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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선교회

신약/히브리서

[스크랩] 히브리서 (11 : 1~40)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7:15
히브리서 11장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ㅇ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 '실상이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스타시스'
는 '아래에'라는 뜻인 '휘포'와 '서게 하다', 또는 '확
립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히스테미'의 합성어이다. 이것은 문
자적으로 '...아래에 확립하다' 혹은 '...아래에 서다'를 뜻하는 것으로 '기초'
(Morris), '실체'(KJV), '확증'(NIV), '객관적 실체'(Lane)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휘포스타시스'는 사람의 생각에 좌우되는 주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객관적인 실체를 가리킨다. 이러한 객관적 실체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
에 확신을 더하는 근거이다(Lane). 바꾸어 말하면 믿음은 그리스도인이 객관적 실체를
확신하는 것이다. 믿음의 이러한 특성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진리의 말씀을 견고히
붙잡게 하며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확신하게 한다(Grasser). 한편 저자는 본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정의함으로써 '믿음'과 '바람'(hope)을 거의 동일
시 하였다. 이는 믿음의 미래 지향적인 특성을 강조한 것이다(Thompson).
ㅇ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 '보지 못하는 것들'의 헬라어 '프라그마톤...우블레
포메논'에서 '것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라그마톤'은 '되어진 것', '사실', '행위', '사건', '업무'등을 의미하는
말로서 인간사(human events)를 의미한다. 저자는 '프라그마톤'을 사용하여 믿음을 인
간사의 영역에 관련시켜 말하고 있다(Lane). 이는 '보지 못하는 것들'이 플라톤의 철
학에서 말하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늘나라의 것들이 아니라 아직 보여지지 않은 사건들
즉 종말론적 미래에 나타날 사건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시사한다(Williamson). 믿음은
미래 지향적이다. 이와 같이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믿음의 능력은 그리스도인들로 하
여금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고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담대하고 진지하게
나아가게 한다(Lane). 한편 '증거'의 헬라어 '엘렝코스'는 법률 용
어로 사용되기도 하는 것으로서(Morris) '객관적인 증거' 혹은 '증명'을 의미한다. 이
것은 믿음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임을 시사한다.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

