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누가복음

[스크랩] 누가복음 (19 : 1~48)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9:09
누가복음 19장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ㅇ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 이 구절은 새로이 시작되는 삭개오 이야기의 배경을
설명하면서 앞에서 소개된 소경 치유 기사와 직접 연결시키고 있다. 즉 여리고에 '이
르러'생긴 사건(18:35)에 곧이어 여리고 안에서 새로운 사건이 전개됨을 보여준다. 누
가는 '지나가다'(디에르코마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예루살
렘을 향한, 다시 말해서 고난을 향한 예수의 굳은 의지를 보다 확연히 드러내고자 한
듯하다. 한편 삭개오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사건을 다루는 본기사의 시간적 배경
은 수난주간 전 목요일 쯤으로 짐작된다.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ㅇ삭개오(재카이오스) - 이 이름은 전통적 유대인의 이름으로서
본래의 뜻은 '청결한 사람' 또는 '의로운 사람'이다. 누가의 소개에 따르면 삭개오는
세리장(稅吏長)의 직책을 맡은 사람이었다. 세리장이란 곧 세관장을 의미하는데 여기
고는 베레아 지방으로 부터 요단강을 건너가는 통상인들의 길목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세관이 있었을 것이고 그 세관에서는 주로 길르앗 지방으로부터 유입되는 향유 등 여
러 상품에 대해 통관세를 징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그 지방은 발삼나무의
산지였기 때문에 특산물에 대한 세금까지도 징수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삭개오는 이 세
관의 우두머리로서 세금 징수를 지휘했던 인물로 보인다. 당시 세리장은 로마의 막강
한 공권력을 이용하여 의도에 다라 자율적으로 세금을 부과하여 징수할 수 있었고, 자
기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누가는 삭개오를 소개할 때에 '부자'라는 말을
첨가시킨다. 이는 당시 세리에게도 '허가낸 도둑'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는데 하물며 세
리장이 받고 있는 원성은 더 높았을 것이고 또 그가 누리는 '부'의 원천이 부당한 착
취에 있음을 암시한다. 삭개오에 대한 이와 같은 배경은 그의 직책이 관료라는 점과,
부자라는 점과 함께 18:18-30의 이야기 즉 부자의 구원에 대한 질문과 연결되고 있다
(Danker). 그리고 당시 세리들이 유대 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받았던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삭개오의 구원에 관한 이 이야기는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의 은혜를 확연
히 드러낸다.

3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수 없어

ㅇ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 삭개오가 예수를 보려고 한 이유는 분명히 밝
혀져 있지 않지만 아마 호기심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으로 보인다. 삭개오도 이미 예
수께 관한 소문을 못들었을리 없고 특히 여리고 성 가까이에서 일어났던 소경 치유 기
적과 그를 따르는 군중(18:35-43)에 대해서 듣고 보았을 것이다. 따라서 삭개오는 예
수가 어떤 분인지 확인하고, 또 만나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를 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첫째, 사람이 많아서 앞을 가려 예수가 보이지 않았고 둘째는
설상 가상으로 키가 작아서였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일행이 걸어갈 때 그 주위에 많
은 군중들이 둘러싸고 함께 걸어가고 있음을 상상할 수 있다. 아마도 삭개오의 호기심
은 더욱 고조되어 예수를 보고싶은 마음이 간절해졌을 것이 분명하다.
ㅇ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 여기서 나타난 장면 묘사에서 상징적인 두 가
지 의미를 읽을 수 있는데 하나는 예수를 만나는데 있어서 장애가 되는 외적 요인 즉
다른 사람에 의해서 방해되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미 예수를 만나려고 모여
든 무리가 예수를 가리고 있기 때문에 삭개오는 예수를 볼래야 볼 수 없는 상황이었
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에서도 먼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왜곡된 특권 의식이나 이기
심 때문에 새롭게 교회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도리어 문을 막고 있는 위치
에 있음으로써 예수를 가로막아 다른 사람의 구원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암시로
도 이해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예수를 만날 수 없는 내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카가
작은 점이다. 키가 작다는 말은 볼 수 있는 위치에 못미친다는 말인데 예수를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의 영적 결핍에 있다는 말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기적 교
만, 세상적 욕심, 진리에 대한 경멸심 등이 다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예수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이 두가지의 장애를 극복하는 일을 선결 과제(先決課題)로 삼아야 할
것이다.

4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ㅇ앞으로 달려가 - '앞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엠프로스텐'
은 본래 장소를 나타내는 부사였다. 여기서는 전치사적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어디를
향해 앞으로 달려갔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문맥상 뽕나무를 향한 것이었고 예수의 일
행이 걸어가는 방향으로 앞질러가 기다리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앞절에서 언급된 삭개오의 한계 즉 예수를 만날 수 없게 하는 외적 요
인과 내적 요인을 극복하려는 삭개오의 의지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에게 관계된 외.
내적 한계를 극복하고 앞으로 향해 달려가는 용기가 참다운 신앙을 형성하게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ㅇ뽕나무 - 이는 단순한 뽕나무(모론)가 아니라 무화과를 의미하는 '쉬
케'와 합성된 '쉬코모레아'라는 뽕나무이다. 따라서
17:6에서 언급되는 뽕나무(쉬카미노스)와는 다른 나무이다. 이
뽕나무는 '애굽 무화과' 또는 '무화과 뽕나무'라고도 불리워지며, 열매는  무화과이고
잎은 뽕잎인 나무로서 요단강 지역에서 많이 자란다. 이 나무는 그 가지가 넓게 퍼지
고 아래로 늘어져 있어 비교적 쉽게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삭개오는 이 뽕나무 위로
올라가게 됨으로써 예수를 만나기 위해 자기의 한계성(限界性)을 극복해 내는 놀라운
지혜를 발휘하고 있다.

