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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요한복음

[스크랩] 요한복음 (14 : 1~31)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9:18
요한복음 14장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ㅇ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 예수님의 별세에 대한 말씀(13:33)을 들은 제자들
은 근심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여기서 그들더러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의 이와
같은 권면은, 이 아래 여러가지 이유를 가진다.
ㅇ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을 믿으라, 또 나를 믿
으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어야 되고 또 예수님 자신을 그 만큼 믿으
라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여기고 믿으라는 뜻이다. 요한 복음
에는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보며 일체로 본다(5:24, 10:30, 14:9, 12:44). 여기
서 예수님이 제자들더러 예수님 자신을 믿으라고 하심은, 그가 일찌기 그들에 주신 내
세훈(來世訓)(12:26, 13:36)을 믿으라는 뜻이다. 다음 절 하반에, 일찌기 주셨던 그의
내세훈이 다시 관설된다. 거기 있는 해석을 참조하여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ㅇ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 여기 "거할 곳"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모나이
인데, 이것은 영구한 저택(邸宅)을 의미하는 바, 하반절의 "처소" 
라는 말과 다르다. 아버지의 집에 있는 모나이 곧, "거할 곳"은 구약 시대에도 늘 있
어오는 것이니, 신약 시대에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시설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가 예비
하실 "처소"는, 본래부터 있던 아버지 집의 "거할 곳"에 신자들을  수용할 자리이다.
그 곳에 갈 수 있도록 하시는 방법은, 그의 죽었다가 다시 살으심 곧, 구속 사업의 완
성인 것이다.
ㅇ그렇지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이 번역은, 원문의 문구를 괄호구로 취급하고 번역한 것이다. 그 뜻은, 만일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없었더라면, 그가 그 사실을 그들에게 벌써 말하였을 것이라는 것이
다. 그러나 그보다는, 이 문구를 그 아래 호티로 시작되는 문구와 연속시켜
서 의문(疑問)의 말씀으로 읽음이 더욱 문법적이다. 그렇게하면 그 문구는 다음과 같
이 번역된다. 곧,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하였
겠느냐?"라고 일찌기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 있을 곳을 예비하시겠다고 한
말씀은, 12:26, 32에 포함되었다. 어쨔든 이 말씀은, 신자들에게 천당 신앙을 강조함
이다.
ㅇ무디(Moody)는 말하기를, "준비된 천국을 믿고 바라보는 신자는, 벌써 천국에 들어
가 있는 듯한 생활을 한다"라고 하였다(Those who look for a heaven made ready will
live as though they were already in heaven-Notes from my Bible, p. 141). 우리가
내세에 들어가 영원히 살 것을 생각할 때에는, 이 세상에서 무슨 일에 조급하거나 당
황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영원토록 살 사람들이다.
ㅇ볼트만(Bultmann)은, 여기 관설된 내세 소망이 유대적 기독교의 색체를 가지지 않
고, 개인 본위로 말하는 노시스주의(靈智派)의 신화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Johannes
Evangelium p. 465). 곧, 요한 복음의 내세관(來世觀)이 노시스 사상에서 말한 것(영
혼이 하늘 세계에 올라간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물론 요한 복음의 말씀이 물론 신
자의 별세 후 그 영혼이 하늘 세계에 감을 말하지만, 노시스 사상에 있는 그것과는 다
른 것이다. 노시스의 내세관은 범신론적이며, 유출설에 속한다. 한스 조나스(Hans
Jonas)는, 노시스 사상이 말하는 영혼에 대하여 말하기를, "사람은 하나님의 본질에서
떨어져 내려온 부분이라"고 하였다(Gnostic Religion p. 44) 헬미티즘(Hermetism) 문
헌에서도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본질에서 분산된 것이니 이는 마치, 광선
이 태양에서 분산된 것과 같다고 한다(Libelius, p. 12). 따라서 노시스 사상
에서 말하는 영혼의 승천은, 그것이 질적으로 하나님과 다시 연합을 의미하는데, 점차
성화되어 올라간다는 것이다(Hans Jonas, The Gnostic Religion. pp. 45, 166). 이같
은 사상이 헬메티즘(Hermetism)문헌에 있다(Libelius 1:25-26). 거기 있는 말을 보면,
별세한 영혼이 7 층 세계를 통과하여 결국 하늘에 이르러 성화 되어 신화(神化)된다고
한다. 그 말을 소개하면 이렇다. 곧, "승천에 대하여 내게 말하시요"하니 포이만드레
스(Poimandres)가 대답하기를 "내 몸이 용해되면 나는 하늘들을 통과한다. 첫째 하늘
은 일이 증가되기도 하고 감손되기도 하는 곳이요, 둘째 하늘은 모든 악한 계획들이
있는 곳이요. 세째 하늘은 사람을 속이는 정욕이 있는 곳이요, 네째 하늘은 교만이 다
스리는 곳이요, 다섯째 하늘은 거룩지 못한 용기와 담력이 다스리는 곳이요, 여섯째
하늘은 부하기를 원하는 악한 욕심이 있는 곳이요, 일곱째 하늘은 사람을 해하려고 하
는 거짓이 기다리고 있는 자리이다. 영혼이 이 모든 하늘들을 지나서 여덟째 하늘에
있는 본체에 올라가 그 본래의 능력을 받아 가지고 하나님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완성이다"라고 하였다.
