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장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ㅇ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 이는 연속적으로 기록된
다섯 번의 충돌 기사 중 마지막 사건에 해당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마가는 시기(時期)나 지리적 위치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는 단순히 안식일에 대한 예수의 입장
을 밝히기 위해서 사용된 또 하나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
서 '다시'란 2장의 직접적인 반복을 일컫지 않는다. 다만 내용
의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마가가 의도적으로 붙인 연결구라
할 수 있다. 한편 본구절은 1:21, 39에서와 같이 예수가 회당
에 들어가셨음을 평범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그 같은 묘
사를 통해 본구절은 예수가 자주 안식일에 회당에 가시는 분이
심을 은연중에 시사하고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본
문은 어떤 안식일에 만난 특별한 사건이 이야기되고 있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 보아야 옳을 것이다(눅 4:16 주석 참조).
ㅇ한 편 손 마른 사람이 - 여기서 손 마른 상태를 묘사한 헬라
어 '엑세람메넨'은 완료 수동태 분사형으로서 이는 그의 신체
장애가 선천적인 것이기보다 후천적인 것으로, 어떤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근육이 마비되고 손이 말라 버려 활동력이 완전히
상실된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Robertson, Vincent). 한편
누가는 힘의 상징인 그의 오른 손이 마른 것이라 표현함으로써
(눅 6:6) 그 처지가 절박했던 사실을 더욱 세밀히 묘사해 주고
있다. 혹자는 이것을 중풍병이라 보기도 한다(Donald W.
Burdick). 어쨌든 말라 비틀어진 이 손은 결국 그의 삶의 위축
과 장애 상태(Gebrauchsun fahigkeit)가 얼마나 심각했
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제롬(Jerome)이
언급한 바, 나사렛파(the Nazarenes)와 에비온파(the
Ebionites)에서 쓰는 묵시 복음서(Apocryphal Gospel)
와 외경 히브리 복음서(Hebraerevangelium)에는 이 병
자가 미장이로서 손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사람이었다고 기
술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보자 자신이 수치스럽게 구
걸하지 않도록 자신의 병을 치료해 줄 것을 호소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병자의 처지가 그렇게 다급한 것으로 묘사되
고 있지는 않다. 단지 마가는 본문을 통해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안식일 개념이 과연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서 더 깊은 관심을 보
이고 있을 뿐이다.
2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ㅇ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 마가는 여기에 등장하는 반
대편 사람들의 신분을 자세히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마가가
막연하게 '사람들'이라고 했지만 그들의 정체는 분명하다. 6절에
서는 바리새인들이 언급되고, 평행 구절인 눅 6:7에서는 '서기관
과 바리새인들'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예수께서는 이미 율법주
의자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비정통적인 언행을 일삼고 있었고,
특히 안식일 규정에 대한 매우 위험한 교훈을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번 안식일 논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예수에
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에게 있었으므로 큰 충돌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예수가 안식일 규정을 직접 파기
하기 직전 상황에 있었으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온 촉각을
곤두세우고 예수의 행동 거지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한편 마가는 예수의 허물을 찾으려고 눈에 빛을 내고 있던 그들
의 목적 의식에 대해 '송사하려 하여'(a reason to
accuse, NIV)라는 말로 묘사하고 있다(마 12:10;눅 6:7).
이는 결국 그 적대자들이 예수를 고발하기로 이미 작정하고 있
었음을 보여 준다. 사실 그 당시 회당은 지방 법정 역할까지
도 수행하던 곳이었다는 점에서(마 12:10) 예수의 회당 안(內)
치유 사역은 어쩌면 상당히 불리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ㅇ안식일에...고치시는가 엿보거늘 - '엿보거늘'(파레테룬)은
'지켜보다', '주시하다'는 뜻인 '파라테레오'의 미완료 과거 시
제로서 사람들이 예수에 대한 고소거리를 찾기 위해 계속적으로
예수 주변에 머물면서 적의에 찬 눈으로 면밀(綿密)히 바라보고
있었음을 나타내 준다(눅 14:1;20:20). 사실 당시 안식일 규정
에는 매우 세밀한 조항까지 만들어 가며 안식일 준수를 강조하
고 있던 터였다. 한 가지 실례로써 어떤 사람 위에 집이 무너질
경우 생명이 위협을 받으므로 구조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하
지만 만약 그 밑에 깔린 자가 이미 죽은 것이 판명되면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그 구조 작업이 연기되어야만 했을 정도이다. 그런
점에서 그 '손 마른 자'는 긴급한 생명 구조가 필요한 상태가 아
니었기 때문에 예수의 치유 사역은 부당한 것으로 정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이란 말씀으로 보아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실 능력을
가지셨음을 깨닫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관심은 '할 수 있는
가'에 있지 않고 '할 것인가'에 있었다(Gnilka).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ㅇ예수께서...일어서라 하시고 - 예수께서는 마치 적대자들의 기
대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병자에게 '한가운데 일어서라'고 요구하
신다. 그러나 이 요구는 안식일의 참의미를 주위에 앉은 모든 사
람들에게 깨우치기 위한 것이었다. 실로 안식일은 천지를 창조하
신 하나님의 권능에 찬 창조 사역을 기리고 또 참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거룩한 날이다(창 2:2;출 16:23;20:8-11). 바로 이날에 지
금껏 하나님의 창조 원형에서 어그러진 불구의 몸으로 고생하며
참평안을 몰랐던 손 마른 사람에게 온전한 몸으로 되돌려 주는
것처럼 안식일을 참되게 보내는 것은 없을 것이다. 특별히 본 기
적의 시위적인(demonstrative) 성격은 2:1-12에 제시된 중풍
병자 치유 사역을 연상시켜 주며, 동시에 은연중에 예수의 안식을
규정 파기를 기대하며 촉각을 곤두세웠던 적대자들의 악의에 찬
행동에 크나큰 충격을 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진정 예수는 당
신의 적대자들이 가만히 엿보던 비겁함과는 대조적으로 그 손 마
른 자를 일으켜서 한 가운데 나가게 하셨다. 그리하여 당신의 초
월적인 권능을 공개적으로 제시하심으로써 당신이야말로 참된 의
원이요 오실 메시야이심을 강력히 내비치셨다.
4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ㅇ안식일에...어느 것이 옳으냐 - 당신의 고소를 전제한 적대자
들의 예민한 촉각을 향해 예수께서는 병행 구조로 된 이중적인
질문으로 그들의 불타오르는 적개심에 오히려 도전하셨다. 한편
이 같은 예수의 질문은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무엇이 요청되는가
에 대한 필요성의 원칙에 입각한 것이다(Donald W. Burdick).
실로 인간에게 궁극적으로 유익을 제공하고 생명을 보존하게 하
는 일은 그것이 곧 최상의 선(Summum bonum)이요, 타인의
필요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더 나아가
법조문에 얽매여 자신의 무관심을 합리화하는 것은 그것이 곧 악
(惡)인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을 돕는 선한 행위를
생명을 구하는 것과 동일하게 여기심으로써 안식일에 그러한 일
들이 허락될 수 있다고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생명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하다고 간주
하심으로써 적대자들의 견해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이렇게 인간
을 위해 정열적으로 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지한 노력을 단순
히 도덕적인 선행으로 평가 절하(平價切下)해서는 안 된다. 진정
예수의 이 같은 노력은 왜곡된 진리를 바로잡고 인생들에게 궁극
적인 구원을 허락하시기 위한 신적(神的)인 사랑의 행위인 것이
다. 한편 본문에 제시된 반립(反立)명제를 요약하면 (1) 살인 행
위와 곤궁에 빠진 자를 구하려 하지 않는 행위는 별 차이가 없다
는 뜻으로 볼 수 있다(Calvin). 실로 선행을 거부하는 것은 곧
살인과 같은 악행을 간접 조장하는 것이다(약 4:17). (2) 하나님
의 뜻은 생명을 구하는 것, 즉 건강을 회복시키는 것이지 6절의
바리새인들과 같이 살인 음모를 꾸미려는 것이 아니다. 사실 예
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사악한 마음을 간파하시고 본문의 말씀을
하셨을 수도 있다. (3) 여기에는 사단의 음모를 멸하시는 예수의
사명(使命)이 암시되어 있는 것 같다. 병과 상처는 궁극적으로
사단의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를 멸하러 오셨다. 한편 사단은 1
주일 내내 악을 행하기 때문에 다른 엿새와 마찬가지로 안식일에
도 사단과의 싸움은 계속되어야 한다(T. W. Manson).
ㅇ저희가 잠잠하거늘(호이 데 에시오폰) - 이는 3인칭 미완료 시
상으로 예수의 적대자들이 아무런 답변을 하지 못한 채 계속 머
뭇거리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욥 5:16;시 63:11;행 4:14;딛 2:8
;벧전 2:15). 실로 그들은 자신들이 지닌 형식주의적 율법관에도
자신이 없었을 뿐 아니라 참 진리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는 무기력
한 종교인들이었던 것이다.
5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ㅇ저희 마음의 완악(頑惡)함을 근심하사 - 여기서 '완악함'(포로
세이)이란 마치 대리석처럼 단단히 굳어버린 완고한 마음 상태를
일컫는다. 진정 유대인의 개념으로 볼 때 '마음'은 인간의 지.정.
의를 모두 포함하는 전인격의 좌소로서 마음이 굳어버리면 예수가
전하고 보여 주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올바른 행
동을 할 수도 없게 된다. 예수께서는 이 완고함을 목도하시고 '근
심하셨다'. 여기 '근심하사'(쉴뤼푸메노스)란 '함께'란 뜻의 '쉰'
과 '걱정하다'는 뜻의 '뤼페오'의 합성어로서 상대방의 입장에 서
서 함께 염려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의미한다. 특별히 이 '뤼
페오'는 현재 시상을 이루고 있어 예수의 근심하시는 상태가 오래
지속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완악함으로 인한 무
지(無知)를 애끓는 심령으로 바라보시는 예수의 이 같은 모습은
바로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의
한계와 아픔에 함께 동참하시기를 원하시는 예수의 뜨거운 인간
애(人間愛)를 보여 준다.
ㅇ노하심으로...둘러보시고 - 여기 '노하심으로'(메트 오르게스)
란 마치 이글거리는 눈으로 보듯이 매우 분노하신 상태를 암시한
다. 이것이 바로 마가의 복음서가 지닌 특징이다. 즉 마가는 전
혀 숨김 없이 예수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다(10
:14). 사실 예수께서 노하셨다는 표현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1:41). 그런데 그가 노하신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의 감정에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표현된 적은 결코 없다. 이
'분노'는 곧 부정과 부패에 대한 정의의 분노 곧 의분(義憤)으로
서 이것은 인간의 도덕적 기본 덕목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조화를 이룬다(Grant). 실로 예수는 당신의 적대자들이 지닌 그
릇된 마음, 죄악에 가득찬 눈길에 분노를 터뜨리셨지만 그 영혼에
대해서는 한없는 사랑으로 근심해 주셨던 것이다. 한편 '둘러 보
시고'(페리블렙사메노스)는 주로 많은 목격자들이 있음을 보여
줄 때 사용된 용어로(34절;5:32;9:8;10:23;11:11) 순간적으로 쭉
한번 둘러보셨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는 곧 예수의 분노의 대
상이 주위 많은 사람들이었음을 간접 시사해 주고 있다.
ㅇ네 손을 내밀라...회복되었더라 - 예수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
시고자 하셨다(4절). 그리하여 병자에게 명령하셨고 그 병자는
즉시 순종함으로써 완전한 회복을 체험할 수 있었다. 이때 예수
는 오직 '말씀'으로 그 능력을 행사하셨다. 이 '말씀'은 곧 당신
께서 친히 태초에 온 우주를 창조하실 때의 그 능력과 동일한 능
력을 지닌 것이다(요 1:1-3). 따라서 예수의 그 말씀 한마디는
그 어떤 비뚤어지고 파괴된 것이라 할지라도 능히 원래의 모습
으로 온전케 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능
력은 예수의 명령에 오직 순종으로, 오직 신앙으로 대답하는 자
에게만 창조 원형으로의 완전함을 제공한다.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ㅇ바리새인들이...헤롯당과 함께 - 병고침의 결과는 놀람도 환
호도 아니고 오히려 적대감을 증대시켰을 뿐이다(H. Van
der Loos, The Miracle of Jesus, p. 438). 바리새인
들은 이제 헤롯당과 함께 손을 잡고 예수를 죽이려고 의논했다.
헤롯당은 종교적 집단이기보다 해롯가문에 정치적으로 봉사하는
정치적 당파였다. 즉 헤롯당은 갈릴리를 관할하던 헤롯 안디바
를 중심으로 하여 헤롯 왕가의 부흥을 꾀한 집단으로서 사회.
종교적 기존 질서와 법률의 고수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Grant, Taylor).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기득권 유지를 위
해 로마 제국의 지배에 긍정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소위 민
족적으로 비애국적 집단이었다. 이에 비해 철저한 애국주의자
들인 바리새인들은 외세를 철저히 배격하는 보수주의자들인
관계로, 헤롯당과는 평소에도 원수처럼 지내던 사이로서 양자
간의 동맹(同盟)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놀라
웁게도 자신들의 기득권과 기존 질서를 와해시킬 위험성이 다
분한 예수 제거에 있어서만은 생각이 일치함으로써 참으로 어
색한 동맹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갈릴리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갈릴리를 관할하던 헤롯 안디바
추종자들과의 제휴를 필연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듯하다.
ㅇ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 바리새인들은 조금 전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에 대한 예수의 질문에 대해 예수를 안
식일 파기자(破棄者)로 단죄하고(출 31:14) '어떻게 죽일꼬'하
는 사악한 답변을 세속적 집단(헤롯당)과 함께 진지하게 의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종교와 정치가 결합할 때 생겨나는 필
연적인 발상이다. 실로 참진리에 대한 세속 집단의 반응은 이
처럼 항상 진리 파괴적 성향을 띠지만 겸손한 영혼의 반응은
항상 자기 파괴(자기 부인)적 경향을 띠게 된다(행 2:37). 어
쨌든 이로써 예수의 적대 세력은 노골적으로 예수를 처형키 위
한 계획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좇으며
ㅇ예수께서...바다로 물러가시니 - 왜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로 물러가셨는가? 마가는 그 이유에 대하여 특별히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마 12:15에 헬라어 '그누스'(아시고', 즉 예수께
서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음모에 대하여 아시고)라는 말이 사
용된 것을 볼 때 예수께서 계셨던 곳(가버나움)에서 떠나신 이
유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을 잡아 죽이기로 결정한 것을
아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죽음의 순간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갈릴리 바다 어느 한적한 곳으
로 물러가셨던 것이다(6:31, 46;7:24, 31;9:2;10:1;14:32). 그
러나 거기서 예수께서는 또 다시 무리들을 만나게 되었다.
8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허다한 무리가 그의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ㅇ유대와...시돈 근처에서...나아오는지라 - 예수께서 몰려들
었던 무리들은 가버나움 근방에서뿐 아니라 남쪽 지방(예루살
렘, 이두매), 동쪽 지방(요단강 건너편), 북서쪽 지방(두로와
시돈) 등 온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마가가 여러 지방 이름을
여기서 언급한 것은 팔레스틴 전역에서 무리들이 예수께 나아
왔음을 암시하기 위해서다. 이에 대해 슈바이쩌(Schweizer)
는 '예수께서 활동하신 곳이 갈릴리(1-6장), 두로, 시돈, 데
가볼리(7장) 그리고 요단강 건너편과 예루살렘으로 언급된 것
으로 보아 마가복음의 지리적 범위의 윤곽을 알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한편 여기에는 예수께서 직접 활동하시지 않은 유
일한 지역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두매 곧 헤브론 남쪽 지역이
다. 이곳에 언급 되어 있는 지명 가운데 몇몇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보자. 이두매 지역은 유대 남쪽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
으로 '이두매'는 구약 '에돔'의 헬라 음역이다. 에돔은 본래
요단.아르바의 동쪽 모압 남쪽의 산지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B.C. 586년 예루살렘 멸망이후 광야의 아랍족속의 세력에
눌려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 후자의 지역이 '이두매'란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유다 마카비는 이두 매인들을 공략
하여 여러 번 성공하였다. 그 후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가 통치 할 무렵에 이두매인들은 유대교
(Judaism)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 그
리스도 당시에는 헤브론 주변 지역을 모두 이두매에 포함시켰
다. 헤롯 대왕이 바로 이이두매 출신이었는데(마 2:1), 그의
여러 아들들은 유대의 정치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인
물들이었다. 한편 '두로와 시돈'이라는 지명은 사실상 팔레스
틴의 북서쪽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또 '요단 건너편'
이라는 말은 갈릴리와 같이 헤롯 안디바의 통치름 받던 베레
아와 데가볼리 지방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Wessel).
