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요한복음

[스크랩] 요한복음 (16 : 1~33)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9:19
요한복음 16장


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ㅇ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 혹자는 '이것'이 예수가 지상 사역을 통하여 말씀하신
모든 교훈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H.R. Reynols).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핍박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15:20-25의 말씀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eyer, Godet, Barrett, Lindars). 그리고 버나드(Bernard)는 핍박 외에 보
혜사 성령에 대한 약속이 '이것'에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다음에 이어지는 '실족지 않
게 하려 함이니'라는 표현으로 보아 '이것'은 '핍박'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하겠으
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15:26, 27의 보혜사 성령에 관한 내용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요한은 '이것'을 의미하는 헬라어로 '타우타'를 사용하였는데 이 단어는
복수로서 두 가지 이상을 지칭한다. 따라서 버나드(Bernard)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한편 본 구절과 같은 표현이 15:11에도 나오지만 본 구절에서는 부정문이 뒤이어 진술
된다. 15:11에서는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연합이 강조되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진술된 반면 본 구절은 '핍박'이 강조된 뒤에 언급되고 있으므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ㅇ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 '실족하다'에 해당되는 헬라어 '스칸달리조'
는 '넘어뜨리다'를 의미하는데 본서에서는 본절과 6:21에만 언
급되어 '기독교의 신앙을 포기하는 것', 즉 '배교'(背敎)를 의미한다(C.K. Barrett).
그렇지만 이 단어가 가장 많이 언급되는 마태복음에서는 '배교'(마 11:6;26:31)뿐 아
니라 '죄를 범하는 것'(마 5:29)을 뜻한다. 여기서 예수는 유대 사회에서 가장 큰 징
계인 '출회'(혹은 출교)와 사형을 염두에 두고 계신(2절)것 같다. 예수는 자신이 십자
가에 체포될 때 제자들이 다 흩어지고 수제자 베드로조차 예수를 부인하게 될 것을 미
리 아시기 때문에 그들 혼자의 힘으로 앞으로 닥쳐올 박해를 견딜 수 없음을 알고 계
셨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이 그와 같은 박해를 만날 때 그의 말씀을 기억하여 실족
하지 않도록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하리라

ㅇ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 우리는 제자들이 유대인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유대
인들에게 있어서 '출회'는 '유대 공동체'에서 쫓겨 나는 것만 의미하지 않고 보다 궁
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유대 랍비들은 '출회'를
몇 가지로 세분 하였으나 구약적 의미에서 '출회'는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어 유
대인들과 교제의 떡을 뗄 수 없는 것을 의미했다(9:22 주석 참조). 따라서 예수를 믿
는 신앙과 예수를 배척하는 유대교의 긴장 관계는 제자들이 현실적으로 직면하는 문제
였다. 즉 '출회'는 종교적인 것으로부터 쫓겨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당시대의 문
화, 교육, 경제 외에 사소한 마을의 공고문이나 사장 정보등으로부터도 분리되는 현실
적인 고난이었다. 실제로 유대 지도자들은 급속히 성장하는 기독교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유대 기독교인들을 회당으로부터 파문(excommunication)시키는 일들을 강행했으
며 주후 90년경에는 람비 가말리엘 2세(Rabbi Gamalie II)가 기독교를 이단으로 정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기도교인들은 '출회'라는 고난의 역사을 통하여 신앙을 더욱
돈독히 하여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출회'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9:22 주석을 참조하라.
ㅇ때가 이르면 - '때'로 번역된 '호라'는 관사 없이 사용되었다. 이 '호라'
는 본서에서 관사와 함께 예수의 사역과 관련하여 두 가지로 구분되어 언급되었다.
(1) 아직 이르지 아니한 '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2:4;7:6, 8, 30;8:20) (2) 이미 성
취된 '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12:23, 27;13:1;16:32;17:1). 두 가지 때의 관계를 오
스카 쿨만(O. Cullmann)은 '이미'와 '아직'의 긴장 관계로 표현한 바 있다. 그러나 본
절의 '때'는 예수의 사역과는 관계가 없다. 이 '때'는 예수가 이 세상을 떠나신 후 있
게 될 제자들 및 성도들의 순교의 '때', 박해의 '때'를 가리킨다. 본문에서 요한이 관
사를 생략한 것은 예수의 사역과 관련된 때와 구분함과 동시에 박해가 어느 시대이든
지 일어날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ㅇ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 이와 같이 말하는 자들이 구체적으로 행하는 일들
은 앞에서 언급되었던 것으로 (1) 출회시키는 일과 (2) 죽이는 일이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을 섬긴다고 고백하는 열광적인 자들에 의하여 수많은 신앙인들이 순
교의 피를 흘렸다. 사도 바울은 그가 다메섹에서의 개심(改心) 전에는 하나님 섬기는
열심으로 성도들을 죽이고, 외국에 있는 성읍 다메섹까지 찾아가서 예수를 믿는 사람
들을 핍박했다고 고백했다(행 26:9-12). 그리고 영국에서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거나 사형당했다. 그외에 종교 개혁 지도자들이 로마 교회
로부터 숱한 박해와 순교를 당했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적 맹신이 빚은 어리석음의 극
치였다. 그러나 성도들은, 예수도 이 같은 유대 지도자들의 편견과 독선에 사로잡힌
맹신의 결과로 십자가를 지셨기에 이런 일을 당할 때 이상히 여길 필요가 없다. 예수
가 제자들에게 앞으로 있을 핍박에 대해 미리 가르치신 이유도 그들이 그 일을 당할
때 이상히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3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ㅇ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 본 구절은 5:21의 반복으로 예수는 2절에 기록된
광신적인 핍박자들의 열심이 영적 무지에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사도 바울은 유
대교에 대한 자신의 지나친 열심이 그리스도께서 바울 자신에게 계시하기 이전에 일어
난 일이라고 고백했다(갈 1:13, 14). 이 무지는 이성적인 지식의 결핍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데서 기인함으로써 종교적 독선과 아집 및
편견에 사로잡힌 상태를 의미한다(행 3:17;고전 2:8). 어느 시대에서든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단지 성경 지식만을 소유한 사람은 바리새인들이 지녔던
것과 같은 종교적 독선과 편견으로 인해 형제를 핍박하는 무지에 빠질 수 있다.

4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 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

ㅇ이 말을 이른 것은...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 예수께서는 종종 미래에 되어질 일들
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이 말을 이른 것'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셨다(2:22;13:19;16:1
). 특히 13:19에서는 이 표현이 제자들의 믿음과 관련이 있지만 본절에서는 오순절 성
령 강림 후에 있을 제자들의 사역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제자들은 앞날에 닥칠 자신
들의 일들을 미리 예수로부터 직접 들은 후 실제로 그 일을 당하게 되면 예수의 말씀
을 기억하고 큰 위로와 확신과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성령께서 제자들
과 함께 계시면서 예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에(14:26) 그들은 핍박을 당할지
라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ㅇ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 '처음부터'(여스 아르케
스)란 표현은 '아프 아르케스'와 같은 의미로 예수의 공생애 시작
또는 예수가 제자들을 만난 시점을 의미한다(H. R. Reynolds). 그런데 그때부터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있을 핍박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은 이유는 다음 두 가지
로 해석될 수 있다. (1)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활동하면서 그가 행하시는 일들뿐 아니
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끊임없는 핍박을 목격했으므로(11:8) 구태여 그러한 핍박에
대해 말씀하실 필요가 없었다. (2) 예수가 이 땅에 계시는 동안은 핍박의 대상이 예수
자신이었으므로 핍박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이
떠날 시간이 다가왔으므로 제자들이 핍박의 대상이 될 것을 제자들에게 알리실 필요가
있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가 행하는 것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이해하지 못했
을 때가 많았으며(14:8, 9) 때로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는 것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14:5). 처음부터 핍박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면 그들은 더욱더 이해하
지 못했을 것이다.

