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히브리서

[스크랩] 히브리서 (3 : 1~19)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7:13
히브리서 3장

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ㅇ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클레세오스 에푸라니우)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것을 의미하는 말로
서 그들이 성도가 될 수 있었던 원인이 하나님께 있음을 시사하는 표현이다. 특히 본
서의 저자는 하나님이란 명칭 대신에 '하늘'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여(6:4;8:5;
9:23;11:16;12:22)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였다. 한편 '거룩한 형제들아'에 해당하
는 헬라어 '아델포이 하기오이'는 신약성경에서 본절에서만 나타
나는 유대적인 표현이다(출19:6;벧전2:9,Hewitt).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의 대제사장적 역할로 인하여 거룩한 자들이 되었다.
ㅇ우리의 믿는 도리의...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저자는 본절에서 예수를 두 가지 칭
호를 통해 소개하면서 그 예수를 깊이 상고하라고 권면한다. '믿는 도리'의 헬라어
'호몰로기아스'는 '고백'(confession)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믿음의 응답으로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을 뜻한다(4:14,
Lane). 이 '호몰로기아스'는 '사도'와 '대제사장' 모두를 수식하는 것으로 본절은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와 대제사장'(the Apostle and High Priest of the rel-
igion we profess, NEB)을 의미한다(Bruce).
ㅇ사도 - 복음서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 자주 표현하고 있
으나(마10:40;눅10:16;요4:34;5:23,24) '사도'로 표현된 신약성경에서 본절뿐이다.
예수를 '사도'로 호칭한 이유에 대하여 다음 두가지의 견해가 있다. (1)유대 문헌에
의하면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전권 대사'로 간주되었다(b.Qidd.23b;Ned.35b;Yoma19a-
b). 이 하나님의 전권대사를 뜻하는 용어 '쉴리'가 헬라어 '아포스톨로
스'('사도')로 번역되었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의 '사도시며 대제사
장'은 유대인들의 전통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Manson). (2)'사도'라는 호
칭은 예수를 구약의 모세와 비교해 언급한 것이다. 모세는 비록 구약에서 직접 '사
도'로 불리지는 않았으나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라는 표현으로 보아(출
3:10,LXX) 모세가 사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본절
에서 제자가 예수를 '사도'로 표현한 것은 모세와의 역할을 비교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대사로서의 예수의 역할을 시사한다(Jone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문맥의 흐름으
로 보아 더욱 타당하다.
ㅇ대제사장 - 신약셩경에서 본서만이 예수를 대제사장으로 부르고 있다. '대제사장'
이란 예수의 칭호는 예수의 사명 가운데 제의적인 요소가 있음을 시사한다(Morris, Hewitt).

2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ㅇ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한 것과 같으니 - 저자는 본절
에서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충성과 모세의 충성을 비교하고 있다. 민12:7에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모
세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온 집을 맡은 충성된 청지기로서 인정받은 것을 나타낸다.
모세는 예수님과 같이 완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유대인들이 가장 존
경하는 조상 중의 하나인 모세를 충성된 자로 인정하면서 3절이하에서는 예수를 보다
우월한 자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혹자의 기적대로 저자가 2:9에서 '영광과 존귀로
관 쓰는 예수를 보니'라고 기록한 것은 하나님이 예수의 충성을 인정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Hewitt).
ㅇ하나님의 온 집에서 - '집'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는 '가족', '가
문' 혹은 '재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으며(느1:6)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거룩한 무리인 성도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를 가리킨다(엡2:21,22;딤전3:15;딤후2:20;벧전4:17). 따라서 '하
나님의 온 집'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하나님의 권속을 뜻한다. 한편 '온'
에 해당하는 헬라어 '홀로'는 모세의 충성과 예수의 충성 사이의 차이점을 암
시한다. 모세와 같은 구약 시대 하나님의 종들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 하나님에게 충
성하였으나 예수는 하나님의 통치가 시행되는 전 영역에서 온전하게 충성하였음을 시
사한다(Morris).

