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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마태복음

[스크랩] 마태복음 (28 : 1~20)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8:17
마태복음 28장


1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ㅇ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 `다하여 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읖세 데'는 일반적인 시간 지시사로서 `이제...후에'
(after)라는 말이다. 이를 근거로 본문을 좀더 정확히 묘
사하면 `이제 안식일이(완전히) 지난 후에'로 표현할 수 있
다. 이는 다른 복음서와 일치되는 표현이기도 하다(막 16:1,
2;눅 24:1;요 20:1). 그렇다면 저녁 해질 때(오후 6시경)를
기준으로 하루가 끝나고 시작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유대인
들의 시간 개념으로는 본 상황이 깊은 밤을 거의 다 지나고
있는 시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오늘날로 말하면 주
일의 문턱에 이미 들어선 때였던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
서 초대교회 신도들은 전통적으로 부활의 이 날을 기념했고
점점 안식일이 아닌 주일예배로 발전해 갔다(요 20장 주제
강해 `주일의 기원과 그 의미'를 참조). 이제 길고 무거웠던
율법의 시대는 마감되고 부활의 주를 중심으로한 새 시대가 
개막되고 있는 것이다.
ㅇ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未明)에. 안식일이 지난 후
첫날은 오늘날의 일요일, 즉 주일을 뜻한다. 즉 이날은 역
사상 최초의 주일을 가리킬 뿐 아니라 구약의 안식일이 예
수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 주일로 대체되어 지키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실 구약의 안식일
이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역을 기념하는 날이라면 주일은
예수께서 이 세상을 다시금 새롭게 재 창조하셨음을 기념
하는 날이라 할 수 있으니 바로 여기에 오늘날 우리들이 주
일을 성수(聖守)하는 의의가 있는 것이다(요 20:19,'주일의
기원과 그 의미' 참조). 그런데 `안식 후 첫날'이라는 표현
은 안식일을 한 주간의 출발점으로 생각하던 유대인들의 전
통적 개념에 따른 표현이다. 초대교회 공동체에서도 이러한
전통을 답습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안식일 대신 `주일' 곧
일요일을 한 주일의 시발점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미명'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포스코'의 원의미는 `날이
새다', `날이 밝아오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이 유대적 어
법으로 사용 되었을 때 그 의미는, 하루 24시간이 시작되는
해질 때를 뜻한다. 눅 23:54에서도 금요일 저녁을 표시하기
위하여 `에피포스코'가 동일한 어법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본문은 그러한 유대적 어법과는 거리가 멀
다. 즉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막 16:2에 보면 `아나테일란
토스 투 헬리우'즉 `해 돋는 때에'로 되어 있어 저녁이 아닌
아침 시각임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눅 24:1에서도 `오르
드루', 즉 `새벽'으로 되어 있어 그 시각은 마가복음과 일치
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의 `아피포스코'는 분명 태
양이 기운을 회복하는 새벽, 먼동이 트는 시점으로 볼 수 있
는 것이다. 실로 공관복음서 모두가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
는 것은 부활 사건이 안식일이 완전히 끌난 그 다음날 일어났
다고 하는 것이다.
ㅇ막달라 마리아와 아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이미 예수의
무덤을 확인한 바 있는(27:61) 두 여인이 무덤을 찾아 왔다.
그 여인들은 안식일 동안에는 멀리 걷고자 아니했을 것이므로
안식일이 끝나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데 복음서간에는 무
덤을 찾은 사람들을 기록함에 있어 다음과 갈은 차이을 드러내
고 있는데 이에 따라 많은 논의가 분분하다.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ㅇ큰 지진이 나며 - 2-4절은 마태만의 특수한 기록들로 다른
복음서에서는 `빈 무덤'의 발견만을 언급하지만 본문에서는 여
인들이`큰 지진'과 친사가 내려오는 장면을 목격한 사실을 보
도하고 있다. 한편 성경에서 지진은 하나님께서 강림하여 역사
하실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특별히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해 주
는것으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27:51; 출 19:18; 시 68:8; 행
16:26;히 12:26). 따라서 여기서 지진이 발생했다고 하는 것은
곧 예수부활의 이면에 하나님의 크신능력이 함께 역사하셨음을
의미한다(엡2:5,6). 27:51에서의 지진이 하나님의 구원의 보증
이신 예수를 살해한 유대인들에 대한 심판이자 더나아가 그한
계를 드러내고만 율법 구세대(舊世代)에 대한 심판이었다면 본
문에서의 지진은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새로운 창조 질서의 구
원사가 시작됨을 알리는 하나님의 개입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지진과 돌의 굴림은 예수의
부활의 시점을 알려 주거나 부활한 예수를 무덤 밖으로 나오게 
하기위한 이적들이라기보다 오히려 여인들과 다른 주위의 사람
들로 하여금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알게 하며 더 이상 죽음
아래 머물러 있을 수없는 예수의 부활의 흔적을 친히 목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McNeil). 실로 예수는 죽음의 권세를 떨치
시고 생명이 충만한 상태로 부활하시어(벧전3:18) 변화된 몸을
입으시고 무덤을 막은 돌의 유무(有無)에 상관없이 무덤벽을
조용히 통과해 나가셨던 것이다요 20:19).
ㅇ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 여기 언급된`천
사'(1:20-23;18:10)에 대해서는 마가(`하얀 옷을 입은 한 청
년')보다 마태와 누가가 더 분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천사적
존재들은 자주 구약성경에서 사람의 형태로 나타났으로, 그같
은 표현상의 차이는 큰 문제가 아닐것이다. 따라서 마가가 언
급한 `청년'은 `천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Lane, Jos,
Antiq.V,277). 그리고 마태와 마가에서는 그 천사가 `하나'인
데 비해 누가와 요한에서는 `둘'로 묘사되었데 이 차이 역시
본 사건이 초자연적 기사라는 점에서 각각의 경험과 그 기술
하고자 하는 도의 차이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봄이 적당
하리라고 생각된다.