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ㅇ우러러 보시고 - 헬라어 '아나블레포'는 '위'(up)라는 전치사
'아나'와 '보다'의 동사 '블레포'가 합성된 복합어로서 '쳐다
본다'(look up)는 뜻이다. 예수는 뽕나무에 앉아있는 삭개오를 쳐다보셨다.
ㅇ삭개오야 - 뽕나무 위에 올라 앉아있는 삭개오에게 예수는 직접 이름을 부르셨다.
예수가 신적 전지성에 의해 삭개오의 이름을 아셨을 수도 있고 혹은 삭개오의 이름이
이미 여리고 땅에 널리 알려졌으므로 무리들 중에서 삭개오의 이름이 언급되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본문에서 누가의 관심은 에수의 초자연적 능력보다는 예수가 삭개오를
지목하여 인격적으로 부른 사실 자체에 집중되어 있다 하겠다.
ㅇ내려오라...유하여야 하겠다 - 예수의 인격적 초대는 단순한 부름에 그치지 않고
삭개오의 집에 함께 머무르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이같은 이야기는 중요한 신학
적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예수와의 만남은 예수의 주권적인 초대(sovereign
invitation)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삭개오가 예수를 보기 위해 자신이 갖고 있는 여
러가지의 한계점을 극복하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은 사실 호기심이었고 진정한 의미에서
만남은 예수가 인격적으로 삭개오를 부르고 그의 집에서 머물겠다고 제안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특히 '...해야 하겠다'는 표현은 신적 필연성(必然性)을 강조함과 아울러
예수의 주권적 의지를 뚜렷이 드러내준다(4:43).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ㅇ급히 내려와...영접하거늘 - 예수의 인격적 초청에 대한 삭개오의 응답은 전격적인
것이었다. 즉 '급히 내려와'라는 단어와 '즐거워하며'라는 단어, 그리고 '영접하거늘'
이라는 단어는 예수의 제안을 더할나위 없는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표현이다. 이는 매
우 감동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의 인격적 부르심과 삭개오의 전격적인 영
접은 구원의 눈부신 접촉점이 되고 있다. 이같이 누구에게든 향하고 있는 예수의 초청
을(요 6:35;7:37)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고 영접하는 사람에게 구원의 문은 활짝 열리
게 된다. 삭개오가 이같이 기쁜 마음으로 승낙한 것은 이미 예수에 대한 소문을 잘 알
고 있었고 그 명성에 대한 권위를 인정함을 뜻한다. 또 삭개오는 평소에 자신의 세리
장이라는 직책과 정당하지 못한 세금 징수 때문에 주민들로부터 원성을 샀을 것이 분
명하며 따라서 소외된 아픈 심정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또 자신의 정당하지 못한 행
위에 대한 자책감으로 고민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예수의 부름은 삭개오에
게 있어서 어둠 속에 비추어지는 빛이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을 그 명성 높으신 예수가 초청했다는 것은 감격스러운 일이었고 또 자신
을 초청했다는 사실은 7절에 언급된 바처럼 모든 사람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배척하는
지옥같은 상황으로부터 구원해주는 생생한 용서의 선언으로 이해됐을  것이기 때문이
다. 특히 5절에서 언급한 '오늘'은 구원의 즉각성(卽刻性)을 뜻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 단어는 '급히 내려와'라는 말과 맛물려 구원이 주저할 수 없는 결단성을
요청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또 9절에서 다시 '오늘'이라는 말이 언급되어 구원
의 즉각성을 재삼 강조한다.

7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ㅇ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당시 세리는 죄인 취급을 당하였
으므로 예수의 행위는 당연히 문제시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죄인의 집에 머물며
함께 식사한다는 사실은 죄인의 죄를 인정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5:29,30). 한편 이들의 수군거리는 모습에서 우리는 인간의 두가지 악한 본성을 엿볼
수 있다. 첫째는 자신의 눈에 박힌 들보를 보지 못하고 타인의 눈에 묻은 티를 흉보는
비판 심리이다(마 7:3). 특히 당시 유대인들은 왜곡된 선민의식에 근거한 교만과 자기
의를 과시하는 형식주의로 인해 타인을 비판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둘째는 타인의 잘
됨을 시기하는 심리이다. 본문의 '뭇 사람'은 죄인에 불과한 세리장이 예수의 관심과
호의를 받게 되자 시기심이 발동하였던 것같다.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ㅇ서서 주께 여짜오되 - 앞절의 내용으로 보아 삭개오가 말하고 있는 장소는 삭개오
의 집 안이었을 것이다. 아마 식탁이나 탁자 주위에 앉았다가 일어서서 말하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일어서서 말하는 행위는 말하는 사람의 진지함과 말하는 내용의 진
실성을 나타내는 엄숙성의 표시라고 볼 수 있다.
ㅇ주여 보시옵소서 - 이미 삭개오는 예수께 대한 호칭을 신앙적인 의미의 '주'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또 삭개오는 '보시옵소서'(이두)라는 말로서 자신의
의지의 단호함과 실천 가능성에 있어서 자신 만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같은
말은 6절에서 언급된 바 있는 그의 기쁨과 결부되어 나오는 즐거운 선언임을 느낄 수
있다. 즉 강요에 의한 타율적 선언이 아니라 기쁨에 의한 자율적(自律的) 결단인 것이

ㅇ내 소유의 절반을...주겠사오며 - 삭개오는 당시 랍비들에 의해 제시된 구제비 곧
소유 혹은 수입의 20%보다 훨씬 많은 파격적 액수를 제시한다. 이러한 헌신적인 태도
는, 영생을 사모하여 예수께로 나아왔으면서도 '네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
에게 나눠주라'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서 근심하여 집으로 돌아갔던 부자 청년의 모습
과 너무도 대조적이다(18:18-23).
ㅇ만일 뉘 것을...사 배나 갚겠나이다 - 여기서 '만일'로 시작되는 가정문은 삭개오
가 부당하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갈취한 사실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그
보다는 가정문을 이끌고 있는 '에이'라는 단어를 '...하는 무엇이든지'라는 의
미의 관계 접속사(everythint that...)로 해석하여 '토색한 것은 무엇이나'로 이해하
는 것이 적절하다. 또 '에이'는 '멘'이라는 단어와 같이 사용되어 '확실히'
또는 '틀림 없이'라는 뜻으로 서약문에 사용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삭개오의 진술은 자
신이 부당하게 취한 모든 것은 본래의 주인에게 확실하게 그리고 무엇이나 돌려준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여기서 삭개오는 부당하게 빼앗긴 사람에게 본래의 것의
4배를 돌려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있는데 율법에 의하면 부정으로 취한 것을 돌려 줄
때에는 1/5을 덧붙여 상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레 6:5;민 5:7). 또 남의 것을
도적질한 것은 4배로 갚아야 한다는 규정도 있다(출 22:1;삼하 12:6). 따라서 삭개오
의 이같은 선언은 당시 율법이 정하는 도적질에 상당하는 배상을 하겠다는 것인데 그
렇다면 삭개오 자신이 그같은 정도의 죄를 범하였음을 고백하는 셈이다. 이같은 삭개
오의 파격적(破格的)인 행위는 자기 중심적 삶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새로이 방향을 바
꾸는 전격적인 회개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회개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회개는 죄에 대한 참회나 죄에 대한 단순한 고백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전격적으로 삶
의 방향을 바꾸는 실천적 행동을 동반해야 한다. 회개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13:1-9 주제 강해를 참조하라.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ㅇ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 삭개오의 선언에 대한 예수의 응답 역시 즉각적
인 것이었다. 즉 구원이 오늘 이 집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죄인
으로 취급받았던 죄인에게 구원을 선언한 것은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실로 파격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같은 선언은 삭개오의 헌신적 자아 부인의 선언에 따른 직접적 결과
임에 분명하다. 구원은 장차 미래에 이루어질 것으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
기서 자아 부인의 실천적 결단을 통해 경험되는 현재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ㅇ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 이 말은 공동체로부터 소외되고 배타적인 대
접을 받아온 삭개오를 공동체로 복귀시켜 당당하게 한 형제로 살아가야 할 것임을 선
언하고 있다. 특히 삭개오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삭개오
야말로 참된 믿음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당시 종교적 복권은 곧 정치.사회적
복권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서는 전인적 인간 구원을 의미한다.

