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장
1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ㅇ유대지경과 요단강 건너면 - 즉 베뢰아 지방을 가리킨다. 이와같이 이시기의 지리적
배경이 베뢰아인 것을 밝히는데 있어본서가 가장 명확하다. 마19:1에는 “요단강 건너
유대지경”으로 되어 저자가 강동편에 거주 했다면 바로 요단강 서편 유대지경이 되므
로 혼란이 되기도한다. 당시 갈릴리 지방의 유대인들은 유대로 갈때에 사마리아를 통과
하지 않고(요4:9) 강동편 베뢰아를 우회한 것이 관례였다.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지방으
로 들어가셨으나 사마리아인의 반항으로 베뢰아 지방을 택하신 사정을 누가는 전한다.
(눅9:51-56) .하여튼 이때 유월절을 맞이하여 상경하는 수많은 순례자의 행열을 따라
예루살렘을 향하신 것이다.
ㅇ무리가모였거늘 - 제자들에게 주신 사적교훈(6:33-50) 이�나고 다시무리에게
에워싸여 공적 광장에 나서신 것이다.
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ㅇ그를 시험하여 - 당시 바리새인들은 신24:1-2(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
치되는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의 해석에서 대립되는 논쟁을 계속하였다. 엄격파인 샴마이파는 위의“수치되는 일”
을 간음으로 보고 간음한 이유외에는 이혼을 못한다고 하였고, 자유적인 힐레파는 무
슨 조건이든(가령 아내가 밥을태웠을 때) 이혼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여기 바리새인의
시험한 목적은 몇가지로 추리할수 있을 것이다. (1) 예수께서는 모세의 율법주의자보
다 차원 높은 도덕을 가르켰으므로(마5:27-32) 이 문제에 대한 견해를 알고 싶어서
(2) 이와같은 논쟁에 예수를 끌어내어 어느편에 가담시키려고 (3)당시 헤롯이 이혼하
였고 세례요한이 이를 반대하다가 죽었으므로 예수를 같은 운명에 빠뜨리기 위해서 등
으로.
3 대답하여 가라사대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ㅇ모세가 어떻게.....이혼증서를 써주어 - 예수께서는 대답에 앞서 반문하시므로 질문
자의 입장부터 밝히셨다.그리고 그들의 대답으로 대답하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앞서
인용하신 신24:1-2을 들어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줌으로 이혼을 허락하였다고 대답하였
다. 이 회답은 곧 저들 자신의 이혼관이었다. 저들은 모세의 말을 문자적으로 취하여
이혼증서를 써주면 얼마든지 이혼할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세
의 말의 근원을 캐서 밝히신 것이다.
4 가로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5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ㅇ마음의 완악함 - 합성형으로“완고한 마음”이다. 앞서 제자들에게 실물 교수하신 어
린아이와 (9:36)는 대조적으로 감수성이 없는 굳어진 마음이다 . 모세의 율법은 정상
적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성의 완악한 것을 전재로주신 차선의 길이었다. “본절과
다음절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계명과 모세의 계명을 대립시키거나 성경을 시정하시
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신21:1의 참뜻을 밝히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인 뜻을 들어낸 것과 인간의 실제적인 죄성과 그로 말미암아 어떤 제한이 불가피한 사
실과의 구별을 명백히 하셔야만 했던것이다”(Cranfield)
6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몸이 될찌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몸이니
ㅇ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 창1:27 및 2:24의 인용으로서 모세를 거슬러
올려 창조에 시작 하신다. 모세의 율법과 하나님의 원시적인 뜻과의 차이점을 지적하
시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귀절은 문자적으로“한 남자와 여자로”다. 하나님은 부
부의 제도를 창조하시되 일부 일처의 제도로 창조하신 것이다. 그리고 일부 일처의
제도는 엄격한 의미에서 이혼한것에서는 벌써 파괴된 것이다.
ㅇ그 둘이 한몸이 될찌니라 - “...한 육체가 될찌니라”(몸이 아니라). 그러나 이는
히브리 용법으로 단순한 육체적 결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몸”으로 또 나아가
“한인격”으로 형성되는 것을 뜻한다. 사람은 어릴 때 부모의 보호로 성장하거나 성
인이 되면 부모를 떠나(아담과 하와는 떠날 부모가 없었지만)이성을 만난 새로운 가정
을 형성한다. 가정은 한 몸이요. 한 인격인 것이다.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더라
ㅇ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 여기 관계대명사는 단수로
부부는 둘이 아니요 벌써 하나인 것을 표시하고 ,동사는 부정 과거형으로 단번으로 영
영짝지워 주신 것을 말한다. 여기 영원 불변한 부부의 윤리가 제시되고 있다. 부부는
창조적인 원리에서 또개인적인 면에서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것이다, 이와같은 신앙이
있는곳에 이혼이 있을수 없는 것이다. 그 기원이 창조자이신 하나님 께 있으므로 피조
물인 사람이 이를 파괴할 수는 없는 것이다.
10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묻자온대
ㅇ집에서 제자들이 - 밖에서 무리에게 공적으로 가르치시고 집에들어가사 제자들에게
그 교훈을 되새겨 주는 것이 예수의 관례였다.(4:10, 7:17. 9:33 등). 이때에도 이혼
문제에 관해 제자들은 질문하였고, 그질문에 대답하셔서 보충설명을 하신 것이다.
11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ㅇ그 아내를 내어버리고.....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 마태에서는 산상보훈의 일부로
인용된다(마5:32).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창조의 원리는 불변의 원리이므로 가령 이혼
증서를 써주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원리에서는 승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부
부관계는 불변이며 따라서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에게 중요한 셈이되므로 본처에게 간
음죄가 되고, 아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랍비들의 가르침에는 남자가 유부녀와 간음했
을 경우 그 남편에게 간음죄가 되고 아내의 경우는 남편에게 간음죄가 되나 남편이 아
내에게 간음죄가 되는 경우는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하신 것은 랍비들의 교훈을 초월하는 것이라 하겠다.
13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ㅇ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 마태와 본서의 낱말은 갓난
어린아이를 가리키나 누가의 용어는 약간 큰 아이를 뜻한다. 또 이동사는 미완료 과거
형으로 계속 데리고 오던 것을 묘사한다 . 저들을 데리고 오다가 제자들의 꾸지람을 받
은 것이다. 당시 유대인 아이들은 회당에서 납비에게 축복을 받는 풍속이 있었고
(Carr).자녀들을 축복할 때 그머리위에 손을얻는 풍속도 있었다. (창48:14). 예수를
숭앙한 추종자들이 예수께 축복을 받고자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것도 제자들의 자연스
런 행동이다. 아이들을 경시하고 귀찮은 존재로 억누른 것은 고대 사회의 공통성 이었
다. 스팔타에서는 자녀의 생살여탈.권은 아비에게 있었고 , 고대중국에서는 아이를 돈받
고 파는수도 있었다.
14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ㅇ분히 여겨 - 본서에만 보이는 첨가로 감정묘사에 예리한 저자의 필치를 보이는 것이다.
제자들의 당치않는 행동을 강하게 제지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보시기에는 어린아이들이
가장 순수하였고, 그들의 오는 것을 가장 반가왔는데 이런 스승의 뜻을 모르고 함부로
그들을 꾸짖는제자들에게 실망과 의분을 표하신 것이다.
ㅇ하나님의 나라가 이런자의 것이니라 - 예수께서는 이미 어린이의 위치를 높여줘 주 자
신과 같이 두셨다. (9:36-37). 여기에서 다시 어린이를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이라고 하
신다. 이는 물론 문자적인 의미보다 어린이의 성품이 하나님의 시민의 성품인 것이다.
어린이의 성품은 여러 가지로 지적되나 중요한 것은 순결과 겸손과 신뢰(신앙)일 것이다.
이런 요소들이 하나님의 나라 시민의 성품인 것이다. 하여튼 부모들은 단순한 축복을 바
라고 아이들을 데리고 왔으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 시민에게 까지 그들을 올리시고
또 축복하신 것이다.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ㅇ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 눅18:17과 문자적으로 같으나 마태에서는 다른 경우에
다른 말씀을 주셨다. (마18:3).여기 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이르노니 “ 귀와 더불어
(3:28주참조)또 이중의 부정사와 더불어 뜻은 극히 강하다. 전절을 받고 이를 부정적
으로 반복하시면서 강조 하신 것이다.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ㅇ안고 안수하시고,축복하시니라 - 부모들의 요구(13절)보다 훨씬 더많이 하셨다
(Bengel).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걸자의 그림자인 어린 아이들을 마음껏 축복하신 것
이다. 축복하심은 미완료형이므로 얼마동안 계속된 것을 뜻한다. 아이들을 하나씩 품
에 안으시고 축복하셨다. (Bruce)그러므로 그시간은 한참이나 걸리셨을 것이다.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ㅇ한 사람 - 그는 마태에 의하면 부자였고 또 청년이었으며 (마19:22) 누가에 의하면
관원 이었다.(눅18:18). 중앙에 있는 산헤드린의 회원이었는지 지방의 관원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어느편이든 나이는 30세가 지났을 것이다. 아마 30세가 겨우 지난 청년
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집에서 (10절)나와길에 나가실 때에 그가 달려와 생의 도를
물었다. 부자요, 관원이요, 또 청년인 그가 현세를 살기 위하여는 최고의 조건들에 만
족하지 않고 영생의 도를 물은 것은 장한 일이었다.