ㅇ그 위에 앉았는데 - 여기`앉았는데'(에카데토)란, 미완료
시상으로서 마치 무덤을 찾은 여인들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계속 앉아있는 모습을 묘사한(실로 그 천사는 예수 부활의 산
증인으로 예수의 빈 무덤을 확증, 보존하는 일을 수행했던 일
종의 영광스런 도구였던 것이다.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ㅇ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 천사에 대
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번개 같은 행상'이
라는 묘사는 천사의 몸에서 매우밝고 환한 광채가 나있었다는
것과 `눈 같이 희 옷'에서는 그 존재의 순결성을 나타내 주고
있다. 특히 이러한 모습은 변화산에서의 예수의 변형되신 모
습(17:2; 막 9:3)을 연상케 하며 그 밖에도  그리스도의 영광
스런 모습을 묘사한 것과 흡사하다(단 7:9;10:6;계 1:13,14).
따라서 이러한 묘사는 초자연적인 천사의 존재가 지니고 있는
거룩성과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천사에
대한 묘사가 복음서마다 다양하게 되있는 마가복음에는 `흰
옷을 입은 한 청년'(16:5)으로, 누가복음에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사람'(24:4)으로, 요한복음에는 `흰 옷 입은 두 천사'
(24:4)로 되어 있어 천상적(天上的)존재의 신비를 다양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4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ㅇ수직하던 자들이...무서워하여 떨며 - 무덤을 지키도록 배
치된 자들(27:64-66)이 지진과 더불어 일어난 천사의 임재 앞
에 너무큰 충격을 받고 있음을 보여 준다. 사실 그들이 예수
의 처형에 따른 일련의 사건들을 직,간접적의로 듣고 보고 하
여 무덤에 묻힌 자의 실체(實體)가 큰 의미를 둘 만큼 대단치
않은 존재라고 방관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같은 그들
의 어리석은 생각을 뒤집고, 또 그들어리석은 보호벽(무덤)을
뚫고 예수는 부활셨던 것이다. 진정 그들의 두려움은 죄인이
성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공포였다(창 3:10). 한편
본문의 `떨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세이스데산'은 `혼들다'
는 뜻의 `세이오'의 제 1과거 수동형으로 `흔들리게 되었다'는
뜻을 가지는데 27:51 에서 땅의 진동을 묘사할 때 사용한 단어
와 같은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임재앞에 선 죄인들
의 실존적 모습이 얼마나 연약한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사
6:4,5). 이와 더불어 본문에는 수직하던 자들이 마치 `죽은 사
람과 같이 되었다'고 보고하는데, 아마 그들은 상상을 초월한
눈앞의 이적들에 압도당하여 잠시 혼절한 것 같다. 그러나 그
들은 이 갈은 잠시간의 무의식 상태에서 깨어나 곧장 성내로
달려가 그들의 목격담을 전하게 된다(11절). 진정 그들은 예수
의 죽음과 부활의 훼방꾼이 아니라 너무도 확실한 증인의 역할
을 하고 만 것이다. 참고로 계 1:17에는 사도 요한이 부활의
주님을 볼 때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5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ㅇ너희는 무서워 말라 - 천사는 먼저 여인들을 안심시키고 위
로한다. 여기서는 `너희는'(휘메이스)이라는 대명사가 강조적
으로 사용되고 있는 바, 하나님의 권능 앞에 사색이 되어있는
무덤지기들은 배제된 채 여인들 에게만 무서워 말라는 말이 주
어진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권능이 임할 때 두려움에 방치되
어 버려질 사람이 있고 두려워 말라고 하는 선택적 위안의 말
씀을 들을 사람이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ㅇ못 박히신 예수를...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 천사는 여인
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러한 천사의
말에서 강조되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에수'이다. 즉 예수께
서는 분명히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강조는 분명한 죽음이 분명한 부활의 전제(前提)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여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있다 함은
예수를 따르던 자들이 결코 외릅게 고립된 상태로 머물러 있
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동을 감찰하시며 함께
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예수에 대한
여인들의 신실함이 인정되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ㅇ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
하나님의 천사는 계시의 중개자로서의 임미를 띠고 있다. 복
음서가 시작될 때 하나님의 뜻을 전달 시켜주기 위해 천사가
꿈에 나타났었는데(1:20 ff). 이와 평행을 이루어 복음서의
마지막에 계시의 중개자로서 또다시 천사가 나타나 여인들에
게 예수의 부활을 알리며 행동을 지시하고 있다. 여기서`그의
말씀하시던 대로'는 예수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알리는 말씀
으로 12:40; 16:21; 17:23; 20:18, 19절에서 예언한 `부활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또한 `여기 계시지 않고'
라는 말은 그가 여기에 있었음을 전제로하는 말이므로 예수가
죽어서 무덤 안에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며, 이제 여기에
계시지 않다는 말은 예수의 부활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바
역사적 사실임을 증거해 주는 것이다. 덧붙여 `그가 살아나
셨느니라'는 말은 예수의 자력(自力)적인 행위를 강조한 말로
서 예수의 신적 전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부
활의 진리를 설명하는 몇몇 성구들(16:21; 17:23;롬 6:4;8:
11)에는 부활이 성부 하나님의 능동적 사역의 결과로 이해되
기도 한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보면 예수의 부활은 성부 하
나님과 성자 예수의 공동 협력에 의한 신적인 승리라고 이해
할 수 있다.
ㅇ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 `빈 무덤'을 확인시켜 주
고 있는 대목으로 `빈무덤'은 예수께서 `몸'으로 부활했다고
하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유대 지도자들도 예수의 `빈 무덤'
을 인정했다. 그러나 저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
쳐갔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28:11-15). 사실 예수가 죽어
서 누이었던 자리에 있지 않음은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하나
일 것이다. 즉 예수가 부활했거나 아니면 적대자들의 말처럼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갔거나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시체를
훔쳐갔다고 하는 적대자들의 주장은 모순을 드러내는 바 사실
이 아님이 밝혀지게 된다(13절 주석참조). 그렇다면 유일한 하
나의 가능성은 예수의 부활을 확인하게 되는 것 뿐이다. 그분
은 확실히 자신의 예언대로 부활하셨고 죽었던 그의 몸은 신령
한 몸으로 변화된 것이다(빌 3:21).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ㅇ빨리 가서 - 예수 부활의 소식을 들은 자들은 더 이상 그 무
덤 앞에서 머무를 수 없었다. 천사들은 그 여인들에게 예수 부
활의 메시지를 가지고 황급히 전하라는 중요한 사명을 맡기었
다. 이는 분명 권유가 아니라 촉급한 명령이었다.
