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사도행전

[스크랩] 사도행전 (9 : 1~43)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0:32
사도행전 9장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ㅇ주의 제자들을 -
   사울이 핍박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명칭으로 언급된 '주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인들
에 대한 누가의 다양한 표현 중의 하나이다. 누가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표현을 '그 도
를 쫓는 사람들'(2절), '제자'(10절), '성도들'(13절),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14
절), '형제'(17절) 또는 '형제들'(30절) 등으로 다양하게 언급하고 있다.
ㅇ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 기독교인에 대한 사울의 잔혹한 행위를 심리적으로 묘사
이다. '위협'으로 번역된 '아페일레'는 '경고'라는 말로도 해석되는데
여기서는 당장이라도 '살해'를 할 것 같은 위협적인 모습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같은 바울의 심리 상태를 '등등하여'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동적인 면을 강조하
고 있는데 이 말은 본래 '숨을 쉰다'(breathe)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표현
은 사울의 호흡이 살기와 위협의 숨소리로 들릴만큼 박해가 잔인했음을 보여줌과 동시
에 사울의 행위가 얼마나 능동적인 행위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사
울 자신은 박해 행위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과 우월감에 도취되어 있었던 것 같다.
ㅇ대제사장에게 가서 - 사울이 대제사장에게 간 것은 기독교인에 대한 체포권을 부여
받기 위함이다(2절). 유대인 중에서도 가장 엄격한 바리새파에 속한 사울이(26:5) 예
수를죽이기로 음모하고 이를 실행했던 대제사장, 바리새인들(눅
19:47;20:19;22:52;23:10)과 같은 노선에 있었음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당시 대제사
장은 칠십 인으로 구성된 의회 '산헤드린'의 의장으로서 로마로부터 인정받은 권한 곧
사법권과 행정권을 팔레스틴 내.외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행사할 수 있었다.
당시 대제사장이 '가야바'(A.D. 18-37)였는지 그 후임자 '데오빌로'(A.D. 37-38)였는
지 알 수 없으나 사울의 회심을 A.D 35년경으로 본다면 '가야바'가  대제사장이
었을 가능성이 높다(Lenski).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학자는 '데오빌로'로 추정한다
(alford, Levin). 그러나 사울의 회심 연도를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두 가지 견해
모두 가설에 불과하다.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ㅇ다메섹 여러 회당 - 사울의 행선지로 언급된 다메섹은
예루살렘 동북쪽 약 230km정도 거리에 위치한 고대 도시로서 삼 면이 산악으로
둘러싸인 해발 671m의 고원 지대이다. 이곳은 아브라함때 부터(창 14:15;15:2)
다윗 시대(삼하 8:6)와 솔로몬 시대에(왕상 11:24) 걸쳐  계속언급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B.C.73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하고 B.C.64년부터
로마의 지배 아래 있게 되었다. 초대 교회 당시 다메섹에 거주했던 유대인의 수는
상당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A.D. 66년 네로 박해 때 약 10,500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
는 요세푸스(Josephus)의 보고가 이를 뒷바침한다. 따라서 당시 유대인들의공동체에
있어서 중심 기구라고 할 수 있는 회당도 상당수에 이르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곳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아마도 예루살렘 박해 때(8:1-3) 예루살렘으로부터 피신해 간 유대
기독교인들과 그들에 의해 개종된 유대인들로 추정된다.
ㅇ그 도를 좇는 사람 - 여기서 언급된 '그 도'란 기독교를 묘사하는 다양한 표현중의
하나다. 누가는 단순하게 '도'로만 언급하기도 하며(19:9, 23;22:4;24:14, 22)
'주의 도'(18:25)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용어로 '도'란 말을 언
제부터 사용하게 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아마 예수를 '생명의 길'로 교회가 인식하
고 있었던 데서 비롯된 것 같다.
ㅇ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 사울이 이방 지역에서 행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묘사
하고 있는 본 구절은 당시 대제사장이 이방의 유대인들에 대해서 막강한 권력을 지니
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ㅇ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 본 구절은 예루살렘이 교회 탄압의 중심이며 유대인들에
대한 행정의 중심지도 됨을 보여준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대제사장이 이방 지역의 유
대인에게까지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마카비1서 15:15-21에 따르면
루기오(Lucius)총독은 유대에서 도망한 자들을 대제사장이 유대법에 따라 처벌할 수
있도록 프톨레미에게 요청한 적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아마 글라우디오 황제와 매
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헤롯아그립바 1세가 분봉왕으로 유대를다스렸으
므로 대제사장에게 상당한 권한을 부여했을 것이다.

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ㅇ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
   본 구절은 사울이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 초자연적 개입이 일어난 것에 대한 묘
사이지만 그 지점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한편 '빛'이 22:6에서는 '큰 빛'이라고 언
급되고 26:13에서는 '해보다 더 밝았다'고 묘사되어 있다. 이에 대해 혹자는 하늘로
부터 온 빛에 대해 강조하기 위한 의도와 함께 같은 이야기를 반복함으로써나타나는
이야기의 단조로움을 없애기 위한 저자의 배려로 이해한다(Haenchen). 그러나 오히려
바울이, 둘러 비친 그 빛에 대해 묘사하기에 어려움이 있었으므로 간증할 때 조금씩
달리 표현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그에게 둘러 비친 '빛'의 성격은 그빛에 대해
언급된 세 곳의 묘사를 종합해 봄으로써 파악할 수 있다.
ㅇ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 26:13에서는 같은 상황을 묘사함에 있어서 "나와 내 동행
들을 둘러 비추는지라"고 하였다. 이 차이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다. 즉 본절에서는 오직 사울이 예수를 만난 사건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나,
26:13에서는 사울 자신의 회심 사건에 있어 현장 목격자들도 있었음을 나타내기 위해
서 일행들에게도 동일한 빛이 비추었다는 진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
고 22:9의 기록은 본절과 26:13의 중간 형태를 취하고 있다. 아무튼 사울과 함께 다메
섹으로 가던 일행들도 사울이 경험한 그 빛을 목격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ㅇ땅에 엎드러져 -
   본 구절은 갑자기 내려 비취는 빛에 의해 나타난 사울의 반사적 행동에 대한 묘사
다. 여기서 '엎드러져'라는 단어 '페손'은 '떨어진다', '넘어진다'의 뜻
으로 쓰러지듯 엎드린 사울의 행동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반사적
이면서 두려움에 휩싸인 즉각적 반응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이 말을 타고 갔다
면 말에서 떨어지다시피하여 땅 위에 엎드렸을 것이다.
ㅇ사울아 사울아 - 혹자는 구약 시대에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것이 격식을 갖추는
습관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Longenecker). 그러나 사울에게 들려진 예수의 음성
은 분명히 애정어린 음성으로 이해된다. 본절 외에 성경에서 이름을 두 번씩 불렀던
경우는 아브라함(창 22:11), 모세(출 3:4), 사무엘(삼상 3:10), 시몬(눅 22:31)을 들
수 있다. 이는 부르는 대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낸다.

