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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사무엘하

[스크랩] 사무엘하(1): 다윗 왕국의 확립 (1-장)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7. 14:55

 사무엘하(1): 다윗 왕국의 확립 (1-장)

 

1. 사무엘하의 구조(참조-김지찬 저 "요단강에서 바벨론 물가까지")
  사무엘하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무엘하 전체의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무엘하의 구조를 암시하는 단서는 궁정관리들의 목록이다. 사무엘하에는 거의 동일한 궁정관리들의 목록이 두 번(삼하 8:16-18, 20:23-26) 반복되어 기록되어 있다. 거의 동일한 이 명단들은 우연한 반복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이 명단은 사무엘하를 세 단락으로 구분하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이 명단들을 기준으로 해서 사무엘하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다윗의 왕권의 확립(삼하 1;1-8:18)
  제 1단락인 (1-8장)은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이 왕이 되어 나라를 견고하게 만들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사울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은 지도자를 잃고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다윗은 나라의 혼란을 수습한다. 그리고 남방 유다와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나라를 견고하게 만들었다.

 2) 다윗의 왕권의 위기와 극복(삼하 9:1-20:26)
  제 2단락인 (9-20장)은 다윗의 범죄로 인해 찾아온 다윗 왕국의 위기와 그 극복 과정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스캔들과 우리야의 살인 사건으로 인해 가정과 정치적으로 치명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는 이 사건을 숨기려고 했지만, 후에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으며,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해주셨다.

 3) 부록(삼하 21:1-24:25)
  제 3단락인 (21-24장)은 부록으로서, 사무엘서 전체의 주제를 다시 한 번 반복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2. 사무엘 하의 내용개관

다윗왕권의 확립(1-8장)

다윗왕권의 위기와 극복(9-20장)

부록(21-24장)

사울

전사

다윗 왕국의
성립

견고해진다윗
왕국

요나단과의 언약을지킴

암몬수리아
전쟁

다윗의범죄

압살롬의
도전

승리

세바의
반역

진노

용서

다윗의용사들

다윗의
노래

진노와
용서


다윗

애가

사울가문과의 전쟁

블레셋정복

법궤운반

다윗언약

행정
제도

므비보셋대접

도전과
승리

밧세바
사건

암논을 죽임

반역

다윗복귀

반역
진압

기브온
거민 원한
해결

군대조직

감사찬송

인구조사

1

2  4

 5

 6

 7

  8

  9   

  10

11  12

 13 

1418

 19

 20

 21

22

23

  24



< 다윗의 왕권의 확립(삼하 1-8장) >

  첫 번째 단락인 삼하 1-8장은 그 내용을 살펴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혼돈에 빠진 사울 왕국(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애도)(삼하 1장)
 2) 다윗 왕국의 성립(삼하 2-7장)
 3) 견고해진 다윗 왕국(8장)

  제 1단락(1장)은 사울이 죽은 후에 패배하고 지도자를 잃고 흩어진 이스라엘 국가의 침체된 상태를 보여준다. 그리고 제 3단락(8장)은 다윗이 어떻게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하는 성공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제 2단락(2-7장)은 다윗이 혼란한 이스라엘을 어떻게 수습하고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한 중간 과정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1. 혼돈에 빠진 사울 왕국(1장)

 1-1. 다윗이 사울의 전사 소식을 들음(1:1-16)

  사무엘하 1장은 시글락에 있던 다윗에게 한 아멜렉 소년이 사울의 죽음의 소식을 전하는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다. 다윗이 아멜렉 사람을 치고 시글락에 돌아온 지 3일째였다. 그때에 사울에게 용병으로 고용되었던 한 아말렉 소년이 사울의 진에서 피해 다윗에게로 왔다. 그는 슬픔의 표시로 옷을 찢고 머리에 흙을 묻힌 채로 다윗에게 나아와서 땅에 엎드려 절을 했다. 다윗은 그에게 "네가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으며, 그 소년은 "이스라엘 진에서 도망쳤다!"고 대답했다. 다윗은 그 소년에게 이스라엘의 전쟁 상황에 대해서 물었으며, 그 소년은 이스라엘의 패배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 소식을 전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전사 소식을 듣고, "네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아말렉 소년은 자신이 "사울의 요청을 따라 사울을 죽이고, 그 증표로  머리에 썼던 면류관과 팔에 있던 고리를 벗겨 가지고 왔다!"고 대답했다. 그는 사울의 정적이었던 다윗에게 환심을 얻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다. 다윗과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들은 사울과 요나단의 전사 소식을 듣고 슬픔의 표시로 옷을 찢었다. 그들은 사울과 요나단,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패배와 죽음 전사 소식을 듣고 저녁때까지 슬퍼하고 울며 금식을 했다. 그리고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는 사울을 죽였다고 보고한 아말렉 소년"을 즉시 죽여버렸다(1-16). 이러한 내용은 다윗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얼마나 존중히 여겼는지를 보여주는 한편, 다윗이 사울의 죽음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1-2.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한 다윗의 애가(17-27)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 소식을 듣고 애가를 지어 사울과 요나단을 조상했다. 다윗은 이 노래를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명했다. 이 노래의 이름은 "활 노래"였으며, 그 내용이 야살의 책에 기록이 되었다(17-18). 우리말 성경에 "활 노래"로 번역된 말은 원래 "케쉐트"("활")란 말이었다. 원무에는 "노래"라는 말이 없고 '활'이라고만 되어 있다. 다윗이 자신의 '애가'를 '활'이라고 지은 까닭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1) 사울이 죽게 된 이유 중에 하나가 블레셋인의 화살을 맞았기 때문이었다(삼상 31:3). 2) 다윗을 위기에서 구해 준 것, 역시 요나단의 활 때문이었다(삼상 20:17-42). 3) 사울과 요나단이 속한 베냐민 지파는 활 쏘는 자들로 유명했었다(대상 8:40;12:2). 4)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윗의 노래 중에 '요나단의 활'이라는 말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22절). '야살'은 '의로운 자'란 뜻이다. 그러므로 '야살의 책'은 '의로운 자의  책'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 책은 이곳 외에 (수 10:13)에도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이 최소한 여호수아와 사무엘 이전에도 존재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이 책의 기원이나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학자들은 이 책이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서 위대한 인물이나 큰 사건을 노래한 서사시를 수록했던 고대 문서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Glodschmidt, Keil). 이 노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1)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함(19). 2) 블레셋 인이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지 않게 되기를 원함(20). 3) 전쟁터였던 길보아 산에게 그들의 죽음을 슬퍼할 것을 요청함(21). 4) 사울과 요나단의 용맹을 기리고, 그들이 생사를 함께 한 일을 노래함(22-23). 5)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들의 죽음을 애도할 것을 요청함(24-25). 6) 자신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을 기억하며 그의 죽음을 슬퍼함(26). 7)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해 다시 한 번 애통함(27). 이러한 다윗의 애가는 다윗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얼마나 존중히 여겼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또한 다윗 자신이 사울의 죽음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1-3.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이 됨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헤브론으로 올라가라고 지시하심.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으로 두 번째 기름 부음 받음(7년 6개월)(10-)  


 
1-4. 사울을 장사한 야베스 족속을 격려하는 다윗(5-7)


2. 다윗 왕국의 성립(2-7장)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은 우여곡절을 거쳐 "유다와 이스라엘"의 보좌를 얻게된다. 그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삼하 2;1-5:16)은 다윗이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 단락의 전체적인 구조를 살펴본 후에 각 소단락의 주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a. 갈등의 가능성(2:1-11)
   b. 갈등의 표출: 소강 상태(2:12-32)
      c. 요약과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들의 명단(3:1-5)
   b': 아브넬과 이스보셋의 죽음: 소강상태가 깨짐(3:6-39, 4:1-12)
 a': 갈등 해소(5:1-5)
      c. 요약과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들의 명단(5:6-16)

