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야고보서

[스크랩] 야고보서 (2 : 1~26)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7:20
야고보서 2장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ㅇ내 형제들아 - '내 형제들아'의 헬라어 '아델포이 무'
는 수신자들에 대한 야고보의 사랑의 감정을 잘 나타내며,또한 이는 새로운
주제로 전환시킬 때 사용하는 표현방식이기도 하다(5절; 1:19; 3:1; 5:7). 이제 야고
보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경건한 삶을 어떻게 실천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 권면
한다.
ㅇ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 본문에 해
당하는 헬라어는 '에케테 텐 피스틴 투 퀴리우 헤몬 예수 크리스투 테스 독세스'
이다. '테스독세스'
(영광의 주)와 '투 퀴리우 헤몬 예수 크리스투'(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
에 대한 해석은 다섯 가지이다. (1)혹자는 '영광'을 '믿음'과 연결시켜서 '우리 주 예
수 그리스도의 영광 가운데있는 믿음'이라고 해석한다(Schlatter, Zahn, Grotius).(2)
혹자는 '영광'이 '주'를 수식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해석한다(KJV, RV, Moo, Burchard).(3)혹자는 '영광'을 '사회적 지위'
로 해석하여서 본문이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Erasmus, Calvin).
(4) 혹자는 '영광의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스 독세스'를 형용사적으로 보아 '우
리의 영광스러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라고 해석 한다(Cantinat, Chai-
ne, Ropes, Hooker, Luther, Mayor). (5) 혹자는 동격으로 보아 '영광이신 우리 주 예
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한다(Bengel, Lenski, Tasker, NEB). 이 다섯 가지 견해 중 마
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왜냐하면 본문에서 '테스 독세스'가 '예수 그리스도'
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지니신 '영광'이
시다(눅 2:32;요 1:14; 17:5; 히 1:3). 한편 '받았니'의 헬라어 '에케테'
는 시상이 현재로서 수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음을 시
사한다.
ㅇ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 '외모로'의 헬라어 '엔 프로소폴렘프시아이스'
는 70인역에서 '사람의 얼굴을 보고
경탄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본래 이것은 '한 사람에게 얼굴을 들다 '라는 의
미로서 한 사람에게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 즉 같은 상황에서 서로 차별을 두고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Manton).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며 그 중심을 보
신다 (삼상 16:7; 행 10:34; 롬 2:11; 엡 6:9; 골 3:25).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닮
아가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유익을 취하기 위하여
외부적인 조건에 얽매이는 것은 잘못이며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걸
맞지 않는다.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ㅇ개역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2-4절까
지가 1절의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권면의 논중임을 나타낸다. 본절과 3절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행위에 대한 예이다.
ㅇ만일 너희 회당에...들어올 때에 - '회당'( 쉬나고겐)은
유대인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이는 일(눅 12:11)이나 사람들이 만나는 장소 (눅
4:15,20,28)를 의미한다. 야고보가 본절에서 '쉬나고겐'을 사용한 것은 이 서신을 유
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쓰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모임, 장
소를 자연스럽게 '쉬나고겐'이라고 부른 듯하다(Burdick). 한편 야고보는 회당에 들어
오는 사람 중 두 부류의 사람을 예로 들고 있다.
ㅇ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 - '금가락지를 낀 사람' 본절에서만 등
장한다. 이것은 본래 '금손가락의 남자', '금가락지 낀'이라는 의미로 '명예와 존귀를
소유한 사람'을 의미한다(창 41:42). 한편 '아름다운 옷'에 해당하는 '에스데티 람프
라' '밝고 찬란한 옷'이란 의미로서 부유한
사람이나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의 옷을 가리킨다. 당시 유대 지방에는 자신의 부와
지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반지나 아름다운 장신구를 달고 과시하는 풍습이 있었다(눅
15:22).
ㅇ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 - '더러운'에 해당하는 헬라어 '뤼파라'
는 '불결한'을 의미 하며 또한 '가난한 사람'(프토코스)은 '구
걸하는 사람'을 가리킨다(마 19:21, Mayor). 야고보는 더러운 옷을 입은 사람과 아름
다운 옷을 입은 사람을 대조시켜서 당시 수신자들이 외모로사람을 취하는 죄를 지적한
다(Hort, Burdick).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ㅇ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 '돌
아 보아' 헬라어 '에피블렙세테'는 '올려다 보다'라는 뜻
의 '에피블레포'에서 유래한 단어로 '좋은 동기를 가지고 쳐다
보다'라는 의미이다(눅 9:38, Burdick). 한편 '좋은 자리'는 특별히 마련된 좌석보다
는 앉을 자리를 권유하는 의미이다(Adamson).따라서 본절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아름
다운 옷을 입은 자들을 존경하여 그 표시로 자리를 정중하게 권유함을 시사한다(Rope-
s).
