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4장
1 그 때에 분봉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ㅇ그 때에 - 헤롯이 세례 요한을 처형시킨 A.D. 39년 이후이며,
갈릴리 전도의 후반기가 시작되는 때로 예수와 반대자들과의
갈등이 표면화되어 가는 시기이다. 개인적으로는 예수의 선구자
로서, 구속사적으로는 구약의 종말과 신약의 출발을 증언하기
위하여 특별히 부름받은 세례요한은 세례 행위와 예수에 따른
메시아의 등의 직접적 방법으로 선구자의 사명을 감당하였지만
동시에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예수의 메시아
로서의 삶을 예표하였다. 다시 말하면 세례 요한의 삶과 죽음은
그 전체가 예수의 모형(模型)이었다. 즉 그의 투옥(14:3)을 통해
서 예수의 수난의 삶이, 그리고 그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의 십자
가에서의 죽음이 예표(豫標)되었다. 한편 이 세례 요한의 죽음을
기점으로해서 예수의 사역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 예수께서 직접 당신의 선구자라고 지칭하였다. 요
한의 죽음 이후, 즉 의로운 말을 외치다가 세상 권력자에게 당하
는 죽음에서 조차 당신의 예표의 역할을 한 요한의 죽음을 목격
한 이후 예수는 본격적으로 스스로 당신이 메시야이심을 공개적
으로 드러내시고 수차의 수난 예고를 하시는 등 당신의 메시야직
의 절정인 십자가 고난을 준비하시게 된다. (2) 당시 팔레스틴 북
부, 즉 헤롯 안디바스의 관할 지역은 물론 전 유대 땅에서 가장
큰 사회.종교적 이슈(issue)의 주제이던 세례 요한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예수 한사람에게 전 사회적 억압에 시달리던 일반 대
중들은 예수에게 정치적인 기대를,주로 정치 기득권층은 예수에게
적대적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1),(2)의 사실을 종합래 볼 때, 예
수는 전 구속사적 관점에서 사역을 행하고 미래를 준비하셨다. 그
러나 세상은 예수의 행위의 참의미를 이해하지못하여 부단히 자신
들만의 편협한 시각으로 예수를 오해하고 있었다. 이런 오해는 예
수 부활 이후에야 비로소 해소되기 시작한 것이다.
ㅇ분봉왕 헤롯 - 여기서 분봉왕(테트라아르케스)이란 '네 개로 이
뤄진 한 벌'을 뜻하는 '테트라스'와 '통치'를 뜻하는 '아케르'의
합성어로 문자적인 뜻은 '한 나라의 1/4을 통치하는 자'이다. 다
시 말하면 이들은 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아 로마의 정복지역의 한
부분을 통치하는 괴뢰 정부의 왕을 가리킨다. 더 자세한 내용은
신약 개론 중 '정치적 배경'란을 참조하라. 본문의 헤롯은 헤롯
대왕이 죽은 B. C. 4년 부터 A. D. 39년까지 네 개의 통치지역으로
나뉜 유대 땅 가운데서 갈릴리와 베레아를 다스렸던 헤롯 안티파스
(Herod Antipas)이다. 따라서 이 시대를 주무대로 활동하셨던
세례 요한 및 예수와 관계가 깊었던 사람으로, 예수로부터는 그의
교활하고 간사한 성품 때문에 '여우'라고 불리우기도 하였다(눅
13:32).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그에게 심문(審問)을 받으
심으로써 그는 세례 요한 및 예수의 처형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되었다(눅 23:7).
ㅇ예수의 소문을 듣고 - 막 6:14에 의하면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
것'이며, 눅 9:7에 의하면 예수의 행한 '모든 일'에 대해서 헤롯에
게 보고(報告)가 된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마가와 누가의 두 복
음서에서의 예수에 대한 소문은 모두 그의 '제사 파송'과 관련된
것으로 편집되어 있다. 그러나 대략 A.D. 29년경, 즉 아무리 빨리
잡는다해도 주께서 죽기 1년전에 있었던 제자들의 전도 파송의 결
과, 제자들이 행한 사역과 능력에 의해서 예수에 관한 소문이 더욱
더 멀리 퍼져나갔다고 하더라도 헤롯이 지금 처음으로 예수의 소문
을 들었다고 하는 것은 이상하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이미 일년
이상 헤롯의 통치지역인 갈릴리에서 말씀을 전파하시고 이적을 행
해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롯은 갈릴리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고
주로 세례 요한을 가두어 놓았던 베레아의 마케루스(Machaerus)
궁전에 있었거나 또는 사치와 향락에 심취해 있었으므로(F.R.
Fay, Homer A. Kent, Jr.) 갈릴리 지방에서는 그가 예수에
관해서 가장 나중에 알게된 사람 중에 속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한편 그의 신하들이 예수의 소문에 관해 언급하고 그 일을 문
제삼으려고 하는 일은 예수의 사역이 예수의 진의(眞理)와는 달리
그들에게 얼마나 큰 정치적 위협(威脅)으로 다가오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을 암시한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정의와 진리는 그것이 굳이
불의와 비진리를 정면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해도 물과 기름이 서로
갈라지듯이 서로 서로를 밀어내기 마련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2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 하더라
ㅇ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 누가는 이 부분에 대해 먼저 신하 중 몇
몇이 보고하고 헤롯이 곧 그 사실을 거부하는 듯한 인상으로 기술
하고 있다(눅 9:7-9). 이에 비해 마가는 헤롯이 신하들의 말에 동조
(alignment)한 것으로 기술했다(막 6:14-16). 아마 이러한 차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튼 심경의 변화를 표현한 것으로, 누가는 헤롯이
신하의 말을 듣고 난 즉시 일어난 상태를, 마태와 마가는 시간이 조
금 더 경과한 뒤에 헤롯의 감정이 가라일은 후 헤롯이 예수를 세례
요한으로 판단할 때의 일을 기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ㅇ이는 세례 요한이라 - 헤롯이 예수를 다시 살아난 세례 요한으로
오해한 원인은 (1) 그가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며, (2) 예수의 사역과 세례요한의 사역에 있어서 유사점, 곧
설교에 있어서의 회개 촉구와 하나님 나라 도래의 임박성 강조, 유
대 교권주의자들에 대한 책망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사실 헤롯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예수를 부활한 세례 요한으로 이해(16:14)는
예수를 유일무이(有一無二)한 메시야로 고백한 제자들의 신앙고백과
는 엄청난 질적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ㅇ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 이러한 결론을 내린 사실에서 적
어도 헤롯은 미신적이며 절충적인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바리새적인 부활관에 영향을 받은 듯, 자신이 살해한
요한이 부활하여 죽기 전보다 더욱 강한 모습으로 행동한다는 미신적
사고에 사로 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때문에 그는 훗날 예수
를 십자가 형(刑)에 처하도록 하는데도 묵시적 동조를 하게 된다.