ㅇ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 본문과 평행 구절을 이루고 있는
막 16:7에서는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라고 하여 베
드로와 제자들을 분리시켜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마태가 마
가보다는 베드로를 우호적으로 묘사해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적어도 예수께서 부활하신 지금의 상황에서 예수의
부활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하는 이야기는 예수께서 일
찍이 예언하셨던 부활의 예언을 망각하고 있거나 불신하고 있
었던 제자들에 대한 책망의 말씀일 수 있기 때문인데 마가는
베드로를 따로 분리시켜 그의 이름을 특별히 언급함으로써 베
드로의 대표적 불선을 상기시키고있는 것이다(26:69-74). 실로
베드로는 세번에  걸쳐서 예수를 부인하기까지 했었던 것이다
(14:66-72). 그에 반해 마태는 베드로를 따로 언급하지 않고
제자들 속에 포함시켜 말함으로써 제자들 모두의 공동 책임으
로 돌리고 있는것이다. 혹 이 말씀이 책망의 말씀이라기보다
는, 두려움과 실망 가운데서 고독해하고 있을 제자들에게 보
내는 기쁨의 소식이라고 해도 베드로에 대한 특별성이 언급되
지 않음은 마찬가지이다. 이런 경우 `주의 부활'이라고 하는
기쁨의 소식은 각각의 제자들 모두에게 동일(同一)한 기쁨이
됨을 말해 주는 것일 수 있다.
ㅇ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 천사가 여인들에게 거
듭 전한 메시지의 핵심이다.
ㅇ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 제자들이 이
말씀을 전해들었다면 그들은 아마 26:32의 말씀 `그러나 내
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를 회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 말씀에 따른 성취에
앞서 유대 지경에서 여인들과 엠마오의 두 제자및 소그룹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러나 당신의 공식적인 현현은 본
문에 언급된 바대로 갈릴리에서 두 번 나타나시게 된다(16-
20장;요 21장). 이제 갈릴리는 더 이상 어둠과 소외의 현장
이 될 수 없었고 복음과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로 대두되게
된 것이다(행 10:37). 실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의 많
은 시간을 보냈고 당신의 제자들을 대부분 부르셨던 갈릴리
를 부활과 승천의 영광스런(행 1:11) 처소로 만드셨던 것이
다. 한편 본문의 `가시나니'(프로아게이)는 현재 진행적인
의미가 아니라 생생한 미래를 나타내는 말로써 예수께서는
약속대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도착하여 거기서 그들을
만날 것이라는 뜻이다(10절).
ㅇ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 특별히 본문의 `일렀느
니라'(에이폰)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공적 선언시에 흔히 사
용하던 문구이다. 따라서 천사의 이 말은 계시의 중개자로서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는 종결 문구인동시에 예수의 부활이
확증적임을 선포하고 있다.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쌔

ㅇ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 무덤에서의 사건과 천사
의 메시지를 전해들은 여인들의 혼합된 심리 상태를 묘사해
주고 있다.평행 구절을 이루고 있는 막 16:8에서 여인들의
상태를 `놀람', `두려움'의 단어를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는
것에 비해 본문에서는 `무서움'과 `큰 기쁨'이라는 모순된
감정을 대비(對比)시킴으로써 한편은 천사의 임재를 위시한
초자연적인 사건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예수
의 부활 소식에 접하여 `큰 기쁨'을 느끼고 있음도 보여 주
고 있다. 이것은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초월적인 사건을 체
험할때 생겨나는 심리 상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바
초자연적 사건 앞에 인간은 두려워할수밖에 없으나, 그 사건
이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은총임을 자각할
때 한없는 기쁨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모순된 감정이 통일되면서 인간은 진정한 신앙적 희열을 느
끼게 된다.
ㅇ제자들에게 알게하려고 달음질할새 - 이 부분도 막 16:8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데, 마가복음에서는 여인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천사가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한 말(7절)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본문에서
는 여인들이 천사의 말을 들은 후 `큰 기쁨'에 차서 천사의
고지(告知) 사항을 제자들에게 전하려고 달려가는 것으로 기
록하고 있다. 이것은 마가와 마태의 교훈적 강조점이 다름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마가는 예수의 측근들에게 있는 부정적
인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로마의 혹독한 탄압 때문에 예수를
부인하고 달아날 위기에 처해 있는 마가의 공동체에게 제자
들처럼 나약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는 동시에 신앙을 지
키지못한 성도들에게는 제자들도 실패했었기 때문에 평범한
신앙인들은 더더욱 그럴 수 있는 일이므로 한번의 실패에 좌
절하지 말라고 하는 교훈을 주고 있다. 반면 마태 공동체의
경우는 마가에 비해 덜 어려운 상황이었으므로 어두운면보다
는 예수의 부활의 기쁨을 기념하고 함께 나누고자 하는 뜻에
서 기쁨의 요소를 강조하는 것이다.

9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ㅇ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 예수의 부활 증
거로 '빈무덤'에 이어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현현(顯現)하신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 현현을 최초로 목
격하는 행운을 부여받은 것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즉 여자는 온전한 인격체로 인정받지
못하며 단지 재산 목록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
던(출 20:17) 유대의 상황에서 예수께서 부활 후 처음으로 여
자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은 여자를 남자와 동등한 인격체이자
부활의 증인으로 인정 하셨음을 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로
예수께 서는 부활의 산 증인으로서 여인을 택하심으로 최초의
범죄자 하와의 후손들이 겪은 슬픔과 고통을 변하여 큰 소망
과 위로가 되게 하셨다(Chrysostom). 한편 예수의 인사
말 `평안하뇨' 는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인사말인 헬라어 `카
이레태'의 번역으로 `기뻐하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인사말은 일찍이 예수께서 자신이 죽을 때 제자들이 근심하게
될 것이나 `그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20)고 하
셨던 예언을 생각나게 해주며 예수 부활 소식을 들었던 여인
들이 두려움과 기쁨이 뒤섞인 상태에 있었듯이(8절) 예수의
십자가 및 부활 사건은 오늘날의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근심과 기쁨의 감정을 교차케 해주는 역설적 사건임을 깨닫게
해준다. 결국 이 말씀은 이제는 두려워 말고 기뻐하라는 말씀
으로 이해할 수 있다.
ㅇ여자들이...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 이와 같은 행위는
상대방에 대한 절대인 존경과 경외의 뜨거운 사랑의 표시였다.
