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마태복음

[스크랩] 마태복음 (27 : 1~66)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8:17
마태복음 27장

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니라

ㅇ결박하여 끌고 가서 - '결박'은 두손을 뒤로 모으고 포승으로
묶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는 사형과 같은 극형을 인도받은 자들을
언도할 때 사용되었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에서부터 결박당하셨
던 것 같으며(26:57) 재판과정 동안 풀렸다가 재차 포박당하신 듯
하다.
ㅇ총독 빌리포 - '총독'으로 번역된 '헤게모니'는 지도자, 총독권
자, 또는 통치권자를 뚱하는 일반적인 칭호이다(10:18). 이 직분
의 더 특별한 명칭은 '총독', '행정 장관'이란 뜻의 '에피트로포
스'가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전자의 호칭이 사용되었
다. 한편 그들은 가이사에게 직접 고소하지 않고도 식민지인의 생
사 여탈권(生死 與奪勸)을 가질만큼 권한이 컸다. 여하튼 사태는
'빌라도'라는 이름 앞에 '총독'이라 명칭을 덧붙여서 빌라도가 로
마 제국을 대표하는 행정 책임자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빌라
도는 유다, 사마리아, 이두매를 관할한 여섯번째 총독으로서 디베
리오(Tiberius) 황제로부터 A.D. 26년에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 등의 증언에 따르면 잔인하
고 전제적(專制的)이며, 자신의 수하에 있는 유대인 관리들을 싫
어하고,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매우 외골수적인
지배자였던 것 같다 (Jos.Antiq.XVIII,35,55-62;Wars II,169
-177). 또한 그는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구별된(고르반) 돈을 훔쳐
수도가 설비로 유용(流用)했으며, 이에 에루살렘 주민들이 반발하
여 폭동을 일으켰을 때 군대를 파견하여 많은 양민을 학살하기도
했다. 그는 예루살렘을 더럽힌 적도 있었다(눅 13:1). 그런데 복음
서에 제시된 그의 인물됨이 위와는 크게 대조되는, 그야말로 심약
하고 기회적 주의적인 성경으로 묘사된 데 대해 많은 학자들이 의
문점을 제시하곤 한다. 이에 대해 '훼넌'(Hoehner, Ch-
ronological, Aspects , pp. 104-105)는 빌라도가 그 당시
곧. A.D. 33년에 예수를 처형할 시점에 로마의 디베료 가이사에게
신임을 잃고 있었으며, 자신의 구원자이며 반유대주의자인 세아누
수(Sejanus, A.D. 31.10. 19 사망)가 죽음으로써 그가 상당히 위
추된 상태였으므로, 정치 감각이 탁월했던 그가 이 예수 처형건에
대해 연약한 모습으로 대처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견
해는 연대기적 차원에서 성경 기록과 상당한 차이를 두고 있으므로
전적인 지지를 얻지 못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심리적, 정치적 측
면에서 빌라도의 고도의 정치술에 의한 후기 생존의 한 방법으로
이렇게 유익한 모습을 보였였다 보는 학자도 있다. 여하튼 A.D.
33년까지의 빌라도의 행정은 극히 부정적으로 평가되었으며, A.D.
36년에는 황제에게 소환되어 프랑스 지방에서 귀향살이를 하다가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어쨌든 예수 처형당시 빌라도는
가이시랴에 자기 관저가 있었으나 유월절 등과 같은 큰 명절 때는
예루살렘에 입경하여 그곳 치안을 관할하곤 했다. 아마 그당시 빌
라도는 자기 아내와 함께 안토니아 성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
다. 한편 이때 산해드린의 공식 회의에서 예수를 사형 선고한 후에
곧장 이곳 빌라도의 처소로 끌고 온 것은 비록 그들이 자의적으로
사행을 결정할 수는 있지만 사형 집행권은 오직 총독의 권한에 속
한 것이기 때문이다. 산헤드린 법에 따르면(1:1;7:2) 예루살렘 멸
망(A.D.70) 약 400여년 전에 집행권 유대의 자치적 권한에서부터
로마 정부 당국으로 이양되었다고 한다. 여하튼 예수가 빌라도 앞
에 선 때는 금요일 아침, 곧 유대력 니산월 14일 아침이다.

3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ㅇ때에(토테) -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로서 '그 때에', '그다음에'
'그리고나서' 라는 의미틀 지닌다. 여기서는 문맥상 예수가 산헤
드린의 고소로 빌라도에게 제소(提訴)된 직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
다.
ㅇ그의 정죄됨을 보고 - 여기서 '보고'(이돈)란 '쳐다보다', '조
심하다', '주목하다'는 뜻의 원어 '오라오'의 제 2과거행 분사이다.
이는 결국 유다가 예수의 재판사건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보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이 문구는 '예수께서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로 번역된 공동번역과 새번역이 훨씬 이해하기
쉽다. 유다는 아마 예수께서 체포되어 산헤드린에 의해 사형 판결
을 받고 빌라도에게 넘겨지기까지 전 과정을 조마조마한 마음을 가
지고 직.간접적으로 보고 들은 것으로 보인다.
ㅇ스스로 뉘우쳐 - 헬라어 '메타멜레데이스'는 마음과 삶의 전적인
변화(메타노이아)룰 뜻하는 '메타노에인'보다는 상당히 약한 의미
를 갖는다. 이는 자신의 행위를 뒤돌아보고 단순히 괴로워하며 '후
회'하는 정도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죄 청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단지 인간적 후회의 차원에
서만 바꾸는 것이다. 여하튼 '뉘우치기'까지 하는 유다의 마음의
상태를 보건대 그는 예수께서 설마 사형에 처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지도 않은 듯하다. 이렇게 본다면 유
다가 예수를 팔아넘긴 것은 돈을 탐하였다기 보다는 예수께서 메시
야로서의 능력을 보이도록 하기 위해 예수를 배반했다는 이야기가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가 계획한 악한 일이 그대로 실
현되는 것을 볼 때 순간적인 양심의 가책을 받을수도 있다는 점에
서 꼭 전자의 입장이 옳다고만 볼 수도 없다. 율의 배반 의도가 무
엇이었든간에 예수의 죽음이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임은 분명
한 것이다.
ㅇ은 삼십을...도로 갖다 주며 - 26:15 주석을 참조하라.한편 유다
는 악한 자기 행위의 결과요 침묵하고 있는 증인이라 볼 수 있는
은 삼십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되돌려 주어 양심의 가책을 가볍게
하고자한 것이다. 어떤 면에서 그는 당시 자신의 과오를 깊이 인식
하는 동시에 예수의 무죄함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에 이처럼 환불
(還拂)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죄는 그 행위의 결과만
을 씻어버림으로써 해결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ㅇ대제사장들과 장로들 - 그들이 한 부류, 곧 산헤드린의 회원들임을
암시하기 위해 두단어를 묶은 하나의 관사(토이스)만을 사용하였다
(21:23)

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ㅇ무죄한 피 - 사본에 따라서는 '의로운 피' 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이같은 변형은 전체문맥과 잘 조화를 이룬다. 즉 19절절에 '의로운
사람'이라는 문구가 예수께 사용되고 있고, 24절에도 '이 의로운 사
람의 피'라는 문구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들과 '무죄한 피'와는 동일
한 맥락을 이룬다. 한편 '피'는 생명의 요체로서 특히 본문에서는 사
람의 전존재를 의미한다. 실로 예수는 '무죄한 인격'이었던 것이다.
ㅇ죄를 범하였도다 - 유다는 무죄한 죄를 판 자신의 죄를 뒤늦게 고
백하나, 하나님께가 아니라 공범자인 산헤드린에게 했다. 따라서 이
자인(自認)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가 아니라 자기의 실수에 대한 인간
적인 강박 관념에서 비롯된 일종의 넋두리에 불과했다.
ㅇ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고전 셈어의 관용적 표현으로서 참
으로 매정한 결별 선언이다. 즉 이것은 배신자에 대한 뼈아픈 배신선
언인 것이다.
ㅇ네가 당하라 - 똑같은 문구가 24절에 다시 한번 나온다. 여기서
'당하라'는 헬라어 '와세이'는 강한 의지가 내포된 명령이다. 따라서
본문을 재구성하면 '그것은 너의 일이니 네가 알아서 하라'가 된다.
이러한 견지에서 공동번역에서는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라'로 번역되
어 있다.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ㅇ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 여기서 '성소'(나오스)가 성전 구내 전
체를 뜻하는지, 이방인의 뜰과 막연히 구별된 제사장만이 출입할
수 있는 성소(sanctuary)를 뜻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구구하나 대
체적으로 후자를 택하고 있다. 적어도 그렇다면 이때 유다는 심각한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떻게든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양으로 율법의
규례를 무시한 채 성소 뜰로 뛰어들어 열린 성전문으로 은 삼십이 든
주머니를 던져 넣었을 것이다.
ㅇ물러가서 - 마치 단말마(斷末魔)의 그것처럼 필사적으로 자기 절
망감을 극복하려 했던 유다는 성소에서 뛰쳐나와 곧장 힌놈 꼴짜기
의 으슥한 곳으로 숨어들었을 것이다(The Pulipit Commentary).
ㅇ스스로 목매어 죽을지라 - 그러나 본문과는 달리 사도행전에서는
유다가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튀어나와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행 1:18). 이는 양 기사간의 모순을 드러내기 보다 조화로운
장면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가룟 유다는 자살 장소로 가파른 바위
언덕 위로 을라가 그곳 나뭇가지에 목을 매었는데, 후에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그 가지가 부러짐으로 해서 날카로운 바위에 떨어져 창
자가 터져 죽어 갔을 것이다(행 1:18,19 주석 참조). 한편 '목 매어
죽은' 사건은 이곳 외에 70인역(LXX)의 삼하 17-23에서 나온다. 이
를 근거로 하여 어떤 학자들은(B,F, Meyer, McNeile) 다윗을 배
신한 친구인 아히도벨과 다욋의 자손을 배신한 가롯유다, 이 두 사
람을 비교하기 위해 마태가 의도적으로 본 장면을 첨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태가 이같은 비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두 배신자를 비교했
다는 것은 신빙성이 없다(Moo, Use of O.T. pp.189-91). 결국 유다
는 끌내 멸망에 이르는 자기 길로 가고 말았다(행 1:25).

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ㅇ이것은 피 값이라 - 유다가 '예수의 피(4절)를 팔므로써 벌어들
인 돈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대제사장들이 이갈은 단정적 발언을
한 것은 적어도 유다의 행위가 사악한 자신들 의견시에서 볼 때도
옳지 못했다는 점을 간접 시언한 것이다.
ㅇ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 율법에 의하면서(신 23:18) 이
런 피값으로 얻은돈은 창기나 개같은 자의 돈과 같이 취급되어 여
호와께서 미워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대신 이런 류의 돈들은 자
선과 구제 등의 대사회적인 용도로 사용되거나, 현금한 당사자에게
되돌려준 듯하다. 따라서 제사장들이 유다의 돈을 성전금고에 넣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편 '성전고'로 번역된 헬라어 '코르
바나스'는 거룩한 물건과 고르반 등을 보관하는 장소로서(15:5;
Jos. Wars II,IX.4), 이곳의 재물들은 주로 각종 제사와 성전 관
리를 해 활용되었다. 그런 점에서 일전에 가룟 유다에게 주어진 은
삼십은 이곳에서 지출된 것이라는 추론(推論)이 가능하다. 어찌되
었든 대제사장을 위시한 유대 지도자들은 엄청난 불의를 자행했음
에도 의식상으로는 깨끗하려는 위선을 떨치지 못했던 것이다(12:9
-14;15:1-9;23:23).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ㅇ의논한 후 - 구체적인 토론을 한 것이기 보다 신속하게 결의안을
통과시켰음을 암시한다(1절). 그들의 믿음은 악을 도모하는 일에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ㅇ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 사도행전에 의하면 유다가 밭을 산 것으
로 되어 있다(행1:18). 분명 그 제사장이 밭을 샀다고 하여도 그
돈의 원(原) 주인은 유다이었으므로, 사실상 슈다가 산 것과 같다
고 설명할 수 있다(Roberton). 한편 이밭의 소재지는 점토지대인
예루살렘 남쪽, 곧 힌놈 골짜기 맞은편에 있다고 전해지며, '악한
회의의 언덕'( the Hill of Evil Counsel) 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은 더이상 토기 굽는 장소로서 효율
가치가 없어진 불모지(不毛地)로 잘 알려져 있었던 듯하다. 왜냐하
면 매우 싼 가격으로 쉽게 이곳을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리고 그들 유대 지도자들이 이런 결정을 신속히 하게 된것은 아마
도 벌써부터 '나그네의 묘지'에 대한 필요성올 느끼고 있었음이 분
명하다. 여하튼 일로 인해 즉 11:12, 13의 예언이 온전히 성취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ㅇ나그네의 묘지 - 여기서 '나그네'란 이방인들이 아니라 타 지방
에 사는 유대인이나 개종한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따라서
'나그네의 묘지'란 그들이 명절 등의 일로 예루살렘에 입경했다가
죽는 경우 묻어 주는 묘지를 말한다. 한편 이곳은 현재에도 가난한
예루살렘 주민이나 치욕스런 자들의 뼈무덤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했다.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ㅇ오늘날까지 - 이 한정적 표현은 본서가 기툭된 그 시점에 이르기
까지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결국 이 말은 본서가 예루살렘과 그 주
변이 완전히 파괴되고 황폐화 되어버린 A.D.70년의 예루살렘 멸망
전에 이미 기록되었음을 간접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유다 자살 사
건과 본서 기록 시점과는 어느정도 시간간격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ㅇ피밭 - 마태복음에 의하면 '피밭'이라는 이름은 피값을 주고 그
땅을 산것에서 유래한다고 하는 반면에 사도행전에서는 유다의 피
가 거기에 흘려졌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워진다고 한다(행 1:18,19).
그래서 예루살렘 주민들은 이 땅을 '아겔다마', 곧 '피의땅' 이라
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 차이의 극복을 위해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 즉 만약 유다가 제사장들이 산 밭에서 죽었다고 가정(假
定)한다면 마태복음과 사도행진의 이야기는 일치되는 것이다. 아마
제사장들은 반드시 바로 그 날은 아니었지만 지체하지 않고(아마
예수의 부활이 있을 일요일로 뗘겨짐 밭을 샀을 것이다. 그리고 돈
이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알고 있었으며, 또 극심한 후회로 절망
에 잠겨 있던 유다가 이스라엘의 계약에 따라 나그네를 위한 묘지
로 삼은 그 밭에서 자살하기로 결심했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유다가 돈을 성전에 던져 넣고나 가서 즉시 자살했다
면 그 시기는 제사장들이 그 돈으로 밭을 사기 전일 수도 있다. 그
렇다고 하더라도 유다의 시체를 그곳에 옮겨 묻었다면 앞의 이야기
는 무리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 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ㅇ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맡씀이 이루었나니 - 구약 예언의 성취
를 강조하는 전형적인 마태의 문구이다. 구약 예언의 성취를 알리
는 이 문구는 예레미야에서 온 것처럼 되어있는 본문과는 달리 사
실은 스가랴의 예언으로 보아도 좋을만큼 대부분이 슥 11:12, 13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렘 18:3에서 토기장이의 집을 방문한 것에
대하여, 그리고 렘 32:6ff. 에서는 밭을 산 것에 대해 하고 있어서
예레미야서가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다. 여하튼'예레미야'란 이름을
후기 편집자들이 첨가했다거나, 순전히 렘32:8-14의 인용이라는 사
실을 들어 이 차이를 해명하는 학설들이 있다. 이와 함께 선지자의
이름이 '예레미야'로 제시된 이유로는, 스가랴서를 위시한 모든 예
언서들을 대표하는 이름이 '예레미야'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Light foot;Talmud, Baba Bathra 14b).
그러나 예레미야 대신에 '이사야'가 예언서의 대표격으로 더 자주
사용된다는 점에서 이 견해는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가장
유력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즉 마태가 렘 18:2;19:1,2;32:8-15의
내용을 종합하고, 즉 11:13과 결합시켜 하나의 문장을 만든 후 그
구절을 대표적인 선지자 예레미야의 이름으로 인용하였다는 학설이
다(Bruce, Meyer, Gundry). 이러한 예는 신약의 다른 곳 에서
도 발견된다(2:23;막 1:2, 3). 실로 마태가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께서 사형(死刑)에 이르는 이모든 과정
(은 30에 팔리우고,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이 사들여진 일 등)이
구약의 예언을 모두 성취했다는 사실이다. 즉 스가랴서에 기술된
예언이 목적하는 바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목자되신 여호와께
삯 은 삼십은을 드렸고 제사장은 그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것을
소개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그같이 예언이 예수의 팔리우는 사
건으로 성취되었던 것이다.