한편 유대인들의 부활관은 신약 시대에 이르러 정립된 것이 아니다.
성경에는 구약 시대에도 이미 부활사상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몇몇 구
절들(욥 14:13-15;단 12:2-3;호 6:2)이 있다. 그러나 부활사상이 훨
씬 다양해지고 많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신구약 중간시기를 거친 신약 시대였을 것이다. 특히 바
리새파 사람들은 부활신앙의 열렬한 신봉자였고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사상을 전면 부정(否定)하였다.실로 여기서 죽은 자는 모두 부활
하여 심판을 받는다는 신약의 가르침과 달리 바리새파 사람들은 부할
은 의로운 유대인들에게만 해당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예수의 가르
침과 차이점이 있다.
ㅇ이런 권능이 - 세례 요한이 그의 사역 중에 비록 어떠한 표적도 해
하지 않았다(요 10:41) 하더라도 헤롯의 이 말에 의하면 많은 사람이
그를 권세(여수시아)와 능력(뒤나미스)을 갗춘 자로, 즉 적어도 그는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구러나 요한의 권위에 정도가 문제
가 아니라, 이런 자 심지어 11:11에 묘사한대로 여자가 낳은 자, 즉
사람의 피를 받고 태어난 자 중 가장 큰자가 예수에 대한 선구자로
서 예수의 메시야직에 대한 증거라는 점에서 마태는 이를 부각시킨
것 같다.
ㅇ운동하는 도다 - '운동하다'는 헬라어 '에네르게오'는 '활기를 돋
우다','움직이다'의 의미인 영어의 'energize'에 해당하는 말이
다. 즉 무엇인가 초월적 힘이 한 인격에게 영감(靈感)과 (動力)을
주는 상태를 가리킨다.예수는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다른 초자연적인 힘(바알세불 등)늬
도움으로 행한다고 생각했듯이 헤롯도 죽은 세례 요한의 영(靈)이
예수 안에서 그 권능들을 행하게 생각하였다.
3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ㅇ전에 - 이 말은 3-12절의 내용이 적어도 1, 2절의 시점 이전에 일
어났던 일의 회상(回相)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공관복음 모두 이 헤
롯의 공포와 세례 요한 살해의 사건을 12제자 파송 사건과 연결시키
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12제자 파송을 즈음하여 요한 살해가
있었고 12제자 파송으로 전국이 예수 소문으로 들끓자 헤롯이 두려워
하였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ㅇ동생 빌립 - 헤릇 빌립 1(Herod Philp 1)세를 말한다. 헤롯 대
왕과 대제사장의 딸 마리암네(Mariamne 2)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로, 헤로디아의 첫 남편이며 살로메의 부친이다. 한편 그와 헤롯 안
티바스와의 관계는 이복 형제간이었다<헤롯왕가의 가계 도표 참조>.
ㅇ헤로디아의 일 - 여기 헤로디아는 헤롯 안티바스의 이복 형제인
'아리스토블루스'(Aristobolus)의 딸이었다. 그녀는 헤롯 빌립,
곧 자신의 삼촌과 결혼하여 살로메를 낳았다. 그런데 사바티안
(Sabatian) 왕인 아레타스(Aretas)의 딸과 이미 결혼한 바 있
는 또다른 삼촌 헤롯 안티바스가 그녀를 유혹하여 남편 빌립을 버리
고 자신과 불법적인 재혼을 하게 했다.그런 까닭으로 인해 아레타스
의 딸은 본국으로 도망가게 되고 끝내 두 나라 간에 전쟁이 발발 하
게 된다. 결국 안티바스는 이 전쟁에서 참패하게 된다. 유대사가 요
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이때가 세례 요한을 참수(斬首)시킨
바로 직후였기 때문에 이 참패의 원인을 의인의 살해로 말미암은 징
벌이라고 간주한다. 한편 본문의 '헤로디아의 일'이란 헤롯 안티바스
와 헤로디아의 불법적인 결혼에 대한 세례 요한의 책망을 가리킨다.
이 일로 인해서 헤로디아는 신약의 엘리야인 세례 요한을 미워하고
죽이고자 계획하였는데(막 6:19), 이는 바알의 선지자를 죽인 일로
엘리야를 죽이고자 했던 이세벧의 경우와 좋은 대조가 되는 사건이었
다(왕상 19:1,2).
ㅇ옥에 가두었으니 - 요한은 유대인의 3대 요새(要塞) 중의 하나인 마
케루스에 있는 감옥에 갇히었다고 한다. 이곳은 헤롯과 헤로디아가 주
로 거처하는 베레아의 남부를 방어하는 요새로, 표고 736m의 사해 동
편 황량한 사정에 위치하고 있었다. 요한의 투옥 이후에 그의 제자들
중 일부는 별개의 집단으로 계속 존속하고 있었으며 그가 옥에 갇혀
있을 동안에는 계속해서 그의 지시를 받았던 것 같다(11:2).
4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ㅇ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 헬라어 동사 '엘레겐은 과거 미완료시상
으로서 '그가 반복해서 말하곤 했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요한이 헤롯
을 직접 만나 그를 책망했다고 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설
교 하는 중에 혹은 세례를 주는 등의 여러 행위속에서 헤롯과 헤로디
아의 불법적인 결혼에 대해 공공연히 비난하였음을 의미한다.
