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누가복음

[스크랩] 누가복음 (15 : 1~32)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9:08
누가복음15장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ㅇ모든 세리와 죄인들 - 본장의 1, 2절은 본장 전체의 서론 부분에 해당한다. 여기
서 '세리와 죄인들'은 비유에 등장하는 '잃은 양 '잃은 은전', '잃은 아들'에 해당하
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조상의 유전이나 율법 해석을 기초로 해서
만든 수많은 금지사항과 의무 조항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간주했
다. 죄인으로 지칭 되는 사람들은 (1) 비도덕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 예를 들
면 간음한 자, 속이는 자(18:11)등이며 (2) 불명예스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들은
공민권(公民權)인 공직퇴임권(公職退任權)과 법정증언권(法廷證言權)을 박탈당한 자
들로 세리, 목자, 행상인, 피혁공 등)이었다.흔히 본장의 내용은 '소외된자의 복음
'(Gospel of the Outcast)이라고 불리운다. 여기 등장하는 세 비유는 한결같이 잃
어버린 자 즉 소외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및 그들의 회개를 하나님이 기뻐하
신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으며, 소외층에 대한 누가의 남다른 관심을 극적으로 표현
하고 있다(16:19-25;17:11-19;18 :1-8, 9-14;19 :1-10). 물론 보다 거시적으로 보면, 
이 소외된 자들이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하지 못한 혹은 아직 그것을 영접하지 않고 
있는 모든 죄인들을 통칭한다고 볼 수 있다.
ㅇ가까이 나아 오니 - '엥기존테스'는 '접근하다'는 뜻의 현재
분사형 으로 예수께서 바리새인듸과 함께 식사와 대화를 나누시는 자리로 '죄인'으로
정죄된 사람들이 계속해서  모여들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예수께서 계시는 곳이면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소외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왔음을 시사한다.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ㅇ원망하여 - '디아공귀조'는 '와글와글 떠들다' 또는 '수근거
리다', '불평하다'의 뜻으로, 여기서는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게 된 데에 대한 바
리새인과 서기관의 불만스러운 모습을 나타낸다. 또한 미완료형으로 사용된 이 동사는
그들의 불만이 단 한번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쉴새없이 계속해서 토로되었으며, 아울
러 이러한 불평불만의 소리는 사건 때마다 늘상 있었딘 것임을 나타낸다.
ㅇ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 이 말은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을 손님으로
접대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단순히 예수가 어떻게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식
사를 같이 할 수 있는가라는 놀라움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추종자들을 향해
예수를 탄핵(彈劾)하는 말로서 '예수는 경건한 자가 아니니 그에게서 떠나라'고 하는
의미이다. 더욱이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대해 '이 사람'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보지 않고 기껏해야 율법 선생 정도로 여겼음을 단적
으로 보여준다.

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ㅇ잃은 양의 비유이다.양은 성경에서 약 50회 이상 언급되며 팔레스틴 지역 특산물로
대표될 만한 동물이다. 양이 일찍부터 팔레스틴 지역에서 가축화 되었다는 것은 창 4
장의 가인과 아벧의 기사에서 시사되어 있다. 양은 유대인 사회에서는 주된 재산이요
생계 수단이며 종교 의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특히 양은 희생 제사와 그 제물
에 있어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동물인데  해마다 막대한 수의 양들이 그러한데에
사용되었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양의 특색은 (1)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른다(요
10:2-5). (2) 순하고 복종한다(사 53:7). (3)사자(미 5:8), 이리(마 10:16, 뱀(요
10:12),시랑과 곰 같은 원수 앞에서 떤다(렘 11:19;미 5:8). (4) 웅덩이에 빠지기 쉽
다(마 12:11). (5)목자가 무관심하면 고통을 당한다(겔  34:5-8;마 9:36;막 6:34;요
10:13). 양을 기르기에 좋은 목장으로는 유대 산지, 네겝 남방,모압, 하란 근방, 
아나톨리아, 수리아 산지,미디안, 요단 동쪽, 아라비아 등이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
된 잃은 양의 비유는 팔레스틴 지방에서 서식하는 양들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 
비유의 목적은 잃은 양 하나를 다시 찾는 기쁨이 아혼 아홉 마리의 양보다 더 큰 것
임을 말하는 것과 아울러 의인인 체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
시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교훈하는데 있다. 물론 이 비유에서 양을 찾아 돌판을
샅샅이 뒤지는 목자는 예수를 가리키는데,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신의 양을 하
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4 너희 중에서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ㅇ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 이 비유에서 등장하는 목장 주인은 그리 큰 부자는 아니
다.아라비아 유목민(遊牧民)의 목축 규모는 대개 20내지 200수 정도이다. 유대법에서
는 보통 300수 정도를 쳐야 대규모 목축에 속했다. 비유에 나오는 이 사람은 몸소 양
을 칠 형편이지 품꾼을 사서 거느릴 정도로 넉넉한 것은 결코 아니다.한편 여기서 등
장하고 있는 양 일백  마리에 대해선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
나 하나님 곁에 안연히 거하고 있는 성도들을 지칭한다고 봄이 무난할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초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백마리의 양이 아니라 잃은 양 한 마리이다.
