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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마가복음

[스크랩] 마가복음 (5 : 1~43)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8:48
마가복음 5장


1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ㅇ바다 건너편 - 이 말은 4:35에서 예수께서 언급한 “저편으로 건너가자”를 받고
있는 말이다. 여기서 “건너편”이란 호수 동쪽편을 가리킨다고 본다. 예수와 제자
들은 항해 도중 한 차례 큰 풍랑을 통해 예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한 뒤 예정했
던 장소에 도착하게 된다.
ㅇ거라사인 지방에- 여기서 “거라사”는 지명에 대한 논란이 많다. 실제로 거라사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방은 갈릴리 호수에서 약 30마일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
방 땅이기 때문에 과연 예수께서 그곳까지 갈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점이 있다.
따라서 이 지방의 성읍이 아닌 갈릴리 호수 가까이에 있는 한 작은 지방(地方)으로
이해할 수 있다(Donald W. Burdick). 더욱이 이곳은 호수 근처의 “가다라”
지방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도 있다. 사실 마태복음에서는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곳을“가다라”지방이 라고 표기한다(마 8:28). 한편 이 지역의 지명에 대해서는
세 종류의 이름들이 발견된다. 즉 마가의 기록대로“거라사”(게라세논), 그리고
마태의 기록대로“가다라”(가다레논), 또 오리겐(Origen)이 주장한대로 “걸게사”
(게르게세논)가 있다. 이에 대해 테일러(Taylor)는 말하기를“이처럼 지명상의 차이
점들이 발견되는 이유는 거라사(갈릴리 동남쪽으로 48km 지점)와 가다라(갈릴리 동
남쪽으로 9.6km 지점)가 갈릴리 호수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지점이며 깎아지른 산들
이 갈릴리 호수로 이어져 있다는 기록 때문이다”고 했다. 그러나 마가는 이곳을 분
명히“가라사인의 지방”이라고 못박고 있으며, 이것은 그 도시에서 갈릴리 호수까
지 미치는 전지역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마 8:28의 “가다라”지방이라는 말도 이
렇게 이해할 수 있음). 그리고 또 다른 한 가능성은 “거라사”라는 지명이 갈릴리
동쪽 해변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 즉 “케르사”(Kersa)와 동일 지역이라는 생각이
다. 바로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40km 높이 정도의 절벽과 옛 무덤들이 있다
고 한다(W. W. Wessel). 어쨌든 이 지방은 로마인들에 의해 10개의 도시가 세워진
“데가볼리”(20절)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 분 아니라 많은 이방인들이
함께 살았던 곳이었음이 분명하다.

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ㅇ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 무덤 사에에서 나와 - 배가 도착하고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자 곧 귀신들린 자를 만났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 장면은 마치 배가 도
착한 장소가 무덤 가까이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즉 무덤 사이에서 나오는 귀신들린
사람을 예수께서 막 만나는 장면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6절을 보면 멀리서 예수를
보고 귀신들린 사람이 달려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배가 닿은 곳이 무덤 근처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한편 4:35의 상황으로 볼 때 이미 날이 저물었을
때였으므로 호수를 횡단(橫斷)한 후 거라사인의 지방에 도착했을 때에는 어두음이
짙게 깔려 있던 때였음이 분명하다.
ㅇ더러운 귀신들린 사람- 여기서 “귀신”(프뉴마티)은 문자적으로 숨, 바람, 기운,
생명, 영혼, 영(spirit), 유령, 귀신, 성령(the Holy Spirit) 등의 다양한 뜻
을 갖고 있다. 그리고 “더러운”(아카다르토)은 “불순한”,“더러운”,“부정한”
등의 뜻으로 쓰인다. 직역하면 “부정한 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는 선한 의
지가 완전히 결여되어 버리고 오직 약령의 지배하에서 자기 파괴적인 우울 증세를
보이는 상태를 의미한다(1:23 주석 참조). 이에 대해 공동번역은“더러운 악령 들
린 사람”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한편 눅 8:27과 본문에서는 악령들린 사람이 단수
이다(안드로포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두 사람으로 묘사된다(마 8:28). 아마도
이같은 차이점은 마태는 그 보고가 상세한데 비해 마가와 누가는 그 둘 중 가장 대
표될 만하고 특징적인(치명적인) 한 사람을 강조하고자 했던 차이일 것이다
(Calven). 나머지 한 사람은 여기 소개된 자의 휘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Lenski).

3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ㅇ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3-5절은 귀신들린 자의 현상태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팔레스틴에서는 죽은 자의 무덤으로 자연 동굴이나 석회암을 깎아 만든 무덤을 사용
하였기 때문에 마음에 거리낌만 없다면 이곳을 거처로 삼기에 적절했을 것이다. 더구
나 공동 무덤은 귀신들이 좋아하는 곳이라는 일반적인 믿음으로 볼 때 귀신들린 자의
거처로는 안성 맞춤이었을 것이다. 이때 귀신들린 자는 아마도 동네에서 쫓겨나 절대
적인 고독과 죽음과 같은 극악한 환경에 처하면서 내.외적인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
었던 것같다. 특히“(거처)하는데”(에이켄)와 뒤에 나오는“.....맬 수 없게 되었으
니”(에뒤나토)라는 말이 모두 미완료 시제를 이루고 있어 그의 최악의 상태가 계속
되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다.
ㅇ아무나.......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사람들은 그 광인을 심히 두려워한 나머지 그
를 묶어두기 위해 쇠사슬까지 동원하였다. 즉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불안을 극복하고
안전을 도모할 목적으로 그 광인의 몸을 쇠사슬로 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도
무지 거친 그를 부드럽게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파괴적이고 무진장한 힘을
제어하지 못했다. 한편 여기 사용된“쇠사슬”은 일종의 수갑 내지는 쇠고랑과 같은
것으로 보통 사람이 풀 수 없는 매우 단단한 것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그 광인은 이
러한 결박을 떨쳐버릴 정도로 괴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아무나”(우데이스) 그
를 제어할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묘사함 헬라어 본문에는 세 개의 부정어(2개의
ou와 1개의 a가 소개됨)가 들어 있어 그 어려운 상황을 더욱 적나라하게 나타내 보이
고 있다.

4 이는 여러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ㅇ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 “여러 번 ....매였어도”(폴라키스....데데
스다이)는 완료 수동태 부정사 구조로 되어 있어 그가 과거에 완벽한 상태로
묶여져 있었던 것이(Robertson) 사실이었다는 것과 동시에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암시를 제공하고 있다. 한편“고랑”(페다이스)은 발을 의미하는“폐자”에서
유래한 말로서 발을 옭암배는 형구(形具)를 의미한다. 실로 그 광인은 이같이 발에
묶인 사슬과 손에 묶인 사슬을 모두 끊어버릴 정도로 강했기 째문에 그 어
느 누구도 감히 그를 제어할 수 없었다. 이 같은 그의 처지에 대해 혹자(Jdhnson)
는“조울병 환자의 조증(躁症)의 상태를 생생하게 표현해 준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ㅇ끊고....깨뜨렸음이러라 - 여기서“끊고”(디에스파스다이)란 문자적으로“당기다”
는 뜻의“스파오”와“둘”이란 뜻의“디아”의 합성어로서 잡아뜯어 두조각 내버린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깨뜨렸음이러라”(쉰테트리프다이)는 말은“비벼서
부수어버리다”는 뜻이다. 결국 이 두 표현은 그 광인의 행동이 얼마나 거칠고 무
막지했는지를 시사해 주고 있다.
ㅇ아무도 ....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 3절에 이어 거듭 그의 괴력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마치 그는 야생의 포악한 짐승처럼 흉포하게 굴었끼 때문에 인간적인 힘으로
는 그를 꺾을 만한 자가 아무도 없었다. 실로 그는 예수가 오시기 전까지 가장 무서
운 괴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ㅇ밤낮 무덤.... 산에서나 - 광인(狂人)의 발작은“시간”(밤낮)과 장소(무덤, 산)
에 전혀 구애됨이 없이 계속되었다. 특별히 여기서“밤낮”이라 한 것은 단지 시간으
로 특정할 수 없는 길고 긴 하루들의 연속을 암시하며,“무덤”과“산”은 그의 비정
상적인 생활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 즉 그는 정신 분열증적 증세로서 뜻
없는 언어를 사용하여 계속 고함쳐댔으며(미완료 능동태 분사), 또“제몸을 상하고
있었다”(카타코르톤 헤아우톤 리도이스) 여기서“상하다”는 말은 완료적 의미로 사
용되어 마치 부숴지게라도 하듯 자기를 짓이겨 깊은 상처를 입혔음을 보여 준다.