ㅇ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 '광야에서의 외치는 자의 소리'
였던 세례 요한의 '고발 내용'이다. 요한이 헤롯을 책망한 것은 그가
첫번째 부인인 아라비아 왕 아레다(고후 11:32)의 딸을 버림으로써
외교적 갈등으로 인하여 나라의 정치적 위기를 몰고 온 때문이라기 보
다는 이방인 출신(헤롯대왕은 이두매 사람이었다)인 헤롯이 자신이 유
대인이 되었음을 자처하면서도 유대의 율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율법(레 18:16;20:21)에는 형제의 아내와 결혼할 수 있는 조건은 그
형제가 아들이 없이 죽었을 때 뿐이다. 그러나 헤로디아의 첫 님편인
헤롯 빌립 1세는 여전히 살아있었으므로 그들은 간음죄를 범한 것이
며, 또한 헤롯파 헤로디아는 삼촌과 조카(헤로디아는 헤롯 대왕의 또
다른 아들 아리스 토블루스의 딸이다) 사이로 이들은 근친상간(近親相
姦)의 죄를 범한 것이 된다.
5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민중이 저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민중을
두려워하더니
ㅇ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 그 이유는 두 가지, 즉 (1) 도덕적
이유, 즉 요한이 자신의 비윤리성을 비난했기 때문에, (2) 정치적
이유, 세례 요한이 민중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너무 심각해졌기 때
문에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문제는 상호 연결된
것으로서 나누어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유대인 사가
(historian) 요세푸스(Josephus)등은 정치적 이유에 초점을
두고, 성경 기자들은 비교적 전자에 기울어진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
을 뿐이다. 사실 세례 요한에게 있어 헤롯가문이나 로마의 식민체제
등을 비판하는 것이 임무는 아니었다. 오히려 구속사적 입장에서 구약
의 종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인한 신약의 시작을 증언하는 것이
그의 주(主) 임무였다. 또한 그가 세속 정치인에게 오해를 받아 죽임
을 당하는 것은 예수께서도 정치적 오해를 받아 죽임을 당한 것과 연
결되어 다시 한 번 세례 요한이 예수의 선구자였음을 상기시켜 준다.
ㅇ민중을 두려워하더니 - 막 6:20에서 헤롯이 요한을 두려워하여 그를
처형하지 못하고 있었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이
때 헤롯이 요한을 단번에 처형치 못한 것은 백성들의 폭동을 우려했기
때문이라 전한다. 여하튼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지도자들을 제외한 민
중의 태도는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매우 호의(好意)적 인 것이었다(3:5,
6;11:7-4). 그에 대한 민중들의 신뢰와 지지의 원인은 다음과 같이 생
각해 볼 수 있다. (1) 유대지도자들과 율법주의자들의 죄악을 고발하
고 그들을 책망하였기 때문이다. (2) 적국(敵國)인 로마를 등에 업고
민중들을 억압하고 있는 헤롯왕가를 비판하였기 때문이며,(3) 예수께
서도 그를 크게 칭찬하셨으므로 예수를 따른 자들도 세례요한을 참선
지자요, 예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한 선구자로서 인식하고, 사실을 사
람들에게 전했기 때문이며, (4) 헤롯이 세례 요한을 불법적으로 감금
한 것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와 동정으로 인해서 세례 요한의 인기가
더욱 더 고조되고 전국민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6 마침 헤롯의 생일을 당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7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대로 주겠다 허락하거늘
ㅇ헤롯의 맹세로 - 살로메의 육감적 독무에 심취한 헤롯 안티바스는
탐욕스럽고 권세있는 제왕(帝王)으로서의 기분을 맘껏 누렸다. 그는
분위기에 도취되어 마치 고대 페르시아 군주들이 하던 식으로 호언장
담을 늘어 놓았다(에 5:3, 6;7:2).헤롯은 자기 어리석음에 도취되었
던 것이다.
ㅇ허락하거늘 - '호몰로게오'는 '확언하다', '공언하다' 등의 의미로,
맹세와 다짐을 동반한(메타) 허락으로서 반복될 수 없는 약속이다.
물론 왕이 기쁜 날을 맞아 신하에게 훌륭한 선물을 내리는 것은 일상
의 일이었지만 헤롯은 자신이 이행해야 할 내용을 알지도 못하면서
기분에 도취된 채 호언 장담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과오(過誤)를
저지르게 된다.
8 그가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ㅇ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 그 당시 살로메는 육체적으로는 뭇남성의
시선을 집중시킬만큼 성숙했는지 모르나 정신적으로는 아직 제 어미에
게 의존해야 할 만큼 미숙한상태였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악의 도구
로 전락하게 된 크나큰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본문의 '시킴'에
해당하는 원어 '프로비바스데이사'는 '선동하다', '권면하다'는 뜻으
로 헤로디아의 집요하고도 악의에 찬 일면을 보여준다. 여하튼 본문은
세례 요한의 죽음이 바로 헤로디아의 사주(使嗾)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말이다. 요한의 죽음은 그녀의 간계(奸計)에 의한 것이
었다. 헤로디아는 분명히 요한의 처형에 대해 끊임없이 헤롯을 졸랐을
것이다. 그러나 결심을 못하는 헤롯의 행동을 통해서도 자신의 요구를
포기하지 않던 헤로디아는 어린 딸을 이용하여 눈에 가시와 같이 자신
의 부정(不貞)을 고발하던 요한을 제거하려 하였다.
ㅇ세례 요뱐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 헤로디아의 횹혈귀적인 완악상을
드러내 준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에 의하면, 이때 헤로디아는
자신의 부정한 결혼을 고발하던 요한의 칼날같은 혀가 침묵하고 있는
모습을 보기 원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요한을 마음껏 저주하고
조롱하기 원했기 때문에 참수(斬首) 당한 요한의 머리를 요구했다고
한다. 한편 여기 언급된 '소반'은 타원형으로 된 얇고 큰 접시를 가리
킨다.
