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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사무엘하

[스크랩] 사무엘하(4): 부록 및 결론 (21-24장)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7. 14:58

 사무엘하(4): 부록 및 결론 (21-24장)

다윗왕국의 확립(1-8장)

다윗왕국의 위기와 극복(9-20장)

부록(21-24장)

사울

전사

다윗 왕국의
성립

견고해진다윗
왕국

요나단의약속지킴

암몬수리아
전쟁

다윗의범죄

근친상간

압살롬의 반역과
극복

세바의
반역

진노

용서

다윗의용사들

다윗의
노래

진노와
용서


다윗

애가

사울가문과의 전쟁

블레셋정복

법궤운반

다윗언약

행정
제도

므비보셋대접

도전과
승리

밧세바
사건

암논을 죽임

압살롬
반역

다윗복귀

반역
진압

기브온
거민 원한
해결

군대조직

감사찬송

인구조사

1

2  4

 5

 6

 7

  8

  9   

  10

11  12

 13 

14 18

 19

 20

 21

22

23

  24


ⅰ. 부록(21-24장)

  (삼하 21-24장)을 읽어보면 단순히 이런 저런 자료를 모아 놓은 후대의 첨가물처럼 보인다. 압살롬과 시바의 반역을 진압하는 이야기가 끝나고, 갑자기 (삼하 21장)에 사울이 지은 죄로 인해 다윗의 통치 기간 중에 3년 동안 기근이 든 이야기가 나오고, 블레셋과 싸울 때에 용맹을 떨친 다윗의 부하들의 명단이 나온다(21:15-22). 그리고 다윗의 노래가 두 개 병치되어 나오더니(22:1-51, 23:1-7), 다윗의 부하들의 명단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23:8-39). 그리고 다윗의 인구조사 사건을 끝으로 사무엘하가 마감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인해 로스트(L. rost) 이후의 비평주의 학자들은 대부분 삼하 21-24장을 사무엘서의 메시지와 형태에는 어떤 근본적 역할도 하지 못하는 후대의 첨가물로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삼하 9-20장과 왕상 1-2장을 묶어서 "왕의 계승 내러티브"라는 가설적 문서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왕의 계승 네러티브" 가설에 근거해서 삼하 21-24장을 떼어놓고 사무엘서를 읽으면 사무엘서 전체의 메시지를 오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최근의 문예적 접근 방식이나 정경적 방법을 주장하는 학자들, 그리고 마소라 편집자들이 그래온 것처럼 왕상 1-2장을 솔로몬 내러티브로 보고, 삼하 21-24장을 다윗의 역사와 사무엘서 전체의 결론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실제로 성경에는 명단, 노래, 공문서 등의 장르들이 섞여서 놀라운 스토리를 이루는 부분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삼하 21-24장에 나오는 6개의 내용들은 다윗의 노래를 중심으로 잘 짜여진 동심 구조를 이루고 있다.

 A.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진노(사울이 기브아 거민을 죽인 일에 대해-21:1-14)

    B. 블레셋과의 전쟁에서의 다윗의 용사들의 전적(21:15-22)

       C. 적을 이긴 승리로 인해 여호와를 찬송하는 다윗의 승전가(22:1-51)

       C' 다윗의 마지막 노래-자신과 자신의 집을 향한 여호와의 길(23:1-7)

   'B'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다윗 용사의 전적(23:8-39)

 A'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진노(다윗의 인구조사에 대해서-24:1-25)

  구조의 중앙에는 두 가지 노래가 나오는 데, 첫 번째 노래는 다윗을 위해 여호와께서 보이신 구원의 행위들을 찬양하는 노래이며(22장), 두 번째 노래는 이스라엘의 미래의 소망이 달려 있는 다윗 언약을 찬양하는 노래이다(23장).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와 언약이 이스라엘의 소망의 기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중심에 놓인 두 개의 노래를 둘러싸고 있는 다윗의 부하들의 명단은 하나님께서 다윗 왕국을 세우고 경고하기 위해 사용한 인간적인 도구들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21-24장을 감싸고 있는 두 개의 이야기는 사울과 다윗이라는 두 왕마저 여호와 앞에 그릇 행하여 진노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사울과 다윗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만이 그들의 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1. 흉년과 기브온 사람들의 원수를 갚음(21장)

  삼하 21장과 24장은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 그리고 용서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이 두 개의 내러티브는 여호와에 대한 숨겨진 범죄와 이 범죄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그리고 죄악을 해결하려는 왕의 행동이 기술되고 있다. 사무엘서 기자는 언제인지 분명히 밝히지는 않고 있지만, 다윗의 시대에 계속해서 3년 동안 기근이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비가 오지 않는 팔레스타인에서 3년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은 것은 심각한 타격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다윗은 기근이 계속되자 하나님께 기근이 계속되는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 일이 사울이 약속을 어기고 기브온 족속을 죽인 죄로 인해 일어난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다(1). 기브온 사람은 원래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아모리 족속 중에 남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정복할 때에 그들을 속여서 평화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사울은 민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이방 민족인 기브온 족속들을 죽이고 말았다. 이러한 일은 약속을 위반한 것으로 명백한 살인죄였다. 이로 인해 기브온 족속들은 한을 품게 되었으며, 하나님은 다윗 왕 때에 사울의 죄를 물으셨던 것이다. 기근의 원인을 알게 된 다윗은 즉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그는 기보온 사람들을 불러서 "어떻게 해야 사울의 죄를 속죄하고 그들이 여호와의 기업인 이스라엘을 축복하겠느냐?" 고 물었다(2-3). 그때에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과 자신들의 문제는 돈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멸하려고 한 사람들의 생명을 원했지만 그들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었다. 다윗은 그 말을 듣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시행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멸하려고 한 사울의 자손 중에서 7명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그들을 사울의 고향인 기브아에서 여호와를 위해 매달아서 살인 사건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대답했다. 다윗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4-6).

  다윗은 요나단과 맺은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 그 명단에서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을 제외시켰다. 그리고 리스바가 낳은 사울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과. 메랍이 낳은 아드리엘의 다섯 아들을 잡아 기브온 사람들에게 넘겨 주었다. 그러자 기브온 족속들은그들을 기브아로 데려가서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을 매어 달았다. 이때에 사울의 후손 7사람이 함께 죽었으며, 그들이 죽은 때는 곡식을 베는 첫 날, 즉 보리를 베기 시작하는 때였다(7-9). 보리를 베기 시작하는 때는 히브리 달력으로 니산(Nisan)월 중순이며, 태양력으로는 4월경이었다. 이때에 리스바가 굵은 베를 가져다가 바위 위에 펴놓고, 그 위에 앉아서 곡식을 베기 시작할 때부터 비가 시체에 쏟아질 때까지 그 시신들을 새와 들짐승으로부터 지키고 있었다. 시체에는 사나운 짐승과 새들이 몰려들기 마련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시신이 매장되지 못하고, 맹수나 맹조에 의해 뜯기우는 것을 최대의 수치로 생각했다(삼상 17:44). 따라서 리스바는 굵은 베옷을 반석에다 깔고 시체 곁에 머물면서 밤낮으로 시체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율법에 따르면, 사람이 죽을죄를 짓고 나무 위에 달리더라도 그 시체를 당일에 내려 장사하도록 명하였다(신 21:22,23). 그러나 이번에 나무 위에 달려 죽은 사울의 일곱 후손의 시체들은 사건의 성격상 예외였기 때문에 당일에 장사되지 못했다. 그들은 3년 연속 기근을 내리신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리기 위한 속죄제물의 의미로 처형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시체는 하나님의 진노가 풀려 비가 내릴 때까지 나무 위에 둘 수밖에 없었다(Lange). 리스바가 한 일이 다윗에게 알려지게 되자, 다윗은 직접 가서 사울의 뼈와 그 아들 요나단의 뼈를 길르앗 야베스 사람으로부터 가져왔다. 이 시채는 전에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을 길보아 산에서 죽인 후에 벳산 거리에 매단 것을 야베스 사람들이 가져온 것이었다. 다윗은 가져온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이번 사건으로 처형당한 사람들의 시체를 거두어 베냐민 땅 셀라에서, 사울의 아비 기스의 묘에 장사하였다. 그리고 이 일이 끝난 후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를 들어주셨다(10-14).