ㅇ위와 같은 노시스 사상은 인간의 자력 구원을 말하는 그릇된 사상이다. 그러나 요
한의 구원론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단독 역사(役事)로 말미암는 구원론이다. 요
14:2 이하는, 실상 구약 사상(시 49:15, 73:24)에 근거한 것이다. 볼트만(Bultmann)의
신환 제거(Demythologizierung)주의는, 실존주의적인 해석 방법으로서 하나님께 대하
여 사람의 쓰는 말은 대부분 신화(神話)라고 잘못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사
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에 의하여 사람
의 언사로 표현될 수 있다.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ㅇ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 예수님께서 일찌기 자기를 하나님께로 가
는 "길"이라는 의미로 많이 말씀하셨다(8:19; 10:1, 7,9,37,38, 12:26, 44,45,49,50;
마 11:27, 28). 다음 귀절(6 절)은 그 곳을 명백히 가리켜 말하면서, 예수님 자신이
"그 길"이라고 하였다. 예수님 자신이 "그 길"인고로 그들은 편하게 그 길을 갈 수 있
다. 그러나 길 되시는 주님 자신은, 그 길이 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큰 고생
을 당하셨다.

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ㅇ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
니이까. 요한 복음에는, 특별히 도마가 충성스러우면서도 둔한 제자로 나타났다. 도마
는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이 천당을 가리키신 줄 몰랐던 것이다. 그 만큼, 그는 지각이
둔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질문 때문에 진리를 밝혀지곤 하였다(Barrett).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ㅇ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
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여기 "길", "진리", "생명"이란 말이, 헬라 원문에는 모두다
"그"라는 관사를 가지고 있어서, "그길", "그 진리", "그 생명"을 의미한다. "그
길"은 유일한 길이요(행 4:12), "그 진리"도 유일한 진리요, "그 생명"도 유일한 생명
근원을 가리킨다.
ㅇ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어디까지나 그 시대의 다른 종교
사상과 타협하시지 않은 사실이다. 그 당시에는 영혼이 자기 힘으로 하늘에 간다는 영
지파(노시스)의 사상과 기타 사상이 유행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과 타협하는 혼합주
의(Syncretism)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용납될 수 없었다. 그는, 그 자신이 독일 무이
(獨逸無二)하신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라고 그는 메시야적인 자아 주
장을 세우신다. 선지자들은 진리와 생명에 대하여 길을 가리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
나 예수그리스도는 "그 길" 자체요, 더욱이 그 길의 목적인 "그 진리", "그 생명"자체
이시기도 하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이르도록 하시는 중보자이시지만, 그
자신이 하나님 자신이시기도 하다. 이 사실은 그가 절대적인 구주이심을 성립시킨다.
ㅇ"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천당 가는 길을 알려는 도
마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천당 가는 길보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가리켜 주신
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천당이 하나님 중심한 곳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
님 외에 별도로 천당을 생각하려는 이원론적(二元論的) 사상으로 흐른다. 그것은 잘못
된 사상이다. 하나님을 떠난 독립적인 선(善)이나 진리나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ㅇ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아버지 하나님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그리
스도는 아버지와 일체이시기 때문이다. 그의 제자들은 그 때까지 그런 영적 지식에 부
족하였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들이 그런 지식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부
터"란 말은, 이제 멀지 않아 곧 실현될 일, 곧, 그의 죽으셨다가 부활 승천하심과 성
령의 강림하심부터 시작될 완전한 계시(啓示)의 시기를 가리킨다.
