝에 52일간의 짧은 기간 안에 성벽을 완공할 수 있었다.


9. 지속적 회복과 갱신(느 8-13장)

 9-1. 언약 갱신(느 8-10장)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고 하나님의 집을 완공한 공동체는 목적이 이루어지게 되자(스 2장-느 7장), 모든 백성이 수문 앞 광장에 모였다. 에스라-느헤미야서에서 "모든 백성이 일제히" 모인 장면은 (느 8장)에서 처음 나타난다. 그들이 모인 것은 백성들이 율법과 하나님의 집에 다시 헌신하기 위해서였다. 백성들은 에스라에게 율법서(토라)를 가져올 것을 요청하였으며, 이를 듣고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하였다(느 8-9장). 특별히 율법의 말씀대로 순종하기로 언약을 맺고 인을 쳤으며, 하나님의 집을 버리지 않기로 맹세하였다(느 10장).


 9-2. 율법의 중심성

  하나님의 집 안에 거하게 될 거룩한 자손들은 율법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가 되어야 했다. 율법서가 이 공동체의 삶과 예배의 중심적인 위치에 놓인 모습은 (느 8-10장)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 단락은 크게 세 장면으로 나누어진다. 각 장면은 크게 다섯 단계, 즉 시간 언급, 모임, 율법과의 만남, 적용, 반응의 순서로 진행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장면1
(7:73(하)-8:12)

장면2
(8:13-18)

장면3
(9:1-10:39)

A. 시간언급

7:73(하)-8:1(상)

A' 8:13(상)

A'' 9:1(상)

B. 모임

8:1(하)-2

B' 8:13(상)

B'' 9:1(하)-2

C. 율법과의 만남

8:3-6

C' 8:13(상)

C'' 9:3

D. 적용

8:7-11

D' 8:14-15

D'' 9:4-37

E. 반응

8:12

E' 8:16-18

E'' 9:38-10:39

  특별히 백성들이 매번 모일 때마다 율법을 낭독하고 삶에 적용하는 것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중심으로 내러티브가 전개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일 때마다 율법을 낭독하고, 율법에 반응을 보였다는 점은 에배가 토라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보여주고 있다. 에스라는 떠나도 토라는 남는 것이다. 특히 (느 8-10장)에서는 세 번의 토라 낭독의 결과가 율법대로 살기로 언약하고, 이를 문서로 맹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 공동체는 문서로 시작해서 문서로 끝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9-3. 율법 낭독의 예배적 의미

  에스라가 율법책을 읽은 것은 (느 8장)에 가서야 나타난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성경 본문을 읽는데 익숙한 이들에게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역사적으로 읽으면 왜 율법을 가르치고 그를 시행하기 위해 온 에스라가 13년 동안 가만히 있다가, 느헤미야가 와서 성벽을 쌓는 사역을 마친 후에야 율법을 가르치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많은 주석가들은 (느 8-10장)을 에스라의 개혁의 지속으로 간주하고, 에스라 8장이나 10장 뒤에 놓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것은 에스라-느헤미야서의 정경 본문의 최종 형태와 느헤미야와 8장의 정경적 기능을 무시한 것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왜 에스라-느헤미야서 기자가 에스라의 율법 낭독을 느헤이야 8장에 가서야 언급하고 있는 지를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에스라가 율법을 읽어준 것은 이스라엘을 개혁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율법을 읽어준 것은 이미 개혁된 백성들에게 언약에 대한 헌신을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흔히 우리는 에스라-느헤미야서에서 율법을 낭독한 것이 죄를 고백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본문을 읽어보면 에스라와 레위인들은 백성들이 죄를 깨닫고 울 때에 그들에게 슬픔을 떨쳐버리고 기뻐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오히려 느헤미야 8장의 율법 낭독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예배 의식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율법 낭독을 기록한 (느 8장)을 (스 8장이나 10장)의 뒤로 옮기려는 시도는 옳지 않다. 에스라-느헤미야서는 율법을 거룩한 공동체가 되기 위한 요소가 아니라, 이미 회복되고 용서받은 공동체를 위해 주어진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스라-느헤미야서 기자는 율법 낭독을 이미 회복된 공동체의 예배 예식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9-4. 회복된 공동체의 명단(느 11-12장)

