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7장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ㅇ엿새 후에 - 이는16:13-28과 새로 전개될 사건을 연결시키기 위한
시간적 설명구이다. 즉 예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16:16)과 그의
수난 예고(16:21) 및 도래할 심판(16:28)에 대한 설명이 있은 후,
며칠이 지난 지금 예수께서는 자신의 부활 및 신적 광휘를 예고하고
계신 것이다. 한편 누가복음에는 같은 사건을 다루면서 '팔 일쯤 되
어'라고 기록되어 있다(눅 9:28). 이는 마태가 예수께서 앞 부분을
말씀하신 후의 기간의 첫째 날과 마지막째 날을 뺐는데 반해, 누가
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 일과 본 번형 사건일을 모두 가산하였기 때
문에 생겨난 차이일 것이다(Hendriksen). 더욱이 누가는 '팔일 쯤'
이라는 막연한 표현을 통해 대략적 시간 계산을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여하튼 이 날은 16장의 사건이 있은 후 만 6일, 곧 온전한 한
주간이 경과한 때를 가리킨다(Wyciffe). 실로 예수께서는 그 한
주간이 완료하는 시점에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부활과 천국의 영
광을 미리 맛보게 하셨다(J. P. Lange). 이와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의 상징적 숫자 개념에 따라, '엿새'는 완전한 수요,
일상과 노동에의 숫자로 볼 수 있으며, '엿새 후'는 곧 '이레(7)'로
승리의 완전 수요, 안식과 하나님 나라의 슷자로 볼 수 있다(The
Pulpit Commentry). 예수께서는 참안식과 천국이라는 새 지평을 이
제 여시고 계신 것이다.
ㅇ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 - 이 세 사람은 전직(前職) 어부
출신들로서(눅 5 :10) 예수께서 주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구별하여
동행하시던 자들이다(26:37;막 5: 37;13:3;눅 8:51). 물론 이들의
피택은 그들 자신의 탁월성에 근거하였다기보다 근본적으로 예수의
절대적인 선택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영광스
런 변화를 목격하는 특권을 허락하시는 동시에 그들 각자에게 당신
의 영광을 세상에 전파할 책무(責務)를 맡기시었다. 실로 두, 세 사
람의 증거야말로 진실된 중언이 될 수 있는 것이다(신 19:15;요 8:
17;고후 13:1). 더욱이 예수께서 증인의 인원을 3인으로 제한시킨
것은 혹시 발생하게 될 오해의 소지를 없애고 또한 아직은 침묵의
시간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9절). 한편 이들 3인의 제자
는 이제 12제자 중에서도 핵심 구성원으로서 예수의 십자가 부활을
준비하며, 예수 이후의 교회를 이끌어 갈 영광스런 책임 사역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3인의 제자들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10:
2의 주석을 참조하라.
ㅇ따로(카트이디안) - 문자적으로는 '따로 떨어져서', '개인적으로'
(privately)이다. 이는 그들에 대해 예수의 영적이고 내밀한 친밀감
을 암시한다.
ㅇ높은산 - 교회의 전통에 의하면(Hieronius, Cyril of
Jerusalem, Jerome) '다볼산'이라고 하며 가버나움과 지리적으로
근거리(近距離)라는 점에서 '예벧에르묵'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W. Ewing).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가이사랴 빌립보와의 근접성을
(16:13) 들어 일반적으로 '헬몬산'으로 추정하고 있다(Wyliffe,
Clarke, Carr). 이 산은 갈릴리 호수 북방 안티레바논 산맥에 위치
하며 스닐(신 3:8;대상 5:23), 시료(신 3:9)등으로도 불리워지고
있다. 해발 약 2,850m로 그 산 봉우리에는 항상 눈이 덮여있다. 이
산은 요단강을 통하여 이스라엘 지역에 물을 공급해 주는 산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참조, 시 133:3). 이 산
은 구약에서는 '시온산'(신 4:48)으로, 베드로에 의해서는 '거룩한
산'(벧후 1:18)으로 불리워지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족장의 산'이
라는 뜻인 '예벧 에쉬 쉐이크'(Jebel esh Sheikh), 또는 '설산'
이란 뜻인 '예벧 에트 탈'(Jebel eth Thalg)등으로 지칭된다.
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ㅇ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 여기에서 '주'(퀴리오스)
란 '사람이나 사물을 소유, 통치하는 자', '결정권을 가진 자', '주
인' 등을 의미한다. 이것은 종이 주인에게 존경과 영예의 칭호로써
일반적으로 부르는 주존칭이었다. 한편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각
각 이 말에 대하여 '랍비'(선생, 막 9:5) '에피스타테스'(곁에서 서
있는 사람, 감독하는 사람, 주인, 통치자, 눅 9:33)로 각각 묘사되
었다. 이 이유는 3절의 '모세와 엘리야'의 기록순서에 대한 이유와
같은 것 같다. 한편 눅 9:33에는 베드로의 강력한 요청과 관련하여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베드로가 어떤 강제적 응답을 요구하지 않는 상태에서 단지 주
위의 화려하고 위엄스러운 광경에 압도되어 자기도 모르게 즉흥적인
말을 한 것임을 암시한다. 베드로의 이와 같은 말은 그가 다음 몇가
지 점에서 잘못 인식한 것임을 보여 준다. (1) 예수께서 아직 당신
의 사역을 이루시기 전, 즉 인간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의를 위해
부활하심으로 승천하시어 영광을 얻으시기 전에 이미 그 영광을 얻
고 그 영광 가운데 거하고자 했다는 점(히 2:9, 10). (2) 산 아래에
는 아직도 고통당하는 영혼들이 많이 있어 그 영혼들을 구원해야 할
지대한 사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리 안식(安息)을 취하고자 했다
는 점(14-20절). (3) 복음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온 세계에 전파된
다음에야 영광스러운 세계와 안식이 오는데 그 세계의 안식을 미리
구했다는 점(24:14;행 1:8) 등이다.
ㅇ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 베드로는 자신의 요구를 절대시하지 않고
예수의 권위를 먼저 인정해 드렸다. 그러나 그의 요구는 심히 육신
적이요 인간적인 발상에 의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주님의 '원하심'
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우리 인간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의를
위하여 3일만에 다시 부활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16:21-23). 베
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이 사설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임박한 수난과 대조되는 이 말을 한 것은 당시 베드로가 얼마나 주
의 뜻과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무지했는가를 잘 보여 준다.
ㅇ초막 - 이는 헬라어로 '스케나스'로서 '장악', '천막' 등을 의미
한다. 당시에 아랍인들은 존귀한 자가 왔을때 존경과 예의를 표하기
위하여 장막을 쳐주곤 했다 한다(왕하 4:9,10). 만약 이런 관점에서
베드로가 초막치기를 제의했다면, 그는 아마 이 안전한 산상에서 지
금 전개되는 놀라운 영광의 광휘와 영적 계시를 오래도록 지속하고
싶은 심정에서, 그기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걸음이 지체되거나 아
예 무산되기를 소원하는 잠재적인 바램에서 이 제안을 했을 것이다.
