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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데살로니가후서

[스크랩] 데살로니가후서 - 내용: 2. 교리적 교훈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2:03

데살로니가후서(2thessalon)


II. 교리적 교훈 (2:1-17)

1. 재림에 대한 자세(2:1-2)

1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하는 것은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주의 재림의 날에 있을 사건을 설명한 바울은, 이제 그 날과 관련된 세부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미 전서(1:10,4:13-5:11)을 통해 재림에 관한 일반적인 교훈을 받았지만, 바로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1절)라고 한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의 원문은
데살로니가전서 5:12과 똑같다.

바울이 요청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 (파루시아스,살전 4:15의 주석을 보라)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살전 4:13-17의 주석을 보라)에 관하여.. 이다. 일련의 사건인 위의 두 문제에 관하여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는 의견이 분분했으므로, 교인들이 동요하거나 두려워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바울은,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2절)고 하는 것이다.
부정적 접속사인 으로나( 와 Te의 합성어인 메테, )가 세번 반복되어 매우 강조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우리에게서( )에 대해 (1) 영과 말과 편지 모두를 수식하는 것이라  설,1) (2) 말과 편지를 수식하는 것이라는 설,2) (3) 편지만을 수식하는 것이라는 설3) 등이 있다. 어느 설을 취해도 상관 없지만, 문맥상 (3) 설이 보다 적합하다.
영으로는 디아 프뉴마토스로서, 예언의 은사에 있어서 성령의 작용을 언급하는 것이다.4) 여기서는 성령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거짓 예언자를 의미한다. 예언에 있어서 주의 할 점은 100퍼센트 객관적인 하나님의 계시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서 제재를 받나니"(고전 14:32)라고 경고하였고, 또한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 4:1)고 경계하였다.
말로는 디아 로구로서, 기록된 예수의 말씀(Moffatt)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교리(칼빈),잘못 이해된 사도들의 가르침(글로악), 교회 내의 생활에서 만들어진 교훈(김용옥,박윤선)등으로 이해해야 한다.
편지로나 디아 에프스톨레스로서, 데살로니가전서,5) 또는 어떤 잃어버린 바울의 서신(Lightfoot,Vincent)6)이 아니라, 누군가가 바울의 이름을 빙자하여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7)을 가리키는 것이다.

아뭏든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재림에 관한 엄청난 낭설을 듣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주의 날'8)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2절 하반)고 경계하는 것이다.
이르렀다는 에네스테켄으로서, '오고 있다'(is comming,<살전5:2>나 '가까우니라'(is near,<빌4:5>)가 아니라, '이미 왔다'는 뜻이다(프레임, "Morris,Bicknell"9)
그 낭설의 내용은 재림의 날이 가까운 장래에 올 것이 아니라 이미 도래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데살로니가전서를 통해 주의 날이 갑자기 임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던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는 매우 큰 충격을 주었다. 따라서 그들은 쉬(타케오스, 빨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였다.
동심하거나 (살류테나이 휘마스 아포 투 누스,)의 문자적 의미는 '너희의 마음(이성)에 요동하거나'이다. 즉 그들은 격동하는 풍랑처럼 마음(이성)이 흔들렸다.
두려워하거나는 트로에스타이이며, '소요,() 에서 온 말로서 당황한 상태를 가리킨다(마24:6,막13:7).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에게 아직 재림의 날이 이른 것이 아니니 흔들리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바울은 주의 재림과 우리가 그 앞에 모이는 것에 관하여, 혹 성령의 계시를 받은 예언으로나, 잘못 이해된 사도들의 가르침(교리)으로나, 바울의 이름을 도용한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미 왔다고 하는 낭설에 현혹되어 마음이 흔들리고 당황해 하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사실이 아니니 동요하지 말라고 경계한다.

2. 재림의 징조(2:3-4).