ㅇ그의 하신 큰 일을 듣고 - 여기서 '그의 하신'에 해당하는
원어 '에포이에이'는 미완료 능동태로서 예수께서 계속적으로
행하신 수 많은 이적과 사역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듣고'의
원어 '아쿠온테스'는 현재 분사 능동태로서 지속적으로 들어
오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실로 예수께 모여든 무리들은 예
수의 신비한 사역을 수없이 들어왔으며 그 소문으로 인해 마
음이 움직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지니는 역동적
(力動的) 특성이다. 복음의 소문은 인습의 장벽과 지역의 장
벽을 넘고 또 인간의 의지를 움직이는 능력이 있다(롬 10:15
-18;히 4:12). 한편 이때 예수께 모여든 무리들은 어느 한정
된 시점에 급히 모여 들었다기보다 오히려 꾸준히 오래도록
지속적으로 모여들었다고 보는 것이 좋다.
9 예수께서 무리의 에워싸 미는 것을 면키 위하여 작은 배를
등대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ㅇ예수께서...면키 위하여 - 오직 마가만이 예수께서 배에
오르신 이유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물론 예수께서 배
에 오르신 목적은 무리들에게 밀리는 것을 면키 위함이었다.
실로 예수를 향하여 육신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아우성
치는 무리들, 그들은 아마도 예수께 접촉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회복될 것으로만 여겼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같이
1차원적인 무리들의 심성에도 구애치 않으시고 당신의 복음
을 전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의 필요도 만족시켜 주셨다(마
4:23). 즉 예수는 무리들의 생각과 기대를 초월하여 역사하
시고 계셨던 것이다. 한편 마가는 예수께서 무리를 가르치
기 위하여 본문과 같은 이러한 방법을 취하신 것을 말하지
않지만 예수께서는 자주 이 방법을 사용하셨다(마 14:22;
요 6:15-25).
ㅇ작은 배를 등대(等待)하도록(히나 프로이아리온 프로스카
르테레 아우토) - 먼저 '작은 배'란 몇명밖에 탈 수 없는
조그마한 보트를 가리킨다. 그리고 '등대하도록'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카르테레'는 '꾸준히 시중들다', '충성하다'
는 뜻의 원형 '프로스카르테레오'의 가정법 현재형으로 사용
되었으며 '...을 위해 항상 대기하다', '집착하다', '지속적으
로 맡은 일을 수행하다'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즉 이 표현은
제자들의 성실하고도 발 빠른 헌신과 봉사를 예감케 해준다.
실로 그들은 예수께서 필요로 하실 때, 언제든지 움직일 준비
를 갖추고 그 준비한 배를 해변 가까이 놓아 두었을 것이다.
특별히 그들이 어부 출신이었다는 사실에서 그들의 능수 능란
한 준비 작업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0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에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핍근히 함이더라
ㅇ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 당시에 무리들은 예수를 만지는
행위를 통하여 병고침을 받으려고 너도나도 그를 만지고자 밀어
댔다. 마치 그 무리들은 예수를 기적을 행하는 자라고 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마 9:20-
22;14:34-36;눅 6:19).
ㅇ병에 고생하는 자들이(호소이 에이콘 마스티가스) - '병'
(diseases, NIV)에 해당하는 '마스티가스'는 원형 '마스틱스'의
복수 목적격의 형태로 사용되었으며, '채찍', '고문' 등의 뜻을
갖고 있다. 이 단어는 70인역(LXX)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채찍질
(욥 21:9)이나 징벌(시 89:32)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데, 비유적
인 용법으로 '병'이란 의미를 나타내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이
는 '병'이 하나님의 채찍을 맞거나 징벌을 받아 생긴다는 사상
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비유적인 용법으로 본 구절의 이 단
어는 예수께서 고쳐 주신 여러병들로 특별히 매우 만성적이거나
치명적인 질병을 가리킨다(눅 7:21). 5:29, 34에서도 혈루병 걸
린 여인의 특수한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한편 그 당시
유대인들은 병을 하나님의 창조의 뜻에 어긋나는 것으로 간주하
고, 그 안에 귀신의 권세가 활동하고 있다고 보며, 또 간혹 죄
와 병이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마 12:22). 그러나 인과 응
보(因果應報)를 초월하시는 예수께서는 그 병의 원인이 어떠하
든간에 그 모든 소원하는 자들에게 치유의 용서를 베푸셨다.
실로 예수께서는 인류의 구속자요 의원으로서 병자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의 병을 치료하신다.
ㅇ핍근(逼近)히 함이더라(에피피프테인 아우토) - '핍근히'를
뜻하는 '에피피프테인'은 '...에 떨어지다', '몸을 던지다',
'달려들다' 등의 뜻인 원형 '에피피프토'의 부정사 현재형으로
서 저돌적(猪突的)으로 달려드는 무리들의 모습을 현장감 있게
묘사해 주고 있다. 즉 병자들이 위험한 정도로 예수에게 몸을
던지고, 달려드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들이 적의가 있었
던 것은 아니고, 단지 각자가 자신의 병 때문에 예수의 치료를
받고자 맹렬하게 애쓸 뿐이었다.
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ㅇ더러운 귀신들도...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 여기서
예수는 또다시 귀신들린 자들과 마주친다(1:23, 24, 34). 그
무리들은 몰랐다고 하더라도 귀신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알았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1:1 주석 참조). 즉 예수의
메시야성을 알고 소리친 귀신들의 외침은 '자신들을 해치지
말라는 쓸데없는 호소'(Wessel)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그리고 덧붙여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은 예수가 누구인
지 알아 본 귀신들의 이러한 외침은 '어떤 사람에 대하여 그
의 정확한 이름이나 인격을 잘 아는 것이 그를 지배하는 것'
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해 볼 때(Lane), 자기들을 능히 제어
하실 수 었는 그분의 능력을 어떻게든 없애보자는 의도에서
나온 외침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한편 귀신들이 예수를 알아
보았다는 이 사실은 다음 두 가지 관점에서 중요하다. 첫째,
당시 사람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였어도 영적 존재인 귀신들
이 예수를 알아 보았으니 예수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
다(1:24;마 8:29;눅 4:41;행 19:15). 둘째, 그러나 귀신들이
예수를 알았다고 해서 그들이 구원받았다는 것은 결코 아니
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단의 수하(手下)로서 끊임없이 성도
들과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장차 멸망의 심판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마 25:41;계 20:10).
12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계하시니라
ㅇ예수께서...많이 경계하시니라 - 본문에서 특히 강조되고
있는 '많이'(폴라)란 부사는 예수의 꾸짖음이 지닌 엄중성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실 예수께서는 귀신들을 대하
실 때마다 예외없이 타협이나 부드러운 청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꾸짖고 징책(懲責)하시는 입장에서 그들을 상대하신다.
한편 위의 구절에서 '하나님의 아들'(1:1)이라는 표현은 비록
예수에 의하여 고통을 당하는 원수인 귀신들에 의하여 고백되
어진 것이지만 그것은 예수께 주어진 매우 정확한 이름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 드러내야 할
때가 오지도 않았고 귀신들이 자신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적
합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귀신들의 외침을 저지하였던
것이다(1:43 주석 참조).
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ㅇ산에 오르사(아나바이네이 에이스 토오로스) - 원문을 볼
때 예수께서 산에(갈릴리 호수 근방의 구릉지대로 추정) 오르
시는 장면을 현재 직설법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마가 특
유의 생동감과 역사성이 넘치는 표현 기법이 사용되었기 때문
이다. 한편 전승에 의하면 이곳은 '하텐산'(Mt. Hatten)
이라고도 하고 가버나움 북부 지역의 벌판을 가리킨다고도 하
나 어느 산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모세의 시내 산 사
건(출 19:20), 구약의 시온(호렙) 산에 대한 빈번한 언급(왕
상 19:8), 산상 수훈, 변화산 사건 등 중요한 성경적 사건이
산에서 일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산이
인간에게 엄숙하고 고요한 심성을 마련해 주고 또 절대자에
대한 외경을 일깨워 주는 영성(靈性)의 훌륭한 매개체였기 때
문이다. 누가는 이때 예수께서 산에 오르신 이유를 기도하려
오르셨다고 함으로써(눅 6:12) 이 같은 사상을 더욱 강조해
주고 있다.
ㅇ자기의 원하는 자들 -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외적 조건이나
그들 각자의 열정적인 자원 의사에 따라 당신의 12제자를 선
택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당신의 권위와 뜻과 계획에 따라 그
들을 선택하여 부르신 것이다. 이는 예정 교리(doctrine
of predestination), 선택 교리의 근간이 되는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소명은 오로지 원하시는 그분의 의지에 따라 되어
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물론 하나님의 주권적인 소
명에는 인간의 절대적이고 즉각적인 동의가 요청되기는 하나
그것은 부차적인 조건에 불과하다.
ㅇ부르시니 나아온지라 - 눅 6:12에는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
에 예수께서 밤새도록 기도하셨음을 언급하고 있다. 예수는
모든 것을 기도를 통해, 즉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해결하
셨다(14:32). 한편 예수의 부름에 대해 제자들은 어떤 주저
없이 즉각적으로 순응하였다(1:18, 20;2:14). 이제 예수의 제
자들은 자기의 모든 관심과 소망을 접어두고 오직 예수의 삶
과 뜻을 절대 헌신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14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ㅇ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 '열 둘'이라는 숫자가 신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특히 '열 둘'은 임의적인 숫자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이 분명하다(마 19:28;눅 22:30).
그런 점에서 그들 12명의 제자들은 새 이스라엘의 보좌에 오
를 12족장과 같은 영광을 얻었음이 분명하다(계 21:14, 15).
사실 앗시리아(B.C. 722)와 바벨론(B.C. 586)에 의해 이스라
엘이 멸망한 이래 현재의 이스라엘은 두 지파 내지 두 지파
반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특히 이 12제자 선택은
이스라엘이 종말의 때 곧 메시야 시대에 열두 지파의 백성으
로 회복되고 완성되리라는 예언서와 묵시 문학에 터잡은 기대
와 관련 되었다고 볼 수 있다(사 11:11, 16;27:12;35:8-10;
49:22;60:4, 9;66:20;겔 39:27;미 7:12 등). 그렇다면 열 두
제자는 전체 이스라엘에 대한 예수의 요구를 상징할 뿐 아니
라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구원에 대한 그의 약속을 상징하기도
한다. 마가는 열 둘의 종말론적 기능을 역사적인 과제로 확대
시킴으로써 그런 이해를 받아들였다. 이 역사적 과제는 분명
히 예수의 일을 지속시키는 것이지만, 열 둘이 구분에 의해
파송되고 또한 예수의 뒤를 이어 교회의 중추적 사명을 감당
해야 한다는 점에서 예수의 일과 구별된다(Gnilka). 한편
마가는 이 선택된 제자들을 대개 '열 둘'이라 칭한데 비해
(16절;4:10;6:7;9:35-헬라어 원문에는 '열 둘'로 묘사되었으
나 개역 성경은 이를 '열 두제자'로 번역하였다.) 마태는
'열 두 사도'(마 10:2) 또는 '열 두 제자'(마10:1;11:1;20:
17)로 표현하였다. 여하튼 마가는 이 '열 둘'이라는 칭호를
통해 그들을 단순히 예수를 좇는 무리들과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의 '세우셨으니'(에포이에센)란 직역하면 '만드
셨으니'로서 이를 근거로 본 구절을 '창조하셨으니'로 번역
하기도 한다(Lohmeyer). 즉 이 12제자 선택은 예수의 구
속사적 관점에서 새로운 역사적 실체의 탄생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다(Taylor, Grant). 물론 나름대로 의미있는 번
역이기는 하지만 본 구절은 단순히 열 둘을 '임명하셨으니'
로 번역하여 예수께서 12제자를 공식적으로 임명하셨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ㅇ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 열 두 제자가 세워진 목적은 세 가지였다. 특별히 본문에서
목적 의식을 분명히 드러내는 헬라어 접속사 '히나'('...하기
위해')의 2회 반복적 사용은 12제자 선택에 있어서 예수께서
확실한 목적을 두시고 행하였음을 보여 준 것이라 하겠다. 첫
째 '자기와 함께 있게하시고', 둘째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세째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실' 목적이었다.
실로 그 열 두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가장 가까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했다. 즉 그들은 예수와 함께 살고 그와 대
화하며 그에게 배워야 했다. 마가 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대부
분의 시간을 그의 제자들을 훈련시키는데 할애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자들의 훈련은 예수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끝나
지 않았다. 그들은 보냄을 받아야 했다(6:7). 즉 그들은 보냄
받은 자, 곧 '사도'(아포스톨로스)로서의 사명을 온전히 수행
해야 했다. 또한 제자들의 사역은 복음을 전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이었다. 이 귀신 축출은 원래 예수께서 지니신 권능으
로서(1:26) 이제 사단의 왕국을 몰아내고 당신의 나라를 건설
하기 위해 부름받은 제자들에게 부여(附與)되고 있는 것이다
(마 10:8). 이렇듯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과 귀신을
쫓는 일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예수께서 이루고자 하
시는 구원은 사단과 그의 일당들을 멸하시고 당신과 구원받은
자들과의 다함없는 교제를 완성하시는 것이다.
16 이 열 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ㅇ이 열 둘을 세우셨으니 - 신약성경에서 제자들의 명단이 기록
된 데는 본문 이외에 세 곳이 더 있다(마 10:2-4;눅 6:14-16;행
1:13). 여기에 나타나 있는 12제자의 이름들은 대부분 네 부분
으로 나눠진다. 즉 첫번째 부분은 베드로가 예외 없이 맨 앞에
등장하고 있으며, 두번째 부분에서는 빌립이, 세번째 부분에서
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다른 제자들 앞에 등장하고 마지막
부분에는 유다의 이름이 등장한다(사도행전에는 그가 이미 자
살한 것으로 묘사되어 그 이름이 생략됨). 한편 마가는 각자의
이름 앞에 접속사 '카이'('그리고')를 삽입하여 연결시킴으로써
이러한 네 부분의 구별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인상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마 10:2-4 주석 및 강해 그리고 본장 13-19
절의 주제 강해를 참조하라).
ㅇ시몬에게는 베드로 - 이 부분에서는 베드로(반석)란 별명을
얻은 시몬이 맨 처음에 언급된다(마 16:18). 여기서 '베드로'
란 이름은 헬라명이며, 요 1:42에 나오듯이 '게바'는 아람명으
로서 그 의미는 '반석'이다. 이는 그의 성품의 강직성(强直性)
에서라기보다 교회사적 의미에서 그가 수행해 가야 할 사명과
연관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가의 복음서에는 어떤 점에서 시몬
이 반석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도
예수께서도 베드로가 비록 굳건하지 못하고 연약한 인물이었다
고 하더라도 그가 미래에 사역하게 될 교회에서 큰 일꾼으로
일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았기 때문에 그러한 별명을 붙여 주
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실로 그는 예수 생전에는 과격하고 또
비겁한 좌충 우돌형의 미성숙한 인격자에 불과했으나 예수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부터 초대 교회의 기초석으로서
의 탁월한 사명을 완수한 반석같은 일꾼이었다(행 2:14). 한편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그의 역할을 두드러지게 강조하였다.
그의 역할은 첫 제자로 부름을 받은 데서 시작하여 무덤에서 천
사의 위탁(委託)을 받는데까지 이른다(16:7). 한편 위에서 보듯
이 그가 문자적으로 반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의 부활을 친
히 목격하고(고전 15:5) 그분에게서 사명을 새롭게 부여 받은 후
(요 21장)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하고서부터일 것이다(행 2장).
어쨌든 그는 열 두 제자 가운데, 그리고 위에 서술한 그들의 과제
(14, 15절)에 있어서 모범적인 위치를 점하게 된다.
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ㅇ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 요한보다 야고보가 항상 먼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야고보가 요
한의 형인 것 같다. 그렇지만 야고보는 사도들 중에 제일 먼저 순
교를 당했기 때문에(행 12:2) 그의 형제 요한보다 큰 업적을 이룰
수는 없었다. 이 두 사람은 어부 세베대의 아들이었는데, 세베대는
사업이 번창하여 삯꾼들을 고용할 정도였으며(1:20), 그의 부인 또
한 예수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도왔다(마 27:55, 56;눅 8:3). 열 두
제자 중 오직 요한만이 십자가 곁에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이나, 세
배대의 가족이 대제사장의 집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요18
:15, 16)은 아마도 세배대의 집이 부유했기 때문인 것 같다. 야고
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살로메로 추정되는데(15:40;16:1), 예수를
섬기는 그녀의 동기가 순수한 것만은 아니었다(마 20:20, 21). 한
편, 이들이 얻은 이름은 '보아너게'라는 이름으로 헬라어로는 '보
아네르게스'라고 하는데, 이것은 마가복음에만 나타나는 이들 형
제의 별명이다. 이 단어의 어근(語根)은 분명치 않으나 히브리어
'브네 레게쉬'('우뢰처럼 쉴새없이 시끄럽게 하는 아들들')에서 온
것 같다. 이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은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그
들의 성급하고도 직선적인 성격 때문에(9:38;10:35-37;눅 9:54) 얻
게 된 듯하다.
