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로마서

[스크랩] 로마서 (15 : 1~33)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0:43
로마서 15장


1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

ㅇ우리 강한 자가 - '강한 자'의 헬라어 '호이 뒤나토이'는
보통 '능력있는 자', '~을 할 수 있는 자', '힘 있는 자'를 뜻하나 여기서는 '영적으
로 강한 사람'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 논쟁에서 자신을 강한 자의 편에 넣어 말하고
있다.
ㅇ마땅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페일로멘'은 '하여야 할
것이다'(should)라는 권고의 의미보다는 '해야만 한다'(must), '의무가 있다'(ought)
라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즉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은 권고나 권
면으로써 수행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무적으로 수행되어야 함을 나타낸다.
ㅇ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 '약점'(타 아스데네
마타)은 '연약함'의 의미로 쓰이며 '담당'(바스타제인)은 갈 6:2
에 나오는 '너희가 짐을 서로 지다(bear)'와 같이 '짐 따위를 지다'라는 상징적인 의
미로 사용된다. 이와 같이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여러가지 약점들을 짊어져야 한다. 그
러나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할 때 사랑 안에서 행해야만 한다. 사랑은 그
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열쇠이다(E. F. Harrison).
ㅇ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 믿음이 강한 자가 연약한 자에 대해서 그들
자신의 입장만을 고수하려고 한다면 연약한 자는 시험에 빠져 낙심하게 될 것이다. 또
한 강한 자가 자기 이익을 위해 힘쓰며 약한 자 앞에서 그들의 강함을 뽑낸다면 약한
자는 믿음에서 돌아서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가 모든 성도들의 기쁨을 위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않은 것처럼(고전 10:33) 강한 자도 연약한 자에 대해서 그
렇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2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ㅇ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 이 말씀은 단순히 남의 기분을 맞추라는 의
미가 아니다. 또한 남이 원하는 바를 맹목적으로 좇는 일을 요구하고 있는 것도 아니
다(Hodge). 이는 타인의 영적 각성에 유익이 되는 일이라면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그
필요를 채워주라는 의미이다. 성도에 대한 이러한 요구는 가능한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모든 유익을 구하지 않고 그들에게 기쁨을 주었던 바울
의 삶이기도 하였다(고전 9:19-23).
ㅇ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 타인의 영적 유익을 위하여 이루어야 할 목
표는 '선'(善)을 이루고 '덕'(德)을 세우는 일이다. '선을 이루고'의 헬라어 '에이스
토 아가돈'은 내적 가치, 특히 도덕적 목적을 나타내는
말로서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남을 생각하는 행위'를 말한다(Murray). 즉 성도들이
약한 형제들의 약점을 자신의 것으로 짊어지면서 살아야 할 원칙을 말씀한 것이다. 또
한 '덕을 세우도록'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스 오이코도멘'                   
은 '집을 세우다'라는 의미를 가지며 여기서는 성도들로 하여금 지혜와 사랑,
은혜와 거룩에 이르도록 믿음의 성장을 촉진케 하는 행동을 가리킨다. 전자가 내적 목
적이나 가치를 지향하는 반면 후자는 외적 목적을 지향한다(Bengel). 결국 이것은 사
람들의 인기나 기분을 맞추기 위하여 사람들을 기쁘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적 유
익을 위하라는 의미이다(Robertson).

3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ㅇ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 헬라어 원문에는 접속사 '왜냐하
면'(가르)을 사용하여 앞절의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여야 할'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성도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하나
님을 기쁘게 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친히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
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직면한 모든 문제를 경험하셨다.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혹은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살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
하며 모든 사람의 기쁨을 위하여 살 것이냐의 갈림길에서 그는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
시는 일을 행하셨다(요 8:29). 그는 비록 많은 사람의 반대를 불러 일으켜 자신에게
죽음이 초래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요 2:17)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결코 중단하지 않고 그분의 뜻을 순종하셨다.
ㅇ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  이것은
시 69:9의 인용이다. 시 69편은 고난의 시로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리스도를 박해한
자들을 보응할 것에 대한 예언이다(F.F. Bruce). 이 인용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
께서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순종의 결과로 비난과 모욕을 받아 죽음을 당하시리라는
것이다. 이렇듯 바울은 시 69:9을 인용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겠다는 뜨거운 마음을 품고 그것을 실행하다 보면 사람들의 비난과 반대에 부딪혀
오해와 중상을 받게 되지만 이 때에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끝까지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자 하였다.

4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ㅇ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가리키나 구체적으로 바울이 앞절에서
인용한 시 69:9의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구
약성경을 인용하고 있는 현상 자체는 당시 교회가 구약성경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해석
하고 있음을 뚜렷이 반영해 준다(E.F. Harrison). 바울이 앞절에서 시편에 나타난 기
록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키고 여기서 다시 성도들에게 적용시킨 것은 시편뿐만 아니
라 구약성경에 기록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성경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장래의
모든 성도들을 교훈하기 위해 기록되었다(딤후 3:16).
ㅇ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 성경을 상징
하는 진정한 목적은 영생에 대한 위대한 소망을 갖는데 있다(요 5:39). 본문은 영생에
대한 소망을 위해서 '인내'와 '성경의 안위(安慰)'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소망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 것은 인내가 영과으런 영생으로 가는 과정에서 반
드시 있어야 할 요소라면, 성경의 안위는 그러한 소망을 얻을 수 있도록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E.F. Harrison). 소망을 견지하는 방법으로서 전자(前者)가 주관적이면 후자
(後者)는 객관적이다(Lenski). '인내'의 헬라어 '휘포모네'는 고난
당하는 자가 수동적인 자세로 체념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혹독한 시련과 고난 속에서
도 용맹스런 군인처럼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목적과 신앙에 대한 충성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Findlay). 이러한 자세는 약한 자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는 자들에게 필요하
다(Lenski). 약한 자들은 한 두 번 도움을 받는 것으로 바로 서지 못하므로 인내를 가
지고 그들을 돌보아 주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안위'의 헬라어 '파라클레시스' 
는 보통 '권고', '위로'를 뜻한다. 바울 서신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
께서 현재와 미래에 당신을 믿는 성도들에게 구원을 보장해 주시고 확신케 해주심을
의미한다. 특히 본절에서는 안위가 성경을 통하여 온다는 사실과 이 안위는 우리가 믿
음으로 소유한 영생을 소망하는데 힘을 주고 확신을 갖게 해줌을 강조하고 있다.

5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ㅇ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 인내와 안위는 성경을 통하여 오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이다(E.F. Harrison). 이 같은 인내와  안위는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하고 또한 현재에는 형제간에 사랑과 협조를 갖게 한다.
ㅇ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크리스톤 예순'
은 직역하면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이다. 즉
'그리스도 예수의 특성과 모범을 본받아'(엡 5:24;골 2:8)라는 뜻이다(Robertson). 예
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표준이며 모본이 되신
다.
ㅇ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 본절은 희구법으로 미래의 소원을 나타내는 관용어적
표현이다(Robertson).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을 함으로써
서로 일치된 정신을 가질 뿐만 아니라 다같이 모든 일에 같은 확신과 생각을 갖게 되
기를 기도하고 있다.

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ㅇ한 마음과 한 입으로 - '한 마음'의 헬라어 '호모뒤마돈'은
'같은 심정을 가진', '만장 일치로' 등의 의미이며 바울은 본절에서만 이 단어를 사용
하고 있다. '한 입으로'(엔 헤니 스토마티)는 '하나의
일치된 고백'을 뜻한다(E.F. Harrison). 이것은 일치된 신앙에 대한 생생한 표현으로
서 모든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 항상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
을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ㅇ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 여기서 바울이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호칭한 것은 하나님(호 데오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설명한 것으로 당시 초대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한  표
현이었다(고후 1:3;11:31;엡 1:3;벧전 1:3). 당시 사도들과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을
구원론적 방법으로 그리스도와 연결시켜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
진 우리의 구원 전부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즉 우리의 구속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독립적으로 혼자서 구원을 이루신 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
님의 아들로서 성부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구원의 예정 가운데서 성육신하여 이 세
상에 오셔서 구원을 이루신 분임을 의미한다(엡 1:3;골 1:26, 27). 이러한 복음의 내
용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론적 칭호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의 중심이 되며 기
독교 신앙의 특징을 함축하고 있다(Lenski).
ㅇ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 '영광'의 헬라어 '돝사제테'는 현
재 능동태 가정법으로 '너희가 계속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는 뜻이다
(Robertson). 성도들 개개인의 삶의 목적이나 교회 일치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의 연합의 중요성과 또
한 그것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J. Calvin). 실로 성도들이 서로 마음
과 뜻이 일치되지 못하고 불화와 갈등 속에서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면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다. 성도들이 '한 마음과 한 입으로' 일치되지 않고
서는 하나님께 참된 영광을 돌릴 수 없다.