2. 다윗의 용사들의 이야기(1)(21:15-22)

  사무엘하의 부록에는 두 개의 다윗의 용사들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이 이야기는 블레셋 전투에서 다윗의 탁월한 용사들이 세운 업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통일 왕국을 세우고, 다윗 왕조를 견고하게 한 것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첫 번째 이야기는 (21:15-22)에 나오고 있다. 이 곳에서는 다윗의 연약함과 블레셋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네 명의 엘리트용사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네 용사로 인해 가드 출신의 4명의 거인 장수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다윗이 블레셋과 싸우다가 피곤해졌을 때에 이스비브놉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 이때에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이스비브놉을 죽였다. 이 일 후에 군대장관들은 다윗에게 더 이상 전쟁에 나가지 않도록 요청하였다(15-17). 두 번째 싸움과 세 번째 싸움은 곱에서 있었다. 이때에 후사 사람 십브개가 블레셋 장수 삽을 죽였으며, 베들레헴 사람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다. 네 번째 블레셋과의 전쟁은 가드에서 있었는데, 이때에 다윗의 형 삼마의 아들 요나단이 가드 장수를 죽이고 말았다(18-22). 이로 인해 블레셋의 거인 장수 넨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 기사에서 다윗은 더 이상 전쟁에 나갈 수 없이 쇠약해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다윗의 모습은 다음에 나오는 여호와께 대한 찬양의 전조를 이루고 있다.


3. 다윗의 찬양(1)(22장)
  부록의 중앙에 있는 (삼하 22-23장)에는 다윗이 부른 두 개의 노래가 나온다. 22장의 노래는 다윗이 모든 대적들로부터 승리한 후에 구원 주이신 여호와를 찬양하기 위해서 과거를 돌아보면서 부른 승전가이다. 이 노래를 통해서 다윗은 이스라엘 왕정의 역사는 단지 권력과 갈등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호와의 주권이 실행되는 스토리임을 노래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가능케 된 것은 오직 여호와의 구원의 은총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22장에 나오는 다윗의 시는 시편 18편에도 나온다. 이 두 시는 내용이 약간 다른데, 이는 아마도 시편의 시가 예배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편집했기 때문으로 보인다(1).

  다윗은 하나님을 자기의 바위, 요새, 구원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반석이나 요새는 적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험한 곳으로서 피난처로 사용되는 곳이다. 다윗은 사울과 그 대적들에게 쫓길 때에 이러한 바위와 요새에 숨어서 생명을 보호했다. 그러나 다윗에게 있어서 진정한 바위와 요새는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그는 바위나 요새에 숨어서 대적들로부터 구원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가 대적들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은 그에게 기름을 부어 주신 하나님께서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구원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그가 곤경에 처할 때마다 그를 구원해 주셨다. 또 다윗은 여호와를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여호와는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하시고, 그의 편이 되어 그를 지켜주셨다. 이런 의미에서 여호와는 다윗의 하나님이었다. 다윗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고 그의 하나님이 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바위가 되어 주셨다. 앞에서 언급된 "바위"(셀라)는 몸을 숨길 수 있는 작은 바위를 말하나, 여기에 언급된 '바위'(추르)는 "큰산"을 의미한다. 여호와는 다윗에게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큰산과 같은 신뢰와 의지의 대상이었다. 큰산은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의 불변성을 의미한다(사26:4). 하나님은 다윗의 '방패', '뿔', 그리고 '산성'이 되어 주셨다. 여기에 언급된 '방패"(마겐)는 작은 원형방패를 말한다. 여호와는 다윗의 방패가 되어 적의 화살과 칼날로부터 그를 보호해주셨다. 또 "뿔"은 승리와 권능을 상징하는 말이며, "산성"은 높고 험한 바위로 된 안전한 피난처를 말한다. 이곳은 적의 침입 시에 최후의 방어선이 된다. 여호와는 다윗에게 최후의 방어선이 되어 언제든지 그가 부를 때마다 그를 보호해 주셨다. 이러한 다윗의 표현들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 주셨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구원의 은총을 체험한 다윗은 앞으로도 원수들의 공격이 있을 때마다 찬송 받기에 합당한 여호와께 나아가 부르짖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또 다시 그를 원수들로부터 구원해주실 것이다. 기도는 적군에 의해 포위되었을 때에, 성도들이 대적의 문을 열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2-4). 다윗은 대적들을 그물과 덫을 가지고 짐승을 잡는 사냥꾼으로 비유하고 있다. 다윗은 사냥꾼에 의해 덫에 걸린 짐승처럼 죽음 앞에 놓여 있었다. 그는 사울과 그 부하들이 친 올무에 걸려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마치 사람을 쓸어서 죽음으로 끌어가는 홍수처럼 다윗을 덮어왔다. '죽음의 그물'과 '죽음의 덫'은 모두 동일한 표현으로 죽음의 위기를 의미한다. 다윗은 여러 번 사울의 추격에 의해 이러한 죽음의 위기에 빠졌다. 이러할 때에서 다윗이 한 일은 여호와께 부르짖는 일이었다. 그가 간절하게 부르짖을 때에 여호와께서는 하늘 성전에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해 주셨다(5-7).

  마침내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 하나님은 다윗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강림하셨다. 주님은 다윗의 대적들로 인해 분노하셨으며, 이로 인해 땅이 진동하고 흔들렸고, 산의 기초도 요동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 강림 하셨을 때의 장면과 유사하다(출 19:18). 하나님은 다윗의 대적들로 인해 분노하여 그 코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입에서는 맹렬한 분노의 불을 뿜고 있었다. 이러한 묘사는 다윗의 대적을 향해 맹렬히 타오르는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하고 있다. '그 불에 숯이 피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진노가 번갯불로 변해 모든 것을 태워버릴 만큼 맹렬한 것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하늘을 굽혀 땅에 닿게 하시고 이 곳에 임하셨다. 이 때에 하나님의 발 밑에는 구름을 인해 캄캄해졌다. 다윗은 이렇게 검고 낮게 깔린 구름을 하나님의 강림을 알리는 전조로 보았다(8-10). 하나님은 다윗의 대적을 치기 위해 살아 있는 보좌인 그룹(천사)를 타고 다니셨다. 이러한 그룹의 보좌는 바람의 날개를 달고 있었다. 하나님은 캄캄하고  많은 물과 빽빽한 구름으로 자기를 두르시고, 그 배후에서 그룹 보좌를 타고 다니셨다. 하나님이 구름 속에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면 악인뿐 아니라 의인들도 죽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번개)은 구름을 가로지르면서 하나님의 강림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리고 번개가 치자마자 하늘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상징하는 우박과 숯불이 떨어졌다. 번개와 뇌성은 진노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다윗의 대적들을 향해 번개의 화살을 쏘아 그들을 흩으셨다. 그리고 이로 인해 다윗의 대적들은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 다윗은 전쟁은 자신이 했지만, 승리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굳게 믿다. 다윗의 대적을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의 호흡(푹풍)을 인해  강물이 마르고 밑바닥을 드려 나게 하셨다. 그리고 땅을 갈라서 그 기초가 드러나게 만드셨다.  다윗은 적들에 의해 강물과 땅 속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책망의 폭풍을 보내서 다윗을 빠뜨린 물을 마르게 하셨고, 그를 가두었던 땅을 갈라지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대적들을 꺾으시고 전세를 역전시켜 주셨다(11-16).