ㅇ그중에 하나를 잃으면 - 팔레스틴의 목초지는 대부분 팔레스틴 남북을 잇는 중앙
고원 지대에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그 고지는 해발 평균이 5백 미터나 되기 때문에
일단 양이 목자를 떠나 길을 잃어버리면 사고를 당하기 쉽다. 그래서 팔레스틴의 목
자(牧者)들은 서너명이 한 조가 되어 양떼를 보호했다. 이들은 저녁이 되어 양떼를 우
리(fold)로 몰아넣을 때 잃어버린 양이 있나 없나를 확인하기 위해 반드시 양떼를 세
어보았는데 만일 단 한마리의 양이라도 없을 경우 목자는 그 양을 찾아 온 지역을 찾
아 다녔다. 한편 '잃다'라는 표현에 대해서 마태는 양 스스로가 양떼로부터 '벗어나
다'의 의미인 '플라나오'라는 말을 사용하여, 잃은 양 한 마리는 복음의
진리를 스스로 거부한 자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었다. 반면에 누가는'파멸하다'의
뜻인 '아폴뤼미를 사용하여 양이 '고의' 혹은 '악의'로 양떼를 떠나
사악한 길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양이 연약하고, 무지하며, 미련하여 양떼
들과 함께 올바로 목자를 따라가지 못했음을 암시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본문의 잃어
버린 양은 타락한 세상 가운데서 방황하고 있는 죄인들을 나타낸다.
ㅇ찾도록 채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 예수께서 잃은 백성을 다시 찾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고 하는 것(19:10)은 누가복음에서 나타난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이다. 마
23:15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한 사람의 개종자(conyert)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
를 두루 다닌다고 하였는데 이들의 열심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시키기 위함이 아니고
자기들의 종파를 열렬히 신봉할 지지자를 얻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목자되신 예수께
서 양을 찾으시는 것은 그 양의 경제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길을 잃고  위험에 처한
양을 구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가려고 하지만(사53:6), 의
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는 이 양떼를 구하기 위해 목
숨을 버리신 것이다(마 9:13;요 10:11).

5 또 찾으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ㅇ즐거워 - '카이로'는 만족으로 인한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기쁨이 넘
쳐서 노래라도 부르며 춤을 덩실덩실 추고 싶을 정도로 홍분이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본문은 죄인 하나가 참으로 회개하였을 때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이와 갈은 것임을 암
시한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바닷가의 모래알 처럼 미미(微微)한 존재인 인생들을,
하나님이 이렇듯 깊은 관심과 애정의 대상으로 삼아주신 것은 오직 당신의 주권적 은
혜라 하겠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받은 성도의 존귀와 영광은 우리의 상상을 초
월한 것이다. 스바냐는 성도들올 향한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이렇게 노래했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
ㅇ어깨에 메고 - 목자의 말을 듣지 않고 제 길로 나아간 양이라고 하더라도 '찾은
양'은 그에게 크나큰 기쁨이 되었으며, 온 세상을 정복하고 돌아오는 승리자의 깃발과
도 갈이 온 동네에 내보이고 싶은 자랑거리와도 같은 것이다. 복음 전도자의 열심과
수고로 얻게 된 성도들도 그 사역자의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이 된다(빌 4:1;살전
2:19).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ㅇ나와 함께 즐기자 - 일은 것 즉 양,은전, 아들을 찾았을 때  이웃들을 불러 모아
함께 즐긴다고 하는 이 기쁨의 잔치는 본장에 나오는 세 비유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내용이다(6, 9, 23절). 이 비유들의 정점은 잃은 것을 도로 찾은 것 보다도 찾은 이후
에 이웃과 함께 공동의 향연(饗宴)을 즐긴다고 하는 것에 있다. 향연을 베풂으로써 개
인의 기쁨은 공동체에게로 나아가고 함께 걱정했던 이웃들의 노고에 보답하게 된다.
이렇듯 하나님 나라에서도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은 그리스도만의 기쁨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 나라 전체에 큰 기쁨이 된다.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ㅇ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 이 말은 백 마리 양이 모두 귀하지만 잃어버렸다가 찾
은 양은 더 각별한 관심의 대상임을 의미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돌아온 탕자 비유
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즉 탕자 비유에서, 큰 아들은 계속 아버지의 집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탕자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 수많은 고생을 겪었으므로 동정과
긍휼이 그에게 더 쏠렸다는것이다(31, 32절). 사실 성도들은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순
서에 있어서는 다소간 차이가 있지만,엄밀한 의미에서는 너나 할것 없이 모두 잃어버
린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8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에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ㅇ열 드라크마 - 한 드라크마(Drachma)는 한 데나리온(Denarius)과 동일한 가치로서
오늘날의 일반 노동자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금액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유의 할 사항은 유대 여인에게 있어서 열 드라크마는  결혼반지에 해당한다는 점이
다. 유대사회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때 결혼 지참금 형식(Jeremias)으로
드라크마 열 닢을 줄에 꿔어주는데 여인은 그것으로 자신의 머리를 장식하곤 하였다.