7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ㅇ이러므로 - 바울은 접속사 '그러므로'(디오)를 사용하여 14:1 이하에서 계
속 되어온 문제 즉, 믿음이 강한 자와 연약한 자에 대한 내용을 총결론 내리면서 그가
서술하였던 바를 함축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ㅇ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 바울은 이제 구체적으
로 그리스도를 본보기로 들어 6절에서와 같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이 성도들의 삶
속에서 가장 큰 목적임을 다시 한번 일깨우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
아'란 말이 헬라어 성경에 '카도스 카이 호 크리스토스 프로셀라베토 휘마스'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그리스도께서도' 또는 '심지어 그리스도께서도'라고 강조점을 두어
해석함이 옳다. 즉 거룩하신 주님께서도 죄인인 우리를 받아주셔서 우리가 죄를 용서
받고 구원의 자리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런 우리가 어찌 다른 형제를 용납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강력한 권면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는 표준
과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E.F. Harrison). 즉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받으셨는데 하물
며 우리가 그 연합을 파괴하는 행위를 할 수 있느냐는 호소로, 서로가 용납하여 일치
와 조화를 이루어야 할 필연성을 말하는 것이다(John Murray).
ㅇ너희도 서로 받으라 - '받으라'의 헬라어는 '프로슬람바네스데'              
로 '영접하다', '환영하다'의 뜻을 가진 명령적 권고이다. 본절은 14:1
의 내용을 되풀이한 것으로서 14:1에서 사용된 동사와 여기서 사용된 동사 '프로슬람
바네스데'가 동일하지만, 여기서는 그 명령이 강한 자에게만 돌려지기 보다는 오히려
강한 자와 약한 자 양쪽 모두에게 돌려지고 있다(Jonh Murray). 따라서 '너희'는 성도
전체를 가리킨다.

8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ㅇ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 그리스도께
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차별하시지 않고 모두 받아주신 이유와 목적을 구체적으로 설
명하고 있다. 본래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당하는 것으로서(갈 2:7-9) 하나님께
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표이며 인(seal)으로 받게 한 것이다. 이처럼 이방인과 구
별되어 선택받은 선민의 상징으로 실시되어온 할례는 유대인의 약속과 특권의 표이다
(John Murray).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할례의 수종자'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할례받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태어나셨고 또 친
히 할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계약인 할례의 법에까지 순종하셨을 뿐 아니라 언약을
맺은 계약 백성 중의 하나가 되셔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수종자' 곧
'봉사자'가 되셨다는 뜻이다. 특히 '수종자'(디아코논)란 말이  가
리키는 의미는 '종' 또는 '섬기는 자'란 뜻이다(막 10:45;눅 22:27). 그리스도는 종으
로서 낮게 되시기까지 하여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그 언약(창
12:1-3;17:1-8)을 친히 수행하신 것이다. 이러한 사역은 당시 유대인에게 국한된 것으
로 보일지 모르나 분명 그것은 전인류를 위한 구속의 사역이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을 위하여 종으로 보내진 것은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었다(9:4, 5)고 지적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할례의 수종자'가 되신 이
유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메시야를 약속하신대로 그리스도께서 오
셔서 그 언약을 성취하심으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입증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하나
님을 향한 인간의 배반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그 신실하신 속성 때문에 그리
스도께서 종으로 오셔서 구원을 이루셨다(John Murray).
ㅇ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하시고 -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
실하심을 입증하기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신 효과 및 목적을 나타내준다. 하나님
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즉 아브라함에게 한 자손을 허락하셔서 그 자손 가운데
서 메시야가 나오게 하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들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하리라(창 12:1-3)는 약속이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견고케
된 것이다. '견고케 하시고'의 헬라어 '베바이오사이'는 '성취
하다', '확증하다', '확립하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증명될
뿐만 아니라 실현되고 확립되어 결실케 되었다는 것이다(John Murray). 바울이 이 말
을 언급한 것은 이방인 신자들이 유대인 신자들을 경시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이스
라엘에게 우선권을 주셨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려는 의도를 가진다. 즉, 유대인들을 통
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근원 역사를 경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E.F. Harrison).
뿐만 아니라 유대인에게 있어서도 그리스도께서 '할례의 수종자'가 되신 목적을 상기
시켜 구원이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이방인까지 포함함을(9절) 가르친다.
하나님의 구원 경륜의 진행 순서상 이스라엘이 먼저일 뿐이지 결코 이방인을 제외시킨
것이 아님을 알게 하므로써 유대인 신자들로 하여금 이방인 신자들을 멸시치 못하게
한 것이다(J. Calvin).

9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ㅇ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 하나님
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던 첫번째 목적이 하나님
께서 그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견고케 하려 하심이었다면 이제 두번째 목적은 하나
님의 긍휼을 이방인에게도 나타내셔서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긍휼의 참여자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J. Murray). 그러나 이방인들은 먼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은 유
대인으로 말미암아 부름을 받은 것이다(4:16). 즉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
4:22)고 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에 대한 구원의 계획과 그들을
통하여 영광받으실 것을 이미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따라서 바울은 구
약의 말씀(시 18:49)을 인용하여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구약의 인용문
을 언급하고 있는 주된 요인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함께 합심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밝힘으로 로마
교회의 구성원인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 사이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 갈등과
불화를 종식시키고 서로 연합하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결국 주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돝사사이 톤 데온)는 구절이 앞절(8절)의 '견고케 하시고'         
(베바이오사이)란 말과 연결되어 평행을 이룰 뿐만 아니라 '이방인으로 그 긍
휼하심을 인하여'(에드네 휘페르 엘레우스)라는
구절의 목적이 되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Meyer).
ㅇ기록된 바 - 바울은 구약의 인용 구절을 주의 깊게 선택하여(9-12절) 8절과 9절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즉 이방인들이 어떻게 이스라엘에 참여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으며 자발적으로 영광을 돌리게 되었는지 구약의 구절을 인용하여 순서적으로 입
증하고 있다.
ㅇ이러므로...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 이 구절은 시 18:49을 인용한 것으로 다윗
이 주변 이방인들을 정복한 후 그 승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찬양한 노래이다. 이것은
유대인인 바울 자신이 이방인 가운데 복음을 전파하고 그로 인해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 사실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1:8).

10 또 가로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ㅇ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 이 두번째 인용문은 신 32:43의 모세 노
래의 마지막 절 내용으로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 특히 본문은 70인역(LXX)의  문자적 인용으로 헬라어로는
'유프란데테, 에드네'이며 '즐거워하라, 이방인들이
여'라는 의미이다. 즉 이방인들의 회심을 예언한 말씀이 이제 성취되고 있다는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Dunn). 또한 이방인들의 지위가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을 영화롭
게 하는데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과 동참할 수 있을 만큼 높아진 사실을 상징적으로 나
타내고 있다(E.F. Harrison). 그런데 맛소라 사본(MT)은 70인역(LXX)과는 약간 다르
다. 맛소라 사본에는 "그의 백성(암모)을 찬양하라, 오 너희 열방들아"라고
번역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히브리어 '암모'가 원문 그대로인가는 의문이
다. 아무튼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을 강력히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헬라어 본문에서는 '주의 백성과 함께'                      
(투 라우 아우투)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이방인에 대한 매우 적대적이고 감정
적인 히브리어의 의미를 보다 완화시켜 이방인도 수용하는 우주적인 의미로 변화시켜
주고 있다. 바울은 이와 같은 헬라어의 의미를 자기 자신의 신학에 적용시키고 있다.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과 약속에 따라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이 지금은 모든 믿는 자
에게 적용된다는 그런 신학에 근거하여 이방인들의 구원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찬송
하고 즐거워하라고 촉구한 것이다(Dunn)

11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ㅇ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 세번째 찬송시는 시
117:1의 인용 구절로서 이방인들이 회심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Godet). 이로 인해 모든 열방들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찬송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여기서 '모든 열방들아'(판타
타 에드네)란 말은 모든 이방 민족들을 지칭하고 '모든 백성들아'               
(판테스 호이 라오이)란 말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 따
라서 본문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게 된 은혜를 입은 모든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함
께 언약을 성취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의미이다. 이제는 이방인들이 유대 전통의
간섭을 받지 않고 유대인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주를 찬송한다는 것이다. 이 예언은 오
늘날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교회에서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을 예배 드
리고 있는 사실에서 넉넉히 입증되고 있다.

12 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ㅇ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 - 이 구절은 사 11:10 말씀
의 인용이다. '이새의 뿌리'(해 리자 투 옛사
이)는 왕적 메시야를 가리키는 칭호로서(사 11:1-5;계 5:5;22:16) 곧 그리스도를 지칭
한다(Dunn). 성경은 다윗의 혈통에서 그리스도가 날 것을 예언하였다(사 11:1, 10).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로서 그리스도의 육적 계보를 형성했다(삼상 16:11-13;17:12).
당시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날 것을 알고 있었다(마
1:1;12:23;21:9;막 10:48;12:35).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만세 전에 예정하고 계획해
놓으신 것이었기 때문이다(요 1:1, 2;계 5:5). 예언에 따라 그리스도는 다윗의 혈통으
로 유대고을 중 가장 작은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지만(미 5:2;마 2:15, 16),
그는 모든 민족, 모든 나라들을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분이다.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 바울은 이사야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약간의 차이를 두어 기록하고
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엘라우고임 이드로슈)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소망을 두리라' 대신에 '돌아오
리니'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성경의 일반적인 표현에 있어서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것은 '그에게 소망을 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여기서 '소망'은 헬라어 '엘피우
신'으로 본절에서는 기쁨과 확신으로 구원을 소망하며 기다린다
는 뜻을 가진다. 본절에서 바울은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면서 이방인들의 부르심을 두
번이나 확증하고 있는데, 하나는 그리스도가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서 이스라엘 백성
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다스릴 분이시라는 점과 또다른 하나는 이방인들도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서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ㅇ소망의 하나님 - 하나님은 믿는 자의 소망의 근원이시고 소망의 유일한 대상이시다
(시 73:24-26). 성경에서의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두고 하나님의 허락하신
미래를 확신한 가운데서 기다리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진다. 그 소망은 항상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이루어지는데, 단지 구약과 신약에서의 차이점은 구약은 앞으로 오실 자를
소망하고, 신약은 오신 자에 대한 소망, 그리고 다시 오실 자에 대한 소망을 가진 것
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본절에서 '소망의 하나님'                            
(호 데오스 테스 엘피도스)은 영원한 구원에 대한 기쁘고도 확실한 기대와 간절
한 소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미하고 있다.
ㅇ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 본절은 바울의 기원과 권
고가 포함된 축도 형식으로서 미래에 대한 소원을 나타내는 희구법이 사용되었다. '기
쁨과 평강'의 헬라어는 '카라스 카이 에이레네스'                              
로서 기쁨(카라)은 주 안에서(빌 3:1) 나타나는 신앙의 결과이며(빌
1:5), 성령의 열매이고(갈 5:22) '평강'(에이레네)은 여러 가지 용례로
사용되어지는데 실제로 생명(조에)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즉 평강은 하나
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로 회복시켜 주시는 그의 구원 사역에 근거를 두고 있다. 여기서
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 구원이 보증된 영혼의 내적인 평온 상태를 의미한다(Dunn). 한
편 '믿음 안에서'의 '믿음'은 교회의 조화를 가져다 주는 유일한 토대가 되면 모든 인
간에게 기쁨과 평강을 가져다 주는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 된다(Dunn, Godet).
ㅇ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 본절은 앞에 나온 구약 인용
문들의 요약이다. 기쁨과 평강의 근거가 믿음 안에서 시작된다면 소망 역시 믿음과 따
로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런데 믿음 안에서 기쁨과 평강과 소망을 충만케 누릴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성령의 능력으로'                                           
(엔 뒤나메이 프뉴마토스 하기우)이다. 여기서 '~으로'라는 전치사 엔
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라는 위치와 장소를 나타내는 처격임과 동시에 '성령의 능력
을 통하여'라는 도구적 의미를 지닌다(Dunn). 그리고 '능력'(뒤나메
이)은 일반적으로 '~할 수 있는 힘, 권능'을 나타내지만 여기서는 '성령께서 믿음 안
에서 기쁨과 평강 그리고 소망을 일으키는 경이적인 능력'을 강조하는 뜻으로 사용된
다(J. Calvin).

