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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선교회

신약/히브리서

[스크랩] 히브리서 (12 : 1~29)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7:15
히브리서 12장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ㅇ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 '증인'의 헬라어
'마르튀론'은 일차적으로 '관람자'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본절
이 결승점을 향하여 달려가는 운동 경기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절의
'마르튀론'은 단순히 수동적인 관람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증인으로서 진리를
증거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이다(Michel, Peterson). 즉 '마르튀론'은 앞장에서
언급된 신앙의 선배들을 가리키는 것으로(11장)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고
난 속에서도 인내하며 충성을 다한 자들이었다. 저자는 이러한 증인들을 먼저 언급함
으로 수신자들에게 증인들과 마찬가지로 고난 속에서 좌절하지 말고 인내하며 최선을
다하여 경주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모든...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 경주자는 두 가
지릍 벗어버려야 한다.
(1) 무거운 것 - 이에 해당하는 혤라어 '옹콘'
은 운동 선수가 운동을 하는 데 방해가 되는 체중을 나타내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는데
장애물이 되는 것을 가리킨다(Morris, Bruce).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장애물은 부를
사랑하는 것,세상적인 관심사나 자만에 빠져있는 것 혹은 세상에 애착하는 것 등을 의
미할 수 있다(Spicq, Mora).
(2) 얽매어기 쉬운 죄 - '죄'의 헬라어 '텐 하마티안'
에 대해 혹자는 배교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Kasemann). 그러나 배교는 본절의 내
용인 그리스도인들이 경주하는 것과 무관하므로 타당하지 않다. 본절의 '텐 하마르티
안'은 단수로 어떤 특정한 죄를 지칭하기보다는 '죄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Montefi
ore, Michel, Peterson, Bruce, Hewitt) 여기서는 경주를 하는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
는 연약성을 가리킨다(Spicq, Mora).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경주를 하는 과정에서 불
필요하며 장애물이 될만한 모든 것을 버려야만하며 동시에 인내로서 경주해야 한다.저
자는 인내하는 가운데 경주를 한 앞선 증인이 많음을 진술함으로 수신자들을 비롯한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이 수많은 어려움에 처한다 할지라도 인내하며 경주해야 함을 권
면한다. 왜냐하면 앞선 허다한 증인들이 결승점에 도달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바라
는 결승점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Bruce).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ㅇ믿음의...예수를 바라보자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의 경주의 목표인 예수에 대한
진술이다. '믿음의'는 '주'만을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주'와 '온전케 하시는 이' 둘
다를 수식한다(Bruce, Lane). '믿음'은 11장에 나타난 허다한 증인들이 삶속에서 지녔
던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나타내며 예수의 지상생활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가
있다(Moffatt, Westcott, Bruce, Hughes). 한편 저자는 본문에서 예수에 대해 두가지
칭호를 사용한다.
(1) 주(아르케곤) - '아르케곤'은 '아르코'
('시작하다', '지배하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능동태일 경우 '지배하다'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나타내며 중간태일 경우 '시작하다'라는 의미를 취해 선
구자되심을 나타낸다. 두 가지중 후자가 더 타당한 듯하다(Bruce, Lane, Morris). 그
리스도께서는 수신자뿐 아니라 앞절에서 언급된 앞선 '허다한 증인들'보다 더 앞서 믿
음의 길을 걸어가셨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으며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과 동행하셨기 때문이다(유1:5, Bruce).
(2) 온전케 하시는 이(텔레이오텐) - '텔레이오텐'은 '텔
레이오오'('완수하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완성자' 혹은 '완전자'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지상 생활 가운데 그 믿음을 온전히 실행한 자임을 드러낸
다(Moffatt,Westcott, Bruce). 저자는 '아르케곤'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우선
적으로 행한자이며 동시에 믿음을 행함에 있어서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탁월
한 자임을 시사하며 '텔레이오텐'을 통해서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완전히
성취하셨음을 드러내고 있다(Peterson, Westcott).
ㅇ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기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
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 '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티'
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1) '대신에'. 이 경우에 본문은 그리스도는 성
육신하시기 이전에 누리셨던 하늘의 지위와 복을 버리시고 죄인들만이 당하는 형벌인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음을 시사한다. (2) '위하여'. 이 경우에 본문은 앞으로 다가올
즐거움 즉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구원과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을
위해 당시 수치스러운 것으로 이해되었던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여 걸어가셨음을 시사
한다. 문맥상 후자의 해석이 더 타당하다. 한편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는
즉위식을 나타내는 시 110:1의 인용이다(2:5-9; 8:1,2; 10:12,13). '앉으셨느니라'의
헬라어 '케카디켄'은 완료 사상으로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하
나님 우편에 앉아계심을 시사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그 수치를 참으시고
이루신 승리가 영원하며 완전함을 나타낸다(Bruce).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ㅇ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
신 자를 생각하라 - 저자는 본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을 제시함으로 고난당
하는 수신자 공동체를 위로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거역하고 대항하며 직접