  하나님은 사자를 보내어 다윗을 갈라진 틈과 많은 물 속에서 건져주셨다. '많은 물'은 수많은 대적들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다윗을 강한 원수와 그를 미워하는 자로부터 구원해 주셨다. 강한 원수와 그를 미워하는 자는 사울 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이 다윗을 사울의 손에서 구해 주신 것은 사울이 다윗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사울 왕은 다윗을 잡으려고 여러 번 군사를 이끌고 다윗을 추격했으며, 이로 인해 다윗은 큰 곤경에 빠졌다. 이 때에 다윗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만 의지하였다. 다윗이 재앙을 당할 때에 하나님은 그의 의지할 자가 되어 주셨다. '지지자'('미쉬안')는 '지팡이처럼 그의 몸을 지지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사울이 다윗을 치려고 할 때마다 다윗의 편에 서서 그가 의지할 지주가 되어주셨다.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넓은 곳'으로 인도해 주셨다. '넓은 곳'으로 인도하셨다는 말은 고통에서 벗어나서 기쁨과 자유가 넘치는 안전한 곳으로 인도되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다윗을 그 대적의 손에서 구해 주신 것은 하나님이 다윗을 기뻐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하시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으로 지정하셨다(17-20).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기의 의와 깨끗함을 따라 자기에게 상으로 갚아 주셨다고 고백하고 있다. 다윗은 그를 추격하고 무고히 대적하는 사울과 그 일행에게 끝까지 선으로 대했다. 다윗은 사울을 모함하지 않았으며, 그를 죽일 기회가 있어도 그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였기에 존귀하게 대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행동했고, 그 손으로 죄는 자의 피를 흘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그의 행위를 따라 그에게 선한 것으로 갚아 주실 것이다. 다윗은 자신이 여호와의 도를 지켰고 사악하게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다윗은 항상 율법을 묵상했으며, 그 앞에 두고 그것을 떠나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고 마음으로라도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살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살려고 노력했던 것이다(21-24). 하나님은 다윗이 행한 의로운 행위를 따라 그에게 갚아 주셨다. 하나님은 다윗이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않은 것을 보시고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갚아 주셨다. 하나님은 자비한 자들에게는 자비함으로 대해 주신다. "자비하다"(헤세드)는 말은 상대가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한 번 맺은 언약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을 말한다. 다윗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신실했고, 또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고 할 때에도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 하나님은 온전한 자에게는 온전하게 대해주신다. "온전하다"(타밈)는 말은 도덕적, 종교적으로 흠이 없는 자를 말하며, 한 눈을 팔지 않고 온전하게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을 말한다. 다윗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온전하게 대했으며,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행하려 했다. 하나님은 순결한 자에게는 순결하게 대해주신다. "순결하다"(가발)는 말은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려는 사람을 말한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자기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자신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하나님은 패역한 자에게는 간교함으로 대해 주신다. "패역한 자"(익케쉬)는 도덕적으로 비뚤어지고 비꼬인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심술을 능가하는 심술을 당하게 하시고, 이상한 길로 인도하여 마침내 저주의 길에 들어가게 하신다. 15;23). 하나님은 자신을 신뢰하는 자에게는 사랑으로 보상해 주시고, 정직한 자에게는 큰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또한 하나님은 비천한 백성은 구원해 주시고, 눈이 높은 자는 낮추신다. 비천한 백성은 핍박 속에서 의롭게 살려고 하는 경건한 무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눈이 높은 사람들은 부요하긴 하지만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을 말한다. 다윗은 연약하고 비천한 자였지만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은 그를 구해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눈이 높은 교만한 자들은 낮추어 버리신다. 사울은 왕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자기의 마음대로 적국의 왕과 가축을 살려주었으며, 제사장만의 권한을 월권하였다. 그 결과 하나님은 사울을 버려 더 이상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미천한 백성을 구원하시며, 교만한 자들은 낮추신다. 다윗은 그의 경험을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25-28).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 등불과 어두움을 밝혀 주실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등불은 번영과 높은 지위의 의미하고 있다. 등불을 켠다는 것은 다윗의 집이 이스라엘 집에 빛을 비추는 왕가로 지속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다윗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비추는 등불로 삼으셨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다윗의 후손들은 곤경에 처했을 때마다 하나니의 도우심을 통해 기적적으로 그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다윗은 대적들과 싸울 때에도 하나님을 힘입고 적군 사이를 달렸다. 다윗은 성전에 있는 성문과 성벽의 담을 뛰어 넘을 때에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뛰어넘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붙들어 주셨기에 다윗은 전쟁과 대적들 앞에서 무사하게 승리할 생각 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은 거짓이나 흠이 전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용광로에 제련되어 모든 불순물이 빠진 순금과 같이 순수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보호를 받게 될 것이다. 다윗은 이러한 진리를 자기의 삶의 체험을 통해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29-31). 다윗은 여호와만이 경배 받을 유일한 존재이며, 여호와만이 변함없이 신뢰할 수 있는 반석이라고 선언한다. 이 세상에 참된 신은 여호와 한 분밖에 없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용기와 힘을 주셨고, 그의 허리띠는 힘과 용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하나님은 다윗이  실수 없이 그의 목적지에 이를 수 있도록 그 길을 온전케 하셨다. 하나님은 다윗의 발을 암사슴처럼 민첩하게 해주셔서 적을 따를 수 있게 해주셨다.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삼고, 이스라엘을 그의 손에 맡기셨으며, 그를 하나님이 선택하신 거룩하고 높은 곳에 세워주셨다. 그러므로 그는 넓은 영토를 지배하며 거룩한 곳을 지킬 수 있었다. 하나님은 다윗의 대적을 물리치심으로 그가 존귀한 이름을 얻게 하셨다. 하나님은 다윗의 손을 단련시켜서 싸우기에 합당한 자로 만드셨다. '가르치다'('라마드')는 말은 '단련시키다', '훈련시키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하나님에 의해 단련된 다윗의 팔은 영웅적인 힘으로 놋(청동) 활을 당길 수 있었다. 놋 활은 보통 사람의 힘으로는 당길 수 없는 무기이다. 다윗이 이것을 당길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큰 힘을 주셨다는 것을 말한다. 다윗은 이러한 모든 힘은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32-35).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주는 도움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전쟁시에 다윗을 방패처럼 감싸서 적의 모든 위협으로부터 구원해 주셨다. 그러므로 다윗의 대적들은 다윗 앞에 패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다윗이 싸움에서 약해지지 않도록 권능의 오른 손으로 그를 붙잡아 주셨다. 다윗이 위대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온유하심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가장 높은 분이지만 가장 연약한 사람들에게까지 자신을 낮추시는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시다. 만일 하나님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 아니었다면, 다윗과 같은 연약한 사람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온유하심은 다윗을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다. 하나님은 다윗의 발걸음을 넓게 해주셨다. '발걸음을 넓게 하셨다'는 그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 주셨다는 것을 말한다. 다윗은 대적들의 박해로 인해 도망 다니는 몸이었지만, 하나님은 그가 자유롭게 다니며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셨다. 사울의 집요한 추격 속에서 다윗이 죄를 짓거나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의 길을 넓혀 주셨기 때문이었다(36-37). 다윗은 하나님의 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무기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나라 안팎에 있는 모든 대적들을 쳐서 무찔렀다. 그는 과거에 자기가 하나님의 힘을 입어 그의 적들을 파멸시킨 일을 회상한다. 다윗은 그의 대적들을 추격하여 그들을 따라 잡았으며, 그들을 모두 죽이기 전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다윗은 대적들을 공격하여 그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다윗의 대적들은 다윗의 공격을 받고 그의 발아래 쓰러져있었다. 하나님은 다윗이 전쟁을 할 수 있도록 그에게 힘과 용기를 주셨다. 다윗은 하나님이 주시 힘과 용기를 힘입고 그 적들을 쳐서 그들이 자기 발 아래에서 굴복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은 다윗의 대적들이 등을 돌려 도망치게 만들었으며, 다윗을 그들을 공격하여 그들의 목을 쳐서 그 생명을 세상에서 끊어버렸다. 다윗의 대적들은 죽음의 위기 앞에서 도움을 구하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구원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여호와께 기도하며 도움을 구했다. 그러나 하나님도 그들에게 응답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이미 구원의 기회를 모두 놓쳐버렸던 것이다. 다윗은 아무도 돕지 않는 대적들은 추격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쳐서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소멸시켜 버렸다. 다윗의 대적들은 다윗의 공격 앞에 거리의 먼지처럼 쓸려버려서 수치스럽고 모욕된 최후를 맞게 되었다(38-43).

