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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요한복음

[스크랩] 요한복음 (17 : 1~26)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9:19
요한복음 17장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ㅇ이 말씀을 하시고 - 제자들을 향한 예수의 고별(告別) 설교는 끝이 났다. 이제 그
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말머리를 돌리신다. '이 말씀'(타우타)은 13-16장
사이에 나오는 예수의 고별 설교를 지시하며 보다 가깝게는 16:33에 나타난 세상에 대
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선언을 가리킨다. 한편 혹자는 본장 기도가 13:30, 31 사이
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R. Bultmann), 고별 설교 뒤에 그의 제자들과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사실을 구태여 부인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이별을 눈 앞에 두고 그
의 친구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일반적인 시각에서 볼 때도 전혀 부자연스럽
지 않다(C.K. Barrett).
ㅇ눈을 들어 - 요한은 예수의 몸동작 하나까지도 구체적으로 기록함으로써 그날 밤에
있었던 일에 대한 체험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이는 하나님께 제사나 예물을 드릴 때
취했던 전형적인 자세(시 121:1;겔 33:25;단 4:34)였으며 또한 일반적인 기도의 자세
였다(L. Morris). 예수는 11:41에서도 이런 자세로 기도하셨는데 이는 공간적인 개념
에서의 '위쪽'이 아니라 존귀하신 하나님을 우러러 본다는 의미에서의 위쪽을 가리키
며 결국 아버지와의 영적인 교제를 상징한다.
ㅇ아버지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테르'는 막 14:36에서와 같이 아
람어 '아바'를 전제로 한 말이다(G. Dalman). 이 아람어는 자녀가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용어로서 우리말 '아빠'와 비슷한 어감을 준다. 본장에서 예수는 이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하고 있는데(5, 11, 21, 24, 25절) 이는 예수와 하나님의 지극히
친밀하고도 유기적(有機的)인 관계를 분명히 함과 아울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 되심을 시사하는 말이다.
ㅇ때가 이르렀사오니 '때'란 대속을 위한 십자가 수난의 때를  가리킨다(막 14:41).
대적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예수를 제거하려 했으나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한'
까닭에 예수께 손을 대지 못했다(7:30;8:20).
ㅇ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 예수는 자기의 영광을 구하기 위해 이 땅에 오
신 것이 아니다(8:50). 예수께서 스스로 구하는 영광 조차도 아버지의 영광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절은 예수 자신을 위한 기도라기 보다는 차라리
성부 하나님을 위한 기도이다(L. Morris). 한편 '영광'(돝사조)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절정을 나타낼 때 반복 사용되었다(7:39;12:16, 23;13:31, 32
등). 예수께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영광'이라 표현하신 것은 매우 의미 심장하다.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함으로써 맡겨진 대사명을 완벽하게 이루셨다는 점에서
십자가는 곧 영광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성자의 관심은 늘 성부의 영광에 고정(固定)
되어 있다(12:28).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ㅇ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 - 아들이 영화롭게 되는 것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자들에게 영생을 제공한다. 본 구절과 유사한 표현은 6절과 9절
에도 나오는 데 이것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1) 예수의
열 두 제자를 가리킨다(C.K. Barrett).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하여 강조된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연합 관계가(15:1-10) 이 고별 설교에서 다시 설명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이 하나의 공동체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2) 우주적 교회(Universal Church)를 의미한다는 견해(Barnard). '판'
은 제자들 간의 소집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롬 8:28)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모든 자들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집단이라고 본
다. 예수는 6:39에서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라 말씀하
신다. 이들은 창세 전부터 미리 예정된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세상과 대립적 관계에 있
는 자들이다. 그들은 '만민'(파세스 사르코스)과도 구분되
는 자들이며 하나님에 의하여 생명의 떡에 초대된 자들이다(6:35, 37, 44, 45, 65).
만일 후자의 견해를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예수께서 구체적으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
신 점을 배제할 수는 없다.
ㅇ만민을 다스리는 권세 - 만민은 '모든 육체'(파세스 사
르코스) 즉 모든 인류,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들을 의미한다(Lenski). 이들을
다스리는 예수의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는 세상 임금의 주권 행사와
구분되는 것으로 군림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부여받은 권세이다(L. Morris). 즉 이 권세의 목적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며 반면에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도록 하는 것
이다(3:35, 36). 예수는 마지막날에 인류를 심판하는 권세를 지니고 계시며(5:27) 또
그의 권세는 제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마 28:18-20). 한편
십자가 수난을 앞둔 시점에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선포하신 것은 이미 십자가의
죽음의 승리와 영광을 바라보고 있음을 시사한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ㅇ영생은...아는 것이니이다 - 십자가의 죽음 뒤에 있는 부활을 바라보며 예수는 '영
생'에 대하여 정의를 내린다.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선
지자들에 의해서도 주장되어 왔었다(Bernard).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호 6:3)라고 했으며 예레미야는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
여 나를 아는 것과...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다'(렘
9:24)고 했다. '안다'(기노스코)는 것은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하며
본절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시에 수식하는 말로 사용됨으로 예수와 하
나님의 인격적 하나됨을 증거한다(Lenski). 하나님의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
식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
님의 뜻과 계획을 인생들에게 가장 쉽게 그리고 충분하게 계시해 주셨기 때문이다. 인
간은 하나님을 앎으로써 행복과 영생에 도달할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의
주인으로서 영생의 주체(主體)가 되신다(11:35;행 3:15). 한편 기도중에 예수께서 자
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른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
는 '저희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인식하는 것'이란 의미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
지만(Lenski) 그렇게 해석하면 헬라어 원문에 무리가 따르게 된다. (2) 예수께서 제자
들의 믿음을 확고히 하시기 위해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이와 같은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이 견해는 무난하게 채택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표현은 메시야의
자기 증거인 셈이다(Godet). (3)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면서 예수에 대한 자신의 견해
를 밝힌 표현이라고 하는 주장이었다(Westcott, Hegnstenberg). 예수께 대한 요한의
고백은 그의 저서 여러 곳에서 반복 기록되었다(요일 1:3;2:22;4:3;5:20 등). 그러나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면서 그날밤의 기억들을 잊어버렸다고 구태여 가정할 필요는 없
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ㅇ아버지께서...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 예수는 아직 그의 사역이 끝나지 않았음에
도 불구하고 그것을 완수하였노라고 고백하신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 자체가 이미
승리를 보증한 것이라는 견지에서 이 말씀은 타당하다. 이는 시간적인 성취의 의미보
다는 실패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라는 차원의 의미에서 이해된다. '일'은 지
상 생애 동안 예수가 행하신 모든 교훈과 사역이며 그것은  인간을 '심판하는 일'과
'생명을 주는 일'로 요약된다(H.R. Reynolds). 한편 예수께서 그의 사역에 대하여 말
씀하실 때마다 '아버지'는 '보내신 자' 또는 '일을 맡겨 주신 자'로 등장한다
(3:35;4:34;5:36 등). 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사역상의 질서를 나타냄과 아버지와 아들
의 하나됨(10:30)을 동시에 강조한다(L. Morris). 한편 '이루어'(
텔레이오사스)는 뒤에 나오는 '다 이루었다'(19:30)라는 선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는 일에 단 한번도 주저하는 일이 없으신 예수는 그의 삶
뿐만 아니라 죽음으로 아버지의 일을 이루심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셨다(C.K.