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이며
ㅇ안드레 - '남자다운'이라는 의미를 가진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
제로서(요 1:40, 41) 갈릴리 바닷가의 벳새다 출신의 어부였다(1
:16-18;마 4:18-18;요 1:44). 그는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되었다가
(요 1:35, 40)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즉시 그를 따르게 된다(마
4:19, 20). 세례 요한을 따르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좇은 안드레의
행동은 세례 요한에 대한 배반이 아니었다. 세례 요한의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앞서 증거하는 진리였기에 스승을 버리는 것
이 아니라 더 큰 진리에로의 발전이며 본래 추구하던 진리를 좇은
것이었다. 한편, 안드레가 베드로를 인도하고도 이름의 기록은 베
드로가 항상 앞서는데(요 1:44), 그는 이에 대해 하등의 시기심이
나 불만을 갖지 않았다. 안드레는 함께 동역하는 아량을 가진 형
제애의 진수를 보여 주며 지극히 개인적이고 체험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ㅇ빌립 - '말(馬)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빌립은
갈릴리 벳새다 출신(요 1:44-51;12:21)으로 안드레와 나다나엘의
친구였다. 그는 예수께 발견되어 제자에의 부르심을 받은 즉시로
그를 따르게 된다(요 1:43, 44). 그는 예수를 만난 후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그를 주께로 인도한다(요 1:45, 46). 그리고 그는 12사
도로 부름을 받은 후에 오병이어(요 6:8-13)의 기적에 앞서서 주
께 시험을 받는다(요 6:1-7). 그후 예루살렘 입성때 헬라인들을
예수께 인도하는 매개 역할을 하기도 한다(요 12:20-22). 또한 예
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아버지(하나님)를 보여 달라고 주께 요
청하기도 했다(요 14:7-12). 전승에 의하면 히에라 폴리스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ㅇ바돌로매 - '톨마이의 아들'(Son of Tolmai)이라는 뜻이며,
이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을 딴 것이기 때문에 아마 개인적인 다른
이름이 따로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요 1:46에 등장한 나
다나엘(Nathanael)과 동일 인물이 아닌가 하는데, 그럴만한
적절한 이유는 (1) 나다나엘은 12제자들과 깊은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며(요 21:2), (2)빌립이 그를 찾아서 예수께 인도했기 때문
이다(요 1:43-46). (3) 공관 복음에서 빌립과 바돌로매는 사도들
의 명단에 항상 함께 열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출생지가
역시 갈릴리의 가나(Cana)라는 것은 같은 결론을 뒷받침한다.
만일 사실이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물'을 의미하는 나다나엘이란
이름은, 베드로를 지칭하는 시몬(Simon)이란 이름과 바요나
(Bar-Jona)란 의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바돌로매와 깊은 연
관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The Pulpit Commentary). 어
쨌든 교회의 한 전승에 따르면 그는 애굽, 인도, 아르메니아 등
지에서 선교 사역을 펼치다가 끝내 순교했다고 전한다.
ㅇ마태 - 그는 분명 레위와 이명 동인(異名同人)이로서(2:14)
마가는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한편 마 10:3에서
마태는 사도들의 명단에 있는 자신의 이름 앞에 '세리'라는 형용
어구를 덧붙인다. 즉 그는 자기 스스로 자신이 옛날에 온 백성으
로부터 비난받아 마땅한 죄인이었음을 결코 숨김없이 드러내 놓
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용사받은 죄인의 떳떳함이요, 일꾼된 자
의 진실과 겸손이다. 한편 마태라는 말은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의미의 '맛다디아'(Mattathias)의 준말로서, 헬라어로는
'데오도르'(Theodore)가 된다(Gesenius).
ㅇ도마 - 도마는 '디두모'(요 21:2)라고도 불리우는데, 디두모는
아람어로 '쌍둥이'를 의미한다. 그는 그의 이름 때문에 알려지기
도 했지만 또한 그의 용기(요 11:16)나 그의 의미 깊은 고백(요
20:28)으로써 더 알려졌다. 실로 그는 의심하는 자의 대명사인
동시에(요 20:25) 예수를 가장 합리적이고 진지하게 알기를 소
원했던 이성적인 신앙인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어떤 전승에 의
하면 그는 인도에 선교사로 가서 일하다가 그곳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ㅇ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하기 위
해 흔히 '작은 야고보'로도 불리어졌다(15:40;마 27:56). 이는
아마도 세배대의 아들 곧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 보다 그가 늦게
부름받았거나 나이가 연소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일 것이다.
한편 야고보의 아버지 알패오는 글로바(Cleophas)와 동일인
인 것으로 추정되며(15:40; 요 19:25), 그의 부인 마리아는 예
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사도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와
친 자매간으로 여겨진다(Jerome).
ㅇ다대오 - 어떤 사본에는(Diatessaron Version) '렙바이
오스'와 '다대오'가 함께 불려지고 있다(Origen). 이 다대
오는 아마도 누가복음의 명단에 나와 있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
가 그의 본명이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눅 6:16;행
1:13). 한편 '렙바이오스'와 '다대오'는 어휘상 유사성을 갖고
있다. 즉 '렙바이오스'는 '심장 깊은 곳', '다대오'는 '가슴'에
서 유래된 말이다. 이러한 이름은 아마 그를 배신자 유다와 구별
하기 위해서 붙여진 것 같다(The Pulpit Commentary).
ㅇ가나안인 시몬 - 시몬은 '열심당'(the Zealot)이라 불리어졌다.
이러한 별칭은 단지 그의 종교적인 열성을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가 예수의 제자로 부름받기 전에
광적인 국수주의자 그룹인 셀롯당(열심당)의 일원임을 밝히는 것
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좋다. 열심당은 팔레스틴을 점령하고
있던 로마에 폭력으로 대항하여 싸웠던 유대인들의 애굽 집단이
었다.
19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러라
ㅇ가룟 유다 - 유다의 성은 '가룟'(Iscariot)이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아마 '가룟(Karioth)이라 불리우는 지방에서 온 사
람'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가룟(Karioth) 지방은 헤브론
에서 남쪽으로 약 3km 떨어져 있는 '케리옷 헤즈론'(Kerioth
Hezron) 지방(수 15:25)이거나 모압 땅 케리옷(Kerioth)
지방과 동일시 될 수 있다(렘 48:24). 따라서 그는 12제자 중
유일하게 남쪽 출신의 제자였다고 보겠다. 유다는 예수의 제자
로서 성경에 나타나기 이전의 생애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알 수
없다. 성경에는 단지 제자들의 돈궤를 맡아 회계(會計)를 보고
베다니에서의 향유 사건을 시작으로 하여 예수를 배반하고 자살
하는 것으로만 유다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우리 주께
서 당신의 제자들로 선택하신 12명의 사람들은 교회 역사에 있
어서 지대한 공헌을 했던 복음의 밑거름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4명은 어부였고, 또 한 명은 사람들의 미움을 사던 세리요, 또
한 사람은 과격한 독립 운동을 벌이던 열심당원이었다. 나머지
6명 제자들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무것도 알려진 바가 없다. 그
열 두 제자들은 모두 평범한 인물들이었다. 즉 그들 가운데는 설
교가도, 성경에 대한 전문가도 없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의 교
회를 세우고 그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게 하였던 사람들이 바
이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12 사도의 명단을 대할 때마다
그들의 위대성이나 탁월한 봉사에 주목하기에 앞서 무엇보다 그들
을 사용하셔서 교회를 세우고 세계 복음화를 주도해 가시는 예수의
초월적인 권능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20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ㅇ집에 들어가시니...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 예수는 다시 무리
들에게 둘러싸였다. 예수께서 들어가셨던 집은 1:29과 2:1에서 언
급된 가버나움에 있던 베드로와 안드레의 집으로 추정되며 그 집
은 예수의 갈릴리 전도 본부 역할을 하였다. 그 집에는 예수의 관
심을 얻고 또 예수의 이적을 체험코자하는 무리들이 수없이 몰리
는 바람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2:2;5:24
;눅 5:1;8:19, 45). 이는 다음 절에 이어지는 예수의 친속의 힐난
(詰難)에 대한 배경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적어도 무리들의 예수
께 대한 열심있는 신앙을 은연중에 강조한 것이라 본다.
21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ㅇ예수의 친속(親屬)들이 듣고...미쳤다함일러라 - 여기서 '친속들'
호이 파르 아우투)이란 문자적으로 '그에게 속한 자들', '그 곁에
서 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어떻게 보면 '그의 친구들' 또는 '그
의 제자들'로도 이해할 수있다. 그러나 31-35절과 연결시켜 볼 때
이는 분명 예수의 '가족들'이다. 즉 예수의 쉴새없는 활동을 심히
염려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던 나사렛의 어머니와 형제들이었다
(Donald W. Burdick). 예수의 가족들은 예수의 많은 능력을 인
하여 크게 소문이 나 식사할 겨를도 없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예수께 와서 그를 붙들려 했다. 이것은 아마도
그들이 예수를 붙들어 다시 나사렛에 억지로 데려가고자 했다는 사
실을 보여 주는 것일 것이다. 즉 그들은 예수를 육적 양식과 영적
양식을 얻기 위하여 몰려드는 사람들로부터 빼앗아 갈 의도였던 듯
하다. 특히 '붙들러'(take charge of, NIV)의 헬라어 '크라
테사이'라는 동사는 어떤 사람을 체포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본문의 긴장스런 장면을 더욱 고조시켜 준다(6:17;12:12;14:1). 한
편 예수의 가족들이 예수께 그러한 태도를 보인 것은 예수가 과로
로 인하여 정신적으로 타격을 받았을 것, 즉 그가 미쳤을 것을 염
려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미쳤다 함일러라'(엘레곤...엑세스테)란
문자적으로 '정신이 제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나갔다'는 뜻으로 결
국 비정상적 정신 상태, 불안한 정신 상태를 지적한 말이다. 한편
본문은 주격이 없는 제 2단순 과거 3인칭 복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데, 이는 예수의 미친 상태를 풍문으로 전해 들었음을 은연중에 암
시한 것이라 볼수 있다. 실로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당신의
적극적인 헌신 때문에 오히려 가족 내의 긴장에 직면했다. 심지어
그분의 사랑하는 어머니 마리아조차 자신의 아들은 특별한 소명을
위해 운명지워졌다고 익히 들어온 바였음에도 불구하고(눅 1:26-
38), 그녀의 자녀들과 함께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
은 예수의 정신적 상태를 의심했고 그를 집으로 데려가려 했다.
심지어 예수의 형제들은 그를 비웃었다(요 7:2-5). 이것은 분명
예수의 실체를 철저히 오해한 가족들의 관심의 수준을 대변해 줄
뿐 아니라(C. L. Mitton), 근본적으로 메시야이신 예수께 대
한 그들의 불신앙을 반증해 준다(요 7:5). 이처럼 불신앙은 진리
를 왜곡, 오해할 뿐 아니라 심지어 진리를 훼방하고 말살하려 들
기까지 한다.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ㅇ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 - 아마도 이들은 예루살렘에 있
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의 언행을 세밀히 살펴 그 범법(犯法)
여부를 알아 보도록 보내진 일종의 종교 감시단이었을 것이다(7:
1;마 15:1). 한편 여기서 '내려온'이라고 기록한 것은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내에서 종교적, 정치적으로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마가
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예수를 핍박하고 처형한 참으로 적대적인
도시였다. 그러한 예루살렘에서 급파된 서기관들(7:1 주석 참조)
은 그야말로 극악한 무리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왔다는 사실은, 예수의 소문이 유대 온
전역에 파다하게 퍼져 급기야는 중앙에 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
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다.
ㅇ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 적대
자들의 비난은 친속들의 언급에서 어느 정도 암시되었지만 그것과
는 엄연히 구별된다. 실로 적대자들은 공개적인 공격을 가하며 예
수를 모독했다. 그들의 첫번째 비난은 예수가 바알세불을 '지폈
다'(is possessed by, NiV)는 것이다(요 10:20). '바알세
불'은 헬라어로는 '베엘제불'로 표기되며, NIV와 KJV는 '베엘
제붑'(Beelzebub)이라 표기한다. '베엘제붑'은 라틴어 성경
(Latin Vulgate)의 표기를 영어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헬라
어 '베엘제불'은 '바알 왕자' 또는 '고귀한 존재 바알'이라는 의
미를 나타내는 가나안 신의 이름인 셈족어 '바알제불'(Baal-
Zebul)의 음역이다. 한편 이 말은 '집주인', '파리들의 주(主)'
라는 뜻으로서 모두 제의적(祭儀的)인 의미를 지닌다. 즉 '집 주
인'이란 제전(祭典)의 주인을, '파리들의 주'란 귀신의 격하된 신
분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유대인들은 시기 적절하게 사
단에 대한 동의어로서 그 이름을 사용했다. 즉 유대인들은 이 '바
알세불'을 귀신들의 왕 곧 사단을 지칭하는 용어로 거의 고정시켰
던 것이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비난은 곧 예수가 사단이라는 엄
청난 모략이었음을 알 수 있다. 두번째 비난은 '귀신의 왕을 힘입
는다'는 것이었다. '귀신의 왕'(the prince of demons, NIV)
은 어둠의 세력 가운데 최강자, 또는 마귀들의 통치자란 의미로서
결국 사단과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마 4:1-11 주제 강해 '사단과
귀신' 참조). 한편 바알세불이 귀신들의 세계를 통치한다는 사실
은 정통 유대교에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까닭은
선.악을 무론하고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통치하고 `계신다는 사
실`을 그들은 믿었기 때문이다(욥 1:6-12). 그런데 간혹 구약의
위경이나 쿰란 공동체의 기록들에 따르면 선.악의 세계가 확실히
구분된다는 사실이 발견되곤 한다. 더욱이 신구약 중간기를 거치
면서 이스라엘은 수많은 이방 문화와 교류했기 때문에 이 같은
이원론적 사고를 하게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Grant,
Taylor). 특히 당시 유대에는 이방에서 주입된 유사치료적 마
술(homoopathisch)이 있었는데, 이 마술에서는 귀신 축출자
가 자기에게 예속된 귀신들의 힘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바로 이
런점에서 예수는 새로운 교훈과 지금까지 듣고 보지 못했던 이
적을 행하심으로 마치 유사치료적 마술의 전문가인 것처럼 주술
의 혐의를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Gnilka).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예수는 백성을 미혹하는 자로 오해받을 수밖에 없
었다(요 7:20, 21;8:48;10:20). 어쨌든 예루살렘에 급파된 종교
지도자들은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인도로써 역사하시는 예수
를 오히려 성령의 능력과 완전히 반대되는 바알세불과 사귀(邪
鬼)와 결탁한 자로 매도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통해 그들은 (1) 예수의 메시야직을 모르고 죄를 짓기도 하였
지만 (2) 예수의 가르침의 순수성과 순결성을 알고도 자기들의
사악한 정치, 경제적 이권이 침해당할까하여 예수를 고의적으
로 배척한 것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예수 사역의 동기와 목적,
능력의 근원까지를 고의적으로 모독함으로써 구원의 유일한 성
령의 사역을 부인한 셈이므로 결과적으로 구원의 길을 영원히
스스로 막은 셈이 된 것이었다(마 9:1-34;15:14).
23 예수께서 저희를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단이 어찌
사단을 쫓아낼 수 있느냐
ㅇ예수께서...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 예수께서는 당신을
비난하는 자들에게 감정을 폭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불
러모으시고 대면하신 채로 비유를 들어 그들의 그릇된 생각을
하나하나 깨우치셨다. 한편 여기서 '비유'(Parable)란 예수
의 교수법 가운데 두드러진 한 특징으로서 심오한 진리 옆에 평
범하고 친숙한 상황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듣는 이로 하여금 이
해에 도움을 주게 하는 것이다. 실로 비유는 하늘의 의미를 지
닌 땅의 이야기로서 비록 이야기의 내용이 땅에 뿌리를 박았으
나 하늘을 향해 열려진 창을 가진 집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마
13장 주제 강해 '예수의 비유' 참조).
