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사도행전

[스크랩] 사도행전 (10 : 1~48)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0:33
사도행전 10장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ㅇ가이사랴에 고넬료 -
   베드로의 세번째 방문지로 언급되는 가이사랴는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해안 도시로
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104km 서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8:40에 의하면 빌립이 선교 활
동을 벌였던 지역 가운데 하나로 언급되는 곳이다. 이 지명에 대해서는 12:19  주석을
참조하라. 당시 가이사랴에는 총독의 관저가 있었으며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고넬료는 주둔군의 하급 지휘관이었던 것 같다. B.C. 82년 만 명의 노예를 해방시켰던
고넬료 슐라(Cornelius Sulla)의이름을본따 당시 고넬료라는이름이흔했었다
(Longenecker). 아마 고넬료 역시 그 중의 한 사람인 것 같다.
ㅇ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 - 이는 이탈리아인으로 구성된 부대로서 총독 보
호를 위해 배치된 지원 부대로 보인다. 한편 '대'(스페이라)는 본래
300-600명의 군인으로 구성되는 부대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 부대는 오
늘날의 대대 병력 정도를 의미하며 그중에 백부장은 100명의 지휘관이라는 점에서 오
늘날의 중대장급에 속하는 지휘관으로 볼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이방인 백부장이 자
주 언급되지만(마 8:13;27:54;막 15:39;눅 7:2;23:47) 부대 이름을 밝한 것은 본문 외
에 27:1에서 '아구사도대'뿐이다. 따라서 팔레스틴에 주둔해 있었던 황제 직할 부대는
2개 이상이었을 것이다.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ㅇ그가 경건하여 -
   '경건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세베스'에 대하여 혹자는 이방
인 개종자들이 지닌 독특한 경건이라고 생각한다(T. Whitelaw). 이에 대해 혹자는 그
가 완전히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proselyte)이라고 주장한다(Olshausen,Neander,
Fecht, Ritshl). 그러나 몇몇 학자는 11:3을 근거로 그가 회당 집회에는 참석했으나
할례 받은 개종자는 아니라고 주장한다(H. Marshall,Neil, Haenchen, Bruce,
Hervey). 내용 전개상으로 보아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ㅇ하나님을 경외하며 - 이말은 할례받은 유대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면서 회당 예배에
참석하는 이방 유대교인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Haenchen). 특히 이 말은 이방 유대교
인을 뜻하는 누가의 일반적인 표현이다. 혹자는 당시 이방 유대교인들은 유대인들에게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22절을 볼 때 이 견해가당시 유대인들의
보편적인 의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ㅇ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 고넬료가 경건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임
을 알리기 위해 누가는 본 구절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특히 백성을 구제했다
는 말은 곧 궁핍한 자들을 경제적으로 많이 도왔다는 말로서 초대 교회 당시 궁핍한
자에 대한 구제가 깊은 관심거리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가 유대인들로부터 칭찬을
들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유대인들에게 많은 구제를 했던 것 같다. 따라서 본문에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말은 구제와 기도에 열심을 내는 사람임을 말
하고 있다.

3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ㅇ하루는 제 구시쯤 -
   9시경은 오후 3시경이다. 고넬료는 아마 유대인들의 관습을 따라 오전 9시와 오후
3시경에 기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누가가 고넬료가 기도한 시간을 언급한 것은
(1) 환상에 대한 사실성 강조를 위한 의도와 (2)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고넬료의 습관
을 암시한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고넬료의 경건성을 부각시키는 효과도 지닌다.
   환상 중에 밝히 보매 - 고넬료가 경험한 이 환상은 9:10에서 언급된 아나니아의 경
험과 비슷하게 묘사되었다. 환상에 대해 혹자는 '인간의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하늘의 소리를 듣거나 천사를 만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정의를 내린다(Haenchen).
고넬료는 기도 중이었으므로 환상 가운데서 실제를 보듯 천사와 대면했던 것이다.
ㅇ사자가 들어와 - 구약 시대에 '사자'는 왕의 전령,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
는 선지자, 또는 제사장, 그리고 천사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신약 시대에
는 주로 '천사'에만 한정되어 사용되었다. 여기서 사자가 '들어온다'고 표현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고넬료가 공개된 장소가 아니라 개인 기도실에서 기도하고 있었던 것 같
다.

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ㅇ주여 -
   환상 중에 하나님의 사자를 바라본 고넬료의 반응은 놀라움과 두려움에 찬 것이었
다. 고넬료는 주의 사자를 '주여'라고 부르고 있지만 이는 절대자이신 하나님 또는 예
수에 대한 호칭이 아니다. 다만 자신 앞에 갑자기 나타난 초자연적 사건 앞에 당황하
며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자기 입에서 터져 나온 소리였을 것이다(9:5).
ㅇ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 주의 사자가 언급한 말은 고넬료의 신앙과 행실을 용납하
였다는 의미를 지닌 '상달하여'(아나바이노)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이는 고넬료의 기도가 하나님 보좌에까지 올라갔음을 의미한다. 즉 고넬료의 기
도가 하나님 보좌에까지 올라갔음을 의미한다. 즉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 행위가 하나
님의 뜻과 일치되었다는 말이며 고넬료가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되었다는 사실을 암시
해 준다.
ㅇ기억하신 바 - 이 말은 구약적인 표현으로(출 2:23;17:14) 위로와 격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Haenchen). 본 구절에서 누가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위로와 격려 외에
(1) 고넬료가 기독교인이 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점 (2) 이방
인인 고넬료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통해 기독교인으로 개종되는 과정이다. 따라
서 이방인에 대한 선교 정당성은 그만큼 강화된다.