즉 이 여인들의 이 갈은 행위는 결단코 공포나 어떤 위압적인
분위기 때문에 취한 피동적인 경배가 아니었다, 이것은 분명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라는 천사의 말을 방금 전해들은 그 여
인들이 변화된 예수의 영광스런 실체를 직접 확인하고 신적인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심히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경배였다.
이때 예수께서는 당신을 인간적인 노력으로 불잡고자 했던 막
달라 마리아와는 다른(요20:17,17)이 여인들의 행위(온전한
경배로서 그의 발 앞에 엎드러짐)를 기쁘게 용납해 주셨던 것
같다. 이로써 그 여인들은 예수의 부활체를 눈으로 보고 또
손으로 만지는 가장확실한 예수 부활의 증인들이 될수있었다.

10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ㅇ예수께서 가라사대 - 본문은 표면상으로 5-7절의 천사의
말을 다시 예수께서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사실은 예
수께서 천사의 말을 단순히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
려 확대시키고 있었음을 다음의 사실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천사가 여인들에게`무서워 말라'고 했을 때 그 의미
는 지진이 일어나며 무덤문이 열리는 초자연적 사건 앞에서
무서워하는 여인들을 안심(安心)시키는 것임이 자명하다
(5절).그것에 비해 지금 예수께서 여인들에게 `무서워 말라
'고 말씀하시는 상황은 여인들이 이미 어느 정도 안심을 했
고 이제는오히려 `큰 기쁨'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또한 여인들이 예수를 보았때 그 발을 붙잡
고 경배했다는 것은 그들이 예상치 못한 사건 앞에서 마냥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반가움과  기쁨
이더 컸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인들에게
전해진 `무서워 말라'는 말은 무덤에서의 사건과 갑작스러
운 예수와의 대면에 의한  여인들의  공포를  일소하기 위
한 말이라기보다는 아직까지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그녀들의 주를 잃은 절망이라고 볼 수있다. 그리
고 주를 잃은 절망과 두려움은 아직도  예수의  부활을 모
르고 있는 제자들과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던 무리들
그리고 더 넓게는  마태의 공동체에게 더 심했을 것을 염
두에 둔다면 결국 `무서워 말라'는 예수의 말씀은  직접
적 대상인 여인들을 넘어 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위로(慰勞)의 말씀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천사는 여인들에게 말하기를 가서 `제자들'에게 말하라고
하였다(7절). 그런데 지금 예수께서는 가서 `내 형제들'에
게 말하라고 한다. 어떤  학자들(Lange, Wycliffe)
은`내 형제들'이라는 표현이 11제자들의 지위를 격상시키
는 것이라고 하나 그것은 `형제들'에 대한 본서의 용례와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태는 5:22-24; 18:15; 23:
8 등에서 `형제들'이라는 말을 예수의 가르침을 받는 자
들의 친교적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했었다. 그리
고12:49, 50 에서는 `내 형제'라는 표현을 11사도를 포함
하여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모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
였다. 그러므로 `네 형제들'은 11제자들에게만 한정될 수
없으며, 예수의 부활 소식은 11제자들 뿐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의 소식으로 확대되어 전해
져야 했던 것이다(Stonhouse, Witness of Matthew,
pp. 176-177). 한편 마태는 무엇때문에 갈릴리의 부활 현
현에 관한 기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확실히 마태복음 전체를 꿰뚫는 두 가지 주제와
관련이 있다. 첫째, 메시야는 천대(賤待)받는 지역에서
나와(2:23) 그 천대받는 백성을 위해 일하신다는 것이다
(4:15, 16). 왜냐하면 하늘나라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
이기 때문이다(5:3).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는 유대인 중
에서도 무시당했던 여인들에게 나타나 그들을 증인으로
삼으신 것이다(1,5-7절; 27:55, 56). 둘째,이방의 갈릴
리(4:15)는 마태복음에서 이방 선교라는 차원높은 주제와
잘 조화된다는 것이다(1:1; 2:1-12; 4:15,16; 8:5-13;
10:18; 12:21;13:17;15:21-28; 24:14). 그리고 이것은 주
님의 위대한 지상 명령 즉 이방선교를 준비하는 것이다(18
-20절).

11 여자들이 갈제 파숫군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ㅇ여자들이 갈제 - 본 구절은 4절 내용과 연결된다. 즉 여
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주의 부활을 전하러 가는 동안,
잠시 혼절했던무덤 경비대원들은 황급히 지금껏 되어진 일
을 고하기 위해 성내로 내리달렸다.
ㅇ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 여인들에 의해서 제자들에게 기
쁨의 소식이 전해지는 것과 대비되어 무덤지키던 자들에 의
해 대제사장들에게 불길한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와같이 중요한일을 빌라도에게 가 아니라 대제사장들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미루어 파슷군들이 로마의 병사라기 보다
는 성전 소속의 사병들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Carson). 그러나 27:65에 언급하였듯이 이들 파숫군
들은 예수의 무덤을 지키도록 유대인들에게 인계된 빌라도
휘하의 로마 군병들이었음에 분명하다. 실로 그들은 산헤드
린의 명령하에 있었기 때문에 곧장 산헤드린에게로 가서 자
신들이 지금껏 경험한 사실을 대체적으로 객관적 입장에서
보고하였을 것이다. 물론 이때의 보고는 부활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는 내용이기 보다 지진, 천사, 빈무덤등 능히 부활
이라 확증할 수 있는 증거들을 목격했다는 내용이었을 것이
다(Bonnard). 한편 대제사장들은 파숫군들로부터 무덤에
있었던 신비한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 들었을 것이고,그들은
직감적으로 그 사건이 의미하는 바 예수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지각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은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표적이기도 했으므로(12:38; 26
:67, 68),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자신들
의 잘못을 회개 했어야했다. 아마 그것은 그들이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은 전혀 반
대의 양상을 나타낸다.

12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ㅇ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 파숫군들의 보고를 받은 대제
사장들은 산헤드린 회의를 소집하여 예수의 부활을 은폐(隱蔽)
하고 거짓 유인비어를 퍼뜨릴 계략을 펴고 있다. 뿐만아니라
일찍이 예수를 죽이려고 유다를 은 삼십에 매수했던(26:14,
15) 저들은 이제 또 부활한 예수를 다시 매장시키려고 `많은
돈'으로 파숫군들을 매수하고 있다. 여기서 그 돈의 액수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총독을 매수하기
위해서는 그가 만족할만한 더 많은 뇌물이 필요했을 것임에
틀림없다(Wettstein) 유대 지도자들의 관심은 진리에
있지 않았고 오직 편법(expedience)과 백성들의 여론
에 있었던 것이다.