  이미 개혁된 공동체, 즉 언약의 갱신을 통해서 율법을 준수하고 하나님의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한 공동체는 이제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들어와 살 수 있게 되었다(느 11:1). 따라서 이제 에스라-느헤미야서 기자는 이 거룩한 성에 거하게 된 공동체 멤버들의 명단을 기록하고 있다. (느 11장)에는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된 이들을 다루고 있다. 예루살렘이 진정한 의미에서 "거룩한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단지 도시 성벽을 재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할 수 없었다. 이는 이 도시가 실제로 살아 있는 진짜 성벽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예루살렘 성에서 살 자격이 있는가? 우선은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 안에 살아야 했으며, 제비를 뽑아 10명 중에 한 명이 예루살렘 성에 거할 수 있었다. 특별히 여기에서 강조된 것은 자원함이다. "무릇 예루살렘에 거하기를 자원하는 자는 백성들이 그들을 위해 복을 빌었느니라(느 11:2)." 사실상 예루살렘 성 안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성벽보다 더 중요한 가능을 가지고 있다. 예루살렘에 설기를 "자원하는 자"라는 말은 제물을 드릴 때에 사용하는 말이다. 이는 그들 자체가 하나님 앞에 제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이방인과는 달리 완전히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헌신하며 살아가야 했었다(느 13:4-31). 1/10을 자원해서 예루살렘에 거하게 한 것은 거룩한 성이요, 하나님의 집인 예루살렘을 위해 백성의 십일조를 드린 것과 같았다. 이제 평신도들의 거룩성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거룩성 못지 않게 중요한 문제가 되게 되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일부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이 예배드리는 처소로서의 교회 건물 건축에 지나친 관심을 갖는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이미 구약 안에서도 건물 자체보다 그 안에 거하는 자들의 삶이 하나님의 집을 형성하는데 더 중요한 요소로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학개, 말라기 선지자를 들먹거리면서 성전 건축에만 열을 올리는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의 모습은 신약적이지 않으며, 또한 구약의 원리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 처소인 건물이 하나님의 집을 형성하는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편 (느 12장)에서는 회복된 공동체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명단(12;1-26)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이 명단이 에스라 2;1로 거슬러 올라가서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1차 귀환부터,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2-3차 귀환까지 바벨론에서 올라온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함께 묶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보면 이 명단은ㄴ 책 전체에 짜여 들어간 천 조직의 느슨한 끝 부분을 묶는 종결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날로 시작해서(느 12;1 참조, 스 2:1), "방백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서기관 에스라 때'로 끝이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느 12:26).


 9-5. 하나님의 집 봉헌(느 12:27-13:3)

  이제 하나님의 집을 봉헌할 모든 준비가 끝났다. 성전이 완공되고 그 집을 채울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왔다. 예루살렘 성벽이 완공되었으며, 백성들이 하나님과 다시 언약을 갱신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에 헌신하기로 작정했으며, 그 안에 살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결정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의 집을 봉헌하는 일뿐이었다. 그러므로 (느 12:27-13:3)은 온 이스라엘 백성이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집을 봉헌하는 의식을 치르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우선 각처에서 레위인들과 노래하는 자들을 불러 모으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물론, 백성과 성문과 성을 정결케 하였다(12:30). 이로써 포로후 공동체는 다시 거룩한 백성이 되게 되었다. 이 백성들이 두 떼로 행렬을 이루고 예루살렘 성을 순행하며, 기쁜 축제의 시간을 가졌다. 그 날에 봉헌식은 이제 하나님의 집이 온전히 세워졌음을 드러내는 "그랜드 오프닝"이었기에 장관이었다.

  "이 날에 무리가 크게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 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느 12:43)."