ㅇ달려와서 꿇어앉아 - 본서에만 보이는 상세한 묘사다. 달려온데 그의 구도의 열심을
볼수 있고 꿇어 앉은데 그의 겸손을 엿볼수 있다. 실로 그는 여러면으로 좋은 점들을
갖추어 있었다. 그러나 한가지가 부족하여 영생의 길에서 탄락된 것이었다.(21절)
ㅇ선한 선생님이여 - 독특한 칭호로 랍비에게도 부른적이 없다. 마태에는 “선한”이
다음어귀에 붙어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로 되어 있다. 두책을
종합하면그의 의도를 추측할수 있을 듯하다. 그는 영생을 얻으려면 선한일을 행하여야
하고 선한 일이라면 선한 선생이신 예수께 묻는 것이 첩경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
여튼 그의 질문에 율법주의적 근본 과오가 들어났다 . 구원은 무엇을 행하는데 (to
do)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데(to be)있기 때문이다
ㅇ영생 - 본서에는 이절과 30절에 두 번나타나고 마태에 3회 누가에 3회만 보이나 요한
복음에는 17회나 사용된다.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ㅇ하나님의 한분이외는 선한이가 없느니라 - 여기 명사는 “선한”이로다(마가.누가)
(선한일으로도 (마태) 번역할 수 있다. 여기 예수께서는 자신의 선을 부정하신 것이 아
니라 (유니테리안의주장처럼) 그 부자 청년의 구도적 자세의 과오를 고치시려는 것이
었다. 첫째는 그를 인간적 선의 개념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선으로 전환 시키려는 뜻이
다. 그는 예수를 인간적 의미에서 선한 선생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인간의 선은 진보
적이고 상대적이나 하나님의 선은 절대적인 것이다. 둘째는 율법적 선에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돌이 키시는 것이다. 탈무드에는 “율법외에 선한 것이 없다”라는 말
이 있다. 이런 관념에서 그를 깨우쳐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신앙으로 이끄시는 말씀일
것이다.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ㅇ살인 하지말라...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 5.6.7.8.9.계명.즉 둘째
돌비의 계명들로 인간에 관한 것이다. 마태에는 결론으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
랑하라”는 계명으로 맺는다. 본서에는 제10계 대신 “속여 취하지 말라”를 첨가하고
있다. 제10계를 반영 하면서도 위의 계명들의 결론적인 성격으로 보인다. 공관복음서는
다같이 제5계를 마지막에 둔다. 이 청년이 특히 이 계명에 불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
다(Bengbl). 그리고 여기 인륜에 관한 계명만을 제시하신 것은 첫째 돌비에 나타난
하나님께 대한 계명보다 중하기 때문애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Calvin).
20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ㅇso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 허위도 아니고 (다음절,예수께서 그를 보시며
사랑하신 것으로 보아), 예수의 진의를 파악한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종래 탄락하여
물러간 것으로 보아). 그는 일반 유대인의 과정을 �아 6세에서 율법을 공부하고,
또 준수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피상적인 범위에서 였고 율법의 참뜻을 안 것은
아니며 따라서 중심으로 준수한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ㅇ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 주의 깊게 응시하시며 사랑하신 것이다. 역시 마가 톡특한
묘사다. 예수께서는 진실된 구도자에 깊은 관심을 두시고 또 사랑 하시는 것이다.
ㅇ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 누가에는 “한가지 남은것”이라 하나 뜻은 같은 것이
다. 전절의“ 나지키었다이다”의 대귀가 된다. 랍비들의 기록에 카니나(Chanina)가
죽을 때 죽음의 천사에게 “네게 율법책을 가져와 거기 거룩한 것중에서 내가 미쳐 실
행치 못한 것이 있나 보아 달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부자 청년에게 부족한 한가
지는 율법이 아니라 재물이었다. 물론 그에게도 많은 부족이 있었겠으나 재물이 그에
게는 무상이었고 영생의 길을 가로 막는 치명적 상처였다. 그의 회의도 불안도 여기서
나왔고, 그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게 한것도 재물 때문이었다. 이 한가지 부족
은 사람을 따라 같이 않을 것이다. 이 한가지 죄를 발견하고 제거하지 못하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 “이는 충고가 아니라 명령 이었으며 ,강압적 이었으나 이 영혼의 성격
을 따른 개인 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수많은 수종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이 명령을 같
이주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재물을 소유하면서 온전한 자가 있을 것이고 모든 것
을 가난한자에게 주고도 온전치 못한 자도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명하신 것
은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줄것과, 예수를 따를 것 두가지였다. 중심문제는 후자
였으나 전자는 그조건 이었다. 전자를 실행하지 못하면 후자는 시작되지 않는 것이다.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ㅇ슬픈 기색을 띠고 - 마 16:3에는 하늘에(하늘에 얼굴을 흐리면)적용되었으나 여기서
는 그부자청년의 얼굴색을 묘사한다. 그는 결국 하나님이냐 재물이냐 (마6:24)는 선택
에 있어 후자를 택했고, 그 결과는 마음의 근심이었다. 만일 그가 예수의 말씀에 순종
하여 하나님을 택하였다면 마음의 기쁨과 평화를 얻었을 것이다. 왈드의상인 베드로
(Peter of Waldo. 1170-1217)는 이때 예수께서 부자 청년에게 명하신 “네게 있는
모든 것을 가난한자에게 주라...그리고 와서 나를 �으라”하신 말씀을 읽고 감
격하여 문자적으로 모든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리온의 성자가 되었다. 그
러나 여기 부자 청년이 근심하여 간 것은 그에게 아직 회개의 소망이 있는 표시가 될
것이다.(Cranfield)
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ㅇ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 본서의 특징어로 6회 나타난다. (3:5주참조)감정적 표정묘
사에 능숙한 마가의솜씨인 것이다.
ㅇ재물이 있는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도다 - 구약에서 부에대한 개념
은 상반적인 두가지 였다. 하나는 선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했고, 다른 하나는
가난한 자가 경건하고 부자는 불경건한 자로 지탄된 것이다. 첫째가 일반적 개념이었고
(제 2계의 성취로)둘째는 특수한 개념이었다. (합 1:4처럼) 하여튼 이런 구약적 배경에
비춰볼 때 그리스도의 말씀은 또 하나의 그리고 전연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신 것이다.
부자는 개인에 한하지 않고 사회나 시대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재물이 많은 부자
가 경건된 신앙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처럼 재물이 많은 시대나 사회 역시 신앙에서는
후퇴한다. 현재의 서구제국이나 미국의 경향이 그것을 말할 것이다. 또 부는 반드시 재
물에 한하지 않을 것이다. 지식이하 지위 등에 부한자들도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가기가 어려운 것이다.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ㅇ제자들이 그말씀에 놀라는지라 - 구약적 개념에 젖은 제자들은 부자에 대한 그리스도
의 새로운 견해에 더구나 부자에게 모든 것을 버리라는 조건이 너무 무거움으로 놀랐
을 것이다.
25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ㅇ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것이- 약대는 “밧줄”의 뜻이있고 바늘귀는 “바늘문”이라
불리우는 성의 작은 문으로 볼 수 있으므로 이를 (1)밧줄을 하늘에 궤는 것처럼 어려운
것 (2)약대가 바늘문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어려운 것등으로 조화하는 설명들이 있으나
수락되지 않는다. 이는 문자적이며 또 동양적 과장법으로 극히 어려운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랍비들이 인용한 바벨론 탈무드에 절대 불가능한 일을 “코끼리가 바늘구멍으
로 들어가는것”이란 말이 있다. 탈무드의 다른귀에 바늘귀는 두친구를 위해서는 좁지
않고, 온 세계도 두 원수를 위해서는 넓지 않다라는 말도 있다“또 코란경에는 “불경
건한 자에게는 하늘의 문이 닫혀 있을 것이고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 까지는 그는
거기 들어가지 못한다”라는 귀가 있다.
26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ㅇ제자들이 심히놀라 -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엄격해지고, 제자들의 놀람은 더욱 심해
�다. 누가에 의하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일반 군
중들에게서 나왔다. 제자들도 일반 군중도 다같이 예수의 엄격한 교훈에 놀랐을 것이
다. 회당을 지배하던 관원이며 따라서 일반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던 부자 청년의 구원이
그렇게 어렵다면 다른사람들이야 누가 감히 구원을 얻을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27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ㅇ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 구원론의 대강령이
다. 구원은 사람 편에 있지 않고 하나님 편에 있는 것이다. 사람의 노력이나 수양이나
각성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하신다. 그것은 부자의 구원에만 한하지 않는다.
부자도 하나님은 구원 하실 수 있고 가난한 자도 스스로 구원 하지는 못한다.
28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ㅇ보소서 우리가 - 두 낱말이 모두 강조적이다. 첫째는 감탄사며 둘째는 부자 청년과
대조되는 우리다, 역시 제자들의 대변자격인 베드로의 발언 이었다. 예수와 부자 청년
사이의 대화를 듣고 있던 베드로는 타락해 가는 부자 청년에 대해 저들은 예수의 요구
대로 행하였다는 자각에서 이렇게 감동적으로 발언한 것이다. 과연 제자들은 예수의 요
구하신 것처럼 모든 길을 버리고 예수를 �았다. (1:18. 20. 2:14). 이와같은
저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이 과연 확실한지를 보장 받고 싶었던 것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ㅇ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 3복음서에 모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귀시작하여 강조적이다. 누가에는 “하나님나라를 위하여”로 되어 있다.
결국예수. 복음. 하나님의 나라는 다같은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 버릴것에 대해
서도 누가는 “아내”를 첨가하고“전토”를 생략하나 뜻에는 차이가 없다. 마태는
“세상이 새롭게 되어.....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를 삽입시킨다.