ㅇ그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이와 같은 완전한 지시기, 곧, 영적 지식을 가지게 됨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그것을 가장 확신 있는 지식으로 여겼다. 그것이 그렇게 확실하
다는 의미에서 우리 본문에, "보았느니라"는 현재 완료 동사가 사용되었다. 사도 요한
의 글에는 이 방면 기록이 적지 않다. 19:35에도 말하기를,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
니 그 증거가 참이라"고 하였고, 요일 1:1-3에도 말하기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
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에 만진 바라 이 생
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다.

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ㅇ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 빌
립은 여기서도 현실적이고 타산적이다. 그는, 영(靈)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감각적으로
보기 원하였다.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ㅇ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벴겔
(Bengel)은 이 귀절에 대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영혼 자체를 볼 수 없으나, 그것이
몸을 도구로 하여 행하는 바를 보아서 알 수 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보는 자는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를 보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관한 일체의 생각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거울로 삼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골
1:15)"라고 하였다(Gnomon 2, Edinburgh, p. 433).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ㅇ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
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
시는 것이라 - 여기 이른 바, "안에 있고"란 말은 성부와 성자의 본질상 연합을 가리
킨다. 그러나 여기서 그 두 분의 도덕적 연합(행위로써 연합)도 의미하였으니, 고데이
(Godet)의 말한 바와 같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여기 '나는 아버지 안에'
란 말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향하여 자기를 겸허(謙虛) 시킴이고, '아버지는 내 안
에'란 말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겸허에 모든 능력과 지혜를 전달하심이다"라고 하였
다(Commentary on the Gospel of John, Zondervan, p. 274).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ㅇ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
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 여기 "믿으라"는 부탁은, 제자들로 하여금 그저 그
의 말씀에 의하여 그런 줄 믿으라는 뜻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을 그의 말씀대로 믿
으라는 명령이다. 이렇게 함이 최고의 신앙이다(Hendriksen).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
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이렇게 믿는 것이 둘째로 가는 신앙이다. 그저 예
수님의 말씀대로 믿음이 첫째인데, 그것은 상반절에 보여 주었다. "그 일"이란 것은
그의 이적과 기사들을 가리킨다. 10:25, 37-38 참조.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ㅇ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
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 이 말씀은 사도들
을 상대로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이 일반 신자들을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1) 이 부분(14-17장) 말씀이 사도들의 사명에 대한 주님의 임종유
언(臨終遺言)과 같은 까닭이며(26,17:18), (2) 이 부분 교훈의 마감이라고 할 수 있는
17장의 기도에, 주님께서 사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면서 후대의 신자들을 사도들에게
서 구분하신 까닭이다(17,20).
ㅇ"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곧, 사도들이 그리스도께서 주
신 권능에 의하여 이적을 행하며, 기타 위대한 일들을 하되, 예수님 자신이 행하신 것
과 같은 정도의 것도 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이보다 큰 것."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므로 성령이 오서서 이루실 만국 전도와 구령(救靈) 사업을 가리킨다. 예수님
이 땅 위에서 행하신 일들은 미래의 이 큰 일들을 위한 준비였다.
ㅇ신바가들은 이 귀절에 근거하여, 신자들이 예수님의 행하신 이적보다 더 큰 이적을
행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땅 위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일과 승천하신 뒤에
그의 하시는 일과으이 구분을 모르는 가운데서 일어난 오해이다. "이보다 큰 일"은 외
부적인 육신 상대의 이적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시므로 완성된 구원
을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실시함이다. 외부적 이적은 "비유로 말씀하신"
계시(啓示)라고 할 수 있고, 성령으로 말미암은 구원 실시는 "밝히 말씀하시는" 계시
라고 할 수 있다(16:25-28). 성령이 오셔서 사도들을 통하여 만국에 복음을 전하시는
것은, 저렇게 큰 일이다(시 27:8; 사 42:6; 슥 9:10).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ㅇ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
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신자들)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런데, 이 말씀이 위의 12절에서 독립된 것인
가? 혹은 그것의 년속인가? 이것은 하나의 난제이다. (1) 핸드릭슨(Hendriksen)은, 이
부분 말씀이 12절 내용을 더 설명해 주는 부속 문구라고 한다. 고데이(Godet)와 즈안
(Zaln)도 역시 같은 해석을  취한다. (2) 그러나 크로솨이데(Grosheide)와 버나드
(Bernard)와 렌스키(Lenski)등은, 이 부분 말씀을 또 하나의 독립적인 약속으로 간주
한다. 특히 버나드(Bernard)는, 13절 초두에 있는 "또한"이란 헬라원어에 근
거하여 이와 같은 주장을 세웠다.