ㅇ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 '선진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이 프레스뷔
테로이'는 '조상들'과 거의 동일한 의미로(1:1) 구약
성경에 나오는 신앙위인들을 지칭한다(Morris). 한편 '이로써'의 헬라어 '엔 타우테'
는 여성 지시 대명사로서 1절에서 언급한 '믿음'(파
스티스)과 연결된다. 구약 시대의 신앙 위인들은 자신들의 확고한 믿음의 결과로 하나
님으로부터 확신과 증거를 얻었다.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ㅇ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 '믿음으로'
(피스테이)는 본절에서 31절에 이르기까지 헬라어 본문의 첫 단어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옛 선진들이 믿음으로 살고 행동한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4-31절까지는 '피스테이'가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들에 대해 사용된 반면
본절에서는 저자와 수신자들을 포함한 당시의 모든 그리스도인에 대해 사용되었다. 본
절에서의 강조점은 헬라어 원문의 첫 문장인 '믿음으로...우리가 아나니'
(피스테이 노우멘)로 진리에 대한 인식이 믿음을 통해서 가능함을
시사한다. 특별히 본절은 창 1:1에 나타나는 세상 창조에 대한 인식과 연결되어 하나
님께서 모든 세계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사실은 오직 믿음으로만 인식할 수 있음을 시
사한다.
ㅇ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 '보이는 것'의 헬라어
'토 블레포메논'은 헬라적 유대주의(hellenistic
judaism)의 전통에서 기인한 것으로 가시적인 우주를 가리킨다(외경 지혜서 13:7). 한
편 '나타난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 파이노메논'은
헬라어 오랜 철학적 전통에서 기인한 표현이다(Williamson, Philo). 저자는 유대주의
전통과 헬라 철학에서 사용되는 단어를 차용하여 그 내용을 부정하고 있다. 이는 저자
가 당시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플라톤과 필로의 우주론, 즉 태초 혼돈 상태에 있었던
가시적인 물질들을 창조자가 이데아나 원형을 사용하여 질서를 부여함으로 우주가 생
성되었다는 우주론을 배격하고 특히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헬라적 유대주의의 관점에
서 창세기 1장을 이해하려는 시각을 막기 위한 것임을 시사한다('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이 형태를 갖추지 못한 물질들로부터 세계를 창조하였다';지혜서 11:17, Lane). '보
이는 것' 즉 물질 세계는 '나타난 것' 즉 창조 이전에 존재했었던 어떤 물질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무(無)에서 창조된 것이다(Ehrhardt). 즉
저자는 '무(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의 교리를 강조하고 있다(Widders,
Bruce, Williamson).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ㅇ저자는 2절에서 언급한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에 대한 실례를 본절
에서 시작하여 31절까지 나열하고 있다.
ㅇ믿음으로 아벧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 본절은 창 4:3-5에 있는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창세기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아벧의 제물은 열납(悅納)하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거절하신 것으로 나타나
며 그 이유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70인역에 따르면 가인의 제물이 거
절당한 이유가 제사 절차상의 결함 즉 가인은 제물을 드릴 때 제물을 나누는 법대로
나누어 놓지 않았고 아벧은 제사 법대로 바르게 제물을 잘라서 드렸기 때문이라고 한
다(Aptowitzer, LXX 창 4:7). 또한 필로에 의하면 아벧의 제물은 생명체였던 반면에
가인의 것은 생명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요세푸스는 가인의 행
동에 도덕적인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아벧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밝히고 있다. 즉 아벧이 드린 제사는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는 행위였
다(Morris). 따라서 아벧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은 것은
자신이 드린 제사를 통해 나타난 믿음 때문이었다.
ㅇ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 이는 하나님께서 아벧의 제물을 열납한
사실을 가리킨다(창 4:4). 즉 하나님께서는 아벧의 믿음과 의로움을 그가 드린 제물을
열납하심으로 증거하셨다.
ㅇ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 본문은 창 4:10의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는 말씀을 암시한다. 창세기에서는 '핏소리'
로 되어있는 반면 헬라어 본문에는 '디헤스'('그것을 통하여')로 되어있
다. '헤스'는 '믿음'을 뜻할 수도 있고 '제사'를 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가 말한
대로 아벧이 드린 제사가 그의 믿음의 표현이기 때문에 믿음이든 제사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벧은 죽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언제까지나 살아있는 소리가 되어 그리스
도인들에게 교훈을 준다(Lenski).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ㅇ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
이지 아니하니라 - 본절은 창 5:21-14에 나오는 에녹에 관한 인용이다. 맛소라 본문에
는(MT)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심'으로 되어있는 반면 70인역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옮
기셨으니'로 되어 있다(창 5:24, Bruce, Morris, Lane). '옮기셨으니'에 해당하는 헬
라어 '메테데켄'은 '변화하다'라는 뜻을 갖는 동사 '메타티
데미'의 단순 과거 수동형으로 '바뀌다', '변화되다'를 의
미한다. 이는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몸이 변화되어 하늘로 올리움 받았음을 암시한
다. 저자는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하늘로 옮기울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믿음으로'라고 진술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이나 유대 전승에서는 에녹이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며 단지 유대 전승에서 모든 세대의 회개의
표본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시락의 교회서 44:16, Lane, Bruce). 저자가 이미 언
급한 대로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죽은 행실을 회개함'은 개종에 있어서 가장 기본
적인 요소이기 때문에(6:1) '하나님께 대한 신앙' 즉 믿음은 회개와 동일시 될 수 있
으므로 유대 전승에서 회개의 표본으로 나타났던 에녹은 믿음의 표본으로 제시될 수
있다(Luhrmann). 에녹의 믿음은 그가 옮기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이었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근본 요인이었다(Lane).
ㅇ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 본문은 에
녹이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근거를 나타내는 것으로 창 5:22-24의 인용이다. 맛소라 본
문(MT)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창 5:22,24) 70인역에서
는 이를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본절뿐만 아니
라 에녹에 관한 유대 전승마다 나타나는 어구로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임을
나타내고 있다(시락의 교회서 44:16;지혜서 4:10,14). 저자는 '믿음'과 '하나님을 기
쁘게 하는 것'과 연결지어 다음 절에서 '믿음'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ㅇ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하나님께
서 저를 옮기우셨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믿음과 필연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자는 그 '믿음'에
대해서 두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1)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 '그가 계신 것'은 단순히 하
나님의 존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믿음은 사단도 소유하고 있기 때
문이다(약 2:19). 그것은 구약 시대 선지자들을 통해 알려지고 마지막 때에 아들 그리
스도를 통해 나타난(1:1, 2) 하나님의 실존적(實存的) 존재를 뜻한다(Bruce).
(2)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상 주시는'
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스다포도테스'는 '보상하다'라는
의미로 '상'은 '하나님을 아는 즐거움'을 가리킨다(Bruce).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에
게 있어서 최상의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시 43:4). 하나님을 기쁘
시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보답하시는 공의로우신 속성을 소
유하신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ㅇ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
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 '경고하심'의 헬라어 '크레마티스데이스'
는 '신적인 의사 소통' 혹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응답' 혹은 '신탁'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8:5;12:25). 노아는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홍수로 온 땅을 심판하
실 것이라는 계시를 받고 방주를 예비하였다. 이것은 노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계
시를 액면 그대로 믿었음을 반증한다. 즉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대한 확신
을 가졌다(1절). 한편 '경외함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라베데이스'
는 문자적으로 '거룩한 두려움'이란 의미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행동하다'를 의미한다(Robertson). '율라베데이스'는 '거룩한'에 강조점을 둘 수도 있
고 '두려움'에 강조점을 둘 수도 있으나 전자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
면 노아가 두려움에 못이겨 방주를 예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준비
하였기 때문이다(Morris).
ㅇ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 '이로 말미
암아'(디 헤스)에서 '이'의 헬라어 '헤스'는 지시 대명사로 '믿
음'이나 '방주' 또는 '구원'을 가리킨다. 이 세 가지 중에서 본문의 문맥으로 보아
'헤스'는 '믿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by his faith, NIV, Robertson). 노
아가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하였을 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으나(Bruce)
노아의 믿음은 옳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세상 사람들은 홍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그들
의 불신앙에 대해 정죄받았다. 결국 노아의 믿음은 그 당시 사람들의 불신앙을 정죄한
것이었다(Morris). 한편 '믿음을 좇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피스틴'
은 노아의 의가 실현되는 방법이나 조건을 나타내는 것으로 노아가 믿
음이라는 규범을 따라 하나님에게서 의를 수여받았음을 시사한다. 노아는 믿음을 따라
의로운 사람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였다(창
6:22, Bruce). 따라서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는 노아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응답한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에게 수여하신 의를 공유하고 상속하였음을 시
시한다(Lane).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ㅇ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때에 순종하여 - 저자는 본절에서 19절까지
유대인들의 가장 위대한 조상인 아브라함을 믿음의 표본으로 제시한다. 앞서 언급된
아벧과 에녹, 그리고 노아는 그 믿음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구약 성경에 없어서 그
들에 대한 기록을 토대로 추정할 수밖에 없었으나 아브라함의 경우 '아브람이 여호와
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라는 말씀에서 그의 믿음이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루메노스'
는 '칼레오'의 현재 분사형으로 아브라함이 부르심
을 받은 즉시 즉각적으로 순종하였음을 시사한다(Westcott). 순종과 믿음은 불가분의
관계로 아브라함의 순종은 그의 믿음을 외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ㅇ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 아브라함은 '내
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창 12:1)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즉시 길을 떠났으며
가나안 땅에 이르렀을 때도 그는 그곳이 하나님이 자신과 후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땅인지 모르고 있었으며(창 12:5, 6), 하나님께서 다시 가르쳐 주신 후에야 알았다(창
12:7). 아브라함은 찾아가야 할 목적지도 알지 못한 채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믿
음으로 그 명령에 순종하여 길을 떠났다.