  사울이 죽은 후에 유다에는 다윗이 왕으로, 이스라엘에는 이스보셋이 왕으로 등극하면서 갈등의 가능성이 a 단락(2:1-11)에 나타나지만, 이 갈등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다윗을 왕으로 삼는 a'단락(5:1-5)에서 해소된다. 갈등의 가능성은 실제 갈등으로 표출되고 이스보셋 편의 아브넬 장군과 다윗 편의 요압 장군 사이에 일어난다. 그러나 이 전쟁은 아브넬의 탁월한 군사적 능력으로 인해 요압 편의 완전한 승리로 끝을 맺지 못하면서, b단락(2:12-32)에서 소강 상태에 이른다. 결국 이스라엘에 두 지도자인 아브넬과 이스보셋이 있기 때문에, 갈등의 소강 상태가 다윗에게 유리하도록 완전히 해결되려면 이 둘의 죽음이 필요하게 된다. 결국 b'단락(3:6-4:12)에서는 두 지도자인 아브넬과 이스보셋이 죽게되는 과정이 나타난다. 그리고 위의 a-b 내용과 a'-b' 단락 사이에는 각각 요약과 다윗의 아들들의 명단인 c-c'단락이 삽입되어 있다.
 

 2-1. 갈등의 가능성(2:1-11)
  사울이 죽게 되자 다윗은 여호와께 유다로 돌아갈 것인지에 대해 물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유다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시매 다윗은 시글락을 떠나 헤브론으로 올라갔다(1). 헤브론(연합, 친교)은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에 있는 성으로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였다(수 15:13; 삿 1:10). 여호와께서 새로운 정착지를 찾는 다윗에게 헤브론으로 가라고 명하신 까닭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1) 헤브론은 유다 지파의 성읍이며 유다 지파 지역의 중심부에 있었다. 그러므로 이 곳은 다윗이 유다 지파의 세력을 업고 왕이 될 정치적인 거점으로 알맞은 곳이었다(4절). 2) 헤브론은 여호수아 시대에 갈렙에게 패한 아낙 자손들이 차지했던 요새로서(수 15:13-17)산지가 성읍으로 둘러싸인 군사적 요충지였다. 3) 헤브론에는 다윗과 친분이 두터운 유다의 장로들이 거주하고 있었다(삼상 30:26,30). 다윗은 자기의 가족을 데리고 헤브론으로 갔으며, 그 곳에서 유다 사람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을 삼았다(2-4). 이때에 다윗은 신하들을 통해서 길르앗 야베스 족속이 사울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들의 충성스러운 행위를 축복하고, 자신이 사울을 이어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5-7). 그러나 군대장관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님으로 건너가서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다(9-10). 마하나임은 '두 진영' 또는 '두 군대'라는 뜻이다. 이곳은 유서 깊은 땅으로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고향 가나안으로 돌아가던 중 천사들을 만났던 곳이다(창 32:1,2). 이곳은 요단 동쪽 갈르엣과 압복강 사이에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것은 갓 지파와 므낫세 반지파의 기업의 경계선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쉽게 통제한 것으로 보인다(수 13:26,30). 다윗은 길르앗의 야베스 거민들에게 사절단을 파송했다(4-7). 그러나 길르앗 족속은 이스보셋을 추종하고 다윗을 좆지 않았다. 이는 아직 다윗이 백성들의 민심을 온전히 얻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술이 어디였는 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추측들이  있다. 이스르엘은 요단 강에서 길보아 산(삼상 31:1)을 거쳐 갈멜 부근을 지나 지중해까지 뻗쳐 있는 넓은 계곡과 평야 지대이다. 하지만 사울 당시 이스라엘은 길보아 전투에서 패하여 이곳을 블레셋에게 빼앗겼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40세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2년 동안 왕으로 있었다. 그리고 다윗은 유다에서 왕이 되어 6년 6개월 동안 왕으로 있었다(11).


 
2-2. 갈등의 표출: 소강 상태-아브넬과 요압 군대의 싸움-(2:12-32)
  이스라엘과그 후에 이스보셋의 군대장관인 아브넬과 다윗의 군대 장관인 요압이 각각 군사들을 이끌고 기브온으로 와서 큰 전쟁을 하게 되었다. '기브온'('언덕')은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으로 9km 떨어진 곳에 있는 히위 족속의 성읍이었다. 이 성은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한 후에 베냐민 지파에게 기업으로 분배되었다(수 18:25). 이곳은 헤브론에서 약 35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마하나임에서는 약 60km 정도나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이스보셋이 군사를 이끌고 먼저 이곳으로 왔다는 것은,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기습적인 군사 행동을 감행했음을 의미한다. 기브온에는 양 진영이 탐낼 만큼 많은 물을 담을 수 있는 저수지가 있었다. 이곳에 물을 채우면 4-6천 명이 물을 마실 수 있었기 때문에, 당분간 성이 포위되어도 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기브온 연못은 가나안에서 아주 중요한 식수 공급원이었으며 전략적으로 차지하는 의미 가 큰 곳이었다. 그러므로 이곳의 지배권을 쟁탈하기 위해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요압과 아브넬은 각각 12명씩 대표를 내보내고 서로 싸우게 하였는데, 그들이 서로 싸우며 죽이는 큰 살육전쟁을 벌였다. 이로 인해 이 곳 이름은 "헬갓핫수림"이 되었다. 이 말은 '헬갓'(들판)과 '핫수림'(날카로운 칼날)이란 말이 합쳐져 이루어진 복합 명사로서, "날카로운 칼날들의 들판'이란 뜻을 가진 말이었다. 그때에 싸움이 맹렬하였는데, 아브넬의 군사들이 요압의 군사들에게 패하여 달아나게 되었다. 이때에 요압의 동생인 아사헬이 아브넬을 추격하였다. 아브넬은 그를 죽이면 요압과 사이가 나쁘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그에게 다른 사람을 좆고 자기를 추격하지 말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아사헬은 그 요청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아브넬을 쫓았다. 그러므로 아브넬은 할 수 없이 창 끝으로 아사헬을 찔러 죽이고 말았다. 요압과 아비새는 계속해서 아브넬의 군대를 추격했는데, 그들이 기아 맞은 편에 있는 암마 산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지고 말았다. '기아'의 뜻은 '폭포' 또는 '솟는 샘'이란 말로서 베냐민 땅, 기브온 광야의 어느 한 지점으로 보인다. 이 곳에는 사람들이 쉬면서 목을 축일 수 있는 샘이나 개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암마 산' 역시 기브온 광야에서 요단 강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는 곳으로 추정된다. 이때에 사울의 동족인 베냐민 지파는 아브넬의을 돕고 있었다. 그때에 아브넬은 요압에게 더 이상 형제끼리 싸움을 하지 말자고 권유함으로 전쟁은 끝이 나고 말았다. 그 후에 아브넬은 그의 군사들을 이끌고 마하나임으로, 요압은 헤브론으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유다와 이스라엘은 서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소강 상태로 들어서게 되었다(12-32).