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ㅇ인자의 온 것은...구원하려 함이니라 - 삭개오에 대한 구원 선언 후 그 선언에 대
한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즉 이미 앞절의 주석에서 밝힌 바 있듯이 잃어버린
자에 대한 구원이란 소외되고 비뚤어진 인간을 다시 공동체로 복귀시켜 당당하고 품위
있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 말은 온갖 죄악과 허물로 말미암아 혼돈
과 파멸에로 향하는 인간들을 구해내사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로 인도하시는 것을 뜻한
다. 이같은 선언은 사실 에수의 전체적 삶을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병에 걸려
정상적인 인간 삶이 불가능한 귀신들린자(마 17:18), 문둥병자(17:14), 벙어리,귀머거
리(막 9:25), 소경(막 8:23) 등과 같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공동체로 복귀시키며 삭개
오와 같은 죄인들을 용서하고 공동체로 복귀시키는 모든 행위는 땅위의 평화(平和)를
위한 사랑의 치유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참으로 사람다와질 수 있도록 하는 예수의 구
원 행위는 오늘의 기독교가 우선적으로 따라야 할 과제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미의 선언이 이미 5:31,32에서 언급되었는데 결국 삭개오는 이와 같은 선언의 실천
적 모델(model)이 된 셈이다.

11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ㅇ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 여기서 '저희'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전
후 문맥상 삭개오의 집에 들어갔던 예수의 일행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되며 장소도
역시 삭개오의 집 안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삭개오에 대한 파격적 구원 선언과 잃
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시키고자 하는 의지 천명을 듣고 있던 사람들에게 예수는 새로
운 비유를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시작되는 열 므나의 비유는 달란트의 비유(마
25:14-46)와 비슷한 내용이나, 주제에 있어 차이가 있다. 즉 달란트의 비유는 하나님
께로부터 받은 은사와 재능들을 최대한 선용해야 한다는데 강조점이 있는 반면, 본비
유의 강조점은 당시 무리들의 그릇된 천국관과 그릇된 메시야관을 지적하는데 있는 것
이다. 이 비유를 말하게 된 이유로 누가는 청중들의 임박한 하나님 나라 도래에 대한
관심과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이 목전(目前)에 다가온 사실을 들고 있다. 따라서 비유
의 초점은 종말적 사건에 대한 관심으로 모아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앞에서 언급된
예수의 선언, 즉 '오늘 이 집에 구원일 이르렀다'는 말을 열 므나의 비유에 나타난 심
판의 엄격성과 대조시켜 구원에 이르기 위한 실천적 결단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의도
를 읽을 수 있다. 또 이 비유를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베풀었다는 점에서 장차 당할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부활과 재림과 연결지어 말함으로써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장
차 도래할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인내할 수 있도록 믿음을 지키라는 의미의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점은 역시 비유의 초점이
라고 할 수 있는 종말적 관심에 대한 언급이다. 누가의 언급처럼 예수께서 비유를 베
푸시게 된 배경이 곧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금방 도래하는 것인줄 생각했기 때문이
라면, 예수는 종말적 심판의 때가 당장 일어나지 않음을 말하면서 사람들의 잘못된 생
각을 바로잡아주려 하신 것이다. 즉 비유의 내용상 예수의 죽음과 부활 후로부터 예수
의 재림까지는 상당한 간격이 있음을 예시하고 있는데 따라서 예루살렘 입성은 종말적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에의 길로 접어드는 것임을 암시한다.

12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ㅇ어떤 귀인이 - 여기서 이야기의 주인공이 달란트 비유(마 25:14-46)에 나오는 '어
떤 사람'과는 달리 '귀인'이라고 언급되는데 '귀인'(유게네스)은
'가문이 좋은 사람' 또는 '마음이 고상하고 귀한 사람'을 뜻하며  비유적으로 예수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ㅇ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 이와같은 배경 설정은 당시에 널
리 알려진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Archelaus)가 아버지의 왕권을 물려받기 위해 로마로
떠났던 이야기와 비슷하다(Josephus). 즉 헤롯 대왕은 죽기에 앞서 자신의 왕국을 세
아들인 안티파스, 빌립, 아켈라오에게 분할해 주었는데 이러한 일은 로마 정부의 공식
적 승인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유대 지방을 분할받은 아켈라오는 로마 황제의 인준
(認准)을 받기 위해 로마로 떠났다. 한편 유대인들은 아켈라오를 매우 혐오했던 터라
사절단을 구성하여 로마로 보내었으나 아켈라오의 왕위 취득을 저지하는 데에는 실패
하고 말았다. 이같은 사건이 예수 탄생 직후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예수 자신 뿐만
아니라 누가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는 점을 들어 이 비유가 그 정치 야사에
서 따온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확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열 므나의 비유가 어디까지나 비유인 만큼 이야기의 출처가 어디였든 간에 내용에 대
해서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본비유의 강조점 곧 당시 예수를
따랐던 무리들의 잘못된 기대에 대한 예수의 교정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첫째, 귀인을
예수로 비유했을 때 왕위를 받으러 간다는 말은 재림할 때 세상의 심판주로 오게 된다
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의 예수는 종말적 심판자나 통치자가 아님을 암
시하며 이는 11절에서 언급된 사람들의 생각 즉 당장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나리라는
기대에 대해 정면으로 배치되는 말이 된다. 둘째는 왕위를 받기 위해 '먼 나라'로 갔
다고 했는데 이 말은 왕위를 받고 돌아오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所要)됨을 암
시한다. 이는 곧 예수의 죽음과 부활 승천 이후 재림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적 경과가
있음을 가리킨다.

13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ㅇ그 종 열을 불러 - 마태는 달란트 비유에서 세 명의 종을 언급한 반면 누가는 그
세 배가 넘는 열 명으로 언급하고 있다. 아마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귀인'으로 설
정되었기 때문에 많은 종을 언급함으로써 귀인을 상당한 재력을 갖춘 권위있는 인물로
묘사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ㅇ은 열 므나를 주며 - 여기서도 달란트 비유와는 달리 열 명의 종에게 열 므나를 균
등하게 나누어 준다. 그리고 화폐의 단위도 차이가 있는데 '므나'는 헬라의
동전으로서 한 달란트의 1/60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달란트의 비유에 대해 여기서 언
급되는 화폐 단위는 엄청나게 적은 액수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본 비유에서는 적은
액수에 대한 충성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 강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I.H.Marshall).
그런 의미에서는 작은 일에 충성(마 25:21,23)을 촉구하는 달란트 비유의 주제와 공통
된다고 할 수 있다.
ㅇ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 이와 같은 당부내지는 지시의 말이 달란트 비유에서
는 나오지 않는다. 여기서 화폐 단위 '므나'를 각 사람에게 주어진 사명, 또는 재능이
라고 한다면 '장사하라'는 말은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과 재능, 또는 일을 창조적이고
생산적으로 수행(遂行)하라는 지시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예수의 명
령과 연관될 때 예수의 재림 때까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창조적으로 수행하는 명령으
로 해석될 수 있다. '장사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라그마튜오마이'
는 이윤 추구와 관계되는 상업적 용어이다. 따라서 이 말은 상업적
이윤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대다수 무리들의 귀를 집중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비
유였으리라 짐작된다.

14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

ㅇ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 이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거부하고 핍박한 사실
을 비유한 것이다. 특히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들의 외식 행위를 비난하고 그
기득권을 위협하는 예수를 눈의 가시와도 같은 존재로 여겼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추
종했던 유대 군중들도 유대 민족을 로마의 억압에서 해방시켜 주리라 기대했던 소망이
사라지게 되자 오히려 적극적으로 예수를 죽음의 자리로 내몰았던 것이다(마
27:20,21).

