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마가복음

[스크랩] 마가복음 (7 : 1~37)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8:49
마가복음 7장


1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ㅇ바리새인들...예루살렘에서 와서 - 본절은 시간. 장소의 배경 설명에 충실
한 마가의 독특한 문장 기법과는 조금 예외적으로 전장(6장)과의 아무런 관련
성도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또 이야기의 배경인 장소에 대한 언급도 없다.
다만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온 중앙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중 몇 사람이
예수를 찾아옴으로써 본 사건이 시작되는 것으로 기록한다. 그런데 여기서 장
소는 갈릴리의 가버나옴지방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왜냐하면 그곳이
예수의 주(主)활동 무대였고 또 중앙에서 내려온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쉽게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은 갈릴리선교 기간 중에 발생
한 것이라 단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중앙에서 지
방까지 예수를 찾아왔는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된다. (1) 중앙에서 그들이 내려
온 것은 지방의 율법학자들이 요청한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유는 예
수의 열성적인 활동과 민중들 사이에 폭발적으로 높아가는 예수의 인기에 대
한 불안 때문에 중앙의 권위 있는 학자들을 초청해 예수에 대한 열기를 식혀
보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예루살렘에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독자적 판단에 따라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의
활동은 사회.정치적으로든, 종교적으로든 굉장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고 특
히 기적의 행위나 죄사함을 선언하는 행위는 종교적 전통에 대한 중대한 도전
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소문으로 전해오는 예
수의 도전적 행위를 직접 살피고 확인하여 대책을 세우기 위하여 몇 사람의 대
표를 파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 앞에 언급한 두 가지의 가능성 모두 수용
하는 것이다. 즉 갈릴리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예수의 활동에 대한 파문이
그들의 전통과 종교적 질서까지 위협한다고 판단하여 그 대책으로서 증앙의 권
위 있는 학자를 파견하여 조사하고 예수와의 직접적인 논쟁을 통해 파문을 진
정시키려 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들을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중앙에서 파견된 그들의 소임은 단순히 예수의 활동에 대한 피상적인 조사였다
기 보다 오히려 예수의 권위와 인기를 일구에 무너뜨릴 수 있는 모함(謀陷)의
구실을 마련하는 것이었다고 보겠다. 사실 당시 전통적인 유대주의와 예수 사
이에는 심각한 갈등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따라서 본문의 조사 단원들은 편
견과 적의로 가득 찬 눈으로 예수와 그 일행의 일거수 일투족을 숨죽여 살피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이와 비슷한 상황은 3:22에서 이미 한 번 발생한 적이
있다.                     

2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ㅇ부정한 손...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 중앙에서 내려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이 예수에게 온 뒤 약간의 시간이 경과된 것 같다. 왜냐하면 앞 절에서 '모였
다가'로 문장이 끝나 시간 차의 여운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와 제자들의 활동을 관찰하다가 문제가 될 수 있는 결정적 증거를 이제 포
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문제의 초점은 '부정한 손. 곧 씻지 않은 손으
로 떡을 먹는 행위'였다. 여기서 '부정한 손' 과 '씻지 않은 손'이 동등한 의
미로서 표현되고 있는데, 후자는 전자의 설명적 첨가어라 할 수 있다. 이는 이
방인(로마)를 위해 복음서를 기록했던 마가의 독자들에 대한 친절한 배려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부정하다'라는 말은  종교적인 의미에서 의식적(意識的)부정
(不淨)을 말하는 것이고 '씻지 않은 손'은 그 부정한 이유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들 조상이 정한 결례 의식을 거치지 않아 성결에 이르지못한 '부정한'(코이
나이스, '보통', '일반'을 의미) 일반 세상의 손을 가리킨다. 사실 중근동 지
방의 식사 예법은 주로 손사용하며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받은
이스라엘에서는 이 손 씻는 일이 단지 위생적 측면에서 보다 오히려 의식적 측
면에서 더욱 강조되었다. 한편 이스라엘에 있어서 위생적 부결이 종교적 부정
으로 공식 율법화된 것은 출애굽 당시의 일이었다('월경하는 여인'. 레 15:19-
31;'시체를 만지는 것',레 21:11;민 19:13;'문등병자', 레 13:3, 44-46;14:
44-57 등). 이와 같은 구분은 사람, 짐승, 물건, 일 등에 있어서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이분법적 종교 의식 속에서 나온 것이다. 특히
본문에 언급된 떡을 먹을 때 손을 씻는 관습은 모세의 율법에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제사장의 제의적 관례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미쉬나(Mishnah)의 한부분 전체가(Tohoroth, 'cleanness')
바로 이 '정결'의 문제를 논하고 있음을 볼 때 유대인들의 의식적 정결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점에서 예루살
렘에서 파견된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결례를 행하지 않고 식사를 한
것을 가만히 주시하면서 그들을 부정한 자로 단죄한 것이었다. 한편 혹자
(Swete)에 따르면 이때 제자들이 먹었던 음식은 지난 번 벱새다 율리아스에서
5병 2어의 기적후에 거둬들인 12광주리에 담겨 있었던 것이라는 재미있는 견해
를 제시하고 있다.

3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ㅇ괄호안에 묶여 있는 3, 4절은 유대인들의 전통과 관례에 전혀 생소한 이방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마가가 친절히 설명해 놓은 해설구이다.
ㅇ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 여기서 먼저 '모든 유대인들'이란 특정 계
층의 종교 지도자들을 제외한 일반 유대 백성들을 가리킨다. 한편 종교걱 특권
을 누리며 남다른 우월 의식을 지니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일반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종교적 규범준수와 각종 규제 조항들을 가르치며, 지키게 하는등의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었다.
ㅇ장로들의 유전(遺傳) - 마가는 제자들이 손을 씻지않고 식사하는 것이 왜 문
제가 되는지에 대해, 그것이 유대적 전통 속에서 전승되어온 것이기 때문이라
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장로' 혤라어로 '프레스뷔테로스'인데, '나
이 많은 사람' 또는 '조상' 등의 의미와 함께 당시 유대인들의 지도자인 지방
의회 의원(눅 7:3)이나 '산헤드린'이라고 불리우는 '예루살렘' 최고회의 회원
을 지칭하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또는 권위 있는 율법교사와 종교 지도자
를 지칭하기도 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공동번역 성서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조상'으로 번역하여 이해하는 것이 문맥상 적절하다고 본다. 그리고 '유전'
(텐 파라도)이란 말은 '...로부터 손으로 건네주다'는 뜻의 '파라디레미'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는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문 율법(토라)뿐 아
니라 구전 율법을 함께 전해 주셨는데, 그 구전 율법이 하나님에게서 모세, 그
리고 아론, 기타 자손들에게 순서대로 전해졌다고 믿는 유대인들의 신앙을 반
영한 말이다. 결론적으로 이'유전'은 유대인들의 조상 때부터 구두로 전승되어
온 행위법 내지는 각종 판례법을 가리킨다고 보겠다. 사실 유대인들의 관습은
이러한 구전율법과 긴밀한 관계 속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 조상의 전통에 관
한 깊은 관심과 구체적인 체계화 작업은 바벧론 포로 시대를 거치면서 산헤드
린의 모체였던 대 회당(Great Synagogue)과 더불어 점차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 전통들은 후대에 서기관들에 의해서 법적인 권위로 높여졌고 '구전
율법'이라는 말처럼 성문화된 율법의 권위와 맞먹을 정도로 종교지도자들에 의
해 강조되었다. 이것은 A.D. 200년 경에 일차 집대성 작업이 이뤄졌으며 그러
한 작업은 A.D. 800년까지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실제작업은 B.C. 300-
A.D. 800년 사이의 긴 기간이 소요됨). 따라서 예수 당시에는 이러한 유전들
이 대개 구전의 형태로 존속되어오고 있었다. 이 유전의 목적은 인간 생활의
유익에 관심두기보다는 인간을 규제, 억압하는데 더 큰 관심을 두었다. 실로
성문 율법은 원칙론적 입장에 서서 특수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듯하지
만 유전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문제들에게까지 분명한 지침을 내려주었다. 그리
고 위대한 랍비들이 만들어 반포했던 수많은 유전들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
로 전해지면서 더 큰 권위와 함께 좀더 강력한 구속력을 지니게 되었고 심지어
는 성경의 권위를 능가하기도 하였다. 한편 '장로들의 유전'에 관한 좀더 자세
한 내용은 본장 주제 강해 '탈무드의 이해'란과 마 15 :2의 주석을 참조하라.
ㅇ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 여기서 '부지런히'라는 말은 휄
라어 '퓌그메'의 번역인데 해석하기 매우 어려워 어떤 영역본(RSV)에서는 번역
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한 번역으로서 '꼭 쥔주먹'. '팔뚝까지의 손으로',
'펼쳤다 접었다 하는 손', '물을 손으로 잔뜩 움켜쥔 상태' 등의 다양한 견해
가 있다. 뿐만 아니라 본문의 읽기를 아예 '퓌크나' 또는 '퓌크노스' 등으로
변경하며 '가끔', '더 자주'란 뚱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사실 라틴 벌게잇
(Vulgate)역에서 이러한 변형을 따르고 있다(crebro,'빈번히'란 뜻).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글 개역성경의 번역과 같이 '부지런히'로 해석한 데도
있다(Syriac Peshito Version). 어째든 이러한 여러 견해들을 통해
추론해 볼 때 유대인들의 결례로서 행하는 손씻음은 양손을 주먹으로 꽉 뀌었
다 폈다 하면서 팔꿈치까지를 물로 씻어내거나 양손을 부지런히 잽싼 동작으
로 부벼대어 씻는 장면을 연상할 수 있다. 특히 주먹을 꽉 쥐는 행위는 어떤
굳은 의지와 힘과 활발함올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Pulpit Commentary). 실로 그들에게는 식사 때마다 꼬박꼬박 부지런
히 씻되 매우 깨끗하게 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있음을 볼 수있다. 그리고 뒤이
어 나오는 '먹지 아니하며'라는 말로 보아 그들이 얼마나 그 관습을 철저하게
지켰는지 알 수 있다.   