3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ㅇ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 저자는 2절에서 예수와 모세가 서로
'충성되다'는 점에서 그 유사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예수와 모세의 차
이점, 즉 모세에 비해 예수께서 더 우월하심을 강조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을 섬기
는 사환으로서(5절) 자신을 세우신 이에게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영광을 받을 만하다.
더욱이 그는 출애굽 직후 40일동안 시내 산상에서 하나님과 만남으로 인해서 그의 얼
굴에 하나님의 영광의 흔적을 얼마간 간직했었다(출34:29-35;고후3:7). 그러나 그의
영광은 결국 사라져 없어질 것에 불과했다(고후3:7,13). 그러나 예수께서는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2:9) 하나님의 본체시며(빌2:6), 영광과 빛의 근원이시므로(요
1:4,5,9) 모세가 받은 영광은 예수의 영광과 비교될 수 없으며, 비교될 만한 영광스러
운 존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ㅇ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 본 비유는 예수께서 모세보
다 더욱 영광받아야 하는 이유를 묘사한다. 본절의 '집'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쿠'
는 2절의 '온 집'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 혹은 '구원받은 무리'를 의미한
다. 모세는 그가 아무리 탁월한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다 하더라도 그 집의 한 부분에
불과하였으나 예수는 그 집을 자신의 피로 세우신 분으로(행20:28) 그 집에 속해 있는
모세보다 훨씬 존귀한 존재이시다. 따라서 예수께서 모세보다 더 큰 영광과 존귀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ㅇ개역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절이 앞서
언급한 '집 지은 자'와 연결된 변론임을 시사한다.
ㅇ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 본절의 상반절에 있
는 '집'은 하반절에서 '만물'로 대치되어 있으며 하나님은 그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로 묘사된다(사40:28;45:7,LXX). '집'이 존재하는 것은 '집 지은이'가 존재함을 시사
하며, '만물'이 존재하는 것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5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ㅇ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
고 - 모세의 역할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될 복음에 대하여 증
거하는 것이었다(Calvin). 즉 그는 장차 도래할 예수와 그 복음을 전하는 소개자였
다. 한편 저자는 모세를 '사환'으로 표현한다. '사환'은 '종'의 의미를 가지는 말로
서 신약성경에서는 이곳에만 나타나며 70인역에서는 자주 모세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출4:10;14:31;민11:11;12:7;신3:24;수1:2;8:31,33,LXX). 이 용어는 하나님과 친밀하
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위엄과 존귀를 지닌 '종'을 가리키나 동시에 여전히 '주
인'에 예속된 '종'임을 암시한다(Morris, Hewitt, Lane).

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밭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ㅇ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 모세는 비록 하나님과 친밀한 관
계를 맺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집에서 '종'으로 충성한 반면에 그리스도는 '아들'
로서 충성하였다. '종'과 '아들'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저자는 모세와 예수께서 충성
하였다는 점에서는 유사할지 모르나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저자는 모
세에게는 전치사 '엔'('...안에서')을 사용하여 '집에서' 충성하였다고 묘사한
반면에 그리스도에게는 '에피'('위에')를 사용하여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
였음을 대비시키고 있다. 결국 이것은 모세에 비해 그리스도께서 질적으로 우월하심
을 시사한다(Lane). 즉 모세는 하나님의 충성된 종으로 탁월한 존재이긴 하였으나 본
질적으로는 일반 사람들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집을 맡은 자이며 아들
로서 질적인 우월성을 갖는다.
ㅇ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 본절에서의
'소망'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예수의 충성스러움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확신을 갖고 바라봄을 의미한다(Lane, Morris). 그리
스도인이 지녀야 하는 이 소망은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1)담대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르레시안'은 '신뢰'를 뜻한
다. 본래 '파르레시안'은 헬라 문화 속에서 헬라 시민들 상호간의 개방적이고도 솔직
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이런 헬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은 이 단어를 하
나님 앞에서 개인 신앙의 '확신과 담대함'을 뜻하는 말로 사용하였다(Philo).
(2)자랑 - 이로 번역된 헬라어 '카우케마'는 자랑하는 '행동'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라 자랑이 되는 '내용'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집에서 성
도들이 갖는 하나님의 백성된 신분으로서의 자랑스러움을 뜻한다(Morris). 한편 '집'
은 구약시대 하나님의 백성을 뜻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신약시대에서
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즉 그리스도
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의 집'이다(2절).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
으로서 하나님께서 복음 안에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성취하시리라는 확신과 자랑스러
움을 인내 속에서 견고하게 붙잡고 나아가야 함을 상기시키고 있다.

