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누가복음

[스크랩] 누가복음 (18 : 1~43)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9:09
누가복음 18장


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ㅇ항상 기도하고 - 이는 모든 일을 그만두고 오직 기도에만 몰두하라는 말씀이 아니
다. 사도 바울도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  갈파한
바 있거니와(살전 5:17), 이 말은 매 순간을 주님의 도움과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는
순종의 삶, 곧 생활이 바로 기도인 삶을 살라는 뜻이다. 조용한 시간을 별도로 내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필수적으로 요청되지만, 구체적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
닫고 실천해나가는 일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또한 이 말씀은 하나님께 어떤 기도 제
목을 놓고 간구하는 자가 응답이 더디다고 생각하여 지레 포기하거나 낙심(落心)하지
말라는 권면이기도 하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바심할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에 반드시 응답하시되 적절한 때를
좇아 최상의 것으로 응답하신다(11:9-13;시 19:14). 특히 본 비유가 종말론적 주제와
관련되어 있음을 생각할 때 이 말씀은 악하고 음란한 말세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끝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2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ㅇ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 6절에서 예수께서 정의한 이 사람의
속성은 '불의함'이다. '불의'(unjust, NIV)라는 말은 '종교적인' 혹은 '경건한'의 의
미와는 정반대의 것으로서 세속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사람은 완전히 세상적인 의
미에서의 소위 '속물'(俗物)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성격은 이중으로 묘사되고 있는
데 첫째는 그가 하나님을 경외치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헬라어 동사 '포베오' 
는 '무서워하는 것', 더 나아가서는 '공경', '예배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의 의미는 그가 하나님의 심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이다. 또한 그의 부패한 삶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두번째 성격은 그가 사람을 존중하
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주로 고아나 과부같이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출
22:22-24;시 68:5;애가 1:1)을 멸시하고 그들의 권리를 보호치 않는 것을 의미한다.
불의한 재판관들의 이러한 모습들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 중의 하나이
다. 그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권력의 참 주인이 오직 하나님이심을 깨닫지 못하고, 법
과 공의를 외면한 채 권력과 재물을 가진 자들에게는 아부하고, 힘없는 자들에게는 포
학(暴虐)을 일삼는다.
ㅇ한 재판관 - 이 재판관은 유대인이 아닌 것같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일
반적인 시비는 여기서처럼 재판정에서가 아니라 장로에게 찾아가서 가리게 되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본절에 나오는 재판관은 예수 당시 통치자인 헤롯(B.C. 4-A.D.39)이
임명한 재판관이거나 로마에 의해 임명된 재판관일 것이다. 이 같은 재판관은 오늘날
에도 찾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권력의 하수인이거나 권력과 야합하여 자신의 이익만
을 생각하는 자들로 정의에 입각한 법정신과 법관으로서의 의무마저도 잊어버린 자들
이다(미 3:9-11).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ㅇ한 과부 - 고아와 과부는 의탁할 곳이 없고 무력한 자의 표본이다. 구약에서는 이
미 이러한 자들을 압제하지 말고 보호하라고 하는 명령이 반복되어 나타난다(출
22:22;신 10:18;욥 22:9;렘 22:3).
ㅇ가서 - '에르케토'는 '가다', '오다'의 뜻인 동사 '에르코마이'
의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끊임없이 되풀이하다'라고 하는 반복적인 의
미를 나타낸다. 도무지 의탁할 데가 없었던 이 여인으로서는 결과에 아랑곳하지 않고
집요하게 매어 달려 간청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음을 암시한다.
ㅇ원한을 풀어 주소서 - 헬라어 동사 '에크디케오'는 '원수를 갚다'
는 말로 (1)가해자를 벌줌으로써 객관적인 공의를 세워주는 것 (2)악한 사람에 의해
탈취된 권리나 보상금 따위를 되찾게 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ㅇ듣지 아니하다가 - 원어상으로는 '원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는 과부의 청원을
아예 무시하려는 의도를 반영한다. 이 불의한 재판관은 공정한 법집행 보다는 사리 사
욕에만 밝았기 때문에 가난한 과부에게는 무관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여인에게는 군
침을 돌게하는 뇌물도 없었고 뒤를 돌봐줄 만한 세력가도 없었던 것이다.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ㅇ번거롭게 하니 - '수고', '고난', '어려움'의 뜻인 '코포스'는 단순
히 성가시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 보다는 막대한 지장을 주는 것, 즉 그 일 때문에 다
른 정상적인 업무에 전념할 수 없게 타격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ㅇ늘 - 헬라어 '에이스 텔로스'는 '끝까지', '목적이 달성될 때
까지'의 뜻이다. 재판관은 과부가 자신의 탄원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판관인 자신을 번
거롭게 하는 그 일을 결코 중단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
ㅇ괴롭게 하리라 - 헬라어 '휘포피아조'는 '아래'의 뜻인 '휘포'
와 '눈'의 뜻인 '화스'의 합성으로 이루어 진 동사로서, 문자적인 의
미로는 '눈 밑을 때리다' 또는 '눈이 멍들게 만들다'는 의미이다. 이는 동양권에서 흔
히 찾아볼 수 있는 어법(語法)으로, 얼굴에 먹칠을 당하는 것 곧 부끄러움이나 수치를
당하는 것, 또는 명예를 훼손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과부의 필사적인 탄원(歎願)이 성
가셔서 였든 혹은 자신의 명예가 실추될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든 간에 결국 불의한
재판관이 과부의 청을 들어 주었다는 데에 본 비유의 핵심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올
바로 구하기만 하면 그것을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해 볼 수 있
다(마 18:19;요 15:7). 우리는 항상 기도하며 낙심치 말고 결코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
의 신실성을 굳게 믿어야 겠다(삼상 15:29).