15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ㅇ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 귀인이 왕위를 받고 돌아와서 맨 먼저 한 일은
떠날 때 종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돈으로 어떻게 장사를 했는지 종을 불러모아 확인하
는 일이었다. 여기서 '장사한'이라는 말은 13절에서 언급된 '장사하다'라는 말 즉 '프
라그마튜오마이'에 전치사로 쓰이는 '디아'를
접두어로 붙여 '디에프라그마튜산토'라는 단어
를 사용하고 있다. '디아'는 '두루 두루 통하여'(through)의 뜻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여기서 말하는 '장사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장사한 내용 전체를 뜻한다고 할 수 있
다. 이 비유에 담긴 종말론적 의미는, 마지막 심판 날에 모든 사람들이  일평생 행한
바 선악간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 날에는 은밀히 지은 모든 죄악
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며(전 12:14), 반면 오른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
게 베푼 자비로운 행위들이 크게 보상받게 될 것이다(마 6:3,4). 특히 받은 바 은사를
잘 활용하여 맡은 사명을 충실히 감당한 자들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수여될 것이다
(약 1:12).

16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ㅇ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 여기서 우선 주목할 것은 '주의 한 므나'
라는 점이다. 즉 주인이 떠날 때 주었던 그 돈은 자기의 돈이 아니라 주인의 돈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점이다. 이와 같은 고백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응당 취해야
할 자세를 함축한 '청지기'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에게 주어진
모든 경제적 도구들은 물론이고 주어진 시간과 재능, 건강 그리고 심지어는 생명마저
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남겼다'는 말은 자
기에게 주어진 삶을 최대의 노력으로 창조적이며 생산적으로 살아냈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윤을 남긴 양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장사 내용, 즉 삶의
과정(過程)이다.

17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ㅇ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 달란트 비유에서의 마태의 묘사와 비슷하다(마
25:21). 즉 마태와 누가가 소개하는 '달란트'와 '므나'의 비유는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에 대한 칭찬과 보상을 공통되게 강조하고 있다. 누가는 '작은 것'이라는 말을 강
조하여 '미크로스'의 최상급인 '엘라키스토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종에게 맡겨진
한 므나가 '지극히 작은 것'(very small, smallest)임을 강조한다.
ㅇ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 달란트 비유에서는 더 많은 것을 맡긴다고만 했기 때문
에 무엇을 많이 맡기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누가는 구체적으로 밝힌다. 본절에 내포
된 교훈은 다음 두 가지이다. (1)하나님나라에서 누리는 축복은 성도들이 기울인 모든
노력을 합한 것보다 월등하게 많다. 열 므나와 열 고을을 비교해보면 이 사실은 더욱
명백해진다. 또한 이 종이 한 일은 주인의 지시를 받은 한 '종'으로서 '장사'를 하는
것이었지만, 그의 충성에 따른 축복은 열 고을을 '다스리는' 당당한 '권세가'의 신분
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온갖 수고와 충성을 다한 성도는 천국에서 예수 그
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히 왕노릇하는 위대한 권세를 소유케 될 것이다(계 22:5). (2)심
은대로 거둔다는 법칙이다(고후 9:6). 열 므나 남긴 자에게는 아홉 고을이나 열한 고
을도 아닌 꼭 열 고을이 주어진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물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는 것 자체가 더할 나위없는 큰 축복임에 분명하지만, 천국 잔치에 참석하게 되는 사
람 중에는 본문의 종처럼 칭찬과 상급을 받는 영예로운 자가 있는가 하면 불가운데서
구원받는 것처럼 부끄러운 처지의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고전 3:15).

18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ㅇ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 이는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남
긴 사람에게 주는 칭찬과 보상인데 역시 남긴 만큼 즉 다섯 므나를 남겼기 때문에 다
섯 고을을 맡기게 된다. 달란트 비유에서는 돈을 맡길 때 능력별고 맡기고 보상은 일
괄 적으로 더 많은 것을 맡기겠다고 한 반면 여기서는 일괄적으로 한 므나씩 맡기고
보상할 때에는 능력급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누가는 보상과 실천적 과정에서 쏟은 노
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앞에서 잠시 언급하였듯이 이 비유의 독특한 점은 '장
사하다'는 말과 남긴 업적에 비례(比例)하여 보상을 베푸는 방법에서도 알수 있듯이
매우 상업적 성격이 짙은 이야기라는 점이다. 이는 일반적 상업 관계를 사용하여 이야
기함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자극하고 이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배려로 보여진다.

20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두었었나이다

ㅇ주의 한 므나...수건으로 싸두었었나이다 - 열 명의 종 중에서 세 명의 종을 언급
하면서 마지막 사람을 소개하고 있다. 열 명의 종을 다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 비유가
세 가지 형태의 종에 대한 이야기로 꾸며진 것이기 때문이다. 언급되지 않은 나머지
종들은 이 세가지 종류의 표본 중 어느 하나에 속한 사람일 것이다. 세 사람의 종이
공통되게 고백하고 있는 말은 자기들에게 맡겨진 '한 므나'가 주의 것이라는 청지기적
태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종은 돈을 수건에 싸두고 보관만 했지 장사는 하지
않았다. 한편 달란트 비유에서는 돈을 땅에 묻어두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수건에 싸
서 돈을 보관한 것으로 묘사된다. 땅에 묻어서 돈을 보관하는 방법은 널리 알려져 있
었으며(Jeremias)수건에 돈을 싸서 보관하는 방법도 랍비 문서에서 나타나는 점으로
보아 돈을 보관하는 한 방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I.H.Marshall).

21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ㅇ이는...거두나이다 - 변명은 그의 나태함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인데, 이는 주인에
대한 오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는 주인에 대해 스스로 느낀 인상에 따라 행동
함으로써 중대한 실책을 범했다. 그의 곡해(曲解)사실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1)그는
주인을 엄한 사람으로 단정했다. '엄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우스테로스'
는 엄격하고 날카롭다는 뜻이다. 이 세번째 사람은 주인을 이렇듯 까다롭
고 무서운 사람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주인의 일을 방관하는 입장에서려
했고 따라서 자발적으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마음을 애초부터 갖지 않았다. 그는 훌
륭한 성과를 얻지 못했을 경우에 당할 주인의 호된 책망이 두려워 아예  일할 엄두도
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의 두 경우에서 드러나듯이, 이 주인은 무작정 화
를 내는 자가 아니라 공의를 소중히 여기며, 종이 기울인 노력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
의 풍성한 상급을 주시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다. (2)그는 주인을 두지 않은 것을 취하
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두지 않은 것을 취한다는 것은 노력없
는 대가를 요구하고 투자 이상의 것을 얻으려는 착취자를 묘사하는 말이다. 이는 고리
대금업자를 가리키는 말로 볼 수도 있다(마 25:24 주석 참조). 그리고 심지 않고 거두
려 하는 사람이란 농경 문화를 배경으로 한 은유적 표현으로서 악질적(惡質的)인 지주
계급을 묘사한다. 이는 이 종이 주인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즉 그는 주인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이익만 챙기려는 사람으로 오해하고
장사하기를 거부한 것으로 보인다. 또 자신이 땀흘려 일해서 남겨 봤자 주인에게로 돌
아갈 것이라는 생각에서 장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종은 얄팍한 이해타산에 눈이 어
두워 더 큰 것을 놓치고 만 셈이다. 결국 그는 주인이 준 한 므나를 주인의 것으로 알
면서도 청지기직의 참된 의미를 전혀 몰랐던 사람이며 주인의 번영이 곧 자기의 성공
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이었다.