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ㅇ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
   이 지명은 9:43에서 언급된 것과 연계되어 있다. 이는 본문의 지명과 이야기를 서
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저자의 의도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본문의 이야기
가 역사적 사실임도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의 욥바 체류는 고넬료를 위한 하나
님의 섭리로 나타내 보이려고 의도했을 가능성도 있다.

6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

ㅇ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
   사자는 계속해서 베드로가 머물고 있는 피장 시몬의 집을 지시하면서 그 집
이 해변에 위치하고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추가하고 있다. 따라서 언급된 지명이 더욱
정밀해짐으로써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더욱 섬세하게 느껴지게 한다. 피장 시몬의 집이
해변가에 위치한 것은 그의 직업적인 이유로 이해된다. 아마 피혁 가공 작업상 바다를
낀 곳이 유리하기 때문일 수 있으며(Lenski) 무역을 위해 바닷가에 위치해 있을 수 있
다.

7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ㅇ하인 둘과 종졸...하나. -
   사자의 지시에 대해 고넬료는 즉각적이고 정중하게 실행에 옮기고 있음을 알 수 있
다. 저자는 고넬료의 행위를 매우 진지하고 정중하게 묘사하려 했다. 그 근거는 (1)
단순히 사람을 보냈다고 언급하지 않고 보냄을 받은 사람을 구체적으로 명시했으며,
(2) 특히 '종졸'이 경건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한편 '종졸'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
트라티오테스'는 '군사'를 의미한다. 이군사는 고넬료 자신의
수하()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을 것이다.

8 이 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내니라

ㅇ욥바로 보내니라 -
   가이사랴에서 욥바까지의 거리는 약 50여km 정도로 사람이 걸어서 약 10시간이 걸
린다. 때문에 9절에서 이튿날 제육시경에 도착했다는 언급과 무리없이 연결하자면 이
들이 출발한 시각은 고넬료가 환상을 본 시각인 제 9시 직후이며 도중에서 잠을 잔 후
계속 길을 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9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

ㅇ이튿날...제 육시더라 -
   고넬료가 보낸 심부름꾼들은 최소한 전날 오후 3시 이후부터 그 다음날 정오 12시
경까지 약 20여 시간을 소요하여 욥바에 당도했다(10:1-6 주제 강해 '유대인의 시간
구분'의 도표 참조). 이에 대해 혹자는 밤을 세워 50km의 거리를 걸어서 가기에는 곤
란하다는 점에서 말을 타고 갔을 것으로 가정한다(Bruce).
ㅇ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 베드로가 기도하러간 지붕은 헨헨(Heanchen)의 말처
럼 통풍이 잘되고 햇빛이 잘드는 옥상을 가리킨다(신 22:8;왕하 23:12;렘19:13;습
1:5;눅 5:19). 아마 피장 시몬은 베드로가 머무는 동안 그곳을 기도처로 예비한 것 같
다.
ㅇ제 육시 - 시각은 낮 열 두 시로 유대인들의 기도 시간과 상관없다. 따라서 본절에
서 베드로는 유대인의 습관과는 상관없이 기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시간
적 언급은 베드로의 환상에서도 언급되는 바처럼 유대교의 종교적 관습을 타파하려는
선교적 동기를 암시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10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ㅇ시작하여 먹고자 하매 -
   배가 고파서 음식을 먹으려 하는 베드로의 심리 상태를 그린 본문은, 곧이어 언급
되는 환상과 깊은 연관이 있다. 보통 유대인들은 오전 기도시간(9시)을 지나서 아침
식사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기도를 시작한 즉시(12시경)에 배고픔을 느낀
것이 아니라 아마 기도하러 옥상에 올라가서 상당한 시간에 걸쳐 기도하던 중 배고픔
을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누가는 환상의 배경을설명하기 위해 언급했을 것이
다. 따라서 다음에 나오는 환상을 먹고 싶은 베드로의 욕구 때문에 나타난 환각과 천
청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아마도 누가는 환상이 사람의 일상적인 삶을 매개로 하여
일어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ㅇ비몽 사몽간에(에게네토 에크스타시스) - 이 말
은 환상을 경험하는 베드로의 심리 상태를 묘사하는 말로서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심리
경험을 묘사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환상'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에 대해서 3
절 주석을 참조하라.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ㅇ하늘이 열리며 -
   이 말은 매우 문학적이며 심정적 표현으로 베드로의 경험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온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표현은 환상에  대한신약적인 표현방식으로
(7:56;마 3:16;계 19:11)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나타낸다.
ㅇ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 개역성경은 여러 소문자 사본에 따라 번역했으나,
권위 있는 시내산 사본과 알렉산드리아 사본(A) 및 바티간 사본(B)은'매어'란
단어가 생략되어 있다. 생략된 대로 직역하면 '네 모퉁이로 땅 위에 머물렀다'란 표현
이 되어 그 뜻이 매우 애매 모호하게 된다. 이는 보자기 같은 그릇의 네 귀가 땅에 드
리워진 모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렇지 않고 개역 성경처럼 번역되면 그 그릇의
네 귀가 매여 땅으로 내려 오는 모습이 강조된다. 그런데 여기서 보자기 같은 것이란
표현으로 보아 네 귀가 매여 땅 위로 드리워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지 않고
여러 학자들이 지지하는(Holtzmann, Westcott, Hort) 권위있는 사본을 따라번역하면
보자기 같은 그릇이 어떠한 모습으로 드리워졌는지 모호하다. 한편 그것의 네 귀퉁이
가 동서남북 사방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으며 하늘로 부터 땅 위로 내려왔다는 점에
서 땅 위의 모든 영역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Lange, Bengel, Neander). 즉
환상에서 보여주듯이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별을 파기한 것처럼 유대의 배타적
선민 의식도 파기되고, 하늘이 온 세상을 덮듯이 온 세계가 유대인과  이방
인 곧 민족적 구별이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암시하고 있다.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ㅇ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 -
   짐승들에 대한 이목록은 창 1:24, 25을 연상하게 하는 데 아마도 여기서는 하나님
의 거룩한 피조물임을 암시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이 짐승 목록은
14절로 보아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부정한 짐승이라고 규정하여(레 11장;신 14:3-20)
상종하지 않으려 했던 짐승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창조물의 목록 중 물고기가 빠져 있
다. 아마도 물이 없는 공중의 그릇이라는 이유로 물고기를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
다(Weiss, Knowling).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ㅇ잡아 먹으라 -
   누구의 음성인지 전혀 언급없이 베드로에게 보여준 짐승들을 잡아 먹으라는 명령문
이 언급되고 있다. 이 명령은 10절에서 베드로가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준비했다는 진
술과 상응하고 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먹고자 하는 식욕 앞에, 제공된 짐승을 잡아
먹으라는 명령은 매우 반가운 제안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명령에
베드로를 시험하는 의도가 내포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명령은 베드로의 대답을 예견
한 명령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에 대한 베드로의 생각을 바꾸기 위한 것이었다.