ㅇ"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
는가? 이것은, (1) 예수님의 권위(權威), 혹은  공로(功勞)에 의지하여 기도함이고,
(2) 그의 계명을 지키며, 그의 뜻대로 기도함이다.
ㅇ"내가 시행하리니"란 말씀은, 아버지께서 기도 응답하심이 아들로 말미암아서 실행
됨을 가리킨다(Barrett).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기도응답은 언제나 인간의
사욕을 채우려 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 그에게 영광이 돌아가게
하려 함이다. 이런 기도 응답은 그리스도의 중보적 역사로 인하여 실시되는고로, 여기
서 "아들을 인하여"란 말이 쓰여 있다.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ㅇ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 이것은, 윗절에  말씀하신
약속을 거듭 말씀하여 고조하는 것 뿐이다.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ㅇ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 여기서 예수님은, 사도들더러 그의
계명을 지키라고 하신다. 신자가 그의 계명을 지킴이 곧, 그를 사랑함이다. 그런데 문
제되는 것은, 이 말씀이 앞절과 관계를 가지는가 혹은 독립적인 말씀인가? 또 혹은 이
것이, 16절 이하에 나오는 보혜사 약속과 관련된 말씀인가?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몇
몇 학자들의 의견을 생각해 보고저 한다. (1)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귀절의 말
씀이 독립적인 언사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보기에는 그런 것 같지 않다. (2) 렌스키
(Lenski)와 핸드릭슨(Hendriksen)은, 이 귀절 말씀이 위에 있는 많은 말씀과 관련되었
다고 생각한다. 곧, 그들은, 여기 "사랑"이란 것을 믿음(11절끝)과 같은 것으로 생각
하고, "계명"이란 것을 기도하라는 부탁과 같이 생각하여 윗말과  연락시타다다. (3)
버나드(Bernnard)는, 이 말씀을 16절 이하의 보혜사 약속과 관련시킨다. 곧, 그는 생
각하기를, 신자가 계명을 지켜야 되는데, 그것은, 16절 이하에 약속된 성령의 은혜로
만 성립된다는 것이다. (4) 다른 학자들은 역시 이 귀절을 16절 이하와 연락시키면서
도 위의 버나드(Bernnard)와 달리 취급한다. 이들은, 이 귀절(15 절)과 아랫 말씀을
연락시켜서 다음과 같은 뜻을 찾는다. 곧, 신자들의 계명을 지켜야 보혜사가 오신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계명이란 것은 신자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과(34 절), 또한 합
심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을 의미하였을 것이다. 신약 교회를 창립하는 오순절 성령 운
동은 물론 구원사(救援史)에 속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약속 성취이다. 이 약속 성취
는 인간의 주관적 조건에 매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약속 성취를 내다
보시면서 사도들과 그 때 신자들의 주관적 준비를 명하시기는 하셨다. 예컨대, 그들더
러 예루살렘에 유하며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이다(행 1:4). 그들의 기다리는
일은 바로 기도에 전력함이었다(행 1:14). (5)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계명을 지키라"는 주님의 말씀은, 14절에 나온 기도하라는 부탁과 관계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기도 응답을 받으려면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15:7).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귀절의 말씀이 그 아래 나오는 말씀, 곧, 성
령이 오시리라는 약속과 관계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그들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
며 기도하는 결과로 성령님이 오시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행 1:12-14, 2:1-4).
ㅇ"계명을 지키리라." "지킨다"는 말은, 보배를 지키며 보관함에 대해 쓰는 말이다.