10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ㅇ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며 - 이 문구는 2절에 연결하여 있으면
오히려 자연스럽다. 마태가 자기만의 독특한 기사인 유다의 사망
이야기를 2절과 11절 사이에 삽입시킴으로써 이같은 시간적 중단
이 생겼다. 본문 이하부터 계속해서 '빌라도'라는 이름 대신 '총
독'이라는 직책명을 반복해서 사용하여 (15. 19, 21절)예수의 사
형이 정치적 문제에 따라 이방인의 손에 의해 공식적으로 진행되
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이때 빌라도의 심문은 총독 관
저(praetorium)에서 진행되었다.
ㅇ유대인의 왕 - 당시 로마의 재판 과정은 먼저 집행관이 원고측
의 고소 이유를 듣고 피고에게 몇 마디 질문을 한 뒤 피고의 자기
변론을 듣는 과정을 필요에 따라 몇번 거듭하다가 배심원들의 의
견을 들은 다음 판결을 내렸으며, 그렇게 확정된 판결은 일사천리
(一瀉千里)로 집행되었다. 유대 지도자들의 예수에 대한 고발 내
용(아마 세금 문제에 관해 언급하신 것을 예수에게 불리하게 적용
시키는 것과 함께 그가 열심당(the Zealot)과 같이 반역을 꾀
하여 유대인의 왕이 되려 한다는 죄목이었을 것이다<눅 23:2>)
사실 빌라도는 로마 총독으로서 점령군을 책임지고 있었으며 법과
질서의 문제에 민감했다. 만일 빌라도가 예수의 범죄의 정치적 성
격을 확신할 수 있다면 예수는 로마의 십자가 처형에 의해서 죽임
을 당하여도 무방하다. 그런 점에서 빌라도의 관심은 '예수가 정
치적인 권력을 장악하여 로마의 법과 질서에 위협을 가했는가' 이
며 따라서 그는 자신의 관점에서 묻는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한편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칭은 일찍이 2:2에서 동방 박사들이
예수께 사용한 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역사적로는 물론 신학적으로
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실은
십자가의 명예에도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신 예수가 약속된 메시야, 곧 유대인의 왕이라는 확신 아래 세
워진 기독교 신앙의 서장(序章)이 되었던 것이다. 예수가유대인의
왕이시라는 문제는 이미 본서 초두에서부터 부각되어 왔던 주제이
다. 십자가에 못박혔던 메시야가 곧 유익하고 정당한 우리의 주이
신 것이다(N.A. Dahl, The Crucified Messiah, pp. 10-36)
ㅇ네 말이 옳도다(쉬 레게이스). 직역하면 '네가 말했다'로서 굳
이 물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당신이 잘 알고 있지 않느냐는 긍정
적 답변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위의 질문에 대해 26:25, 64 등에
서 이미 긍정하신바 있다. 그러나 예수의 대답은 세상의 구세주로
서의 메시야 됨을 긍정한 것이지, 정치적 의미에서의 왕됨을 긍정
한 것은 아니다. 물른 이때 빌라도는 과연 예수가 어떤 의미에서
유대인의 왕이셨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었다. 예수께서 지니신
왕권의 본질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18:34-37에 자세히 정의되어
있다.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ㅇ고소를 당하되 - 마가복음에는 고소하는 이들이 대제사장들로
만 국한되는데 반해 마태는 '장로들'을 첨가하고 있다. 이처럼
마태가 '장로들'을 첨가한 것은 백성의 대표들이 예수를 고소한
일에 분명히 관여하였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또한 26:65,
66 에서는 산헤드린이 사형 판결을 내린 이유가 예수께서 자신
을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었음을 알 수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유대
법에 의해서는 성립되지만 로마법에 의해서는 유죄 판결의 이유
가 안 된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저들이 예수를 고소하였다고만
언급되어 있을뿐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고소했는지는 언급되
어 있지 않다. 눅 23:2 에 의하면 고소 내용이 예상했던대로 정
치적인 죄목이었음을 알 수 있다 (11절 참조).
ㅇ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 이 시야가 예언한 바 있는 '고
난받는 종'(사 53:7)의 침묵을 연상시켜 준다. 예수께서는 앞서
있었던 산헤드린 공회의 심문에서도 침묵을 지키셨다(26:62, 63).
그리고 이후 요 9에서도 마지막(세번째) 침묵을 지키셨다. 사실
저들의 고소 내용은 예수께서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대답하신 진
실 말고는 모두 거짓 고소였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침묵으로써
저들의 허위에 찬 거짓고소를 부정하실 수밖에 없었다.

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ㅇ저희가 너를 쳐서...많은 것으로 증거하는지 - 한 두마디의
거짓도 아니고 무수히 많은 고소 앞에서도 예수는 흔들리지 않
고 오직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이에 빌라도는 예수가 분명 무죄
(無罪)함을 직감했고 사지 않은 상태로 예수를 풀어 반감을 사
지 않은 상태로 예수를 풀어 주려 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께 자기 변호의 기회를 준 것이다.

14 한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ㅇ한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 이중부정 구문을 사용하고 있
는 혤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예수께서는 '대답하지 않으셨는데
단 한마디의 고소에 대해서도 (답변)하지 않으셨다'가 된다.
실로 예수의 침묵은 무언(無言) 중에 자신의 무죄성욜 강조하
신 동시에 자신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서(20:28) 기꺼
이 고난을 당하겠다는 당신의 거룩한 뜻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
다.
ㅇ심히 기이히 여기더니 - 이 말은 가끔 초자연적인 사실 앞에
서 경이감을 표시하는데 사용되었다(9:33)실로 죽음 앞에서 조
금도 혼들림 없이 자신을 구재(救災)하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한
채 '한 마디' 대답 없이 침묵할수 있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다변(多辯)의 수사학으로 길들여진 빌라도가 그런 일을 일찍이
본 일이 있었겠는가? 그는 사실상 초자연적 존재와 사건 앞에서
있는 것이며, 따라서 기이히 여기는 감정이 생기지 않을 수 없
었다. 여하튼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많은 말로 가르치시던
예수께서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는 한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진정 예수께 있어서는 말하는 것도 침묵하는 것도 인류에 대한
당신의 지극한 사랑의 표시인 것이다.

15 명절을 당하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ㅇ명절을 당하면...죄수 하나를 - 명절에 죄수를 풀어 주는 전례
가 역사적으로 언제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1) 이 관습이 유대인을 무마하기 위한 로마의 식민지 정책의 일
환으로 행해졌다고 한다(Gro-tius) (2) 로마와 헬라에서는 황
제의 생일이나 명절에 죄수들을 석방했던 관습이 있었는데, 공적
축일(祝日)에 로마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석방한 것은 빌라도 이
전 시대부터의 관습이었던 것 같다(Braune). (3) 유대인의 풍
속에 관한 고대 문서(M, Pesahim)에는 '그들은 그들이 감옥
에서 석방해 주고자 하는 자를 대신하여 유월절 앙을 죽일 수 있
었다'는 내용이 있어 유대 지방에서 매년 유월절에 대속사가 이
루어졌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4) 앞의 설명과는 반대되는 것으
로, 복음서 연구가의 브랜스콤(B.H. Breanscomb)은 그 전례에
대해 '여기 설명된 것과 같은 그런 전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유월절 절기에 로마의 총독들이 정규적으로 죄수 한
명을 석방했으며, 또 그 죄가 어떠하든지 간에 무리들이 개인을
지명했다는 관례는 전혀 아무런 확증이 없을 뿐만아니라 팔레스
틴을 다스리던 로마 통치의 정신과 방법에 전혀 모순된다'고 말
하고 있다. 그러나 로마법에는 로마 제국의 행정관은 아직 정죄
되지 않은 죄인을 사면해 주거나 이미 정죄된 죄인을 용서해 줄
권리가 있었다는 점에서 본문의 풍속의 기원이 보호하다 하더라
도, 최소한 로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던 유대 지역에서 실행되
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Moule, Idiom Book, p 59).

16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ㅇ빌라도의 바리바리 하는 유명한 죄수 - 하위그룹에 속하는 헬
라어 사본들(아도스사본. 8-9세기경)과 시리아역, 그리고 고대
교부들의 문헌들에서는 '바라바'를'예수 바라바(Jesus Ba-
rabbas)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본문에
'예수'라는 이름이 삭제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에 대한 존경심이 커지고 '예수'라는 이름
이 신성시 되면서 '예수 바라바'에서 '예수'라는 명칭이 생략되
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와 더불어 이 사실을 더욱 확고히 하
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덧붙인다. 즉 마태는 17절에서 바
라바라와 예수를 구분하기 위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라는 문
구로 '예수 바바라'와 '그리스도 예수'를 구분하고 있다는 것이
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오늘날 크게 지지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한편 '바라바'(Barabbas)라는 말의 의미는 '바르
아바'(bar Abba) 곧 '아바의 아들',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 랍비의 아들'(Ewald), 또는 '마귀의 아들'
이라는 뜻으로 적 그리스도를 뜻한다고도 한다(Theophylact).
이와는 반대로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에 관련되고, 바로 그것에
서 하나님 거룩한 섭리의 일면을 발견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Olshausen). 그러나 이러한 제견해들 중에 어느것을 단정
적으로 주장하기란 사실 힘들다. 한편 본문의 '유명한'(에피세
모스)이란 '탁월한', '눈에 띄는'이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특히
'악명(惡名)높은'이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사실 바라바
는 평범한 죄수는 아니었다(막 15:7;)눅 23:19;요 18:40). 즉
그는 단순한 도둑이나 강도가 아니라 적어도 사행에 처해질 정
도인 것으로 보아 아마 반란 음모자였음이 분명하다. 사울 당시
유대 전역에도 게릴라에 의한 반란과 유혈 사태가 빈번하였었다
(Jos.Antiq.XVIII,3-10,3-10,60-62;눅 13:1). 아마 바라바
도 그러한 유혈 사태에 관련되었을 것이며, 거기에다가 반도덕적
악행도 저질렀던 것 같다. 그렇다면 유대 백성에게 있어서 그는
악명 높은 강도로서가 아니라 어떤면에서 '영웅'적 행동을 한 자
로 기억될지도 모를 일이다.

17 저희가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가로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ㅇ빌라도가 물어 - 마가복음과는 달리 전례대로 해주기를 구하는
무리의 요구가 본문에는 빠져 있다. 또한 마가복음에서는 빌라도
가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막 15:9)고 묻고 있는데 비해 본문에서는 빌라도가 백성들에게
요구하기를 '바라바'와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 중에서 하나를 선
택하라고 한다. 사실 그는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종교적 열성이
강한 유대 백성이라면 적어도 선한 선생으로 이해되었던 예수를
선택할 줄 알았을 것이다. 그는 마치 자기가 무모한 살인의 책임
을 회포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를 맞은 양 이렇게 다급히 백성들
에게 물었으며, 이 방법으로 산헤드린의 악한 계책(計策)을 깨뜨
려 버리려 하였던 것 같다. 한편 빌라도가 선택을 요구한 '저희'
는 예수를 고소한 무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 특사로 사
면될 죄인을 선택함에 있어서 빌라도가 의견을 물었던 무리들이었
다(막 15:8). 이와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확실치는 않지만 아
직 예수 그리스도의 체포와 재판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 상태에
있었던 군중들은 혁명 투사였던 '예수 바라바'의 이름을 외치면서
(8, 9세경의 아도스 사본이 신빙성이 있다면 그의 사면을 요구하
였을 것이고, 이때 빌라도는 이 외침을 예수 그리스도를 지지하는
함성으로 잘못 알아듣고(왜냐하면 빌라도는 내심으로 바라바 보다
는 예수를 석방해 주고 싶었기 때문에)'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
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라 하는 예수냐 아니면 그리스
도라 하는예수냐'라고 군중들에게 질문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Lane, Mark P. 554) 그러나 이것은 분명 하나의 가정일 뿐이다.
한편 본문의 '그리스도라 하는(불리우는) 예수'란 표현은 예수의
신적 존재를 무시하고 경시하여 부르는 말임이 분명하다.