ㅇ여기서 내게 주소서 - '여기서'라는 말은 유대의 정치, 종교지도자
와 로마시의 군관들이 모인 잔치 자리로서 연회석이자 공식적인 모임
의 장소이다. 헤로디아는 헤롯이 그의 딸에 대한 맹세를 깨뜨릴 것을
염려하여 모인 사람들의 눈과 귀를 담보(擔保)로하여 그(헤롯)를 위협
하고 요한의 처형을 더이상 지체치말고 즉각 실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9 왕이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 명하고
ㅇ왕이 근심하나 - 헤롯의 근심이 무죄한 자를 죽이는 것에 대한 양
심의 가책 때문인지 아니면 요한의 죽음으로 인해서 일어날지도 모를
민란 대문인지 확실치는 않다. 어쨌든 그의 근심은 '양심의 최후 투쟁'
(plumptre)이었으나 그는 의가 아니라 자신의 위치에 집착, 선택함
으로써 악에게 굴복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ㅇ자기의 맹세한 것 헬라어 '호르쿠스'는 맹세의 뜻인 '호르코스'의
복수형으로, 맹세가 여러 번 반복되었거나 아니면 그 맹세가 확정적일
만큼 강력했던 것임을 의미 하는 말이다. 헤롯이 세례 요한을 처단하도
록 허락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첫째, 고대 근동에서의 맹세는 율법
에서도 평시되어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특히 성경적인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거짓없음과 약
속이행의 의지를 엄숙하게 맹세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위반할 경우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향 처벌을 받더라도 이의(異意)가 없는 것을 의미
한다(민 30:1-8, 강해 '서뤠과 맹세에 대하여') 신약 시대에 이르러 맹
세는 하나님 대신에 신의 인격, 예배에 관련된 물체, 우주만물, 성전
등을 가리켜 맹세가 행해졌다. 그러나 맹세의 남용(남용)으로 인해서
예수께서는 일체(일체)의 맹세를 반대하시기도 하였다(마 5:34-37). 한
편 구약의 인물 중에서도 경솔한 맹세로 인해서 절망적인 상태에 빠지
게 된 사람으로 입다(삿 11:31-39), 사울(삼상 14:38ff)등이 있다. 둘
째, 헤롯은 그의 왕으로서의 권위 때문에 맹세를 깨뜨릴 수 없었을 것
이다. 고대 사회에서 왕의 말은 곧, 국법이었다. 그 예로 다니앨을 사
자굴에 집어넣었던 메대 나라의 다리오 왕의 금령을 들 수 있다(단 6
:14-15).
ㅇ그 함께 앉은 사람들 -막 6:12에 의하면 이곳에 초대된 사람들은 대
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듸이다. 이 사람들은 왕의 잘못을 제
지하는 얼리야김의 방백들과는(렘36:25) 달리 헤롯의 불의를 조장하고
촉구하는 자들이었을 겻이다. '같은 깃털을 가진 새들이 함께 모이듯'
헤롯의 주위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모두 헤로디아와 같이 부정하고 사
악한 자들로서 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대신에 그의 비위를 맞추고 아첨
함으로써 세례 요한의 참수를 결단하게하는 결정적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들이 바로 어리석은 헤롯의 맹세의 증인이 되었고 사악한 헤로디아
의 살인에 동조자(同調者)가 되었다.
10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 베어
ㅇ사람을 보내어...옥에서 목 베어 - 심문이나 재판의 판결없이 사람
을 처형하는 것과 더구나 모세 율법에 따르면 목을 베어 죽이는 일은
종교적, 신앙 공동체에 대한 공적 범죄이외에는(출 32:27;신 13:6-18).
참수헝은 그리이스나 로마의 관습을 따른 것이다. 헤롯과 그를 따르는
자들은 이러한 이방적 태도를 반율법적이고 반민족전인 것이어서 그가
아무리 유대인임을 자처한다고 하더라고 민중의 미움을 받는 이유가
되고 있다.
11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여아에게 주니 그가 제 어미에게
가져가니라
ㅇ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 헤로디아는 그녀의 부정과 불의를 끝없
이 고발하던 세례요한의 혀가 잠잠해졌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의 머
리를 요구한 것 같다. 그러나 요한의 처형이 정의를 부르짖던 그의
'소리'를 결코 잠재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ㅇ여아에게 주니 - 여기서 '여아'(코라시온)란 혼기(婚期)가 가까운
처녀를 가리킨다. 사실 그 당시 증근동 지방에서는 조혼(早婚)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십대 중반에 이른 살로메에게 이 용어를 붙인 것은 무
리가 아니었다.
ㅇ제 어미에게 가져 가니라 -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한 뒤
얼마지나지 않아 그의 목을 받아들 수 있게 되었다. 실로 악인은 피흘
리기를 좋아하며, 그것을 신속히 행한다. 한편 루핀(Rufin)의 제롬
(Jerome)은 이때 헤로디아가 뽀족한 바늘로 피로 젖은 세례 요한의 혀
를 사정없이 찔렀다고 전한다. 한편 무고(誣告)한 피를 흘리게 한 헤
롯은 얼마 후 그의 전처의 본국이었던 페트라(Petre)의 아레타스
왕과의 전투에서 참패하여 도주하였고, 또 로마 황제의 진노를 사게
됨으로써 로마 원로원에 의해 프랑스 리용으로 추방되어 거기서 비참
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또한 살로메는 겨울에 얼음 위를 걷다가
얼음이 꺼져 그만 날카로운 얼음에 목이 찔려 죽었다고 한다
(Josephus). 정녕 하나님은 요한이 아닌 헤롯과 그 일당의 목을
요구하신 것이다.
12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고하니라
ㅇ요함의 제자들이...장사하고 - 하나의 조직체로서의 요한의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
이 살아있을 때에 스승과 연락이 잦았으므로(11:2) 스승의 참수 소식을
곧바로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그들은 머리없는 스승의 시신을
안치한 후 곧 예수께 나아갔다. 즉 그들은 스승인 요한의 증언, 곧 예
수가 하나님의 어린 양(요 1:35-40)이라는 말을 듣고 점차 예수를 신뢰
하게 되었는데, 이제 그 스승이 죽자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예수에게로
와서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하였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요한은 생전 뿐
아니라 사후에도 그의 영향력이 대단했는데, 그 결과로서 요한의 제자
들은 팔레스틴을 벗어나 지역에서 여전히 작은 분파로서 존재하였었는
데 그들은 대부분 예수를 중심한 복음의 충만한 지식을 지니지 못하고
단지 편협한 신앙적 지식만을 소유하고 있었다(행 18:24-19:7).
