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6): 분열왕국 이야기(3)(18-25장) | ||||||||||||||||||||||||||||||||||||||||||||||||||||||||||||||||||||||||||||||||||||||||||||||||||||||||
아하스 이후 남방 유다는 이스라엘처럼 즉시 멸망하지 않았다. 그러면 왜 유다는 이스라엘보다 더 오래 유지될 수 있었는가? (왕하 18-25장)는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 유다 왕국이 단독으로 존재했던 약 150년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 기간에 유다는 몇 차례 대대적인 종교 개혁이 일어났다. 유다는 이스라엘처럼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 종교개혁이 필요했다. 남유다가 이스라엘처럼 멸망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그들은 다윗 시대와 같은 순결을 회복해야만 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 남 유다의 종교 개혁은 히스기야 로부터 시작되었다.
1.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주전 715-686년) * 종교 개혁 운동(대하 29:3-31:21) * 앗수르 왕 사르곤과 히스기야(사 20:1-6) * 앗수르 왕 산헤립과 히스기야(대하 32:1-21, 왕하 18:13-19:37, 사 36-37장) 히스기야의 반 앗시리아 정책을 저지하기 위해서 앗시리아의 산헤립이 히스기야 14년(주전 701년)에 유다를 공격했다. 산헤립의 문서에 따르면 이 때에 앗수르 군대는 46곳의 유다성읍들을 항복시킨 후에 예루살렘 성을 포위했다. 당시 산헤립이 습격한 라기스에 대한 발굴 조사가 있었는데, 1,500구의 유해들이 함께 묻힌 구덩이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러한 일은 당시 산헤립의 군대가 얼마나 히스기야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당시에 히스기야의 처지는 절망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히스기야는 라기스를 포위하고 있던 산헤립에게 사신을 보내 항복의사를 밝혔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시는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18:14)" 그러자 산헤립은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은 300달란트와 금 30달란트의 공물을 요구했다.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곡간에 있는 은"을 모두 내주었으며, 그것도 모자라서 "여호와의 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까지 벗겨서 앗시리아 왕에게 주었다(18:15-16). 히스기야는 이렇게 뇌물로 앗시리아의 위협을 극복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앗시리아는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산헤립은 반역한 히스기야 왕의 항복을 받고 그를 징계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을 포위했다(18:1). 그리고 나서 군대장관 랍사개는 장문의 연설을 통해 유다 사람들에게 항복을 권유했다(18;19-35). 히스기야는 뇌물로 앗수르 왕을 돌려보려고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열왕기 기자는 히스기야가 앗수르와 타협하려고 한 일이 무모했음을 강조했다. 히스기야는 처음에 "앗수르 왕을 배척하기로"마음을 먹었지만, 위험에 처하게 되자 앗시리아 왕을 매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오히려 예루살렘 성 포위라는 최악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히스기야는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의지하기로 결심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그에게 보내어 구원을 약속해 주셨다.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해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19:34)." 그리고 하나님은 사자를 보내어 앗시리아 군대 185,000명을 하루 밤만에 모두 죽여버리셨다. 이 일로 인해 산헤립은 전멸을 당하고 수치스럽게 고국으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고국으로 돌아간 후에 그의 신복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하나님은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 그와 그의 백성을 구해 주셨다. * 히스기야의 병과 바벨론 왕의 사신(대하 32:22-31, 왕하 20장, 사 38-39장) 히스기야가 앗시리아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는 소식을 들은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은 위문의 사신을 보냈다. 바벨론은 유다와 동맹을 맺고, 그동안 시달려 온 앗수르를 함께 공격하기를 원했다. 그때에 히스기야는 교만해져서 그 사신들에게 궁전의 보물들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부요함을 자랑했다(왕하 20:13). 그때에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어 그를 책망하셨다. 