18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줄 앎이러라

ㅇ이는 저가 ...앎이러라 - 여기서 '앎이러라'(에데이)는 말은 제
2과거 완료 시상으로서 이미 충분히 납득한 상태에 있었음을 분명
히 보여 주고 있다. 즉 빌라도는 유대 지도자들의 고소에 결함이
있음과 그들의 불같은 행동의 이면에는 개인적인 시기와 질투가
스며 있음을 모두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유대 지도자들의
'시기'는 21:15, 16;21:45 에서도 이미 보여진 바 예수의 가르치
는 권위나 능력과 언행이 저들의 위선과 허위성을 적나라하게 드
러냈을 뿐 아니라 저들의 종교, 사회상의 고유한 권위를 상당히 침
범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에 생겨났을 것이다. 빌라도의 이러한
유대 지도자들의 저의(底意)를 이해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였다.
실로 사람이 알지 못한 채 죄를 짓는다면 그 실수 한 가지만 책망
받으면 그만일 것이다. 그런데 알면서도 짐짓 죄를 지었을 때는 죄
를 지었다는 것 뿐 아니라 자신의 양심을 거스렸다는 사실까지도 아
울러 책망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결과적으로 예수를 십자가
형에 처한 빌라도의 잘못은 결단코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다.

19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

ㅇ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 - 요 19:13에서처럼 마태는 빌라도
가 총독 관저 앞에 마련된 돌로 만든 단상, 곧 재판석에 앉았다고
기록한다. 물론 그가 이 자리에 알은 것은 유대인들의 선택(17절)을
귀담아 듣고 그에 준한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한편 이 빌
라도의 태도는 그의 제도적 권위와 그의 실제적 무능력 사이의 대조
를 심화시킨다.
ㅇ그 아내가..가로되 - 빌라도의 아내에 관한 이야기는 마태복음에
서만 나온다. 전설에 의하면 빌라도의 아내의 이름은 '프로클라 클
라우디아'(Procula Claudia)였는데, 유대교에 귀의했을뿐 아
니라(외경 니고데모 복음서 2장), 그리이스와 에디오피아 교회에서는
그녀를 심지어 성자(聖者)의 한 사람으로 숭배하기까지 했다고 전한
다. 여하튼 A.D. 21년에 로마상원 의회에는 어떤 지방행정관도 그의
아내를 부임지까지 동반할 수 없다는 법이 제안되었었다(Tarcitus,
Annals III.33-35). 그러나 그 제안은 아직 입법화되지 않았기 때
문에 빌라도의 부인이 그와 함께 총독관저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ㅇ저 옳은 사람(토 디카이오 에케이노) - 여기서 '옳다'는 말은 '전
혀 무흠하다'(innocent)라는 뜻으로 결국 이 말은 거룩한 예언자
나 메시야에게만 국한되어 표현되는 유대인의 관용어이다. 따라서
그 아내는 예수의 절대 무죄성과 함께 예수의 신적 속성을 어느정도
이해한 상태였을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꿈에서 얻어낸 신령한 지식
이었다.
ㅇ꿈에...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 그녀는 초자연적인
한 꿈 때문에 정신적으로 뿐 아니라 육체적로도 상당히 고통당했다고
실토했다. 한편 빌라도의 아내의 '꿈' 이야기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
를 상기시킨다(1, 2장). 사실 꿈에 대한 강조는 마태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서 마태에게 있어서는 '꿈'이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으로 이해
되고 있다(1:20;2:12,13,19,22) 어쨌든 그녀의 꿈이 신적 계시로 이
해되든 아니면 단순한 예수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염려한 심리적갈등
에 의한 마음의 표상이었든지간에 마태가 이 이야기를 통하여 강조하
고자 하는 것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유대 지도자들의 돌이킬 수없는
책임과 예수의 무죄를 밝히고자 하는데 있다.

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자 하게 하였더니

ㅇ대제 사장과장로들이...권하여 - 산헤드린은 빌라도가 확신에 찬
결단을 내리는데 주저하면서 때마침 찾아온 아내의 꿈에 관한 이야
기를 듣는 동안 백성들을 충동하는데 성공 한다. 특별히 본문에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일치된 한 무리임에도 불구하고 그 각각에 관
사 (호이)가 사용되고 있는 것은 그들 각자가 군중들 틈에서 바라바
의 석방을 요구하게 하는 사주(使嗾)를 매우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
었음을 간접 시사한다. 예수를 멸하자 마태복음에서만 볼 수 있는
문구로 유대 지도자들의 음모와 그들의 책임이 강조되고 있는 표현
이다.
                
21 총독이 대답하여 가로되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바라바로소이다

ㅇ둘 중에 누구를 - 마가복음과는 달리 본서에서는 빌라도가 '누구
를 놓아주기를 원하는가'하고 다시 한번 결정을 묻는다. 그러나 백
성의 대답은 단호히 산혜드린의 결정을 바라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요구했다. 사실 이때 내심으로는 예수의 무죄를 확신하는 빌라도는
가능한한 분위기를 예수에게 불리하지 않은 방향으로 유도해 보려고
하지만 백성들은 그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역
사적으로볼 때 백성들이 그러한 반응을 보인것은 이해할만하다. 즉
바라바냐 예수냐 하는 선택의문제 앞에 그들은 로마 총독의 의도보
다는 자기들의 지도자들의 의도를 찬성했을 것이다. 식민지의 억압받
는 상황에서 점령군 사령관의 말을 듣느니 차라리 밉지만 자기들의
지도자들의 말을 듣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이(Jos.,Antiq.,
XVIII269-272). 더구나 산헤드린의 지도자들이 예수에 대해 하나
님을 모독했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퍼뜨리면서 선동(煽動)했나면 순
진한 백성들로서는 당연히 예수의 사형을 지지했을 것이다. 훗날 베
드로는 이같은 군중 심리에 의한 어리석고도 불의한 결정에 대해 통
렬히 비난하는 설교를 하게 된다(행 3:14,15).

22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ㅇ그러면...내가 어떻게 하랴 - 빌라도는 비록 유대 백성들이 산헤드
린의 충동질에 바라바의 석방을 요구했지만, 또 한번 예수의 석방도
요구하지 않겠느냐는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조심스런 질문올 덧붙인
다.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그는 예수에게 십자가형이 아닌 좀더 가벼
운 형벌이 요구되기를 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빌라도의 태도는 매우
무책임하고 결단성이 없는 것으로 재판의 판결에 있어서 고유한 판결
권을 가진 그로서는 마땅히 자신의 양심적 소신에 따라서 판결을 내
렸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책임을 면하려고 판결권을
백성들에게 이양하고 있다.
ㅇ십자가에 못박혀야 - 이 외침의 주동자는 물론 산헤드린 공회원들
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무리'들은 적극적 동조자로서 예
수의 처형을 요구하였다. 사실 그들 중에 최소한 몇몇은 바로 며칠
전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시 '호산나' 찬미했던 자들도 있었을 것이
다(21:9). 한편 이 십자가 처형 요구는 곧 예수를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로 단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32-4절).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가장 불명예스러운 난동으로 처형할 것, 곧 로마법에 의한 십자가형
을 강력하게 요구했던 것이다. 실로 유대 백성들은 자신들의 영적
무감각과 자기 파괴적 열광으로 그들 자신의 메시야를 로마의 십자
가로 제거(除去)한 것이다.

23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ㅇ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 누가복음에는 '무슨 악한 일
을 했는가?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했나니 때려서 놓으라'(눅 23
:14-16)고 기록되어 있어, 가능하면 예수를 극형으로 처형하지 않으
려는 빌라도의 태도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요한복음 19:
1-16 에서도 예수를 용서하려는 빌라도의 노력이 잘 묘사되고 있다.
요컨대 빌라도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은 그가 상식과 선의를 갖추고
있는 행정관이기는 하지만 정의에 서서 소신껏 행동치 않는 기회주의
적이고 우유부단한 인물이었음을 보여 준다.
ㅇ저희가 더욱 소리 질러 - 빌라도의 소신없는 태도는 오히려 군중들
의 주장을 더욱 고조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즉 자신들의 주장에
결국 빌라도가 굴복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군중
들은 흥분과 열광으로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사 5:7).

24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ㅇ아무 효험도 없이 - 이는 빌라도의 완전한 굴복을 뜻한다.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 여기서 '나려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네타이는
현재 시상으로서 지금 군중들이 마치 폭도로 변할 듯한 장면을 확연히
관찰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즉 더이상 지체할수 없는 급박한 상황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민란'은 로마의 지방 행정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로서 이 일이 로마정부에 전달되면 자기 신상에 크나큰
해가 되었다. 따라서 어떠한 생을 치러서라도 민란을 사전에 예방해
야만 했다.
ㅇ물을 가져다가...손을 씻으며 - 이 문구는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것
이다. 한편 신명기 21:6,7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살해되외었을때 그
부근에 있는 성(城)의 장로들은 손을 씻는 의식을 통하여 자신들은 이
범죄와 무관하다는 것을 나타내어야 했다. 그리고 시편 26:6과 73:13
은 이 법이 거의 금언적이라는 것을 입증해준다. 이처럼 무죄의 표시
로 손을 씻는 행위는 철저히 유대적인 것으로서, 몇해 동안 유대를 통
괄하던 빌라도에게는 익숙한 풍습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 유대 풍습을
따름으로써 그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확실히 전했을 뿐 아니라 그 유대
인들을 은연 중에 경멸했던 것이다. 물론 손을 씻고 난 후, 손바닥을
마주침으로써 자신의 결백과 무흠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빌라
도는 행정적으로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자기가 최총 결정권자였음에
도 뷸구하고 이 간단한 상징 행위를 통해 자기 무죄를 선언하는 대신
모인 무리들에게 그 죄책을 전가(imputation)했다. 그러나 비록
그가 온몸으로 자신의 무죄를 선언했지만 역사는 오늘도 그의 죄책을
묻고 있다(사도신경 中).
ㅇ이 사람의 죄에 대혀여 - 사본(시내, 레기우스 등)에 따라 본문을
'이의인(디카이온)의 피에 대하여'로 읽기도 했다. 적어도 이것이 사
실 이라면 빌라도는 분명 자기 아내가 전해 준 말(9절)을 신중히 기
억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자신의 비겁한 행동은 공의의
관점에서 더욱 지탄(指彈)받아야 마땅했다.
ㅇ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 빌라도는 의식적(손씻음)으로 뿐
아니라 윤리적, 사법적으로도 자기의 죄책을 모면하려 하였다. 그러
나 그는 역사와 양심의 법, 그리고 하나님의 법에 의해 영영히 그 허
물을 단죄받을 것이다.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찌어다 하거늘

ㅇ백성이 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 이같은 표현은 성경
에서 자주 발견되는 관용적 어구로서(출 20:5;삼하 1:16;3:28; 행18:
6), 자신들의 죄를 스스로 인정하고 심지어 자랑한다는 의미를 내포
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백성'을 원문의 의미에 충실하려면 '모든
백성'(파스 호 라오스)이라고 번역함이 옳다. '모든 백성'이 법적 양
식에 따라서 예수의 회가 부당하게 흐르는 것에 대한 책임을 자신과
자기의 후손들에게 돌리라고 했던 것이다. 특히 이 말 속에는 하나님
을 배칙하는 완고한 태도가 들어있다. 한편 마태는 15:32; 17:14 등
에 사용했던 '무리들'(라오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백성'
(라오스)이라고 함으로써 단순한 군중이 아닌 하나님의 친 백성이 그
런 말을 했음을 은연중에 밝히고 있다. 한편 무죄한 메시야의 죄를
흘리게 한데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한
저들의 말대로 유대인들은 A.D.70년 예루살렘의 끔찍한 최후를 겪어
야 했으며, 이후에 끝없는 유랑 생활, 그리고 2차 셰계 대전을 전후
한 20세기에는 유대인 600만명이 학살당하는 민족적 참극(慘劇)을 당
해야 했다.

26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ㅇ바리바는...놓아주고 - 빌라도는 군중들의 위압적 호소에 굴복하여
바라바를 석방하고 대신 그리스도 예수를 죽음에 내어주었다. 본문은
특히 이 인물의 운명의 극명한 대조가 부각되는데, 이 대목에서의 본
래적인 초점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죄인을 위하여
고난받고 범죄자를 대신하여 죽임당하시러 이 땅에 오셨다는 대속의
진리를 분명히 볼 수 있다.
ㅇ채찍질하고 십자가에...넘겨 주니라 - 예수께서 당하신 채찍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즉 유대의 율법
에 있어서 매질은 40대로 제한되어 있으나(신 25:3;고후 11:24)로마
인들은 이것을 무시하고 힘이 있는대로 때리고 싶을 때까지 때렸다.
특히 매질에 사용되던 채찍은 유대인들처럼 막대기가 아니라 여러갈
래로 된 동물의 가죽 끝에 뼈조각이나 납덩이를 붙여 만든 손잡이가
짧은 형태의 것이었다. 죄인은 옷이 벗겨진 후 기둥에 꽁꽁 묶여졌
다. 매질이 얼마나 심하였든지 그 매질이 가해지는 동안 죄인의 몸
에서는 회가 분수같이 뿜어 나도고, 뼈가 드러나 보일 뿐 아니라 내
장(內藏)까지 튀어나올 정도로 끔찍한 광경이 벌어졌다고 한다
(Josep-hus, war II 612; VI,304) 심지어 매질만으로 사람이 죽
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매질은 죄인을 십자가에 처형하기에 앞서 힘
을 빼는 데 사용되곤 하였다. 예수는 판결이 나기 전에 이미 뼈질을
당하셨다(눅 23:16,22;요 19:1-5). 따라서 판결이 내려진 뒤에는 반
복되지 않았다. 만일 매질이 반복되었다면 예수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을 것이다. 여하튼 빌라도는 몇 마디 더 심문한 뒤에(요 19:1-
16)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 주었다(16절) 이러한 모든 사실
들은 여호와의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상시시켜 준다(사 53:6,12).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ㅇ총독의 군병들이 - 빌라도는 자기 수하에 있는 로마 출신 군사들
에게 예수를 십자가 형에 처할 것올 명령하였다. 따라서 '총독의 군
병들'은 이후부터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 부르며 모멸적언 조롱을
하게 된다(막15:16-20;요 19:2,3). 이는 이사야 예언의 온전한 성취
였다(사 53:3).
ㅇ관정 - 헬라어로 '프라이토리온'으로 불리워지며 라틴어 '프레토
리옴'(Preatorium)과 상응하는 말이다. 이는 본래 장군의 본부를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총독의 공식 거주지를 뜻하는 말로 사용
되었다. 즉 유대 총독의 본거지는 가이사랴였지만 파종 명절의 치안
유지를 위해 예루살렘에 주둔할 때는 특별 거주지가 마련되었었다.
예수 당시 빌라도 총독은 자신의 예루살렘 특별 거주지를 안토니아
요새에 정하고 있었고, 로마 군대를 그곳에 함께 주둔시키고 있었다.
한편 공동번역 성서는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총독 관저'로 번역
하고 었다.
ㅇ온 군대 - 여기서 '군대'란 헬라어로 '스페이라'인데 26:53.54에
언급된 '영'(레기온)을 10등분한 한 부대이며, 천부장의 지휘 아래
있는 300명에서 600명에 이르는 부대이다. 이 '군대'가 소집된 것은
무죄한 죄수이신 예수를 놀이삼아 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실로 그들
은 예수의 주위에 모여 예수의 왕권을 마음껏 놀리고 조롱하였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은 책임자 빌라도의 묵허하에 이뤄졌다는 점에서
빌라도의 죄책은 더욱 가중된다 하겠다.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ㅇ총포를 입히며 - 사실 예수께서는 조절에서 채찍질을 당하기 전에
이미 한 번 옷을 벗기웠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계속 옷올 벗기
는 데 이곳까지 끌려와 희롱당하셨는지, 아니면 채찍 후 그 입던 옷
을 다시 입으신 후 여기서 다시 옷을 벗어왔는지 분명치 않다. 여하
튼 예수는 걸레처럼 찢기어진 당신의 어깨 위에 '홍포'를 걸치게 된
것이다. 여기 '홍포'(클라뮈스)는 아마도 로마의 군인들이나 시장관
들이 입던 짧고 붉은 망또였을 것이다(28절). 그런데 이 홍포의 색
상에 대해 '진흥색'이라 한 마태복음과는 달리 마가와 요한복음에서
는 '자색 옷'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자색'으로 된 옷은 황제만이
입을 수 있었고(Macc 10:20, 62;11:58;14:43,44)군인들은 옷을 착
용했다는 점에서 예수가 입은 '홍포'는 군병들의 망또였던 것으로 추
적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군병들이 예수께 입힌 옷은 헤롯왕의 옷장
에서 버려졌던 븜은 왕의 의복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8갹즙. 어찌되
었든 여기서 마태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로마 병사들이 예수께 왕을
상징(象徵)하는 옷으로 갈아 입힌 후 그분을 조롱하려 했다는 점이다.