22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ㅇ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 17절의 '착한 종'과 대조를 이루는 '악
한 종'이라는 말로 저주섞인 응답을 하고 있다. 여기서 '악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
네로스'의 원뜻은 '병든'으로서 죄에 오염되어 영적 중태(重態)에
처한 인생의 참경을 암시한다. 한편 이 역시 달란트 비유에서와 비슷한 반응인데 누가
는 독특하게 종이 주인에 대해 진술했던 그 말로 판단하겠다고 선언한다. 이 종이 이
렇듯 심판에 처하게 된 근본 원인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주인의 성품을 곡해했기 때
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어떤 분으로 생각하느냐' 혹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
로 여기느냐'고 하는 문제는 인생의 결말을 좌우하는 근본적인 물음이다(마
16:15,16).

23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ㅇ그러면...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 종의 잘못된 변명에 대해 상식선에서 반박하
고 있는 이 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로는, 은행에라도 맡겨두어
주인이 돌아왔을 때 원리금(元利金)을 찾을 수 있게 했었어야 했다는 뜻이다. 둘째로
는 무노동으로 이윤을 얻으려 했다면 은행에 맡겨두고 이자를 취하는 것이 더 안전하
고 실속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식으로 되물으면서 돈을 종에게 맡긴 것은 단순한 자
기 이윤 추구의 목적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마 25:27 주석 참조). 다시 말해서 돈을
맡긴 것은 주인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종들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하
고 있다.

24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ㅇ곁에 섰는 자들 -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미 열명의 종들이 와 있었을
것은 틀림없지만(15절) 같은 종에게 돈을 빼앗으라고 명령할 리는 없었을 것이라고 상
식선에서 생각하면 아마도 열명의 종들 이외에 주인의 심복 또는 하인에게 지시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주인은 이미 왕위를 받은 상당한 권력자였고 따라서 그의 주
변에는 심복들이 그림자처럼 따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ㅇ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 이 말에 함축된 의미는 매우 상징적
이다. 왜냐하면 이를 문자적으로 이해할 경우 이미 열 므나를 갖고 있고 열 도시의 통
치권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한 므나를 준다는 것은 걸맞지 않기 대문이다. 여기서 이
야기의 초점은 한 므나를 빼앗긴 자에게로 모아지는데, 장사하여 남기지 않는 자 즉
받은 바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지 않고 고의로 사장(私藏)시켜 버리는 자는 있는 것마
저도 모두 빼앗겨 살 가치 조차도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려
는 것이다. 그 구체적 대답이 26,27에서 언급되고 있다. 한편, 이같은 원리는 일상 생
활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예컨대, 우리가 어떤 기술을 배워 계속 활용하고 닦아가면
그 기술을 더 많은 곳에 사용할 수 있으나 그 기술을 하찮은 것으로 여겨 사용치 않으
면 이미 획득한 기술마저도 녹슬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25 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ㅇ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 주인의 지시를 받은 자가 상식적인 의문을 제기
하고 있다. 이 구절 역시 달란트 비유에서는 없는 말인데 문맥상 어색한 점을 발견하
게 된다. 즉 이미 열 므나를 받은 자는 열 도시를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았는
데 굳이 열 므나를 소유한 것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이 말이 표현하고자 하는 상징적 의미는 분명하다. 즉 '저희'는 상급의 개념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정해진 액수에만 집착하고 있는 바, 이는 당시의 율법주의적 태도를 암
시한다.

26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ㅇ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빼앗기리라 - 이는 격언구에 가까운 말이며 달란트
비유 외에 8:18;마 13:12;막 4:25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우리는 이를 '부익부', '빈익
빈'의 경제적 현상을 정당화하는 말로서 이해하면 안된다. 이 비유가 경제적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이고 이 비유가 상징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종말적 심판에 도래하는 나라에 관한 것이다. 이미 16,17절에서 보았듯이
본 이야기의 초점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데 있고 심판의 대상은 전체 삶의 과정이다.
따라서 본절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이땅에서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강력히 주지시
킨다. 이 땅에서 주어진 삶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이것은 두번 다시
주어지지 않는 일회성의 삶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하나님 나라의 일에 매진해야 한
다. 또한 본문은 천국에서 축복을 누릴 자의 삶은 이 땅에서도 표시가 난다는 점을 시
사한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사는 자에게서 자연스럽게 발산되는 생
명의 향기에서(고후 2:15), 성령으로 충만한 자의 구체적 삶 속에서 맺어지는 신령한
결실이다(엡 5:9;약 3:17,18).

27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ㅇ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 달란트 비유에서 마태는 그 종을 내어
쫓아 슬피 울게 할 것이라고 말하는데(마 25:30) 여기서는 그같은 내용이 없고 오히려
다른 사람에 대한 저주로 옮겨가고 있다. 새로운 저주의 대상은 14절에서 언급된 내용
즉 주인이 왕위를 받기위해 먼 나라로 떠났을 때에 그의 왕 즉위를 반대하여 밀사를
보냈던 사건과 관련된다. 이 주인은 그들을 가리켜 '원수들'이라고 지목하며 매우 단
호하고 분노에 찬 감정을 표시한다. 정치적으로 보면 왕위 즉위에 대한 반대자는 반역
자 또는 역적(逆賊)으로 간주될 수 있는데 사실 곧이어 언급되는 사형 선고는 그에 응
당하는 형벌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음을 거부하고 죄악된 옛 생활을 계
속 고집하는 자 또한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놓여 있는 셈이다. 사실 새롭게 거듭나기
전의 모든 사람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요,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있다(엡 2:3).
ㅇ내 앞에서 죽이라 - 이같은 단호한 선언에는 단순하게 개인의 왕위에 반대한 사실
에 대한 앙갚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나라 도래를 방해하는 세
력의 종말을 보여주고자 하는 뜻이 숨어 있다. 사실 이같은 이야기는 아켈라오가 왕위
를 받고 돌아온 후 자신을 반대했던 사람들을 학살했던 사건과 매우 비슷하다. 하지만
여기 함축된 의미는 그 초점이 복수에 맞춰져 있다기 보다는 주인의 뜻을 바로 깨달아
어찌하든 작은 일에나마 충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에 있다. 한편 이같은 비
유가 A.D. 70년에 디도(Titus) 장군의 공격으로 예루살렘이 멸망한 사건에 대한 암시
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그것은 지나친 추측에 불과하다.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ㅇ이 말씀을 하시고...앞서서 가시더라 - 누가는 므나의 비유와 예루살렘 입성을 자
연스럽게 연결시키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시고'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뒤이어 예수
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장서서 가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와 비슷한 장면이 막 10:32
에도 나온다. 이는 장군이 부대 앞에서 진두 지휘함으로써 부대의 사기를 높이듯이,
예루살렘에서의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조금도 두려움 없이 단호하게 걷는 장면이다.
한편 본절에서부터는 주께서 십자가 수난을 겪으시기에 앞서 맞이하신 마지막 한 주간
의 생애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29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ㅇ감람원이라는 산의 벱바게와 베다니 - 감람원이라는 산은 '감람산' 또는 '올리브
산'이라고 하는 에루살렘 교외의 동쪽에 위치한 곳이다. 이 산은 남.북으로 약 4km의
길이가 되며 예루살렘보다 약간 높은 나즈막한 산이다. 이 산에 벱바게(
벧파게)라는 지명이 언급되는데 신.구약 성서 전체에 걸쳐 오직 이 이야기에만 나
오는 지명이다(마 21:1;막 11:1). 탈무드에서는 이 곳이 감람산 서쪽에 있는 것으로
언급되기도 하나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베다니(베다니아)라는  지
명과 함께 사용된 점으로 보아 베다니 근처, 혹은 인접한 곳에 위치한 마을 이름인 것
같다(Lightfoot, Godet). 한편 사랑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다니'는 예루살렘으로부
터 약 3.5km, 그리고 여리고로부터 약 24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감람산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현재는 '엘 라자리'(El Azariyeh) 혹은 '라자리에'라는 지명으로 알려져 있
는데 아마도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유래된 듯하다(요
11:1-44).
ㅇ제자 중 둘 - 본문에서 어느 제자를 보냈는지 알 길이 없으나 22:8에서 유월절 식
사를 준비하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보낸 점을 보아 역시 여기서도 베드로와 요한인
듯하다.