Barrett).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ㅇ창세 전에...영화롭게 하옵소서 - 본서의 기자는 이미 영원 전부터 예수께서 하나
님과 함께 계셨음을(1:2) 기록했으며 또한 그가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음을 누누
이 강조해 왔다. 본절에서 예수는 '아버지와 함께'라는 말을 두 차례 사용하였는데,
이는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선재성(先在性)을 강조하는 동시에 지금은 육신
의 몸을 입고 있음을 시사한다. 첫번째 '함께'라는 말은 성육신 이전 상태로서의 하늘
영광의 회복을 바라보는 것이며(Lenski) 두번째 '함께'는 십자가의 승리로 인해 얻게
될 영광을 지시한다. 세상 만물이 존재하기 이전에 계셨던(1:1;8:58;16:28) 아들의 신
성과 영광은 성육신을 통해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스스로  비하(卑下)되었다. 그는
하늘 영광을 스스로 버리고서 완전한 인성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ㅇ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 예수는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12:28)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은 아버지의 일(4절)을
이루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그 인물 전체를 대변하는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예수께서 나타낸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품성, 인격, 능
력, 구속 사역, 은혜, 사랑 등 모두를 포함하며 그것은 예수 자신의 모든 사역을 통하
여 세상 앞에 현현(Manifestation)되어졌다. 예수의 자기 계시는 신적 존재의  영원하
고 본질적인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신 것이다(R. Bultmann).
ㅇ아버지의 것이었는데 -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는 대략 두 가지  견해로 갈린다.
(1) 이미 그들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되어 있었음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
(Beza, Calvin). (2) 예수를 만나기 전에 그들은 옛 언약의 체제 하에서 하나님의 백
성으로 살아가고 있었음을 갈리킨다고 보는 견해. 이 중 하나를 확증적으로 지지하기
는 어려우나 문맥상 (1)의 견해가 더 무난하리라 본다.
ㅇ말씀을 지키었나이다 - 하나님과의 정당한 관계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써 유지된다. 사실 본서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다'는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 단지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으며(8:55),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
(8:51;14:23) 또는 '계명들'(엔톨라스, 14:15, 21;15:10)을 지키도록
명령받았다. 한편 예수는 자신의 말이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하시며 자신의 말을 지키
는 자를 아버지께서 사랑하리라고 하셨다(14:23, 24). 따라서 본절에서 하나님의 말씀
을 지켰다는 것은 율법(노모스)이나 구약의 계명들(엔톨
레)을 준수했다는 의미보다 본서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말씀'(로고스)이
신 예수(1장 주제 강해 '로고스 개념의 배경과 그 의미' 참조)를  영접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7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줄 알았나이다

ㅇ지금 저희는...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 예수는 자신의 구체적인 선
교 사역이 아버지에게 의존(依存)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본절을 앞절과 연결시켜
이해하면, 본절은 제자들이 예수 자신의 말씀을 지킴으로 아버지의 말씀을 지킬 수 있
었다는 사실에 대한 근거를 제공한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란 단지 예수의 말
씀'(레마타, 8절)이나 '이적'등 사역에 필요한 요소들 뿐만 아니라 예
수 안에 포함된 모든 것들을 강조하여 표현한 말이다(Lenski). 반면에 제자들이 '알았
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비밀을 다알았다는 의미보다는 예수의 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에 대한 지식일 것이다(L. Morris). 한편 '지금'(뉜)
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예수의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던 제자들이 드디어 예수의
모든 것이 하나님과 연유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를 강조한다.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ㅇ내게 주신 말씀들을...받고...아오며...믿었사옵나이다 - 헬라어 원문에서 본절은
'왜냐하면'으로 시작함으로써 앞절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여기서 '말씀'은 입술
로써 이야기한 것과 같은 하나님의 개개의 말씀들을 지칭한다(3:34). 이는 말로써 전
달한 사상을 뜻하고 '로고스'(6, 14절)와 구분된다. 본서에서 '로고스'는 말이라는 의
미 보다는 '예수의 인격'과 관계되어 더 많이 사용되었다(6절 주석 참조). 한편 본절
속에는 다섯 개의 부정 과거 동사가 나온다. 먼저, 두 개는 예수께 관한 것이며 나머
지 세 개는 제자들에 관한 것이다. (1) '나오다'와 '보내다'는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
터 보내심을 받은 역사적인 사실을 나타내는 부정과거로 사용되었다(Lenski). 반면에
(2) 나머지 세 개 즉 '받았다', '믿었다' 등은 제자들의 영적 상태의  변화를 암시한
다. 제자들은 동시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의심을 품고서 말씀을 받았다. 그리고 그
들은 예수께 대한 이해와 지식으로 성장해 갔으며 그 앎(16:30)으로부터 믿음이 생겨
났다. 물론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시간적 순서를 엄격히 규정(規程)하기란 쉽지 않
으며 어떤 면에서 이 두 표현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따라서 보다 중요한
것은 안다는 것과 믿는 것은 순서에 관계 없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6:69). 본절에서 강조하는 바는 말씀을 받음으로 그들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
이다(1:12).