ㅇ사단이 어찌 사단을 쫓아낼 수 있느냐 - 어둠의 세력 가운데
가장 탁월한 존재인 사단은 그의 휘하에서 자신의 뜻을 실현하
기 위해 활약하는 마귀들을 쫓아내지 않는다. 사단이 사단을 쫓
아내는 것은 스스로 분쟁하는 것으로서 자기를 망하게 하는 일이
된다. 그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는 마귀를 쫓아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사단이나 바알세불과는 적대 관계에 있으며
(창 3:15), 또한 그들보다 더 강력(强力)하시기 때문이다. 실로
예수는 귀신들을 만나실 때마다 두려워하거나 주저함 없이 책망
하셨다. 귀신들에 대한 예수의 권능은 특별히 그의 치유 역사
가운데서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각 복음서들에서 보듯이 그러한
치료의 사역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계시는 것으
로 항상 묘사되었다. 그러기에 진정 사단은 이 세상을 완전하게
장악하지는 못한다. 그는 여러 가지 파괴와 고통과 질병의 원인
이 되기도 한다. 또한 그는 우리의 삶과 세상의 악의 근원이 되
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패배는 너무도 자명하다. 왜냐하면 그
들의 왕인 바알세불의 세력을 만유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기간 중 이미 책망하시고 몰아내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 그 목덜미를 짓이겨 놓으셨기 때문이다.
24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ㅇ만일 나라가...그 나라가 설 수 없고 - 예수는 사단이 사단을
쫓아낼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는 두 가지 실례를 사용
하신다. 분쟁하는 나라는 멸망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극히 기
초적인 상식이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이 상식에도 못 미치는
발상으로 예수를 비난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본문의 '나라'
(바실레이아)는 흔히 '왕국'으로 번역하는데, 실로 이 왕국이 건
실히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 왕과 신하된 백성이 혼연 일체(渾然
一體)가 되어야 함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어느 한 쪽이 불신
하고 파괴적 성향을 띠면 그 나라는 망하고 말 것이다. 이 실례
에서 예수는 보편 타당한 진리를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모든 나라
모든 공동체들에게 적용되는 진리요, 예외없이 사단의 나라에도
적용되는 진리인 것이다(눅 11:17;고전 1:10;3:3;11:18).
25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ㅇ집이 스스로 분쟁하면...설 수 없고 - 예수의 보편 타당한 논
리는 좀더 구체적이고도 실감있게 적용된다. 그것은 누구나 피부
로 느낄 수 있는 집안의 분란(紛亂)에 대한 비유이다. 여기서
'집'(오이키아)이란 어떤 건축 구조물을 뜻하지 않고 혈연적인
가족 구성원들의 집합체로서의 집을 말하는 것으로서, 어떤 면
에서는 '나라'라는 집합체보다 더 결속력과 동질성 면에서 뛰어
나다 할 것이다. 실로 이 두번째 비유는 결국 사단의 왕국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공동체에 적용되는 것이다. 즉 어떤
단체로 그 자체 내에서 분쟁이 있으면 스스로 망하고 만다
(Lenski).
26 만일 사단이 자기를 거스려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이에
망하느니라
ㅇ사단이 자기를 거스려...망하느니라 - 24, 25절의 결론구에 해
당한다. 요약하면 사단의 왕국도 역시 분쟁하면 필연적으로 멸망
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 사단의 왕국은 스스로의 내분으로
인해 멸망할 조짐은 없었고 성경에 기록된 바대로 최후의 심판 때
까지 그 왕국이 지속될 것이었다(요 12:30, 31;살후 2:8). 바로 그
런 이유로 예수의 귀신 축출은 사단의 내분으로 단정할 수 없으며,
오직 사단의 적대자요 심판주로서의 권세있는 사역에 해당하는 것
이다(요 14:30;요일 3:8;계 20:10).
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ㅇ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늑탈(勒奪)치 못하리니 - 더 자세한
내용으로 엮어져 있는 눅 11:21, 22과 평행을 이루는 본문은 사
49:24, 25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서 '강한 자'란 막강한
힘을 소유한 약탈자나 도적의 이미지(image)를 제공하는 자로서
본문에서는 사단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마 12:29). 그렇다면 '강
한 자의 세간'은 사단이 소유하고 관할하는 그 휘하의 마귀들내지
는 사단에게 직접적인 고통과 피해를 입고 있는 존재들을 포괄적으
로 일컫는다. 그리고 '강한 자의 결박'이란 사단과 그휘하의 마귀
들을 축출하는 일과 사단의 왕국을 황폐화시키는 것을 가리킬 것이
다. 이같은 강한 자 결박 장면은 유대 문헌들에 자주 등장하는 것
으로(계 20:2;외경 에녹서 10:4, 5;레위의 유훈 18:12) 악의 최후
멸망을 기대하게 한다. 한편 본문에 암시된 '그 강한 자를 결박할
자'는 사단의 왕국을 괴멸(壞滅)하시고 당신의 나라를 건설키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일컫는다. 실로 예수는 사단을 결박
시키고 그 사단에게 결박당한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
셨으며, 병고침과 귀신 축출 등을 통해 이미 점진적으로 사단의 세
간을 늑탈해 가고 계신 것이다. 물론 비록 사단이 결박 상태에 있
다 하더라도 최후의 심판 때까지는 긴 사슬에 묶은채 최후의 발악
을 할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께서 강조하신 바는 (1) 당신은
사단과 결코 동맹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과 (2) 당신은 현실적으로
사단의 세력을 파괴해 가고 계시며, 그렇기에 당신은 사단보다 더
강한 분이시라는 점이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ㅇ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아멘 레고 휘민) - '아멘'(진실
로)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본문은 예수께서 당신의 진실하신 품성과
약속을 보증으로 말씀하시는 공식적이고도 중차대한 메시지를 전하
실 때마다 특징적으로 사용하신 권위문(權威文)이다(마태복음 31회,
누가복음 6회, 요한복음 25회, 본서에는 13회 기록됨-8:12;9:1,
41;10:15, 29;11:23;12:43;13:30;14:9, 18, 25, 30).
ㅇ사람의 모든 죄...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 여기서 '사람'에 해당
하는 원문은 '사람
들의 아들들'(토이스 휘오이스 톤안드르폰)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
어 '인자'(人子)에 대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는 마 12:32와 그 언
어적 유사성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여기서 '모든 죄'(판타...타
아마르테마타)는 문자적으로 '모든 죄악된 행위'를 뜻하며, '훼방'
블라스페미아미)은 '모든 죄'의 한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서 상대방
을 모욕하거나 상대방의 일에 적극적인 장애 역할을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같은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인 개개의
죄악 행위조차 궁극적으로는 용서를 ('사하심을 얻되'라는 말이 미
래 시상임에 유의) 받을 수 있다고 단언하셨다. 이는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목적으로서 예수는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사랑
과 또 모든 죄를 사하시는 능력을 지니신 인류의 유일한 구속자이
시다.
29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ㅇ성령을 훼방하는 자는...영원한 죄에 - 이 부분은 성경의 난해
구절들 가운데 하나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을 통해
인간의 모든 죄는 예수의 십자가 아래서 용서받을 수 있다고 선언
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3:16). 그럼에도 본문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다음
몇 가지를 통해 이 난해를 극복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모든
죄는 무조건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회개해야만 구원
을 얻는 것인데,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결국 삼위 일체되신 하나
님을 부인하는 것이므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2) 성
부는 구원을 계획하시고 성자는 구속 사업을 실현하시고 성령은
이를 성도들에게 적용하신다. 따라서 인간은 성령의 감동 감화를
통해 구원받는데, 이를 부인하면 '회개'를 통한 구원의 길이 영
원히 막히게 된다. 즉 '인자'는 모르고 부인할 수 있을지라도 성
령의 사역을 부인하는 것은 고의적(故意的)인 일이고 또 회개를
거부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사 63:10;행 5:3;엡 4:30;살전 5:19).
더 자세한 내용은 마 12:31, 32 주석 및 강해를 참조하라. 한편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해진다는 이 말씀은 교회 역
사상 크나큰 불안과 고통을 야기시켜 왔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
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였는지에 대해 매우 불안해 해왔다.
실로 예수께서 여기서 강조하시고자 한 것은 그죄의 일시적 경향
이 아니라 반복 지속적이고 고의적인 죄악의 행위로 인해 발생하
는 고질적이고 뿌리깊은 영혼의 상태에 관한 것이다. 만일 사람
들이 용서받을 수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한된 성품을 가지
고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마음의 완악함과 편견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를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그분의 은혜를 비
난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처럼 죄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라일(Ryle)의 다음과 같은 말은 큰 위로가 될 것이다. '결코 용
서받지 못할 죄가 분명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죄로 인해 마음의
가책을 받는 자들은 결코 그 같은 죄를 범하지 않는다'(J. C.
Ryle, Expository Thoughts on the Gospels, 2:59).
반면에 실제로 그 같은 죄를 범하는 자들은 완악한 심령을 지니고
있기에 자신이 그 같은 범죄자요 또 미래에까지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30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ㅇ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 본절에 언급된 서기관들의
말 자체가 위에 언급한 영영히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해 직접
적인 원인이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어떤 범죄라 할지
라도 회개가 있고 돌이킴이 있을 때에는 분명 하나님의 용서가
따를 것임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본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선행에 대한 예수의 교훈과 또 사단의 왕국이 분열
할 때 그 왕국이 패망하리라는 사려깊은 예수의 설명을 듣고서
도 오히려 고의적이고 악의적으로 성령의 능력에 의해 되어진
이적을 모독(冒瀆)한 것이 곧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에 해당
하는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편견이 없는 보통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선한 일'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일들을 행하셨다.
그는 불행한 사람들을 악의 세력과 속박에서 자유롭게 해주셨
다(마 12:22;눅 11:14). 예수께서는 그 일을 성령의 능력
(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을 통하여 행하셨으나
서기관들은 그것을 사단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어쨌든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는 그 사람의 행동의 근거가
되는 심령의 자세에 의해 판가름 나는 것이다. 즉 예수의 진리
에로의 인도와 성령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회개는 커녕 깊은 적
의와 거듭되는 의지적 반항을 함으로써 성령을 훼방하는 치명
적인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Donald W. Burdick). 이에
대해 미톤(C.L. Mitton)은 말하기를 '당신이 선이라고 분
명히 알고 있는 데도 선한 것을 악하다고 하는 것은 당신이 편
견과 악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자인한 까닭에, 모든 죄 중에
서 가장 악한 죄를 범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마음의 완악함
(3:5) 때문에 이와 같은 죄악을 범한다'고 했다.
31 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ㅇ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예수를 부르니 - 마가는 다시 21절
과 연결하여 예수의 가족에 대하여 말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마가는 서기관들과의 바알세불 논쟁에 관한 기사를 삽입시
킴으로써 위기감(危機感)을 고조시키고 더불어 예수의 가족들이
나사렛에서 가버나움까지 오는데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을 독자
들에게 암시하고 있다. 가족들이 예수께서 있는 곳에 도착하였
으나 그들은 그가 계신 곳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 대신에 그들
은 밖에 서서 사람을 시켜 그를 불렀다. 특히 형제들과 그 모친
이 언급되어 있으나(본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어머니에 대한 언급
이 이 구절 한 군데밖에 없다) 요셉은 언급되어 있지 않은 점이
이채롭다. 아마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났었던 것 같다. 한편 '동생
들'에 관해서는 6:3 주석을 참조하라.
32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ㅇ무리가...어짜오되...밖에서 찾나이다 - 예수께서 들어가 계신
집은 입추(立錐)의 여지없이 사람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무리
들은 제자들과 더불어 예수를 중심으로 빽빽이 둘러 앉아 있었다.
한편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마 12:47) 본
문의 '무리' 대신 어떤 한 사람이 예수께 이야기했다고 기술한다.
이를 종합해 보면 아마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장면을 지켜보
던 한 사람이 바깥 사정을 전해 듣고(31절) 무리를 헤집고 들어
와서 예수께 이르러 이야기를 전한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러한
두 복음서 간의 차이 이외에도 마가는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
이 밖에서 찾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마태는 '말하려고 밖
에 섰나이다'(마 12:47)라고 전하고, 누가는 '보려고 밖에 섰나
이다'(눅 8:20)라고 각각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이유는 각 기자의 관심사가 달랐을 뿐 아니라 각 기자들이 지닌
독특한 기록 방법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각 기자들
은 동일한 역사적 사건을 함께 보완적으로 조화롭게 기록하고 있
다는 사실이다. 한편 본 구절에서는 가족들이 현장에 나타나 예
수를 계속 찾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예수께서 명확히 알고
계신가의 여부가 표면상 드러나 있지 않다. 측측하건대 예수께서
는 그의 동생들의 불신을 이미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 같은 사
실은 다음 절에서 보듯이 예수의 영적 가족에 관한 가르침에서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계속해서 순종하기 위해
때로는 가족과의 관계도 단절해야 한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암시
하고 있는 듯하다. 실로 이것은 예수께서 직접 경험한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께서는 친히 집이나 가족까지 버리는 복음에
대한 절대 순종을 주저없이 말씀하시게 된다(10:28-30). 어쨌든
본문에서 예수가 가족들의 면회 요청에 즉각 응하지 못하셨던 것
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Lane). 한편 본절에 언급된 '누이
들'이란 용어는 여러 권위 있는 사본들(시내, 바티칸, 에브라임
등)에는 빠져 있다. 아마도 31절과, 본문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
마태복음, 누가복음과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생략된 듯하다. 그
러나 이 용어가 생략된다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ㅇ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근본 의도는 인간 관계를 전면 부정해서가 아니다. 예수는
바로 이 기회를 통해 영적 관계의 중요성을 가르치시고자 하셨을
뿐이다. 실로 예수께서 평가하셨듯이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와의
긴밀한 관계성(복음을 전하고 그 나라를 건설하는 일등)이 지상에
계시는 어머니와의 관계성(인간적 교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었
다(마 6:33). 따라서 예수는 비록 사랑하는 어머니를 위시한 가족
들이 당신을 혈연으로서의 끈으로 연결코자 노력하였으나, 당신은
하늘의 영적 관계성으로 대답하셨던 것이다. 이는 반인륜적(反人
倫的) 처사이기 보다 초인륜적(超人倫的) 처사였다.
34 둘러 앉은 자들을 둘러 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ㅇ둘러보시며...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 여기서도 세밀하고
도 생동적인 문장기법을 사용하는 마가의 특징이 돋보인다. 예수
께서는 가장 가까이 자리하고 있는 이들을 찬찬히 바라보시며 내
밀한 감격의 음성으로 '내모친과 동생들을 보라'고 하셨다. 추측
컨대 이들은 예수의 12제자일 것이다(마 12:49). 특히 이들을 지
칭한 것은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예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예수와
함께 있는(14절) 자의 각별한 위치를 뜻할 것이다. 진정 그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기준과 제약에도 구애됨 없이 먼저 하나님
의 뜻을 따르는 자로 인정된 것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고 따르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의 약속을 전적으
로 신뢰함으로써 예수와의 그 깊은 영적 가족 관계에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보내 주신 당신의 행위에
대한 저들의 공개적 결단을 기뻐하시고 육친적 관계(肉親的關係)
이상으로 저들을 예수와 결속시켜 주신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영적 가족들에서 혈연적 가족들을 제외시켰다
고 상상할 필요는 없다. 그들도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예수와
성(聖) 가족이 되는 것이다.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ㅇ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 예수
의 참된 가족은 비단 열 두 제자만 아니라 '누구든지'
(whoever, NIV)될 수 있었다. 이는 구원의 개방성과 영적
가족의 보편성을 일깨워 준다. 그러나 이러한 개방은 한 가지 필
연적인 조건을 충족시킬 때에만 가능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
대로 하는' 것이다. 즉 예수와 친속 관계를 맺게 해주는 핵심 요
소는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마 12:50;눅 8:21). 한
편 이와 같이 예수께서 하신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고려
되어야 할 한가지 사실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란 과연 어
떤 사람인가 ? 라는 점이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듣고 받아들이며, 또한
그분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다(요 1:21).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의 인격으로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요구에
대한 전폭적(全幅的) 순종이라 할수 있다. 실로 예수와 더불어
도래한 하나님 나라가 인간에게 돌연 나타나고 그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이 순종에 대한 요구에 그 긴박성이 더해진 것이다
(Lane). 이땅에 오신 예수께서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시면서부
터 존재하게 된 새가족에게는 마땅히 예수께서 아버지께 순종함
으로 보이신 하나님을 향한 절대 순종과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이
주의 부르심에서 보여준 그러한 철저한 순종이 요청되고 있다.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ㅇ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 이는 연속적으로 기록된
다섯 번의 충돌 기사 중 마지막 사건에 해당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마가는 시기(時期)나 지리적 위치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는 단순히 안식일에 대한 예수의 입장
을 밝히기 위해서 사용된 또 하나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
서 '다시'란 2장의 직접적인 반복을 일컫지 않는다. 다만 내용
의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마가가 의도적으로 붙인 연결구라
할 수 있다. 한편 본구절은 1:21, 39에서와 같이 예수가 회당
에 들어가셨음을 평범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그 같은 묘
사를 통해 본구절은 예수가 자주 안식일에 회당에 가시는 분이
심을 은연중에 시사하고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본
문은 어떤 안식일에 만난 특별한 사건이 이야기되고 있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 보아야 옳을 것이다(눅 4:16 주석 참조).