30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ㅇ너희 맞은편 마을 - 29절의 언급 내용으로  보아  벱바게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Bruce).
ㅇ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 - 이같은 묘사는 슥 9:9의 예언의 성취라
볼 수 있다. 즉 예수는 기치 창검(旗幟槍劒)의 군대를 거느린 무력의 왕으로서가 아니
라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 끝까지 화평을 선포하는'(슥 9:10) 평강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고자 하신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를 구하신 것은 제
물에 바치는 정결한 짐승을 구별하는 종교적 의식법에 맞추려고 한 것으로 생각할 수
도 있다(민 19:2;신 21:3;삼상 6:7). 따라서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종교
적 신비감까지 느끼도록 함으로써 그 엄숙함을 강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지
시는 자신의 초자연적 능력을 보여주신 좋은 실례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비적 예지의
표현은 한층더 예루살렘 입성의 진지함을 증폭시켜 준다.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ㅇ주가 쓰시겠다 하라 - 여기서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
가 하나님을 가리키는지 예수 자신을 지칭하는지 또는 나귀의 본래 주인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는지 분명하게 밝힐 길이 없다. 그러나 33절에 나귀의 주인이 언급된 점으로
보아 나귀의 주인은 아닌듯하다. 혹자는 미리 나귀 주인과 약속하여 나귀를 준비해 두
었던 것이라고 말하고 나귀의 주인이 예수였다고 본다(Wycliffe). 그러나 그런 추측은
적절치 못하다. 현재 나귀를 사용할 사람이 예수라는 점에서 '주'를 예수 자신으로 보
는 것이 문맥상 무리가 없다. 따라서 단순히 나귀의 소유주라는 의미의 '주'보다는 신
앙적 의미에서 '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눅 12:41 주제 강해 '주의 호칭과 예수' 참
조). 이와 같은 이해는 30절에서 언급된 엄숙한 분위기와 잘 부합되는 것으로서 예루
살렘 입성 직전의 종교적 신비감(神秘感)을 읽을 수 있다.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대로 만난지라

ㅇ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 예수가 예견하신 대로 나귀가 묶여있음을 발견하게 되었
다. 여기서도 나귀를 사전에 미리 준비해 둔 것인지 또 멀리서 나귀 새끼가 묶여 있는
것을 보고 지시했던 것인지 아니면 예수의 초자연적 예지 능력으로 된 것인지 밝혀져
있지 않다. 이중 예수의 신비적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그러나
이같은 초자연적 능력에 대한 묘사는 예지 능력 자체에 강조점을 둔 것이라기 보다는
예루살렘 입성의 종교적 엄숙성 또는 예언 성취의 경이감을 표현하는데 관심을 둔 것
이라고 할 수 있다(마 21:4 주석 참조).

33 나귀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ㅇ그 임자들이...푸느냐 - '임자들'이란 나귀 주인을 가리키는데 평행 본문 막 11:5
에서는 '거기 섰던 사람 중 어떤 사람'이라고 다소 불명확하게 언급한다. 또한 그들이
묻는 물음도 누가는 남의 것을 왜 푸느냐는 식의 물음인데 반해 마가는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는가'하고 물음으로써 소유권에 대한 전제 없이 나귀새끼의 용도에 대해
묻고 잇는 점이 서로 다르다. 어쨌든 이야기의 전개는 예수께서 예견하신대로 되어갔
다. 그리고 본절의 물음은 무슨 권위로 남의 짐승을 가져가느냐는 의미일 수도 있으나
아직 새끼에 불과한 나귀를 끌고 가서 무엇에 쓰려는가 하는 의미로도 이해된다.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ㅇ주께서 쓰시겠다고 하고 - 이 말에 대해 나귀의 주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러나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것은 곧 주인들이 제자들의 말을 인
정했다는 암시를 준다. 따라서 주인들이 이미 예수에 대하여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었
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어쨌든 이같은 묘사는 예수의 초능력적 예지(豫知) 능력
또는 철저한 예언 성취 등을 알게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예루살렘 입성이 신적인 섭
리(providence)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시사한다.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ㅇ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 나귀 등에다 겉옷을 걸친 것은 안장 대신 사용
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왕이나 귀인에게 보이는 일반적인 존경의 표시로도 간주될 수
있다(왕하 9:13). 그리고 타복음서와는 달리 여기서는 예수 스스로 나귀 위에 탄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예수를 태웠다고 묘사한다. 이같은 누가의 독특한 묘사 또는 예수께
대한 제자들의 존경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왕상 1:33).

36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ㅇ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 겉옷을 나귀가 지나가는 길 위에 까는 행위는
왕에 대한 존경과 환영의 표시이다(왕하 9:13). 여기서 '저희'는 제자들을 받는 말인
데 마가와 마태는 많은 사람 또는 무리의 대부분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마태,
마가는 겉옷 뿐만 아니라 나뭇가지도 길에 펼쳤다고 했고(마 21:8;막 11:8) 요한은 그
것을 종려나무 가지라고 밝혔다(요 12:13). 또한 요한복음은 환영의 무리가 예루살렘
으로부터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으나(요 12:12,13,18) 공관복음에는 언급되지 않는다.
이 무리들은 대체로 갈릴리에서 부터 따라온 순례자들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예수께서
는 자신이 이스라엘과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오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드
러내고 계신다. 그러나 당시 예수를 환호(歡呼)했던 사람들 대다수는 예수를 정치적,
민족적 메시야로 밖에 여기지 않았다.