 2-3. 요약과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들(3:1-5)
  그 후 갈등의 소강 상태는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의 오랜 전쟁"으로 지속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다윗은 점점 강해져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해져갔다(1). 이러한 요약 후에 사무엘서 기자는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들의 명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2-5). 1) 맏아들-암논(아히노암의 소생), 2) 둘째 아들-길르압(아비가일의 소생), 3) 셋째 아들-압살롬(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소생), 4) 넷째 아들-아도니야(학깃의 소생), 5) 다섯째 아들-스바댜(아비달의 소생), 6) 여섯째 아들-이드르암(에글라의 소생). 이 후손들은 다윗이 왕 위에 오른 후에 그 왕조를 이어나갈 사람들이었다. 이 명단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들의 명단(5:13-16)과 연결될 뿐 아니라, 삼하 6장에 나오는 미갈의 불임과도 연결된다.


 
2-4. 아브넬의 투항과 죽음: 소강 상태가 깨짐(3:6-39)
  사울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있는 동안에 아브넬은 사울의 집에서 권세를 잡기 시작했다(6). 그러다가 아브넬은 이스보셋의 첩인 리스바를 취함으로 자신이 권세를 잡으려는 욕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자기의 첩과 간통한 것에 대해 분노하여 아브넬을 크게 책망했다. 이로 인해 아브넬과 이스보셋 사이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브넬은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한대로 다윗을 이스라엘 집의 왕으로 세울 것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스보셋은 아브넬을 두려워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7-11). 결국 아브넬은 다윗에게 사신을 보내어 자신과 언약을 맺으면 이스라엘을 다윗에게 넘기겠다고 제안하였다(12). 다윗은 이 제언을 받아들이면서, 그 조건으로 자신의 아내였던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고 했다. 다윗은 사울의 딸을 아내로 삼음으로 자신의 왕위가 합법적인 것임을 보이려고 했다(13). 그리고 나서 다윗은 이스보셋에게 자기의 아내였던 미갈을 돌려보내라고 연락했다. 그리고 이스보셋은 그 말대로 미갈을 그 나면 발디엘에게서 데려다가 다윗에게 보냈다(14-15). 그 후에 아브넬은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그들이 요청했던 대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아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러한 뜻을 베냐민 집에도 전하고, 그 결정 사항을 다윗에게 전하기 위해서 헤브론으로 올라갔다(16-19). 아브넬이 부하 장수 20명을 데리고 다윗에게 나아갔을 때 다윗은 그를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아브넬은 그 자리에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고 돌아갔다(20-21).

  다윗은 자신을 왕으로 삼은 것이 여호와께로부터 난 것임을 굳게 믿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아브넬과 언약을 맺고, 또 사울의 딸 미갈을 취함으로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오르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다윗의 시도는 요압이 아브넬을 죽임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아브넬이 헤브론을 떠난 뒤에 요압과 그의 부하들은 적군을 치고 노략한 물건을 가지고 베브론으로 돌아왔다. 요압이 헤브론으로 돌아온 후에 그는 아브넬이 왔다가 간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다윗에게 어찌하여 아브넬을 살려서 보냈느냐? 고 항의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급히 사람을 보내서 시라 우물가에서 아브넬을 다시 불러왔다. 시라 우물이 어디인지에 대하여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이곳은  헤브론에서  북쪽으로 약 4km 떨어진 곳으로 이 곳에는 대상들을 위한 숙박 시설이 있었다(Josephus). 2) 이 곳은 헤브론에서 서북쪽, 즉 예루살렘 쪽으로 2.4km 떨어진 곳에 있는 오늘날의 '아인 사라' 저수지라는 견해이다(R. Young). 어쨌든 아브넬은 뜨거운 사막의 열기를 피해 이곳에서 쉬면서, 행군하기에 알맞은 서늘한 때를 기다리다가 요압이 보낸 사자들을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때에 요압은 다윗이 아브넬을 부르는 것처럼 위장해서 아브넬을 불렀을 것이다. 아브넬은 자신이 요압의 아우 아사헬을 죽였기 때문에 요압이 불렀다고 하면 결코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요압은 아브넬이 돌아온 것을 보고 비밀스러운 말을 그에게 하는 것처럼 하다가, 그의 배를 찔러서 죽이고 말았다. 요압은 이렇게 하여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원수를 갚게 되었다. 그 후에 다윗은 요압이 아브넬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간교한 계교를 써서 아브넬을 죽인 요압과 그의 집을 저주했다. 다윗은 요압을 비롯한 모든 백성에게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아브넬 앞에서 애통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다윗은 직접 아브넬의 상여를 따라가서 그의 시체를 헤브론에 장사했으며, 그 무덤에서 소리를 높여 울었다. 이 때에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지어 노래로 불렀다. 그리고 다윗은 그 날 저녁 해가 질 때까지 금식하여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지켜 본 모든 백성들은 아브넬을 죽인 것이 다윗이 시킨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윗은 요압이 자기의 뜻과는 다르게 아브넬을 죽인 것을 알았지만, 자신의 힘에 약해서 요압을 처벌하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그는 그 모든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게 되었다(22-39).


 2-5. 이스라엘 왕 이스보셋이 암살 당함(4:1-12)
  아브넬의 암살 소식은 곧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그는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손맥이 풀렸으며, 온 이스라엘도 그 소식을 듣고 놀라게 되었다(1). "손 맥이 풀렸다"는 말('이르푸  야다우')은 '손이 약해졌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사용된 '약해졌다'는 말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빠진  상태를 묘사하는  말이다(렘 6:24; 50:43; 겔 21:7). 이 말은 이스보셋이 아브넬의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를 잘 묘사하고 있다. 아브넬의 피살 소식은 온 이스라엘을 당혹감과 두려움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고대사회에서는 영웅적인 한 인물에게 국가의 운명을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군장 중에는 바아나와 레갑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베냐민 족속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이었다(2). "군장"이라고 번역된 말('사리 게두딤')은 2:8에 나오는  군장, 즉 '사르 차바'와는 다른 말이다. '사르 차바'는 '군대의 사령관"을 의미하는 말인데 반해 본문에 사용된 '사리 게두딤'은 '무리들의 우두머리'란 뜻으로, 한 부대를 책임지던 지휘관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공동 번역은 이를 '특공대 대장'으로 번역하고 있다. 바아나와 레갑은 이스보셋과 같은 베냐민 지파였다. 그러나 그들은 사울 왕가를 무너뜨리는 반역의 선봉에 섰다. 이는 그들이 비열한 공명심과 사악한 출세욕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브에롯은 이스라엘이 기브온과의 조약을 맺을 때 얻은 네 성 중 하나였다(수 9:17). 후에 이 성은 베냐민 지파의 14성읍 중에 하나로 편입되었다(수 18:25).