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ㅇ주여  뉘시오니이까 -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알지 못하는 음성에 대하여 사울은 '주여'(퀴
리에)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호칭은 자기를 부르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인식했음이 아
니다. 이는 사울이 곧이어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자신을 부른 자의 정체를 묻고
있다는 점에서 알수 있다. 아마도 초자연적 어떤 힘앞에서 나약한 인간의 의식으로부
터 나온 호칭으로서 짐작된다.
ㅇ나는...예수라 - 본절의 헬라어 본문에는 복음서에서 예수의 자기 선언의 한 양태
인 '에고 에이미'가 언급되었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선
언하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를 70인역(LXX)이 '에고 에이미'의 문장으
로 표현한 데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예수는 '에고 에이미'를 사용하심으로써 구약에서
모세가 만난 그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자기 선언을 하신 것이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란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의 선포 근원이 하나님이심
을 밝힌 반면 예수는 스스로의 신적권위를 나타내신 것이다. 본절에서도 역시 예수는
사울에게 하나님으로서 자기를 선언하심으로써 세상에서 사역하실 때와 동일한 언어
습관을 나타내셨다.

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ㅇ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
   자신의 정체를 밝힌 예수께서 곧이어 사울에게 일방적으로 지시하셨던 것은 다음
두 가지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1) 사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미 예수께서 그를
자신의 제자로 지명하여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2) 사울이 예수에 대
한 어떠한 반응도 없이 일방적으로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은 부활한 예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암시한다. 이 두가지 의미를 종합해 보면 사울의 소명 의식이  부활한  예수의
강권적인 능력의 부름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표현은 예수가 사울을 아
시기 위해 이미 예정된 계획을 가지고 계셨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26:16과 본절은 내
용 전개상 약간의 모순이 있다. 즉 26장에서는 아나니아와 사울에 만남에 대해서 생략
되어 있으며 사울의 소명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어진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
러나 본절은 사울의 소명이 그가 다메섹성에 들어간 후에 주어질 것으로 묘사하고 있
다. 이 같은 불일치는 26장이 사울 자신의 체험을 간략하게 전달하는 것이므로 그 체
험에 담긴 내용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울은 아나니아를 통해 받
았던 소명을 다메섹 도상에서 받은 것처럼 묘사했던 것이다. 한편 본절은 헬라어 본문
에서 접속사 '알라'('그러나')로 시작되고 있으나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았다. 여기서 혹자는 앞절과 연관지어 '나는 네가 행한 일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너는 지금 어떤 일을 해야한다'라는 의미로 이해하여 '알라'를
문자적으로 해석한다(Lenski). 그러나 혹자는 '알라'를 감탄사 정도로 생각하여 '자'
로 번역했다(Haenchen). 여기서 어느 해석을 취해도 앞절과 본절의 연결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래서 어떤 영역 성경 중에는 '그는 떨면서 놀라움에 사로잡혀 주여 내가 무
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말했다'는 구절을 첨가시켰다(KJV, MLB). 이는 22:10과 조화시
키기 위한 첨가로 짐작된다. 아마 바울은 자신이 핍박하는 자들이 섬기던 예수를 만나
자 놀라서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물었던 것이다.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ㅇ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
   사울과 함께 동행하였던 사람들의 반응을 묘사하면서 그들이 시각적으로아무것도
감지하고 있지 못함을 언급하고 있으나 22:9과 26:14에서는 각각 조금씩 달리 설명했
다. 22:9에서는 일행이 소리는 못들었어도 빛은 보았다고 진술하여본절과정반대의
상황을 나타내었다. 반면 26:14에서는 사울과 그 일행 모두가 엎드려졌다고한점으로
보아 모두가 초자연적 경험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바울의 세 가지 진술이 모
두 서로 일치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언급된 '소리'는 음성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바울에게 명령한 음성이 예수의 음성인지 아니면 사울의 음성(5절)이었
는지 분명히 알 수 없다. 또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이 하늘로부터 온 빛을 말하는 것
인지는 분명치 않다. 이러한 의문들을 종합해 보면 다음 두 가지의추측이가능하게
된다. (1) 일행들은 '주여 뉘시오니이까?'라는 사울의 외침만 들었을 것이다
(Chrysostom, Bruce). (2) 그들이 무슨 소리를 듣기는 들었으나 그 소리가 무엇을 의
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Bengel). 여기서 강조된 분명한 사실은 사울이 환
상이라고 할 수 있는 초자연적 경험을 하였고 그 사건을 목격한 자가  있었다는 것이
다. 그러나 목격자들은 사울이 어떤 경험을 하였는지 구체적으로 증언할 수 없는 피상
적이거나 부분적인 이해만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22:9과 26:14의 기록과 본절
의 기록이 지닌 차이는 모순이라기 보다는 구체적으로 초자연적인 경험을 한 사람은
사울뿐임을 강조하는 기능을 갖는다.
ㅇ말을 못하고 섰더라 - 본 구절은 사울의 일행들이 무엇인가를 경험하면서도 아무
말을 못하고 있음을 묘사하는 표현이다. '말을 못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네오이
'에 대해 혹자는 '공포로 인하여 말을 못하고 벙어리가 되었다'는 의미
로 해석한다(A.C. Hervey).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는 한번도 언급되지 않고 다만 70
인역(LXX)의 사 56:10에서 짖지 못하는 개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사
56:10에서는 이 단어가 공포와는 관계없이 어떤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와
연관되어 사용되었다. 아마 누가는, 사울의 일행이 자신들과 사울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 전혀 깨닫지 못한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한 것 같다.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ㅇ일어나 눈은 떳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
   사울이 예수의 음성을 듣고 있었던 모습은 땅에 엎드러진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보지 못했다'라는 말은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사울이 보고자 했으나 볼 수 없
었던 상태, 즉 빛을 경험한 순간부터 일어서는 시점까지 보이지 않고 있는 사태를 암
시한다. 따라서 사울이 경험한 소명 사건은 가시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이었다기 보다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의 음성을 들었던
사실은 내면적인 사건으로 돌릴 수 없다. 사울이 빛으로 인해 예수의 모습을 보지 못
했을지라도 그의 음성은 그에게 실제로 들려왔다. 한편 그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상태
에 대해 몇몇 학자들은 사울이 회심하기 전까지의 영적 무지에대한 상징으로 생각한다
(Calvin, De Wette). 그렇지만 본문에서는 그러한 증거를 발견할 수 없으므로 그 생각
은 별로 타당성이 없다(Meyer). 오히려 이 사건은 사울에게 실제로 발생한 사건에 대
한 구체적인 증거였다.

