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6장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ㅇ여호와께서...일러 가라사대 - 이 말은 이하 제시되는 모든 말씀의
신적 기원성을 분명히 나타내는 말이다. 이처럼 성경은 여호와의 계시
말씀이 기록된 책이기에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변치 않고 오고 오는
성도들에게 참된 진리를 교훈해 주고 있는 것이다.
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거든
ㅇ남자나 여자가 - 고대 히브리 사회에서 그들의 규범(율법)은 대부분
남성 우위의 내용들로 가득 메워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당시 남자는 남녀 두 성(gender)의 대표자로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
며, 또한 언약의 체결자로서 하나님께 대한 책무를 지니고 있었기 때
문이다(창 2:15-17; 3:11). 그런데 '나실인'(Nazirite)에 관한 규정을
다룬 본문에는 특이하게도 남자와 여자, 두 성(性)을 동일한 위치에
두고 같은 의무 조항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나실인 제도는 당시대
의 종교, 사회적인 관행(慣行)을 초월하며 하나님과 인간의 자유로운
만남과 자발적인 헌신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특별법이라 할 수 있
다. 여하튼 나실인제도에 나타난 바 이러한 남녀 동등이라는 파격(破
格)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하나님 앞
에서는 인격적인 면에서 결코 성(性)차별이 있을 수 없다(그러나 기
능적 구별은 인정해야 한다, 창 2:23; 3:16-19). (2)각 개인은 누구
에게도 예속됨이 없는 독립체로서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인격적인 관
계를 가질 수 있다. (3) 이러한 인간의 인식과 관습을 뛰어넘는 자유
로움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에 의해서 가능하며, 그렇기에 이 자
유로움은 인간의 권리 주장이 아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사용
되어져야 한다.
ㅇ특별한 서원 - 여기서 '특별하다'(팔라)란 '크고 경이롭다', '구별
하다','어렵다'등의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뒤에 연결
된 서원(네데르) 곧 하나님께 대한 약속이 매우 성(聖)스럽고 가치
있는 것이며, 아울러 그 서원 이행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
임을 암시한 말이라 볼수 있다<30:1-8 강해, 서원과 맹세에 대하여>.
ㅇ나실인(나지르) - 이는 '구별하다'(separate), '분리하다'(set
apart)란 뜻을 지닌 동사 '나자르'에서 유래된 말로 곧 '구별된 자',
'성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자', '세상과 분리된 자'란 의미이다.
즉 세상적 욕망을 끊어버리고 자신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헌신하기로
서원한 사람을 가리킨다. 이것은 나실인 제도가 정착되기 전의 구약
초기 시대에는 신성한 종교적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신적 권능을 부여받은 고귀한 신분(예:요셉)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
되기도 했다(창 49:26). 그런데 후대에 와서 나실인 서원 규약이 율
법에 의해 규정되고 표준화 되면서 자신을 종교 도덕적으로 구별시켜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서원한 사람이면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나 일정
기간 또는 평생 동안 나실인이 될 수 있었다. 혹자는 이 나실인 제
도가 애굽이나 당시 이방 국가의 금욕 서원 또는 머리털 봉헌 서원
등의 관습에 기인하고 있다고 주장하나(Spencer, Knobel), 근거가 없
는 견해이다(Keil & Delitzsch, Vol. 1-3, p. 34). 한편 나실인 중에
는 삼손(삿 13:5)이나 세례요한(눅 1:15)등과 같이 하나님의 직접적
인 명령에 따라 나실인이 되어 평생을 헌신한 자도 있었고, 사무엘처
럼 부모의 서원에 따라 그렇게 된 자도 있었다(삼상 1:11). 물론 본
장에서는 자원하여 나실인이 될 자들이 지켜야 할 법에 관해 설명하
고 있다. 그리고 나실인의 서원 제도는 다른 모든 구약의 의식적인
율법이 그러하듯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최종 완성된다(마 12:1-8).
그러므로 이제 성도들이 하나님의 섬기는 것은 의식적 구별법에 의해
서가 아니라, 새로운 방법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구별되
어 새로이 거듭난 심령으로써이다(롬 7:5,6: 고후 3:6-11). 다음은
이 나실인 제도를 알기 쉽게 도표화 한 것이다.
+-----------------------------------------+-------------------+
| 구 분 | 내 용 l참 조 구 절 |
+---------+-------------------------------------+-------------+
| 기 원 | 출애굽 제 2년 2월 초에 시내 광야에서l 6 : 1 |
| | 하나님이 모세에게 계시함 | |
+---------+-------------------------------------+-------------+
| 목 적 | 하나님께 헌신,봉사하기 위해 자신을 | 6 : 6 |
| | 구별시킴 | |
+---------+-------------------------------------+-------------+
| 자 격 | 남녀 구분없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 | 6 : 2 |
+---------+-------------------------------------+-------------+
| 준 수 | (1)포도나무 소산 및 독주를 금할 것 | 6 : 3, 4 |
| | (2)머리털을 깍지 말 것 | 6 : 5 |
| 사 항 | (3)시체 접촉으로 인해 부정케 말 것 | 6 : 6 |
+---------+---------+---------------------------+-------------+
| | 의지별 | . 자발적 서원으로 | 6:2;행18:18;|
| | | . 부모의 서원으로 | 삼상 1:11; |
| 종 류 | | . 하나님의 명령으로 | 삿 13:5,7; |
| +---------+---------------------------+ 눅 1:15; |
| | 기간별 | . 일정기간 동안 | 삼상 1:11 |
| | | . 일평생 동안 | |
+---------+---------+---------------------------+-------------+
| | 삼손, 사무엘, 레갑 족속, | 삿 13:5,7; |
| | | 삼상 1:11; |
| 실 례 | | 렘 35:6,7; |
| | 세례 요한, 사도 바울 | 눅 1:15; |
| | | 행 18:18 |
+---------+-------------------------------------+-------------+
| | (1)혼탁한 현대를 사는 성도에게 순수 | |
| | 한 신앙 촉구 | |
| | (2)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드린 예수 | 히 7:26 |
| 교 훈 | 그리스도를 예시 | ㅣ
| | (3)온전한 헌신은 철저한 경건생활로 ㅣ약 1:27 |
| | 부터 가능 | ㅣ
| | (4)자기 부인(deny oneself)없이는 ㅣ 마 16:24 |
| | 하나님을 기쁘게 할수 없음을 교훈 | |
+---------+-------------------------------------+-------------+
ㅇ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거든 - 직역하면 '여호와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구별하려면'(RSV, to separate himself to the Lord)이다.
이 말은 나실인의 헌신 대상 및 목적을 보여 주는 바 곧 그것은 순전히
'여호와를 위해서, 여호와께'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삶 전체를 드렸던 것이다. 그들은 일정한 장소나 업무에 국한
되지 않고(출애굽 여정 동안에는 주로 성막 중심의 봉사를 했던 것 같
다). 주어진 환경에서 하나님 나라 건설에 일익을 담당함으로써 자신
의 서원을 구체화 했다. 한편 그들은 여호와를 위해 자신을 구별하는
일에 타인의 조언(助言)이 필요치 않않다. 다만 헌신을 받으실 하나
님과 자신의 관계가 바르냐 그렇지 못하냐가 문제일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을 구별한다는 것은 (1)항상 (2)하나님만을 바라보며
3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찌니
ㅇ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 여기서 '멀리하며'(야지르)란 말은 '분
리하다'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나자르'의 사역형 능동태(Hiphil)의
미래 구문으로서, 곧(앞으로 서원 기간 동안) '계속적으로 멀리하라',
'철저히 멀리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나실인은
모든 술을 절대 입에 대지 말아야 했으며 특히 포도 나무에서 얻어진
어떤 종류의 소산물도 먹을 수 없었다. 그것은 나실인의 나실인으로서
의 삶을 살아갈 때 제사장처럼(레 10:9) 마음의 청결과 절제를 유지하
여 맑은 정신으로 여호와께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기 위해서였다. 그러
나 이 명령의 더 깊은 의미는 술로 대표되는 '모든 육적인 유혹'을 전
적으로 멀리하라는 데에 있으며(렘 35:6, 7). 동시에 자신들의 '가장
큰 기쁨'은 오직 여호와께 두라는 데에 있다. 이 사실은 성경에서 포
도가 상징하는 바를 알아보면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즉 포도는 기쁨,
축제, 풍요 등을 상징했으며(전 10:19; 요 2:1-11), 동시에 그 발효된
알콜 성분으로 인한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쾌락과 세상적인 사치(창 9:
21; 사 28:7)를 상징했다. 그러므로 정신을 혼미케 하며 세상적 쾌락
과 사치(삼상 25:18, 36; 호 3:1)를 조장하는 포도주를 멀리해야 하는
것은 구별된 자의 당연한 도리였다. 사실 하나님을 자신의 최고의 '기
쁨'으로 여기는 자에게는 술(세상)이 제공하는 기쁨은 관심 밖의 일이
된다. 한편 '독주'(쉐카르)는 포도주와는 구분되는 기타의 독한 알콜
성 음료로써 마시는 자를 혼미케 할 정도의 강력한 술(strong drinks)
을 총칭하는 말이다(잠 20:1; 사 28:7).
ㅇ포도주의 초 - 여기서 '초'(호메츠)란 '신맛이 나다', '발효하다',
'알록달록하다'는 뜻의 '하메츠'에서 유래한 말로써 '포도주'(헤메르)
보다 알콜 농도가 낮은 신 포도주였을 것이다. 이것은 히브리인들이
빵을 먹을 때 찍어 먹는 양념으로 사용되곤 했다(룻 2:14).
ㅇ독주의 초 - 역시 '포도주의 초'와 동일하게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
인다.
ㅇ마시지 말며(로이쉐테) - '마시다'는 말은 단순히 '들이키다'는 뜻
외에 '술취하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앞의 '멀리
하며'란 말과 동의어이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강조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ㅇ포도즙(미쉐라트 아나빔) - 원문대로 해석하면 '익은 포도를 넣고
발로 짓이겨 뽑아낸 즙을 가리킨다(느 13:15; 욥 24:11; 사 5:2).
ㅇ건포도 - 이것은 호화롭고 부유한 계층이 즐기던 식료품이었다(삼
상 25:18). 물론 이것을 섭취한다 해도 취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
나 이것이 우상 숭배자들이 추구하는 향락을 상징하는 식물이기도
했다는(호 3:1) 점에서 구별된 자의 식물로는 적합하지 못했다.
4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찌며
ㅇ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 나실인의 제한된 생활 규범은 서원한 기간
동안 철저히 이행되어야 했다. 만약 이 규범을 어기면 그는 처음부터
다시 새로운 서원을 해야 했다(12절). 그러나 서원한 기간을 끝낸 후
에는 그들도 포도의 각종 소산물을 먹을 수 있었다. 이것은 (1)나실인
도 그의 서원 기간이 종료되면 평범한 일반 백성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 주며 (2)하나님은 인간에게 무조건 일상의 생활까지 제한하실 정
도로 지나친 분이 아님을 말해 준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께서 오히
려 나실인의 금지 규례를 서너 가지로 정하여 주신 것은 흔히 이방의
금욕 종교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의 몸을 자학(自虐)하는 갖가지 금욕
규례를 스스로 만들어 자신의 몸에 굴레를 덧씌우는 그러한 폐단을 방
지코자 한 의도도 있다고 볼 수 있다.
ㅇ씨나 껍질이라도 - 혹자에 의하면 팔레스틴에서는 포도의 씨와 껍질
을 이용하여 술이나 기타 음식물을 만들었다고 한다(Pulpit
Commenrtary). 여하튼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포도 나무에서 나
오는 하찮은 소산물일망정 금하라는 것이다. 즉 나실인들에게는 포도
나무의 모든 소산, 곧 그것으로 대표되고 상징되는 세상적인 모든 쾌
락으로부터 '절대 성결'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 헌신
된 자들은 조그마한 유혹의 가능성마저 배제해야 한다.