이것은 계명을 중심에서부터 사랑하여 지킴이다. 계명 지킴과 기도 응답은 서로 분리
될 수 없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은, 마술적 의미에서 그
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종교 윤리적 내용을 가진 것이다. 그것은, 그 기도
자가 주님을 사랑하여 계명을 지키는 사실이 있어야 그의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이다.
ㅇ불건전한 신비주의는 계명과 율법을 무시하는 경향에 있다. 예를 들면, 재세례파에
속하는 란텔파(rANTERS)는, 자기들이 모든 계명을 초월한다(계명의 제재를 받지 않는
다는 뜻)고 하였다(R.A. knox. Enthusiasm, p. 173). 그들의 이와 같은 주장은, 자기
자신을 신격화(神格化) 하는 참람한 행동이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ㅇ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 여기 이른바 "구하겠다"는 말의 헬라 원어는,
상대방을 향하여 동등 처지를 취하고 구하는 태도와 과히 틀림 없는 것을 가리키는 말
이다. "보혜사"란 말은 "대언자"를 의미한다. 요일 2:1에 예
수님을 "대언자"라고 하였으니, 성령을 가리켜 "다른 대언자"라고 함이 적당하다. 성
령은 우리를 위하여 도고하여 주시는 대언자이시다(롬 8:26). 그 뿐 아니라, "보혜사"
란 말을 위로자란의미도 가진다. 그가 우리를 위로하신다는 것은, 성도로 하여금 그리
스도를 모시고 있음과 마찬가지의 힘과 평안과 기쁨과 능력을 가지고 이 세상을 통과
할 수 있도록 하실 그의 역사를 가리킨다.
ㅇ여기 약속된 보혜사의 오심은, 오순절 임하실 성력을 가리킨다. 그가 "영원토록 너
희와 함께 하시리라"고 하셨으니,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단 한 번 있을 것이지만, 그
역사의 영구할 것이 알려진다(마 28:20).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ㅇ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
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 "저는 진리의 영이라." 이 말씀은, 진리(그리스도의 인격과 속죄 사업
에 대한 설명 계시)가 성령님의 것이라는 뜻이다. 세상이 그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은 육안에 보이는데로만 무엇을 믿는 까닭이다. 그러나 신자들이 그를 받는 이유
는, 그가 그들 속에 거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까닭이다. 그것이, "저는 너
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하신 말씀이 의미한 바이다.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ㅇ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
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
음이라 - 여기서 갑자기 "내가"란 말씀으로 시작된 것은, 위(16-17)의 논제(성령)와
달라진 느낌이 있다. 즈안(Zahn)은 이것을 논거로 하여, 이 귀절 말씀은 재림을 취급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기서 "내가"란 말을 사용하신 이유는, 위(16-17)
에 관설된 성령의 역사가 예수님 자신의 속죄 사업의 연장이요 완성이기 때문이다. 그
뿐만아니라, 예수님은 삼위 일체 안에서 성령과 일체이기 때문에 그가 여기서 "내가"
란 말을 기탄 없이 사용하셨다. 위의 16-17절은 성령의 오심을 약속하신 것 뿐이고,
이 귀절(18 절)부터는 성령의 역사와 예수님 자신과의 관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 점
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내가"란 말로 가르치신 것은, 자연스럽다. 여기 "내가...너희
에게로 오리라"하신 말씀은 재림을 가리키는가? 그의 부활을 가리키는가? 혹은 성령의
강림을 가리키는가? (1) 재림을 가리킨다는 학설이 옳지 않은 이유는, "조금 있으면"
이란 말(19절 초두)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 온다는 것은 미구에 오심을 의미한
다. 그 뿐 아니라, 그의 오심을 세상이 보지 못한다는 말도 재림설에 맞지 않는다. 재
림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보리라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계 1:7). (2)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켰다는 학설도 여기 맞지 않는다.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땅에 계신 기간은
길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그것이 18절의,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리라"
고 하신 말씀을 성취시킬 수 있겠는가 함이 문제 된다(Smide). (3) 많은 주석가들이,
이것을 성령 강림에 관한 말씀으로 여긴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성령 강림 사건에 주
님의 부활까지 포함시켜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페인(Fein)은 말하기를, "부활절과 오
순절은 일체(一體)로 합류한다"라고 하였다(Ostern und Pfingsten fliessen zu einer
Einheit zusammen. - Theol., S. 383).