1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ㅇ내 형제들아 -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좀더 부드럽고 다정한 호칭을 사용하여 친
밀감을 형성하고 있다. 이 용어는 본서에서 자주 쓰는 표현으로 1:13;7:1;8:12;10:1;
16:17) 로마 교인을 향한 애정어린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ㅇ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 당시 로마의 성도들에게 약간
의 불화와 갈등은 있었지만(14장) 전체적으로 볼 때 로마 교회는 신앙의 성숙한 면모
가 가득했다. '가득하고'(메스토이)는 충분히 가득찼다는 말로서 1:29
에서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찼다는 말을 했을 때도 사용된 단어다. '선함'의
헬라어는 '아가도쉬네스'로 여기서는 선천적  기질로서의 '선
함, 착함'이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해 삶 속에서 드러나는 '새사람의 인격의
덕성 및 도덕적인 성숙함'을 의미한다. '모든 지식'(파
세스 그노세오스)은 로마의 성도들이 더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로서(J. Murray) 저희에게 필
요한 구원의 지식이 다 있어서 안전하고 확실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
(Lenski). 더 나아가 고전 8:1, 7, 10, 11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그노시스'라는 단어
는 구원에 관한 지식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통찰과 이해를 나타내므
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오해했지만 로마의 성도들은 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과 계획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고후 2:14;4:6;10:5;빌
3:8, Dunn).
ㅇ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 로마의 성도들이 갖춘 성숙한 신앙의 또다른 면을 말하
고 있다. '서로'(알렐루스)는 약한 자들과 강한 자들 즉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을 가리킨다. 저희가 이렇게 서로 권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
게 선한 마음과 충분한 지식이 있어서 저희 믿음과 생활에 필요한 것을 잘 알고 있었
기 때문이다. 바울이 아직 방문하지 않은 로마 교회는 목회자들이 있지 않았다. 그렇
지만 그들은 항상 피차 권면하여 진리에서 이탈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가
운데 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살전 5:11).
ㅇ나도 확신하노라 - 헬라어 성경에는 재귀 대명사 '아우토스'가 삽입되
어 '나 자신도 확신하노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1) 다른 사람의 객관적인 증거와 평가를 떠나서 바울 자신의 깊은 확신을 강조하는
표현이다(Meyer, Dunn). (2) 어떤 객관적인 자료에 근거해서 확증하고 확신한다는 표
현이다(E.F. Harrison). 우리는 여기서 위의 두 견해가 다 작용한 가운데서 바울이 로
마 교회에 대한 확신을 선언했다고 보아도 크게 잘못됨은 없겠으나 두번째 견해가 좀
더 자연스런 해석이라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확신하노라'(페
페이스마이)가 수동 완료형이므로 자신의 추측에서라기 보다는 로마 교회의 사정을 잘
알 수 있는 어떤 근거에 의해서 확신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선언이
믿을 만한 증거에 바탕을 둔 확신이 아니라면 이것은 마음에 없는 칭찬을 감추기 위한
과장된 말에 불과한 것이다.

15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

ㅇ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에파나밈네스콘)는 잘 쓰지 않은 용어로 신약성경에서 본절에만
나온다. 그 뜻은 '어떤 교리를 반복한다'는 의미이다. 즉 그들이 알지 못한 어떤 새로
운 것을 가르친다는 뜻이 아니고 이미 알고 있는 복음의 진리를 회상시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바울은 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라고 했을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1) 복음의 원리와 명령을 안다고 하면서도 그들의 행함에
부족함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더 굳건히 세우기 위해서다. 물론 성숙한 신앙적 면
모를 갖춘 로마 교회였지만 온전함에 이른 것이 아니었기에 바울은 다시 한번 진리를
일깨워 주어 로마 교회를 튼튼하게 세우려고 하였을 것이다. (2) 이미 그들이 잘 알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는 수신자들의 신앙의 질을 존중해 주는 예
의 바른 태도이다(Dunn). (3) 또한 여기서 가르친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구태여
'생각나게 하려고'란 용어를 쓴 것은 바울의 신앙 인격의 겸손한 표현법이다
(Hendriksen). 이는 형제를 권면할 때에 상대의 인격을 존중해 주는 모범을 보여준다.
ㅇ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 로마의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
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특별한 의미와 감회를 주는 것이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텐 카린 텐 도데이산 모이 휘포 투 데우)는 세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그리스도
안에서 만세 전에 택정함을 입은 것을 말한다(엡 1:3-6).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일반적인 주권으로 선택함을 받은 것을 바울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라
고 노래했다. (2)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 구원함을 받은 것을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고 강조했다(엡 2:5, 8). 지난 날 무지 가운데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하고 믿는 자를 멸절(滅絶)시키려 했던 악한 자신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메섹 도
상에서 친히 만나 주심으로 자기를 불러 회개시키고 구원해 주신 그 사건을 그는 평생
감격하며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고 찬송했다. 바울 사도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대적했
던 자신이 구원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라고 그의 서신 곳곳에서
고백하고 있다(3:24;딛 2:11-14;히 2:9). (3) 사도적인 직분과 사역에 관련된 고백으
로서 바울은 자기의 사도 직분을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고 말한다(행 9:15;고전
15:9-11;엡 3:7-9;딤전 1:12, 13). 교회와 믿는 자를 핍박하여 주님을 대적했던 죄인
중에 괴수인 자신을 불러 구원해 주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이
방인의 사도'로 삼아주신 것이야말로 은혜 중의 은혜라고 간증하는 것이다(롬 1:1, 5;
갈 1:1, 15;2:9). 이중 본문에서 말하는 은혜는 문맥상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
하다. 즉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예수께서 부르시고 세우신 사도적인 직분과 사역을
뜻한다(Murray, Dunn).
ㅇ더욱 담대히(톨메로테론) - 이 말은 비교적인 의미가
내포된 부사로서 바울 사도의 다른 서신보다도 본서를 '더욱 담대한 마음으로' 썼음을
나타낸다(12:3;14장). 바울은 자신이 로마 교회를 세우지 않았고 또한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택정하시고 이방인의 사
도라는 막중한 사명을 맡겨 주심을 생각할 때 그들을 권면할 자격을 찾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담하게' 말할 수 있었다.
ㅇ대강(아포 메루스) - 이는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1)
'부분적으로', 혹은 '어떤 곳에는'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Meyer). (2) '다소', 또는
'어느 정도'라고 해석될 수 있다(Murray, Godet). 여기서 우리는 두번째 해석을 취한
다 해도 크게 틀렸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첫번째 견해를 취함이 좀더 적절한 해석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더욱 담대히'란 말은 (1)번의 해석과 연결시킬 때 비
교적인 의미가 선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어느곳에서는 내가 더 대담하게 썼
다'고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어느 곳에서'(부분적으로)란
6:12, 19;8:9;12:3;13:3, 13, 14;14:3, 4, 10, 13, 15, 20 등을 들 수 있다(Meyer).
위와 같은 구절들에서 바울은 더욱 담대한 권면을 하고 있다.
ㅇ썼노니(에그랖사) - 이 말은 '과거에 ~했다'는 단순 과거형 동사로
서 바울 사도가 이제까지 로마서를 쓴 사실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본서 저자가  사
도 바울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증거를 보게 된다.