5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
ㅇ삭도를...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 여기서 '삭도'(타아르)란 '발가
벗기다', '없애다'는 뜻의 히브리어 '아라'에서 유래한 말로서 주로
면도용 칼을 의미한다. 한편 나실인이 왜 머리를 깍아서는 안되었으
며, 반드시 길러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랑게(Lange)
는 나실인이 머리털을 기른 것은 생명의 고상한 힘, 곧 하나님의 주권
과 승리의 화환(花環)을 상징하는 머리털(고전 11:3-7)을 길름으로써,
자신을 주장하는 자가 세상 권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임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 당시의 관념으로 머리털은 피와 마찬가지로
생명을 상징했기 때문에,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 행위는 생명의 주
권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복종과 경외를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Fairbaim, Baumrarten). 한편 길게 자란 머리를 '힘과 충만한 생명
력의 상징'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Keil). 왜냐하면 살아 있는 존재
만이 머리카락을 생성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나실인의 머리를 기른 것은 '자신의 여호와에 의해 조성된 그분의 소
유로서 자신의 온 정력을 다 바쳐 여호와를 섬기겠다'는 표식으로써,
머리털은 곧 여호와를 위하여 쓴 관(冠)이라 생각할 수 도 있다. 실
례로 평생 나실인이었던 삼손 같은 경우, 그의 머리털은 카리스마적인
신적(神的) 능력을 나타내는 표식이었다(삿 16:17). 결국 나실인이 머
리를 깍지 않은 것은 (1)자기 위에 유일한 경배 대상임을 나타낸 것이
며 (2)또한 하나님만이 자기 생명과 힘의 유일한 근원임을 인식하여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그분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ㅇ그는 거룩한즉(카도쉬 이헤에) - 직역하면 '성결하게 되었으니', '봉
헌 되었으니'라 할 수 있다. 즉 서원한 기간 동안 그는 하나님의 소유
로 구별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의 몸은 더이상 그의 것도
아니었고, 또한 여타의 주권자도 있을 수 없었다. 오직 그는 자신을 온
전히 하나님께 드리기에 힘써야 했다. 이러한 요구는 오늘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벧전 2:9)으로 부름받은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실로 오늘
날 모든 성도들은 영적 나실인인 것이다.
ㅇ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 이는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주권
을 인정하는 표이다. 한편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대머리와 머리를 완
전히 밀어버리는 것은 수치스럽고도 혐오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왕하 2:23). 죄로 오염된 이방 문화의 부산물로 받아 들여졌다(레 21
:5). 반대로 머리를 전혀 깍지 않고 자연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나실인
과 같은 특정인에게만 허용되지 않았던 것 같다(겔 44:20). 사실 히브
리인들은 애굽과 같은 고대 다른 이방 족속들과는 달리 수염과 머리를
깍는 관습이 있었다(Keil).
6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
7 그 부모 형제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로 인하여 몸을 더럽히지 말
것이니 이는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그 머리에
있음이라
ㅇ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 - 나실인은 그 정한 기간 중에는 비록 가
장 친한 친지들(부모, 형제, 자매 등)이 죽었을지라도 그 시체와 접촉
해서는 안 되었다. 만약 나실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곁에서 어
떤 사람이 죽었다면, 그는 정결케 하는 날 곧 제 7일에 머리를 깍아버
리고 제 8일에 제사장에게 예물을 드려 제사를 드리게 함으로써 시체
로 인한 부정을 제해야 했다(9-12절). 왜냐하면 주검(시체)은 결국 죄
악이 빚어낸 결과이므로(롬 6:23) 의식상 부정하게 취급되었기 때문이
다. 따라서 나실인이 시체를 멀리해야 하는 것은 의미상 죄를 멀리해야
하는 것의 상징적 표현이라 볼 수 있다. 한편 이 구절을 제사장 성별
규례에 대한 기록인 레 21장과 비교할 때, 나실인은 심지어 대제사장에
게 요구되는 사항까지(레 21:1-12) 자신들의 의무 조항으로 받아들여야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윤리마저 금지
시킨 이러한 요구는,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나 부모,
형제보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지 결코 부모, 형제
와의 정리(情理)를 완전히 끊어버리라는 뜻은 아니다(마 8:21,22; 10:
35-38).
ㅇ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그 머리에 있음이라 - 이 말은 '하나님께 자신
을 성별하여 온전히 봉헌한다는 외적이고 상징적인 표시로써 깍지 않은
긴 머리를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결국 나실인의 긴 '머리카락'은 그
머리에 관유로 기름부음 받아 성별된 제사장의 머리(레 21:12), 또는
대제사장의 머리에 씌어진 '관'(冠)과 동일한 의미로 이해 할 수 있다
(출 29:6; 슥 6:11). 즉 나실인의 긴 머리털은 하나님의 소유됨을 나타
내는 가장 확실한 인식표였다. 한편 '구별하다'란 뜻을 지닌 히브리어
'나자르'에서 '화관'(花冠)이나 대제사장의 '관'(冠)을 뜻하는 단어 '네
제르'가 파생된 사실(출 29:6; 레 21:12)은 위의 견해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Pulpit Commentary). 한편 '머리'가 부정케 된 것은 그의 전
인격이 부정케 된 것을 상징했다. 그러므로 시체로 오염된 자는 구별된
자로서의 표식이자 전인격의 상징인 머리털을 깨끗히 밀어냄으로써 부
패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있었다(9절).
8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그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니라
ㅇ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 즉 이 기간 동안 나실인의 몸은
더이상 자신의 유익이나 친지나 친구를 위해 사용할 수 없었다. 그 기
간 동안 나실인의 몸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전적으
로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좇아 살아가야만 했다. 한편 유대 랍비들의
말에 의하면, 나실인으로서의 삶을 살고자 하는 자는 최소한 그 구별
기간을 30일 이상 되게 해야 한다고 한다(Matthew Henry).
9 누가 홀연히 그 곁에서 죽어서 스스로 구별한 자의 머리를 더럽히거든
그 몸을 정결케 하는 날에 머리를 밀 것이니 곧 제 칠일에 밀 것이며
ㅇ홀연히 그 곁에서 죽어서 - 여기서 '홀연히'(베페타 피테옴)란 '눈 깜
박할 사이', '뜻밖에'라는 뜻이다. 이는 뒤이어 나오는 '그 곁에서'라
는 말과 어우러져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라
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그 해결 방안이 준비되었다.
그러나 만일 나실인이 그 서원 기간동안 고의로 그 금지 규례를 어겼을
경우에는 아무런 해결책이 없었다. 아마 이때에는 그것이 하나님을 조롱
하고 모독한 죄에 해당되기 때문에 엄한 형벌이 내려졌으리라 추정된다.
ㅇ그 곁에서(알라우) - 이 말은 '그의 옆에서 일어나다(발생하다)'로 볼
수 있다. 즉 자신이 자발적으로 시체를 접촉하게 된 것이 아니라 자기
곁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어쩔 수 없이 보살폈거나 그 시체를 만졌을 경
우를 일컫는다. 이처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진행된 주검의 부정에
대해서는 고의로 범한 부정과는 구분하여 그 해결 방안이 마련되고 있다
(9-12절). 이는 행동의 결과 이전에 동기를 먼저 보시며 인간의 약함을
깊이 이해하시는(히 4:15) 하나님의 자애로우신 조처라 할 수 있다.
ㅇ구별한 자의 머리를 더럽히거든 - 여기서 '머리(털)'는 전인격을 상징
한다. 왜냐하면 나실인의 머리털은 자신이 지금 하나님께 구별된 자라는
사실을 가장 뚜렷히 인식시켜 주는 '증표'였기 때문이다(Keil).
ㅇ몸을 정결케 하는 날 - 이 날은 시체로 인해 부정하게 된 날로부터
'제 7일째'되는 때였다. 특별히 이 날을 '정결케 하는 날'로 정한 것은
시체를 만지는 자는 '7일 동안' 부정할 것이라는 율법조항 때문이다(19
:11). 즉 주검(시체)을 만진 자는 7일 동안은 어쩔 수 없이 부정한 자로
지내야 했으며, 7일 이후에야 비로소 속죄를 위한 각종의 제사가 허락되
었다. 한편 여기서 '7'이란 숫자는 '완전수'로서, 부정케 된 자가 자신
의 허물을 완전히 인식하고 통회할 수 있는 충분하고도 완전한 기간을
암시한다. 사실 죄(허물)에 대한 깊은 자각이 없이는 아무도 정결례나
제사에 임할 수 없었다. 이는 우리가 예수를 믿고 새 생명을 얻어 풍성
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에 대한 깊은 자각과 회개가 선행되어
야 하는 것과 같다.
ㅇ머리를 밀 것이니 - 나실인이 만약 시체로 인해 부정케 되었다면, 그는
'구별'과 '헌신'의 가시적 증표인 긴 머리를 밀므로써 자신의 부정을 없
이 해야 했다. 한편 여기서 '밀다'(갈라흐)는 말은 '면도하다', '대머리
가 되게 하다', '황폐케 하다'는 의미로써, 결국 머리털을 완전히 밀어
버리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머리를 민 것은 자신의 허물에 대
한 슬픔과 통회의 외적 표시라 할 수 있다(사 22:12;렘 16:6; 겔 7:18).
그런데 모세 율법에서는 원래 이렇게 머리를 미는 것이 금지되었었다(레
19:27; 신 14:1).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고 그 죄
악을 철저히 없이 한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특별 규례가 제정되었던 것이
다. 이런 견지에서 오늘 영적 나실인이 된 우리는 자신의 범죄에 대해
머리를 미는 대신 각자의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이다(욜
2:13).
10 제 팔일에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지고
회막문에 와서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ㅇ제 팔 일에 - 성경에서 '8'은 회복과 부활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여기
서는 허물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함을 뜻한다(마 28:1).
즉 이 날은 나실인이 부정했던 흔적을 떨쳐버리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
계에서 새롭게 교제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날인 동시에 새로운 헌신에
의 결심을 다지는 날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 날은 죄로 인해 죽었던
우리가 예수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나는 회복과 중생의
날을 예표하는 날이라 할 수 있다.
ㅇ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마리 - 비둘기는 노아시대(창 8
:20)와 아브라함때부터 제물로 바쳐진 정결한 짐승이었다. 이 새들은 가
난한 자들의 식용(食用)으로 사용되었으며, 경제적으로 빈곤한 자들의
제사 제물로 규정되었었다<레 14:22>. 여기서는 경제적인 측면의 가난보
다 나실인이 자신의 허물로 인한 영적 빈곤함을 강조하기 위해 이 제물
이 요구되었던 것 같다.
ㅇ회막문에 와서 - 여기서 '회막문'은 성소 앞 곧 성막앞, 번제단이 있
는 곳을 가리킨다<5:16>. 이처럼 부정을 입은 나실인이 회막문에 선 것
은 부정하게 된 자신을 하나님께 보이며, 성결과 헌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였다(레 14:30). 이처럼 모든 죄와 허물은 하나님앞에서 해결되
어야 한다.
11 제사장은 그 하나를 속죄 제물로, 하나를 번제물로 드려서 그의
시체로 인하여 얻은 죄를 속하고 또 그는 당일에 그의 머리를 성결케
할 것이며
ㅇ속죄 제물로...번제물로 - '속죄제'는 자신이 저지른 허물에 대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의미에서<레 4:2-5:13>, '번제'는 또다시 하나
님께 완전한 '헌신'을 다짐한다는 표시로 드려졌다<레 1:3-17>. 이처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자는 과거의 죄에 대한 철저한
청산과 더불어 현재와 미래의 삶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경건한 계획이
있어야 마땅하다.