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ㅇ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
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 '우거하여'에 해당하는 헬
라어 '파로케센'은 나그네처럼 기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
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발 붙일 만큼의 유업도 얻지 못하
였으며(행 7:5),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헤브론 근처의 막벧라 밭을 사라의 매장지로
사기전까지는(창 23장)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죽을 때까지
보지 못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그와 동일한 약속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삭과 야곱도
그 약속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삭과 야곱도 그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하고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장막에 거하였으니'는 완전히 정착된 생활
을 하지 못하고 나그네 생활을 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약속해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
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바를(창 12:2, 3) 성취하실 것을 굳게 믿었다.

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ㅇ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 본절은 아브라함
이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믿음의 인내를 할 수 있었던 이유를 나타낸
다. '터'는 '기초'를 의미하는 것으로 '터가 있는 성'은 9절의 '장막'
(스케나이스)과 상반되는 표현이다. 장막은 터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이동하기 위한
임시 거처인 반면에 '터가 있는 성'은 한 곳에 고정된 영구한 집이다. 이 성은 지상에
있는 어떤 도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진동치 못하며 장차 올(12:28;13:14) 영원한
하늘 도성으로(Bruce, Lenski) 하나님에 의해 견고히 세워진 '시온 성'을 암시한다(시
48:8;87:1-3, 5;121:3;사 14:32;33:20, Lane). 한편 '경영하시고'의 헬라어 '테크니테
스'는 '기술'을 뜻하는 '테크네'에서 파생된 단어
로 '기술자', '설계자' 혹은 '건축가'를 뜻한다. 이를 앞서 언급된 '성'과 결부시킬
때 본절에서는 '설계자'나 '건축가'의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지으실'의
헬라어 '데미우르고스'는 '사람의 무리'를 뜻하는 '데미오스'
와 '일'이란 뜻의 '에르곤'의 합성어로서 '사람들을 위
해 일하는 자'의 뜻을 지닌다. 이 두 가지 표현은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성을 건축하
셨음을 나타내는 것으로(Morris)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손수 지으신 하늘나
라의 도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믿음의 인내를 할 수 있었음을 시시한다.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ㅇ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
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 '잉태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카타볼렌 스페
르마토스'는 남성의 정액을 생산하
는 기능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헬라 관용구이기 때문에(Lucian) 이를 사라에게 적용하
기에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라 자신'이란 말을 주격으로 보지 아니하고
대격으로 보아 '아브라함이 사라 자신과 함께...잉태하는 힘을 얻었다'라고 해석하면
된다(Bruce). 비록 사라가 잉태하게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믿지 못하고 웃었다 할지
라도(창 18:9ff.) 사라가 끝까지 의심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 사라는 곧 아브라함의
믿음에 동의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사라가 아브라함과 한 마음으로 믿음에 동
의하지 않았다면 둘 사이에 부부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며 이삭도 잉태될 수 없
었을 것이기 때문이다(Morris). 두 사람은 늙어 아이를 생산할 능력이 전혀 없었으나
약속하신 하나님의 미쁘심 곧 신실하심을 믿음으로 이삭을 출산할 수 있었다.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ㅇ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은 아브라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가 자손을 낳을 수 없었던 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한편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는 구약성경에 자주 나타나
는 관용구로서 수많은 무리를 가리킨다(창 15:5;22:17;출 32:13;신 1:10;10:22). 아브
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수많은 무리를 자손으로 둔다는 기적적인 약속의 성취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
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라고 한 바울의 진술처럼(롬 4:19) 아브라함의 변치않는 믿음
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기 때문이었다(롬 4:22).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ㅇ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
고 환영하며 - '이 사람들'이란 8-12절에 언급된 인물들 즉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
곱을 가리킨다. 그들은 모두 가나안 땅과 그 후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
이었으나, 그 약속의 성취는 보지 못한 채 죽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
신 바를 실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일생을 살았다. '보고'는 신체적인 눈으로 보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약속에 대한 것을 마음으로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Morris). 즉 그들은 믿음의 눈으로 약속의 성취를 바라보았다. 이 약속의 성취는 일
차적으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라고 할 수 있으나 보다 근본적인 것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성취된 구원을 가리킨다(Bruce).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때를 즐거운 마음으
로 기다리다가 보고 기뻐하였다(요 8:56).
ㅇ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 '외국인과 나그네'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 한 말 즉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창 23:4)와 야곱이
바로에게 한 말 즉, '내 나그네 길...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창 47:9)을 인용한 것이
다. 저자는 본절에서 옛 신앙의 위인들의 그러한 고백을 통해 그들이 이 땅에 안주하
지 않고 계속적으로 나그네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참된 소망을 하늘나라에
두고 살았음을 강조한다.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ㅇ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앞절
의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한 옛 조상 즉 아브라함이나 야곱과 같은 이
들을 가리킨다. 이들이 자신들을 가리켜 나그네라고 한 것은 자신들이 살았던 이 땅이
본향(本鄕)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Bruce). '본향'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트리다'
는 '선조의 땅', '고향'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들은 이 땅에서 나그
네로 존재하였으며 그들의 목적지가 하늘나라였음을 시사한다.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ㅇ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 본절의 '본
향'은 하늘나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나 야곱이 가나안을 가기 위해 떠
났던 지상의 고향을 가리킨다. 그들은 지상의 고향을 자신들의 본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에 쉽게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
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혼시키려고 할 때 가나안 땅의 여인들 중에서 신부감을 택하
지 말고 자신의 고향, 즉 메소포타미아로 가서 신부감을 구해오도록 그의 종에게 당부
하면서도 '삼가 내 아들을 그리고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창 24:6)고 하였다. 야곱 역
시 메소포타미아를 고향으로 생각하지 않았다(창 30:25;31:3). 아브라함은 사라를 가
나안 땅에 묻었으며 자신 역시 그 곳에서 장사되었다(창 23:19;25:9-10). 이삭이나(창
35:27-29) 야곱도(창 49:29-33;50:13) 가나안에서 장사되었다. 그들이 이 땅에서 고향
을 찾았다면 자신들이 태어난 지상의 고향으로 충분히 돌아갔을 것이다(Bruce). 그러
나 그들의 본향은 하늘나라에 있었기 때문에 지상의 고향을 찾지 않고 믿음으로 하늘
나라의 영원한 고향을 찾고자 했다.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ㅇ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
셨느니라 - 그들이 찾았던 고향은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좋은 곳, 즉
'하늘에 있는 고향'이었다. '사모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레곤타이'
는 '...을 향해 뻗치다', '열렬히 갈망하다'라는 의미로 그들이 간절히 하
늘나라를 갈망하였음을 시사한다. 한편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
곱의 하나님'(출 3:6, 15, 16)이라고 말한 사실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살았던 이스라엘의 족장들을 결코 부끄러워 하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하
늘나라에 '한 성'을 준비해 놓으셨다. 이 '성'은 '장막'(9절)과는 대조되는 것으로 그
리스도인들의 영원한 처소를 가리킨다.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ㅇ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
부터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다(창 22:1-18).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으나 그는 순종하였다. 혹자는 이때 아
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자식마저 포기해야함을 직감적으로 깨달
았다고 주장한다(Lane).
ㅇ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생
자가 이삭을 바치라고 명하셨을 때 이는 그에게 이겨내기 어려운 혹독한 믿음의 시험
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수많은 자손을 허락해 주신다는 약속의
성취 여부가 이삭의 생명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부자간의 애정 문제를 제외하고라
도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 사이에 커다른 모순이 생기게 됨에 따라 아브라함은 갈등하
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Morris). 그러나 이런 모순을 제거하는 일은 아브라함이 처
리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셔야 할 문제였다(Bruce).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하나
님의 약속을 성취시킬 독생자를 하나님께 드렸다.