29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하며

ㅇ당시 면류관을 엮어 - 당시 사용되던 동전에 보면 디베우스가이사
(Tiberius Caesar)가 면류관을 쓰고 있는 것이 새겨져 있는데
그 면류관 위에는 빛나는 못들이 달려 있었다. 군인들은 그것을 생
각하여 주변에서 자라는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예수의 머리 위에 씌
웠다. 이 가시나무에 관해서는 야자나무나 아칸더스(acanthus)
나무, 또는 아랍의 나바(naba)나 나브카(nabka)심지어 선인장
종류나 아카시아 종류의 나무로 보는 학자들이 있다. 여하튼 가시나
무와 가시덤불이 쉽게 자라는 팔레스틴에서 흔한 종류의 것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한편 그들이 가시관을 씌운 원래 목적은 예수를
조롱하기 위해서였을지라도 결국 그들은 고난의 왕관을 혜수께 씌웠
던 것이다. 따라서 그 가시에 의해 찢어진 예수의 머리에는 검붉은
핏방울이 쉴새없이 흘러내렸음에 분명하다.
ㅇ갈대를 그 오른손에 - 동전에 새겨긴 황제의 오른손에는 통치권의
상징인 황제의 홀(笏)이 쥐어져 있는데, 로마 군병들은 이것을 모방
하여 예수의 오른손에 '갈대'를 쥐어 주었다. 이 '갈대'는 등나무
종류의 평범한 풀이나 줄기가 꿋꼿한 갈대였음이 분명하다.
ㅇ무릎을 꿇고 - 마가복음에서는 '예배하다'를 뜻하는 '푸로스퀴네
오'라는 동사를 사용했는데, 마태는그 단어 대신 단순히 '무릎 꿇
다'는 뚱인 '고뉘페테오'라는 동사를 사용했다. 그런데 이 두 단어
는 의미상 동일하게 언급됨이 마땅하다. 즉 군인들이 예수를 조롱
하는 자리에서 그들이 마치 자신들의 군주인 '가이사'에게 경배하
듯 예수를 경배하며 심히 우롱했던 것이다.
ㅇ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 이는 '가이사 만세'라는 로마인
들의 황제에 대한 찬사의 외침과 같은 뜻이다. 따라서 공동번역과
새번역에서는 이를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번역하고 있다. 하나님
의 아들이자 세상의 구세주이신 예수께서 하찮은 로마 군병들에게
치욕스러은 조롱을 당하신다. 그러나 마태는 저들의 조롱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진리를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묵묵히 시사해 주고 있
다. 군인들은 조롱의 차원에서 예수께 황제에게 대한 모든 예를 갖
춤으로써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께 경배하리라'는 시 22:27의 내
용을 역설적으로 성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군인들은 자신들
도 모르는 가운데 진리를 증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예수는 면
류관을 쓰시고, 홀을 들고,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신 동시
에 여호와의 고난받는 종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칼한 진리의 선포
인 것이다.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ㅇ침 뱉고...머리를 치더라 - 로마 군인들은 왕에 대한 충성의 표
로 입맞추는 대신 가장 모욕적인 행동으로서 그에게 침을 뱉었다.
그리고 왕을 위하여 목숨바쳐 싸우는 대신 갈대로 머리를 내리쳤
다. 그 결과 그분의 머리에 씌워진 가시는 더 깊이 그분의 피부 속
으로 박혀 들어갔을 것이며 얼굴은 더욱 검붉게 물들어 갔을 것이
다. 한편 여기서 '치더라'는 말은 어쩌면 이것은 지상에서의 그리
스도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대접(待接)이었는지 모른다. 한편 마태
는 조롱과 육체적 학대를 구별하여 먼저 조롱한 후에 학대한 것으
로 기술하고 있다.

31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ㅇ희롱을 다한 후 - 여기에 사용된 동사는 과거 완료의 시제를 의
미하는 부정과거형로 씌어졌다. 따라서 마태는 그 어간에 되어진
세세한 내용을 어느 정도 생략했음을 보여 주고있다. 그러므로 그
회롱과 학대가 언제까지 계속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
한 것은 로마 군병들이 자신들의 기분을 마음껏 푼 정도로 예수는
육체적으로 서서히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편 요
한의 중언(요19:4-6)에 따르면 이때 빌라도는 다시 한번 예수의 석
방을 해 노력한 혼적이 발견된다.
ㅇ그는 옷을 입혀 - 대개 옷을 벗기운 채로 형장을 향하며, 가는
도중에 사람들의 비웃음과 매질을 당해야만 했다. 이러한 관습이
예수께 적용되지 않은 것은 아마 그가 너무 많은 매질을 이미 당
했기 때문에 더 매질을 당하게 되면 아예 죽게될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그때가 유월절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신
경을 너무 자극하지 않도록 삼가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편 예수
께서 다시 입으신 '옷'(히마티온)은 주로 겉옷을 뜻하지만 군병들
이 제비뽑은 사건에(시 22:18; 요 19:23)비춰볼 대 분명 속옷까지
포함한 표현일 것이다.
ㅇ십자기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가리라 -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때가 유대 시간으로 '제 3시', 곧 오늘날의 오전 9시였으므로(막
15:25), 본문은 아직 오전 9시가 되기전의 일이라 본다. 여하튼 유
대 지도자들의 고소에서부터 로마 당국의 사형 언도에 이르기까지
예수에 대한 판결은 밤새 급속히 진행되었고 급기야 아침에 이르러
십자가 형을 집행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유대인의
습관을 좆아 그 사형 집행은 성문밖에서 이뤄졌는데(민 15:35,36;
행 7:58;히 13:11,12),이때 예수는 관례를 따라 자신이 질 십자가
를 친히 지고 형장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이 형장으로의 이동은 원
래 죄수 처형을 전담했던 부총독이 맡아야 했으나 그 부총독(Li
-ctor)이 빌라도의 명령을 거부했기 때문에 대신 말탄 백부장이 형
장 이동을 진두 지휘(陳頭指揮)하였으며, 네 명의 군병들이(요
19:17,23)예수의 신변 호위를 했고 그 뒤에 군병들이 따라 나섰다
고 전한다(Lange, The pulpit Commen-tary).

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

ㅇ나가다가 - '시골에서' 올라온 구레네인 시몬과의 만남이 곧 있
었던 것으로 보아(막15:20, 21)'관정으로부터' 나갔다는 말이 아니
라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갔다'는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사형 집행이 성 밖에서 집행되었던 규정(레 24:14; 왕상 21:13)과
사람들이 많은 곳을 통과하여 형장에 이르게하는 그 당시 관례에
따라 예수는 예루살롑 시민이 모두 목격할 수 있는 대로로 나아갔
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께서 나아갔던 그 고난의 길을 가리
켜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sa)라 명명하여 기념하고 있
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당시 심한 매질로 인해 거의 기진했기 때문
에(요 19:17) 혼자의 힘으로 형장에까지 완전히 나아갈 수 없었다
(히 13:13).
ㅇ시몬이란 구레네 사람 - 아마 그는 리비아 서북편에 위치한 구레
네의 '디아스포라'란 큰 유대인 집단에(Jos.,Antiq.,XIV.7,2;
Cont.Apion. 제 2권)소속된 일원이었던것 같다(행11:22;13:1).
한편 구레네 거주자들은 예루살렘에 자기들의 회당을 갖고 있었던
것 같으며, 시몬은 이때 유월절 행사를 위해 예루살렘에 입경한것
으로 보인다. 또한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가 사도들에게 잘 알
려진 사실로 미루어 볼때에 (막 15:21;롬16:13), 시몬 역시 이 사
건 이후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사실 경건한 유
대인이라면 어느 누가 유월절과 안식일을 눈 앞에 두고 피흘리는
십자가를 지고자 했겠는가마는 이때 구레네 시몬은 아무런 원망과
불평없이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였다. 비록 항거할 수 없는 로마의
군법에 따라 징발(徵發)되는 비운을 맞았으나 그는 피흘리며 죽어
가신 예수의 최후를 누구보다 생생히 목격할수 있었으며, 그후로
전가족이 구원얻는 크나큰 측복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억지로'
(엥가류산)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말로서 마치 증앙정부로부터 특명
을 받은 진령이 목적지로 가기 위해 강제로 말이나 사람을 차출해
갔던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5:14), 여기서는 '징발하며'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다. 여하튼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졌지만
결과적으로 '억지로' 측복을 받은 격이 되었다. 여기서 십자가에
대해서는 막 15:21-34의 강해를 참조하라. 한편 본절은 성경 해석
에 있어서 중대한 오해를 일으키는 구절이기도 하다. 즉 제 2세기
영지주의의 이단자였던 바실리데스(Basilides)는 예수가 아니
라 구레네 시몬이 도중에 바뀌치기 당해 십자가에 죽었다고 한다.
더욱이 그는 34절의'예수께'는 원문에 의하면 '그에게' 이고 따라
서 본문상 '시몬에게'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덧붙인다(31절
이후에는 원문상 예수라는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고 35절
의 '예수를 십자가에'도 왼문에는 '그를 십자가에'라고 되어 있어
이 경우 역시 '시몬을 십자가에'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바실리데스의 견해는 이 장면을 철저히 오해한 것이며, 이일
로 인해 그는 이단자로 정죄되었다. 사실 법적용에 있어서 철저했
던 로마 당국자들과 또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 심히 원했던 유
대지도자들이 이러한 실수를 용인할리 만무하다. 그와 더불어 요
19:17에 의하면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나가
셨다'고 분명히 기술하고 있다.

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ㅇ골고다 즉 해골의 곳 - '골고다'라는말은 아람어 또는 히브리
어의 '길갈타' 또는 '굴골토'를 헬라어로 음역(音譯)한 것으로
'해골'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런 이름을 갖게 된 이유가 그
곳이 많은 시체가 버려짐으로 자연히 해골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
라고 하는 학자들(Jerome, Hieronymus)도 있고, 그곳이 해골
모양의 언덕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후자의 견해가 더 많은 지지를 받는다. 한편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곳을 지칭하는 용어로 흔히 사용되는 '갈보리'
(Calvary)는 고든(Gordon)이라는 한 장군에 의해 명명되었
으나 아람어와는 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보리'라는
말은 원뜻과 조화되는데 그 이유는 '갈보리'가 '해골'을 의미하
는 라틴어 '칼바'(Calva)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골고다'의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하지는 않다. 아무튼 가장 가
능성 있게 생각되는것은 그곳이 '성에서 가까운'(요 19:20),'길
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29절), '성에서 지방으로 내려가는 주요
도로변'(32절)에 위치한 오늘날의 '성묘 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가까운 곳으로 추정된다. 이곳 외
에도 모든 장군이 주장하는 '고든 갈보리'(Gor-don's
Calvary)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34 쓸개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 하시더라

ㅇ쓸개 탄포도주 - 이는 시편 69:21을반영하고 있으며 48절에서
비슷한 구절이 다시 반복된다. 한편 마가복음에는 '물약을 탄
포도주'로 되어 있는데 이같은 차이는 아람어의'물약'(morah)
이라는 말이 히브리어의 '담'(marrah)과 유사할 뿐 아니라 그
쓴맛이나 독성에 있어서도 유사하기 때문에 생겨산 것으로 보인
다. 물론 이 사건에서 마태복음이 중언하는 '슬개 탄 포도주'란
말이 국약 시편에 더 가깝다. 여하튼 본문의 '쓸개'(콜레)란 진
짜 '쓸개'나 '담즙'을 뜻하기 보다 쓴 맛이나는 것이라는 사실
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말로 보는 것이 보편적이다(carson,
Lenski). 그리고 '포도주'는 매우 센 독주(毒酒)로서 취기가
속히 들고 마위 성분이 강한 술을 가리킬 것이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이 쓰디쓴 포도주를 사형당하는 죄수에게 제공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1)십자가 형을 당하는
죄수들에게 순간적으로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하거나, 그 고통
을 참아낼 힘을 주려했기 때문인 동시에 (2) 술로인해 거의 마
취되다시피 한 죄수들은 사형 집행관들이 손쉽게 다룰 수 있었
기 때문에 제공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독한 포도주를 최
후의 순간에 이른자에게 제공된 것은 잠 31:6, 7의 교횬에 근거
한 관습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와 더불어 이때 예수께
드려지는 포도주는 예루살렘의 어느 부유한 여인의 자발적인 헌
납에 의해 자비의 선물로 전해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Li-
ghtfoot).
ㅇ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 예수께서는 자비의 선물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일단 맛을 보시는 정도로 그치셨다. 예수
께서는 적어도 그 포도주에 마취 성분이 있음을 익히 알고 계셨
던 것 같다. 여기서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우크 에델랜)는
말은 계속적인 거부 의사를 내포한 말로서, 예수는 그 당시 몇
번에 걸쳐 마실 것을 강요당했으나 끝까지 마시지 않을 것을 고
사(固辭)하셨음을 보여준다. 실로 예수께서는 마취제의 도움으
로 고통을 덜어보려 하기보다는 모든 감각을 지닌채 맑은 정신
으로 끝까지 다가오는 뼈저린 고통에 맞서고자 하셨던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것이 순전히 당신의 자발적
인 의지에 따른 것으로서 그 십자가가 제공하는 아주 세미한 고
통조차도 친히 감수하시며 인성(人性)으로서 당하셔야 할 모든
고통을 끝까지 체험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진정 예수께서는 하
나님께서 제공하신 당신의 '잔'을(20:22;요18:11)한 방울도 남김
없이 마시고자 하셨다. 한편으로는 이같은 행동을 통하여 예수께
서는 이미 말씀하신 바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
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26:29)는 당신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성취하고 계신 것이다.