4 또 시장에서 돌아 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ㅇ시장에서 돌아와서는 - 여기서는 그들의 생활 습관 속에 있는 정결에 관한
의식(儀式)을 보여 주고 있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시장'은 부정한 곳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시장이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
고 혼잡한 곳에서 부정한 여러 사람들과 접촉 가능한 대중적 장소이기 때문에
불결해지기 쉽다는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즉 유대인들 시장에서 이방인
들이나 심지어는 율법 규정을 준수하지 않은 유대인들과 흑시 접촉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의식적 정결에 힘썼던 것이다.
ㅇ물을 뿌리지 않으면 - 이 말은 '배티손타이'라는 훼라어의 번역인데, '씻
다', '적시다'라는 뜻인 '배티조'의 복수 3인칭 중간태로서 번역하면 '그들
자신을 씻다'가 된다. 때문에 '물을 뿌린다'는 것을 목욕을 하거나 물에 몸을
잠그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즉 '배티조'는 물에 담그고 적신다는 뜻과 씻는다
는 뜻을 갖고 있으므로 오히려 목욕하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
다. 물론 이것을 세례와 침례의 차이를 판가름하는 기준으로 삼아야 할 필요
는 없다. 어쨌든 혹자(Meyer)는 본문의 점층법적 표현을 강조하면서 '유대
인은 먹기 전에 항상 손을 씻었다. 그리고 그들은 시장에서 돌아와서 먹기 전
에는 항상 몸을 씻었다'고 그 의미를 명확히 표현했다. 물론 이 모든 행위늘
그들이 종교적 부정을 탈피하기위한 의식적 행동이었다. 실로 그들은 전인격
적인 거듭남이나 내면적 자기 성찰보다 이러한 겉으로 드러난 의식적 정결에
더 큰 종교적 가치를 두었던 것이다.
ㅇ잔과 주발(周鉢)과 놋그룻을 씻음이러라 - 마간는 음식먹을 때 사용하는 식
기들까지 씻는 철거한 관습을 소개하면서 그들의 정결 관습에 대한 철저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여기서 '잔'(포테리온)은 음료를 마시는 그릇을, '주발'
(크세테스)이란 로마인들의 액체를 재는 도구 또는 작은 그릇, 항아리 등을 
뜻하며,'놋그릇'(칼키온)은 구리로 제작된 각종 용기들로서 주로 취사 도구를
가리킨다. 그런데 탈무드(Talmud)에 따르면 이러한 도구들은 주로 이방인
들에게 구입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정결례가 요구된다고 한다. 한편 수리아
사본 등에서는 위의 세 종류 이외에 '침상'(클리논)이라는 말을 첨가하고 있
다. 만약 이러한 첨가가 마가의 본 의도를 그르치기 않는다면 '씻는다'는 뜻
의 훼라어 '배티스무스'의 활용도는 상당히 광범위하게 된다. 즉 여기 '씻는
다'는 말은 물에 완전히 잠그다는 뜻 외에 단순히 잠그지 않고 '씻어낸다',
'닦는다'는 등의 의미로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의 정결례는 다양하
게 이뤄졌음을 짐작해 볼수 있다.  

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ㅇ예수께 묻되 - 여기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문제 제기가 시작된다. 문
제의 내용은 예수의 제자들이 '장로들의 유전', 즉 조상들의 전통에 따른 정
결례를 어겼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이 묻는 것은 이유를 알고 싶어 묻는 것
이 아니고 이미 제자들의 행위가 중대한 잘못을 범했다는 전제아래 제자들의
행위에 대혜 정죄하고 그 책임을 예수에게 추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
에서 볼 때 첫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정결 관습을 철저하게 지킨다는 자
부심과 아울러 자신들이 그 전통적 관례의 파수꾼임을 자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예수를 집중 공격함으로, 제자들의 부정한 행위가 종교적이건 비
종교적이건 모두 스승에게 그 책임이 물어져야 함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사
실 그들은 제자들을 책잡기 위해 보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스승인 예수를
종교, 정치적으로 매장시키기 위해 보내졌었다.                                    

6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ㅇ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잘 예언하였도다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제
기한 문제에 대하여 예수의 첫번째 응답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다(사
29:13). 실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 일행을 책잡기 위해 그들의 전통적 유전
을 세웠지만 비수는 하나님의 권위있는 말씀으로 응대하셨다. 따라서 이러한
응대자체가 하나님의 법을 도외시하는 그들 유대 지도사들에 대한 정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예수는 그들을 향해 '외식(外食)하는 자'라고 부르고
있다. 외식한다는 말은 예수가 자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지칭하여 부르
는 말로서 마 23장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뜻은 원래 휄라어 '휘
포크리테스'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자신의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무대에 서
는 '연극 배우'라는뜻으로 결국 속과 겉이 다른, 이중 인격자 또는 위선자란
의미이다. 이것은 그들이 주장하고있는 주장과 현실적 행동 사이에 있는 객관
적 불일치를 비판하는 말이다. 그리고 본문의 '잘  예언하였도다'에서 '잘'
(칼로스)이란'적확하다', '우수하다'는 뜻으로서, 9절에서도 한번 언급되는데,
그곳에서는 일종의 비아냥거림조로 사용되고 있다.
ㅇ이 백성이...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 예수께서 인용하신 사 29:13은 70인
역(LXX)의 기계적 인용이 아니라 당신의 의도에 따라 선별한 자의적 인용이
다. 따라서 희브리 본문(맛소라 사본)과는 그 의미상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으나 본질적으로는 그 의미하는 바가 동일하다. 즉 그들은 비록 각종 유전
들과 전통들을 철저히 고수하지만 실은 진실과 경건의 내적 눙력이 결여된
위선자들이었다(딤후 3:5). 실로 그들의 외적인 경건은 거짓이었는데, 그 까
닭은 '그들이 종교적 경건의 진정한 대상이신 분에게 그들의 삶 진체를 온전
히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다'(Anderson). 실로 그들은 형식적 신앙 생활
로 인해 B.C. 7C경 이사야에게서 책망받았던 그들 조상처럼 입술만의 신앙
고백과 위선적인 생활 및 참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채 거듭거듭 수행하던 형
식 위주의 예배 의식 등으로 하나님의 뜻에서 점점멀어져 갔던 것이다. 한편
예수의 이 말씀은 이사야가 원래 그의 글을 기록할 때 A.D. 1C에 존재할 서
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 시대의 종교 지
도자들에 대한 이사야의 비판이 예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에게도 해당된다는
의미이다(마 15:7 주석 참조).        