3누가 아무렇게나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4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앞(1-2절)에서 주께서 이미 재림하셨다고 하는 낭설 때문에 동요하지 말라고 한 바울으나, 이제 독자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재림 전에 있을 사건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3절).
그 요지는 전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주께서 이미 재림하셨다고 하는 주장에 속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적인 일에 속는 것은 정신적인 피해와 물질적인 손해를 보는 것에 불과하지만, 영적인 일에 속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는 지식과 물질을 추구하는 그 이상의 열정을 가지고 영적 지식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여기에 말씀을 위탁받은 목회자의 중요성이 있다.
주의 재림보다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의 배됴하는 일은 헤 아포스타시아로서, 신약에서는
사도행전 21:21에 한 번 더 나타난다. 이 점에 대해 독자들은 이미 바울에게서 직접 들어 잘 알고 있었다(5절,살전 5:1).
그 말은 원래 정치 또는 군사적인 배반을 뜻하였다. 유대교에서는 이교로 전락하는 것을 가리켰다(수22:22,대하29:19<70인역>,행21:21).프레임은 [후에는 무서운 종말의 표적 중 하나로서(cf.Eth.En.91:7) 묵시적 전승에 고정된 요소가 되었다(cf.Jub.23:14-,4 Ezra 5:1-,ak24:10-)라고 설명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그러나 아마도 바울은 모세에 대한 유대인의 배반,또는 마음 속에 있는 율법에 대한 이방인의 배반, 또는 주께 대한 기독교인의 배반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왜냐하면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2:13-,살전 5:9)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고전 3:15>이 구원받게 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전체적으로 비기독교인의 배반과 지금 악령인 공중의 권세잡은 자의 지배를 받고 있는 불순종의 아들들(엡2;2)의 배반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1)
반면에 많은 학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교회(신자)의 반역으로 이해하고 있다. 2) 본절의 말씀만 가지고는 명백한 것을 알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본절의 말씀이 주께서 재림하시시 직전에 있을 종말적인 대배교를 지시하는 것이므로, 하나님께 대한 교회 안팎의 대반역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불법의 사람(호 안토로포스 테스 아노미아스,)3)을 '배도하는 일'과 동일시하는 설(Chrysostom,Theophylact,Augustine)4) 과 구별하는 설5)이 있는데 둘 사이에 카이가 있는 것을 보아 구별해야 할 것이다.
[본절의 역사적 배경으로 볼 수도 있는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의 예루살렘 침범 (주전 167)을 고찰해 보면, 그는 우선적으로 유대인들의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렇다고 하면 유대인들의 배교는 여기 '배도하는 일'의 그림자로,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는 '불법의 사람'의 그림자로 보아도 상관 없을 것이다
](이상근)

멸망의 아들 (호 휘오스 테스 아포레이아스,)과 동격인 불법의 사람(또는 악한자)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오는 것이므로(9절) 사단과 동일시 할 수 없다.또한 [요한계시록 13장과 17장의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도 동일시 할 수 없다.. 그는 추상적인 능력이나 집합적인 개념이 아니라 분명히 종말적 인격 존재이다](헨드릭슨).
[다니엘서 7:25과 8:25 그리고 11:36등이 배경이 되고 있는 불법의 사람은 일반적으로 요한서신에 나오는 적그리스도와 동일시 되고 있다(요일 2:18224:3, 요이7)](에어하트).
그는 교황 또는 카톨릭 교회 전체, 재생하여 초자연적 존재로서, 이 세상에 온 네로, 카이저 뵐헬름(Kaiser Wilhelm), 뭇소리니(Mussolini),히틀러(Hitler) 그리고 스탈린(Stalin) 등으로 이해되어 왔다.6)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불법의 사람이 종말의 날에 임박하여 출현하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를 이미 지나간 역사적인 인물과 동일시 하는 견해들은 타당성이 없다. 사실상 바울이 불법자를 어떤 한 개인으로 보았겠는가 하는 것도 충분히 토론의 여지가 있는 문제다. 신약성서 시대 이래 지금까지 이 불법자에 관해서 많은 해석과 주장이 있었으나 모두 신빙성이 없는 것들이었다.이제 보다 타당성 있게 보이는 것은 바울은 종말이 가까울 때 배교하는 현상과 함께 불법자(혹은 악의 사람,(man of sin) 가 여기 저기에 출현하여 혼잡을 이룰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불법자를 어느 한 개인으로 규정하지 않는다면, 이 문제는 그다지 풀기 어려운 문제는 아닐 것이다](김용옥).
아뭏든 한 가지 명백한 것은 불법자의 운명은 멸망이라는 점이다.