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ㅇ지금 - 예수가 7:33에서 '조금 더 있다가'란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아직 하던 일이
남아 있고 그 일이 끝날 때까지 시간이 남아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는
'지금'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의 사역이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제자들에게 암시적
으로 가르쳐 주신다.
ㅇ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 여기서 '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파고'
는 14:2에서 '가다'로 번역된 '포류오마이'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문자 그대로 '떠나 가다'라는 의미가 강조된다. 그런데 예수는
목적지가 없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 집'을 향해 가시는 것으로(14:2), 본절
에서는 자신을 '보내신 이' 곧 아버지에게로 간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보내신 이'
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 자신이 이땅에 사명을 받고 오셨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간
다'라는 표현은 그 사명을 다 이루시고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감을 가리킨다.
ㅇ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 이 말은 13:36에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
고 말한 베드로의 질문과 14:5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한
도마의 질문과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순처럼 보이는 이 표현은 표면
적인 것에 불과하다. 만약 본문에서 '묻다'라는 용어가 부정 과거 형태인 '에로테세'
로 쓰였다면 그 의미는 묻는 자가 과거에도 없었다는 의미가 되겠지
만 요한은 이러한 모순을 피하기 위해 현재 시제를 사용하여 예수가 말씀하고 계신 그
시점을 강조한다. 즉 예수는 자신의 교훈에 대한 제자들의 즉각적인 반응이 없음을 지
적하고 있을 뿐이다.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ㅇ도리어...근심이 가득하였도다 - 14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본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책망하신다. 이 책만은 제자들의 영적 무분별과 관련이 있다. 즉 예
수는 자신이 아버지께로 간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자신의 기쁨을 제자들과 공유하기
를 원했으나(15:11), 제자들이 기쁨이 충만하기는 커녕 오히려 근심이 가득찼다. 그들
이 예수가 떠나시는 목적과 의도를 명백하게 이해했다면 슬픔에 잠기지 않았을 것이다
(14:18).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ㅇ실상을...너희에게 유익이라 - '실상'(해 알레데이아)이란 말
은 단순히 거짓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사실 자체만을 언급하는 것처럼  보인다(롬
9:1). 그러나 이 말은 예수께서 유대인들과의 논쟁 속에서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
희가 믿지 아니하는도다'(8:45)라고 책망하실 때 사용하신 '진리'와 같은 용어이다.
그런데 개역 성경은 본 구절에서 '알레데이아'의 의미를 약화시켜 번역하여 본절 전체
의 의미도 약화 되었다. 따라서 본 구절은 '실상'보다 '진리'로 번역함이 타당하며 따
라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진리를 펼쳐 보이시겠다는 강화된 의미로 보는 것이 좋다. 한
편 예수의 떠나심은 세상에 오심과 같은 유익을 제자들에게 준다. 여기서 '유익하다'
(쉼페레이)라는 말은 (1) 유익의 근거와 (2) 유익하게 되는 대상
없이는 매우 막연한 의미에 불과하다. 그래서 예수는 본절 하반절에서 이 두 가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셨다.
ㅇ보혜사가 너희에게로 - '보혜사'는 제자들에게 있어서 유익의  근거이며 '너희'는
유익하게 되는 대상을 지칭한다. 보혜사는 예수가 십자가의 죽음과 더불어 부활의 영
광을 얻기 전에는 오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혜사 성령은 예수의 구속 사역을 더욱
영광스럽게 하며 더욱 풍성하게 드러내며 그것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기 위해 오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은 예수께서 부활의 영광을 나타내신 후 성부께 가기 전에는 결
코 오시지 않는다.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ㅇ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본절에서부터 예수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 설명하신다.
14:26에서는 성령의 가르치며 생각나게 하시는 사역에 대해 말씀하셨으나 본절부터는
세상을 책망하시는 사역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리고 14:26의 대상은 제자들이지만 본
절에서의 대상은 세상이다. 세상은 메시야이신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으므로 성령에 의
해 책망을 받게 된다. 여기서 '책망하시리라'로 번역된 '엘렝크세이'
는 '엘렝코'의 미래형이다. '엘렝코'는 '훈계하다', '죄를 깨닫게 하
다', '잘못을 꾸짖다'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단어의 뜻은 다음
과 같은 여러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다. (1) 행 2:36, 37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청중이 마음에 찔림을 받은 것과 같이 '죄에 대해 깨닫게 하는 것'(convict)을 의미한
다. (2) '어떤 잘못에 대해 꾸짖는 것'(reprove)을 의미한다(KJV). (3) '세상의 잘못
됐음을 증명하는 것'을 의미한다(J. Knox). (4) '허물을 드러내는 것'(NIV 난외주) 또
는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드러내는 것'(Jerusalem Bible)을 의미한다. (5) '그릇된 생
각을 꾸짖어 바로잡는 것'을 의미한다(공동번역). 이처럼 제자들에게 있어서 성령은
예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사역을 수행하시지만 세상에 대해서는 세상의 잘못을 적
나라하게 드러내신다. 그리고 그러한 성령의 드러내는 사역에 의해 세상 중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 세상에 대한 성령의 판단은 단호하다. 그러나 성령의 단호함
이 곧 세상에 대한 심판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판단하시
는 것 역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이다. 성령은 세상의 죄를 폭로함으로 그리스도
의 죄없음을 증거하고, 세상의 거짓된 의를 드러냄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의를
선포하며, 세상이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이미 심판에 처해졌음을 드러내신다.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ㅇ죄에...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 '죄'(하마르티아)는 '빗나감',
'악행', '위범' 등의 의미를 갖고 있지만 원래는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간 것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 용어는 예수에 대한 불신앙으로 국한되고 있
다. 성령께서 불신앙을 책망하시는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두 가지이다. (1) 당시 유대
인들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한 것이다. 이는 15:22, 24에서 예수에 의하여 명
백히 선포되었다. 그들은 직접 예수의 말씀을 들었으나 믿지 않았으며, 예수를 보았지
만 메시야로 영접하기는 커녕 오히려 미워했다(1:11). 결국 자기들의 메시야를 아무런
연고 없이 미워하고(15:25) 핍박하여 십자가에 죽게 했다. 이러한 그들의 죄를 성령이
드러내신다. 이는 15:26에서 말씀하신 성령의 증거 사역과 일맥 상통한다. (2) 예수를
보지 못한 세상의 죄에 대한 것이다. 성령 강림 후 복음이 세계 각처에 전파되는데 성
령은 그 복음을 믿지 않은 자들도 유대인들과 동등하게 죄인임을 드러내신다. 예수는
자신을 영접하는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
지만(1:12) 아들에게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리라(3:18)고 말씀하셨
다. 8:24에서는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의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고 말씀하셨다. 성령은 믿지 않는 자의 죄와 그에 따른 사망에 대해 세상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신다. 왜냐하면 세상은 어두움 속에 있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어두움을 인식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각 사람의 양심에 빛을 비추심으로 그들의 죄가 드러나
게 하셔서 죄에서 돌아서게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도우신다. 이것이 죄
를 책망하시는 성령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ㅇ의에 대하여라 함은 - '의'(디카이오쉬네)는 본서에서 본절
외에 8절에서만 사용되었으며 본문에서 그 개념은 '죄'와 반대되는 것으로 사용되었고
(C.K. Barrett), '심판'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1) '의'는 9절의 죄와 문맥상 상관
관계에 의하여 나온 말로 예수의 무죄를 의미한다. (2) 세상의 의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런 의미의 의는 공의의 심판자되신 하나님의 의
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따라서 예수의 무죄를 증명하는 '의'는 하나님의 본성에 속
하는 '의'로서 죄 가운데 있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공의'가 되기도 한다. 세상은 자기
의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롬 10:3) 오히려 의의 성
취자이신 예수를 십자가에 달았다(행 7:2). 이처럼 세사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
를 영접하지 않은 죄로 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의의 심판은 세상에
의해 죽임을 당한 예수가 부활하여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심으로 더욱 더 확증된다.