오늘날 근동지방에서 많은 여인들이 머리 장신구로서 걸치고 다니는 100개의 금화나
은화에 비하면 참으로 초라한 장신구이겠지만 열 드라크마는 여인의 지참금이기 때문
에 귀중한 재산이며 비상금이 된다. 그래서 유대 여인들은 잠을 잘 때에도 이를 결코
풀어 놓지 않는다고 한다. 이 열 드라크마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결코 장신구의 역할을
다할 수 없기 때문에 여인은 부지런히 그것을 찾았을 것이다.
ㅇ등불을 켜고 - 유대인들의 가옥 구조는 대개 창문이 없거나 있어도 환기만을 위한
조그만 창문이 하나 정도 있을 뿐이어서 그 안은 어두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이
비유는 예수와 복음 전도자들이 하나님의 공의인 등불을 켜고(습 1:12)구원할 죄인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 은유적으로 나타낸다.

9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ㅇ찾은즉...함께 즐기자 - 경제적 손익(損益)을 계산한다면 벗과 이웃을 초청하여 잔
치를 베푸는 것보다 잃은 돈을 찾지 않는 깃이 차라리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
유에 나오는 이 여인에게 있어서 선물받은 열 드라크마중 하나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
을 만큼 귀중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이 본절을 통해서 드러난다.사람의 목숨이 천하보
다 귀한 사실을(마16:26)확신한다면, 복음 증거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연히 깨
닫게 될 것이다.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ㅇ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 '사자'의 뜻인 앙겔로스'    
는 '천사' 혹은 '사절'을 뜻한다(마2:13;막1:2). 죄인 한 사람의 회개는 개인의 기쁨
일 뿐만 아니라 온 우주의 기쁨이 된다.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삼위 하나님히 계획
과 협력이 수반됨과 아울러 여러 천사들의 협력 또한 함께 하므로, 한 죄인의 회
개가 우주적 기쁨으로 연결되게 마련이다. 한편 성경에서 천사들은 하나님의 사자로
서 예고나 경고(창 18:9, 10;삿13:2-24;마 2:13), 인도와 교훈(창 24:7,40; 출14:19;
마1:20,21), 혹은 보호(창 32:24-29;마 18:10) 등과 같은 여러 방편으로 성도들을
돕고 있다.

11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ㅇ사복음서 중 오직 본서에만 기록된 이  '탕자의 비유'는 앞의 두 비유와  마찬가지
로 죄인을 찾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비유는 세부 묘사가 매우
생생하며 당시의 관습과 법적인 절차를 반영하고 있으며 영적인 감동과 충격을 우리에
게 안겨준다. 이 비유의 첫번째 부분(11-24절)은 앞의 두 비유와 같이 잃었던 것을 다
시 찾는데 대한 기쁨을 말하고 있으며 두번째 부분(25-32절)대조적으로 맏아들의 냉혹
한 태도를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앞 부분은 하나님이 인생의 죄악을 사하기 원하
시되 신속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사하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어 뒷 부분은
이기적 탐욕으로 가득한 입으로써 하나님의 자비를 오히려 비방하는 자들의 왜곡된 모
습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다. 두 비유가 일명 '돌아온 탕자의 비유'로 잘 알려져
있지만,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여기 등장하는 두 아들 모두가 소위 '잃어버린' 자
들이라 할 수있다. 호색과 방탕으로 가진 소유를 깡그리 탕진 하고서 아버지께 돌아온
탕자가 하나님을 모르고 방황하는 모든 죄인들을 상징함은 분명한 사실이거니와, 큰
아들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있다는 점에서 '잃어버린자'였던 것
이다. 한편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 타락한 과정을 거치고 다시금 아들로서의 지위를 
회복하는 과징은 각각 7단게로 구분될 수 있는데 이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ㅇ그 둘째가 - 서리나 죄인(1절) 또는 이방인과 같이 뒤늦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얻
게 된 자, 혹은 사회적으로 억압당하던 천민계층을 상징한다고 봄이 무난하겠다.