한편 이와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유대인들의 전통적 명절의
하나인 장막 절기의 회상이라는 점이다(레 23:42, 43). 이 절기는
종말적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베드로는 예수의 변모
에 감사하며, 메시야 시대의 임박한 개시를 인식하고 장막짓기를 요
구했다는 것이다(cARSON). 그러나 후자의 견해는 전체 문맥상 조화
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ㅇ하나는 주를 위하여...하리이다 - 이는 모세와 엘리야를 영광스런
위치에서 예수와 동등시 취급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러한 자의적 판단에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과 자신의 동
료 제자들과는 견줄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들로서의 그 세 사람의
신분을 인정한다는 측면에서 이같은 제안을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
이 그 세 분을 수종드는 자로도 과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ㅇ제자들이 듣고...심히 두려워하니 - 본 구절은 제자들이 이미 예
수께서 위엄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시고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하
는 영광스러운 분위기에 압도되어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인간의 절대적인 공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선 죄악
된 인간의 통상적인 느낌이다(사 6:5;마 14:27;28:5,10).
7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ㅇ예수께서 나아와...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 이는 예수의 다함없는
사랑과 연민의 정을 나타내 보이는 행동이다(사 6:5-7;단 10:9,10:
계1:17). 따뜻한 손길과 부드러운 음성은 깊은 공포에 휩싸여 있던
제자들의 산란(散亂)한 심령을 넉넉히 회복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ㅇ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 사랑과 신적 권위에 입각한 예수의 이중
명령이다. 즉 예수는 제자들을 향해 공포의 자리를 떨고 일어날 뿐
아니라 두려워하는 마음을 완전히 떨쳐버릴 것을 말씀하셨다(14:27)
이 이중적 명령은 완전한 구원과 완전한 사랑의 표현이자 오직 당신
만이 인간이 지닌 심연의 공포를 제거하실 수 있음 보여 주는 것이
었다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ㅇ그러면 어찌하여 - 여기서 '그러면'(운)은 논리적 연결사 또는 추
정(推定) 불변사로 사용되어 앞의 사건과 바로 이어지는 질문의 내
용이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는 앞의 함구령과 연관
된 제자들의 질문을 이끄는 말로 사용되었다.
ㅇ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 제자들이 이 말을 하게 된
배경에는 변화산에서의 엘리야의 출현과 계속되는 예수의 함구령에
그 근원이 있다. 사실 그 당시 서기관들은 말 3:1;4:5 등에 근거하
여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온다고 주장했었다(M
Eduyoth 8:7; M Baba Metzia 3:5). 따라서 엘리야가 출현하지
않는 한 예수의 메시야로서의 진정성은 의심받게 마련이었다. (1)
변화산상에서의 엘리야 출현은 에언된 말 4:5의 성취인지, (2)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마땅히 공표해야 하는데도 왜 그 사실을 사
람들에게 알려서는 안되는 것인지에 대해 질문하였던 것이다.
1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ㅇ엘리야가 이미 왔으되...임의로 대우하였도다 - 예수께서는 여기
서 당신의 삶을 예표하는 세례 요한의 사역의 두 가지 면을 제시,
비교 하셨다. 즉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눅 1:17)으로서 왔던 세례
요한을 영적으로 무지했던 세상 사람들은 그를 엘리야로 (1) 정확히
깨닫지 못하였으며 오직 소수만이 그의 선구자적 메시지에 귀기울였
다. 또한 그를 (2) '임의(任意)로 대우하였다'. 즉 그를 메시야의
선구자로 인정치 않고 오히려 배척, 박해하고 끝내 그를 죽음에 이
르게 했다. 그 까닭은 자명한 것이었으니, 그것은 세례 요한이 그
맡은 바 소임을 성실히 완수 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메
시야로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이 맡으신 소임을 성실히 수행하셨던 예
수께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즉 예수는 어두운 세상의 빛으로 왔으되
세상이 당신을 알아보고 환영하기는 커녕(요1:9-11) 오히려 배척하
며 끝내는 죽음에 내어줄 것이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당신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고하셨던 것이다. 한
편 본문에서 '임의로'(호사 에델레산)란 '그들이 원하는 무엇이든
지'(whatever they wished)를 의미한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의지대로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 등을 거스릴 때 사용되는 말로서, 결국 임의로 행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죄악임을 암시한다.
13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14 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ㅇ주여 - 이는 헬라어로 '퀴리오스'인데, 특별히 본문에서는 상대
방에 대한 극존칭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의 '퀴리오스'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는 신앙 고백적
용어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8:2;17;4) 이런 관점에서 마가
는 이때의 호칭을 단순히 '디다스칼로스'(선생님)로 기술하고 있
다(막 9:17).
ㅇ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 막 9:21과 눅 9:38에 근거해 보면,
이 아들은 그 아비의 외아들로서 어렸을 때부터 간질병을 않고 있
었다. 이러한 아들의 고통을 치료하기 위해 그 아비는 예수의 측은
지심(惻隱之心)에 호소한다. 실로 그분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야
말로 모든 병자, 모든 죄인의 회복과 구원의 출발점이 된다.
ㅇ간질 - 이는 헬라어 '세레니아조마이'로서 '달의 침범을 받다'
(strucken by moon), '미치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고대
인들이 간질병을 달에 의해 영향을 받는 비정상적인 현상이라고 생
각한데서 기인된 듯 싶다. 간질병은 보통 5-10분 동안 발작하는 병
으로서, 이 병이 발작할 때에는 환자는 갑자기 나뒹굴며 거품을 물
고 경련을 일으키는(막 9:20) 현상을 나타내는데, 이 때에는 자기
도 모르게 무의식으로 자기 몸을 자해하기도 한다.
ㅇ심히 고생하여(카코스 파스케이) - 문자적으로는 '심하게 고통을
받는다'는 뜻으로 그 병의 증세가 심각할 정도로 악화되었음 암시
한다.
ㅇ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 이는 간질병 환자의 갑
작스런 발작으로 인한 돌발적이고도 불가항력적인 위험성을 호소한
말이다. 한편 막 9:22에 따르면 귀신에 의해서 이 환자가 무의식적
으로 자해(自害)한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실로 귀신과 악령들은
사람의 마음에 침투하여 그 평온하게 하지 못하고 그들의 악한 습
성과 파괴적인 경향대로 그 인격을 두렵고 불안하게 하고 평형 감
각마저 앗아감으로써 자멸을 유도 하곤 한다.