특히 죄와 의가 재판의 상황에서 셈어의 동의어로 해석된다면 '죄책'과 '무죄함'으로
번역될 수도 있을 것이다(B. Lindars). 한편 예수께서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신 것은
'하나님의 의'의 이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간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완전한 의'
(Perfect Righteousness)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성령은 인간 스스로 세워놓은 의
의 규범이 불완전함을 세상에 드러내심으로 사람들이 완전한 의를 따라 살도록 책망하
신다.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ㅇ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 죄, 의, 그리고 심판에 대한 성령의 책망은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즉 죄와 의에 대한 성령
의 책망이 그리스도의 '무죄'와, '완전한 의'를 세상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이라
면 심판은 그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임금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증거한다. 세상 임금은 사단의 세력을 의미한다(12:31;14:30). 이처럼 사단은 모든 죄
인들 위에서 군림한다는 뜻에서 '공중 권세 잡은 자'(엡 2:2), '어두움의 세상 주관
자'(엡 6:12)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사단에 대한 예수의 심판은 예수가 이 세상
에 오심으로 시작되었으며(마 8:29;막 1:24;3:11;눅 4:41;행 19:15) 십자가 위에서 죽
으심으로 더 이상 사망이 왕 노릇하지 못하게 사망의 권세 잡은 자들을 심판하셨다(히
2:14).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이 심판을 더욱 확증함으로써 사단에 대한 자신의 승리
를 확인하셨다. 성령은 이 심판을 세상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신다. 한편 '심판을 받았
다'란 표현은 헬라어 본문에서 완료형으로 기록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예수의 사역 가운데서 이미 심판이 시작되었다. 예수에 의해서
귀신들이 쫓겨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심판이 시작되었음을 입증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5:27). 다만 성령은 예수의 심판하시는 사역
을 마지막 심판 때까지 지속시키실 것이다. (2) 예수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
취될 승리를 내다보시고 완료형으로 사용하셨다. 예수를 믿는 자가 심판에 이르지 않
고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표현과 같이(5:24) 승리가 확정되어 있으므로 심판도 확정된
것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ㅇ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 '감당하다'(바스타조)는 문자적
으로 '훔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12:6). 그리고 어떤 때에는 '무엇을 옳긴
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10:31). 또한 19:17에서는 예수가 십자가를 지시는 것
에 적용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대부분 짐을 지는 것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다(행 15;10;갈 5:1). 본절에서도 역시 이런 의미에
서 '바스타조'가 사용되었다. 예수는 아버지의 뜻하시는 바 모든 것을 알고 계셨지만
그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를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
다. (1) 제자들이 실제적으로 모든 교훈을 이해하기에는 그들의 영적 이해력이 연약하
다는  것이다. 그들의 연약함은 성경의 여러 곳에 묘사되어  있다(마 16:6-12,
21-23;17:17;막 16:14). 그리고 이런 이해력의 부족으로 인해 그들은 부끄러운 일들을
행했떤 것이다(18:15-27;막 14:50). (2) '지금'이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보아 가까운
미래 어느 시점에서는 제자들이 예수의 교훈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 영으로서 임하시는 성령은 하나님의 듯을 다 아심과 동시에 예수가 선포하신 말
씀의 목적을 아시며 또한 제자들의 생각도 아신다. 그는 영이시기에 무지에 싸여 잠자
는 제자들의 영을 깨워 영적 비밀을 깨닫도록 하신다. 이때 제자들은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예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게 되며 그뿐 아니라 그 말씀이 그들 속에 살아
움직이며 그들의 삶이히 4:12) 변화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그들의 삶은 사도
행전에서 명확하게 부각되고 있다. 이처럼 예수가 가르치신 모든 것을 성령을 통해서
완전히 이해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서 제자들은 증거자가 될 것이다(행 1:8).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ㅇ진리의 성령 - 혹자는 이 표현에 대해 성령이 진리를 가져와서 세상 사람들의 양심
에 그 진리를 심어 주시는 것으로 설명한다(Bernard). 이와 비슷하게 바렛(Barrett)도
이 말이 '진리를 전달하시는 성령'을 의미한다고 단언한다. 이에 대해 자세한 것은
14:17 주석을 참조하라.
ㅇ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 '진리 가운데로'란 표현이 사본에 따라 두 가
지로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1) '엔 테 알레데아':시
내산 사본과 베자 사본을 비롯한 몇몇 대문자 사본(L, W, * )과 소문자 사본
이 이 독법을 따른다. 그리고 이 독법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본 구절을 '진리의 전 영
역 안에서의 인도하심'으로 해석하거나(C.K. Barrett), '모든 진리 안에서 교훈하심'
으로 해석한다(Farrar, Fenton). (2) '에이스 텐 알레데미안'      
:몇몇 대문자 사본 (L, W)과 많은 소문자 사본이 이 독법을 따른다.
그리고 터툴리안(Tertullian)과 바실(Basil) 그리고 크리소스톰(Chrysostom)과 같은
교부들도 이 독법을 지지한다. 이 독법을 지지하는 학자는 헬라 고전 문학에서처럼
'에이스'가 항상 역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본 구절을 '성령의 활동하에서 그
리스도의 전체 진리 안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을 매우 잘 묘사해 주는 것'이라고 주장
한다(Dela Potterie). 그리고 모리스(L. Morris)도 이 독법을 지지하면서 '시간이 경
과함에 따라 성령은 제자들을 점점 더 깊이 진리에 대한 지식안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고 본 구절을 해석한다. 여기서 어떤 독법을 취하든지 중요한 것은 성령이 진리와 관
련해서 성도들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이다. 포치(Porch)의 진술대로 예수는 이 세상에
오심으로 스스로 진리를 계시하셨으며 보혜사 성령은 이 진리를 드러내 보이시며 성도
들을 위해 그 진리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만드셨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의 성령이
오신 목적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하는 일이다(15:26). 성령은 세상을 책망하시는
반면(16:8-11) 제자들과 성도들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신다. 한편 '인도하다'
(호데게오)는 70인역(LXX)에서 시편에 자주 등장한다. 시편에서 이 용어는
현재의 문제에 대한 해결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구원을  갈구하는데 사용되었다(시
5:8;27:11;107:14;143:10). 다른 곳에서 이 용어는 인도하고 가르치시는 하나님을  표
현할 때 사용되기도 했다(출 13:17;수 24:3). 이처럼 '호데게오'는 '인도하다'는 의미
와 '가르치다'는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으므로(Kittel) 본절에서도 '가르치다'란 의미
를 취할 수 있으나 이 단어 뒤에 이어지는 전치사 '에이스'와 잘 조화가 되지  않으므
로 '인도하다'가 적당하다.
