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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선교회

신약/히브리서

[스크랩] 히브리서 (6 : 1~20)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7:14
히브리서 6장


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ㅇ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 저자는 5:11-14에서 언급한 신앙
상의 권면 즉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 것'을 계속 권고한
다. 그는 본절에서 더이상 독자들을 젖을 먹는 어린아이(5:13)로 취급하지 않고 있다
(Lane). '그리스도 도의 초보'의 내용은 본절 하반절과 2절에 세개의 쌍으로 된 6가
지 항목으로 상술되고 있다. 본서의 수신자들이 유대인 공동체였기에 '그리스도 도의
초보'의 내용은 유대교 관습과 연관된 것이었다(Bruce, Morris, Lane).
ㅇ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 '죽은 행실'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
이다. (1)혹자는 생명을 주지 못하는 구약 시대 율법의 제사 의식을 의미한다고 주장
한다(9:10, Hewitt). (2)혹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인간들의 실제적인 모든 악행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uce).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나 다음에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후자가 더 타당하다(Morris). 또한 죽을수밖에 없던
지난날의 행실을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행위인 '회개'는 세례 요한이나(마
3:2), 예수 그리스도(막1:15) 그리고 그의 제자들(행2:38)의 가르침에 있어서 가장 기
본적인 것이었다. 한편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
이상의 것으로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을 시사한다(Morris).
이러한 믿음은 참된 신앙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로서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잘 나타나
고 있다(창15:6;합2:4).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ㅇ세례들과 안수와 - '세례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밥티스몬'은 기독
교의 '세례'(밥티스마)를 의미하지 않고(롬6:4;엡4:5;골2:12) 유대교
의 일반적인 정결 예식을 의미한다(레11-15장, Bruce, Morris). 초대 교회 그리스도
인들은 죄 씻음을 받은 표징(表徵)을 세례로 볼 것인가 아니면 유대인들의 정결 의식
으로 볼 것인가에 대하여 논란이 많았으며(요3:25;행19:1-5) 처음 믿는 개종자들은 이
'세례들'에 관한 교훈에 접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안수'는 구약시대부터 널리
시행되던 관습이었다(민8:10;신34:9). 신약시대에도 새로운 개종자(행8:17)나 전도
사역자(딤전4:14)에게 종종 안수를 시행하기도 하였다(행8:17-19). 본절의 '안수'는
주로 개종자들에게 행하여 성령의 은사를 받도록 하는 것을 가리킨다.
ㅇ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 - 이것은 '그리스도 도의 초보'에 관한 마지막 세번
째 쌍으로서 미래에 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주제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중대 관
심사인 종말론적 교리이다(사26:19;단7:9,10;12:2;눅20:37,38;행23:8;마카비2서 7장,
Bruce). 이러한 교리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책임적 존재로서 마지막 때에 회
계해야 함을 시사한다.
ㅇ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 '완전'의 헬라어 '텔레이오테타'는 '성
숙'이라는 의미로 공동체내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인격적으로 순종하는 것
을 가리킨다(Lane).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개종한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그러한 문제
에 집착하지 말고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과 권한에 순종하기를 권면한다.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ㅇ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의 헬라어
'에안페르 에피트레페 호 데오스'에서 '...하시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안페르'는 '페르'('참으로')를 접미어로 취한 형태로 '참
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조건문
으로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때 가능함을 시사한다. 한편 '이것'이 가리키
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가리킨다
고 주장한다(Moffatt, Hewitt). (2)혹자는 '완전한 데 나아가는 것'(2절)을 가리킨다
고 주장한다(Robertson, Morris, Bruce, Lane). 두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
냐하면 전자의 것은 이미 버리라고 저자가 권면했기 때문이다(1절).그리스도인들이 완
전 곧 성숙으로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다(1,7절, Lane).