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ㅇ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라고 약속하셨으며(창
12:2), 이러한 아브라함의 민족은 오직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한다고 약속하셨다
(창 21:12). 이삭을 통해 아브라함의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그 이
삭을 바치라고 요구한 것은 하나님 자신의 약속에 위배되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그 약속하신 바를 이루
신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Morris).

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ㅇ贊纛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생각한지라'의 헬라어 '로기사
메노스'는 부정 과거로 단순한 견해가 아니라 단호한 내적
인 확신이나 신념을 나타내는 말이다(Westcott, Lane).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 즉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그의 믿음은 아브라함 자신의 과거 경험으
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아브라함은 죽은자와 다름없는 자신의 몸에서 하나님의 능력으
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인 이삭을 낳을 수 있었다(11, 12절). 아브라함의 이러한 경
험은 자신의 아들 이삭이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믿
음을 갖게 해 주었으며(Moxnes, Teodorico) 그 확신으로 인해 자신의 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가서 경배하
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창 22:5). 만약 아브라함이 이삭이 다시 살 것을 믿지 못
하였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Bruce, Morris).
ㅇ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 '비유컨대'의 헬라어 '엔 파라볼
레'에서 '파라볼레'는 '유형', '상징', '예시'를 뜻한다. 초
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삭이 제물로 바쳐진 사실을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상징으
로 간주하였기 때문에(Bruce) '엔 파라볼레'는 본절이 '예수의 부활에 대한 예시'임을
암시한다(Lane). 한편 아브라함이 정작 이삭을 죽이려고 칼을 쳐들었을 때(창 22:10)
그에게 있어서 이삭은 죽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Bruce). 그러나 그 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는 음성을 들었을 때 그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었
다.

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ㅇ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 아브라함
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은 이삭에게 그 약속을 다시 확인시켜 주셨으며(창 26:2-5) 이
삭은 장차 이루어질 이 약속받은 축복을 그의 두 아들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해 주었다
(창 27:27-29, 39, 40). 이 때 합법적인 축복의 상속자는 맏형인 에서였으나 야곱이
속임수로 그 축복을 가로챘으며 에서는 그 나머지 축복을 받아야 했다(창 27:39, 40).
저자는 이러한 부당성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그는 이삭이 미
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두 아들에게 축복하였다는 사실에
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삭의 이러한 행위는 믿음의 본질, 곧 "믿음은 바라는 것들
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1절)라는 것에 대한 실증적인 예(例)에 해당
한다(Bruce). 한편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은 사실이 비합법적인 것이라고 단정할 수
만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실을 나중에 이삭이 알게 되었을 때 그 축복을 무효화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창 27:33)고 야곱을 인정해 주
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 었기 때문이다(창 25:23).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ㅇ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 본문은 20절과 마찬가
지로 족장 야곱이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믿고 아들들에게 축복하였
음을 나타낸다(Morris). 야곱은 자신의 임종이 가까왔을 때 손자인 에브라임과 므낫세
에게 축복하였다(창 48:13-20). 이 때 요셉은 장자의 축복을 장자인 므낫세가 받을 수
있도록 하였으나 야곱은 팔을 어긋나게 하여 오른손으로 차자인 에브라임 머리에 얹고
왼손으로 장자인 므낫세의 머리에 얹어 장자의 축복을 차자에게 해주었다(창 48:14,
19, 20). 이러한 사실은 장자에게 축복과 혜택을 부여하는 인간의 관습에 구애됨 없이
하나님은 그의 주관대로 뜻을 이루는 분이심을 시사한다.
ㅇ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 본문은 창 47:31(LXX)의 인용이다. 맛
소라 본문(MT)에는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경배하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지팡이'와 '침상'이라는 두 가지로 번역이 되는 것은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mth)가 모음을 붙이기에 따라 '말테'(matteh, '지팡이')로 읽을 수도 있고 '밑
타'(mittah, '침상')로 읽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본
문은 70인역이므로 전자를 택하고 있다. 야곱이 그의 임종이 가까왔을 때 지팡이 머리
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는 것은 지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9, 13절)같이 살았던 그
의 삶을 특징짓는 상징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지팡이는 순례자의 상징적인 물건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Michel).