ㅇ자의로 말하지 않고 - 예수는 자기의 의도대로 말씀하지 않았다(8:26;12:49;14:10).
이와 같이 성령도 자기 임의로 말슴하시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씀한다. 비록
듣는 사람이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예수는 자신이 해야할 모든 말씀은 다 드러내셨
다(4:25). 성령이 말하는 것은 예수가 선포하셨던 말씀에 대한 단순한 보충이 아니라
성부께서 계획하셨고 성자가 선포하고 실행하셨던 전 구속 사역에 관한 말씀의 의미를
풍부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ㅇ듣는 것 - 여기서 '듣다'는 현재 시제로 언급되어 성령이 끊임없이 성부와 성자로
부터 말씀을 듣고 사역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이 함께
사역 하심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ㅇ장래 일을...알리시리라 - '장래일'(타 에르코메나)은 문
자적으로 '다가오는 일들'을 뜻하는데, 혹자는 이것을 장래일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한
다(Bernard). 그러나 이 용어는 본서에서 유일하게 한 번 사용되었으므로 성령의 사역
에만 이 용어를 적용시키는 데 어려움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용어를 두 가지로 생
각할 수 있다. (1) 예수가 잡혀 가신 날 밤의 시점에서 본다면 '장래일'은 곧 닥칠 예
수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의미한다. (2) 세상을 책망하는 성령 사역의
관점에서(8절)보면 '장래일'은 죄와 의와 심판을 선포하는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받앙
들일 수 있다. 사실 양자를 다 받아 들인다 해도 무리는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하나
님 나라에 관한 종말론적인 사건은 단지 미래의 역사에서만 기대되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말론적 사건은 이미 복음서 안에서 시작되었으며(눅 7:19) 예수의 죽음과
부활 역시 종말론적 사건에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나드의 견해대로 성
령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모두 아시므로 제자들에게 장래 일을 깨닫게 하실 수 있
다. 그리고 이러한 성령의 사역은 요한의 계시록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 예언의 기
능 역시 예수의 말씀과 별개가 아니라 철저히 그의 말씀과 결부되어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장래 일'은 전체 구속사 중 남은 부분에 대한 것으로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이후 성취될 일들이다. 성령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일들에 대하여 다 알고 계시
므로 그의 사역을 단지 어떤 한 사건에 대한 예언으로 제한시킬 수 없다.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ㅇ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 앞에서 성령의 역할은 세상을 책망하며(8절), 제자들을 진
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이라(13절)  소개되었거니와  여기서는 예수의 영광(Glory,
NIV)을 나타내는 것이라 덧붙여 소개된다. 넓게 보면 본절의 이 역할은 앞에 언급한
두 역할과 직접적으로 연결될 뿐만 아니라 거의 동일한 의미를 시사한다. 본 구절의의
미에 대해서는, 일차적으로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떠올릴 수 있다.
예수는 비천한 말구유에서 탄생하심부터 시작하여 공생애 기간 동안 줄곧 머리 둘 곳
도 없을 정도로 외관상 초라한 생활을 하셨다(눅 9:58). 특히 영광과 위엄 가운데 지
상의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리라는 제자들과 그들을 위시한 추종자들의 기대와는 정반
대로 십자가에서 처절한 모습으로 죽음을 당하셨을 때, 모든 사람들의 눈에 그 십자가
는 수치와 무기력과 절망으로 보였을 뿐이며, 예수의 영광은 어디서도 찾을 길 없어
보였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의 영광이 고난과 죽음의 관문(關門)을 거친 후 비로
소 얻어지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단지 죽음 자체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에 대한 생생한 목격과 강림하신 성령의 증거를 통해 예수의 위엄과 영광은 확연
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아울러 본 구절의 의미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티'(*    
)로 연결되는 본절 하반절에 의해 뒷받침된다(15절 주석 참조). 즉 이러한 부활에 대
한 증거 사역을 포함하여 성령은 창조주와 구속주이신 예수의 신적 본성과 신분 및 장
래 재림주로 임하실 사실 등을 증거함으로써 예수 당시에는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명확히 밝혀 예수의 영원하신 영광을 충만히 드러내셨고 또 앞으로도 드러내
실 것이다. 요컨대 성령이 증거하는 예수의 복음은 영광의 광채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충만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고후 4:4, 6). 또한
본문은 성령의 사역이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centric)임을 나타낸다. 즉 아
들이 아버지와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 철저히 순종함으로써 어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고 자신의 역할을 온전히 완수했듯이 성령의 사역 또한 예수의 사역 위에 기초
하며 또 예수의 사역의 결실을 맺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ㅇ내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 예수는 17:10에서 '내 것은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따라서 본문에서 성령이 나타내시는 것은 성
자에게 속한 것을 근거로 하지만 결국 그것은 성부의 것이다(3:35;5:20). 삼위 하나님
은 구속(救贖) 사역에 있어서 상호 협동적이다. (1) 성부는 구속  사역을 계획하셨고
(엡 1:3-5;벧전 1:2) (2) 성자는 성부의 뜻에 순종하여 구속을 완성하셨으며(엡 1:7)
(3) 성령은 구속 사역의 의미를 드러내시며 동시에 예수가 완성하신 그 구속을 각 사
람들에게 적용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신다(엡 1:8, 9;벧전 1:12). 그렇기 때문에 결국
성령의 역할을 본문에서 성자의 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한
편 예수가 소유하신 '내 것'은 자신이 성취하신 전체 구속 사역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구속사역을 바탕으로한 '장래 일'(13절)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왜냐하면 '장래
일'은 그리스도가 성취한 구속 사역을 근거로 전개될 것이며 또한 그 일은 성부가 계
획하신 것이므로 역시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풍성'(엡
3:8)이라고 표현한 것도 바로 이 말씀을 근거한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ㅇ조금 있으면 - 16절과 19절 사이에서만 '조금 있으면'이란 단어가 일곱 번이나  반
복 사용되었다. '조금'은 본장에서는 시간과 관련해서 사용되었다. (1) 일차적으로 이
단어는 매우 짧은 시간을 의미한다. (2) 상징적으로는 긴 시간의 개념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예수는 자기의 공생애 기간이 약 3년정도였지만 자신이 이 땅에
있는 기간을 '잠시'라고 말씀하셨다(12:35). 이에 따라 후반절에 나오는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표현은 일차적으로 부활하신 후에서 승천까지의 말씀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상징적으로는 재림의 때를 의미할 수도 있다. 예수는 사역 초기에 '아직 내 때
가 이르지 아니하였다'(2:4;7:6, 8, 30;8:20)라고 말씀하시면서 작정된 '때'가 아직
남았음을 암시하셨다. 그러나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바
로 전후에는 여러번 '때가 왔다'(12:23;13:1;16:32;17:1)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때'의
임박성을 드러내셨다. 따라서 잡히시는 그 밤에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이라고 말씀
하신 것은 그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그 이후에 있을 부활 사건의 임박성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사실 7:33에서도 '조금'이라는 말이 언급되었지만 '에티'라는 부사
가 첨가되어 보다 덜 긴박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ㅇ나를 보지 못하겠고 - '못하겠고'에 해당하는 헬라어의 부정어 '우케티'는