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ㅇ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 광인은 예수를 최초 목격했을 때 거의 발작
적으로 적의를 품고 예수께로 질주해 왔을 것이다(눅 8:27). 그러나 그가 예수께 당
도했을 때 직감적으로 그분의 초월적 권능과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발견하고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여기서“절하며”란 엄밀히 따져서“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즉 그 귀신은 자기 앞에 서신 이가 자기보다 더 탁월한 분
이심을 알아보고 경읠글 표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신앙적 경배가 아니라 단지 지적
인 굴종에 불과하다(약 2:19). 이로써 예수는 자연계를 지배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
(4:35-41) 당신의 권위로 영계(靈界)도 능히 지배하시는 초월자이심을 드러내 보이
셨다.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ㅇ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 예수께 접근하는 귀신들의 특징적인 모습이다(1:23).
ㅇ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 귀신은 예수의 신성을 믿는 신앙 고백으로
서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예수를 자기와 떼어 놓을 생각으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어쨌든 그의 저의(底意)가 불순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곧 메시야로 확신한 것은 그의 영적 감지력이 상당히 탁월했음을 보여 준다(1:24 주
석 참조). 한편 겨기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극존칭을 사용하는 것은 하
나같이 절대 지존자이신 하나님을 가리킨 표현이다(눅 1:32, 35, 76 ;행 7:48 ;16:17
;히 7:1).
ㅇ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티 에모이 카이소이) - 히브리인들이 대인 관계
에서 흔히 사용하던 관용적 표현으로서“나를 버려두고 네 일에나 신경쓰라”는 뜻이
다(1:24). 이에 대해 공동번역에서는“왜 저를 간섭하십니까”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같은 표현은 귀신이 예수에게 간청하는 부르짖음이다. 그 간청은 귀신이 예수 앞에
굴복하는 모습이다. 귀신은 이미 예수께서 자기를 위협하고 압도하는 무서운 분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ㅇ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 귀신의 간청은 자신을 괴롭히지 말
라는 것이다. 여기서“하나님 앞에 맹세하고”는 하나님께 대한 서원을 할 때 쓰던
표현으로“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오니”라는 뜻이다. 그런제 이것이 귀신을 내어쫓
을 때 사용하는 말이라는 점을 들어 귀신이 예수를 조롱하는 표현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귀신의 이 말은 조롱을 위한 조롱이 아니라 예수의 등장으로 파멸의 위리글
인식한 자신이 절망적 패배감으로 하는 발악적 부르짖음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귀신의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사람을 괴롭히고 파괴하며 무서운 힘
으로 다른 사람까지 위협하던 존재가 이제는 예수 앞에 파멸적 위기를 맞고 있는 것
이다. 특별히 그가“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고 간청한 것은 귀신이 자기 생활의 안
전을 극도로 위협받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편행 구절인 마 8:29에는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로, 눅 8:31에는“무저
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간구하고 있다. 이로 보건대 지금 귀신들이 받을 괴
로움은 종말적 심판날에 있을 징계를 의미하며, 바로 그 순간이 이를 때까지 그 귀신
들은 무저갱 행(行)에 처해지지 않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이다.

8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ㅇ예수께서 이미.... 이르시기를 - 본절은 7절의 상황에 대한 마가의 보충 설명이다.
즉 귀신이 예수 앞에 절망적 부르짖음으로 간청하는 이유가 예수께서 이미 귀신을 향
해 그 사람으로부터 나오라고 하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6
절과 7절 사이에 귀신돠 예수의 만남에 대한 상황 묘사가 행략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
다. 여기서 “이미....이르시기를”(에레겐)은 미완료 시제를 이루고 있어 예수께서
이미 계속해서 말씀해 오셨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예수의 명령은 즉각적으로 시행되
지 않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같은 지연은 그 귀신의 항거라고 볼 수도 있으나(마
8:29-31) 오히려 “당신의 때”를 정확히 맞추어 행하시고자 하는 예수의 주권적인
섭리로 인한 지연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ㅇ더러운 귀신아.....나오라 - 예수께서 귀신 축출 선언은 곧 인간 해방 선언이다.
사실 귀신은 지금껏 그가 차지하고 있던 그 인간의 인간됨을 파괴하고 있었다. 따라
서 예수께서 귀신을 향해 그 사람으로부터 떠나 나오라 명령하신 것은 그 사람의 본
래적 품성과 인격으로의 회복을 원하시는 당신의 지극한 사랑과, 그 모든 회복을 홀
로 주관. 명령하시는 당신의 절대적인 권위를 함께 보여 준 것이라 할 수 있다(욥
24:22). 실로 예수의 주권이 인정되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그 현장에는 항상 하나
님의 형상을 입고 창조되었으나 사단의 권세로 그 형상을 손상입은 영혼들의 건강하
고도 완전한 회복이 뒤따르게 된다.

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ㅇ네 이름이 무엇이냐 - 이 말은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에게 묻는 질문이다. 이러한
귀신과의 대화는 고대 귀신 축출 이야기에서 많이 나타나는 형식이다. 그리고 고대
전쟁사를 통해 볼 수 있듯이 적운의 장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전쟁에 있어서 중
요한 준비 요건 중에 하나로 간주되었다. 본절도 귀신의 정체를 분명히 밝힘으로써
귀신의 본성을 보여 주려고 한다. 그것은 인간을 파괴하고 있는 주범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ㅇ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 귀신은 예수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이름
을 밝히고 있다. 특히 그는 앞에서는“나”라는 단수 인칭을 사용한 데 비해 뒤에서
는“우리”라는 복수 인칭으로 말하여 어법이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차
이는 귀신 중 우두머리가 대표로 예수와 대화했디 때문에 생겨났을 뿐이다. 귀신의
이름은“군대”이다.“군대”라는 말은 헬라어로 “레기온”인데, 이것은 로마 군대
의 군사 용어로서 6,000명으로 구성된 1개 군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는 군사 용어로서 “레기온”이라는 말을 사용한 이유를“귀신의 수가 많기 때문”
이라고 맑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사람에게 들어간 귀신의 수효가 많이 있는
집단적(集團的) 의미로서 표현하기 위해“레기온”이라는 집단적 의미의 군대 용어
를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그 광인에게 침입한 귀신의 세력이 얼마
나 강력하고 파괴적이었을까 하는 사실을 족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혹자는
이 귀신을 죽은 뒤에 안식을 얻지 못하는 원한을 갖고 있는 영들의 집합체라고 생각
하기도 한다. 그러한 배경 설명으로 귀신이 무덤 사이에서 살았다는 점을 들 수 있
다. 그리고 집단적인 의미의 군대 용어를 사용한 점으로 보아 로마와 투쟁하며 저항
하다 죽어간 희생자들의 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일면의 타
당성을 갖고 있지만 설득력이 희박하다. 왜냐하면 뒤에 나오는 사건들은 결국 귀신
들을 몰사시키는 것인데(13절) 그렇다면 로마에 저항했던 사람들에 대한 저주가 되
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 귀신은 매우 많은 숫자를 가진 집단으로
서 하나의 집합된 힘을 발휘하고 있던 존재들임이 분명하다. 이처럼 실로 사단은 한
사람의 건강한 영혼을 지배하기 위하여 수많은 자신의 부하 귀신들을 동원하는 집념
과 무자비함이 있다(마 12:45;눅 8:2).

10 자기를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더니

ㅇ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 여기서 귀신이 예수께서 다시 간청을
하고 있다. 마가는"간절히”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간청하는 귀신의 자세가 7절의 모
습과는 다름을 보여 준다. 즉 귀신의 자세는 그 기세가 모두 꺾인 모습이다. 귀신의
요구는 자신을 이 지방으로부터 추방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이 제안은 7절의 반항,
즉 간섭하지 말라는 식과는 전혀 다르게 이 지방에만은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렇
다면 그 사람으로부터는 나오겠다는 말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예수에게 항복하는 모
습니다. 그런데 문제는“이 지방”이 과연 어디냐는 점이다. 이는 분명 거라사라는
특정한 장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한편 마태복음에서는 여기에 대해 구
체적인 언급이 없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귀신이“무저갱”(無低坑)으로 보내지
말라고 간청한 것으로 묘사한다(눅 8:31).“이 지방”에 머물기를 원한다는 뜻이기
보다“다른 지방”곧 자신들이 최후 심판 전에 감금당하는 무저갱에로 쫓겨나기를
원치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실로 귀신은 최후의 순간이 이르기 전까지 계속하여 활
동할 장소를 필요로 하고 있다.

11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ㅇ마침....돼지의 큰 떼가 - 이 절은 삽화적이다. 즉 배경 그림같이 묘사되고 있다.
예수가 내리신 호수 가까이에 산이 있고 무덤도 있으며 많은 돼지를 방목시키는 비탈
진 넓은 곳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이방인 지역이기 때문에(1,20절 주석 참
조) 돼지를 많이 길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취급하여 먹지도 않고 가까이 하지도 않았으므로(레 11:7 ; 신 14:8) 좨지는 기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돼지의 주인은 이방인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
나 그 주인이 로마인들(로마 군대)을 위해 돼지를 사육하는 불경스런 유대인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12 이에 간구하여 가로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ㅇ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 11절에서 돼지떼에 대한 풍경 묘사를 한 이유가 밝혀
진다. 귀신은 이 지방을 떠나지 말게 해달라는 간청과 함께 사람으로부터 나오겠다는
생각을 밝힌다. 그러나 자신들은 돼지 무리에게로 옮겨 갈 것을 예수에게 제안하고
있다. 이것은 수동적인 의미에서 허락을 간청하고 있은 것이다. 그래서 “보내어”라
는 단어를 사용하여 돼지에게 들어가고 안 들어감도 예수께 그 권한이 있음을 보여 주
고 있다. 실로 귀신들은 무엇이든지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귀신들은 그 사람을 파괴
할 수 없데 되자 이제 돼지 때를 파괴하고자 한다.