14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ㅇ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
   베드로의 대답은 당시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대표적 생각을 나타낸 것 뿐이다. 즉
그의 대답은 생활과 종교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먹는 음식에까지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을 구분하는 유대인들의 이분법적 사고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한편 베드로는 '결코...
아니다'라는 강한 부정어를 사용하여 전면적으로 주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다. 이 같
은 부정적 대답은 주의 명령을 거부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자신의 생활이 얼마맡큼 철
저한 율범적 생활인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 같은 베드로의 대답은 모든 유대인들의
대답으로 상징될 수 있다(겔 4:14).
ㅇ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 - 본 구절은 베드로가 그 짐승들을 잡아 먹을 수 없는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 다음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1) 제공된 짐승이 종교적으로
부정한 짐승으로서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먹지도, 가까이 하지도 않는 속된 것이
기 때문이다. (2) 자신이 어려서부터 이 짐승들을 멀리하고 정한것과 부정한 것을 철
저하게 구별하며 살아온 바처럼 지금도 지켜야 될 규범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시
이 같은 베드로의 대답은 유대인들의 일반적 견해다. 베드로는 아직 환상의 의미를 제
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15 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ㅇ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니 말라 -
   이 말은 곧 유대인들이 이제까지 전통적으로 규범시해 왔던 이분법적() 사
고를 뒤엎는 타격적 선언이다. 이 같은 메시지는 이미 12절에서 짐승들을 창조하신 하
나님의 섭리를 연상케 하고 11절에서 하늘이 열리고 짐승들을 담은 그릇이 땅에 늘어
져 닿았다는 표현 속에 암시되어 있다. 본절에서 하나님의 선언은 베드로에게 보인 짐
승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을 포함하고 있다. 본 구절
은 당시 속되다고 인식되던 것을 깨끗하다고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면 속되지 않다는 의
미를 지니므로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사고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이분법적 상상들을 인간 구원이라는 차원에서 파기하고
일치와 화해, 용서와 사랑의 시대를 선언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같은 메시지는
초기 기독교의 중요한 과제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6 이런 일이 세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ㅇ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
   여기서 말하는 '이런 일'이 이제까지 묘사된 환상을 말하는 것인지 15절에서 언급
된 음성, 곧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는 선언을 뜻하는 것
인지 아니면 베드로가 계속 명령을 거부하기 때문에 세 번씩 같은 말을 반복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공동번역은 '이런 말이 세 번 오고 갔다'고 말함으로써 베드로가 완강
하게 거부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RSV는 이런 일이 단순히 세 번 일어났음을언급하고
있다. 어쨌든 저자 누가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것을 속된 것으
로 여기지 말라는 명령에 대해 베드로의 거부가 세 번 반복되었다는 데 있다. 즉 전통
적으로 세 번 반복하는 형태가 지극히 강조적 묘사라는 점에서(요 21:15-17), 본절의
세 번 반복은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보이신 환상이 (1) 매우 명백했다는 사실과 (2)
베드로가 반드시 실천해야 할 사실과 관련이 있음 및 (3) 베드로가유대적인 전통을
하나님 앞에서 고집했음을 의미한다.
ㅇ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 베드로가 체험한 환상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
리짓는 이 구절은 11절의 '땅에 드리웠더라'는 표현과 대응되는 구절이다. 즉 하늘로
부터 내려왔던 그릇과 짐승들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 묘사는 이야기 전체가 나
타내고 있는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거룩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하늘에서
그들이 속되고 부정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짐승들이 내려오고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전통적 사고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며, 그들이 속되고 부정하다고 판
단한 것들이 깨끗하고 거룩된 것이 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가 세상에 오심 이후부터 깨끗하고 부정한 것의 구별이 없고 이방인과 선민이라는
구별도 파기되었다(고전 10:26).

17 베드로가 본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 마침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ㅇ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 -
   '의심하더니'로 번역된 '디아포레오'는 본래 출구가 없는 사면
초가의 상태를 의미하며 공동번역은 이 단어를 '어리둥절하다'라고 번역하
고 있다. 따라서 아직 베드로는 환상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지 못함이 분명하다.
ㅇ마침 - 이 말은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한 시각을 알 수 있는 단서로 베드로
가 환상을 본 직후 도착했음을 의미한다. 이 시각이 베드로의 기도 시작 시간인 정오
였는지(92절) 아니면 정오가 지난 어느 시간인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18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우거하느냐 하거늘

ㅇ우거하느냐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세니제타이'는 '거주하다'는 의
미와는 달리 손님으로서 잠시 유숙()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보아 베드로는 피
장 시몬의 집에 오랫동안 머문 것이 아니라 손님의 자격으로 잠시 머무른 것 같다.