13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ㅇ그의 `제자들이...도적질하여 갔다하라 - 당시에 유대인들
사이에 예수가 부활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하
는 소문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구절이다. 그
러나 저들의 조작은 스스로 모순을 갖고 있음이 곧 드러난
다. 즉 잠자는 사이에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하는 말 자체가
모순인데, 무덤지키는 파숫군들이 엄격한 규율을 어기고 잠
잤다고 하는 것도 믿을 수 없거니와 설령 잠이들었다 하더
라도 잠든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고 믿기
는 더욱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겁많고 자기 신변의
안전을 위해 공포에 떨던 제자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예수의 무덤을 열어 젖힐 용기를 가졌겠는가? 또한, 가정해
서 유대 당국자들이 제자들의 범죄 사실을 입증해 주는 어
떤 증거를 갖고 있었다면 왜 기소하지 못했단 말인가? 한편
고대 세계에서 무덤에 해를 입히는 것은 사자(死者)에 대한
심한 모욕이었고. 때로는 사자에게 형벌을 가하는 방편이었
다. 가이사(Caesar)의 나사렛 비문(Nazareth
Inscription)은 이 사실을 입증해 준다. 물론 이 비문과
예수의 사망과의 관계가 불분명하다 하더라도 그 당시 무덤
보호 규율은 상당히 엄격했음을 알수 있다(B.M.Metzer).
여하튼 저들이 퍼뜨린 소문은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의 잔꾀
에 지나지 않음이 곧 드러난다.

14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ㅇ총독에게 들리면 - 이는 군인 의무규정을 다하지 못한
자들이 사법적 절차에 의해 빌라도 총독의 심문을 받게 될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Meyer).
ㅇ우리가 권하여 - 문자적으로`우리가 설득하여'가 된다.
즉 유대 지도자들은 이 일이 어렵게 되면 무덤 파수 임무
를 맡았던 군병들이 최선을 다해 자기 임무에 충실했노
라고 말로써 설득할 뿐 아니라 빌라도의 마음을 뇌물로
설득(매수)하려 했던 것이다.
ㅇ근심되지않게 하리라 - 실로 파숫군들이 잠든 사이에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사실을 빌라도
가 안다고해서 그다지 심각할 것은 없었을 것이다. 왜냐
하면 에초에 무덤을 지키는 일은 빌라도가 지시한 일도
아니거니와(27:64,65), 대제사장들은 문제가 되지 않도록
사전에 돈으로 빌라도를 매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
방법은 그 당시에 유효하고도 일반적인 관행이었기 때문
이다.

15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ㅇ오늘낱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 본문에서
`오늘날 까지'라 함은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인
A.D.50-70년경을 뜻한다. 그런데 A.D. 150년경에 초대
교부 저스틴(Justine Martyr)이 쓴 `트리포와의
대화'(Dialogue cum Tryph., 108)에도 똑같은 이
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유포되기 시작한 거짓말이 오랫동안 사람들 사이에 전
해지면서 기독교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니 이 거짓말은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소위
`도적설'이라는 부활  이설(異說)로 남아 기독교 신앙의
전파를 방해하고 있다. 한편 A.D.165년 경에 기록된 베
드로 복음서 11:46-49에 의하면 군인들과 장로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보고하고 있으며 빌라도는 군병들에게 침묵을
지키라고 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ㅇ유대인 - 이방인들이 유대인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유
대인'이라는 표현법을 마태가 사용한 경우는 이곳이 유일
하다. 여기서 우리가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에 이미 유대교를 신봉하는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구분이 될 정도로 갈라져 있었을 것이라는 사
실이다. 즉 본문에서 마태는 기독교인과  대별되는 말로서
`유대인'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16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ㅇ열 한 제자 - 27:5에서 보도된대로 열 둘 가운데 한 사람
인 유다가 죽었으므로 열한 제자만이 모인 것은 당연한 일
이다.
ㅇ갈릴리.복음서들에 의하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여러
곳에서 여러 차례 나타내 보이셨는데 마지막선고 명령이 주
어지는 곳으로 갈릴리를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복음서는 본
서 뿐이다. 마태에게 있어서 갈릴리는 이방의 상징이자(4:
15), 예수의 주된 관심사인 소외(疏外)된 사람들 즉, 로마제
국으로부터 억압과 착취를 당하며, 유대교의 거짓된 종교인
들로부터 기만당하는 민중들의 도시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어쨌든 마태는 갈릴리에 대한 예수의 특별한 명령
(7,10절; 26:32)에 집중하기 위해 예수의 유대현현 등과 같
은 다른 기사들을 모두 생략하고있는 것이다.
ㅇ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 이 산은 예수께서 이미 명
하셨던 곳이라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언제 그런 이야기를 했
는지 그리고 과연 그 산이 어떤 곳인지(혹 다볼 산 또는 팔
복산이라고도 하나 확실치 않다) 복음서에서 찾아내기는 어
렵다. 예수께서는 분명 부활 이후몇번의 현현 중에 이미 제
자들과 당신이 익히알고 있는 산을 지명하셨음에 틀림없다.
실로산은 하늘과 지상이 만나는 곳으로 하늘의 대명령을 땅
에 선포하신 지상 명령에 (the Great Commission)과
적절한 조화를 이룬다. 사실 마태에게 있어서 산은 매우 중
요한 의미를 갖는데,하나님의 뜻이 계시되고, 예수의 가르
침이 베풀어지며 하나님과 만나는 기도의 장소가 바로 산이
었기 때문이다(5:1; 8:1; 17:1,9; 24:3; 26:30). 구약에서
도 산은 매우 중요한 곳으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도 산
이고(출3:2이하)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은 곳도 산이었
다(출 32:15). 여하튼 예수의 지상 명령(18-20절)과 갈릴리
의 한 특정 지역이 관련된것은 예수의 비참한 배경과 이방
선교라는 본서의 대주제와 함께 연결된다(10절). 한편 많은
권위있는 주석가들은 본문의 이 장면을 고전 15:6에 바울이
기술한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신 사건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 이유로 이곳 소집에 대하여는 3회에 걸친 예고가
주어졌으며(7, 10절; 26:32) 그것은 지상 대명령을(18-20절)
전달하신 회집이었고 갈릴리는 로마 정부나 유대 종교지도
자들의 간섭을 쉽사리 피할 수 있는 곳으로서 500여명의
군중이 일거(一擧)에 모이기에 적합했다는 것을 들고 있다.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ㅇ예수를 뵈옵고 - 물론 11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처음
목격한 것은 아니다. 그들과 함께 모인 500여명의 형제 가
운데 많은 수가 예수의 부활체를 처음, 그리고 경악에
가까운 상태로 목도하였을 것이다.