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ㅇ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 여기서 예수는 소위 '구전 율법'이라고 하
는 '장로들의 유전'을 사람이 만든 계명이라고 규정한다. 이'사람의 게명'은
8절에서도 '하나님의 계명'과 대조를 이루어 강조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바
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장로들의 유전'은 사람이 작위적
(作爲的)으로 만든 것으로서 그 권위에 절대성이 없음을 선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장로들의 유전이 생겨난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 율법만으로
는 방대하고 복잡한 인생 제반사에 대한 구체적 지침을 마련하기 어려웠기 때
문이었다고 볼 수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 목적과 계명의 핵심에서 이탈된
개개의 구체적인 규범들은 맹목적 순종을 요구하는 허망한 것으로 변질될 소
지가 다분하였으며, 특별히 조상들의 권위와 민족적 우월감에 도취되었던 유
대인들의 심성으로는 그러한 위험에 필연적으로 빠질 수밖예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예수께서 지적하신 바 사람의 계명은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라는
말에 의해 그 권위가 완전히 부정된다. 즉 예수께서는 그들이 율법처럼 믿고
지켜 왔던 정결 의식이 결국 하나님 앞에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는 헛된
것이 되었다는 것을 말함으로써(마 15:9참조) 그것을 지키며 자랑하거나, 그
것을 지킴으로써 거록하게 되었다는 그들의 그릇된 자만심을 철저히 해부(解
剖)하셨던 깃이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그러한 자만심을 가지고, 정결 의식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을 느끼며 또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던 종교 지도자들의 행동과 그 권위 및 그 가르침의 내용 등을 모
조리 무시하고 거부하신 것이다. 결국 이 말씀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경배가 보이는 사람의 규범에 의해 무시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신의 위선적인 종고 형태를 찬양하는 지도자에 대한 예수의 준엄한 심
판이라 할 수 있다. 

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ㅇ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 앞절에서 언급한 '사람의 계명'과 대조되고 있으
며, '버리고'와 다음에 나오는 '지키느니라'가 대비를 이루어 예수의 비판을
명료하게 보여 준다.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의 계명이란 인간들에게 전달된 하
나님의 직접적인 메시지로서, 이 메시지는 인간의 그 어떤 인위적 규범보다
우위에서며 또 모든 인간 활동은 그 메시지에 온전히 귀결(歸結)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순환관계를 무시한 일체의 규범과 판단은 철저히 인간 중심의
것이 될 수밖에 없으며, 거기에는 형식과 위선만이 남을 뿐이다. 한편 예수께
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계명'은 19:18과 신 6:5 등에서 가장 잘 드러나고 있
는데, 그것은 '네 마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
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12:28-34). 결국 예수
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배척한 것으로  천명
하면서 오히려 그들이 종교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법을 어긴 자들임을 밝히고
계신 것이다. 당시 그들이 갖고있던 철저한 하나님 신앙과 종교적 율법이 지
배하는 사회에서는 이 같은 표현이 체제 도전적인 발언으로 들려지기에 충분
할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예수는 단순한 체제 도전적인 저항을 하신 것이 아
니라 모든 율법적인 관습이 하나님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한 봉사가 되어야 함
을 천명하심과 아울러 그러한 관습이나 율법들이 도리어 하나님에 대한 배신
이나 이웃에 대한 고통으로 나타날 때에는 단호하게 도전하고 맞서 싸운 것이
다.
ㅇ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 앞에서 말한 하나님의 게명을 '버리고'와 대립
되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계명보다 인간의 계명을 더 중요하게
여김을 비판하고 있다. 즉 그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지 못하고 오
직 인간의 말과 인간의 칭찬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9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ㅇ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 여기서는 앞절에서 언급된 문장의  어순을
바꾸어 다시한 번 그들이 중요시하는 정결 관습이 사람이만든 것, 곧 절대적
인 권위를 지니지 못하는 것으로서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구속력을 가질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관습이 하나님의 계명과 대립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유대인들의 유전은 원래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침해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율법을 에워싸는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
러나 실제로는 유전이 도리어 율법을  왜곡하고, 경화(硬化)시키며, 하나님의
뜻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편 이 구절은 9-13절에서 말하고 있는
유전들과 하나님의 계명이 상충되는 구체적 예증 제시를 위한 문제 제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예수는 단정적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행위를, 유
전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ㅇ잘 저버리는도다 - 이 구절은 6절에서 언급된 '잘 예언하였도다'와 대응되
는 표현으로서 그릇된 종교라서 집착해 있는 유대 지도자들의 잘못을 비웃는
독설적 발언이다. 즉 이말은 그들이 너무 쉽게, 간단히 하나님의 게명을 포기
한다는 뜻이다. 사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전통이 서
로 충돌될 때에는 거침없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따랐다.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의 율법을 피해가는 수단으로서 사람의 전통이 동원되기
도 했다. 이러한 모습은 사람 앞에 경건해지려는 위선자들의 특징이다.   