6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ㅇ불의한...들으라 - 비유를 끝내고 그 비유에 대한 해석을 들려 주시기 전에 제자들
에게 스스로 생각할 여유를 주기 위한 말씀이다.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ㅇ밤낮 부르짖는 - 1절의 '항상 기도하고'라는 말씀의 또 다른 표현이다. '부르짖다'
의 뜻인 '보아오'는 고뇌의 부르짖음 혹은 원조를 청하는 외침의 뜻을 의
미하는 '보에'에서 나온 말이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 애원하는 태도를 암시
한다.
ㅇ택하신 자들 - 이말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되었으며 신약
에서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힘입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될 자들을 나타낸다(마
24:31;막 13:27;계 17:14). 여기서 '택하신 자들'이란 주의 제자들로서, 과부나 고아
와도 같이 예수의 죽음 이후에는 어떠한 사람도 의지할 자가 없는 무력한 자들을 상징
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들이 의지할 분은 바로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
ㅇ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 헬라어 문장 '마크로뒤메이 에프아우토이스'
는 주석하기에 매우 난해한 구절로 알려져 왔다.
문제는 여기에 사용된 동사 '마크로뒤메오'가 '지체하다',
'미루다'의 뜻인지 아니면 '참다', '견디다'의 뜻인지에 관한것에 있다. 또한 전치사
'에피'가 '...을 향해서'일 수도 있고 '...때문에'일 수도 있기 때문에 여기
서 가리키고 있는 '저희에게'란 구체적으로 택하신 자들인지 아니면 그의 원수들인지
가 명확치 않다. 그리고 이 구절은 전체 문장과 연관성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완전히
독립적인 것인가하는 것도 문제인데 이에 대해서 (1)바이스(J.Weiss), 벴겔(Bengel)등
은 '택한 자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오랜 참으심으로 그들에게 응답하신
다'고 하는 의미로 (2)맨슨(J.W.Manson)은 '하나님이 택한 자들을 박해하는 자들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 그들에게 내릴 진노(震怒)를 연기하신다'고 하는 뜻을 가
진 원래의 아람어적 표현이 잘못 사용된 문맥으로 이해하는가 하면 (3)리젠펠트
(H.Riesenfeld)와 예레미야스(Jeremias)등은 이 구절을 양보절로 이해하여 '비록 기다
리게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자들을 구하지 않겠는가'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본다. 앞 구절과 8절과의 관련성 속에서 본다면 어쨌든 '아니'라고 하는 부정의 대답
을 이끌어 내는 구절인 것은 분명하다. 즉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들의 밤낮 부르짖는
기도를 불의한 재판관처럼 오래 지체하거나 계속 외면치 않으시고 응답해 주신다고 하
는 의미이다.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ㅇ속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타케이'는 일반적으로는 아주
짧은 간격 뒤에 곧 일어날 사건을 지시한다. 그러나 때로는 어느 정도의 기간이 흐른
후 '갑자기' 어떤 일이 발생하리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비교, 계 22:20의 '타퀴'
) 어쨌든 이 말은 하나님의 응답이 조속히 혹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것
을 시사한다.
ㅇ믿음을 보겠느냐 - 여기서의 믿음은 풀루머(Plummer)의  주장대로  그리스도로서의
인자에 대한 믿음일 수도 있고 또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않는 기도의 자세를 견지하
는 실천적 믿음일 수도 있다. 또한 이 말은 인자의 재림이 지연됨에 따라 많은 주의
제자들이 박해의 시대 속에서 낙망하여 허탄함에 빠지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말씀이기
도 하다. 결국 이 말 속에는 주의 재림이 늦어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세상 풍조에
휩쓸려 신령한 믿음의 길을 포기하게 되리라는 예측이 담겨 있다. 이 점에 관해 주님
은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경고하신 바 있다(마 25:5). 하지만 애굽에서의 오랜 종살
이로 인해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렸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끝내 출애굽을 명
하셨으며(출 3:10) 또한 바벧론 유수(幽囚)로 말미암아 다윗 왕국에 대한 언약이 끊긴
것으로 알고 소망을 잃었던 백성들에게 위대한 귀환은 기필코 성취되고 말았다(출
12:51).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구속 계획을 만세 전으로부터 차질 없이 하나 하나
성취해 나가셨고 지금도 그 과정에 있는 것이다.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ㅇ자기를 의롭다고...멸시하는 - 직접적으로는 예수 당시 도처에서 볼 수 있었던 바
리새인들의 완악한 모습을 묘사한 말이다. 즉 당시 대다수 바리새인들은 위선과 교만
으로 부장한 채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소외받았던 약자들을 무시하고 정죄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또 한편으로 이 구절은 바리새인들과같이 독선적 아집에 사로잡힌 일
반 사람들을 지칭하기도 한다. 사람들 중에는 양심이니 진리니 하는 것들을 아예 무시
하고 육신의 정욕이 명하는 대로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이들도 있지만 나름대로 선악간
행위의 기준을 세워놓고 구도자적 삶을 지향하는 소위 종교성이 많은 이들도 있는 것
이다(행 17:22).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폐단이 바로 종교적 독선(獨善)
이다. 본절은 이들의 오류를 두 가지로 지적한다. (1)자기 의(義)를 내세움. 이들이
내세우는 자기의(自己義)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럽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그 누구
도 스스로 의를 자랑할 수 업는 죄인들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
로 덧입음으로써만 진정한 의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롬 3:24). 이 자명한 사실에
도 불구하고 자기의 의를 고집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객관적 열의에서라기 보다는 종
교적 인정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2)다른 사람을 멸시함. 자기 스스로 의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자만하는 자는 그러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을 공공연하게든
무의식적으로든 경멸하기 쉽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 사람은 겸손
하며 타인의 저급한 상황을 멸시하기 보다는 긍휼히 여긴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ㅇ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 곧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
에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다(행 2:15;3:1;10:9). 성전은 동,서,남쪽이 골짜기로 둘러싸
인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유대인들은 이곳의 유대인의 뜰에서 기도를 하곤 하
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개인적인 기도를 위해서 편리한 시간을 택해 성전에 올라가
기도 했다.
ㅇ바리새인...세리 - 이 비유에 등장하는 두 사람의 뚜렷이 대조되는 신분은 극적
(dramatic) 효과를 더해준다. 즉, 바리새인이 당시 유대교의 종교인들을 대표하는 반
면 세리는 당시 천시되던 소위 '죄인'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극적 대조를 통해
하나님의 판단이 인간적 판단과 얼마나 판이한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ㅇ서서 따로 기도하여 - 이 간단한 말 속에는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교만이 뚜렷이 암
시되고 있다. 첫째 그가 '서서'기도했다는 것은 성전에서 서 있는 자세로 기도하는 하
나의 '습관'을 암시한다. 그가 드린 기도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 나오는 간절한 영
혼의 기도가 아니라 세끼 밥을 먹듯이 습관에 매인 형식적 기도였으리라는 추측이 간
다. 둘째 '따로'라는 말은 바라새주의의 발단은 이교적인 헬레니즘 문화의 침해에 반
대하여 경건성을 유지하여 구별된 삶을 형성해 보자는 것이었기 때문에 구별 그 자체
가 잘못된 사상은 아니다. 그러나 본래의 그 선한 정신이 스스로만 의롭게 여기는 배
타적 독선주의로 탈바꿈한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마 23장과 막 7장에
서 뿐만 아니라 유대 문학에서 두루 발견된다. 누가의 경우도 여러 곳에서 바리새인들
의 터무니 없는 적대심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5:17;6:2,7;7:39;11:37-54;15:2;16:14
등). 그는 외형적 율법적 죄를 범하지 않는데 대해 감사하는 자랑의 기도를 드렸으며
더욱이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율법 준수의 자랑까지도 덧붙였다(민 18:21;신
14:11,23). 오늘날에도 이 같은 바리새적 교인이나 지도자들은 권력과 사회적 지위,
교회의 권위, 재력에 의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며 의로운 체한다. 그러나 하나님
과 자신들의 양심,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결코 그들의 불의(不義)를 놓치지 않을 것이
다(렘 11:20;23:24;암 9:3).
ㅇ토색...감사하나이다 - 그는 토색(討索),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않으며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했다. 즉 자신에게는 불의가 전혀 없으며 깨끗함
뿐임을 자랑했다. 유대법에 의하면 금식은 1년에 한 번 속죄일에 행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특별한 은총을 원하는 자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됴일에도 금식을 행했으며, 예
루살렘에 장이 서는 때 얼굴을 희게 하고 헝클어진 머리에, 구김살이 간 옷을 입고 큰
거리에 나와 자신들의 경건을 자랑하였다(마 6:16-18 주석 참조). 이처럼 자신들의 의
(義)를 자랑하는 자들은 오히려 의롭지 못한 자들이며 예수와 무관한 자들이다. 왜냐
하면 예수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지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5:32).