멸망은 아폴레이아로서, 영생의 상실, 영원한 파멸, 영원한 형벌을 뜻한다(마7:13,롬9:23,빌1:28,벧후 2:1).
바울은 불법자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로,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4절)고 설명한다.
대적하는 자(호 안티케이메노스)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 계획, 그리고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순수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반대하거나 대항한다.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7)의 전자는 판타 및 정관사가 없는 테온이 나온 것을 보면, 여기서는 기독교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이방의 거짓 신들도 포함하는 것이다. 후자는 이곳과 사도해전 17:23에만 보이는데, 숭배를 받는 모든 피조물을 지시하는 것이다.
대적하는 자는 자신을 그들 (위에 언급한 양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휘페라이로메노스 에피,), 즉 대항하여 높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주장한다. 이는 [자기 중심자이다. 자기 숭배론자이다. 자기,자기,자기를 존중하며, 자기를 확장하고,자기를 오로지(完全)한다. 그의 전 노력은 하나로 자기에 주집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가치의 변경'을 주창한다. 하나님, 사랑, 의,그런 것은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것은 자기인 것이다. 자기를 버리고 타에 쓰임 같은 것은, 이는 노예 도덕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얼핏 보기에, 실로 용감하고 철저한 인생관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상대하여 볼 때, 이것은 죄의 절정, 그 극치이다
](내촌감삼).

성전은 나온으로서, 성전이 아니라 성소이다. 이교의 신전에 있어서 성소는 신들의 조각상을 보존한 곳이었다. 유대인 성전에 있어서 그것은 지성소라는 건물이었다. 히에론은 그 모든 건물과 뜰을 다 망라한 전체 성전을 말한다(렌스키,헨드릭슨).
이것을 가리켜(1)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하는 설.8) (2) 불경스러운 예배를 위한 사원 건물이라고 하는 설("Morris",9)(에어하트),(3) 교회(고후 6:16,엡2:21,고전 3:1617,계 3:12)라고 하는 설10) 등이 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의 한 부분이라는 점과 재림 직전에 있을 적그리스도의 참람된 행동을 가리킨 것이라는 점을 보아 (3) 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참조 마24:15-51).
지금까지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바울은 주께서 이미 재림하셨다고 하는 낭설 때문에 동요하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러한 주장에 속지 말라고 하면서 재림 전에 있을 징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재림 전에 먼저 교회 안팎의 대반역이 있을 것이다. 또한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 하나님 및 거짓 신들 그리고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는 모든 피조물들에 대항하여 자신을 높여 교회에 앉아 신이라고 자처할 것이다.

3. 먹는 자의 역사(2:5-8)

5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6저로 하여금 저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하여 막는 것을 지금도 너희가 아나니 7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중에서 옮길 때가지 활동하리라 8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재림 전에 있을 징조, 즉 배도와 불법자의 출현에 대해 가르친 바울은, 자신이 불법자와 그를 막는 자에 관하여 데살로니가에서 직접 여러 번 말했던 사실을 또다시 언급하고 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5절).