ㅇ한 편 손 마른 사람이 - 여기서 손 마른 상태를 묘사한 헬라
어 '엑세람메넨'은 완료 수동태 분사형으로서 이는 그의 신체
장애가 선천적인 것이기보다 후천적인 것으로, 어떤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근육이 마비되고 손이 말라 버려 활동력이 완전히
상실된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Robertson, Vincent). 한편
누가는 힘의 상징인 그의 오른 손이 마른 것이라 표현함으로써
(눅 6:6) 그 처지가 절박했던 사실을 더욱 세밀히 묘사해 주고
있다. 혹자는 이것을 중풍병이라 보기도 한다(Donald W.
Burdick). 어쨌든 말라 비틀어진 이 손은 결국 그의 삶의 위축
과 장애 상태(Gebrauchsun fahigkeit)가 얼마나 심각했
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제롬(Jerome)이
언급한 바, 나사렛파(the Nazarenes)와 에비온파(the
Ebionites)에서 쓰는 묵시 복음서(Apocryphal Gospel)
와 외경 히브리 복음서(Hebraerevangelium)에는 이 병
자가 미장이로서 손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사람이었다고 기
술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보자 자신이 수치스럽게 구
걸하지 않도록 자신의 병을 치료해 줄 것을 호소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병자의 처지가 그렇게 다급한 것으로 묘사되
고 있지는 않다. 단지 마가는 본문을 통해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안식일 개념이 과연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서 더 깊은 관심을 보
이고 있을 뿐이다.
2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ㅇ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 마가는 여기에 등장하는 반
대편 사람들의 신분을 자세히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마가가
막연하게 '사람들'이라고 했지만 그들의 정체는 분명하다. 6절에
서는 바리새인들이 언급되고, 평행 구절인 눅 6:7에서는 '서기관
과 바리새인들'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예수께서는 이미 율법주
의자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비정통적인 언행을 일삼고 있었고,
특히 안식일 규정에 대한 매우 위험한 교훈을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번 안식일 논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예수에
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에게 있었으므로 큰 충돌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예수가 안식일 규정을 직접 파기
하기 직전 상황에 있었으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온 촉각을
곤두세우고 예수의 행동 거지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한편 마가는 예수의 허물을 찾으려고 눈에 빛을 내고 있던 그들
의 목적 의식에 대해 '송사하려 하여'(a reason to
accuse, NIV)라는 말로 묘사하고 있다(마 12:10;눅 6:7).
이는 결국 그 적대자들이 예수를 고발하기로 이미 작정하고 있
었음을 보여 준다. 사실 그 당시 회당은 지방 법정 역할까지
도 수행하던 곳이었다는 점에서(마 12:10) 예수의 회당 안(內)
치유 사역은 어쩌면 상당히 불리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ㅇ안식일에...고치시는가 엿보거늘 - '엿보거늘'(파레테룬)은
'지켜보다', '주시하다'는 뜻인 '파라테레오'의 미완료 과거 시
제로서 사람들이 예수에 대한 고소거리를 찾기 위해 계속적으로
예수 주변에 머물면서 적의에 찬 눈으로 면밀(綿密)히 바라보고
있었음을 나타내 준다(눅 14:1;20:20). 사실 당시 안식일 규정
에는 매우 세밀한 조항까지 만들어 가며 안식일 준수를 강조하
고 있던 터였다. 한 가지 실례로써 어떤 사람 위에 집이 무너질
경우 생명이 위협을 받으므로 구조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하
지만 만약 그 밑에 깔린 자가 이미 죽은 것이 판명되면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그 구조 작업이 연기되어야만 했을 정도이다. 그런
점에서 그 '손 마른 자'는 긴급한 생명 구조가 필요한 상태가 아
니었기 때문에 예수의 치유 사역은 부당한 것으로 정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이란 말씀으로 보아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실 능력을
가지셨음을 깨닫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관심은 '할 수 있는
가'에 있지 않고 '할 것인가'에 있었다(Gnilka).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ㅇ예수께서...일어서라 하시고 - 예수께서는 마치 적대자들의 기
대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병자에게 '한가운데 일어서라'고 요구하
신다. 그러나 이 요구는 안식일의 참의미를 주위에 앉은 모든 사
람들에게 깨우치기 위한 것이었다. 실로 안식일은 천지를 창조하
신 하나님의 권능에 찬 창조 사역을 기리고 또 참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거룩한 날이다(창 2:2;출 16:23;20:8-11). 바로 이날에 지
금껏 하나님의 창조 원형에서 어그러진 불구의 몸으로 고생하며
참평안을 몰랐던 손 마른 사람에게 온전한 몸으로 되돌려 주는
것처럼 안식일을 참되게 보내는 것은 없을 것이다. 특별히 본 기
적의 시위적인(demonstrative) 성격은 2:1-12에 제시된 중풍
병자 치유 사역을 연상시켜 주며, 동시에 은연중에 예수의 안식을
규정 파기를 기대하며 촉각을 곤두세웠던 적대자들의 악의에 찬
행동에 크나큰 충격을 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진정 예수는 당
신의 적대자들이 가만히 엿보던 비겁함과는 대조적으로 그 손 마
른 자를 일으켜서 한 가운데 나가게 하셨다. 그리하여 당신의 초
월적인 권능을 공개적으로 제시하심으로써 당신이야말로 참된 의
원이요 오실 메시야이심을 강력히 내비치셨다.
4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ㅇ안식일에...어느 것이 옳으냐 - 당신의 고소를 전제한 적대자
들의 예민한 촉각을 향해 예수께서는 병행 구조로 된 이중적인
질문으로 그들의 불타오르는 적개심에 오히려 도전하셨다. 한편
이 같은 예수의 질문은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무엇이 요청되는가
에 대한 필요성의 원칙에 입각한 것이다(Donald W. Burdick).
실로 인간에게 궁극적으로 유익을 제공하고 생명을 보존하게 하
는 일은 그것이 곧 최상의 선(Summum bonum)이요, 타인의
필요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더 나아가
법조문에 얽매여 자신의 무관심을 합리화하는 것은 그것이 곧 악
(惡)인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을 돕는 선한 행위를
생명을 구하는 것과 동일하게 여기심으로써 안식일에 그러한 일
들이 허락될 수 있다고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생명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하다고 간주
하심으로써 적대자들의 견해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이렇게 인간
을 위해 정열적으로 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지한 노력을 단순
히 도덕적인 선행으로 평가 절하(平價切下)해서는 안 된다. 진정
예수의 이 같은 노력은 왜곡된 진리를 바로잡고 인생들에게 궁극
적인 구원을 허락하시기 위한 신적(神的)인 사랑의 행위인 것이
다. 한편 본문에 제시된 반립(反立)명제를 요약하면 (1) 살인 행
위와 곤궁에 빠진 자를 구하려 하지 않는 행위는 별 차이가 없다
는 뜻으로 볼 수 있다(Calvin). 실로 선행을 거부하는 것은 곧
살인과 같은 악행을 간접 조장하는 것이다(약 4:17). (2) 하나님
의 뜻은 생명을 구하는 것, 즉 건강을 회복시키는 것이지 6절의
바리새인들과 같이 살인 음모를 꾸미려는 것이 아니다. 사실 예
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사악한 마음을 간파하시고 본문의 말씀을
하셨을 수도 있다. (3) 여기에는 사단의 음모를 멸하시는 예수의
사명(使命)이 암시되어 있는 것 같다. 병과 상처는 궁극적으로
사단의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를 멸하러 오셨다. 한편 사단은 1
주일 내내 악을 행하기 때문에 다른 엿새와 마찬가지로 안식일에
도 사단과의 싸움은 계속되어야 한다(T. W. Manson).
ㅇ저희가 잠잠하거늘(호이 데 에시오폰) - 이는 3인칭 미완료 시
상으로 예수의 적대자들이 아무런 답변을 하지 못한 채 계속 머
뭇거리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욥 5:16;시 63:11;행 4:14;딛 2:8
;벧전 2:15). 실로 그들은 자신들이 지닌 형식주의적 율법관에도
자신이 없었을 뿐 아니라 참 진리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는 무기력
한 종교인들이었던 것이다.
5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ㅇ저희 마음의 완악(頑惡)함을 근심하사 - 여기서 '완악함'(포로
세이)이란 마치 대리석처럼 단단히 굳어버린 완고한 마음 상태를
일컫는다. 진정 유대인의 개념으로 볼 때 '마음'은 인간의 지.정.
의를 모두 포함하는 전인격의 좌소로서 마음이 굳어버리면 예수가
전하고 보여 주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올바른 행
동을 할 수도 없게 된다. 예수께서는 이 완고함을 목도하시고 '근
심하셨다'. 여기 '근심하사'(쉴뤼푸메노스)란 '함께'란 뜻의 '쉰'
과 '걱정하다'는 뜻의 '뤼페오'의 합성어로서 상대방의 입장에 서
서 함께 염려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의미한다. 특별히 이 '뤼
페오'는 현재 시상을 이루고 있어 예수의 근심하시는 상태가 오래
지속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완악함으로 인한 무
지(無知)를 애끓는 심령으로 바라보시는 예수의 이 같은 모습은
바로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의
한계와 아픔에 함께 동참하시기를 원하시는 예수의 뜨거운 인간
애(人間愛)를 보여 준다.
ㅇ노하심으로...둘러보시고 - 여기 '노하심으로'(메트 오르게스)
란 마치 이글거리는 눈으로 보듯이 매우 분노하신 상태를 암시한
다. 이것이 바로 마가의 복음서가 지닌 특징이다. 즉 마가는 전
혀 숨김 없이 예수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다(10
:14). 사실 예수께서 노하셨다는 표현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1:41). 그런데 그가 노하신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의 감정에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표현된 적은 결코 없다. 이
'분노'는 곧 부정과 부패에 대한 정의의 분노 곧 의분(義憤)으로
서 이것은 인간의 도덕적 기본 덕목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조화를 이룬다(Grant). 실로 예수는 당신의 적대자들이 지닌 그
릇된 마음, 죄악에 가득찬 눈길에 분노를 터뜨리셨지만 그 영혼에
대해서는 한없는 사랑으로 근심해 주셨던 것이다. 한편 '둘러 보
시고'(페리블렙사메노스)는 주로 많은 목격자들이 있음을 보여
줄 때 사용된 용어로(34절;5:32;9:8;10:23;11:11) 순간적으로 쭉
한번 둘러보셨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는 곧 예수의 분노의 대
상이 주위 많은 사람들이었음을 간접 시사해 주고 있다.
ㅇ네 손을 내밀라...회복되었더라 - 예수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
시고자 하셨다(4절). 그리하여 병자에게 명령하셨고 그 병자는
즉시 순종함으로써 완전한 회복을 체험할 수 있었다. 이때 예수
는 오직 '말씀'으로 그 능력을 행사하셨다. 이 '말씀'은 곧 당신
께서 친히 태초에 온 우주를 창조하실 때의 그 능력과 동일한 능
력을 지닌 것이다(요 1:1-3). 따라서 예수의 그 말씀 한마디는
그 어떤 비뚤어지고 파괴된 것이라 할지라도 능히 원래의 모습
으로 온전케 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능
력은 예수의 명령에 오직 순종으로, 오직 신앙으로 대답하는 자
에게만 창조 원형으로의 완전함을 제공한다.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ㅇ바리새인들이...헤롯당과 함께 - 병고침의 결과는 놀람도 환
호도 아니고 오히려 적대감을 증대시켰을 뿐이다(H. Van
der Loos, The Miracle of Jesus, p. 438). 바리새인
들은 이제 헤롯당과 함께 손을 잡고 예수를 죽이려고 의논했다.
헤롯당은 종교적 집단이기보다 해롯가문에 정치적으로 봉사하는
정치적 당파였다. 즉 헤롯당은 갈릴리를 관할하던 헤롯 안디바
를 중심으로 하여 헤롯 왕가의 부흥을 꾀한 집단으로서 사회.
종교적 기존 질서와 법률의 고수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Grant, Taylor).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기득권 유지를 위
해 로마 제국의 지배에 긍정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소위 민
족적으로 비애국적 집단이었다. 이에 비해 철저한 애국주의자
들인 바리새인들은 외세를 철저히 배격하는 보수주의자들인
관계로, 헤롯당과는 평소에도 원수처럼 지내던 사이로서 양자
간의 동맹(同盟)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놀라
웁게도 자신들의 기득권과 기존 질서를 와해시킬 위험성이 다
분한 예수 제거에 있어서만은 생각이 일치함으로써 참으로 어
색한 동맹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갈릴리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갈릴리를 관할하던 헤롯 안디바
추종자들과의 제휴를 필연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듯하다.
ㅇ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 바리새인들은 조금 전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에 대한 예수의 질문에 대해 예수를 안
식일 파기자(破棄者)로 단죄하고(출 31:14) '어떻게 죽일꼬'하
는 사악한 답변을 세속적 집단(헤롯당)과 함께 진지하게 의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종교와 정치가 결합할 때 생겨나는 필
연적인 발상이다. 실로 참진리에 대한 세속 집단의 반응은 이
처럼 항상 진리 파괴적 성향을 띠지만 겸손한 영혼의 반응은
항상 자기 파괴(자기 부인)적 경향을 띠게 된다(행 2:37). 어
쨌든 이로써 예수의 적대 세력은 노골적으로 예수를 처형키 위
한 계획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좇으며
ㅇ예수께서...바다로 물러가시니 - 왜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로 물러가셨는가? 마가는 그 이유에 대하여 특별히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마 12:15에 헬라어 '그누스'(아시고', 즉 예수께
서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음모에 대하여 아시고)라는 말이 사
용된 것을 볼 때 예수께서 계셨던 곳(가버나움)에서 떠나신 이
유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을 잡아 죽이기로 결정한 것을
아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죽음의 순간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갈릴리 바다 어느 한적한 곳으
로 물러가셨던 것이다(6:31, 46;7:24, 31;9:2;10:1;14:32). 그
러나 거기서 예수께서는 또 다시 무리들을 만나게 되었다.
8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허다한 무리가 그의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ㅇ유대와...시돈 근처에서...나아오는지라 - 예수께서 몰려들
었던 무리들은 가버나움 근방에서뿐 아니라 남쪽 지방(예루살
렘, 이두매), 동쪽 지방(요단강 건너편), 북서쪽 지방(두로와
시돈) 등 온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마가가 여러 지방 이름을
여기서 언급한 것은 팔레스틴 전역에서 무리들이 예수께 나아
왔음을 암시하기 위해서다. 이에 대해 슈바이쩌(Schweizer)
는 '예수께서 활동하신 곳이 갈릴리(1-6장), 두로, 시돈, 데
가볼리(7장) 그리고 요단강 건너편과 예루살렘으로 언급된 것
으로 보아 마가복음의 지리적 범위의 윤곽을 알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한편 여기에는 예수께서 직접 활동하시지 않은 유
일한 지역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두매 곧 헤브론 남쪽 지역이
다. 이곳에 언급 되어 있는 지명 가운데 몇몇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보자. 이두매 지역은 유대 남쪽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
으로 '이두매'는 구약 '에돔'의 헬라 음역이다. 에돔은 본래
요단.아르바의 동쪽 모압 남쪽의 산지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B.C. 586년 예루살렘 멸망이후 광야의 아랍족속의 세력에
눌려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 후자의 지역이 '이두매'란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유다 마카비는 이두 매인들을 공략
하여 여러 번 성공하였다. 그 후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가 통치 할 무렵에 이두매인들은 유대교
(Judaism)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 그
리스도 당시에는 헤브론 주변 지역을 모두 이두매에 포함시켰
다. 헤롯 대왕이 바로 이이두매 출신이었는데(마 2:1), 그의
여러 아들들은 유대의 정치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인
물들이었다. 한편 '두로와 시돈'이라는 지명은 사실상 팔레스
틴의 북서쪽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또 '요단 건너편'
이라는 말은 갈릴리와 같이 헤롯 안디바의 통치름 받던 베레
아와 데가볼리 지방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Wessel).