  브에롯 사람들은 일찍 깃다임으로 도망쳐서 당시까지 그 곳에 살고 있었다(3). '깃다임'이 어디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느 11:33)에는 이 곳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거주했던 곳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이 곳과 동일한 곳인지를 알 수 없다. 브에롯 사람들이 깃다임으로 이주한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길보아 전투(삼상 31장) 후에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을 습격하자 브에롯을 버리고 깃다임으로  피신했다(Keil, Patrick). 2)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했을 때(21:1-2) 그곳을 떠났다(Pulpit).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는 므비보셋이라는 절뚝발이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는 5살 때에 사울과 요나단의 전사 소식을 듣고 유모가 안고 도망하다가 떨어뜨려서 다리를 절게 되었다(4). 레갑과 바아나는 서로 모의하고 이스보셋이 낮잠을 자는 때를 이용해서 배를 찔러 죽였다. 그리고 그들의 이스보셋의 머리를 베어가지고 밤새도록 아라바 길을 통해서 헤르본에 있는 다윗에게로 가지고 갔다(5-8). 그러나 다윗은 인간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의 구원자임을 밝힌 후에 두 암살자를 처형시켰다(9-12). 다윗은 전에서 사울과 요나단의 전사 소식을 전한 사람을 시글락에서 처형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이제도 전과 같이 사울의 아들을 암살한 두 군장을 죽이고, 수곶을 베어서 그 시체를 헤브론 연못가에 매달았다. 그리고 나서 다윗은 이스보셋의 머리를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무덤에 장사하였다. 이러한 다윗의 태도는 그가 왕으로서의 권위를 하나님께 맡기고, 암살을 권력의 수단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2-6. 갈등 해소(5:1-5)
  이렇게 해서 사울의 가문에 속한 정적인 이스보셋과 군대장관인 아브넬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자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이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 나아와서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게 되었다. 그들은 다윗이 전에도 이스라엘을 인도했으며, 또 여호와께서도 다윗이 이스라엘의 목자와 왕이 될 것이라고 약속한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이 헤브론에서 다윗과 언약을 맺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을 삼았다(1-3). 그러나 이 모든 일은 다윗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각 지파들의 장로들이 주도했다. 다윗이 왕이 된 것은 다윗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여호와의 언약을 기억하고 그것을 이행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일은 다윗이 왕이된 것이 여호와의 은혜 때문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윗은 30세에 왕이 되었으며, 그 후 약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그는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동안 유다 지파를 다스렸으며, 예루살렘에서 33년 동안 유다와 이스라엘을 다스렸다(4-5).


 
2-7.요약과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들의 명단(5:6-16)
  이제 사울과 다윗의 싸움은 끝이 났으며, 다윗은 유다와 이스라엘 위에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왕이 되었다. 사무엘서 기자는 바로 이 시점에서 다윗이 여부스 족속을 치고 예루살렘을 정복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다윗은 자기와 함께 하던 정예병을 이끌고 여부스 사람이 있던 예루살렘 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여부스 사람들은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다윗을 조롱했다(6). 다윗이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기려고 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1) 헤브론은 유다에서 볼 때는 중심 지역이었지만, 이스라엘 전체로 볼 때에는 너무 남쪽에 치우쳐 있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었다(Pulpit). 2) 예루살렘은 주위가 깊은 골짜기로 형성되었으며, 성읍 자체가 고지에 자리잡고 있는 천연적인 방어 요새였다(Wycliffe). 3)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기드론 골짜기에는 기혼 샘이 있었기 때문에 충분한 수원을 확보하고 있었다(Lange). 4) 예루살렘은 다윗이 속한 유다 지파와 사울이 속한 베냐민 지파의 경계지역에 있었다(수 15:7,8; 18:6). 따라서 예루살렘은 두 지파 간의 심각한 갈등을 해소시키고, 온 나라를  화합을 도무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Keil  & Delitzsch). 5)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중심부로서 중앙 성소를 짓기에 적합한 곳이었다(Leon Wood). 여부스 족속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전부터 예루살렘과 그 주변 산간  지역에 거주해  왔던  족속이었다(민 13:29; 수 15:8; 18:16). 이들은 여호수아 당시 이스라엘의 침공을 받아 일시적으로 패배했지만(수 10:23,26), 완전히 정복당하지는 않았다. 그 후 사사 시대에 이르러 유다 및(삿 1:8)베냐민 지파의 자손들(삿 1:21)도 그들을 완전히 쫓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점차 세력을 확보하고 마침내 예루살렘을 그들의 방어 기지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윗에 의해서 완전히  정복을 당하게 되었다(7-9절). 여부스는 한때 예루살렘의 또 다른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수18:16,28; 삿 19:10; 대상 11:4). 여부스 족속은 다윗이 자신들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루살렘이 정복하기에 매우 어려움 성이었기 때문이다.  1) 예루살렘은 당시 가나안을 남북으로 연결시켜 주던 주요 도로인 '왕의 대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2) 남쪽과 동쪽의 성벽은 절벽과도 같은 가파른 언덕에 세워져 있었고, 3) 그  주변에는 외적의 침입을 막아 주는 기드론, 힌놈, 두로베온과 같은 골짜기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여부스 족속들은 자신 만만하게 다윗을 조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도우심을 입어 시온 산성을 정복할 수 있었다(7). 시온은 '요새'란 뜻으로, 예루살렘 남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구릉의 이름이었다. 다윗은 이곳에 세워진 산성을 빼앗아서 그 이름을 다윗 성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시온'은 넓은 의미로 예루살렘 전체를 묘사하는 말로 사용되었다(왕하 19:21; 사 3:16; 슥 2:10). 후에 이 곳은 성전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하여 자주 언급되었다(사 24:23; 옵 1:17). 그때에 다윗은 부하들에게 수구로 올라가서 다윗이 미워하는 절뚝발이와 소경, 즉 여부스 사람들을 치라고 명령했다(3). '수구'('친누르')는 '하수도', '배수로', '지하 통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곧 예루살렘 남동쪽에 있는 기혼 샘에서 남쪽 저수지로 흘러 들어온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수직으로 파놓은 갱도를 말한다. 이 갱도는 성안에서 성밖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난공 불락의 예루살렘 성안으로 군사들이 침입해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따라서 다윗은 이곳을 통해 적 진지에 들어가 공을 세우는 자에게 푸짐한 상급을 주겠다고 약속했으며, 요압과 그 군사들이 이에 응했던 것이다(대상 11:6). 다윗은 지형적인 이점을 의지하고 교만하게 말했던 여부스 사람들을 비꼬아 절뚝발이와 소경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는 훗날 속담이 되어 '미운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게 되었다. 여부스 족솓처럼 자기의 힘만 믿고 교만하여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은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사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어떠한 집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다윗은 그 성을 정복한 후에 그 곳에 거하였으며 그 곳 이름을 다윗 성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다윗은 밀로에서부터 안으로 둘러서 성을 쌓았다(9). 밀로는 "채운다"는 뜻을 가진 "말레아"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이며, 이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이것이 흙이나 돌로 쌓아 올린 성채를 의미한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이 성채는 아마도 여부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읍에서 가장 취약 지구인 북방의 방어를 위해 북동쪽이나 북서쪽 한쪽 모퉁이에 세워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윗은 이 밀로를 기점으로 해서 예루살렘에 성벽을 둘러 쌓음으로 외세 확장의 기틀과 여호와 종교를 위한 중앙 성소의 기초(대하 3:1)를 마련하게 되었다. 솔로몬과 히스기야 역시 이 밀로를 증축하였다(왕상 11:27; 대하 32:5).