13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ㅇ허락하신대 - 귀신들이 돼지에게 자신들이 들어가게 해주면 계속 활동하며 살 수 있
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예수께 간청한 부탁을 예수께서 들어 주셨다. 이로 보건대
돼지의 몰사 사건의 원인자가 외관상으로는 그 군대 귀신들이었음과 돼지 몰사 사건의
궁극적 결정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셨음을 알게 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타인의
재물을 고의로 손상시킨 예수의 윤리적 타당성 여부이다. 물론 그 소유주가 유대인어
었다면 그가 모세의 율법을 어긴 파렴치한이었기 때문에 그를 징책(懲責)할 목적으로
이 같은 큰 손해를 입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소유주가 이방인이었다면 문제는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본문을 자세히 살피면 돼지 떼를 몰
살시킨 주 원인자는 예수가 아니라 그 군대 귀신이었음을 보게 된다. 즉 예수는 적극적
요구를 “허락”하신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께 모든 책임을 전가하기에는 무리가 따른
다(이외에 또 다른 견해들에 대해서는 마 8:32 주석을 참조하라). 그리고 무엇보다 이
러한 예수이 “허락”이 지닌 재산상의 피해보다 그 피해를 딛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計劃)이 무엇인지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 실로 하나님은 이러한 재산상
의 피해를 통해 영적, 정신적, 사회적 회복과 건강을 허락하셨던 것이다(15,19,20절).
이러한 하나님의 초월적 경륜은 동방의 의인 욥에게서도(욥 1, 2장) 발견된다
(Dona;d W. Burdick). 한편 예수께서 귀신을 돼지 떼로 옮기게 허락한 사실에서 두 가
지 주목해야 할 점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사람의 존귀성 문제이다. 예수는 사람과
돼지를 두고 사람 안에서 귀신들이 활동하지 못하게 하시는 권위적 모습을 보여줌으로
써(8절 주석 참조) 사람을 높이셨다. 반대로 돼지 떼에게는 귀신들이 들어가도록 하락
함으로써 그 어떤 피조물보다 인간의 존엄성을 더욱 강조하셨다. 둘째는 돼지에게 귀
신들이 들어가게 허락하심으로써 상대적으로 귀신의 활동 영역에 대한 암시를 제공한
다. 사실 당시에는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취급하고 있었다(11절 주석 참조). 이러한
돼지에게 귀신들이 들어가도록 예수께서 허락하심으로써 귀신의 활동 장소가 부정한
곳으로 한정됨을 보여 주고 있다. 귀신이 머물 수 있는 곳은 부정한 곳이다(벧후2:22).
ㅇ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 사람의 온 인격을 지배하던 귀신들이 영혼 없는 돼지
에게로 들어가 그들을 조정한다는 사실은 결코 어려운 문제가 아닐 것이다. 실로 귀신
은 생명 있는 것들에 대해 항상 부정적인 영향력을 직. 간접 행사한다.
ㅇ이천 마리 죄는 떼가....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 이 장면은 매우 드라마틱
(dramaric)하다. 파괴자 사단의 사자인 귀신들은 자신들이 활동할 수 있는 또 다른 장
소인 돼지 떼를 죽음에로 질주하게 했다. 특히 이 사건의 급받함은 “비탈길을 내리달
아 갔다”는 펴현과 2,000마리나 되는 돼지의 숫자를 통해 강조되고 있다. 실로 귀신
으 2,000마리나 되는 돼지에게 각각 그 파괴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거의 발작적으로 행
동하게 했고 곧장 몰사시킴으로써 그 사악한 위력을 과시했다. 실로 예수는 그 시점에
서 주위의 사람들에게 귀신의 최후 목적이 인간과 자연 파괴라는 엄숙한 진리르 암묵적
으로 보여 주고 계셨던 것이다. 한편 “몰사(沒死)하거늘”(에프니곤토)이란 말은 미완
료시상을 취하고 있어 2,000마리의 돼지 떼가 계속해서 물속으로 빠져들어 죽어가는 장
면을 더욱 생생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14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촌에 고하니 사람들이 그 어떻게 된것을 보러 와서

ㅇ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 여기서부터 20절까지의 내용은 “돼지 몰사 사건”에 대한
반응들을 묘사하고 있다. 본절에서는 현장에서 직접 사건을 경험한 돼지치는 사람들의
반응이 나타나 있다. 그들은 현장에서 “도망”하였다고 묘사한다. 이 말은 당시에 벌
어진 사건이 너무도 급작스러웠고 상상을 초월한 광경이었기 때문에 주채할 수 없는
놀라움을 묘사하는 뜻으로 사용된 말이다. 따라서 “도망”했다는 말은 무서워서 달아
났다기 보다는 놀라운 사건을 알리기 위해 급히 달려간 사실을 긴박(緊迫)하게 묘사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ㅇ읍내와 촌 - 여기서 “읍내”(폴리스)란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읍을 가리키며(히 12:
22), 대체로 발달된 도시, 변화한 마을 정도로 이해된다. 그리고 “촌”(아그로스)이란
원래 “들”, “밭”(fiekl)등으로 이해되나 흔히 시골로 번역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
양자를 합하여 “도시와 시골”이라는 말로 이해할 때 “돼지 몰사 사건”이 그 지방
전역에 알려졌음을 보여 준다. 이에 대해 마태는 “온 시내”(마 8:34)로 언급한다.
어쨌든 이 사건은 삽시간에 여러 곳으로 퍼져갔고 그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현장
으로 모여들었음을 알 수 있다.

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ㅇ예수께 이르러...보고 두려워하더라 - 여기서는 소문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이 바라
보는 현장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마가는 “이르러”와 “보고”라는 말을 현재형으
로 기술함으로써 그 현장성과 생동감을 더해 주고 있다. 즉 그들은 좨지 묘사 사건을
듣고서는 지체없이 이곳에 달려와서 뚫어지게 그 상황을 확인하며 여러 관점에서 세밀
히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장면은 13 , 14절에서 나타난 연속적인 사건의 급
박성과 긴박감과는 대조적으로 평온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3-5절에서 험악하게
묘사되었던 귀신들린 사람이 정신을 되찾고 예수 앞에 앉아 있는 장면은 폭풍우가 걷
힌 다음 쏟아지는 햇살을 생각나게 한다. 특히 “옷을 입고”, “앉은 것”이란 표현
은 그의 상태가 건강한 정상인으로 되돌아왔음을 확증케 하는 외적인 증표이다. 실로
그는 오랫동안 옷을 벗어 던진채(눅 8:27) 무덤과 산을 뛰어다니며 괴성을 지르고 자
기 몸을 상하게 하는 등의 극히 불안정한 심적 상태를 유지해 왔었던 것이다. 그러나
귀신들려 인간성을 상실했던 사람이 이제는 온전한 제정신으로 회복되었다(고후 5:
13), 여기 "정신이 온전하여“(소프로니조)란 건전한 마음과 올바른 자각 및 바른 판
단 등을 할 수 있는 건강한 정신 상태가 되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이제 그에게는 평
화가 회복되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장면을 면밀히 검토한 사람들은 그 귀신들렸던
자가 그 처절했던 상황에서 벗어난 것을 보고 기뻐하기는커녕 ”두려워하였다“. 여
기서 ”두려워하다“는 표현은 사건의 놀라움에 대한 강조적 묘사인 동시에 이 사건
의 궁극적인 주체자인 예수에 대한 경외감(敬畏感)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온전한 신앙 상태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예수의 본질적 특성(공의와 사
랑의 주)을 이해한 자는 감정적으로 그분을 두려워하는 데서 해방되어 그분의 사랑의
역사를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요일 4:18).

16 이에 귀신 들렸던 자의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저에게 고하매

17 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ㅇ이에 귀신들렸던......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 다른 목격자들이, 소문을 듣고 달
려와 현장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에게 이제까지 일어났던 사건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그들의 반응은 예수에게 이 지방에서 떠나달라고 간청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
는 그들이 예수를 심히 두려워했기 때문이다(15절). 즉 그들은 자기들의 상상을 초월
하여 감히 지신들로서는 제어할 수도 없는 능력이 예수 안에서 역사하고 있음을 깨달
았다. 따라서 만일 예수가 좨지 2.000마리를 몰사시키셨다면 다음에 그보다 더 심각
하고 두려운 일을 충분히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능 것이다. 이러한 두려움과 무지
와 경제적 이기심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떠나라고 간청했던 것이다. 실로 그들은 자
신들의 미신적 상상력과 물질적 욕심 때문에 생명의 주를 거부(拒否)하고 말았던 것
이다(4:19). 예수께서는 그들의 소원대로 그곳을 떠나시게 된다. 진정 그분은 당신을
원치 않는 곳에 오래 머물지 않으신다.