  하나님은 다윗을 온갖 백성의 투쟁 속에서 건져내셨다. 다윗은 사울에게 박해를 받았으며, 수많은 전쟁에 휘말렸다. 다윗은 통일국가의 왕이 되기 전까지의 북 왕국(이스보셋 왕조)과 대치하는 기간을 보냈다. 다윗은 유다 지파의 왕이 된 후에도 7년 동안이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다스리던 북 왕국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인해 이스보셋과 전쟁을 하지 않고도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 전쟁에서 다윗을 구원하여 그를  세계를 지배하는 지도자로 세우셨다.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도 계속해서 이방 나라들을 정복하였다. 다윗은 당시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주변의 모든 나라들을 정복하고 그들과 종주권 계약을 체결했다. 그 결과 이방 나라들은 다윗에게 조공을 바치며 섬기는 나라들로 전락되었다. 여기에서 '열방'('고임')은 이스라엘 주변에 있던 이방 민족들을 의미한다. 다윗과 정면으로 싸우지 않은 이방 나라들은 다윗의 명성을 듣고 두려워했다. 다윗 왕이 아람 동맹군인 하닷에셀의 군대와 싸워 승리했을 때에, 하맛 왕과 다른 많은 왕들이 다윗 왕에게 항복하고 화친을 요청했다(삼하 8;10;10:19). 이와 같이 이방 국가들은 점점 힘을 잃고 그들의 있던 요새에서 문을 열고 두려워떨면서 나왔다. '쇠미하다'(나벧)는 말은 '힘을 잃다'는 뜻으로, 이방 민족들이 다윗의 세력 앞에서 전의를 상실한 것을 의미한다. '그 견고한 곳'은 이방인들의 요새를 말한다. 이방 국가들은 모두 견고한 요새에서 문을 열고 나와서 다윗 왕에게 항복했다(44-46). 다윗은 자기를 대적들로부터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있다. 다윗은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이라고 고백한다. 모든 우상들은 생명이 없지만 여호와는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반석"이라고 부른다. 반석은 요동하지 않기에 신뢰할만하며, 적의 공격 앞에서 피할 수 있다. 또 그는 하나님을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대적들로부터 자신을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승리의 영광을 돌렸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세운 다윗에게 도전하는 사람들 벌하심으로, 정의가 해를 받지 않도록 지켜주셨다. 하나님은 모든 나라들을 다윗에게 복종하게 만드셨다. 다윗은 자신이 열방 중에서 높아진 것이 하나님 때문임을 알고있었다. 하나님은 대적 자의 손에서 다윗을 구해주셨으며, 다윗이 그들을 쳐서 진압하게 해주셨다. 하나님은 다윗을 높이 들어 대적들 앞에서 승리할 수 있게 해주셨다. 하나님은 자기 힘만 믿고 폭력을 휘두르는 자들의 손에서 자기가 기름을 부어 세운 왕을 구원해 주셨다(47-49).

  그러므로 다윗은 이 모든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고, 열방 중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그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감사와 찬양은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우신 일을 열방에 전하겠다고 선포하고 있다. 다윗이 열방과 싸워 승리한 것은 열방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열방은 다윗의 승리를 보고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나와 구원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서 열방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실로 하나님은 다윗이 감당하기에 너무나 벅찬 큰 구원을 베푸셨고, 다윗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그 언약을 따라 은총을 베풀어주실 것이다.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 자비와 구원의 역사가 자기에서 끝나지 않고 후손들에게도 영원히 이어질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러한 예언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다. 다윗은 이스라엘 주변의 일부 지역들만 정복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을 통해서 온 세상을 정복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즉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정복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셨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서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성령을 통해 온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모든 세상이 무릎을 꿇게 하실 것이며, 장차 모든 사람들이 그 입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50-51).


4. 다윗의 마지막 노래(23:1-7)
  부록에 나오는 다윗의 두 번째 노래는 (삼하 23:1-7)에 기록되어 있다. 이 노래는 다윗 왕국의 건설이 인간이 성취한 우연의 산물이 아니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능력의 선물임을 노래하고 있다. 다윗의 왕권은 여호와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 세워진 왕권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 권력의 산물이 아니라, 백성의 복지를 위해서 섬기는 봉사 직분이었다. 이것은 임시적인 조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영원한 실재였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다윗은 이상적인 왕으로 묘사되고 있다. 23장에 나오는 다윗의 노래는 22장의 노래 다음에 배열되어 있지만, 이 두 시는 시간적으로 다른 시기에 기록되었다. 22장의 시는 다윗이 주변의 이방 국가들을 정복한 직후, 곧 그의 이스라엘 통치 초기에 기록되었으나(22:1), 23장의 시는 그가 모든 역경과 좌절을 맛본 통치 말년, 곧 그가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기록한 시였다. 22장의 시는 활기찬 흐름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다윗의 최 전성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나, 23장은 범죄 후에 하나님의 섭리와 자비를 체험하고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23장의 찬양은 다윗을 넘어서 미래에 완성될 공의로운 메시아 왕국을 예언했다는 점에서 '선지자적 찬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3장의 시는 모세가 죽기 전에 축복의 시를 지은 것처럼(신 33장), 다윗이 임종을 앞두고 그의 마지막 소원을 노래로 표현한 것이었다(Hertzberg). 그러나 그의 노래는 다윗의 개인적인 노래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 감동된  '메시아적인 노래였으며, 나단 선지자를 통해 베푸신 '다윗 언약'(7:8-16)에 기초한 노래였다.

  다윗은 자신을 1) 이새의 아들 다윗, 2) 높이 들림 받은 자, 3) 야곱의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그리고 4)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라고 부르고 있다(1). '이새의  아들'은 '이스라엘의 왕'이란 호칭과는 대비되는 호칭으로서, 자신의 보잘 것 없음과 비천함을 드러내는 호칭이었다. 다윗은 거룩한 노래를 시작할 때에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지 않고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려 하였다. 본문에서 '말함이여'라고 번역된 말('네움')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은 말을 할 때에 자료 사용되는 말이다. 이것은 그의 노래가 성령의 감동을 받은 다윗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시적인 형태로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다윗은 원래 양치는 미천한 목동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크게 높아진 사람이 되었다. 이러한 다윗의 표현은 자신이 왕이 된 것이 하나님의 은총 때문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다윗은 양치는 소년 시절부터 악기를 잘 타는 자로 소문이 나 있어서 사울 앞에서 수금을 연주하는 악사로 고용되기도 했었다(삼상 16:16, 19, 23). 다윗은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셨다"는 말은 직역하면, '내 안에서 말씀하셨다'는 뜻이다. 이 말은 다윗이 하나님의 영에게 감동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기록된 다윗의 노래는 그의 개인 적인 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해 계시된 시라고 할 수 있다. 다윗은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다"고 노래한다. 이 말은 다윗이 입술을 주장하는 주체가 성령임을 고백한 말이다.  이와 같은 성령의 완전한 지배를 받는 상태를 우리는 '성령 충만'이라고 부른다(엡 5:18-19). 이러한 구절은 다윗의 노래가 신적인 권위를 가질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2). 다윗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리고 이스라엘의 바위"가 말씀하신다고 노래하고 있다. 구약 성경의 경우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할 때에 일반적으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말로 시작했다. 이것은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자기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과 바로의 압제에서 구원하여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그 언약을 성실하게 이행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바위'는 흔들림이나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불변성 강조하는 말이다. 이 시는 다윗 언약(7:8-16)에 기초한 것으로, 한 번 약속한 일을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불변성 또는 신실성에 기초하고 있다.