ㅇ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 이러한 요구는 둘째 아들이신 21:17에 나오는 재산
상속의 율법을 잘 알고있음을 나타낸다. 신 21:17에는 재산 상속시 장자에게 전 재산
의 2/3를, 차자에게 1/3을 나누어 줄 것을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의 이 같
은 요구는 사실상 관례에 어긋난 것이었다. 왜냐하면 재산의 상속은 아버지의 임
종(臨終)이 임박할 때 행해지는 것이 일반적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자식에
게 정식으로 재산을 상속해 주기 전까지는 적당한 재산을 선물로 주곤 했다. 그
ㅇ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 작은 아들이 자기 몫을 완전히 물려 받았고 큰 아
들도 역시 자신의 몫을 양도받은 것 같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사용권이 여전히 아버
지에게 있는 그의 재산을 아버지의 동의없이도 마음대로 처분한 것에 반해서 큰 아들
은 그 사용권을 여전히 아버지 에게 두고 있었음을알 수 있다(31절). 유대에서는 만일
아버지가 생존해 있을 때 재산을 물려 받았을 경우 상속자는 이를 자신의 임의대로 사
용할 수 없었다.만일 아버지가 생존해  있을 때 상속자가 그 재산으로 장사를 해서 이
익금을 남겼다 해도 그 이익들을 임의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돌려야 했다
(Jeremias,Parabes of Jesus,P.128-29).

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ㅇ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 '모아 가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쉬나고'  
에는 '거두어 들이다'의 뜻 외에도 '헌금으로 바꾼다'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보기도 
한다(Greed). 이러한 둘째의 태도로 보아 그는 고향에서 농사를 짓는 일엔 전혀 관심
이 없고 오히려 큰 도시에 나가 장사와 같은 업종에 종사하려고 헹던 것 같다.
ㅇ허랑방탕하여 - NIV에는 '거친 삶을 사는 것'(wild living)이라 표현한다. 한편 여
기서 그가 먼 나라로 떠난 것은 그가 얼마나 부모의 품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나름대로
의 삶을 살고 싶어 했는지를 또한 그 계획이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오래전
부터 계획된 것임을 잘 나타내 준다. 뿐만 아니라 그 재산을 모두 허랑 방탕한 생활에
소비해 버린 것은 그가 게획한 모든 생각들이 육적인 쾌락을 향해 있었음을 증명해 준
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청운의 꿈을 가지고 먼나라로 갔지만 그곳에서 세상의 온
갖 유혹을 받아 타락했다고도 볼 수 있다. 어쨌든 아버지의 집을 떠난 그는 걷잡을 수
없는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종국에는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을 다 탕진허 버리는 결
과를 초래했다.

14 다 없이 한 수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ㅇ궁핍한지라 - 방탕한 아들에게는(1) 가진 모든 재산을 허비하고 (2) 설상가상(雪上
加霜)으로 기근까지 겹치는 어려움이 몰려왔다.그런데 그 기근은 단지 한 지역에만 국
한 되었던 것이 아니고 그가 이상향으로 생각하고 찾아왔던 그 나라 전체를 엄습했다.
이제까지 부족함이 없이 온갖 즐거움과 자유를 누렸던 그는 '비로소' 궁핍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에게 닥친 이러한 어려움은 그로 하여금 새로운 안목을 갖게 하는 기회
가 되었고 아버지의 집이 참행복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였으며 아버지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돌리도록 결단하게 만드는 동인(動因)이 되었다. 성도가 하나님이 정해
주신 구역 안에서(시 16:6)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함은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음과 같다.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ㅇ그  나라 - 유대 민족은 팔레스틴에 약 50만 명 정도만 남아 있었고 4백만명 정도
가 디아스포라(Diaspora)의 삶(유대땅을 떠나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의 셍활)을 살았다
고 한다. 이 먼 나라(13절)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이집트 혹은 이디오피아 등으로 추
정하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니며 확실한 것은 적어도 유대밖이라고 하는 사
실이다.
ㅇ붙여 사니 - 이는 '더부살이하다'는 의미로 그의  밑바닥의 삶을 그대로 드러내는
표현이다. 유대인들은 예로부터 동족은 종으로 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족속의
종이 되는 것을 가장 큰 수치로 여겼다. 만약에 동족 중에서 그가 진 빚이나 형벌
로 인해서 종으로 부리게 된다고 하더라도 유대인에게는 50년 마다 모든 노예를 무조
건 해방하는 것을 정한 희년(禧年)의 규정이 있었다(레 25:54). 둘째 아들은 아버지
의 간섭을 벗어나 제마음껏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먼 이국땅으로 떠나갔지만 결국 
종살이로 전락하고 말았다.이는 우리 신앙 생활 중에서도 흔히 체험되는 바이기도
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요구되는 삶의 질서와 법도를 때로는 무시하며 거역함으로써
소위 자유로은 삶을 살고자 해보지만, 결국에는 세상과 죄악의 속박에 얽매여 마치 
노예와도 같은 부자유스러운 상태에서 고뇌하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과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 불잡힌 바 됨으로써만 오히려 가능하다, 왜냐하면 오직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겠기 때문이다(요8:22).