ㅇ가난한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 먼저와는 대조적
으로 가난한 자에게 대하는 태도에 관해 언급된다. '섰든지'의 헬라어 '스테디'
는 '배치하다'의 의미를 지닌 '히스테미'의 명령법이다.이
것은 아무렇게나 자리를 차지하라는 것으로서 아마 회당의 맨 끝이나 구석진 한 곳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있다. 한편 '네 발등상 아래 앉으라'는 '내 발 아래 앉으라'는 표
현이다. 당시에 전쟁에서 승리한 정복자들은 종종 자신들의 발을 피정복자들의 목위에
두었는데(눅 20:43) 본문에서는 그러한 의미보다는 발 아래의 마루바닥에 앉으라는 의
미로 사람을 차별하는 모욕적인 행위를 암시한다.

4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ㅇ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것이 아니냐 - 야고보는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서 수신
자들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구별 하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에
크리데테'는 수동태로 서로 구별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RV). 한편 '아니냐'의 헬라어 '우'는 부정 불변화사로 수신자들이 야
고보 자신의 지적에 대해 충분히 긍정할 수 있는 것임을 암시한다. 2,3 절에서 야고보
가 예를 들어 지적했듯이 수신자들은 아름다운옷을 입은 부한 자들과 더러운 옷을 입
은 가난한 자를 차별 대우했다. 이렇게 사람을 구별하여서 판단하는 것은 항상 공정하
지 못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으며 범죄가 된다.
ㅇ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느 자 -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는 것은 잘못된 동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지음을 받은 인간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며 상대방을 위한 판단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
을 채우기 위한 판단이다. 이러한 구별 행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을 서로 분
리시키며 피차 시험에 들게 하기 때문에 악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며(요 8:15), 확고
한 믿음이 결여된 것임을 시사한다(Ropes).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ㅇ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 야고보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라고 언급함
으로써 새로운 논리를 전개해 나간다. 앞절까지는 사람 외모로 판단했을때 죄가 되는
것을 언급하였지만 본절에서 11절까지는 사람을 구별하여 판단하지 말아야 될 이유를
열거하고 있다.
ㅇ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은 초대 교회 당시 사회에서 별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부류였다(마11
:5; 고전 1:26-29). 그러나 그들이 돈이 없고 가난해서 사회에서 천대 받는 자들이었
다고 할지라도 믿음에 대해서는 결코 가난한 자들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
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상속자이기 때문이다.야고보는 여기서 미래적인 영적 안목을
가지고 세상에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잘못된 시각임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
님께서는 가난한자들에게 그들이 천국의 백성이 되게 하는 소망을 품게 하셨다. 그러
나 가난한 자들이 모두 다 믿음이 부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야고보는 '가난한 자'
의 헬라어 '투스 프토쿠스' 에서 관사 '투스'
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자들이 '가난한 자들' 중에서도 한정된
자들임을 나타내고 있다(고전1:26-28).한편 '택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셀렉사토'
는 부정 과거 중간태 용법으로서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친히
선택하였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전 1:27).
ㅇ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 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 하나
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신 것이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
다. 그러면 보상으로 인한 약속이 되기 때문이다. 단지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전혀 유
업으로 받을 수 없는 자들이지만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이 자신을 사랑하도록 부르셨으
며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상급으로 마련하셨다. 이러한 것을 믿고 바라는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일 수밖에 없으며,그 결과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 된다(마 5:3;눅 6:20,
Tasker). 한편 '아니하셨느냐'는 본절 상반 절에서 언급된 '택하사'와 연결되어 '하나
님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냐'라는 의미이다. 이는 4절에서의 용법처럼 긍정적인 대답
을 기대하고 사용한 야고보의 표현 방식이다.