 9-6. 코다: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느 13:4-31)

  언뜻 보면 더 이상 종말론적 소망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회복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이제 거룩한 자손들이 거룩한 성에 거하며, 율법과 하나님의 집에 충성하기로 맹세했고, 다함께 하나님의 집을 봉헌했다. 그러나 에스라-느헤미야서의 마지막 결론부(느 13장)로 들어가면 다소 낙담적인 전망이 등장한다. 레위인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집을 버리고 도망가고(13:10-11), 사람들이 안식일에 일을 하고 장사를 하면서 안식일을 범하고(13:15-16),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반 백성은 물론 제사장마저도 이방인들과 통혼하는 일을 서슴치 않는 모습(13:23-29)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실패의 암시로 끝나는 에스라-느헤미야서는 성공의 스토리인가? 아니면 실패의 스토리인가? 도대체 성공적인 하나님의 집의 건축은 이야기를 실패의 글로 마무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에서 에스라-느헤이야 시대의 포로 후기 공동체는 신정 정치의 완벽한 실현이 아니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결론부에 가서 교정이 필요한 죄가 남아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 책을 떠나면서 "이미, 아직 아니"(now, and not yet)의 느낌을 갖게 한다. 우리는 "이상적 공동체"를 한번 문제가 해결되면 영원히 문제가 없는 그러한 "동화에나 나오는 공동체"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항상 매 시대마다 새롭게 변화해야 한다. 결국 에스라-느헤미야서 기자는 의도적으로 이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비록 낙담적이긴 하지만, 공동체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이방인 결혼 문제로 결론을 맺으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에서 회복된 공동체는 이미 징계받은 백성이었으나, 계속적인 징계와 개혁을 필요로 하는 백성이었다.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원리는 단지 종교 개혁자들의 모토만은 아니었음을 우리는 여기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솔로몬에 대한 암시(느 13:26-27)는 결국 불순종할 때에 이스라엘의 미래가 어떠할 지를 예기하고 있다. 포로 이전의 공동체에서 저질렀던 죄가 이제는 포로 이후의 공동체 앞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에스라-느헤미야서는 과연 포로 후 공동체가 여호와의 말씀에 계속적으로 순종할 것인가? 에 대해서 대답을 제시하지 않은 채 종결되고 있다. 이는 신약 시대로 나아가면서 포로 후 공동체가 이 점에서 성공하고 있는 지에 대해 스스로 자문할 수 있는 큰 질문을 하나 던진 것이다.


10. 신학적 의미

 10-1. 재건은 하나님의 사역

  에스라-느헤미야서는 여러 가지 신학적 주제들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 중에서 중요한 몇 가지 주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첫째로 에스라-느헤미야서는 하나님의 집을 재건한 일이 역사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고레스가 성전 재건을 허락한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으며(스 1:1),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전 재건의 역사를 완수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다(스 5:5). 에스라와 그 일행이 예루살렘에 올 수 있도록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으며(스 7:27), 길에서 그들을 보호하신 분도 하나님이셨다(스 8:22). 느헤미야를 총독으로 임명하신 분도 하나님이셨으며(느 2:8),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는 모든 일을 도우신 분도 하나님이셨다(느 4:14,20).

  둘째,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집을 재건한 것은 완벽하였다. 이스라엘의 재건, 성전 재건, 상번제의 재건, 레위인들의 찬양과 연중 절기들의 회복, 율법을 공동체의 삶의 규례로 회복함, 예루살렘 시의 재건, 제사장 제도의 회복, 백성들의 성결, 계역 갱신 등의 역사는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삶과 예배가 모세의 율법과 다윗의 규례대로 지켜졌다. 이렇게 해서 포로 후에 여호와의 집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세워지게 된 것이다.

  셋째, 여호와께서 세상 권력들을 이용해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신 것처럼, 그의 백성을 재건하실 때에도 세상 권력들을 이용하신다는 점을 겅조한다. 이것은 고레스의 칙령(스 1,6장), 아닥사스다가 에스라에게 보낸 편지(스 7:11-27), 느헤미야의 임무에 대한 상세한 기록(느 1-6장)에서 잘 나타난다. 이방 황제들의 행동과 권위가 여호와의 백성의 회복의 과정에 직접 간접으로 연루되어 있다. 비록 이스라엘의 재건을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그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심으로 여호와는 열방의 왕이시며 역사의 주인이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10-2. 백성 전체에 대한 관심

  또한 에스라-느헤미야서는 일반 백성을 하나님 나라의 핵심 성분으로 강조하고 있다. naksg은 명단들, 귀환자 명단을 반복함으로써, 에스라-느헤미야서서는 지도자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많은 백성의 행동과 참여를 통해 역사가 흘러간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에스라-느헤미야서에 기록된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오랜 시간에 걸친 역사, 많은 시작들과 멈춤들, 다른 이의 사역 위에 이어지는 사역, 한꺼번에 일을 해치우려는 이루어진" 산문적 역사로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에스라-느헤미야서에 있어서 인간 주인공은 이스라엘 백성이다. 비록 무명의 백성들이라 해도 그들이야말로 기억될 필요가 있는 자들인 것이다. 유명하지 않은 이들, 수많은 백성들에 대한 새로운 강조는 에스라-느헤미야서의 독특한 관점이다.