10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ㅇ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 예수는 앞절에서 언급한내용, 즉사람의
전통을 따르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언행을 구체적 예증을 통해서 반박하기 위해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믿
고 있는 모세의 계명을 예로 들고 있다. 즉 예수는 그들의 주장에 내적 모순
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의 말과 그들의 믿음을 대비시키는 방법을 사용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구절은 출 20:12과 신 5:16에 나오는 십계명의 제 5계
명으로서 예수는 70인역(LXX)과 히브리성경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이
는 바로뒤에 이어지는 내용과 동일한 강조점을 두고 있으나 후자가 효(孝)에
대한 소극적.강압적  명령이라면 본문은 적극적이고 당위적인 명령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이 이르셨으되'(마 15:4)라고 본 내
용의 초두를 장식하고 있어 본문의 '모세는...하라하고'와 차이를 보이고 있
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원저자(하나님)와 그 저자의 뜻을 받들어 사람들에
게 반포한 기자(모세)라는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뿐 두 표현은 공히 '하나님
의 거룩한 뜻'이라는 신적 권위를 내포한 말이라 할수 있다.
ㅇ아비와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 이 구절은 제 5계명(출 20
:12)을 보충 설명한 규례로서 출 21:17에 나오는 '효'를 주제로 한 저주문이
다. 이는 맛소라 사본과 거의 동일한 내용을 형성하고 있다. 본문은 앞에서
언급한 부모 공경에 대한 계명과 부모에 대한 불공경의 대가를 극명하게 대조
시켜 강조하고 있다. 즉 비록 부모를 '훼방'(욕하고 저주하는 것)하는 것조차
하나님께서 극도로 싫어하시며 심지어 사형까지 시키도록 명하셨다는것을 천
명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에 대한 범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점을 강
조하여 간접적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유전을 통한 불효를(11-13절) 죄
로 평가하고 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부모 공경을 통해 보이지
않는 당신을 섬기는 법을 가르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11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ㅇ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 - 직역하면 '나로 인해 당신이 유익을 얻게 될 그
무엇'이란 뜻이다. 즉 자식이 부모에게 봉양하고자 할 때 그것이 그 부모에게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는어떤 선물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말은 부모를 농락하
고 속이는 파렴치한 변명임을 곧 알게된다. 고르반(코르반). 이 말은 히브리어
'코르반'의 음역(音譯)으로서 구약 시대의 제사장 전승을 통해 그 뜻을 알수
있는데, 그 뜻은 '하나님께 드림' 곧 '하나님께 바치는 물건'을 가리키는 매우
신앙적 의미였었다(레 2:1,4,12). 마가는 본서의 이방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서 이러한 음역과 더불어 설명구까지 첨가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말을 헬
라어로 번역할 때는 '도론' 즉 '선물'이라는 뜻으로 표기한다. 또 본문 내용과
비슷한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유대인의 납골당(納骨堂)의 비문(碑文)에서 같은
형태의 용법이 발견되었다. 즉 '...하나님께 드린 예물...'이라는 표현이다
(J.A. Fitzmyer, Derrett). 물론 예수 당시의 이 말이 순전히 하나님
께 예물을 드리기위해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장로들의 유전'을 따르는
사람들이 부모에게 해야 할 봉양의무를 하나님께 대신했다는 변명의 뜻으로 사
용되기도 하였다. 즉 장로들의 유전은 자식이 부모에게 드려야 하는 의무를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말하기만 하면 더 이상 부모에게 할
의무가 없어진다고 가르쳤다. 때문에 그들은 부모 공경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
기위한 구실로 장로들의 유전(遺傳)을 이용했다. 또 '고르반'은 일종의 맹세문
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그들이 가진 물건올 하나님께 드릴 것이라고 선언함으
로써 그 물건에 대한 소유권을 부모를 위시한 모든 타인으로부터 제한시킬 수
가 있었다. 이 '고르반' 맹세는 비록 모세의 또다른 계명(부모 공경 둥)을 파
기하는 일이 있어도 반드시 시행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 같은 '맹세'는 실제로 성전에 물건을 바쳐야 한다는 '강제 규정'을 갖고 있
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맹세자는 '고르반'된 물건을 일부만 성전에 헌납하고(아
예 헌납치 않는 수도 있음)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해도 무방했던 것이다. 결국
장로들의 유전은 많은 재물을 갖고 있으면서도 부모에게 나누어주지 않으려는
불효자들의 기만적인 행위를 정당화 시켜주는 구실을 한 것이다. 한편 후대 랍
비들은 이러한 규정의 불합리성을 지적하여 '미쉬나'(Mishnah)에 고르반을
빌미로 부모 공양을 등한히해서는안 된다고 못박고 있다. 그러나 예수 당시에
는 아직 그 조항이 제정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극단적인 유대주의자는 부모 공
경보다 하나님께 대한 맹세를 더 중하게 여겨 고르반의 폐단을 계속 고집하였
다고 한다.

12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ㅇ제 아비나 어미에게...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 이 구절은 10절에서
언급된 계명의 내용과 연결하여 생각해야 한다. 즉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
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모두가 꼭 지켜야 할 하나님의 계명으로 이해했을
때, 11절의 논증을 통해 그들이 모세가 준 계명을 어겼음이 명백함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돌아갈 대가는 10절에서 언급한바처럼 반드시 죽게 될
것 뿐이다.   

13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ㅇ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 여기서 먼저 '폐하며'(아퀴
룬테스)란 9절에 언급된 '저버리다'는 뜻보다 그 의미가 더욱 강하며 '파기하
다'. '아예 무시하다' 등의 뜻을 지닌다. 실로 예수는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
는 행위가 하나님의 말씀을 파기시키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이 말은 그들의
언행에 대한 결정적 모순을 지적하는 말인데, 즉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배와
충성을 위해 만들어내고 지킨 율법적 관습이 결과적으로는 10-12절에서 논증된
바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화하여 파기시킨 것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다
시 말하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이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깨닫지
뭇했고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 대한 사랑에 있음을 망각하여 하나님에 대한 사
랑이라는 구실로 사람을 희생시키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다시 분명해지는 사
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사람에 대한 사랑.봉사와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다
는 점이다. 예수가 율법주의자들의 언행을 비판한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 였
다. 오늘날에도 교회 전통이나 교리 그리고 권위에 집착하여 교회가 실천해야
할 이웃 사랑, 사람에대한 봉사와 세상에 대한 봉사를 소홀히 하거나 관심하는
않는 잘못을 범하는 교회들은 이러한 비판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ㅇ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위선되고 거짓된 종
교 형태가 단지 부모 공경에 관한 제 5계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 전반에 걸쳐 드러난다고 밝히신다. 특히 '행하느니라'(포이에이테)는 말은
능동태 현재 시상으로서 그들의 행동이 습성화되고 중복되고 있음을, 즉 그들
의 그릇된 신앙 행위가 거듭 노출되고 있음을 지적해 주고 있다.         

14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ㅇ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 여기서 이야기의 대상이 바뀌고 있다. 즉 1-13
절까지는 제자들의 식사 현장에 나타난 예루살렘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한 예수의 논박(論駁)을 다루었으나 여기서부터는 더이상 바리새인들을 향한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는 다시 청중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한편 이 이야기의
주제는 그 내용으로 볼 때 정결에 관한 주제가 계속되고 있으므로(5절에 제시
된 바리새인들의 질문이 15절에 직접 답변되어짐) 연속적인 이야기로 보아도
좋다.
ㅇ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 이 말은 예언자적 발언으로서 각성을 촉
구하는 호소라고 할 수 있다. 즉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에서 논증된 바처럼 사람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어리
석음으로부터 깨어나 올바른 신앙 실천을 촉구하는 호소문이다. 더욱이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예고문일 수도있다. 즉 이제까지는 잘못된 관
습에 대한 비판이었지만 지금부터는 그 비판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는 암시를
주고 있다. 그래서 예수는 청중들을 불러모으고 자신의 이야기 곧 내적 성결이
라는 대주제를 설파하기 위해 경청하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ㅇ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 여기서 언급되는 두 절은 원래 한 절로 구성
된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즉 NIV에서는 16절이없고 15절의 하반부에 16절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 16절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
다. 또 어떤 사본에는(모스코,베자 등) 16절에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아마도 필사자들이 4:9이나 4:23의 모형에 따라 인용하
여 첨가시킨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Metzger, Textual
Commentary, p.95). 공동 번역에서는 전자의것을 선택하여 16절을
생략하고 16절의 내용은 15절에 통합시키고 주(主)를 달아 후자에서 언급한 첨
가 문을 소개한다. 한편 여기서는 1-23절의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참으로
부정(不淨)한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표현기법은 물질적 부정과 도덕적
부정을 날카롭게 대조시키는 대구법(對句法)형태로서 마가 특유의 어휘력이 구
사되고 있다(V. Taylor,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rk,
p. 343). 즉 사람밖에 있는 어떤 것(물질)도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는 것
과 사람안에서 나오는 것(심성을 대변하는 말, 생각, 의지, 영적 반응 등)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것이 날카롭게 대비되면서 딴절에서 다시 언급되는 것처
럼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참으로 부정한 것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와 같
은 표현은 종교 지도자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철저하게 지키던 정결 예식을 모
조리 부인하는 결과적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부정한 음식, 부정한 물건, 또
는 부정한 짐승에 의해서 사람이 부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기 때문에 그
들이 지키는 정결 예식은 소용없게되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는 레위기 법전(레
11-15장)이 명하는 바 정.부정의 규례에 대한  새로운 해석, 곧 그 영적 중요
성을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진정 예수가 말하는 참으로 부정한것은, 물로도
씻을 수 없는 부정의 근본 원인이되는 사람의 마음이다. 따라서 참으로 부정한
것은 자기 안에 있으며, 부정한 것이 밖에 있는 양 정결 예법에만 관심하면서
자기가 갖고 있는 부정한 것을 은폐시키려하는 모든 위선적인 정결 예법은 부
정한 것이다. 실로 예수는 여기서 철저한 자기 변혁, 자기 회개를 촉구하는 것
이다. 그 이유는 정결이라는 것은 가시적인 의식(儀式)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 곧 그사람의 인격과 양심과 영혼의 철저한 개혁을 통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마 15:11 주석 참조).            