ㅇ예수께 고하니라 - 막 6:30에 의하면 이 보고는 사도들의 선교 활동
에 대한 보고였다. 그러나 마태는 이 보고가 요한의 처형에 관한 것임
을 서술하는 가운데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흡수되었
을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옥에 있는 요한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
을 보고한(11:4 ff)제자들이 요한의 처형 소식을 주님께 알렸다는 사
실은 이미 그들이 예수와 스승 사이의 사상의 일치를 알고있었을 뿐만
아니라 요한의 가르침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은자들이 많았을 것임
을 의미한다.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ㅇ예수제서 들으시고 - 본문에서 예수께서 들으셨다고 하는 내용은 '
요한의 처형'에 관한 소식이 아니라 예수의 권능에 대한 소문이 신하
들에 의해 헤롯에게 보고되었고 헤롯이 그를 다시 살아난 세례 요한
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하는 소식이다(1절). 따라서 3-12절의 내
용은 부록적(附錄的) 설명임에 분명하다. 3절에 보면 요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헬라어 '가르'(왜냐하면)로 시작되는데, 이 '가르'는
어떤 사실에 덧붙여 설명하고자 할 때 쓰이며, 반면에 3절의 초두에
나타나는 '데'(그리고)는 어떤 일을 새롭게 전개시코고자 할 때 사용
되는 말이다(L. Cope).
ㅇ따로 빈들에 가시니 - 세례 요한의 사후(死後) 헤롯이 이번에는 자
신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는 것과 헤롯의 미신적인 두려움
과 그가 자신을 만나보기를 간절히 기대한다(눅 9:9)는 사실을 아신
예수께서는 해롯의 관할지역을 떠나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 벱새다
광야로 가셨다. 이때부터 예수의 사역은 주로 제자들을 염두에 두고
그들을 훈련하기 위한 것이 되었는데, 이는 그가 자신이 앞으로 나
아가야 할길이 바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
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역 주위에서 발생한 여러 사건과 이적
들은 예수의 공생애에 있어서 그 절정에 속하는 것이며 그 이후의 사
건들은 수난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하는 의의를 갖는다.
ㅇ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 예수께서는 전에도 바리새인
들의 적의(敵意)를 피해 떠나신 적이 있는데(12:15), 이제는 헤롯 안
티바스를 피해 안식과 묵상을 위해 떠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피하신 또 다른 이유는 12제자들이 선교 여행을 마치고 막 도착했기
때문이다(막 6:30;눅 9:10). 그 제자들은 영.육의 휴식기가 필요했고
자신들의 선교 방법에 대한 검토 및 예수께 복음의 비빌을 좀더 깨우
침 받아야 했다. 한편 누가는 예수가 가신 빈들이 벱새다(눅 9:10).
즉 갈릴리 북동쪽 해안에 위치한 벱새다 율리우스(Bethsaida
Julius) 지방에 속한 곳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갈릴리 호수
해변을 따라서 도보(徒步)로 예수를 좇아갔을 것이다. 무리들은 선지
자로 여기던 세례 요한의 처형소식을 듣고 목자 잃은 양처럼 방황하
다가 예수 계신 곳을 듣고 그분에게서 영혼의 쉼을 얻고자 찾아 나선
것 같다.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ㅇ예수께서 나오사 - 예수께서는 자신이 공개됨으로써 대적자들의 표
적이 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자들과 조용한 무리를 향해 나아오
셨다. 이것은 바로 인간 자신의 자유 의지에 의한 결단에 대해 선택,
구원하시기 위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의지가 응답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ㅇ큰 무리 - 직역하면 '많은 무리'라 된다. 한편 이 사람들의 수(數)
를 21절과 막 6:44에서는 남자만 '오천 명'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
당시 숫자 계산에 들지 않는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포함한다면 이 무
리는 적어도 만 오천내지 이만 명은 넘었을 것이다.
ㅇ불쌍히 여기사 - (스플랑크니조마이). 헬라어의 이 동사는 유대인
들이 참으로 애끓는 아픔의 세월을 보낸 디아스포라(Diaspora)상
태로 살아가기 시작할 때 생겨났다고 한다. '불쌍히 여기다'라고 하
는 말은 내장 혹은 심장 등 인간의 내부로부터 그 아픔을 느끼는 것
을 의미한다. 이는 히브리인들이 '내장'(스플랑크나)을 인간의 깊은
감정이 거하는 곳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실로 '인간에 대한 긍휼'은
예수의 전인격성을 대표하는 속성으로, 자식에 대한 어버이의 간절한
정(情)이상의 애틋한 긍휼의 마음이다. 한편 예수의 인간에 대한 최
대한의 긍휼은 바로 십자가 상에서의 대속의 행위로써 드러나고 있
다. 그런데 예수께서 병을 고쳐주시는 경우 사람의 믿음을 보고서 행
하시는 적도 있지만 흔히는 그 자신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심'으로
병고침의 이적을 행하셨다.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ㅇ저녁이 되매 -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은 저녁(옵시아스)을 두 가지
로 나누어서 이해하였는데, 제 1저녁은 늦은 낮, 주오후 3시부터 시
작되고, 제 2 저녁은 일몰 이후 부터 시작되었다. 본문의 구절은 제
1저녁을, 23절에서는 제 2저녁시간을 가리킨다.
ㅇ이곳은 빈들이오 - 빈들을 가리키는 말인 '에레모스'는 광야 혹은
한적한 곳으로,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던 곳도 이러한 곳이었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
나와 메뚜기로 매일의 양식을 삼았던 곳도 바로 이러한 곳이었다.