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ㅇ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 환자의 아비는 예수의 소
문을 듣고 아들을 예수께 데려왔으나 예수의 변화산 행(行)으로 인
해 만나지 못하고 대신 남은 아홉 제자들에게 자신의 딱한 처지를
호소했던 것 같다. 사실 그 제자들도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이적을 행하기도 했었다(10:1;눅 10:17). 그러나 그 같은 권능은
그들의 영원한 소유가 될 수 없었으며, 또 오직 온전한 믿음과 예
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지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ㅇ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 제자들의 실패는 13:54-19:2 전체를
통해 반복되는 주제이다(1416-19, 26, 23, 33;16:5, 22;17:4, 10,
11). 결국 이러한 실패는 제자들이 진보와 실패 사이를 오가는 것
을 보여 주고 있다(14:26, 27, 31). 실로 이것은 천국의 이적을
행하는 능력은 자신의 것이 아니며 마술과는 달리, 전적으로 하나
님께서 주시는 것이요 그 자신의 믿음의 여하를 따른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19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ㅇ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 '믿음이 적은'은 사본들에 따라 어
떤 사본은 '아피스토스'(믿음이 없음, unfaith) 또다른 사본은 '올
리고피스토스'(믿음이 부족함,little-faith, poor-faith)로 각각
표기하고 있다. 이 중 17절에 제시된 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여'라는 책망과의 조화를 위해 전자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좋다. 그
러나 비록 후자의 견해를 받아들인다해도 본문에서는 믿음이 적음
을 지적한다기 보다 그들의 닐음이 결핍되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Bonnard). 실로 적은 믿음은 아무리 하찮더라도 겨자씨와 같이 반
드시 결과를 산출하게 마련이지만 믿지 않는 불신앙은 그 어떠한
결과도 산출해 낼 수 없다. 한편 마가는 본문과 기도의 관련성을
기술하고 있다(막 9:29). 사실 기도는 하나님의 권위와 섭리를 믿고
인정하는 자의 특권이요 의무라는 점에서 마가의 보고는 적절하다
하겠다.
ㅇ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이는 예수께서 새릅고도 중요한 교훈
을 말씀하실 때, 듣는 이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자주 사용하신
표현이다(5:18).
ㅇ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 겨자씨는 보통 씨앗 중에서 가
장 작은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으로 팔레스틴 지방 또는 지증해 연안
등지에 많이 자라며 최대로 성장하면 약 3-4.5m의 큰 나무로 자란다
고 한다. 이것은 '니코티아나 그라우카'(Nicotianaglauca) 혹은
'브라씨카 니그라'(Brassica nigra) 등으로 알려져 있다. 이 겨
자나무는 원줄기와 몇개의 곁줄기로 자라는데 원줄기는 새가 앉아도
부러지지 않을 만큼 강하다고 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결국 믿음이 지닌 생명력과 감추어진 무한한 가능성을 강조하기 위
해서일 것이다. 정녕 믿음은 무한한 자생력을 지닌 것으로, 근본적
인 문제점은 그 양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하찮을 정
도 일망정 그 있고 없고가 문제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과 그 뜻을 믿는 것으로서(Wyciffe)
자기 신뢰나 신념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따라서 겨자씨 믿음이 산을
옮기는 믿음으로 가시화(可視化)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믿
음일 때에만 가능하다. 한편 공관복음에서는 겨자씨에 대한 언급이
다섯번 나온다(13:31;17:20;막 4:31;눅 13:19;17:6).
ㅇ이 산을 명하여...옮길 것이요 - 겨자씨와 산은 표면적으로는 크
나큰 대조를 이루며 '옳기는 것'에 대한 회의를 불러 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온전히 보존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하나님과의 생명적 관계를 지속하면 그 믿음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
님께서 믿음의 분량에 따라, 그 주권적인 방법에 의해 인간의 상상
을 초월하는 일들을 이뤄내고야 만다. 즉 겨자씨 믿음은 그 소유자
로 하여금 능력과 지혜가 충만한 하나님과 꿇임없이 연결시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초월적인 경륜을 이 땅에 실현하게 한다. 한편
여기에서 '산'이란 문자적인 의미보다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커다란 문제, 난제(難題) 등을 함측하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21:21, 22:사 40:4;49:11;54:10;막 11:23;눅 17:6;고전
13:2).
ㅇ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카이 우덴 아뒤나테세이 휘민) -
문자적으로 '그리고 너희에게 어떤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and noting shallbe impossoble to you)이다. 이는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전능성에 대한 약속으로서 그 효력은 지금도 유효
(有效)하다(19:26;빌 4:13;히 11;1).
21 (없음)
22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ㅇ갈릴리에 모일때에 - '모이다'(아나스트레포데논)란 '거류하다',
'머물다', '살다' 등의 뜻인 '아나스레포'의 헌현 분사다. 이는 예
수께서 수 주간을 팔레스틴 북단에 머무시다가 다시 헤롯 안디바의
영지인 갈릴리 지역으로 조용히 접근해 들어오셨음을 암시한다. 이
러한 갈릴리 복귀는 예루살렘으로의 최후 여행을 위한 마지막 준비
작업이었다. 한편 막 9:30은 이와 같은 사건을 다루면서 '갈릴리 가
운데로 지날새'라고 기록 함으로써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를 통과하
지 않으시고 윗 갈릴리의 한적한 사잇길을 통해 자신의 고향이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셨음을 암시한다. 일반적으로 갈릴리 지역은 북쪽으
로 헬몬산 근방에 위치한 티타니(레오테스)강, 서쪽으로 갈멜산을
중심으로 한 지중해 연안, 남쪽으로 에스드렐론 평원, 동쪽으로는
요단강과 갈릴리 호수 등으로 구성된 남북 약 96km,동서 약 48km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이다. 본문에서는 헬몬산 아래에서 갈릴리 호수
근처에 있는 가버나움 지방으로 오시는 장면을 묘사할것 같다(24절
;막 9:30).
ㅇ예수께서...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공식적
으로 당신 자신의 수난에 더해 말씀하신 두번째 예언이다(16:21).
여기서 '넘기워'(파라디도스다이)란 두 가지 점에서 애매모호(曖昧
模糊)하다. (1) 이는 '넘기다', '배반하다'는 뜻일수 있는데,문맥에
따라서 강한 의미 가질 때는 후자의 뜻이고, 한 의미를 가질때는 전
자의 뜻을 가진다. (2) 수동형('넘겨주다')을 취할 때, 하나님께서
예수를 넘겨 주신 것인지(Origen, Clark), 가롯 유다가 예수를 배
반한 것인지(Bengle) 모호하다. 여하튼 본문 전체의 문맥으로 볼
때 이 같은 다양한 견해는 조화될 수 있는 것들이다. 한편 본문의
'사람들의'란 말은 유대인의 대표자로서의 대제사장(16:21)또는 십
자가 처형에 관여한 이방인들(20:19)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데 이같은 수난 고지(受難告知)는 순전히 믿음이 부죽한 제자들을
위한 것으로서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이 일을 뚜렷
이 기억하게 된다(눅 24:^).