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ㅇ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 본절에서 예수께서 위하여 간구
하는 대상을 제자들에게만 제한시키셨다고 해서 세상을 위하여 구하지 않으신다는 것
은 아니다. 단지 제자들은 세상과 구별되어 있다(L. Morris).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과
제자들은 밀접한 상호 관계로 연결되어 있으며(Lenski), 예수는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유지시키신다. 특히 '비옵나니'의 헬라어 '에로탄'은
종속 관계에서 사용하는 '아이테인'과는 달리 대개 동등한 위치에서 말
하는 것을 가리키며, 이는 곧 중보자로서의 예수의 신적 신분을 시사한다. 한편 예수
께서는 '세상'을 위해서도 기도하신다.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며(요 3:16) 궁
극적으로 세상 역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대상이다. 본장 속에서도 예수는 세상이
'믿을 것'(21절)과 세상이 '알게 될 것'(23절)을 위해 기도하신다. 예수는 제자들의
죄만을 짊어지신 것이 아니라 세상 죄를 짊어지셨다'(1:29). 그는 세상의 어리석음과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기도하셨다(눅 23:34). 세상은 제자들과 달리 하나님과
대립적(對立的)인 위치에 있다. 따라서 그 기도의 내용이 서로 다른 것은 필연적이며,
세상을 위한 기도는 더 이상 세상이 '세상적'이지 않기를 구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회
개에 이르기를 구하는 것이다(L. Morris, C.K. Barrett). 예수는 세상에서 그의 말씀
을 듣고 회개를 외쳐야 하는 제자들을 위해 먼저 기도한다.

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ㅇ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내 것이온데 - 모든 피조물은 모두 이와 같이 고백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라는 말씀은 피조물
중에 누구도 따라할 수 없다(Luther). 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동등함을 증거한다. 따라
서 예수께서 '내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의 말씀'(7, 8절)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2절), '그에게 속한 제자들'(6, 9절) 뿐만 아니라 창세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지녔던 신적인 존재와 영광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Lenski, Luther). 따라서 예
수의 인성은 아버지의 것이며 아버지의 신성도 예수의 것이다. 이것은 아들 예수와 아
버지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 무이한 부자 관계로서 예수의  계속적인 중보(中
保) 사역을 보증하는 것이기도 하다(롬 8:34).
ㅇ내가 저희로...영광을 받았나이다 -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완수하여 세상에
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신 예수는 제자들로부터 영광을 받았다고 완료형으로 기록한
다. 이러한 완료형은 제자들의 복종적인 믿음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미 영광을
받으셨음을 시사함과 아울러(6, 8절) 장차 제자들의 신앙 고백과 복음 사역을 통해 영
광받으시게 될 것을 암시한다. 외관상 제자들이 동시대의 사람들과 달리 특출한 신앙
을 보였다는 뚜렷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말씀하심은 제자들의 장래에
대한 예수의 신뢰와 확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혹자는 이 완료형 시제의 사용을 저자가
보다 후대의 관점에서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하나(C.K. Barrett) 그다지 합당하다고는
보기 힘들다.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ㅇ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 할 시간이 임박해짐에 따라, 자연히 예수의 관심은 황량한 세상에 남는 제자들에
게 닥칠 위험에 집중되었다. 본절의 기도 내용은 특별히 예수의 죽음으로부터 승천에
이르는 비교적 짧은 시간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할 수 있다. 예수는 부활 승천 후 오
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또다른 보혜사인 성령을 보내시고 성령 안에서 제자들을 계속
보호 인도하실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죽음에서 승천에 이르기까지의 막간(幕間)에는
예수께서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만 제자들을 맡기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Godet).
ㅇ거룩하신 아버지여 - 세상의 죄악과 대조를 이루는 '거룩하다'라는 단어가 아버지
의 칭호에 붙여졌다. '거룩한 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은 본질적인 의미에서 동의어
반복적 표현이다. 아버지의 이름 즉 본질은 모든 죄와 분리되어 있고 대립되어 있기
때문에 거룩한 아버지에게 죄악 가운데 남겨두는 제자들의 보전을 간구하는 것은 조화
를 이룬다(Lenski). 또한 이 말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레 11:45)고 말씀하심으로 세상으로부터 성별을 요구하셨던 것과 같이 제자들
에게 당신 안에서 세상과 성별되기를 바라는 예수의 간구를 담고 있다.
ㅇ아버지의 이름으로...보전하사 - 헬라어 '테레오'는 '조심스럽게 돌보
다', '굳게 붙들다', '보호하다' 등의 의미를 지니며 본장에서는 '제자들이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다'(6절)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제자들을 보전해야 할 대상은 세상의 악
이며 그 수단은 하나님의 이름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계시 특히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
해 드러난 하나님의 모든 신성(神性)과 뜻을 가리킨다. 이후에 사도들은 자신들의 복
음 사역의 능력이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고백한다(행 4:10-12).