ㅇ그의 머리를 성결케 할 것이며 - 본절은 나실인이 9절에서 '머리를
민' 행위로 그의 허물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피흘림이 있는
제사'를 드림으로 비로소 속죄의 은총을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처럼 "피흘림 없이는 사(赦)함이 없다"(히 9:22)는 규례는 구
약 시대 속죄의 대원칙이었다<레 17:10-16 강해, 피제사의 원리>. 한편
이러한 원리는 오늘날 신약 성도들에게도 적용 된다. 즉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와 반성 정도로 그 죄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
의 죄든지 예수의 보혈 공로를 힘입을 때에만 비로소 그 죄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엡 1:7).
12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릴 날을 새로 정하고 일년 된
수양을 가져다가 속건제로 드릴찌니라 자기 몸을 구별한 때에 그 몸을
더럽혔은즉 지나간 날은 무효니라
ㅇ여호와께 드릴 날을 새로 정하고 - 원문에는 '새로 정하고'라는 말이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뒤에 나오는 '지나간 날은 무효니라'는 말과
어우러져 문맥상 위의 말이 첨가됨이 마땅하다.
ㅇ일년 된 수양을...속건제로 - 속건제(trespass offering)는 주로 하
나님과 이웃에게 해(害)를 끼쳤을 경우 드리는 의무제로서 <레 서론,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미>, 여기서는 시체로 인한 부정에서 용서받고,
부정을 입기 전의 상태로 회복되기 위해 드리는 제사라 할 수 있다<레
14:12>.
ㅇ무효니라(이페루) - 이 말은 '떨어지다', '멸망하다'는 뜻으로 이때
까지의 '구별'이 헌신 기간에 전혀 계산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한
순간의 실수가 온전하고 경건했던 지난 날을 무익하게 만든다는 냉엄한
신앙 윤리를 제시한다(겔 33:13). 따라서 이제 나실인은 자신의 헌신
서약과 헌신기간을 다시 정함으로써 처음부터 새롭게 출발해야 했다.
이것이 신앙인의 진취성이다. 얼룩진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돌진하는 기상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날마다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빌 3:13, 14).
13 나실인의 법은 이러하니라 자기 몸을 구별한 날이 차면 그 사람을
회막문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ㅇ회막문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 '회막'은 여호와의 임재의 상징적 처
소로서 서원 기간을 채운 자가 회막문에 가는 것은 곧 그가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을 의미했다. 이처럼 하나님께 구별된 자의 처음(10절)과 나중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므로 서원 기간을 채운 나실인이
회막문에 선 것은 곧 나실인으로서 자신의 삶의 시작과 과정과 결말이
하나님에 의해 진행되었음을 고백하는 신앙 행위라 할 수 있다(롬 11:
36).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 헌신코자 결심하는 자는 무
엇보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Coram Deo)라는 의식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회막문에서'라는 말은 '하나님 앞'이라는 의미외에
'이스라엘 온 회중 앞에서 공개적으로'라는 의미도 지닌다. 즉 나실인
이 서원 기간을 채운 후 회막문에서 각종 의식을 행하는 것은 모든 이
들에게 자신의 의무 기간이 끝났음을 공식적으로 알리기 위해서이다.
즉 이런 공개적 행사를 통해 지금까지 제한된 이웃과의 교제 관계를
청산하고, 서원 전의 본래 상태로 되돌아가 서로 접촉할 수 있게 되었
음을 알렸던 것이다.
14 그는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되 번제물로 일년 된 흠 없는 수양
하나와 속죄 제물로 일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하나와 화목제물로 흠
없는 수양 하나와
15 무교병 한 광주리와 고운 가루에 기름 섞은 과자들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들과 그 소제물과 전제물을 드릴 것이요
ㅇ예물을 드리되 - 여기서 '예물'(코르반)이란 '가까이 가져오다', '준
비하다', '제공하다'는 뜻의 '카라브'에서 유래한 말로써 곧 여호와께
나아가는 자가 드릴 '봉헌물', '희생 예물'을 뜻한다(레 1:2).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 나아오는 자에게 결코 '빈 손'으로 나오지
말 것을 명하신 바 있다(출 23:15). 이는 당신이 물질적으로 빈핍하기
때문이 결코 아니라, 당신을 만나러 오는 자로 하여금 그 은혜를 감사
케 함으로써 당신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려는 목적으로 요구하신
것이다. 사실 예물은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일 수도 있다(마 6:21).
한편 본문에서는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하였다.
(1) 번제물 - 나실인이 정한 기간을 채움으로써 서원에서 자유를 얻었
지만, 여전히 하나님께 헌신의 삶을 살아갈 것을 고백하는 표의 예물이
다<레 1:1-17>. (2) 속죄 제물 - 헌신 기간 동안 부지불식간(不知不識
間)에 지은 죄와 자신의 부족한 삶 전체를 고백하며 속죄의 은총을 바
라고 드리는 제사 제물이다<레 4:1-5:13>. 사실 나실인의 생활이란 절
대무흠이 요구되는 것이었으나, 그 서원을 마치는 날 이처럼 죄를 속하
는 제사가 요구된 것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다 할 자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롬 3:10). (3) 화목제물 - 헌신 기간 동안 자
신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계속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기 원하여 드리는 제사 예물이다<레 7:11-36>. (4) 소제물 - 이
제물은 화목 제물과 함께 드려졌는데, 서원 기간 동안 헌신과 봉사의 삶
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예물이었다<레
2:1-16>. 그리고 이 소제물과 더불어 전제물이 드려졌다.
ㅇ전제물이란 전제(奠祭)의 방식으로 드리는 예물로서 곧 포도주나 기름
등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전제물은 단독으로 전혀 드려질 수 없었고,
보통번제, 화목제, 소제 예물 등과 더불어 드려졌다(레 23:13). 한편 위
의 각종 예물과 제사에 대해서는 레위기 서론,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
미'를 참조하라. 소제(meal offering)와 전제(drink offering)로 바쳐질
제물을 열거한 15절의 내용을 보다 쉽게 번역한 공동 번역에는 "또 고운
밀가루를 기름에 반죽하여 누룩 없이 과자 모양으로 만든 것과 기름을
발라 누룩이 없이 만든 속 빈 과자 한 바구니를 곡식 예물과 제주(祭酒)
와 함께 가져가 바친다"로 되어 있다. 이 모두는 여호와께 대한 감사의
표로써 드리는 일종의 감사 제물이다(레 7:12).
16 제사장은 그것들을 여호와 앞에 가져다가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고
ㅇ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고 - 번제보다 속죄제가 순서상 먼저 드려졌다
<11절>. 그 이유는 인간에게 있어서 헌신과 감사 이전에 가장 먼저 요
구되어지는 것이 바로 죄를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
은 죄 있는 인간과 결코 교제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하나
님께 자신을 헌신하기에 앞서 죄 문제를 해결함이 마땅하다.
17 화목 제물로 수양에 무교병 한 광주리를 아울러 여호와께 드리고
그 소제와 전제를 드릴 것이요
ㅇ소제와 전제를 드릴 것이요 - 엄밀히 구분하면 여기서 '소제'는 제사
의 한 종류이고, '전제'는 제사 드리는 한 방법이다. 즉 전제는 제물을
'부어서'드리는 방식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예물로서는 주로 기름이나
포도주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제사 종류와 제사 방법을
엄밀히 구분하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혼용하고 있다. 한편, 이 소제
와 전제는 단독으로는 거의 드려지지 않았고, 대부분 번제 또는 화목제
와 더불어 드려졌다.
18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 문에서 그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찌며
ㅇ그 머리털을 밀고 - 서원한 기간이 종료된 나실인은 하나님과의 특별
한 관계(5절)와 각종 헌신에 대한 의무가 끝났음을 공식적으로 나타내
기 위한 표시로써 머리털을 잘랐다. 물론 그가 머리털을 잘랐다고 해서
이제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치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생
활 전체를 드리는 나실인의 까다로운 규제에서 벗어나 평범한 생활인으
로 돌아감을 가리키는 것이다.
ㅇ화목 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지며 - 감사와 교제로 상징되는 화목제에
불에 그동안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자신이 특별히 구별되었음을
표시하는 긴 머리를<7절> 태우는 것은 서원 기간 동안의 구별된 삶 전
체와 그 삶을 가능케 했던 사실을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돌린다는 의미
가 내포되어 있다. 동시에 그동안의 삶이 온전히 하나님께 열납되었기
를 바란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후부터 하나님과 더
나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는 소원도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람의 삶 전체는 항상 '하나님께 영광'과 '하나님과 화
목'이라는 대명제 아래 머문다(고전 10:31).
19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이 그 머리 털을 민 후에 제사장이 삶은
수양의 어깨와 광주리 가운데 무교병 하나와 무교전병 하나를 취하여
나실인의 두 손에 두고
ㅇ삶은 수양의 어깨...무교병 하나와 무교전병 하나 - 나실인의 서원을
마무리 짓는 최종적인 제사로서 제사장은 화목제 예물(흠없는 수양 한
마리,14절) 중 수양의 삶은 어깨 부위와 소제 예물(무교병 한 광주리와
기름 섞은 과자들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들, 15절) 중 무교병 하나와 무
교전병 하나(레 2:4 주석 참조)를 취해 '요제'(搖祭, a wave offering)
로 드려야 했다. 그리고 요제로 드린 이 예물들은 이미 화목제로 드린
'흔든 가슴과 든 넓적다리'(레 7:34 주석 참조)와 함께 제사장의 몫으
로 돌려졌다. 이처럼 나실인의 서원 종료 예물을 제사장이 취한 것은
그 나실인의 삶이 앞으로도 계속 제사장의 구별된 삶으로 이어져 그
속에서 하나님과 친교와 화목의 상태를 유지하게 될 것이라는 일종의
축복이었다(Keil & Delitzsch, Vol. 1-3, p. 40).
20 여호와 앞에 요제로 흔들 것이며 그것과 흔든 가슴과 든
넓적다리는 성물이라 다 제사장에게 돌릴것이니라 그 후에는 나실인이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느니라
ㅇ여호와 앞에 요제로 - '요제'는 화목제 희생 제물의 가슴 및 곡식단
과 첫이삭의 떡(본문에서는 무교병과 무교전병, 레 7:12)등을 앞.뒤로
흔들어 드리는 제사 방법이다<레 서론,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미>.
그리고 본문에 언급된 '가슴과 넓적다리'는 이미 화목 제물 중 제사장
의 것으로 구별된 것이다(레 7:30-34). 한편 요제로 드려질 제물(19절)
은 먼저 그것을 드리는 나실인의 손 위에 올려지며, 다음으로 제사장이
제물을 든 나실인의 손을 받쳐들고 흔들므로써 제사가 진행된다. 이같은
행동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하고 상징한다. 즉 (1)나실인의 헌신을
하나님께서 온전히 받으셨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2)제물을 앞으로 내
밀었다가 다시 거두어 들이는 이 요제의 행동은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
을 다시 제사장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다는 사실을 상징화한 행동이다.
(3)그리고 나실인이 바친 풍성한 예물이 하나님의 대변자인 제사장들에
게 돌려져 그들의 음식이 되게 한것은 나실인이 하나님과 거룩하고도
풍성한 교제를 나누게 되었음을 상징하는 행동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온전한 봉사를 마친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이다. 이처럼 구약 시대에 나
실인이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교제를 나누는 이러한
간접적인 헌상(獻上)과 교제는 이제 신약 시대에 영적 나실인된 우리
성도들에게 이르러서는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직접적인 봉헌과 교제를 이룰 수 있게 되었는 바 이것은 마침
내,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되는 날 가장 완전한 모습으로 이뤄질 것이
다(계 21:1-4).
ㅇ흔든 가슴과 든 넓적다리 - 레 7:34 주석 참조.