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ㅇ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 -
   이 말은 17절의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
다. 베드로는 자신이 보았던 환상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으므로 그것을 깨닫고자  고민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환상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기도하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ㅇ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 비록 베드로는 환상 가운데 있지도 않았으며 기도하
고 있지 않았으나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이는 성령의 역사가아무런제한없이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여기서 누가는 그 음성이 설명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밝히면서 조
금 전의 환상과 구분 시키고 있다. 이 같은 묘사는 초기 사도들의 활동이 철저하게 성
령의 인도를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숨은 의도를 나타내고 있다.
ㅇ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 베드로를 찾는 이들이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라면(17절)
두 명이 아니라 두 명의 하인과 한 명의 종졸을 포함해서 모두 세 명이어야하는데(7
절) 여기서는 두 명이라고만 언급되고 있다. 그래서 베자사본(D)에서는 숫자를 언급하
고 있지 않다. 한편 사본 A, C, E에서는 '세 사람'이라고 언급하는데 본문은 바티
칸 사본(B)을 따라 두 명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두 명이란 표현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언급된 두 명은 고넬료의 직접적인 사명을 부여받은 두
사람을 가리키며 그들을 호위한 종졸은 그 수에 포함되지 않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20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ㅇ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
   내려가라는 성령의 지시는 베드로가 기도하기 위해 지붕 위에 올라간 후 아직 내려
오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한편 성령은 베드로가 자신의 경험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 것
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유없이 무조건 두말하지 말고 그들을 따라가라고 지시
하고 있다. 이것은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를 암시한다.
ㅇ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 고넬료로 하여금 하인을 베드로에게 보내도록 지시한
이가 4절에서는 하나님의 사자 곧 천사들로 묘사된 반면 여기서는 성령으로언급되었
다. 따라서 천사와 성령이 동일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3, 4절의 천
사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임무를 수행하는 존재로서 묘사되지만 본절의
성령은 환상 중이 아니라 음성으로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결
코 동일한 표현으로 볼 수 없다. 특히 본절에서 '내가'(에고)가 강조됨으로
써 그 음성의 주제가 하나님이심을 부각시키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성령'이란 표현이
적절하다.

21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가로되 내가 곧 너희의 찾는 사람이니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ㅇ무슨 일로 왔느냐 -
   베드로는 성령의 지시에 담긴 의미를 알고 싶은 마음에서 다른 말보다도 제일 먼저
그들이 온 목적에 대해서 물었다. 이로 보아 아직도 베드로는 환상과 두사람의 방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확실히 이해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22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ㅇ의인이요 -
   유대인들이 말하는 의인은 율법 준수의 기준에 따라  구분되었다(Lenski). 그런데
고넬료는 유대교로 개종한 자도 아니고 더욱이 유대인들을 지배하는 로마의군인이기
에, 그에게 붙여진 의인이라는 말은 매우 파격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문제는 의인이라
는 표현을 유대인들이 고넬료에게 직접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두 하인이 그렇게 표현
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가 비록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회당 예배에 참석
했다는 전제하에서(2절 주석 참조) 유대인들에 의해 고넬료의 경건한 삶이 인정되었을
것이며, 그에 따라 그는 의인으로 칭송받았을 것이다.
ㅇ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 베드로와 대면한 고넬료의 하인들은 먼저 자신들을
보낸 주인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그 소개의 내용 중 유대 온 족속들이 고넬료에게 하
고 있는 칭찬을 언급한 것은 베드로가 유대인이므로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고넬료의 인물됨에 대해서 2절에 언급되었으나 본절과 같은
칭찬은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은 하인들이 베드로를 설득시키기 위해 특별히
언급한 이야기로 이해된다.
ㅇ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 계속해서 집중적으로 강조되는 점은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에의한 것이라는사실이다. 4절에서 언급되었던'천사'
(앙겔로스) 앞에 '거룩한' 명령임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지시하다'라는 말에 헬라
어 '크레마티조'의 제1부정과거 수동태 '에크레마티스데'
가 사용되어 고넬료가 받은 지시가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명령이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이방인에 대한 선교는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임을 베드로로 하여금 깨우
쳐 주고 있다.
ㅇ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마타'는 생동
감있는 말씀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베드로의 입을 통해 나오는 성령에 감동된 하나님
의 말씀을 가리킨다. 이 '말'은 베드로의 설교뿐 아니라 간증이나 예수 사건에 대한
베드로의 증언 등을 포괄하고 있다.