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ㅇ바울은 그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은혜를 본절에서 구체적으로 약술하고 있다
ㅇ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 바울은 대제사장의 명을 받
아 기독교도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중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이방인을 위한 복음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행
9:15;26:14-19). 즉 사도직의 은혜가 이방인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숭고한 사역의 성취
를 위해 바울에게 주어진 것이다(Godet). 그 후에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온 생애를
전략하였다. '일꾼'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이투르곤'은 '레이
토스'('백성')와 '에르곤'('일')이 합성된 단어로 공직자
곧, 공적인 관리를 뜻한다(Godet). 종종 '군대의 종이나 왕의 신하'나 '성소에 부리는
자'(히 8:2)에 대해서도 사용된다. 그러나 특히 신약에서는 하나님에  의하여 임명된
일꾼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라는 것은 그
리스도에 의해서 임명받은 일꾼을 말한다(Meyer). 바울은 이 단어를 그리스도의 일꾼
된 자신에게도 사용하지만 또한 바울 자신의  일꾼된  에바브로  디도에 대해서도(빌
2:25) 사용하고 있다.
ㅇ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바울에게 맡
기신 사도직은 범세계적인 직무로서 복음 전파의 직무는 물론 제사장적 성격을 띤 직
무였다. 즉 바울의 사명은 이방 세계를 하나님이 받으심직한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일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히에루르군타)란 단어가 명백히 보여준다. 신약에서 본절에서만 사용된
'히에루르군타'란 단어는 '히에로스'('거룩한')와 '에르고'
('일')의 합성동사 '히에루르고스'에서 파생한 동사로서 '거룩한
사명을 수행하다', '제사장으로 봉사하다'의 뜻을 가진다. 이러한 사명을 받은 바울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1) 제사장 직무를 맡은 바울의 역할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인격
은 물론 모든 청중, 곧 이방인의 인격을 하나님께 바치는 구원의 메신저(messenger)로
서의 봉헌(奉獻) 행위였다. (2) 모든 교회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었다. 이
것은 본서는 물론(1:8-10) 모든 바울 서신의 첫머리에 나타나는 모습이다. (3) 구체적
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란 표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바울의 사도직은 제사장적 직
무를 수행하는 기능이 있었다(Godet).
ㅇ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 이것은 신약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비유적
표현으로서 아마도 사 66:20로부터 발전된 개념일 가능성이 높다(Murray). 바울은 여
기서 '이방인'(톤 에드논)과 '제물'(헤
프로스포라)을 동격으로 취급하여 복음에 의하여 얻어진 이방인을 사도가 하나님께 드
리는 제물 즉 영적인 희생 제물이라고 말하고 있다(Godet, Meyer). '제물'이란 제사
의식에서 마지막으로 바쳐지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것이 되어야 한다. 따라
서 이 비유적인 표현에서 우리는 복음 전파자의 사역의 목표를 보게 된다. 그것은 이
방인들에게 단순히 복음을 전파할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순종케 함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제물이 되도록 그들의 영혼을 성결케 해야 한다는 사명인 것이
다. 이런 뜻에서 사도직의 기능을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함으로 묘사했고, 사역의 대상
인 이방인을 구약의 제사에서 제사장이 드리는 제물로 비유하여 나타낸 것이다
(Calvin).
ㅇ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하심이라 - 당시 복음을 통해 회개한
이방인 신자들이 할례를 받지 않았다고 하여 불결하다고 주장하는 유대인 신자들이 있
었기에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바울은 이방인 신자들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고 깨
끗게 되어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하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Blaiklock). '성령 안에서 거
룩하게 되어'의 헬라어 '헤기아스메네 엔 프뉴마티 하기오'                    
는 완료형 수동태 분사 구문을 취하고 있어, 성화(聖
化)가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로 칭의와 최종적인 구원 사이에서 이루어져 가는 과정
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또한 성령께서 신자를 하나님이 받으심직한 상태로 창
조해 가시는 주체임을 보게 된다(Harrison). 거룩한 삶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
능한 것이다(8:2, 4).

17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ㅇ그러므로(운) - 앞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사도직과 이방인을 위한
임무를 말한 바울은 이제 그 사역의 구체적인 결과를 진술하기 위해 15절과 16절의 내
용을 받는 접속사를 쓴 것이다.
ㅇ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엔 크리스토 예수) - 이 어구는 바울의 애용구로서 바울
신학의 기본어(key word)이다. 본문에 대한 학자들
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말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through Chirst Jesus)란 말로서 '자랑한다'는 용어가 시사할 수 있는 지나친 자기
자랑적인 태도를 부드럽게 유화시켜 준다(Godet). (2) 바울의 자랑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는 것으로 자랑의 근거를 강조하는 것이다. 즉 그의 자랑은 자기 자신
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높이는 것임을 말한다(Meyer).
(3) 사도가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말을 첨부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랑이 아니고는 모든 자랑이 제거되어야 할 것임을 나타낸 말이다(고전 1:29,
30;고후 10:17, J. Murray). 위의 세 견해는 유사한 것으로서 본문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어구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덧붙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헬라어 원문에 나타난 강조점의 문제이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어구는 '자랑
하는 것'(카우케신)이란 말을 직접 수식하고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부사구로서 '내가 가졌다'는 '에코'라는 동사를 수식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
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말은 위의 세 가지 해석을 취하면서도 자랑 그 자체를
강조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바울이 자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의 근거가 '그리
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한층 강조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라는 말은 사도의 모든 사역의 근거요 내용과 목표였다.
ㅇ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타 프로스톤 데온) - 이
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1)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하나님께 관한 것'이다
(Godet). (2) 일종의 부사적 대격으로서 '하나님께 대하여'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Dunn). 두 가지 해석을 다 취할 수 있다. 이 표현은 어떤 특정한 것을 가리킨다기보
다는 하나님께의 섬김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에 관련된 것에 있어서만 자랑
한다는 자랑의 범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용어는 예배 직무를 수행하는 유
대인의 예배 의식적 표현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전문 술어로서(히 2:17;5:1) 앞절(16
절)의 '제사장 직무'(히에루르게인)와 '일군'         
(헤기아스메네)과 일맥 상통한다(Godet).
ㅇ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 여기서 자랑의 구체적 내용은 16절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방인들이 복음을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을 말한다. 여기서 바울이 유달리
자랑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도구로서의 축복을 받은 사실이다(고
전 15:31;고후 1:12-14;7:4, 14;8:24). 이것을 바울은 자기의 면류관이요 기쁨이라고
했다(살전 2:19).

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ㅇ한글 개역 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헬라어 원문이나 영역본에는 이유를 나타
내고 접속사 '왜냐하면'(가르)이 본절 초두에 삽입되어 있다. 그러므로 본절
은 17절에서 주장한 것, 즉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한 것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 기록하
고 있다.
ㅇ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 이것은 16절의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으로서 좀더 쉽게 직역하면 '이방인 편에서 순종이 생기게 하기
위하여'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순종하도록 이끄는 것이
야말로 바울의 소원이었으며, 또한 그의 부르심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바울은 이것을
다시 상기시킴으로 로마의 성도들에게 자신의 사역에 대한 열매를 확실하게 가르치면
서 이런 성과가 어떻게 무엇으로 성취되었으며 그 성격은 어떤 것인지를 규명하고 있
다(J. Calvin).
ㅇ나로 말미암아(디 에무) - 이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행한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을 통한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을 강조한 것
이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이방인을 순종케 하기 위해 자기가 수고한 것
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임을 말하고 있다. 아울러 자기 자신은 주님
이 쓰시는 복음 전도의 도구요 하나의 통로였음을 명백히 밝히는 표현을 쓴 것이다(J.
Murray).
ㅇ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바울 사도를 통해 쓰신 도구, 즉 방편과 원리가 무엇이었는지 구
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1) '말과 일이며'(로고 카이 에
르고). 이것을 혹자는 그의 설교와 수고, 또는 전도와 생활이라고 말한다(눅 24:19;행
7:22;고후 10:11, Robertson).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말'(word)은 그리스
도의 복음 전파를 위한 사도 바울의 모든 노력을 총체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대개 그의
가르침과 설교(복음 증거)를 말한다. 그리고 '일'(deed)은 복음을 위한 그의 행적과
고난 즉 실천적 행실이 있는 삶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를 통해 나타나는 이런
것들을 거룩한 도구로 쓰셔서 구원 사역을 이루셨다(Lenski). (2) '표적과 기사의 능
력이며'(엔 뒤나메
이 세메이온 카이 테라톤). 그리스도께서는 이방인을 향한 효과적인 전도 사역을 위하
여 바울로 하여금 표적과 기사의 능력을 행하게 하셨다(행 13:7-12). 이것은 예수 그
리스도의 사역(행 2:22)과 사도들의  사역에서도 나타났다(행 5:12). 여기서 '표적'
(세메이온)은 영적인 의미로서 인간들의 눈앞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역사를 의미한다(signs, KJV, RSV). 즉 영적으로 볼 수 없는 실재를 눈 앞에
나타내준 증표인 것이다. 그리고 '기사'(테라톤)는 놀라운 일을 뜻하
는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즉 자연 법칙을 초월하는 기적을 말한다
(miracles, NIV). 이로보건대 표적과 기사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그리스도께서 세우
신 자임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그가 전한 복음이 하나님이 계시하신 진리임을  증거한
다. 아울러 무엇보다도 그 복음이 가리키는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역사상에 현실로 임했
음을 일깨워 주는 표이다. 구약에서는 표적과 기사가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의 수단으
로써 나타났으며, 특히 출애굽 때와 광야 생활 중에 그러했다. 그러므로 표적과 기사
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아무튼 이것은 바울을 통해 이방
인을 부르실 때 쓰신 거룩한 방편이며, 그 결과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순종을 불러
일으켰다(J. Calvin). (3) '성령의 능력으로'                                 
(엔 뒤나메이 프뉴마 토스). 이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까)
본절의 결론적인 어구로서 사도의 사역이 성령의 능력의 역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했음
을 나타내 준다(Calvin). (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구원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서 사도에게 주신 능력이다. 따라서 이 어구는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신 것 외에는'이
란 구절과 연결된다(Meyer). (따) 사도를 충만케 한 거룩한 능력이다(Godet). (마) 사
도의 복음 전파를 열매맺게 한 실질적인 능력이다(Murray). 이를 종합해 보건대 '성령
의 능력'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을 순종케 하기 위해서 사도를 통해 나타내신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을 가능하게 한 장본인임을 알 수 있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는 복음 전파의 열매가 맺혀질 수 없다. 거룩한 성령께서 모든 방편들을
들어 도구로 쓰실 때 하나님 나라의 열매가 있을 것이니 모든 사역자들은 능력의 근원
인 성령을 의지해야 할 것임을 암시한다.
ㅇ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 바울은 여기서 곡언법(曲言法)
을 사용하고 있으니, 곡언법은 어떤 문장을 강조할 때에 이중의 부정사를 사용하여 훨
씬 더 강한 긍정을 이끌어 낼 때에 사용하는 어법이다. 본문에서는 '우 가르 톨메소'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와 '우 카테이르가사토'
('역사하신 것 외에는')는 썼다. 이 문장을 직역하
면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지 않는 것은 어느 하나라도 말하지 않겠다', 즉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한 것만을 말하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절의 의미는 '나는 그리스도께
서 이방인을 순종케 하기 위해서 나를 통해 말과 일, 표적과 기사의 일을 성령의 능력
으로 역사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이다(Meyer,
Godet).