37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바
모든 능
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ㅇ이미 감람산에서...능한 일을 인하여 - 다른 복음서에 없는 자세한 장면 묘사이다.
이제 감람산 기슭까지 온 것으로 보인다. 여기 등장하는 군중들은 이미 갈릴리 지역에
서부터 동행해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여리고에서부터 동행한 사람도 있었을 것으로 보
이는데 벱바게와 베다니 사람들도 있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아뭏든 이 모든 사
람들이 예수를 환영하며 찬양하는데 그 찬양은 예수의 모든 능한 일을 보았기 때문이
었다. 즉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베다니를 오는 동안 나사로의 부활 소식을 들었을 것
이며(요 12:17,18) 그외에도 예수의 허다한 권능들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보고 들었음
에 분명하다.
ㅇ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 이 구절 역시 누가의 독특한 묘사로서 깊은 신학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데 즉 예수의 활동을 하나님의 활동과 일치시키고 있다는 점이
다. 예수께서 그동안 행하셨던 치병 활동이나 모든 놀라운 가르침과 기적적인 활동 등
이 모두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난 것이며 예수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체험
하였다는 고백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같은 묘사는 예수가 군중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공개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38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ㅇ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 이같은 구호는 시 118:26에서 따온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누가는 '왕이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예수를 왕으
올 묘사하는 것은 이미 '므나의 비유'에서 예견되었거니와 여기서도 예수를 왕권적 권
위를 지니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시편에서
사용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라는 말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성전에 모이는
자들에 대한 축복의 말이지만, 메시야 예언과 관련된 경우에는 예수의 승리의 입성(入
城)을 예표한 것이다.
ㅇ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 - 이 구절은 2:14에서 나오는 천사들의 합
창과 흡사한데 여기서는 땅에서 평화가 아니라 하늘에서 평화라고 표현함으로써 어색
한 느낌을 준다. 이 표현 역시 다른 복음서와 다른 독특한 표현이다. 즉 마태와 마가
는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마 21:9;막 11:10) 누가
는 호산나라는 말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본절의 뜻에 관해, 구원이 아직은 하늘에
만 나타났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하고(W.Forester) 또는 사람을 위해 예비한 하늘의
평화라고 말하기도 한다(Easton, Plummer). 또 사람들에게 줄 평화가 예수께 주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J.H.Davies), 예수께서 왕으로 높여짐으로써 하나님과 사람 사
이에 평화가 임했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J.H.Marshall). 이중 마샬(Marshall)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 있다고 볼 수 있다. 보충하면 탄생 때에 천사들이 땅위의 평화
를 노래했던 것처럼 이제 예수가 만왕의 왕으로서 이 땅에 가져다준 평화가 곧 하늘의
평화임을 선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ㅇ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 이 구절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언급되지 않
는 누가만의 묘사이다. 여기서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대해 사용한 '선생'(
디다스칼로스)이라는 호칭은 군중들이 외치는 '주'(퀴리오
스)와 대조되고 있다. 한편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한  요청은 두
가지 다른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다. (1)여기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대해 호
의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본다(7:36;11:37;13:31;14:1). 즉 군중들의 환호는
흥분된 것이었음에 틀림 없었을 것이고 이같은 메시야적 행진이 계속되었을 때 예수의
신변에 물리적 위협이 올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흥분된 군중을 자제시켜
야 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환호의 물결이 시위의 양상을 띰으로써 예루
살렘에 주둔(駐屯)한 로마 군대와 부딪히게 될 상황을 두려워했을 수 있다. (2)다른
한편으로는 바리새인들이 호의적인 반응이라기 보다는 예수께 드린 찬양에 대한 거부
의 표시로서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요구했을 수도 있다. 그들에게는 예수에 대한 찬양
이 신성 모독의 소리로 들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전후 문맥상 (2)의 견해가 더 타당한
듯하나, 어쨌든 바리새인들이 신성한 하나님의 역사를 무지한 인간적인 생각으로 막으
려 했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하다(마 16:21-23 주석 참조).

40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ㅇ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 격언구 형태의 이 구절은 합
2:11에서 언급된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는 말을 연상시킨
다. 이 말은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한 마디로 묵살하는 것인데 첫째, 예수를 메시야로
환호하는 저들의 찬양이 정당함을 확인하는 것이고 둘째, 반드시 그렇게 찬양되어야만
한다는 필연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 대한 메시야적 찬양은 특정한
사람들의 자유 의사에 따라 제한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와 계
획하에 필히 이루어질 사실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 찬양은 계속 선포되어야 할 내용이
므로 응당 찬양해야 할 상황에서 침묵을 지키는 것은 곧 죄가 된다는 의미도 함축(含
蓄)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메시야 찬양 때문에 물리적 위협이 닥쳐온다고 해도
계속 외쳐야 할 것이며 메시야의 행진은 계속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시사함으로써, 오
늘의 기독교인들에게 어떠한 물리적 위협이나 고난 앞에서도 하나님의 뜻과 주의 복음
을 굽힘없이 선포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ㅇ성을 보시고 우시며 - '우시며'에 해당하는 '에클라우센'은 슬
퍼하고 비통하여 우는 것을 뜻한다. 예수가 성에 가까이 이르러 성을 바라보고 울었다
는 이 묘사는 누가만의 증언이다. 예수가 울었다는 이야기는 복음서 중에서 여기와 요
11:35에서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서 울었던 것, 모두 두번 나오는데 히 5:7에서도 예수
가 통곡하여 울었다는 이야기가 언급된다. 이같은 묘사는 예수의  인성(人性)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으며 더욱이 많은 사람들이 열광적인 환호와 찬양
이 있은 후에 묘사되었다는 점에서 그 울음의 의미를 더 의미심장하게 해주고 있다.
또한 예수가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고 울었다는 점에서 이 눈물은 예루살렘의 장래를
애통해하는 메시야적인 눈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눈물이고 사랑의
눈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이 울음은 예루살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을 보면서 인류의 아픔을 보고 온세상 모든 피조물의 고난까지도 생각하면서 우는 메
시야적 눈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구체적 이유는 42:44절에서 언급되지만 당시 이스
라엘이 당하고 있던 고난 즉 로마로부터의 압제와 억압, 그리고 자기 문화와 종교의
헬라화 또는 타락, 그럼에도 소수 특권 계급의 끊임없는 자기민족 착취와 지배 등은
실로 암담(暗澹)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이같은 상황은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벌어
지고 있는 인류의 고난받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고난은 인류사적 맥락과 일
치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눈물은 자기 민족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인류
가 당하고 있는 보편적 고난과 죄에 대한 애통의 눈물이라고 할 수 있다.

42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ㅇ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 이말은 탄식조의 문장인데 예루살렘을
인격화하여 '너'라고 호칭하면서 외치는 소리이다. 즉 예루살렘을 너라고 부른 것은
예루살렘안에 사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이며,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라는 점에
서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뿐만 아니라 각 민족간의 역사적 정황은 각
각 다르지만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고난과 죄성을 통칭하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한편 본 구절의 핵심은 '평화'이다. 이미 38절에서 '하늘에는 평화'라는 찬양이
있었고 예수의 탄생 때 천사들의 노래가 땅위의 평화를 선포한 바 있듯이(2:14) '평강
의 왕이신' 예수의 활동이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바는 땅 위의 평화였다고 할 수 있다
(사 9:6).
ㅇ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 그들은 평화의 길이 없어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길이 있는데도 자기 눈이 가리워져 알지 못한다고 말함으로써 그 책임이 그들 자신에
게 있다는 암시를 준다. 다시 말하면 이 전에 수많은 선지자와 예언자들을 통해 평화
의 길을 제공받았고 예수의 활동을 통해 하늘 나라의 길을 밝히 볼 수 있었음에도 불
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눈 안에서 그 길을 숨겨 버렸다는 것이다.