십자가에 못박았던 대적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대응하시지 아니하시고 참으셨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인내는 고난을 당하고 있는 수신자 공동체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 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ㅇ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 본절은 앞절과 마찬
가지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수신자들의 고난에 대한 비교이다. 저자는 이 비교를 통해
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이 수신자들이 당하는 고난보다 훨씬 극심한 것임에도 불
구하고 끝까지 인내하신것과 같이 수신자들도 그래야 함을 시사한다. '죄와 싸우되'는
수신자들의 공동체와 악의 세력과의 갈등을 나타내는 것으로 '죄'는 1절에서 언급한
'죄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3절의 '죄인들'과 같이 악의 무리를 가리킨다
(Lane). 한편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는 수신자들이 죄에 대항하여 당한
고난이 순교에까지 이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수신자들은 고난을 당할때 자신들보다
더 심한 고난을 당한 허다한 증인들과 수치와 죽음에도 인내하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결코 낙심해서는 안 되며 그들과 같이 인내하고 고난에 잘 대응해야 한다.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 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 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ㅇ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 본문은 '아들
들인 너희에게 말한 권면을 완전히 있었느냐?' 라는 의미의 수사학적 의문문이다. 이
물음을 통해서 저자는 수신자들이 훈련과 교육의 측면에서 부과된 고난의 바른 개념을
완전히 잊어버렸음을 확고하면서도 부드럽게 비난하고 있다. 다음에 언급되는 인용문
을 통해서 저자는 수신자들이 인내해야만 했던 고난이 훈련의 성격을 띤 것임을 진술
하고 있다.
ㅇ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
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
니라 - 본문은 잠 3:11,12의 인용이다. 이는 하나님의 징계하시는 행위에 대한 의도를
나타내는 바,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더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
을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고난을 통해서 훈련시키심을 시사한다. '징계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데이아스'는 꾸짖음, 교정, 징벌과 같은
수단을 통해서 교훈하시며 교육하시는 것을 의미한다(신 8:5). 하나님은 자식이 잘 되
기를 바라는 부모와 같이 자기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뜻에
순종하도록 함으로 목표에 도달하도록 훈련시키신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징계와 책망
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사이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임을 나타내어 '아들됨'을 강조
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식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과 사랑을 시사한다(Bruce, Hewitt,
Morris). 한편 본문의 '내 아들들아'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휘에 무'
이나 인용문인 70인역 잠 3:11에는 '휘에'('아들아')로 되어 있어 본
문에 인칭대명사 '무'('나의')가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우'가 없는 '휘
에'는 잠언 전체에서 교사가 학생을 부를 때 사용된 표현이다(Lane, E.Ahlborn). 저자
는 이러한 의미를 지닌 70인역에 '무'를 삽입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새 언약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됨을 강조하고 있다(Bertram, Bornkamm).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 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ㅇ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 '너희가 참음은'의 헬라어 '휘포메네테'
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1) 혹자는 직설법으로 이해
하여 개역성경 본문처럼 해석한다(Hewitt). (2) 혹자는 명령법으로 이해하여 '너희는
징계를 참으라'는 의미로 해석한다(Morri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문맥상 명령법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ㅇ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
으리요 - 본문은 아버지로서 자녀를 징계하는 것이 보편적인 것임을 말하는 수사학적
표현이다. 아들이 아버지와 징계를 받는다는 사실은 아버지가 그 아들을 진정한 아들
로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고난을 통해 징
계를 하신다는 것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아들로 인정하고 계심을 시사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을 슬퍼하거나 좌절하는 것이 아
니라 그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로 하나님의 아들됨의 증거임을 깨달아 기뻐해야 한다.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ㅇ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아들이 아니니라 - 저자는
본절에서 징계를 받지 않는 경우를 통해서 징계가 아들됨의 증거임을 반증한다. '사생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노도이'는 노예나 첩의 아들을 나타낼 때 사
용되는 단어로 모든 사생아를 의미한다. 또한 '참아들이 아니니라'의 헬라어 '우크 휘
오이'는 서자(庶子)를 가리킨다. 만약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없다면 그는 서자이며 사생아이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도 될 수가 없다. 반대로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의
징계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사랑과 상속자로서의 특권적 위치
를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ㅇ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
께서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 '영의 아버지'는 '육체의 아버지'와 대조되
는 개념으로 하늘 세계가 복종하는 초월적인 분 즉 하나님을 가리킨다(Kuss, Lane).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주로서 그리스도인들을 훈련시키고 헌신을 요구할
수 있는 최고의 권위를 소유하신 분이시다. 저자는 최고의 권위를 소유하신 영의 아버
지와 육신의 아버지틀 대조함으로 자녀들이 육신의 아버지보다 더 위대한 영의 아버지
이신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때 당연히 복종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살려'의 헬
라어 '제소멘'은 생명으로의 초대를 의미하는 것으로(신
30:11-20) 종말론적 구원을 즐기는 것과 연결된다(10:38,39, Peterson). 그리스도인들
은 하나님께 징계를 받을지라도 좌절하여 배교하는 것이 아니라 인내하며 담대히 나아
가 복종함으로 온전한 구원을 소유하여야만 한다.