ㅇ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돼지는 불결한 짐승 중의 하나이다
(레11:7;신 14:8). 따라서 그들은 돼지 고기를 먹지도 않을 뿐더러 돼지를 치는 것조
차 꺼려하며  천시하였다.

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ㅇ쥐엄열매 - 이 열매는 동부 지중해 연안에서 볼 수 있는 상록 교목(喬木)인 구주
콩나무(carob tree)의 열매를 가리킨다. 구주 콩나무에는 8-30cm정도 되는 꼬투리가
맺히는데 그  안에는 5-15개의 열매가 들어있다. 흔히 이것은 세례 요한의 떡
(ST.John's bread)이라고 불리는데 그 이유는 광야에서 살았던 세례 요한이 쥐엄 열매
를 먹었다는 일설 때문이었다(마 3:4;막 1:6). 이 열매의 맛은 약간 단데 주로 가축의
사료로 사용되며 때로는 기근시에 가난한 사람들의 식량으로 대용되기도 했다.
ㅇ배를 채우고자 하되 - 미완료형 '에페뒤메이는 그가 배고픔을
채우지 못했음과 아울러 그 상태가 한참 동안이나 계속되었음을 가리킨다. 그는 임금
으로 기본적인 생계 문제도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액수를 받았는데 물론 최저
생계비 조차도 보장받지 못하는 그러한 상황은 그 나라에 후년이 들었기 때문에 더한
층 가일화되었을 것이다. 그의 상황은 오늘날의 저임금 노동자의 그것과 유사하다. 
ㅇ주는자가 없는지라 - 그가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민심은 그로부터 돌아섰다.
결국 이 말은 그가 모든 사람에게 따돌림을 받게 되어 실제적으로 배고퓸으로 인한 고
통보다 더 큰 아픔을 겪게되었음을 나타낸다. 그가 한 때 돈을 뿌리며 호의호식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몰려들어 함께 먹고 마시며 즐겼을 것이다. 그러나
가진 소유를 깡그리 탕진한 지금에 이르러 그는 모든 사람들로 부터 비웃음과 조소(嘲
笑)를 받았으며 완전히 소외된 자(outcast)가 되었다. 한 사람도 그에게 동물에게 먹
일 사료조차 주지않았다고 하는 것은 그 나라가 극심한 흉년이 들었음을 말함과 아울
러 굶어 죽어가는 그에게 어느 누구도 동정을 베풀지 않은 극단적인 상황을 암시한다. 
굻주림과  철저한 고독이라고 하는 상황은 인간이 절대자를 대면할 수 있는 기회가 되
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인식하게 되는
기회가 된다.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ㅇ스스로 돌이켜(에이스 헤아우톤 엘돈) - 문자 그대로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의미로, 징신을 제대로 차린 것을 말한다. RSV에  의하면 본
래의 '자신에게로 돌아오다'(come to himself)이다.이러한 표gus은 '회개'에 대한 히
브리적 사고를 나타내 주는 숙어이다 (Jeremias,parables,P.130). 또한 이 표현은, 육
신의 정욕에 이끌려 자행자지하는 삶은 자신의 존재를 상실케 함을 시사한다. 하나님
을 떠난 삶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참된 자아를 상실한 삶이라 할 수있다. 하나
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는 곧 자기의 존
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ㅇ내 아버지에게는 - 그가 회개하게 된 동기는 배고픔이었으나 그가 되돌아 가기를
원하였던 곳은 아버지에게로였다. '아버지에게로'의 길은 자신의 교만과 허랑방탕한
삶에 대한 회개의 길이며  앞으로의 자신의 삶을 아버지의 판단과 처분에 전적으로
맡기는 완전한 순종의 길임을 뜻한다.
ㅇ양식이 풍족한(페리쓩온타이,아르톤). 직역
하면 '빵으로 둘러싸이다'이다. 이것은 양식이 남아 돌아갈 정도로 가산이 넉넉함을
암시한다. 참으로 영원히 주리지 않게 될 음식은  하나님에게만  있다(암 8:11-13;요
4:14).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ㅇ일어나가서 - '곧  출발하리라'는 표현이다. 이러한 말은 그의 '스스로 돌이킴'이
결연한 의지를 동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참된 회개란 마음의 번화에 따른 행동의 변
화가 수반(隧伴)되어야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감은 그가 회심한 이
후에 최초로 취해진 의지의 결단이었다.