ㅇ그의 하신 큰 일을 듣고 - 여기서 '그의 하신'에 해당하는
원어 '에포이에이'는 미완료 능동태로서 예수께서 계속적으로
행하신 수 많은 이적과 사역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듣고'의
원어 '아쿠온테스'는 현재 분사 능동태로서 지속적으로 들어
오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실로 예수께 모여든 무리들은 예
수의 신비한 사역을 수없이 들어왔으며 그 소문으로 인해 마
음이 움직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지니는 역동적
(力動的) 특성이다. 복음의 소문은 인습의 장벽과 지역의 장
벽을 넘고 또 인간의 의지를 움직이는 능력이 있다(롬 10:15
-18;히 4:12). 한편 이때 예수께 모여든 무리들은 어느 한정
된 시점에 급히 모여 들었다기보다 오히려 꾸준히 오래도록
지속적으로 모여들었다고 보는 것이 좋다.
9 예수께서 무리의 에워싸 미는 것을 면키 위하여 작은 배를
등대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ㅇ예수께서...면키 위하여 - 오직 마가만이 예수께서 배에
오르신 이유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물론 예수께서 배
에 오르신 목적은 무리들에게 밀리는 것을 면키 위함이었다.
실로 예수를 향하여 육신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아우성
치는 무리들, 그들은 아마도 예수께 접촉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회복될 것으로만 여겼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같이
1차원적인 무리들의 심성에도 구애치 않으시고 당신의 복음
을 전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의 필요도 만족시켜 주셨다(마
4:23). 즉 예수는 무리들의 생각과 기대를 초월하여 역사하
시고 계셨던 것이다. 한편 마가는 예수께서 무리를 가르치
기 위하여 본문과 같은 이러한 방법을 취하신 것을 말하지
않지만 예수께서는 자주 이 방법을 사용하셨다(마 14:22;
요 6:15-25).
ㅇ작은 배를 등대(等待)하도록(히나 프로이아리온 프로스카
르테레 아우토) - 먼저 '작은 배'란 몇명밖에 탈 수 없는
조그마한 보트를 가리킨다. 그리고 '등대하도록'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카르테레'는 '꾸준히 시중들다', '충성하다'
는 뜻의 원형 '프로스카르테레오'의 가정법 현재형으로 사용
되었으며 '...을 위해 항상 대기하다', '집착하다', '지속적으
로 맡은 일을 수행하다'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즉 이 표현은
제자들의 성실하고도 발 빠른 헌신과 봉사를 예감케 해준다.
실로 그들은 예수께서 필요로 하실 때, 언제든지 움직일 준비
를 갖추고 그 준비한 배를 해변 가까이 놓아 두었을 것이다.
특별히 그들이 어부 출신이었다는 사실에서 그들의 능수 능란
한 준비 작업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0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에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핍근히 함이더라
ㅇ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 당시에 무리들은 예수를 만지는
행위를 통하여 병고침을 받으려고 너도나도 그를 만지고자 밀어
댔다. 마치 그 무리들은 예수를 기적을 행하는 자라고 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마 9:20-
22;14:34-36;눅 6:19).
ㅇ병에 고생하는 자들이(호소이 에이콘 마스티가스) - '병'
(diseases, NIV)에 해당하는 '마스티가스'는 원형 '마스틱스'의
복수 목적격의 형태로 사용되었으며, '채찍', '고문' 등의 뜻을
갖고 있다. 이 단어는 70인역(LXX)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채찍질
(욥 21:9)이나 징벌(시 89:32)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데, 비유적
인 용법으로 '병'이란 의미를 나타내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이
는 '병'이 하나님의 채찍을 맞거나 징벌을 받아 생긴다는 사상
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비유적인 용법으로 본 구절의 이 단
어는 예수께서 고쳐 주신 여러병들로 특별히 매우 만성적이거나
치명적인 질병을 가리킨다(눅 7:21). 5:29, 34에서도 혈루병 걸
린 여인의 특수한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한편 그 당시
유대인들은 병을 하나님의 창조의 뜻에 어긋나는 것으로 간주하
고, 그 안에 귀신의 권세가 활동하고 있다고 보며, 또 간혹 죄
와 병이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마 12:22). 그러나 인과 응
보(因果應報)를 초월하시는 예수께서는 그 병의 원인이 어떠하
든간에 그 모든 소원하는 자들에게 치유의 용서를 베푸셨다.
실로 예수께서는 인류의 구속자요 의원으로서 병자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의 병을 치료하신다.
ㅇ핍근(逼近)히 함이더라(에피피프테인 아우토) - '핍근히'를
뜻하는 '에피피프테인'은 '...에 떨어지다', '몸을 던지다',
'달려들다' 등의 뜻인 원형 '에피피프토'의 부정사 현재형으로
서 저돌적(猪突的)으로 달려드는 무리들의 모습을 현장감 있게
묘사해 주고 있다. 즉 병자들이 위험한 정도로 예수에게 몸을
던지고, 달려드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들이 적의가 있었
던 것은 아니고, 단지 각자가 자신의 병 때문에 예수의 치료를
받고자 맹렬하게 애쓸 뿐이었다.
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ㅇ더러운 귀신들도...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 여기서
예수는 또다시 귀신들린 자들과 마주친다(1:23, 24, 34). 그
무리들은 몰랐다고 하더라도 귀신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알았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1:1 주석 참조). 즉 예수의
메시야성을 알고 소리친 귀신들의 외침은 '자신들을 해치지
말라는 쓸데없는 호소'(Wessel)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그리고 덧붙여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은 예수가 누구인
지 알아 본 귀신들의 이러한 외침은 '어떤 사람에 대하여 그
의 정확한 이름이나 인격을 잘 아는 것이 그를 지배하는 것'
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해 볼 때(Lane), 자기들을 능히 제어
하실 수 었는 그분의 능력을 어떻게든 없애보자는 의도에서
나온 외침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한편 귀신들이 예수를 알아
보았다는 이 사실은 다음 두 가지 관점에서 중요하다. 첫째,
당시 사람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였어도 영적 존재인 귀신들
이 예수를 알아 보았으니 예수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
다(1:24;마 8:29;눅 4:41;행 19:15). 둘째, 그러나 귀신들이
예수를 알았다고 해서 그들이 구원받았다는 것은 결코 아니
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단의 수하(手下)로서 끊임없이 성도
들과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장차 멸망의 심판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마 25:41;계 20:10).
12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계하시니라
ㅇ예수께서...많이 경계하시니라 - 본문에서 특히 강조되고
있는 '많이'(폴라)란 부사는 예수의 꾸짖음이 지닌 엄중성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실 예수께서는 귀신들을 대하
실 때마다 예외없이 타협이나 부드러운 청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꾸짖고 징책(懲責)하시는 입장에서 그들을 상대하신다.
한편 위의 구절에서 '하나님의 아들'(1:1)이라는 표현은 비록
예수에 의하여 고통을 당하는 원수인 귀신들에 의하여 고백되
어진 것이지만 그것은 예수께 주어진 매우 정확한 이름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 드러내야 할
때가 오지도 않았고 귀신들이 자신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적
합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귀신들의 외침을 저지하였던
것이다(1:43 주석 참조).
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ㅇ산에 오르사(아나바이네이 에이스 토오로스) - 원문을 볼
때 예수께서 산에(갈릴리 호수 근방의 구릉지대로 추정) 오르
시는 장면을 현재 직설법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마가 특
유의 생동감과 역사성이 넘치는 표현 기법이 사용되었기 때문
이다. 한편 전승에 의하면 이곳은 '하텐산'(Mt. Hatten)
이라고도 하고 가버나움 북부 지역의 벌판을 가리킨다고도 하
나 어느 산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모세의 시내 산 사
건(출 19:20), 구약의 시온(호렙) 산에 대한 빈번한 언급(왕
상 19:8), 산상 수훈, 변화산 사건 등 중요한 성경적 사건이
산에서 일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산이
인간에게 엄숙하고 고요한 심성을 마련해 주고 또 절대자에
대한 외경을 일깨워 주는 영성(靈性)의 훌륭한 매개체였기 때
문이다. 누가는 이때 예수께서 산에 오르신 이유를 기도하려
오르셨다고 함으로써(눅 6:12) 이 같은 사상을 더욱 강조해
주고 있다.
ㅇ자기의 원하는 자들 -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외적 조건이나
그들 각자의 열정적인 자원 의사에 따라 당신의 12제자를 선
택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당신의 권위와 뜻과 계획에 따라 그
들을 선택하여 부르신 것이다. 이는 예정 교리(doctrine
of predestination), 선택 교리의 근간이 되는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소명은 오로지 원하시는 그분의 의지에 따라 되어
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물론 하나님의 주권적인 소
명에는 인간의 절대적이고 즉각적인 동의가 요청되기는 하나
그것은 부차적인 조건에 불과하다.
ㅇ부르시니 나아온지라 - 눅 6:12에는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
에 예수께서 밤새도록 기도하셨음을 언급하고 있다. 예수는
모든 것을 기도를 통해, 즉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해결하
셨다(14:32). 한편 예수의 부름에 대해 제자들은 어떤 주저
없이 즉각적으로 순응하였다(1:18, 20;2:14). 이제 예수의 제
자들은 자기의 모든 관심과 소망을 접어두고 오직 예수의 삶
과 뜻을 절대 헌신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14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ㅇ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 '열 둘'이라는 숫자가 신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특히 '열 둘'은 임의적인 숫자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이 분명하다(마 19:28;눅 22:30).
그런 점에서 그들 12명의 제자들은 새 이스라엘의 보좌에 오
를 12족장과 같은 영광을 얻었음이 분명하다(계 21:14, 15).
사실 앗시리아(B.C. 722)와 바벨론(B.C. 586)에 의해 이스라
엘이 멸망한 이래 현재의 이스라엘은 두 지파 내지 두 지파
반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특히 이 12제자 선택은
이스라엘이 종말의 때 곧 메시야 시대에 열두 지파의 백성으
로 회복되고 완성되리라는 예언서와 묵시 문학에 터잡은 기대
와 관련 되었다고 볼 수 있다(사 11:11, 16;27:12;35:8-10;
49:22;60:4, 9;66:20;겔 39:27;미 7:12 등). 그렇다면 열 두
제자는 전체 이스라엘에 대한 예수의 요구를 상징할 뿐 아니
라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구원에 대한 그의 약속을 상징하기도
한다. 마가는 열 둘의 종말론적 기능을 역사적인 과제로 확대
시킴으로써 그런 이해를 받아들였다. 이 역사적 과제는 분명
히 예수의 일을 지속시키는 것이지만, 열 둘이 구분에 의해
파송되고 또한 예수의 뒤를 이어 교회의 중추적 사명을 감당
해야 한다는 점에서 예수의 일과 구별된다(Gnilka). 한편
마가는 이 선택된 제자들을 대개 '열 둘'이라 칭한데 비해
(16절;4:10;6:7;9:35-헬라어 원문에는 '열 둘'로 묘사되었으
나 개역 성경은 이를 '열 두제자'로 번역하였다.) 마태는
'열 두 사도'(마 10:2) 또는 '열 두 제자'(마10:1;11:1;20:
17)로 표현하였다. 여하튼 마가는 이 '열 둘'이라는 칭호를
통해 그들을 단순히 예수를 좇는 무리들과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의 '세우셨으니'(에포이에센)란 직역하면 '만드
셨으니'로서 이를 근거로 본 구절을 '창조하셨으니'로 번역
하기도 한다(Lohmeyer). 즉 이 12제자 선택은 예수의 구
속사적 관점에서 새로운 역사적 실체의 탄생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다(Taylor, Grant). 물론 나름대로 의미있는 번
역이기는 하지만 본 구절은 단순히 열 둘을 '임명하셨으니'
로 번역하여 예수께서 12제자를 공식적으로 임명하셨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ㅇ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 열 두 제자가 세워진 목적은 세 가지였다. 특별히 본문에서
목적 의식을 분명히 드러내는 헬라어 접속사 '히나'('...하기
위해')의 2회 반복적 사용은 12제자 선택에 있어서 예수께서
확실한 목적을 두시고 행하였음을 보여 준 것이라 하겠다. 첫
째 '자기와 함께 있게하시고', 둘째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세째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실' 목적이었다.
실로 그 열 두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가장 가까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했다. 즉 그들은 예수와 함께 살고 그와 대
화하며 그에게 배워야 했다. 마가 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대부
분의 시간을 그의 제자들을 훈련시키는데 할애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자들의 훈련은 예수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끝나
지 않았다. 그들은 보냄을 받아야 했다(6:7). 즉 그들은 보냄
받은 자, 곧 '사도'(아포스톨로스)로서의 사명을 온전히 수행
해야 했다. 또한 제자들의 사역은 복음을 전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이었다. 이 귀신 축출은 원래 예수께서 지니신 권능으
로서(1:26) 이제 사단의 왕국을 몰아내고 당신의 나라를 건설
하기 위해 부름받은 제자들에게 부여(附與)되고 있는 것이다
(마 10:8). 이렇듯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과 귀신을
쫓는 일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예수께서 이루고자 하
시는 구원은 사단과 그의 일당들을 멸하시고 당신과 구원받은
자들과의 다함없는 교제를 완성하시는 것이다.
16 이 열 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ㅇ이 열 둘을 세우셨으니 - 신약성경에서 제자들의 명단이 기록
된 데는 본문 이외에 세 곳이 더 있다(마 10:2-4;눅 6:14-16;행
1:13). 여기에 나타나 있는 12제자의 이름들은 대부분 네 부분
으로 나눠진다. 즉 첫번째 부분은 베드로가 예외 없이 맨 앞에
등장하고 있으며, 두번째 부분에서는 빌립이, 세번째 부분에서
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다른 제자들 앞에 등장하고 마지막
부분에는 유다의 이름이 등장한다(사도행전에는 그가 이미 자
살한 것으로 묘사되어 그 이름이 생략됨). 한편 마가는 각자의
이름 앞에 접속사 '카이'('그리고')를 삽입하여 연결시킴으로써
이러한 네 부분의 구별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인상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마 10:2-4 주석 및 강해 그리고 본장 13-19
절의 주제 강해를 참조하라).
ㅇ시몬에게는 베드로 - 이 부분에서는 베드로(반석)란 별명을
얻은 시몬이 맨 처음에 언급된다(마 16:18). 여기서 '베드로'
란 이름은 헬라명이며, 요 1:42에 나오듯이 '게바'는 아람명으
로서 그 의미는 '반석'이다. 이는 그의 성품의 강직성(强直性)
에서라기보다 교회사적 의미에서 그가 수행해 가야 할 사명과
연관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가의 복음서에는 어떤 점에서 시몬
이 반석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도
예수께서도 베드로가 비록 굳건하지 못하고 연약한 인물이었다
고 하더라도 그가 미래에 사역하게 될 교회에서 큰 일꾼으로
일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았기 때문에 그러한 별명을 붙여 주
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실로 그는 예수 생전에는 과격하고 또
비겁한 좌충 우돌형의 미성숙한 인격자에 불과했으나 예수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부터 초대 교회의 기초석으로서
의 탁월한 사명을 완수한 반석같은 일꾼이었다(행 2:14). 한편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그의 역할을 두드러지게 강조하였다.
그의 역할은 첫 제자로 부름을 받은 데서 시작하여 무덤에서 천
사의 위탁(委託)을 받는데까지 이른다(16:7). 한편 위에서 보듯
이 그가 문자적으로 반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의 부활을 친
히 목격하고(고전 15:5) 그분에게서 사명을 새롭게 부여 받은 후
(요 21장)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하고서부터일 것이다(행 2장).
어쨌든 그는 열 두 제자 가운데, 그리고 위에 서술한 그들의 과제
(14, 15절)에 있어서 모범적인 위치를 점하게 된다.
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ㅇ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 요한보다 야고보가 항상 먼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야고보가 요
한의 형인 것 같다. 그렇지만 야고보는 사도들 중에 제일 먼저 순
교를 당했기 때문에(행 12:2) 그의 형제 요한보다 큰 업적을 이룰
수는 없었다. 이 두 사람은 어부 세베대의 아들이었는데, 세베대는
사업이 번창하여 삯꾼들을 고용할 정도였으며(1:20), 그의 부인 또
한 예수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도왔다(마 27:55, 56;눅 8:3). 열 두
제자 중 오직 요한만이 십자가 곁에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이나, 세
배대의 가족이 대제사장의 집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요18
:15, 16)은 아마도 세배대의 집이 부유했기 때문인 것 같다. 야고
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살로메로 추정되는데(15:40;16:1), 예수를
섬기는 그녀의 동기가 순수한 것만은 아니었다(마 20:20, 21). 한
편, 이들이 얻은 이름은 '보아너게'라는 이름으로 헬라어로는 '보
아네르게스'라고 하는데, 이것은 마가복음에만 나타나는 이들 형
제의 별명이다. 이 단어의 어근(語根)은 분명치 않으나 히브리어
'브네 레게쉬'('우뢰처럼 쉴새없이 시끄럽게 하는 아들들')에서 온
것 같다. 이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은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그
들의 성급하고도 직선적인 성격 때문에(9:38;10:35-37;눅 9:54) 얻
게 된 듯하다.