12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ㅇ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 본절은 형식적으로는 독립된 문장이지만 내용적으로
는 역시 앞절의 '당신에게 감사하나이다'라는 문구에 종속되어 있다. 그의 모든 기도
문에 나오는 동사는 '일인칭 단수형'으로, 그의 기도가 자기의를 내세우는 독선적 아
집으로 가득 차 있음을 넌지시 시사한다. 한편 십일조에 관한 성경 최초의 언급은 아
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자기의 전리품 중 1/10을 준 데서 발견된다(창 14:20). 그후
야곱도 소득의 1/10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창 28:22). 하나님은 이렇
듯 유래가 깊은 십일조 제도를 출애굽 당시에 보다 체계적으로 설명해 주셨다. 모세의
율법 가운데 십일조에 관한 세부적인 기록은 레 27:30-33;신 12:5-18등에 나온다. 이
곳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거두어 들이는 모든 산물 즉 곡물, 과일, 가축 등에서
1/10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분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후대에 이르러 유대교의 랍비들은
율법의 문자적 적용에 더욱 철저하기 위해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이르기까지 십일조를
바치는 규정을 만들었다(마 23:23). 본절의 바리새인은 십일조를 철저히 지킨 것을 내
세우며 하나님께 보답을 요구하는 듯한 자세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십일조가 모든 소
유의 주인이 하나님이요 자기는 청지기에 불과함을 고백하는 행위임(마 25:14-30)을
알지 못한 태도이다. 요컨대, 십일조는 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조건부적 뇌
물이 아니라 택함받은 자가 마땅히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드려야 하
는 신앙의 표시이다(욥 1:21;롬 11:36).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ㅇ멀리 서서 - 바리새파 사람과는 대조적으로 세리는 멀리 아마도 성전 밖 이방인의
뜰에 서서 기도하였을 것이다.
ㅇ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은 정
상적인 여러 자세 중 하나였다(시 123:1;막 6:41;7:34;요 11:41;17:1). 이 세리는 기
도의 정상 자세 조차도 취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죄인 중에 죄인임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ㅇ가슴을 치며 - 이 표현은 정확히 말하자면 죄의 근원지로서의 마음을 치는 깊은 참
회와 애통을 나타내는 말이다(23:48;마 11:19). 또한 헬라어 동사 '에튀프테'
는 '때리다', '치다'의 뜻인 '튀프토'의 미완료형으로 계속해서
치는, 반복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이러한 표현은 그가 세리라는 자기 직업을 통하여
범해온 죄 많은 생활들을 청산할 뿐 아니라 그동안 그가 사람들로부터 착복한 금액에
다 율법에 명시된 배상액까지 부가하여 갚고자 하는 굳은 결의가 이 표현 속에 암시되
어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출 22:1-15).
ㅇ불쌍히 여기옵소서(힐라스데티) - 이는 '진정하옵소서', '분노
하지 마옵소서'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말 속에는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동시에 자
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세리의 모습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를 가리켜 '많은 죄인들 중의 한 명'이라고 칭하지 않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는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관대한 처분만을 기다리
는 그의 겸손한 태도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선 바리새인과 세리 중
세리가 더 의롭다는 절대적인 판결을 내리셨는데(14절) 이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로부
터 사죄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신앙인의 참된 자세가 어떠한 것인지를 분명히 가르쳐
준다(요일 1:8,9). 한편 세리의 기도는 바로 시 51편의 서두의 인용이기도 하다. 세리
의 기도의 호소의 근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둔 것이고 이것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받게 된다.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ㅇ의롭다 하심을 받고(데디카이오메노스) - '의롭게
하다'는 뜻의 이 단어는 여기서 완료 수동태 형으로 사용되어 하나님께서 이 세리를
주권적으로 의롭다고 선포하고 확정하셨음을 암시한다.
ㅇ자기를 높이는 자는...높아지리라 - 인간의 높아지고 낮아짐은 인간 스스로의 능력
유무에 의한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롬 9:21). 따라서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분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고 이웃을 존귀히 여기는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자신을 높이는 길임을 한시라도 잊
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공로에 따라 역사하신
다고 생각했다. 한편 본문의 세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믿었으며 또한 하나님은 자기와 같은 죄인에게라도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자비로운 분
이라는 소망을 가졌다.