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ㅇ한번 비췸을 얻고 - 저자는 4-8절의 내용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성숙시키지 못하고
헛된 교훈에 미혹된 배도자(背道者)의 결말에 대해 경고한다. 본절과 다음절은 개종
자들의 첫 신앙 체험을 기술한 것으로 그 표현이 추상적이어서 구체적으로 해석하기에
다소 난점이 있다. '비췸을 얻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티스덴타스'
는 '비추다'라는 의미의 동사 '포티조'의 부정과거 수동태 분사이다.
혹자는 이 단어가 2세기경에는 '세례를 베풀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면서
'포티스덴타스'가 '개종자들이 세례받는 것'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Kasemann,
Conzelmann, Bruce). 그러나 이러한 용례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없으므로 이 단어가
세례 베푸는 것을 뜻한다고 단정하기가 어렵다. 도리어 '포티스덴타스'는 신약성경에
서 그리스도의 복음이나 그리스도 자신을 암시하는 '세상의 빛'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요1:9;고후4:4,6;벧후1:19) 복음을 믿는 자들을 의미하는 '세상의 빛'(마5:14;요
8:12)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보아 복음의 진리를 믿고 받아들인 행위를 의미한다고 해
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ㅇ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 '하늘의 은사'에 대해서는 두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
는 '성찬'(聖餐)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uce). 왜냐하면 '맛보고'의 헬라어 '규사
메누스'가 문자적으로 '음식을 맛보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2)
혹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선물이라고 주장한다(Lane). 그러나 본절의 '하나
님의 은사'는 어느 한 가지로 규정하기 어렵고 다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
시는 귀한 선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Morris).
ㅇ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 '참예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토쿠스'는
'참여하다', '교제하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체험한
것을 가리킨다(Lane, Bruce).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ㅇ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 '선한 말씀을 맛보았다'는 말은 하
나님 말씀의 귀중한 가치를 깨달았다는 의미인 듯하다(Morris, Hewitt). 한편 '내세
의 능력'은 미래적인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장차 올 세계의 능력을 의미한
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현재에도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고 있다
(Lane, Morris). 이와같이 4-5절에 걸쳐 진술된 영적인 체험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
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든지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사(恩賜)이다.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ㅇ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 '타락한 자들'의 헬라어
'파라페손타스'는 '한쪽으로 떨어져 나가다'라는 의미의 동사
'파라피프토'의 부정과거 능동태 분사이다. '파라페손타스'는 4,5절
에서 언급한 영적 체험을 받아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좋은 은
사를 체험하였다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자를 가리킨다. '타
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는 본절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1)본절은 다시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든가 구원받지 못한다는 의
미가 아니다. 저자가 뜻하는 바는 '다시 회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회개'는 회개
하는 자가 자신의 삶 전체의 방향을 전환시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결코 반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일회적인 것이다. 따
라서 본절은 타락한 자들이 일회적인 회개를 다시 반복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Morris). (2)저자는 구약시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알고 지은 고의적으로 배도한 본절
의 '타락한 자들'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타락하여 다시 회개할 수 없는 자임을 의미
한다(Bruce).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는다.
ㅇ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스타우룬타스'에서
'다시'로 번역된 접두사 '아나'는 '다시'라는 의미가 아니라 '위에'라는 의미
이다(Robertson, Hewitt, Morris). 이것은 타락한 자들이 예수를 두 번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십자가 위에 못박아'라는 의미로 그리스도를 거부하
는 자들이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던 자들과 다를 것이 없음을 시사한
다.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ㅇ개역 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 '가르'는 본절과
다음절이 앞서 언급한 내용에 대한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
ㅇ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
면 하나님께서 복을 받고 - 본절은 그리스도인의 장성함에 대한 비유로 사5:1 이하의
'포도원의 노래'와 내용 면에서 유사하다(Bruce). '땅'은 그리스도인들을 비유한 것
이며(마13:18-23) '비'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감화 등을 비유한 것이다(사
44:3;55:10). 밭을 가는 자가 열심을 다해 밭을 갈았을 때 밭이 그에 맞는 소출을 내
면 밭을 가는 농부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배도하지 아니하고
성숙한 신앙으로 발전해 나아갈 때 은혜를 베푸시고 돌보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신다(Hewitt, Morris, Lane).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ㅇ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 본절은 배교자에 대한 비유이다. '가시와 엉겅퀴'는 창 3:17, 18의 내용과
연관된다. 창세기에서 가시와 엉겅퀴는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야기된 저주의 산물
이었다. 본절에서 '가시와 엉겅퀴를 낸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배도함을 의미하는 것으로(Lane) 그것의 '마지막' 즉 결과는 불사름을 당하는
것이다. '불사름'의 헬라어 '카우신'은 마지막 심판 때의 엄격함을 나
타내는 것으로서 그 불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소멸하는 도구가 된다
(10:27;12:29).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ㅇ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 저자는 4-8절에서 배도자들의 결국이 어
떠한 것인지에 대하여 엄숙한 경고를 하였으나 본절에서 수신자들이 자신이 말한 그러
한 배도자들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의 헬라어 '아가페토이'
는 본서에서 오직 본절에서만 사용된 표현으로 수신자들에 대한 저자의 애정
어린 호칭이다.
ㅇ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 '이보다 나은 것'
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크레잇소나'는 저자가 4-8절에서 언급한 배
도자의 상태와 관련된 것으로 수신자들을 배도자와 비교할 때 훨씬 좋은 상태 즉 배도
자들이 받는 저주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상태에 있음을 시사
한다(Hewitt, Morris, Robertson). 한편 '구원에 가까운 것'의 헬라어 '에코메나 소테
리아스'에서 '에코메나'는 '소유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에코'의 현재 중간태 분사로 수신자들이 구원을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
낸다. 수신자들은 배도할 가능성이 있었으나 결코 배도자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들에게는 구원받은 것의 증거가 될 수 있는 선행의 열매가 있었다(10절). 저자는 수
신자들에게 구원받은 자임을 확신시키고 있다.