17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ㅇ무리를 떠나...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 여기서도 역시 이야기의 장소
적 배경이 바뀌고 있다. 이야기를 듣던 청중들과 헤어지고 제자들과 예수가 한
자리에 있을 때(가버나움의 베드로 집으로 추정) 제자들이 15, 16절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질문을 하고 있다. 이것은 마가가 즐겨 쓰는 묘사법으로서 마
치 4:10의 장면을 보는 듯하다. 여기서는 '제자들'이질문한 것으로 되어 있는
데, 마태의 평행 본문에서는 베드로가 질문한 것으로 나온다(마 15:15). 마태는
특정한 제자 곧 베드로를 자주 내세워 부각시키는 반면 마가는 전체 제자를 등
장시키면서 제자들의 무지를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도 제자들이 예수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어쩌면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하
는데 중요한 증인 역할을 했던 베드로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간과해 버렸는지
모른다. 한편 여기서 제자들이 질문한 것은'비유'에 대한 것이었는데, 예수가
한 이야기는'비유''라기 보다는 오히려 격언적인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ㅇ너희도 이떻게 깨달음이 없느냐 - 이와 같은 표현은 마가의 특징적 의도와
결부되어있다. 즉 제자들의 무지를 강조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8:17에서도
같은 형태의 말로 예수가 직접 제자들에게 '깨닫지 못함'을 꾸짖고있다. 그 외
에 간접적으로 제자들의 무지를 꾸짖는 경우로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4:13),
물위를 걸으신 기적(6:52), 부활 예고에 대한의문(9:10) 등이 있다. 여기서 예
수의 말 뜻을 제자들만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일반 청중들도 이해하지 못
하였음을 '너희도'라는 표현을 통해 암시하고 있다. 즉 청중도 제자들도 모두
예수의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 같은 몰이해에 대한 예수의 실망감
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못함을 모르느냐'고 반문하면서 간
접적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특히 제자들에 대한 실망의 표시이다. 이와
같이 청중과 제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이 비유와 같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예수의 가르침이 당시의 모든 배경을 생각할때 너무나
과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즉 너무 뜻밖의 신인이기 때문에 고정 관념을 벗어나
이해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인간을 더럽게 하는 본질적
(本質的)인 원인이 '밖에서 들어가는 것' 곧 '식물'이 아님을 역설적으로 강
조하셨다.       

19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ㅇ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 예수는 먹어서 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그것은 먹은 음식이 '마음'
으로 들어가는 것이아니라 '위'와 '창자'로 소화되어 베설되기 때문이라고 말
한다. 즉 사람이 먹어서 들어간 것은 배를 통해 다시 배설됨으로써 마음과는
아무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마음'은 인간활동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지.정.의'의 좌소(坐所)이며 비물질적인 내면의 인간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
'배'는 순수히 물질적 개념을 나타내며, 또 인간 육체의 신진 대사를 이루게하
는 전과정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현상적으로 볼 때에도 '마음'은 물질적인 것
과는 무관하며 도덕적, 영적 측면에서만 더럽혀질 수 있는 것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실로 예수께서는 인간의 소화 기능을 적나라하게 설명하심으로써 음
식과 인간 부정 문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천명하셨다. 이로써 예수는 레
11장, 신14장 등에 언급된 식물의 정.부정 관계법을 공식적으로 철회하시고 음
식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고 계신다.
ㅇ모든 식물을 깨끗하다하셨느니라 - 문자적으로는 '모든 식물을 깨끗이하면서'
이다. 이 구절은 예수가 직접 한 말이 아니라 마가가 첨가시킨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In saying this, Jesus declared all
foods "clean", NIV). 즉 예수의 말을 종합하여 결론적인 해석을 언
급한 것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음식의 정결에 관한 논쟁이 많았다. 그것은 이
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면서 유대인의 관습과 이방인들의 식사 관습과의 차이
에 상호충돌이 생겼기 때문이다(롬 14장;고전 8, 10장;갈 2:11;골 2:16). 특히
이방 선교를 한 바울은 이 같은 문제에 부딪혀 그의 서신을 통해여러 차례 언
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같이 식사한 것 때문에 위
신적 행동을 취하다가 바울에게 책망받은 적이 있다(갈 2:11-14). 이러한 논쟁
에 결정적 쐐기를 박는 사건이 베드로의 욥바 체험이다. 즉 베드로는 욥바에서
환상중에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 된다(행 10:1-16). 그리고 곧 이방인 '고넬료'의 집을 방문함으로
써 음식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더불어 이방인의삶과 구원에 대하여 긍정적 판
단을 하게 된다. 아마도 마가 역시 이와 같은 초대 교회의 입장에 동의하면서
정결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이 결론적 핵심어로 '식물은 깨끗하다'는 선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도 롬 14:13-17에서 무엇이든 더러운 것은 없고 더럽게 생
각하는 마음이 문제이며, 음식 문제로 사람을 괴롭히지 말라고 말하고 있으며,
롬 14:6에서 먹는 것도 주를 위해 먹으며 먹지 않는 것도 주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초대 교회의 입장은 정결에 관한 유대 전통을 거부한
것이 분명하다. 이는 허식에 짖눌려 있던 유대인과 더불어 이제 막 복음의 문
을 들어선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자유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Martin).       

20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ㅇ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 청중과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수수께끼같은 말, 즉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어떻게 사람을 더럽히고, 또 더
럽히는 것이 과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사람' 또
는 '사람 속'이라는 말은 곧'마음'이라고 볼수 있다. 이 마음이란 사람의 감정
이나 사상 또는 생각 등의 근저(近著)이며 그러한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게하는
인격의 중심부로 이해된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것
의 대표격으로 악한 생각생각(evil thoughts)을지칭하신다. 여기 '악한 생
각'은 인간의 모든 부정과 악한 사상과 음모가 곁들여진 의지적인 생각으로서
행동화된 죄악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즉 바로 이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것이
다. 여기서 악한 생각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를 12가지로 나누어 설명하
는데, 이와 비슷한 언급이 롬 1:29-31;갈 5:19-21에서도 나온다. 평행 본문인
마 15:19에서는 6가지만 언급되고 있는데, 십계명의 제6. 7. 8. 9계명의 순으
로 나열하고 있다. 반면 마가는 그러한 전통 계명의 순서와는 무관하게 나열하
고 있다. 이를 재구성하여 살펴보면 음란, 간음, 음탕이다. 이 세 종류는 서로
비슷한내용을 표현하고 있는데, 십계명 중 제 7계명에 상당하는 죄악이다. 한
편 그 각각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음란'(포르네이아이)은 일반적으로 부정한
성관계를 뜻하는 말로서 윤리적 측면이 강조되고, '간음'(모이케이아이)은 기
혼자와 관계되는 성범죄이며, '음탕'(아셀게이아)은 모든 사람들이 갖는 성적
본능을 자제없이 노출시키는 공개적이고도 부끄럼을 모르는 성범죄를 말한다.
살인, 악독, 흘기는 눈, 훼방, 교만, 광패(狂悖). 이러한 것들은 사람을 향한
파괴적 언어와 행동을 가리키는 말로서 제 6계명이 상관되는 '살인'이라는 말
로 압축시킬 수있다. 여기서 '악독'(포네리아이)이란 말은 노동, 아픔, 고통
이란 뜻의 '포노스'에서 나온 것이다. 즉 고되고 아프게 하는 요인이 될 행위
를 말한다. '흘기는 눈'(오프달모스 포네로스)은 악의적인 비읏음과 빈정거림
으로 응시하거나 부러워하면서 시기한다는 셈어적 표현이다. '훼방'(블라스페
미아)은 신성모독적인 욕설과 험담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광패'(아프로쉬
네)는 도덕적 판단력 이 결여된 사람의 어리석음을 뜻한다
(foolishness;AV, RSV). 그리고 도덕질(클로파이)은 제 8계명, 속임(돌로스,
'을가미', '덫'이란 뜻)은 제 9계명, 탐욕(플레오%시아이), 곧 좀더 많이 가
지려는 욕망은 제 10계명과 관련지어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이와 같이 사람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십계명에 사람과 판련된 6가지의 계명 중 부모와의
관계만 빼고 5계명 모두 포함되어 있어 마가 역시 십계명을 염두에 두고 서술
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모든 조항들이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부정
한 것의 '모두'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사람을 더럽게 하는 모든 것
이 인간이 품은 마음에 있음을, 그리고 모든 부정의 원천은 사람의 마음임을
강조하기 위해 대표적으로 예시된 것일 뿐이다. 본절은 이와 같은 뜻을 결론
적으로 말하고 있다. 요컨대 참으로 부정한 것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형식적인 정결 예식을 통해서 부정이 깨끗하게 되는 것이 아니며 손을
씻지 않고 먹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도 못한다. 참으로 정결하게 하는
것은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근본적 변혁인 회계뿐이다
(욜 2:13).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하나 숨길 수 없더라