'더 이상은...아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제자들이 앞으로는
더 이상 예수를 볼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이 말은 다시 보게 된다는 하반
절과 모순을 일으키는 표현이 된다. 그러나 이 표현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
신이 잠시 제자들의 곁을 떠나심을 강조한 것일 뿐이다. 예수는 여러번 이 세상을 떠
나심을 시사했다(8:21, 22;13:3, 33, 36;14:4, 5, 28;16:5, 10).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시점이므로 제자달이 예수 자신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ㅇ나를 보리라 - '보리라'의 헬라어 '와세스데'는 본서에서 '영적인
실재'들을 보는 것으로 사용된 적이 있다(1:51). 그러나 이 동사는 다른 곳에서는 가
시적인 것을 본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L. Morris). 그런데 본절에서 다시 보게 되는
것이 '영적인 실재'를 의미하는지 가시적인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영적인 실재로서
제자들이 예수를 다시 보게 되는 것이라면 성령은 만나게 됨을 가리키지만 가시적으로
보는 것이라면 부활하신 예수를 보게됨을 가리킨다. 예수는 앞부분까지 성령 강림및
그의 사역에 대해 자세하게 가르치셨으므로 본절이 성령과 전혀 관계 없는 설명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따라서 본절에서 '다시 본다'라는 표현은 예수의 부활과 성령의 오
심 두 가지 모두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 두가지 사건은 앞으로 그리스
도의 증인이 될 제자들이 눈으로 목도하고 체험해야 될 가장 중요한 것이므로 제자들
이 다시 보게 되는 내용에서 어느 하나도 제외될 수 없다.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ㅇ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무슨 말씀이뇨 - 예수가 7:33에서 자기를 이 땅에 보내
신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의문을 가진 바 있다(7:35). 아직 영적 무지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도
그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제자들이 예수가 세상을 떠나 가신다는 말씀을 반복해서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인간의 영적 무지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아버니께로 가신다는 예수의 말씀 자
체가 난해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난해함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유대적 메시야
관 곧 메시야가 오시면 영원히 그들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기에 예
수가 떠나신다고 반복해서 말씀하실지라도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제
자들은 난해한 문제 앞에서 스승이신 예수에게 묻지 못하고 서로에게 물음으로써 해결
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그들이 자신들의 무지로 인해 심각하게 말씀하시는 예수를
실망시키지 않으려 했든지 아니면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자신들의 무지를 스승
에게 드러내지 않으려 했든지, 그들의 행위는 매우 어리석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
은 서로가 소경과 같은 상태에 있으므로 서로 의논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
기 때문이다.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ㅇ본절과 17절의 의문은 내용상 약간의 차이가 있다. 즉 17절은 16절에서 언급된 예
수의 말씀 전부와 연관이 있지만 본절은 그 내용중 '조금 있으면'이라는 표현에 국한
되어 있다. 여기서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은 16절에서 두 번 반복된 것을 가리키는데
제자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세한 것은 16절 주석을 참조하라.
ㅇ알지 못하노라 - '알다'를 뜻하는 헬라어 '오이다'는 경험적 지식을 의
미하는 '기노스코'와는 달리 직관적인 지식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
었다. 그러나 요한은 이 두 동사를 특별히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였으므로 본절에서 그
의미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ㅇ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 요한은 제자들이 서로 말하는 것을 예수가 '들으셨다'
(아쿠오)라고 표현하지 않고 '아셨다'고 표현하여 예수의 신적인 통찰력
을 강조했다. 한편 18절과는 달리 '알다'라는 동사가 '기노스코'로
언급되었다. 여기서도 요한은 그 동사가 지닌 독특한 의미에 따라 사용하지 않고 17절
에 사용된 '오이다'와 반복을 피하기 위해 '기노스코'를 사용했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ㅇ진실로 진실로 - 이에 대해서는 6:47 주석을 참조하라.
ㅇ곡하고 애통하겠으나 - '애통하다'(드레네오)라는 동사는  본서에서
본절에만 사용되었으나 공관복음서에서는 몇 번 사용되었다(마 11:17;눅 7:32). 이 말
은 또는 '애곡하다'라는 의미를 지니므로 '울다'(크라이오)와 비슷하게
사용된다. 여기서는 '울다'와 함께 사용되어 예수의 죽음이 제자들에게 큰 슬픔이 된
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그를 따랐던 두 사람이 엠마
오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와 나눈 대화를 기술했던 누가는 그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있었다고 묘사했다(눅 24:17). 이 슬픈 빛은 그 두 사람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
라 모든 예수의 제자들도 그런 슬픔에 잠겨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예수는 자신의
죽음 후 제자들이 크게 슬퍼하고 마음의 동요를 일으켜 각자 본래의 곳으로 흩어질 것
을 미리 아시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부활하신 후 그의 말씀이 사실
이었음을 제자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그들에게 증거가 될 수 있도록 예수는 '슬픔'
을 강조하여 말씀하셨다.
ㅇ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 예수의 말씀은 슬픔 대신에 기쁨이 주어진다는 것
이 아니라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된다라는 의미이다. 십자가가 제자들에게는 처음에
슬픔의 원인이 되나 나중에는 기쁨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L. Morris). 부활을 믿지 못
한 자들에게는 수치와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들에게 십
자가는 예수와 일시적인 이별로 인한 슬픔을 주지만 결국에는 기쁨으로 변하여 영광의
대상이 된다. 이런 점에서 칼빈(Calvin)은 십자가를 복음의 결실을 위하여 저희들이
감수해야 할 슬픔이라고 설명하였다.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ㅇ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 예수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해산(解産)하는 여인에 비유
하셨다. 해산하는 여인이 주는 일반적인 의미는 출산의 고통 뒤에는 아기가 태어난 것
으로 인한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본 구절은 다음에 이어지는 '아이를 낳으면'이란 구
절과 같이 '호탄'(whenever)과 연결된 부정의 시상절(indefinite  temporal
clause)로서 '해산할 때마다'란 의미를 지니는데, 이는 고통 후에 따르는 기쁨의 불가
피성을 강조하는 구절이다. 여기서 구약에서 해산하는 여인의 비유가 지닌 의미를 살
펴본다면 본절에서 예수가 이 비유를 사용하신 근본적인 목적을 좀더 깊이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은 종종 슬픔과 위험에 처한 이스라엘을 묘사할 때에
해산하는 여인의 진통에 비유하였다(사 26:17-19;66:7-14;렘 4:31;6:24;호 13:13-15).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새 시대가 도래하기 전에 이 세상이 멸망하는 고통의 날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으며(사 13:6) 후기 유대교는 이 수난기를 메시야 시대의 도래를 위한
해산의 고통이라고 교리화시켰다(C.K. Barrett). 에수는 이러한 구약의 예언을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적용하여 종말론적인 언어로 묘사하심으로써 아직  이루어지지 아니한
부활의 사건을 미리 바라보고 있었다.
ㅇ아이 - 본문이 구약의 메시야적 종말론 사상을 전제하고 있지만 태어난 '아이'를
사  9:6에 나오는 '한 아기'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C.K.