23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갈쌔 욥바 두어
형제도 함께 가니라

ㅇ베드로가 불러들여 -
   방문객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후 그들을 집 안으로 영접한 베드로의 행위는 그 방
문객들이 이방인이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의를 지닌다. 즉 베드로가 그들의 말을  신
뢰하였다는 뜻과 함께 이방인을 한형제로서 용납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유대
인인 베드로가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시몬의 집으로 영접한 것은아직  이방인과의
접촉이 신학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 비추어 보아 잘 이해되지 않는다. 아마 베드
로는 그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자신이 본 환상의 의미를 깨달았으므로  그렇게  행동한
것 같다.
ㅇ유숙하게 하니라 -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을 집으로 불러들이고 함께 잠을 자게 한
다는 사실은 당시에 매우 반 유대교적 행위로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11:1-3). 그럼
에도 이러한 행동을 하게 된 베드로는 자신이 경험한 환상이 의미하는 바를이해하게
되어 이제 무할례자인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버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베드로가
그들을 유숙하게 한 것은 그들이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왔으므로 다시 가이사랴까지
가기 위해서는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본절의 핵심은 이방인을 전적으로 용납하였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다.
ㅇ욥바 두어 형제 - '두어'로 번역된 부정대명사 '티네스'는 확정되지
않고 또한 많지도 않은 수효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그런데 11:12에서 여섯 명이 베드
로와 함께 고넬료의 집으로 갔다고 언급되어 있으므로 본절에서 언급된 형제는 세명이
분명하다. 이 표현상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해결할 수 있다. 누가는 본절은 관찰자
의 입장에서 기록하고, 11:12은 베드로의 고백의 입장에서기록되었으므로베드로의
고백 부분에서는 정확한 숫자가 언급되어 그 고백의 사실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본절
에서는 누가가 관찰자의 입장에서 서술하므로 정확한 숫자를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한편 욥바에서 세 사람이 베드로를 동행하게 된 이유에 대해 본문에서 명백하게 언급
되지 않고 있다. 다만 다음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1) 이방인에게 일어나는 성령
의 역사를 그 세사람이 목격하고 증인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함 (2)아직도고넬료가
보낸 사람의 신분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베드로가 그들과 동행하게 되어
혹시 어려움에 처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임.

24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ㅇ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
   본 구절에서 구체적 도착 시간은 언급되지 않고 욥바로부터 출발한지 이특째 되어
가이사랴에 도착했다고 언급되었다. 그런데 30절에 따르면 고넬료가 환상을체험했던
그때와 어느 정도 일치함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오후 3시를 전후해서 가이
사랴에 도착했을 것이다.
ㅇ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 이는 고넬료가 환상을 굳게 믿었다는 사실을 의미
하며 동시에 형제 사랑과 신앙에 대한 강한 열정을 보여준다. 만약 그에게 그 사랑과
열정이 없었다면 자기 가족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
의 친족과 친구들까지 초청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했으며 함께 구원의
은혜에 동참하고자 원했다.

25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ㅇ베드로가 들어올 때 -
   고넬료가 베드로를 맞이한 장소가 고넬료의 집인지 가이사랴로 들어가는어귀인지
구분할 수 없다. 어떤 사본(D)에서는 베드로가 도시로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
나 24절의 정황으로 보아 집으로 들어올 때라고 보는 것이 정황으로 보아 집으로 들어
올 때라고 보는 것이 문맥상 적절하다(Haenchen).
ㅇ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 고넬료가 베드로를 마중할 때 보여준 자세는 마치 신적
인 존재나 로마 황제를 대하는 듯하였다. 이는 당시에 사도들이 지녔던 권위를 보여주
며 또한 고넬료의 겸손하고 순수한 성품을 나타낸다. 특히 고넬료가 베드로를 대할 때
신적인 권위 앞에서는 것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베드로를 환상 중에 경험한
천사의 말과 관계된 사람으로서 특별히 선택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5절 참조).

26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ㅇ나도 사람이라 -
   고넬료의 행위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은 신적 권위를 사양하며 동등한 사람임을 전
제하고 있다. 이 같은 베드로의 행위는 겸손을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사도와 일반 성도는 하나님 앞에 동등한 사람으로서 지배자와 피지
배자의 관계가 있을 수 없는 것임을 시사하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고넬료가 로
마 군인이라는 점에서 그의 경배 행위가 로마인들의 황제 숭배와 관련된 것으로도 이
해될 수 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인간에 대한 신적인 숭배는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 암
시와 함께 로마 황제에 대한 숭배를 부정하는 의도를 가지고 이러한 말을 했을 것이
다.

27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의 모인것을 보고

ㅇ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
   누가는 이표현을 통해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상당히 호의적이었음을 강조하려 했을
것이다. 즉 베드로가 이방인에 대해 지니고 있던 배타적 우월감을 버리고 15절에서 지
시한 주의 말씀을 따라 이방인을 한 형제로 용납하였음을 보여준다. 한편 이 같은 베
드로의 행위는, 17절에서 베드로가 자신의 경혐한 환상의 의미에 대해 고심했지만 지
금은 그 환상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ㅇ위법인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
   고넬료 집 안에 모여 있는 고넬료의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24절)을 향해베드로는
자신의 방문에 대한 정당성을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유대인들의 전통적 관습을 언급하
고 있다. 즉 신 7:3, 4규정을 확대 해석하여 모든 이방인과의 교제를 죄악시하고 이방
인들이 만들어 낸 물건이나 식품까지도 부정한 것으로 대했던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르
면 베드로 자신의 고넬료집 방문은 유대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행위였다. 이러한 사실
을 고넬료와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상기시킴으로써 베드로는 자신의 행위가 일종의
모험임을 강조했다.

29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

ㅇ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
      여기서 언급된 '사양치 아니하고'라는 단어 '아난티르레토스'
는 직역하면 '반대하는 말을 할 수 없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베드로가 고넬료
가 보낸 사람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는 이유를 강조해 준다.

30 고넬료가 가로되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시 기도를 하는데 홀연히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ㅇ나흘 전 이맘때까지 -
   고넬료가 환상을 체험한 날로부터(3절)나흘이 지났음을 밝히고 있는데,고넬료의
하인들이 이틀만에 욥바에 도착하였고(9절) 욥바서 하루를 묵고(23절) 욥바에서 가이
사랴까지 이틀 걸려 도착하였으므로 3박 4일이 지난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나흘'이
란 표현은 타당하다.
ㅇ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 본 구절은 3, 4절에 언급된 천사에 대한 묘사로 70인
역 자료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Haenchen). 희고 빛난 옷은 거룩한 천사의 옷으로 자
주 묘사된다(1:10;마 28:3;막 16:5;눅 24:4).