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ㅇ금세에 있어...백배나, 내세에 영생을 - 마태나 누가에게는 “여러배”로 되어 있다.
본서의 백배도 그런 뜻이고 또 내용적인 의미에서 볼 것이다. (모친과 아내 등을 몇배
나 받지는 못할 것이므로). 본서의 특색은 “핍박을 겸하여 받고”에 있다. 성도들은
현세에서 축복을 받으나 늘 핍박을 각오하여야 한다. 정당한 수고가 없이 받은 축복은
마귀의 선물인 것이다(욥42:12-16).하여튼 예수께서는 버리라고 말하시고 백배나 주리
라고 보장하신다. 그것은 신령한 세계의 역설인 것이다. 이 역설을 체험치 못하면 주의
깊은 은총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ㅇ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고... - 마태에는 이 병행귀 외에 21:16에 다시 나타나 일종
의 격언조로 되어 있다. (1)전자는 베드로 이하 신도들후자는 그외 신도들(Gould,
Plummer, Cranfield), (2)유대인과 이방인(Clarke) (3)바리세인과 세리 (4)부자
와 가난한자들 등으로 해석된다. 첫째가 일반적인 견해다. 하여튼 이는 종말적원리요.
하나님의 세계의 순서다. 종말적 원리는 현세적 원리와는 상반되며, 하나님의 순서는
인간의 그것과는 모순된다. 이런 사실을 통해 신앙적 우월감에 잠긴 제자들을 경계하신
것이다.
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ㅇ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길에 - 아직 요단강 동편 베뢰아에 계시는 것인지(Bruce).
dlal 요단강 서편으로 건너 가셨는지(Meyer)는 밝혀지지 않으나 여리고에 가까운
지점까지 당도한 듯하다(46절). 이 여행의 목적지가 예루살렘인 것이 비로서 밝혀진다.
ㅇ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는 자들은 두려워 하더
라 - 감정묘사에 정밀한 본서의 특징이 여지없이 나타난 장면이다. 예루살렘의 지명과
더불어 예수의 수난을 향해 감연히 앞서가시는 예수의 자세는 엄숙했다. 그리고 이와같
이 엄숙한 주의 모습에서 심상치 않는 정세를 감지하면서 제자들은 놀라고 일반 추종자
들은 오히려 두려워한 것이었다.
ㅇ열두제자를 데리시고 -“곁으로.취한”것이다.놀라 예수에게서 멀어지는 제자들을 곁
으로 불러들이셔서 수난의 예고를 다시 주신 것이다.
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ㅇ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그들이 능욕하며 침�으며,채찍질하고 죽일것이니 -
수난의 장소가 예루살렘인 것이 비로소 밝혀진다. 그리고 수난의 예고도 처음 두 번에
비해 구체적이고 세밀하여 축자적으로 성취 되었던 것이었다. 예수의 고난은 대제사장
들과 서기관들 유대 유권자들이 주동이 되고 이를 이방인인 로마 정권자들의 힘을 빌어
모욕과 폭행을 가한 후에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그리고 3번의 예고에 빠짐없이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첨가하셨다. 그리스도의 수난이 승리로 �날 것을 확인 하신
것이다.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ㅇ야고보와 요한이 - 마태에는 그들의 어머니가 구한 것으로 되어있다. 아마 모자가 같이
말했을 것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처음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며 베드로와 더불어 특히
예수의 신임을 받은 제자였다. 또 그들의 어머니 살로메 (16:1)는 성모 마리아와 자매
간으로 믿어지고 있다. 이와같은 사실들이 이런 특청의 근거가 되었을지모른다 .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ㅇ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 그들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한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하였으나 예수께서 “무엇을 원하느냐”고 유도하시기 까지는
그 소원을 진술하지는 못하였다. 역시 양심의 가책을 느껴 머뭇거렸를 것이다.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ㅇ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 우의정과 좌의정의 자
리였다. 우편과 좌편은 왕과 가장 친근하고 왕 다음가는 영광의 자리였다. 베드로가 예수
께 모든 것을 버린 보상을 요구 했을때(28절) 예수께서는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리라(마19:28)하셨다. 그 말씀을 기억하면서 이런 요구를 했을 것이다.
또 메시야가 오시면 곧 지상에 왕국을 세우고 메시야 통치가 시작된다는 유대인의 일반
적 개념 이었다(행1:6). 예수께서 말씀하신 세상이 새롭게 되는 때는 종말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 종말 이전에 메시야의 고난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때 야고보 형제나 유대
인들의 오해는 종말적 메시야 왕국 이전에 있을 고난을 생각지 못한 것이 었다. 하여튼
야고보 형제의 요구는 “인간의 허무한 공명심을 비치는 밝은 거울 이었다(Calvin)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ㅇ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 근본적으로 말해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구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바로 알지 못하며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눅23:34) 자기의 구하는 것을 수 없는 것이다(롬8:26). 구체적으로 말해 이때
야고보 형제는 그들이 구한 우편과 좌편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곳은 두강도가
달린 십자가 들이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바라보면서 행
진 하시는데 저들은 왕의 보좌를 연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근본적인 착오에서 모든
견해나 구하는 것은 방향을 잃은 것이었다.
ㅇ나의 마시는 잔을 ...받는 세례를 - 구약에서 하나님의 총애도 뜻했으나(시 23:5,116
:13)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키는 경우도 많았다. (시75:8, 사51:17-23, 렘25:
15-28, 49:12, 51:7,겔23:31-34, 합2:16, 슥12:2).본문의 배경은 물론 후자다. <세례>는
본서에만 첨가된 것이다. 이 낱말의 동사형은 물이 넘치는 것이나 거리에 사람들이 쇄도
하는 것으로 넘치는 고난을 상징하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의 잔이나 세례는 다같이 그
의 받으실 고난을 상징한 것이다.
39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ㅇ할수 있나이다 - 이 자신에 넘치는 회답은 저들이 아직 예수의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
지 못한 증거였다. 그들의 오해는 두길로 추측 할 수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잔과 세례
를 영광으로 착각하고 이와 같이 혼연히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가령 그것을
고난의 잔으로 알았다 해도 메시야 왕국을 건설을 위한 충신들의 고난 정도로 알았을
것이고 십자가의 수치고 극심한 순교의 고난으로는 상상 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어느
편이든 저들은 예수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속단적으로 대답한 것이다.
ㅇ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 그리스도는 높고 다른 차원에서 그들의 대답을 긍4
정하신다. 이와같이 차원을 달리하면서 이상하게 진전된 문답을 관찰할 것이다. 과연 야
고보 형제가 장차 그리스도의 참뜻도 이해하게 되고 또 그뜻대로 그의 잔을 마시게 될
것을 예고하신 것이다. 본절에 의해 야고보와 요한이 다같이 초기에 순교하였다는 교회
의 오랜 전승이 성립 된 것이다. 야고보가 헤롯에 의해 조기의 순교한 것은 분명하나
(행12:21. 44년경)요한의 경우 그가 천수를 누리면서 도미시안 황제 때 밧모섬에 귀양가
서 계시록을 기록하고 100세가 지나 죽었다는 전설이 유력한 것이다. 순교만이 주의잔을
마시는 것이 아니며 주를 위한 이와같은 고난의 생애 역시 주의 잔을 마신 것이었다.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ㅇ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는지 - 마태는 보다 분명하게 :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 하셨든지 “라한다. 종말적인 메시야 왕국에서 메시야 의 좌우편에 앉을사람이 있을
것은 부정하시지 않는다. 다만 그 자리는 이제 새삼스러이 예수께서 주실것이 아니라 이
미 성부 하나님이 작정하신 그 사람이 얻을 것을 밝히신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에 복종하는것 만이 성도들이 취할 태도인 것이다.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ㅇ열 제자가 듣고...분히 여기거늘 - 그들도 야고보 형제와 꼭같은 공명심이 있었고 그
러므로 시기에 차서 분히 여길 것이다. 두 사람이 예수의 좌우편 같은 가장좋은 지위를
독점하게 되면 저들은 그 자리를 바라보지 못하므로 두사람에 대해 노여워한 것이다. 교
회는 언제나 이와같은 불순한 욕망 때문에 분규에 빠지는 것이다.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ㅇ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으로 주관하고....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고 -
전자는“주로 행세하는 자로 왕을 말하고 후자는 ”권력을 행사하는 방백급의 중신을 가
리킨다. 세속적 체계에 있어서는 왕이 백성을 임으로 주관하여 종으로 삼고 , 왕의 권력
을 맡은 방백들 역시 백성들 위에 세도를 부리는 것이 상징적 일이가. 그러나 교회력 체
계에 있어서는 그럴수는 없는 것이다. 이하 교훈은 야고보 형제에 대해 분히 여기는 제
자들에게 전반적으로 주신 것이다.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ㅇ크고자 하는 자는....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종이 되리라 - 일
종의 히브리 용법으로 같은 내용을 반복함으로 뜻을 강조하는 것이다. 같은 교훈은 제
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는 다툼이 일어 났을 때 이미 주신바 되었다(9:35, 36, 눅 22:25-
27)세속적 질서와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같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정반대이다. 남의 으
뜸이 되고 위대해지는 자는 오히려 남을 섬기는 종의 자세에 서는 것이다.
ㅇ섬기는자 종 - 전자는“집사”로 번역되었고 (딤전3:8)후자는 당시의 노예제도에서 이
해 되어야 한다(빌1:1). 전자는 일의 성격에서, 후자는 일하는 자의 신분에서의 표현이
나 결국 같은 뜻이다. 바울은 자신을 복음의 일꾼(섬기는자)으로도 (고전3:5, 엡3:7),
그리스도의 종으로 (롬 1:1) 불렀다.