그리고 이사야는 장차 그가 바벨론 사신들에게 보여준 모든 보물들이 장차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유다가 철저히게 파멸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니, 무릇 왕구의 모든 것과, 왕의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을 바벨론으로 옯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 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왕하 20:17-18)." 히스기야 왕의 삶은 유다 왕국을 상징하고 있었다. 북방 이스라엘은 배도로 멸망했지만, 유다 왕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그 생명이 연장되었다. 예루살렘은 앗시리아의 공격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히스기야와 유다 백성들은 구원 받은 것에 만족하고, 계속되는 심판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 회개와 영적-도적적인 개혁으로 전진하지 못했다. 2. 므낫세와 아몬의 배도 1) 므낫세(주전 686-642년, 대하 33:2-10, 왕하 21:2-16) * 종교적 부패(대하 32:2-10, 왕하 21:2-16) * 하나님의 징계와 회개(대하 33:11-20) 2) 아몬(주전 642-640년, 대하 33:21-25, 왕하 21:19-26) 3. 신흥 바벨론과 유다 왕국의 멸망(주전 640-586년, 대하 34-36장, 왕하 22-25장) 요시야 왕을 계기로 하여 유다 왕국은 드디어 그 마지막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제는 앗수르의 세력도 매우 약화되었다. 앗수바니발 왕의 뒤를 이은 왕들은 그렇게 유능하지 못했으며, 앗수르는 그 수도 니느웨가 멸망할 때까지(주전 612년) 계속해서 약해져갔다. 그러자 신흥 바벨론은 이때를 이용하여 새로운 국제 질서의 주도권을 잡고 일어나게 되었다. 요시야 왕이 통치할 때는 앗수르의 세력이 약해져 있었고, 바벨론이 세력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다는 비교적 평화롭게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시야 왕의 뒤를 이은 왕들은 성장해 가는 바벨론에게 계속하여 시달리다가 결국 주전 586년에 멸망을 당하고 만다. 1) 요시야의 개혁(주전 640-609년, 대하 34-35장, 왕하 22:1-23:30) * 개혁 운동(대하 34:8-35, 왕하 22:3-23:25) A. 평가 문장: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다윗의 길로 행함(22:2) 열왕기 기자는 요시야 왕을 평가하는 문장(A-A')에서 요시야가 완벽에 가까운 왕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요시야의 실제 행적을 담고 있는 중앙 내러티브는(왕하 22:3-23:24) 왕의 제 18년에 일어난 일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요시야가 제 18년에 율법서를 발견하고(B), 율법을 따라 유월절을 지킨 이야기(B')는 두 번째 틀을 형성하고 있다. 요시야는 왕에 오른지 8년, 즉 그의 나이 16살 때에 이미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왕이 된 지 12년, 즉 그의 나이 20살 때에는 벌써 예루살렘과 유다와 북방 여러 성에 있는 모든 우상을 제거했다. 그가 이러한 정화 운동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무려 6년의 세월이 걸렸다(대하 34:1-8). 이러한 일은 유다 왕국의 역사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일반적인 개혁 운동은 요시야가 성전을 수리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부터 시작 되었다. 이러한 일반적인 개혁운동은 성전을 수리하다가 발견한 율법 책을 인해 가속이 붙어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제사장 힐기야는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그 책을 서기관에게 주어 요시야 왕 앞에서 낭독하게 했다. 서기관이 낭독하는 율법책을 듣던 요시야는 그 자리에서 옷을 찢었다. 그는 율법을 어긴 유다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즉시 옷을 찢고 회개하고, 신하들을 보내어 유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여호와께 묻도록 요청했다(왕하 22:13). 과연 므낫세와 아몬의 죄로 인해 타락한 유다는 어찌될 것인가? 정녕 유다가 재앙을 피할 길은 없는가? 이러한 요시야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 서닞자 훌다를 통해 주어졌다. 훌다의 예언은 여호와께서 율법책에 기록된대로 유다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는 부분과(15-17), 이 재앙에서 요시야가 면죄될 것을 선언하는 부분(18-20)으로 나뉜다. 그러나 이 예언에는 유다가 재앙을 피할 길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 율법서에 대한 요시야의 질문과 하나님의 대답이 C단락(22:12-20)을 형상하고 있다. 저주와 재앙을 피할 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요시야는 놀랍게도 율법에 순종하여 개혁을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선 그는 백성들을 모으고 율법책을 읽은 후에 그 게명을 지키겠다는 언약 갱신 의식을 치른다(X단락; 23:1-3). 언약 관계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표진이기 때문에, 임시적으로나마 유다는요시야의 통치 아래에서 황금기로 돌아가고 있었다. 요시야 왕의 개혁은 과거 히스기야 왕 때보다도 더 철저했다(왕하 23:13). 요시야는 언약 갱신을 근거로 해서 포괄적인 개혁을 시도했다(C'단락; 23:4-20). 