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ㅇ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지를 괄시하였도다 - 하나님께서 택하신 가난한 자들은 하
나님의 주권에 의해 선택을 받은 자들이다.그러한 이들을 무시하는 행위는 가증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신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외모로 취하여 멸시하였다.야고
보는 수신자들이 존귀하게 대했던 '부유한 자들'의 행위를 세 가지의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를 외모로 취해 차별 대우한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1)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 당시에 부자인 사두개인들은 가난한 유대인 그리스
도인들을 악독하게 박해하였다. 로마 정부는 유대인들에게 자기의 민족인 디아스포라
를 다스릴 수 있는 상당한 지배권을 부여하고 있었다(Lenski).그래서 사두개인들은 특
히 유대 그리스도인을 핍박하였다(행 4:1-3; 9:2; 16:19). 그들의 압제는 종교적인 것
은 물론 경제적인 이익과 관계된 것들이었다(행 19:23-41). '압제하며'에 해당하는 헬
라어 '카타뒤나스튜우신'은 '카타'
('아래로')와 '뒤나스테스'('유력자', '군주')의 합성어로 '권력
을 잡은 자들이 무자비하게 수탈하는 행위'를 나타낸다. 부유한 자들은 가난한 자들뿐
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압제하고 착취 하였다.
(2)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 당시 유대 사회에서 채권자는 채무자를 무
자비하게 다루었다. '끌고 가지'의 헬라어 '헬쿠신'은 단순하
게 '이끌다'(요 6:44;12:32)라는 의미도 있으나 여기서는 어떤 사람을 강제로 끌고 가
는 행위를 나타낸다(행 16:19; 21:30).야고보는 개역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3인칭 대
명사 '아우토이'('그들')를 사용하여 가난한자들을 끌고 가는 자가 부
자들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3) 저희는 너희에게 대해서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의 헬라어 '토 칼론 오노마 토 에피
클레덴 에프 휘마스'
에서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에피클레덴 에
프 휘마스'는 문자적로 '너희 위에 일컬어진'이란 의미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고
전 1:2;딤후 2:19)를 가리키며, '아름다운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나타낸다.
이러한 표현은 히브리 관습으로,관습에 의하면 어린아이에게 자기 조상의 이름을 따서
붙이곤 하였다(창 48:16). 이것은 개개인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어짐을 나타내었고
그 개개인은 하나님이 택한자로서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으로 구별되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
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니게 됨을 시사한다(Tasker, Burdick). 한편 '훼방하다'에 해
당하는 헬라어 '블라스페무신'은 '악을 말하는'의 의미
인 '블라스페모스'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문에서는 '신성 모독'
즉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를 일컫는다(Ropes).부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은 그
리스도인들을 농락하고 압제함으로 신성 모독의 죄를 범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
신자들이 외모로만 사람을 취하여 부자들을 옹호하고 존경하는 것은 그들의 범죄에 동
조하는 죄악이다.

8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ㅇ개역성경에는 '멘토이'('참으로')가 생략되어 있다. '멘토이'는
의심스러운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견고한 확신을 뜻하는 말로서 '그러나', '그럼에
도 불구하고'의 의미를 수반한다(Ropes).
ㅇ너희가 만일...지키면 -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 텔레이테'
조건문으로 '너희가 완전하게 지키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다는 완전성보다는 지키기를 노력하는 성실성의 관계를 시사한
다(Manton).
ㅇ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 - 사람
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행위의
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그것이 왜 불합리한가를 설명하고 있다. '최고한 법'의 헬라어
'노몬 바실리콘'(에서 '바실리콘'은 '왕'을 의미하
는 '바실류스'에서 유래한 말이다. '바실리콘'을 '노모스'에 적
용한 것은 로마 시대에 있어 왔던 일반적인 표현 방식으로(4:11,Robertson) 당시에 로
마 황제에 의해 제정된 법은 어느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법이었다. 야고보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법은 그 자체가 어떤 것에도 견줄 수 없는 탁월
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더욱 이 하나님의 법은 다른 율법보다 포괄성을 가지
고 인간 관계를 주장하는 법이기 때문에 '최고의 법'이라고 할 수 있다(Mayor,Tasker,
Ropes). 그러므로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것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을 실천하는 것이다(레 19:18; 마 22:39). 곧 상대방을 외모로 구별하지 않는 것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얽매이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다.

9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ㅇ본절은 외모로 사람을 취한자들을 향한 징계를 나타낸다.
ㅇ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
은 최고의 법과 완전히 대치될 뿐만 아니라 죄를 들어 오게하는 요인이 되어 하나님의
율법을 파괴하는 행위가 된다(요일 3: 4).