ㅇ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 여기에서 '하늘'이란 하나님을 의미한다. 히
브리인들은 종종 하나님 대신에 하늘이란 단어를 사용했었다. 이 아들이 지은 죄악은
다양한 각도에서 볼 수 있겠으나 그는 (1) 아버지의 재산을 마음대로 다 탕진해 버렸
다. (2)허랑 방탕한 삼을 살았다. (3) 부정한 짐승과 접촉했다. 이러한 죄를 범하면
서 그는 아버지에 대해 불효, 불순종, 불충, 불성실했다는 사실과 함께 그토록 자상
하고 사랑이 많은 아버지를 주신 하나님께 범죄했음을 겸손히 시인했다.또한 본 구
절은 사람에 대한 도리롤 이행하지 못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 범죄하는 꼴이 되고만
다는 것을 교훈한다. 바울은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라했다(엡 6 :1-3). 한편 아버지와 하나님이 따로 언급 되고는 있지만 이 비유
에서 아버지가 한 행동이 하늘에  께신 아버지께서  하신 행동 그려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과 유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
었다(시 103:13).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ㅇ아버지의 아들이라...못하겠나이다 - '감당치 못하다'라고 하는 말은 '알맞지 않
다'합당하지 않다'고 하는 의미로 이 작은 아들은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더이상 아
들의 자격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패역된 죄를 저질렀음을 자책하고 있다. 자신의 행
위에 의해 그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상실되었을 것으로 단정하였다. 그는 이미 상
속분을 다 받았으므로 아무런 권리도 주장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음식과 의복제공과
같은 것도 이제는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질 수 없는 것임을 깨닫고 있다. 그러나  부
자 관계란 어떤 인의적 계약이나 재물의 수수관계에 의해 깨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아들은 밉든 곱든 자기 아들이며, 그 역으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ㅇ품군의 하나 - 품군은 일시적인 기간만 고용되는 사람, 즉 날품팔이를 가리킨다. 
따라서 그는 아버지의 아들로서도 그리고 종으로서도 들어가 살 수 없고 다만 일시적
인 고용인으로서 날품팔이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였다.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낭고 입을 맞추니

ㅇ아직도...입을 맞추니 - 꿀어진 관계의 회복이 아버지의 주도하에  이루어진다(K.H
Rengstorf). 아버지의 주도적인 사랑(initiative love)은 다음과 같다. (1) 아직 멀
리 떨어진 곳에 있는 아들을 먼저 알아보았다는 사실을 미루어 그가 매일갈이 아들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며 먼거리를 살펴보았음을 알 수 있다. (2) 회개의 말을 듣기도
전에 힘들고 지친 모습으로 돌아오는 아들의 모습에 측은(側隱)한 마음을 느끼게 된
다. '측은히 여기다'의 뜻인 '스플랑크니조마이'란 도와
주지 않으면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아들의 참회 고백
이전에 아버지의 불쌍히 여기는 느낌이 선행한다. (3) 나이 많은 동양인의 경우 아무
리 급할 때에라도 달려 나가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이 비유의 아버지는 그 자신의 품
위가 떨어지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고(Jeremias) 행동하고 있다. 이는 죄인이 하나님
께로 돌아올 때 그분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이다.또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달려갔음은 아버지의 용서 행위가 아들의 사죄 행위보다 우선한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하나님께 천천히 다가가지만 회개한 인간에게 하나님
께서는 급히 달려 오셔서 그의 은혜를 베푸신다. (4) 입맞춤은 삼하 14:33에 의하면
아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용서를 뜻한다. 또한 '입맞추니' 의 뜻인 '카테필레센'
은 많은 입맞춤 즉 여러번 거듭한 입맞춤으로, 단 한번의 
의례적 인사와는 달리 돌아온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기쁨을 그대로 드러내는 행위이
다. 죄를 자백하고 벌을 받으려고 돌아온 아들에 대한 끌없는 용서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ㅇ내가 하늘과...못하겠나이다 - 여러 고본(古本)들에는 19절의 '나를 품꾼의 하나
로 보소서'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이 아들은 마음속에 깊이 각오한 회개와 겸비의
뜻을 그대로 아버지 에게 고하고 있다. 아마 그는 자신을 보고 기쁨에겨워 입맞추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용서의 뜻을 감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감히 아버지를 아버지
라고 부를 면목이 없음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돌아온 아들을 무조건 적으로 용서하
는 아버지의 사랑과 지나간 잘못을 철저히 뉘우치는 아들의 겸비함이 함께 어우러진
이 장면은 뜨거운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ㅇ제일 좋은 옷 -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품꾼이 아니라 극빈처럼 더우하였는데 요
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바로가 하사한 물품과 같은 것들이 지급되었다(창
41:42).제일 좋은 옷이란 문자적으로 그 집에 있는 첫번째의 옷이다. 제일 좋은 옷은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큰 영예를 의미한다. 그 당시에는 훈장(勳章)이 없었을 시기였으
므로 왕이 공로가 많은 신하를 포상할 때 귀중한 옷을 하사했다.따라서 아버지의 집에
서 가장 좋은 옷을 입혔다고 하는 것은 아들의 죄를 탕감해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아
들로서의 모든 권리가 여전히 유효한 것임을 공표하는 행위였다.