 10-3. 하나님의 집의 확대

  에스라-느헤미야서는 하나님의 집을 성전에서 거룩한 자손들과 예루살렘 시로 확대하고 있다. 에스라-느헤미야서에서 하나님의 집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고레스는 귀환의 방향과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가서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집을 지으라!" 에스라-느헤미야서는 하나님의 집은 단지 성전뿐 아니라, 예루살렘 도시와 그 안에 사는 거룩한 자손 전체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개념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수용되고 발전되어졌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정경적 의미에서 다시 설명할 것이다.


 10-4. 본문의 권위

  에스라-느헤미야서가 놀랄 정도로 많은 문서들에 의존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에스라-느헤미야서가 기록된 문서들을 크게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집이 건축되는 과정에 있어서 권위 있는 문서들이 큰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우선 하나님의 성전이 건축되는 데 있어서는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고레스의 칙령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편 포로 귀환민들이 거룩한 자손으로 회복되는 데 잇어서는 모세의 율법과(스 7:6,10,11,12),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라고 명하는 아닥사스다의 조서(스 7:14)가 중요한 기능을 감당한다. 특히 거룩한 공동체가 지속적으로 개혁과 갱신을 하는 데 있어서는 성문화된 율법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느 8-13장 참조). 공동체는 율법을 읽고 문서로 공동의 반응을 나타냈다(느 10장). 느헤미야의 마지막 개혁(느 13:4-31)은 공동체가 문서로 맹세한 것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에스라-느헤미야서는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모두 기록된 문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같은 문서화의 원동력은 페르시아 문맥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기원이 무엇이든간에 에스라-느헤미야서에서 쓰여진 글에 대한 강조는 "책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로 변화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거룩한 자손들이 하나님의 집을 중심으로 율법을 매일의 삶 가운데 적용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을 맛보는 신학적 비젼을 보여주고 있다.


11. 정경적 의미

 11-1. 하나님의 집

  에스라-느헤미야서의 하나님의 집의 개념은 신약 시대의 "하나님 나라와 성전"의 이해로 나아가는 중간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신약 학자들은 예수의 선포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의 "집"으로 그려져 있다고 주장한다. 김세윤 박사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하나님은 보통 "아버지"로 지칭되고, 하나님 나라를 "대문"(마 7:13, 눅 13:24), "문"(눅 13:24 이하), "열쇠"(마 16:19, 23:13, 눅 11:52) 등이 사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함께 쓰이는 동사는 "들어가다"이며, "잔치"(식탁의 교제)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김세윤 박사는 이러한 점에 근거하여 예수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집에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잔치를 배설하고, 그이 백성은 자녀가 되어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서 잔치 상에 둘러 앉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김세윤 박사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하나니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왕좌가 놓인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과 잔치의 교제를 나눈 성전" 연결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예수님으 하나님 나라를 성전으로 인식하고, 그 성전을 구체적으로 자신이 세울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로 보았다. 이러한 사실은 "성전과 백성과 예루살렘 성벽"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집의 재건을 하나님 나라의 회복으로 본 에스라-느헤미야서의 메시지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1-2. "이미"와 "아직 아니"의 종말론

  포로기는 황폐한 시대였던 동시에 회복의 시대였다. 이미(already) 포로기는 회복의 영에 의해 영적인 변형이 일어난 시기였다. 따라서 반 게메렌은 "분명히 새 언약의 시대는 이미 포로 후기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고토로 돌리셨으며, 스룹바벨을 통해 성전을 복구하고, 여호수아가 제사장이 되어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으며, 율법을 포로 후 공동체의 삶의 규례로 재확립하고, 성벽을 재건하신 일을 통해서  확실히 알 수 있다. 물론 이것들은 회복의 표징들로서는 작을지 몰라도 무시될 수 없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종말(에스카톤)의 현재적 표징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로 후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신이 이미 그들 안에 역사를 시작하셨다고 강하게 선언한 것도 이에 근거한 것이었다.