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ㅇ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여 섬기려하고 - 접속사 “왜냐하면
( γαρ)으로 시작하여 전절의 의미를 설명한다. 제자들이 섬기는 자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할 것은 스승되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섬기기 위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과연 그리
스도의 전생애는 철저히 섬기는 생애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생명까지 바쳐 인류를
섬기시고 구속하신 것이다. 그것은 모든 믿는자들에게 최고의 모본이 되었다.
ㅇ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본절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논한
중요한 구절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근거로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가장
중요한 구절로도 취급된다. 더구나 본절이 복음서의 일부로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이라
는데 그 의의는 큰 것이다. 우선 본 구절의 본문 비평적인 문제부터 취급해야 할 것이
다. 여러 학자들은 본절의 진정성을 거부하여 왔다. 그 근거로서는 (1)본문이 전후 내
용과 조화가 되지 않는 것 (2)대속물이란 낱말은 이곳 이외는 신약 전체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 (3)인자의 온 것은 이란 그리스도의 생애가 �난 후를 암시하는 것 (4)사
상적 내용은 바울의 영향이 현저한 것 등이다. 그러므로 대체로 눅 22:27(나는 섬기는자
로 너희 중에 있노라)가 원형이었고 본 귀절은 후대의 신학적 첨가라는 결론이 주어진
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중요한 발언은 언제나 어떤 기회를 따라 지나가는 말씀으로 주
어졌다는 사실에 비추어 본문의 위치를 의심할 필요도 없을 듯하다.
ㅇ대속물 - 가장 중요한 구절의 가장 중요한 낱말이다. 신약에서 이곳에서 (마태의 병행
귀와 더부어)한 번만 나타나고 바울 서신에는 합성형이 한 번(딤전 2:6)보인다. 이 낱말
의 동사형 대속함은 3회(눅 24:21, 딛 2:14, 벧전 1:18). 대속물을 주고 성취된 사실인
“대속”이 역시 3회(눅 1:68, 2:38, 히 9:12)나타난다. 이 낱말의 어근은 “푼다”이며
구약의 제사 법전에서 출발하였다. 즉 (1)이스라엘 남자들이 바쳤던 반 세겔의 생명의
속전(출 30:12). (2)소가 사람을 죽였을 때 지불한 은 30세겔의 속전(출 21:30). (3)처
음난 아들을 위해 바친 대속전(민 18:15) (4)팔린 친족을 속량하기 위해 지불한 속전(레
25:47-53) (5)팔린 토지를 무르기 위해 친족이 지불한 대가(레 25:25-27)등의 배경을
고찰 할 수있다. 이 낱말의 고전 그릭의 배경은 보통 복수로 사용되고 포로나 노예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속전을 뜻했다. 이와같은 구약적 및 고전 그릭의 배경 아래 이 낱말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설명하는 소중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즉 그가 죄와 죽음의 노예
상태에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지불하신 보혈의 값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스도
의 대속은 교회역사를 통해 논의되어 (1)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하나님의 공의에 만족을
주었다. (2)마귀에게 인간의 죄값을 지불하셨다. (3)단지 인간에게 도덕적 감화를 주었
다. 등의 학설로 발전되었다. 3번은 속죄론과 방향이 엇긋난 것이다. 2번에 있어 하나님
은 인류의 범죄와 구원에 관해 마귀를 징벌하실 일이지 그에게 값을 치루셔야 할 의무는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죄값을 지불하신 대상은 범죄한 인간은 죽으리라(창 2:17)는
하나님 스스로 정하신 법도이다. 결국 이와같은 하나님의 공의를 그리스도의 죽음이 만
족하게 성취하므로 인류를 죄의 결과인 죽음에서 구원하신 것이다.
ㅇ많은 사람의 -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 ”다.여기 역시 전치사 중요한 것으로 “을 위
해On behaif"가 아니라 ”의 자리에서 (대신하여)in the Place of"다. 즉 이와
동의어인 ΰπέρ“단수이”...의 유익을 위한 것“을 표시함에 대해 이
는 엄격히 남의 자리에서 그를 대신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 여기<망은 사람>은
오히려 “모든사람”all“으로 이해된다. 딤전 2:6(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
전으로 주셨으니 )에는 모든 사람으로 되어 있으며 그외 명사나 전치사등도 본절과 대
조가 되는 것이 주목된다. 아마 본절은 사 53:11(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의 반영으로 보인다.
46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ㅇ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 갈릴리를 떠나 요단강 동편 베뢰아 지방을 우회하시고 이제
요단강을 건너 강서편의 도시요 예루살렘의 관문인 여리고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당시
북방 갈릴리인의 일반적 순례길이기도 했다. 여리고는 지중해 면에서 2500미터나 낮은
곳이며 따라서 해발 762미터의 고지인 예루살렘에서는 내림길이 있다. 사해 북쪽 요단강
하류의 서편에 위치한 비옥한 곳이며 현재는 엘리하Er -Riha라 불리운다. 일찍부터
주민이 많아 융성한 산업 도시였고 헤롯대왕이 궁전을 건축하여 이 도시를 미화시켰고
이곳에서 사망하였다. 이스라엘 역사에는 여호수아 때부터 관련되었고 지금도 구도시의
유적에는 여호수아가 파괴한 성곽이 남아있다. 기후는 아열대성이다.
ㅇ디메오의 아들인 거지 소경 바디메오 - 그의 이름을 밝히는 것은 본서 뿐이다. “바디
메오”역시“디메오의 아들”을 뜻함으로 결국 겹말이 된셈이다. 히브리어를 알지 못한
이방인 수신자를 위해 주해적 설명을 부친 것이다. 그의 부친 디메오는 당시 여리고에
알려진 인물 같다.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ㅇ나사렛 예수시란.....다윗의 자손 예수여 - 본서에는 흔하지 않는 이름이다. 전자는
1:24이후 처음이고, 후자는 이곳에만 나타난다(48절 및 간접적으로는 12:35). 전자는
비하하신 주의 인성을 가리키고 (요 1:46), 후자는 바로 메시야의 별명이다. 유대인은
메시야를 다윗왕의 재현으로 생각하고 그의 나타나심으로 사방의 적들을 정복하여 다
윗왕국을 재건 하는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일반군중이 그에게 나사렛 예수라고 가르
쳐 줄때에 즉각 그를 다윗의 자손이라 부른데 이 소경의 위대한 신앙이 엿보인 것이다.
아마 그는 일찍부터 예수에 관해 들었고 이 예수가 바로 메시야이신 것도 믿어 그를 만
나기를 소원하고 있었을 것이다.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ㅇ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 짖궂게 돈을 구하는 것은
거지의 본성이었고 또 이런 거지를 무조건 제지하는 것은 일반의 군중 심리였다. 그러나
입전 만은 사정이 달랐다. 거지는 상대를 바로 알았고 또 바른 것을 구했고 군중은 그런
것을 모르고 무조건 제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지는 굴복하지 않고 더욱 소리지른
것이다. 신앙에는 언제나 장해가 있고 그 장해를 극복하므로 신앙은 성숙해 지는 것이
다.“군중이 이적 행사를 막기 위해 거지를 제지한 것은 부당한 것이다. 저들은 거지의
성급한”다윗의 자손을 제지했고 그것을 입성하실 때까지(11:10) 마 21:15. 보존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Gould) 아마 Gould의 견해역시 정당하게는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
때 군중은 아직 예수의 메시야성(다윗의 자손)에 명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ㅇ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른다 - 같은 동사의 세 변화가 주목된다. 이 부근의 묘사는 본서에 독특하고 또
정밀하다. 목격자의 증언을 받아 거룩한 본서의 특징인 것이다. 군중은 이제 약간의 동
정을 나타내어 거소경을 도와 예수께 나아가게 한 것이다. 하여튼 예수의 관심은 약한
자, 그리고 진실된 구도자에게 쏠리신 것이다.
50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ㅇ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 역시 본서 만이 간직하는 생생한 묘사다. 소경은 기
쁨과 열정 때문에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예수께 나와왔다. 천재 일우의기회를 잃을수
는 없었던 것이다. 이런 순수한 구도자를 주는 또한 환영 하신다.
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ㅇ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보기를 원하나이다 - 직접적 질문에 솔직한 회답
이었다. 예수께서는 이적을 행하시기 전에 흔히 이와같은 질문을 하셨다(5:9, 30, 6:38
9:21).병자에게 용기를 주어 신앙을 고백을 시키시려는 것이었다. 소경의 회답은 솔직하
고 근본적이었다. 그는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처럼 돈을 구하지는 않았다. (행3:2). 그리
스도에게 우리는 근본적 해결을 구해야한다.
ㅇ선생님이여 - 이곳과 요20:16(부활 후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께 부른)에만 나타나며,
선생에 대한 최고 존칭어다. 일반적인 용어 “랍비”(9:5, 요1:38).는 “나의큰자”의
뜻으로“선생”을 가리키나 이는 “나의 증인, 또는 나의 선생”을 뜻한다. 앞선“다윗
의 자손이여” 와 더불어 칭호에서도 이 소경 거지의 큰 믿음이 보인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ㅇ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 5:34주 참조.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 흔히 하
신 말씀 이었다.(마 7:50, 8:48, 9:22, 17:19, 18:42 등). 그리스도의 이적적 권능을
유도하는 것은 믿음이다. 본문의 경우 소경의 믿음은 그의 간곡한 태도와 메시야적 칭
호를 부른데 있었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 소경이 고침을 받은 후 예수를 쫓는 것이 특
기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받는자는 주의 뒤를 따라 살 의무가 있는 것이다.