ㅇ그 후에는...마실 수 있느니라 - 나실인이 나실인으로서의 기간 동안
에는 엄격히 금지된 포도주를 마시는 이 의식은 하나님께서 나실인의
서원 종료 제사를 열납하셨음과 그의 헌신 기간이 완전 종료되었음을
확증하는 표시이다. 한편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때 나실인이 마셨던 포
도주는 희생 제물과 더불어 드려졌던 전제물(15절)의 일부였던 것으로
추측된다(Keil, Winterbotham).
21 이는 곧 서원한 나실인이 자기 몸을 구별한 일로 인하여 여호와께
예물을 드림과 행할 법이며 이 외에도 힘이 미치는대로 하려니와 그
서원한대로 자기 몸을 구별하는 법을 따라 할 것이니라
ㅇ이 외에도 힘이 미치는대로 - 즉 나실인의 법(13-20절)에 지정된 것
외에 나실인이 마음의 감동을 받은 대로 하나님께 특별 예물을 드려도
좋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것은 의무제가 아닌 '자원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힘이 미치는 대로'란 곧 '경제적인 능력에 따라'로 해
석할 수 있다. 이것은 (1) 인간의 형편과 처지를 깊이 이해하시는 하나
님의 자애로우신 성품을 반영한 조처이더 (2) 감사하는 마음과 자원하는
심령에 의해 드려진 예물만이 참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점을
반영한다(출 36:3). 실로 하나님은 예물보다 그것을 드리는 인간의 마음
을 더욱 감찰하신다(삼상 15:22). (3) 당신께 감사하는 마음을 하나님께
서는 결코 억제시키거나 금지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교훈한다. 한편 이
조항으로 인해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은 자가 '나실인의 법'을 수행할
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동료들이 자원제의 제물을 대신 내어주는
관례가 생겨났다고 한다(Josephus, Antiquities, XIX, 6,1; 행 21:24).
ㅇ그 서원한대로...따라 할 것이니라 - 이는 '자신이 자발적으로 약속한
것 그대로 실행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서원'이 지니
는 필수 이행성을 강조한 표현으로써, 비록 서원한 것이 서원자에게 해
로울지라도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이 서원의 대전
제 조건이다(시 15:4), <30:1-8 강해, 서원과 맹세에 대하여>.
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ㅇ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 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릴 축도는
당시 이스라엘의 왕이자 선지자인 모세를 통해 제사장들에게 전달되었
다. 그러나 그 축도는 오직 이스라엘의 제사장인 아론과 그 아들들만이
할 수 있었다. 즉 모세와 아론은 각각 그 한계를 지녔던 것이다. 그러
나 신약 시대에 이르러 구약 시대의 모세와 아론의 역할을 홀로 온전히
감당할 거룩한 자가 나타났으니, 그는 곧 우리의 영원한 왕이자 선지지
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에 영적
이스라엘 백성된 우리 성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축복 선언을 받아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23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ㅇ이의 중보자인 제사장을 선택하시고 부르셨다. 그러므로 아래 언급
된(24-26절) 축복을 선언할 권한은 오직 아론과 그 아들들, 곧 제사장
들에게만 있었다. 그러나 그 축복은 제사장 스스로의 권위에 기초하지
않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권위에 의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제사
장은 매 축복의 내용을 선언할 때마다 '여호와는'(예호와)이란 말을
전제한 후 각종 축언을 베풀어야 했다. 따라서 제사장들의 축복권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위임하신 그 특별한 권위에 전적 의존하고, 나아
가 그 권위로 말미암아 그 축복의 내용이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게 후일 유대 랍비들은 다음과 같은 경고를 그 백성들에게 들려
주고 있다고 한다. 즉 '당신은 행여 이 초라한 제사장이 나에게 무슨
축복을 베풀 수 있겠는가?라는 말을 하지 말라. 왜냐하면 당신에게 복
을 주시는 자는 그 제사장이 아니라, 그 제사장을 통해 말씀하시는 거
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Matthew Henry).
ㅇ축복하여 - '축복하다'(바라크)는 말은 '하나님을 송축하다', '무릎
을 꿇다', '은혜로 복주다', '풍성하게 하다'란 의미 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주로 신적인 복의 선포와 그 선포가 지니는 긍
정적이고 풍성한 영향력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물론 신(神)의 이
름이 언급되지 않은 채 개인이나 공동체에 '축복'이 선포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인간을 복(福)되게 하는 근원이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점에
서, 그 모두는 하나님의 신적 권위 아래 놓인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이 말의 용례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한편 이 말의 용례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즉 (1)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善)을 베푸심으로
써 그들에게 제공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와 풍성함을 가리킬 때
(신 7:12-16)와 (2)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한 자가 타인에게 하
나님의 복을 전달하고자 할 때 기원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창 14
:19). 본문에서는 위의 두 의미를 모두 포함하여 사용되고 있다<신
28장 강해, 성경에 나타난 복의 의미>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ㅇ여호와는 - 본 축도문(24-26절)에 이 말이 세 번 언급된다.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는 주체자는 바로 '여호와'라
는 사실을 분명히 나타내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단
순히 축도문의 시적(詩的) 운율상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다. 그러나 구속사적으로 볼 때 본 축도문에 '여호와'란 신 명칭이
세 번 언급된 것은 (비록 그것이 당시대의 모세와 아론 및 모든 이스
라엘 백성들의 눈에는 가리워져 있었을지라도) 분명 삼위(三位)로 존
재하시되 일체(一體)로 역사하시는(요일 5:8) 삼위 하나님과 연관되
어 있음에 틀림없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Pulpit
Commentary).그런견지에서 혹자들은 본 축도문에 나오는 '여호와'(예
호와)란 신 명칭의 악센트가 각기 달랐다고 한다(Mattthew Henry's
Commentary).
ㅇ복을 주시고 -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건국자이시자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계약자로서 그들에게 '복'(베라카), 곧 현세적이고 내
세적인 모든 복을 주시기 원하셨다<신 28장 강해, 성경에 나타난 복
의 의미>. 그러므로 이 '복'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
가는데 필요한 힘과 지혜로 볼 수 있을 것이며(시 16편). 또한 물질
적인 번영과 많은 자녀 및 건강과 장수 등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이다(창 24:1; 시 127:3). 이처럼 하나님은 선택하시고 부르신 당신
의 백성의 필요를 따라 아낌없이 풍성한 영육간의 복을 베푸시기를
원하시는, 진정 복의 근원자이시다.
ㅇ지키시기를 원하며 - 여기서 '지키다'(솨마르)는 말은 원래 '둘레
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다'란 뜻이다. 따라서 이 의미가 발전하여 '세
심하고도 철저한 보호와 보존', '주의 깊에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가짐'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는 모든 악한 세력으로부터의 보호
(시 37:28)뿐 아니라 가난과 재앙과 각종 질병 및 전쟁으로부터의 보
존(시 33:19; 76:3)까지를 의미한다. 사실 향후 죽음의 땅 광야를 행
진해야 하며 사나운 이방 세력과 맞부딪쳐야 하는 이스라엘에게 있어
서는 실제적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보호와 돌보심이 절실히 요구되었
다. 이는 오늘날 하나님나라를 목적하고 광야 같은 세상을 행진해가
야 하는 우리에게도 간절히 요청되는 바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
님의 은혜와 보호 없이는 이 세상에서 한시라도 쓰러지지 않을 수 없
는 연약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25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ㅇ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 여기서 여호와의 '얼굴'이란 표현은 그분
의 '성품'과 전인격을 상징하는 신인동형동성론(Anthropormophism)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가리우거나 감춘다는
것은 인간 편에서는 절망과 죽음을 의미한다(레 17:10; 신 31:17,18;
욥 13:24; 욜 2:6). 반면에 그분의 '얼굴'이 한 개인 또는 어떤 공동
체를 향하여 돌려진다는 것은 바로 생명과 구원과 희열이 그위에 찬
란히 비췬다는 것을 의미한다(Keil, Baumgarten, Pulpit Commentary;
시 27:1; 44:3; 잠 16:15). 그러므로 하나님의 얼굴 방향은 곧 인간
생존의 열쇠라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의미를 간직한 채 지금 하나
님께서는 당신의 언약 백성들에게 당신의 그 사랑과 은혜와 보호와
평강의 얼굴을 항상 돌리시겠다고 축복하고 계시는 것이다. 한편 본
문의 '비취다'(오르)는 '영광스러운'(glorious)이란 뜻을 포함하고
있는 말로써, 곧 당신의 영광스러운 광채가 연약하고 보잘것 없는
인간에게로 향하여 짐을 의미한다. 실로 캄캄한 곳에서는 미미한 촛
불하나가 매우 값진 역할을 감당하는데, 하물며 의와 영광의 태양이
신 하나님께서 어둡고 지친 우리 영혼에 찬란한 빛을 비추시는데 어
찌 벅찬 감격과 생의 희열이 솟아나지 않겠는가?
ㅇ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
시는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그에게 당신의 '은혜'를 베푸시기 위함
이다. 여기서 '은혜'(하난)란 본래 '구부리다', '아랫사람에게 몸을
굽히다'는 의미였으나 이것이 발전하여 '은혜를 베풀다', '긍휼히
여기다'는 의미가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란 죄로 말미암
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조건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한량없
는 사랑과 긍휼과 자비라 할 수 있다. 그런고로 오늘날 우리는 바로
이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왔고, 또한 살아가고 있으며 그리고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엡 2:4,5).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하라
ㅇ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 여기서 '향하여 든다'(나사)는 말은
'받아 들이다', '열망하다', '공급하다'는 뜻을 지닌 말로써 곧 '열
정적으로 바라보다', '계속해서 주시하다'는 의미이다. 결국 이 말은
하나님께서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을 베푸심'을 가리킨다. 이것은 25
절의 '비취사'란 말보다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을 묘사한 것으
로, 하나님께서 특별히 귀중한 대상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주의깊게 계속 주시함을 뜻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된
자는 하나님의 그러한 돌보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그 어떤 위협과
도전도 능히 극복할 수 있으며 아울러 참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
다(롬 8:31-39).
ㅇ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 여기서 '평강'(솰롬)은 '안전', '행복',
'건강', '번창', '평안', '우정' 등의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전쟁(불화)이 없는 상태', 곧 적막한 평화를 의미하
지 않고, 기쁨과 생(生)의 환희가 샘 솟듯 솟아 오르는 역동적인 평
화를 가리킨다(사 55:12).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 '평강'은 모
든 기쁨과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으로서 곧 하나
님의 축복의 최고 절정을 이루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실로 하나님께
서는 평화를 선포한 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평화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죄와 불의를 멸하시고, 그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억제할 수 없는 참 평강을 맛보게 하셨다(사 52:7; 53:5;
행 10:36; 골 1:20).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ㅇ내 이름으로 -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과 성품을 대변하는 것으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무엇을 명하는 것은 곧 자신의 전 의
지와 인격을 내걸고 명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내
이름'이란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해 주셨을 뿐 아니라(출 3:14). 축복
선언(24-26절) 중에도 거듭 언급하셨던 '여호와'를 가리킨다. 하나님
은 이렇게 절대 거룩한 당신의 이름을 전제하여 제사장들로 하여금
축복을 선언하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전 인격과 명예를 걸고 그 축복
내용을 그 백성에게 반드시 이루실 것을 표명하셨다. 또한 이것은 오
직 당신의 이름에 의해서 그 축복이 선포될 때만이 그 속에 담겨진
내용이 유효하게 작용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고로
진정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이름이 빠진 축복은 공허한 주문(呪文)
에 불과하다.
ㅇ내가...복을 주리라 - 이는 여호와께서 유일한 복의 주체자가 되심
을 분명히 선언하는 구절이다. 즉 비록 제사장에 의해 축복이 선포되
지만, 진정한 선포자요 수여자(授與者)는 바로 하나님이라는 의미이
다. 그렇기에 이 축복은 가장 완전하며 또한 모든 이들에게 진정으로
유익이 되는 것이다.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ㅇ여호와께서...일러 가라사대 - 이 말은 이하 제시되는 모든 말씀의
신적 기원성을 분명히 나타내는 말이다. 이처럼 성경은 여호와의 계시
말씀이 기록된 책이기에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변치 않고 오고 오는
성도들에게 참된 진리를 교훈해 주고 있는 것이다.