이 단락을 보면 왕이 주동이 되어 벌인 개혁의 조치들이 얼마나 강력하고(폐하고, 불사르고, 빻고, 깨뜨리고), 철저했는지(모든 제사장들, 게바에서 브엘세바까지)를 잘보여준다. 그는 우상을 처음에는 불에 태우고 다음에는 빻아서 먼지로 만들고, 유다 밖으로 가져가게 하였다(4). 요시야 왕의 철저한 개혁을 통해 남방 유다에서는 솔로몬 왕 때부터 있었던 모든 우상과, 산당들이 제거되었다. 그 뿐 아니라 요시야는 북방 이스라엘에서 여로보암이 세웠던 모든 우상의 제단들을 훼파해버렸다. 욧야는 전국적으로 개혁을 단행한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율법서에 지시한대로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했다. 우상 제거와 함께 신앙운동이 절정을 이른 것은 온 백성이 함께 모여 유월절을 지킨 때였다(대하 35:1-19, 왕하 23:21-23). 구약 성경은 사사 시대 이후 요시야 왕 때처럼 유월절을 크게 지킨 적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대하 35:18, 왕하 23:22). * 요시야의 종교 개혁의 영향 신명기의 요지는 여호와를 신실하게 경외하는 자에게는 보호와 축복이 있으며,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자에게는 고통과 불행이 주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이 원리는 국가의 번영을 비롯해서 사회의 전반적인 면에 두루 적용되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불순종하면 그들의 땅을 잃게 될 것을 경고하고 있다(4:25-31, 8:1920, 11;1-17, 28:58-68). 요시야의 종교 개혁이 일어난 후에 이러한 원리에 대해 의아심을 품을 만한 고통스러운 사건들이 계속 발생했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주전 538년에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대 백성들은 당연히 모든 예배는 예루살렘에서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바로 이 무렵에 성전에서 제물로 사용될 짐승들을 팔고, 돈을 바꾸어 주는 상인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인 장소(예루살렘)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찾아오는 순례자들에게 필요한 제물과 화폐를 공급해 주었다. * 요시야 말기의 국제 정세와 므깃도 전쟁(대하 35:20-27, 왕하 23:28-30) 이미 논술한 바와 같이 앗수바니팔이 죽은 후에(주전663년) 앗수르는 계속하여 유약한 자들이 그 뒤를 이었으므로 국세는 점점 쇠약해져만 갔다. 이처럼 약해진 앗수르는 바벨론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메데까지 바벨론과 연합하여 앗수르를 공격했다. 그리하여 주전 612년에 바벨론과 메데의 연합군은 앗수르의 옛 수도였던 앗수르를 점령했고, 또 2년 후에는 니느웨를 포위하였고, 그 성은 포위된지 3개월만에 점령되었다. 이러한 니느웨 성에 대한 멸망은 이미 선지자 나훔에 의하여 20년 전에 예고된 바 있었다(나훔 3:1-7, 16-19). 그러나 앗수르는 다시 대오를 정비하여 서북부 도성인 하란에서 전쟁을 개시했다. 그러나 주전 610년에 하란은 결국 바벨론에 의해 점령당하고 말았다. 앗수르는 다음 해인 주전 609년에 또 다시 하란을 탈환하기 위해서 전쟁을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에 애굽의 바로 느고는 급속히 성장하는 바벨론을 견제하기 위해서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을 치려고 출정했다. 이때에 요시야 는 이스라엘이 독립하려면 앗수르가 멸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바벨론을 치려고 진군하는 애굽의 군대를 막으려고 했다. 요시야는 느고의 출정을 막기 위해 전쟁에 나갔다가 결국 므깃도에서 전사하고 말았다(왕하 23:29-30, 대하 35:23-24). 그러나 이 일로 인해서 애굽은 앗수르를 돕지 못하게 되었으며, 결국 하란은 바벨론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북방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의 죄에 아합의 죄가 더해졌을 때에 멸망하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유다도 므낫세의 죄로 인해 급속하게 멸망으로 치닫게 되었다. 유다의 경우 잠시 지연은 될 지 모르지만 결국 그들도 멸망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께서 유다의 심판을 지연하신 이유는 단지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이었다. 2) 여호아하스(주전 609년, 대하 36:1-4, 왕하 23:31-33)/애굽 왕에게 페위당함/ 3) 여호야김(주전 609-597년, 대하 36:4-8, 왕하 23:34-24:7, 렘 22:13-19, 렘 36:1-32) 므깃도 전쟁(주전 609년)에서 유다의 요시야 왕을 이긴 애굽의 바로느고는 하란 점령에는 실패했지만, 수리아 지역과 팔레스타인 지역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에 바벨론 왕의 맏아들이 군대를 이끌고 유브라테스 강을 건너 와서 수리아의 북부 지방인 갈그미스에서 애굽을 격퇴시켰다. 이때에 애굽 군대는 하맛으로 후퇴하여 대오를 정비하려 했지만, 추격하는 느부갓네살의 군대`에 의해 전멸되고 말았다. 이 승리로 인해 애굽은 크게 세력이 약해졌으며, 바벨론은 세계를 제패하는 나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후에 바벨론은 유다의 왕인 여호야김에게 애굽 대신 조공을 드리게 만들었다. 3년 후(주전 601년)에 느부갓네살은 애굽이 다시 일어날 것을 염려해서 애굽을 다시 한번 공격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는 양편이 모두 많은 전사자를 내고 느부갓네살은 후퇴를 하고 말았다. 