1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ㅇ유대지경과 요단강 건너면 - 즉 베뢰아 지방을 가리킨다. 이와같이 이시기의 지리적
배경이 베뢰아인 것을 밝히는데 있어본서가 가장 명확하다. 마19:1에는 “요단강 건너
유대지경”으로 되어 저자가 강동편에 거주 했다면 바로 요단강 서편 유대지경이 되므
로 혼란이 되기도한다. 당시 갈릴리 지방의 유대인들은 유대로 갈때에 사마리아를 통과
하지 않고(요4:9) 강동편 베뢰아를 우회한 것이 관례였다.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지방으
로 들어가셨으나 사마리아인의 반항으로 베뢰아 지방을 택하신 사정을 누가는 전한다.
(눅9:51-56) .하여튼 이때 유월절을 맞이하여 상경하는 수많은 순례자의 행열을 따라
예루살렘을 향하신 것이다.
ㅇ무리가모였거늘 - 제자들에게 주신 사적교훈(6:33-50) 이�나고 다시무리에게
에워싸여 공적 광장에 나서신 것이다.
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ㅇ그를 시험하여 - 당시 바리새인들은 신24:1-2(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
치되는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의 해석에서 대립되는 논쟁을 계속하였다. 엄격파인 샴마이파는 위의“수치되는 일”
을 간음으로 보고 간음한 이유외에는 이혼을 못한다고 하였고, 자유적인 힐레파는 무
슨 조건이든(가령 아내가 밥을태웠을 때) 이혼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여기 바리새인의
시험한 목적은 몇가지로 추리할수 있을 것이다. (1) 예수께서는 모세의 율법주의자보
다 차원 높은 도덕을 가르켰으므로(마5:27-32) 이 문제에 대한 견해를 알고 싶어서
(2) 이와같은 논쟁에 예수를 끌어내어 어느편에 가담시키려고 (3)당시 헤롯이 이혼하
였고 세례요한이 이를 반대하다가 죽었으므로 예수를 같은 운명에 빠뜨리기 위해서 등
으로.
3 대답하여 가라사대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ㅇ모세가 어떻게.....이혼증서를 써주어 - 예수께서는 대답에 앞서 반문하시므로 질문
자의 입장부터 밝히셨다.그리고 그들의 대답으로 대답하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앞서
인용하신 신24:1-2을 들어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줌으로 이혼을 허락하였다고 대답하였
다. 이 회답은 곧 저들 자신의 이혼관이었다. 저들은 모세의 말을 문자적으로 취하여
이혼증서를 써주면 얼마든지 이혼할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세
의 말의 근원을 캐서 밝히신 것이다.
4 가로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5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ㅇ마음의 완악함 - 합성형으로“완고한 마음”이다. 앞서 제자들에게 실물 교수하신 어
린아이와 (9:36)는 대조적으로 감수성이 없는 굳어진 마음이다 . 모세의 율법은 정상
적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성의 완악한 것을 전재로주신 차선의 길이었다. “본절과
다음절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계명과 모세의 계명을 대립시키거나 성경을 시정하시
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신21:1의 참뜻을 밝히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인 뜻을 들어낸 것과 인간의 실제적인 죄성과 그로 말미암아 어떤 제한이 불가피한 사
실과의 구별을 명백히 하셔야만 했던것이다”(Cranfield)
6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몸이 될찌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몸이니
ㅇ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 창1:27 및 2:24의 인용으로서 모세를 거슬러
올려 창조에 시작 하신다. 모세의 율법과 하나님의 원시적인 뜻과의 차이점을 지적하
시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귀절은 문자적으로“한 남자와 여자로”다. 하나님은 부
부의 제도를 창조하시되 일부 일처의 제도로 창조하신 것이다. 그리고 일부 일처의
제도는 엄격한 의미에서 이혼한것에서는 벌써 파괴된 것이다.
ㅇ그 둘이 한몸이 될찌니라 - “...한 육체가 될찌니라”(몸이 아니라). 그러나 이는
히브리 용법으로 단순한 육체적 결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몸”으로 또 나아가
“한인격”으로 형성되는 것을 뜻한다. 사람은 어릴 때 부모의 보호로 성장하거나 성
인이 되면 부모를 떠나(아담과 하와는 떠날 부모가 없었지만)이성을 만난 새로운 가정
을 형성한다. 가정은 한 몸이요. 한 인격인 것이다.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더라
ㅇ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 여기 관계대명사는 단수로
부부는 둘이 아니요 벌써 하나인 것을 표시하고 ,동사는 부정 과거형으로 단번으로 영
영짝지워 주신 것을 말한다. 여기 영원 불변한 부부의 윤리가 제시되고 있다. 부부는
창조적인 원리에서 또개인적인 면에서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것이다, 이와같은 신앙이
있는곳에 이혼이 있을수 없는 것이다. 그 기원이 창조자이신 하나님 께 있으므로 피조
물인 사람이 이를 파괴할 수는 없는 것이다.
10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묻자온대
ㅇ집에서 제자들이 - 밖에서 무리에게 공적으로 가르치시고 집에들어가사 제자들에게
그 교훈을 되새겨 주는 것이 예수의 관례였다.(4:10, 7:17. 9:33 등). 이때에도 이혼
문제에 관해 제자들은 질문하였고, 그질문에 대답하셔서 보충설명을 하신 것이다.
11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ㅇ그 아내를 내어버리고.....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 마태에서는 산상보훈의 일부로
인용된다(마5:32).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창조의 원리는 불변의 원리이므로 가령 이혼
증서를 써주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원리에서는 승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부
부관계는 불변이며 따라서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에게 중요한 셈이되므로 본처에게 간
음죄가 되고, 아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랍비들의 가르침에는 남자가 유부녀와 간음했
을 경우 그 남편에게 간음죄가 되고 아내의 경우는 남편에게 간음죄가 되나 남편이 아
내에게 간음죄가 되는 경우는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하신 것은 랍비들의 교훈을 초월하는 것이라 하겠다.
13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ㅇ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 마태와 본서의 낱말은 갓난
어린아이를 가리키나 누가의 용어는 약간 큰 아이를 뜻한다. 또 이동사는 미완료 과거
형으로 계속 데리고 오던 것을 묘사한다 . 저들을 데리고 오다가 제자들의 꾸지람을 받
은 것이다. 당시 유대인 아이들은 회당에서 납비에게 축복을 받는 풍속이 있었고
(Carr).자녀들을 축복할 때 그머리위에 손을얻는 풍속도 있었다. (창48:14). 예수를
숭앙한 추종자들이 예수께 축복을 받고자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것도 제자들의 자연스
런 행동이다. 아이들을 경시하고 귀찮은 존재로 억누른 것은 고대 사회의 공통성 이었
다. 스팔타에서는 자녀의 생살여탈.권은 아비에게 있었고 , 고대중국에서는 아이를 돈받
고 파는수도 있었다.
14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ㅇ분히 여겨 - 본서에만 보이는 첨가로 감정묘사에 예리한 저자의 필치를 보이는 것이다.
제자들의 당치않는 행동을 강하게 제지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보시기에는 어린아이들이
가장 순수하였고, 그들의 오는 것을 가장 반가왔는데 이런 스승의 뜻을 모르고 함부로
그들을 꾸짖는제자들에게 실망과 의분을 표하신 것이다.
ㅇ하나님의 나라가 이런자의 것이니라 - 예수께서는 이미 어린이의 위치를 높여줘 주 자
신과 같이 두셨다. (9:36-37). 여기에서 다시 어린이를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이라고 하
신다. 이는 물론 문자적인 의미보다 어린이의 성품이 하나님의 시민의 성품인 것이다.
어린이의 성품은 여러 가지로 지적되나 중요한 것은 순결과 겸손과 신뢰(신앙)일 것이다.
이런 요소들이 하나님의 나라 시민의 성품인 것이다. 하여튼 부모들은 단순한 축복을 바
라고 아이들을 데리고 왔으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 시민에게 까지 그들을 올리시고
또 축복하신 것이다.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ㅇ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 눅18:17과 문자적으로 같으나 마태에서는 다른 경우에
다른 말씀을 주셨다. (마18:3).여기 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이르노니 “ 귀와 더불어
(3:28주참조)또 이중의 부정사와 더불어 뜻은 극히 강하다. 전절을 받고 이를 부정적
으로 반복하시면서 강조 하신 것이다.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ㅇ안고 안수하시고,축복하시니라 - 부모들의 요구(13절)보다 훨씬 더많이 하셨다
(Bengel).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걸자의 그림자인 어린 아이들을 마음껏 축복하신 것
이다. 축복하심은 미완료형이므로 얼마동안 계속된 것을 뜻한다. 아이들을 하나씩 품
에 안으시고 축복하셨다. (Bruce)그러므로 그시간은 한참이나 걸리셨을 것이다.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ㅇ한 사람 - 그는 마태에 의하면 부자였고 또 청년이었으며 (마19:22) 누가에 의하면
관원 이었다.(눅18:18). 중앙에 있는 산헤드린의 회원이었는지 지방의 관원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어느편이든 나이는 30세가 지났을 것이다. 아마 30세가 겨우 지난 청년
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집에서 (10절)나와길에 나가실 때에 그가 달려와 생의 도를
물었다. 부자요, 관원이요, 또 청년인 그가 현세를 살기 위하여는 최고의 조건들에 만
족하지 않고 영생의 도를 물은 것은 장한 일이었다.