따라서 마을이 없고 인적이 드문 이러한 곳에서 자연식품인 메뚜기와
석청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에 의해서 마련된 만나를 제외한
다른 떡이나 음식을 기대한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헤롯은 그의 찬란한 궁전에서 귀족들과 연회릍 벌렸지만 그 연회는
살인과 범죄의 현장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의 제자와 큰
무리들과 함께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 '빈들'은 바로 하나님
의 축복과 인간의 감사가 넘쳐나는 은혜의 땅이며, 천국잔치의 전례
(前例)가 행해진 곳이다.
ㅇ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때가 벌써 지났으니'
가 된다. 그렇다면 이 '때'란 어떤 상황을 말하는가. 이에 대해 예수
께서 가르침을 마칠 때, 식사할 때, 무리들을 돌려보낼 때, 밝은 시
간이 지나는 때 등으로 해석하는데 이 여러 견해들은 모두가 큰 차이
가 없는 것으로 어느 것을 취하더라도 거의 동일한 의미일 것이다.
ㅇ무리를 보내어...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 어쩌면 현대에 만연
하고 있는 금전만능적이고 지극히 타산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처럼 들
리는 제자들의 무책임한 발언이다. 사설 제자들 중에는 (아마 가릇유
다일 것이다) 예수와 제자들에게 필요한 돈이 얼마쯤 남아 있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며, 그 돈으로는 약 2만여명의 무리를
먹이기에 역부족임을 또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은 무
리를 자기들에게서 떠나게 하는 것 밖에 다른 방도(方途)를 찾지 못
했던 것이다.
1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ㅇ갈 것 없다 - 문자적으로 '가게 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서, 부정
어 '우'가 사용되어 강압적인 부정문이 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꽤 합
리적이고 설득력있는 것과 같은 제자들의 주장을 이 한 마디의 말로
단호히 거부하셨다. 예수께서는 해산(解散)하기를 종용하는 제자들의
말에 따라 힘없이 돌아가는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을 보고, 깊은 연민
과 애정으로 돌아가려는 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것이다. 실로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그리스도에게서 떠나는 일은 결코 필요치 않다. 정녕 예수께서는 지
금도 인간이 안고 있는 그 어떤 문제 일지라도 외면치 않고 당신의
넓은 품 안으로 받아 들이고 게신다(요 14:1).
ㅇ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 제자들은 '스스로 사 먹게하소서'라고
말하였고 예수는 '너희가 그들에게 그것을 주라'고 하셨는데,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참으로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 명
령에 쓰인 동사 '도테'는 '주다'란 뜻의 '디도미'의 제 2 과거형으로,
즉각적이고 긴급한 행동이 요구됨을 의미 한다. 실로 경제적으로 풍
요롭지 못했던 제자들에게는 무리들에게 음식을 대접해야 할, 그것도
지금 당장 수행해야 할 의무가 주어졌다. 물론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거의 만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능력이나 수단을 가지
고 있지 않음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굶주린 군중들에 대
한 그들의 책임감을 일깨워 주는 것과, 또한 자신에 대한 제자들의
신앙의 정도를 시험하기 위한 의도에서 행해진 것일 것이다. 물론 여
기서의 책임은 무리들에게 물질적인 양식 뿐만 아니라 영적인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할 사명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사도 베드
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고 세 번이나 거듭 부탁하셨
듯이(요 21:15-17) 본문에서도 제자들에게 그들의 사명을 잊지 않도록
당부하고 계신 것이다. 이러한 제자들의 책임은 현존하는 교회의 사명
이기도 하다. 교회는 굻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에게 육의 양식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심령이 굶주리고 메마른 자에게 영원한 생명수를 마시게
할 책임이 있다.
17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18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ㅇ내게 가져 오라 - 마태만이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분명히
떡의 끝없는 분배 사건이 예수의 손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암시하
는 말이다.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의 명령을 이해치 못한 제자들의
연약한 믿음에서 기적이 형성된 것이 아니라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는
예수의 마음에서부터 그것은 발생되었다. 따라서 제자들은 기적의 공
동 창조자가 아니라 기적의 분배자(分配者)에 불과하였다. 실로 제자
들의 이러한 연약한 믿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까지 계속되
었다. 따라서 예수의 '내게 가져오라'라고 하는 이 말은 인간의 근본
적인 문제를 해결키 위해 제자들에게로, 교회 자체에게로가 아니라
오로지 교회의 머리 이신 주님에게로만 자신을 가져가야 한다고 하는
사실을 암시한다.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ㅇ잔디 위에 앉히시고 - 눅 9:14에 의하면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
히셨다고 하였고, 막 6:40에 의하면 혹 백씩 혹 오십씩 알았다고 하였
다. 여기서 '알았다'의 뜻인 '아나클리노'는 물론 이스라엘인들의 보
통의 식사 때의 자세와 마찬가지로 비스듬히 기대어 눕는 것을 의미한
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신령한 이적을 행하시기에 앞서 그 이적에 참
여하게 될 무리들에게 먼저 '순종'과 '질서'를 요구하다. 한편 본문의
'잔디'에 관한 언급으로 보아 이때는 대략 3, 4월 경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팔레스틴에서는 우기(雨期)가 막 끝나가는 2월 중순 경부터
빈들에 잔디가 돋아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요 6:10). 더욱이 요한은
이때가 유월절(니산 월 14일)이 가까운 때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요
6:4). 참고로 유월절 기간이 다한 이후로는 잔디가 푸른 기운을 잃고
시들기 시작한다.
ㅇ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 이러한 행동은 유대 가정에 있어서 가
장(家長)이면 누구나 하는 평범한 일이었다(롬 14:6; 딤전 4:5). 유대
인 탈무드(Talmud)에 의하면 '감사없이 무엇을 즐기는 자는 하나님께
강도짓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정도로 감사의 일상화(日常化)를 가르쳤
다. 바로 예수께서 이 날의 잔치를 주관하시는 주인이시며, 제자들은
그의 시중꾼이며, 무리들은 잔치에 초대되어 온 손님들이다.여기서
'축사하다'의 뜻인 '유로게오'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을 말
한다. 무엇을 먹기 전에 하는 유대인들의 공통된 기도의 내용은 '땅으
로부터 양식을 얻게 하시는 우주만물의 왕이신 우리 주 하나님이시여
감사하나이다'였다. 본분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기도의 내용 역시 그들
앞에 적은 양이나마 음식이 놓여진 것에 대한 감사이지, 그 음식의 무
한정한 증가를 간구한 기원에 집중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예수께서
평소에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실때 드리던 기도 그대로였을 것이다(26:
26;눅 24:30).