 
2-8."승리의 비결"-여호와의 은혜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기사를 기록한 후에 (삼하 5:10)에서 사무엘서 기자는 다윗이 승리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해 가니라." 사무엘서 기자는 다윗의 성공을 하나님의 공으로 돌리고 있다. 다윗의 성취는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야웨 엘로헤 체바오트')는 '천군 천사의 하나님 여호와'로도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체바오트'의 기본형 '체바아'는 본래 '군대','무리'란 뜻으로,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거느리고 계시는 수많은 하늘 군대인 천사들(욥 33:23; 느 9:6; 시 103:21; 마 10:27; 히 12:22)을 가리키고 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란 하나님의 큰 권능과 위엄을 강조하는 이름으로, 종종 줄여서 '야웨 체바오트'로 표기된다(6:2; 삼상 15:2; 왕하 3:14; 대상 17:24; 시 24:10; 사 1:9).  전능하시고 무적이신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하심으로 다윗은 점점 강성해 질 수 있었다.  하나님은 친히 하늘 군대를 통해서 다윗의 대적을 물리쳐 주셨으며, 이로 인해 다윗은 안으로는 물론 대외적으로도 인정을 받을 정도로 강성해질 수 있었다. 그 후에 다윗은 두로 왕 히람의 도움을 받아 그가 거할 집을 건축할 수 있었다. 두로 왕 히람은 다윗을 위해 사자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어 다윗을 집을 건축하는 일을 돕게 하였다(11). 다윗이 그의 집을 지은 것을 그가 블레셋을 정복한 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윗이 블레셋을 비롯한 이방 민족들을 보기 좋게 제압을 하게 되자(17-25), 다윗의 세력을 인식한 히람 왕이 화친의 제스처로 사자들과 백향목 등을 보내온 것으로 보인다(Leon Wood). 사무엘서 기자는 다윗의 번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이러한 사건을 먼저 기록했을 것이다. 두로는 시돈과 함께 B. C. 8-10세기경 베니게의 중심적인 도시 국가였다. 이스라엘 최북단 국경에서 약 24km 서북쪽에 위치해 있던 이 도시 국가는 지중해 연안 국가로서 일찍부터 목재, 밀기름, 포도주, 금속, 노예, 말 등을 수출하는 무역 국가였다. 그들의 전성 시기에 두로의 상선들은 애굽과 스페인까지도 진출했었다. 히람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두로를 다스리던 왕으로, 다윗은 물론 솔로몬의 건축 사업에 적극 조력한 왕이었다(왕상 5:1-12). 레바논이 원산지인 백향목은 왕궁, 성전(왕상 5:5,6;6:9,10), 배의 돛대(겔 27:5), 우상 등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최고급 건축 자재였다. 이 나무는 잘 썩지 않고 벌레가 먹지 않으며, 내구성이 강해서 방향(芳香)을 지니고 있었다. 히람 왕이 이렇게 좋은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낸 사실은 당시 다윗이 다스리던 신정 국가의 위세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로 인해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기를 높여서 이스라엘의 왕을 삼은 것과,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그 나라를 높여주신 것"을 깨닫게 되었다(12). 다윗은 여러 가지 환경을 통해서 그가 왕이 된 것과 이스라엘을 열방 중에서 높여주신 것이 자신의 지도력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이 모든 일이 여호와의 손에서 주어진 것임을 분명하게 깨닫기 시작했다.

  이제 사무엘서 기자는 다윗이 왕권을 얻는 이야기를 그가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들의 명단으로 마무리짓고 있다(13-16). 다윗은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후에 처첩들을 더 얻었다. 다윗은 왕이 되면 아내를 많이 얻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있었다.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얻은 처첩들을 통해서 또 다시 아들들을 낳게 되었다(13). 예루살렘에서 다윗이 낳은 아들들은 삼무아와 소밥, 나단과 솔로몬, 입할과 엘리수아, 네벡과 야비아, 엘리사마와 에랴다, 그리고 엘리벨렛이었다(14-16).


 2-9. 블레셋을 이김(5:17-25)

  가 첫 번째 승리(17-21)
  한편 블레셋은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블레셋은 전에는 다윗을 도와 사울이 주도하는 이스라엘을 견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되자, 그를 공격하여 자신의 지배권을 행사하려고 했다. 다윗은 블레셋이 올라왔다는 소식을 듣고 "요해처"로나아갔다(17). '요해처'('므추다')는 '그물', '접근하기 힘든 장소', '요새'등을 뜻하는 말이다. 본문에 언급된 '요해처'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1) 요해처는 다윗이 점령한 예루살렘 요새였다(Lange). 그러나 이 주장은 다윗이 초기에 예루살렘을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에, 받아들이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 본절의 '나갔다'고 번역된 말('야라드')는 원래 '내려갔다'는 뜻이다. 따라서 높은 고지에 있는 예루살렘 요새로 다윗이 내려갔다는 말은 모순이 된다. 2) 요해처는 아둘람 굴을 의미한다(Keil  & Delitzsch). 이는 평행 구절인 (23:13-14)에서 다윗이 아둘람 굴에 그의 진영을 설치한 것과 일치한다. 아둘람 굴은 다윗이 사울 왕과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일시 도피했던 곳이며, 가드와 베들레헴의 중간 지점에 있다. 이때에 블레셋 사람은 미리 도착해서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다(18). 르바임 골짜기는 거인의 골짜기'란 뜻으로, 이 골짜기에 살았던 거인족 '르바임'(신 2:11)의 이름을 인해 붙은 지명으로 보인다(Lange, Pulpit). 르바임 골짜기는 길이가 약 5km, 폭이 약 3km나 되었기 때문에, 매우 많은 병력이 그곳에 진을 칠 수 있었다. 르바임 골짜기는 예루살렘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로서, 이 곳의 북쪽 끝은 유다 지파의 북쪽 접경지인 동시에, 또한 베냐민 지파의 남쪽 경계지이기도 하다. 따라서 블레셋 군대가 이곳을 먼저 점령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과 유다의 경계지인 이곳을 차지함으로써 이스라엘을 남북으로 분단시키 위한 의도였다(Leon Wood). 이들이 이러한 계획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1) 르바임 골짜기 바로 남쪽에 그들의 요새인 베들레헴이 있었을 것이다(23:14). 이 베들레헴은 길보아 전투 때에(삼상 31:1)그들의 손 안에 들어갔을 것이다. 2) 그들은 아직껏 유다와 베냐민의 경계지인 예루살렘 요새가 다윗의 손에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계획을 세울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윗은 자신이 올라가서 블레셋 군대를 칠 것인지에 대해서 여호와께 물었다. 아마도 이때에 다윗은 제사장의 에봇에 있는 우림과 둠밈을 통해서 물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다윗에게 올라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라고 하셨다. 여호와께서는 블레셋 군사를 다윗의 손에 붙여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다(19). 다윗은 여호와의 지시를 따라 바알브라심에 이르러서 블레셋 군사들을 쳐서 물을 흩는 것처럼 흩어버렸다. 그리고 나서 다윗은 그 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고 불렀다(20). 바알브라심은 '주'라는 뜻을 가진 '바알'이란 말과, '터치고 나옴', '부숴뜨림', 또는 '흩음'을 의미하는 페라침이란 말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복합어이다. 따라서 이 말의 의미는 '흩으심의 주'라고 할 수 있다. 이 이름은 여호와께서 블레셋 대군을 물을 흩어버리듯이 쉽게 물리치게 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 다윗이 만든 지명이었다. 다윗은 이렇게 함으로써 그 날의 승리가 자신 때문이 아니라, , 여호와로 인한 것임을 분명하게 증거했다. 블레셋 군사들은 도망을 치면서 그들이 섬기던 신상들을 버리고 도망쳤다. 그들은 그들이 섬기던 신이 전쟁에서 이기게 해줄 것으로 믿고 신상들을 전쟁터에 가지고 나왔던 것이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율법의 말씀대로 이 모든 우상들을 거두어서 모두 치워(아무도 불에 태웠을 것이다)버렸다(21).