  3절에서 다윗은 자신을 1)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2)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라고 부르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왕은 일차적으로는 다윗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메시아 왕'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왕은 공의를 베풀고(렘 23:5; 33:15),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자가 되어야 했다. 다윗 왕은 이러한 신정 국가의 이상적 왕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모형일 뿐 그가 정말로 하나님 앞에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점에서 다윗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공의로 판단하시고,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백성들을 다스리신 이상적인 왕이었다(시 2:1-2; 겔 34:23-24; 사 11:3-5). 4절에서 다윗은 메시아가 다스릴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세 가지 이미지를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다. 4절에 언급된 "저는"은 사람(다윗 또는 메시아)이 아니라, 다윗(메시아)가 다스리는 나라를 의미한다. 메시아가 다스리는 나라는 1) 돋는 해 아침빛과 같고, 2) 구름이 없는 아침과 같으며, 3) 비온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과 같을 것이다. '돋는 해 아침 빛 같다'는 말은  메시아의 나라가 고통과 죄악과 부패의 밤이 물러가고, 기쁨과 번영과 행복의 찬란한 아침 햇살이 비추는 나라가 될 것을 의미한다. '구름 없는 아침'은 구름이 완전히 걷힌 청명한 하늘처럼, 온갖 염려와 부정적인 것이 사라진 순수하고 영광스러운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비온 후의 광선을 인해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과 같다'는 말은 인간의 죄로 인해 파멸된 세상에서 죄문제가 해결되고, 새롭게 돋아나는 새싹과 같은 희망의 나라가 도래할 것을 의미한다. 다윗은 자신의 집이 하나님 앞에 이와 같지 않느냐? 고 외치고 있다. 다윗은 메시아의 상징이었으며, 특히 그의 집에서 메시아가 태어나서 이러한 세상을 이룰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영원한 언약을 세워 자신을 모든 일에 구비하고, 견고케 해주셨다고 고백한다. 다윗은 지나간 일을 돌이켜 볼 때에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행하시는 신실하신 분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느로 장차 미래에 메시아를 통해 이루실 약속도(이것은 구원에 관한 일이었으며 또한 그의 소원이었다) 반드시 이루어 주실 줄을 믿을 수 있었다(5). 그는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특히 다윗이 자신과 맺은 언약을 '영원한 언약'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면, 그는 장차 자신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통해  세워질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았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를 거부하는 또 다른 나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는 "사악한 자는 모두 내버려질 가시나무와 같다"고 선언하고 있다. 메시아의 도래는 그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축복이 되지만, 그를 거부하는 사악한 자에게는 심판의 근거가 된다. 본문에서 '사악한 자'라고 번역된 말('벨리야알')은 '무익하고 가치 없는 자'라는 뜻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경스러운 자를 의미한다. 다윗은 이러한 자들은 '모두 내버려질 가시나무와 같다'고 경고하고 있다. 가시나무는 발견되는 즉시 농부가 밭에서 뽑아 불에 태워버린다. 이러한 표현은 메시아를 거부하는 불경스러운 자들이 받을 철저한 심판을 묘사하고 있다(사 27:4; 겔 28:24). 다윗은 이러한 가시나무는 가시가 있어서 손으로 잡을 수 없기 때문에, 철과 창 자루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가시나무는 가시가 있어서 맨손으로는 잡을 수 없기 때문에 철로 만든 도구를 사용해야 거둘 수가 있다. 이러한 표현 역시 메시아를 거부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비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가시덤불은 결국 불에 던져져서 땔감으로 사용되게 될 것이다. '불'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상징이다(마 3:10; 13:30; 눅 19:27). 사악한 자에게는 냉혹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다윗의 노래는 1) 메시아께서 통치하시고 건설하실 나라에서 불의한 세력이 소멸되고(사 27:4), 2) 메시아의 의로운 통치에 대적하는 무익한 자에게 엄중한 심판이 있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마 25:30).


5. 다윗의 용사들의 이야기(23:8-39)
  (삼하 23:8-39)에는 부록에 나오는 두 번째 다윗의 용사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이 부분에서는 (삼하 21:15-22)에 나오는 명단과 비슷하게 다윗의 엘리트 용사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총사령관들 아래에 있는 30용사의 명단이 제시되고 있다. 이 곳에 소개되고 있는 용사들은 다윗 왕국 건립에 크게 활약했으며,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일에 큰 공을 세운 600명의 용사들 중에 일부이다. 본문에는 모두 37인의 용사들이 소개되고 있는 반면에 (대상 11:10-47)에는 16명의 용사들이 추가로 소개되어 있다.

 5-1. 다윗의 첫 번째 3 용사들(9-12)

 * 다그몬 사람 요셉 밧세벳(에센 사람 아디노)(8)
  그의 본 이름은 '야소브암'이며, '아디노'는 그의 별명이었다. 그는 시글락에서 다윗과 합류하였고(대상 12:6), 2만 4천명으로 구성된 정예병 중에서 1월에 근무하는  첫 번째 부대의 부대장이었다(다윗은 상비군을 12개의 군대로 나누고, 달마다 한번씩 근무하는 체번제를 실시했다)(대상 27:2). 그는 군장의 두목이었는데, '군장'('솰리쉬')는 '셋'이란 뜻의 '솰로쉬'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그는 지휘관 중의 지휘관, 즉 가장 뛰어난 세 장군의 하나였다. 그들은 왕이 전쟁에 나갈 때에 병거에서 왕과 함께 있었고, 왕의 주변에서 특수 부대(호위병)를 지휘했다(왕하 9:25; 10:25). 그러나 이들은 요압이나 아마사가 차지했던 전체 이스라엘 군대의 군장('사르')보다는 하급의 직책이었다.

 *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8-10)
  '아호아'는 베냐민 지파였으며(대상 8:4), '엘르아살'은 2만 4천명으로 구성된 부대 중에서 2월에 근무한 부대의 부대장이었다(대상 27:4). 그는 야소브암과 삼마와 함께 다윗의 뛰어난 세 장군('솰리쉬')의하나였다.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바스담밈'에서 전쟁할 때에(대상 11:13)블레셋 군사들을 보고 고지 쪽으로 올라가며 후퇴하였다. 이때에 다윗의 3장군은 물러서지 않고 블레셋 군사들을 유도하였다. 그리고 이때에 엘르아살이 혼자 앞서 나가서 손에 쥐가 날 때까지 블레셋 군사들을 쳤다. 이 날에 여호와께서 크게 승리하게 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군사들은 다시 돌아와서 블레셋 군사들이 버리고 간 군수품만 노략했다.

 *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11-12)
  마지막 다윗의 3 장군은 '삼마'였다. 전에 블레셋 사람이 레히(우리 말로 "떼를 지어"라고 번역된 말은 "레히"를 가리킨다. 이 곳에는 녹두 나무 밭(또는 보리밭)이 있다)에 모였을 때에 이스라엘 군사들은 그들을 보고 도망을 쳤다. 그러나 그때에 삼마는 홀로 그 밭에 서서 물러서지 않고 블레셋 군사들을 막아 공격했으며, 여호와의 도움으로 크게 승리했다.


 
5-2. 다윗의 두 번째 3인의 용사들(13-23)-아비새, 브나야, 익명의 한 사람
  이 세 사람은 충성에 있어서는 앞에 언급된 3인과 같았지만, 그 능력에 있어서 뒤지는 사람들이었다. 이 세 사람은 곡식을 벨 때에 아둘람 굴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이때에 블레셋 군사들은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다. 아둘람 굴은 다윗이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해 은신한 곳으로, 이곳에서 다윗은 그의 가족과 다른 동료들과 합했다(삼상 22:1-2). 이 곳은 가드와 베들레헴의 중간에 있는데, 최근 성서 고고학자의 탐사로 이곳의 산 중턱에서 약 400명 정도가 거주할만한 큰 동굴이 발견되었다. 블레셋 군사들이 진을 쳤던 '르바임 골짜기'는 예루살렘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로서,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경계 지역에 있었다(5:18). 이 전투는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직후에, 다윗의 세력을 우려한 블레셋 족속이 선제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5:17). 이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었으며, 블레셋 군대의 진은 베들레헴에 있었다. 여기에 언급된 산성(메추다)은 아둘람 근처에 있던 산성을 말한다. 당시에 다윗은 아직 예루살렘을 정복하지못했기 때문에, 다윗은 아둘람 근처의 산성에 머물고 있었다(5:17). '영채'(맛차브')는 '군부대'를 의미하는 말이다(13:23; 14:1). 이러한 묘사는 당시에 상황이 이스라엘에게 매우 불리한 것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블레셋 사람들은 길보아 전투(삼상 31:1-7)에서 베들레헴을 차지한 것으로 보이며, 그 후에 그 곳에 군부대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에 다윗은 목이 말라서 베들레헴 성 문 곁에 있는 우물 물을 마시고 싶어 했다. 당시 다윗이 진 치고 있던 아둘람의 물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깨끗하고 시원한 베들레헴의 물을 사모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이 우물은 베들레헴 북동쪽으로 약 15분 걸리는 곳에 있었으며, '다윗의 우물'이란 이름으로 전해 내려왔다고 한다(Keil). 다윗은 베들레헴 태생으로(16:2,18), 어려서부터 이 우물 물을 마시면서 자라났을 것이다. 그 때에 다윗의 두 번째 세 용사가 목숨을 걸고 블레셋 군사들을 치고 나가서 베들레헴의 우물 물을 길어왔다. 그러나 다윗은 세 용사가 목숨을 걸고 떠온 피와 같은 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 물을 여호와의 제단에 전제물로 붓고 말았다(13-17). 다윗은 자신의 경솔함을 깨닫고, 세 용사 생명의 대가인 물을 율법에 따라 하나님께 헌납했다. 다윗은 '피를 먹지 말라'(레17:10)는 율법에 따라 세 용사의 피와 같은 물을 마시지 않았다.