19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ㅇ이 일로 인하여 - 바울은 원인 및 결과적인 접속사 '그러므로'(호스테)
를 사용하여 그가 18절에서 말한대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일꾼으로 이방  전도 사역에
부름받아 여러해에 걸쳐 전도 활동을 하였음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이 일로 인하
여'라는 말은 18절과 19절을 한데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Meyer).
ㅇ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 바울은 세 차례에 걸쳐서 소아
시아와 지중해 북부 지역을 두루 다니며 전도 여행을 하였다(행 13-21장), 그가 복음
전도를 시작한 것은 다메섹과 아라비아 지방에서부터였으며(행 9:19, 20), 본격적으로
이방인의 사도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것은 안디옥에서였다(행 11:25, 26;13:1-3).
그런데 어째서 그의 전도 사역의 출발점을 예루살렘으로 말했는가? 여기에 대해서 혹
자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전도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던 것을 염두에 두고 말하였다
고 한다(F.F. Bruce). 또한 혹자는 복음 전도의 출발점과 중심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
였기 때문에 그곳을 언급했다고 한다(Lenski). 후자가 좀더 타당한 의견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행 1:8에서처럼 복음은 예루살렘으로 시작해서 땅끝까지 전파될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루리곤'(Illyricum)은 아드리아 해의 동쪽 연안, 마게도냐에 근접
해 있는 로마의 속령으로 오늘날의 유고슬라비아 영토에 해당한다. 공식 명칭은 일루
리아(Illyria)로 바울은 3차 전도 여행 중 고린도에 체류하는 동안 일루리곤 지역을
방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행 20:1, 2). 아무튼 사도는 여러 해에 걸친 자신의 사역의
결과를 언급하는데서 자기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나 회심자의 수효, 또는 이러한 사역
에 뒤따른 고난 등에 관한 설명을 생략하고 단지 자기가 수고한 경로를 표시하기 위해
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을 인용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Harrison).
ㅇ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 이것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
지 이르는 넓은 범위의 지역을 나다니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다고 목적지를 향해 곧바로 서둘러간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는 복음을
편만하게 전했다고 말하고 있다. '편만하게 전하다'의 헬라어 '페플레로케나이'  
는 '플레로오'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부족한 것
으르 보충하고 완결짓는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직역하면 '복음을 채웠노라', '복음
전하는 일을 완성했노라'(NEB)로 번역할 수 있다. 또한 복음을 모든 곳에 전파하여
'완전히 밝히 드러내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Godet). 칼빈(Calvin)은 이것을 '바
울이 부족된 것을 보충하면서 복음 전파를 넓게 퍼뜨렸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을 통하여 바울의 전도 활동을 짐작해볼 수 있는데 그는 전도 여행을
하면서 큰 도시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그곳에 교회를 세운 다음 그 지역의 새로운 회심
자들에게 그 교회를 맡겨 그들로 하여금 그 주변 지방들을 보다 강력하게 그리고 지속
적으로 복음화시키도록 한 듯이다.

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ㅇ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자신의 사도직의 진실성을 확증하기 위해 지금까지 동양에서의 자신의
활동이 거둔 성공에 대해서 언급하였다(19절). 그리고 이제 본절에서는 서양에서의 미
래 사역과 로마 방문에 대한 생각을 피력하기 위해 그가 항상 자기 사역의 지침으로
삼아온 원칙을 상기시키고 있다(Godet). 이러한 고백은 이미 다른 전도자가 그리스도
의 복음을 전파한 곳에서는 전도하지 않겠다는 바울의 확고한 선교  정책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자기 자신에게 닥치는 희생과 고난이 아무리 많더라도 복음을 위한 길잡이가
될 책임을 맡겠다는 그의 소망을 표현해 주고 있다(Harrison). '힘썼노니'라고 번역된
헬라어 '필로티무메논'은 '필로스'('사랑함')와
'티메'('명예')가 합성된 단어로 '힘쓰다'는 의미 외에 '명예를 사
랑한다' 또는 '영예로운 일로 간주한다', '열성으로써 노력하다'의 의미를 가진다. 이
것은 바울 자신이 개인적인 영예를 구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의 사도적 책임이었다. 사도란 단순한 목사나 전도자가 아니다. 바울 자신이
고전 3:10에서 말한대로 그의 사명은 '터'를 놓아 다른 사람이 그 위에 건축할 수 있
게 하는 것, 즉 남들이 아직 가지 않은 곳,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지 않은 곳에 복음
을 전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바울은 영예로운 일로 여겼고, 이 일을 사랑했으며 또한
최선을 다해 열정적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바울의 성스러운 자랑과 열
망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여기서 어떤 새로운 사상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현재 목표를 향해서 다가가고 있는 선교 사역의 진행 방법과 정책 및 그 성격을 규졍
하고 있는 것이다(Godet).
ㅇ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
해야 할 막중한 사명을 갖고 있는 바울이(1:8, 14, 15;행 1:8) 여기서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한다는 자신의 선교 정책을 말한 것은 단순히 사도직의 구별 의식이나
우월 의식에서 한 말이 아니다. 이것은 바울의 사역의 독특한 특징으로 땅끝까지 복음
을 전해야할 신성한 일을 자기 혼자 독불장군식으로 주장하지 않고 다른 사역자들의
전도 활동과 열매를 존중한다는 의사 표현이다. 즉 이미 복음이 전파된 곳에 또 가서
전하는 이중적 일을 하지 아니하여 하루라도 빨리 땅끝까지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하
고자 한 열망에서, 바울은 그러한 선교 원칙을 취한 것이다. 바울의 이런 선교 원칙은
그 결과 얻어지는 공적을 독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체 기독교 선교의 경제성을 위
해서였다. 아직도 미개척지가 많은데 한 곳에 사역자들이 모이는 것은 기독교 전체의
공동 사역(team ministry)이란 관점에서 볼 때 비효율적이므로 자신이 먼저 앞장서서
고통을 무릅쓰겠다는 순교적 자세를 바울은 항상 갖고 있었던 것이다.

21 기록된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ㅇ본절은 사 52:15의 70인역(LXX)의 문자적 인용으로서 앞절(20절)에서 말한 바울의
선교 정책이 자기 고집이나 자랑이 아님을 입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의 이방인
을 위한 전도 사역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일치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구절은 그 유명한 이사야의 '종의 노래' 즉 메시야의 자기 비하(빌 2:7, 8)와 고난
과 승귀(빌 2:9-11)가 완벽하게 응결되어 있는 사 52:13-12의 내용으로서 그 종이 많
은 민족과 왕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언급하고 있다.
ㅇ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호이스 우크 아넹겔레 페리 아우투 와손타이).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 사 52:13-15에서는 '왕들'(멜라킴)로 표현
되었으나 본문에서는 유대인과 대조되는 이방인을 가리킨다.
ㅇ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카이 호
이 우크 아케코아신) - '듣지 못했다'는 것은 유대인들처럼 고난의 종되시며 메시야이
신 주님에 관한 소식을 듣지 못했다는 뜻으로서 역시 이방인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
리고 '깨달으리라'(쉬네수신)는 말은 사도들이 전파한 주님의
소식, 곧 복음을 듣고, 예수를 메시야인 구세주로 알게 되어 믿음에 이르른 것을 뜻한
다. 앞 구절의 '볼 것이요'란 말과 대등 소이한 표현이다. 이렇듯 열방에 복음의 빛이
비춰지므로 주께 돌아온 자가 역사상에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새로운 시
대가 도래한 것을 보여주는 획기적인 사건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울은 자기의 선교 사
명을 인식하고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자신의 선교사역의 결과를 증거한 것이다. 한편
혹자는 이러한 예언이 바울의 사역에서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그의 사도직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말한다(John Calvin). 왜냐하면 이 말씀은 특별히 사도들에
게 위임되었고(마 28:19, 20;막 16:15), 그들에 의해서 이 말씀이 성취되어졌기 때문
이다.