35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ㅇ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후에 - 십자가 형은 로마인들의 독특한
형벌로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에게는 적용되지 않고, 단지 이
방 점령 지역의 극악한 범죄자들에게만 적용되었던 형벌이다(Jos
Judoll,1). 한편 로마법에 의한 십자가 처형은 (1) 먼저 공식적 선
고를 받은자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향한다. (2) 형장으
로 행하는 길에 자기 죄목이 적힌 명패를 가슴에 달아 지나가는 통
행인들에게 인격적 모독을 받게 한다. (3) 형장에 도착한 죄수의
옷을 벗긴다. (4) 독한 술로 육체와 정신을 혼미케 한 후 십자가에
못을 박거나 묶어 그것을 반듯이 세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미
세워둔 십자가위에 죄수를 끌어올려 못박는 경우도 있음). (5) 그
런 상태로 계속 버려두어 죄수로 하여금 서서히 죽어가게 한다(이
때 건강한 남성의 경우 3일 정도 경과해야 숨이 끊긴다). 이때 각
종 야수(野獸)나 새들이 죄수의 몸을뜯어 먹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6) 어느정도 시간이 경과한 후 그 죄수의 다리를 꺾고 치명
적인 외상(外傷)을 가함으로써 어떠한 소생 가능성도 없애 버린다
(물론 이때 외관상 죽은것이 확인되면 다리는 꺾지않고 창으로 몸
을 찔러 확인 사살만 한다). 여하튼 로마법에 의해 십자가형에 선
언된 사형수는 십자가에 수직으로 머달리도록 그 손목과 발이 묶이
거나 못박히는데, 예수의 경우는 못박혀 달리신 예이다. 그런데 로
마법에 따르자면 죄수들은 벌거벗긴 채로 십자가에 못박히는데, 예
수의 경우 그들이 유대인들의 규정(M. Sanhedrin 6:3)에 따라
허리 아랫 부분을 가리는 옷을 예수에게 걸쳐주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한편 십자가의 형태는 X자형(Crux decussata) 또는
T자형(Crux commi-ssa), + 자형(Crux immissa)과 같이 여러
가지였으나 전통적인 형태는 +자형이었다.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
가는 그 머리 부분에 명패가 부착된 것으로 보아 십자형임이 분
명하다(37절). 죄인이 십자가에 달리는 높이는 몇 십 센티에서 단
몇 센티까지 다앙하였는데 예수께서는 지면에서 그리 높지않게 달
리셨던 것 같다(48절:요 19:29). 여하튼 예수께서는 그 땅을 더럽
히지 않기 위해(신 21:22,23) '나무 위에 달린 저주받은 자'(갈3:
13)로서 최후의 순간을 맞으시게 된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은 이 엄청난 참혹의 헌장을 단순히 한 분사구문('예수를 십자가
에 못박은 후에')으로 취급하고 오히려 뒤이어지는 군병들의 제비
뽑기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처럼 기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 이
것은 그 십자가 형벌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적어도 그 당시 사
람이면 익숙히 알고 있었던 것이거나 아니면 기자(記者)가 더이
상 떨리는 붓끝으로 예수의 참혹한 절규를 추적될 수 없었기 때문
이었을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을 뿐이다.
ㅇ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 십자가에 달린 죄수의 옷은 사형
집행자가 갖는 것이 통례였다. 이때 4명의 로마 군병들은 아마 예
수의 겉옷과 속옷 그리고 허리띠와 신발을 나눠갖기 위해 제비뽑
았을 것이며, 이것은 요 19:23, 24 에 기록되 있는 바처럼 시 22
:18의 말씀을 성취한 것이었다. 그리고 마가는 이때를 제 3시, 곧
오전 9시로 기록함으로써 (막 15:25)예수의 처형이 분명한 역사적
사건임을 분명히 시사하고 있다.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ㅇ거기 앉아 지키더라 - 마가복음 평행구인 막 15:25의 '때가 제
삼 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박으니라'를 생략하고 마태는 그 자리
에 이 문구를 기록하고 있다. 저들이 지키는 까닭은 못 박힌 자
의 고통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누가 구해내지 못하게 지키기 위
함이다. 죄수가 완전히 숨이 끊어지기까지 지키는 것은 그들의
고유 업무였던 것이다. 하여튼 예수는 분명 십자가 위에서 마지
막 호흡을 멈추신 것이 확실하다.

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 이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ㅇ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 - 처형되는 죄수의 죄목을
밝히는 내용의 패(주로나무 위에 석고를 바르고 그 위에 붉은
글씨내지는 검은 글씨를 새겨 넣음)를 목에 걸거나 가슴에 매달
고 형장에까지 가서 십자가를 세우고 그 죄패를 머리 위에 매다
는 것이 로마 처형법상 한 관례였다. 한편 예수의 죄패는 빌라
도가 쓴 것으로(요 19:19,23) 각 복음서간에 약간의 차이를 이룬
다(막 15:26; 눈 23:38; 요 19:19 조). 그중 요한복음의 '나사
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이 가장 완전한 형태인 것으로
추정된다. 여하튼 빌라도는 이 죄명(罪名)을 통하여 자신의 반
(反)유대적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그는 로마의 지배 아
래있는 유대인들의 처지와 그들 서로간의 반목(反目)상태를 조롱
했던 것이다. 한편 이 죄패는 각 지방에서 오는 순례자를 위해
히브리어(아람어), 헬라어(당시의 보편적 언어), 라틴어(로마의
공용어)로 각각 기록되었다(요 19:20). 그런데 이 세가지 언어의
패에 대해 흑자(Westcott)는 그리스도를 위한 종교(히브리어)
문화(헬라어), 사회(라틴어)적 예비 활동의 총체적 표현으로 간
주하기도 한다. 또 다른 학자는(Robertson)유대인을 위한 선
언(히브리어), 법적 선언(라틴어), 만인을 위한 공표(헬라어)등
으로 세 언어를 이해하고 있다. 어찌되었든 저들은 예수를 단죄
하고 나아가 유대 민족을 조롱하려고 그런 죄패를 붙여 놓았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전리를 고백하는 것이 되었다. 실로 복음서
초두에 동방 박사들은 예수를 '유대인의왕'으로 예배했었고(2:2)
그에게 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었다. 이제 그분의 생애
의 마지막에 로마의 군인들은 그의 옷을 빼앗고, 옷을 벗기은채
고독하게 죽어가는 그의 십자가 아래 달아있으면서 처음에 붙여
진 그 칭호를 마지막으로 달아 주고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묘하
게도 예수께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는 사람들은 하
나같이 이방인들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언약 백성, 선택받은
백성인유대 민족들은 오히려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께 '유대인의
왕'이란 칭호를 부여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하라고 요구한다(요 19:21).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ㅇ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 십자가형도 항상 다른
사람에게 경고를 주기 위해 공개적으로 시행되었기 때문에 사람
들은 예수의 십자가형을 분명히 목격할 수 있었을 것이며, 따라
서 그들은 역설적으로나마 '십자 가의 증인'이 될 수 있었다.
한편 본문의 장면은 시편 22:7에 언급된 '사람마다 나를 보고
비쪽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빈정댑니다'(공동 번역)의 반영이다.
여기서 '지나가는 자들'은 예수의 사형언도 내용을 잘알고 있는
예루살렘 성내(城內)의 주민들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머
리를 흔드는' 것은 상대방을 심히 멸시하고 조롱하는 유대인들
의 상징적 행동이었다(시 109:25; 애 22:15). 여하튼 유대인들
은 다시 산헤드린 재판에서 보여 준 것과 같은(26:67,68) 사악
한 장면을 보여 준다. 비록 그들이 예수의 적대자들이라 할지라
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통을 당하는 그 순간에 조롱
과 멸시를 퍼붓는 잔인함을 보여 주고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
은 예수를 모욕하여(에불라스페문), 즉 예수의 '신성을 모독하
여'(blasphemabant. Vulgate)돌이킬 수 없는 참람한 불
경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9:3;12:31;26:65).

40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ㅇ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성전을 헐고 사흘에 다시 그것을 지으려 했던 자여'가 된다.
따라서 그 당시 비난하는 무리들은 적어도 산헤드린에 동조했
던 자들이었음이 분명하다. 한편 예수의 말씀은 성전을 문자
그대로 헐고 다시 3일만에 복원시키겠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적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요2:19-22).
ㅇ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 이는 이미 가야바의 질문
(26:63) 중에 물어진 것인 동시에 시험자 사단의 질문이기도
(4:3, 6)했다. 이처럼 지나가는 행인을 통하여 사단은 여전히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고통을 회피(回
避)하도록 유혹하였던 것이다(Lohmeyer;16:21-23). 실로 육
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가장 연약한 상태에 있는 자에게
쉽게 접근하여 기회만 주어지면 미혹하려드는 것이 사단의 속
성이다(벧전 5:8).
ㅇ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 그릇된 메시야관에
짙게 물들어 있던 유대인들의 어리석은 요구였다. 즉 그들은
적어도 메시야라면 각종 이적과 영웅적 활동을 전개할 뿐 아
니라 심지어 자기 자신의 어려움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었다. 그러나 예수는 능히 그럴 수 있는 분이심에도 불구
하고 (26:53) 하나님 아버지께서 마련해두신 자기 희생을 통한
만인 국원에의 길을 지금 가고자 하신 것이다(16:23).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ㅇ처음에는 로마 군인들이(37절), 그 다음에는 군중들이(39, 40절),
그리고 이제는 산헤드린의 중추적 인물들, 곧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리
고 장로들이 예수를 조롱하고 나선다. 이로 보건대 산헤드린은 이제
완전한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
다'라는 그들의 요구는 40절에 나온 행인들의 사단적 요구와 일치되고
있다. 실로 그들은 믿기 위해 이적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사단의 대변
자로서 예수의 신적 권위에 대한 완전한 의혹과 또 그런 자를 처형시
킨 승리감에 도취되어 또한 예수를 조롱하기 위해 이같은자신에 찬 요
구를 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는 저들의 비난은 결코 조롱받을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남
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버려야 하는 것은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ㅇ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 이방인에 의해 예수가 '유대인의 왕'
으로 불려진데 대한 유대인들의 대구적(對句的) 비난이다. 특히 '이스
라엘'이라는 말은 그 속에 언약적인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그
런 점에서 그들의 비난은 자신들의 죄를 더욱 가중시키는 격이되었다.
ㅇ우리가 믿겠노라 - 물론 거짓과 악의에 찬 약속이다.

42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찌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찌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ㅇ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 조절에 인용했던 시편 22:7에 이어 본절
에서는 그 다음절인 시편 22:8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를 그 깊은 뜻을 완전히 파악치
못한 채로 인용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기뻐하시면'(델로)이란 말은
70역(LXX)에 따른 번역으로서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 세세한 데까지
돌보고 계심을 나타내고 있다. 여하튼 그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
켜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할 때 그것이 그가 메시야로써 동시에
그 이상의 신분을 가진 자임을 주장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그
들은 만일 예수께서 메시야라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의 모든 일을
성사시켜주실 것인데 그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예수가 단지 자신을
시야로 가장하고 있다는 결론을 이끌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그들
은 사악하게도 구속 사역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마음대로
비웃고 있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예수를 버리셨다고 단정했던 유대
지도자들의 생각이 옳았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
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혹심한 시련, 곧 하나님의 버리심과 마
음이 젖어지는 고통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서 다시 부활케 하심으로써 예수가 메시야되
심을 분명히 증거하셨다. 실로 그들은 하나님이 부재한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곳에 하나님이 헌존(現存)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것
이다.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ㅇ함께...못박힌 강도들도...욕하더라 - 주위를 둘러싼 모든 군중들
이 적어도 한 마디씩은 예수를 비난한 것을 보고 있던 강도들은 상대
적인 우월감에 그들마저도 예수를 희롱하게 되었을것이다
(Robertson). 이러한 가능성은 '욕하더라'(오네이디존)는 말이 미완
료 시상으로서 뒤늦게나마 이제 막 그일을 작했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누가 왜 보고에 의하면 이렇게 비난했던 두 강도중
하나가('데스마이', 38절) 잠시후 예수의 형언할 수 없을 만큼의 거
룩하심과 또한 끝까지 인내하심에 강한 감동(感動)을 받아 멸망의 벼
랑 끝에서 구원받게 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눅 23:39-43).

45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ㅇ제 육 시로부터...제 구 시까지 - 본문의 '제 6시', '제 9시'는
유대인의 시간 단위로 오늘날의 시간과 6시간 정도 차이가 난다. 그
러므로 '제 6시'는 오늘날의 정오(낮 12시)를, '제 9시'는 오늘날의
오후 3시를 가리킨다. 실로 예수께서는 오전 9시경부터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막 15:25) 오후 3기경까지 근 6시간여동안 찢어지는 듯한
육쳬적 고통과 더불어 어둠보다 더 짙은 영적, 정신적 고뇌(46절)를
맛보시며 시시각각 다가오는 당신의 죽음을 온몸으로 확인하고 계셨
다.
ㅇ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 제 6시에서 제 9시까지 약 3시간 동안
의 '어두움'은 마치 애굽에서 첫 슈월절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재앙
시에 나타났던 3일 동안의 어두움을 상기시킨다(출 10:21-23). 따라
서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한 것은 심판 또는 비극을 알리는 표적이었
음이 분명하다(암 8:9, 10). 한편 이때의 어두움이 '온 땅에' 임했
다고 하는데 그 '온 땅'이란 의미가 어디까지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에 대해 혹자는(D.A.Carson) '온 땅에'를
뜻하는 헬라어'에피 파산 텐 겐'이 온 지구(the earth)전체를
뜻하기보다, 국한된 지역으로서의 모든 '땅'(the land)을 의미
한다고 보아 '유대 지경 전체'라는 제한적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이같은 견해는 매우 타당한 것인데, 그 이유는 당시 유대 땅에 임한
어두움은 예수의 죽음과 유대 민족에게만 관계된 표적이었기 때문이
다. 특히 본문과 연관을 지닌 출 10:22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
던 하나님의 심판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는데, '캄캄한 흑암이
삼 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었다', 결국 이기록은 본문의 '온땅'을
제한적인 의미로 이해하는데 간접적으로 동조하고 있다. 이때의 어
두움에 대하여 사막의 열풍에 의한 천기 조건의 이상으로 발생한 우
연 발생적이고도 일시적인 현상이거나 아니면 단지 '일식' 현상이라
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학설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이날은 음력 보름이 다 된 시간이었으므로 천문학적 상식로 월식이
될 가능성은 있으나 일식(日蝕)은 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자연법칙상의 현상이라기 보다는 찬송가의 시구처럼 영혼의
신령한 태양되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물질 세계의 태양
이 밝은 빛을 잃어서(눅 23:44)캄캄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
하튼 이 장면에서 다음과 같은 상징적 의미들도 도출해낼 수 있다.
(1)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준엄함(26:24; 사5:30). (2) 인류의 무거운 죄짐을 대신 지신 예수
의 십자가 수난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지를 보임. (3) 전
우주적 통치자의 고뇌에 찬 죽음에 대한 자연계의 순응(롬 8:22) 등
의 뜻으로 볼 수 있다.