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이며
ㅇ안드레 - '남자다운'이라는 의미를 가진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
제로서(요 1:40, 41) 갈릴리 바닷가의 벳새다 출신의 어부였다(1
:16-18;마 4:18-18;요 1:44). 그는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되었다가
(요 1:35, 40)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즉시 그를 따르게 된다(마
4:19, 20). 세례 요한을 따르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좇은 안드레의
행동은 세례 요한에 대한 배반이 아니었다. 세례 요한의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앞서 증거하는 진리였기에 스승을 버리는 것
이 아니라 더 큰 진리에로의 발전이며 본래 추구하던 진리를 좇은
것이었다. 한편, 안드레가 베드로를 인도하고도 이름의 기록은 베
드로가 항상 앞서는데(요 1:44), 그는 이에 대해 하등의 시기심이
나 불만을 갖지 않았다. 안드레는 함께 동역하는 아량을 가진 형
제애의 진수를 보여 주며 지극히 개인적이고 체험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ㅇ빌립 - '말(馬)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빌립은
갈릴리 벳새다 출신(요 1:44-51;12:21)으로 안드레와 나다나엘의
친구였다. 그는 예수께 발견되어 제자에의 부르심을 받은 즉시로
그를 따르게 된다(요 1:43, 44). 그는 예수를 만난 후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그를 주께로 인도한다(요 1:45, 46). 그리고 그는 12사
도로 부름을 받은 후에 오병이어(요 6:8-13)의 기적에 앞서서 주
께 시험을 받는다(요 6:1-7). 그후 예루살렘 입성때 헬라인들을
예수께 인도하는 매개 역할을 하기도 한다(요 12:20-22). 또한 예
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아버지(하나님)를 보여 달라고 주께 요
청하기도 했다(요 14:7-12). 전승에 의하면 히에라 폴리스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ㅇ바돌로매 - '톨마이의 아들'(Son of Tolmai)이라는 뜻이며,
이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을 딴 것이기 때문에 아마 개인적인 다른
이름이 따로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요 1:46에 등장한 나
다나엘(Nathanael)과 동일 인물이 아닌가 하는데, 그럴만한
적절한 이유는 (1) 나다나엘은 12제자들과 깊은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며(요 21:2), (2)빌립이 그를 찾아서 예수께 인도했기 때문
이다(요 1:43-46). (3) 공관 복음에서 빌립과 바돌로매는 사도들
의 명단에 항상 함께 열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출생지가
역시 갈릴리의 가나(Cana)라는 것은 같은 결론을 뒷받침한다.
만일 사실이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물'을 의미하는 나다나엘이란
이름은, 베드로를 지칭하는 시몬(Simon)이란 이름과 바요나
(Bar-Jona)란 의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바돌로매와 깊은 연
관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The Pulpit Commentary). 어
쨌든 교회의 한 전승에 따르면 그는 애굽, 인도, 아르메니아 등
지에서 선교 사역을 펼치다가 끝내 순교했다고 전한다.
ㅇ마태 - 그는 분명 레위와 이명 동인(異名同人)이로서(2:14)
마가는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한편 마 10:3에서
마태는 사도들의 명단에 있는 자신의 이름 앞에 '세리'라는 형용
어구를 덧붙인다. 즉 그는 자기 스스로 자신이 옛날에 온 백성으
로부터 비난받아 마땅한 죄인이었음을 결코 숨김없이 드러내 놓
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용사받은 죄인의 떳떳함이요, 일꾼된 자
의 진실과 겸손이다. 한편 마태라는 말은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의미의 '맛다디아'(Mattathias)의 준말로서, 헬라어로는
'데오도르'(Theodore)가 된다(Gesenius).
ㅇ도마 - 도마는 '디두모'(요 21:2)라고도 불리우는데, 디두모는
아람어로 '쌍둥이'를 의미한다. 그는 그의 이름 때문에 알려지기
도 했지만 또한 그의 용기(요 11:16)나 그의 의미 깊은 고백(요
20:28)으로써 더 알려졌다. 실로 그는 의심하는 자의 대명사인
동시에(요 20:25) 예수를 가장 합리적이고 진지하게 알기를 소
원했던 이성적인 신앙인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어떤 전승에 의
하면 그는 인도에 선교사로 가서 일하다가 그곳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ㅇ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하기 위
해 흔히 '작은 야고보'로도 불리어졌다(15:40;마 27:56). 이는
아마도 세배대의 아들 곧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 보다 그가 늦게
부름받았거나 나이가 연소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일 것이다.
한편 야고보의 아버지 알패오는 글로바(Cleophas)와 동일인
인 것으로 추정되며(15:40; 요 19:25), 그의 부인 마리아는 예
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사도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와
친 자매간으로 여겨진다(Jerome).
ㅇ다대오 - 어떤 사본에는(Diatessaron Version) '렙바이
오스'와 '다대오'가 함께 불려지고 있다(Origen). 이 다대
오는 아마도 누가복음의 명단에 나와 있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
가 그의 본명이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눅 6:16;행
1:13). 한편 '렙바이오스'와 '다대오'는 어휘상 유사성을 갖고
있다. 즉 '렙바이오스'는 '심장 깊은 곳', '다대오'는 '가슴'에
서 유래된 말이다. 이러한 이름은 아마 그를 배신자 유다와 구별
하기 위해서 붙여진 것 같다(The Pulpit Commentary).
ㅇ가나안인 시몬 - 시몬은 '열심당'(the Zealot)이라 불리어졌다.
이러한 별칭은 단지 그의 종교적인 열성을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가 예수의 제자로 부름받기 전에
광적인 국수주의자 그룹인 셀롯당(열심당)의 일원임을 밝히는 것
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좋다. 열심당은 팔레스틴을 점령하고
있던 로마에 폭력으로 대항하여 싸웠던 유대인들의 애굽 집단이
었다.
19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러라
ㅇ가룟 유다 - 유다의 성은 '가룟'(Iscariot)이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아마 '가룟(Karioth)이라 불리우는 지방에서 온 사
람'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가룟(Karioth) 지방은 헤브론
에서 남쪽으로 약 3km 떨어져 있는 '케리옷 헤즈론'(Kerioth
Hezron) 지방(수 15:25)이거나 모압 땅 케리옷(Kerioth)
지방과 동일시 될 수 있다(렘 48:24). 따라서 그는 12제자 중
유일하게 남쪽 출신의 제자였다고 보겠다. 유다는 예수의 제자
로서 성경에 나타나기 이전의 생애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알 수
없다. 성경에는 단지 제자들의 돈궤를 맡아 회계(會計)를 보고
베다니에서의 향유 사건을 시작으로 하여 예수를 배반하고 자살
하는 것으로만 유다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우리 주께
서 당신의 제자들로 선택하신 12명의 사람들은 교회 역사에 있
어서 지대한 공헌을 했던 복음의 밑거름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4명은 어부였고, 또 한 명은 사람들의 미움을 사던 세리요, 또
한 사람은 과격한 독립 운동을 벌이던 열심당원이었다. 나머지
6명 제자들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무것도 알려진 바가 없다. 그
열 두 제자들은 모두 평범한 인물들이었다. 즉 그들 가운데는 설
교가도, 성경에 대한 전문가도 없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의 교
회를 세우고 그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게 하였던 사람들이 바
이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12 사도의 명단을 대할 때마다
그들의 위대성이나 탁월한 봉사에 주목하기에 앞서 무엇보다 그들
을 사용하셔서 교회를 세우고 세계 복음화를 주도해 가시는 예수의
초월적인 권능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20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ㅇ집에 들어가시니...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 예수는 다시 무리
들에게 둘러싸였다. 예수께서 들어가셨던 집은 1:29과 2:1에서 언
급된 가버나움에 있던 베드로와 안드레의 집으로 추정되며 그 집
은 예수의 갈릴리 전도 본부 역할을 하였다. 그 집에는 예수의 관
심을 얻고 또 예수의 이적을 체험코자하는 무리들이 수없이 몰리
는 바람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2:2;5:24
;눅 5:1;8:19, 45). 이는 다음 절에 이어지는 예수의 친속의 힐난
(詰難)에 대한 배경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적어도 무리들의 예수
께 대한 열심있는 신앙을 은연중에 강조한 것이라 본다.
21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ㅇ예수의 친속(親屬)들이 듣고...미쳤다함일러라 - 여기서 '친속들'
호이 파르 아우투)이란 문자적으로 '그에게 속한 자들', '그 곁에
서 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어떻게 보면 '그의 친구들' 또는 '그
의 제자들'로도 이해할 수있다. 그러나 31-35절과 연결시켜 볼 때
이는 분명 예수의 '가족들'이다. 즉 예수의 쉴새없는 활동을 심히
염려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던 나사렛의 어머니와 형제들이었다
(Donald W. Burdick). 예수의 가족들은 예수의 많은 능력을 인
하여 크게 소문이 나 식사할 겨를도 없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예수께 와서 그를 붙들려 했다. 이것은 아마도
그들이 예수를 붙들어 다시 나사렛에 억지로 데려가고자 했다는 사
실을 보여 주는 것일 것이다. 즉 그들은 예수를 육적 양식과 영적
양식을 얻기 위하여 몰려드는 사람들로부터 빼앗아 갈 의도였던 듯
하다. 특히 '붙들러'(take charge of, NIV)의 헬라어 '크라
테사이'라는 동사는 어떤 사람을 체포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본문의 긴장스런 장면을 더욱 고조시켜 준다(6:17;12:12;14:1). 한
편 예수의 가족들이 예수께 그러한 태도를 보인 것은 예수가 과로
로 인하여 정신적으로 타격을 받았을 것, 즉 그가 미쳤을 것을 염
려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미쳤다 함일러라'(엘레곤...엑세스테)란
문자적으로 '정신이 제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나갔다'는 뜻으로 결
국 비정상적 정신 상태, 불안한 정신 상태를 지적한 말이다. 한편
본문은 주격이 없는 제 2단순 과거 3인칭 복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데, 이는 예수의 미친 상태를 풍문으로 전해 들었음을 은연중에 암
시한 것이라 볼수 있다. 실로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당신의
적극적인 헌신 때문에 오히려 가족 내의 긴장에 직면했다. 심지어
그분의 사랑하는 어머니 마리아조차 자신의 아들은 특별한 소명을
위해 운명지워졌다고 익히 들어온 바였음에도 불구하고(눅 1:26-
38), 그녀의 자녀들과 함께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
은 예수의 정신적 상태를 의심했고 그를 집으로 데려가려 했다.
심지어 예수의 형제들은 그를 비웃었다(요 7:2-5). 이것은 분명
예수의 실체를 철저히 오해한 가족들의 관심의 수준을 대변해 줄
뿐 아니라(C. L. Mitton), 근본적으로 메시야이신 예수께 대
한 그들의 불신앙을 반증해 준다(요 7:5). 이처럼 불신앙은 진리
를 왜곡, 오해할 뿐 아니라 심지어 진리를 훼방하고 말살하려 들
기까지 한다.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ㅇ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 - 아마도 이들은 예루살렘에 있
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의 언행을 세밀히 살펴 그 범법(犯法)
여부를 알아 보도록 보내진 일종의 종교 감시단이었을 것이다(7:
1;마 15:1). 한편 여기서 '내려온'이라고 기록한 것은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내에서 종교적, 정치적으로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마가
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예수를 핍박하고 처형한 참으로 적대적인
도시였다. 그러한 예루살렘에서 급파된 서기관들(7:1 주석 참조)
은 그야말로 극악한 무리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왔다는 사실은, 예수의 소문이 유대 온
전역에 파다하게 퍼져 급기야는 중앙에 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
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다.
ㅇ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 적대
자들의 비난은 친속들의 언급에서 어느 정도 암시되었지만 그것과
는 엄연히 구별된다. 실로 적대자들은 공개적인 공격을 가하며 예
수를 모독했다. 그들의 첫번째 비난은 예수가 바알세불을 '지폈
다'(is possessed by, NiV)는 것이다(요 10:20). '바알세
불'은 헬라어로는 '베엘제불'로 표기되며, NIV와 KJV는 '베엘
제붑'(Beelzebub)이라 표기한다. '베엘제붑'은 라틴어 성경
(Latin Vulgate)의 표기를 영어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헬라
어 '베엘제불'은 '바알 왕자' 또는 '고귀한 존재 바알'이라는 의
미를 나타내는 가나안 신의 이름인 셈족어 '바알제불'(Baal-
Zebul)의 음역이다. 한편 이 말은 '집주인', '파리들의 주(主)'
라는 뜻으로서 모두 제의적(祭儀的)인 의미를 지닌다. 즉 '집 주
인'이란 제전(祭典)의 주인을, '파리들의 주'란 귀신의 격하된 신
분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유대인들은 시기 적절하게 사
단에 대한 동의어로서 그 이름을 사용했다. 즉 유대인들은 이 '바
알세불'을 귀신들의 왕 곧 사단을 지칭하는 용어로 거의 고정시켰
던 것이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비난은 곧 예수가 사단이라는 엄
청난 모략이었음을 알 수 있다. 두번째 비난은 '귀신의 왕을 힘입
는다'는 것이었다. '귀신의 왕'(the prince of demons, NIV)
은 어둠의 세력 가운데 최강자, 또는 마귀들의 통치자란 의미로서
결국 사단과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마 4:1-11 주제 강해 '사단과
귀신' 참조). 한편 바알세불이 귀신들의 세계를 통치한다는 사실
은 정통 유대교에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까닭은
선.악을 무론하고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통치하고 `계신다는 사
실`을 그들은 믿었기 때문이다(욥 1:6-12). 그런데 간혹 구약의
위경이나 쿰란 공동체의 기록들에 따르면 선.악의 세계가 확실히
구분된다는 사실이 발견되곤 한다. 더욱이 신구약 중간기를 거치
면서 이스라엘은 수많은 이방 문화와 교류했기 때문에 이 같은
이원론적 사고를 하게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Grant,
Taylor). 특히 당시 유대에는 이방에서 주입된 유사치료적 마
술(homoopathisch)이 있었는데, 이 마술에서는 귀신 축출자
가 자기에게 예속된 귀신들의 힘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바로 이
런점에서 예수는 새로운 교훈과 지금까지 듣고 보지 못했던 이
적을 행하심으로 마치 유사치료적 마술의 전문가인 것처럼 주술
의 혐의를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Gnilka).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예수는 백성을 미혹하는 자로 오해받을 수밖에 없
었다(요 7:20, 21;8:48;10:20). 어쨌든 예루살렘에 급파된 종교
지도자들은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인도로써 역사하시는 예수
를 오히려 성령의 능력과 완전히 반대되는 바알세불과 사귀(邪
鬼)와 결탁한 자로 매도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통해 그들은 (1) 예수의 메시야직을 모르고 죄를 짓기도 하였
지만 (2) 예수의 가르침의 순수성과 순결성을 알고도 자기들의
사악한 정치, 경제적 이권이 침해당할까하여 예수를 고의적으
로 배척한 것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예수 사역의 동기와 목적,
능력의 근원까지를 고의적으로 모독함으로써 구원의 유일한 성
령의 사역을 부인한 셈이므로 결과적으로 구원의 길을 영원히
스스로 막은 셈이 된 것이었다(마 9:1-34;15:14).
23 예수께서 저희를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단이 어찌
사단을 쫓아낼 수 있느냐
ㅇ예수께서...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 예수께서는 당신을
비난하는 자들에게 감정을 폭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불
러모으시고 대면하신 채로 비유를 들어 그들의 그릇된 생각을
하나하나 깨우치셨다. 한편 여기서 '비유'(Parable)란 예수
의 교수법 가운데 두드러진 한 특징으로서 심오한 진리 옆에 평
범하고 친숙한 상황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듣는 이로 하여금 이
해에 도움을 주게 하는 것이다. 실로 비유는 하늘의 의미를 지
닌 땅의 이야기로서 비록 이야기의 내용이 땅에 뿌리를 박았으
나 하늘을 향해 열려진 창을 가진 집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마
13장 주제 강해 '예수의 비유' 참조).