Barrett). 오히려 새로 태어난 사람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며 더 나아가 제자들
의 고통과 함께 탄생할 새로운 이스라엘(L. Morris) 곧 교회를 의미한다.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ㅇ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 이는 16절과 19절에서 사용된 '나를 보리라'에 암시된
부활의 사상과(16절 주석 참조) 관계되어 있다. 즉 16절과 19절에서는 제자들이 보는
것에 예수의 부활뿐 아니라 성령의 강림이 이중적 의미로 암시되어 있으며 본절에서는
예수 자신이 직접 제자들을 보신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이는 부활
후 40일 동안 지상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영광스런 부활을 나타내실 것을 미
리 알리는 말씀이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어떠한 처지 속에 있다 할지라도 저들을
찾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ㅇ마음이 기쁠 것이요 - 성도가 얻는 마음의 기쁨은 성경에서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
다. (1)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체험한 후:다윗은 숱한 고난 가운데서 자신을 구원해 주
신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며 즐거워했던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이다(시 16:8-11;21:1,
6;33:21;35:9). 그리고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바라보고 기뻐했으며(합
3:18),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기버할 것을 권했다(사 66:10, 14). (2) 성령의 충만함
을 받은 후: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그들의 삶에 있어서
두드러진 점은 기쁨이 충만했다는 사실이다(행 2:46). 바울은 성령의 열매 중 사랑다
음으로 '희락' 곧 '기쁨'을 언급했다(갈 5:22). 이 기쁨은 모진 박해와 고난 가운데서
나타나는 영원한 기쁨이다. 본절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기쁨은 두 가지
종류의 기쁨 모두를 의미한다.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목격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고 기쁨을 얻게 되었으며(눅 24:52), 예수가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돌아가신
후에도 성령의 강림으로 인해 그들의 기쁨은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ㅇ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 이 말은 제자들이 결코 슬픔을 당하지 않는다
는 의미가 아니다. 제자들이 받게 될 기쁨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므로 세상 사람들이 잠
시 체험하는 일시적인 기쁨과 구별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말은 제자들이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한 후 더욱 심화된 기쁨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L.
Morris). 한편 '빼앗다'란 동사가 사본에 따라 세 가지로 각거 달리 기록되었다. (1)
'아페레이':이 표현은 유일하게 사본에서만 언급되었다. 이 말은 '없
애버리다'란 의미로 본 구절의 의미를 매우 강화시킨다. 그러나 이 말은 필사자가 '들
어올리다' 또는 '제거하다'를 의미하는 '아이레이'를 거의 비슷한 의미를
지닌 '아페레이'로 잘못 보고 필사한 것으로 이해된다. (2) '아레이': 이 말
은 '아이로'의 미래형으로 몇몇 사본(B, D)의 지지를 받는다. 본절이 시제
상 미래를 나타내므로 그런면으로 보면 이 단어가 적합하다는 주장이 많다. (3) '아이
레이':현재형으로 가장 많은 사본의 지지를 얻고 있다. 본절이 미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현재형이 사용될 수 있는 것은 미래의 사건을 생생하게 묘사하
거나 미래의 상황을 강조하기 위함이라 하겠다(마 26:18;27:63;막 9:31;눅 3:9). 따라
서 본절에서는 (3)의 동사가 가장 적합하다.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ㅇ그 날에는 - 헬라어 '엔 에케이네 테 헤메라'             
는 신약 성경에서 주로 '마지막 날', '시대의 종말'등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엇
다(막 13:17, 19). 그러나 본절에서 이 구절은 부활 이후의 시간을 가리킨다고 봄이
바람직하다(L. Morris). '그날'은 19절의 '조금 있으면'이라는 단어와 같이 유동적 의
미를 지녔다고 볼 때 '성령이 오시면'이라는 의미로 파악할 수도 있다.
ㅇ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 헬라어 '에로타오'라는 동
사는 16절과 30절에서 (1) '질문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이 단어는 후기 헬라
어에 있어서 (2) '복 주시길 구한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본서에서는 '무
엇을 요청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4:31, 40, 47;14:16). 만약 (2)의 뜻으로
해석한다면 본절의 의미는 후반부와 연결되어 '내게 구하지 아니하리라...아버지께서
구하는 것을 주시리라'의 의미로 변하게 된다(C.K. Barrett). 이렇게 되면 본절은 27
절과 연결되어 구절 전체가 간구에 관한 예수의 말씀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아들이 제
자들을 대신하여 구하는 것이 아니라(26절) 제자들이 직접 아버지에게 간구한다(27절)
는 것을 설명하심으로써 예수는 제자들이 자신에게 기도할 필요가 없고 자신의이름을
가지고 성부께 직접 기도할 것을 강조하신다. 그러나 (1)의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구
하다'(아이테오)라는 동사를 수반하는 후반부와 별개의 문장으로 해석해
야 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고별 설교 가운데서 계속 의문을 가졌다(13:6, 25;14:5,
22;16:17, 18). 모리스(L. Morris)는 이 견해를 지지하면서 그 근거로 본 구절 다음에
오는 '진실로 진실로'란 용어가 주제의 전환을 암시하므로 하반절의 기도에 관한 내용
과 본 구절은 같은 맥락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견해를 따르면 본 구
절은 성령이 임하시면 제자들이 예수께 더 이상 질문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의미가 된
다. 그러나 이하의 근거로 (2)의 해석이 더 타당하다. (1) 요한은 같은 단어가 중복되
어야 할 경우에 비슷한 단어를 사용하여 중복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2) 하반절의
'아버지께 구하는'이란 표현은 제자들이 직접 기도해야 할 대상을 밝혀주는 의미를 지
닌다. (3) '진실로 진실로'란 예수의 언어 습관은 반드시 주제가 바뀌어질 때 사용되
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실을 강조하며 확증하실 때 더욱 많이 사용되었다. (4) '그날'
은 미래적인 날로서 성령이 오셔서 활동하시는 '날'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날'에 제
자들이 예수께 직접 질문할 수 없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이므로 구태여 이
사실을 밝히실 필요가 없었다.
ㅇ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 본 구절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
을 주시리라'(26절 ; 15:16)는 표현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헬라어 본문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주시리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15:16도
본 구절과 같은 어순을 지니고 있지만 개역 성경은 각기 어순을 바꾸어서 번역하여
'내 이름'이란 용어가 '구하는 것'과 '주시는 것' 모두에 깊은 연관이 있음을 보여준
다. 즉 성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또한 그의이름으로 기도 응답을
받는다.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ㅇ지금까지는...구하지 아니하였으나 - 여기서 '구하다'로 번역된 '아이테오'
는 '구하다', '질문하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에로타오'와는
달리 '요구하다'란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그리고 후반절의 내용이 기도와 관련된 것
이 분명하므로 본절에서는 '구하다'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리고 특히 '구하다'란 말이
현재형으로 언급되어 '지속적으로 기도하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L. Morris). 그리
고 이 지속적인 기도는 다른 이름으로써는 소용없고 오직 예수의이름으로 이루어 질
때 응답이 있을 것이다. 한편 '지금까지는...아니다'라는 구절은 미래적 시간에는 어
떤 일들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의 증보자 개념은 본절에서  아직은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아직 십자가 상에서 피흘림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성
전의 휘장은 그대로 드리워져 있었으며, 신성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하늘의 성소
에 들어가지 않으셨다(Calvin). 그러나 그의 구속 사역이 완성될 그날 곧 '조금 있으
면' 제자들은 아들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25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ㅇ이것을 비사로..일렀거니와 - '비사'(比辭)로 번역된 '파로이미아'    
는 공관복음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본서에서 '비유'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파로이미아'는 확연히 드러나지 않거나 난해한 말, 또는 상징적인 말의 형태
를 가리킨다. 한편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 세 가지로 추정될 수 있다. (1) 21절
에 언급된 해산하는 여인에 관한 비유. (2) 14:1에서 본장 24절까지 말씀하신 것으로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비사들. (3) 지금까지 예수가 말씀하셨으나 사람들이 이해하
지 못한 모든 것. 혹자는 '이것'을 세 가지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한다(C.K.