15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ㅇ만져 주심 - 이 구절과 유아 세례 문제를 굳이 결부시키는 것은 근거가 없다. 오히
려 이 말은 속죄의 날 저녁에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데리
고 와서 축복의 기도를 받는 관습이 배경이 되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2:28 주석 참
조).
ㅇ어린 아기 - 평행 부분인 마 19:13과 막 10:13에서는 7세 미만의 어린 아이를 가리
키는 '파이디아'로 표현되었으나 여기서는 '갓난 아기' 도는 '젖먹이'
를 뜻하는 '브레페'가 사용되었다. 더욱이 누가는 이 말 앞에 접속사
'카이'를 첨가하여 '젖먹이들까지도'라는 강조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이
렇게 천진한 아이들이 예수의 은혜를 덧입고자 접근할 때에 예수의 제자들은 아이의
부모들을 꾸짖으며 접근을 막았다. 이 같은 제자들의 행위로 보아 아직도 그들은 예수
의 교훈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왜냐하면 예수는 어린 아이를 어른들과 마찬가지인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고 있었으나 제자들은 아직 성숙치 못하여 사람 취급도 받을
수 없는 귀찮은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갓난 애들과 같은 그
러한 계층까지도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ㅇ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 구원 혹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주제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예수는 어린 아이 자체에 대해 진지하고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들이라는 주제로 관심을 확대시키고 게신 것이다. '이
런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이우톤'은 '이런 종류의(이와 같은)
사람'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젖먹이가 엄마의 품을 의지하듯이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
하는 자, 어린아이의 동심과 같이 깨끗하고 솔직한 마음을 가진 자가 바로 하나님 나
라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ㅇ받들지 않는 - '받들다'로 번역된 동사 '데코마이'는 '받아 들이
다', '영접하다', '손에 쥐다', '인정하다', '공인하다'등의 여러 가지 뜻이 있다. 마
샬(Marshall)은 '받들다'라는 표현을 '하나님의 나라의 메시지를 받아 들이다'의 의미
로 해석하였으며, 쉴라터(Schlatter)는 '어린 아이들과 같이 아무런 이의없이 하나님
의 나라의 실체를 인정하고 또 거기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이 받들다라고
하는 말이 담고 있는 의미'라고 하였다.