ㅇ"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 이 말씀은, "내가 사는고로 너희도 살게 되리라"고 번역하신 것이 헬라 원문과 부
합한다. 그리고 우리 한역의 "이는"이란 말은 잘못된 번역이다. 그러므로 이 문구는,
위의 말씀에 직속하는 이유 문구가 아니고 하나의 독립 문구이다. "내가 사는고로"란
말씀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한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으나(Lange, Barrett). 다른
학자들은 이것이 예수님의 고유하신 생명 근원을 의미한다고 한다(Grosheide). 어쨌든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영적으로 살려 주시는 근원이 되심을 보여준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점에 있어서 상반절의 "나를 보리니"란 말씀이, 살게 하
여 주는 원인을 나타낸다고 한다. 곧, 산다는 것(영생의 생명)은 실상 우리 심령이 하
나님을 봄으로(앎으로) 생기는 것이다. 요 17:3 참조.
ㅇ18절부터 27절 까지는 보혜사의 하실 일에 대하여 말한다. 곧, (1) 신자들을 거듭
나게 하여 살리심(19 절), (2) 그리스도와 신자를 연합하게 하심(20 절), (3)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심. (4) 사도들로 하여금 진리(예수님의 업적과 말
씀)를 깨닫도록 하심(26 절), (5) 신자들에게 평안을 주심이다(27 절).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ㅇ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
라 - 이 말씀은, 신자와 그리스도의 연합한 관계를 가리킨다. 신자와 그리스도와 연합
에는 여러가지 방면이 있으니, (1) 신자가 선택 관계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엡 1:3-4).
(2) 신자가 구원사상(救援史上)의 그리스도 행적에서 그와 연합함. 곧, 그의 죽으심,
그의 부활, 그의 승천의 복된 사실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롬 6:3-11; 엡
2:4-6; 골3:3-4). (3) 신자가 중생(重生)과 성화(聖化)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연합함
(엡 2:10). (4) 신자가 그의 행위와 생활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와 연합함(롬 6:4; 고전
1:4-5). (5) 신자가 죽음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와 연합함(살전 4:14,16). (6) 신자가
부활할 때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한다(고전 15:22; 롬 8:17). 이렇게 이 연합은 영
원하며, 죽음도 그것을 파괴 시키지 못한다.

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ㅇ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
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나의 계
명."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13:34) "새 계명"을 가리키는데, 신자들이 서
로 사랑할 계명이다. 13:34 해석, 요일 2:7-11 참조. 형제를 사랑한다 함은 무엇으로
성립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내포한 신약 윤리(예수의 계명)에 순종하는 생
활이다. 이 모든 윤리는 사랑을 목적한 것이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신약 윤리가 모
세의 십계명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그 완성이라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도 이
런 사고 방식으로 관설하였다(롬 13:8-10).
ㅇ그런데, 기독자가 계명을 실행함에 있어서 구약 시대 성도보다 더욱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관철하게 된다. 그 이유는, 신약 시대의 성도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그 성취 형
태에서 누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어 주신 그 큰 사랑을 받은 것
이, 언제나 그의 윤리 생활의 동기를 이룬다. 요일 4:19에 말하기를, "우리가 사랑함
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계명은, 신자들로 하여금
무슨 일을 행할 때든지 사랑의 동기로 행하여 모든 의(義)를 이루라는 것이다. 그들이
사랑의 동기를 가짐에 있어서 구약 성도들보다 명확하고 철저하고 일관성을 가지게 되
어야 한다(마 22:37-40).
ㅇ"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나타나실 것을 가리킨다. 그 나타나심은, 우리의 육신에 나타나심
보다 더욱 근거 깊이 우리의 심령에 나타나심이다.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ㅇ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니까 - 여기 "유다"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이다(눅 6:16). 그의 물어본
말은 세상 영광을 생각한 것이다. 곧, 예수님이 자기를  제자들에게 나타내시리라(21
절)고 하신 말씀을, 유다는 이름낸다(명성을 떨친다)는 뜻으로 오해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묻기를, "왜 널리 세상에는 이름을 나타내시지 않으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ㅇ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
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 주님을 사랑
하는 사랑이 그의 말씀을 지킴보다 앞선다. 사랑없이 계명을 지킬 수 없으며, 지킨다
해도 생명 있는 것은 아니다.