ㅇ달려와서 꿇어앉아 - 본서에만 보이는 상세한 묘사다. 달려온데 그의 구도의 열심을
볼수 있고 꿇어 앉은데 그의 겸손을 엿볼수 있다. 실로 그는 여러면으로 좋은 점들을
갖추어 있었다. 그러나 한가지가 부족하여 영생의 길에서 탄락된 것이었다.(21절)
ㅇ선한 선생님이여 - 독특한 칭호로 랍비에게도 부른적이 없다. 마태에는 “선한”이
다음어귀에 붙어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로 되어 있다. 두책을
종합하면그의 의도를 추측할수 있을 듯하다. 그는 영생을 얻으려면 선한일을 행하여야
하고 선한 일이라면 선한 선생이신 예수께 묻는 것이 첩경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
여튼 그의 질문에 율법주의적 근본 과오가 들어났다 . 구원은 무엇을 행하는데 (to
do)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데(to be)있기 때문이다
ㅇ영생 - 본서에는 이절과 30절에 두 번나타나고 마태에 3회 누가에 3회만 보이나 요한
복음에는 17회나 사용된다.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ㅇ하나님의 한분이외는 선한이가 없느니라 - 여기 명사는 “선한”이로다(마가.누가)
(선한일으로도 (마태) 번역할 수 있다. 여기 예수께서는 자신의 선을 부정하신 것이 아
니라 (유니테리안의주장처럼) 그 부자 청년의 구도적 자세의 과오를 고치시려는 것이
었다. 첫째는 그를 인간적 선의 개념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선으로 전환 시키려는 뜻이
다. 그는 예수를 인간적 의미에서 선한 선생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인간의 선은 진보
적이고 상대적이나 하나님의 선은 절대적인 것이다. 둘째는 율법적 선에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돌이 키시는 것이다. 탈무드에는 “율법외에 선한 것이 없다”라는 말
이 있다. 이런 관념에서 그를 깨우쳐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신앙으로 이끄시는 말씀일
것이다.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ㅇ살인 하지말라...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 5.6.7.8.9.계명.즉 둘째
돌비의 계명들로 인간에 관한 것이다. 마태에는 결론으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
랑하라”는 계명으로 맺는다. 본서에는 제10계 대신 “속여 취하지 말라”를 첨가하고
있다. 제10계를 반영 하면서도 위의 계명들의 결론적인 성격으로 보인다. 공관복음서는
다같이 제5계를 마지막에 둔다. 이 청년이 특히 이 계명에 불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
다(Bengbl). 그리고 여기 인륜에 관한 계명만을 제시하신 것은 첫째 돌비에 나타난
하나님께 대한 계명보다 중하기 때문애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Calvin).
20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ㅇso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 허위도 아니고 (다음절,예수께서 그를 보시며
사랑하신 것으로 보아), 예수의 진의를 파악한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종래 탄락하여
물러간 것으로 보아). 그는 일반 유대인의 과정을 �아 6세에서 율법을 공부하고,
또 준수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피상적인 범위에서 였고 율법의 참뜻을 안 것은
아니며 따라서 중심으로 준수한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ㅇ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 주의 깊게 응시하시며 사랑하신 것이다. 역시 마가 톡특한
묘사다. 예수께서는 진실된 구도자에 깊은 관심을 두시고 또 사랑 하시는 것이다.
ㅇ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 누가에는 “한가지 남은것”이라 하나 뜻은 같은 것이
다. 전절의“ 나지키었다이다”의 대귀가 된다. 랍비들의 기록에 카니나(Chanina)가
죽을 때 죽음의 천사에게 “네게 율법책을 가져와 거기 거룩한 것중에서 내가 미쳐 실
행치 못한 것이 있나 보아 달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부자 청년에게 부족한 한가
지는 율법이 아니라 재물이었다. 물론 그에게도 많은 부족이 있었겠으나 재물이 그에
게는 무상이었고 영생의 길을 가로 막는 치명적 상처였다. 그의 회의도 불안도 여기서
나왔고, 그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게 한것도 재물 때문이었다. 이 한가지 부족
은 사람을 따라 같이 않을 것이다. 이 한가지 죄를 발견하고 제거하지 못하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 “이는 충고가 아니라 명령 이었으며 ,강압적 이었으나 이 영혼의 성격
을 따른 개인 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수많은 수종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이 명령을 같
이주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재물을 소유하면서 온전한 자가 있을 것이고 모든 것
을 가난한자에게 주고도 온전치 못한 자도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명하신 것
은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줄것과, 예수를 따를 것 두가지였다. 중심문제는 후자
였으나 전자는 그조건 이었다. 전자를 실행하지 못하면 후자는 시작되지 않는 것이다.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ㅇ슬픈 기색을 띠고 - 마 16:3에는 하늘에(하늘에 얼굴을 흐리면)적용되었으나 여기서
는 그부자청년의 얼굴색을 묘사한다. 그는 결국 하나님이냐 재물이냐 (마6:24)는 선택
에 있어 후자를 택했고, 그 결과는 마음의 근심이었다. 만일 그가 예수의 말씀에 순종
하여 하나님을 택하였다면 마음의 기쁨과 평화를 얻었을 것이다. 왈드의상인 베드로
(Peter of Waldo. 1170-1217)는 이때 예수께서 부자 청년에게 명하신 “네게 있는
모든 것을 가난한자에게 주라...그리고 와서 나를 �으라”하신 말씀을 읽고 감
격하여 문자적으로 모든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리온의 성자가 되었다. 그
러나 여기 부자 청년이 근심하여 간 것은 그에게 아직 회개의 소망이 있는 표시가 될
것이다.(Cranfield)
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ㅇ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 본서의 특징어로 6회 나타난다. (3:5주참조)감정적 표정묘
사에 능숙한 마가의솜씨인 것이다.
ㅇ재물이 있는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도다 - 구약에서 부에대한 개념
은 상반적인 두가지 였다. 하나는 선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했고, 다른 하나는
가난한 자가 경건하고 부자는 불경건한 자로 지탄된 것이다. 첫째가 일반적 개념이었고
(제 2계의 성취로)둘째는 특수한 개념이었다. (합 1:4처럼) 하여튼 이런 구약적 배경에
비춰볼 때 그리스도의 말씀은 또 하나의 그리고 전연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신 것이다.
부자는 개인에 한하지 않고 사회나 시대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재물이 많은 부자
가 경건된 신앙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처럼 재물이 많은 시대나 사회 역시 신앙에서는
후퇴한다. 현재의 서구제국이나 미국의 경향이 그것을 말할 것이다. 또 부는 반드시 재
물에 한하지 않을 것이다. 지식이하 지위 등에 부한자들도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가기가 어려운 것이다.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ㅇ제자들이 그말씀에 놀라는지라 - 구약적 개념에 젖은 제자들은 부자에 대한 그리스도
의 새로운 견해에 더구나 부자에게 모든 것을 버리라는 조건이 너무 무거움으로 놀랐
을 것이다.
25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ㅇ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것이- 약대는 “밧줄”의 뜻이있고 바늘귀는 “바늘문”이라
불리우는 성의 작은 문으로 볼 수 있으므로 이를 (1)밧줄을 하늘에 궤는 것처럼 어려운
것 (2)약대가 바늘문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어려운 것등으로 조화하는 설명들이 있으나
수락되지 않는다. 이는 문자적이며 또 동양적 과장법으로 극히 어려운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랍비들이 인용한 바벨론 탈무드에 절대 불가능한 일을 “코끼리가 바늘구멍으
로 들어가는것”이란 말이 있다. 탈무드의 다른귀에 바늘귀는 두친구를 위해서는 좁지
않고, 온 세계도 두 원수를 위해서는 넓지 않다라는 말도 있다“또 코란경에는 “불경
건한 자에게는 하늘의 문이 닫혀 있을 것이고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 까지는 그는
거기 들어가지 못한다”라는 귀가 있다.
26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ㅇ제자들이 심히놀라 -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엄격해지고, 제자들의 놀람은 더욱 심해
�다. 누가에 의하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일반 군
중들에게서 나왔다. 제자들도 일반 군중도 다같이 예수의 엄격한 교훈에 놀랐을 것이
다. 회당을 지배하던 관원이며 따라서 일반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던 부자 청년의 구원이
그렇게 어렵다면 다른사람들이야 누가 감히 구원을 얻을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27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ㅇ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 구원론의 대강령이
다. 구원은 사람 편에 있지 않고 하나님 편에 있는 것이다. 사람의 노력이나 수양이나
각성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하신다. 그것은 부자의 구원에만 한하지 않는다.
부자도 하나님은 구원 하실 수 있고 가난한 자도 스스로 구원 하지는 못한다.
28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ㅇ보소서 우리가 - 두 낱말이 모두 강조적이다. 첫째는 감탄사며 둘째는 부자 청년과
대조되는 우리다, 역시 제자들의 대변자격인 베드로의 발언 이었다. 예수와 부자 청년
사이의 대화를 듣고 있던 베드로는 타락해 가는 부자 청년에 대해 저들은 예수의 요구
대로 행하였다는 자각에서 이렇게 감동적으로 발언한 것이다. 과연 제자들은 예수의 요
구하신 것처럼 모든 길을 버리고 예수를 �았다. (1:18. 20. 2:14). 이와같은
저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이 과연 확실한지를 보장 받고 싶었던 것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ㅇ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 3복음서에 모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귀시작하여 강조적이다. 누가에는 “하나님나라를 위하여”로 되어 있다.
결국예수. 복음. 하나님의 나라는 다같은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 버릴것에 대해
서도 누가는 “아내”를 첨가하고“전토”를 생략하나 뜻에는 차이가 없다. 마태는
“세상이 새롭게 되어.....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를 삽입시킨다.