23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ㅇ죽음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 예수께서는 패역한 인간
들의 순간적인 승리('죽음을 당하고')와 하나님의 영원한 승리('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를 대비시켜 닥쳐오는 당신의 삶을 정확히 예시
하셧다. 즉 부활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들의 모든 궤계(詭
計)와 포악(暴惡)을 일거에 물거품으로 돌릴수 있다는 하나님의 궁극
적 승리를 예시한 것이다. 결국 이 논지의 초점은 승리의 부활을 맞
이하기 위해서는 순간적인 죽음을 필연적으로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ㅇ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막 9:32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의 수
난 예고를 깨닫지도 못하고 그에 대해서 더 이상 묻기도 두려워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실로 그들은 예수의 수난 예고 소식에 온 정신이
쏠려 그 이후에 있을 영광스런 부활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만한 여
유가 없었다. 그들은 계시의 불완전한 이해 때문에 인간적인 두려움
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 이후에야 비로소 수
난의 참의미를 이해하는 완전한 신앙에로 발전하여 진정으로 자유할
수 있었다. 요한 복음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음심으로 제자들이
슬퍼하겠으나 다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슬픔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 계시의 동시적 이해를 촉구하고 있다(요 16:
16-22).
24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ㅇ가버나움 - '나훔의 마을'이란 뜻으로서 갈릴리 호수 서북쪽에 위
치한 성읍이다. 오늘날에 이 성읍은 어디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일반
적으로 '텔 훔'이란 곳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곳은 예수의 선교 사
역의 중심지였으나(8:5-15;9:2-8;18:1-5), 회개하지 않고 교만함으
로서 인해 예수의 책망받는 지역이기도 하다(11:23). 이제 예수께서
는 수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오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리 방
문하셨다.
ㅇ반 세겔 받는 자들이 - '반 세겔'이란 헬라어로 '디드라크마'로서
'두드라크마'를 의미한다. 그런데 한 드라크마는 헬라어인 하루 품
삯을 나타내는 동전 명칭으로 유대인에게도 사용되는데 일반적으로
1/4세겔로 취급되었다. 한편 이 '반세겔'은 유대인들이 출애굽한 후
시내산에서 인구 조사를 한 직후에 모든 유대인 남자들이 내었던 생
명의 속전,즉 애굽에서 건져주신 생명의 대가로 여호와께 바쳤던 양
과 같은 것이다(출 30:11-16). 이것은 선민 이스라엘에게는 의무적
으로 부과된 것이었다. 바벧론 포수 후 그 의무는 20세이상된 자로
서 3/1세겔로 조정되었다(느 10:32). 예수 당시에도 느헤미야의 수
정된 의무조항에 따라 매년 유월절 전인 봄에(아달월 15일) 모세 당
시의 환율에 의해 계산, 부과했다. 따라서 당시에는 반세겔을 바꾸
려는 환전상으로 들끓고 있었을 것이다. 이 환전상들은 그 수수료로
인해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여하튼 이 반세겔은 로마에 바치
는 공공의 세금이라기보다 당시 주로 성소의 유지 비용으로 사용되
었다. 한편 여기에서 '반 세겔 받는 자들'(호이 타디드라크마 람
바논테스, those receiving the didrachmas)은 일반적으로 국
세를 거두는 '세리'(텔로나이)와는 다르다(9:10). 이것은 반 세겔을
거두는 자들이 신분상 로마 위해 세금을 거두는 자들이 아니라, 이스
라엘의 성전을 위해 거두는 다른 계층의 사람들임을 암시한다.
ㅇ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 이는 세금 징수자들이 이미 예수와 베드
로 등의 제자들과의 관계를 익히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와 더
불어 성전을 대하시는 예수의 태도가 과연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보
기 위해 이들은 예수께로 시선을 돌렸던 것이다.
25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26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27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ㅇ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히나 데 메 스
칼달리소멘 아우투스) - 직역하면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실족지
않게 하기 위하여'(But that we may not offend them)가 된
다. 길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율법 위에 계신 분으로서
율법이 정한 바 그 의무 조항을 능히 초월하실 수 있으셨다. 그
러나 예수께서는 다인의 유익을 우선 생각하시는 지극한 사랑의
원리에 따라 스스로 겸비(兼備)해지기를 원하셨다(3:15). 한편
본문의 '오해케 한다'는 '스칸달리소멘'은 단순히 넘어뜨린다는
뜻이 아니라 아예 함정에 빠뜨려 치명적인 피해를 제공한다는 의
미로 보아야 한다. 이는 결국 예수께서 성전세 납부를 거부함으
로써 야기될 상황, 곧 예수가 왜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자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을 율법으로 파괴하
고 성전과 예배를 무시하는 자들로 오해하여 마침내 당신의 복음
을 먼저 배척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예방적 조처로서 성
전세 납부를 하고자 하신 것이다. 이러한 겸비의 모범을 따라 훗
날 사도 바울도 다른 사람을 위한 자기 절제와 겸비의 도를 가르
치게 된다(고전 8:13;9:12, 22).
ㅇ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 성전세
조달을 위한 예수의 구체적인 지시 사항이다. 이로써 우리는 동
전 한 닢이 고기 입 속에 있음을 미리 아시는 예수의 전지성(全
知性)과 그 동전을 이미 있게 하신 다자신의 전능성(全能性)을
알수 있다(Wycliffe). 한편 신약에서는 낚시 기사가 이곳밖에
없고 대부분은 그물을 사용하는 것으로 언급된다. 여하튼 예수의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율법의 요구에서 면죄되시지만, 율
법에 순종하실 뿐 아니라 제자들의 필요에 대해서도 당신만이 하
실 수 있는 기적적 방식으로 예비해 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 사
건은 수난 예고(22, 23절) 바로 뒤에 위치하여 우리로 하여금 예
수의 겸비를 다시 생각케 한다. 즉 그분은 바다를 잠잠케 하시며,
오병 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능력자이셨지만 스스로 낮추시고 쓸
데없이 남으로 오해케 하지 않으시려고 이러한 이적의 수고를 아
끼지 않으셨던 것이다(11:28-30;12:20). 이같은 겸손의 교훈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 및 오늘 우리들을 위한 것이다.
ㅇ한 세겔(스타테르) - 그리이스에서 통요되던 금화로서 대략 4
드라크마, 곧 한 세겔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것이면 1인당 반세
겔요구되는 성전세의 두 사람분을 납부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례수의 이적은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가장 정확한 은혜로
채워진다.