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ㅇ본절은 '호이 멘 가르...호 데'('저희는 ... 오직 하나님은')라는 단어의 대비를 통
해 육신의 아버지와 영의 아버지의 비교를 나타내고 있다.
ㅇ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 '자기의 뜻대로'는 육신의
아버지의 징계가 자녀에게 유익을 끼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징계의 불확실성을 시사한다. 또한 '징계하였거니와'의 헬라어 '에파이듀온'
은 미완료 시상으로 육신의 아버지의 징계가 불완전하여 반복
되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저희' 곧 육신의 아버지가 행한 징계는 불완전할 뿐만 아
니라 자녀에게 유익을 끼치는지 조차도 불확실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
은 육신의 아버지를 공경하였다(9절).
ㅇ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 하나
님의 징계는 육신의 아버지의 징계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완전하시
기 때문이다(Bruce).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징계하시
는 목적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을 영적인 성숙과 거룩함에 이르
도록 하심을 시사한다. '거룩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오테토스'
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공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본질적
인 성품을 나타내는 것으로(Morris, Procksch)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완전하여진다
(Bruce, Lane).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훈련의 성격을 띤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속성인 거룩함을 공유할 수 있도륵 하신다. 한편 그리스도인이 온전한 성화를 이루는
데는 인내를 통해서 믿음을 보존함으로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미래에 있다(Lane,
Michel, Hughes, Peterson). 훈련의 성격을 띤 고난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실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며 종말론적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다.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ㅇ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
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 저자는 '프로스 토 파론'
('당시에는')과 '휘스테론'('후에')을 대
비 시켜서 하나님의 징계가 그 당시에는 어려움과 슬픔을 가져다 주지만 궁극적으로
놀라운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의의 평강한 열매'는 평강과
의로 이루어진 열매를 의미한다(Lane). '평강과 의'는 종말론적 구원의 선물로서
(Michel) 미래에 소유하게 될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흔적이다(Peterson).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ㅇ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 저자는 본문에서 사 35:3을
인용하여 고난으로 인해 소진(消盡)된 상태에 있는 수신자들에게 강하고 담대해질 것
을 권면하고 있다. '피곤한 손'은 '불구가 된 손'(JB)으로 무용(無用)하여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절의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은 철저하게
소진되고 좌절한 사람을 나탄내는 표현이다. 한편 '세우고'의 헬라어 '아노르도사테'
는 '강하게 하다'라는 의미로(NIV) 고난으로 인해 좌절에 빠
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서 담대해질 것을 나타내는 권면이다.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하라

ㅇ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하리 - 본문은 잠 4:26의 인용이다. '곧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르다스'
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 가운데 적절한 행동을 취하는 것으로 윤리적인 것
을 의미하나 본절에서는 믿음의 시련을 통해서 도달하는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를 의미
한다(Lane). 그리스도인들은 시련에 의해서 좌우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인 목
표를 향해 곧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편 '어그러지지'의 헬라어 '에크트라페'
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곧은 길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을 의미하여 '배교'를 시사한다고 주장한다(Hughes, Kasemann). (2) 혹자는
'탈구(脫臼)하다'라는 의미로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rris,
Bruce, Hewitt).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만약 전자의 경우 처럼 배교를 의
미한다면 '배교는 더이상 속죄할 수 있는 제사가 없다'는 말(10:26)과 '고침을 받게
하라'는 명령과 부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Lane). 저자는 본절에서 시련과 위험 속에
서 좌절하고 소진된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여 신앙의 최
종적인 목표인 종말론적 구원만을 향하여 매진할 수 있도록 하라고 권면하고있다.