ㅇ떡을 떼어 - 떡을 떼시며 그것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예수의
손으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장정 5천명과 여자, 어린아이가
먹을 수 있었던 기적의 근원지요, 기적이 일어난 현장이며, 떡을 떼시
는 그 순간이 바로 그러한 기적이 발생한 시점(時點)이다.예수가 행하
시는 기적은 이상한 주문(呪文)이나 신기한 동작이 필요치않는 일상적
인 자연스런 행동 속에서 이루어졌다. 조각이 계속해서 불어나며 떡덩
어리가 결코 없어지지 않는 이 기적을 나타내는 말이 바로 '떡을 떼며'
라는 이 단순한 한 마디의 말이다. 그런데 이 뗀 떡은 그것이 바로 인
류의 영적생명을 위해 찢기울 생명의 떡이신 예수와 그분의 육체의 모
형이라고 하는 점에 그 큰 의의가 있다(요 6:26, 27). 예수께서는 그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게하기위하여 끊임없이 손으로 떡을 떼셨다.
오늘도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께서는 우리의 육과 영의 양식을
위해서 여전히 떡을 떼어주신다.
ㅇ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 제자들은 언제나 예수의 사건을 다른 사
람보다 더 가까이, 더 먼저 경험한 목격자들이며 그 목격한 사실들을
전달해 주는 증인들이다. 떡과 물고기가 전해지는 이러한 과정은 생
명의 양식인 그리스도의 말씀이 먼저 복음에 사로잡힌 자들에 의해
세상에 전달되는 과정과 동일하다.
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ㅇ다 배불리 먹고 - 겨우 목을 축이고 한 끼니를 때우는 정도가 아니
라 사람들이 멀리 떨어진 자신의 집을 찾아 갈 기운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게 떡과 물고기가 배급(配給)되었다는 말이다. 특히 '배
불리 먹었다'고 하는 말은 아마도 미래에 있을 메시야 왕국의 잔치의
풍성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이는 그리스도의 몸
은 온 인류의 영적 양식이 되며 모든 죄인의 죄악을 모두 사(赦)할 수
있는 큰 사랑의 힘을 지녔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ㅇ남은 조각 - 기름으로 모든 빈 그릇을 채운 이적(왕하 4:1-7)과 스
무 개의 보리떡과 자루에 담은 채소로 100명을 먹인(왕하4:42-44) 엘
리사의 기적과 신약에서 나오는 예수의 모든 기적들의 공통점은 바로
'사용하고도 남았다'고 하는 사실에 있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기적에서도 병자는 그 자신의 병을 고쳤을 뿐만 아니라 몸이 완전히
건강해지는 것을 체험한다. 이러한 차고 넘치도록 후히 주시는 사랑
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이다. 따라서 남은 조각들은 바로 주님이 행하
신 기적의 조각들이며 주님의 사랑의 파편(破片)들이다. 한편 여기서
'남은 조각'은 단지 먹다가만 부스러기만을 의미하지 않고 예수께서
나눠주시기 위해 손으로 떼 놓은 조각듸까지를 포함한 말일 것이다.
ㅇ열 두 바구니 - 열 두 제자가 각각 한 바구니씩 거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그 남은 조각들은 12제자들의 계속되는 식량이 되었을 것
이다. 한편 바구니를 뜻하는 헬라어 '코피노스'는 유대인들이 사용하
는 버들가지로 만든 음식담는 그릇으로서 여행자들의 휴대용 주머니
로 활용된 것이었다. 그에 비해 예수께서 4천명을 먹인 이야기에서
나오는, 일급 광주리는(15:37) 헬라어 '스퓌리스'로, 흔히 이방인들
이 물고기나 과일을 담는데 사용하는 갈대로 만든 광주리였다. 그리
고 오천 명, 떡 다섯 개, 열 두 바구니 등의 5와 '12'라는 숫자는
'모세 오경'과 '열 두 지파'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유대인들에게 의
미 있는 슷자로 이해된다. 결국 이러한 점들은 많은 학자들로부터 오
천 명을 먹인 기적은 유대인에게, 4천명을 먹인 기적은 이방인들에게,
예수가 생명이 됨을 나타내기 위해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ㅇ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 - 오병 이어의 기적 사건은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만 1년전인 유월절이 임박한 기간에 베풀어진 것으로 보
인다(요 6:4). 따라서 그 당시 무리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이었
기 때문에 많은 숫자가 한꺼번에 운집(雲集)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
편 이때 모인 무리는 성인 남자만을 계수(計數)하는 유대인의 계산법
에 따라 '오천 명'이었기 때문에 여자와 아이 (파이디온, 조그마한
아이란 뜻)까지를 합산하면 1만 5천명에서 2만명 정도로 추산(推算)
된다. 예수의 공생애 중에 최대의 군중이 운집한 것이다.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ㅇ즉시...재촉하사 - '재촉하다는 '억지로 시키다'의 뜻이다. 예수께
서 오천 명이 넘는 무리들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부르게
하신 후에 급히 서둘러 제자들을 무리로부터 멀리 떠나가게 한 이유는
다음과 갈이 추측해 볼 수 있다. (1) 주님은 한적한 곳에서 홀로 기도
하기를 위하셨다(23절). (2)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 뿐만 아니라 동
요하고 있는 무리들을 피하여 한적한 곳에서 잠시 쉬시기를 원했다
(막 6:31-32). (3)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먼저 해산시킴으로써 자
신을 왕으로 삼으려하는 백성듸의 의도와 분위기를 잠재우려고 하였
다(요 6:15). 왜냐하면 그의 제자들은 주님을 도와 무리들의 잘못된
기대를 올바로 잡아줌으로써 주님을 돕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정
치적 욕망을 성취하려는 기대에 빠져 있었으므로 그들이 남아있는 일
이 예수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막 8:27-9:1
주제 강해, '메시야 사상 전개' 참조).