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거든
ㅇ남자나 여자가 - 고대 히브리 사회에서 그들의 규범(율법)은 대부분
남성 우위의 내용들로 가득 메워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당시 남자는 남녀 두 성(gender)의 대표자로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
며, 또한 언약의 체결자로서 하나님께 대한 책무를 지니고 있었기 때
문이다(창 2:15-17; 3:11). 그런데 '나실인'(Nazirite)에 관한 규정을
다룬 본문에는 특이하게도 남자와 여자, 두 성(性)을 동일한 위치에
두고 같은 의무 조항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나실인 제도는 당시대
의 종교, 사회적인 관행(慣行)을 초월하며 하나님과 인간의 자유로운
만남과 자발적인 헌신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특별법이라 할 수 있
다. 여하튼 나실인제도에 나타난 바 이러한 남녀 동등이라는 파격(破
格)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하나님 앞
에서는 인격적인 면에서 결코 성(性)차별이 있을 수 없다(그러나 기
능적 구별은 인정해야 한다, 창 2:23; 3:16-19). (2)각 개인은 누구
에게도 예속됨이 없는 독립체로서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인격적인 관
계를 가질 수 있다. (3) 이러한 인간의 인식과 관습을 뛰어넘는 자유
로움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에 의해서 가능하며, 그렇기에 이 자
유로움은 인간의 권리 주장이 아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사용
되어져야 한다.
ㅇ특별한 서원 - 여기서 '특별하다'(팔라)란 '크고 경이롭다', '구별
하다','어렵다'등의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뒤에 연결
된 서원(네데르) 곧 하나님께 대한 약속이 매우 성(聖)스럽고 가치
있는 것이며, 아울러 그 서원 이행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
임을 암시한 말이라 볼수 있다<30:1-8 강해, 서원과 맹세에 대하여>.
ㅇ나실인(나지르) - 이는 '구별하다'(separate), '분리하다'(set
apart)란 뜻을 지닌 동사 '나자르'에서 유래된 말로 곧 '구별된 자',
'성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자', '세상과 분리된 자'란 의미이다.
즉 세상적 욕망을 끊어버리고 자신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헌신하기로
서원한 사람을 가리킨다. 이것은 나실인 제도가 정착되기 전의 구약
초기 시대에는 신성한 종교적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신적 권능을 부여받은 고귀한 신분(예:요셉)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
되기도 했다(창 49:26). 그런데 후대에 와서 나실인 서원 규약이 율
법에 의해 규정되고 표준화 되면서 자신을 종교 도덕적으로 구별시켜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서원한 사람이면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나 일정
기간 또는 평생 동안 나실인이 될 수 있었다. 혹자는 이 나실인 제
도가 애굽이나 당시 이방 국가의 금욕 서원 또는 머리털 봉헌 서원
등의 관습에 기인하고 있다고 주장하나(Spencer, Knobel), 근거가 없
는 견해이다(Keil & Delitzsch, Vol. 1-3, p. 34). 한편 나실인 중에
는 삼손(삿 13:5)이나 세례요한(눅 1:15)등과 같이 하나님의 직접적
인 명령에 따라 나실인이 되어 평생을 헌신한 자도 있었고, 사무엘처
럼 부모의 서원에 따라 그렇게 된 자도 있었다(삼상 1:11). 물론 본
장에서는 자원하여 나실인이 될 자들이 지켜야 할 법에 관해 설명하
고 있다. 그리고 나실인의 서원 제도는 다른 모든 구약의 의식적인
율법이 그러하듯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최종 완성된다(마 12:1-8).
그러므로 이제 성도들이 하나님의 섬기는 것은 의식적 구별법에 의해
서가 아니라, 새로운 방법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구별되
어 새로이 거듭난 심령으로써이다(롬 7:5,6: 고후 3:6-11). 다음은
이 나실인 제도를 알기 쉽게 도표화 한 것이다.
+-----------------------------------------+-------------------+
| 구 분 | 내 용 l참 조 구 절 |
+---------+-------------------------------------+-------------+
| 기 원 | 출애굽 제 2년 2월 초에 시내 광야에서l 6 : 1 |
| | 하나님이 모세에게 계시함 | |
+---------+-------------------------------------+-------------+
| 목 적 | 하나님께 헌신,봉사하기 위해 자신을 | 6 : 6 |
| | 구별시킴 | |
+---------+-------------------------------------+-------------+
| 자 격 | 남녀 구분없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 | 6 : 2 |
+---------+-------------------------------------+-------------+
| 준 수 | (1)포도나무 소산 및 독주를 금할 것 | 6 : 3, 4 |
| | (2)머리털을 깍지 말 것 | 6 : 5 |
| 사 항 | (3)시체 접촉으로 인해 부정케 말 것 | 6 : 6 |
+---------+---------+---------------------------+-------------+
| | 의지별 | . 자발적 서원으로 | 6:2;행18:18;|
| | | . 부모의 서원으로 | 삼상 1:11; |
| 종 류 | | . 하나님의 명령으로 | 삿 13:5,7; |
| +---------+---------------------------+ 눅 1:15; |
| | 기간별 | . 일정기간 동안 | 삼상 1:11 |
| | | . 일평생 동안 | |
+---------+---------+---------------------------+-------------+
| | 삼손, 사무엘, 레갑 족속, | 삿 13:5,7; |
| | | 삼상 1:11; |
| 실 례 | | 렘 35:6,7; |
| | 세례 요한, 사도 바울 | 눅 1:15; |
| | | 행 18:18 |
+---------+-------------------------------------+-------------+
| | (1)혼탁한 현대를 사는 성도에게 순수 | |
| | 한 신앙 촉구 | |
| | (2)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드린 예수 | 히 7:26 |
| 교 훈 | 그리스도를 예시 | ㅣ
| | (3)온전한 헌신은 철저한 경건생활로 ㅣ약 1:27 |
| | 부터 가능 | ㅣ
| | (4)자기 부인(deny oneself)없이는 ㅣ 마 16:24 |
| | 하나님을 기쁘게 할수 없음을 교훈 | |
+---------+-------------------------------------+-------------+
ㅇ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거든 - 직역하면 '여호와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구별하려면'(RSV, to separate himself to the Lord)이다.
이 말은 나실인의 헌신 대상 및 목적을 보여 주는 바 곧 그것은 순전히
'여호와를 위해서, 여호와께'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삶 전체를 드렸던 것이다. 그들은 일정한 장소나 업무에 국한
되지 않고(출애굽 여정 동안에는 주로 성막 중심의 봉사를 했던 것 같
다). 주어진 환경에서 하나님 나라 건설에 일익을 담당함으로써 자신
의 서원을 구체화 했다. 한편 그들은 여호와를 위해 자신을 구별하는
일에 타인의 조언(助言)이 필요치 않않다. 다만 헌신을 받으실 하나
님과 자신의 관계가 바르냐 그렇지 못하냐가 문제일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을 구별한다는 것은 (1)항상 (2)하나님만을 바라보며
3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찌니
ㅇ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 여기서 '멀리하며'(야지르)란 말은 '분
리하다'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나자르'의 사역형 능동태(Hiphil)의
미래 구문으로서, 곧(앞으로 서원 기간 동안) '계속적으로 멀리하라',
'철저히 멀리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나실인은
모든 술을 절대 입에 대지 말아야 했으며 특히 포도 나무에서 얻어진
어떤 종류의 소산물도 먹을 수 없었다. 그것은 나실인의 나실인으로서
의 삶을 살아갈 때 제사장처럼(레 10:9) 마음의 청결과 절제를 유지하
여 맑은 정신으로 여호와께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기 위해서였다. 그러
나 이 명령의 더 깊은 의미는 술로 대표되는 '모든 육적인 유혹'을 전
적으로 멀리하라는 데에 있으며(렘 35:6, 7). 동시에 자신들의 '가장
큰 기쁨'은 오직 여호와께 두라는 데에 있다. 이 사실은 성경에서 포
도가 상징하는 바를 알아보면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즉 포도는 기쁨,
축제, 풍요 등을 상징했으며(전 10:19; 요 2:1-11), 동시에 그 발효된
알콜 성분으로 인한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쾌락과 세상적인 사치(창 9:
21; 사 28:7)를 상징했다. 그러므로 정신을 혼미케 하며 세상적 쾌락
과 사치(삼상 25:18, 36; 호 3:1)를 조장하는 포도주를 멀리해야 하는
것은 구별된 자의 당연한 도리였다. 사실 하나님을 자신의 최고의 '기
쁨'으로 여기는 자에게는 술(세상)이 제공하는 기쁨은 관심 밖의 일이
된다. 한편 '독주'(쉐카르)는 포도주와는 구분되는 기타의 독한 알콜
성 음료로써 마시는 자를 혼미케 할 정도의 강력한 술(strong drinks)
을 총칭하는 말이다(잠 20:1; 사 28:7).
ㅇ포도주의 초 - 여기서 '초'(호메츠)란 '신맛이 나다', '발효하다',
'알록달록하다'는 뜻의 '하메츠'에서 유래한 말로써 '포도주'(헤메르)
보다 알콜 농도가 낮은 신 포도주였을 것이다. 이것은 히브리인들이
빵을 먹을 때 찍어 먹는 양념으로 사용되곤 했다(룻 2:14).
ㅇ독주의 초 - 역시 '포도주의 초'와 동일하게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
인다.
ㅇ마시지 말며(로이쉐테) - '마시다'는 말은 단순히 '들이키다'는 뜻
외에 '술취하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앞의 '멀리
하며'란 말과 동의어이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강조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ㅇ포도즙(미쉐라트 아나빔) - 원문대로 해석하면 '익은 포도를 넣고
발로 짓이겨 뽑아낸 즙을 가리킨다(느 13:15; 욥 24:11; 사 5:2).
ㅇ건포도 - 이것은 호화롭고 부유한 계층이 즐기던 식료품이었다(삼
상 25:18). 물론 이것을 섭취한다 해도 취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
나 이것이 우상 숭배자들이 추구하는 향락을 상징하는 식물이기도
했다는(호 3:1) 점에서 구별된 자의 식물로는 적합하지 못했다.
4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찌며
ㅇ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 나실인의 제한된 생활 규범은 서원한 기간
동안 철저히 이행되어야 했다. 만약 이 규범을 어기면 그는 처음부터
다시 새로운 서원을 해야 했다(12절). 그러나 서원한 기간을 끝낸 후
에는 그들도 포도의 각종 소산물을 먹을 수 있었다. 이것은 (1)나실인
도 그의 서원 기간이 종료되면 평범한 일반 백성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 주며 (2)하나님은 인간에게 무조건 일상의 생활까지 제한하실 정
도로 지나친 분이 아님을 말해 준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께서 오히
려 나실인의 금지 규례를 서너 가지로 정하여 주신 것은 흔히 이방의
금욕 종교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의 몸을 자학(自虐)하는 갖가지 금욕
규례를 스스로 만들어 자신의 몸에 굴레를 덧씌우는 그러한 폐단을 방
지코자 한 의도도 있다고 볼 수 있다.
ㅇ씨나 껍질이라도 - 혹자에 의하면 팔레스틴에서는 포도의 씨와 껍질
을 이용하여 술이나 기타 음식물을 만들었다고 한다(Pulpit
Commenrtary). 여하튼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포도 나무에서 나
오는 하찮은 소산물일망정 금하라는 것이다. 즉 나실인들에게는 포도
나무의 모든 소산, 곧 그것으로 대표되고 상징되는 세상적인 모든 쾌
락으로부터 '절대 성결'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 헌신
된 자들은 조그마한 유혹의 가능성마저 배제해야 한다.