ㅇ우리과 같이...하나가 되게 - 아버지의 이름은 세상의 악으로부터 저희를 성별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저희로 하나가 되게 하신다. '하나'가 되는 근거는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이다. 예수는 고별 설교 속에서도  연합과  하나됨을  계속  강조하셨으며(13:34,
35;15:13). 본장 기도 속에서도 계속 반복하고 있다(21, 22, 23절). '하나가 되게'라
는 표현에 대한 여러 견해를 살펴보자. (1) '하나가 되게'가 아니라 '하나로 계속 있
게'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L. Morris, Lenski). 제자들은 이미 아버지가 '예수에
게 주신 이름에 의하여 하나가 되었으므로 계속 하나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지켜
달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2) 제자들은 독립된 여러 개개인들로서가 아니라 연합된 하
나(as a unity)로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로 보는 견해(Barrett). (3)
제자들이 예수 안에서 서로 연합하여 유기체적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세상의 온갖 불의
와 죄악으로부터 성별되고 보호받아야 함을 뜻한다는 견해. 이중 세번째가 가장 자연
스럽게 이해되지만 나머지 두 견해도 보완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다.

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ㅇ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 지상에 계셨을 '때'를 언
급하신 것은 그의 사역이 완성 단계에 있음을 시사한다. 예수는 지난 날을 회상하면서
그의 사역이 아버지의 이름에 의존되어 있었음을 고백하며 이를 이후에도 아버지께서
보전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H.R. Reynolds). 한편 본절에서 '보전하
다'(에테룬)와 '지키었나이다'(에퓌랖사)가 나란히
언급되었다. 전자는 6, 11절 등에서 두루 사용되었으나 후자는 본절과 12:25에서만 나
온다. 후자는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대한 방어라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한다. 그러나 두
단어는 '보전'과 '보호'를 강조하는 의미에서 동의적으로 반복되었으므로 서로의 위치
가 바뀐다 해도 별다른 의미 차이를 드러내지 않는다.
ㅇ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 이 말은 명백히 가룟 유다를 지칭한다. '멸망하다'는
의미로 사용된 헬라어 '아폴뤼오'는 일반적으로  종말론적인 완전한
파멸 또는 저주를 의미한다(3:16;롬 2:12;고전 8:11). 살후 2:3에서 이 단어는 예수
재림 전에 일어나는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을 칭할 때 사용되었다. 유다를 '멸망
의 자식'이라고 부른 것은 그의 종국적 운명이 멸망에 처하게 되어 있다는 의미보다는
그의 인격 자체가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을 정도로 타락되어 있다는 의미에 가깝다
(L. Morris). 유다는 엄연히 자신의 주관적 결정에 따라 멸망의 길을 걸어갔을 뿐이
다. 따라서 유다의 반역은 예언을 통해 이미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유다의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보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Calvin).
ㅇ성경을 응하게 함 - 유다는 자신의 독자적 의사에 따라 행동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성경의 예언을 성취시켰다. 이 예언된 말씀은 예수께서 직접 인용하신 바 있는(13:18)
시 41:9을 가리킨다. 혹자는 시 55:12-15 등의 말씀을 추가하기도 한다(Lenski, C.K.
Barrett 등). 또한 사 57:12과 같은 적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유다에게 적용한다 할
지라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하려 함이니이다

ㅇ지금...내가 세상에서 - 예수는 지금 제자들을 남겨 놓는 시점에 있다(Lenski). 이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11절에 이어 예수는 아버지에게로 간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
하고자 이 표현을 사용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지상의 사역 가운데서 제
자들을 보호하셨던 때(12절 상반절)와 떠나가시는 때 사이의 대비를 더욱 분명하게 나
타내 보여주셨다.
ㅇ이 말을 하옵는 것은 - 바렛(Barrett)에 의하면 '이 말'은 14:1-16:33의 고별 설교
도 포함한다고 한다. 이 해석의 근거는 본 구절과 같은 표현의 헬라어가 사용된 15:11
로서, 그곳에서는 그동안 예수가 말씀하셨던 것들을 포함하여 '이 말'이란 표현이 사
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옵는 것'이란 표현이 미완료 과거형이라면 고별 설교도
포함될 수 있으나 현재형이므로 '이 말'은 단순히 1-12절까지의 기도 내용을 지칭한다
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ㅇ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 이 표현은 고별 설교(15:11;16:22, 24)에서
도 언급되었다. 그 설교에서 '기쁨'은 하나님의 보호에 따른 기쁨이다. 예수가 잠시
제자들과 이별하지만 하나님의 보호는 영원하며, 성령의 강림으로 제자들은 영적으로
나 지식적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므로 그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를 확실히 체험하게 된
다. 이것이 고별 설교에 있어서 기쁨의 근거다. 본절에서도 역시 같은 차원의 기쁨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15:11;16:22, 24 주석을 참조하라.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ㅇ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 '아버지의 말씀'은 예수를 통하여 계
시된 메시지 전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L. Morris). 이 '말씀'은 예수가 성부로부
터 받은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예수가 여러번 자신을 성부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
표현할 때 이미 암시되었다. 한편 '주었다'(데도카)는 '위임하다', '위
탁하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므로(마 25:15;막 12:9) 제자들이 진리이신 하
나님의 말씀(17절)을 위임받게 됨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본절
에서 '데도카'는 완료형으로서 제자들이 이미 받은 말씀과 연관된다. 따라서 본 구절
은 제자들에게 그동안 예수가 가르치신 내용들에 대한 것이다.