31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ㅇ들으시고...기억하셨으니 -
   4절과 내용상 같다. 다만 4절보다 간략하게 진술되고 있을 뿐이다. 용어상의 차이
로 4절에서는 '상달하여'가 사용되었으나 본절에서는 '들으시고'가 사용되었다. 그러
나 의미상 아무런 차이는 없다.

32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가 바닷가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느니라 하시기로

ㅇ베드로...우거하느니라 - 이 부분의 헬라어 본문은 세 가지로 읽혀지고 있다.
(1) '바닷가'란 말이 생략되었다.
(2)'바닷가' 다음에'와서 너에게 말할 자'호스파라게노메노스 랄레세이 소이가
첨가되어 있다.
(3) 개역성경과 같은  독법을취한다. 여기서 대부분의 사본들은
   2)의 독법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청하라'는 말
속에 (2)의 첨가된 내용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누가는 앞의 사건을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으므로 (2)의 독법은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3)의 독법이 가장 무난하다.

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ㅇ하나님 앞에 -
   본 구절이 사본에 따라 조금씩 달리 표현되어 있다. (1) '하나님 앞에
, 대부분의 사본이 이 독법을 취한다. (2) '주님 앞에', 몇몇 소문자 사본이 이 독법
을 따른다. (3) '당신 앞에', 서방 사본과 역본이 이 독법을 따른다. (3)의 독법에 따
르면 베드로의 권위가 강조되지만 (1)과 (2)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세를 지
닌 고넬료의 모습이 강조된다. 특히 '하나님 앞에'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여호와 앞에
서'와 함께 자주 사용되어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순종과 경건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
구절에서는 '하나님 앞에'가 가장 무난하다.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ㅇ베드로가 입을 열어 -
   빌립이 이방인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전도할 때(8:35), 또는 산상 설교에서 예수가
설교를 시작할 때(마 5:2) 처럼 '입을 열어'라는 표현은 곧이어 언급될 이야기의 권위
와 잔중함을 암시해 준다. 여기서는 이방인에 대한 구원을 선언하는 중대한 선언을 나
타내기 위해 이 표현이 사용되었다.
ㅇ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 하나님은 사람의 외적인 조건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 이 구절은 신 10:17의 인용구로 짐작된다. 여기서 언급된 '외모'는 유대인들
이 지키는 율법과 종교적 제의와 관습들을 가리키는 말이며 형식적인 경건주의를 상징
한다. 더 나아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외형적 구분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35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줄 깨달았도다

ㅇ이제는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선민의식과 같은 배타적 우월감이 하나님 앞에 용납
되지 않는다. 여기서 구원받을 대상의 범위가 온세상 사람으로 확대된다. 한편 본절의
표현은 구약적인 표현인데 이를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예수를 믿고 영접한 자'로 해석
할 수 있다.
ㅇ깨달았도다 - 헬라어 본문에서 이 동사는 현재형으로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 이야
기를 들으면서 자신에게 보여진 환상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하여 이제 분명하게 그 의
미를 파악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ㅇ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 -
   이제는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선민의식과 같은 배타적 우월감이 하나님 앞에 용납
되지 않는다. 여기서 구원받을 대상의 범위가 온세상 사람으로 확대된다. 한편 본절의
표현은 구약적인 표현인데 이를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예수를 믿고 영접한 자'로 해석
할 수 있다.
ㅇ깨달았도다 - 헬라어 본문에서 이 동사는 현재형으로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 이야
기를 들으면서 자신에게 보여진 환상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하여 이제 분명하게 그 의
미를 파악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36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ㅇ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 -
   베드로는 창조주 하나님에게 사용하던 칭호를 예수에게 사용하면서 이제 구원의 유
일한 길로서 예수를 내세우고 있다. 여기서 '만우'는 헬라어로 중성과 남성  모
두에 해당되어 '세계 만물' 또는 '모든 사람'을 뜻한다. 그래서 혹자는 '만유'를 '모
든 사람'을 뜻한다. 그래서 혹자는 '만유'를 '모든 사람'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Haenchen, Bruce). 이는 롬 10:12의 '모든 사람의 주'란 표현과도 일치한다. 이에 따
라 공동번역은 본 구절을 '만민'으로 해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
'만유'를 '만민'으로 해석해야 할 정당한 근거를 발견할 수 없으므로 '만유'로 해석하
는 편이 무난하다. 왜냐하면 이 '만유'란 표현은 모든 피조물을 지칭하므로 '만민'이
란 의미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ㅇ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 베드로는 평화를 예수가 전한 복음의 핵심으로  본다. 이
평화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뜻한다(Haenchen). 과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심판하는 자와 죄인의 관계였으므로 화해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관계가 예
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해의 관계로 바뀌게 된 것이다(롬 5:10, 11). 또한 이 평화는
사람간의 평화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엡 2:14, 2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
여,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관계에 있으서, 그동안 그 둘을 가로 막았던 장벽이 무너짐
으로써 하나님 안에서 민족적 편견과 편애가 없어졌다. 이런 의미엥서 복음은 모든 장
벽을 제거하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