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ㅇ믿음으로 요셉은 임종 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 본문은 창 50:24, 25의 내용에 대한 인용이다. 요셉은 하나님께
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켜 마침내 선조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실 것과 그 때 자신의 해골을 가지고 갈 것을 유언하였다(출 13:19;수 24:32). 이러
한 사실은 요셉의 믿음을 잘 예증해 주는 것으로 자신의 선조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 내려온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이라고 확신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
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될 것을 예언하였다. 이는 요셉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성취하신다는 믿음을 소유하였음을 시사한다.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ㅇ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
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인구 수가 급증
함에 따라 위협을 느끼며 그들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 사내아이가 출산되었을 때 그들
을 전부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출 1:9-10, 15, 22). 그런 상황에서
모세가 출생하였다(출 2:1, 2). 저자는 70인역을 인용하여 본절에서 믿음으로 그 부모
가 모세를 석달 동안 숨겼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출 2:2에는 모세를 숨긴 일을 한
사람으로서 오직 어머니만 언급되었다. 이러한 차이는 별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아
이를 숨기는 일이 남편과의 합의 없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Morris). 70인역에
서 부모가 모세를 석달동안 숨긴 것은 '아름다운' 아이였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해
당하는 헬라어 '아스테이온'은 '도시'라는 뜻의 헬라어 '아스튀'
에서 파생된 형용사로서 '도시에 속한', '잘 양육된' 혹은 '우아한'이란 뜻
이다. 아마 부모는 아이의 이러한 아름다움을 보고 하나님이 그 아이를 통해 큰 일을
이루실 것을 예견한 듯한다(Morris).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ㅇ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 '장성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가스 게노메노스'
는 출 2:11(LXX)의 '장성한 후에'를 인용한 것이
다. 이것은 그가 히브리인 어머니를 통해서 양육을 받았기 때문에(출 2:9) 모세가 자
신이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identity)을 알았음과 동시에 그가 내린 결단은 장성한 사
람이 내린 신중한 것이었음을 암시한다(Morris).
ㅇ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 본문은 저자가 출 2:11, 12의 내용을
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Lane). 모세는 자기 형제인 히브리 노예를 돕는다고 무력으
로 개입하여 애굽 사람을 죽였다. 이것은 모세가 자신을 히브리인으로 자처한 행위였
으며, 바로의 공주의 아들됨을 부인하는 행위였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온
갖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가졌지만 믿음으로 그 모든 것을 거절하였다.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ㅇ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
하고 - 모세는 바로의 왕궁에서 왕자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권한을 향유하며 세상적인
온갖 쾌락을 다 즐길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것을 포기하고 하나
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원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을 뜻하는
민족주의적 개념이 아니라 '영적인 하나님의 백성', 즉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의미
하는 종교적 개념이 내포된 표현이며(Morris), '죄악의 낙'은 모세가 바로의 왕궁에서
도덕적으로 타락한 생활을 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도 그대로 왕궁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 자체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크나큰 죄
악이 되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Bruce). 한편 '더 좋아하고'의 헬라어 '말론 헬로메노
스'는 '...보다 ...을 택하다'라는 의미로 모세가 그
일을 판단하여 선택하였음을 나타낸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왕궁에서 일
시적인 안락함을 누리는 것보다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일
을 더 가치있게 여겼다.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ㅇ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 저자는 본문에서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을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가 신약 시대뿐만 아니라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백성
과 함께 있었다는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사 63:9에서 그리스도가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라고 기록하고 있으며(Bruce), 고전 10:4에서 바울은 출애굽 사건을
언급하면서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
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그리스도는 하나님
의 백성과 함께 동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25절)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 분으로서(13:8) 시대를 초월하여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과도 함
께 하셨기에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凌辱)을 받을 수 있었다. 한편 '상'에 해
당하는 헬라어 '미스다포도시안'은 10:35절에서의 '상'
과 동일한 용어로서 '보상'을 뜻한다.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을 기꺼이 받은 이
유는 하나님께서 보상해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 상은 바로의 궁전에 있는 온
갖 보화들보다도 더욱 고귀한 것으로서 하늘나라에서 받게 될 영원한 상이었다. 저자
는 본서의 수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고난당하는 사실을 알고(13:13) 모
세의 경우를 예로 들어(Bruce) 수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상을 바라보면서 기꺼이
고난에 동참하도록 권면한다.

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ㅇ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 모세는 애굽을 두 번 떠났
었다. 첫번째는 자기 동족을 박해하는 애굽 사람을 살해한 일로 바로를 피해 미디안
땅으로 도피한 일이며(출 2:11-15), 두번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탈출시킬 때
였다. 본절의 '애굽을 떠나'가 의미하는 것은 두 가지 경우 중 전자에 해당한다(Lane,
Morris, Bruce). 왜냐하면 다음절에서 모세가 유월절을 정하여 피 뿌리는 의식을 하게
한 사건인 출애굽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절의 사건은 출애굽 전
에 되어진 일로서 모세가 미디안 땅으로 도망한 일을 가리킨다. 본절의 해석의 문제점
으로 모세가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모세가 미디안으
로 도주할 때에는 두려워 하였다는 것이다(출 2:14, 15). 그러나 모세가 미디안으로
도주한 동기는 애굽인을 죽여서 생겨난 바로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출 2:14). 왜냐
하면 출애굽기나 다른 성경에서 모세의 도망과 두려움을 연결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Morris). 즉 모세가 비록 노예 폭동을 일으킬 수 있었을지라도, 그냥 도주한 것은 아
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가 안 되었다는 인식과 믿음에 의한 것이었다
(Bruce, Morris).
ㅇ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 '보이지 아니하는 자'
(아오라톤)는 유대교나 초대 기독교에 있어서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
로 사용되었다(롬 1:20;골 1:15;딤전 1:17, Lane). 필로(Philo)는 바로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모세는 이와 대조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믿었다고 진술하고 있다(Life of Moses 1.88). 모세는 오랜 광
야 생활 가운데서도 '보이지 아니하는 자'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출 33:11;민
12:7, 8)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믿음으로 기다렸다.