이 질문 속에 안타까와 견딜 수 없어 하는 바울의 목회자적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바울이 말한 것(엘레곤;미완료 과거형), 즉 여러 번 말한 것을 제대로만 기억하였던들 그러한 거짓 교리에 속지 않았을 것이다. 마가는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하며 맹세한 직후에 곧 회개하게 된 동기에 대해,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14:72)라고 기록하고 있다.
말씀을 몰라서 사단의 궤게에 속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미 들어 알고 있는 말씀을 필요한 때에 기억하지 못하여 속는 것은 큰 문제이다. 이런 경우는 대개 알고 있는 말슴에 대한 무관심 또는 자신의 뜻에 대한 집착으로 비롯되는 것이다.
본절에서 언급된 것은 6절 초두(원문)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지금도 너희가 아나니(6절 하반)에서 나타난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저로 하여금 저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6절 상반)이다.
막는 것은 중성 관사를 가진 분사인 토 카테콘이며, 7절에 남성 명사인 호 카테콘(막는 것)으로 다시 나타난다. 전자는 활동을 후자는 활동의 주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문제는 당시의 독자들이 잘 알고 있던 막는 것(막는 자)이 무엇 또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함이다. 이 점에 대해 (1)로마 제국(로마황제)이라는 설,1) (2) 네로 황제라는 설(wETSTEIN),2) (3) 클라디우스 황제라는 설(Whitby), 3) (4) 로마의 법률이라는 설,4) (5) 사단(Schaefer,Needham) 5) 또는 어떤 악마적 힘(칼브린) 6) 이라는 설, (6) 유대 국가라는 설(워필드),7) (7) 이방 세계의 정부라는 설(하바드), (8) 복음이라는 설(칼빈), (9) 교회라는 설(Stanton), 8) (10) 천상적 존재인 엘리야라는 설(Gunkel),9) (11) 마지막 때가 오기 전에 행해진 이방인에 대한 복음 선교와 그 역할을 담당했던 바울 자신이라는 설(쿨만,풍그),10) (12) 성령이라는 설, 11) (13)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역사(경륜)라는 설12)등이 있다.
저로 하여금 저의 '때' (카이로,-
살전 5:1의 주석을 보라)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즉 미래에 나타날 인격이라는 점과 아직 불법자(대적하는 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이미 과거사가 된 로마 제국 (로마황제)이나 로마의 법률이라 할 수 없고, 복음이나 교회와 같은 추상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사단 또는 악마적 힘이라고 하는 견해는 불법자가 사단의 사후인 (2:9)이라는 점을 보아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와 관련하여 세상의 국가나 정부라는 견해도 때로는 그들이 사단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을 보아 받아들이기 어렵다.
"지금 막는 자"(호 카테콘 아르티 <7절 중반>)가 '지금(아르티)'이라는 부사와 현재 분사형 명사로 되어 있으므로 바울 당시에 역사하고 있던 사실을 뜻한다는 점과 '지금(아르티)'이란 바울에게 있어서 멀지 않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표시하는 말이기도 하였다(프레임)는 점, 그리고 사단의 하수인인 불법자(대적하는 자, 적 그리스도)의 출현을 저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점 등을 미루어 보아, 하나님 또는 성령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중에서 옮길 때까지"(7절 하반)라는 말씀을 보아, 하나님보다는 성령을 취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6절의 내용을 보충하여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7절)고 설명한다.
비밀은 뮈스테리온으로서, 70인 역에는 오직 다니엘서 (2:18,19,27,28,30)에만 나타나서 왕의 비밀 (끔)을 가리키지만, 외경이나 고전 헬라어에서는 흔히 사용되었으며 비밀을 표시하고 있다. 신약의 용법도 비밀(마13:11,골1:2627,롬11:25),숨은 뜻(계1:2017:7), 만민 특히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엡1:93:349),복음(엡6:19)등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신비 종교에서는 신자에게 전수해 주는 비밀의 교리를 뜻하였다 (Lightfoot)](골1:26의 주석).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란 막는 자 곧 성령께서 저지함으로 불법자가 나타나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그의 불법은 이미 은밀히 활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활동은 교회에 대한 불신자들의 핍박으로 나타나고 있다(1:4). 이 기간은 불법자의 출현을 저지하시는 성령께서 옮길 때까지이며 성령께서 옮기시자마자 불법자가 나타날 것이며(2:3,8), 그때 불법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인간 세계는 최악의 상태가 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사단 또는 그 하수인의 출현과 활동 역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의 일부로서, 하나님의 지배권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드디어 불법자가 출현함과 동시에 주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멸망할 것을 말한다.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8절).
불법한 자(호 아노모스,는 히브리식으로 표현하면, 3절의"불법의 사람"(호 안트로포스 테스 아노미아스,)이다.
맹렬하게 활동하는 불법자의 운명에 대해 바울은 '주 예수께서'13)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8절 중반)라고 말한다.
그 입의 기운으로는 프뉴마티 투 스토마토스 아위투로서, 그의 입의 바람으로, 그의 입김으로, 또는 그 입의 성령으로 등을 뜻한다. 신약에서는 이곳에만 나타나는데, 이사야 11:4의 "....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를 반영한 것이다(비교:욥4:89,계2:16). 여기서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렌스키)이라기보다는 그의 입김으로 보아, 주 예수의 놀라운 권능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또한 바울은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8절하반)고 한다.