ㅇ여기 성부(聖父)와 예수님이 함께 신자에게 오셔서 거하신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내주(內住)를 가리킨다.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신 동시에 아들의
영이시다(고전 6:19; 고후 6:16; 엡 3:17; 살전 4:8). 이와 같은 연합은 내세에 이르
러서 더욱 완전히 이룬다(계 3:20, 21:3). 현세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함께
거하시며, 내세에는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거한다(Godet).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ㅇ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
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 이 귀절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순
종하지 아니함이 얼마나 중대한 잘못임을 지적한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는 죄악이다. 그 이유는, 그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ㅇ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 이것은, 그가 이때
까지 가르치신 말씀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가 이 말씀을 하신 목적이, 다음
절(26절)에 나와 있다. 곧, 그의 별세 후에 보내실 성령님을 통하여 하실 말씀은 더욱
자세하고 많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이다.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ㅇ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
리라 - 여기"너희"란 말은 사도들만 가리킨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직접
들은 말씀을 기억하도록 하여 주시겠다고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자들은 사도들이다. 성령의 일은, 예수님의 교훈을 되살려 해설하시는 것이다. 그러므
로 그것은, 예수님의 전날 교훈을 사도들의 기억에 되살려 깨닫게 하시는 운동이다.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ㅇ이 말씀이 윗절까지 계속되던 성령론과 어떤 관련을 가지는가? 우리는 이 점에 있
어서, 이 귀절이 위의 모든 말씀의 결론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곧, 26절에 말한대로 성령님의 하시는 일은 사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사건("너
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깨닫게 하신다고 하였고, 그 뒤에 이 귀절은 평안의 선물을
말한다.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사건을 깨닫고 믿을 때에 비로소 참다운
평안을 누린다. 어떤 학설에, 평안에 대한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단순한 작별 인사라
고 하나, 이 말씀을 그렇게 보는 것은 잘 못이다. 그 이유는, 이 귀절에 말한대로 그
평안은 그리스도께서 선물로 주신다고 하였고, 또한 그것이 세상의 주는 것과 같지 않
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 평안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므로 신자들
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며(28 절), 또한 그 평안이 그들의 영원한 기업이 된다.
ㅇ예수님의 평안은, 그가 하나님과 평화롭게 지내시는 관계를 말함이다. 그는 구속
사업의 완성으로 신자들에게도 그런 평안을 주신다. 그의 주시는 평안이 세상의 그것
과 다른 특성은, 그 가장 위험한 때에도 심령이 평안할 수 있는 것이다(Barrett)

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ㅇ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엿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 예수님께서 가신다는
것과 오신다고 하신 것은 그가 이미 말씀하신 바이다. 13:33-36, 14:2, 3, 12, 18-19,
21, 23 참조. 그런데 그를 사랑하신 자라면 그의 가심을 기뻐할 이유가 무엇인가? (1)
그가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은, 그가 영화를 얻으시는 사건이기 때문이며(히 12:2),
(2) 그가 가심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의 구원이 완성되는 까닭이다.
ㅇ"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이것은, (1) 예수님께서 땅에 계신 동안 영광을 취
하시지 않은 고로 아버지보다 낮음을 가리키고, (2) 그가 중보자(中保者)의 지위에 계
신 것 만큼, 그 역사에 있어서는 아버지에게 종속(從屬)하심을 말함이다.

29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30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ㅇ이 부분 말씀은 14장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이 결론에서 두 가지
를 말씀하셨다. 곧, (1) 그가 이 부분에 미리 말씀하신것은, 그 일이 성취될 때에 제
자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29절)과 (2) 사단의 무리가 와서 예수님을 고
난의 자리로 잡아 간다는 것이다(30-31).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 곧,
사단은 예수님을 정죄할 아무런 근거도 가지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
도께서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시고 하늘에 속하셨으며, 또한 그에게는 전연 죄가 없
으시기 때문이다.
ㅇ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
게 하려 함이로라 - 예수님께서 사단으로 말미암아 해를 받으시게 되는 목적이 이러하
니, 곧,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시며 순종하시는 마음으로 고난 받으신다는 것을 드러내
시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수난은, 사단의 뜻을 이루어 주려는 것이 아닐, 하
나님의 계명(죽으라는 것과 부활하는 것-10:17-18)을 감심으로 이루시는 것 뿐이라는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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