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ㅇ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 예수는 배를 타시고 동쪽 지경에 오셨다가(2절) 이제
다시 뱃머리를 돌려 자신의 곳으로 돌아가시려 한다. 실로 예수께서는 이 지방을 떠
나라고 하는 그곳 주민들의 제안을 즉각(卽刻)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 이에 대해 새번역 성서에서는 “함께 가기를”원했다로,
공동번역 성서에도 역시 예수를 “따라 다니게”해 달라고 간청한 것으로 번역되어 있
다. 따라서 “함께 있기를” 간구한 것은 그곳에 머물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예수
를 따라 나서겠다는 뜻이다. 이것은 한 인간이 가장 비참한 처지에서 인간이 아닌 짐
승과 같은 삶을 살다가 구원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감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
다(Bengel). 사실 예수를 따라 나서겠다는 고백은 제자가 되어 주님의 길을 같이 가
겠다는 뜻이고 자기 몸을 다 바쳐 주님을 섬기겠다는 표현이다. 또 그 자신이 따라
나서겠다는 것은 자신의 과거 때문에 마을에서 자기를 용납해 주지 않을 것같기 때문
일 것이라고, 또는 다시 귀신이 자기를 억누를까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
는 주장도 많지만 그보다는 진실한 감사와 헌신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
한 장면은 17절에서 보여 준 다른 사람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자신을 구원해 주고
자신에게 진정한 사랑과 자유를 허락한 분에게는 타산적인 생각이 개입될 수 없다. 다
만 전적인 헌신이 있을 뿐이다.

19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신대

ㅇ집으로 돌아가.......네 친속에게 고하라 - 귀신들렸던 사람의 간청은 예수로부터
거절당한다. 그 이유는 첫째, 자기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새 삶을 시작해야 되기
때문이고, 둘째, 이와 같은 구원 사건을 가족들에게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1:
44에서 문둥병자에게 침묵을 명하신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이는 아마도 이번의 사건
은 이방 지역에서 일어났기 째문에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사람들에게 전파한다 하더라
도 무방했기에 그렇게 한 것같다. 사실 유대 지경에서 예수 자신의 메시야 주장은 아
직까지 때가 이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상당히 큰 위험을 무릅써야 했던 것이다. 어쨌
든 예수의 명령은 곧 당신의 귀신 축출에 대한 깊은 의미를 알게 한다. 첫째,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한 것은 한 인간의 인간성이 철저히 파괴되었다가 다시 본래의 모습
을 되찾는 구원이 한 개인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공
동체에 다시 정상적인 모습으로 복귀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사람
은 병으로 인해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있었기 째문에 다시 그러한 관계를 회복
함으로써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다. 둘째는 기적적인 놀라운
구원 사건을 경험한 사람이 가야 할 곳은 가정과 사회, 즉 삶의 현장(現場)이라는 사
실을 말해 주고 있다. 삶의 현장과 가정 안에서 구원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구원
받은 사람의 과제이다. 즉 가정과 사회에 봉사하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실천하
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세속 사회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속 사
회 안에서 주님을 전파하며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한편 마가
는 이 일을 행하신 분을 “주님”(퀴리오스)으로 표현한데 비해 누가복음에서는 “하
나님”(눅 8:39)으로 표현한다.

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ㅇ데가볼리에 전파하니 - 예수는 가족에게 알리라고 했지만 이 사람은 제가볼리 전
역에 알리게 된다. “데가볼리”는 갈릴리 호수 동편과 요단강가에 인접한 10개 도
시를 가리킨다. 여기서 10개 도시란 거라사(Gerasa) 와 가다라(Gadara) 및 다메섹
(Damascus), 빌라델비아(Philadelphia), 스구도볼리쓰(Scythopolis), 힙보스
(Hippos), 벨라(Pella), 라바나(Raphana), 디오스(Dios), 가다나(Kathana) 등이다.
이중 스구도볼리쓰만은 요단 서편에 위치해 있다. 이 도시들은 자치적인 연맹 도시
였다.  1절에서 언급한 “거라사”도 이 10개 연맹 도시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도
시들은 B. C. 3세기경 수리아의 셀류시드(Seleucid)의 통치 기간에 헬라화 정책의
시험 도시들로 조직되었다. 그리고 유대 마카비 시대에 이르러 하스몬(Hasmonian)
왕조 때 힐카누스의 지배를 받다가 다시 로마의 폼페이(Pompey) 장군에 의해 로마
관할로 편입되었다. 이와 같이 광역 도시에 예수께서 행하신 “미친 돼지 몰사
사건”과 “귀신들린 사람의 구원 사건”이 퍼져나갔고 모든 사람들이 놀랐다. 여
기서 예수의 선교 활동이 이방 지역에서도 성공적으로 진행됨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한 인간이 거듭나는 체험(體驗)으로 그리고 거듭난 한 인간이 자기 사건을 전
한으로써 10개 도시의 넓은 지역에 예수에 관한 이야기는 전파되는 드라마틱한 장
면이다.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 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ㅇ다시 저편으로 건너 가시매 - 돼지 몰사 사건이 발생했던 위치가 갈릴리 호수
동편이므로 건너편이라고 할 때 서쪽 해안 곧 가버나움 지경으로 추측된다(마 9:1).
이곳은 바로 갈릴리 선교의 전진 기지였다. 그곳에서도 역시 큰 무리가 모여들었다.
이 표현은 4:1의 표현과 비슷하다. 그리고 “거라사”지방과는 대조적이다. 즉 거
라사 지방에서는 떠나줄 것을 요구했지만 갈릴리 지방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어 예수의 인기를 보증해 준다.
ㅇ바닷가에 계시더니 - 이 표현은 바닷가에 도착한 시각과 22절에 나오는 다음 사
건이 발생한 시각에 간격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바닷가가 많은 군
중들을 향해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용이한 지역이었으므로 이곳을 자주 당신의 교
육의 장(場)으로 활용하셨다.

22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ㅇ회당장 중 하나 - 이는 “한 회당장”으로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가버나
움에 있는 한 회당장으로 이해된다. 당시 회당의 조직은 회당장, 핫잔(Hazzan),
랍비 그리고 평신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중에서 특별히 “집회의 우두머리”로
일컬어지는 회당장은 건물을 관리하며, 예배 순서의 작성 및 질서 유지, 심지어
재판과 같은 사무 증을 관할하던 장로 출신의 지도자였다(눅 4:13 ; 8:41;행 18:
8,17). 실로 이들은 제사장 계급의 상대적 실추(失墜)로 인해 소위 종교 민주화를
통해 등장한 평신도 계급(the laymen classes)들로서 이들의 등장은 곧 종교적 관
심을 일반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제사장은 아니지만 예배를 주관하고 회
당을 관리하며 다스리는 사람들이다. 때로 “회당장”이라는 명칭은 명예직으로서
행정적인 의무는 없으나 회중 가운데 탁월한 인물에게 이 직위가 주어지기도 하였
다. 따라서 이들은 당시 대중들로부터 상당한 존경의 대상이었다. 야이로(Jairus)
는 바로 이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야이로 역시 그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로
부터 존경받는 사람이었다고 보는데는 의심할 바 없다.
ㅇ야이로 - 이는 “깨달은 사람” 내지는 “그는 빛난다”는 뜻의 히브리어 이름
“야일”의 헬라식 발음으로 이해된다(민 32:41 ; 삿 10:3).
ㅇ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 발 아래 엎드렸다는 것은 최대의 존경을 표현하
는 것이다. 회당장의 신분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존경받는 사회적 지위를 가
졌다면 이 장면은 ① 예수를 최고의 지위로 높이는 절대 겸손의 모습니다. 사실 그
당시 예수는 일반적으로 한 새로운 랍비 정도에 불과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던 터
였기 때문에 유대의 종교를 대표할 만한 종교 지도층 인사가 그 앞에 무릎 꿇는 것
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② 예수의 치료이적이 그 지방에 아주 신빙성있고
믿을 만한 소문으로 알려져 있음을 암시한다. 즉 그 지방의 존경받는 회당장이 기
적을 요청한 사실은 예수의 이적 행위에 대한 공적인 신뢰감을 증명하는 것이다.
③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철저한 믿음과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취한 회당장의 신앙
적 행동을 보여 준다. 회당장이 직접 바닷가에 많은 무리가 모인 곳으로 예수를 찾
아왔고 그러한 행동에 옮기기까지는 예수에 대한 믿음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불가능
했을 것이다.