18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ㅇ어떤 관원 - 마태는 이 사람을 '청년'(마 19:20)으로, 그리고 마가는 다만 '한 사
람'(막 10:17)으로 소개하고 있는 반면에 누가는 이 사람을 '관원'으로 밝히고 있다.
그런데 '관원'으로 해석된 헬라어 '아르콘'은 로마 정부에 의해 임명된
정부 관리(authorities)일 수도 있고, 회당을 맡아보는 사람일 수도 있으며, 산헤드린
(Sanhedrin) 회원를 가리킬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의 배경을 '관원'이라는 말만으
로 정확히 추정해 내기란 어려운 문제이다.
ㅇ선한 선생님 - 유대인들은 사람에게 '선한'이란 호칭을 붙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선한 것은 오직 율법이며, 하나님 한 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이 관원이 예수를 가리켜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이미 예수에 대
한 존경과 경외심을 지녔음을 표시함과 동시에 그가 원하는 것을 예수께서 들어주실
수 있다고 확신했기 대문이다. 사실 이 관원이 '선하다'고 말한 것처럼 예수께서는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요 3:2)이며 '생명의 떡'(요 6:48)이자 '생명수'(요 7:38)
이시다.
ㅇ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이 질문은 어떤 율법사의 질문이기도 했
다(10:25). 이 말은 영생을 얻는데 필요한 자격을 갖추는데 혹시나 자신이 모르고 빠
뜨리고 있는 어떤 행위가 있는지를 발견하고자 하는 열망이 담긴 질문이다. 그런데 이
말 속에는 그가 영생에 이르는 것이 다만 선행의 결과인 줄 착각하고 있었음이 드러나
고 있다. 아마 그는 정성을 다해 그 율법의 세부 규례들을 열심히 따랐으나 뭔가 부족
한 것이 있었으며 이처럼 도덕적 행위나 율법을 철저히 행함으로도 만족을 느낄 수 없
었던 그가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는 영생에 이
르게하는 확실한 길을 제시할 수 있는 분으로 판단하고서 그 앞에 나아왔던 것이다.
여기서 '영생'으로 번역된 헬라어 '조에'는 하나님의 생명 혹은 생명의 근원
자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 관원이 요구한 생명은 순간적이며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곧 죽음에 의해 차단이 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의미한다. 요 3:3-15
에서도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코 영생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ㅇ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 이말은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죄있는 자로 여겼
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쩌면 이러한 반문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지 않으면서도 어찌
하여 하나님께만 적용될 수 있는 칭호를 사용하느냐는 약간의 비난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Plummer). 아무튼 이 말씀에 함축된 의미는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선의 기준을 훨씬 높이심. 이 관원이 예수를 '선하다'고 부르며 접근한 데에는 자
신의 선행에 대한 자신감이 은연중에 표출되고 있다. 따라서 예수는 하나님이 요구하
시는 선의 기준은 인간의 노력이나 업적에 의해 도달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며 참된
선은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임을 가르쳐주고자 하셨다(대상 16:34;대하 5:13;시
106:1;118:1,29). (2)당신의 신성을 증거하고자 하심. 이 관원이 예수를 신적 권능을
소유한 탁월한 랍비로 여긴 것에 대해 예수는 은근히 비난하는 투로 말씀하신다. 왜냐
하면 예수는 탁월한 랍비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20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ㅇ계명을 아나니 - '알다'의 뜻으로 번역된 동사 '오이다'는 단순히 머리
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지키다', '따르다'를 의미
한다. 따라서 예수의 이 말씀은 그것들을 지키라고 하는 권고가 된다. 예수께서는 영
생의 조건으로 제일 먼저 율법 준수를 거론하셨는데 이는 율법 준수에 대해  내심으로
자신 만만해하는 이 관원의 허물을 벗기기 위해 정면으로 대응하시기 위함이었다. 사
람은 그 누구도 율법의 완수자가 되지 못하며 다만 '율법으로 죄를 깨달을 수 있을'
(롬 3:20:갈 3:24)뿐이다. 이 사실은 마 5:17-48에 언급된, 율법 준수에 관한 새롭고
도 차원높은 예수의 교훈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관원의 율법에 대한 태도는 문자적이
고 피상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ㅇ간음하지 말라...공경하라 하였느니라 - 여기서 거론된 계명은 제5계명 부터 제9계
명까지 언급되었다(롬 13:9;약 2:11). 십계명에 있어서 전반부 곧 제1계명부터 제4계
명까지가 하나님과 인간 간의 관계 규정이라고 한다면 5계명부터는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를 규정한 것이다. 문제 제기의 형식으로 여기 인용된 것은 십계명의 후반부, 즉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 관한 계명인 바, 예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주력할 뿐 고통받
는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에는 무관심한 당시 종교인들의 냉혈성을 지적하고 싶으셨
는지도 모른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언어 도단(言語道斷)인 것이다(요일 4:20). 사실 당시 대다수 종교 지도자들의
대신(對神) 관계 또한 거짓과 위선으로 오염되어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
면 그들은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아전 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21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ㅇ어려서부터 - 어떤 이들은 이 말을 '바미츠바'(bar mitzvah)가 된 때부터 라고 해
석하는데 '바미츠바'란 '율법의 아들'이란 뜻으로, 종교적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연
령에 도달한 유대 소년에게 주어지는 명칭이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아들들이 5,6세가
되면 율법 공부를 시키고 그것을 준수하게 한다. 따라서 이 말은 구체적으로 '소년 시
절부터'를 가리킨다.
ㅇ다 지키었나이다 - 지킬 수만 있다면 율법은 구원의 길이 된다. 그러나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다는 데 인간의 어려움이 있다. 예수께서는 가장 쉽게 인간을 측정할 수 있
는 계명을 몇가지 인용하셨다. 그 관원은 자신의 행실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며 회심전
의 바울처럼(빌 3:6) 율법을 다 지켰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율법을 다만
문자적으로만 지켜왔음을 알 수 있다. 이 관원은 자신의 율법 준수의 헛점이 무엇인지
는 몰랐지만 그러한 율법 준수로도 영생에 이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공허감
을 느끼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ㅇ한 가지 부족한 것 - '헨 소이 레이페이'의 문자적인
뜻은 '네게 한 가지 남은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관원의 생각을 그의 재산 문제로 돌
리게 함으로써, 이제 열번째 계명의 핵심을 찌르고 있다. 바울은 골 3:5에서 탐심은
우상 숭배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관원의 경우 마지막 계명 하나를 어김으로써 첫번째
계명과 두번째 계명들을 어긴 결과가 된 것이다.
ㅇ네게 있는 것을...나눠 주라 - 자신의 재물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는 명령은 그 관원의 자만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에 있어 정곡을 찌르
는 말씀이다. 그는 기껏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정도로 마치 이웃 사랑을 실천한
것인양 자부했는지 모르나, 예수는 이웃을 위한 전폭적이고도 적극적인 헌신을 명하셨
다. 특히 그는 많은 재물을 소유했던 관계로 이 말씀은 너무도 무거운 짐으로 여겨졌
을 것이다. 예수의 이 말씀은 인간이 마음 속에 있는 재물에 대한 의로심을 다 버릴
때에만 비로소 온전히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음을 시사하는 말이다. 또한 본문의 이 명
령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예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14:33의 말씀
과도 일맥 상통한다. 이 관원의 경우는 자기 소유물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 데 이는 모든
성도들에게 문자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절대적 원리라기 보다는 예수께서 그 관원으로
하여금 그의 탐심을 완전히 없애도록 하려는 특수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Liefeld).
결국 이 말씀은 단순한 청빈(淸貧)의 명령이 아니라, 적극적인 이웃 사랑에 대한 요구
였다(12:33).
ㅇ나를 좇으라 - 영생에 이르기 위한 마지막 단계에 해당한다. 관원이 자기의 모든
재물을 풀어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준다고 할지라도 그가 진실하게 예수를 좇지 않는
다면 이것 또한 부족한 것이 된다. 예수를 좇는다는 것은, 그의 제자가 되어 그 가르
침을 준수하며 그리스도의 삶을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23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ㅇ심히 근심하더라 - 이 관원의 심각한 갈등을 통해 우리는 '두 마음을 품은 자'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그는 한편으로 영생을 소유하고 싶었고 또 한편으로는 안락한 삶
을 누리고도 싶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 택일을 명하신다. 이러
한 양자 택일은 진정한 주의 제자가 되기 위해 누구나 거쳐야 할 단계라고도 볼 수 있
지만 여기서는 특히 관원의 교만하고 안일한 내면 세계를 꿰뚫어 보신 예수의 영적 통
찰에서 비롯되었다. 만일 관원이 진정 자신의 연약함과 죄악됨을 깨닫고 예수 앞에 엎
드려 은혜를 간구했다면, 이렇듯 극단적인 양자 택일의 도전을 받지는 않았을지도 모
른다. 결국 이 관원의 마음 속에 일어난 걷잡을 수 없는 갈등과 고민은 그의 마음이
영생에 대한 욕망과 세속적인 탐욕으로 나뉘어져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더욱이 그는
큰 부자였기 때문에 현실의 안락함을 포기할 수 없었다.

24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ㅇ어떻게 어려운지(포스 뒤스콜로스) - 이 말은 '얼마나
어려운지'가 보다 정확한 의미이다. 이는 굉장히 힘들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며
나아가 그일이 본래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함을 암시한다. 성경은 부자가 영생을 얻
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다. 부자가 영생을 얻기 힘든 이유는 (1)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재물을 의지함으로(시 52:1-6;잠 18:11;딤전 6:17), (2)부의
축적을 위해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고 그들을 압제함으로(잠 18:23;렘  22:13-19;딤
전 6:17-19;요일 3:17), (3)치부하고자 하는 탐심 때문에(12:15-21;16:13-31)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재물 뿐만이 아니라 천하 만물을 잘 관리하고 다스리도록
우리에게 맡기셨다. 따라서 우리는 재물을 소유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것을 관리의 개념으로 받아들여 하나님의 일을 위해 관리하고 이웃과 함께 나누고 그
들을 섬기는 일에 사용해야 할 것이다.