ㅇ가락지를 끼우고 - 가락지는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는 인장 반지와 같은 것으로서
이를 아들에게 주었다고 하는 것은 곧 자신의 권한을 아들에게 위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재산을 아들들에게 모두 이어준 아버지가 이제 가지고 있는 권한은 맏아들
의 재산에 대한 사용권 뿐이다. 따라서 첫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불만을 토로한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됨직하다(29,30절). 엄밀한 이해타산으로 따지면 그의 아우는 이제 가
산(家産)에 대한 아무런 권한도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ㅇ신을 신기라 - 신을 신는다고 하는 것은 그가 자유인의 권리를 회복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동시에 종들은 맨발로 다녔다. 먼 나라에 가서는 다른 사람의 머슴의 신세였
던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와서는 다시 자유인으로서 살게 되었는데 이러한 모습은 사
람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반드시 죄에게 종노릇을 하게 되는 반면에 하나님 안에서는
완전한 자유자가 됨을 의미한다. 이 세 가지(옷, 가락지, 신)는 필요성 때문에 제공
된  것이라기 보다는 아들을 존귀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Plummer).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ㅇ살진 송아지를 - 헬라어 원문에는 송아지라는 단어 앞에 관사'톤'이 붙어
있어서 그 송아지가 바로 준비해 둔 송아지임을 나타낸다. 당시 유대인들은 귀한 손님
이 올 경우와 같은 특별한 때에는 자신이 키우던 짐승들 가운데 가장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손님을 대접하였다.
ㅇ잡으라 - 여기서 '뒤오'는 단1히 '눕히다'의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다른
곳에서는(22:7;행 14:13) '희생시키다'의 뜻도 사용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고대 교
부들(Irenaeus,Augustine,Jerome) 중에는 이 송아지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 구절의 핵심은 앞서 언급한 상징적인 의미보다는 죄인
이 회개하여 돌아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더없이 기뻐하신다는 사실에 있다(시
51:16,17).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ㅇ죽었다가...얻었노라 -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아들 편에서의 영적 죽음과 부활을
뜻하고 '잃었다 다시 얻음'은 아버지편에서의 아들과의 분리와 재결합을 의미한다. 하
나님을 떠난 삶은 엡 2:1과 요일 3:4에 의하면 '허물과 죄로 죽은' 삶을 뜻한다. 이러
한 인간의 죄악된 죽음의 상태는 부활이요 생명이신(요 11:25)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의 은총에 의해서만 온전히 회복될 수 있다.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ㅇ맏아들 - 죄인들에게 베풀어지는 사죄와 구원의 은총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여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전 유대인들을 상징한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율법에 충실한 자(출 4:22)로서 행동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몸과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맏아들의 이러한 위선적
태도는 작은 아들이 돌아온 사건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ㅇ밭에 있다가 - 밭에서 일한 것이 꼭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서 행한 것이었으리라고
볼 수는 없다.그는 이미 상속을 받았기 때문에 아버지를 위해서 밭에서 일한 것이 아
니라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일한 것이다. 이는 자신들의 교리와 율법을 지지할 신봉
자(信奉者)를 얻기 위해 열심히 전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했다고
하는 바리새파 유대인들의 모습과 유사하다.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ㅇ무슨 일인가 물은대 - '묻다'의 뜻인 '에퓐다네토'는 미완
료형로서 계속해서 묻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태도는 일종의 조사, 심문하는 것
과 같은 의미를담고 있다.여기서 의문점은 축하연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맏아들
이 그 자리에 없었다고 하는 점이다. 이는 그 축하연이 너무나 빨리 진행되었기에 맏
아들이 그 자리에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는 26-31절의 대화로 보건대 맏아들
이 그 잔치에 없었다고 하는 것은 그의 가족과 그와의 관계가 다소 소원(疎遠)하였음
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다. 아무튼 이는 맏아들의 아버지 집에 대한 무관심과 아울
러 동생에 대한 불만 심지어는 적개심까지도 암시한다.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ㅇ다시 맞아들이게 됨 - '아폴람바노'는 로버트슨
(Robertson)에 의하면  '다시'의 뜻인 '아포'와  '영접하다 '받다'의 뜻인 '람바노'의
합성어로  '다시 얻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죽었딘 사람이 다시 살아난 가족 전체의
축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말이다.

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ㅇ저가 노하여 - '분노하다'의  뜻인 '오르기조'는 '콧구멍을 벌름거
리다'에서 온 말이다.이는 일시적으로 격양(激昻)된 감정에서 나온 화가 아니라 깊이
쌓인 분노와  노여움을 암시한다.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서 식사를 하며 예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에 대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원망하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맏
아들의 이러한 노여움은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여 하나님께 구원받게 됨에 대해 요
나가 화를 내었던 것과 유사하며(욘 4:1)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의 분노,죄인들의 구원
에 대해  스스로 의인인 체하는 자들의 노여움과 상통한다.
ㅇ들어가기를 즐겨아니하거늘 - 문자적으로는 '기꺼이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의 의
미로, 축하 잔치 자리에 들어가기를 거절 했다는 뜻이다.  이는 동생의 돌아음을 거부
하는 행위를 나타낸다.