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ㅇ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 마치 기름이 동난 등블이 마지막 자기
심지를 태우며 희뿌연 연기와 불꽃을 일으키둣, 예수께서는 더이상
항거할 수 없는 죽음에의 기운과 영적인 고독 앞에서 마지막 기운을
돋우어 성부 하나님께 절규(絶叫)하고 있는 것이다.
ㅇ엘리 엘리라마 사박다니히브리어와 아람어 음역에 따른 시 22:1의
인용으로서 십자가상의 가상 칠언(架上七言)중에 네번째 말씀에 해
당하며(요 19:28-30강해 '가상 칠언' 참조), 마태와 마가만이 기록
하고있다. 그런데 마태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인 히브리어 '엘
리'를 그대로 음역하여 '앨리' 엘레이로 기록하고 있는데 비해, 마
가는 이것을 '나의 하나님'(엘로히)라는 아람어 음역에 근거하여
'엘로이'로 표기하고 있다(막 15:34). 그 다음에 이어지는 '라마 사
박다니'는 분명 순수 아람어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외경 베드로
복음서(Gospel of Peter)에는 '엘리'를 '나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능력'(my power) 으로(헤 뒤스나미무; 이는 히브리어 '헬리'
의 뜻임) 번역하여('나의 능력이며 나의 능력이여 당신은 나를 버리
셨나이까') 마치 가현설(Docetism)에 입각한 듯한 하소연으로
표기하고 있다. 즉 베드로 복음서에 따르면 인간 예수만이 고통 당
하고 죽은 것이 된다. 물론 이것은 예수께서 극심한 고통 가운데 말
씀하셨기 때문에 '엘'라는 말이 쉽게 사람들에게 '엘리야'를 부르는
듯이 잘못 들려질 수 있는 것 같이, '엘리'가 '헬리'로 잘못 들려졌
기 때문에 생겨난 오해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쨌든 예수
께서는 다윗이 예언적으로 노래한 시 22:1의 말씀이 당신의 찢어지
는 듯한 영적 절망감을 예언적로 표현해 놓은 것으로 인정하시고 이
구절을 인용하신 것이다. 실로 예수의 이러한 부르짖음은 가장 필요
한 시간에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데 대한 절대 고독감과
심각한 위기적 심경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그가 당할 십자가의 고통
이 얼마나 처절(悽絶)하고 무거운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
다. 이러한 절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1) 예수께서는 죄
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의 죄를 짊어지셨다는 점(고후:5),
(2)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셨다는 점이(빌 2:6-8), (3) 죄를 향한 하나님의 중오와 보응
이 얼마나 엄격하고도 무서운 것인가라는 점, (4) 성부로서의 하나
님은 그를 버리지 않았지만(눅23:46)죄악을 징벌하시는 심판주로서
의 하나님은 예수가 죄인의 자리에서 영, 육의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인류를 구원 해야하는 이상 그를, 철저히 포기하고 그에게 무간섭하
셔야 했다는 점, (5) 하나님께 버림받은 최악의 상황을 맞아 대속적
죽임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인간 구원을 소망하신 예수의 지극한 사
랑(요 3:16)등이다.
ㅇ나의 하나님(데무) -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본문에만 나타나는
표현으로서, 비록 '하나님'이 예수 자신에게서 떠나가셨다 하더라도
예수께서는 자신의 유일한 소망이 하나님께 있음을 잊지 않으시고
그분을 '나의' 하나님으로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하
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인성(仁性)으로 인류의 죄를 모
두 담당하시는 대속의 제물이 되셨으며 그 인성은 신성(神性)의 절
대적 후원을 받고 있기 때문에 예수는 '나의 아버지'가 아닌 '나의
하나님'이라 호소하신 것이라고 볼 수있다(Lenski).
ㅇ어찌하여(히나티) - 직역하면 '어떤 목적을 두시고'과 된다. 즉
예수께서는 지금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신 목적에 대해서 묻고 계
신 것이다. 이는 분명 신성으로서의 예수가 지적(知的)결함을 의미
하기보다 오히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와의 직임상의 차이를 보
여 주는 동시에 성부께 대한 성자의 절대 겸손과 완전한 순종의 진
리를 암시해 주고 있다(24:36).
ㅇ나를 버리셨나이까 - 이는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를 그의 원
수들의 손에 버려두셨다는 뜻을 내포하는(Hend-riksen)동시에
하나님께서 인류 죄악을 위해 마련해 두신 '잔'(진노와 심판을 그에
게 마시우게 하셨다는 뜻을 담고 있다. 실로 예수의 이같은 절규에
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충만한 댓가
를 자신의 온몸으로 친히 치르고 계신 예수의 뜨거운 사랑이 내포되
어 있다. 한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이 말씀이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최후의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 복음과 요한복
음에 의하면 그 밖에도 여섯 마디의 말씀을 더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복음서를 통한 가상 칠언을 정리하면 (1) '저희를 사하여
주소서'(눅 23:34) (2) '나와 함께 낙원 있으리라'(눅 23:43) (3)
'저가 아들이니이다'(요 19:26) (4) 본문 (5) 본문 '내가 목마르다'
(6) '다 이루었다'(요 19:28) (7)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
나이다'(눅 23:46) 등이다.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이들이 듣고 가로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ㅇ거기 섰던 자 중 어떤이들 - 이를 로마 군인들 중 몇몇으로 이해하
는 학자들도 있으나(Zigabenus, Euthym), 적어도 구약 선지자
엘리야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었다는 점에서 그들이 유대인들이었음
이 분명하다(Theophy-lact). 그리고 좀더 깊이 생각하면 '엘
리'의 정차한 발음을 듣지 못했다는 점에서 헬라와 유대인일 가능성
도 높다.
ㅇ엘리야를 부른다 - 엘리야는 녹지 않고 살아서 승진한 의인으로서
(왕하 2:9-12) 유대인들의 전통적 종말관에 따르면 그가 고통당하는
자들을 구하러 다시 올 것으로 기대 되었다. 그리하여 저들은 예수께
서 '엘리엘리...'하는 절박한 절규를 듣고 엘리야에게 구원을 요청하
는 것으로 오해했다. 즉 그를은 '엘리'라는 말을 '엘리야'를 뜻하는
히브리어 '옐리야후'로 잘못 듣고 있었던 것이다(특히 70인역은 이를
엘루우'로 기록함). 40절에서 예수에게 조롱하여 말하기를 '진정 하
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했었다. 이렇게 말하는
저들의 심정은 신성 모독죄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기도 했지만 한편
으로는 저들의 마음속에 비록 그 대상이 눈앞의 예수가 아니라 하더
라도 분명 애타게 고대해왔던 메시야 대망(待望)이 담겨져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저들의 메시야 대망은 예수의 말씀 '엘리 엘리...'
를 듣는 순간 곧 오해를 하여 엘리야가 와서 도와 주나 보자고 하게
하였다. 아마 그들은 엘리아가 와서 예수를 도와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여 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있
는 예수 자신보다는 십자가 아래서 예수를 조롱하고 있는 자기들을 위
해서였을 것이다.