ㅇ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 여기서의 '율법'은 성경의 일반적인 법보다는
야고보가 8절에서 언급한 최고의 법을 가리킨다(Burdick). 한편 '정하리라'의 헬라어
'엘렁코메노이는 '증명되다'라는 의미로 범죄를 통하여 '증
명 됨'을 시사한다.사람을 외모로 취한자는 최고의 법을 어긴 자이며, 율법은 그를 범
죄자로 정하여 범죄하였음을 드러낸다.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자가 되나니

ㅇ개역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절이
앞절에서 언급한 내용 즉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 범죄자가 된다는 사실의 근거임을 시
사한다.
ㅇ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 야고보
는 온 율법을 지키는 자가 한 가지를 제외시키는 것을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율
법은 모두 다 중요한 것이다. 사람이 율법 한 가지만 범한다 할지라도 범죄한 자가 된
다. 야고보는 본절에서 사람들이 율법 중 자기의 필요한 부분만을 취하여 지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자들이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 부자들에
게는 지나치게 마음을 쓰면서도 가난한 자들에게는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은 율법
을 취사 선택하여 지키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이러한 행위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며 역
시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율법을 지키는 자는 취사 선택의 방법이 아닌 불리한 율법
도 동일하게 지켜야 한다. '거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타이세'
는 '걸려 넘어지다'의 의미인 '프타이오'에서 파생된 단어로 '처음으
로 걸려 넘어지다'를 의미하며(Hort) '범한'의 헬라어 '에노코스'는
'지속된'의 의미를 지닌 형용사이다. 사람이 모든 율법을 지키다가 처음으로 단 한번
범죄하였다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범죄한 것과 동일한 결과가 된다.이는 야고보가 죄의
형벌을 말하려고 했다기보다는 모든 율법에 대한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ㅇ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
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 본절은 앞절의 원론적인 언급에 대한
예이다. 논문에서 언급된 십계명은 그 순서가 서로 바뀌어 있다. 그러나 야고보는 본
문에서 어느 가정된 상황을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지 순서가 뒤바뀐 것에 대하여 특별
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 것은 아닌 듯하다(Tasker).하나님의 율법은 본질적로 하나님
의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동일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그러기에 한 가지 율법
을 완전하게 지켰다 할지라도 다른 율법을 범한다면 그것은 모든 율법을 범한 것과 동
일하며,그러한 자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자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 자가 된다.
그러므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포괄적인 최고의 법 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사람을 외모로 보는 한 가지만을어겼다 할지라도 그것은 모든 율법을
범하는 것과 동일하다(Calvin).

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ㅇ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 야고보는 본
절에서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다. 모든 율법에 차별없이, 간과하지 말고 행하라는 것이
다. '자유의 율법'은 앞서 언급한 최고의 율법을 가리키는 표현으로(8절) 예수 그리스
도를 통하여 주어진 새 계명 즉 복음을 의미한다.이것은 사람들 속박하고 구속하는 것
이 아니라 사랑안에서 은혜와 긍휼로 인도하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이다(마 5:44; 요13
:34; 골 3:12; 요일 3:11).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 받을 자처
럼(고후 5:10) 말을 하고 행해야한다. '...처럼'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토스'
는 현재 시상의 동사인 '말하고', '행하는'을 동일하게 수식하고 있다. 현재
시상은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가 습관적이고 지속적인 행위여야 함을 시사한다.또
한 본문은 행하는 것뿐 아니라 말도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됨을 나타낸다(Manton).

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ㅇ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 본절은 그리스도
의 말씀을 근거로 한다(마 18:23-35).'긍휼'은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는 자비심으로 본
절에서는 특별히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자비심을 나타낸다. 이러한 긍휼을 행하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되며(마 5:7)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는 자는 자신의 잘못을 용서받
게 된다(마 6:2). 그러기에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며 가난한자에게 긍휼을 베풀기보다
는 멸시하고, 도리어 부유한 자에게 관대한 자는 결코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없다.