ㅇ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 여기서 먼저 '거기를 떠나'란 문자적으로 '이
곳에서 부터'(from here)가 된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디인가? 아마도
이곳은 '집'(17절) 또는 '게네사렛'(6:53) 아니면 그 밖의 다른 장소를 가리
킬 것이다. 이중에서 '게네사렛'곧 갈릴리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즉 서서히 고조되어가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반대에 직면하여 예수는 일단
갈릴리 활동을 증단하시고 그곳을 떠나 북쪽 두로 지경으로 그 거처를 옳기셨
다. 이 같은 활동 무대의 이동은 벱새다율리아스 이후 두번째 경우이다. 한편
'두로'라는 도시는 갈릴리 북서쪽 지중해 해안 도시로서 '뵈니게'
(Phoenicia)라는 지금의 레바논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그 도시는 원양 항해
술과 예술이 발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수가 왜 그곳으로 갔는지, 그 지
역에 얼마만큼 진입해 들어갔는지에 관해 본서는 침묵하고 있다. 혼히 마가는
이런 세부적인 사실들을 독자들의 상상력에 맡기는 경향이 있다(W.W.
Wessel). 어쨌든 예수는 유대인들의 땅을 떠나 이방인들의 지경에 조용히 스
며들어 가셨던 것이다.
ㅇ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 여기서 예수가 왜 두로에 왔
는지 그 이유를 추측할 수있는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즉 이곳에 올 때에 자
기의 신분을 숨기고 왔음을 알 수 있는데, 그례다면 선교나 치병 활동 또는
가르침을 위한 공적인 목적에서가 아님이 분명하다. 따라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휴식과 새로운 활동을 위한 준비를 위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 이방 지역에서도 이미 예수 자신이 숨어
지낼 수 없을 만큼 당신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눅6:17에
의하면 산상수훈 당시에 이미 두로와시돈 사람들이 예수를 만난 사실을 지적
해 주고있다. 이와 같이 예수가 조용하게 피신하여 쉬려했으나 그 명성 때문
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치병과 선교 활동을 하게 된 사례가 이미 앞에서 여러
번 언급된 바 있다(6:30-34;53-56). 한편 본문에 제시된 '한 집'이란 그곳 원
주민의 집인지, 유대인의 집인지 잘 알 수 없지만 짐작컨대 예수께 대해 상당
한 호의를 가지고 있었던 집임이 분명하다(Meyer). 이러한 모호한 사실
들과 더불어 또 한가지 여기서 분명치 않은것은 예수가 제자들과 동행한 것인
지 아니면 혼자서 두로까지 왔는지이다. 이에 대한 답이될 만한 근거를 이 이
야기 속에서 전혀 발견할수 없다. 그러나 평행 본문인 마 15:23에서 제자들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제자들도 예수와 동행하였다고 단
정할 수있다. 다만 마가는 이 여행에서 제자들의 역할이 주목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고 판단되어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ㅇ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 - 예수를 찾아왔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이방인 여인에 대한 배경 설명이다. 확실히 그녀는
예수께 대한 소문, 그 중에서도 그분의 탁월한 신유의 은사에 관한 소문을
듣고 찻아왔을 것이다. 그녀는 예수의 오신소문을 듣자 마자 '곧'(유뒤스)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겸손과 절대 신뢰의 자세를 취했다. 한편 그
여인의 딸은 '더러운 귀신'에 들렸는데(1:23;5:2 주석 참조). 평행 본문인
마 15:22에서는 '흉악한 귀신'이 들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공동번
역에서는 '악령'과 '마귀'로 표현하고 있다. 이 병은 육체적 압밖과 두려
움을 동반한 심한 정신적(精神的) 질환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러한
딸을 두고 있던 그 여인의 한숨과 눈물, 그리고 고통은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을 것이다. 마가는 그 여인은 헬라인(a Greek)이면서 수로
보니게 족속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당시의 역사적 상황으로 보아 그녀
의 국적이 분명 헬라 곧 그리이스가 아닌 점을 생각할 때 여기서'헬라인'
(Greek)은 유대인콰 구별되는 의미에서의 '이방인'(Gentile) 에 해
당하는 말이거나,'헬라어를 상용하는'(Greek-Speaking) 사람이라는
의미일 것이다(행 18:4;롬 3:9;10:12). 한편 그녀는 '수로보니게' 출신이
었는데, 여기서 '수로보니게'는 '수로' 지방의 '보니게'라는 뜻이다. 즉
지금의 '시리아'에 야한 '뵈니게'(Phoemicia)지방을 말한다(24절 주석
참조). 당시 '뵈니게'는 행정상 시리아에 복속되어 있었다. 어쨌든 마가는
아프리카에 있는 '리비오 보니게'(Liobyo-Phoemicia)와 혼돈을 피하기 위해
'수로'라는 지방 이름을 붙여 '수로 보니게인'(SyroPhoemicia)이라
이름하였을 것이다. 실로 여기 언급된 여인은 분명 헬라화된 이방사람 이었
다. 당시 이들 이방인들은 민족적 우월성에 도취되어 있던 유대인들에게 심
한 적대감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Josephus).
ㅇ간구하거늘(에로타). 미완료 시제로서 그 어미가 자기 딸의 치유를 소망
하며 예수께 거듭거듭 호소하고 있는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하고있다. 실로
그녀는 오직 딸의 구원을 위해 민족적 반감이나 개인적 자존심을 모두 팽개
치고 예수께 매어 달리고 있는 것이다.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ㅇ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개들에게 - 예수는 은유적인 표현을
빌어 유대 민족과 이방인을 구별하고 있다. 여기서 '자녀'(테크논)란 하나
님의 선민(選民) 곧 유대인을 가리키며. '배불리 먹게 하다'는 말은 본 상
황에서 '유대인 환자를 먼저 치료해야 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고, 좀더 포
괄적으로는 복음 또는 하나님이 구원의 시혜에 관한한 유대인에케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이것은 결코 배타적인 선민 의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직 전 인류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 하
나님으로부터 우선 선택된 것일 뿐이었다(창 12:2, 3). 이러한 특수한 유대
인의 선민적 위치에 대해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선교 여행의 지침을 통해서
도 간접적으로 언급하신적이 있고(마 10:5), 사도 바울 역시 이러한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롬 2:9 ff).한편 본문에 언급된 '개'는 주로 유대인들이 이
방인들을 경멸할 때(시 59:6), 또는 자신을 비하시킬 때와 악한 존개를 상
징할 때 사용하던 말이다. 그런데 본문의 '개'를 뜻하는 헬라어'퀴나온'
야생의 들개가 아닌 가정에서 기른 애완용 또늘 귀여운 강아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그 의미하는 바가 조금은 부드러운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마
15:26) 그러나 '개'라는 사실 그 자체는 본질상 비천하고 속된 경향을 띨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이 같은 '자녀'와 '개'의 대비(對比)
를 통해 신적 특권에 있어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사이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영구한 숙명론적 차이로 볼 수는 없다. 그에
대한 증거로서 마틴(Martin)은 본문의'먼저'(프로톤)라는 말에 주의를 환기
시고 있다. 즉 그는 13:10 주석에서처럼 이 말에 종말론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다음과같은 독특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프로톤)'이 삽입된 것은 이스라
엘의 배타적 특권이 한 때뿐임을 가리킨다. 예루살렘 교회가 생긴 직후의 기
간까지는 자녀들(이스라옐)이 '(먼저)' 배불리 먹을 수 있었으나. 이 특권이
영원히 유대인에게만 속하는 배타적인 특권일 수만은 없었다. '후에는'(휘스
테론) 이방인 개들도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이여인에 관련하여
사용된 '후에는' (이 말은 성경 본문에는 없는 것이며 임의로 붙인 것임)이라
는 시간은 이미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이미 그녀를 불
쌍히 여겨 그녀의 간구에 응답하고 게시기 때문이다".                           