  나. 두 번째 승리(22-25)
  그 후에 블레셋은 이전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서 다시 한번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블레셋 군대들은 이번에도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다(22). 다윗은 이번에도 블레셋 군대를 공격할 것인지에 대해 여호와께 물었다. 여호와께서는 이번에는 그들과 전면전을 벌이지 말고 기습 작전을 펴도록 지시하셨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블레셋 군대의 뒤쪽으로 돌아가서 뽕나무 수풀이 있는 맞은 편에서 그들을 습격하라고 지시하셨다(23). 아마도 블레셋 군사들은 지난번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이스라엘 군대의 정면 공격을 예상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의 계획을 미리 아시고 다윗에게 기습 공격을  명하셨을 것이다. 뽕나무 수풀이란 말은 "바카"라는 말을 번역한 것이다. 원래 바카라는 말은 '울다','통곡하다'는 뜻을 의미하는 말로서 이는 '우는 나무'를 가리킨다. '나무가 운다'라는 것은 '수액을 낸다'는 의미이다(Wycliffe). 따라서 학자들은 '바카'가 '뽕나무'나 '배나무'가 아니라 수액을 내는 '발삼나무'라고 말한다(Lange, Keil, Rust). 달만은 이 '바카'가 관목류가 아닌 덤불에 가까운 종류라고 하였다(Hertzberg). 이렇게 볼 때에 바카, 곧 발삼나무 수풀은 이스라엘 군이 매복해 있기에 적절한 장소였을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을 걷는 소리가 들리면, 즉시 공격을 개시하라고 지시하셨다.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공격하면 여호와께서 앞서 나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실 것이라고 하셨다(24). 이러한 언급은 이 전쟁이 다윗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가 친히 임하여 블레셋 군대를 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윗은 그 말을 듣고 즉시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다윗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게바에서 게셀까지 블레셋 군대를 쳐서 정복할 수가 있었다(25). 게셀은 블레셋 영토의 북동쪽 경계로서 르바임 골짜기에서 최소한 24km나 떨어진 곳이었다(Leon Wood). 이로 보아 다윗의 승리는 완전한 승리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두 전쟁에서의 패배로 인해 블레셋 군대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모든 영향력을 잃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여호수아에 의해 시작된 가나안 정복은 다윗에 의해 최종적으로 완성이 되게 되었다. 다윗은 내부의 적들을(사울의 가문) 제거하고 왕이 된 후에, 가장 강력한 외부의 적(블레셋)을 제거함으로 나라를 견고하게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다윗은 "신정정치의 실현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2-10.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김(6장)
  다윗은 블레셋의 세력을 저지한 후에 여호와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려고 했다. 그는 언약궤를 가져오기 위해서 전 이스라엘에서 정예 군사 3만을 선발했다(1). 그는 이렇게 함으로 전 국민이 여호와에 대해 관심을 갖게 했으며, 각 지파 간의 유대감을 조성하고, 통일 왕국의 결속을 공고히 하려고 했다. 그가 3만의 군사를 대동한 것은 언약궤가 있던 바알레유다가 블레셋 국경과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만약에 있을 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2). 바알레유다는 '숲의  성읍'이란 뜻을 가진 기럇여아림의 옛 명칭이다. 이곳은 원래 기브온 사람들의 도시였으며, '바알라'로 불리웠다(수 15:9; 대상 13:5,6). 그 후 이곳이 유다 지파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자, '유다의 바알라', 곧 바알레유다로 불려지게 되었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욥바로 가는 길목, 곧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여호와의 언약 궤는 그 동안 이곳에 70년 이상(B. C. 1075년-B. C. 1003년)이나 머물러 있었다(삼상 7:1, 2). 그러나 다윗은 이 일에 대해서 여호와께 묻지 않았다. 그는 신앙 적과 그의 왕위를 견고히 하기 위해 언약궤를 가져오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께서 자신이 그 일을 해도 좋은지, 그리고 언약궤를 가져오는 방법 과 시기 등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그는 이 일로 인해서 큰 낭패를 경험해야만 했다. 다윗은 언약궤를 운반할 때에 율법을 따르지 않았다. 율법은 언약궤를 레위인 중에서 고핫 자손들이 '어깨에 메고' 운반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민 4:15;7:9). 그러나 다윗은 전에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블레셋에서 이스라엘로 운반해 왔던 방법을 따라, 새 수레에 언약궤를 싣고 운반하려고 했다(3-5). 그러나 나곤의 타작 마당에서 갑자기 소들이 뛰기 시작했다. 이 일을 보고 웃사가 언약궤가 넘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손으로 언약궤를 붙잡았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웃사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6-7). 다윗은 이 사건으로 인해 그 곳 이름을 "베레스웃사"라고 부르게 하였다(8). 여기에서 '베레스'로 번역된 '페레츠'는 '갑작스런 공격',  '뜻밖의  재난', 또는 '위반이나 범법'을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베레스웃사'라는 말은 '웃사를 치심', 또는 '웃사의  위반'을 의미한다. 다윗은 여호와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개인적인 열심으로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오려고 하였으나, 웃사의 죽음을 인해 그 일을 이루지 못했다. 웃사의 죽음을 본 다윗은 두려워하여,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해 오는 일을 중단하고, 그것을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가져가도록 지시했다(10). (대상 26:1-4)에 의하면, 오벧에돔은 고핫의 자손으로, 후에 예루살렘 성문의 문지기가 된 사람이다. 본문에서 그를 가드 사람이라고 한 것은 그가 단 지파 안에 있는 레위인의 성읍인 가드림몬에서 태어났기 때문으로 보인다(Keil, Wycliffe, Pulpit). 이로 인해 여호와의 언약궤는 오벧에돔의 집에서 3개월간 머물러 있었으며, 여호와께서 그 집을 축복해 주셨다(11).

  후에 다윗은 여호와께서 언약궤가 있는 오벧에돔의 집을 축복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언약궤를 올려오는 일을 개시했다. 다윗은 이번에는 율법의 규례를 따라 언약궤를 레위인들이 메고 운반하도록 했다. (대상 15:11)을 보면 이 때에 언약궤를 멘 사람은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 레위인 우리엘, 아사야, 요엘, 스마야, 엘리엘, 암미나답이었다. 다윗은 언약궤가 출발할 때에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렸으며, 에봇을 입고 힘을 다해 춤을 추었다(12-14). 그러나 사울의 딸 미갈은 다윗이 춤을 누는 것을 보고 그를 비웃었다(15-16). 그녀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기에 이러한 다윗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윗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가지고 와서, 미리 준비한 장막에 안치하였다. 이것은 성전을 짓기 전까지 임시로 만든 거처였을 것이다. 그리고 다윗은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했다. 그리고 번제와 화목제를 모두 마친 후에 다윗은 모든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고 고향으로 돌려보냈다(17-19). 다윗이 집으로 돌아오게 되자, 사울의 딸 미갈은 다윗이 사람을 앞에서 몸을 드러내고 춤을 춘 일로 인해 비난했다. 미갈은 다윗은 천한 사람처럼 계집종들 앞에서 그 몸을 드러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다윗은 미갈에게 그가 춤을 춘 것은 여호와 앞에서 순수한 신앙의 표시로 한 것이었다고 대답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사울의 집을 버리고 자신을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아 주셨으며, 자신은 이 일로 인해 여호와 앞에 기쁘게 뛰놀 것이라고 대답했다. 다윗은 자신이 여호와 앞에서 이보다 더 낮아진다고 해도 계집종들은 자신을 높일 것이라고 했다. 이 일로 인해 사울의 딸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녀를 낳지 못하게 되었다(20-23). 미갈은 1) 하나님 앞에서 교만했으며, 2) 하나님의 언약궤에 대해 무지했고, 3)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4) 또한 자기의 입술을 가볍게 놀린 결과로 이러한 저주를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사울의 가문은 끝이 나게되었고, 이제부터는 다윗의 가문을 통해 이스라엘의 왕이 계승되게 되었다. 다윗은 사울의 딸 미갈을 통해 왕정의 정통성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그 일은 실패로 끝이나고 말았다. 이스라엘의 국경에서 오랫 동안 머물러 있던 여호와의 언약궤가 돌아온 것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삶의 중앙에 서실 준비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에 언약궤가 없음을 인해 생겼던 "신학적인 막간"은 이렇게 해서 끝을 맺게 되었다. 이제 이스라엘의 새로운 시작이 열리게 된 것이다. 언약궤의 회복을 통해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장소임을 나타내셨다. 여호와는 예루살렘을 자신의 거처로 정하셨다. (삼상 4-6장)에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빼앗김으로 잃었던 이스라엘의 영광은 예루살렘에 언약궤가 안치됨으로 다시 회복될 수 있었다. 언약궤를 회복한 사건은 다윗과 그 가문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2-12. 다윗 언약(7장)