48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ㅇ한 사람이....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 아마 이 일이 발생한 동
기는 예수께서 '목마르다'(요 19:28)는 맡씀을 하셨기 때문이었을 것
이다. 그런데 본문의 이같은 행동은 예수에 대한 동정심에 근거한 것
이기 보다 예수의 생명을 조금 더 연장(延長)시켜 과연 엘리야가 그
를 구해주는지를 보려고 한 악한 의도(47, 49절)에서 나온 것으로 보
인다. 아무튼 '해융'에 '신 포도주'를 머금어 그것을 갈대에 째어 예
수께 마시우게 한 행동은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라는 구약 예언(시69:21)을 다시 한번(34절)더 성
취시킨 사건이었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한편 여기서 '해융'이란 일종
의 스폰지(sponge)같이 다량의 엑체를 빨아들이는 도구로서 바다생
물의 뼈대 갈은 것에서 추출한다. 그리고 '신포도초'(와소스)란 원래
'식초'란 뜻으로서 정확히는 '포스카'(posca), 즉 신포도주와 계란
물을 섞어 만든 로마 군인들의 음료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때 예수
께 최후의 음료를 제공한 것은 로마 군병 중 한 사람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49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ㅇ그 남은 사람들이...가만 두어라 - 여기 '가만 두어라'는 말은 '지
금 혼자 내버려 두라', '조용히 물러서라' 등의 말일 것이다. 이는
예수를 향한 더욱더 조롱적인 어투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마태에 의
하면 이 말을 한자는 예수에게 방금 신 포도주를 준 로마 군병이 아니
라 그 주변 인물들임에 비해 마가복음에서는 신 포도주를 마시우게 한
후 자신의 행동을 금하는 군중들에게 선 포도주를 예수께 먹인 바로
그 사람이 계속해서 말을 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막 15:36). 이에
비해 요한은 그것이 누구에 의해 발설되었는지, 그리고 조롱인지 아닌
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오직 성경 말씀이 성취된 것에만
관심을 두고있다 (요 19:28,29). 따라서 어느 것이 정확한 보고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어찌되었든 예수의 절규하는 소리에 자극을 받은 군
중들은 떠들고 그 와중에 로마 군병들은 심정적으로 합세(숨박히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ㅇ엘리야가 와서...구원하나 보자 - 적어도 유대인들은 예수가 지금
도저히 희생불가능한 죽음의 문턱에 이르른 것이라고 자신해 해며 이
같은 조롱을 거듭하고있다. 한편 어떤 사본에서(시내, 바티칸 등)본절
과 다음절 사이에 요 19:34 에 기록되어 있는 바 옆구리를 창으로 찔
렀다는 이야기를 추가시키고 있다. 대신 요한복음과는 반대로 '물과
피'의 순서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물과 피를 통하여 상징
되는 성례전과의 절차상의 일치를 위함인듯하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Robertson) 이 이야기가 후대의 필사가에 의해 기계적이고도 무모하
게 베껴썼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위의 몇몇
사본은 역사적 측면에서 뿐 아니라 신학적 측면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삽입구라 본다.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ㅇ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 예수께서는 신 포도주로 목을
축이신 후 아마 '가상 칠언' 중 마지막에 해당하는 제 6,7번째 말씀
(눅 23:46;요19:30)을 외치신 것 같다. 특히 예수께서 최후의 순간에
'크게' 외칠 수있었다는 사실은 아직 당신에게는 생명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눙동적이고 자발적(自發的)으로 당신의 생명
을 내어준 결과에 의해서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예수의 생명은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지만 스스로 포기할 수는 있었던 것이다
(요 10:17, 18). 영혼이 떠나시다(페켄 토 프뉴마). 복음서는 예수님
의 죽음의 의의를 설명하지 않고 오직 그의 죽음의 사실만을 간단하게
언급한다. 한편 예수의 죽음을 묘사할 때 '생명, 목숨'을 뜻하는 '프
쉬케'의 떠남으로 표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영'을 뚱하는 '프뉴마'의 떠남으로 표기한것은 물론 당신의 죽음이
우리 인간과 똑같은 영, 육의 분리를 뜻하는 것인 동시에 자신의 생
명을 자발적으로 내어주셨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특히
'영혼이 떠나가시다'(he gave up his spirit)란 담담한 표현은
정해진 바로 그 시간에 예수께서 친히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다는 강
한암시가 내포되어 있었다. 진실로 예수께서 성부로부터 버리심을 당
하여 깊은 심연(深淵,gulf)으로 떨어지고 자기 백성들에게 잔인한 조
롱을 받고 숨지시던 바로 그 순간이 그가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
물'(ransom for many)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때이다(20:28).
한편 본문의 이 사실을 어거스틴(augustine)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
고 있다. '예수 그분은 당신이 원하셨기 때문에, 원하시던 때에, 원
하시는 대로 떠나가셨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ㅇ성소 휘장이...찢어진 둘이 되고 - 성소에는 지성소(the most
Holy Place)와 성소(the Holy Place)를 나누는 휘장과, 성
소와 안뜰(the court)을 나누는 휘장이 각각 있었다. 여기서
찢어진 휘장이 단지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
도 있으나 둘 모두를 지시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
렇다면 바깥 휘장이 쪼어져 나간 것은 어쩌면 성전의 임박한 멸망을
암시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우리에
게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바로 안쪽 휘장이 찢어진 사실이다. 이
안쪽 휘장은 대제사장이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1년에
단 1회만 열렸다(히 9:7). 혹자에 따르면 이 휘장은 높이 55규빗(1규
빗=약 45.6cm), 너비 16규빗 크기의 문에 드리워졌었는데,그것은 바
벨론 제(製)로서 고급 린넨(linen)의 직물에 갖가지 색을 입혔으
며, 또한 그 위에 아름답게 여러 모양의 수를 놓았다고 한다.
(Josephus, Wars V 5.4). 실로 이같은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
까지' 찢어진 것은(지진이 일어나기 전의 일임)분명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담겨있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즉 하나님의 임재 처소를 의미하
는 지성소를 드리우고 있던 휘장은 분명 하나님과 인간의 죄로 인한
단절과 불완전한 교제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휘장이 찢어
짐은 (1) 대속 제물이신 예수의 찢겨진 육체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가
는 새롭 산 길이 열렸음을 상징한다(히 10:19, 20). 이로써 그 어떤
죄인이라 할지라도 예수의 이 대속(代贖)의 죽음을 의지하고 담대히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2) 혈통적 선민의 울타리가
무너지고 옛 언약의 신비가 벗겨지는 동시에 구속의 온전반 성취를
이루게 되었음을 상징한다(5;17-20;히 6:19;9:6). 이와 함께 (3) 유
대교와 유대교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성진의
멸망을 상징한다. 물론 이 멸망은 A.D. 70년의 예루살렘 패망을 의
미한다기 보다 차라리 '믿음이 온 후'에는 '믿음이 오기 전'의 모든
것이 멸망케 된다는 신학적 의미에서의 멸망이다.
ㅇ땅이 진동하여 비위가 터지고 - 이것은 마태복음만의 독특한 기록
이다. 성전 휘장이 젖어짐과 동시에 땅이 무너진다. 그리고 땅이 흔
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 진정 백부장의 탄성(54절)과 함깨 이 모
든 사건은 예수의 죽음직후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다(D.Wenham,
'Resurrection' pp. 42-46). 아마도 마태는 지진 그 자체를 성전
휘장이 쪼어지고 무덤이 열리는 사건과 같이 하나님의 심판과 신의
영광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왕상 19:11;사 29:6; 렘 10
:10;겔:18). 좀더 발전적으로, 이 지진과 바위의 갈라짐은 당신의 독
생자의 죽으심으로 인한 심판주로서의 하나님의 임재(시18:7;사5:25;
욜 2:10)를 뜻한다. 즉 이것은 예수의 죽음을 믿음으로 수용하는 자
에게는 새언약과 새 창조의 하나님으로서의 임재를, 끝까지 불선하는
자에계는 진노와 영원한 심판의 주로서의 하나님의 임재를 암시한다.
한편 성전이 서있는 지반은 지질학상으로 결함이 있는 곳이다. 오늘
날 그곳에 모슬렘 사원이서 있는데 지금까지 여러 번 지진에 의해 손
상을입어왔다고 한다(D.Baly, The Geography of the Bible.
p 25;Cyril. Cateches. Cateches. 13권 33).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ㅇ무덤들이 열리며 - 이 구절 역시 마태복음만의 기록이다. 앞부분
에서의 지진의 결과로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커다란 돌문이 열리게
되었다. 이는 팔레스틴의 무덤들이 대개 천연 동굴이나 아니면 바위
를 쪼개어 만든 인조동굴에 시체를 안치(安置)하고 그 출구에 큰돌
을 굴려놓아 봉함으로써 의식적 부정을 방지하고 야수에게 시체가
도난당하지 않게 한 사실에 비춰 생각할 수 있다.
ㅇ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 마태복음에만 기륵되어 있는
본문은 수많은 의혹을 지니고 있지만, 실제적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
을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부인할 수는없다. 실로 이 사건은 메시야
가 오실 때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9:25;22:23)이
현실화한 것인 동시에 예수 재림 때에 있을 모든 성도의 부활을 예
증해주는 것이다. 물론 본문의 이 사건은 53절 증언하는 바 예수의
부활 이후에 일어난 것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함께 강조하고자
했던 마태의 저작 의도에 따라 이곳에 옮겨져 기록된것 같다. 한편
성경에서는 본 사건 이전에도 몇번의 기사가 소개 되었는데(왕상 17
장: 왕하 4:32-35; 마9장 눅 7장;요 11장) 이 모두는 한결같이 자연
적인 몸으로서의 부활이었다. 본 부활 사건을 두고 학자들 중에는
썩지도 아니하고 다시 죽지도 아니한 영체(spiritual body)를
입고 부활한 사건(고전 15:53)으로 보기도 하며, 앞서의 부활 사건
과 같이 단지 육체적으로 죽었던 자들이 소생한 사건으로 보기도 한
다. 여기서는 그들의 죽음에 대한 기사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
에서 그리고 그들의 부활이 다시 땅위에 살게 하려는 것이기 보다는
예수의 부활과 그 능력을 중명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영
화(榮華)의 몸'으로 부활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어쨌든 죽었
던 자의 몸이 무덤에서 일어나 예수 부활 후 무덤에서나 온 것은 (1)
사망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와 그 승리가 성도들에게 가져다
주는 생명력 넘치는 영향력을 상징한다(고전 15:55-57). (2) 예수께서
성도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을 생생히 중거한다(고전 15:23). (3)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음부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음을 상징한다(엡 4:8,9). 한편 본문의 '성
도들'(하기오이)은 교회의 한 전설에 따라 구약 시대의 위인들(심지어
욥도 여기에 포함되었다고 함)이라고 보기도 한다(벧후 3:4). 사실 우
리는 그에 대한 확실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분
명 구약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거나 중간기 시대에 영적인 영웅들로서
활약한 자들이거나 이스라엘 역사상의 순교자들이 아닌가 생각한다(사
4:3; 단 7:18; Tobit 8:15;1 Enoch 38:4, 5)그리고 무엇보다 이 '성
도들'을 상징적으로 이해하여 생존시 페시야를 대망하던 자들로서 예
수의 부활과 더불어 그 소망하는 바가 성취된 자들이라 보는 것이 좋
을 듯하다. 만일 부활한 성도가 이러한 사람들이라면 예수 이전에 살
던 사람들 역시 예수 이후의 사람들과 같이 예수의 승리와 그의 부활
로 말미암아 그들의 부활이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ㅇ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 여기서 '부활'(에게르
신)이란 말은 특수 동사로서 예수께서 무덤에서 일어난 '그들을 부활
시켰음'을 뜻할수도 있고 아니면 능동태로 취급하여 '예수 자신이 부
활 하신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부활'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
으로 볼 때(고전 15:23)'예수의 부활'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즉 개역
성경의 번역대로 예수께서 먼저 부활하신 후 그 부활의 영향력(影響
力)에 의거해 저희가 무덤에서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마태가 성도의
부활장면을 이곳에 배치한 것은 정확한 시간 순서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수의 부활이 가져다주는 생명력 넘치는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정상적인 시간 순서을 무시하고 이 사실을 이곳에 앞당겨 왔던 것이
다. 한편 부활한 성도들이 '거룩한 성' 곧 '예루살렘'(4:5)에 들어가
행하였던 모든 행적을 추적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은 자신들을 익히 알고 있는 자들을 찾아가 예수의 부활을
증거현상 증인이 되었다는 점이다(겔 37:12). 그리고 덧붙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인해 신약 교회가 폭발적으로 이
방 세계에 그 세력을 떨치기 전까지 여전히 성도(Holy City)예루살
렘은 복음의 중심지였다는 점이다(행 1:8).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ㅇ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 -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본
문의 신앙고백을 백부장 혼자하는데(막15:53)반해 본서에서는 백부장
외에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도 같이 그런 고백을 했다고 기록하
고 있다. 또 마가복옴에서는 백부장이 예수의 '운명하심'을 보고 그
런 고백을 하는데, 본서에서는 '지진과 그 되는 얼', 즉 흑암과 지진
과 예수의 부르짖음등의 일련의 사건들을 목격하고 고백한 것으로 기
록하고 있다. 어쨌든 백부장과 군병들은 예수의 처형이 평범한 사건
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기이한 사건들은 그 군병들
로 하여금 두려움에 휩싸이게 했고 아마 그들은 그러한 사건들이 자
신들이 가담한 그 범죄에 대한 하늘의 진노였다고 믿게 되었을 것이
다. 한편 본문의 '두려움'(에포베데산)은 단순한 공포심 이상의 것으
로 아마도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장면에서 혼히 발견되는 일종의 종
교적 두려움 같은 것임에 분명하다(사 6:5). 한 전설에 따르면 이러
한 경건한 두려움에 휩싸였던 본문의 '백부장'은 '론지누스'
(Longinus)이며 (외경 베드로 복음서에는 '페트로니우스' 예수의
죽으심을 친히 목격했던 그 십자가 아래서 참된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고 전한다.
ㅇ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 누구에 의하면 백부장을 위
시한 군병들이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아마 누가에 의한 고백은 예수를 죄인으로 고소한 유대인들의 판결이
정녕 잘못된 것으로서 예수는 무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
해 기술(記述)된것 같다. 어쨌든 그 당시 백부장과 군병들은 죽어가
신 예수에 대해 그분은 과연 '의인'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사
실을 동시에 고백한것이 분명하다. 실로 그들의 고백은 그들이 생각
했던 것 이상의 의미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즉 그것은 약속의 메시
야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께서 그의 '고난과 죽음'의 현장에서
가장 분명히 당신의 존재를 나타내 보여 주고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혹자는 '아들'(휘오스)이란 말 앞에 관사가 붙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단순한 영웅적 인물 정도로 고백된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Bruce).
그러나 이 호칭은 메시야 개념이 내포된 '하나님의 아들'이란 뜻임이
분명하다. 이같은 사실은 그들이 고백한'진실로'(알레도스)라는 강조
적 표현에서 더욱 확신할수 있다. 분명 이 부사는 유대인들이 조롱한
내용(3:5-13;15:21-28;27:39-44)과 정반대의 사실을 강조해 주고 있
는 것이다. 여하튼 이방인의 입술에서 이같은 고백이 나왔다는 것은
이방 선교의 신호탄인 동시에, 십자가의 효능이 즉시 발휘되고 있음
을 보여 준다.

55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 부터 좇아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ㅇ예수를 섬기며...좇아온 많은 여자 - 마태는 또 한 부류의 십자가
의 산 중인을 소개하고 있다. 그들은 당시 사회적 인습으로 블때 천
한 신분에 속했던 몇몇 여인들이었다. 그 여인들 중에는 예수의 무덤
을 맨 처음 찾아간 여인도 있었다. 특히 마태가 그 여인들의 이름과
행적을 이곳에 기록한 것은 십자가의 사건이 마무리 되고 있음을 보
여 주는 동시에 세상의 낮고 췬한 자들을 들어 지혜롭고 강한 자들
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을 것시다(고전 1:
27-31).한편, 이 여인들은 갈릴리에서 온 자들로서, 그들은 자기들의
소유로 제자들과 예수의 쓸 것을 돕고 또 천국복음을 듣기 위해 예수
를 따라다니곤 했다(눅 8:2, 3). 실로 예수께 대한 그들의 헌신적 노
력과 사랑은 죽음도 불사(不辭)하는 것이였다. 진정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법이다(요일 4:18). 예수가 체포되자 죽기까지 예
수를 쫓겠다던 제자들은 하나같이 달아났고(26:57), 특히 가장 열심
있는 자로 자처(自處)하던 베드로마저 예수를 부인(否認)하고 말았다
(26:69-75). 그런 와중에 갈릴리 전도 사역 때부터 예수의 쓸것을 돕
기 위해 예수를 따라 다니던(눅8:2, 3)여인들은 예수의 마지막 예루
살렘 여정(旅程)에 동참했으며. 또 온전한 사랑으로 모든 두려음을
극복하고 처절한 예수의 최후를 타는 가슴으로 지켜보게 된 것이다.
실로 그 여인들은 예수께 대한 숨은 봉사자 들이었으며 예수의 생
(生)과 사(死)의 조용한 증인들이었다.
ㅇ멀리서 바라보고 - 이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당시 십자가 현장
주변에 접근하기가 용이(容易)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56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ㅇ예수의 최후를 애타게 바라보고 있던 여인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실로 세상의 낮고 천한 자들을(유대 사회에서는 일
반적으로 여자들을 천한 신분으로 간주함) 들어 강한 자들을 부끄럽
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반영한 광경이라 볼 수 있다(고전 1:
29-31).

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ㅇ저물었을 때 - 이때는 금요일이 끝나고 안식일이 막 시작되려는
오후 6시경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신 21:22, 23에 명한 바 계명을
철저히 준수하는 유대인들의 관습에 의하면 예수의 시신(屍身)은
밤새도톡 십자가에 달린 채로 있어서는 안 되었다. 특히 바로 다
음날이 안식일과 큰 명절인 유월절이 겹치는 거룩한 날이었기 때문
에 더더욱 용납될 수 없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의 관습은 십자가에
달린 죄수의 모습을 만인들이다 볼 수 있도록 시신이 날짐승에게
뜯겨먹히거나 부패할 때까지 그대로 십자가에 달아 놓는 것이었다.
만일 그 시신을 장사지내고자 하면 로마의 지방 행정관의 용인(容
認)하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한편 장사지낼 수 있도록 청할 수
있는 자들은 대개 죽은자들의 친구들과 친척들이었으며 그나마 대
역(大逆)죄로 죽은 경우는 결코 허용되지 않았다.
ㅇ아리마대 부자 요셉...그도 예수의 제자리 - 여기서 '아리마대'
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알려진바 없으나 대개 '리다'(Lydda)
나 '라마다임'(Ramathaim;삼상 1:1)으로 간주한다. 한편 마가
(막 15:43)와 누가(눅 23:50,51)는 요셉을 산헤드린 공의회의 요
직(要職)을 맡은 자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누가는 그가 '의로은
사람'로서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산헤드린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
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단지 마태만이 그가 '부자'임을 의
식적(義識的)으로 밝힌다. 사마도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측면에 남
다른 주의를 기울였던 마태는 이 사실을 밝힘으로써 '그 무덤이 악
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라는 사 53
:9-12의 예언을 상기(想起)했을 것이다. 어쨌든 지방에 있으면서도
예루살렘 근처에 자기 무덤이 있었다는 것(유대인들은 메시야의 때
가 도래하기를 고대하며 사후에라도 그때에 대한 소망을 간직하기
위해 예루살렘 근방에 자기 가족묘를 마련해 두었다고 함)과 요한
의 보고를 종합해 보면 요셉은 재물이 넉넉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마태는 요셉을 예수의 제자, 곧 그의추종자라 한다(13:52;28:19). 비
록 요셉이 사회적 신분 때문에 은밀(隱密)하게 예수를 좇았다고는 하
나 그가 예수의 가르침에 깊은 감사를 받고 예수의 삶을 좇아간 것은
분명한 것 같다.

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주라
분부하거늘

ㅇ빌라도에게 가서 - 지금껏 자신의 신앙을 노출시키지 않았던(요
19:38) 요셉은 예수의 죽음을 의해 옛 예언들이 성취되는 것과 십자
가에 달린 그분이 바로 메시야라는 사실을 재차 확신하고는 두려움
의 그림자를 담대히 떨쳐버리고 예수와 가까운 자로 자처하며 그 시
선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본문의 '가서'(프로설돈)란 긴급히
달려왔음을 암시하는 말로서, 죄수의 시체 관리 책임자인총독에게
자신의 요구를 관철(貫澈)하기 위해 급히 총독 관저로 나아갔음을 시
사한다. 그런데 그는 산헤드린의 일원으로서 율법 준수에 철저했을
것이다. 따라서 큰 명절에 즈음하여 이방인과의 접촉을 의도적으로
피해야만 했고 또 시체와의 접촉을 멀리 해야만 할 입장이었다(요
18:28). 그럼에도 그는 의식적(儀式的)부정보다 예수의 장사에 더관
심을 가졌던 것이다. 진정 신앙의 바른 도리에 입각한 자는 다른 어
느 것보다 예수 사랑에 더 큰 비중을 둔다.
ㅇ예수의 시체를 달라 - 마가의 보고에 의하면 이때 요셉은 '당돌히'
(용감하게) 예수의 시체를 요구했다고 한다(막 15:43). 실로 그는
자신의 지위와 명예에 치명적 손실이 가해질지도 모르는 그 상황을
결연히 떨치고 일어나는 참신앙의 용기를 보였던 것이다. 한편 요셉
이 이같은 간청을 한 때는 아마 요 19:311에서 보듯이 일단의 유대인
들이 빌라도를 접견(接見)하고 난 직후일 것으로 판단된다.
ㅇ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 빌라도는 요셉의 요청에 따라 먼저 십자가
형장(形場)의 관리자인 백부장에게 예수의 죽음을 확인한 다음(막 15
:44, 45)시체를 내어주었다. 이처럼 까다로운 절차없이 시체를 내어
준 사실은 적어도 그가 예수는 반역죄로 처형된 것이 아님을 어느 정
도 공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57절 참조).