  이러한 두 번째 3인에는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인 아비새와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 그리고 무명의 한 용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아비새는 이 3인 중에 우두머리였는데, 그는 창을 들어 한 자리에서 300명의 군사를 죽있다. 또한 브나야는 갑스엘 용사의 손자 여호야다의 아들이었다. '갑스엘은 유다 남쪽에 있는 지방이었다(수 15:21; 느 11:25). 여호야다는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이었는데(대상 27:5;12:27), 그의 아들 '브나야'는 다윗 치하에서 그렛과 블렛의 대장(근위대장)이 되었고(8:18; 20:23), 2만 4천 명으로 구성된 3월 군대의 장관으로 있었었다(대상 27:5). 또한 브나야는 아도니야의 반역을 분쇄한 공으로 솔로몬 때에 요압 대신 군대 장관이 되었다(왕상 2:28-35).그는 매우 효용한 일(라브 페알림-'위대한 행위', '큰 일')을 행했다. 그는 모압의 강한 용사 둘을  죽였으며, 눈이 올 때에 함정에 내려가서 사자를 쳐죽였고, 2m30cm나 되는 거대한 애굽 사람을 막내기를 가지고 싸워서 그의 창을 빼앗아 그를 죽이고 말았다. 이는 그가 얼마나 큰 힘을가진 자인지를 잘 보여주는 말이다. 다윗은 이러한 그를 인정하여 자신의 시위대 장관을 삼았다. 시위대는 왕의 근위대를 의미하며, 이는 사형 집행 기관인 '그렛' 부대와 왕명을 급히 전달하는 '블렛' 부대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매우 뛰어닌 용사들이었지만, 첫 번째 3인의 용사들보다는 못했다.
 

 5-3. 다윗의 31용사들(24-39)
  사무엘서 기자는 첫 번째 3인의 용사들과 두 번째 3인의 용사들을 언급한 후에 계속해서 그 밑에 있던 30인의 용사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 용사들의 마지막 명단에는 헷 사람 우리야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다윗이 범한 밧세바의 남편으로 다윗의 충신이었으나, 다윗의 책략으로 인해 모살당하고 말았다(11:14-17). 한편 '헷'은 가나안  족속으로서 이방 족속이었다(창 10:15).  마지막 용사의 이름은 예상 외로 다윗이 죽였던 헷 사람 우리야이다. 우리야는 평범하게 징병된 인물이 아니라, 왕을 위해서 특별히 모집된 이방의 전문 군인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이스라엘의 경건한 병사처럼 행동했으며, 이로 인해 다윗의 죄가 더욱 강조될 수 밖에 없었다. 우리야에 대한 언급은 왕권의 교만이 불러온 비극과 그 대가를 암시하는 암호라고 할 수 있다.

  사무엘서 기자는 이들이 모두 37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본문(24-39절)을 보면 용사의 수는 도합 31인이 된다. 여기에 기록된 37인은 다음과 같이 산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 첫 3인의 용사들(8-12절), 2) 둘째 3인의 용사들(13-23절), 3) 세째 그룹의 31인의 용사들(24-39절). 한편 이 용사의 명단에는 군대 장관인 '요압'의 이름이 빠져 있다. 아마도 요압은 전군의 군대 장관이었기 때문에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요압은 헌신적으로 충성하긴 했지만, 그가 아브넬과 압살롬, 그리고 아마사 등을 살해하는 무자비한 행동을 했으며, 솔로몬 왕 때에 반란에 가담했기 때문에 본 명단에서 삭제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6. 다윗의 인구 조사와 형벌(24장)

  24장에는 이스라엘이 다윗이 교만해져서 인구조사를 한 일로 인해 3일간 온역으로 징계를 받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겉으로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지만, 실제로는 이스라엘 땅에 대해 진노하기 위해 여호와께서 부추긴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24:1).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은 다윗이 사단의 유혹에 미혹되는 것을 방임하셨다(대상 21:1).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킨 이스라엘의 범죄는 무엇인가 ? 1) 혹자는 그것을 본서에 기록되지 아니한 '숨은 죄'라고 본다(Kimchi). 2)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다윗의 인구 조사에 동참한 죄라고 본다(Lange). 그러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에 대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을 진노케 한 이스라엘의 범죄는 무엇인가? 1) 어쩌면 이스라엘의 범죄는 이스라엘 전체의 교만이었을 것이다. 인구조사를 한 영역을 보면 이스라엘은 다윗의 지도 아래 처음으로 인근 국가들 가운데 강력한 국가로 등장했다(5-7).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다윗을 통해 거의 실현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자신감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감은 우월감으로 이어지는 교만으로 나타났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징계를 통해서 그들의을 겸손하게 만들고, 그들의 번영이 자신의 의로움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셨을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결국 다윗의 교만한 모습은 교만해진 이스라엘 전체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나의 노래에서 나타났듯이 하나님은 언제든지 가난한 자를 높이시고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하나님이시다. 2) 어쩌면 이스라엘의 범죄는 압살롬의 난과  세바의 난에 나타난 반역적인 태도였을 수도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다윗 왕을 반역하고, 그를 대적하여 압살롬과 세바를 좇았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반역 적인 행동 역시 하나님의 징계의 대상이 되었을 수도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말살하지 않고 인간 역사를 당신의 뜻대로 섭리하여 가신다. 따라서 다윗의 인구 조사는 다윗의 자유 의지와는 상관없이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계코자 다윗의 의식 속에 있던 악한 의도를 허용하셨을 뿐이다. (대상 21:1)을 보면 이러한 인구조사가 '사단의 격동'을 인해 일어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다윗의 인구 조사는 하나님을 인한 것인가? 아니면 사단을 인한 것인가? 아마도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단의 유혹을 허용하셨을 것이다(욥 1:12;삼상 26:19). 다윗의 인구조사는 범죄한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단의 격동을 허용함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다윗은 요압에게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모든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다윗은 인구 조사를 통해서 자기의 세력과 영광스러운 번영을 확인하고 자랑하려 했다. 특히 그는 군사력에 대한 실상을 파악함으로 강대국으로서의 위치를 굳히고자 했다. 이러한 의도는 1) 번영의 근거가 바로 자신에게 있다고 믿었으며, 2) 하나님 보다 군사력을 더욱 신뢰하려 했던 다윗의 교만한 마음을 반영한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흔히 자신에게 찾아온 행복과 번영을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제목으로 삼지 않고 자신의 힘을 괴시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이러한 인간의 과시욕과 명예욕은 그러한 번영과 힘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일로서, 결국 그분의 진노를 자초하게 되었다(시 94:2; 잠 21:4; 눅 1:51). 요압은 다윗의 교만한을 감지하고 이를 만류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그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인구조사를 실시하도록 요압을 재촉하였다. 인구 조사단은 이스라엘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인구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단은 요단 강을 건너서 갓 골짜기에 있는 성읍인 아로엘 우편(야셀 맞은 편)에 장막을 쳤다. '아로엘'은 요단 동편에 있던 한 성읍으로(신 2:36; 수 12:2), 원래는 르우벤 지파에 속했지만, 그곳에 성을 쌓은 자들은 갓 자손이었다(민 32:34). 이곳은 사해에서 동쪽으로 약 22km 떨어진 곳이며, 아르논 강북쪽 해안에 있었다. 이곳은 국경 지대에 있었기 때문에, 요압은 이 곳에서부터 인구 조사를 착수했던 것이다. 야셀은 원래 길르앗에 있는 아모리 성읍이었으나, 후에 갓 족속의 정착지가 되었다(민 32:35; 수 13:25). 이곳은 아모리 지경과 경계지였으며, 갓 지파가 레위 지파에게 준 네 성읍 중에 하나였다(수 21:39). 인구 조사는 큰 사업이었기 때문에 많은 무리들이 동원되었다. 따라서 요압은 이들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장막을 아로엘과 야셀 사이의 초원 지대에 세우고, 이 장막을 인구 조사의 본부로 이용했었다(Keil, Lange).