5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
ㅇ삭도를...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 여기서 '삭도'(타아르)란 '발가
벗기다', '없애다'는 뜻의 히브리어 '아라'에서 유래한 말로서 주로
면도용 칼을 의미한다. 한편 나실인이 왜 머리를 깍아서는 안되었으
며, 반드시 길러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랑게(Lange)
는 나실인이 머리털을 기른 것은 생명의 고상한 힘, 곧 하나님의 주권
과 승리의 화환(花環)을 상징하는 머리털(고전 11:3-7)을 길름으로써,
자신을 주장하는 자가 세상 권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임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 당시의 관념으로 머리털은 피와 마찬가지로
생명을 상징했기 때문에,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 행위는 생명의 주
권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복종과 경외를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Fairbaim, Baumrarten). 한편 길게 자란 머리를 '힘과 충만한 생명
력의 상징'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Keil). 왜냐하면 살아 있는 존재
만이 머리카락을 생성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나실인의 머리를 기른 것은 '자신의 여호와에 의해 조성된 그분의 소
유로서 자신의 온 정력을 다 바쳐 여호와를 섬기겠다'는 표식으로써,
머리털은 곧 여호와를 위하여 쓴 관(冠)이라 생각할 수 도 있다. 실
례로 평생 나실인이었던 삼손 같은 경우, 그의 머리털은 카리스마적인
신적(神的) 능력을 나타내는 표식이었다(삿 16:17). 결국 나실인이 머
리를 깍지 않은 것은 (1)자기 위에 유일한 경배 대상임을 나타낸 것이
며 (2)또한 하나님만이 자기 생명과 힘의 유일한 근원임을 인식하여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그분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ㅇ그는 거룩한즉(카도쉬 이헤에) - 직역하면 '성결하게 되었으니', '봉
헌 되었으니'라 할 수 있다. 즉 서원한 기간 동안 그는 하나님의 소유
로 구별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의 몸은 더이상 그의 것도
아니었고, 또한 여타의 주권자도 있을 수 없었다. 오직 그는 자신을 온
전히 하나님께 드리기에 힘써야 했다. 이러한 요구는 오늘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벧전 2:9)으로 부름받은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실로 오늘
날 모든 성도들은 영적 나실인인 것이다.
ㅇ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 이는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주권
을 인정하는 표이다. 한편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대머리와 머리를 완
전히 밀어버리는 것은 수치스럽고도 혐오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왕하 2:23). 죄로 오염된 이방 문화의 부산물로 받아 들여졌다(레 21
:5). 반대로 머리를 전혀 깍지 않고 자연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나실인
과 같은 특정인에게만 허용되지 않았던 것 같다(겔 44:20). 사실 히브
리인들은 애굽과 같은 고대 다른 이방 족속들과는 달리 수염과 머리를
깍는 관습이 있었다(Keil).
6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
7 그 부모 형제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로 인하여 몸을 더럽히지 말
것이니 이는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그 머리에
있음이라
ㅇ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 - 나실인은 그 정한 기간 중에는 비록 가
장 친한 친지들(부모, 형제, 자매 등)이 죽었을지라도 그 시체와 접촉
해서는 안 되었다. 만약 나실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곁에서 어
떤 사람이 죽었다면, 그는 정결케 하는 날 곧 제 7일에 머리를 깍아버
리고 제 8일에 제사장에게 예물을 드려 제사를 드리게 함으로써 시체
로 인한 부정을 제해야 했다(9-12절). 왜냐하면 주검(시체)은 결국 죄
악이 빚어낸 결과이므로(롬 6:23) 의식상 부정하게 취급되었기 때문이
다. 따라서 나실인이 시체를 멀리해야 하는 것은 의미상 죄를 멀리해야
하는 것의 상징적 표현이라 볼 수 있다. 한편 이 구절을 제사장 성별
규례에 대한 기록인 레 21장과 비교할 때, 나실인은 심지어 대제사장에
게 요구되는 사항까지(레 21:1-12) 자신들의 의무 조항으로 받아들여야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윤리마저 금지
시킨 이러한 요구는,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나 부모,
형제보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지 결코 부모, 형제
와의 정리(情理)를 완전히 끊어버리라는 뜻은 아니다(마 8:21,22; 10:
35-38).
ㅇ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그 머리에 있음이라 - 이 말은 '하나님께 자신
을 성별하여 온전히 봉헌한다는 외적이고 상징적인 표시로써 깍지 않은
긴 머리를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결국 나실인의 긴 '머리카락'은 그
머리에 관유로 기름부음 받아 성별된 제사장의 머리(레 21:12), 또는
대제사장의 머리에 씌어진 '관'(冠)과 동일한 의미로 이해 할 수 있다
(출 29:6; 슥 6:11). 즉 나실인의 긴 머리털은 하나님의 소유됨을 나타
내는 가장 확실한 인식표였다. 한편 '구별하다'란 뜻을 지닌 히브리어
'나자르'에서 '화관'(花冠)이나 대제사장의 '관'(冠)을 뜻하는 단어 '네
제르'가 파생된 사실(출 29:6; 레 21:12)은 위의 견해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Pulpit Commentary). 한편 '머리'가 부정케 된 것은 그의 전
인격이 부정케 된 것을 상징했다. 그러므로 시체로 오염된 자는 구별된
자로서의 표식이자 전인격의 상징인 머리털을 깨끗히 밀어냄으로써 부
패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있었다(9절).
8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그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니라
ㅇ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 즉 이 기간 동안 나실인의 몸은
더이상 자신의 유익이나 친지나 친구를 위해 사용할 수 없었다. 그 기
간 동안 나실인의 몸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전적으
로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좇아 살아가야만 했다. 한편 유대 랍비들의
말에 의하면, 나실인으로서의 삶을 살고자 하는 자는 최소한 그 구별
기간을 30일 이상 되게 해야 한다고 한다(Matthew Henry).
9 누가 홀연히 그 곁에서 죽어서 스스로 구별한 자의 머리를 더럽히거든
그 몸을 정결케 하는 날에 머리를 밀 것이니 곧 제 칠일에 밀 것이며
ㅇ홀연히 그 곁에서 죽어서 - 여기서 '홀연히'(베페타 피테옴)란 '눈 깜
박할 사이', '뜻밖에'라는 뜻이다. 이는 뒤이어 나오는 '그 곁에서'라
는 말과 어우러져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라
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그 해결 방안이 준비되었다.
그러나 만일 나실인이 그 서원 기간동안 고의로 그 금지 규례를 어겼을
경우에는 아무런 해결책이 없었다. 아마 이때에는 그것이 하나님을 조롱
하고 모독한 죄에 해당되기 때문에 엄한 형벌이 내려졌으리라 추정된다.
ㅇ그 곁에서(알라우) - 이 말은 '그의 옆에서 일어나다(발생하다)'로 볼
수 있다. 즉 자신이 자발적으로 시체를 접촉하게 된 것이 아니라 자기
곁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어쩔 수 없이 보살폈거나 그 시체를 만졌을 경
우를 일컫는다. 이처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진행된 주검의 부정에
대해서는 고의로 범한 부정과는 구분하여 그 해결 방안이 마련되고 있다
(9-12절). 이는 행동의 결과 이전에 동기를 먼저 보시며 인간의 약함을
깊이 이해하시는(히 4:15) 하나님의 자애로우신 조처라 할 수 있다.
ㅇ구별한 자의 머리를 더럽히거든 - 여기서 '머리(털)'는 전인격을 상징
한다. 왜냐하면 나실인의 머리털은 자신이 지금 하나님께 구별된 자라는
사실을 가장 뚜렷히 인식시켜 주는 '증표'였기 때문이다(Keil).
ㅇ몸을 정결케 하는 날 - 이 날은 시체로 인해 부정하게 된 날로부터
'제 7일째'되는 때였다. 특별히 이 날을 '정결케 하는 날'로 정한 것은
시체를 만지는 자는 '7일 동안' 부정할 것이라는 율법조항 때문이다(19
:11). 즉 주검(시체)을 만진 자는 7일 동안은 어쩔 수 없이 부정한 자로
지내야 했으며, 7일 이후에야 비로소 속죄를 위한 각종의 제사가 허락되
었다. 한편 여기서 '7'이란 숫자는 '완전수'로서, 부정케 된 자가 자신
의 허물을 완전히 인식하고 통회할 수 있는 충분하고도 완전한 기간을
암시한다. 사실 죄(허물)에 대한 깊은 자각이 없이는 아무도 정결례나
제사에 임할 수 없었다. 이는 우리가 예수를 믿고 새 생명을 얻어 풍성
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에 대한 깊은 자각과 회개가 선행되어
야 하는 것과 같다.
ㅇ머리를 밀 것이니 - 나실인이 만약 시체로 인해 부정케 되었다면, 그는
'구별'과 '헌신'의 가시적 증표인 긴 머리를 밀므로써 자신의 부정을 없
이 해야 했다. 한편 여기서 '밀다'(갈라흐)는 말은 '면도하다', '대머리
가 되게 하다', '황폐케 하다'는 의미로써, 결국 머리털을 완전히 밀어
버리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머리를 민 것은 자신의 허물에 대
한 슬픔과 통회의 외적 표시라 할 수 있다(사 22:12;렘 16:6; 겔 7:18).
그런데 모세 율법에서는 원래 이렇게 머리를 미는 것이 금지되었었다(레
19:27; 신 14:1).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고 그 죄
악을 철저히 없이 한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특별 규례가 제정되었던 것이
다. 이런 견지에서 오늘 영적 나실인이 된 우리는 자신의 범죄에 대해
머리를 미는 대신 각자의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이다(욜
2:13).
10 제 팔일에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지고
회막문에 와서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ㅇ제 팔 일에 - 성경에서 '8'은 회복과 부활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여기
서는 허물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함을 뜻한다(마 28:1).
즉 이 날은 나실인이 부정했던 흔적을 떨쳐버리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
계에서 새롭게 교제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날인 동시에 새로운 헌신에
의 결심을 다지는 날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 날은 죄로 인해 죽었던
우리가 예수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나는 회복과 중생의
날을 예표하는 날이라 할 수 있다.
ㅇ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마리 - 비둘기는 노아시대(창 8
:20)와 아브라함때부터 제물로 바쳐진 정결한 짐승이었다. 이 새들은 가
난한 자들의 식용(食用)으로 사용되었으며, 경제적으로 빈곤한 자들의
제사 제물로 규정되었었다<레 14:22>. 여기서는 경제적인 측면의 가난보
다 나실인이 자신의 허물로 인한 영적 빈곤함을 강조하기 위해 이 제물
이 요구되었던 것 같다.
ㅇ회막문에 와서 - 여기서 '회막문'은 성소 앞 곧 성막앞, 번제단이 있
는 곳을 가리킨다<5:16>. 이처럼 부정을 입은 나실인이 회막문에 선 것
은 부정하게 된 자신을 하나님께 보이며, 성결과 헌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였다(레 14:30). 이처럼 모든 죄와 허물은 하나님앞에서 해결되
어야 한다.
11 제사장은 그 하나를 속죄 제물로, 하나를 번제물로 드려서 그의
시체로 인하여 얻은 죄를 속하고 또 그는 당일에 그의 머리를 성결케
할 것이며
ㅇ속죄 제물로...번제물로 - '속죄제'는 자신이 저지른 허물에 대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의미에서<레 4:2-5:13>, '번제'는 또다시 하나
님께 완전한 '헌신'을 다짐한다는 표시로 드려졌다<레 1:3-17>. 이처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자는 과거의 죄에 대한 철저한
청산과 더불어 현재와 미래의 삶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경건한 계획이
있어야 마땅하다.