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ㅇ모든 사람으로...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 '좆으라'의
헬라어 '디오케테'는 단순히 찾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긴
박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Morris, Lane, Michel).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노력을 강조
한다.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추구해야 할 것에 대해서 두 가지로 진술한다.
(1) 화평함 - 이것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ㄱ)혹자는 불신자들까지 포함하는
모든 사람들과의 평화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orris, Bruce, Hewitt, Spicq,
Montefiore, Andriessen). (ㄴ) 혹자는 십자가상에서 성취된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에
의해서 회복된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평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Lane, Foerster). 이
두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
님과 인간과의 화평은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인들, 혹은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
인들 사이에 화평을 이룰 수 있는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화
평을 통해서 타인의 행복과 복지를 위한 책임을 갖게 된다.
(2) 거룩함 - (하기아스몬) - 코이네 헬라어(Koine Greek)
에서 '-모스'로 이루어진 단어는 '행위'를 나타낸다(Lane). 그러기에
'하기아스몬'은 거룩해진 상태를 가리키기보다는 거룩해져 가는 과정을 나타낸다. 그
러나 인간의 노력에 강조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
로서 성도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고자 할 때 주어지는 것이다(Michel, Morris, Bruce)
거룩함은 그리스도인이 소유해야 할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거룩해져야만 한다(레 11:45; 벧전 1:15,16). 이러한 화평과 거룩함이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화평과 거룩'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
해 그리스도인에게 성취된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드러내
야 할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이다(마 5:9).

15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자가 있을까 두려워 하라

ㅇ너희를 돌아보아 - '돌아보아'의 헬라어 '에피스코푼테스'
는 현재 능동태 분사로 '계속적으로 지켜 보고 감독하는 것'을 의미한
다. 이는 공적인 목회 사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서로를 돌보
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3:12,13; 10:24,25). 저자는 그 과정에서 조심해야할 세 가
지를 제시하고 있다.
(1) 하니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 '이르지 못하는' 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스테론 아포'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
해서 어떤 혜택으로 부터 제외되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여도 얻기가 어려움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은헤에 대한 거절,불신앙, 혹은 가볍
게 여기는 마음으로 인해서 복음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은혜를 자진해서 포기하는 것을
시사한다(Lane, Morris, Michel, Casey, Bruce).
(2) 쓴 뿌리가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
워하고 - 본문은 신 29:12(LXX)의 내용을 반영한다.그러나 본서의 헬라어 본문은 본서
저자가 나름대로의 의도를 가지고 생략한 것이 발견된다.

┌────┬─────────────────────────────────┐
│ 본 문 │ │
│ │메티스 리자 피그리아스 아노 퓌우사 에노클레 │
│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두려워 하고' │
│ │ │
├────┼─────────────────────────────────┤
│ │ │
│ 신 │메 티스 에스틴 엔 휘민 리자 피크리아스 아노 퓌우사 에노클레 카이 │
│ 29:17 │피그리아 │
│ (LXX) │'너희 중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쓴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을 │
│ │두려워하라' │
└────┴─────────────────────────────────┘
저자는 신명기 본문에서 두 가지를 생략하고 있다. (ㄱ) '에스틴 엔 휘민'
('너희 중에 있다'). 왜냐하면 '에스틴...에노클레'
(... , '있다...괴롭게 하고')가 구문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
다(Michel). (ㄴ)신명기 본문의 마지막에 있는 '피크리아'('쓴').
이 말을 생략한 것은 중복을 피하기 위함이다(Lane). '쓴 뿌리'는 쓰고 독이 있는 열
매를 내는 것으로 신명기에서는 우상 숭배와 연관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인용을 통
해서 완고한 기질로 인해서 생겨나는 불신앙과 배교가 수신자들의 공동체에 팽배해지
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경고한다.
(3)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 저자는 본문에서 창 25:29-34의 '에서'를 예로 들어 공동체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에 대해 경고한다. 성적 부도덕을 행하는 '음행하는자'
(포르노스)와 나란히 '에서'를 언급한 점에 대해 두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음행하는 자와...망령된 자'의 헬라어 '포르노스에 베벨로스'
에서 '에'('또는')가 '음행하는자'와 '망령된 자'
를 분리시키는 것으로 수신자의 공동체내에 '음행하는 자'와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
라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주장한다(Elliott, Bruce, Riggenbach, Morris, We
stcott). (2) 혹자는 '포르노스'를 은유적으로 해석하여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 '망령된 자'와 동일한 의미로 보며 '음행하는자'와 '망령
된 자' 둘 다가 에서의 경우에 해당되는 것으로 주장한다(Lane). 두 가지 견해 중 전
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포르노스'를 은유적으로만 해석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실제
로 저자는 문자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13:4). 한편 '망령된'에 해당하는
헬라어 '베벨로스'는 '거룩하지 못한' 혹은 '세속적인'이란 의미
로 영적인 면보다는 현세적인 것에 더 치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림으로 현세적인 것을 위해서 하늘의 참 복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고 내던져 버리는 자의 모델이 되었다(Thompson). 이러한 에서의 행위는 하나님께
서 장자에게 주시고자 했던 축복에 대한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으로 배교자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Hewitt, Morris).