25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ㅇ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 흔히 랍비들은 불가능한 어떤 일을 가리킬 때 코끼
리가 바늘귀로 들어가려고 한다는 말을 했다. 본절에서 '낙타'와 '바늘귀'는 문자 그
대로 받아들여도 예수께서 의도하신 비유의 의미는 분명해진다. 다만  어떤 학자들은
이 두 단어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기도 한다. 첫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큰 대문 옆
에는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니기에 알맞은 넓이와 높이를 가진 작은 문이 있었다고 한
다. 이 작은 문은 바늘귀 문이라고 불렸는데 여기서 말하는 이 표현은, 약대가 이 작
은 문을 억지로 들어가려 하는 모습에서 생긴 것이라 한다. 또 하나는 '약대'를 나타
내는 헬라어는 '카멜로스'인데 발음이 이와 비슷하게 들리는 '카밀
로스'란 단어는 선박용 밧줄을 의미한다. 따라서 '밧줄'을 바늘귀에
꿰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보다는 쉽다는 비유로 이해한다. 따라서 여
기서 예수께서 의도하는 바는 부자가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려 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인간이 소유하여 즐기는 재물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얼마
나 방해가 되는지를 가르쳐 주려는 것이다(마 19:23;막 10:23).

26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ㅇ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 여기서 '구원받다'는 말은 '영생을 얻다', '하나
님 나라에 들어간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물음은 '그렇다면 구원을
얻기란 불가능하지 않겠는가'라는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다. 리빙 바이블(Living
Bible)도 '그토록 어렵다면 어느 누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If it that
hard, how can anyone be saved?)라고 옮겼다. 예수와 부자 관원의 대화를 듣고 있던
주위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개념상 부귀
는 하나님의 축복 중 하나로 여겨졌으며(욥 1:10), 당시 종교적 관행상으로 볼때 이
관원의 행실은 거의 완벽할 정도로 율법에 충실한 듯이 여겨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27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ㅇ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 이는 부자 관원과 나누신 대화의  결론이다. 영생을
얻기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 관원에게 예수께서 십계명 중 일부를 제시하
신 것은 사실상 그 계명을 스스로의 힘으로 지킬 수 없음을 고백케 하시기 위함이었
다. 왜냐하면 온전한 의미에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설령 율법의 한 부분을 지켰다고 하더라도 다른 부분을 범하고 마는 것이 인생의 한계
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원은 '다 지켰노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따라서 예수는 관원이 부자이고 그의 마음이 물욕을 떨쳐버릴 수 없음을 알고 허를 찌
르는 요구를 하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두번째 요구 말씀도 실천을 요청하신 것이
라고 보다는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음'을 알게 하시려
는 의도를 시사한다. 왜냐하면 이 관원이 설령 예수의 말씀을 좇아 자신의 모든 소유
를 다 팔아 구제하였다고 해도 그 행위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
이다. 그에게 진정 필요했던 것은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믿고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었다.

28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ㅇ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 일시적으로 두려움과 절망에 빠졌던 제자들은 하나님
의 능력에 관한 예수의 대답(27절)을 듣고 확신을 갖게 되었고, 그 관원이 하지 못한
그 일을 자신들은 해왔다고 하는 정역절 고백과 확인 요구의 말씀을 한다. 마 19:27에
의하면 베드로는 이 말 뒤에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란  말을 덧붙인다.
부자 관원과는 틀리다고 하는 자부심을 은근히 비춰주는 베드로의 말은 처음 그가 예
수를 만나 따라 나설 때의 극적인 장면을 생각나게 한다(마 4:20). 예수의 부름을 받
았을 때 그가 헌신적인 결단을 감행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
은 결과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축복에 이르게는 되었지만 예수의 공생애 당시만 하더라
도 메시야관이나 천국관에 있어 많은 오해를 지니고 있었고 인간적 나약함이나 무지로
말미암은 시행 착오를 무수히 겪어야 했던 것이다(막 14:66-72). 본절의 경우는 은근
히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려는 과시욕과 예수의 말씀에 담긴 속 뜻을 채 헤아리지 못한
아둔함을 드러내 보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아마 제자들은 부자 관원에게 하신 '하늘에
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는 예수의 말씀에 귀가 솔깃해졌을 것이다(22절).

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ㅇ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 마 19:29에 의하면 '내 이름을 위하여'이며 막  10:29에
의하면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이다. 따라서 예수와 그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는 동일
한 맥락에서 이해됨을 의미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계신다. 하나님 나라
의 선포가 바로 복음이다.
ㅇ집이나...자녀를 버린자는 - 누가가 포기의 대상(물건, 사람)으로 삼은 것은 마가
가 명시한 것과 다르다. 누가는 마가가 기록한 '전토'(田土)를 생략하고 그 대신 '아
내'를 포함시켰는데, 이는 그가 버려야 할 대상을 주로 인간 관계에 집중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도 있다(Marshall).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예수를 좇기위해 그들의
가정과 직업까지도 포기함으로써 많은 대가를 지불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
해 무엇인가 포기해야 했던 사람들은 누구든지 금생과 내생에서 충분히 넘치도록 다시
보상을 받을 것이다. 예를 들면, 만일 한 사람이 안정된 직업을 포기해야만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게서 금생과 내생에서 그 자신과 안전된 영원한 관계를 갖도록 하실 것
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만일 한 사람이 가족의 친성(親性)을 포기해야만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가족의 사랑을 얻을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를 따르는데 수반되는
희생 대가를 지불했다. 아울러 예수께서도 그들이 그 모든 것을 보상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미 포기한 것에 대해 미련을 두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 아울러
우리가 포기한 것에 대한 대가로 무엇을 얻을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서도 안 된다.
이러한 불가피한 포기나 헌신은 구원을 위한 담보물로서가 아니라 구원에의 확신에 따
른 자발적 순종의 표시로서 이해되어야 하며,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잃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 만큼은 잃을 수 없다는 것이다.