23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ㅇ많이 간구하여 - 회당장은 마치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한 자처럼 필사적(必死的)
으로 거듭 반복해서 예수께 간절히 매어달렸다.
내 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 회당장이 예수께로 온 목적을 밝히고 있다. 이유는
“어린 딸이 다 죽게 된” 때문이다. 여기서 “어린 딸(뒤가트리온)이란 조그마한
여아를 깊은 애정으로 부를 때 사용하던 말이다. 이를 통해 야이로의 자식에 대한
애끙는 심정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죽게 되었사오니“(에스카토스 에케이)란
지금 즉음이 문 앞에 서 있을 만큼 그 병세가 최악의 상태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물론 그 딸의 병명은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한편 누가 복음에서는 회당장
이 직접 말하지 않고 기록자 누가가 담담히 설명하고 있는데, 어린 딸의 나이가 12
살임을 밝히고 있다(눅 8:42). 그리고 회당장은 다만 예수께서 자기 집으로 가주기
만을 간청한다(눅 8:41).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내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마
9:18)라고 말함으로써 절망적인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즉 마가와 누가복
음은 ”죽게 된 지경“을 말하고 마태복음은 이미 죽은 것으로 묘사한다. 이 같은
차이점은 마태가 마가복음에도 뒤에 기술되고 있는(35절) 이미 딸이 죽었다는 사실
을 본시점과 종합하여 서술한 째문인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어쨌든 세 복음
서의 공통된 점은 사태가 매우 급박(急迫)하다는 것이다.
ㅇ손을 얹으사 -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께서 그 손을 딸의 몸위에 얹으면 곧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 실로 회당장의 간청은 확신적이고 매우 구체적이
다. 이는 병 치유에 대한 전권을 인정한 것이다. 여기 손을 얹어 안수하는 것은 하
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바라는 행위이자 치병을 이한 일반적 행위로 알려져 있다(6:
5 ; 8:23, 25 ; 약 5:14-16). 따라서 회당장의 이 같은 안수에서 요청은 예수의 능
력과 권위를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며 그의 은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ㅇ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 여기서 “구원을 얻어”(소데)란 “구원하다”, “보
전하다”, “놓아주다”, “병을 고치다”는 뜻을 지닌 (소조)의 부정과거 가정법
수동태로서 예수로 인한 병의 회복, 곧 건강을 기원한 말이다. 따라서 본문을 재해
석하면 “(당신으로부터) 건강을 회복하여 (계속) 살게 하소서”가 된다.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쌔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ㅇ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에워싸 - 야이로의 간청을 받아들여 그의 집으로
출발하는 장면 묘사이다. 여기서 “가실새”(아펠덴)란 부정 과거 시제를 취하여
예수께서 곧바로 출발하셨음을 암시한다. 즉 예수는 즉각적 응답으로써 그의 간청
에 호응하셨다. 이렇게 예수께서 급히 이동하자 바닷가에 모였던 많은 사람들이 예
수를 따라 이동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무리들의 행동을 표현한 “따
라가며”, “에워싸 밀더라”는 표현은 각각 미완료시제를 사용하여 예수를 따르
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예수를 좇으며, 더욱이 예수께 접근하기 위해 계속 몸을 부
딪히는 혼잡함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이 같은 장면은 그 당시 예수를 중심한 분
위기가 매우 열기가 있음을 보여 주며, 따라서 예수의 명성과 인기가 대단한 것이
었음을 알 수 있다.