28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ㅇ주여 옳소이다마는 - 본서에서 예수가'주'로 불리운 곳은 이곳 밖에 없다.
여기 언급된 '주여'란 단순히 상대방에 대한 존칭이지만 그 이면에는 예수의
절대적인 주권과 능력을 인정하는 참신앙이 마음에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옳소이다마는'이라는 말은 상대의 말을 일단은 인정하나 그 말에 대한 또다
른 자기 이견(異見)을 피력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일종의 반의 접속사라고
할 수 있다. 실로 그녀는 예수께서 언급하신 바 유대인의 우선권과 특수한
권리를 인정하는 동시에 비천한 자신의 존재('개')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신분상의 차이 때문에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제외되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이 같은 불굴의 답변은 그녀에게 내재된 강한
믿음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ㅇ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 수로보니게 여인은 재치있게
예수의 말을 받았다. 즉 그녀는 마치 상 아래서 꼬리를 혼들고 주인의 호의
를 기다리는 귀여운 강아지를 연상시키면서 적어도 자신과 자신의 딸도 그러
한 입장에서 당신의 호의를 기다리고 있다고 간청한 것이다. 실로 그녀가 간
청한 것은 유대인에게 특별히 허락된 은혜와 축복의 '부스러기'에 블과했다.
이 말은 앞절에서 언급한뒤 유대인들의 배타적 우월감과 편견에 대해 극한
대조를 보여 주고 있다. '개'라는 말로 자신을 지칭할 때 받는 인격적 모멸
감과 훼손된 자존심을 개의치 않고 주의 은총을 간청하는 모습은 극한 겸손
(謙遜)의 표시이다. 이 같은 겸손과 유대인의 오만한 우월의식이 대비되어 이
방 여인의 믿음이 높여진다. 마가는 이 이야기 속에서도 역시 유대인들의 잘
못된 전통을 무효화하고 이방인의 모습 속에서 겸손하게 복음을 수용하는 모
델을 제공하며 예수의 언행에 대해 사사 건건 시비를 거는 유대인들을 간접적
으로 공격하고자 한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ㅇ이 말을 하였으니 - 예수께서는 그 여인의 대답에 매우 만족하셨다. 즉 예수
는 그 여인의 입을 통해 전해진 말로써 그녀의 내면에 깃든 독특한 믿음을 간
파하셨던 것이다. 마태는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평행본문에 '네 
믿음이 크도다'(마 15:28)라고 기록하고 있다.
ㅇ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 이제 이방 여인이 안고 시름해했던
최대의 문제가 순식간에 해결된다. 예수는 순수하고 끈질긴 그녀의 믿음에 충분
히 만족하시고 이제'돌아가라'(you may go, NIV)고 말한다. 이것은 치
병 기적을 행한 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어투로서 완전한 회복을 전제한 말이다.
즉 육체적, 정신적 소명  뿐 니라 가정 복귀 또는 사회복귀를 명하는 것이다. 그
리고 예수는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는 선언을 통해 그녀의 믿음에 확
실히 응답하셨다. 특히 여기 '나갔느니라'는 말은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어 그
선언과 동시에 이미 귀신이 그 딸에게서 떨어져 나갔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처럼
예수께서 원거리에 있는 병자를 고치신 경우는 본서에서 이곳이 유일하다. 그리
고 놀라운 사실은 예수가 어떤 특별한 명령이나 외침 없이 당신의 거룩한 의지로
치병 기적을 이뤄냈다는 것은 그분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적 권능을 보여 준
것이라 하겠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ㅇ집에 돌아가 본즉...귀신이 나갔더라 - 예수께서는 그녀의 집에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선사하셨다. 그녀는 자기 집으로 돌아와 예수께서 허락하신 선물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마가는 아무런 설명 없이 그녀의 딸이 침상에
누워 있었다고 증언하는데, 이는 아마도 귀신이 그 딸에게서 나오면서 최후의 발
악을 함으로써 그 딸을 기진 맥진하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9:26, W.W.
Wessel). 이와 더불어 마가는 '귀신이 나갔더라'(다이모니온 여세레뤼도스)는
말을 완료 능동태 분사로 기록하여 그 딸에게서 귀신의 존재가 완전히 떨어져나
가 매우 깨끗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ㅇ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 물론 이'갈릴리 호수'는 이방 지역에 속한 땅을 지
칭한다. 사실 본문에 제시된 예수의 여행로를 지리적으로 상세히 설명하기는 쉽
지 않다. 아마 예수는 두로 지경에서 북쪽으로 약40km 올라기시돈 지역의 이방
인 거주지를 통과하며 레온테스 강(the Leontes)을 건넌 후 다시 남동쪽
으로 내려가 헤롯 빌립의 영토를 통과하여  갈릴리호수의 동쪽에 이르러 데가볼
리(Decapolis) 지역으로 들어가셨을 것이다(가이사랴, 알럭산드리아, 서방
사본 등.) 이 여행을 하는 동안 예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에 관해서 마가는 전
혀 기록하고 있지 않다. 어쨌든 예수는 지금 이방인 구역에 거하고 계신다. 여
기 언급된 데가볼리(10개의 헬라 도시들의 연합체 및 그 영토)에는 대부분 이
방인들이 거주했으나 상당수의 유대인들도 함께 살고 있었다.       