ㅇ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 제자들이 미움을 받을  것을  대화식(對話式)으로
말씀하실(15:18, 19) 때와는 달리 기도 가운데서 제자들의 고난을 위해 기도하심은 자
기에게 소간 자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
ㅇ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 본 구절을 혹자는 '(내가 세상적이지 않음같이) 저
희도 세상적이지 않습니다'라고 번역했다(Berkley). 그런데 본 구절을 헬라어 본문대
로 번역한다면 '(내가 세상에 기원을 두지 않았듯이) 저희도 세상에 기원을 두지 않습
니다'로 해석된다. 이 말은 출신이나 소속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므로 개역 성경처럼
번역되어야 한다. 여기서 예수는 제자들도 자신과 동일한 출신과 소속을 지니고 있음
을 가르치신다. 제자들이 이러한 신분을 소유하게 된 근거는 어떤 인간적인 방식에 의
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1:13) 또한  영으로  거듭났다는데(3:3-8)
있다(C.K. Barrett).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예수에 의하여 세상에서 택함을 입은 자들
이며(15:19) 예수에게 접붙임을 받은 자들로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ㅇ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 예수 자신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나 자신
의 사역을 완성하실 때까지는 세상에 머물러 계셨다. 이와 같이 제자들도 세상에 속하
지 않았지만 자기들에게 위임된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여전히 세상 안에(in the world)
있어야 한다(11절). 그래서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으나 예수와 함께 하늘로 올
라갈 수는 없다. 혹자는 예수의 이와 같은 표현이 당시의 종말론적 기대 즉 예수 재림
시에 있게 될 휴거(repture)에 대한(살전 4:17) 사상을 수정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것
으로 추정한다(Bultmann, Barrett). 그러나 이 추정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본절
에서 강조된 것은 종말론적인 내용이 아니라 제자들의 사역과 관련된 내용이기 때문이
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바렛(Barrett)은 본 구절의 표현이 성도와 세상의 분리를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한다. 요한이 본서를 당시의 이단(異端)
인 영지주의자들에 대해 복음을 변증하기 위해 기록했으며 또한 본절이 세상과 엄격한
분리를 반대하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으므로 이 견해는 어느 정도 타당성을 지니고 있
다. 아무튼 고전 5:10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도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이 곧 세
상과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성도들이 그렇게 하려면 세상 밖으
로 나가야 할 것이다.
ㅇ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 - 이 말은 제자들을 위한 예수의 간구로서 하
나님의 보호와 구속이 있을 것에 대한 기도를 의미한다(Bernard) '악에'의 헬라어 '에
크 투 포네루'에서 '포네루'가 남성도 되고 중성도 되
므로 본 구절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1) 남성:이렇게 해석하는 자들은 악한
자에게 넘어간 가룟 유다의 사례와(요 13:27;눅 22:3) 예수의 고별 설교 가운데 언급
된 이 세상 통치자들에 대한 기사(12:31;14:30;16:11) 같은 부분을 근거 구절로 삼는
다. 그리고 그들은 요한의 서신서에 언급된 '포네론'또는 '포네루'
(요일 2:13, 14;3:12)가 의미상 '악한 자'를 뜻한다고 보아 본 구
절도 '남성'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Meyer, Lenski, Barrett, Morris,
Macgregor, Davey). 공동 번역이 이 견해를 취한다. (2) 중성:이렇게 해석하는 자들은
세상에 실제로 악이 있다는 것과 또한 세상 자체가 악하는 것(요일 5:19)을 들어 악의
세력(power)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Luther, Calvin, Hengstenberg, Godet). 개
역 성경도 이 견해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이 견해를 지지하면서 혹자는 악이 이세상
에 존재하는 무신론적 경향성이라고 주장한다(Reynolds). 그러나 본 구절이 '남성'이
나 '중성' 어느 것으로 해석될지라도 의미상 큰 차이가 없다. 한편 '빠지지 않게 보전
하시기'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테레세스'로 '지키다', '보호하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본 구절 전체를 헬라어 본문에 따라 번역하면 '악(한 자)에게서 보
호하시기 위함'이 된다. 개역 성경은 헬라어 본문에 없는 '빠지지 않게'라는 말을 첨
가시켜 '보전하다'라는 말을 강조시키고 있으나 본 구절에 사용된 전치사 '에크'가 '~
에서 벗어나(밖으로)'를 의미하므로 정확한 번역은 아니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ㅇ14절에 언급된 말씀이 어순만 바뀌어서 반복되고 있다. 즉 두 절에서 '우크 에 이
신'와 '여 투 코스무'의 순서가 뒤
바뀌어졌다(개역 성경은 변화가 없음). 14절은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이유로 서술되었
지만 본절은 악으로부터 보전되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ㅇ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 '거룩하게 하다'는 것은 성별'(consecration)에 대한
것으로 세상과 분리(分離)된 삶을 의미한다. '거룩하게 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하기
아조'는 '깨끗하게 하다'를 뜻을 가진 '카다리조'와
다른 측면에서 사용된다(Reynolds, Bernard) 제자들은 이미 예수의 말씀에 의하여 깨
끗함(purification)을 받았다(15:3). 물론 그들이 깨끗함을 받은 것이 거룩하게 되었
다는 의미를 지니지만 세상에 속해 있으나 세상과 분리된 삶을 의미하는 '성별'과는
다르다. 이미 깨끗하게 된 제자들은 진리안에서(엔 테
알레데이아) 깨끗게 된 그 신분을 유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는 지금 제자들이
그러한 삶을 살수 있도록 해 달라고 성부께 간구하신 것이다. 또 한편으로 예수는 제
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므로(16절) 그 자신과 같은 거룩함이 은혜로 그들에게 주
어지기를 원한다. 구약에서 '하기아조'는 선지자를 불러 세상과 구별하여 세울 때 사
용되었으며(렘 1:5)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울 때에 '거룩하게 하여 제사
장 직분을 맡겼다'(출 28:41). 따라서 예수는 자신이 성부에 의해 거룩하게 되어 세상
에 보냄을 받으심 같이(10:36) 제자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파송하실 때에 하나
님에 의해 성별되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진리'는 제자들을 거룩하게 하는
매개체이며(요 8:32) 거룩하게 하는 실행자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16:13)이시다
(Bernard). 이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가 지상 사역동안 선포하셨던 것이며 성
령은 그 선포된 말씀을 근거로 활동하신다.