강림하여 나타나심(테 에파파네이아 테스 파루시아스, - 살전 1:10의 주석을 보라)은 재림을 표시하는 두 말이 중첩되어 강조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즉 초림 때와는 달리, 재림주의 비길 데 없는 찬란한 영광과 권능을 표시하는 것이다.
폐하시리라는 카타르게세이로서, 완전히 페하여 무용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이 낱말도 바울의 용어로 신약의 27회 중 바울이 25회 사용하였다(이상근).
지금까지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바울은 전에 독자들과 함께 있었을 때에 여러 번 말했던 것을 또다시 언급하고 있다.
그 내용은 성령께서 불법자(대적자)로 하여금 그의 때에 나타나도록 저지하신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불법자가 나타나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불법은 이미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 활동 기간은 불법자의 출현을 저지하시는 성령께서 옮기실 때까지이다.
성령께서 옮기시자마자 불법자가 나타나 본격적으로 활동할 것이고, 그로인해 세게는 최악의 상태가 될 것이다.
그때에 주 예수께서 비길 데 없는 영광과 권능으로 재림하셔서, 자신의 입김으로 불법자를 죽여 없애실 것이다.

4. 멸망하는 자(2:9-12).

가, 악한 자의 임함

9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하을 얻지 못함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불법자를 멸하신다고 한 바울은, 이제 그 불법자 곧 악한 자에 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약한 자의 임함은 '사단'(
살전 2:18의 주석을 보라)의 '역사'(에네르게이안 - 살전 2:13의 주석을 보라)를 따라, 즉 사단의 역사를 다하기 위하여 사단의 역사를 다하기 위하여 사단의 보냄을 받아 세상에 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사단의 힘을 빌어 모든 '능력'(살전 1:5의 주석을 보라)과 표적과 거짓 기적을 행한 것이다(마24:24,비교:계3:14). 이 셋은 그리스도의 활동과 대등한 것 같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사단의 역사를 따른 악한 자의 모든 것을 다 거짓 정신으로 행해진다는 데 있다. 많은 학자들은 모든(파세,)과 거짓으로 (프슈두스,)을 위의 셋을 다 수식하는 것으로 보아, "모든 거짓 능력과 거짓 표적과 거짓 기적"으로 해석하고 있다.1)
표적들(세메이오이스,)과 기적들(테라신,)은 성서에서 흔히 같이 나타나는 말이며(출7:39,신4:43,사8:18,단6:27,마24:4,요4:48,행2:194:305:12,롬15:18,고후12:12),거의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으로 발생하는 초지각적인 현상을 의미한다.
표적과 기적의 차이점은 전자가 인간계에 나타나는 이적임에 비해, 후자는 주로 자연계에 보여지는 이적이다. 전자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 이상의 진리의 상징 등 영적 면에 치중하는 반면, 후자는 인간의 주목을 끄는 외적 면에 치중한다. 위의 세가지는 사도행전 2:22에도 같이 나타나며,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표시하는 낱말들이다. 그러나 여기 사단도 같은 역사를, 그의 대리자를 통해 행사하는 것을 밝히고 있다. 단지 차이점은 하나님의 역사가 참인데 대해, 사단의 역사는 거짓인 것이다(이상근).
악한 자 곧 불법자의 악행은 온갖 거짓된 능력과 표적과 기적 등을 행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해 바울은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10절)라고 설명한다.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의 불의의(아디키아스,)가 주어 속격(또는 출처의 탈격)이므로, 이 표현은 불의로부터 나온 것이거나 불의가 행한 모든 속임으로를 의미하는 것이다.2)
앞서 언급된 "모든 거짓 능력과 표적과 기사"가 불법자(적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면을 보인데 대해, 이는 그의 주관적면을 가리키는 것이다(프레임).
결국 불법자의 모든 외적 행위들은 그의 불의에서 비롯된 속임수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 예수께서도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24:24)고 경계하셨다.
불법자의 근원은 사단이고 그 속임수의 대상은 멸망하는 자들이다. 불법자는 주 예수로 말미암은 구원을 얻지 못한 자들, 즉[벌써 멸망 도상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멸망에 합당한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다](어드맨). 불법자는 유혹에 넘어갈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 즉 주를 믿지 않고 부정과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미혹하는 것이다.