  그들은 다음과 같은 지명을 차례로 돌아다니면서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 1) 길르앗-2) 닷딤훗시, 3) 다냐안, 4) 시돈, 5) 두로, 6) 히위와 가나안 사람의 모든 성읍, 7) 유다 남편으로 나와서 브엘세바에 이름-8) 조사를 마치고 예루살렘에 이름. '길르앗'(Gilead)은 인구 조사 본부가 설치되었던 아로엘과 야셀이 있던 지방으로(신 3:10), 얍복 강 양편에 있는 산악 지방을 의미한다(창 31:21-48). 이곳에는 갓과 르우벤과 므낫세 반 지파가 살고 있었다. 닷딤홋시는 갈릴리 바다 동편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조사단이 그곳에서 이스라엘 북단인 '다냐안'으로 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이곳은 길르앗에서 다냐안으로 가는 중간 지점이며, 따라서 닷딤홋시 땅은 갈릴리 바다 동편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냐안은 정확히 말해서 '단야안'이며, 이는 이스라엘  북단에 있던 '단'을 가리킨다(수 19:47; 삿 18:29). 이곳은 다메섹의 남서쪽에 있었으며, 당시에 다윗 왕조의 북쪽 경계지에 있었다. 한편, '야안'은 베니게의 신의 이름으로, 이교적인 풍습에 의해 이 지명에 붙여진 듯하다(Bunsen). 시돈은 사실상 다윗 왕국의 영토는 아니었으나, 다윗 왕국의 속국으로 당시 군역에 가담하고 있었다. 한편 시돈성은 베니게의 부요한 성읍이었으며, 단의 북서쪽 지중해 해안에 있었다(창 10:15; 수 11:8; 19:28). '두로'(Tyre) 역시 시돈과 마찬가지로 당시  다윗의 속국이었다. 이곳은 시돈에서 남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에 있었다(수 19:29). 따라서 이스라엘 최북단까지 올라간 요압 일행은 시돈을 기점으로 해서 다시 남쪽으로 선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히위 사람'이나 '가나안 사람'은 모두 이스라엘 내에 거주하던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비록 히위 사람들은 기브온 근처까지 내려와 살기도 했지만(수 11:19), 이들은 주로 이스라엘의 북방 지역, 즉 납달리, 스불론, 잇사갈 지파의 땅에 공동으로 살고 있었다. 따라서 이곳은  후에  '열방의  둘레'라는 뜻인 '갈릴리'로 불려지게 되었다. 한편 이들 이방인들도 역시 군역을 감당해야 했기 때문에 인구 조사에서 제외될 수 없었다. 브엘세바는 유다 네게브 지방의 한 성읍이었고, 남쪽 유다의 행정 중심지였다(대하 19:4). 이곳은 이스라엘 영토의 최남단에 있었다. 그러므로 성경 저자들은 이스라엘의 판도를 서술할 때 흔히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고 기술하였다(삿 20:1; 삼상 3:20; 삼하 3:10). 요압을 지도자로 한 인구 조사단은 위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9개월 20일만에 조사를 마치고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요압의 보고에 의하면 이스라엘에서 전쟁에서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은 80만명이었으며, 유다 사람은 50만명이었다(2-9).

  다윗은 인구 조사를 실시하고 보고를 받은 후에 자신이 여호와께 교만하여 범죄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다윗은 여호와께 나아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다. 다음 날 아침에 하나님은 선지자 갓을 다윗에게 보냈다. 그리고 다윗의 교만함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징계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지시하였다. 1) 7년 기근, 2) 대적 앞에서 3개월 동안 도피함, 3) 이스라엘에 3일간 온역이 있음. 다윗은 사람에게 rsks을 당하기 보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손으로 징계를 받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그는 3일간 이스라엘에 온역을 내리는 징계를 선택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온역을 인해 7만명이 죽음을 당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약속한 3일이 되었을 때에 여호와의 사자에게 징계를 그치라고 명하셨다. 이때에 여호와의 사자는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에 있었다. 여부스인은 예루살렘 성의 원주민이었으며(5:6-8),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은 모리아 산 곧 예루살렘 동북편 언덕에 있었다(대하 3:1). 타작 마당은 추수한 곡물의 겨나 지푸라기 등을 바람에 날려 보내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높은 곳에 있었다. 후에 이곳은 솔로몬 성전을 건축하는 터가 되었다(대하 3:1). 역대상에는 '아라우나'의 이름이 '오르난'으로 기록되어 있다(대상 21:15,18, 20-23). '아라우나'는 여부스식 표기이며, '오르난'은 히브리식 표기였다. 이때에 다윗은 이스라엘을 치는 여호와의 사자를 발견하고, 그 앞에 엎드려서 이렇게 외쳤다.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지만, 이 양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17)" 다윗은 오직 자기만이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고백하면서, 모든 죄의 책임을 스스로 담당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진정한 회개의 참 모습을 볼 수 있다. 참된 회개는 1)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차원을 넘어, 그 범죄로 말미암은 결과서까지 달게 책임지려는 마음 자세를 갖는 것이며, 2) 타인의 허물과 죄악까지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통회하는, 긍휼과 자비의 마음 자세를 갖는 것이다. (대상 21:16)을 보면, 다윗은 '굵은 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했다. 이는 다윗이 일국의 왕이라는 처지에 결코 연연치 않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최대한의 겸손과 회개의 모습을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10-17).

  그 날에 선지자 갓이 다윗을 찾아 가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해 제단을 쌓으라고 지시했다. 이러한 갓 선지자의 말은 다윗의 겸허한 회개에 대한 여호와의 응답이요 화해 선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회개를 인정하시고, 당신의 진노를 진정시킬 구체적인 방안을 갓 선지자를 통해 다윗에게 전달하셨다. 하나님은 화해의 장소로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을 지시하신 것은 그곳에서 천사의 심판 활동이 중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나타난 곳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곳을 화해와 자비의 장소로 지정하시고, 이곳을 성별케 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후에 이곳에는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져 택한 백성들의 시은소가 되었다. 다윗은 그 말을 듣고 즉시 그 명령을 실행하기 위해서 아라우나의 집으로 갔다. 아라우나는 자초지종을 듣고 자기의 타작 마당과 제물을 무상으로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윗은 값없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겠다고 밝히고, 그 모든 것을 장당한 값을 지불하고 사서 제사를 드리겠다고 선언했다. 다윗은 은 50세겔을 주고 그의 타작 마당과 소를 사서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다. 다윗은 아라우나의 소유를 취해 그냥 드릴 경우, 그 제사가 완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정 다윗은 자신의 재산을 바쳐 최대한의 정성을 드리기를 원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방 출신 개종자 아라우나의 아낌없는 헌신과, 참된 눈물의 회개자 다윗 왕의 희생적인 순수함을 볼 수 있다. 이같이 아름다운 정경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1) 참된 헌신은 결코 이해 타산이나 인색함 없이 온전하고도 자발적으로 드려야 한다(고후 9:7). 2) 자기 희생 없는 값싼 제사는 여호와께 무의미한  것이다(신  16:16). 3)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온전한 헌신과 순수한 희생의 마음 자세이다(삼상 15:22; 사 1:11-17; 히 13:16). (대상 21:25)에는 땅 값으로 금 600세겔을 지불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차이를 각각 다른 품목에 대한 가격으로 보아야  한다(Pulpit). 즉 본문에 나온 은 50세겔(1세겔-노동자 4일의 품삯)은 소와 타작 마당에 해당하는 값이며, (대상 21:25)에 나타난 금 600세겔은 아마도 성전 부지로 사들인 모리아 산 전체에 대한 값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다윗과의 화해를 표시로 아라우나 마당에서의 제사를 요구하셨다(18절).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징벌하시는 방법과 더불어 그 형벌을 해결하시는 방법까지도 생각하고 계셨다. 이처럼 인간의 회개와 죄로부터의 회복은 인간 스스로의 자의식과 자발적 행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구원 섭리에서 비롯된다(시 51:10-13).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사의 처소로 '아라우나 마당'을 특별히 요구하신 데는 그 의미하는 바가 크다. 즉 예루살렘 성 동쪽 모리아 산에 위치한 그 마당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곳으로서(창 22:1-14), 아브라함의 순종 및 신앙과 하나님의 준비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은혜가 기억되는 장소였다. 이런 역사적인 명소를 하나님께서 당신의 화해와 자비의 처소로 다시 한번 택하시고 성별케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와 보살피시는 은혜를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영적이고 내면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장소에 얼마 후 솔로몬 성전이 세워지게 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섭리가 아닐 수 없다(대하 3:1). 이때에 다윗이 드린 '번제'는 다윗이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해 하나님께 드린 제사였다(레 1:4). 그리고 다윗은 번제에 이어 화목제도 드렸다. 이 '화목제'는 하나님께서 죄를 사해 주셨다는 전제하에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에 대해 감사하면서 드린 제사이다. 이러한 다윗의 제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내의 온역 재앙은  완전히 그치게 되었다. 이것은 인간들이 당하는 모든 고통과 재난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오직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이는 결국 이스라엘의 삶은 왕정과 같은 정치 조직에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미래와 생명은 기도를 들으시고 땅을 고치시는 유일하신 여호와 한 분에게만 달려 있는 것이다.