ㅇ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 본절은 거룩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필연적
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계시만이 성별을 가능케 한다(L. Morris).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진리이며 생각하시는 것, 행하는 것, 모두가 동질(同質)의 진리
이다. 아버지의 말씀은 예수에 의하여 선포되어 현실 가운데서 '진리'로 나타나신다
(Reynolds). 한편 본절에서 '진리'는 헬라어 본문에서 관사 없이 사용되었다. 이는 앞
의 '진리'와 구별시키기 위함이다. 즉 상반절의 '진리'와 구별시키기 위함이다. 즉 상
반절의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여기서는 그 말씀이 '참되심'을 의미한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ㅇ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보내었고 - 제자들의 사역은 그리
스도의 사역에 근거한다. 강조법으로 사용된 '나를'(에메)과 '나도'(카고)가
'보내심'의 상관 관계를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즉 예수가 성부로부터 사명
을 부여받아 세상에 오심같이 자신도 역시 제자들에게 서명을 주어 세상에 보내신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성부에게서 받은 사명을 제자들도 수행하게 된다. 그렇지만 제
자들 스스로 그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을 근거로 활동하시는
성령에 이끌림을 받을 때에야 제자들은 그 사명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다. 특히 혹자
는 본 구절 가운데서 '보내신 것같이'가 방법에 있어서 유사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
라 인격의 유사성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절에서 두번 반복된 '보내다'의
헬라어 '아포스텔로'는 '펨포'와는 달리 어떤 사명
을 부여해서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보내신 것같이'는 사명을 주는 방법에서
뿐 아니라 보내시는 자의 인격이 동일함을 가리킨다. 한편 본절에서 두번 언급된 '보
내다'는 헬라어 본문에서 둘 다 부정과거형으로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다. 즉 제자들이 사명을 부여받아 보냄을 받아 활동한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의 일이다. 그런데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미 이전에 사명을 주어 보내셨던 것
처럼 말씀하시기 때문에 모순된 진술을 하고 계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수는 공
생애 초기에 제자들에게 사도적(使徒的) 임무를 부여하셨다(마 10:5;막 3:14). 그렇지
만 이 임무는 지속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예수는 20:21에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
에게 다시 현재형을 사용하시어 '보내노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본절은 과거에 제자
들에게 부여하신 사도적 임무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고 더 나아가서 제자들이 이 후에
그 사명에 따른 삶을 살게 될 것을 암시한다. 구약의 한 예로 다윗은 왕으로서 인정되
는 기름 부음을 받았으나 실제로 왕으로서의 임무를 시작한 것은 몇 년이 지나서야 가
능했다9삼상 16:13;삼하 2:7).
ㅇ세상에 - 예수는 자신 뿐 아니라 제자들이 사명을 부여받은 사역의 장소를  지칭하
여 '세상'이라는 말을 언급하셨다. 요한에게 있어서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와 대립
(對立)된 영역을 뜻하며(8:23;18:36) 어떤 때에는 사단에 의해 대표되는 집합적인 인
격체로 묘사되기도 한다(14:27). 이처럼 요한은 '세상'을 주로 그리스도와 대립된 것
으로 설명한다(1:29;요일 4:4;5:4, 5, 19).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세상'을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보내셨다(3:16). 이런 점에서 예수는 이 사랑의 계명을 수행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으며 또한 자기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계명을 주셔서 세상에 보내셨
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이 서로 하나가 되고 또한 그 안에서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명령하시고(13:34;15:12, 13), 기도에서도 제자들과 그들의 말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해 간구하신다. 이와 같은 말씀들은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에게 대한 사
랑을 강조한 것이지만(13:1) 제자들이 세상으로 가야 한다는 사명도 함께 강조되고 있
다. 이 사명에 따라 세상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룩하는 사랑의 공동체로 초대되어
야 한다. 따라서 세상을 향한 제자들의 파송은 모든 성도들에게도 세상을 그리스도에
게로 초대하는 동일한 사명을 갖게 하는 의미를 지닌다(Reynolds, C.K. Barrett, 케세
만).

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ㅇ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 예수는 10:36에서 자신이 성부에 의해 거룩하게 되심
을 언급하셨으나 본 구절에서는 자기 스스로 거룩하게 하신다는  표현을 사용하신다.
그렇지만 여기에 어떤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니다. 70인역(LXX)에서 '거룩하게 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조'는 다음 두 경우에 사용되었다. (1) 제사
임무를 수행하는 제사장들을 성별하는 경우에 사용하였으며(출 28:41;29, 1, 21) (2)
또 하나는 희생 제물에 대한 성별을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출 28:38;민 18:9). 본절에
서 예수의 거룩하게 하심은 두 개의 의미를 모두 가졌는데,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는
희생 제물이 되심과 동시에 그 예식을 집행하는 대제사장이 되신다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의 거룩하게 하심은 갈보리의 언덕을 바라보는 것이며 그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L. Morris). 혹자는 예수께서 '내가 내 자신을 아버지께 거룩하게 하여 드린
다'라고 말씀하지 않는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구약의 희생적 개념에 적용하는 것을 반
대한다(Lenski). 그러나 그는 자의적인 죽음과 속죄적 죽음으로서의 거룩하게 하심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또 바렛(Barrett)은 '위하여'(휘페르)라는 말에 강조점
을 두어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막 14:24) 또는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막
1:45) 등과 같은 성만찬적인 용어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한다. 예수의  거룩하게 하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과 같은(15:13) 자의적인 대속적 죽음이다. 혹자는
이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자아 성화'(自我聖化)의 비밀이라고 설명했 
다(Luthi, L. Morris).