22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번 막혔더니

ㅇ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 로마 교회는 바울
에 의해서 세워지지 않았지만, 1:13에서 이미 언급한대로 바울은 로마 교회를 방문할
계획을 여러 차례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로마를 방문하는 것이 늦어졌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1) 방금 서술한(20, 21절) 바울 사도 자신의 선교 원칙
에 뿌리를 둔 장애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즉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는다는 바울의
독특한 사역 방식이 작용한 것이다(Meyer). (2) 복음 전도 사역이 너무 바빴기 때문이
다. 즉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지경에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
를 세워야 할 일이 쉴사이 없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또한 장애 요소가 된
것이다.사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려지지 않는 곳에서 복음 전하는 것을 그의 사역
의 원칙으로 삼았기에 연달아 진행되는 복음 전파와 교회를 세우는 일은 바울의 로마
행을 본의 아니게 가로막은 외적인 장애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Harrison). 한편 '막혔
더니'로 번역된 '에네콰토멘'은 반복을 나타내는 미완료 수
동태형으로서 외적인 장애요소가 계속해서 가로막았음을 보여 준다. 즉, 로마 방문 계
획이 번번이 성취되지 못한 것이 바울 자신의 고의적인 뜻이 아니었음을 나타내 준다.

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ㅇ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 '이제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뉘니'
는 일반적으로 '지금', '현재'라는 의미로 쓰이나 바울 서신에서는 새로운 시대나 상
황의 전개를 분명하게 할 때에 자주 쓰인다(3:21;5:11;6:22;8:1). 여기서는 특히 상황
의 전개를 분명하게 할 때에 자주 쓰인다(3:21;5:11;6:22;8:1). 여기서는 특히 상황의
전개에 관하여 쓰인 것으로 앞절(22절)의 상황과 대조되는 다른 경우가 펼쳐진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지방'(토이스 클리
마시 투토이스)은 복수이므로 '지방들'을 말하며 바울의 현재 선교하는 지역들을 의미
한다. 즉 예루살렘에서부터 일루리곤까지 지중해 동부 지역의 도시들을 가리키며 대체
적으로 에베소, 고린도, 데살로니아, 빌립보, 다메섹 등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곳을
두루 다니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19절). 이제 더 이상 그 지역에서는 복음을
전할 새로운 곳이 없었기 때문에 좀더 새로운 지역에 눈을 돌리고자 하였다.
ㅇ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 '여
러 해 전부터'로 번역된 헬라어 '아포 폴론 에톤'은
'상당히 오래 전의 해부터'라고 직역할 수 있다(Robertson). 바울의 서바나와 로마 방
문 계획은 갑자가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준비되고 계획된 것이었다.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대개 로마 교회의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특히
바울의 서바나에 대한 전도 계획은 그가 지중해 동부 지역에 전도 사역을 치중하였을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서바나는 서쪽 변방으로 땅끝이라고 생각되었
다. 이곳에 복음을 전파하기에 앞서 그가 로마에 들르기로 작정했던 것은 로마가 당시
세계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바나 선교를 위한 전략적 요충
지로서 로마 교회의 협력을 필요로 했다. 그렇다면 단순히 선교 기지로 이용하기 위해
서만은 아님을 1:11-13에서 보여준다. 즉 선교 계획에 동참하게 하기 전에 저들의 믿
음을 확인하고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 저희를 견고케 하며, 영적인 사귐을 통해 피차
유익을 받고 안위케하려는 목적도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중요한 내용이었다. 위에서
'원'(에피포디안)이란 '간절한 열망'으로서 본절에서는 서바나에
가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하지 않고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라 했다. 이것은 바울이 로
마 교회 성도들을 일차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ㅇ이는 지나가는 길에 - 한글 개역 성경에는 삭제되어 있으나 헬라어 원문에는 '서바
나'(스파니안)가 삽입되어 있다. 즉 '서바나로 지나가는'      
(호스 안 포류오 마이 에이스
텐 스파니안)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서바나는 지중해 연안의 서쪽에 위치한 곳으로 오
늘날 스페인 지역이며 당시 그곳은 로마의 영토로 많은 유대인들이 이주하여 살고 있
었다. 바울은 3차에 걸친 전도 여행 중에 지중해 전지역에 걸쳐 전도하였으나 아직 서
바나 지역은 전도하지 못했다. 그는 원래부터 서바나에 대한 선교 계획을 가지고 있었
으나 교회 내에서의 끊임없는 분쟁과 위기와 바쁜 전도 일정들 때문에 그곳에 전도를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23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어 그 일
을 위해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Ernst Kasemann). 여기서 '지나가는 길에'
(디아포류오메노스)란 말은 '통과하는 길에'란 뜻으
로 로마에서 오래 머물지 않겠다는 바울의 여행 계획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로마 교회를 향한 무성의한 모습이 아니다. 서바나로 가는 길에 잠깐 들려 간다고한
것은 앞절(20절)에서 밝힌 것처럼 '남의 터위에 건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미 그리스
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쓴다'는 바울 사도의선교 원칙에
근거한 것이고 또한 될 수 있는대로 빨리 서바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려는 열망과 전
도 계획 때문인 것이지 결코 로마 교회를 무성의하게 취급한 것이 아니다. 로마 교회
의 성도들을 향한 사도의 관심과 사랑을 생각할진대 더욱 그러하다(1:11-13).
ㅇ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 바울이 서바나를 향한 선교 계획의 중간 기착지로서 로마를 방문하는 이유
를 설명하고 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너희를 보고                    
(데아사스다이 휘마스). 여기서 '보고'라고 번역된 '데아사스다이'      
는 단순 과거행으로서 '본다'는 동작과 행위를 강조한다. 즉 그토록 보기 원
했던 로마 교회 성도들을 보는 것이 바울의 방문 이유 중에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바
울 사도가 저들의 얼굴 보기를 사모한 것은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통해 구원
받은 한 형제로 여겼기 때문이다. (2)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
(휘몬 프로톤). 여기서 보듯이 헬라어 성경에는 '교제하여'라는 말이  없다. 그러므로
원문 그대로 해석한다면 '먼저 너희의'라는 해석이 되지만 휘몬이란 말이
제2인칭 복수 제 2격이란 점과 이 편지의 발신자와 수신자의 상호 관계를 생각할 때
한글 개역 성경에서 '교제하여'란 해석을 덧붙인 것은 행간의 의미를 살려주는 무난한
의역이라 생각된다. 이 어구를 의역한 우리말 성경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먼저 여러
분을 만나'(새 번역), '여러분을 만나 함께 지내면서'(공동번역), '먼저 로마에 있는
여러분을 방문하여 교제를 가진 후에'(현대인의 성경). 그렇다면 여기서 말한 교제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일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베푼 구원의 은혜를 들으면
서 저들의 믿음을 확인하고 또한 사도 자신이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 그들의 믿음을
견고케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선교 계획(서바나를 향한)을 알려주어 그들도 참여케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피차 안위를 받는 성격의 사귐이었음을 알 수 있다(1:11-13).
이로써 처음하는 그들이었지만 한 믿음 안에서 한 하나님 아버지의 권속인 형제들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3)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에안...아포 메루스 엠플레스도). '약간'(아포 메루스)이란
말은 '얼마동안', '잠시나마'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만족을 받은 후에'    
(에안...엠플레스도)란 말은 '충분한 기쁨을 누린다'는 뜻이다. 즉 오랫동안 사
모했던 교인들의 얼굴을 직접 보고 교제를 나누는 사귐을 통해서 저들이 진실로 진리
위에 굳게 서 있는 것을 확인한 사역자의 기쁨을 의미하며 또한 바울의 선교 계획에
참여하겠다는 저들의 믿음을 확인한 후에 오는 사역자의 즐거움을 가리킨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를 무성의하게 대하지 않고 얼마나 간절히 보고 싶어했는지를
보여준다. (4)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엘피조...휘프 휘몬 프로펨프데나이 에케이). 여
기서 '그리로'(에케이)란 서바나를 말하는 것으로서 사도는 그의 여행 목적
지를 로마 교인들 앞에서 밝히고 있다. '너희의 보내줌'                      
이란 말에서 '프로펨프데나이'란 말은 '프
로펨포'의 제 1부정 과거 수동태 부정사로서 '너희로 말미암아 보
냄을 당하기를' 또는 '너희가 나를 보내줌'이란 뜻으로 바울 사도가 로마 교회의 파송
을 받을 것을 기대한 표현인 것이다. 바울은 지금까지 그의 선교 사역에 있어서 다른
교회의 도움의 손길과 지원을 통해서 새로운 선교지로 파송을 받아 복음을 증거해왔다
(행 13:1-4;14:26;15:40). 그는 이러한 체험을 상기하면서 이제 마지막이 될지 모를
서바나 선교 계획에 로마 교회의 참여를 공개적으로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
들의 기도, 재정적인 도움, 함께 복음 전파에 수고해 줄 조력자 등의 도움을 받아 로
마 교회 이름으로 파송을 받아 아직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서쪽 변방까지 복음을 전파
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로 보건대 바울의 로마 체류 성경이 잠정적이고 제한적인 것이
며 또한 그의 방문 목적이 로마 교회와의 교제의 협력가가 지원을 힘입으려 함에 더
강조점이 있다는 것을 명백히 나타내 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도 바울과 각
교회들과의 유대 관계가 굉장히 밀접했으며, 바울의 사역은 어디까지나 교회를 통한
선교 사역이었다는 점이다(J. Murray). 그리고 '바람이라'를 가리키는 '엘피조' 
란 말은 '내가 바람이라'는 뜻으로 단순히 서바나에 파송받는 것뿐 아니라
본절 전체의 내용을 사도가 기대했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왜냐하면 '엘피조'가 '가르'
('이는') 이하와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25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ㅇ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 바울은 23절에 사용
한 역접을 나타내는 접속사 '그러나 이제는'(뉘니 데)을 반복 사용하
여 서바나 선교 계획의 중간 경유지로서 로마를 바로 가야하지만 도중에 예루살렘을
거쳐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이 그렇게 가기를 소원하였던 로마
교회의 방문을 또 뒤로 미룬 채 먼저 예루살렘을 방문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무엇
이었겠는가 ? 예루살렘 교회는 모든 교회의 모(母) 교회로서 교회 지도자들 즉 사도들
이 있는 교회이지만 지금은 핍박과 어려움 중에 있는 가난한 유대인 성도들이 많이 있
었다. 이러한 위급한 교회를 모든 교회가 협력하여 도와줄 의무가 있었다. 이것은 모
교회에 대해 이방 교회가 지녀야 할 당연한 태도이며 그들이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염두에 두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성도들과 기타 이방 교회의 성도들과의 화합과 일치였다. 예루살렘 이외의 모든 교회
는 대부분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유대 기독교들과 이방인 기독교 개종자 사이
에는 적지 않은 충돌과 마찰이 있었는데 유대 기독교 신자들은 이방인 기독교 개종자
들에게 배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 가운데서 일부는 이방인 기독교 신자들에
게 구약의 규례들을 따를 것을 강요하는 무리들도 있었다(행 15:1, 5). 이러한 형편에
서 바울은 이방인 성도들의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예루살렘과 이방 교회 간의 관계가
극복되어 견고한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형성되리라 생각했었다. 이전에도 바울은 예루
살렘에 있는 가난한 교인들을 돌보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하
여 바나바와 함께 수리아 안디옥에 있는 성도들로부터 헌금을 거두어서 도와준 적이
있었다(행 11:30;12:25). 그리고 바울은 갈 2:10에서도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줄 것을
이방인 교회에 호소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바울의 로마 교회의 방문이 다시
한번 불가피하게 지체되었고, 이와 같은 사정을 로마 교회에 알림으로 그들로 하여금
양해를 구하고 있으며 또한 그의 이러한 모범을 따르도록 독려하고 있다(John
Calvin).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이러한 구제의 행동을 '성도를 섬기는 일'
(디아코논 토이스 하기오이스)로 묘사하
고 있다. 따라서 '성도를 섬기는 일'이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루살렘의 가난한 유대
인 성도들을 구제하기 위해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이방인 성도들이 모금한 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는 일을 뜻한다(고후 8, 9장). 여기서 우리는 사역자 바울이
일을 진행시키는 우선 순위를 배우게 된다. 즉 사도가 그토록 보기를 사모했던 로마
교회의 교인들과 만나게 되는 개인적인 기쁨보다는 우선적으로 어려운 성도들을 도와
주고 그들이 다른 성도들과 서로 사랑 가운데서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한몸 의식을 갖
게 하는 일에 무엇보다도 먼저 힘쓰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ㅇ이는...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지고 온 헌금은 고린도, 갈라디아, 마게도냐 등 많은 이방인 성도들이 예루살렘 교
회를 위해 힘껏 헌금한 것이었다(고전 16:1-3;고후 8, 9장);갈 2:10). 그런데 '마게도
니아와 아가야' 사람들만 언급한 것은 바울이 본 서신을 쓸 때 아가야에 있었고 최근
에 마게도니아를 지나왔기 때문이다(행 18:12;20:1, 2). 이것은 본 서신이 고린도에서
쓰여졌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 아가야는 헬라 명칭 '아카이아'로 고
린도의 수도였다. 그들은 어려운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서 헌금을 억지로 하거나
마지 못해서 하지 않고 자원하는 마음으로(고후 9:5-15) 기쁘게 사랑의 선물을 바울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에 보냈다. 위에서 '얼마를 동정'의 헬라어는 '코이노니안 티나'
인데 '코이노니안'은 일반적으
로 '교제', '친교'의 의미이다. 이 문장을 직역하면 '얼마의 친교'를  세웠다는 말로
번역될 수 있다. 실제로 공동 번역에서는 '교우로서 정을 나누려고'라고 '친교'의 의
미로써 번역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코이노니안'을 '친교'로 해석하기 보다는 '헌
금'으로 해석하는 것이 좀더 무난할 듯하다.