ㅇ경배하나 - `경배하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퀴네
오'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나타내는 단어로 마태가 자주 사
용하는 말이다(9절; 2:8; 4:9). 또한 이 단어는 `절하다'
로 번역되기도 하는데(9:18; 14:33; 15:25)공동번역 에서
는 본문을 `절하다'로 번역하고있다. 본문이 어떤 의미로
해석되든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는 이제 십자가의 패배에
서 완전히 벗어나 승리하신 분으로 섬김을 받는 자리에 오
르셨다는 것이다.
ㅇ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 예수의 부활에 대한 의심은 다
른 곳(눅 24:10,11; 요 20:24-29)에도 기술되어 있지만,
의심하는 자들은 모두 예수의 부활을 보지 못하고 듣기만
하던 자들이었다. 따라서 `보고도' 의심한 본절은 매우 특
이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몇
가지 난제가 해결되어야만 한다. 첫째 난제는 그 의심하는
자가 11제자 중에서인지 아니면 500명 형제중에서인지에
관한 의문이다. 여기서 `경배하나'에 해당하는 `프로스쮜
네오'가 단순히`무릎을 꿇다',`...에게 경의를 표하다'는
약한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경배(敬拜)하다'는 뜻 으로
사용되었다면 `11제자들'과 `오히려 의심하는 자'는 다른
두 그룹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경배(예배)하는
자가 예수가 누구였는지 몰랐을 리가 없고, 또 예수의 부
활을 의심했을리 없겠기 때문이다. 사실 본문의 확실한
목격자였던 마태는 그가 그때 그곳에 없었던 본서의 독자
들이 의심을 제기할지도 모를 위와같은 사항에 대해 신중
하게 생각지도 않고 오직 자신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실들에만 기억을 돼살려 생생히 묘사했던 것으로 보인
다(8절). 한편 이러한 문제점을, `오히려...있더라'(호이
데)의 읽기를`...자는 없더라'(우데)는 읽기로 고침으로
써 해결하려는 시도가 있으나 이는 큰 무리가 있는 읽기
이다(Beza 사본, Bornemann). 두번째 난제는 의심한
자들이 누구인지는 제쳐 놓고라도, 도대체 왜 의심했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 사용된 동사 `에디스타산'(<더러는>
의심하였다)은 신약에서 이곳과 14:31에서만 나타나는데
그 의미는 불신앙이 아닌 망설임을 뜻한다(`비록 더러는
주저하였으나',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I.P.
Ellis). 어쨌든 주저한 자들이 11제자 외의 다른 사
람들이었을 지라도 그들이 왜 의심했는가 하는 문제는 그
대로 남는다. 여기에 대해 혹자는 (Hendriksen,
Grosheide, Filson, Walvoord) 부활을 의심한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제
시했다고 한다. 즉 그들은 예수가 부활후의 현현에서 항
상 즉시로는 인정되지 않았다는 사실, 다시 말하면 예수
의 생시(生時)와 변화상 태와의 너무 큰 차이 때문에 그
무리들이`과연 그가 예수인가?'하고 의심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파르쿠르스트(L.G.Parkhurst,Matthew
28:16-20 Reconsiderd, p. 179)는 의심한 것은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것이나 혹은 부활의 사실성에 대
한 것이 아니라 부활한 예수를 경배함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그는 계속해서 예수께서는
18절의 말씀으로 그러한 주저하는 마음을 쫓아버렸다고
한다. 이와 유사하게 건드리(Gundry)는 말하기를 17-
20절은 오직 예수의 말씀만이 의심을 쫓아낼 수 있다(심
지어 부활 현현조차 의심을 쫓아내지 못한다)라고 하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마태의 근본 의도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볼 때 18절은 17절이 아니라 19절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18절이 17
절의 의심을 쫓아버린다고 하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
(Dunn,Jesus p.124). 적어도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여기 본문이 눅 9장이나 요 21장에서처럼, 모
든 의심이 제거되었다고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여하튼 마태의 기사가 간결하기 때문에 마태가 뜻하는
것이 무엇이 었는지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는 것이 좋을 듯하다.
특히 `오히려 의심하는 자'가 11제자가 아니라 그밖의
다른 제자 들이었다고 한다면, 그들의 불신앙과 공포에
서 신앙과 기쁨에로의 변화는 주저하는 중에 서서히 나
타났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적어도
이미 두번이나 부활한 예수를 목격한(베드로는 적어도
3번, 도마는 1번) 11제자는 이 새로운 현현에 마주쳐 즉
시 경배할수 있었겠으나 다른 제자들은 머뭇머뭇 주저
(躊躇)했다. 실로 그들은 거듭된 예수 자신의 부활에 대
한 예언을 깨닫지도 믿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후에는 절망에 휩싸였고, 당분간 완전한 신앙
에로 복귀하기까지 의심의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한편 마태는 다음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있다.
그것은 부활한 예수에 대한 믿음을 위해서는 오순절의 성
령 충만이 필수적이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마태의 간결한
기사는 이 사실을 이미 전제한다. 왜냐하면 어떤 복음서 기
자도그 구속사의 획기적인 사건을 간과했을리 만무했기 때
문이다. 그러나 마태는 자신의 주제적관심들을 오직 주님의
선교 지상 명령에 집중시키고자 그 사건을 생략한 것이다.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ㅇ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가사대 - 예수께서는 당신께 대
한 의혹을 떨쳐버릴수 없었던 당신의 형제들(10절)에게 가
까이 접근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부드러운 음성과 그
깊은 사랑의 자태를 직접 체험케 하셨다. 그리고 예수는 아
마 본문 이하에 기록된 말씀보다 더 많은 말씀으로 그들의
실추(失墜)된 마음을 굳게 세우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사
명자로서의 자의식을 고취시켰을 것이다.