17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ㅇ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
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 본문은 앞절에서 망령된 자
의 예로 제시된 에서에 대한 설명이다. '축복'은 에서가 아버지 이삭에게서 받고자 했
던 하나님의 실제적인 복을 의미한다.또한 '기업'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
성에게 약속하신 땅의 소유를 가리키나 본서 내에서는 아들됨과 연결된다(Lane). 예수
께서는 만유의 상속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1:2,4)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통해서
아들의 지위를 얻는 자로(2:10) 하나님의 약속을 상속받을 자들이다(6:12,17,18;9:15)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기업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할당하신 것이
다. 한편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 이페르 메타 다크뤼온 에크
제테사스 아우텐'
은 문자적으로 '비록 눈으로 그것을 구하였을지라도'라는 의미로 개역성경 본문
에는 '그것을'(아우텐)이 생략되어 있다. '아우텐'은 앞서 언급한 '축
복'을 가리키는 것으로 에서가 축복을 다시 받기 위해서 눈물로 간구했음을 나타낸다
(Bruce, Hewitt). 에서의 눈물은 축복을 도로 찾기 위한 눈물이었지 장자 명분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가볍게 생각한 것에 대한 회개의 눈물이 아니었다(Lane).그러기에 그
가 눈물을 흘리며 간구했던 축복을 하나님으로 부터 받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선물을 멸시하였기 때문이다(Westcott, Andriessen). 에서가 눈물로 간구했
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 부터 장자권에 대한 재고(再考)의 기회를 얻어내지 못한
것은 배교자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가볍게 여
기고 현세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된다(6:7,8,Lane).

18 너희에 이른 곳은 만질만한 불 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19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을 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ㅇ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하
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느니 - 본
문에는 '시내 산'이라고 나타나지 않지만 시내 산에 대한 언급임이 분명하다(Morris,
Lane, Bruce, Hewitt).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현현하실 때 나타났던 징조에 대해 본
문은 일곱 가지-만질 만한, 불 붙는 산, 흑운, 흑암, 폭풍, 나팔 소리, 말하는 소리-
로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구약의 시내 산 사건 때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만질만
한'의 헬라어 '프셀라포메노'를 사용하여 다음에 언급된
시온 산 사건과 분명한 대조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시내 산 사건이 외적으로 보이
는 것과 귀에 들리는 현상을 통해서 물질적이고 만져서 느낄 수 있는 상태임을 시사한
다(Windisch, Casey). '프셀라포메노'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 가지도 시내 산에서 하나
님의 현현 때 동반되었던 외적이고 가시적이며 가칭적인 현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두려움을 품게 한다(출 19:16-22; 20:18-21; 신
4:11,12; 5:22-27). 이 일곱 가지 징조는 두려움을 주며 하나님과의 만남을 모호하게
하는 현상이다. 즉 불 붙는 산과 흑암, 흑운 등과 같은 가시적인 현상은 하나님을 계
시하기보다는 도리어 모호하게 하여 하나님의 임재만을 느끼게 하였으며, 폭풍과 나팔
소리 그리고 말하는 소리와 같은 가청적인 현상은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히 이해할 수
없는 굉장히 큰 소리로 두려움만을 유발시켰다(신 4:12, Casey, Lane). 그래서 이스라
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소리를 더이상 듣지 않도록 해달라고 간구하였다.
하나님은 그 간구를 들으시고 모세를 통해서만 말씀하시기로 결정하신다(출 19:16-19;
20:18-21; 신 5:23-28)

20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ㅇ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
이라 -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이 금지된 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에게도 해당되었
다(출 19:12,13).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무시한 것에 대한 심
판은 신속하고 가공할 만한 것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공포감을 느끼게 하였
다. 이러한 것은 옛 언약하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시사한다(Thomas, Casey,
Lane).