ㅇ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 - 예수의 죽음은 제자들의 죄를 씻는 일차적
인 목적에 머물지 않고 '히나'가 이끄는 또 하나의 목적을 제시한다. 그 목적
은 제자들의 복음 사역을 위해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의 거룩은
예수와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제자들의 성결은 아버지의 은사에(17
절)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살후
1:12) 자신의 사역을 계승하여 지상에서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거룩하게 되기를
간구하면서 그들을 위해 죽음을 맞는다. 한편 본 구절에서  '진리'는 17절 상반절의
'진리'와는 달리 관사(冠詞)가 없다. 이를 전치사 '엔'과 함께 부사적 용법으로
해석한다면 그 뜻은 '진실로'가 된다. 그러나 이 해석을 취할 경우 본 구절의 의미가
상반절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서 '진리'는 17절 상반절의 '진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관사가 생략된 것으로 이해된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가 자신을
거룩하게 하시는 것과는 다른 방법, 즉 예수에 의해 선포된 아버지의 말씀으로 거룩하
게 되는 것이다.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ㅇ이 사람들만 - 이 말은 단순히 예수를 믿는 사람들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사람들로
서 예수의 열 한 제자들을 가리킨다. 바렛(Barrett)은 이 사람들을 예수와 함께 만찬
에 참석했던 사람들이라고 주장하지만 가룟 유다는 제외시켰다. 그런데 본장의 기도가
만찬에서 행해진 것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18:1을 볼 때 만찬에서 행해진 것으로 추정
된다. 왜냐하면 공관복음서는 예수가 만찬 후 곧바로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ㅇ저희 말을 인하여 - '말'(로고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자들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메시지 전체를 드러내는 복음적인 가르침을 의미한다(Bernard). 이런
의미에서 제자들에 의하여 전달된 메시지 역시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본질적
으로 '진리'이다. 제자들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원문상 진리 '안에서'(19절) 이루어지
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반면 성도들의 믿음은 제자들의 말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
이라고 말하고 있다. 제자들의 믿음이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것에서
기인하듯이 그들의 보내심을 받음(18절)을 통하여 믿음을 가진 새로운 신자들이 생겨
날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가...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라고 말씀하실 때 제자
들에 의하여 이루어질 지상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이미 바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바울
은 복음 전파자의 사명을 강조하기 위해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라고 진술했다. 이처럼 교회의 기초(基礎)는 말씀
이며, 이 말씀이 전파될 때 교회는 형성된다.
ㅇ믿는 사람들 - '믿는 사람들'은 현재분사형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미래적 의미로 파
악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L. Morris, Turner, Bernard). 미래적 의미를 현재 분사
로 나타내는 용법은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 어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므로 이 말은 '믿
게 될 자들'로 번역하는 것이 더 분명한 뜻을 나타낸다. 그래서 많은  영역 성경들은
미래형으로 번역했다(KJV, Scoffield Bible, Jerusalem Bible, MLB, NIV, LB).

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ㅇ아버지께서 내 안에...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 본절에는 '히나'가
이끄는 세 가지의 목적절이 나온다. 이 세 목적절은 모두 20절의 '내가 비옵는 것은'
에 연결된다. 본문은 그중 첫번째 '히나'절로서 성도 공동체의 연합을 성부와 성자의
일체성에 근거하여 간구하는 내용이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 있어 그의 일을 하시며
(14:10) 또 아들은 아버지 안에 있으므로 두분은 하나로  존재하고  일하신다(10:30).
예수는 제자들이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셨듯이(11절) 저들의 증거를 통해 얻게 될 사람
들, 즉 교회 역시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신다(C.K. Barrett). 그러나 하나됨이 의미가
제도적이거나 조직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교회의 구성원 모두가
주체성을 상실한 채 기계적으로 통합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이
존재 양식에 있어서 각각 독립적이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완전한 일체를 이루듯이 교
회내의 각 지체들도 나름대로의 다양한 특성을 지니는 가운데 통일성(統一性)을 띠는
것이다(15:1-8;고전 12:12, 13). 그러나 성도들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은 아들이 아버
지 안에 있는 것과는 질적 측면에서 엄연히 구분된다.
ㅇ우리 안에 있게 하사 - 이는 두번째 '히나'가 이끄는 목적절이다. 예수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사실을 전제하고서 어버지와 아들을 하나로 묶어 '우리 안
에'(엔 헤민)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역으로 아버지와 아들도  우리들
안에와서 거처를 삼으시고 함께 하신다는 점을 시사한다(14:23).
ㅇ세상으로...믿게 하옵소서 - '히나'가 이끄는 세번째 목적절은 앞의 두 목
적절의 결과로 등장한다. 성도 공동체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일체를 이룸으로써
세상이 이를 통해 믿음을 갖게 되기를 간구하시는 내용이다. 물론 이는 세상 전체가
믿음을 갖게 되리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는 없다(15:20, 22, 24). 다만 세상 사람들 중
에는 지금은 비록 불신 가운데 있지만 장차 믿음과 구원에 이르게 될 자들도 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세상을 감동시키는 성도들의 하나됨은 성도들의 배후에서 하나가 되
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능력과 모든 은혜에 의한 것이다. 결국 성도
들은 예수와 하나님 안에 거하는 풍성한 은혜와 연합(聯合)한 증거들을 드러냄으로써
세상을 믿음으로 인도하는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ㅇ내게 주신 영광을 - 예수의 영광은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했던 영광(5절)과 지
상의 모든 사역을 다 마친 후에 아버지와 함께 누릴 영광들을 모두 포함한다. 특히 예
수는 마지막 설교(16:14 주석 참조)와 대제사장적 기도 속에서 십자가와 영광을 분명
하게 연결시키셨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영광은 아들이 행하는 모든 사
역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십자가를 통해 그 영광의 역설적 의미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ㅇ저희에게 주었사오니 - 제자들 역시 아들의 영광을 소유한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영광이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세세토록 왕노릇하는 영광이요 영원히
사랑 가운데 거하는 축복이다(딤후 2:12;계 20:4). 아들의 영광이 아버지의 모든 뜻에
순종하는 것 속에서 나타났듯이 제자들의 영광도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는 가운데서 나
타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각기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의 뒤를 따라 오라고 말씀하
셨다(눅 9:23). 믿음안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함으로 순종과 겸손과 수난을
통하여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성도들의 십자가이다.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형벌이 아니라 제자됨의 사명과 하나님의 자녀됨의 존귀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Barclay). 따라서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획득한  영광을 세상
가운데서 실제적으로 나타낼 때에 아버지와 아들이 있는 그곳에서 영원한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24절).