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ㅇ그러므로 - 헬라어 '디오'는 8절의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에 연결된 것
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범한 과오를 범하지 말아야 함을 시사한다
(Morris, Robertson, Lane).
ㅇ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 저자는 7-11절을 시95:7-11에서 인용하면서 이것을 성
령께서 하신 말씀으로 설명하였다. 이런 사실은 저자가 인용한 시편의 내용이 하나님
의 말씀으로서의 권위가 있음을 시사한다(Hewitt).
ㅇ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 본문은 선지자나 천사나 모세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든'이란 의미로 수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
적인 복종과 아울러 즉각적인 행동을 하도록 요청하고 있다(Hewitt, Morris).

8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ㅇ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 본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
의 지도로 출애굽할 때에 발생했던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반역 행위를 나타낸다. 비
록 그들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반항하거나 거역한 적은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
께서 세우신 그들의 지도자 모세에게 대적함으로써 하나님에게 반역하였다(출
14:10-14;15:24;16:2-9;17:1,2). 이스라엘 백성의 수많은 반역 중에서 본절의 내용이
말하는 반역은 출17:1-7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여행할
때 물이 부족하자 모세와 더불어 다투었던 사건이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물을 주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호렙산의 반석을 쳐서 물을 내었는데 그 곳의 이름을 '맛
사' 혹은 '므리바'라고 칭하였다(출17:7). 그러나 70인역에서는 '맛사'와 '므리바'라
는 지명(地名) 대신에 '격동'(호 파라피크라스모스)과 '시험'
(호 페이라스모스)으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번역은 번역자가 시편
95:7-11을 번역할 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분노를 초래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
지 못한 사실에 비추어 해석한 듯하다(Lane).
ㅇ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 본 구절의 '마음'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의 중심적
인 요소인 '속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벧전3:4) 인간의 '지성'(욥9:4;38:36;잠
10:8;11:29), '감정'(신28:47;삼상25:31;시34:18;사21:4;겔27:31)과 '의지'(4:12;시
64:6;잠6:18;전10:2;눅24:25;롬10:10;고전2:9;엡6:6)의 좌소(坐所)이다. 한편 '강퍅
케 하지 말라'의 헬라어 '메 스클레뤼네테'에서 '메'는 부
정어이며 '스클레뤼네테'는 '말라서 굳은', '딱딱한'의 뜻을 갖는 '스
클레로서'에서 파생한 동사이다. 이 '강퍅함'은 애굽 왕 바로가 하나님의
이적을 보면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대적했던 것처럼(출9:35)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서 일절 거부하는 성향으로 굳어져 버린 인간의 심성을 가리킨다.

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ㅇ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 '거기서'
(후)는 출애굽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방황했던 '광야'를 말한다. '나
를 시험하여 증험하고'의 헬라어 '에페이라산 엔 도키마시아'
에서 '에페이라신'은 '시험하였다'(tested, NIV)의 뜻이며 '도키마시아'
는 '입증하는'(proving)의 뜻으로 본 구절의 뜻은 '입증하기 위하여 시험하였다'(tes-
ted in proving)라는 뜻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을 그
대로 믿기보다는 객관적인 증거로 하나님의 '행사'(에르가)를 보고자 하였다.
ㅇ사십년 동안에 - 맛소라 사본과 70인역에서는 이 40년을 하나님의 진노의 40년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저자는 본절에서 70인역을 인용하면서도 이 40년을 하나님의 은
혜와 축복에 연결시켜 해석하고 있다(Lane, Schroger, Kistemaker). 이것은 저자가
진노의 40년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고 보호하
셨음을에 초첨을 맞추고 있음을 시사한다. 저자는 본절을 구약성경에서 인용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동안 하나님을 거역한 것과 예수께서 죽임을 배척하는 태도에 양
자의 유사성을 염두에 둔 듯하다(Morris, Hewitt).