ㅇ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 아버지의 주도적인 사랑(initiative love)을 또다시 보
여주는 말이다. 20절에서 그랬듯이 집으로 들어오지 않는 아들을 위해 아버지는 다시
한번 집에서 나왔다.  '권하다'(파라칼레오)는  말은 '옆에서
서'를 뜻하는 '파라'와 '말하다'를 뜻하는 '칼레오'의 합성어
로  옆에서서 다정히 이야기하거나 또는 친절한 말을 건네는 것을 뜻한다. 특히 여
기서는 미완료형으로 사용되어 아버지의 권함이 계속되어졌음을 나타낸다. 아울러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어 유대인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도록
계속 권고하심을 상징한다.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ㅇ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 잃었던 아들을 다시 얻은 기쁨으로 인해 잔치를 벌이고
있던  아버지에  대한 이러한 비난은 맏아들의 불만이 오래전 부터 지속되어온 것임
을 암시한다. 여기서 섬긴다고 하는 표현 '둘류오'는 상전에 더한 종
의 과계에서 사용되는 말로, 마치 종처럼 섬겼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하나
님의 자녀 라는 인식과 그 기쁨을 느끼지 못한 죄로 단순한 의무감에서 하나님을 섬겨
왔음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신령한 인격적 교제를 나누는 일은 뒷전으로 미룬 채 단지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지
키기에 급급하였다. 즉 율법의 수많은 조항들을 지키기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
고 이를 이루는 것으로만 생각한 것을 의미한다. 빌 3:9에 의하면 바울은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하나요"라고 하였었는데, 이는 자기 의를 내세두는 우월감과
자만심을 단적으로 지적해낸 말이다. 맏아들의 이러한 태도로 미루어  보건대,내적(內
的)으로는 오히려 그가 '잃어버린 아들' 에 해당한다 하겠다.
ㅇ염소 새끼라도 주어 - 인과응보의 법칙을 적용하기를 주장하는 말이다.이 염소새끼
는 살진 송아지에 비해 싼 것에 속했다. 큰 아들의 불만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첫째는
그의 아버지가 작은 아들만 편애(偏愛)한다는 항변이다. 하지만 그는 두 아들 모두한
결같이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알지 못했으며, 불쌍한 처지에 놓인 아우에 대해
철저한 이해 관계로만 반응하는 냉혈한이었다. 둘째로 그는 아버지가 공의에 어긋난
태도를 보인다고 항변했다. 이는 곧 그는 선하고 옳은 사람이며 아우는 정죄받아 마땅
한 악인이라고 하는 위선적 편견으로서 바리새적 교만을 상징한다. 한편 맏아들이 아
버지의 전재산을 상속하게 될 것(31절)을 깨닫지 못한 채 염소나 송아지(30절) 한마
리로 인해 불평한 것은 바리섀인과 서기관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
과 영적인 특권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눈 앞의 현세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배
타적 독선에빠져 있었음을 암시한다.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ㅇ이 아들 - 원문에 의하면 '당신의 아들'이다. 그는 돌아온 아들을 '동생'이라고
부를 것을 거절한다. 이는 자신과 동생과의 형제관계를 인정치  않으려는 강한 의도가
숨겨겨 있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경멸적인 어투로서(18:11;마20:12;행 17:8) 바리
새인과 서기관들이 세리와 창기와 같은 사람들을 '죄인'(sinner)이라고 부른 것과 같
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러한 맏아들의 표현을 시정 (是正)하여 '네
동생'이라고 하였다(32절).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ㅇ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엄청
난 축복과 영적인 특권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했던 것같이 맏아들은 자기자신에게 주
어진 특권이 무엇인지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는 장자로서 아버지의 재산의 3분의 2를
상속받을 수있을 뿐만 아니라 그 밖에 집의 가장으로서의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자로서(출 4:22) 구원에 있어서 우선권이 있을 뿐만 아
니라 또한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출 19:6;사 61:6) 이방인들을 구원
에로 인도할 책임이 있었다.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러한 의무와 권리를 망각하고 있었
다.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ㅇ마땅하다 - 이  말은 '잔치를  베풀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아버지의 변명의 말이
아니라 '너는 반드시 환호하고 기뻐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하는 아들에 대한 책망의
말씀이다. 이는 죄인들이 예수께 가까이 나아오는 것을 원망하던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그 죄인들의 돌아옴을 기뻐해야 한다는 의미를 시사한다.그리고 '마땅하다'의 뜻인 
'에데이는 미완료 시제로 필연성과 긴급성(the necessity and urgency)을
내포한다. 따라서 이 비유의 맏아들은 잔치에 참여해야 할 당위성을 갖고 있으며
더욱이 돌아온 동생을 뜨거운 가슴으로 맞아들이도록 요청받고 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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