ㅇ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 긍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표시
이다(Johnson).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삶 속에서 나타난 긍휼을 통하여 심판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게 되며(요일 4:17), 심판
을 이기고 자랑할 수 있게 된다.가난한 자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을 가진 자들은 심판
대 앞에서도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며 심판도 그 긍휼을 이기지 못하게 될 것이다.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ㅇ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
요 - '만일 사람이...하고'는 가정법을 수반하는 조건문으로서 가식적인 믿음을 지적
하는 말이다. 이는 '만약 믿음이 있노라 하고 계속적으로 말만 한다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들의 말은 전혀 가치가 없는 거짓이며 행위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이렇게
믿음이 있노라 신앙 고백을 하면 서도 마음 내키는대로 살아서 행함이 전혀 없다면 구
원에 있어서 유익된 것이 무엇이겠느냐는 것이다. 한편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에 해
당하는 헬라어 '티 오펠로스'는 도덕적으로 비난을 할 때 자주
쓰는 수사 의문문이다(Ropes, Robertson).야고보는 조건문과 비난을 나타내는 수사 의
문문을 사용해서 말로만 '믿음'이 있음을 강조하는 사람들을 향해 경고하면서 믿음의
본질을 설명한다. 참된 믿음은 거듭남에 수반되어 생겨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생
활과 행동에 변화를 가져온다.그러기에 거듭났지만 변화되지 않은 믿음은 피상적인 것
이며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ㅇ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메 뒤 나타이
헤 피스티스 소사이 아우톤'이다. 야고보는 부정 불변화사 '메'를 처음에 사용하여서
본문의 질문
에 대한 대답이 부정적인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본문은 문자적으로 '행함이 없는 믿
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해 낼 수 있겠느냐?'라는 의미이나 실제로는 '행함이 없는 믿음
은 능히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야고보가 사용한 '행함이 있는
믿음'은 바울이 주장한것과는 차이가 있다. 바울 사도는 율법과 복음을 대조시켜서 인
간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
원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한 반면에 야고보는 '복음' 안에서 '믿음과 행위'를 비교하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임을 드러내고 동시에 복음 안에서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Adamson, Ropes).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ㅇ만일 형제나 자매해가 헐벗고 일용한 양식이 없는데 - 야고보는 본문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의 예로 가난한 자가 부유한 자를 찾아가서 몸에 쓸 것을 구했을 때 살것은
주지 않고 말만하는 자를 들고 있다.'형제나 자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자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결속된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낸다. 한편 '헐벗다'에 해
당하는 헬라어 '귐노이'는 '벌거벗은'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본문
에서는 '초라한', '남루한' 옷을 입은 자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궁핍한 자들이 절망의
상태에 있는 것을 강조하여 표현한 것이다(Burdick). 또한 '일용할'의 헬라어 '에페메
루'는 '하루를 지내기 위한'의 의미로 하루 하루 연명할 양식을
가리킨다(Adamson). 야고보는 본문에서 생활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옷과 일용할 양식
이 없는 자들에게 행함이 없이 믿는 자들이 하는 세 가지의 '위로의 말'을 예로 들어
그러한 말이 얼마나 공허한가를 드러내고 있다.
ㅇ평안히 가라-이것의 헬라어 '휘파게테 엔 에이레네'는 히브리어의 '레쿠 레샬롬'에서
유래된 말로서 유대인들이 헤어질 때 사용했던 통례적인 인사법이었다 (삿 18:6; 삼상
1:17; 20:42; 삼하 15:9; 막 5:34; 눅 7:50; 8:48). 걱정이 쌓여있는 '헐벗고 일용한
양식이 없는 자'에게 이러한 인사는 무의미한 것이다.
ㅇ더웁게 하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르마이네스데'
는 중간태로 '스스로 불을 지펴서 덥게 하라'는 의미이다(눅 22:55; 요 18:18,25). 이
는 '옷을 입어라'라는 의미로 앞절에서 언급한 '헐벗은 것'에 대한 반대어이다. 그러
나 이들은 스스로 옷을 따뜻하게 입을 능력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본문과 같은 위로
는 전혀 가치가 없는 공허한 말에 불과하다.
ㅇ배부르게 하라 - 이것의 헬라어 '코르타제스데'는 본래
가축을 방목하여 키울 때 스스로 풀을 찾아 먹는 것을 나타낸다.혹자는 수동태로 해석
하나(Mayor, Adamson) 중간태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빌 4:12,Robertson,Davids,M-
artin). 만약 수동태로 본다면 교회의 다른 사람들에게 불행한 사람을 더웁게 해주고
배부르게 해주라고 권면하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 결론적
으로 본문은 헐벗고 굶주린 자에게 아무런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않고 '네가 알아서 스
스로 배부르게 하라'라고 위로하는 것은 공허한 것이며 합당치 못한 것을 강하게 드러
내고 있다.