ㅇ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 먼저 18-20절
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모든'이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다
는 점이다. 이 `모든'이란 말이 본 문단을 단단히 묶고 있
다(모든 권세, 모든족속, 모든 것, 모든 날<항상>). 한편
여기서 권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수시아'는 능력, 힘, 절
대적 권세를 뜻하는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권세로 가르치고
(7:29),병을 고치며(8:1-13), 죄인을 용서하셨다. 이제 복
음서의 마지막에 이르러 예수는 자선이 지상에서의 권세 뿐
아니라 온 우주의 권세를 가졌음을 확정적으로 선언하고 있
다. 그런데 이선언을, 부활로 인해 십자가 사건 이전에 가
졌던 권세와는 비교할 수 없는 권세가 예수께 주어졌다고
보는 것은 타당치 않다. 그리고 또 예수께서 죽기 전에 가
르치고 행한 것들이 부활후 지금 말하고 행하는 것들보다
권세면에 있어서 조금 낮은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진정
부활 이전의 사역기간 동안에 행하신 그분의 말씀은 신적
권위가 있는 것이었고(24:35), 또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지니시었다(9:6). 따라서 그의 권세는 부활 전이나
후나 모두 절대적인 권세있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부활
후에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 즉 우주의 모든 권세가 그
분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 권세는 아버지께서 주신 것
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종속하지 않는다(고전
15:27,28). 이제 아버지의 모든 권세는 아들을 통해서만 행
사된다. 결국 예수는 중보자적 왕이신 것이다. 이러한 권세
는 그분의 지극한 겸비(兼備)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
다(빌 2:5-11). 이로 말미암아 구속사의 대전환점이 도래했
으니 곧 메시야 `왕국'(그분의 왕적 통치, 그분의 구원하는
신적 권세의 행사; 3:2; 13:37-39)이 새로운 전능으로 임하
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단 7:13,14에 이미 암시되
어 있던 터였다(France, Jesus pp.142-143). 어쨌든 한
때 비하와 고난을 당하신 `인자', 곧 예수는 온 우주의 권세
를 받으시고 이제 당신의 형제들에게 선교 지상명령을 하달하
고 계신것이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ㅇ너희는 가서 - 여기 `가서'(포류덴테스)는 제 1과거 분사형
으로서 끝없이 지속적으로 나아가야 할 것을 시사한다. 물론
이 분사는 `너희는 제자를 삼아'라는 본동사의 보조 역할 밖
에는 하지 않으나 제자를 만드는 사역이  `모든 족속'에 확장
되길 요구하는 문맥에서 `가다'라는 분사가 매우 의미 심장한
명령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한 분사가 명령형
에 의존하는 부수적인 분사로서의 기능을 가질 때는 보통 그
분사는 독립성이 짙은 명령적 의미를 갖는다(2:8,13; 9:13;
11:4; 17:27; C. Rogers, The Great Commission, pp.
258-67). 결국 '가서'란 선교에 있어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이
며 지속적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이라본다. 진정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 위임한 권세와 당부한 명령을
가지고 언제 어디서나 복음 전하는 길을 `가는' 선교사들이
바로 성도들인것이다.
ㅇ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 일찍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길'과 `사마리아인의 고을'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은양에게 가라고 하셨고(10:5,6) 예수 자신은 이스라
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만 보냄을 받았다고 말씀했던 것
(15:24)과는 대조적으로 이제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
라고 한다. 이는 이제 더이상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差別)
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한편 `모든 족속'에 대해 이스
라엘을 제외한 모든 이방족속들을 지칭한다는 견해가 있다
(Hare, Walker). 즉 이스라엘은 이제 영광된 지위를 상실
했기 때문에 복음 전파 대상에서  제외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민족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
(Trilling, Hubbard,John p.Maier). 사실 마태가
'족속'(에드네)이라는 말을 관사없이 사용할 경우 대부분
`민족들', `백성들'을 뜻했으며(24:9,14; 25:32) 그리고 그
표현은 `(구분없이) 모든백성들' 혹은 `(구분없이) 모든 나라
들'을 의미했다. 따라서 이방인만이 본 지상 명령의 관심대상
이라고 보는 것은 불필요한 제한을 설정하는 것이 된다. 한편
`제자를 삼아(마데튜사테)란 말은 `제자를 만들라'는 강한 명
령으로서 가르치고 훈련시키라는 의미이다. 사실 한 자연인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든다는 것은 그를 선생과 제자에의 관계
에로 인도함을 뜻한다. 제자란 그리스도의 권세있는 교훈의
멍에를 메야 하며(11:29), 그리스도가 말한 것이기 때문에 그
가 말한 바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가 요구하는 것이
기 때문에 그 요구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순복하는 것을 모두
포함한 말이다(Broadus). 진정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하고 순종하는 자들이다(12:46-50). 한편 이와 더불
어 제자는 선포와 응답을 모두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제자를 삼아'라는 말 속에는 회개의 신앙을 이끌어내는 복음
의 선포가 은연 중에 내포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제자직
에 대한 응답은 세례를 받고 가르침을 받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절과 다음 절에 이어지는 지상명령에서 주어진 바
`가라', `세례를 주라',`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단어가 모두
`제자 삼으라'는 본 동사의 보조 역할을 하는 분사형을 취하
고 있다는 사실에서 더욱 확연(確然)해진다.
ㅇ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주고 - 예수께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시기는 이곳이 처음이다. 그런데 우
리는 여기서 세례가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다가(행 2:38; 8:16; 10:48; 롬 6:3; 고전 1:13,
15; 6:11; 10: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점차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으로 확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관해 리겐바하(E. Riggenbach)는 말하기를 디다케
(Didach, 12사도 교훈집) 당대에, 예수의 이름으로주는
세례와 삼위(三位)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는 공존했다 한다.