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ㅇ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 요셉 혼자 예수의 시체를 장사 지내지
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시체를 옮겨가기 위해서는 우선 땅에 박힌
십자가를 뽑아 뉘운 다음 손과 발에 박힌 못을 빼어야 했고 시체를
옮기는 채비를 갖춰야 했다. 이와 함께 시체를 옮기는일, 씻는 일,
몰약을 썩는 일 등 장례에 필요한 모든 일을 제한된 시간안에 요셉
혼자 하기에는 사실상 벅찬 일이다.
ㅇ정한 세마포로 싸서 - 여기 '정한 세마포'란 질 좋고 깨끗한 아마
(linen)를 가리키는것 같다. 이 정한 세마포는 주로 시체를 싸는데
사용되었다. 한편 요한복음에 의하면 일찍이 예수를 밤에 찾아갔던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沈香)섞은 것을 백근쯤 가지고 와서 요셉을
도왔다고 한다(요 19:39). 또한 요한복음에는 유대인이 장례법대로
향품과 세마포로 쌌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본서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
이 없다.

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ㅇ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 59절의 '정한'이라는 단어와 '자기
의 새 무덤', 그리고 '큰' 돌이라는 수식어는 마태복음에서만 강조어
로 기록되어 있다. 특별히 여기서 '새'무덤이란 아직 죽음에 영향력
이 그 공간을 침범치 못한 곳으로 영원히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몸
을 가지신 예수의 시체를 안치(安置)하기에 매우 적합한 곳이었다
(행 2:27). 실로 이곳은 부활 곧 '새' 생명을 준비하는 예수의 휴식
처였던것 같다. 한편 이곳의 위치는 갈보리 언덕에서 매우 가까운 곳
에 위치한 현재의 성묘 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가 서있는 곳으로 추정된다(Parrot). 그곳은 암석
들로 구성되어 있어 돌로 깍은 무덤들을 쉽게 만수 있는 장소이다.
요셉은 모든 것을 '놓고'그 자리를 떠나갔다. 진정 이러한 일련의 행
동은 그의 신앙의 성격을 밝혀 준다. 왜냐하면 유죄판결을 받아 처형
된 사람을 이스라엘 조상들과의 연속성을 대표하는 무덤에 장례하는
것은 유대법에 어긋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산헤드린의 결정
에 의해 사형을 받은 시체를 산헤드린 공회원이 장사지냈다는 것은
형언(形言)할 수 없이 진한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 장면이다. 실로 이
같이 주께서 누군가를 필요로 하실 바로 그때 그곳에 주님 곁에 있을
수 있는 신앙인이 참 신앙인일 것이다.

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ㅇ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 여기서 '다른 마리아'는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를 가리킨다(56절 주석 참조). 실로 이 두 여인들은 예
수의 장래를 주도하던 요셉과 일단의 무리들, 그리고 56절에 언급된
동료 여인들이 모두 떠난 이후 어둠이 깔리는 그 무덤가에서 예수께
대한 간절한 사랑의 마음을 지을 길 없어 머뭇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로마법에 의하면 처형된 자들을 위하여 애곡(哀哭)하는 것은 금
지되었다고 한다. 하여 여인들은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과 절망을 억
지로 참으며, 예수의 장사(藏事)를 조용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진정
예수의 처형과 매장의 증인은 제자들이 아니라 여인들이었음을 기억해
야 한다. 여인들의 권위가 무시당하던 당시의 상황에서(M.Roshha-
Shanah, 1:8)이 여인들의 증거는 참으로 특이한 것이었다. 그리고
예수의 매장 장소에 두여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또다른 의미에서 중요
성을 갖는다. 그것은 '두사람' 이상의 증언이 법적인 효력을 지녔던
당시의 상황에서 예수의 죽으심 내지는 부활의 역사성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기 때문이다(고후 3:1; 히 10:28). 이 증거와 기록은 모든 가
현설(Docetism)의 도전을 이겨내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62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ㅇ예비일 다음 날 - 이 날은 안식일을 뜻한다. 그런데 왜 그냥 안식일
이라 하지않고 예비일 다음날이라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구구하
다. (1) 마태가 안식일이라는 말 대신에 '예비일 다음 날'이라는 표현
을 사용하는 것은 25:57 에서 생략한 말을 사용하고 싶어서이다
(Bonnard, Hill, 막 15:42 참조). (마태가 '예비일 다음날'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일반적인 안식일(the last day of week)과
유월절기간 중의 안식일(a feast-Sabbath)을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즉 마태는 안식일이 유월절중의 안식일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런 표
현을 썼다(D.a.Carson)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예비일'을 의
미하는 헬라어'파라스큐앤'는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날
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주
님께서 돌아가신 날보다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안식일을 가리켜 '파라
큐에'의 다음날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중 두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
한 듯하나 세번째 견해도 무시할 수 없다.
ㅇ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모여 - 서로 반목(反目)과 질시의
대상인 앙집단이 공동의 목적을 위해 공동 전선을 펴고 있는데 그것도
안식일에 이런일을 펼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異例的)인 것으로, 상
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요 18:28 에 의하면 그들은 몸을 더럽히지 않
으려고 안식일 전날, 곧 금요일에는 궁전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않는다.
아마 그때는 그들 주위에 많은 군중들이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
문일것이다. 이제 그들은 군중들의 눈을 피하며 하나둘씩 빌라도의 관
정에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이때 예수의 부활 문제를 대두시
킨 것은 부활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22:23) 사두개인 출신들인 대제사
장들이 아니라 부활 교리를 확신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이었음이 분명하
다.

63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ㅇ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하되 - 여기서 '주여'(퀴리에)란 총독에
대한 정중한 어법에 불과하다. 한편 '저 유흑하던자'이란 유대 군중
들이 고대했던 바, 예수가 해방자요 정치적 메시야라는 사실을 전제
(前提)로 한 말로서 진정 예수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치 못했기 때문
에 '유혹하는 자'(deceiver)로 농락당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초대교회 당시에까지 지속되어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가리켜'세상
을 미혹하던 사람'이라고 악선전(惡宣傳)하기도 했다고 한다. 여하튼
예수께서 사사로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고난과 부활 대한 예고
(12:40;16:21;17:23:30:19)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알려지기
는 어려운 일이었다. 아마 예수를 배반한 유다가 그들에게 말해주었
을 것이다. 제자들은 잊어버리고 있는 사실을 저들이 기억하고 있다
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실로 제자들은 정치적 페시야
로서의 예수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무너지자 예수께서 하신 말씀들을
모두 잊어버렸는 배반해 적대자들은 예수를, 죽이고 그 무리들을 완
전히 와해(瓦解)시켜 놓고도 신경질적으로 예민한 공포속에서 예수의
능력을 두려워 하고 있었던 것이0]다.
ㅇ우리가 기억하노니(엠네스데멘). 이 말은 기동적(起動的)부정과거
직설법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그뜻은'지금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는
의미이다. 아마 그들은 예수의 죽음을 즐기다가 유대인의 관습에 따
라 예수의 시체가 장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들이 혹시 부활을
조직하여 거짓을 유포(流布)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돌연 예수의
말씀이 기억났을(12:40)것이다.

64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 하니

ㅇ그러므로 분부하여 - 당시 유대인은 로마 제국의 허락없이 독자적
으로 군사 행동을 취할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
체 보존을 간청했던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는 자치 능력을 인정받은
성전 수비대가 따로 있었지만 그 활동 범위는 성전에 국한되어 있었
을 뿐이다.
ㅇ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 여기서 '사흘까지'란 말은 매우 중
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평소에 자주 예언하시기를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16:21;17:23;20:19)고 하셨으니
만인 사흘이 지나도 부활하지 않는다면 예수는 한갖 사기꾼에 지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슈대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動員)하여 예수 부활을 저지(沮止)함으로써 그를 사
기꾼으로 몰아세우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모든 인
간적 장애를 초월하시고 부활 하셨으니 바로 여기에 우리가 믿는 부
활의 도(道)와 하나님의 권능, 기독교의 진리가 있는 것이다(고전
15:12-28).
ㅇ그의 제자들이...시체를 도적질하여 - 이는 그때의 정황으로서는
도무지 생각조차 하기 힘든 억측이었다. 사실 그 당시 제자들은 죽
음으로 끝난 예수께 대해 깊은 회의(懷疑)와 절망에 빠져있었을 뿐
아니라 더욱이 자신들의 신변 안전을 위해 모두 숨어 있었던 상태였
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 종교 지도자들은 흑시 있을지도 모를 예
수의 부활로 인한 소란을 미연(未然)에 방지하고, 또 자신들의 말대
로 예수의 시체 도난을 예방하기 위해 조급히 간청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예수의 완전한 죽음과 완전한 부활에 대해 더욱 확실한
증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ㅇ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 여기서 먼저 '유혹'(프라네)이란
63절 '유혹하던 자'란 말과 그 맥을 같이 하는 말로서 타인을 적극
적으로 미혹하는 일종의 '사기'를 뜻한다. 실로 유대 지도자를이 생
각하기에 예수는 자신이 메시야라고 주장함으로써 '첫번째사기'를
쳤고,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의 예언로써 '두번째 사기'를 칠것으로
믿어 자신들을 보호하고 백성들이 미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덤
파수(把守)가 필요하다 생각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예수의 페시
야로서의 선동(煽動)보다 친히 부활함으로써 백성에게 끼칠 영향력을
더욱 두려워했던 것이다.

65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파숫군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하거늘

ㅇ너희에게 파숫군이 있으(에케테쿠스토디안). 많은 학자들은 이 부분
을 현재 명령법으로 해석하여 '경비병을 내어 줄 터이니 지키라'고 해
석한다(Roberrson, Lenski). 그러나 이에 비해 혹자는(D.A,
Carson). 무덤을 지킨 자들이 대제사장들에게만 보내하고 빌라도에
게는 보고 하지 않는 28:11 에 근거하여 본문을 직설법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카슨'은 그같은 주장의 연장으로 본문에 나오
는 '파숫군'은 로마 군인들이기 보다 오히려 레위인으로 구성된 성전
수비대원으로 보는 것이 좋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본문에 언급된 빌라
도의 대답은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는 의미에서의 허락이 아니라 냉소적인 말로 '너희들은 그 예수가 살
아있을 때 두려워하더니 지금 그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두려움에 싸여
있구나 그렇게도 두려우면 너희들 힘으로 지키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여라'의 의미로 해석한다. 물론 이같은 주장도 일견 타당성이있으나
본문을 명령법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지지를 받고 있다. 따라서 명령
법적 관점에서 볼 때 본문의 '너희에게 파숫군이 있으니'란 말은 빌라
도가 유대인들을 향해 그들이 목적하는 바 무덤 수비를 위해 자신의
부하 곧 로마 군인들을 활용하도록 하라는 지시가 될 것이다. 그런 점
에서 본문의 '파숫군'(쿠스토디아)은 '네명으로 구성된 군인'(러시어
로 Custodia)이라는 뜻으로 유대 성전 수비대가 아니라 로마
군병으로 이뤄진 보초대, 경비대를 가리킨다(행 12:4). 어찌되었든 저
들의 말대로 사람들이나 미혹하는 사기꾼으로 예수를 이해했다면 왜
그리 두려워하는 것일까? 아마 저들은 예수께서 메시야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을지라도 적어도 예수를 탁월한 예언자 정도로는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예언자라 할지라도 자기들의 기득권(旣
得權)을 위협할 때 저들은 지체없이 제거해 버린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가장 온전히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장 완전히 반역
(反逆)하는 경우이다.
ㅇ힘대로 굳게 하라(이스팔리사스데 호스 이다테). 이를 직역하면 '너
희가 알고 있는 방식대로 스스로 그것을 튼튼히 지키라'이다. 즉 온갖
적절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두려움의 원인을 제거하라는 의미
이다. 이로써 빌라도는 자기의 권위롤 확실히 세우는 동시에 더이상
예수 사건으로 인한 골머리를 앓지 않기 위한 처방(處方)을 내린 것
이다.

66 저희가 파숫군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

ㅇ저희가 파숫군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印封)하고 - 본문은 마치 '왕
과 대신들은 사자 우리의 문을 막은 돌에 봉인을 하여 아무도 다니엘
을 건져 내지 못하게 하였다(단 6:17)는 다니엘의 체험을 연상케 한다.
사실 초대교회에서는 다니엘이 갇혀있던 사자굴에서 무사히 나온 것을
예수께서 무덤에 머무시다가 그것을 뚫고 나와 부활하신 것에 대한 모
형(模型) 또는 비유로 생각했다. 한편 유대 지도자들은 서둘러 무덤
봉쇄(封鎖)작업에 들어갔다. 그들은 큰 돌을 굴려 무덤 출구를 막은
다밧줄로 그 돌과 무덤 출구 양쪽에 동여맨 후, 밧줄의 중심부와 돌과
무덤벽 사이에 얽혀 있는 밧줄에 나 흙으로 밀봉(密封)했다. 따라서
만약 출구에 조그마한 이상이 있더라도 이 인봉이 깨어지기 때문에 부
정한 방법의 헛소문을 미연에 방지하는데 용이했다. 실로 로마 제국의
추악한 정권의 인준(認儁) 하에 유대인들의 치밀한 간개(諫疥)로 포장
인봉된 꾸밈이었지만 모든 노력은 얼마 후 수포(水泡)로 돌아가고 말
았다. 안식 후 첫날 동시에 밝은 기운이 이는 동시에 페시야이신 예수
를 하나님의 구속하라는 무대에서 제거해 버리려는 그 모든 노력들은
부활의 항거(抗拒)할 수 없는 승리로 말미암아 하늘의 비웃음(시 2:4)
을 사고 말았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