ㅇ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 불행한 자들의 몸에 쓸
것을 채우지 않고 앞서 언급한 세 종류의 공허한 말만 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을 차갑
게 하는 것이며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이다.충분히 도와줄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
와 주지 않고 스스로 믿음이 있노라 하고 떠벌리는 것은 위선에 불과하다(요일 3:18).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ㅇ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본절도 역시 가정법을 수
반하는 조건문의 형식으로 '만약 계속해서 행함이 없다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진실
된 믿음의 열매는 '행함'으로 나타난다. 행함은 믿음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다.그러므로
'행함'이라는 열매를 맺지 못하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 자체'에 해당하는 헬라
어 '카드 헤아우텐'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죽은 것 즉
본질적으로 죽은 것을 시사한다(Mayor).야고보는 여기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올바른
믿음이 아니요, 헛된 믿음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믿음은 죽은 나무와 같이 아
무런 힘이나 능력이 없어서 외부적으로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꽃이나 열
매를 맺지 못한다. 이렇듯 행함이 없는 믿음은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사람도 구원 시
키지 못한다(Burdick).

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ㅇ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 헬라어 본문에는 '혹이 가로
되' 이하에는 구두점이 없다. 그래서 '혹이 가로되'가 수식하는 말이 어디까지인지 확
실히 알 수가 없으나 '나는 행함이 있으니'까지 수식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듯
하다. 이러한 수식절의 '나'(아고)와 '너'(수)가 반드시 야고보와
다른 반대자를 지칭한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어떤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을 지칭할 따름이다(Ropes, RSV, NIV). 한편 본문은 '너는 믿음이 있느냐?
나는 행함이 있다'라는 의미로 믿음과 행함이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나타낸
다고 이것은 믿음이 없는 행함이 있을수 있고, 행함이 없는 믿음도 있을 수 있다는 것
을 암시한다(Tasker).
ㅇ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 본
문은 반대자의 주장에 대한 야고보의 답변으로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여 설명하는 자에
게 그 증거를 나타내 보이라는 호된 질책이다. '행함이 없는 네 믿음'에 해당하는 헬
라어 '텐 피스틴 수 코리스 톤 에르곤'
에서 '... 없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코리스'는 '...로
부터 분리된' 번역하는 것이 더 확실하다.이것은 '행함'과 '믿음'의 분리를 시사한다.
그러나 행함은 믿음으로부터 온 열매이기 때문에 결코 믿음과 행함은 서로 분리하여
나타날수 없으며 믿음이 없이는 결코 행함이라는 결과가 입증될 수 없다. 단순히 입술
로써 고백만 한다고 해서 그 실체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속사람의 마음
가짐인 믿음을 통하여 행함의 열매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Hort). 그래서 야고보는
반대자에게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고 담대하게 선포한다. 이것은
단순히 입술로써만 고백하는 믿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의 실체를 증거하겠다는 것
으로서 행함이 구원의 도구가 아니라 믿음의 증거임을 시사한다(Robertson).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ㅇ네가 하나님은 한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리라 - 본절
에서 야고보는 다시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 고백하는 자들의 주장에 대해 언급한다. 행
함은 없고 오직 믿음만을 주장하는 자들의 고백인 '한 분이신 하나님' 즉 유일신을 믿
는 믿음에는 야고보도 동의한다. 그러나 한 분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은 확실한 교리로서 기본적인 것이다. 또한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 그 자체는
중요한 일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전통적으로 믿고 따라온 중요한 교리이다(신 6:4,
Mussner). 그러나 그 교리 자체가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진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귀
신들도 그 정도까지는 믿기 때문이다.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역사하심은 귀신들도 마땅
히 아는 바이다(막 1:24). 그러나 귀신들이 하나님께서 유일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믿
지만 그것은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하며 다만 떨게 할 뿐이다. '떠느니라'에 해
당하는 헬라어 '프릿수신'은 '털이 곤두서다','떨다'를 의미하
는 '프릿소'에서 유래한 단어로 극도의 공포심 때문에 머리 끝이 곤두
서는 것으로 영적인 불안과 공포를 의미한다(Manton). 이처럼 '하나님께서 유일신이
시다'라는 믿음은 귀신들과 마찬가지로 지적으로만 받아들이고 입으로만 시인하는 것
에 불과할 수도 있다. 구원하는 참된 믿음은 내적으로는 온전한 신앙의 인격체를 만들
어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게 하며 외적으로 믿음에 대한 행함을 나타나게 한다.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ㅇ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나니 - '허탄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네'는 '공허한', '속이 빈'의 의미로 행함이 없는