ㅇ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 '나와 너'란 예수와 베드로가 비록 하
나같이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었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입장에서
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즉 예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를 지니신 분으로서 성전세를 내지
않으셔도 됨에도 불구하고 내시는 것이며, 베드로는 그 근본이 죄
인된 인간이요 사망에 처헌 자로서 생명의 속전 곧 성전세를 내야
할 자였던 것이다.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ㅇ엿새 후에 - 이는16:13-28과 새로 전개될 사건을 연결시키기 위한
시간적 설명구이다. 즉 예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16:16)과 그의
수난 예고(16:21) 및 도래할 심판(16:28)에 대한 설명이 있은 후,
며칠이 지난 지금 예수께서는 자신의 부활 및 신적 광휘를 예고하고
계신 것이다. 한편 누가복음에는 같은 사건을 다루면서 '팔 일쯤 되
어'라고 기록되어 있다(눅 9:28). 이는 마태가 예수께서 앞 부분을
말씀하신 후의 기간의 첫째 날과 마지막째 날을 뺐는데 반해, 누가
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 일과 본 번형 사건일을 모두 가산하였기 때
문에 생겨난 차이일 것이다(Hendriksen). 더욱이 누가는 '팔일 쯤'
이라는 막연한 표현을 통해 대략적 시간 계산을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여하튼 이 날은 16장의 사건이 있은 후 만 6일, 곧 온전한 한
주간이 경과한 때를 가리킨다(Wyciffe). 실로 예수께서는 그 한
주간이 완료하는 시점에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부활과 천국의 영
광을 미리 맛보게 하셨다(J. P. Lange). 이와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의 상징적 숫자 개념에 따라, '엿새'는 완전한 수요,
일상과 노동에의 숫자로 볼 수 있으며, '엿새 후'는 곧 '이레(7)'로
승리의 완전 수요, 안식과 하나님 나라의 슷자로 볼 수 있다(The
Pulpit Commentry). 예수께서는 참안식과 천국이라는 새 지평을 이
제 여시고 계신 것이다.
ㅇ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 - 이 세 사람은 전직(前職) 어부
출신들로서(눅 5 :10) 예수께서 주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구별하여
동행하시던 자들이다(26:37;막 5: 37;13:3;눅 8:51). 물론 이들의
피택은 그들 자신의 탁월성에 근거하였다기보다 근본적으로 예수의
절대적인 선택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영광스
런 변화를 목격하는 특권을 허락하시는 동시에 그들 각자에게 당신
의 영광을 세상에 전파할 책무(責務)를 맡기시었다. 실로 두, 세 사
람의 증거야말로 진실된 중언이 될 수 있는 것이다(신 19:15;요 8:
17;고후 13:1). 더욱이 예수께서 증인의 인원을 3인으로 제한시킨
것은 혹시 발생하게 될 오해의 소지를 없애고 또한 아직은 침묵의
시간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9절). 한편 이들 3인의 제자
는 이제 12제자 중에서도 핵심 구성원으로서 예수의 십자가 부활을
준비하며, 예수 이후의 교회를 이끌어 갈 영광스런 책임 사역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3인의 제자들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10:
2의 주석을 참조하라.
ㅇ따로(카트이디안) - 문자적으로는 '따로 떨어져서', '개인적으로'
(privately)이다. 이는 그들에 대해 예수의 영적이고 내밀한 친밀감
을 암시한다.
ㅇ높은산 - 교회의 전통에 의하면(Hieronius, Cyril of
Jerusalem, Jerome) '다볼산'이라고 하며 가버나움과 지리적으로
근거리(近距離)라는 점에서 '예벧에르묵'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W. Ewing).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가이사랴 빌립보와의 근접성을
(16:13) 들어 일반적으로 '헬몬산'으로 추정하고 있다(Wyliffe,
Clarke, Carr). 이 산은 갈릴리 호수 북방 안티레바논 산맥에 위치
하며 스닐(신 3:8;대상 5:23), 시료(신 3:9)등으로도 불리워지고
있다. 해발 약 2,850m로 그 산 봉우리에는 항상 눈이 덮여있다. 이
산은 요단강을 통하여 이스라엘 지역에 물을 공급해 주는 산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참조, 시 133:3). 이 산
은 구약에서는 '시온산'(신 4:48)으로, 베드로에 의해서는 '거룩한
산'(벧후 1:18)으로 불리워지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족장의 산'이
라는 뜻인 '예벧 에쉬 쉐이크'(Jebel esh Sheikh), 또는 '설산'
이란 뜻인 '예벧 에트 탈'(Jebel eth Thalg)등으로 지칭된다.
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ㅇ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 여기에서 '주'(퀴리오스)
란 '사람이나 사물을 소유, 통치하는 자', '결정권을 가진 자', '주
인' 등을 의미한다. 이것은 종이 주인에게 존경과 영예의 칭호로써
일반적으로 부르는 주존칭이었다. 한편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각
각 이 말에 대하여 '랍비'(선생, 막 9:5) '에피스타테스'(곁에서 서
있는 사람, 감독하는 사람, 주인, 통치자, 눅 9:33)로 각각 묘사되
었다. 이 이유는 3절의 '모세와 엘리야'의 기록순서에 대한 이유와
같은 것 같다. 한편 눅 9:33에는 베드로의 강력한 요청과 관련하여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베드로가 어떤 강제적 응답을 요구하지 않는 상태에서 단지 주
위의 화려하고 위엄스러운 광경에 압도되어 자기도 모르게 즉흥적인
말을 한 것임을 암시한다. 베드로의 이와 같은 말은 그가 다음 몇가
지 점에서 잘못 인식한 것임을 보여 준다. (1) 예수께서 아직 당신
의 사역을 이루시기 전, 즉 인간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의를 위해
부활하심으로 승천하시어 영광을 얻으시기 전에 이미 그 영광을 얻
고 그 영광 가운데 거하고자 했다는 점(히 2:9, 10). (2) 산 아래에
는 아직도 고통당하는 영혼들이 많이 있어 그 영혼들을 구원해야 할
지대한 사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리 안식(安息)을 취하고자 했다
는 점(14-20절). (3) 복음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온 세계에 전파된
다음에야 영광스러운 세계와 안식이 오는데 그 세계의 안식을 미리
구했다는 점(24:14;행 1:8) 등이다.
ㅇ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 베드로는 자신의 요구를 절대시하지 않고
예수의 권위를 먼저 인정해 드렸다. 그러나 그의 요구는 심히 육신
적이요 인간적인 발상에 의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주님의 '원하심'
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우리 인간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의를
위하여 3일만에 다시 부활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16:21-23). 베
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이 사설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임박한 수난과 대조되는 이 말을 한 것은 당시 베드로가 얼마나 주
의 뜻과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무지했는가를 잘 보여 준다.
ㅇ초막 - 이는 헬라어로 '스케나스'로서 '장악', '천막' 등을 의미
한다. 당시에 아랍인들은 존귀한 자가 왔을때 존경과 예의를 표하기
위하여 장막을 쳐주곤 했다 한다(왕하 4:9,10). 만약 이런 관점에서
베드로가 초막치기를 제의했다면, 그는 아마 이 안전한 산상에서 지
금 전개되는 놀라운 영광의 광휘와 영적 계시를 오래도록 지속하고
싶은 심정에서, 그기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걸음이 지체되거나 아
예 무산되기를 소원하는 잠재적인 바램에서 이 제안을 했을 것이다.