32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ㅇ귀먹고 어눌한 자 - 사람들이 예수앞에 데리고 온 환자는 귀먹고 말을 하기
곤란한 사람인데 귀머거리는 자연히 말하기 곤란해지거나 아예 무의미한 소리
만 지을 줄 아는 벙어리가 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런데 본문에 사용된 '어눌
하다'(모기랄로스)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이곳 한 곳에만 나오며 70인역(LXX)
에서도 단 한 곳에만 제시되있다. 특히 70인역의 상황은 본 기사와 깊은 상관
관계를 맺는다. 즉70인역의 사 35:6은 메시아시대를 제시한 것으로 '그 때에
저는 사나 사슴같이 살 것이며 벙어리('모기랄로스')의 혀는 노래하리니'라
고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듯이, 마가는 이같은 사실을 분명 염두에 두고 본 사
건을 기록했을 것이다.
ㅇ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 이미 5:20주석에서 언급된 바처럼 이 지방
에 예수의 치병 기적이 널리 알려져있다. 그리고 안수하는 것 역시 보편적으
로 알려져 있는 치병 행위였다(5:23;6:5).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ㅇ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 환자를 따로 데리고 무리를 피해간
이유로는 다음 두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36절에서 언급한 바처럼 군
중들의 흥분된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병고치는 기적을 비밀로 하려 했기 때
문이다. (2) 예수가 한자와 긴밀한 인격적 관계를 갖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즉 그 환자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온 피동적 인물이었고 자신의 치유 의지
가 거의 없던 상태였을 것이다. 이에 예수는 그 무감각하고 피동적인 인격에
게 당신의 존재 본질을 분명히 드러내시고 그로하여금 믿음의 반응을 보이게
하시려 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5:40에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도
이러한 은밀함을 요구하신 바있다.
ㅇ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 이와 같이 환자의 취부에 직접 접촉
하면서 침사용하는 치료법은 당시 일반 백성들 사이의 민간요법으로 많이 활
용되었던 것 같으며 특히 침이 치유의 효과와 화를 막아주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형태로 치병 활동을 했다는 고대 기록들이
남아있는데 로마의 황제 베스파시안(A.D. 69-79)이 소경에게 침을 눈에 발라
치료호다는 기록도 전해지고(Tacitus, Hist, iv. 81) 그외 플리니
우스(Plinius),슈톤(Sueton)등의 기록에도 나온다. 따라서 이러한 형태
의 치유 행위는 당시 혤라와 유대인 의사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한 방법으로 볼
수 있다(Taylor). 그런데 왜 예수께서는 환자에게 전혀 손을 대지 않고도
능히 치유하실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게셨음에도(2:3-12;3:5)이러한 행동, 그
것도 미신적 행위로 오해받을 수 있는 치유법을 선택하셨을까?  이는참으로
신비한 장면으로서 다만 추측하건대, (1) 예수는 귀먹고 어눌한 자에게 직접
접촉하심으로써 당신의 뜨거운 사랑을 표시하셨고,(2) 그를위해 당신께서 지
금 힘쓰고 계신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보여 주셨으며, (3) 귀먹고 어눌한 자가
능동적으로 믿음을 지닐 수 있게 도와  주시기 위해 이 같은 행동 언어를 취
했을 것이라 본다. 여기서 양 귀에 손가락을 넣은  것은 그의 귀가 열릴 것을
암시하며, 혀에 손을 대신 것은 그의 혀가 정상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ㅇ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 이 같은 행동은 기도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는데, 6:41에서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면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한 모습
이 언급되고 있다. 여기서 '탄식'이라는 말은 거의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의
미한다. 이와같이 하늘을 바라보며 신음 소리를 나타내는 행위는 고대의 기
적 설화에서 초인적인 힘을 끌어들이는 형식적 표현으로 많이 나타나는데,
본너(Bonner)는 능력있는 발언이나 기적능력을 나타내기 전에 예언자나 기
적행위자가 하는 준비 동작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한다. 물론 마가가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예수의 행위를 이해했을 리는 없을 깃이다. 오히려 그는 이
인간을 깊이 사랑하시고 그 고통마저 동참하기를 원하시는 예수의 애정의 탄
식으로 보았을 것이다. 물론 예수가 하늘을 보며(요 11:41;17:1) 탄식한 것
은 단순히 당신의 감정을 표출한 것이 아니라 단식으로 간구한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 탄식은 환자의 고통뿐만 아니라 인류의 아픔을 탄식하는 당신의
지극한 애정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혹자(Van der Loos)에
따르면 '예수의 탄식은 기도의 탄식이었으며 성부와 성자 예수의 감추어진
교제에 따르는 탄식이었다. 예수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한 것이 늘상 예수의
기도 방법이었다면 초대교회도 역시 이런 기도의 자세로 병을 치료 했을 것
이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단지(예수의 이름으로) 치료할 수 있었을 뿐이었
다'라고 이 장면에 관해 언급한 바있다.
ㅇ에바다(여파다) - 이 말은 아람어의 음역으로서 마가는 그 뜻을 열리라
(디아노이크데티)로 밝히고 있다. 즉 마가는 자신의 이방 독자들에 대한 친
절한 노력 으로서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아람어를 언급한 후 그 뒤에 헬
라어로 설명구를 덧붙이고 있다(5:41). 그런데 이 '열리라'는 말이 단지 닫
혀진 귀에만 관련된 말이 아니라 혀에도 그영향이 미치는 명령어로 보아야
한다. 어떻든 예수의 이 같은 명렁은 그 환자의 심령 뿐 아니라 그 닫혀진
귀를 뚫고 들려졌다. 이는 메시아의 시대를 예언한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다'는 사 35:5 말씀의 완전한 성취
로서 지상에 돌입한 메시아 왕국의 현존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ㅇ귀가 열리고...곧 풀려 - '열리라''는 명령과 함께 즉시 귀가 열리고 말
문이 열리게 된다. 여기서 '말이 분명하더라'(엘라레이 오르도스)는 그가
적어도 완전한 벙어리가 아니었으며(그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단지 언어
에 장애(障碍)가 있었을 뿐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여기 사용된 동사가 미완
료시제로서 그의 말의 호전된 상태가 점점 구체적으로 또렷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36 예수께서 저희에게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계하실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하니

ㅇ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 이렇게 치병 기적에 대하여 비밀로
침묵하라는 명령은 마가가 자주 묘사하는 내용이다(1:43, 44;3:12;5:43).
침묵을 요구한 대상은 환자자신에게만 아니라 그 환자를 데리고 온 사람과
그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사람들에게 명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
는 자신의 명성이 치병 기적과 함께 널리 퍼지게 됨으로써 문제화 되는 것
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5:43 주석 참조). 특히 여기서 '경계하사'(디
에스테이라토)란 당신의 금지의사가 매우 적극적이었음을 반영한다. 사실
예수는 그들이 당신의 명령을 어길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적어도 그들이 흥분된 상태로 당신에 관한 소문을 퍼뜨
리는 것보다 오히려 조용히 그들 스스로가 예수의 명령에 순복(順服) 하고
또 그들 각자가 당신을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만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ㅇ경계하실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하니 - 이 구절 역시 마가의 공통된
언급으로서 침묵 요청 다음에 목격자들은 침묵으로 비밀을 지킨 것이 아니
라 오히려 널리 소문을 내어 전파시켰다고 소개하고 있다(1:45). 이 같은
언급은 침묵 명령과, 그 명령을 어기고 전파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감격
적 기적의 체험을 잘 대비시켜 그들의 후분된 환호가 지닌 부정적인 모습을
은연중에 제시해주고 있다. 사실 그들은 막상 예수께서 로마세력에 의해 체
포, 처형 당하실 때 극한 조롱으로 그 환호를 대신했던 것이다. (마 27:22,
23). 이는 인간적 판단과 기대가 하나님의 생각과 배치(背馳)되고 만다는
사실을 보여 준 단적인 예라 하겠다.   

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가로되 그가 다 잘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ㅇ심히 놀라...그가 다 잘 하였도다 - 예수의 치병 기적에 대한 사람들의 반
응을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놀라 경탄하는 것이다. 여기서 '히'(휘페르페리
쏘스)는 헬라어 문헌들에서 단 한번 나오는 단어로서 '심히 이상의', 곧 '극
도로', '측량할수 없이'란 뜻이다. 이것은 적어도 그 이방지역의 주민들이
예수의 존재와 능력을 충격적일 만큼 크게 느꼈고 또 그 모든 것을 긍정적으
로  평가했음을 보여 준다고 본다. 이와 함께 마가는 사람들이 예수의 행위
를 '그가 다 잘했다'고 하는 말로 칭찬하며, 또 그분을 신뢰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평행 본문인 마 15:31에서는 그 감격의 표현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로 하면서 그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간접 묘사하고 있다. 한편 '그가 다  잘하였도다'란 말은 '하나님이 그 지으
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는 말씀을 기억나게
한다. 왜냐하면 깊은 의미에서 예수의 이 같은 기적은 메시야 왕국의 현존을
알리는 메시지일(사 35:5, 6)뿐 아니라 하나님의 '새 창조'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가에게 있어서 이 사건은 예수의 메시야적 활동
의 분명한 표시임과 동시에 이방인 거주지에서도 주의 복음과 주의 나라가
폭발적으로 확장(擴張)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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