21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ㅇ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
으나 - '보이는 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판타조메논'
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현현하실 때 나타났던 외적이고 가시적이며 가청적인 현
상들을 가리킨다. 저자는 본절에서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만 두려워했던
것이 아니라 옛 언약의 중재자인 모세도 두려워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구약성
경 어느 곳에서도 시내 산 사건 때 모세가 두려워했다고 진술된 곳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그렇게 기술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모세가 시내 산의 가시나무떨기 불꽃을 보고 무서워 하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
한다(행 7:30-32, Hughes, Thurston). (2) 혹자는 모세가 아론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
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섬기는 것을 보고 돌판을 던진 후 다시 새 돌판을 받으러
올라가서 두려워 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한다(신 9:19,Moffatt, Buchanan,
Kuss, K. J. Thomas) (3) 혹자는 유대 전승인 하가다 전승의 '천사들이 입에서 나오는
호흡로 나를 소멸시킬까 두려웠다'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Michel, Bruce, Spicq,
Westcott). 저자가 어디에서 본문을 인용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가 말하는 강
조점은 백성들뿐만 아니라 옛 언약의 중재자인 모세조차도 하나님의 현현을 두려워 하
였다는 사실이다. 즉 옛 언약하에서 예배자와 하나님과는 분리되어 있었으며 감히 접
근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음을 시사한다(P.R. Jones).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ㅇ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 '그러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라'는
본문이 앞서 언급된 시내 산 사건과(18-21절) 대조적인 것임을 암시한다.시내 산 사건
이 물질적이고 외적이며 가시적이고 가칭적인 반면에 본문의 시온 산 사건은 영적이며
비가시적인 것이다. 한편 '너희가 이른 곳은'의 헬라어 '프로셀렐뤼다테'
는 완료 시상으로 새 언약의 중재자인 예수를 통해서 그리스도인
에게 주어진 초월적인 축복을 현재 수신자 공동체가 이미 공유하고 있으며 계속적으
로 소유하고 있을 것임을 시사한다(Morris, Bruce, Michel, Hewitt). 저자는 옛 언약
즉 시내 산에서 나타난 징조에 대해서 일곱 가지로 진술한 바와 같이 본문에서 새 언
약의 초월적인 축복에 대해서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일곱 가지를 제
시하고 있다.
ㅇ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 - 본문에 나타난 세 가지
호칭은 동의어이며 하나를 가리키는 다양한 표현이다(Spicq, Michel, Bruce, Casey,
Westcott). 시온 산은 예루살렘에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거하는 집이라고도
불렸으며 이스라엘 지파들이 만나던 장소였고(Bruce, Morris) 영광스러운 하늘 도성의
기초로 불려지기도 하였다(LXX 사 28:16; 54:11-14). 이러한 시온 산이라 불린 '하나
님의 도성'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은유로서(28절; 겔 48:35; 계 3:12) 새 언약하에 있
는 그리스도인들이 미래에 완전히 소유할 나라임과 동시에(13:14) 이미 소유하고 있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나라이다(28절, Lane, Bruce).
천만 천사...총회(뮈리아신 앙겔론, 파네귀레이). 개역성경 본문에는 '총회'
(assenbly, NIV)가 '장자들
의...교회'와 연결되어 있으나 헬라어 본문으로 볼 때 '천만 천사'와 연결되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NIV, Morris). '총회'의 헬라어 '파네귀레이'는 축제를 즐기기 위
해 모이는 '즐거운 집회'를 가리키는 것으로(Spicq, Morris, Bruce) 앞서 언급된 옛
언약하의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포에 떠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스도
의 구속 사역을 통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천만천사와 연합하여 축복의 장소인 하늘
의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며 그 앞에 나아가게 된다.
ㅇ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 '장자'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하나님
의 창조사역때에 제일 처음으로 창조된 천사장들을 가리킨다고 말한다(Clement). (2)
혹자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는 구속받은 자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ane,
Hewitt, Bruce, Michel, Marshall).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구속받은 그리
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첫 열매이며 상속자로서 비록 지상에서 생활한다 할지라도 그들
의 이름은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사 4:3; 단 12:1; 눅 10:20; 롬 8:6,29; 빌4:3; 약
1:18; 계 3:5; 13:8; 17:8; 20:12).
ㅇ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 - 이것은 종말론적 측면을 강조한 표현으로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모습을 시사한다(Lane). 또한 이는 그리스도의 피를 경히 여기고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 배교자들이나 비그리스도인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가공할 만
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으며(10:26-29)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 거룩해지고
깨끗하여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은혜와 교제로 함께 하심을 시사한다
(Hewitt, Bruce).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 - '온전케 된'에 해당하는 혤라어 '테텔레이
오메논'은 완료시상으로 예수의 피로 하나님과의 관
계 속에서 이미 전혀 부족한 것이 없는 상태에 있음을 시사한다(10:14, Spicq, Lane).
한편 '의인의 영들'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그리스도 이전에 참믿음
을 소유하였다가 죽은 자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uce). (2) 혹자는 그리스도 이후
에 죽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ichel). (3) 혹자는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에 상관없이 죽은 믿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Hewitt, Lane).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11:10, 13-16; 13:14).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서 옛 언약과 새 언약하에 있는 믿는 자들이 온전하여졌다(10:14; 11:40).
ㅇ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 본문
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피와 죄없이 죽은 아벨의 피의 대조를 통해 그리
스도의 피의 우월성과 새 언약의 효능성을 시사한다. '중보'의 헬라어 '메시테'
는 본서에서 항상 새 언약과 연결되어 사용되며(8:6; 9:15; 렘
31:31-34) 옛 언약의 중보자인 모세(21절)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비교를
통해 그리스도와 새 언약의 우월성을 증거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대속을
위해 흘리신 피에 의해서 옛 언약이 할 수 없었던 양심의 정결함을 입게 되었고, 영원
한 구원을 소유하게 되었으며 하늘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 존전에 담대하게 나아갈수
있게 되었다(9:11-14).한편 '아벨의 피'는 창 4:10-12에서 언급된 아벨의 죽음을 가리
킨다.죄 없이 가인에의해 살해를 당한 아벨은 흘린 피로 하나님께 신원하였으며 그 피
는 저주와 연결되었다(창4:11,12). 아벨과 동일하게 그리스도께서도 죄없이 죽임을 당
하였지만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이들에게 저주가 아니라 축복과 은혜를 가져다 주었으
며, 모든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영원한 구속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Br
uce, Morris, Lane).