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ㅇ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 '그러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오'(WWW)는
70인역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저자는 '디오'를 본 인용문에 삽입함으로 시
편을 인용한 본절의 내용을 보다 명백히 하고 있다. 한편 '이 세대'가 가리키는 '세
대'는 문맥상 광야 40년동안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체험했던 이스라엘 열조들을 가리
킨다(16절). 그래서 대부분의 영역본(KJV, RSV, NIV)과 공동번역은 '그 세대'(that
generation)라고 해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하여 광야 생활을 하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강퍅한 마음에 대해 격노하셨다. '노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
로소크디사'는 '증오' 혹은 '극도의 혐오'를 느끼는 감정을 의미하는
헬라적 용어로 하나님께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뢰하지 않음과 강퍅한 마음에 대
해 얼마나 강하게 분노하셨는가를 암시한다(Delitzsch).
ㅇ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 '미혹되어'의 헬
라어 '플라논타이'는 '방황하다', '속다', '잘못하다'라는 의미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잘못된 길을 걷고 있었음을 시사한
다. 그들은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무지(無知)에 의해서가 아
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잘못을 가르쳐주어 '하나님의 길'을 알게 해주었음에도 불구
하고 그들 스스로가 거부해 버렸음을 암시한다(Delitzsch, Moffatt).

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ㅇ내가 노하여 - '노하여'의 헬라어 '오르게'는 10절의 '노하여'
(프로스크디사)와는 다른 말이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죄를 싫어하시는 하나
님의 본성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진노를 의미한다(Morris).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계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부함으
로 범죄하였고 하나님은 그에 상응하는 진노와 심판을 행하셨다.
ㅇ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 이 인용
구는 민14:21-23, 28-30절의 말씀과 유사한 것으로 특히 민 14:30의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와 일치를 보이고 있다. 하
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심판하실 것을 맹세하셨다. 이러한 맹세와 심판은 그
들의 죄악에 대하여 정당하고도 적절한 보응이다(Lane). 한편 심판의 내용은 '안식'
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안식'(카타파우신)이란 창 2:2에서 처음
언급되었으며 그후 십계명 가운데 '안식일'의 규례가 제정되었다(출20:8). 출애굽 당
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안식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었다(신12:9). 그러나
신약시대에 이 안식은 영적인 의미의 안식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성취될 완성
된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는데 그곳은 악의 세력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의와 공평이
실현된 곳이다(행7:49;계14:13).