43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ㅇ날이 이를지라 - 여기서 '날'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메라이'는 복
수 형태로서 5:35;17:22;21:6;23:29에서도 언급되는데 모두 종말의 때를 가리키는 말
이다. 즉 종말적 심판의 때가 도래하게 된다는 뜻이다. 또한 이 예언은 훗날 A.D.70년
에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될 것에 대한 예언이기도 하다.
ㅇ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사면으로 가두고 - 로마군에 의한 예루살렘성의 함락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예언이다. 즉 A.D. 70년에 디도(Titus)가 이끄는 로마군이 예루살
렘 성을 공격하기 위해 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위한 방책(防柵)을 둘러 쳤다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언급된 '토성'은 헬라어로 '카랖스'로
서 본래는 '말뚝'이라는 뜻이다. 즉 토성은 말뚝으로 친 공격용 방책을 뜻하는 것이
다. 이와같이 예언과 역사적 사실이 일치된 이유 때문에 누가복음의 저자가 예루살렘
함락을 목격한 후 누가복음을 완성시킨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갖게 해준다. 그러나
한편 예수가 직접 이 예언을 못했을리도 없다. 예수의 통찰력이라면 당시 그 도시가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고 그대로 방치될 때에는 그와같은 종말을 맞이하리라는 점을 불
보듯 명확하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ㅇ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 이 말은 성곽과 성전의 완전 파괴를 의미
한다. 이와 똑같은 형태의 언급이 21:6에서도 나오는데 물론 성전을 상대로 한 말이
다. 한 도시가 거주민의 완전한 파멸과 건물의 완전한 파괴로 더이상 구원의 가능성이
사라져버린 그림을 보는 듯한 이 묘사는 전술하였듯이 단순히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과 연결지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같은 예언은 평화의 길을 걷지않고 주의 길을
거부(拒否)하면서 살아가는 사람과 도시와 민족의 최후를 말해주는 것이며 종말적 심
판의 때에 이와같은 파멸을 당하게 되리라는 궁극적이고 우주적 의미로도 이해되어야
한다.
ㅇ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 이와 같은 완전 파멸을 맞게 되는
이유를 '권고의 날'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언급하는 바, 권고의 날은 '하나님이 너를
방문하신때', 혹은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러 오신 때' 라는 뜻이다(AV, RSV, 공동번
역). 다시 말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또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 세상에 와
서 회개를 촉구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호소했지만 그들이 믿지도, 듣지도 않았기
때문에 완전한 파멸이 오게 된다는 말이다.

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ㅇ성전에 들어가사 - 이야기가 많이 비약되고 있다. 즉 성 밖에서 갑자기 성전 안으
로 들어가는 이야기가 나옴으로써 마가가 전하는 보다 세세한 이야기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마가는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 다시 성 밖으로 나와 머문 후 다시 들어가
성전 숙정 작업을 했다고 묘사하나(막 11:11-15) 누가는 이와 같은 행적을 생략하고
있다. 한편 본절과 다음절에 묘사된 성전 숙정사건은 요 2:13-22의 사건과는 별개의
것이며 마 21:12,13과 막 11:15-18만 평행되는 내용이다.
ㅇ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 누가는 성전 숙정 사건을 간단하게 묘사하고 있
다. 즉 환전상이나 비둘기 파는 사람에 대한 언급이나 예수께서 의자를 둘러 엎어 분
노를 표시했다는 말도 없다. 그러나 당시 성전의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방인 구역
에서 상인들이 희생 제사를 위한 제물용 짐승이나 필요한 기름, 포도주 등을 팔았다.
그리고 유대인 남자는 1년에 반세겔의 성전 세금을 유월절 때에 성전에 납부해야 했는
데 이때 당시 통용되던 헬라, 로마 또는 수리아니 애굽의 화폐를 세겔로 바꾸어주는
환전상이 영업을 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영업을 허가해 준 종교 지도자와 상
인이 야합(野合)하여 비싼 가격으로 짐승을 팔고 환전 수수료를 고액으로 받아내었다.
때문에 성전은 뇌물 수수의 장소, 장사꾼의 장터가 되고 말았다. 이같은 성전의 상황
은 당시의 종교적 부패상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었다. 예수는 이같은 상황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46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ㅇ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 사 56:7의 인용구이며 세 복음서 모두
이 말을 인용하고 있다. 기도한다는 것은 절대자 하나님을 향한 가장 기본적 예배의식
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성전이 기도처가 못된다는 말은 곧 성전의 종교성이 상실되었
으며 하나님과 상관없는 곳이 되었다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하면 앞절의 상황 묘사처럼
더이상 성전이 아니라 부패의 온상이며 위선과 욕심의 투기장이 되고 장사꾼의 무대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ㅇ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 렘 7:11의 인용구로서 세 복음서가 공통되게
인용하고 있다. 사실 성전이라 함은 종교와 정치가 하나로 연결된 제정 일치의 사회에
서는 나라 전체를 통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온 민족의 정신적 지주요 종교적 핵심인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켜 강도의 소굴이라고 선언한 예수의 발언은 결국 정치 지도자를
포함하여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할 수 있으며 기존(旣存)의 권위 체
계를 깡그리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여기서 41절에서 예수가 비통해하며 울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종교의 타락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즉 예루살렘이 멸망의 길을
갈 수밖에 없고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은 종교의 중심인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루살렘을 구하는 길은 모두가 회개하여 성
전을 기도하는 집이 되게 하는 일이다. 이는 오늘날의 교회가 과연 민족과 세계의 평
화를 주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강도의 소굴로 전락하고 말았는지를 묻게
하는 충격적 말씀이다. 또한 예수처럼 살기로 고백하며 예수의 길을 가는 기독교인이
타락한 교회를 향해 강도의 소굴이라고 외칠 수 있는지를 스스로 물어보게 하는 말씀
이다.

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ㅇ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 앞절에서 보여준 예수의 파격적 언행에 이
어 예수는 성전 안에서 매일 가르침을 행했다고 묘사하는 바, 이는 예수의 호된 비난
과 공격 대상이 성전 자체가 아니라 성전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종교적 부패상(腐敗狀)
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한편 예수의 그같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집권자들이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것은 성전 안에 가르침을 들으러 몰려온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
측된다(48절 주석 참조).
ㅇ대제사장...서기관...백성의 두목들이 - 예수를 제거시키려는 구체적 음모가 비로
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예수 살해 결의의 결정적 원인은 성전에서 행한 예수의
언행이 자신들에 대한 치욕스러운 모욕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지만 대적들은 이미 오
래전부터 예수의 언행과 민중들에 대한 예수의 영향력 때문에 예수를 제거시키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5:21;6:2;11:53,54;13:14). 여기서 언급되는 '백성의 두목들'이란 백성
의 지도자라는 말인데 장로가 아니면 산헤드린(Sanhedrin)의 어느 한 분파일 것으로
보인다.

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ㅇ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 지도자들은 예수를 당장 제거시키고 싶었지만 예
수의 가르침에 몰려든 많은 사람들 때문에 어떻게 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다. 아마
도 때가 유월절이 가까와져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을 것이고 특히 갈릴
리 지역에서 예수의 활동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인기는 폭발적으로 성전을 충만하게 채웠을 것이고 반대로 종교 지도자들은 위기감에
쫓기는 처지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열심당(Zealots)의 활동을 두려워
했던 그들은 지방으로부터 열심당원들이 유입되어 예수와 함께 민중 봉기를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판단을 해서 사태의 긴박감을 절감하였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예수를 죽
이려는 음모는 집권자들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도 필사적으로 진행되어야 했을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 대한 적대감이 정치적, 종교적 양 측면 모두에서 한껏 고조되
어 바야흐로 촉발(觸發) 직전의 뇌관(雷管)과도 같은 상태에 있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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