자들을 향한 말로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이 전혀 알
지 못함을 가리킨다. 따라서 ' 허탄한 사람'은 영적인 진리를 전혀 몰라 행함이 없는
어리석은 사람을 말한다. 한편 '헛것'의 헬라어 '아르게'는 원래 곡식이
전혀 없는 땅이나 노예가 일하지 않아서 전혀 소득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Hort, Moo,
Mussner). 이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수고하지 않아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는 것임을
시사한다(14-19절,Burdick).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ㅇ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 야고보가 '아브라함'을
예로들면서 '우리 조상'이라고 표현한 것은 수신인이 유대인임을 시사한다(Burdick).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었고,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다(요 8:53; 행
7:2; 롬 4:1). 한편 '드릴 때에'라고 번역된 말은 그 의미가 확실하지 않다. 아브라함
이 그 아들 이삭을 실제로는 드리지 않았음에도 헬라어 본문에는 부정 과거인 '아네노
카스'가 사용되고 있다.이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기로 작
정하고 그 의지를 실천에 옮겼기 때문이다. 즉 사실상 하나님께서 그 뜻하신 바를 실
행치 아니하셨을지라도 아브라함은 실제로 아들 이삭을 드렸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
다.
ㅇ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 부가 의문문의 형태로 사용된 '아니
냐'의 헬라어 '우크'는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야고보의 표현 방식이다.
한편 '의롭다 하심을 받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디카이오데'
는 '의로 여기다'라는 의미로 개인의 주관적인 주장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모든 사람이
의롭다고 인정할 만한 선포 행위를 일컫는다. 이러한 의롭다함은 '행함으로' 즉 아브
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비로소 선포되었다(창 22:1-14).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ㅇ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
라 - 본절은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논증으로 '믿음'
과 '행함'과의 관계성을 보여준다. '네가 보거니와'는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증거
가 명백할 정도로 충분한 것'을 가리킨다(Robertson). 이것은 '네 가 보느냐'라는 의
미로 다시 한번 믿음만을 강조하는 자들을 향한 야고보의 권고를 나타낸다. 야고보는
본절에서 '의롭다 함'의 근거가 오직 행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제
시해 주고 있다. 아브라함의 의롭다 하심은 오직 행함만이 아니라 '믿음이 그의 행함
과 함께 일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과 '행함'은 불가분리의 근본적인 속성을 지
니고 있음을 나타낸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닌 죽은 믿음이며, 반대
로 믿음이 없는 행함은 올바른 행함이 아니다.믿음은 행함의 원칙으로 행함과 함께 역
사하며 믿음의 바탕 위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결과가 행함이다(Burdick). 그러한 의
미에서 아브라함의 믿음도 행함으로 온전케 된 것이다(Manton, Calvin). 이처럼 믿음
의 필연적인 결과로 행함이 나타날때 믿음은 온전케 될 수 있다.

23 이에 경에 이른바 이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ㅇ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 '경에 이른바'는 창 15:6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창 15:6에서 하나님
이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시고 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창 22장의 사건까지는
30년의 시간이 흐른다. 이러한 시차로 인해서 혹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완전하였기에
'응하였다'고 볼 수는 없으며 이 말 속에는 예언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
님의 섭리로 인하여 이루어졌음을 분명하게 해주고 있다고 주장한다(Tasker). 또 다른
이는 이삭이 출생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겼기때문에 이삭을 드리는 사건
으로 인하여 '응하였다' 즉 의로 여김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은 모순이라고 지적하고
있다(Luther).더군다나 카톨릭주의자나 소키니안들(Socinians)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의로 여길 때'의 아브라함의 의는 불완전한 것이었으나 이삭을 드리는 행함을 통하여
비로소 완전한 의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창 15장에서의 아브라함의 의는 이미
'완전한 의'였다. '응하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플레로데'는
'플레로오'에서 온 말로서 성경말씀을 '실행 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
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 이미 믿음이 전제되어 있었으며 그러한 아브라함의 믿
음자체가 창 22장의 사건을 낳는 근거가 된 것이다.그러기에 창 15:6의 아브라함의 의
는 이삭을 드릴 때 비로소 완전해진 것이 아니라 이미 15장에서 완전한 '의'였다.아브
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쳤을 때 이러한 믿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것이다(Bu-
rdick). 따라서 야고보의 주장과 바울의 주장은 서로 상반되고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서로 다른 측면 즉 행함과 믿음의 측면을 각각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창 22:1-14절은 창 15:6을 응하였다는 것이다.