Barrett). 그러나 세번째의 추정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말씀하시는 시점과 장
소가 12:36을 기점으로 구분되므로 '이것'이 12:36이전에 말씀하신 것을 지칭할 수 없
기 때문이다. 그리고 첫번째의 추정은 '이것'으로 번역된 헬라어가 복수이므로 타당하
지 않다. 따라서 두번째의 추정이 가장 적당하다.
ㅇ때가 이르면...밝히 이르리라 - '밝힌다'는 동사는 10:24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향하여 예수 자신의 신분을 밝힐 것을 요구했던 곳에서 언급되었다. 여기서 예수는 숨
기는 것과 밝히는 것을 그 이유를 깨닫는 집단과그것을 깨닫지 못한 집단을 대조시켜
설명하시지 않고 '때'라는 단어와 연결시켜 설명하신다. 본절에서는 비유의 깊은 뜻에
대한 이해의 유무가 마가의 기록처럼(막 4:11) 제자이냐 아니면 막연한 집단이냐에 따
라 구분되었다기 보다는 그 계시를 밝히시는 때에 의하여 비밀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에 따라 구분된다. 즉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안 함께 했던 모든 무리들(제자들 포함)
과 부활을 경험한 무리들 사이에 대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비밀을 밝히 알리시는
'때'는 직접적으로 부활 이후 곧 성령의 오시는 때를 의미하므로 예수와 지상 생애를
함께 했던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성령이 오시는 때에 가서야 성부에 관한 것을 포함한
모든 비밀을 알게 될 것이다.

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ㅇ너희를 위하여..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 성령을 통해서 비밀을 밝히 알게 되
면 제자들은 마땅히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능력이 생길 것이다(23절). 그러나 그것
때문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한 중보 기도를 하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실제로 표면적으로 드러난 의미로는, 구하지 않겠다는 말씀이 14:16이나 17:9의 말씀
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메이어(Meyer)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4:16과
17:9에서 예수가 언급하신 기도는 보혜사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의 기도를 의미하므로
본절의 말씀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혜사가 오신 이후에는 제자들의
기도 능력이 성숙하여져서 중보 기도가 필요 없다는 주장은 오히려 더 큰 모순을 일으
킨다. 왜냐하면 요한은 보혜사 성령이 오신 후에도 예수가 성부 앞에서 대언자로 성도
를 위해 활동하신다(요일 2:1)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롬 8:34과 히 9:24-26 역시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를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가 성
령의 오심 이전이나 이후나 계속되고 있음을 명백한 사실이다. 그래서 모리스(Morris)
는 예수가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전후 문맥에서 이미 강
조한 기도의 기본 원칙에 근거하여 다시 재고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중보는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완성되었으므로 그 희생의 공로는 지속적이다. 무릎을
굻고 아뢰지 아니한다고 할지라도 십자가에 근거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직무에 의
해 성도들의 기도는 보좌 앞에 상달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중보 기도는 부활하신
후에도 지속된다. 그러나 세상에 게신 동안에는 보좌를 향해 예수가 친히 제자들을 위
해 중보 기도를 하신다(17장). 따라서 본절은 성령이 오신 후에는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멈추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에 계시는 동안 예수가 제자들을 위해 여러 가
지로 기도하셨던 것과 같은 기도를 멈추신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시면 그 성
령에 의해 제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   
다. 그리고 27절은 그 이유를 한 걸음 더 나가서 설명해 준다.

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ㅇ아버지께서 친히...사랑하심이니라 - 본 구절에서 '친히'(아우토스)라
는 말이 보통의 경우와 같이 강조적인 용법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의미는
'자의적인' 또는 '자발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C.K. Barrett, Field). 본절에서
는 제자들이 예수를 사랑하고 그가 아버지께로부터 온 자인 것을 믿음으로 아버지께서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그들의 사랑과 믿음이 아버지의 사랑
을 보장하는 공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누구의 설득에 의하여 사랑을 베푸시
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랑은 오직 당신 스스로의 자의(自意)에 의해 베풀어지는 것이
다(요일 4:19).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설명했다. '없는 자
들을 부르셔서 있는 자들로 만드시고, 딱딱한 심령을 부드럽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28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ㅇ아버지께로...왔고...아버지께로 가노라 - 요한은 본서를 시작할 때 아버지로부터
오신 아들의 신성과 말씀이 육신이 된 성육신의 비밀과(1:1-14) 아들을 통한 구속사역
을 설명했다. 이제 마지막 고별 설교에서 이것을 다시 한번 요약하는 것은 매우 인상
적이다.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는 '다시' 하늘로 돌아간다. 아버지로부터 오신 예수는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이처럼 본절에서 예수는 자신의 오고 가심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기원이 결코 세상이 아님을 밝히셨다. 이러한 예수의 말씀 속에는 자신을 정치
적 메시야, 곧 세상적 메시야로 생각하며 그러한 메시야로 삼으려는 자들의 의도가 전
혀 소용없음도 암시되어 있다. 그리고 예수가 이 세상을 떠나심은 성령의 오심에 대한
확실한 조건이요 신호이다.

29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사도 하지 아니하시니

ㅇ제자들이 말하되...아니하시니 - 제자들은 실제로 예수의 비유들을 잘 이해하지 못
했으며(10:6) 예수 역시 비사로 말쓰마신 후에 그날에 가셔야 제자들이 밝히 알 수 있
을 것이라고(23, 25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이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
은 매우 예외적이며 특히 25절과 서로 모순되는 진술로 보인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
한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밝히 드러날 때가 다가오고 있으며 또
한 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에 대한 사랑과 올바른 신앙 고백을(27,
28절)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가 말씀하시는 비사의 의미를 이해한 것처럼 대답했
다(C.K. Barrett). (2) 제자들은 의혹의 안개가 다 걷혀 명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 같
지만 사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Bernard, Lindars). 단지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
은 예수께서 비사로 말씀하지 않았으며 또한 쉽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어
렵게 생각한 것은 예수의 언어적 표현(비유 또는 비사)이 아니라 미래에 되어질 일들
자체에 대한 것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알고 있는 우리들과는
달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신다는 사실을 그때 당시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이다(L. Morris). (3)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의 의도를 다 이해하지
는 못했으나 단지 어떠한 느낌에 의하여 위로를 받을 수가 있었다. 제자들은 어렴풋하
게 느끼는 것을 확실하게 아는 것처럼 과장되게 표현했다. 이러한 표현은 오늘날 우리
가 복음에 대한 아주 미비한 지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알고 있는 것처럼 더
큰 확신으로 외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Calvin). (4) 25절에서 약속한 '그때'가 제자들
에게는 성취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으므로 이
당시 제자들은 모든 의심을 해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H.R. Reynolds). 그러나 부활
한 그리스도를 목격한 이후에도 믿지 못했던 제자들을 생각하면(마 28:17) 25절에서
약속한 것들이 이 시점에서 성취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5) 제자들은
과거와 현재 및 미래에 있어서 예수 자신의 실존에 대한 모든 비밀들을 세심하게 들으
면서 예기치 못했던 걔달음에 사로 잡혔다. 그래서 자발적이면서도 만장 일치적인 고
백이 그들의 입술에서 튀어 나왔다(Godet). 그런데 31, 33절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밝히 이해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만약 그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완전히 이
해했다면 체포되던 스승을 버려두고 도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상의 모든
견해들을 종합해 볼 때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통하여 감추어진 비밀에 대하여 조금
이해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본절과 같이 말한 것은 약간의 과장이 포함된 것 같다. 모
든 것을 다 명확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믿
었으므로 이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었다.