25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 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ㅇ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
하지 못하엿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 '말하
신 자'의 헬라어 '톤 랄룬타'는 24절의 '랄룬티'
('말하는')와 연결되는 것으로 본문에서 '땅에서 경고하신 자'와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로 나타난다. 이는 한 분이신 하나님을 나타낸다(Andriessen,
Lane). 한편 '땅에서'와 '하늘로 좇아'는 26절의 '그 때'와 '이제'의 대조와 동일한
비교로 전자는 옛 언약을 가리키며 후자는 새 언약을 가리킨다(Spicq, Michel, Bruce,
Hughes). 옛 언약하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았고 순종하
기를 거절하여 심판을 당하였다(3:16-19). 새 언약보다도 열등한 옛 언약을 거절한것
도 심판을 피할 수 없었건만 옛 언약보다 훨씬 월등한 새 언약의 메시지를(2:1-4) 고
의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율법을 거부할 때보다 더 엄중한 심판을 면할 수 없는 행위이
다(Morris, Hewitt).

26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ㅇ저자는 본문에서 세 가지 시제 즉 과거, 현재, 미래의 사건에 대해 진술하고 있
다.
(1)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 '그 때'는 과거의 시내 산 사건
을 가리키는 것으로 18-21절의 내용을 시사한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현현하실 때
땅이 진동하였으며(출 19:18; 삿 5:4,5; 시 68:8; 77:18; 114:4,7) 그 위엄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2) 이제는 약속하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뉜 데 에펭겔타이'
로서 개역성경에는 '데'('그러나')가 생략되어 있
다. '데'는 시내 산 사건에서 나타난 땅의 진동보다 더 큰 진동이 있을 것임을 암시한
다. 한편 '약속하여'는 하나님께서 약속의 형식으로 말씀하신 실체들(4:1; 9:15)을 그
리스도인들이 소유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약속하여'의 헬라어 '에펭겔타이'
는 완료 시상으로 과거에 약속하셨으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현재
까지 그 약속이 지속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비록 과거에 약속하셨다 할지라도 약속을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약속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10:23; 11:11).
(3) 가라사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 본문은
학 2:6의 인용으로 앞서 과거에 일어난 사실인 시내 산 사건과 대조를 이루어 과거의
시내 산 사건은 땅만 진동하였으나 미래에는 하늘과 땅이 모두 진동할 것임을 나타낸
다. 여기서 '땅'과 '하늘'은 시내 산에서의 계시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새 언약
에 대한 상징이며(Thomas) '진동'은 미래에 벌어질 세상의 변형 또는 긍극적인 파멸을
가리키는 것으로 우주적 대변혁을 나타낸다(Lane). 또한 본문은 새 언약의 공동체에게
임할 심판을 나타내어 하늘로부터의 경고를 무시한 자들은 땅으로 부터의 경고를 무시
한 자와 마찬가지로 심판당함을 강조한다(25절). 새 언약의 계시를 거부한 자들은 최
후의 파멸의 날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산에서 주어진 계시를 무시한 자들과 마찬가지
로 심판하실 것이다(Morris, Lane).