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ㅇ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 바울은 여기서 이방
인 교회의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구제 헌금의 성격을 '자원하는 심령과 의무'라는 관
점에서 규정하고 있다. '빚진 자'라고 번역된 헬라어 '오페일레타이'           
는 '오페일로'('빚지다')의 목적 소유격으로 '의무를 가진 자'
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나 여기서는 '손해를 준 사람에게 아직 보상하지 않은 사람'이
라는 의미를 가진다. 바울은 이 용어를 1:14과 8:12에서도 사용하고 있는데, 자신을
가리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의 빚진 자'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고백은  의미심장
한 것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무한한 은혜에 대한 채무자적인 자신의 심정을 나타
낸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복음의 빚진 자로서 사랑의 봉사와 복음 증거의 삶을 살았
던 것이다. 바울의 이와 같은 태도는 이방인들 또한 유대인들에게 가져야 할 태도이
다. 이방인은 유대인에게 복음의 빚진 자이기 때문이다.
ㅇ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빚진 자인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신령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코이스'는 '영
적인', '성령에 부합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구속적 은혜'
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로부터 이방 세계로 전파된 사실을 가리키
는 말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으로 나셨으며 복음의 일차적인 대상 또한 유
대인이었다. 그러므로 만일 예루살렘 교회가 그들의 영적 축복 곧 복음을 이방인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아직도 사단의 권세 아래, 죄악의 어두움 속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E.F. Harrison). 그런데 지금 이방인들은 예루살렘 유대 기독교 신자들로
부터 시작된 복음을 받아들임으로(행 10장;11:19-22;15:40, 41)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되었다. 따라서 이방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성도들에게 빚진 자들이
된 것이다. 이 '빚'(오페일로)은 상업적 빚의 의미가 아니라 은혜를 크
게 입은 자에 대해 느끼는 의미로서 부채감(負債感)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방인 신자
들이 그들의 '육신의 것'(엔 토이스 사르키코이
스) - 이 단어는 육신의 죄악된 면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육신의 일상 생활에 속한
필요한 것들을 말하는 것으로서 부유한 이방인 성도들이 물질로써 가난한 유대인 성도
들을 섬기는 것을 의미함(Robertson)-을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유대인 성도들에게
나누어 줌으로 복음의 은혜를 갚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당연한 일인 것이다.

28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ㅇ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 바울이 서바나
선교 계획을 가지고 중간 기착지(奇着地)로서 로마를 곧바로 가지 않고 지체하면서까
지 예루살렘을 굳이 방문하고자 했던 의도가 본문 가운데 명확히 나타나 있다. 바울은
그가 이방인 교회에서 모은 헌금을 직접 예루살렘에 가져가지 않고 그의 신실한 동역
자들을 통해서 대신 보낼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행 21:11-14). 그러나 그가 굳은 결심을 가지고 직접 예루
살렘을 방문하고자 했던 주된 이유는 기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 교회에 그의 선교
사역을 낱낱이 보고함으로(행 21:18-20)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확증하기 위해
서이다(사 11:1;42:1;60:3;행 1:8). 이런 뜻에서 그는 이방인의 헌금을 '열매'로 표현
하고 있다.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씨를 뿌린 결과 그 보답으로
얻게 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사 25:6-8). '확증한 후에'라고 번역된 헬라어 '스프
라기사메노스'는 '인(印)으로  표시하다'의 뜻을 가진
'스프라기조'의 완료형 수동태로서 시험을 위해 '견고케 하다',
'증명하다', '엄숙히 선포하다', '확실히 끝내다', '확인의 도장을 찍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의역하면 '구제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확실히 전달한 후에'란
뜻이다. 그리고 또한 이어법은 상업적 거래에서 사용된 것으로 바울 자신에게 맡겨진
돈을 인봉한 채로 가지고 갔다는 뜻으로서 어떤 대표성을 나타낸다고 한다(Bartsch).
어쨌든 바울은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이처럼 그의 선교 사역을 완료함으로써 그 증
거(證據)로 헌금과 함께 그의 사역의 성과를 예루살렘 교회에 확증하며, 이방 성도들
의 감사와 그들이 받은 영적인 축복의 열매들을 헌금을 확증한 것으로 대표하여 증거
하고자 했다(Ernst Kasemann). 그리하여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을 전달하는 일
을 그처럼 중요한 일로 여겼던 것이다.
ㅇ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 바울은 본문에서 로마를 경유하여 서바나로 갈
선교 계획을 언급하고 있는데 바울이 실제로 서바나에 가서 복음을 증거했는지는 확실
치 않다(John Murray, E.F. Harrison).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서 본 서신을 비롯한 그
의 모든 서신에 확실히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바울이 로마 교
회는 방문했으나 서바나에는 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W. Wiersbe). 그러나 그가 서바
나에 복음을 전했다는 증거는 A.D. 1세기말에 살았던 교부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가 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The Epistle to the Corinthians)에
서 찾아볼 수 있다. 거기에 보면 '바울은 온 세상에 의를 가르쳤으며, 그가 서방의 끝
에 도달했을 때 통치자들 앞에서 증거하였으며, 이와 같이 하여 이세상을 떠났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여기서 '서방의 끝'은 당시 서바나를 가리키기 때문이다(행 19:21,
22). 이러한 클레멘트의 서신 내용을 볼 때 그의 선교 계획이 서바나까지 성취되었음
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John Murray, C.H. Dodd, E.F. Harrison, J.B.
Lightfoot).