37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ㅇ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
   예수가 선포했던 평화의 복음은 요한의 세례에서 부터 출반된 것임을 시사한다. 여
기서 언급된 '그 세례'는 메시야이신 예수를 예비하는 것이다. 요한의 세례는 백성들
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나 본질적으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
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앞서 세례
요한을 언급했던 것이다.
ㅇ갈릴리에서 시작되어 - 본 구절이 예수의 사역이 시작된 지역에 대한 설명인지 아
니면 예수의 출생에 대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다만 36절에서 '화평의 복음을 전하
사'란 표현이 사용된 점으로 비추어 보아 본 구절은 예수의 사역과 관련된 것으로 짐
작된다.
ㅇ두루 전파된 그것 - '전파된 그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게노메논 레마'
는 '되어진 말씀'으로 직역될 수 있다. 이는 이미 예수를 통해 온 지역에 전파된 말
씀으로 앞에서 언급된 '화평의 복음'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여기서는 비록 '말
씀'으로 언급되어 있으나 이 말씀 속에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말씀 외에 행하신 표적도
포함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를 통해 나타난 계시는 말씀에 의한 것과 행위에 의한
것이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ㅇ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
   누가는 '나사렛'이라는 지명과 함께 예수를 언급하여 그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사
실을 강조했다. 한편 누가는 역사적 예수가 수행하신 모든 언행에 대한 권위를 언급하
려는 의도로 본문을 서술했다. 즉 앞절에서 언급한 '그것'은 나사렛 예수의 언행과 일
치하는 것이고 나사렛 예수의 언행은 하나님의 영향 아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가 행했던 모든 언행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예수
의 모든 가르침과 행위는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그 정당성이 인정받게 됨을 보여준다.
그래서 누가는 본절 마지막에 '이는 하나님의 함께 하셨음이라'고 덧붙여 놓았다.
ㅇ착한 일을 행하시고 - 이에 대해 혹자는 헬라적인 의미에서 백성들에게 은인으로
인정받는 군주에 대한 암시를 주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Haenchen). 즉 군주가 백성들을 보살피고 그들에게 애정으로 도움을 베풀어 줄 때 헬
라인들은 그 군주를 향해 선한 일을 행한다고 평가한다. 다시 말해 군주를 자신의 은
인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의 통치자적인 모습을 연상하면
서 착한 일을 행하시는 것으로 진술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는 선하신 본질을 지니신
예수가 행하신 일에 대해서 유대적인 윤리 개념으로 진술했을 뿐이다.
ㅇ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예수의 기적 행위를 치유의 행위로 연결시켜 모든 악마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 즉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것을 말한다. 베드로는 이 모든능력을하나님이
함께하는 증거로 말하여 예수의 모든 언행을 하나님의 권위로 전당화하여 설명하려고
한 것 같다(2:22).

39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ㅇ우리는...모든 일에 증인이라 -
   '우리'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베드로와 그 동료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아마도 열 두
사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예수에 관한 모든 일을 증언할 수 있는 증인,
즉 역사적 목격자이며 동시에 그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 선언하는 전도자의 사명을 부
여받았다.
ㅇ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 예수는 온 인류를 우해 죄에 대한 저주를 담당하셨다. 그
리고 이 저주는 신 21:22에 따라 나무에 달린 것 곧 십자가 지심과 깊은 연관이 있다.
5:30에서 베드로와 사도들은, 예수께서 나무에 달려 죽으셨다고  묘사하였다. 따라서
본문은 초기 기독교의 상투적 증언 내용으로 예수의 죽음을 구약 예언의 성취로 보면
서 또한 예수를 메시야로 증거하는 이중적 효과를 나타낸다.

40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ㅇ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
   베드로는 예수의 죽으심에 이어 부활 사건에 대해 증거함으로써 당시 사도들의 증
거 내용이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것임을 보여준다. 본 구절에서는 부활 사건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베드로가 이미 본문과 같은 내용의 설교
를 여러 차례에 걸쳐 설교한 점을 미루어 보아(2:32;3:15;4:10;5:30) 부활이 초대 기
독교에 있어서 선표의 주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ㅇ본 구절은 베드로 자신을 포함한 사도들의 권위를 보증하려는 의도로 언급되었다.
즉 예수의 십자가 부활 사건이 모든 백성에게 보여진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선택
한 몇몇 증인에게만 나타난 것이다. 이 표현을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
다. 첫째는 사도권에 대한 배타적 강조이다. 특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증
언자로서 선택되었다는 특권 의식을 강조함으로써 초대 기독교의 교권 중심을 사도 중
심으로 해야 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는 것이다(8:14 주석참조). 둘째는 부활 사건에
대한 증인이 소수였다는 사실에 대한 해명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하나님이 불
특정한 다수를 통해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불러 세운 소수의 증인을
통해서 일하심을 밝힘으로써 소수에게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게 하심이 하나님의 뜻임
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ㅇ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 - 부활의 증인으로 세움을 받은 사도 들의 새로운 소명
체험의 시기와 사건에 대한 진술로서 아마도 눅 24:36-49의 내용과 관련이 있
는 것으로 보인다. 즉 베드로는 부활 후 함께 식사를 나눌 때 주어진 예수의 명령을
부활에 대한 증언자로서 선택된 사도들의 소명의식으로 이해했다. 초대 기독교에서 사
도의 권위에 대해 문제가 되었을 가능성은 본서에서 사도권에 대한 계속된 강조 속에
암시되어 있다(1:2;2:42;4:35-37;5:12, 41;6:6). 본절 역시 사도권에 대한 정당성과
그 권위를 강조하려는 변증적 입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42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ㅇ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 -
   지금까지 베드로는 세상에 오신 메시야의 사역에 대해서 언급했으나 본절에서는 세
상 마지막 날 수행하실 그의 사역에 대해 진술한다. 이는 초대 기독교 인들의 고백으
로서 부활하신 예수가 장차 종말적 심판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에 대한 선포다.
ㅇ증거하게 하셨고 - 베드로는 앞에서 언급된 내용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것임을
고백함으로써 자신의 증언 내용을 정당화하며 증언의 권위를 부각시키고 있다.