  학개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학 2:5)." 학개는 과거 출애굽 때에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을 한 마디로 "나의 신"이란 말로 요약하고 있다. 이 신이 포로 후 공동체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더 이상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포로 전 선지자들이 여호와의 신의 역사를 미래로 돌린 것과 비교해보면 특기할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건축을 감당한 것은 여호와의 신의 강한 감동때문이었다. 이는 다음 구절이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바 모든 백성의 마음을 흥분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역사를 하였으니(학 1:14)...." 지도자들과 일반 백성의 마음은 이들의 영적인 변화와 성령의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을 바벨론 포로라는 형벌로 다스리고 정결케 한 후에, 다시 회복시키시며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게 하는 일은 결코 인간의 힘으로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는 나의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죄느니라(슥 4:6)." 스가랴는 회복의 사건이 인간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신으로만 가능하다고 선포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실현된 종말론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남은 자들은 새 시대의 입구에 서서 회복을 미리 맛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보다 크게 성취될 때를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포로 후 시기가 회복의 시기요 새 언약의 시대의 시작인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은 완전한 성취의 시기가 이르지는 않았다(not yet). 유다인들은 일부 약속들의 실현을 체험하기는 했지만, 그 약속이 온전한 성취는 여전히 미래의 일이었다. 포로 후 공동체는 여전히 이방 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느헤미야의 기도에는 "땅 안에서의 자유라는 하나님의 약속과 이방 왕에게 복종해야 하는 현재의 상황 사이에 참을 수 없는 모순"이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느 9:34-37). 그러나 포로 후 공동체는 아직 이방 왕에게 복종해야 하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소망을 가지고 현재의 상황을 신실하게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신앙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느헤미야는 단번의 회개와 개혁으로 모든 것이 갑자기 변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우리가 이 모든 일을 인하여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을 치나이다 하였느니라(느 9:38)." 미래의 소망을 가지고 현재의 삶을 신실하게 수용하는 모습을 이보다 더 분명히 보여주는 구절은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과거의 구원 행위와 하나님의 미래의 구원 행위 사이에서, 즉 현재와 미래 실제가 주는 긴장 가운데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예수의 재림 시기, 성취의 시대를 고대하였던 신약 시대 신자들(살전 1:10)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점에서 구약은 율법 시대, 신약은 은혜 시대라고 구분하는 것이 반드시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포로 후기 공동체는 하나님의 임재가 주는 축복을 어느 정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임재의 최종적인 완성을 앞당길 책임을 지고 있었다. 온전한 의미에서 회복의 새 공동체는 아직 임하지 않았다. 따라서 신약의 신자들 역시 포로 후기 공동체의 이스라엘인들과 유사하게, 성취와 약속의 긴장 가운데서 최종적인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면서 믿음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구약은 예언이고 신약은 성취라는 도식 하에서 구약의 하나님 나라 도래의 약속은 오직 신약 성경에서만 성취되었다고 보는 것은 큰 오류이다. 왜냐하면 구약과 신약이 모두 다 하나님 나라의 침투와, 하나님의 현재적-미래적 사역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와 미래가 중첩되어 미래가 현재 위에 그림자를 던져주는 이중 구조는 구약과 신약에 모두 적용된다. 물론 구약과 신약은 항상 연속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구약과 신약 사이에는 근원적인 불연속적인 요소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연속성은 연속성의 흐름 안에서, 하나님의 점진적인 계획이 실행되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구속사의 진전에 따라 점점 더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것을 더 충분히 향유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포로 후 공동체가 향유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포로 전기 백성들보다 더 많았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현재의 약속 성취는 포로후 공동체 시대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고, 하나님 아버지의 부요함을 상속받게 하고, 자기 몸으로 새로운 성전을 삼으신 것은 에스라-느헤미야서에서는 상상 할 수 없는 큰 은혜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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