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ㅇ21절의 문장 구조와 매우 유사하다. 21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내주하는 것
속에 제자들도 함께 거한다는 논조(論調)로 전개되지만, 본절은 보다 수직적인 의미에
서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제자들의 관계를 하나로 묘사하고 있다. 제자들과 아버지의
상호 연합을 위한 중보적 매개체로서의 아들을 설명하면서(Lagrange) 세상 가운데서
사랑을 나타내야 할 제자들의 온전한 일체성을 강조하고 있다(L. Morris). 다시 말해
서 제자들이 아버지와 연합할 수 있는 것은 아들이 제자들 안에도 있고 또한 아버지
안에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들을 통하지 아니하고 아버지께 갈 수 있는 자는 아
무도 없다(14:6).
ㅇ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 이 구절은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12절)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제자들이 세상에 드러내어야 할 온전한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다. '온전함'(테텔레이오메노이)은 '수행하
다', '완성하다'(4:34;5:36;17:4) 등의 의미이며 성경 말씀의 '성취'를 나타낼 때도
사용되었다(19:28). 제자들의 하나됨은 아버지와 아들의 온전한 일체(一體)의 수중에
로 지향되어 가야 한다. 그리고 온전함을 이루라는 것은 하나가 되기까지 온전히 장성
하라는 뜻이며 또한 거기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최종적인 연합과
완성은 마지막 때에 성취될 것이지만 교회는 그 성장의 모든 단계에서 완성을 향해 나
아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C.K. Barrett).
ㅇ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 - 여기서 '알게'는 21절의 '믿게'와 동의어가 아님이 분명
하다. '알게'라는 말은 믿음에 이르는 것 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의 인정까지 포함한다.
하나님 안에서 성도들이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을 보면, 설령 믿음이 없는 자라 할지라
도 감탄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궁극적으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려는 계획과 연결된다(빌
2:10). 한편, 하나님의 사랑과 아들을 보내심이 불가분적 관계에 있음과 같이 제자들
을 사랑하는 것과 그들을 세상에 보내는 것 역시 불가분적 관계에 있다. 성도들이 세
상 가운데서 하나로서 나타나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基礎)할 때에만
가능하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ㅇ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 '나 있는 곳'이란 이 세상의 어느 곳이 아니라 영
원한 천국이다. 예수는 앞에서 제자들에게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13:33)고 말
씀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후에는 따라 오리라'(13:36)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말씀은
결국  미래의  시점을  염두에 둔 것이며, 종말론적인 소망에 관한 것이다(C.K.
Barrett). 예수께서 세상에 더 오래 있지 않을 것이라고(11절) 말씀하심으로 임박한
십자가의 수난과 영광을 예고하신 바 있다. 이제 제자들을 당신이 계신 곳에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저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뒤를 좇아 고난에 동참하라는 것이며 또한
그 고난 뒤에 있을 영광에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L. Morris).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연
합함으로 이미 영광에 참예하였으나(22절)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는 보좌에 앉으
신(계 3:21) 그의 영광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
ㅇ창세 전부터...내게 주신 나의 영광 - 22절에서 '영광'은 지상 사역의 절정인 십자
가 죽음과 주로 연관된 것임에 반해(22절 주석 참조) 본절은 미래에 회복될 영광에 강
조점을 둔다. 이 영광은 그가 창세 전부터 가지고 있던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의미한
다. 본절은 그리스도의 신적 선재성(先在性)을 회고하며 동시에 미래적 완성을 바라보
고 있다. 성도들은 지금은 거울 보는 것과 같이 희미하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있
으나 그때에는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과 같이 보게 될 것이다(계 22:4).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줄 알았삽나이다

ㅇ의로우신 아버지여 - 요한은 형용사 '의로운'(디카이오스)을 하나
님에게만 사용하고 있다(C.K. Barrett). 이 칭호는 11절의 '거룩하신 아버지'와 같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신구약 전체에서 강조되는 사항이다
(렘 12:1;시 116:5;119:137;롬 3:36;요일 1:9;계 16:5). 이 하나님의 의는 근본적으로
불의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을 구별하는 칭호이며, 주님은 아버지
의 의로우심을 선포하심으로 아버지에 대하여 무지한 가운데 있는 불의한 세상을 단호
히 정죄(情罪)하고 있다.
ㅇ세상이...알지 못하여도 - 세상의 무지는 두 가지로 지적되는데 하나는 아버지에
대한 무지이며 또 하나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사실에 대한 무지이다. 예수
는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낸 것을 믿게 하기 위하여 기도하셨으며 또
한 세상의 믿음을 위하여 제자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되기를 기도하셨다(23
절). 본문에서는 아버지와 제자들 사이를 연결시키는 중보자로서의 예수의 모습이 부
각되어 있다. 제자들은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를 알게 되었으나 세상은 아들을 거부함
으로 여전히 무지한 상태에 머물게 된다. 제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중재된 지식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ㅇ내가 아버지의 이름을...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 아버지의 이름은 아버지의
본성을 의미하며 아들의 지상 사역 가운데서 가장 확연히 나타났다(6절 주석 참조).
아들은 이 땅에서 행하는 모든 행동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격을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
내었다. 그리고 '알게 하리니'는 장래의 사건을 암시하는데 혹자는 바로 이후에 있을
십자가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며(L. Morris) 또는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성경이 증
거할 사역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Reynolds, C.K. Barrett). 우리는 본문이 이 두
가지 모두를 암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하겠다.
ㅇ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 - 본절 마지막 '히나'가 이끄는 목적절은 예수 그
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중보 기도를 마무리하는 내용이다. 이는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
라'(16:33)고 말씀하신 마지막 설교의 끝 부분과 연관을 맺고 있으며 또한 제자들이
장래에 알게 될(상반절 주석 참조) 사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예수는 사역을 완
성하심으로 그들 안에 영원히 머물 것이다(마 28:20).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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