25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ㅇ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 여기서 상황이 바뀌고 있다. 야이로 회단장의 이야기에
서 갑자기 12년동안 혈루증(血漏症)을 앓는 여인이 등장한다. 여기서 혈루증
(subject to bleeeding, NIV)은 현대의학 용어인 “혈루병”이 아니다. “혈루병”
은 여자에게 유전 인자로 잠재할 수는 있어도 병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남자에
게는 유전으로 잠재성과 병으로 모두 나타난다. 따라서 여기서의 혈루증은 만성 하
혈증(下血症)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자궁(uterus) 안에 종기가 생기거나 어떤
이상이 생겨 불규틱적으로 피가 흐르는 중세일 것이로 간주했다(레 15:25). 따라서
종교 생활 뿐 아니라 사회적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특히 이 여인의 병이 12
년(“12”는 완전수 또는 하나님의 계회과 성취를 나타내는 수로 상징됨)이나된 병
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병이 치유될 수 없는 불치의 병임을 암시하고 있다. 또 이
여인이 병으로 받는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통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처참(悽
慘)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형편은 25절에서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한편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는 그녀가 파네아스 출신의 이방인 베로니카
(Veronica)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ㅇ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 혈루증을 앓는 이 여인은 많은 의사를 찾
아다니며 치료를 위한 노력을 한 것으로 소개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의적 노력을 더
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 의원들은 그녀에게 더 심한 고통만을 안겨 주었다. 이에 대
해 의사 출신인 누가는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했다”(눅 8:43)는 말로써 동료
의사들의 한계 상황을 깊이 배려하며 적절히 묘사하고 있다(Robertson). 한편 당시의
시대적 배경으로 보아 이 여인의 가정은 어느 정도 부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
면 당시는 부자가 아니면 의사를 찾아 갈 수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재산을 치료비로 다 써버리고 이제는 가난한 처지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병은
더 악화되었다는 묘사는 25절에서 12년 동안 병을 앓아왔다는 표현과 함께 ① 병의
불치성과 ② 의술의 무력함을 나타내 보이고 ③ 인간적인 모든 수고가 허사로 돌아
갔다는 절망적인 상황 묘사와 ④ 그 여인이 받고 있는 고통이 진퇴 양난(進退兩難)
의 절박(切迫)한 상황임을 암시하고 있다. 재산을 치료비로 다 허비하고 남은 것은
병든 몸 하나이고 그나마 병은 더욱 악화되고 병의 부정함 때문에 사람들과 사회로부
터 소외된 여인의 모습은(레 15:25-28) 인간 최악의 한계 상황에 다다른 것이다. 삶과
존재의 기반이 송두리째 상실되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이 여인의 모습은 4장의 풍랑
을 만난 제자들의 모습과 2-5절의 귀신들린 사람과 2,23절의 죽음 직전에 이른 야이로
의 딸과 함께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인간의 유한성과 인간적인 노력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이처럼 그 혈루증의 여인은 더 이상 자기의 힘
으로 어찌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비로서 번정한 구원자 예수를 찾게 된
것이다.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ㅇ소문을 듣고.... 옷에 손을 대니 - 절망의 벽에 부딪힌 이 여인은 예수의 치병 기적
에 대한 소문을 상세하게 들은 것으로 보인다. 이 여인의 믿음은 예수의 옷에만 손을
대도 자신의 병이 치유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은 앞에서(23절) 언급된 야
이로 회당장의 진술과는 차이가 있ek. 야이로의 믿음처럼 예수께서 주체가 되어 환자
와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환자가 예수에게 접촉을 함으로써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이러한 형태는 3:10 ; 6:56에서도 나타난다. 즉 예수를 만지게 해 달
라거나 옷에라도 손을 대게 해 달라는 간청은 예수에게 치유의 능력이 충만하다는 확
신에 찬 믿음의 결과이다. 따라서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치유받고자 하는 사람의 믿
음을 강조하는 점이다. 이 여인은 직접 보고 믿은 것이 아니라 소문을 통하여 믿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예수를 만지게 되는데,
이 같으 사실은 그녀의 담대함(간절함)과 겸손함을 대변해 주는 행동이다. 즉 그녀
는 사회 통념상 여자로서 뿐 아니라 부정한 자로서 공중(公衆) 앞에 나설 수 없는(접
촉 불가) 입장이었으나 그러한 사회, 종교적 장애를 극복하고 담대히 예수께 접근했
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몰래 감추고 자신의 병을 가만히 치유하고
자 하는 마음에서 예수의 “뒤로” 온 것이다. 한편 마태는 그녀가 예수의 “겉옷
가”(the edge of his cloak, NIV)를 만졌다고 기록하고 있다(마 9:20). 즉 그녀는
예수와 접촉함으로써 율법적으로는 예수를 부정케 만든 결과가 되었다(레 15:19-27).
그러나 생명의 주께서는 이 모든 의식적 부정을 초월(超越)하여 그녀의 믿음을 받아
들이셨다.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ㅇ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얻으리라 함일러라 - 그녀가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이유를 설명한다. 사실 그녀의 이 같은 심정에는 미신적(superstitious)
요소가 전혀 없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녀는 오직 예수만이 자신의 문제
를 해결해 주실 구원자이심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한편
“함일러라”(엘레겐)는 미완료 시제로서 그녀가 마음속으로 그 같은 사실을 되뇌이
고 또 되뇌였음을 보여 준다.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ㅇ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 여인의 믿음대로 병은 즉각적으로 치료되었다. 실
로 12년 동안 한시도 그녀의 몸에서 출혈(出血)이 떠나지 않은 그 지독한 병증이
완전히 제거된 것이다. 이 상황을 공동번역은 “출혈이 그치고”라고 번역하고 있다.
특히 “혈루의 근원”이라는 표현은 병의 치료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치
료된 것을 암시한다. 이와 같은 표현법은 치료의 즉각성과 피료의 완벽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로써 그녀는 12년의 정신적 고통이 함께 해결된 것이다. 이러한 치료는
예수와의 전인격적(全人格的) 접촉(교제)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모든 문제의 유일한
해결 방법이라는 사실과 동시에 예수의 능력과 권위를 더 높이는 것이었다.
ㅇ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 병이 나았다는 것을 자신이 직접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즉 그녀는 혈루의 근원이 근절되자 곧 자신의 치유를 자각(自覺)하게 된 것
이다. 결국 이 같은 자각은 곧 그 치유가 몸으로 직접 느낄 정도로 완전하고도 신속
하게 치유되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은 즉각적이고 근원적인 치유 기적이 발생한 놀라
움과 대조를 이루는 것은 27절에서 묘사된 여인의 행동이다. 그녀는 환자의 연약한
몸과 여자라는 핸디캡(handicap)을 갖고 그 많은 군중 속에서 겨우 예수의 뒤쪽에서
손을 옷에 대었다. 간청을 한 적도 없고 믿음을 예수께 밝힌 적도 없는 이 여인에게
기적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실은 이 여인이 갖고 있는 믿음이 공개된 사실은 없지만
이미 숨겨진 믿음도 기적을 일으킬 만한 가치가 있음을 암시한다(히 11:6). 실로 예
수는 인간의 심령을 살피는 분으로서 그 소원의 깊이를 조용히 알아보고 계셨던 것
이다(마 6:6).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ㅇ능력이......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 치유 기적이 예수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즉 예수께서 자신에게서 치유의 능력이 나간 사실과
누가 자신의 옷에 손을 댄 사실을 감지한 것이다. 사실 그 치료받은 여인은 모든 것
을 은밀히, 조용히 심지어 예수마저 모르게 해결하고자(27절) 했었다. 물론 이 같은
그녀의 생각은 심히 어리석은 것이었지만 그녀의 겸손하고도 조용한 일면을 보여 준
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예수는 사람들이 혼잡한 다운데서도(31절) 당신의 전지성
(全知性)으로써 그녀의 간절한 소망을 이미 알고 계셨고 또 그녀가 당신의 옷자락을
만지신 것도 알고 계셨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당신이 친히 그녀의 소망을 들어 주셔
서 그녀의 치유를 허락해 주신 것이다. 여기 “스스로 아시고”(에피그누스 엔헤아우
토)란 완전하고도 초월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결국 이 말은 예수께서 그 여인의 행위
의 동기와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모두 알고 계셨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당신의 능력
이 나간 줄 아신 것이 수동적인 의미에서의 지식이 아니라 곧 그 여인이 치료된 사실
을 예수께서 뒤늦게 아신 것이 아니었다. 이는 예수께서 그 치료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능동적인 깨달음, 곧 당신이 그 능력을 능동적으로 계획하셨고 또한 발휘하셨음
을 보여 준다.
ㅇ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 예수께서 그 간은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셨기 때문
에 이 질문을 하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는 내밀한 이적을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
개하시기 위해 이 같은 빌문을 의도적으로 하셨을 것이다(Calvin Donald W.
Burdick). 그와 더불어 생각되는 바는 33, 34절의 내용으로 보아 치료받은 사람과 인
격적(人格的)인 관계를 �기 위함인 것으로도 보인다. 병의 치료는 단순히 물
리적인 치료만이 완전 치유가 아니다. 병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 역시 신체적 고통 못
지 않게 큰 것이므로 인격적 만남 속에 병이 치유되어야 함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
녀가 그녀의 졍을 고침받은 것이 미신적 신앙 때문에서가 아니라 진정한 신앙 때문이
라는 사실을 그녀가 손으로 당신의 옷자락만 잡기보다 그 영(靈)으로 당신의 거룩한
인격을 잡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ㅇ제자들이 여짜오되.....물으셨나이까 - 여기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손을 댄 사람을
찾으시는 것에 대하여 불만 섞인 응답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혼잡하
고, 또 사람들이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누가 옷에 손을 대었는지 어떻게 알겠느냐는
식의 반문이다. 이 사실은 혈루증을 치유한 사실이 예수와 환자 자신밖에 므른다는
사실과 제자들의 영적 무지(육체적 접촉만 생각하고 영적 교감(靈的交感을 도외시함)
를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치유받은 여인은 즉각 나타나 고백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여인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상당히 큰 두려움을 갖고 있음을 보게
된다.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ㅇ예수께서......둘러 보시니.....여자가.....사실을 여짜온대 - 예수께서는 바로
군중들을 향해 몸을 돌리고 직접 찾으신다. 그리고 이 광경을 지켜 보는 치유받은
여인은 더 이산 사실을 숨긴 채 있을 수 없었다. 이 여인은 몹시 뚜려워하며 예수
앞에 엎드려 사실을 고백한다. 여기서 두 가지 강조점을 결견할 수 있다. 첫째는 예
수께서 여인을 찾으시는 행위이다. 제자들의 충명스런 변명에도 불구하고 계속 치유
된 여인을 찾고 있는 장면(“둘러 보시니”는 미완요시제)은 치유받은 자로부터 감
사의 인사를 받기 위힘도 아니고 치유를 확이니하기 위한도 아니다. 오직 치유받은
사람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그녀로 하여금 바른 신앙을 갖게끔 하기 위힌 것이다
(30절 주석 참조). 이것은 예수께서 고난받고 고통당하는 사람에 대한 강한 관심과
뜨거운 사랑 및 다함 없는 연민을 갖고 있음이 암시된다. 둘째는 치유받은 여인의
행위이다. 그녀는 몹시 두려워 하고 있었다. 이유는 ① 자신의 병이 종교적으로 부
정한 것이고 따라서 죄인 취급받는 신분이기 때문에 군중들 틈에 끼여들였다는 것을
공개하기에는 두려운 사실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② 또 그런 부정한 몸으로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다는 사실이 특히 여자의 신분으로서 불경건한 행위였기 때문일 것이다.
③ 그녀는 자신이 지금 받은 은혜를 예수로부터 훔쳐 낸 것 같은 심령을 가졌을 것이
다. 즉 그녀는예수 몰래 예수의 신적 능력을 이용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④ 마지막
으로 예수에 대한 깊은 경외감(敬畏感)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 여인이 예수 앞에
엎드린 모급은 22절의 장면을 연상케 한다. 즉 치유의 기적을 체험한 이 여인은 예수
에 대하여 신적인 권위와 초월적인 능력을 느꼈을 것이고 따라서 그에 따른 경외감이
두려움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한편 그녀는 예수의 강권적인 요구로(내밀한 요구였음)
자신의 만성적인 몹쓸 질병과 그 기적적 치유에 대한 모든 사연들을 무리들 앞에서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소위 신앙간증오로서, 결과적으로 예수의 크나큰 은혜에
부응하여 그분께 무한한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었으며, 또 그녀가 완전한 정
상인이 되었음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일이 되기도 했다. 실로 “은혜 위에 은혜”의
역사가 주어진 것이다.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