27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과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ㅇ이 또한 한번이라 하심은 - 본문은 앞절의 '땅'과 '하늘'의 대비와는 달리 '진동
치 아니할 것'과 '진동할 것'을 대비하여 하나님께서 시내 산의 현현을 통해 땅을 진
동하시고도 다시 한번 미래에 하늘과 땅을 진동하시는 이유를 나타낸다. 이유는 두 가
지이다.
(1)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 '영존케'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
이네'는 하나님의 지속적이고도 변함이 없는 속성이나 새 하늘과 새 땅
과 같은 실체 혹은 하나님과 연관된 의인들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사 66:22). 본절
에서 '메이네'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의 불변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시간적인 지속성이
아니라 남아있는 실체의 질적인 불변성을 나타낸다(Grasser). 새 언약에 신실한자들은
미래에 영원히 진동하지 않을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함과 같이(28절) 영원한 구원을 즐
길 것이며 심판하시는 이인 하나님의 불변성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23절).
(2)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 하나님께서 세후
의 날에 심판하시는 또 하나의 이유는 변동될 것 즉 창조물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진
동할 것'과 동일시 되고있는 '만든 것들'의 헬라어 '페포이에메논'
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권한에 종속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
는 것임을 시사한다(Lane). 그러나 저자는 '진동할 것'과 '진동치 아니하는 것'의 차
이를 '창조물'과 '창조되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 유무에
서 찾고 있다(G.B.Caird).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모든 것들은 진동할 것이며 제거
될 것이다. 그들은 새 언약의 축복을(22-24절) 빼앗길 뿐만 아니라 저주와 심판을 당
하게 될 것이다(25절).

28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ㅇ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 '진동치 못할 나라'
의 기원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단 7:14,18(LXX)에서 기원한 것이라
고 주장한다(Westcott, Michel). (2) 혹자는 시 95:9-11(LXX)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주
장한다(Vanhoye, Lane).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저자는 본서에서
자주 시편을 인용하여 논증하고 있으며, 또한 앞서 학 2:6을 인용하여 진동의 문제를
해석하면서 단 7:14,18을 인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진동치 못할 나라'라는 것은
최종적인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실체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
물이다(Morris). 한편 '은혜를 받자'의 헬라어 '에코멘 카린'
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감사하자'로 해석한다(NIV, Hewitt,
Lane). (2) 혹자는 '은혜를 붙잡자'로 해석한다(JB, Morris, Montefiore). 두 가지 해
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카린'은 감사보다는 은혜를 의미
하며, 또한 뒤에 언급되는 '이로 말미암아'(디 헤스)로 지지를 받기 때
문이다. 저자는 새 언약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진동치 아니할 하나님 나라를 선물
로 받았기 때문에 심판을 자초하는 배교나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행위를 범하지
말고 오직 은혜를 굳게 붙들 것을 권면한다.
ㅇ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 '경건함과 두려
움'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자신의 비천함을 깨닫고 종말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늘 인
식하는 가운데(29절)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를 나타낸다(Morris, Lane). 그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굳게 붙잡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하고 그 관계 속에서 경외하
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봉사하며 섬겨야 한다.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ㅇ개역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절이
앞절에서 언급한 것, 즉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움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이유임을 나타낸다.
ㅇ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 본문은 신 4:24의 인용이다. 저자는 신명
기 본문에서 본절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너의'(수)를 '우리'
(헤몬)로 변경하고 있다. 이는 본문이 새언약 하에 있는 수신자 공동체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임을 시사한다. 시내 산 현현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은 새 언약
하에서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Riggenbach, Moffatt, Michel). 한편 '불'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6:8; 10:27). 본문은 하나님의 음성을 거부하고 새 언약의 효력을 고
의적으로 부정하는 배교자들과 비그리스도인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이 엄격함과 완전함
을 암시한다(Lane). 그러기에 새 언약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간과
하지 말고 두려움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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