43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ㅇ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
   이 내용은 이미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것임을 전제하고 있다(3:18,
19;사 33:24;53:5;렘 31:31-34;49:6;눅 24:46, 47). 이 사실로 미루어 보아 설교의 내
용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죄
사함이 선포됨으로써 베드로의 설교가 종결되면서 복음이 사람에게 끼치는 결과가 핵
심적으로 진술되었다. 즉 베드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나타나는 결과가 믿는
자들에게 주어짐으로 인간에게 가장 심각한 죄 문제가 해결됨을 선포했다.

44 베드로가 이 말 할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ㅇ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
   본절로 미루어 보아 성령 강림의 시점이 베드로의 설교가 끝난 뒤라기보다는
성령 강림으로 인해 베드로의 설교가 중단된 듯한 인상을 더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독특한 점은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했다는 표현이다. 당시 성령
의 임재가 곧 기독교인됨에 대한 징표로 여겨졌지만(8:14-20), 무엇보다 본문의 사건
은 안수나 세례 없이 성령이 강림하였다는 점이 처음 성령 강림의 때와 유사하다. 이
는 '말씀'의 권위를 나타내면서 동시에 성령의 임재가 어떤 의식 행위에 있는 것이 아
님을 입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받은 이들이 이방인들이었다고
그들이 기독교인이 되려고 기독교인의 어떤 집회에 참여했다는 언급도 없다는 점에서
성령은 인간이 같춘 어떤 조건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활동한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
다. 이로써 이방인에 대한 선교의  정당성이 확실하게 제시되었다. 한편여기서는
2:2-4과 같이 성령이 강림함을 객관적으로 식별할 수 있는 어떤 묘사가 없지만 46절에
서는 방언을 말하고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였다는 점이 유일한 성령 강림의 외적 증
거로 묘사되어있다. 이는 고넬료의 가정에도 2:2-4와 같은 현상이 있었느나 누가가 자
세한 묘사를 생략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ㅇ할례받은 신자들이...놀라니 -
   본절은 오랫동안 간직해 왔던 유대인들의 절대적 신념이 무너지는 순간을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할례받은 신자들이란 여기서 정통 유대인을 말하며 욥바에서 베
드로를 따라 동행했던 자들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놀람은
구약 시대에서부터 시행된 할례 의식을 통하지 않고 이방인도 구원의 경험이 가능하다
는 사실을 경험하였다는 사실에 있다. 이 같은 장면 묘사는 첫째로 기독교인이 된 유
대인들도 아직까지 이방인 구원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이 있었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
고 둘째로 유대인을 이방인에게 직접 임재하는 성령의 활동을 목격한 증언자로 언급하
여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을 유대인들에게 강조하려는 누가의 의도가 숨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이방인 선교와 이방인 에게도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한다는 바울의
구원관이 암시되어 있다.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ㅇ방언을 말하며 -
   오순절 사건(2:4)과 같은 현상으로 묘사되었으나 그 당시와 같은 각국 방언 현상은
아닐 것이다.
ㅇ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 '들음이러라'의 헬라어가 미완료 과거형으로 '계속해
서 들었다'의 뜻을 담고 있다. 이는 성령의 역사가 이방인들에게서 계속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들의 찬양 행위가 노래였는지 말로 표현되었는지 아니면 방언으로 찬양한
것인지는 정확히 규명할 수 없으나 베드로의 일행이 그 찬양을 이해했다는 점에서 그
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했을 가능성이 높다.

47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ㅇ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
   이방인들의 성령 받음을 베드로는 자기들의 성령받음과 동일시하고 있다. 즉 베드
로는 이 사실을 선포함으로써 이방인들의 성령 체험을 정당화했다. 이는 이방인 전도
문제에 있어서 하나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
ㅇ누가 능히 물로 세례줌을 금하리요 - 반문 형식으로 된 본문은 강한 긍정의 대답을
전제한 어투이다. 첫째는 이미 성령을 받은 사울에게 기독교인됨의형식인세례행위
(8:12)는 마땅히 수행되어야 함을 암시하고, 둘째는 성령 받음은 기독교인됨의 가장
확실한 징표임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베드로의 어투는 이방인에게 세례를 베푸는 행
위가 당시 할례자들에게 매우 문제시 될 수 있을 것으로 짐작한 데서 비롯된 것 같다.
따라서 본절에서 베드로의 증언은,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재하였다는 사실이 이방인에
게 세례를 베풀고 기독교인으로 입교시키는 데 아무 하자가 없음을보증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진술하고 있다.

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ㅇ세례를 주라 하니라 -
   베드로가 직접 세례를 베풀지 않고 누구인지는 언급이 없지만 베드로는 그에게 세
례를 주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것은 빌립이 세례를 주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것은 빌
립이 세례를 베풀었던 사실과 마찬가지로(8:12) 당시 세례를 베푸는 것이 사도들의 고
유 권한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베드로를 대신해서 세례를 베푼 자들은 이방
인들이 성령을 받는 것을 보고 놀란 할례자들, 곧 욥바에서 베드로를 수행한 자들이었
을 것이다(23절).
ㅇ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 본문은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설
교한 것 만큼 중요한 사실이기에 언급되었다. 왜냐하면 누가는 이방인과 사도가 함께
자고 먹었다는 사실을 암시함으로써 이방인이 기독교인이 될 수 있으며 유대인의 의식
절차를 밟지 않고 서로 교제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편 비록 본구절에서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더 머물렀는지에 대해서 누가가 언급하지 않았으나, 11:1-3로
미루어 보아 그가 그곳에 머문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특히 누가는 어떤 사건이 다
음에 문제시되거나 그 내용이 반복된다면 그 진술들이 상호 보충되도록 서술하는 방법
을 취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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