한편 이와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유대인들의 전통적 명절의
하나인 장막 절기의 회상이라는 점이다(레 23:42, 43). 이 절기는
종말적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베드로는 예수의 변모
에 감사하며, 메시야 시대의 임박한 개시를 인식하고 장막짓기를 요
구했다는 것이다(cARSON). 그러나 후자의 견해는 전체 문맥상 조화
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ㅇ하나는 주를 위하여...하리이다 - 이는 모세와 엘리야를 영광스런
위치에서 예수와 동등시 취급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러한 자의적 판단에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과 자신의 동
료 제자들과는 견줄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들로서의 그 세 사람의
신분을 인정한다는 측면에서 이같은 제안을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
이 그 세 분을 수종드는 자로도 과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ㅇ제자들이 듣고...심히 두려워하니 - 본 구절은 제자들이 이미 예
수께서 위엄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시고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하
는 영광스러운 분위기에 압도되어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인간의 절대적인 공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선 죄악
된 인간의 통상적인 느낌이다(사 6:5;마 14:27;28:5,10).
7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ㅇ예수께서 나아와...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 이는 예수의 다함없는
사랑과 연민의 정을 나타내 보이는 행동이다(사 6:5-7;단 10:9,10:
계1:17). 따뜻한 손길과 부드러운 음성은 깊은 공포에 휩싸여 있던
제자들의 산란(散亂)한 심령을 넉넉히 회복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ㅇ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 사랑과 신적 권위에 입각한 예수의 이중
명령이다. 즉 예수는 제자들을 향해 공포의 자리를 떨고 일어날 뿐
아니라 두려워하는 마음을 완전히 떨쳐버릴 것을 말씀하셨다(14:27)
이 이중적 명령은 완전한 구원과 완전한 사랑의 표현이자 오직 당신
만이 인간이 지닌 심연의 공포를 제거하실 수 있음 보여 주는 것이
었다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ㅇ그러면 어찌하여 - 여기서 '그러면'(운)은 논리적 연결사 또는 추
정(推定) 불변사로 사용되어 앞의 사건과 바로 이어지는 질문의 내
용이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는 앞의 함구령과 연관
된 제자들의 질문을 이끄는 말로 사용되었다.
ㅇ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 제자들이 이 말을 하게 된
배경에는 변화산에서의 엘리야의 출현과 계속되는 예수의 함구령에
그 근원이 있다. 사실 그 당시 서기관들은 말 3:1;4:5 등에 근거하
여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온다고 주장했었다(M
Eduyoth 8:7; M Baba Metzia 3:5). 따라서 엘리야가 출현하지
않는 한 예수의 메시야로서의 진정성은 의심받게 마련이었다. (1)
변화산상에서의 엘리야 출현은 에언된 말 4:5의 성취인지, (2)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마땅히 공표해야 하는데도 왜 그 사실을 사
람들에게 알려서는 안되는 것인지에 대해 질문하였던 것이다.
1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ㅇ엘리야가 이미 왔으되...임의로 대우하였도다 - 예수께서는 여기
서 당신의 삶을 예표하는 세례 요한의 사역의 두 가지 면을 제시,
비교 하셨다. 즉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눅 1:17)으로서 왔던 세례
요한을 영적으로 무지했던 세상 사람들은 그를 엘리야로 (1) 정확히
깨닫지 못하였으며 오직 소수만이 그의 선구자적 메시지에 귀기울였
다. 또한 그를 (2) '임의(任意)로 대우하였다'. 즉 그를 메시야의
선구자로 인정치 않고 오히려 배척, 박해하고 끝내 그를 죽음에 이
르게 했다. 그 까닭은 자명한 것이었으니, 그것은 세례 요한이 그
맡은 바 소임을 성실히 완수 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메
시야로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이 맡으신 소임을 성실히 수행하셨던 예
수께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즉 예수는 어두운 세상의 빛으로 왔으되
세상이 당신을 알아보고 환영하기는 커녕(요1:9-11) 오히려 배척하
며 끝내는 죽음에 내어줄 것이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당신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고하셨던 것이다. 한
편 본문에서 '임의로'(호사 에델레산)란 '그들이 원하는 무엇이든
지'(whatever they wished)를 의미한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의지대로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 등을 거스릴 때 사용되는 말로서, 결국 임의로 행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죄악임을 암시한다.
13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14 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ㅇ주여 - 이는 헬라어로 '퀴리오스'인데, 특별히 본문에서는 상대
방에 대한 극존칭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의 '퀴리오스'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는 신앙 고백적
용어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8:2;17;4) 이런 관점에서 마가
는 이때의 호칭을 단순히 '디다스칼로스'(선생님)로 기술하고 있
다(막 9:17).
ㅇ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 막 9:21과 눅 9:38에 근거해 보면,
이 아들은 그 아비의 외아들로서 어렸을 때부터 간질병을 않고 있
었다. 이러한 아들의 고통을 치료하기 위해 그 아비는 예수의 측은
지심(惻隱之心)에 호소한다. 실로 그분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야
말로 모든 병자, 모든 죄인의 회복과 구원의 출발점이 된다.
ㅇ간질 - 이는 헬라어 '세레니아조마이'로서 '달의 침범을 받다'
(strucken by moon), '미치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고대
인들이 간질병을 달에 의해 영향을 받는 비정상적인 현상이라고 생
각한데서 기인된 듯 싶다. 간질병은 보통 5-10분 동안 발작하는 병
으로서, 이 병이 발작할 때에는 환자는 갑자기 나뒹굴며 거품을 물
고 경련을 일으키는(막 9:20) 현상을 나타내는데, 이 때에는 자기
도 모르게 무의식으로 자기 몸을 자해하기도 한다.
ㅇ심히 고생하여(카코스 파스케이) - 문자적으로는 '심하게 고통을
받는다'는 뜻으로 그 병의 증세가 심각할 정도로 악화되었음 암시
한다.
ㅇ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 이는 간질병 환자의 갑
작스런 발작으로 인한 돌발적이고도 불가항력적인 위험성을 호소한
말이다. 한편 막 9:22에 따르면 귀신에 의해서 이 환자가 무의식적
으로 자해(自害)한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실로 귀신과 악령들은
사람의 마음에 침투하여 그 평온하게 하지 못하고 그들의 악한 습
성과 파괴적인 경향대로 그 인격을 두렵고 불안하게 하고 평형 감
각마저 앗아감으로써 자멸을 유도 하곤 한다.