ㅇ그의 머리를 성결케 할 것이며 - 본절은 나실인이 9절에서 '머리를
민' 행위로 그의 허물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피흘림이 있는
제사'를 드림으로 비로소 속죄의 은총을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처럼 "피흘림 없이는 사(赦)함이 없다"(히 9:22)는 규례는 구
약 시대 속죄의 대원칙이었다<레 17:10-16 강해, 피제사의 원리>. 한편
이러한 원리는 오늘날 신약 성도들에게도 적용 된다. 즉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와 반성 정도로 그 죄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
의 죄든지 예수의 보혈 공로를 힘입을 때에만 비로소 그 죄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엡 1:7).
12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릴 날을 새로 정하고 일년 된
수양을 가져다가 속건제로 드릴찌니라 자기 몸을 구별한 때에 그 몸을
더럽혔은즉 지나간 날은 무효니라
ㅇ여호와께 드릴 날을 새로 정하고 - 원문에는 '새로 정하고'라는 말이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뒤에 나오는 '지나간 날은 무효니라'는 말과
어우러져 문맥상 위의 말이 첨가됨이 마땅하다.
ㅇ일년 된 수양을...속건제로 - 속건제(trespass offering)는 주로 하
나님과 이웃에게 해(害)를 끼쳤을 경우 드리는 의무제로서 <레 서론,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미>, 여기서는 시체로 인한 부정에서 용서받고,
부정을 입기 전의 상태로 회복되기 위해 드리는 제사라 할 수 있다<레
14:12>.
ㅇ무효니라(이페루) - 이 말은 '떨어지다', '멸망하다'는 뜻으로 이때
까지의 '구별'이 헌신 기간에 전혀 계산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한
순간의 실수가 온전하고 경건했던 지난 날을 무익하게 만든다는 냉엄한
신앙 윤리를 제시한다(겔 33:13). 따라서 이제 나실인은 자신의 헌신
서약과 헌신기간을 다시 정함으로써 처음부터 새롭게 출발해야 했다.
이것이 신앙인의 진취성이다. 얼룩진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돌진하는 기상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날마다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빌 3:13, 14).
13 나실인의 법은 이러하니라 자기 몸을 구별한 날이 차면 그 사람을
회막문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ㅇ회막문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 '회막'은 여호와의 임재의 상징적 처
소로서 서원 기간을 채운 자가 회막문에 가는 것은 곧 그가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을 의미했다. 이처럼 하나님께 구별된 자의 처음(10절)과 나중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므로 서원 기간을 채운 나실인이
회막문에 선 것은 곧 나실인으로서 자신의 삶의 시작과 과정과 결말이
하나님에 의해 진행되었음을 고백하는 신앙 행위라 할 수 있다(롬 11:
36).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 헌신코자 결심하는 자는 무
엇보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Coram Deo)라는 의식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회막문에서'라는 말은 '하나님 앞'이라는 의미외에
'이스라엘 온 회중 앞에서 공개적으로'라는 의미도 지닌다. 즉 나실인
이 서원 기간을 채운 후 회막문에서 각종 의식을 행하는 것은 모든 이
들에게 자신의 의무 기간이 끝났음을 공식적으로 알리기 위해서이다.
즉 이런 공개적 행사를 통해 지금까지 제한된 이웃과의 교제 관계를
청산하고, 서원 전의 본래 상태로 되돌아가 서로 접촉할 수 있게 되었
음을 알렸던 것이다.
14 그는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되 번제물로 일년 된 흠 없는 수양
하나와 속죄 제물로 일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하나와 화목제물로 흠
없는 수양 하나와
15 무교병 한 광주리와 고운 가루에 기름 섞은 과자들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들과 그 소제물과 전제물을 드릴 것이요
ㅇ예물을 드리되 - 여기서 '예물'(코르반)이란 '가까이 가져오다', '준
비하다', '제공하다'는 뜻의 '카라브'에서 유래한 말로써 곧 여호와께
나아가는 자가 드릴 '봉헌물', '희생 예물'을 뜻한다(레 1:2).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 나아오는 자에게 결코 '빈 손'으로 나오지
말 것을 명하신 바 있다(출 23:15). 이는 당신이 물질적으로 빈핍하기
때문이 결코 아니라, 당신을 만나러 오는 자로 하여금 그 은혜를 감사
케 함으로써 당신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려는 목적으로 요구하신
것이다. 사실 예물은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일 수도 있다(마 6:21).
한편 본문에서는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하였다.
(1) 번제물 - 나실인이 정한 기간을 채움으로써 서원에서 자유를 얻었
지만, 여전히 하나님께 헌신의 삶을 살아갈 것을 고백하는 표의 예물이
다<레 1:1-17>. (2) 속죄 제물 - 헌신 기간 동안 부지불식간(不知不識
間)에 지은 죄와 자신의 부족한 삶 전체를 고백하며 속죄의 은총을 바
라고 드리는 제사 제물이다<레 4:1-5:13>. 사실 나실인의 생활이란 절
대무흠이 요구되는 것이었으나, 그 서원을 마치는 날 이처럼 죄를 속하
는 제사가 요구된 것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다 할 자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롬 3:10). (3) 화목제물 - 헌신 기간 동안 자
신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계속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기 원하여 드리는 제사 예물이다<레 7:11-36>. (4) 소제물 - 이
제물은 화목 제물과 함께 드려졌는데, 서원 기간 동안 헌신과 봉사의 삶
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예물이었다<레
2:1-16>. 그리고 이 소제물과 더불어 전제물이 드려졌다.
ㅇ전제물이란 전제(奠祭)의 방식으로 드리는 예물로서 곧 포도주나 기름
등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전제물은 단독으로 전혀 드려질 수 없었고,
보통번제, 화목제, 소제 예물 등과 더불어 드려졌다(레 23:13). 한편 위
의 각종 예물과 제사에 대해서는 레위기 서론,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
미'를 참조하라. 소제(meal offering)와 전제(drink offering)로 바쳐질
제물을 열거한 15절의 내용을 보다 쉽게 번역한 공동 번역에는 "또 고운
밀가루를 기름에 반죽하여 누룩 없이 과자 모양으로 만든 것과 기름을
발라 누룩이 없이 만든 속 빈 과자 한 바구니를 곡식 예물과 제주(祭酒)
와 함께 가져가 바친다"로 되어 있다. 이 모두는 여호와께 대한 감사의
표로써 드리는 일종의 감사 제물이다(레 7:12).
16 제사장은 그것들을 여호와 앞에 가져다가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고
ㅇ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고 - 번제보다 속죄제가 순서상 먼저 드려졌다
<11절>. 그 이유는 인간에게 있어서 헌신과 감사 이전에 가장 먼저 요
구되어지는 것이 바로 죄를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
은 죄 있는 인간과 결코 교제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하나
님께 자신을 헌신하기에 앞서 죄 문제를 해결함이 마땅하다.
17 화목 제물로 수양에 무교병 한 광주리를 아울러 여호와께 드리고
그 소제와 전제를 드릴 것이요
ㅇ소제와 전제를 드릴 것이요 - 엄밀히 구분하면 여기서 '소제'는 제사
의 한 종류이고, '전제'는 제사 드리는 한 방법이다. 즉 전제는 제물을
'부어서'드리는 방식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예물로서는 주로 기름이나
포도주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제사 종류와 제사 방법을
엄밀히 구분하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혼용하고 있다. 한편, 이 소제
와 전제는 단독으로는 거의 드려지지 않았고, 대부분 번제 또는 화목제
와 더불어 드려졌다.
18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 문에서 그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찌며
ㅇ그 머리털을 밀고 - 서원한 기간이 종료된 나실인은 하나님과의 특별
한 관계(5절)와 각종 헌신에 대한 의무가 끝났음을 공식적으로 나타내
기 위한 표시로써 머리털을 잘랐다. 물론 그가 머리털을 잘랐다고 해서
이제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치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생
활 전체를 드리는 나실인의 까다로운 규제에서 벗어나 평범한 생활인으
로 돌아감을 가리키는 것이다.
ㅇ화목 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지며 - 감사와 교제로 상징되는 화목제에
불에 그동안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자신이 특별히 구별되었음을
표시하는 긴 머리를<7절> 태우는 것은 서원 기간 동안의 구별된 삶 전
체와 그 삶을 가능케 했던 사실을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돌린다는 의미
가 내포되어 있다. 동시에 그동안의 삶이 온전히 하나님께 열납되었기
를 바란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후부터 하나님과 더
나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는 소원도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람의 삶 전체는 항상 '하나님께 영광'과 '하나님과 화
목'이라는 대명제 아래 머문다(고전 10:31).
19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이 그 머리 털을 민 후에 제사장이 삶은
수양의 어깨와 광주리 가운데 무교병 하나와 무교전병 하나를 취하여
나실인의 두 손에 두고
ㅇ삶은 수양의 어깨...무교병 하나와 무교전병 하나 - 나실인의 서원을
마무리 짓는 최종적인 제사로서 제사장은 화목제 예물(흠없는 수양 한
마리,14절) 중 수양의 삶은 어깨 부위와 소제 예물(무교병 한 광주리와
기름 섞은 과자들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들, 15절) 중 무교병 하나와 무
교전병 하나(레 2:4 주석 참조)를 취해 '요제'(搖祭, a wave offering)
로 드려야 했다. 그리고 요제로 드린 이 예물들은 이미 화목제로 드린
'흔든 가슴과 든 넓적다리'(레 7:34 주석 참조)와 함께 제사장의 몫으
로 돌려졌다. 이처럼 나실인의 서원 종료 예물을 제사장이 취한 것은
그 나실인의 삶이 앞으로도 계속 제사장의 구별된 삶으로 이어져 그
속에서 하나님과 친교와 화목의 상태를 유지하게 될 것이라는 일종의
축복이었다(Keil & Delitzsch, Vol. 1-3, p. 40).
20 여호와 앞에 요제로 흔들 것이며 그것과 흔든 가슴과 든
넓적다리는 성물이라 다 제사장에게 돌릴것이니라 그 후에는 나실인이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느니라
ㅇ여호와 앞에 요제로 - '요제'는 화목제 희생 제물의 가슴 및 곡식단
과 첫이삭의 떡(본문에서는 무교병과 무교전병, 레 7:12)등을 앞.뒤로
흔들어 드리는 제사 방법이다<레 서론,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미>.
그리고 본문에 언급된 '가슴과 넓적다리'는 이미 화목 제물 중 제사장
의 것으로 구별된 것이다(레 7:30-34). 한편 요제로 드려질 제물(19절)
은 먼저 그것을 드리는 나실인의 손 위에 올려지며, 다음으로 제사장이
제물을 든 나실인의 손을 받쳐들고 흔들므로써 제사가 진행된다. 이같은
행동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하고 상징한다. 즉 (1)나실인의 헌신을
하나님께서 온전히 받으셨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2)제물을 앞으로 내
밀었다가 다시 거두어 들이는 이 요제의 행동은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
을 다시 제사장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다는 사실을 상징화한 행동이다.
(3)그리고 나실인이 바친 풍성한 예물이 하나님의 대변자인 제사장들에
게 돌려져 그들의 음식이 되게 한것은 나실인이 하나님과 거룩하고도
풍성한 교제를 나누게 되었음을 상징하는 행동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온전한 봉사를 마친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이다. 이처럼 구약 시대에 나
실인이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교제를 나누는 이러한
간접적인 헌상(獻上)과 교제는 이제 신약 시대에 영적 나실인된 우리
성도들에게 이르러서는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직접적인 봉헌과 교제를 이룰 수 있게 되었는 바 이것은 마침
내,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되는 날 가장 완전한 모습으로 이뤄질 것이
다(계 21:1-4).
ㅇ흔든 가슴과 든 넓적다리 - 레 7:34 주석 참조.