그 이유를 가리켜, 바울은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10절 하반)라고 설명한다.
신약에서 이곳에만 사용된 진리의 사랑(텐 아가펜 테스 알레테이아스,)에 대해, (1)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 또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사랑, 즉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설,3) (2) 진리에 그리스도요(요14:6,고후11:10), 복음이므로(갈2:5,골1:5), 그리스도 또는 복음의 사랑이라는 설(이상근), (3) 사랑은 진리를 강조하는 것이라는 설(궁촌무천), (4) 복음이라는 설(렌스키)등이 있다.
성서에서 진리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의미하므로 복음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결국 바울에 의하면, 멸망하는 자들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불법자의 속임수에 넘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이전에 살았던 인간들과 예수를 전해 듣지 못한 인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갈 3:6-9의 주석을 보라).

나,하나님의 심판

11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것을 믿게 하심으로 12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은 멸망할 자들이 구원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에 대해,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11절)이라고 말한다. 즉 그들이 복음을 받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거짓 것을 믿게 하실 목적으로 '기만하는 효과적 힘'(에네르게이안 플라네스,)을 보내신다는 것이다. 불법자가 멸망하는 자들을 기만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심원한 섭리에 의한 것이지, 그 자신의 지혜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한 마디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나 능력을 부여받았음(선재은혜)에도 불구하고, 받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이한 심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실 때, 완강하게 저항하는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하신 일(출4:217:39:1210:1)과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방치하신 일(사6:10)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바울은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1:28)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방치하시는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인 것이다. 이러한 심판은 동시에 인간들로 하여금 더 큰 죄악들을 행하도록 방치함으로써, 스스로 일말의 여지가 없는 죄인임을 자각케 하고 그로 인해 구주를 찾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가 내포된 것이기도 하다.
바울은 다시금 강조하여,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12절)고 단정짓는다.
모든 자가 판테스(B,D,E,K,L,P 사본 등)로 읽혀지든지 혹은 하판테스(N, A,G,F 사본 등)로 읽혀지든지 해석상으로는 중요하지 않다.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자들이(10절) 그 진리를 믿을 리 없고, 불법자의 불의에서 비롯된 속임을 따른 자들이 의를 좋아할 리가 없으며, 오히려 불의를 더욱 좋아하게 된다. 불의의 속임을 따랐다는 그 자체가 이미 불의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증인이기도 하다. 결국 그 모든 자는 악한자(불법자)가 멸망당하듯, 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바울은 악한 자 곧 불법자란 사단의 역사를 다하기 위하여 사단의 보냄을 받아 세상에 온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사단의 힘을 빌어 모든 거짓 능력과 표적과 기적을 행함으로써, 멸망하는 자드를 불의에서 비롯된 모든 속임수로 미혹한다.그 까닭은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복음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거짓 것을 믿게 하실 목적으로, 가만하는 효과적 힘을 보내시는 것이다. 즉 악한 자가 멸망하는 자들을 기만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심원한 하나님이 섭리에 의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특이한 심판이다. 결국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여 불의의 속임에 미혹되어 더욱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5. 구원받을 자에 대한 당부(2:13-15)