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ㅇ사흘 동안을 보지도 못하고 심음을 전폐하니라 -
   여기서는 강조점은 보지 못함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한
사실이다. 즉 사흘 동안에 걸쳐 사울에게 내면적인 어떤 큰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마도 사울 자신이 지금까지 배웠고 자랑스럽게 고수했던 사상 체계와 자
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경험한 예수의 음성을 연관지어 깊은 고뇌나 생각에 빠졌을 것
이다. 특히 '사흘'(엔 헤메라스 트레이스)이라는 숫
자는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보낸 요나의 이야기(마 12:40)나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
예수의 부활처럼 사건의 대전환을 예고한다. 이와 같이 사울의 회심은 자기 자신의 엄
청난 내면적 고통을 통한 결단이었다. 이 사흘 동안 사울은 다메섹 도상의 경험을 구
약적 차원에서 재해석해야 했으므로 그의 신학적 체계가 일순간에 무너질 수 있기에
신중을 가했다.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ㅇ그 때에 -
   헬라어 본문에는 특정한 시간을 지시하는 접속사가 없고 이야기의 진행을 자연스럽
게 연결하는 접속사 '데'('그러나')만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데'를 생략하든
지 아니면 '한편'이란 접속사로 연결시키는 편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 - '제자'로 언급되는 '아나니아'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흔한
이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5:1;23:2). 이 이름의 히브리적 본래 의미는 '여호와는 은
혜로우시다'라는 뜻을 갖고 있었다. 그 이름의 뜻에 걸맞게 아나니아는 유대인들로부
터 칭찬을 듣는 경건한 자였다(22:12). 그런데 그가 어데게 제자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는 언급이 없다. 한편 '제자'는 기독교인에 대한 누가의 다양한 표현 중의 하나다(1절
주석 참조). 22:12을 볼때 아나니아가 다메섹에 오랫동안 거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예
루살렘 박해 때 피신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으며오순절때  기독교인이되었거나
(2:5-11) 아니면 그 이전 예수의 활동 당시 예수를 따랐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일 것으
로 짐작된다.
ㅇ환상중에 불러 - 본 구절은 아나니아의 구약적인 계시 경험(삼상3:1-9)에
대한 진술이다. 이 언급은 사실적 묘사라기 보다 신적 계시에 대한 문학적 묘사로 이
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환상은 하나님의 계시의 방편으로서 계시 전
달자에게 실제적으로 일어난다. 본절에서 아나니아가 본 환상은 (1) 사울을 택하기 위
한 주의 치밀한 섭리를 강조하며, (2) 아직도 의구심에 사로 잡혀 있을 사울에게 증거
가 되는 기능을 갖고 있다.
ㅇ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 예수의 부름에 대한 아나니아의 대답은 구약적인 형식
을 띠고 있다(창 22:1;삼상 3:4). 따라서 본절에서 사울의 소명 사건을 구약 시대의
소명 사건과 일치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11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ㅇ직가라...가서 -
   예수가 가라고 지시한 거리 '직가'는 동서로 곧게 뻗은 거리로서(Vincent)
현재는 '다르발 무스타킴'(Darbal Mustaqim)이라고 불리어진다.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 9절에서 언급된 사울의 금식 행위를 예수는 기도하는 중이
라고 언급하고 있다. 사울은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깊은 고민과
함께 절박한 기도를 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9절 주석 참조)

12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ㅇ저가 아나니아라 하는...보았느니라 -
   본 구절은 아나니아가 자신에게 와서 안수를 통해 자신의 눈을 뜨게 하여 줄 것이
라는 사실을 바울이 환상으로 이미 알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사울
에게 아나니아의 일을 보여주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사울은 두번째 환상을 본 셈이
된다. 이같이 치밀한 과정을 통해 사울의 회심시키는 사실을 볼 때 사울에 대한 예수
의 깊은 애착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울의 철저한 유대교적 사상과 기독교를 탄
압하였던 광신적 열정만큼이나 사울의 회심은 간단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가 겪고
있는 깊은 고뇌와 예수의 집요한 노력이 사울의 회심을 가능케 하였다.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ㅇ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
   본 구절은 아나니아가 사울을 직접적으로 전혀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또한 본 구절은 아나니아가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과 많은 교제가 있었음을 보
여준다. 따라서 아나니아는 이미 이전에부터 있어 왔던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임
을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서 간과될 수 없는 사실은 사울의 악명이이방 지역에까지
알려져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잔악하고 반 기독교적인 사울의 행위에 대한 강조
라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아나니아에게 있어서 악명 높은 사울에게 안수하라는
예수의 지시는 충격적인 사실로 이해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은 사
울의 회심이 놀랍고 충격적인 사건임을 강조하는 효과를 지닌다.
   주의 성도 - 이말은 기독교인에 대한 누가의 다양한 표현 중 하나로 '구별된 거룩
한 자'를 의미한다. 32절과 41절에서는 단순히 '성도'라고 언급하고 있다. 본문에서 '
주'라고 번역된 '당신'(수)이라는 표현은 성도와 예수와의 관계를 밝히고 있
다. 이는 성도에 대한 박해가 예수에 대한 핍박이며(5절) 따라서 사울이 예수와 적대
적 관계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예수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
박하느냐'(4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ㅇ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 -
   기독교인에 대한 또 다른 명칭이다. 명칭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절 주석을 참조하
라. 누가는 기독교인에 대한 다양한 표현을 통해서 이야기의 지루함을 피할분 더러
기독교인에 대한 당시의 다양한 이해를 소개하고 있다. 사람이 주의 이름을부른다는
것은 그가 구원받았음을 의미한다(몸 10:13). 그렇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는 성도를 의미한다.