10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넘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 하시느니라

ㅇ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 '그의 이름'은 하
나님의 이름을 가리킨다. 고대에는 '이름'이 그 이름을 소유한 자의 전인격을 대표하
는 것이었다(Morris).본서의 수신자들은 선행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 즉
그의 전인격을 나타내는 사랑으로 성도들을 계속적으로 섬겼다.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수신자들의 행위를 기억하신다. 저자는 하나님의 공의와 수신자들의 행위를 근
거로 앞절에 언급된 확신을 소유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수신자들의 선행이 그들의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Hewitt). 그들의 선행은 자신
들의 믿음이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 고백되어지는 진실한 것임을 나타내
준다.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ㅇ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 '간절히
원하는'의 헬라어 '에피뒤무멘'은 '열렬히 바라다'라는 의미로 저자
의 간절한 염원을 나타낸다. 저자는 '너희 각 사람' 즉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은 관심
을 보이면서 그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깨어 부지런하여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부끄럼
없는 삶 즉 믿음에서 난 선행을 행하며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는 삶을 영위하기를 바
라고 있다.
ㅇ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 '끝까지'의 헬라어 '아크리 텔루스'
는 3:14의 반복으로 종말론적인 면을 강조한다. 즉 이것은 '파루시아'(parousia,
'그리스도의 재림')로 말미암아 그들의 소망이 완전히 실현(實現)될 때까지라는 의미
이다(9:28, Lane). 한편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는 '온전한 소망을 지니다'라는 의
미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의 참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다
(롬8:24,25). 본절에서 소망이 언급되어 있는 반면에 앞절에서는 '사랑' 그리고 12절
에서는 믿음이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세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종종 함께 쓰여졌다
(10:22-24;롬5:2-5;고전13:13;갈5:5,6;골1:4,5;살전1:3;5:8;벧전1:21,22). 이는 그리
스도인들의 균형잡힌 신앙생활에 위의 세 요소가 필수불가결함을 암시한다.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ㅇ게으르지 아니하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나 메 도드로이 게네스데'
에서 '게으르지'의 헬라어 '노드로이'는 5:11의 '둔하므
로'와 같은 단어로서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본절은 5:11의 내용을 기능적으
로 보완하고 마무리하는 역할을 한다(Lane). 즉 그리스도 도에 대한 초보자들은 말씀
을 듣기에 게으르고 둔하여서 해석하기 어려웠다(5:11). 그러나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앞절에서 부지런하라고 권면하며 동시에 본절에서는 게으르지 아니하여 말씀을 잘 이
해하고 계속 성장하여 나아가기를 권면한다(Hewitt).
ㅇ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
려는 것이니라 -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이란
13절의 아브라함과 같은 자들을 말한다(Bruce). 그런자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
함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에 대해 오래참고 기다려 기업을 받은 자들이다(Lane,
Grasser). '기업으로 받는'이란 '확실히 소유하다'라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 즉 구원을 온전히 소유한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구약시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서 약속하신 것을 믿고 인내한 것을 예로 들어 수신자들에게 아브라함과 같이 주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믿고 인내하여 소유하는 자가 되기를 권면한다.

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ㅇ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할실 때에 -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언급할
때 대부분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으며(행3:25;7:17;롬4:13;갈3:8,14,16,18) 본서에
서도 아브라함을 예로 제시하는 경우가 자주 등장한다(13-15절;2:16;7:4-5;11:8-19).
13-15절의 아브라함에 관한 서술은 믿음의 모범으로서 12절의 '본받으라'는 권면에 대
한 내용이다.
ㅇ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 본절
은 창22:16의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를 저자가 논리적인 부연 설명을 덧붙여
인용한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맹세'에는 약속에 대한 지연(遲延)이 암시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즉시 약속을 이행하신다면 맹세하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West-
cott). 하나님은 자신을 세워 스스로 맹세하셨다(출32:13;사45:23;렘22:5;49:13).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에 대한 확실한 이행을 보증하는 것으로 하나님
께서는 스스로 약속의 확실성에 대한 가장 큰 보증이 되신다(Lane).