가,형제들로 인한 감사

13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14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재림의 날이 이르기 전에 있을 불법자의 출현과 그의 활동및 그의 속임수에 걸린 멸망하는 자들과 함께 악한 자(불법자) 가 당면하게 될 무서운 종말적 심판에 관한 것을 집중적으로 설명한 바울은(2:1-12), 이제 자신의 관심을 바꾸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구원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는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13절)라고 한다. 원문 초두에 나오는 데(그러나,그런데)는 그 이하의 내용의 앞의 내용(2:1-12)과 대조되는 것임을 강조해 주고 있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는 데살로니가전서 1:4의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와 "하나님"이 주로 바뀐 것 외에는 똑같다(살전1:4의 주석을 보라).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1:3의 주석을 보라)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란 독선적인 선민 의식을 가진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선언이다.
처음부터 1)는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한 처음부터2)가 아니라, 창세 전부터3)을 의미하는 것이다(엡 1:43:9-11,요1:1). 즉[바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택하심 그들의 역사적 소명을 가지고 주장하는 것이다](토마스, P.324).
바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택하시는 목적을 가리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살전 4:3-8과 5:23의 주석을 보라)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13절 하반)라고 설명한다.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란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신다는 뜻이다. 특히 여기서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궁극적으로 완성될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창세 전의 선택이 역사 속에서 구체화되고 있는 사실에 대해,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4절)라고 설명한다. 즉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인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 복음"(살전 1:5의 주석을 보라)곧 바울 일행의 복음 선교를 통하여 그들을 부르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 또는 창세 전의 선택은 복음 증거자들을 통하여 구체화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부르심의 궁극적인 목적은, 재림의 날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인 것이다(1:10,12의 주석을 보라).

나. 형제들에 대한 당부

15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이러르모는 아라 운으로서, 상당히 강한 표현이다. 바울이 곧 어떤 권고를 하려고 할 때, 그것을 위한 이유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는 말이다.
바울은 구원의 길로 부르심을 받은 데살로니가가 굥니들에게 굳게서서(스테케네,살전 3:8의 주석을 보라)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고 한다. 즉 바울이 직접 가르친 말이나 그의 데살로니가전서로 가르친 유전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다.
유전은 파라도세이스로서, 교리, 관습, 계율등의 전승을 뜻한다. 즉 전해 내려온 권위 있는 교훈을 의미하는 것이다(골2:8의 주석 참고).

바울 당시에 벌써 교회에서는 전승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승은 교회의 불가결의 요소이다. 그러나 전승주의에 빠지면 신약 당시의 유대교나 후대의 카톨릭의 과오를 번하게 된다. 반면에 전승을 무시하면 자유주의의 방종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이상근). 전승이란 성서의 본질적인 뜻에 입각할 경우에만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지키라는 크라테이테로서, 본절과 골로새서 2:19, 그리고 마가복음 7:38에만 나타난다. 여기서는 마가복음 7:38의 경우처럼 전승 또는 교훈을 준수하라는 뜻이다.
지금까지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바울은 독자들의 구원에 대해 항상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 이유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복음을 믿음으로 완전한 구원을 얻게 하실 목적으로, 창세 전부터 그들을 택하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창세 전의 선택이 역사 속에서 구체화 되고 있는 사실에 대해, 자기 일행의 복음 선교를 통해 독자들을 부르셔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신다고 설명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독자들에게 굳게 서서 말 또는 데살로니가전서로 가르침을 받은 교리를 준수하라고 권한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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