30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ㅇ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 누가와 마태는 단지 '여러 배'(many times, NIV)를
받는다고 기록한 반면 마가는 '백 배'라고 하여 최상의 보상을 강조하고 있다(마
19:29;막 10:30). 또한 마가는 '핍박을 겸하여' 받게됨을 지적하고 마태는 굳이 현세
와 내세를 구분하지 않고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축복을 시사하지만, 누가는 현세의 보
상에 비교적 강조점을 많이 두었다. 본절을 이해함에 있어 우리는 단지 물량적이고 세
속적인 의미에서 보상의 기준을 삼아서는 아니될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
이므로 하나님의 뜻이 함께 하면 성도들이 물질적 축복을 많이 받을 수도 있다. 그러
나 하나님 중심주의로 살아가면 단지 일용할 양식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지만 세속적
탐욕의 노예가 되면 백만 장자가 되어도 불만과 번민에 시달릴 수 있는 것이다. 요컨
대, 문제는 누림의 질에 있는 것이지 그 양에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현실
에는 핍박과 고통이 함께 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물질적 어려움을 당하는 일이 허다하
지만,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소망으로 말미암아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
을 가진 자'라고 하는 역설적 충족감을 맛보며 살 수 있는 것이다(고후 6:10).

31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ㅇ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 갈릴리를 출발하여 베뢰아를 통과하는 긴 여행
은 이제 거의 목적지에 도달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당할 임박한 고난이 언급되어
있는 9:31부터 줄곧 이 예루살렘은 주께서 올라가시기로 계획하신 목적지요 또한 그의
인류 구원의 사역이 완성될 곳으로 거듭 암시되어 있다(9:51;13:22;17:11;18:31). 순
례자들이 큰 절기를 맞아 예루살렘 성전으로 나아갈 때에, 예배하기 위해 양이나 비둘
기 등과 같은 제물을 가지고 가 듯이, 예수는 자신을 '세상 죄'를 대속할 제물로 바치
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사 53:10;요 1:29).
ㅇ선지자들로...응하리라 - 이 표현은 마태가 즐겨 사용하는 말이며, 누가복음에는
오직 이 곳에만 나온다. '선지자들로'로 번역된 '디아 톤 프로페톤'
은 선지자들이 예언선포의 주체자들이 아니라 대리자, 대언자임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고 예수의 고난과 관련된 '성경의 성취사상'은 평행 구절인 마
20:18과 막 10:33에는 언급이 생략되어 있다. 예수의 고난과 관련된 구약의 예언을 몇
가지 예로 들어보면, 시 9:19;22:15;사 53:9;슥 12:10 등이다.

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ㅇ이방인들에게 넘기워 - 이 예언에서 누가는 맨 먼저 이방인들을 예수의 형(刑) 집
행인으로 언급한다. 23장 내용을 보면 예수 무죄 방면을 위한 빌라도의 갖가지 노력들
이 타복음서에 비해 밀도있게 기록되었음이 사실이다. 이렇듯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유대인들에게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방인의 책임도 분명히 지
적되어야 함을 밝힌다.
ㅇ희롱, 능욕, 침 뱉음 - 이는 예수의 고난을 매우 구체적이고도 생생하게 예언한 것
이다(23:11,36;마 27:30). 예수의 자의식 속에는 영광스러운 부활과 더불어 십자가 수
난이 항상 자리잡고 있었지만 이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시기를 보류하셨다. 이제 공생애
의 마지막이 가까와 옴에 따라 이렇듯 구체적인 부분까지 언급하시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의 수난을 대속의 개념과 연결시켜 실로 적절하게 예언한 바 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
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33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ㅇ죽일 것이니...살아나리라 - 본 구절은 32절과 함께 기독교 신앙의 골격을 이룬다.
예수의 고난과 부활은 성경상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박
해받는 교회에 평안을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우리들의 삶의 상처를 치유하
신다는 확신을 갖게하기 때문이다. 특히 '죽일 것이니'라고 하는 말 가운데서 우리는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예수께서 그 죽음을 정복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수난과 더불어 부활이 함께 예고된 사실 또한 중요한 의미를 전해준다.
부활이 없는 갈보리는 패배에 불과하며 반면 갈보리없는 부활은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완전하지 못한 부분적인 사랑만을 들려줄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부활은 기독교  신
앙의 진수요 핵심이라 할 수 있다.

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였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ㅇ하나도...알지 못하였더라 - 예수께서 그의 수난과 죽음을 거듭 이야기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데 대해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1)메시야에 관련된 그들의 잘못된 선입견 때문에 자신들이 메시야로 여기던 예
수께서 그토록 비참한 수난을 당하리라고 결코 생각할 수 없었다. (2)그리스도의 수난
은 일시적이나마 당시 제자들에게 숨겨졌던 사항이며 현재에 이르러 썩어질 구습을 좇
는 모든 자들에게도 여전히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비밀이다.

35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ㅇ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 여리고(Jericho)는 요단강 서쪽 약 8km, 예루살렘 북
동쪽 약 24km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이 성읍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래된 성읍으로서
여호수아의 지휘아래 이스라엘 백성이 칼 한번 쓰지 않고 함락시킨 성읍이다(수 6장).
그런데 예수 당시에 이 성읍은 신.구 여리고로 나뉘어져  구(舊)여리고에서 남쪽으로
약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헤롯 대왕에 의해 신(新)여리고가 건설되었다. 헤롯대왕의
정책에 따라 신여리고가 나날이 발전함으로 구여리고는 계속 퇴락해가 예수 당시에 구
여리고는 거의 황폐화되었다. 신여리고의 발전은 당시 팔레스틴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
관을 자랑할 만큼 소문이 나 있었다. 어쨌든 여리고는 갈리리와의 연결로였으며  예루
살렘의 관문 역할을 했다. 따라서 예수께서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다는 것은 곧 그의
죽음이 점점 임박해 오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이 구절에 대해 평행 구
절인 마 20:29은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막 10:46은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라
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상반되는 기록이 아니라 정확히 일치하는 기록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신.구 여리고 중 어느 한쪽에 먼저 들르셨다가 나오셔서 다른 한
쪽으로 가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태와 마가는 두 여리고 중 한 여리고에서
떠나시는 것을 기록했고, 누가는 예수께서 두 여리고 중 한 여리고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기록하였다.
ㅇ한 소경 - 마가에 의하면 이 사람은 '바디매오'이다. 그가 예수께 대해 보인 태도
(다윗의 자손으로 부른 것)에 의하면 그는 분명히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들은적이 있었
으며 이미 그 마음에 예수의 메시야적인 능력에 대해 신뢰를 품고 있었던 것 같다.
ㅇ구걸하다가 - 당시 거지들은 종종 도시근처의 도로변을 따라서 구걸을 했다. 왜냐
하면 도시의 도로변은 거지들이 사람들을 가장 많이 접촉할 수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
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아야 하는 의무를 소홀
히하였다(레 25:35-38). 따라서 거지들이 그들의 비참한 삶의 테두리 속에서 벗어나고
픈 소망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쉽게 짐작이 간다. 이 소경 거지는 메시야에게서 그 소
망을 이루게 되었다. 그는 부끄러움 없이 예수의 관심을 끄는 소리를 질러댔고 예수는
소경 거지에게 그의 믿음이 그를 보게 했다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상황이 얼마나 절망
적인가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예수께 믿음으로 부르짖는다면, 그
는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36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ㅇ무리의 지남을 듣고 - 예수께서는 수난당하실 장소인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며 이
소경이 구걸을 하던 장소를 지나고 계셨다. 이미 예수의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그분이 지나는 것을 보고 여기 저기에서 몰려들었다. 그때 거지 소경은 사람이 몰려
웅성대는 것을 보고 궁금히 여기며 그 장소로 다가갔다. 그는 일단 사람이 많이 몰려
있으므로 구걸하기에 좋은 여건이 조성되어 많은 구걸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
을 것이다.