ㅇ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 '하나님의 벗'
(필로스 데우)이라는 칭호는 야고보가 사용하기 이전에도 이미 일반적으로 사
용된 칭호이다(대하 20:7; 사 41:8, Phillo). 야고보는 이 칭호를 사용함으로 '믿음'
과 '행함'을 통해서 '의'로 여김을 받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
고 깊이 교제를 나누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친밀한 교제를 유지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숨기지 않았음을 의미한다(창 18:17,Ta-
sker). 예수께서도 십자가의 비밀을 안 제자들에게 '이제부터는 종이라 하지 아니하고
친구라 하리라'고 하셨다(요 15:15).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친구라 함은 아브라함이 이
삭을 제물로 드렸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것으로 아브라함에게 전
적으로 특권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은혜이다(Knox).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ㅇ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 본절에
서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예를 통하여 전체적인 결론을 맺고 있다. 진정한 믿음이란 정
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반응인 행함으로 나타난다. 즉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서 순종으로 나타난다. '믿음으로 만 아니니
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크 에크 피스테오스 모논'
은 믿음도 우리가 가져야 하는 필수적인 것이고, 또한 아브라함처럼 행함
으로써 나타내 보여야 하는 것임을 시사한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믿음으
로만이 아니다. 믿음을 통한 행동으로써 의롭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문
은 바울이 엡 2:8,9에서 주장한 것과는 의미상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야고보의 주장은 진실된 믿음으로 인하여 행함이 산출되는 것이라고 주
장하였고(22절), 바울 또한 우리의 구원이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
아 오직 믿음이 있는 자는 선행을 무시하지 않는 자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결코 믿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없다. 바울은 다만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 율법
주의자들을 대상으로 말하 였고(롬 3:20,28) 야고보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행함과 믿음
은 별개라고 주장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다(Martin). 따라서 바울과 야고보의
주장은 동일한 것이다(Burdick).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ㅇ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본절은 라
합의 예이다. 라합은 이방인이었다. 야고보가 라합을 예로 든 것은 아마 행함으로 의
롭다 함을 받는 것은 어떤 특정한 민족이나 한정된 사회 계층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
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Calvin). 라합은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기생이었고,이방인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의롭다 함
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믿음에 근거한(수 2:8-13; 히 11:31) 행함이었다. 그
녀가 죽음을 무릅쓰고 사자(使者)들을 도피시킨 것은 신실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ㅇ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 그녀가 의롭다함을 인정받은 것은 모
든 사람 앞에서 신실한 믿음을 인정받은 것을 가리킨다.실제로 그녀는 여리고 성이 무
너지는 날 자신뿐만 아니라 부모, 형제, 친척과 더불어 구원을 받았으며(수 6:23), 다
윗왕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았다 (마 1:1,5,6). 그래서 후대에 신
앙의 모범적인 인물로 기록되었다(히 11:31). 야고보의 이러한 주장은 그녀의 과거 생
활이나 거짓말했던 것을 간과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녀의 믿음에 의한 행위를 강조
하기 위함이다(Adamson).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ㅇ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 야고보는 본절
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을 영혼없는 몸 즉 시체에 비유하고 있다. 이 비유는 산 믿음이
라면 반드시 행함이 뒤따라야 하며 행함은 반드시 믿음에 기초해야 함을 암시한다.'영
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토스'는 일반적으로 '영'(spir-
it)이라고 번역한다(NIV, NASB). 그러나 본문에서 야고보가 사용한 비교는 창 2:7을
근거한 것으로 본절의 '프뉴마'는 창세기의 '생기' 즉 생명을 주는 '호흡'을 의미하는
'루아흐'로 보아 '호흡'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숨을 쉬지 않
는 것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나 다름 없으며 만약 야고보가 '영'으로 보았다면 '프쉬
케'('영혼')를사용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Robertson, Martin).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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