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ㅇ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 환자의 아비는 예수의 소
문을 듣고 아들을 예수께 데려왔으나 예수의 변화산 행(行)으로 인
해 만나지 못하고 대신 남은 아홉 제자들에게 자신의 딱한 처지를
호소했던 것 같다. 사실 그 제자들도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이적을 행하기도 했었다(10:1;눅 10:17). 그러나 그 같은 권능은
그들의 영원한 소유가 될 수 없었으며, 또 오직 온전한 믿음과 예
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지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ㅇ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 제자들의 실패는 13:54-19:2 전체를
통해 반복되는 주제이다(1416-19, 26, 23, 33;16:5, 22;17:4, 10,
11). 결국 이러한 실패는 제자들이 진보와 실패 사이를 오가는 것
을 보여 주고 있다(14:26, 27, 31). 실로 이것은 천국의 이적을
행하는 능력은 자신의 것이 아니며 마술과는 달리, 전적으로 하나
님께서 주시는 것이요 그 자신의 믿음의 여하를 따른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19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ㅇ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 '믿음이 적은'은 사본들에 따라 어
떤 사본은 '아피스토스'(믿음이 없음, unfaith) 또다른 사본은 '올
리고피스토스'(믿음이 부족함,little-faith, poor-faith)로 각각
표기하고 있다. 이 중 17절에 제시된 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여'라는 책망과의 조화를 위해 전자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좋다. 그
러나 비록 후자의 견해를 받아들인다해도 본문에서는 믿음이 적음
을 지적한다기 보다 그들의 닐음이 결핍되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Bonnard). 실로 적은 믿음은 아무리 하찮더라도 겨자씨와 같이 반
드시 결과를 산출하게 마련이지만 믿지 않는 불신앙은 그 어떠한
결과도 산출해 낼 수 없다. 한편 마가는 본문과 기도의 관련성을
기술하고 있다(막 9:29). 사실 기도는 하나님의 권위와 섭리를 믿고
인정하는 자의 특권이요 의무라는 점에서 마가의 보고는 적절하다
하겠다.
ㅇ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이는 예수께서 새릅고도 중요한 교훈
을 말씀하실 때, 듣는 이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자주 사용하신
표현이다(5:18).
ㅇ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 겨자씨는 보통 씨앗 중에서 가
장 작은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으로 팔레스틴 지방 또는 지증해 연안
등지에 많이 자라며 최대로 성장하면 약 3-4.5m의 큰 나무로 자란다
고 한다. 이것은 '니코티아나 그라우카'(Nicotianaglauca) 혹은
'브라씨카 니그라'(Brassica nigra) 등으로 알려져 있다. 이 겨
자나무는 원줄기와 몇개의 곁줄기로 자라는데 원줄기는 새가 앉아도
부러지지 않을 만큼 강하다고 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결국 믿음이 지닌 생명력과 감추어진 무한한 가능성을 강조하기 위
해서일 것이다. 정녕 믿음은 무한한 자생력을 지닌 것으로, 근본적
인 문제점은 그 양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하찮을 정
도 일망정 그 있고 없고가 문제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과 그 뜻을 믿는 것으로서(Wyciffe)
자기 신뢰나 신념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따라서 겨자씨 믿음이 산을
옮기는 믿음으로 가시화(可視化)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믿
음일 때에만 가능하다. 한편 공관복음에서는 겨자씨에 대한 언급이
다섯번 나온다(13:31;17:20;막 4:31;눅 13:19;17:6).
ㅇ이 산을 명하여...옮길 것이요 - 겨자씨와 산은 표면적으로는 크
나큰 대조를 이루며 '옳기는 것'에 대한 회의를 불러 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온전히 보존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하나님과의 생명적 관계를 지속하면 그 믿음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
님께서 믿음의 분량에 따라, 그 주권적인 방법에 의해 인간의 상상
을 초월하는 일들을 이뤄내고야 만다. 즉 겨자씨 믿음은 그 소유자
로 하여금 능력과 지혜가 충만한 하나님과 꿇임없이 연결시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초월적인 경륜을 이 땅에 실현하게 한다. 한편
여기에서 '산'이란 문자적인 의미보다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커다란 문제, 난제(難題) 등을 함측하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21:21, 22:사 40:4;49:11;54:10;막 11:23;눅 17:6;고전
13:2).
ㅇ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카이 우덴 아뒤나테세이 휘민) -
문자적으로 '그리고 너희에게 어떤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and noting shallbe impossoble to you)이다. 이는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전능성에 대한 약속으로서 그 효력은 지금도 유효
(有效)하다(19:26;빌 4:13;히 11;1).
21 (없음)
22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ㅇ갈릴리에 모일때에 - '모이다'(아나스트레포데논)란 '거류하다',
'머물다', '살다' 등의 뜻인 '아나스레포'의 헌현 분사다. 이는 예
수께서 수 주간을 팔레스틴 북단에 머무시다가 다시 헤롯 안디바의
영지인 갈릴리 지역으로 조용히 접근해 들어오셨음을 암시한다. 이
러한 갈릴리 복귀는 예루살렘으로의 최후 여행을 위한 마지막 준비
작업이었다. 한편 막 9:30은 이와 같은 사건을 다루면서 '갈릴리 가
운데로 지날새'라고 기록 함으로써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를 통과하
지 않으시고 윗 갈릴리의 한적한 사잇길을 통해 자신의 고향이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셨음을 암시한다. 일반적으로 갈릴리 지역은 북쪽으
로 헬몬산 근방에 위치한 티타니(레오테스)강, 서쪽으로 갈멜산을
중심으로 한 지중해 연안, 남쪽으로 에스드렐론 평원, 동쪽으로는
요단강과 갈릴리 호수 등으로 구성된 남북 약 96km,동서 약 48km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이다. 본문에서는 헬몬산 아래에서 갈릴리 호수
근처에 있는 가버나움 지방으로 오시는 장면을 묘사할것 같다(24절
;막 9:30).
ㅇ예수께서...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공식적
으로 당신 자신의 수난에 더해 말씀하신 두번째 예언이다(16:21).
여기서 '넘기워'(파라디도스다이)란 두 가지 점에서 애매모호(曖昧
模糊)하다. (1) 이는 '넘기다', '배반하다'는 뜻일수 있는데,문맥에
따라서 강한 의미 가질 때는 후자의 뜻이고, 한 의미를 가질때는 전
자의 뜻을 가진다. (2) 수동형('넘겨주다')을 취할 때, 하나님께서
예수를 넘겨 주신 것인지(Origen, Clark), 가롯 유다가 예수를 배
반한 것인지(Bengle) 모호하다. 여하튼 본문 전체의 문맥으로 볼
때 이 같은 다양한 견해는 조화될 수 있는 것들이다. 한편 본문의
'사람들의'란 말은 유대인의 대표자로서의 대제사장(16:21)또는 십
자가 처형에 관여한 이방인들(20:19)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데 이같은 수난 고지(受難告知)는 순전히 믿음이 부죽한 제자들을
위한 것으로서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이 일을 뚜렷
이 기억하게 된다(눅 24:^).