 가. 다윗이 성전 건축을 요청함(1-3)
  우리는 지금까지 다윗 왕정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임을 살펴보았다. 다윗 왕정은 인간의 조약이나 사울의 딸 미갈을 아내로 맞이함으로 합법화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다윗의 왕조는 어떻게 합법화될 수 있는가? 다윗 왕조는 여호와의 인정과 여호와께 대한 순종으로만 합법화될 수 있다.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바로 사무엘하 7장의 메시지이다. 여호와는 다윗을 도와 모든 사방의 대적을 정복할 수 있게 해주셨다. 그리고 다윗은 야전 막사 대신 예루살렘에 궁전을 짓고 그 안에 평안히 거할 수 있게 되었다(1). 이 기록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다윗 언약(4-17절)을 주신 때가 다윗 통치 말기임을 보여 준다.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때는 1) 다윗이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했을 때인데, 여기에 언급된 사방의 모든 대적은 블레셋(5:17-25;8:1)을 비롯한 여러 이방 족속들(8:2-14)을 포함하므로 이때는 분명히 다윗의 말기였다. 2) 또한 그때는 다윗이 백향목으로 지은 예루살렘 궁에 거했을 때(2)인데, 이때는 두로의 히람 왕과 교류가 있었던 때(5:11)이므로 다윗의 통치 말기였다. 따라서 본문은 시간적으로 8장 이하에 나오는 내용보다 나중에 있었던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사무엘서가 연대기적으로(chronologically) 기록되기보다는 주제별로 일관된 흐름을 따라 기록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Keil, Lange, Pulpit). 다윗은 여호와의 종인 자신은 백향목으로 지은 궁전에 거하고 있는데, 주인이신 여호와의 언약궤가 임시 회막에 안치되어 있는 것이 송구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므로 그는 나단 선지자를 불러서 여호와의 궤를 안치할 성전을 지을 뜻을 전하고 여호와의 재가를 받기를 원했다(2). 나단 선지자는 다윗과 솔로몬 양대에 걸쳐 크게 활동한 선지자였다. 그는 다윗 언약뿐 아니라, 밧세바와 다윗의 간음 사건 및 솔로몬의 등극 문제에 대해서도 깊이 관여했다(12:1-15; 왕상 1:8-30,32,39,45). 또한 그는 성전 예배에서 음악을 장려했으며(대하 29:25), 다윗과 솔로몬의 행적을 기록했다(대상 29:29; 대하 9:29). 나단은 다윗의 말을 듣고 "여호와께서 당신과 함께 계시니 왕의 뜻대로 하라!"고 대답했다(3). 이러한 나단의 말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자기 생각에 성전을 지으려는 다윗의 뜻이 좋게 보여서 즉흥적으로 대답했던 것이다.

 나. 여호와의 답변과 언약(4-)
  그러나 그 날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했다. 나단은 성전 문제로 인해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이며, 여호와께서는 그가 한 말을 시정해 주시기 위해서 즉시 그에게 나타나셨다(4). 하나님은 다윗에게 직접 말씀하실 수도 있었지만, 나단을 통해 자신의 뜻을 계시하심으로 선지자 고유의 직분을 인정해 주셨다. 하나님은 다윗이 성전을 짓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제언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다윗은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에, 평화를 상징하는 성전을 짓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대상 22:8 참조). 둘째는 아직 성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대적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에게 평화를 주신 후에 평화와 안식의 상징인 성전을 지을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삼하 7:13). 이러한 이유로 인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후부터 지금까지 장막에 거하시면서 성전을 건축하라는 명령을 내리시지 않았던 것이다(5-7). 하나님은 성전을 건축하기 전에 먼저 하실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의 모든 대적을 멸하고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안식(평안)을 주시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이루신 후에 다윗의 아들을 통해서 평화와 안식의 상징인 성전을 건축하게 하실 것을 약속해 주셨다(8-13).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장은 다윗의 요청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우리들도 때때로 진심으로 어떠한 일에 헌신하기를 원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다를 때에는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언약은 이스라엘과 구원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해 주셨다.

  "여호와가 너를 위해 집을 이루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1-16)."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다윗 언약이다. 다윗 언약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왕조 하사, 입양)로 되어 있다. 다윗 언약의 첫 번째 내용은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영원한 왕조"를 하사하신 것이다. 다윗이 여호와의 집을 짓겠다고 하자, 하나님은 이것을 바꾸어 "여호와께서 너를 위해 집을 건축할 것이라"고 대답하셨다(11).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영원한 왕조를 허락하신 것이다. 다윗은 성전을 건축하고 싶었지만, 이 일은 하나님께서 먼저 그의 집을 건축한 후에야 가능했다. 하나님은 이 땅에 평화를 주신 후에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성전을 건축하게 하실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은혜의 순서를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먼저 다윗의 집을 세우고, 그 후에 다윗의 후손이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 것이다. 다윗 언약의 두 번째 내용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이 낳을 아들의 아비가 되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거이라고 약속하셨다(14). 그리고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아비처럼 그를 징계를 할 것이지만, 사울처럼 은혜를 거두지는 않겠다고 약속하셨다(15).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다윗의 후손에게 주어진 은총이 무조건적인 은총이라는 것이다. 사울은 그의 행위에 따라 은혜를 주기도 하고, 빼앗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윗의 후손은 잘못을 범해도 징계는 받지만 그 은총을 거두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손을 자기의 아들로 입양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솔로몬을 비롯한 다윗의 후손들은 그들의 행위대로 한다면, 사울 처럼 버림을 받아 마땅했다.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셨지만,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왕조를 바꾸시지는 않으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다윗과 그 후손에게 영원한 왕조를 허락하시고, 그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은총을 허락하셨다는 점에서 다윗의 언약이 중요한 것이다. 다음날 다윗은 나단을 통해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듣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성전 건축을 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 말씀하신 모든 약속을 자신과 자신의 집에 이루어주시기를 기도하였다(17-29).


3. 견고해진 다윗 왕국(8장)  <참고 지도: 다윗의 정복>
  (삼하 8장)은 다윗 왕국이 얼마나 견고해졌는지를 밝히면서  삼하 1-8장의 단락을 마무리  짓고 있다. 여기에는 다윗이 인근 국가들을 정복하는 기사들이 등장한다. 다윗은 서쪽의 적(블레셋(1절))과 동쪽의 적(모압(2절), 암몬(12절))은 물론 북쪽의 적(수리아(3-8절))과 남쪽의 적(에돔(14절), 아말렉(12절))을 모두 정복하고 승리하였다. 그리고 다윗은 두로(베니게(삼하 5:11)와 하맛(8:9)과는 화평을 맺었다. 다윗은 블레셋 사람을 쳐서 항복을 받았으며, 그들의 손에서 메덱암마를 빼앗았다. '메덱암마'는 지명이 아니라 블레셋의 여러 성읍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메덱암마'는 '어머니의 굴레'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고대 근동에서는 한  나라의  수도를 '어머니'라고 불렀다(Keil,  Lange, Gesenius). 그리고 그 수도의 통치를 받는 주변 성읍을 그 수도의 '딸들'이라고 기록했다(수 15:45,47). 이런 점에서 보면 '어머니'란 말은 블레셋 다섯 성읍 중 주도권을 장악했던 '가드'를 의미할 것이다(삼상 27:2, 5;29:2-4, 6,7). 그리고 '굴레'라는 말은 가드에 종속된 블레셋의 네 성, 즉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수  13:3)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다윗이 메덱암마를 빼앗았다는 말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수도인 가드와 나머지 네 성읍을 모두 정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날의 다윗의 승리는 블레셋에 대한 완전한 승리였다(1). 또한 다윗은 동쪽에 있는 모압을 쳐서 정복하였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전쟁을 할만한 장정들은 모두 죽이고, 키가 작은 소년과 유아들은 살려주었다(2). 다윗은 이렇게 함으로 발람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였다(민 24:17).