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ㅇ금세에 있어...백배나, 내세에 영생을 - 마태나 누가에게는 “여러배”로 되어 있다.
본서의 백배도 그런 뜻이고 또 내용적인 의미에서 볼 것이다. (모친과 아내 등을 몇배
나 받지는 못할 것이므로). 본서의 특색은 “핍박을 겸하여 받고”에 있다. 성도들은
현세에서 축복을 받으나 늘 핍박을 각오하여야 한다. 정당한 수고가 없이 받은 축복은
마귀의 선물인 것이다(욥42:12-16).하여튼 예수께서는 버리라고 말하시고 백배나 주리
라고 보장하신다. 그것은 신령한 세계의 역설인 것이다. 이 역설을 체험치 못하면 주의
깊은 은총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ㅇ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고... - 마태에는 이 병행귀 외에 21:16에 다시 나타나 일종
의 격언조로 되어 있다. (1)전자는 베드로 이하 신도들후자는 그외 신도들(Gould,
Plummer, Cranfield), (2)유대인과 이방인(Clarke) (3)바리세인과 세리 (4)부자
와 가난한자들 등으로 해석된다. 첫째가 일반적인 견해다. 하여튼 이는 종말적원리요.
하나님의 세계의 순서다. 종말적 원리는 현세적 원리와는 상반되며, 하나님의 순서는
인간의 그것과는 모순된다. 이런 사실을 통해 신앙적 우월감에 잠긴 제자들을 경계하신
것이다.
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ㅇ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길에 - 아직 요단강 동편 베뢰아에 계시는 것인지(Bruce).
dlal 요단강 서편으로 건너 가셨는지(Meyer)는 밝혀지지 않으나 여리고에 가까운
지점까지 당도한 듯하다(46절). 이 여행의 목적지가 예루살렘인 것이 비로서 밝혀진다.
ㅇ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는 자들은 두려워 하더
라 - 감정묘사에 정밀한 본서의 특징이 여지없이 나타난 장면이다. 예루살렘의 지명과
더불어 예수의 수난을 향해 감연히 앞서가시는 예수의 자세는 엄숙했다. 그리고 이와같
이 엄숙한 주의 모습에서 심상치 않는 정세를 감지하면서 제자들은 놀라고 일반 추종자
들은 오히려 두려워한 것이었다.
ㅇ열두제자를 데리시고 -“곁으로.취한”것이다.놀라 예수에게서 멀어지는 제자들을 곁
으로 불러들이셔서 수난의 예고를 다시 주신 것이다.
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ㅇ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그들이 능욕하며 침�으며,채찍질하고 죽일것이니 -
수난의 장소가 예루살렘인 것이 비로소 밝혀진다. 그리고 수난의 예고도 처음 두 번에
비해 구체적이고 세밀하여 축자적으로 성취 되었던 것이었다. 예수의 고난은 대제사장
들과 서기관들 유대 유권자들이 주동이 되고 이를 이방인인 로마 정권자들의 힘을 빌어
모욕과 폭행을 가한 후에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그리고 3번의 예고에 빠짐없이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첨가하셨다. 그리스도의 수난이 승리로 �날 것을 확인 하신
것이다.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ㅇ야고보와 요한이 - 마태에는 그들의 어머니가 구한 것으로 되어있다. 아마 모자가 같이
말했을 것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처음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며 베드로와 더불어 특히
예수의 신임을 받은 제자였다. 또 그들의 어머니 살로메 (16:1)는 성모 마리아와 자매
간으로 믿어지고 있다. 이와같은 사실들이 이런 특청의 근거가 되었을지모른다 .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ㅇ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 그들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한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하였으나 예수께서 “무엇을 원하느냐”고 유도하시기 까지는
그 소원을 진술하지는 못하였다. 역시 양심의 가책을 느껴 머뭇거렸를 것이다.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ㅇ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 우의정과 좌의정의 자
리였다. 우편과 좌편은 왕과 가장 친근하고 왕 다음가는 영광의 자리였다. 베드로가 예수
께 모든 것을 버린 보상을 요구 했을때(28절) 예수께서는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리라(마19:28)하셨다. 그 말씀을 기억하면서 이런 요구를 했을 것이다.
또 메시야가 오시면 곧 지상에 왕국을 세우고 메시야 통치가 시작된다는 유대인의 일반
적 개념 이었다(행1:6). 예수께서 말씀하신 세상이 새롭게 되는 때는 종말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 종말 이전에 메시야의 고난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때 야고보 형제나 유대
인들의 오해는 종말적 메시야 왕국 이전에 있을 고난을 생각지 못한 것이 었다. 하여튼
야고보 형제의 요구는 “인간의 허무한 공명심을 비치는 밝은 거울 이었다(Calvin)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ㅇ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 근본적으로 말해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구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바로 알지 못하며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눅23:34) 자기의 구하는 것을 수 없는 것이다(롬8:26). 구체적으로 말해 이때
야고보 형제는 그들이 구한 우편과 좌편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곳은 두강도가
달린 십자가 들이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바라보면서 행
진 하시는데 저들은 왕의 보좌를 연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근본적인 착오에서 모든
견해나 구하는 것은 방향을 잃은 것이었다.
ㅇ나의 마시는 잔을 ...받는 세례를 - 구약에서 하나님의 총애도 뜻했으나(시 23:5,116
:13)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키는 경우도 많았다. (시75:8, 사51:17-23, 렘25:
15-28, 49:12, 51:7,겔23:31-34, 합2:16, 슥12:2).본문의 배경은 물론 후자다. <세례>는
본서에만 첨가된 것이다. 이 낱말의 동사형은 물이 넘치는 것이나 거리에 사람들이 쇄도
하는 것으로 넘치는 고난을 상징하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의 잔이나 세례는 다같이 그
의 받으실 고난을 상징한 것이다.
39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ㅇ할수 있나이다 - 이 자신에 넘치는 회답은 저들이 아직 예수의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
지 못한 증거였다. 그들의 오해는 두길로 추측 할 수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잔과 세례
를 영광으로 착각하고 이와 같이 혼연히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가령 그것을
고난의 잔으로 알았다 해도 메시야 왕국을 건설을 위한 충신들의 고난 정도로 알았을
것이고 십자가의 수치고 극심한 순교의 고난으로는 상상 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어느
편이든 저들은 예수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속단적으로 대답한 것이다.
ㅇ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 그리스도는 높고 다른 차원에서 그들의 대답을 긍4
정하신다. 이와같이 차원을 달리하면서 이상하게 진전된 문답을 관찰할 것이다. 과연 야
고보 형제가 장차 그리스도의 참뜻도 이해하게 되고 또 그뜻대로 그의 잔을 마시게 될
것을 예고하신 것이다. 본절에 의해 야고보와 요한이 다같이 초기에 순교하였다는 교회
의 오랜 전승이 성립 된 것이다. 야고보가 헤롯에 의해 조기의 순교한 것은 분명하나
(행12:21. 44년경)요한의 경우 그가 천수를 누리면서 도미시안 황제 때 밧모섬에 귀양가
서 계시록을 기록하고 100세가 지나 죽었다는 전설이 유력한 것이다. 순교만이 주의잔을
마시는 것이 아니며 주를 위한 이와같은 고난의 생애 역시 주의 잔을 마신 것이었다.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ㅇ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는지 - 마태는 보다 분명하게 :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 하셨든지 “라한다. 종말적인 메시야 왕국에서 메시야 의 좌우편에 앉을사람이 있을
것은 부정하시지 않는다. 다만 그 자리는 이제 새삼스러이 예수께서 주실것이 아니라 이
미 성부 하나님이 작정하신 그 사람이 얻을 것을 밝히신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에 복종하는것 만이 성도들이 취할 태도인 것이다.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ㅇ열 제자가 듣고...분히 여기거늘 - 그들도 야고보 형제와 꼭같은 공명심이 있었고 그
러므로 시기에 차서 분히 여길 것이다. 두 사람이 예수의 좌우편 같은 가장좋은 지위를
독점하게 되면 저들은 그 자리를 바라보지 못하므로 두사람에 대해 노여워한 것이다. 교
회는 언제나 이와같은 불순한 욕망 때문에 분규에 빠지는 것이다.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ㅇ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으로 주관하고....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고 -
전자는“주로 행세하는 자로 왕을 말하고 후자는 ”권력을 행사하는 방백급의 중신을 가
리킨다. 세속적 체계에 있어서는 왕이 백성을 임으로 주관하여 종으로 삼고 , 왕의 권력
을 맡은 방백들 역시 백성들 위에 세도를 부리는 것이 상징적 일이가. 그러나 교회력 체
계에 있어서는 그럴수는 없는 것이다. 이하 교훈은 야고보 형제에 대해 분히 여기는 제
자들에게 전반적으로 주신 것이다.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ㅇ크고자 하는 자는....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종이 되리라 - 일
종의 히브리 용법으로 같은 내용을 반복함으로 뜻을 강조하는 것이다. 같은 교훈은 제
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는 다툼이 일어 났을 때 이미 주신바 되었다(9:35, 36, 눅 22:25-
27)세속적 질서와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같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정반대이다. 남의 으
뜸이 되고 위대해지는 자는 오히려 남을 섬기는 종의 자세에 서는 것이다.
ㅇ섬기는자 종 - 전자는“집사”로 번역되었고 (딤전3:8)후자는 당시의 노예제도에서 이
해 되어야 한다(빌1:1). 전자는 일의 성격에서, 후자는 일하는 자의 신분에서의 표현이
나 결국 같은 뜻이다. 바울은 자신을 복음의 일꾼(섬기는자)으로도 (고전3:5, 엡3:7),
그리스도의 종으로 (롬 1:1) 불렀다.