여호야김은 이 기회를 이용해서 느부갓네살을 배반하였다(왕하 24:1). 이때에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에게 가서 바벨론을 배반하지 말라고 권면했지만 여호야김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렘 27:1-15). 여호야김은 어려울 때에 애굽 왕이 자기를 도와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김이 바벨론을 배반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압과 암몬인들로 보충된 군대를 이끌고 와서 여호야김을 쳤다. 그리고 나서 느부갓네날은 갈대아 부대를 보내어 유다를 다스리게 했다(왕하 24:2, 렘 35:11). 기록에 의하면 바벨론의 주부대는 주전 598년 12월에 예루살렘에 진입했으나, 그 전에 벌써 여호야김은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아마도 바벨론의 환심을 사기 위한 한 신하가 그를 비밀리에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여호야김은 11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수많은 죄를 저질렀으며(왕하 24:3,4), 애굽과 바벨론을 왔다갔다 하면서 섬기다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렘 22:18). 4) 여호야긴(주전 597년, 대하 36:9-10, 왕하 24:8-16): 유다의 첫 번째 포로 5) 시드기야(주전 597-586년, 대하 36:11-21,왕하 24:17-25:21,렘 39:1-10): 왕국멸망 느부갓세살이 여호야긴 대신에 왕으로 세운 시드기야는 느부갓세살의 허수아비였다(주전 597-586년; 왕하 24:17). 그가 비록 유다의 왕의 자리에 있기는 했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그는 왕리라기 보다는 섭정자의 위치에 놓여있었다. 바벨론 왕은 포로로 잡아간 여호야긴을 여전히 유다 왕으로 대접했고, 유다 백성 역시 시드기야를 왕으로 간주하지 않았다(왕하 25:27, 렘 52:31). 그러므로 그의 위치는 매우 약했으며, 또한 그의 통치 능력 역시 매우 부족했다. 그는 그 후에 계속해서 반 바벨론 파와 친 애굽 파로부터 바벨론을 배반하도록 압력을 받았다. 당시에 에돔과 모압과 암몬, 그리고 베니게의 여러 나라에서는 새로운 반 바벨론 동맹이 이루어졌다(렘 27:1-3, 겔21:18-23, 21:8 참고). 그리고 외국의 사신들이 시드가야를 찾아와서 유다도 이 동맹에 가담해 달라고 요청했다(렘 27:3). 궁중의 반 바벨론 파의 수뇌들은 시드기야에게 그 의견을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시드기야가 바벨론을 배반하게 만든 또 한 세력이 있었으니,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이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지켜 주실 것이며, 바벨론으로 잡혀간 포로들도 2년 안에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바벨론의 멍에를 꺽으시고 유다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예언했다(렘 28:1-12).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도 받지않고 자기 마음대로 백성들에게 "평안"을 외쳐댔다(렘 7:4). 이로 인해 시드기야는 마침내 바벨론을 배반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 제 9년(주전 588년)에 세 번째로 유다를 공격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그리고 그로부처 2년 후(주전 586년)에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말았다. 느부갓네살은 도망하는 시드기야 왕을 사로 잡고, 그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였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시드기야의 두 눈을 뽑은 채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갔다. 이로 인해 시드기야는 바벨론에서 죽는 날까지 감옥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렘 52:9-11, 왕하 25:6,7).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주전 586년에 마침내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었으며, 이 때에 성전도 함께 파괴되었다. 그리고 이때에 남은 백성들도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며, 비천한 자들만이 남아서 그 땅을 지키게 되었다(렘 25:8). 거짓 선지자들이 유다가 곧 회복될 것이라고 거짓 예언을 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끌려간 포로들이 곧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그들에게 그 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그 성이 평안하기를 구하라고 권고했다. 예레미야는 그들이 다시 돌아오려면 무려 70년이 지나야 한다고 예고했다(렘 29:10). 그리고 에스겔 선지자 역시 포로들과 함께 살면서 그와 비슷한 예언을 했으며, 그들에게 소망의 메시지를 전해주었다(겔 21:27).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이 바벨론 군에게 포위되었을 때에 애굽 군대가 와서 자기들을 도와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애굽 군이 퇴각되어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렘 37:7). 