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ㅇ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
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 '정하였으니'의 헬라어 '페포이에켄'
은 '만들다'의 뜻인 '포이에오'의 완료형으로 유월절의 항구성을
시사한다(Robertson). 모세는 이 절기를 영원한 규례로 제정하였다(출 12:14). 모세가
이같이 정한 것은 유월절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출 12:12, 13)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
이다. 애굽 전역에 장자의 죽음을 가져다 백성들로 하여금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게 하였다. 그 이유는 죽음의 천사가 피를 바른 집은 넘어가리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믿음으로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애굽인의 장자들은 죽임을 당하였으나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으며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탈출
할 수 있었다.

29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ㅇ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 저자는 본절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믿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모세의 인
도로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주변에 장막을 치게 되었다(출
13:17-14:4). 애굽의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고 있던 곳까지 추격해 왔을 때
(출 14:10-12) 그들은 모세의 명령에 순종하여 홍해 바다를 건넜다. 이러한 사실은 이
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믿음을 함께 나누었음을 시사한다(Lane). 실제로 구약성경에
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바다를 건넌 사건은 하나님의 주권과 변치않는 그의 사랑의
언약을 나타내는 경이로운 일로서 찬양되고 있다(출 15:1-21;시 106:9-12;사 43:16,
17;44:27). 홍해를 믿음으로 무사히 건넌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불신앙과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이스라엘백성을 추격하여 홍해 바다에 난 길로 들어 온 애굽군대는 바닷물
이 본래대로 돌아와 물 속에 침몰하여 전멸하였다(출 14:23-28).

30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ㅇ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 여리고 성은 40년 동
안 광야 생활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수 2:1). 그러나 여
호수아와 그를 따른 용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성 주위를 6일 동안은 하루에
한번씩 돌고 7일째 되는 날에는 일곱 번 돌고 큰 소리로 외칠 때 그 성이 무너져내렸
다(수 6:1-21). 이러한 사건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순종하였기 때문
에 가능하였다(Spicq). 저자는 본절에서 특별히 실제 믿음을 갖고 행동한 여호수아나,
그를 따른 군사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는 저자가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
하고 하나님을 믿고 그의 명령에 따라 행동으로 실천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강
조하기 위함이다(Lane, Spicq).