12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ㅇ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 '삼가'에 해당하는 헬라어 '블레페테'는 '조심
하라'는 의미로 '명령'임을 뜻한다.
ㅇ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 '너희 중에 누가'라는 표현으로 보아
저자는 성도들 중에 더러는 기독교 신앙을 저버리고 유대교로 들어갈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음을 암시한다(Hewitt). 그들은 유대교에서도 기독교에서 섬기는 같은
하나님을 섬기므로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이 배교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
었다(Morris). 저자는 그러한 자들에 대해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었다고 설명한
다. '믿지 아니하는'(아피스티아스)이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
닌 말로서 새로운 문단의 시작인 본절과 새 문단의 마지막 결론이 되는 19절에서 등장
하고 있다. 이 불신앙은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앙을 가리키는 것으로 민14:11과 연관
된다(신1:32;9:32;시106:24). 또한 '악심'역시 민 14장의 영향을 반영한 것으로 '이
악한 회중'이란 표현으로 두 번 나타난다(민14:27,35). 이와같은 민 14장에 대한 저
자의 암시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민 14장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믿음이
나 신뢰의 '부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한 '거부'를 뜻하기
때문이다(Lane). 따라서 본절의 '믿지 아니함'도 믿음에 대한 부족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며 그것은 참으로 '악한' 것임을 시사한다.
ㅇ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 저자는 본서에서 하나님에 대해
'살아계신'이란 수식어를 첨가하여 자주 사용하였다(9:14;10:31;12:22). 이 수식어는
죽어 있어서 인간의 부르짖음에 응답할 수 없는 이방신들과 대조를 보이기 위하여 흔
히 사용된 문구였다(시115:4-8;사44:9-20;렘10:1-16;합2:19). 한편 '떨어지다'의 헬
라어 '아포스테나이'는 '분리되다', '떠나다', '배신하다'라는 의미로
불신앙의 결과를 나타낸다. '믿는 형제들' 가운데 소수가 기독교를 버리고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려는 것은 하나님의 최종 계시인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것으로 옛날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것과 비교될 수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
과의 완전한 분리를 초래하는 행위이다(Bruce).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ㅇ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 '오늘'(세메론)이
란 표현은 시95:7의 인용이다. 이것은 저자가 성경을 근거로 수신자들을 권면하고 있
음을 나타낸다. 본절의 '오늘'은 과거의 '오늘' 즉 시편이 쓰여질 그 당시 상황에서
의 '오늘'이라기 보다는 성경과 사도들의 복음 전승을 통하여 날마다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는 '현재로서의 오늘'을 의미하는 것으로(Lane) 시간의 긴박성을 암시한다. 저자
는 배교의 위험성이 있었던 당시 유대인 공동체에게 한 순간이라도 놓치지 않는 긴박
감을 가지고 서로를 권면하여 경건한 삶을 이루어 가도록 권면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교제를 통하여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고 그로 인해 죄와 이단에 대해 방어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ㅇ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 '강퍅케 됨'의 헬라어
'스클레륀데'는 8절에 나오는 '스클레뤼노'의 제1부정 과
거 수동태로서 저자는 사람들을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게 하는 주체가 '죄'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 '죄'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의 약속을 좇아 행동하기를 거부하는 죄를
말한다(민14:19,34,LXX,Lane).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ㅇ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 이것은 본절 하반절의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기 위한 조건이다. 여기서 '시작할 때'란 예수 그
리스도를 처음 믿을 때를 의미한다(Morris). '확실한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스
타세오스'는 '본질' 혹은 '정수'를 뜻하는 것으로 본절에서는 '확신'을
뜻한다(confidence, KJV, RSV, NIV, JB).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앞절과 마찬가지로 구
약성경 민수기의 내용 즉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렀을
때에 새로운 지도자를 뽑아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떨어
져나가려고 했던 사건을 상기시킴으로(민14:3,4), 수신자들로 하여금 조상들의 그러한
전철(前轍)을 밟지 말고 그들이 처음 가졌던 믿음의 확신을 굳게 지키라고 권면한다
(Hofius, Lane).
ㅇ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
(메토코이 투 크리스투)에서 헬라어 '메토코이'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종말론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시45:7의 인용이며 영원한 하늘나
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동료'(companion)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ofius, Bru-
ce). (2)혹자는 '메토코이'가 파피리 문서(the papyri)에서 일반적으로 쓰여진 '동반
자'(partner)라는 의미라고 주장한다(Lane). (3)혹자는 '메토코이'가 그리스도 안에
서 '함께 나눈다'라는 의미라고 주장한다(to share in, NIV, RSV, Morris, Moffatt,
Hewitt).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그리스도와 함께 참
예한 자'란 그리스도를 믿어 낙심치 아니하며 그와 함께 하늘나라를 상속할 자를 의미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일을 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그리스도
인이 됨으로써 얻게 되는 특권을 강조하는 것이다.