14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ㅇ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 본
절은 70인역의 창22:17을 다소 변형시킨 인용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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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 22:17 | |
| (LXX) | 에 멘 율로곤 율로게소 세 카이 플레뒤논 플레뒤노 토 |
| | 스페르마 수 |
| |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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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에이 멘 율로곤 율로게소 세 카이 플레뒤논 플레뒤노 세 |
| |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
| | 번성케 하리라' |
+------------------+------------------------------------------------------+
70인역에는 '플레뒤노 토 스페르마 수'('내가 너의 씨를
번성케 하리라')로 되어 있는 반면에 본절에서는 '플레뒤노 세'('내가
너를 번성케 하고')로 되어 있다. 두 구절의 의미는 동일한 것이나, 이렇게 저자가
'너의 씨'를 '너'로 변경시켜 인용한 것은 이야기의 초점을 아브라함에게 집중시키기
위함이다(Schroger). 또한 창22:17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자손의 번성뿐만 아니라 땅
에 대한 소유까지도 포함하고 있으나 본절에서는 자손에 대한 약속만을 언급한다. 이
는 11:17-19의 내용 즉 약속을 성취받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 이삭을 아브라함이 하
나님께 제물로 바치기까지 인내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Swetnam).

15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ㅇ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믿음
과 인내에 대해 엄격한 시험을 거친 후에 약속에 대한 보증을 받을 수 있었다(창
22:1,15-18). 약속의 성취는 이삭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었으나 아브라함은 하나님
의 명령을 따라 이삭마저도 제물로 바치려 하였다. 이것은 어떠한 절망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으며, 그와 같은 믿음은 약
속을 기다리는 모든 자들이 본받아야 할 본보기였다(Lane). '약속을 받았느니라'는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과 손자인 에서와 야곱의 출생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
나 이것은 약속의 완전한 성취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너희 조상 아브
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 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약속의 보다 깊은 의미를 내다보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Morris).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ㅇ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 저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17절) 당시 일반 사람
들이 하던 맹세와 비교하여 설명한다(Cicero, Philo). 일반적으로 맹세는 발언한 것
에 대한 결정적이고도 구속력이 있는 확증이었다. 구약성경에서 맹세는 맹세하는 사
람보다 더 크고 위대한 여호와의 이름으로 되어졌으며(신6:13;10:20) 만일 맹세를 하
고서 이를 어기면 그것은 십계명 중 제3계명을 어기는 것이 되었다(출20:7;신5:11;슥
5:3,4). 실제로 맹세는 약속한 것의 명백한 진실성을 비준해 달라고 하나님을 엄숙히
부르는 행위를 수반하였다(Philo). 저자는 아마도 아브라함이 이방인들과 다툼을 방
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요구한 사
실과 이러한 맹세는 최후 결정으로 더이상 변개(變改)할 수 없음을(창
14:22;21:23-24;24:3) 염두에 두고 본절을 기록하였을 것이다(Lane).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ㅇ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
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 본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를 나
타내는 것으로 창22:16-17에 대한 언급이다. 여기서 '맹세로 보증하셨나니'는 하나님
의 약속의 불변성을 의미한다. 특히 '보증하셨나니'의 헬라어 '에메시튜센'
은 '중재자'란 뜻의 '메시테스'에서 유래한 말로서 '중재자가
되다', '보증인이 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은 맹세가 필요없으나 자신의 약
속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기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셨다.
한편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은 아브라함을 포함하여 그의 후손들을 시사하는 것
으로 육체적인 후손이라기 보다는 영적인 후손 즉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Lane, Mo-
rris).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하신 맹세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확신을 고무(鼓舞)시켜 주는 말씀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 즉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
들에게까지 확장되어 적용된다(Michel, Spicq, Foerster).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맹세는 자신의 약속이 변치 않는다는 사실을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증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ㅇ본절은 '히나'('위하여')로 시작하는 목적절로 하나님께 맹세하신 목적을
나타낸다.
ㅇ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은 13절과 17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가리킨
다(Bruce, Michel, Kuss). '약속'은 모든 날 마지막에 나타난 말씀인 그리스도 자신
을 가리키는 것으로(1:2), 하나님께서 '맹세'하여 보증하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성취되었다(20절;히5:6,10;7:17,21,28;시110:4, Lane). 한편 본문에 해당하는 헬
라어 '디아 뒤오 프라그마톤 아메타데톤 엔 호이스 아뒤나톤 프슈사스다이 데온'
은 '이 두 가지 변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은 거짓말 하실 수 없으므로'(by two unchangeable things
in which it is impossible for God to lie, NIV)라는 의미로 이 두 가지 사실 즉 '약
속'과 '맹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수 없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성경의
단편적인 한 두 구절에서 유추한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에 흐르는 사상에 뿌리를
둔 것이다(민23:19;삼상15:29;시89:35;사31:2).
ㅇ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
'소망'은 본서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을 가리
키는 것으로 현재 이룩되었으며 앞으로 완성되어질 구원을 나타낸다(Michel, Grasser,
Glaube, Mora). 저자는 '앞에 있는 소망' 즉 그리스도인들의 종말론적 구속의 소망이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약속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사역으로 인해 이중의 보장을 받
고 있음을 강조한다(Lane, Schierse). 이러한 소망을 바라보고 삶을 영위하는 그리스
도인들은 세상의 죄악을 피해가야 한다(Morris). 한편 '큰 안위'는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오는 '용기' 혹은 '위로'를 가리킨다(Robertson). 하
나님은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 즉 자신이 행하신 약속과 맹세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성취하셨으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현재 구원을 누리고 있는 그
리스도인들은 변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인해 종말론적 구원의 성취를
소망하고 현재 지상의 삶 가운데서 위로를 받게 된다.