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ㅇ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
   13, 14절에서 아나니아의 입을 통해 사울의 반 기독교적 행위가 언급된 후 예수로
부터 사울의 소명이 극적으로 선포되고 있다. 사울의 선교 대상이 크게 세 가지
로 언급되었다. (1) 이방인, 여기서 예수는 유대 이외의 모든 나라에 대한 선교를 첫
번째 관심사로 언급하고 있다. 사울이 이방인에 대해 배타적이며 광신적인 유대인이었
다는 점에서 이 같은 소명은 사울의 회심에 걸맞는 매우 극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임금. 이는 세속적인 권력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아그립바 왕
(26장), 가이사(딤후 4:16, 17)등 집권자들 앞에서 증언하였던 사울의 선교 활동을 통
해서 이 소명이 실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이스라엘 자손들. 사울은 자기 민족에
대한 깊은 애정을 지녔으며 회심 후에도 그 애정을 잃지 않았다(롬 9:1, 2).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기 민족에게도 복음을 전할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이처럼 사울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았다. 다만 베드로를 비롯한 많은 사도들이유대인을
상대로 전도 활동을 했으므로 사울 자신은 이방인을 상대로 그 사역을 감당했다(갈
2:8).
ㅇ택한 나의 그릇 - 선택된 그릇에 대한 히브리적 표현법으로서 사람을 가리킬 때 사
용되었다(렘 22:28;51:34). 사울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도구로서하나님께 선택된
자임을 의미한다(롬 1:1;갈 1:15).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ㅇ그가...받아야 할 것 -
   본 구절은 복음전파를 위한 소명과 함께 사울이 겪어야 할 고난에 대한 예언으로서
그 고난이 필연적인 것으로서 언급된다. 이 같은 예고는 13절에서 언급된 아나니아의
말과 사응하는 표현으로 사울이 기독교인들에게 해를 입혔던 것처럼 자신도 해를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해'는 고난의 의미로서 보복의 차원
이 아니다. 즉 기독교인이 당하게 될 의로운 고난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바울은 예수를 따르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는 예수의
명령을(마 16:24;막 8:34;눅 9:23;14:26, 27) 실천해야 했다.
ㅇ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 '보이리라'로 번역된 '휘포데잎소'는
'지시하다', '증거하다'의 의미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사울에게 보이시겠다
는 것은 환상이 아니라 앞으로의 겪어나갈 실제적인 고난을 말한다. 즉 사울은 환상을
통해서 자신이 예수를 위해 어떠한 고난을 얼마나 당하게 될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기
보다는 실제로 선교 사역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것들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ㅇ형제 사울아 -
   아나니아는 예수의 지시에 따라 사울을 방문하여 안수하고는 '형제'라는 호칭으로
사울을 부르고 있다. 특히 '형제'(아델포스)라는 칭호가 암시하는
바 그 의미는 매우 크다. 왜냐하면 이미 아나니아는 사울의 반 기독교적인 행위로 인
해 적대적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13, 14절). 따라서 여기서 '형제'라는 호칭은 사울
의 모든 악한 과거가 용서되고 사울을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으로  선언하는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ㅇ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 아나니아의 이 말은 사울의 선교 활동이 성령의 인도
에 따른 것임과 사울에게도 사도적 능력이 부여됨 그리고 그가 참된 기독교인이 되었
음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안수는 성령이 임하는 방편으로 이해된다(8:17). 본절에서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하면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는 말을 했으나 사울이
성령으로 충만케 되었는지에 대해서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다만 사울의 눈이 치료되
어 세례받은 사실과 이 후의 행적으로 미루어 보아 이때 성령의 충만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ㅇ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
   사울이 다시 보게 된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가 보지 못하게 된 원인이 제거됨을 묘
사하고 있늠 본문은 의학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Lumby, Haenchen, Hervey). 혹자는
이 기적을 사울이 경험한 주관적 느낌이나 상징적 표현으로 이해한다(Weiss, Barnes).
그러나 이 사건은 물리적으로 나타난 사실적 현상이다(alford, Bengel, Knowling). 왜
냐하면 상징적 의미만을 전달하려 했다면 단순히 '눈을 뜨게 되었다'는 표현만을 사용
해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누가는 사울의 눈이 치유된 기적이 실제로 발생한사건이며
그 사건을 사울의 부름받음에 대한 증거로 기록했던 것이다
ㅇ세례를 받고 - 기독교인 됨에 대한 의식으로서 사울은 아나니아로부터 세례를 받게
되는데 이 세례가 빌립이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에게 베풀었던 것과(8:36-38)
같은 형식을 취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에 대해 혹자는 다메섹에 침례할만한 강이 없
었다는 점에서 볼 때 침례가 행해질 수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현대에 행해지는 형식의
간단한 예식을 치렀을 것이라(Lenski)고 말한다. 또한 어떤 학자는 다메섹에 있는 유
다의 목욕탕에서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Earn). 그
러나 이러한 추정들은 확실한 근거에 입각한 것이 아니다. 본절에서 누가가전달하고
자 하는 요점은 사울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여 믿음의 공동체에 가입했다는 사실
이다.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쌔