당시에 유다의 모든 성읍들이 망했으며, 예루살렘과 아세가와 라기스만이 남아 있었다.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설명해 주는 "라기스의 편지"가 남아 있어서 당시의 유다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바벨론 왕은 유다 백성들을 사로잡아 간 후에, 남은 자들을 위해서 그달리야를 총독으로 삼았다. 그는 한때 예레미야를 숨겨주었던 아히감의 아들이었으며, 그의 조부인 사반은 요시야 왕의 개혁 당시에 서기관으로 있었다(왕하 22:3). 흩어진 유대인들은 느부겟네살이 그달리야를 총독으로 삼았다는 소식을 듣고 미스바로 모여들었다. 그러자 그달리야는 남은 유다 백성들에게 바벨론을 섬기면서 살도록 권면했다(렘 40:9-10). 그러나 이때에 돌아왔던 사람들은 대부분 에돔, 모압, 그리고 암몬으로 망명했던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은 대부분 강경한 반 바벨론파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달리야가 친 바벨론 적인 말을 하는 것을 듣고 크게 분노했다. 그리고 그들의 두목이었던 이스마엘은 그달리야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그는 바벨론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애굽으로 도망쳤고, 이때에 예레미야도 강제로 애굽으로 가게 되었다. 그 후의 유다 역사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더 황폐해졌으며, 그 지역은 사마리아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지 약 1500년 후에 그의 후손들은 이제 자유인이 아닌 포로로서 다시 옛 고토인 갈대아 땅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일부만이 그 곳에 남아서 많은 고난 속에서 살게되었다 * 유다의 멸망과 은혜의 언약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회복이 인간의 순종이나 회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여호여긴은 그의 부침처럼 악을 행했다. 그러므로 유다는 멸망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유다를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삼하 7:14-16). 다윗 가문은 벌받아 바땅한 짓을 했지만,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은 결코 그들을 아주 버리지는 않으실 것이다(삼하 7:16, 왕하 8:19, 왕상 11:36, 15:4).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다윗의 왕조를 가리켜 "영원한 왕조"라고 불렀던 것이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을 바벨론의 손을 통해 징계하시고 그들을 다시 연단되고 순수한 백성으로 거듭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후에 그들을 다시 회복시켜서 자기의 백성을 삼으실 것이다. 이러한 희망과 미래는 오직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셨던 무조건적인 은총의 약속 안에서만 가능했다. e. 결론 및 적용: 열왕기의 신학 1. 포로됨은 언약의 저주
따라서 포로됨은 이스라엘에게 전혀 예기치 못한 것이 아니었다. 열왕기 기자는 모세가 오래 전에 이미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면 포로로 잡혀가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비그적인 종말이 그렇게 쉽게 찾아 온 것은 아니다. 이미 이스라엘의 반역과 불충성은 솔로몬 시대부터 나타났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랫 동안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참고 인내하셨다. 그리고 여러 번 그들이 죄에서 돌이키기를 권고하셨다. 그러나 계속해서 이스라엘이 죄에서 돌이키지 않게 되자, 할 수 없이 심판을 내리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따라 배역한 이스라엘을 두 동강이 나게 만드셨으며, 기근을 보내시고, 전쟁에 패하게 하시며, 동시에 선지자들(엘리야와 엘리사 등)을 보내어 그들이 돌이키도록 권면하셨다. 그리고 가끔 몇 몇 왕들은 그 권면을 받아들여 종교 개혁을 단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개혁도 잠시일 뿐, 이스라엘은 또 다시 죄악으로 깊이 빠져들어갔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말았으며(왕하 7장), 이로 인해 율법의 저주대로 이스라엘은 포로가 되고 말았다(레 26:27-, 신 28:36-37, 왕상 8:46). 3. 회개의 촉구 4. 다윗 언약은 아직도 유효함 결국 다른 왕의 땅 하사 언약(노아, 아브라함, 비느하스 등과 맺은 언약)에 해당되는 것은 다윗 언약에도 해당되는 것임이 드러났다. 영원한 왕조와 왕국을 보장하는 언약이 다윗에게는 무조건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다윗처럼 여호와께 완전히 헌신하는 자손들만이 약속된 축복에 완전히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희망을 형성하는 일부이기도 하다. 다윗과 맺은 언약과 연관해서 여호와께서 다윗의 왕조의 통치 아래 그의 백성을 다시 세우실 것이라는 희망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강하게 남아 있었다. 열왕기 기자가 이와 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엇다는 점은 그가 마지막에 여호야긴 왕이 감옥에서 풀려나와 바벨론의 식탁에 앉는 영예로운 위치로 격상되었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암시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5.