23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ㅇ죽음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 예수께서는 패역한 인간
들의 순간적인 승리('죽음을 당하고')와 하나님의 영원한 승리('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를 대비시켜 닥쳐오는 당신의 삶을 정확히 예시
하셧다. 즉 부활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들의 모든 궤계(詭
計)와 포악(暴惡)을 일거에 물거품으로 돌릴수 있다는 하나님의 궁극
적 승리를 예시한 것이다. 결국 이 논지의 초점은 승리의 부활을 맞
이하기 위해서는 순간적인 죽음을 필연적으로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ㅇ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막 9:32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의 수
난 예고를 깨닫지도 못하고 그에 대해서 더 이상 묻기도 두려워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실로 그들은 예수의 수난 예고 소식에 온 정신이
쏠려 그 이후에 있을 영광스런 부활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만한 여
유가 없었다. 그들은 계시의 불완전한 이해 때문에 인간적인 두려움
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 이후에야 비로소 수
난의 참의미를 이해하는 완전한 신앙에로 발전하여 진정으로 자유할
수 있었다. 요한 복음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음심으로 제자들이
슬퍼하겠으나 다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슬픔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 계시의 동시적 이해를 촉구하고 있다(요 16:
16-22).
24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ㅇ가버나움 - '나훔의 마을'이란 뜻으로서 갈릴리 호수 서북쪽에 위
치한 성읍이다. 오늘날에 이 성읍은 어디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일반
적으로 '텔 훔'이란 곳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곳은 예수의 선교 사
역의 중심지였으나(8:5-15;9:2-8;18:1-5), 회개하지 않고 교만함으
로서 인해 예수의 책망받는 지역이기도 하다(11:23). 이제 예수께서
는 수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오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리 방
문하셨다.
ㅇ반 세겔 받는 자들이 - '반 세겔'이란 헬라어로 '디드라크마'로서
'두드라크마'를 의미한다. 그런데 한 드라크마는 헬라어인 하루 품
삯을 나타내는 동전 명칭으로 유대인에게도 사용되는데 일반적으로
1/4세겔로 취급되었다. 한편 이 '반세겔'은 유대인들이 출애굽한 후
시내산에서 인구 조사를 한 직후에 모든 유대인 남자들이 내었던 생
명의 속전,즉 애굽에서 건져주신 생명의 대가로 여호와께 바쳤던 양
과 같은 것이다(출 30:11-16). 이것은 선민 이스라엘에게는 의무적
으로 부과된 것이었다. 바벧론 포수 후 그 의무는 20세이상된 자로
서 3/1세겔로 조정되었다(느 10:32). 예수 당시에도 느헤미야의 수
정된 의무조항에 따라 매년 유월절 전인 봄에(아달월 15일) 모세 당
시의 환율에 의해 계산, 부과했다. 따라서 당시에는 반세겔을 바꾸
려는 환전상으로 들끓고 있었을 것이다. 이 환전상들은 그 수수료로
인해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여하튼 이 반세겔은 로마에 바치
는 공공의 세금이라기보다 당시 주로 성소의 유지 비용으로 사용되
었다. 한편 여기에서 '반 세겔 받는 자들'(호이 타디드라크마 람
바논테스, those receiving the didrachmas)은 일반적으로 국
세를 거두는 '세리'(텔로나이)와는 다르다(9:10). 이것은 반 세겔을
거두는 자들이 신분상 로마 위해 세금을 거두는 자들이 아니라, 이스
라엘의 성전을 위해 거두는 다른 계층의 사람들임을 암시한다.
ㅇ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 이는 세금 징수자들이 이미 예수와 베드
로 등의 제자들과의 관계를 익히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와 더
불어 성전을 대하시는 예수의 태도가 과연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보
기 위해 이들은 예수께로 시선을 돌렸던 것이다.
25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26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27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ㅇ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히나 데 메 스
칼달리소멘 아우투스) - 직역하면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실족지
않게 하기 위하여'(But that we may not offend them)가 된
다. 길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율법 위에 계신 분으로서
율법이 정한 바 그 의무 조항을 능히 초월하실 수 있으셨다. 그
러나 예수께서는 다인의 유익을 우선 생각하시는 지극한 사랑의
원리에 따라 스스로 겸비(兼備)해지기를 원하셨다(3:15). 한편
본문의 '오해케 한다'는 '스칸달리소멘'은 단순히 넘어뜨린다는
뜻이 아니라 아예 함정에 빠뜨려 치명적인 피해를 제공한다는 의
미로 보아야 한다. 이는 결국 예수께서 성전세 납부를 거부함으
로써 야기될 상황, 곧 예수가 왜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자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을 율법으로 파괴하
고 성전과 예배를 무시하는 자들로 오해하여 마침내 당신의 복음
을 먼저 배척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예방적 조처로서 성
전세 납부를 하고자 하신 것이다. 이러한 겸비의 모범을 따라 훗
날 사도 바울도 다른 사람을 위한 자기 절제와 겸비의 도를 가르
치게 된다(고전 8:13;9:12, 22).
ㅇ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 성전세
조달을 위한 예수의 구체적인 지시 사항이다. 이로써 우리는 동
전 한 닢이 고기 입 속에 있음을 미리 아시는 예수의 전지성(全
知性)과 그 동전을 이미 있게 하신 다자신의 전능성(全能性)을
알수 있다(Wycliffe). 한편 신약에서는 낚시 기사가 이곳밖에
없고 대부분은 그물을 사용하는 것으로 언급된다. 여하튼 예수의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율법의 요구에서 면죄되시지만, 율
법에 순종하실 뿐 아니라 제자들의 필요에 대해서도 당신만이 하
실 수 있는 기적적 방식으로 예비해 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 사
건은 수난 예고(22, 23절) 바로 뒤에 위치하여 우리로 하여금 예
수의 겸비를 다시 생각케 한다. 즉 그분은 바다를 잠잠케 하시며,
오병 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능력자이셨지만 스스로 낮추시고 쓸
데없이 남으로 오해케 하지 않으시려고 이러한 이적의 수고를 아
끼지 않으셨던 것이다(11:28-30;12:20). 이같은 겸손의 교훈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 및 오늘 우리들을 위한 것이다.
ㅇ한 세겔(스타테르) - 그리이스에서 통요되던 금화로서 대략 4
드라크마, 곧 한 세겔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것이면 1인당 반세
겔요구되는 성전세의 두 사람분을 납부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례수의 이적은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가장 정확한 은혜로
채워진다.
ㅇ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 '나와 너'란 예수와 베드로가 비록 하
나같이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었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입장에서
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즉 예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를 지니신 분으로서 성전세를 내지
않으셔도 됨에도 불구하고 내시는 것이며, 베드로는 그 근본이 죄
인된 인간이요 사망에 처헌 자로서 생명의 속전 곧 성전세를 내야
할 자였던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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