ㅇ강건하여지니라 -
   사울이 음식을 먹고 강건하여졌다는 본문은 9절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사울의 금
식이 끝났다는 단순한 의미 외에 사울의 내적 갈등과 고뇌의 종결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본 구절은 사울의 변화된 새로운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강건하여지니
라'라는 단어는 사울의 변화가 매우 긍정적으로 나타난 것임을 암시한다.
ㅇ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 사울이 다메섹에 거주하는 기독교인들과 함께 지냈다
는 사실은 그가 기독교인으로 변화되었음을 암시하며 또한 그가 다메섹의 기독교 공동
체로부터 기독교인으로 인정받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회심과
선교시작 사이에 나타난 며칠간의 공백 기간에 대한 갈 1:16, 17과의 차이점이다. 즉
본절과 20절에는 사울이 회심한 후 곧바로 복음 전파 사역을 시작했으며 여러 날 후
에루살렘으로 간 것으로 묘사된 반면 갈 1:16, 17에서는 그가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다고 진술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조금씩 견해가
다르다. 혹자는 회심 직후  아라비아를  다녀와서다메섹에서  머물렀다고주장한다
(Pearson).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어떤 학자들은 사울이 23절에 언급
된 '여러 날' 이후에 아라비아로 갔을 것으로 추정한다(Neander, Meyer). 그 외에 올
스하우젠(Olshausen) 같은 학자는 25절 사건 이후에 사울이 아라비아로  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누가의 기록과 바울 자신의 진술을 문자적으로 일치시킬 필요가 없
다. 누가는 사울이 회심 후부터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까지의 일을 간략하게 기록한 반
면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함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햇수를 밝힐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 이후부터 26절 사이에는 3년이란 기간이 걸렸으며 사울은 이
동안에도 복음 전파를 했을 것이다.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ㅇ즉시로 각 회당에서 -
   사울의 첫 복음 전파의 장소가 회당으로 소개되어 2절에 언급된 회당과 대조되고
있다. 즉 사울이 기독교인을 핍박하기 위해 방문하기로 되어있는 장소였던 회당이 복
음을 전파하는 장소로 뒤바뀜으로써 그의 회심이 극적으로 강조되었다. 한편 '각 회
당'이란 표현은 사울의 설교가 여러 회당에 걸쳐 계속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로
보아 사울이 큰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음을 알 수 있다.
ㅇ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이가 예수이심을 확신
했기에 그 예수와 하나님의 아들을 서로 연관지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예수를 따라 다녔던 자가 아니었기에 자기가 만난 예수와 하나님의아들을연관지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서는 메시야와 하나님의 아들을 신학적으로 깊
게 연결한 혼적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ㅇ듣는 사람이 다 놀라 -
   여기서 누가는 사울의 설교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을 언급하면서 사울의 과거를 언
급함으로 사울의 회심을 강조하고 있다. 본 구절에 언급된 청중은 회당에 모인 비기독
교적 유대인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을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라고 칭하여
그들이 제 삼자적 입장에 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청중들의 놀람은 사울의
회심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이라기보다는 부정적인 반응, 즉 사울에대한 반감이라고
볼 수 있다(Haenchen). 특히 23절의 언급은 유대인들이 사울을 배교자, 배신자로 여겼
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ㅇ사울은 힘을 더 얻어 -
   본 구절은 청중들의 반감에 상응()하여 표현된 반응으로서 청중들의 반감에 개
의치 않고 오히려 더 기세를 높여 증거하는 사울을 부각시킨다. 뿐만 아니라 누가는
영적인 힘이 증가되고 점점 담대해지는 사울의 모습을 나타내 주고 있다.
ㅇ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 본절에서의 설교는 20절에서의 설교와 표현만
다를 뿐 그 내용은 같다. 이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하는 것이 사울의 일관된 메
시지의 중심이기 때문이다(고전 1:23). 한편 여기서 언급된 '증명하다'로 번역된 '쉼
비바조는 본래 '연결시키다'는 뜻과 함께 '논증하다', '가르치
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사울의 설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여러가지
의 자료들을 모아 논증적으로 예수의 그리스도됨을 가르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ㅇ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슁케오'는 '
혼란케하다', '섞다'의 뜻을 지니므로 사울의 설교 내용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혼란에
빠져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갑작스런 사울의 회심과 그의 설교 내용은 유대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공동 번역은 이러한 의미로 번역했으며 대부분의 영역 성
경도 이 의미로 번역했다(KJV, RSV, MB). 이러한 유대인들의 반응은 다음절에 언급되
는 유대인들의 음모에 의해 더욱 분명해진다. 따라서 개역성경의 번역은 정확하다고
볼 수 없다.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ㅇ여러 날이 지나매 -
   이 표현은 사울의 선교가 시작된 후 유대인들의 살인 공모가 있게 된 시점까지 상
당한 시간의 경과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여러 날' 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메라이 히
카나이'는 19절의 '며칠'(헤메라스 티나스)과는 달리 상당히 긴 시간의 간격을 의미한
다. 이러한 시간적 간격에
대해 많은 주석가들은 사울이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메섹으로 돌아간 기간이 삼 년으로
암시되어 있다. 그러나 엄격하게 아라비아에서 다메섹으로 돌아간 기간을 삼년으로 규
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갈 1:18의 삼 년은 바울의 회심으로부터 예루살렘에 이르기
까지의 전 기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특히 바울은 자신이 아라비아에서 얼마동안 머
물렀는지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날'에 대한 시간적 규명은
어렵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사울이 회심 이후 약 삼 년여에 걸쳐 예루살렘에 들어
가지 않고 다메섹에서 사울의 선교 활동이 상당한 기간 동안 진행 되었을 것이라는 사
실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울에 의한 파문은 유대인 공동체에 있어서 충격적인 도전
으로 인식되지 않았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사울의 지속적으로 예수를 전하여 많은 유
대인들이 혼란에 빠지게 되자 위기감을 느끼고 사울을 죽이려 했을 것이다.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ㅇ저희가...선문까지 지키거늘 -
   고후 11:32에 의하면 '아레다 왕의 방백'이 성을 지킨것으로 사울은 언급했다. 여
기서 역사적 고증에 따른 어려움이 발생하게 된다. 당시 다메섹은 나발인들이
소유하여 그들이 성을 지켰다는 설(H. Schlier)이 있는가 하면 나바티안족들이 다스렸
다는 설도 있다(Loisy, Lake). 당시에는 유브라데스 강에서 홍해까지 뻗쳐있는 나바티
안 아랍 왕국이 있었으며 이곳의 통치자는 아레다 4세(B.C. 9-A.D. 40)였다. 유대인들
이 나바티안 족의 방백을 매수해서 사울을 잡고자 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두번째
견해가 더 타당하다. 이처럼 사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은 과격한 것이었다.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ㅇ그의 제자들이 -
   누가는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사울을 탈출시키는 사람들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그
의 제자들'이란 호칭을 사용한다. 여기서는 문맥상 '사울의 제자들'이라는 말로 해석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칭 대명사 '그의'(아우투)는 앞절에서 언급된
사울을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이들에 대해서 다음 세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이들은 사울이 다메섹으로 갈 때 예루살렘에서부터 따라간 동행인이었을 것
이다. (2) 다메섹에서 행한 사울의 설교에 감동되어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유대인들일
것이다. (3) 이전부터 있었던 기독교인들로 사울을 따르며 그를 도왔을 것이다. 그런
데 여기서는 (2)의 견해가 가장 적절하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상당 기간 전도 활동을
했으므로 그곳에 상당한 추종자들이 있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ㅇ광주리 - 이 말의 헬라어 '스퓌리스'는 예수가 4,000명을 먹이신
기적때 언급되었던(마 15:37;막 8:8) 것과 동일한 단어이다. 그러나 사울이 고후
11:33에서 직접 언급할 때에는 본문에서 언급한 갈대 광주리와 구별되는 끈으로 만든
바구니 '사르가네'가 언급되었다. 사람을 달아내리는 데는 사울이
직접 언급한 '사르가네'가 보다 더 정확할 것이다. 그렇지만 '스퓌리스'와 '사르가네'