37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

ㅇ예수께서 지나신다 - 이 말은 구원의 기회가 마냥 인생을 기다리고 잇는 것이 아니
기 때문에 예수를 만날 수 있을 때에 열의를 다해 그분 앞에 나아가야 된다는  긴박한
뜻을 먼저 암시하는 표현이다. 만일 소경 거지가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며 묵묵히 동냥
이나 하며 앉아 잇었다면 그는 그토록 놀라운 체험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보라  지
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38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ㅇ다윗의 자손 예수 - 마태는 이 칭호를 메시야의  의미로 즐겨 사용하곤 했다(마
9:27;12:23;15:22;21:9). 이 칭호는 본서에서는 이곳에만 등장하는 데 기독교  이전의
문헌 가운데서는 솔로몬의 시편 17:21(위경)에서만 메시야의 칭호로 사용되고 있다.
바디매오는 예수를 기적을 행하는 자 뿐만 아니라 메시야로서 이해하고 있었음이 분명
하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고 믿었다(사 11:1). 그런
데 예수께서 이 칭호에 대해 아무 말씀이 없는 것을 보면 그가 이제는 자신이 메시야
임을 군중들에게 드러내며 밝힐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ㅇ불쌍히 여기소서 - 이 말은 시 4:1;6:2;25:16;31:9;51:1;86:16등에서 멸시와 고통
을 당한자, 소외된 자들이 하나님께 고하는 외침의 한 형식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이
는 13절에서의 세리의 기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39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ㅇ더욱 심히 소리 질러 - '소리지르다'의 뜻인 헬라어 '크라조'는 본래
까마귀의 우는 소리에서 만들어진 의성어에서 유래한 말로,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동
물들의 외침 소리와 같이 '악쓰는 소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모처럼 예수를 만날 기회
를 갖게 된 그 소경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게
하는 구절이다.

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저가 가까이 오매 물어 가라사대

ㅇ예수께서...데려오라 - 아이러니칼(ironical)하게도 예수께서는 며칠 후에 빌라도
를 통해서 본 구절에서 하신 말씀과 같은 말을 듣는다(요 18:31). 압제자 빌라도 앞에
죄 없으신 예수께서 죄인의 모습으로 서신 장면은 본장면과 잘 대비된다. 본문에서 예
수는 다윗의 자손으로서 왕의 모습을 갖고 우리들에게 열렬한 지지와  영접을 받으며
왕도(王都) 예루살렘에 입성한다(19:36-40). 아울러 왕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으로 행차
하시는 가운데서 불쌍한 소경 거지를 보신 예수는 진실로 위엄있는 왕의 권위로 거지
에게 거룩한 능력의 보화를 내리셨다. 반면 빌라도 앞에서 예수는 철저한 종의 형상으
로, 또는 제단에 드려질 희생 양의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따라서 공생애의 마지막, 이
제 죽음의 장소를 향해 가시는 도중에서 다윗의 자손이며 왕이신 예수께서 거지 소경
을 만난 사건은 실로 큰 의미가 있다.

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ㅇ네게 무엇을...원하느냐 - 그 소경이 원하는 바란 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자명하
다. 그러므로 예수의 질문은 그 사실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경의 믿음을 유도하기
위해서 또는 고백의 시간을 주기 위해서 이 질문을 하신것이다. 예수께서는 병자든 죄
인이든 항상 이러한 식의 질문을 하신 연후에 그 질문의 대답대로 이루어 주시곤했다.
이는 병자, 죄인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예수의 깊은 배려이기도 했으며 또한 그들이
자신들의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잘 이해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한 것일 수
도 있다. 거지 소경에게 있어서 근본적인 해결책은 얼마간의 적선 행위가 아니라 눈을
치유받는 일이었으며 나아가서는 영혼의 눈을 뜨는 일이었던 것이다.

42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ㅇ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 '네가 온전하게 되엇다'고 하는 의미인
(Robertson) 이 말씀은 그 소경이 육체적인 축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축복
곧 메시야를 만나 죄의 구속에서 해방되었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예수께서는 이러한
구원의 역사가 바로 소경 자신의 믿음 때문이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예수의 기적
행위를 있게 하는 보조 역할로서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7:50;8:48;17:19;마 9:22;막 5:34)하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

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ㅇ예수를 좇으니 - 고침을 받은 그 소경이 단순히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례자들의 뒤를 좇은 것이라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고 봄이 무난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주를 따르기로 했으며, 수많은 제자들 가운
데 한 명이 된 것 같다.
ㅇ하나님을 찬양하니라 - 평행 본문 중에서 오직 누가만이 소경이었던 본인과 그 기
적을 목격한 사람들이 다 함께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기록하고 잇는데 치유 기적 다음
에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하는 이러한 송영은 누가의 독특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5:26;17:18;행 2:47;3:9). 하나님께는 찬양을 돌리고 그리스도 예수에게는 큰 신뢰를
나타내 보이게 된 그들의 태도는 예루살렘 성전 안의 종교 당국자들, 교권주의자들의
태도와 완전히 대조적인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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