  그 후에 소바 왕 하닷에셀이 1차적으로 다윗에게 패배한 수치를 회복하기 위해서 군사를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을 향해 떠났다. 소바는 다메섹 북쪽과 레바논 산지의 동쪽에 위치했던 아람의 소국이었다. 그 당시에 아람인들은 강력한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여러 개의 소국가로 분립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강력했던 소국이 소바였으며, 그 영향력은 유브라데 강 유역에까지 뻗쳐 있었다. 당시에 소바는 요단 동편과 수리아의 통치권을 놓고 이스라엘과 다툴 정도로 최강적이었다. 이때에 다윗은 그를 쳐서 마병 1,700명과 보병 20,000명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전쟁에 사용될 말의 힘줄을 끊어 버렸다. 다윗은 이렇게 해서 말을 많이 두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였다(3-4). 이때에 그 소식을 들은 다메섹 아람 사람들이 하닷에셀을 도우려고 왔다. 다메섹은 소바의 바로 아래(남쪽)에 있는 도시로 아람의 수도였다. 아마도 이곳에 살던 아람인들은 처음에는 동맹군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다윗이 하닷에셀의 패주병들을 추겨하여 그들의 지역까지 이르게 되자, 위기감을 느끼고 소바 왕을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도 쳐서 아람 사람을 22,000명이나 죽이게 되었다(5). 다윗은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고 그 곳을 주관했으며, 아람을 신하가 삼고 조공을 드리게 하였다(6). 다윗은 하닷에셀의 신하들이 가진 금 방패를 빼앗아서 예루살렘으로 가져왔으며, 매우 많은 놋을 빼앗았다(7).   

  그러면 다윗의 승리와 번영의 원인은 무엇인가? 사무엘서 기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8:6,14). 다윗의 모든 승리와 영광은 여호와께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전리품으로 얻은 물건을 모두 하나님께 드렸다. 그 때에 하맛 왕 도이는 다윗이 자기의 정적인 하닷에셀에게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하맛은 아람 소바의 윗쪽(북쪽)에 있던 아람 소국이었다. 이 나라는 오론테스 강 유역에 건설된 도시 국가였으며 아람 소바와 함께 유브라데 강에서 레바논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나라였다. 소바와 하맛은 아람 소국들 중 자웅을 겨루는 강력한 국가들이었다. 이 두 나라는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종종 전투를 벌였을 것이다. 따라서 다윗이 소바를 정복했다는 소식은 하맛 왕 도이에게는 큰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다윗에게 자기 아들을 보내어 예물을 드림으로 축하의 뜻을 전하고, 양국 간에 화친을 맺었다(9-10). 다윗은 각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과 하맛 왕 도이가 보낸 모든 예물도 여호와께 드렸다(11-12). 다윗은 이렇게 함으로 모든 승리가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음을 나타내고, 또 자기 아들이 성전을 지을 수 있는 재료를 준비했다. 그 후에 다윗은 또 다시 모압 옆에 있는 에돔을 정복하고 그 곳에서 수비대를 두어 그 곳을 주관하게 했다. 이로 인해 에돔 족속 역시 다윗의 속국이 되어 다윗에게 조공을 드리는 나라가 되었다.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는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승리하게 해주셨다(13-14).

  (삼하 8:15-18)은 사무엘하의 첫 번째 단락(1-8장)을 결미를 형성하고 있다. 사무엘서 기자는 다윗을 "공평과 정의로 통일 왕국을 다스린 이상적인 왕"으로 묘사하고 있다(15). '공'에 해당하는 '미쉬파트'는 '공정한 재판'을 의미한다. 또한 '의'에  해당하는  '체다카'는 '하나님의 율법에 일치된 행위'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두 용어는 다윗이 율법에 따라 공정한 재판을 백성들에게 베풀고 나라를 의롭게 다스린 것을 의미한다. 다윗은 신정 왕국의 왕답게 하나님의 말씀과 공의에 입각해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이는 곧 장차 나타나게 될 메시아의 나라의 의로운 통치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시 45:6,7). 그리고 나서 사무엘서 기자는 다시 다윗 왕국의 행정 구조를 담당한 신하들의 명단을 기록하고 있다. 군대장관은 요압이었으며, 사관은 여호사밧이었다. 사관('마즈킬')은 '기억하게 하는 자'란 뜻으로, 왕의 명령이나 나라에서 일어나는 중요사건들을 기록하여 문서화하고 관리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공동 번역은 이를 '공보 대신'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제사장은 사독과 아히멜렉이 담당했다. 다윗 당시에는 두 명, 즉 기브온의  제사장인 사독과(대상 16:39), 예루살렘의 제사장인 아히멜렉이 대제사장으로 있었다. 사독은 아론의 셋째 아들 엘르아살의 자손이었으며, 아히멜렉은 아론의 넷째 아들인 이다말의 후손이었다(대상 24:3). 서기관에는 스라야가 임명되었다.

  '서기관'('사페르')은 '기록하다', '열거하다', '말하다'는 뜻의 '사파르'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는 각 행정 부서간의 서신 연락 사무를 담당하던 비서관으로 보인다. 브나야는 그렛과 블렛 사람을 주관하는 자가 되었다. '그렛'과 '블렛'은 다윗의 시위병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렛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크레티'는 '칼로 베다', '죽이다'는 뜻의 '카라트'에서 파생된 말이다. 따라서 이 용어는 왕의 명령에 따라 중죄인을 처벌하는 사형 집행관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브나야는 실제로 이런 일을 집행한 일이 있었다(왕상 2:25). 또한 '블렛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플레티'는 '도망하다', '경주하다'는 뜻의 '팔라트'에서 파생된 말이다. 따라서 이 용어는 왕의 급한 엄명을 받고 먼 지방에 속히 전달하는 보발군, 곧 왕명을 수행하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대하 30:6).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들은 다윗 왕조를 위해  헌신적으로 충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유랑 길에 나선 다윗을  호위하였을 뿐 아니라(15:18), 아도니야의 반역 음모에서부터 솔로몬을 보호, 그를 다윗을 잇는 차기 이스라엘의 왕으로 옹립하기도 했다(왕상 1:38, 39). 그리고 다윗의 아들들은 대신이 되었다. 여기에서 사용된 대신(코헨)은 원래 제사장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이 곳에서는 이 말이 "신실한 고문"이란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다윗의 아들들은 백성들의 사정을 살피고 왕에게 고하는 자로서, 백성들의 여론을 수렴하여 왕에게 직고하는 자란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Keil, Lange). 이러한 행정 구조와 관료 체제는 솔로몬 시대에 비하면 아직 유아기임이 분명하다. 이 명단은 (삼하 20:23-26)에 나오는 다윗의 부하들의 명단과 함께 사무엘하를 세 단락으로 나누는 구분을 하고 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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