7. 부록(21-24장)의 결론

  사무엘하의 마지막 장들(21-24장)은 다윗 언약의 성취가 정치적 조직의 문제가 아니며, 구원사를 위한 여호와의 간섭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호와께서 다윗이 자신의 통치 안에서만 나라를 올바르게 통치할 수 있게 하셨다. 이렇게 함으로 여호와께서는 다윗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언약을 견고하게 세워 주셨다. 이와 같이 사무엘서는 이스라엘 역사와 삶에 있어서 여호와의 주권을 강조하면서 그 끝을 맺고 있다.


ⅱ. 사무엘서의 정경적-신학적 의미

 1. 역전의 하나님

  사무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낮은 자를 높이시고,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역전의 하나님임을 선포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은 한나의 기도에서 고전적인 형태로 묘사되고 있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7)." 하나님은 낮은 자를 높여주시며,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먼저 된 자를 나중되게 하시고, 나중된 자를 먼저 되게 하신다(마 19:30, 막 10:31, 눅 13:30). 이러한 역전의 패턴은 구약에서는 자주 나타난다. 하나님은 우상 제작자의 아들인 아브라함을 불러서 축복의 근원으로 삼으셨으며, 차남인 야곱을 불러 장남인 에서를 이기게 하셨다. 사무엘서에는 이러한 역전의 패턴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사무엘서 전체를 살펴보면 여호와께서 고통당하는 자를 구원하시고, 더 나아가 고통을 가한 자들에게 승리하게 만드신다. 하나님은 한나가 브닌나를 이기게 하셨으며, 다윗이 사울을 이기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이기게 하셨으며, 블레셋의 다곤신과 골리앗을 넘어뜨리고 다윗의 뿔을 높여주셨다. 또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넘어지게 하신다. 하나님은 브닌나와 엘리의 아들들과 골리앗과 블레셋과 사울과 압살롬을 넘어지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밧세바 사건과 인구 조사로 교만해진 다윗을 가차없이 꺾으셨다. 여호와는 언제든지 그들의 겸손과 교만에 따라 그들의 상황을 역전시키신다. 이러한 점에서 여호와는 이방인이 섬기는 다른 신과 달랐다. 여호와는 애굽이나 메소포타미아의 신과 같이 귀족들의 신이 아니었다. 여호와는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노예인 이스라엘의 신이셨다. 애굽의 신들은 포식하여 뚱뚱해져서 무감각해진 신이었다. 그러나 여호와는 왕과 귀족들의 학대로 인해 부르짖는 노예들의신이셨다. 여호와는 낮은 자의 부르지음에 귀를 기울여 주시고, 가난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들어서 귀족들과 함께 안ㄱ 하시는 역동적인 하나님이셨다.
 

 2. 구속사에서의 다윗 언약

  사무엘서는 다윗의 왕정은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선물임을 강조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변방 공동체에 불과한 이스라엘이 이 지역을 주도하는 지배 세력이 된 것은 다윗 때문이었다. 사무엘서는 이러한 다윗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탁월한 군사-정치적 지도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은혜임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 하셨으며(삼하 5:10, 7:3), 다윗을 자기의 아들로 삼고, 다윗에게 영원한 집(왕조)을 약속하셨다. 이러한 점에서 다윗 언약 뒤에 나오는 역사 기록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언약이 어떻게 실현되었는지 보여주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다윗과 그 후손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성취하셨다. 그리고 이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1) 언약의 중개자
  하나님은 다윗과 그 후손을 자기의 아들로 받아들이셨다. 따라서 다윗과 그 후손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언약의 중개자 역할을 수행했다. 이스라엘에서 왕이 되는 것은 하나님과 이러한 언약 관계 안에 있으며, 또 언약의 중개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요시아 왕은 백성을 모으고 언약의 법인 율법을 읽고 그 동안 이스라엘이 떠났던 언약을 다시 갱신하였다(왕하 23:1-3). 왕의 하나님을 대리하는 권위를 행사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대표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이러한 언약 중개자로서의 이중 역할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이스라엘 왕의 위치와 깊은 관계가 있다.

 2) 남방 유다 왕국의 장수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 후손이 죄를 범하면 징계하기는 하지만, 아주 버리지는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솔로몬이 범죄했을 때에도 그를 징계하는 동시에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다. 그리고 솔로몬이 아들 르호보암 때에 나라를 둘로 나누면서도 다윗의 후손의 위를 끊지 않으셨다. 그 후에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유다 왕조를 징계하면서도 동시에 자비를 베풀어 주셨다. 400년 이상 지속된 다윗 왕가의 역사는 하나님의 언약과 자비로 인해 가능했다.    

 3) 그리스도에 의한 성취
  신약 성경은 이새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윗의 약속이 성취되었다고 증거하고 있다(마 1:6, 눅 3:32). 다윗 왕조는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잊혀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를 다윗의 고향이며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하셨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셨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롬 1:3-4)에서 다윗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며, 그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 역시 그리스도께서 아들이시기에 왕이요 후사이며(히 1:2), 제사장이며 중보자라고 말하고 있다(히 5:5-6).   

 4) 그리스도의 성취의 새로운 의미
  그러나 예수는 단순히 다윗의 옛 언약을 성취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셨다. 마리아의 몸에서 인간으로 태어나신 예수는 우리 가운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모습으로 사셨다(요 1:14, 롬 1:3, 갈 4;1, 히 2:14).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성포되셨지만, 사랑하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고난과 죽음을 기까이 받아들이셨다(빌 2:9, 롬 8:31-39, 히 5:7-10). 사실 다윗 왕정이나 예루살렘 성전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지 못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몸을 드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높이시고 그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통치권을 부여하셨다(엡 2:11-22. 고후 5:16-21).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인류의 속죄를 완성하시고,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셨으며,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복음 전파와, 돌봄, 치유의 사역을 위해서 세상에 파송된 지체인 것이다(마 25:31-46, 28:18-20). 이제 신약의 교회는 모두 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실 것"을 기다리며 살고 있다(계 11:15).
 

 3. 다윗의 수난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우리는 앞에서 다윗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았다. 또한 신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사건을 다루면서 다윗의 수난 이야기에 호소하고 있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다윗이 받는 고통과, 아들을 용서하시는 다윗의 사랑의 이야기가 (삼하 15-19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신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과 고통을 묘사하면서 이러한 이야기의 여러 요소들을 적절하게 인용하고 있다.

예수의 수난

비교

다윗의 수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를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요 18:1)

예수께서 수난기간동안 기드론 골짜기를 지나가심

온 땅 사람이 대성통곡하며 모든 인민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니라(삼하 15:23)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좆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좆았더니(눅 22:39)

예수께서 감람산에 올라가시면서 울고 기도하심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머리를 거리우고, 맨 발로 울며 행하고 저와 함께 가는 백성들도 각기 그 머리를 가리우고 울며 올라가니라(삼하 15:30)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눅 23:35)

예수께서 백성들의 저주를 짊어지심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거 사울의 집 족속 하나가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저가 나오면서 연하여 저주하고(삼하 16:5-23)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 27:5)

예수의 배반자가 아히도벨처럼 목을 매어 자살함

아히도벨이 자기 모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가지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 아비 묘에 장사되니라(삼하 17:23)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옴...어린 양이 성전이 되심(계 21장)

주님께서 영광 중에 예루살렘에 돌아오심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군을 물리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옴(삼하 19:2-44)

 


ⅲ. 결론

  사무엘서는 사사 제도에서 왕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와 왕정이 세워지는 역사를 그리고 있다. 이는 구약 계시 뿐 아니라 ,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이른 전체 구속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다윗 왕조의 지속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무엘서가 강조하고 있는 점은 신정 저치이건, 아니면 왕정 정치이건 이스라엘의 존재와 삶은 오직 여호와 한 분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왕들과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자의 정의와 율법의 표준에 맞추어 살아가야 했다. 그들이 이러한 율법의 표준에 맞추어 살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연단시키셨다. 사무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방법으로 이스라엘의 삶에 간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를 이해하지 못하여 당황해 했다. 사무엘서 뒤에 나오는 열왕기서는 이러한 전망에서 이스라엘이 언약 백성으로서 어떤 역사를 만들어 갔는지를 기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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