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 열왕기에서는 예언자들과 예언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열왕기에서는 예언과 성취의 상응성을 강조하고 있다. 예언서에서는 대부분의 예언들의 성취가 지적되지 않고 있으나, 열왕기에서는 그렇지 않다. 열왕기에서는 모든 참 선지자의 말이 성취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열왕기에서 선지자의 말이 성취되는 것을 집요하게 추척하는 것은 단순히 선지자나 예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예언은 단순한 미래의 예고가 아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언약의 규정들과 연관시킨 후에, 이에 근거하여 장래의 모습을 선언한 것 뿐이다. 결국 "예언과 성취"에 대한 열왕기 기자의 관심은 유다와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는 언약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함을 드러내려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말씀에 신실하시기 때문에, 언약의 규정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축복을, 그렇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저주하시겠다고 하신대로 역사를 이끌어 나가신다. 결국 열왕기 기자는 단순히 유다와 이스라엘 왕들의 왕정사를 기록하는 데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언약의 말씀이 어떻게 역사 가운데 실증되었는지를 드러내 보이는 데 더 많은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엘리야와 엘리사 사이클(왕상 17장-왕하 8:29)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두 명의 선지자가 차지하고 있는 기간은 역사적으로는 불과 30년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두 선지자의 이야기는 열왕기 전체의 1/3(14장)이나 된다. 결국 열왕기는 단순히 왕들의 통치 기록이 아니라, 여호와의 신실한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와 맞서 싸웠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열왕기 기자의 관심은 지상의 왕들에게 있지 않다. 열왕기 기자의 진정한 관심은 하늘의 대왕인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루시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데 있다. 만일 지상의 왕들과 정치-사회-경제적 통치에 관심이 있었더라면, 현재 열왕기의 모습과는 다른 이야기를 기술했을 것이다. 오므리 왕은 북방 이스라엘에서는 정치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강력한 왕조를 세웠으며, 앗시리아(앗수르)의 발흥을 예기하고 사마리아를 새 수도로 삼고, 사마리아를 요새화한 인물이었다. 오므리에 대한 인상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앗시리아에서는 오므리 왕조가 멸망한 후에도 북방 이스라엘을 가리켜 "오므리의 집"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왕기 기자는 오므리를 단 6절(왕상 16;23-28)로 묘사하고 있다.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였다." 이러한 점은 북방 이스라엘 최고의 정치-경제적 풍요를 이룬 여로보암 2세를 간략하게 취급한 것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왕하 14:23-29). 결국 열왕기의 중앙 부분에 있는 엘리야와 엘리사 사이클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바알 숭배를 왕정이 후원하는 역사와, 이에 대한 선지자와 제사장들의 반응이다. 바알 숭배는 오므리 왕조가 베니게의 영향을 받아 창건하였는데, 이는 여로보암의 죄를 기억나게 해주는 사건이었다. 결국 이 바알 숭배는 이스라엘에서는 선지자의 주도권에 의해(왕하 9-10장), 남방 유다에서는 제사장의 주도 하에(왕하 11장) 제거되게 된다. 이렇게 보면 선지자들 역시 "정치적 인물"이었다. 이는 그들이 정치적 일에 자주 연루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의 하늘 궁정의 사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메시지를 여호와 왕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아 지상의 총독들이나 백성들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여호와 왕은 그들을 통해 지상의 왕이나 백성들을 소환하였으며, 선지자들을 통해 심판을 베풀고, 축복을 하사하며, 구속을 일으키셨다. 결국 열왕기는 여호와의 통치를 지상에서 대리하는 왕들의 통치 아래서 전개되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열왕기를 통해서 "성령께서 오늘날의 교회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 위대한 다윗의 아들 예수께서 오셔서 왕국을 확고히 하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시고, 지금은 하늘의 성전에 앉으셔서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다스리면서 그의 목적을 달성하고 계심으로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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