가 본절과 고후 11:33에서 구별없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광주리에 담겨져 탈출
한 것은 그 당시의 위기적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회심으로 인해 겪게 되는
사울의 첫번째 수난이라는 점에서 16절에서 예수가 아나니아에게 예언한 그의 고난이
시작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ㅇ예루살렘에 가서 -
   갈 1:18에 의하면 사울은 예루살렘으로 삼 년만에 돌아오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15
일 동안 체류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오게 된 동기는 베드로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제자들을 사귀고자 - 여기서 언급된 제자들이란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사도를 가리
킬수도 있고 일반 기독교인을 지칭할 수도 있다. 그런데 갈 1:19에서 바울은 예루살렘
에서 야고보 외에 다른 한 사도도 만나지 못했음을 진술했다. 따라서 여기에 언급된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성도들을 총칭하는 표현이다.
ㅇ다 두려워 하여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 - 본문은 사울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
의 반응으로 교회가 사울의 회심을 믿지 않고 경계하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사울의
제자됨은 본인이 직접 말한 것인지 아니면 소문으로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는지 분명하
게 구분할 수 없다. 아마 소문으로도 이미 알려져 있었을 것이고 자신 또한 직접 제자
됨을 언급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소문은 다메섹과 예루살렘이 거리상 많이 떨어져
있었으므로 정확하게 전달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사울에 대
한 신회를 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도들은사울에게서 직접
듣고도 믿을 수 없었던 것도 역시 사울의 회심이 상식적으로 납득될 수 없을 만큼 예
기치 못한 사건임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여기서 '제자됨'이 사도성을 뜻하는
말인지 단순히 '기독교인이 됨'을 뜻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만약 사도됨을 진
술하려고 의도했다면 누가는 일반 성도의 의미인 '제자'란 용어 대신 '사도'란 용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ㅇ바나바 -
   사울이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냉대를 당할 때 사울을 사도들 앞에
서 보증해 준 바나바는 구브로(Cyprus)섬 출신으로서 레위인이며 본명은 요셉이었다.
그에게 설교하는 능력과 위로하는 능력이 인정되어 바나바라는 이름이 사도들에 의해
주어졌다(4:36).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 교회에 바쳤으며(4:37) 안디옥 교회
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사울과 동역자가 되어 활동하기도 했다(11:24-30;13:2-4). 이
러한 그의 경력으로 보아 사울이 예루살렘에 갔을 당시 바나바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
서 상당한 신임을 얻고 있을 뿐 아니라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사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는지는 본문 가운데 전혀 언급이 없다. 아마
도 그는 사울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전적으로 신뢰하였을 것이다. 결국 사울은 바나
바의 도움으로 사도들을 만나게 되는데 갈 1:19에 따르면 야고보만만났다고 사울은
말하고 있다. 따라서 누가가 언급한 '사도들에게'란 표현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본서 가운데서 '사도'란 표현은 열두 제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14:4, 5,
14). 따라서 본절의 '사도들'은 당시 그들과 비슷한 위치에서 사역을 하던 자들로 짐
작된다.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ㅇ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었다는 말은 예루살렘 교회로 부터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
아들여졌다는 의미이다. 본문을 직역하면 '그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었다'라는
뜻이 된다. 즉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는 말이며 기독교인들
로부터 경계받거나 배척받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ㅇ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
   누가는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울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사울의 설교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사울이 선교 활동에 어떻게 임했는지에 대해서만 언급
했다.특히 '담대히 말하고'라고 해석된 헬라어 '파르레시아조마이'
는 '숨김없이 자유롭게 말하는'의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누가는 사울의 설교 내용
보다 사울이 예루살렘의 기독교 공동체로부터 인정되었으며 자유롭게 선교 활동을 했
다는 사실에 더 관심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누가가 바울의 사도성을 나타내
기 위한 구체적인 첫 진술로도 이해될 수 있다.
ㅇ헬라파 유대인들과...변론하니 - 여기서 언급된 변론자들은 유대에 거주하는 유대
인이면서 헬라적 문화와 철학의 영향을 받아 논쟁하기를 좋아했던 사람들로 보인다.
이들이 기독교도였는지 아니면 기독교에 대해 배타적인 유대인들이었는지는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들이 사울을 죽이기로 모의했다는 점에서 기독교에 배타적인 감정을 지
닌 유대인들로 짐작된다. 당시 유대 사상가 필로(Philo)가 헬라 철학을 이용해 성경을
해석할 정도였으므로 유대인들에게 헬라 철학이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
다. 그후 헬라 철학이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후 헬라 철학은 교부
들에 의해 신앙을 변증하고 성경을 해석하는 데 이용되었다. 이처럼 헬라 사상
은 초대 교회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사울도 헬레니즘의 중심지인 다소 출신이
므로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ㅇ형제들 -
   이에 대해서는 1절 주석을 참조하라.
   가이사랴...다소 - '다소'가 사울의 고향이었다는 점에서(11:25;21:39;22:3) 안전
한 곳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사울이 다소로 가기 위해 거쳐 갔던 곳이 '가이사랴'이
다. 이곳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가이사랴를 의미한다(Alford, Alexander, Bruce). 다
메섹에서 당한 살해 위협(23절)에 이어 사울은 예루살렘에서도 또다시 살해당할 위협
을 받고 탈출하게 되는데 이 같은 그의 수난은 선교의 실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16
절에서 언급된 예수의 예언처럼 사울이 당해야 하는 고난이며 이방인 선교를 위해 져
야하는 십자가였다.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ㅇ그리하여 -
   이 접속사는 다음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1) 사울이 다소로 피신한 것과 본절
이 깊이 연관되었음을 보여 준다. (2) 주제를 전환시키기 위해 단순히 별 의미 없이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1)의 해석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누가는 바울이 다소로 피
신함으로써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의 마찰이 해소되었음을 전해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ㅇ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 이방 지역에도 교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자가
팔레스틴 지역만을 언급한 것은 이 지역 교회가 이방 교회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누가는 사울에 의해 예루살렘을 비롯한 팔레스틴 지역이 신학적인 문제로 소
동이 벌어졌으나 그 문제가 잠잠해졌음을 보여주기 위해 이 지역에서의 교회만을 언급
했을 뿐이다.
ㅇ교회가 평안하여 - 이 말은 교회에 대한 외부의 박해가 없었다는 의미와 함께 교회
가 성장하고 있음을 뜻한다. 사울에 의해 예루살렘의 소동 외에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따른 박해도 잠잠해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로마 황제 '칼리굴라'(Caligula : A.D.
37-41)가 자신의 동상을 성전에 세우려 하여 유대인들의 거센 반발이 일어났고 41년 1
월 24일에 칼리굴라가 피살됨으로써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상대적으로 감소했던  것으
로 보인다.
ㅇ든든히 서 가고 - 이 말은 당시 건축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여기서는 교회 성장에
대한 묘사다. 바울은 교회를 건물로 생각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각 성도가 연결되어 지
어져 가는 것으로 묘사한적이 있다(엡 2:21).
ㅇ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 누가는 초기 교회의 성장이 성령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위로'라는 단어 '파라클레시스'는 '격
려', '권면' 등의 뜻을 갖고 있다. 여기서는 보혜사(파라클레
토스) 성령의 사역을 나타내기 위해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