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ㅇ지금에야...아나이다 - 모든 것을 온전히 아는 것은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이시다.
단지 제자들은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를 안다고 고백한다. 예수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다 아신다(2:24, 25).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의문을 아시고(19절) 그 의문을 해결해 주실 수 있다. 제자들은 이같은
예수의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믿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아직 지극히 연
약하여 그들이 고난을 극복할 만큼의 믿음은 되지 못한다. 어떤 면에서 본절과 29절에
서 언급된 제자들의 고백은 예수를 위해 자신의목숨도 버리겠다고 호언 장담하던 베드
로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마 26:33).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마음은 원이지
만 육신이 연약하여 생각대로 실현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마 26:41). 그들은 스승 앞
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이해한 것처럼 대답했으나 어디까지나 그들의 이해는 아직 불완
전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32절의 말씀은 예수가 굳이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ㅇ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 예수는 제자들의 믿는다는 고백을 단순히 반복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 구절은 앞뒤 문맥에 따라서 조심스럽게 상고(詳考)되어야 한다. 왜냐하
면 그들이 믿는다는 고백(30절)과 예수를 떠나게 되는 배신(32절) 사이에 본절이 언급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본절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의 견해를  제시한다. (1)
혹자는 의문문이 아니라 서술문으로 이해하여 '이제는 너희가 믿는도다'로 재번역한다
(Bernard, Godet, Meyer). 이러한 해석은 예수가 제자들의 믿음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
라 오히려 감탄하는 의미로 이해한 데서 비롯되었다(McClymont)는 것으로 지금까지 무
지했던 그들의 믿음이 이 정도라도 고백할 수 있다는 사실이 예수에게 기특하게 여겨
졌다는 뜻이다. (2) 예수의 말씀을 의문문으로 받아들여 반어적(反語的)으로 해석하는
것이다(Calvin). 즉 본절은 '너희에게 믿음이 굳게 섰다고 지금 자랑하는 거냐 ?'라는
의미가 된다. 예수는 제자들의 연약성을 지적하고 그들의 신앙적 한계를 경고하고 있
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절을 이와 유사한 13:38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13:38에서 예수의 질문은 반어법으로서 베드로가 예수를 위해 죽을 수
없음을 강조한 의미였다. 그리고 본절은 32절에 비춰볼 때 분명히 반어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베드로가 예수를 사랑했으나 아직 자기 목숨을 버릴만큼 완전한 사랑에
이르지 못한 것처럼 제자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으나 그들의 믿음은 지극히 불완
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예수가 반어법을 사용하신 것은 베드로의 사랑을 무시했거
나 제자들의 믿음을 무시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 아직까지 그들의 사랑과 믿음이 불
완전 상태에 있음을 지적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 말은 성령 강림 때까지 온전한
믿음을 갖기 위해 기다리라는 권고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ㅇ너희가...흩어지고 - '흩어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코르피스데테'
는 원래 '뿌려 버리다'를 뜻하는데 10:12에서는 이리에 의하여 흩어지는
양떼를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개역 성경은 '헤치느니라'로 번역함). 본절에서 예수는
슥 13:7에 언급된 예언을 인용하셔서 제자들에게 적용시키셨다. 그 흩어짐은 이리떼
같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예수의 예언대로 제자들이
흩어진 것은 예수의 신성을 입증하는 증거 중에 하나이다. 실제로 제자들은 방금 신앙
을 고백하였으나 그 밤에 모두 예수 곁을 떠나 각각 자기의 길로 도망해 버렸다(마
26:56). 끝까지 주를 따르겠다고 말하던 베드로조차도 세 번씩이나 주를 부인하는 연
약함을 보였다(마 26:33, 34). 그래서 예수는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홀로 남게 되시
는 고독과 더불어 고통의 십자가도 지셔야 했다. 예수는 인간들의 철저한 배신과 사랑
하는 자들의 흩어짐 속에서 고통의 절정에 이르신 후 승리를 얻으셨고 이 승리를 통해
교회가 출발되었다. 무엇보다 그토록 연약했던 제자들에 의하여 교회가 출발하였다는
사실은 그 출발의 궁극적인 기원이 제자들의 용기와 지혜에 있지 않음을 증거한다.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ㅇ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 이 표현은 고별 설교에서 여러번 반복되었다. 그런데 이
표현과 관련된 내용은 각기 조금씩 차이가 있다. (1) 예수의 말씀하신 것들이 이루어
질 때에 제자들이 믿게 하기 위함(13:19;14:29). (2) 제자들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기
위함(15:11). (3) 환난 때에 예수의 말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14:4). (4) 본절에서는
평안을 주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것'이 지칭하는 바를 고별 설교(13-16장)로 국한
시키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자세한 것은 25절과 16:1 주석을 참조하라.
ㅇ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 이제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조차 제다들이 소
유해야 할 모든 것을 갖도록 하시기 위해 수고하신다. 예수가 주시는 평안은 세상적인
것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이 월등한 것이다(14:27). 이 평안은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
지만 마음으로 누리는 기쁨(22절)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또한 성령의 열매인(갈 5:22)
이 평안을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얻을 수 있었다.
ㅇ담대하라 - 제자들이 담대(膽大)해야 할 대상은 세상에서 당하게 되는 환난이다.
이 환난은 상반절에서 언급된 평안과 대조되는 용어이면서 동시에 그 둘이 나오게 된
출발점 역시 대조된다. 즉 환난은 세상에서 나오며 평안은 예수 안에서 나온다. 그러
나 예수가 세상을 이기심같이 평안도 환난을 이긴다는 약속이 보장된다. 이런 이유로
제자들에게 예수는 담대하라고 권면하셨던 것이다(마 5:12).
ㅇ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여기서 세상은 바로 앞에서 언급된 세상과 약간 구별되
어야 한다. 앞에서 언급된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으로서 인간들이 생활하는
영역을 지칭하지만 본 구절에서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모든 대적자들과 사단
의 무리 및 그 세력을 가리킨다(12:31;14:30). 예수가 싸우는 대상은 전자의 의미를
지닌 세상의 통치자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정치적 왕국
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이기었노라'(니카오)란
표현은 본서 외에 요한의 서신서에서도 영적 승리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요일
2:13, 14;4:4;5:4, 5). 예수는 세상으로부터의 승리를 묘사함에 있어서 동사의 완료형
으로 말씀하신다. 이 완료형은 본절에서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예수는 아직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으므로 아직 부활의 승리 역시 거두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완료형의 동사를 사용하신 것은 그 승리가 미래의 일이지만 완전히 확보되어 있
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수는 '부활'로써 사망의 왕노릇하는 자들로부터 슬이를 거두셨
으며(롬 5:12, 14;딤후 1:10) 세상을 정복하셨다. 이러한 승리에 대한 완료 시제는 승
리의 영속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승리는 그리스도 자신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그와
연합한 모든 자들에게 동일한 의미로 적용된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고 고백할 수 있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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