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ㅇ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여 섬기려하고 - 접속사 “왜냐하면
( γαρ)으로 시작하여 전절의 의미를 설명한다. 제자들이 섬기는 자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할 것은 스승되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섬기기 위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과연 그리
스도의 전생애는 철저히 섬기는 생애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생명까지 바쳐 인류를
섬기시고 구속하신 것이다. 그것은 모든 믿는자들에게 최고의 모본이 되었다.
ㅇ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본절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논한
중요한 구절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근거로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가장
중요한 구절로도 취급된다. 더구나 본절이 복음서의 일부로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이라
는데 그 의의는 큰 것이다. 우선 본 구절의 본문 비평적인 문제부터 취급해야 할 것이
다. 여러 학자들은 본절의 진정성을 거부하여 왔다. 그 근거로서는 (1)본문이 전후 내
용과 조화가 되지 않는 것 (2)대속물이란 낱말은 이곳 이외는 신약 전체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 (3)인자의 온 것은 이란 그리스도의 생애가 �난 후를 암시하는 것 (4)사
상적 내용은 바울의 영향이 현저한 것 등이다. 그러므로 대체로 눅 22:27(나는 섬기는자
로 너희 중에 있노라)가 원형이었고 본 귀절은 후대의 신학적 첨가라는 결론이 주어진
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중요한 발언은 언제나 어떤 기회를 따라 지나가는 말씀으로 주
어졌다는 사실에 비추어 본문의 위치를 의심할 필요도 없을 듯하다.
ㅇ대속물 - 가장 중요한 구절의 가장 중요한 낱말이다. 신약에서 이곳에서 (마태의 병행
귀와 더부어)한 번만 나타나고 바울 서신에는 합성형이 한 번(딤전 2:6)보인다. 이 낱말
의 동사형 대속함은 3회(눅 24:21, 딛 2:14, 벧전 1:18). 대속물을 주고 성취된 사실인
“대속”이 역시 3회(눅 1:68, 2:38, 히 9:12)나타난다. 이 낱말의 어근은 “푼다”이며
구약의 제사 법전에서 출발하였다. 즉 (1)이스라엘 남자들이 바쳤던 반 세겔의 생명의
속전(출 30:12). (2)소가 사람을 죽였을 때 지불한 은 30세겔의 속전(출 21:30). (3)처
음난 아들을 위해 바친 대속전(민 18:15) (4)팔린 친족을 속량하기 위해 지불한 속전(레
25:47-53) (5)팔린 토지를 무르기 위해 친족이 지불한 대가(레 25:25-27)등의 배경을
고찰 할 수있다. 이 낱말의 고전 그릭의 배경은 보통 복수로 사용되고 포로나 노예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속전을 뜻했다. 이와같은 구약적 및 고전 그릭의 배경 아래 이 낱말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설명하는 소중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즉 그가 죄와 죽음의 노예
상태에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지불하신 보혈의 값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스도
의 대속은 교회역사를 통해 논의되어 (1)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하나님의 공의에 만족을
주었다. (2)마귀에게 인간의 죄값을 지불하셨다. (3)단지 인간에게 도덕적 감화를 주었
다. 등의 학설로 발전되었다. 3번은 속죄론과 방향이 엇긋난 것이다. 2번에 있어 하나님
은 인류의 범죄와 구원에 관해 마귀를 징벌하실 일이지 그에게 값을 치루셔야 할 의무는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죄값을 지불하신 대상은 범죄한 인간은 죽으리라(창 2:17)는
하나님 스스로 정하신 법도이다. 결국 이와같은 하나님의 공의를 그리스도의 죽음이 만
족하게 성취하므로 인류를 죄의 결과인 죽음에서 구원하신 것이다.
ㅇ많은 사람의 -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 ”다.여기 역시 전치사 중요한 것으로 “을 위
해On behaif"가 아니라 ”의 자리에서 (대신하여)in the Place of"다. 즉 이와
동의어인 ΰπέρ“단수이”...의 유익을 위한 것“을 표시함에 대해 이
는 엄격히 남의 자리에서 그를 대신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 여기<망은 사람>은
오히려 “모든사람”all“으로 이해된다. 딤전 2:6(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
전으로 주셨으니 )에는 모든 사람으로 되어 있으며 그외 명사나 전치사등도 본절과 대
조가 되는 것이 주목된다. 아마 본절은 사 53:11(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의 반영으로 보인다.
46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ㅇ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 갈릴리를 떠나 요단강 동편 베뢰아 지방을 우회하시고 이제
요단강을 건너 강서편의 도시요 예루살렘의 관문인 여리고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당시
북방 갈릴리인의 일반적 순례길이기도 했다. 여리고는 지중해 면에서 2500미터나 낮은
곳이며 따라서 해발 762미터의 고지인 예루살렘에서는 내림길이 있다. 사해 북쪽 요단강
하류의 서편에 위치한 비옥한 곳이며 현재는 엘리하Er -Riha라 불리운다. 일찍부터
주민이 많아 융성한 산업 도시였고 헤롯대왕이 궁전을 건축하여 이 도시를 미화시켰고
이곳에서 사망하였다. 이스라엘 역사에는 여호수아 때부터 관련되었고 지금도 구도시의
유적에는 여호수아가 파괴한 성곽이 남아있다. 기후는 아열대성이다.
ㅇ디메오의 아들인 거지 소경 바디메오 - 그의 이름을 밝히는 것은 본서 뿐이다. “바디
메오”역시“디메오의 아들”을 뜻함으로 결국 겹말이 된셈이다. 히브리어를 알지 못한
이방인 수신자를 위해 주해적 설명을 부친 것이다. 그의 부친 디메오는 당시 여리고에
알려진 인물 같다.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ㅇ나사렛 예수시란.....다윗의 자손 예수여 - 본서에는 흔하지 않는 이름이다. 전자는
1:24이후 처음이고, 후자는 이곳에만 나타난다(48절 및 간접적으로는 12:35). 전자는
비하하신 주의 인성을 가리키고 (요 1:46), 후자는 바로 메시야의 별명이다. 유대인은
메시야를 다윗왕의 재현으로 생각하고 그의 나타나심으로 사방의 적들을 정복하여 다
윗왕국을 재건 하는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일반군중이 그에게 나사렛 예수라고 가르
쳐 줄때에 즉각 그를 다윗의 자손이라 부른데 이 소경의 위대한 신앙이 엿보인 것이다.
아마 그는 일찍부터 예수에 관해 들었고 이 예수가 바로 메시야이신 것도 믿어 그를 만
나기를 소원하고 있었을 것이다.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ㅇ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 짖궂게 돈을 구하는 것은
거지의 본성이었고 또 이런 거지를 무조건 제지하는 것은 일반의 군중 심리였다. 그러나
입전 만은 사정이 달랐다. 거지는 상대를 바로 알았고 또 바른 것을 구했고 군중은 그런
것을 모르고 무조건 제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지는 굴복하지 않고 더욱 소리지른
것이다. 신앙에는 언제나 장해가 있고 그 장해를 극복하므로 신앙은 성숙해 지는 것이
다.“군중이 이적 행사를 막기 위해 거지를 제지한 것은 부당한 것이다. 저들은 거지의
성급한”다윗의 자손을 제지했고 그것을 입성하실 때까지(11:10) 마 21:15. 보존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Gould) 아마 Gould의 견해역시 정당하게는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
때 군중은 아직 예수의 메시야성(다윗의 자손)에 명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ㅇ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른다 - 같은 동사의 세 변화가 주목된다. 이 부근의 묘사는 본서에 독특하고 또
정밀하다. 목격자의 증언을 받아 거룩한 본서의 특징인 것이다. 군중은 이제 약간의 동
정을 나타내어 거소경을 도와 예수께 나아가게 한 것이다. 하여튼 예수의 관심은 약한
자, 그리고 진실된 구도자에게 쏠리신 것이다.
50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ㅇ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 역시 본서 만이 간직하는 생생한 묘사다. 소경은 기
쁨과 열정 때문에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예수께 나와왔다. 천재 일우의기회를 잃을수
는 없었던 것이다. 이런 순수한 구도자를 주는 또한 환영 하신다.
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ㅇ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보기를 원하나이다 - 직접적 질문에 솔직한 회답
이었다. 예수께서는 이적을 행하시기 전에 흔히 이와같은 질문을 하셨다(5:9, 30, 6:38
9:21).병자에게 용기를 주어 신앙을 고백을 시키시려는 것이었다. 소경의 회답은 솔직하
고 근본적이었다. 그는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처럼 돈을 구하지는 않았다. (행3:2). 그리
스도에게 우리는 근본적 해결을 구해야한다.
ㅇ선생님이여 - 이곳과 요20:16(부활 후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께 부른)에만 나타나며,
선생에 대한 최고 존칭어다. 일반적인 용어 “랍비”(9:5, 요1:38).는 “나의큰자”의
뜻으로“선생”을 가리키나 이는 “나의 증인, 또는 나의 선생”을 뜻한다. 앞선“다윗
의 자손이여” 와 더불어 칭호에서도 이 소경 거지의 큰 믿음이 보인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ㅇ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 5:34주 참조.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 흔히 하
신 말씀 이었다.(마 7:50, 8:48, 9:22, 17:19, 18:42 등). 그리스도의 이적적 권능을
유도하는 것은 믿음이다. 본문의 경우 소경의 믿음은 그의 간곡한 태도와 메시야적 칭
호를 부른데 있었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 소경이 고침을 받은 후 예수를 쫓는 것이 특
기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받는자는 주의 뒤를 따라 살 의무가 있는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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