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ㅇ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 '기생'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조나'를 번역한 것으
로 이방 신전에서 일하는 창녀가 아니라 일반 창녀를 가리킬때 사용된 용어였다(수
2:1, Bruce). 라합은 이러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과 초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서 높이 존경받는 인물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사라, 아비가일, 에스더와 더
불어 구약성경의 대표적인 여인 중의 한사람으로 평가되었다(바빌론 탈무드 Megillah
15a). 신약성경에서도 라합의 믿음은 본절 이외에 약 2:25에서 찬양되고 있으며 예수
님의 족보에도 등장한다. 이와 같이 그녀가 믿음의 인물로 추앙받는 것은 이스라엘의
첩자를 숨겨준 자신의 행동이 동족에게 발견될 경우 죽음을 면치못하게 됨을 알고서도
그러한 행동을 실행하여 결국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점령하는 데 중대한 공헌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목숨을 걸고 믿음을 실천한 행위였다(수 2:1-21, Morris). 한편 '순
종치 아니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이스 아페이데사신'
은 믿음으로 순종하여 행동으로 옮긴 라합과 대조를 이루는 여리고 백성들
을 가리킨다(Lane). 그들은 순종치 아니함으로 멸망당하였다. 저자는 여리고 사람들의
멸망을 언급하므로 수신자들에게 순종치 아니함으로 광야에서 멸망당한 이스라엘 백성
들을 상기시키고 있다(3:18).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ㅇ내가 무슨 말을 더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
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 '내가 무슨 말을 더하리요'에 해당하
는 헬라어 '카이 티 에티 레고'는 수사적이며 문학적
인 표현으로서 시간이나 지면 관계상 제한을 받게 될 때 흔히 사용되던 관용구이다
(Lane, Robertson). 저자는 이와 같은 관용구를 사용하므로 믿음에 대한 예를 얼마든
지 열거할 수 있으나 그 전체적인 이야기를 다 취급할 수 없음을 나타내면서 여섯 명
의 믿음의 사람을 예로 제시한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이들 네 사람은
신약성경에서는 본절에서만 언급되었고(행 3:24;13:20) 다윗은 자주 언급되었다(마
1:1, 6;막 2:25;행 1:16 등). 여기서 이들 여섯 사람의 이름은 연대순서대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구약성경에는 바락(삿 4, 5장), 기드온(삿 6-8장), 입다(삿 11, 12장),
삼손(삿 13-16장), 사무엘(삼상 1-15장), 다윗(삼상 16-삼하 24장)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ㅇ기드온 - 이는 이스라엘의 다섯번째 사사로서 미디안의 군대를 무찌른 사람이었다
(삿 7장).
ㅇ바락 - 이는 네번째 사사로 가나안 족속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한 인물이었
다(삿 4장).
ㅇ삼손 - 이는 무서운 힘의 소유자로서 그 힘을 사용하여 블레셋을 괴롭힌 사사였다
(삿 13-16장).
ㅇ입다 - 이는 길르앗의 서자(庶子)로서 방랑생활을 하다가 암몬 족속의 위협을 받던
이스라엘의 부름을 받고 큰 전과를 거두었던 사사였다(삿 11-12장).
ㅇ다윗 - 이는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아 이스라엘의 두번째 왕이 된 인
물로 훌륭한 믿음의 소유자였다(삼상 16:1-13).
ㅇ사무엘 - 이는 어머니 한나의 기도로 얻은 아들인데 일찍이 엘리 제사장에게 맡겨
져 하나님의 율례를 배웠으며 성장 후 이스라엘의 사사요, 제사장적 기능을 담당하는
자로서 쉽게 믿음을 저버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늘 신앙으로 인도한 선지자였다(삼상
1-15장). 저자는 이들 여섯 명의 믿음의 인물들을 열거하고서 이들에 관한 일을 말하
려면 자신에게 시간이 부족할 것이라고 하였다. 본절의 '...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필레잎세이 메 가르 디에구메논 호 크로노스
페리'로 이는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수사적 관용구로서 고대 저술가들이나 필
로(Philo)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표현법이다(Lane). 저자는 이런 수사법을 사용하여 이
들이 믿음의 사람이었음을 얼마든지 증명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33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ㅇ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 저자는 본절부터 38절에 이르기까지 믿음으로 산자들의 공적과 그들의 승리의 삶을
일반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본문은 여호수아를 위시하여 32절에서 언급된 사사들과 다
윗에 대한 설명으로 볼 수 있다(Bruce). 여호수아 시대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의
정복 사업은 사사 시대를 거쳐 다윗에 이르러서 최고의 절정에 달하여 그들이 차지한
영토는 이집트 국경에서부터 유브라데스강까지 확장되었다(왕상 4:20, 21). 특히 '이
기기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고니산토'는 '정복하
다'(to conquer, NIV)의 뜻이다. 유대 사가(史家) 요세푸스는 이 단어를 다윗이 팔레
스틴 지역을 정복 했음을 기록할 때 사용하여서(Antiq vii, 53) '나라들을 이기기도'
가 다윗이 블레셋과 모압과 수리아 그리고 에돔을 정복했던 것을 가리킨다고 진술한
다. 한편 '의를 행하기도 하며'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소유한 사사들이나 열왕들의
의롭고 바른 통치를 가리킨다. 이것은 특히 사무엘이 완전한 의로움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삼상 12:3-5, 23) 다윗 또한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공과 의'로 모든 백성
에게 행하였음을 가리킨다(삼하 8:15;대상 18:14). 이상 언급된 사사들이나 열왕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믿음을 가지고 살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리라는 약속을 받았으며 그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였다(Bruce).
ㅇ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 본문은 저자가 특별히 다니엘을 염두에 두고 한 표현
인 듯하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려다가 모함을 받아 사자굴에 던져졌
으나 신체적으로 아무런 해도 받지 않고 거기에서 나올 수 있었다(단 6:17-22). 다니
엘 이외에 다윗도 양을 칠 때 사자를 물리친 일이 있었으며(삼상 17:34-37), 브나야도
사자를 죽였었다(대상 11:22).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ㅇ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 이것은 다니엘과 함께 바벧론에 포로로 끌려온 세 명
의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벱느고를 가리키는 것이다(단 1:7). 그들은 느브갓네살 왕
이 세운 금신상 앞에 절하지 아니한 죄목으로 느브갓네살왕에 의해 풀무불 속에 들어
가게 되었으나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조금도 상하지 않고 그곳으로부터 나올 수 있었
다(단 3:23-37). 그들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단 3:19-23) 앞에서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굳건한 믿음을 시사한다(Bruce).
ㅇ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 칼날을 피한 자들로는 구약 시대의 몇몇 선지자들을 생각
할 수 있다. '엘리야'는 이세벧에게서 도망하였으며(왕상 19:2), '엘리사'는 이세벧의
아들인 여호람에게서 구원받았고(왕하 6:31 ff.),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을 피하여 숨
었다(렘 36:19,26). 또한 '다윗'도 사울 왕의 칼날을 무사히 피하여 도망하였다(삼상
18:11). 저자는 이러한 예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방패가 되심을 강조한다(시 18:2).
ㅇ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된 실례는 구약성
경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 중에서 제일 보잘것없는 가문 출
신으로서(삿 6:31 ff.) 300명의 군사만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위엄을 이룩하
였다. 뿐만 아니라 삼손(삿 16:28-31)이나 하스기야 왕(왕하 20장;사 38장)은 연약한
중에 있다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시 강하게 회복되었다. 에스더 역시 연약한 여자였
으나 믿음으로 강하게 되어 자기 동족을 죽음으로부터 구할 수 있었다(Clement 1서
55:3).
ㅇ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 이는 여호수아나 사사들
그리고 다윗의 전쟁사 등을 가리킨 것이다. 이와 같이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의 어
떠한 권세나 군대의 세력 혹은 모든 위험을 물리칠 수 있었으며 자신들이 바라던 바를
성취할 수 있었다.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ㅇ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 이것은 구약성경의 사르밧 과부
(왕상 17:17-24)와 수넴 여인(왕하 4:18-37)의 경우를 가리킨다. 전자는 엘리야가 그
녀의 죽은 아들을 살려 주었다. 신약성경에서는 나인성 과부(눅 7:11-14),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와 마리아(요 11장), 도르가(행 9:36, 41)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인들에
게 있어서 믿음은 곧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요 3:15, 16,36;5:24;6:40, 47).
ㅇ또 어떤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
며 - 본절 상반절에서 여인들은 자신의 자녀나 관계된 자들을 부활로 되돌려 받았었
다. 그 부활은 일시적인 것으로서 그들의 아들들은 다시 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본문의 '더 좋은 부활'에서 '더 좋은'의 헬라어 '크레이트토노스'
는 질적인 차이를 나타내는 형용사이다. 따라서 '더 좋은 부활'은 본절 상반절
의 '부활' 즉 일시적인 부활과는 대조를 이루는 표현으로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게 되
는 종말론적 부활을 가리킨다(Spicq). 한편 '악형을 받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튐파
니스데산'은 고문대나, 곤봉을 뜻하는 명사 '튐파논'
에서 유래한 말로서 '죽도록 때리다', '고문하다'를 의미한다. 즉
이것은 고문대 위에 사람을 묶어놓고 때려서 죽이는 형벌을 말하는 것으로 마카비서에
나오는 신앙인이었던 엘리아살이 이와 같은 형벌을 받았다(마카비 2서 6:19, 28;7:31,
Robertson, Bruce). 또한 마카비 2서 7장 1절이하와 4서 8장 1절 이하에서는 그 어머
니와 일곱 명의 아들이 여러 가지 고문을 당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은 한결같
이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 모든 고문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마카비 2서 7:9). 즉
이들은 이 세상에서 구차하게 생명을 연장하기 보다는 새로운 삶과 부활이 있다는 믿
음의 확신에 근거해서 하나님과 그의 의를 위해 자신들의 생명을 기꺼이 바칠 수 있었
다.