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ㅇ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 본절은 시95:7,8의 인용이다. 본절과 전후절의 관련성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본절이 지금까지 진술해 온 것에 대한 요약으로 앞절인 14절
과 연결된다고 주장한다(Morris, Lane, NIV). (2)혹자는 본절이 새로운 문단의 시작
으로서 다음절과 연결된다고 주장한다(Hofius). (2)의 견해로 본다면 16절 첫머리에
있는 접속사 '가르'('왜냐하면')에 대한 해석이 애매하게 된다. 따라서 두
가지 견해 중 전자가 타당하다. 저자는 본절의 인용문을 통해 가데스의 옛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가 수신자들의 신앙생활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Lane,
7,8절).

16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ㅇ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 '격노케 하던'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피크라난'
은 '화나게 하다', 혹은 '반역하다'라는 의미로 15절에서는 '노하
심'(파라피크라스모스)으로 사용되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
성들이 가나안을 향하여 광야를 지나는 도중에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불평하여 하나님
을 여러 번 진노케 한 사실을 나타낸다(Lane).
ㅇ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 본문의 강조점은 모세에게 있는 것
이 아니라 출애굽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의 음성을 '모두'듣고 그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친히 목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움
에 봉착할 때마다 하나님께 불평하고 애굽을 그리워함으로 '모두'가 하나님을 격노케
하였다. 한편 '좇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통하여')는 모세가 이스
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이끌어내었다(lead out of Egypt, NIV) 는 의미라기
보다는 '모세를 통하여(디아 모위세오스)나왔다'는 의미이다. 이것
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원해서 애굽을 탈출하였음을 시사한다(Morris). 그러나
그들은 얼마 못가서 다시 애굽을 탈출한 것을 후회하였고 하나님을 원망하였다.

17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ㅇ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 본절에서 저자는 이스라엘 백
성의 광야 40년 생활을 하나님의 진노로 설명한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에서
연유된 하나님의 진노이다. 그로 인해 그들은 40년의 광야 방랑 생활 속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고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야 40
년의 진노하에서도 끊임없이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
혜를 베푸셨다.
ㅇ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
진 자'란 출애굽 당시 애굽에서 모세의 인도로 나온 자들로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
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킨다(민 14:29,30,32). 이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그를 대적하던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로서(Henry) 하나님의 현존과
약속을 불신앙하고 거부한 결과이다. 저자는 이런 질문과 답변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
이 출애굽을 통해 구원의 은총을 체험한 것과 같이 수신자인 유대인 공동체도 동일한
구원의 은총을 체험하였음을 상기시키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한 죄의 전철(前轍)을
밟지 말 것을 암시적으로 권면하고 있다.

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ㅇ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 본절은
민14:43의 반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던 이유가 그들의 불순종임
을 나타낸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도 않았고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시험
함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출 5:21; 14:11;15:24;16:2;17
:2,3;32:1;민11:1,4;12:1;14:2,22,23).
ㅇ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은 성경에서 자주
'믿지 않았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5:9;11:31;신30:20;롬1:5;6:17;
10:16;16:26;갈5:7). 이러한 불순종은 불신앙의 정점이며 하나님에 대한 노골적인 멸
시(민14:23)이며 반항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
하게 되는 결정적인 장애가 되었다(Lane).

19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ㅇ이로 보건대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 블레포멘'은 저자
가 지금까지 시편 95편에 대한 것을 해석한 결론임을 시사한다.
ㅇ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것이라 - 저자는 본절에서 이제까지 인
용하여 수신자들에게 제시한 이스라엘의 광야 40년 생활에 대한 결론을 맺고 있다.
이스라엘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불신앙'이다. '믿지 아니하므로'
(아피스티안)는 비록 시편 95:7-11에는 직접 언급되고 있지는 않으나 같은 내
용을 담고 있는 민14:11에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가데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
나님께 대항함으로 맞이하게 된 비참한 결과를 암시한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상기는 본서의 수신자들이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깊은 인상을 남겼
을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불신(不信)으로 말미암아 가데스에서의 조상들처럼 그들도
같은 파멸에 이를 수 있다는 경고가 되었을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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