ㅇ그 후에는...마실 수 있느니라 - 나실인이 나실인으로서의 기간 동안
에는 엄격히 금지된 포도주를 마시는 이 의식은 하나님께서 나실인의
서원 종료 제사를 열납하셨음과 그의 헌신 기간이 완전 종료되었음을
확증하는 표시이다. 한편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때 나실인이 마셨던 포
도주는 희생 제물과 더불어 드려졌던 전제물(15절)의 일부였던 것으로
추측된다(Keil, Winterbotham).
21 이는 곧 서원한 나실인이 자기 몸을 구별한 일로 인하여 여호와께
예물을 드림과 행할 법이며 이 외에도 힘이 미치는대로 하려니와 그
서원한대로 자기 몸을 구별하는 법을 따라 할 것이니라
ㅇ이 외에도 힘이 미치는대로 - 즉 나실인의 법(13-20절)에 지정된 것
외에 나실인이 마음의 감동을 받은 대로 하나님께 특별 예물을 드려도
좋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것은 의무제가 아닌 '자원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힘이 미치는 대로'란 곧 '경제적인 능력에 따라'로 해
석할 수 있다. 이것은 (1) 인간의 형편과 처지를 깊이 이해하시는 하나
님의 자애로우신 성품을 반영한 조처이더 (2) 감사하는 마음과 자원하는
심령에 의해 드려진 예물만이 참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점을
반영한다(출 36:3). 실로 하나님은 예물보다 그것을 드리는 인간의 마음
을 더욱 감찰하신다(삼상 15:22). (3) 당신께 감사하는 마음을 하나님께
서는 결코 억제시키거나 금지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교훈한다. 한편 이
조항으로 인해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은 자가 '나실인의 법'을 수행할
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동료들이 자원제의 제물을 대신 내어주는
관례가 생겨났다고 한다(Josephus, Antiquities, XIX, 6,1; 행 21:24).
ㅇ그 서원한대로...따라 할 것이니라 - 이는 '자신이 자발적으로 약속한
것 그대로 실행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서원'이 지니
는 필수 이행성을 강조한 표현으로써, 비록 서원한 것이 서원자에게 해
로울지라도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이 서원의 대전
제 조건이다(시 15:4), <30:1-8 강해, 서원과 맹세에 대하여>.
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ㅇ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 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릴 축도는
당시 이스라엘의 왕이자 선지자인 모세를 통해 제사장들에게 전달되었
다. 그러나 그 축도는 오직 이스라엘의 제사장인 아론과 그 아들들만이
할 수 있었다. 즉 모세와 아론은 각각 그 한계를 지녔던 것이다. 그러
나 신약 시대에 이르러 구약 시대의 모세와 아론의 역할을 홀로 온전히
감당할 거룩한 자가 나타났으니, 그는 곧 우리의 영원한 왕이자 선지지
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에 영적
이스라엘 백성된 우리 성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축복 선언을 받아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23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ㅇ이의 중보자인 제사장을 선택하시고 부르셨다. 그러므로 아래 언급
된(24-26절) 축복을 선언할 권한은 오직 아론과 그 아들들, 곧 제사장
들에게만 있었다. 그러나 그 축복은 제사장 스스로의 권위에 기초하지
않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권위에 의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제사
장은 매 축복의 내용을 선언할 때마다 '여호와는'(예호와)이란 말을
전제한 후 각종 축언을 베풀어야 했다. 따라서 제사장들의 축복권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위임하신 그 특별한 권위에 전적 의존하고, 나아
가 그 권위로 말미암아 그 축복의 내용이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게 후일 유대 랍비들은 다음과 같은 경고를 그 백성들에게 들려
주고 있다고 한다. 즉 '당신은 행여 이 초라한 제사장이 나에게 무슨
축복을 베풀 수 있겠는가?라는 말을 하지 말라. 왜냐하면 당신에게 복
을 주시는 자는 그 제사장이 아니라, 그 제사장을 통해 말씀하시는 거
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Matthew Henry).
ㅇ축복하여 - '축복하다'(바라크)는 말은 '하나님을 송축하다', '무릎
을 꿇다', '은혜로 복주다', '풍성하게 하다'란 의미 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주로 신적인 복의 선포와 그 선포가 지니는 긍
정적이고 풍성한 영향력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물론 신(神)의 이
름이 언급되지 않은 채 개인이나 공동체에 '축복'이 선포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인간을 복(福)되게 하는 근원이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점에
서, 그 모두는 하나님의 신적 권위 아래 놓인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이 말의 용례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한편 이 말의 용례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즉 (1)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善)을 베푸심으로
써 그들에게 제공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와 풍성함을 가리킬 때
(신 7:12-16)와 (2)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한 자가 타인에게 하
나님의 복을 전달하고자 할 때 기원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창 14
:19). 본문에서는 위의 두 의미를 모두 포함하여 사용되고 있다<신
28장 강해, 성경에 나타난 복의 의미>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ㅇ여호와는 - 본 축도문(24-26절)에 이 말이 세 번 언급된다.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는 주체자는 바로 '여호와'라
는 사실을 분명히 나타내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단
순히 축도문의 시적(詩的) 운율상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다. 그러나 구속사적으로 볼 때 본 축도문에 '여호와'란 신 명칭이
세 번 언급된 것은 (비록 그것이 당시대의 모세와 아론 및 모든 이스
라엘 백성들의 눈에는 가리워져 있었을지라도) 분명 삼위(三位)로 존
재하시되 일체(一體)로 역사하시는(요일 5:8) 삼위 하나님과 연관되
어 있음에 틀림없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Pulpit
Commentary).그런견지에서 혹자들은 본 축도문에 나오는 '여호와'(예
호와)란 신 명칭의 악센트가 각기 달랐다고 한다(Mattthew Henry's
Commentary).
ㅇ복을 주시고 -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건국자이시자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계약자로서 그들에게 '복'(베라카), 곧 현세적이고 내
세적인 모든 복을 주시기 원하셨다<신 28장 강해, 성경에 나타난 복
의 의미>. 그러므로 이 '복'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
가는데 필요한 힘과 지혜로 볼 수 있을 것이며(시 16편). 또한 물질
적인 번영과 많은 자녀 및 건강과 장수 등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이다(창 24:1; 시 127:3). 이처럼 하나님은 선택하시고 부르신 당신
의 백성의 필요를 따라 아낌없이 풍성한 영육간의 복을 베푸시기를
원하시는, 진정 복의 근원자이시다.
ㅇ지키시기를 원하며 - 여기서 '지키다'(솨마르)는 말은 원래 '둘레
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다'란 뜻이다. 따라서 이 의미가 발전하여 '세
심하고도 철저한 보호와 보존', '주의 깊에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가짐'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는 모든 악한 세력으로부터의 보호
(시 37:28)뿐 아니라 가난과 재앙과 각종 질병 및 전쟁으로부터의 보
존(시 33:19; 76:3)까지를 의미한다. 사실 향후 죽음의 땅 광야를 행
진해야 하며 사나운 이방 세력과 맞부딪쳐야 하는 이스라엘에게 있어
서는 실제적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보호와 돌보심이 절실히 요구되었
다. 이는 오늘날 하나님나라를 목적하고 광야 같은 세상을 행진해가
야 하는 우리에게도 간절히 요청되는 바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
님의 은혜와 보호 없이는 이 세상에서 한시라도 쓰러지지 않을 수 없
는 연약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25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ㅇ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 여기서 여호와의 '얼굴'이란 표현은 그분
의 '성품'과 전인격을 상징하는 신인동형동성론(Anthropormophism)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가리우거나 감춘다는
것은 인간 편에서는 절망과 죽음을 의미한다(레 17:10; 신 31:17,18;
욥 13:24; 욜 2:6). 반면에 그분의 '얼굴'이 한 개인 또는 어떤 공동
체를 향하여 돌려진다는 것은 바로 생명과 구원과 희열이 그위에 찬
란히 비췬다는 것을 의미한다(Keil, Baumgarten, Pulpit Commentary;
시 27:1; 44:3; 잠 16:15). 그러므로 하나님의 얼굴 방향은 곧 인간
생존의 열쇠라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의미를 간직한 채 지금 하나
님께서는 당신의 언약 백성들에게 당신의 그 사랑과 은혜와 보호와
평강의 얼굴을 항상 돌리시겠다고 축복하고 계시는 것이다. 한편 본
문의 '비취다'(오르)는 '영광스러운'(glorious)이란 뜻을 포함하고
있는 말로써, 곧 당신의 영광스러운 광채가 연약하고 보잘것 없는
인간에게로 향하여 짐을 의미한다. 실로 캄캄한 곳에서는 미미한 촛
불하나가 매우 값진 역할을 감당하는데, 하물며 의와 영광의 태양이
신 하나님께서 어둡고 지친 우리 영혼에 찬란한 빛을 비추시는데 어
찌 벅찬 감격과 생의 희열이 솟아나지 않겠는가?
ㅇ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
시는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그에게 당신의 '은혜'를 베푸시기 위함
이다. 여기서 '은혜'(하난)란 본래 '구부리다', '아랫사람에게 몸을
굽히다'는 의미였으나 이것이 발전하여 '은혜를 베풀다', '긍휼히
여기다'는 의미가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란 죄로 말미암
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조건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한량없
는 사랑과 긍휼과 자비라 할 수 있다. 그런고로 오늘날 우리는 바로
이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왔고, 또한 살아가고 있으며 그리고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엡 2:4,5).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하라
ㅇ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 여기서 '향하여 든다'(나사)는 말은
'받아 들이다', '열망하다', '공급하다'는 뜻을 지닌 말로써 곧 '열
정적으로 바라보다', '계속해서 주시하다'는 의미이다. 결국 이 말은
하나님께서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을 베푸심'을 가리킨다. 이것은 25
절의 '비취사'란 말보다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을 묘사한 것으
로, 하나님께서 특별히 귀중한 대상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주의깊게 계속 주시함을 뜻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된
자는 하나님의 그러한 돌보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그 어떤 위협과
도전도 능히 극복할 수 있으며 아울러 참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
다(롬 8:31-39).
ㅇ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 여기서 '평강'(솰롬)은 '안전', '행복',
'건강', '번창', '평안', '우정' 등의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전쟁(불화)이 없는 상태', 곧 적막한 평화를 의미하
지 않고, 기쁨과 생(生)의 환희가 샘 솟듯 솟아 오르는 역동적인 평
화를 가리킨다(사 55:12).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 '평강'은 모
든 기쁨과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으로서 곧 하나
님의 축복의 최고 절정을 이루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실로 하나님께
서는 평화를 선포한 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평화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죄와 불의를 멸하시고, 그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억제할 수 없는 참 평강을 맛보게 하셨다(사 52:7; 53:5;
행 10:36; 골 1:20).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ㅇ내 이름으로 -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과 성품을 대변하는 것으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무엇을 명하는 것은 곧 자신의 전 의
지와 인격을 내걸고 명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내
이름'이란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해 주셨을 뿐 아니라(출 3:14). 축복
선언(24-26절) 중에도 거듭 언급하셨던 '여호와'를 가리킨다. 하나님
은 이렇게 절대 거룩한 당신의 이름을 전제하여 제사장들로 하여금
축복을 선언하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전 인격과 명예를 걸고 그 축복
내용을 그 백성에게 반드시 이루실 것을 표명하셨다. 또한 이것은 오
직 당신의 이름에 의해서 그 축복이 선포될 때만이 그 속에 담겨진
내용이 유효하게 작용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고로
진정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이름이 빠진 축복은 공허한 주문(呪文)
에 불과하다.
ㅇ내가...복을 주리라 - 이는 여호와께서 유일한 복의 주체자가 되심
을 분명히 선언하는 구절이다. 즉 비록 제사장에 의해 축복이 선포되
지만, 진정한 선포자요 수여자(授與者)는 바로 하나님이라는 의미이
다. 그렇기에 이 축복은 가장 완전하며 또한 모든 이들에게 진정으로
유익이 되는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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