ㅇ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 예수께서 치유받은 여인에게 공개적으로 내린
구원 선언이다. 여기서 “딸아”(뒤가테르)란 성숙한 여자나 소녀를 향하여 애정어린
마음으로 친밀히 부르는 호칭으로서(23절) 예수께서 여인을 향하여 친히 이렇게 말씀
하신 곳은 복음서 가운제 본문이 유일하다. 실로 예수께서는 그녀로 하여금 그녀가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기 때문에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지닌 “믿
음” 떼문에 완전한 회복(구원)을 얻은 것임을 주지시키셨다. 그 “믿음”은 그녀가
예수에게 치유의 능력이 충만함을 확신한 것이다(27, 28절 주석 참조). 그리고 그 믿
음을 행위로 옮겼을 때 이 여인의 가장 절망적 문제였던 혈루증이 완전히 치유된 것
이다. 여기서 “구원하였으니”(세소켄)란 완료시제를 취하고 있어 그 구원이 이미
그녀에게 확실히 주어졌음을 소개한다. 그리고 여기서 이 구원은 현상적으로는 육체
적 구원과 영적 구원은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묘사되고 있다(2:1-12). 따라서 이 치
유의 체험은 질병으로 인한 모든 육체적 고통과 자신이 부정한 죄인이라는 정신적.
영적 굴레로부터 벗어남을 뜻한다(25절 주석 참조). 이와 같은 구원 선언을 예수께
서는 군중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이 여인이 더 이상 죄인이 아님을 선
언하고 있으며, 아울러 예수는 이 여인을 소외 당했던 사회로 다시 복귀시키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 같은 자유와 회복을 허락하시려고 그 여인을 그렇게 찾았던 것이다.
이 여인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또한 부정한 여인이 아니다. 한 사람의 구원은 죄
의식으로부터 풀려나는 것 뿐만 아니라 건강과 평화로운 사회 공동체에 복귀하여 행
복한 삶을 누리는 것까지 포함되는 것이다. 때문에 예수께서는 구원 선언을 한 다음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라고 감동적인 선언을 하고 있다. 여
기서 “평안히 가라”(Go in pease, NIV)는 문자적로 “평화를 향하여 가라”는 뜻보
다 “평화의 상태를 지니고 가라”로 보는 것이 좋다. 즉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영원
히 지워지지 않는 평화의 은총을 선사하신 것이다. 이 평안은 히브리인들의 전통적
인사말인 “샬롬”(삿 18:6 ; 삼상 1:17)을 훨씬 능가하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공
하신 것이다(요 14:27). 이 “평안”에 대해 혹자(Anderson)는 말하기를 “여기서
꼭 내적인 고뇌로부터의 해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
짐으로써 얻게 되는 생명의 완전함을 의미한다”고 했다. 여하틈 모든 인류가 이와
같이 평화로운 은총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는 것이 주님의 뜻일 것이다. 이러한 구원
선언은 눅 7:50 ; 17:19 ; 18:42 등에도 나타난다. 이렇듯 예수의 병치유의 기적은
내면적인 구원 문제와 연결된다. 따라서 치유의 목적이 단순한 병치유가 아니라 인간
의 근본적 구원과 관계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35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ㅇ아직 말씀하실 때에 - 마다의 현장감 넘치는 서술 기법이 또 한 번 돋보인다. 여
기서 이야기는 급전환된다. 혈루증 치유 기적으로 무리들과 함께 멈추어서 지체하는
사이에 야이로의 집으로부터 전강이 왔다. 물론 지금껏 예수 곁에서 모든 상황을 지
켜보고 있었던 야이로의 마음은 탈대로 다 타버린 상태였을 것이다. 그러한 애타는
상황 가운데 전해 진 내용은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는 혈루증
치유와 예수의 구원 선언으로 고조된 분위기를 잠재우는 소식이었다.
ㅇ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 여기서 “죽었나이다”(아페다넨)는 제 2과거 직설법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그 죽음이 변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임을 보고하고 있다. 따라
서 이제는 더 이상 손 쓸 필요가 없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ㅇ어찌하여 선생을 괴롭게 하나이까 - 이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상황을 강하게 묘
사하고 있다. 즉 야이로의 딸의 죽음을 전한 자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 생각했
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의 바르고 합리적인 발상으로써 예수를 더 이상 괴롭히
지 말 것을 간한 것이다. 한편 본문의 “괴롭게 하다”란 뜻의 원어 (스퀼로)는 원
래 짐승의 가죽이나 나무의 껍질을 벗길 때 사용하던 말로서 가혹하리만치 혹독한
고통이나 쓰라림을 뜻한다(마 9:36). 따라서 이 말은 더 이상 예수를 “귀찮게 하거
나 마음에 부담을 주지 말라”는 매우 단호한 요청으로 볼 수 있다.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ㅇ곁에서 들으시고 -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예수께서 직접 들은 것이 아니
라 심부름꾼이 야이로에게 하는 말을 “엿들으셨다”(파라쿠사스). 그러나 예수께서
는 그들이 전한 말을 아예 무시하셨다. 실로 예수의 생명을 충성하게 하시는 사역
앞에서 이같은 절망적 소식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계속 당신
이 목적하신 바를 추진해 가셨고, 더불어 딸의 죽음 소식 앞에 절망하고 있는 야이로
를 격려하셨다. 이에 예수는 절망에 사로잡힌 야이로를 향해 희밍을 선언한다.
ㅇ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메 포부 모논 피스튜에) - “두려워 말라”, “믿기만
하라”는 이 이중 명령은 모두 현재형을 취하고 있어 그 같은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
는 엄명이다. 이는 곧 죽음의 소식에 마음 흔들리지 말고 지금껏 나를 향해 지니고
있었던 그 믿음, 그것을 계속하여 지니라는 말씀이다(롬 4:20, 21). 실로 예수는 당
신의 신적 본성을 의지하고 죽음을 훨씬 뛰어넘는 당신의 초월적인 능력을 계속 바
라보게 하신 것이다 두려움과 믿음은 항상 적대적 관계이다. 따라서 극한 절망 속에
있을 바로 그 시점에 모든 부정적 요소(두려움)를 떨치고 절대적 존재이신 예수를 절
대 신뢰하는 것은 참 용기요 참믿음이다. 예수께 지속적 신뢰를 갖는 이 믿음이야말
로 곧 생명의 유일한 열쇠이다.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

ㅇ베드로와 야고보와...요한 - 여기서부터 예수의 동행인이 제한된다. 즉 베드로아
야고보 그리고 요한만 예수와 동행한다. 예수께서는 지금 곧 일어나게 될 생명의 이
적을 직접 확인하고 후세에 전할 증거자로 3인의 가장 친밀한 제자를 선택하신 것이
다(신 19:15). 이 외에도 변화산 사건 때에도 이 세 제자가 언급되었고(9:2 ; 마 1
7:1 ; 눅 9:28), 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에도 이 세 제자의 이름이 거론된
다(14:33 ; 마 26:37). 이 사실로 미루어 예수는 제자들 중에 이 세 제자를 가장
신뢰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예수께서 이 세 사람 외에 다른 여타의 사람을 물리신
이유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당신의 사역의 진지함을 더하게 하시기 위해서 이거
나(구경거리로 삼게 되지 않기 위해) 또 다른 방해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서 였을 것
이다. 혹자(Robertson)는 야이로 가정의 주택 구조가 작았기 때문이라고 하는 재미
있는 이유를 제시하기도 하나 당시 야이로가 사회적으로 유력한 인사였다는 점에서
그의 주택이 내우 협소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ㅇ훤화함과.....울며.....통곡함 - 여기서 “훤화함”이란 어지러울 정도로 시끄러
이 떠드는 것을, “심히 통곡함”이란 마치 꽹과리가 울려 대듯이 크게 울어대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집안은 초상집
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여서 시끄럽게 떠들며 통곡하고 있었다.
마태복음에서는 피리를 불고 소란스럽게 떠들고 있음을 묘사한다(마 9:23). 유대인
들의 장례식은 흔히 정중한 분위기 보다는 조금 격앙스럽게 피리를 불고 통곡하며
소란하다. 또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하여 피리를 불고 울게도 하였다. 이처럼 직업
적으로 울어 주는 자들은 주로 여인드로서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 대성통곡하는 것
이 특징이다.
그리고 그 통곡 소리는 가슴 또는 손바닥을 치며 함창 혹은 교창(交昌)으로 이뤄진
다. 한편 사적으로 유력한 인사였던 야이로 집안이었기에 이러한 고용 통곡꾼 뿐 아
니라 많은 조문객(弔問客)과 가족 친지들을 합한다면 야이로의 집은 참으로 혼란스
러웠을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풍경은 죽음의 절망감과 함께 정신 못차릴 정도의 소
음과 호란스러움으로 인해 또다른 절망감으로 들어가세 한다. 어쨌든 야이로 집에
모여든 사람들은 다만 슬퍼하거나 그 아이의 죽음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길 뿐
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야일로 집안에 궁극적인 평안을 제공하지는 못했던 것
이다.

39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ㅇ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 예수께서는 절망적인 초상집 분위리를 극적으로 전환
시키고 있다. 즉 장례 풍습에 따라 통곡하며 소람스럽게 떠드는 행위를 급지시키고 있
는 것이다. 한편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면 “어찌하여 이처럼 야단들이냐 이제 그만
치우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아이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ㅇ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 혹자는 이를 축어적(逐語的)으로 해석하여 아이
가 정말 죽지 않고 단지 기절한 상태에 있었다고 주장한다(Olshausen). 그러나 누가의
기록(눅 8:55) 중 “그 영이 돌아와”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그 아이는 분명 영(靈)과
육(肉)이 분리된 죽은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죽은사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
은 헬레니즘(Hellenism)과 유대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완곡 어법이다(창 47:30 ; 단
12:2 ; 요 11:11 ; 행 7:60 ; 고전 15:18 ; 살전 5:10). 특별히 생명과 부활
(Resurrection)의 주이신 예수께서 인간의 죽음을 바라보실 때 그것은 영원한 허무나
절망이 아니라 잠시 잠간의 잠에 불과한 상태였음이 분명하다. 특별히 이 말씀은 그
소녀의 소생을 전제한 말씀이라는 점에서 볼 때 비록 죽음의 실재성은 명확한 사실이
나 그것은 단지 한시적(限時的)인 수면 상태와 같은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고전 15:
51). 진정 죽음과 삶의 지배권을 가지신 이 예수의 말씀은 모든 죽은 자와 죽어가는
우리 인생들에게 부활의 아름다운 희망을 갖게 하는 복음이 아닐 수 없다(욥 19:25-
27).