ㅇ사단이 어찌 사단을 쫓아낼 수 있느냐 - 어둠의 세력 가운데
가장 탁월한 존재인 사단은 그의 휘하에서 자신의 뜻을 실현하
기 위해 활약하는 마귀들을 쫓아내지 않는다. 사단이 사단을 쫓
아내는 것은 스스로 분쟁하는 것으로서 자기를 망하게 하는 일이
된다. 그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는 마귀를 쫓아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사단이나 바알세불과는 적대 관계에 있으며
(창 3:15), 또한 그들보다 더 강력(强力)하시기 때문이다. 실로
예수는 귀신들을 만나실 때마다 두려워하거나 주저함 없이 책망
하셨다. 귀신들에 대한 예수의 권능은 특별히 그의 치유 역사
가운데서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각 복음서들에서 보듯이 그러한
치료의 사역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계시는 것으
로 항상 묘사되었다. 그러기에 진정 사단은 이 세상을 완전하게
장악하지는 못한다. 그는 여러 가지 파괴와 고통과 질병의 원인
이 되기도 한다. 또한 그는 우리의 삶과 세상의 악의 근원이 되
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패배는 너무도 자명하다. 왜냐하면 그
들의 왕인 바알세불의 세력을 만유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기간 중 이미 책망하시고 몰아내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 그 목덜미를 짓이겨 놓으셨기 때문이다.
24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ㅇ만일 나라가...그 나라가 설 수 없고 - 예수는 사단이 사단을
쫓아낼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는 두 가지 실례를 사용
하신다. 분쟁하는 나라는 멸망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극히 기
초적인 상식이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이 상식에도 못 미치는
발상으로 예수를 비난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본문의 '나라'
(바실레이아)는 흔히 '왕국'으로 번역하는데, 실로 이 왕국이 건
실히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 왕과 신하된 백성이 혼연 일체(渾然
一體)가 되어야 함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어느 한 쪽이 불신
하고 파괴적 성향을 띠면 그 나라는 망하고 말 것이다. 이 실례
에서 예수는 보편 타당한 진리를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모든 나라
모든 공동체들에게 적용되는 진리요, 예외없이 사단의 나라에도
적용되는 진리인 것이다(눅 11:17;고전 1:10;3:3;11:18).
25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ㅇ집이 스스로 분쟁하면...설 수 없고 - 예수의 보편 타당한 논
리는 좀더 구체적이고도 실감있게 적용된다. 그것은 누구나 피부
로 느낄 수 있는 집안의 분란(紛亂)에 대한 비유이다. 여기서
'집'(오이키아)이란 어떤 건축 구조물을 뜻하지 않고 혈연적인
가족 구성원들의 집합체로서의 집을 말하는 것으로서, 어떤 면
에서는 '나라'라는 집합체보다 더 결속력과 동질성 면에서 뛰어
나다 할 것이다. 실로 이 두번째 비유는 결국 사단의 왕국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공동체에 적용되는 것이다. 즉 어떤
단체로 그 자체 내에서 분쟁이 있으면 스스로 망하고 만다
(Lenski).
26 만일 사단이 자기를 거스려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이에
망하느니라
ㅇ사단이 자기를 거스려...망하느니라 - 24, 25절의 결론구에 해
당한다. 요약하면 사단의 왕국도 역시 분쟁하면 필연적으로 멸망
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 사단의 왕국은 스스로의 내분으로
인해 멸망할 조짐은 없었고 성경에 기록된 바대로 최후의 심판 때
까지 그 왕국이 지속될 것이었다(요 12:30, 31;살후 2:8). 바로 그
런 이유로 예수의 귀신 축출은 사단의 내분으로 단정할 수 없으며,
오직 사단의 적대자요 심판주로서의 권세있는 사역에 해당하는 것
이다(요 14:30;요일 3:8;계 20:10).
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ㅇ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늑탈(勒奪)치 못하리니 - 더 자세한
내용으로 엮어져 있는 눅 11:21, 22과 평행을 이루는 본문은 사
49:24, 25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서 '강한 자'란 막강한
힘을 소유한 약탈자나 도적의 이미지(image)를 제공하는 자로서
본문에서는 사단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마 12:29). 그렇다면 '강
한 자의 세간'은 사단이 소유하고 관할하는 그 휘하의 마귀들내지
는 사단에게 직접적인 고통과 피해를 입고 있는 존재들을 포괄적으
로 일컫는다. 그리고 '강한 자의 결박'이란 사단과 그휘하의 마귀
들을 축출하는 일과 사단의 왕국을 황폐화시키는 것을 가리킬 것이
다. 이같은 강한 자 결박 장면은 유대 문헌들에 자주 등장하는 것
으로(계 20:2;외경 에녹서 10:4, 5;레위의 유훈 18:12) 악의 최후
멸망을 기대하게 한다. 한편 본문에 암시된 '그 강한 자를 결박할
자'는 사단의 왕국을 괴멸(壞滅)하시고 당신의 나라를 건설키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일컫는다. 실로 예수는 사단을 결박
시키고 그 사단에게 결박당한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
셨으며, 병고침과 귀신 축출 등을 통해 이미 점진적으로 사단의 세
간을 늑탈해 가고 계신 것이다. 물론 비록 사단이 결박 상태에 있
다 하더라도 최후의 심판 때까지는 긴 사슬에 묶은채 최후의 발악
을 할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께서 강조하신 바는 (1) 당신은
사단과 결코 동맹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과 (2) 당신은 현실적으로
사단의 세력을 파괴해 가고 계시며, 그렇기에 당신은 사단보다 더
강한 분이시라는 점이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ㅇ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아멘 레고 휘민) - '아멘'(진실
로)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본문은 예수께서 당신의 진실하신 품성과
약속을 보증으로 말씀하시는 공식적이고도 중차대한 메시지를 전하
실 때마다 특징적으로 사용하신 권위문(權威文)이다(마태복음 31회,
누가복음 6회, 요한복음 25회, 본서에는 13회 기록됨-8:12;9:1,
41;10:15, 29;11:23;12:43;13:30;14:9, 18, 25, 30).
ㅇ사람의 모든 죄...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 여기서 '사람'에 해당
하는 원문은 '사람
들의 아들들'(토이스 휘오이스 톤안드르폰)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
어 '인자'(人子)에 대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는 마 12:32와 그 언
어적 유사성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여기서 '모든 죄'(판타...타
아마르테마타)는 문자적으로 '모든 죄악된 행위'를 뜻하며, '훼방'
블라스페미아미)은 '모든 죄'의 한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서 상대방
을 모욕하거나 상대방의 일에 적극적인 장애 역할을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같은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인 개개의
죄악 행위조차 궁극적으로는 용서를 ('사하심을 얻되'라는 말이 미
래 시상임에 유의) 받을 수 있다고 단언하셨다. 이는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목적으로서 예수는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사랑
과 또 모든 죄를 사하시는 능력을 지니신 인류의 유일한 구속자이
시다.
29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ㅇ성령을 훼방하는 자는...영원한 죄에 - 이 부분은 성경의 난해
구절들 가운데 하나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을 통해
인간의 모든 죄는 예수의 십자가 아래서 용서받을 수 있다고 선언
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3:16). 그럼에도 본문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다음
몇 가지를 통해 이 난해를 극복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모든
죄는 무조건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회개해야만 구원
을 얻는 것인데,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결국 삼위 일체되신 하나
님을 부인하는 것이므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2) 성
부는 구원을 계획하시고 성자는 구속 사업을 실현하시고 성령은
이를 성도들에게 적용하신다. 따라서 인간은 성령의 감동 감화를
통해 구원받는데, 이를 부인하면 '회개'를 통한 구원의 길이 영
원히 막히게 된다. 즉 '인자'는 모르고 부인할 수 있을지라도 성
령의 사역을 부인하는 것은 고의적(故意的)인 일이고 또 회개를
거부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사 63:10;행 5:3;엡 4:30;살전 5:19).
더 자세한 내용은 마 12:31, 32 주석 및 강해를 참조하라. 한편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해진다는 이 말씀은 교회 역
사상 크나큰 불안과 고통을 야기시켜 왔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
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였는지에 대해 매우 불안해 해왔다.
실로 예수께서 여기서 강조하시고자 한 것은 그죄의 일시적 경향
이 아니라 반복 지속적이고 고의적인 죄악의 행위로 인해 발생하
는 고질적이고 뿌리깊은 영혼의 상태에 관한 것이다. 만일 사람
들이 용서받을 수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한된 성품을 가지
고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마음의 완악함과 편견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를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그분의 은혜를 비
난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처럼 죄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라일(Ryle)의 다음과 같은 말은 큰 위로가 될 것이다. '결코 용
서받지 못할 죄가 분명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죄로 인해 마음의
가책을 받는 자들은 결코 그 같은 죄를 범하지 않는다'(J. C.
Ryle, Expository Thoughts on the Gospels, 2:59).
반면에 실제로 그 같은 죄를 범하는 자들은 완악한 심령을 지니고
있기에 자신이 그 같은 범죄자요 또 미래에까지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30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ㅇ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 본절에 언급된 서기관들의
말 자체가 위에 언급한 영영히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해 직접
적인 원인이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어떤 범죄라 할지
라도 회개가 있고 돌이킴이 있을 때에는 분명 하나님의 용서가
따를 것임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본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선행에 대한 예수의 교훈과 또 사단의 왕국이 분열
할 때 그 왕국이 패망하리라는 사려깊은 예수의 설명을 듣고서
도 오히려 고의적이고 악의적으로 성령의 능력에 의해 되어진
이적을 모독(冒瀆)한 것이 곧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에 해당
하는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편견이 없는 보통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선한 일'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일들을 행하셨다.
그는 불행한 사람들을 악의 세력과 속박에서 자유롭게 해주셨
다(마 12:22;눅 11:14). 예수께서는 그 일을 성령의 능력
(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을 통하여 행하셨으나
서기관들은 그것을 사단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어쨌든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는 그 사람의 행동의 근거가
되는 심령의 자세에 의해 판가름 나는 것이다. 즉 예수의 진리
에로의 인도와 성령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회개는 커녕 깊은 적
의와 거듭되는 의지적 반항을 함으로써 성령을 훼방하는 치명
적인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Donald W. Burdick). 이에
대해 미톤(C.L. Mitton)은 말하기를 '당신이 선이라고 분
명히 알고 있는 데도 선한 것을 악하다고 하는 것은 당신이 편
견과 악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자인한 까닭에, 모든 죄 중에
서 가장 악한 죄를 범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마음의 완악함
(3:5) 때문에 이와 같은 죄악을 범한다'고 했다.
31 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ㅇ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예수를 부르니 - 마가는 다시 21절
과 연결하여 예수의 가족에 대하여 말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마가는 서기관들과의 바알세불 논쟁에 관한 기사를 삽입시
킴으로써 위기감(危機感)을 고조시키고 더불어 예수의 가족들이
나사렛에서 가버나움까지 오는데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을 독자
들에게 암시하고 있다. 가족들이 예수께서 있는 곳에 도착하였
으나 그들은 그가 계신 곳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 대신에 그들
은 밖에 서서 사람을 시켜 그를 불렀다. 특히 형제들과 그 모친
이 언급되어 있으나(본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어머니에 대한 언급
이 이 구절 한 군데밖에 없다) 요셉은 언급되어 있지 않은 점이
이채롭다. 아마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났었던 것 같다. 한편 '동생
들'에 관해서는 6:3 주석을 참조하라.
32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ㅇ무리가...어짜오되...밖에서 찾나이다 - 예수께서 들어가 계신
집은 입추(立錐)의 여지없이 사람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무리
들은 제자들과 더불어 예수를 중심으로 빽빽이 둘러 앉아 있었다.
한편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마 12:47) 본
문의 '무리' 대신 어떤 한 사람이 예수께 이야기했다고 기술한다.
이를 종합해 보면 아마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장면을 지켜보
던 한 사람이 바깥 사정을 전해 듣고(31절) 무리를 헤집고 들어
와서 예수께 이르러 이야기를 전한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러한
두 복음서 간의 차이 이외에도 마가는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
이 밖에서 찾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마태는 '말하려고 밖
에 섰나이다'(마 12:47)라고 전하고, 누가는 '보려고 밖에 섰나
이다'(눅 8:20)라고 각각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이유는 각 기자의 관심사가 달랐을 뿐 아니라 각 기자들이 지닌
독특한 기록 방법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각 기자들
은 동일한 역사적 사건을 함께 보완적으로 조화롭게 기록하고 있
다는 사실이다. 한편 본 구절에서는 가족들이 현장에 나타나 예
수를 계속 찾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예수께서 명확히 알고
계신가의 여부가 표면상 드러나 있지 않다. 측측하건대 예수께서
는 그의 동생들의 불신을 이미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 같은 사
실은 다음 절에서 보듯이 예수의 영적 가족에 관한 가르침에서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계속해서 순종하기 위해
때로는 가족과의 관계도 단절해야 한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암시
하고 있는 듯하다. 실로 이것은 예수께서 직접 경험한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께서는 친히 집이나 가족까지 버리는 복음에
대한 절대 순종을 주저없이 말씀하시게 된다(10:28-30). 어쨌든
본문에서 예수가 가족들의 면회 요청에 즉각 응하지 못하셨던 것
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Lane). 한편 본절에 언급된 '누이
들'이란 용어는 여러 권위 있는 사본들(시내, 바티칸, 에브라임
등)에는 빠져 있다. 아마도 31절과, 본문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
마태복음, 누가복음과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생략된 듯하다. 그
러나 이 용어가 생략된다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ㅇ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근본 의도는 인간 관계를 전면 부정해서가 아니다. 예수는
바로 이 기회를 통해 영적 관계의 중요성을 가르치시고자 하셨을
뿐이다. 실로 예수께서 평가하셨듯이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와의
긴밀한 관계성(복음을 전하고 그 나라를 건설하는 일등)이 지상에
계시는 어머니와의 관계성(인간적 교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었
다(마 6:33). 따라서 예수는 비록 사랑하는 어머니를 위시한 가족
들이 당신을 혈연으로서의 끈으로 연결코자 노력하였으나, 당신은
하늘의 영적 관계성으로 대답하셨던 것이다. 이는 반인륜적(反人
倫的) 처사이기 보다 초인륜적(超人倫的) 처사였다.
34 둘러 앉은 자들을 둘러 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ㅇ둘러보시며...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 여기서도 세밀하고
도 생동적인 문장기법을 사용하는 마가의 특징이 돋보인다. 예수
께서는 가장 가까이 자리하고 있는 이들을 찬찬히 바라보시며 내
밀한 감격의 음성으로 '내모친과 동생들을 보라'고 하셨다. 추측
컨대 이들은 예수의 12제자일 것이다(마 12:49). 특히 이들을 지
칭한 것은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예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예수와
함께 있는(14절) 자의 각별한 위치를 뜻할 것이다. 진정 그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기준과 제약에도 구애됨 없이 먼저 하나님
의 뜻을 따르는 자로 인정된 것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고 따르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의 약속을 전적으
로 신뢰함으로써 예수와의 그 깊은 영적 가족 관계에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보내 주신 당신의 행위에
대한 저들의 공개적 결단을 기뻐하시고 육친적 관계(肉親的關係)
이상으로 저들을 예수와 결속시켜 주신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영적 가족들에서 혈연적 가족들을 제외시켰다
고 상상할 필요는 없다. 그들도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예수와
성(聖) 가족이 되는 것이다.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ㅇ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 예수
의 참된 가족은 비단 열 두 제자만 아니라 '누구든지'
(whoever, NIV)될 수 있었다. 이는 구원의 개방성과 영적
가족의 보편성을 일깨워 준다. 그러나 이러한 개방은 한 가지 필
연적인 조건을 충족시킬 때에만 가능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
대로 하는' 것이다. 즉 예수와 친속 관계를 맺게 해주는 핵심 요
소는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마 12:50;눅 8:21). 한
편 이와 같이 예수께서 하신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고려
되어야 할 한가지 사실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란 과연 어
떤 사람인가 ? 라는 점이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듣고 받아들이며, 또한
그분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다(요 1:21).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의 인격으로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요구에
대한 전폭적(全幅的) 순종이라 할수 있다. 실로 예수와 더불어
도래한 하나님 나라가 인간에게 돌연 나타나고 그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이 순종에 대한 요구에 그 긴박성이 더해진 것이다
(Lane). 이땅에 오신 예수께서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시면서부
터 존재하게 된 새가족에게는 마땅히 예수께서 아버지께 순종함
으로 보이신 하나님을 향한 절대 순종과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이
주의 부르심에서 보여준 그러한 철저한 순종이 요청되고 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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