36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ㅇ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 본
절이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마카비 전쟁 당시 시
리아의 침략군들이 신앙을 지키려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한 것을 가
리킨다고 주장한다(마카비 2서 7:1, Morris). (2) 혹자는 예레미야를 지칭하는 것이라
고 주장한다(Bruce). 예레미야는 한때 바스훌에 의해 매를 맞고 착고에 채워지기도 하
였으며(렘 20:2) 사람들로부터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었으며(렘 29:7ff.), 구덩이속의
진흙에 던져지기도 하였다(렘 38:6). 본절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이든간에 저자는 본문
을 통해서 믿음의 사람들이 그 믿음으로 인해 수많은 핍박과 고난과 희롱을 당하였음
을 강조한다.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ㅇ돌로 치는 것과 - 돌로 치는 행위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전통적으로 전해지던 처형
법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애굽의 유대인들이 우상숭배를 그치지 않을때 예레미야가 그
에 대해 끊임없이 회개를 촉구하자 유대인들이 그를 돌로 쳤다(Tertullian, Scorpion
Antidote 8;Jerome, Against Jovinian 2.37). 또한 예수께서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
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라고 탄식하셨다(마
23:37). 예수께서 탄식하신 내용은 여호와의 전뜰 안에서 돌에 맞아 죽은 예언자 스가
랴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대하 24:21;눅 11:51).
ㅇ톱으로 켜는 것과 -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진다(Lane).
ㅇ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 다른 믿음의 사람들은 '칼날을 피하기도'하였지만(34절)
또 다른 이들은 믿음으로 인하여 칼에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엘리야는 이세벧로부
터 피할 수 있었으나 그 외의 다른 예언자들은 칼에 죽임을 당했다(왕상 19:10). 또한
여호야김이 집권할 당시 예언자 우리야가 칼에 죽임을 당했으며(렘 26:23), 신약 시대
사도 야고보도 칼로 죽임을 당하였다(행 12:2).
ㅇ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라는 것은 엘리야와 엘리사를 가리켜 한 말로 볼 수 있다
(Lane).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하며 고린도의 그
리스도인들에게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한' 사람들을 본 받으라고 촉구하였다
(Clement 1서 17:1). 클레멘트는 거기서 그들이 엘리야와 엘리사, 그리고 에스겔을 가
리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특별히 엘리야는 구약 시대 예언자들의 일반적인 복장이었던
(슥 13:4) 털옷을 입고 다녔으며(왕하 1:8) 신약 시대의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
었다(막 1:6). 이러한 복장은 특수한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예언자들의 검
소한 생활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편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라는 말은 엘리
야와 엘리사의 예언자의 삶을 요약하고 있는 말로 볼 수 있다(왕상 17:2-16;19:1-19;
왕하 1:3-16;8:1, 2, Lane). 또한 이것은 특별히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
(Antiochus IV Epiphanes)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을 때 경건한 유대인들은 신
앙을 지키기 위해 도망하여 산이나 광야에서 짐승처럼 생활하였던 것을 상기시킨다(마
카비 2서 5:27).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ㅇ(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 본문은 '세상이 그들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라는 의미이다(the world was not worthy of them, NIV).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핍박과 환난이 문제시 될 수 없었으며 세상적인 부귀와 영화가 그들의 마음을 돌려놓
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었다.
ㅇ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 본절은 시 106:4(LXX)을 인
용한 것으로 박해가 있을 때 광야나 산 혹은 굴 속으로 피신하는 일은 일반적인 현상
이었다(왕상 18:4, 13;19:1-4, 9). 저자는 이러한 인용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이 있다고 하여 반드시 이 땅에서 안락함과 평안을 누리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
다. 그리스도인들의 보상은 세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며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받게 된
다(Bruce).

39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ㅇ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 '이
사람들이'라는 말은 32-33절에서 언급된 인물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본장에서
언급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을 가리킨다(Michel, Moffatt). 이들은 모두 다 성경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의 믿음에 대하여 증거를 받은 자들이었다(2, 5절). 그러나 그들
은 '약속'을 받지는 못하였다. 이 말은 33절의 '약속'을 받지도 못하였다. 이 말은 33
절의 '약속을 받기도 하며'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절에서의 '약속'에
해당하는 헬라어 '텐 에팡겔리안'('그 약속')으로 단
수로 표현된 반면에 33절의 '약속'은 '에팡겔리온'('약속들')
으로 복수이다. 따라서 33절의 '약속들'은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하신 특정한 약속들로
서 그러한 약속들은 그들의 생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었다. 그러나 본절의 '그 약
속'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성취될 '영원한 기업의 약속'(9:15)으로서 영
원한 하늘나라의 구현을 가리킨다. 저자가 본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사람들은
다...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이다(13절, Peterson).
구약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다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지 못하였으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속에서 살았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어떠해야 하
는가 하는 것을 교훈하는 실제적인 본보기가 되었다(Lane).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ㅇ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
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 앞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구약 시대의 믿
음의 사람들이 약속을 받지 못한 것은 그들의 믿음에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기 때문이었다. '더 좋은 것
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레이트톤 티'는 부정 대명사로서
더 좋은 것의 구체적인 내용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
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온전케 되는 구원을 시사한다(Morris). 구약 시
대의 믿음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구원의 온전함을 경험할
수 없었으나 이제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약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이나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은 다같이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분 앞에 자유로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Bruce). 이것은 구약 시대의 믿음의 인물들의 구원이나 그리스도인들
의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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