29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줄을 아노라

ㅇ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 바울
의 확신에 찬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 확신은 로마에 꼭 도착할 것에 대한
확신이라기 보다는 그리시도의 풍성한 은혜와 능력이 바울의 로마 방문에 함께 동반하
리라는 확신이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은 헬라어 '엔 플레로마티 율로기아스 크
리스투'로 쓰여졌다.
다른 헬라어 사본(* ,   )이나 KJV에서는 '...의 복음'                         
(투 유앙겔리우투, of the gospel)이라는 말이 삽입되어 있지만 의미상으로
큰 차이가 없다. 이것은 신적인 충만함을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골 1:19)로부터 신령
한 은혜를 로마 성도들에게 풍성히 나누어 준다는 뜻으로 쓴 것이다. 여기서 '축복'이
라고 번역된 헬라어 '율로기아스'는 원래 '축복', '관대', '이익'
의 의미이나 본문에서는 구체적으로 '예수께서 주시는 풍성한 축복'을 가리킨다. 즉,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것을 예수께서 친히 완성하신 축복으로서(갈 3:8, 9), 예수 그리
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택함을 받은 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적인 축복이다(엡
1:3).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이 이러한 풍성한 주(主)의 은혜를 통해서 더욱 견고한
믿음에 서기를 원해왔다(1:11). 실제로 로마 교회를 방문하기 오래 전부터 이를 위해
항상 기도해왔다(1:9, 10). 이제 바울은 예루살렘을 거쳐서 로마에 가게 될 경우 그리
스도의 축복을 충만히 소유해서 가게 되리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충만
한 은혜와 능력이 바울과 주(主)를 믿는 모든 성도에게 영구적으로 내려질 것에 대한
확신을 보여주는 것이다(John Murray). 주님께서는 실제로 죄수의 몸인 바울을 놀라운
방법으로 로마로 가게 하셨고(행 26:30-28:15), 그의 선교 사역을 수행하게 하셨다(행
28:16-31). 이러한 체험에 근거해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축복을 확신있게 말하는 것이
다.

3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ㅇ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
를 권하노니 - 본문을 좀더 쉽게 직역하면 '형제 여러분, 나는 성령이 베푸시는 사랑
을 믿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공동 번역)라고
번역할 수 있다.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는 일반적으로 수단,
매개, 동인을 나타내는 전치사로 여기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을 매개로
하여 권유를 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형제들아~권하노니'라고
부드럽고 정중한 태도로 부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
랑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함축적으로 자신의 부탁을 보다 강력하게 나
타내고 있다(J. Murray). '성령의 사랑'
(아가페스 투 프뉴마토스)은 '성령이 지니고 있는 사랑', '성령이 성도에게 부어 주시
는 사랑'을 의미한다(E.F. Harrison).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란 말이 위엄과 권
위로써 권하는 성격이 있다면 반면에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란 말은 사랑에 호소
하는 부드러운 권고적 성격이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로 말미암고 ~로 말미암아 권
하노니'란 표현은 사도 자신의 권위나 주관이 전혀 없이 오직 크신 삼위 하나님이 그
이유와 근거와 내용이 되고 목표가 됨을 강력히 시사해준다. 그만큼 심각하고 강력한
부탁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연합된 로마의 성도들이 자신의 사역에 기도로 적극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는 것이다.
ㅇ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 바울은 그에게 닥칠
위험으로 그의 선교 계획에 지장이 초래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었다. 그는 주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처방책 즉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는 말씀에 따라
합심하여 기도하면 모든 문제를 선히 해결해 줄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고후 1:11). 여
기서 '나와 힘을 같이하여'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쉬나고니사스다이 모이'     
로 여자적으로 '죽을 힘을 다하다'라는 일사 각오
(死覺悟)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말은 신약에서 본절에서만 사용되었는데 그 뜻은
운동 경기에서 한 팀에 소속된 선수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처럼 마음과 영혼을
다 바쳐서 온 힘을 다하여 기도하라는 뜻이다(Lenski). 또한 이것은 기도가 내포하고
있는 씨름을 암시하고 있다. 기도는 끈질기고 열심히 내는 것이어야 하며 마치 투쟁
(鬪爭)과도 같은 것이다(John Murray).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계획을 성
취하기 위해 하나님이 마련하신 수단이며 성령이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이다(행 12:5).
물론 이때 힘써서 하는 기도는 자기 욕심의 응답을 위해 간구하는 기도가 아니고 어디
까지나 하나님의 뜻을 알아 그 뜻이 성취되기를 간절히 구하는 기도를 말하는 것이며
무조건 무엇이든지 기도만 하면 이루어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아무튼 이와 같이 전례
없는 강력한 기도의 요청은 현재 사도 바울이 처해 있는 그리고 앞으로 전개될 수 있
는 절박한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31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32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ㅇ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 바울이 로마 성도들
에게 강력하게 기도 부탁을 한 데에는 두 가지 주요 목적이 있었다. 본문이 그 중 한
가지이다.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의 헬라어로 '아포 톤 아페이둔톤 엔
테 유다이아'                                                              
인데 여기서 '아포'는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을 나타낸다
(Ridderbos). 그리고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이란 복음에 대적하는 유대인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데, 그들은 단순히 예루살렘이나 팔레스틴의 남부에서 뿐 아니라
전 유대 지역에서 바울을 대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Ernst Kasemann). 그는 이전
에도 그들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행 9:29, 30) 지금도 여전히 그를
대적하는 열기가 식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을 가게 될 경우 '주 예
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그 곳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고 있어야만 했
다'(행 21:13). 이런 상황 때문에 바울은 더욱 간절하게 로마 성도들에게 복음을 순종
치 아니하고 대적하는 자들로부터 화를 입지 않게 해달라고 구체적으로 기도를 부탁하
고 있다. '구원을 받게 하고'로 번역된 헬라어 '뤼스도'는 바울의 이런
심정을 잘 반영해 주는 말이다. 바울은 '자기의 생명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귀한 것
으로 여기지 않는다'(행 20:24)고 고백하였지만 유대 불신자들의 살인적 음모에 대해
서는 자신의 목숨을 무모하게 내어 맡기거나 또는 자기의 생명을 구하고자 비겁하게
타협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오직 복음의 증진을 위한 그의 뜨거운 열정 때문이었다
(John Murray). 그는 결코 불신자들의 무모한 살인적 음모에 희생당하므로 복음 전도
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이를 위하여 기도를 요청
하고 있는 것이다.
ㅇ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 본문은 바울이
로마 성도들에게 기도 부탁을 한 중요 목적 중의 또다른 한 가지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성도들이 그들을 위해 마련한 이방 교회의 구제 헌금을 감사함으로 기꺼이 받
아들이도록 기도하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방 교회의 사랑의 선물이 예루살렘 유대인
성도들의 큰 고통을 덜어주기에 아주 적절한 시기에 제공되고 있지만 그들이 이방인
교회의 헌금 받기를 거부하거나 형식적인 감사로밖에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까 염려하고 있었다(E.F. Harrison). 그 이유는 첫째,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인들
도 하나님의 합당한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인정되었지만(행 15:19-29). 그럼에
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 안의 바리새적인 유대인 성도들은 바울과 이방인 교회들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행 15:5) 둘째, 바울의 이방인에 대한 선교 사역
과 그의 활동에 관한 잘못된 거짓 소문이 예루살렘 교회에 전반적으로 퍼져 있었기 때
문이다(행 21:20, 21). 바울은 이러한 문제들을 예감하고 예루살렘 교회 방문시 이러
한 문제들로 인한 갈등의 소지가 없도록 로마의 성도들에게 미리 기도를 간절히 요청
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과 그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33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찌어다 아멘

ㅇ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 한글 개역 성경에는
헬라어 성경에 있는 '데'('이제는')라는 접속사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을 넣어
해석하면 지금까지 말한 15장 전체의 결론이 맺어짐과 동시에 로마 교인들을 향해 부
탁했던 그 내용들의 간절성이 한층 살아난다. 한편 혹자는 본절에  '아멘'
(Amen)이 있는 것을 이유로 들어 이 대목이 본 서신의 끝이고 16장은 다른 곳에서 삽입
된 독립된 서신이라고 주장한다(Kasemann). 그러나 본절의 아멘은 기도의 끝에 따라오
는 당시의 전통적인 축복 양식의 한 표현으로서 바울 사도가 지금까지 로마 교인들에
게 부탁하고 그들을 위해 축복한 내용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과 그  내
용에 대한 중요성 및 그것들이 그대로 성취될 줄을 믿는 믿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
고 사본상에서 보더라도 본장에 뒤이어 16장이 계속되고 있다. 한편 '평강의 하나님'
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호 데오스 테스 에이레네스'                           
는 바울의 다른 서신서에서도 축도 중에 자주 언급되고 있다(16:20;고후
13:11;빌 4:9;살전 5:23;살후 3:16). 이것은 유대교적 표현으로서 바울이 '평화' 
(에이레네)를 하나님과 함께 관련지어서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기본적으로
성도의 평강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John Murray). 이 평강의  본래
적인 의미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 구원이 보증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로서
영혼의 평온한 내적 상태, 항상 만족한 상태를 가리킨다(Hodge). 바울이야말로 이러한
참된 평화를 간절히 바랬고 그의 모든 독자(讀者)들이 이 평화를 누리게 되길 소원했
다. 바울은 로마에 가기 전 도중에 방문할 예루살렘에서의 많은 충돌과 고난을 예상했
기에 이 평화를 갈구했고(행 21:13), 또한 로마의 성도들에게도 영적인 일치와 기쁨의
신앙 생활을 위해서는 참된 평화가 있어야만 했음을 안 것이다. 그런데 평화를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 뿐이었다. 왜냐하면 평화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
다. 따라서 바울은 평강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해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즉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함으로써 주어지는 모든 축복이 로마 교회 안에 충
만하게 나타나기를 바라는 사역자의 심정을 잘 보여준 것이다(J. Murray).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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