40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ㅇ저희가 비웃더라 - 예수께서 선언한 희망의 믿음이 다시 한 번 절망의 벽에 부딪
힌다. 즉 인간의 죽음을 영구한 종말로 보았던 주변의 사람들이 본질적(本質的)으로
무지한 자신들의 실상은 파악하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의 무지를 비웃었던 것이다.
여기서 “비웃더라”(카테게론)는 단어는 미완료 시제로서 그들의 조롱섞인 비웃음
이 계속되었음을 보여 준다. 어쨌든 이 비웃음은 결과적으로 그 소녀의 죽음이 현상
적(現象的)으로 명확한 사실이었다는 점과 또 이후에 그 소녀를 살리신 예수의 능력
은 참으로 신비하고 초월한 이적이었음을 반증하는 일이 되고 말았다.
ㅇ저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 - 여기 “내어 보내셨다”(에크발론)는 말은 강압적
으로 몰아내셨다는 뜻으로 위엄에 찬 예수의 권위를 엿보게 한다. 실로 예수는 당신
의 능력과 존재를 부인하고 희심하는 자들은 생명의 기적을 체험하는 특권에서 제외
시키고자 비난과 조소로 일관하는 무리들을 매몰차게 쫓아내셨다. 그리고 그곳에 당
신의 이적의 세 증인(제자들)과 그 아이의 부모만을 동참케 하셨다. 이 장면은 한
방문객에 불과한 예수가 그 집의 참 주인으로 향사하시는 기이한 모습을 보여 준다
(Benger, Robertson). 실로 예수가 주인으로 있는 가정은 곧 생명의 기적을 맛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질 것이다.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ㅇ아이의 손을 잡고 - 예수의 치유 행위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여기서는 아이의 손
을 잡는다. 이는 죽음을 향해 뻗는 생명의 손길로서 처음 야이로가 바닷가에 찾아와
예수께 간청할 때 아이에게 손을 얹어 달라고 한 사실을 기억나게 하는 장면이다
(23절). 이처럼 어린아이의 손을 잡는 예수의 모습은 참으로 진지하고 애정어린 인
자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절망에 처한 사람을 주님이 손잡아 주리라는 표
현은 출 3:20 ; 7:5 ; 시 37:24 ; 눅 1:66 ; 행 11:21 등 여러 군대 나타난다. 진정
주님은 절망 속에 헤메이는 영혼들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시고 참생명에로 인도하시는
친절한 안내자요 신실한 보호자가 되신다(시 23:2, 4)..
ㅇ달리다굼(탈리타 쿰) - 이 말은 예수 당시 팔레스틴에서 통용되던 아람어 탈리타
쿰에서 유래한 말로서 “탈리다”(소녀야란 뜻)와 “쿰”(일어나라는 뜻)의 합성어
이다. 이를 번역하면 “소녀야 일어나라”는 말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해석할 때
“내가 네게 말하노니”라는 말을 첨가시키고 있다. 이것은 “달리다굼”이라는 말
이 어머니가 아침에 아이를 깨울 때 사용하는 평범한 일상어라고 보았을 때, 그 말
의 신적 권위를 높이기 위해 마가가 추가시켜 해석한 첨가어로 보인다. “달리다굼”
이라는 말은 여기서만 나오고 마태복음(일으키시는 행동만 기록)과 누가복음(번역문
만을 기술)에서는 이 말이 없다. 여기서도 사실성과 생동감(生動感)을 특히 강조하
는 마가의 문장 기법이 돋보인다. 즉 마가는 주님께서 친히 사용하신 아람어의 이 단
문을 마치 현장을 재현하듯 분명히 기록하여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
다. 한편 마가는 이 아람어와 함께 번역문을 병기함으로써 아람어에 생소한 이방 독
자들을 향해 성실한 노력을 보여 주고 있다.
ㅇ소녀야........일어나라(토 코라시온.....에게이레) - 여기서 “일어나라”는 뜻의
“에게이레”는 2인칭 단수 현재 명령형으로서 단호하고도 권위에 찬 예수의 명령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사실 이 말은 앞에도 언급했듯이 해가 뜨는 아침에 부모가 아이를
사랑스러운 어조로 깨울 때 흔히 쓰던 말이었다는 점에서 본 장면은 새 아침의 환희와
정겨움을 더해 준다. 실로 생명(生命)과 부활(復活)의 새 지평을 여신 예수께서는 친
히 그 아침을 마면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죽어 있는 영혼들에게 그 아침을 맞이하도록
“달리다굼”으로 친히 깨우고 계신 것이다.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 두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ㅇ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 여기서는 치유의 결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즉 예
수의 말씀대로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걸었다고 묘사한다. 더욱이 마가는 “일어난”
(아네스테) 동작을 단순 과거 시제로 처리하고 곧이어 “걸어다닌”(페리에파테이)
동작을 미완료 시제로 묘사하여, 즉각적으 로깨어나 계속 방안을 이리저리 걸어다닌
사실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그녀의 나이가 12세였다는 사실은 그녀의 동작이
얼마나 가볍고 발랄했을까 하는 상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실로 그녀는 생명은 물론
원기(元氣)까지 회복하였던 것이다(Swete).한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걸었다는
이야기가 없다. 그 이유는 소녀가 다시 살아난 사실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켜 기술하
고자 했던 기록적 특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소녀의 나이가 12살이라는 사실을
누가복음에서는 이 이야기의 첫 부문에서 밝혔지만(눅 8:42) 마가는 이야기의 마지막
에서 밝히고 있다. 실로 이 12살이라는 나이는 인생에 있어서 이제 막 꽃이 피려는 시
기(유대법상으로는 만 12년 6새월 이후에는 겨혼 가능 연령이 됨)이다. 특이한 점은
소녀의 나이와 이야기의 중간에 일어났던 혈루증에 걸린 여인의 투병 기간이 같은 12
년으로 일치하고 있는 점이다. 성경에서 이 “12”라는 숫자가 완전수인 동시에 하나
님의 경륜과 계획의 성취를 나타내는 수라는 사실과 연결하여 생각해 봄직하다(창 49:
28 ; 겔 43:16 ; 계 21:12, 14).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 소녀의 소생과 원기 회복은 주위 사람들에게 정
신을 잃게 할 만큼 큰 충격으로 다가갔다. 여기서 놀라는 사람들은 40절에서 언급한
사실로 미루어 소녀의 부모와 요한, 베드로, 야고보이었을 것이다. 그 중 누가의 기록
에 의하면 그 부모가 가장 큰 충격을 맏은 것으로 나타난다(눅 8:56). 특히 마가는 그
들이 놀란 것을 “크게”라는 말과 “놀라거늘”이라는 반복법을 통하여 그들이 마치
황홀지경(恍惚之境)에라도 빠진 듯이 완전히 혼이 나간 상태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기적은 둔중 속에서 공개적으로 일어난 혈루증 치유 기적과는 전혀 달리 실내에서
그리고 몇 명 안되는 목겨자만 있는 은밀한 곳에서 조용하게 일어난 점이 특징적이다.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ㅇ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 - 여기서 예수는 또 다시 기적적인 사건에 대해 목격자
들에게 비밀로 할 것을 명령한다(1:44 ; 3:12 ; 마 12:16 ; 16:20 ; 17:9 ;눅 8:
56). 이것은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고 그 사실을 알리라고 한 점과(19절) 혈루증 환
자의 치유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사실(34절)과는 대조적이다. 예수의 이 같은 행위는
메시야의 자기 공개 시기가(마 16장) 이를 때까지 언제나 그러했듯이 당신의 놀라운
이적과 가사에 관한 소문이 대중들에 의해 문제화(問題化) 되지 않게 되기를 바란 것
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아이가 살아난 것을 비밀로 하기에는 불가능하기
때문에(이미 많은 사람들이 아이의 죽음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그 부모들이 그 아이
들을 숨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마가는 메시야 은닉의 주제
(Messianjc-secret motif)를 인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대해
혹자(Cranfield)는, 예수께서 그러한 말씀을 한 것은 그 일을 절대적으로 비밀에 붙
이라는 의미로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가능한 한  그 일이 널리 알려지지 않기를 원했
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즉 알 필요가 없는 자들에게까지 그 기적에 대
해 알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실로 메시야로서 예수의 신성은 그것을 믿을 준비
가 되어 있는 자들에게는 공개되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감춰진다. 어쨌든
마태는 그 소문이 온 땅에 퍼진 사실을 보고하고 있다(마 9:26).
ㅇ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 이 명령은 소녀가 완벽하게 다시 살아났음을 확인하게
한다. 즉 모든 몸의 기능이 정상적인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느 즉각적이면서
도 완전한 인간 회복이요, 부분적 구원이 아니라 전체적인 구원이다. 이러한 의미에
서 볼 때 예수의 치유 기적을 소개한 본장에서 치유 받은 모든 사람들의 완전한 회복
이 강조되었다. 귀신들린 자는 가족과 사회 공동체로 복귀함으로써 구원을 받았고 혈
루증 환자 역시 근본적 치료로써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
(34절 주석 참조). 아야로의 딸도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는 것이라고 말하심으로써
소녀에게 전혀 이상이 없음을 말리면서 정상적으로 잠에서 막 깨어난 아이처럼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것이다. 한편 예수의 이 같은 명령은 전인적인 생명을 다시 제공하
신 크나큰 사랑과 더불어 그 아이가 몹시 아파있을 동안 매우 굶주려 있었을 것이라
는 사실을 아시고 그 아이에게 자상하게 먹을것까지 제공하게 하시는 당신의 구체적
이고 실제적인 사랑을 보여 준다. 진정 예수는 영혼의 문제뿐 아니라 육신의 문제까
지도 해결하시는 궁극적인 해결자이셨던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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