32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ㅇ때에 -
   특정한 시간을 지시하는 언급은 원문에 없고 다만 '그러나' 또는 '그리고'를 뜻하
는 접속사 '데'만 언급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역성경에서는 '때에'라
는 표현을 통해 베드로의 룻다 방문이 교회가 평화롭게 성장하고 있는 시기(31절)임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는 어느 시점을 지칭하기보다 주제의 전환을 위해 '데'가 사용
되었으므로 '한편'으로 번역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ㅇ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 룻다에 오기 전 이미 베드로는 여러 지역을 거쳐 왔음을
밝히고 있는데 선교를 위한 여행이었는지 이방 지역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를 방문하는
시찰 여행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8:14에서 처럼 이방 기독교인들을시찰하면
서 동시에 전도도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ㅇ룻다 - 오늘날 이름은 '룻'(Ludd)이며 예루살렘 북서쪽 약 40km 지점에 위치한 곳
으로서 해안도시 욥바로부터 동쪽으로 약 17-18km에 위치한 비옥한 땅으로 알려져 있
다(Josephus).

33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가 중풍병으로 상 위에 누운지 팔년이라

ㅇ애니아 -
   '칭찬받는 자'라는 의미를 지닌 헬라어 이름으로서 그가 기독교인이었는지 아니면
기독교와 상관없는 유대인이었는지는 알수 없으나 32절에 언급된 '성도들'중 한 사람
이었을 것이다. 그는 팔 년 동안 중풍병을 앓아온 환자인데 본절에는 그의 나라에 대
한 언급이 없다. 그런데 팔 년 동안을 직역하면 8살부터 중풍병을 앓아온 것으로 이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번역 성경들은 애니아가 8년 동안 그병을 앓아온 것
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 이유는 어릴 때에 중풍병에 걸린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누가는 병의 햇수를 밝힘으로써(3:2;4:22;14:8;눅 13:11) 환자의 병이
이웃으로부터 확인되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또한 환자가 상()에 누워서 팔 년을 지
냈다는 표현은 거동을 할 수 없는 중병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같이 병의 깊
이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치유 능력에 대한 효과를 높여주고 있다.

34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ㅇ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
    '낫게 하시니'란 표현은 누가의 상투어라고 볼수 있다(10:38;28:8;눅
5:17;6:19;9:2, 11, 42;14:4;22:51). 이는 예수가 그 불치병을 고쳐주신다는 베드로의
확신을 전달해 주는 용어다. 나아가서 베드로의 치유 기적과 예수 그리스도를 결부시
키는 것은 예수의 치유 기적을 상기시키고 부활한 예수께서 지금도 치료자로서 성도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증언하기 위함이다.
ㅇ자리를 정돈하라 - 환자에 대한 베드로의 지시는 중풍환자를 고치며 명령했던 예수
의 지시와 비슷한 어투다(마 9:6;막 2:19). 이는 치유의 즉각성을 강조하고 예수의 능
력이 현존함을 암시하기 위한 표현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 자신이 예수의 보
낸 자임도 시사한다.

35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

ㅇ사론에 사는 사람들 -
   일반적으로 '사론'은 '평야'를 의미하며 남쪽 욥바와 북쪽 갈멜산 사이에 위치한
평야 지역을 가리킨다. 이 평야는 길이가 약 80km, 폭이 약 9-19km로 북부는 수목이
많은 평이며(사 35:2) 남부는 비옥한 농토가 펼쳐지고 있다(사 65:10). 신약 성경에서
는 이 지명이 본절에서만 나타난다. 본절과 38절을 종향해 볼 때  여기서의'사론'은
길게 뻗쳐 있는 평야 전체를 의미하지 않고 룻다와 욥바 근처의 한성읍을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된다(아 2:1;대상 27:29;사 33:9).
ㅇ주께로 돌아가니라 - 이 말은 룻다와 사론 사람들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였다는 의
미다(Bengel, Knowling). 그런데 그 지역 사람 모두가 개종하였다는 표현은 과장된 것
으로 짐작되며(Haenchen) 치유 기적이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
쳤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치유 기적은 예수의 사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초대 교회
의 확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8:5-7).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ㅇ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에제자 - '욥바'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서북쪽
으로 약 55k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해안 도시로서 현재는 '야파'(Jaffa)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이 욥바와 애니아를 만났던 '룻다'와의 거리는 약 18km
정도 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는 수리아의 통치 아래  있었다.
어떤 까닭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는지는
모르나 여기서 언급된 다비다가 이미 기독교인임을 '제자'라는 말로서 알 수 있다.
'제자'의 여성형은 여기서 처음 사용되고있다(신약성경에서).
'다비다'라는 히브리 이름으로 보아 그녀는 유대인임에 틀림없으며 그 이름은
헬라식으로 '도르가'(도르카스)로 번역되어 사용되었다.
본절의 내용으로 보아 다비다는 그 도시에서 잘 알려진 여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행
과 구제하는 일에 앞장 선 것으로 보아 그녀는 부자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39절의 내
용에 비추어 볼 때 그녀가 과부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ㅇ시체를 씻어 다랍에 뉘우니라 -
   병들어 죽은 '다비다'를 유대인의 장례 절차에 따라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Bruce).
헬라인들에게도 이러한 절차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Knowling). 저자의 의도는
장례 절차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비다가 완전히 죽어서 이미 장례 절차의 일부를
밟은 후였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40절에서 언급되는 다비다의 소생을 자연스럽게 강
조하는데 있다. 한편 시체를 다락에 뉘었다는 사실은 왕상 17:17-24과 왕하 4:32-37의
영향을 받아 다비다를 다시 소생시키고자 하는 기대에서 나온 발상으로  판단할
수 있으며 시체에 향유를 바르지 않았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하여 준다(Haenchen).  38
절에서 언급되듯이 즉시 베드로를 부르기 위해 사람을 보낸 것은 그들이 다비다를 다
시 살려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다비다가 선행을 많이 하
여 주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는 점에서 주위 사람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살
려보려고 애썼을 것이다.