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ㅇ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 본절에서 닻의
비유가 사용되는 것과 같이 '삶'을 '항해'에 비유하는 것은 고대 문학에 있어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이었다(Hilgert).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이와같은 비유는 오직 본절에
서만 나타난다. 이 '닻'의 비유는 헬라문학에서도 그러했듯이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
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Lane). 저자는 소망이 '영혼의 닻'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표현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소망하는 종말론적 구원의 성취가 확고한 것임을 시사한다.
한편 본절의 '영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케스'는 인간을 '육'과 '영
혼'으로 분리하는 헬라 철학의 이원론적 개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本質的)
인 생명을 나타낸다(Morris).
ㅇ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 '휘장'은 구약 시대의 성막 안에 있던 두 개의 방 즉 성소
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천을 가리킨다. 이 휘장 너머 즉 안쪽은 지성소를 의미한다(출
26:31-35;레16:2,12,15;21:23;24:3).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
만 들어갈 수 있었다(레16: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셔서 들어가심으로
(20절) 휘장은 찢어졌고(마27:51;막15:38)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모든 자들이 자
유롭게 지성소 즉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종말론적
구원의 성취를 통해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한편 '들어가나니'의 헬라어 '에이세르
코메넨'은 '에이세르코마이'('들어가다')의 현재
분사로서 '닻'(앙퀴란)을 수식한다. 따라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닻'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 '닻'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시한다(Windisch,
Kasemann, Grasser, Koster, Schroger). 그러나 이 '닻'은 다시 소망을 설명하고 있
으므로 결국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소망'이다(Lane, Kuss, Michel, Spicq). 휘
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소망'이라는 사실은 7:19의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
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는 말씀으로 더욱 확증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지
닌 소망은 닻과 같이 튼튼하고 안전하여 세상의 어떠한 시련이나 유혹을 뛰어넘어 하
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한다(Morris).

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ㅇ그리고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
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 '앞서 가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드로모스'
는 본절에서와 같이 단수로 사용된 용례가 고전에서나 헬라 문헌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 단어의 복수 형태인 '프로드로모이'는 주력 부
대 앞에 나가있는 '첨병'이나(Herodotus, Polybius), '주력 함대를 앞서 인도하는 배
들'(Alciphron), '처음 익은 열매'(민13:20;사28:4), 혹은 '전령'(Herodotus)을 뜻하
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용례에 비추어 볼 때 본절의 '프로드로모스'는 '선구
자', 혹은 '선두주자'라는 의미를 지니며 동시에 누군가가 '프로드로모스'의 뒤를 따
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선구자(先驅者)로 멜기세덱과
같은 대제사장직 수행을 위해 먼저 휘장 안으로 들어가셨다(5:7-10). 즉 예수께서는
자신의 대속적인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셨으며 그 구속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씻어 백성들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하셨다(10:14, Lane).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심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구속을 힘입어 뒤
따라 하나님 존전에 나아갈 수 있는 확증이 된다(Hewitt).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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