그러나 분명히 밝혀둘 것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
삼위의 조화로운 협력이 있었다는 사실과(3:16, 17) 초대 교
회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하더라도(행 8:16;
10:48) 그것이 창조자이시요 섭리자이신 성부 하나님과 죄를
고백케 하시며 위로하시는 성령의 권위와 실체를 이미 전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로 삼위일체라는 신앙이 후대의 교
회가 확실한 토대를 세우고 또 초대교부 터툴리안
(Tertullian)에 의해 그 용어가 공식 사용되었다 하더
라도 그것은 분명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 의해 증거되고 또
사도들에(고전 12:4-6;고후 13:13;요일 3:23,24) 의해 계
승 발전되었다는 사실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어떻든 제자
들이 되는 자들은 삼위(Trinty)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여기서 `이름'(오노마)이란 하나님의 품성과
속성 및 그분의 전인격을 암시하며 또 그분의 권위와 권능이
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특별히 `오노마'가 복수가 아닌
단수로 사용된것은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하나되심을 강조해
준다고 보겠다. 그리고 `이름으로' 에서 `...으로'(에이스)
에 관해 몇몇 신약 성경 기자들과는 달리, 마태는 분명히 헬
레니스틱 그리스어(Hellenistic Greek)에서 흔히 나타내
는 '에이스(엄격히는 `안으로'란 뜻)와 '엔' (엄격히는 `안
에'라는 뜻) 간의 혼동을 피하고있다. 만일 그렇다면 전치사
`안으로'는 어떤 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행위 혹은 주님의 권
세 아래로 들어오는 행위를 강하게 시사해 준다(Allen,
Albrigth and Mann). 한편 `세례를 주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밥티조'는 `잠근다'(왕하 5:14; 시 68:23), `씻는
다'(막7:4; 눅 11:38; 딛 3:5)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어 이를
`침례' 또는 `세례'로도 각각 번역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는 3:6, 11, 13-17의 주석을 참조하라. 사실 중요한 것은
`침례'냐 `세례'냐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란 죄사함을 받고
(막16:16) 메시야의 게약 공동체의 일원이 되며, 메시야의
주권에 굴복하겠다는 서약의 표(Sign)라는 사실이다
(Beasley-Murray, Baptism pp.90-92).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ㅇ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마
태복음에서 예수의 공생애는 `가르침', `전파하심' 그리고 `병
고침'으로 요약될 수 있다(4:23; 9:35). 그런데 예수께서 일찍
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병을 고치고', `전파할 것을' 명하셨
지만(10:7-9) 지금처럼 `가르치는 것'에 대한 직접적 명령은
하시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살아있는 유일한 선생으로
서(23:8) 가르치는 권세가 그분에게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데 이제는 승천하실 때가 되었으므로 당신의 뜻을 받들어 천국
일꾼으로 계속 매진(邁進)해야 할 제자들에게 `가르칠' 책임과
권위를 부여해 주고 계신 것이다. 제자들은 이제 세상에 나아
가 생전에 스승이 가르쳐 주신 계명들과 교훈(디다케)을 가르
칠 수 있는 권리와 동시에 의무를 갖게 된 것이다. 한편 `가르
쳐'(디다스콘테스)는 현재 분사형으로서 지속적인 가르침을 강
조한 말이다. 즉 예수의 가르침은 오고오는 세대들에게 전달되
고 보존되어야 할 것이었다(딤후2:2). 실로 처음 예수의 가르
침에 접했던 제자들(`눈의 목격자들-eyewitnesses')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들을 주의깊게 전달하여 줄 때 다음은
`귀의 목격자들'(earwitnesses)을 낳게 된다(O'Brien
pp.264ff.). 이러한 역동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전달 과정을 통
해 하나님의 나라는 더욱 든든히 서 갈 것이다. 한편 제자들이
가르치는 바는 단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교리로 끝나서는 아
니되었다.그것은 반드시 `지키고' 순종해야 할 그리고 전의지
적 결단과 실행이 동반되어야 할 살아있는 가르침이어야 했다.
ㅇ볼지어다(이두) - 마태가 자주 사용하던 간투사로서, 예수께
서 지상 대명령을 마치시면서 그에 곁들여 당신의 위대한 약속
을 주시고자 제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이 `볼지어다'는 본문에서 `확실히' 정도의 뜻이 될 것이다.
ㅇ세상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 본서는 예수의
탄생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며 그 이름은 `임마누
엘'이라는 말로 시작되었다(1:23).`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
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은 이제 본서의 마지막에 강조적으로
다시 언급되고 있다. 이 약속은 성도들에 대한 넘치는 위로와
힘이 아닐 수 없다. 비록 그분은 잠시후 승천하실 것이지만 무
소부재하신 그분은 여전히 당신의 사람들의 형제요 친구요 구
원자요 상담자요 안내자로서 모든 공간 모든 시간을 초월하여
`함께' 계실것이다. 진정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신 그
분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모든 지식과 권능과 사랑를 가지고
언제라도 돕고 위로해 주실 것이라는 초월한 약속이 아니고 무
엇이겠는가? 단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그분의 계명을 지킴으로
써 그분의 임재(臨在)를 체험하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
에게만 그분의 약속은 실현이 될것이다. 한편 여기서 `세상 끝
날까지'(헤오스 테스 쉰테레이아스 투 아이오노스)란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어 주께서 재림하시는, 세상 역사의 종말을 가
리킨다(24:3). 그리고`항상'(파시스 타스헤메라스)이란 신약에
서 여기에만 나오는데 직역하면 `모든 날의 전체'가 된다. 이
는 우리의 먼 장래만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각각의
날들 모두를 가리킨다. 실로 주님의 임재는 이 `세상 끝날까지'
(13:39, 40, 49; 히 9:26) 지속될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그때인 역사의 종말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여기에는
심판에 대한 묵시적 경고가 내포되어있다. 주와 더불어 살아가
는 성도 내지는 신앙 공동체는 그 궁극 지향점이 종말이므로
감히 더불어 계신 주님을 떠나 제멋대로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편 주님의 지상 명령과 그것의 성취 사이의 기간은
추정하기가 어렵다.어쨌든 그 기간은 교회가 지속적으로 선교
해야하는 활동 기간이며, 또 교회가 주의 재림(parousia)
을 예비해야 하는 준비기간인 동시에 교회가 주의 잔치를 현재
적으로 누려야 하는 희락(喜樂)의 기간이기도 하다. 이상으로
본서는 지속적인 선교와 가르침에 대한 기대와 명령으로 끝이
난다. 앞에서 보아왔듯이 본서에 기술된 다섯개의 강화들은 예
수의 가르침이라는 동일한 내용과 함께 끝을 맺고 있다(3:1
-26:5). 반면 예수의 수난과 부활 기사는 그의 제자들에게 동일
한 사역을 수행하도록 위임함으로 끝이났다. 즉 십자가와 빈 무
덤, 그리고 부활하신 주의 영광스런 승리의 현현과 승귀에 비추
어서 그 사역을 수행하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서는 주의
명령이 완성되는 `세상 끝날까지'는 종결되지 않는 미완(未完)
의 책인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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