38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ㅇ제자들이...두 사람을 보내어 -
   '제자 들'은 기독교인들을 가리키는 누가의 상투적 용어이며(1절 주석참조) 그들이
보낸 두 사람도 기독교인일 가능성이 높다. 36절의 '여제자'란 말로 볼 때 욥바에 이
미 기두교인이 있었음을 알수 있는데 어떤 경로로 욥바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는지 분명
하지 않다. 8:40에 건급된 빌립의 전도 여행의 영향이거나2:1-11에서  언급된바처럼
오순절 사건을 목격했던 사람들일 가능성도 있다.
ㅇ지체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 그들의 간청이 다비다를 살아나게 해 달라는 것인지
아니면 죽었으니 와서 영혼을 위로하는 기도를 해달라는 것인지 또 무조건 와 달라고
간청한 것인지 전혀 언급이 없다. 살려달라는 언급이 없다는 것에 대해 혹자는 이야기
를 더욱 섬세하게 이끌어간다는 인상을 준다고 설명한다(Haenchen). 그러나 앞에서 다
비다가 죽었다는 표현을 사용하였으므로 누가는 간청의 말에 그 표현을 굳이 반복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39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ㅇ모든 과부 -
   이들은 다비다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베드로 곁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로서 평소 다
비다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과부들로서 평소 다비다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과부들로 짐
작된다. 그렇지만 다비다도 과부였다는 가정과 함께 평소에 함께 지냈던 친구였을 가
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다만 문맥상 구제한 일이 강조되었다는 점에서(36절) 그리고
당시 과부들이 구제의 대상에 속했다는 점에서(6:1) 여기에 언급된 과부들은 다비다로
부터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로 이해된다.
ㅇ저회와 함께 있을 때 지은 속옷과 겉옷 - 렌스키(Lenski)는 다비다가 구제 활동을
위해 봉제 작업을 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며 프로이쉔(Preuschen)은 다비다의 부유
함을 말하기 위해 과부들의 그의 옷을 보여준 것이라고 추측한다. 또는 다비다가 생전
에 입던 옷을 보며 그를 추모하고 울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러나과부들이
다비다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라고 믿는다면 평소에 다비다가 그 과부들을 위
해 만들어 주었던 옷을 베드로에게 보여주며 그 은혜를 기억하고 울었을 것이라는 추
측이 가장 적절하다.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ㅇ베드로가...다비다야 일어나라 -
   본절에서 베드로의 치유 방법은 예수의 행위를 모방했다고 할 정도로 서로 비슷하
다. 사람을 다 내보내는 행위는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의상황과비슷하다
(막 5:40). 아마도 베드로는 야이로의 딸을 살릴 당시 예수에게서 배운 대로 했을 가
능성이 높다. 특히 '다비다야 일어나라'라는 말을 아람어로 번역할 경우 야이로의 딸
에게 예수가 했던 말인 '달리다굼'과 거의 일치한다(Haenchen). 또한 여기서는 34절에
서 베드로가 애니아를 고칠 때 언급한 '예수의 이름'에 대한 언급이 없다. 아마도 예
수의 행위를 그대로 모방하였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한편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는 사
실은 예수의 행위와 닮지 않았고 오히려 왕하 4:33에서 언급된 엘리사의 행위와 비슷
하다. 따라서 누가의 서술은 예수를 모방하여 행동했던 베드로의 모습과 엘리사의 사
건이(왕하 4장) 결부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ㅇ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
   베드로가 깨어난 다비다를 일으키는 모습 역시 막 5:41에서 보여준 예수의 행위와
흡사하다.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과 권위로 병을 고치면서 자신의 행위속에서 예수의
능력이 함께 함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베드로의 행위에 부활한 예수가 사도들을 통
해 세상에 계실 때와 같이 일을 하고 있음이 암시되어 있다.
ㅇ그의 산 것을 보이니 - 본 구절에 나타난 베드로의 행위는 막 5:43에서 묘사된 예
수의 행위와 정반대이다. 아마도 42절의 내용으로 보아 전도하기 위한 베드로의 의도
가 작용하였을 것이다.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ㅇ주를 많이 믿더라 -
   다비다의 회생()의 결과는 룻다에서 애니아를 치료했던 것과 동일하다. 따라서
이 치병 이야기는 초기 기독교의 확장이 치유 기적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시
사하고 있다. 아프리카, 아시아 선교 때에 의료 선교가 공헌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
서 이해할 수 있다.

43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피장의 집에서 유하니라

ㅇ시몬이라 하는 피장()의 집 -
   누가는 '시몬'이란 사람의 직업을 명시함으로써 베드로와 구별하고 있다. '피장'이
라는 직업은 동물의 가죽을 가공하는 직업으로서 오늘날의 피혁 제조업자로 이해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피혁 제조업자를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여기피했다
(Edersheim, Bruce, H.Marshall, Hervey). 그러나 베드로는 그 사람과 교제를 함으로
써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였다(눌 19:5-10). 이 사실은 또한 초기 기독교에서 신분과
직업에 대한 계급적 의식을 무시했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베드로가 천한 신분인 시몬
의 집에 머물렀음은 다음에 나오는 이방인 고넬료의 개종과 깊은 연관이 있는 듯하다.
즉 이 사건은 당시 선민 의식으로 인한 유대인들의 배타적 우월감을 깨뜨리고 천민과
이방인에게도 평등하게 주의 은총을 선포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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