ㅇ앞서 건너 편으로 가게 하시고 - 음식을 먹은 벱새다 광야의 건너편
은 갈릴리 호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게네사렛일 것이다(34절).한
편 요 6:17은 가버나움이라는 마을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웨스트코트(Westcott)와 모리스(Morris)는 다음과 같이 주장
하였다. 예수께서는 벱새다 율리우스에 근접해 있는 동쪽 해안에서 자
신을 기다리라는 당부와 함께 제자들을 보내어 호수를 건너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내는'이라는 가정법 과거 동사와 함께 쓰인 '동
안에'란 뜻의 '헤오스 후'는 '때까지'(until)로 번역되어야 한다.
따라서 건너펀으로 가게 하셨다고 하는 의미는 주님께서 무리들을 해
산시킬 때까지만 제자들이 앞서 가다가 그 후에 예수께서는 기도하시
고 다시 제자들과 만나 건너편으로 건녀가시려고 했다는 것이다.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ㅇ무리를 보내신 후에 예수께서 이제부터 그와 함께 하려는 많은 군중
들을 집으로 돌려 보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생각될 수 있다. (1) 여러
가지 이적, 특히 오병이어 사건에서 그가 참 메시야이심이 드러났음에
도 불구하고 무리들에게 옹위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으며(21장), (2) 비록 그가 유대인들이 고대(苦待)하던
참 메시야이시라고 하더라도 메시야가 올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들
을 시켜 생선과 육류를 준비하여 잔치를 배설(排泄)할 것으로 생각하
던 그들의 예측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온 인류가
고대하는 구원자로서 오히려 유대인들에게는 배척당하고 수난당하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예수께서는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리들의 갈채와 소란은 마귀의 유혹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먼저
여기서 '산'은 혼잡한 무리들과 격리된 영적 교제의 장소이다. 더불어
이곳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항해 모습을 주시(注視)할 수 있었을
것이다(막 6:48). 한편 예수께서는 자신이 행한 기적을 둘러싸고 중대
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종종 한적한 곳을 찾아나섰으며 그곳에서 기
도와 명상을 하곤 하셨다(막 1:35;눅 5:16;6:12). 예수의 능력의 비밀
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에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성부 하나님과 계속적으로 교제를 나눈 것에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사역을 가능케하는 예수의 내적인 삶의 본질이었다. 기도
와 이적 행위 사이의 바른 관련성은 행위가 일차적으로 중요하고 기
도로써 그 행위를 돕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최고로 중요한 것이며 행
위는 그 기도를 입증하는 것일 뿐이다(Archbishop William Temple).
ㅇ저물매 - 두번째 저녁을 의미한다(15절 참조).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ㅇ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 헬라어 성경에서 이 표현은 '메손 테스
달라세스'로, '바다 한 가운데'를 의미한다. 이곳과 평행구절인 요
6:19에는 '십여 리'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는 25-30 스타디온쯤 되는
거리이다. 그렇다면 1스타디온(stadion)은 184.85m 이므로 따라서
육지에서 배까지의 거리는 4.6km 내지 5.5km에 해당한다(제 1권 성경
총론 '성경의 도량형'란 참조).
ㅇ바람이 거슬리므로 - 갈릴리 오수에서 부는 바람은 폭퐁우를 동반
한 돌풍으로 급격한 기후 변동과 고난의 위험성이 있다(막 4:37;요
6:18). 한편 성경 문학적으로 바람은 생의 덧없음(시 78:39), 하나님
의 심판(렘 18:17), 사람들을 흩어지게 하는 재난(렘 49:36), 사람을
미혹하는 교훈(엡 4:14)등을 상징하다. 따라서 본문의 이 말은 환호,
열광하는 군중들을 뒤로하고 예수로부터 떠밀려 배를 타고 있는 제자
들이 이미 마귀가 가져다 주는 시험, 즉 세상 권력에 대한 미련이 여
전히 그들을 괴롭혔을 것이라고 하는 상상을 가능케 한다. 실로 그
들의 배는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거슬리고, 그들의 영혼은 그들
을 향해 불어 오시는 성령의 바람을 거스렸다.
ㅇ고난을 당하더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바사니조'는 '시금석으로
시험하다', '고통을 주어 심문하다', '동요케 하다'등의 뜻으로, 제
자들이 풍랑으로 인해 육체와 정신의 급격한 위기에 봉착(逢着)했음
을 암시하는 말이다. 한편 제자들이 이러한 곤란을 경험하는 이 시간
에 예수께서도 협곡(峽谷)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시면서 역시 고
난 중에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셨다. 물론 예수에게 있어서 고난은
바로 유대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 사이의 음모 구상과 박해공작
(plot)에 대한 예견(foreknowledge)과 자신을 이 세상의 왕으로
삼으려는 군중들의 오해와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내면서도 예수 자신을
올바로 이해하고 평가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지 등등의 사유로 인해
서 생겨난 것일 것이다. 이처럼 예수와 제자들은 그 시간에 함께 고
통을 당하였으나 주님께서는 기도틀 통하여 그 고난을 스스로 극복하
시고 능히 물리치셨다. 그에 반하여 제자들은 주남님 도우심으로써만
그 고난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다. 그들은 배 가까이 오신 예수 주님
으로 확신할 때까지 배에서 고난을 당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때 예수
께서는 그들의 고난을 친히 목격하고 계셨으나 즉시 그들을 찾지 않
으셨다. 이는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훈련시키기 위한 조처로서
(Chrysostom), 예수께서 육신으로 그들과 더불어 계시지 않더라도
그분의 보호하시는 능력이 여전히 그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다는(8:
23-27) 사실을 확신시키기 위해 이런 시련의 기간을 두셨던 것이다
(Homer A. Kent, Jr.).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ㅇ밤 사경에 - 유대인들은 밤을 3경으로 아누었으나(일경을 4시간씩,
막 6:48) 그이이스나 로마에서는 밤을 4경으로 나누었는데, 여기서
마태는 로마식을 따른 것 같다. 따라서 1경은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이며, 2경은 9시부터 12시까지, 3경은 12시부터 새벽 3시까지,그리고
본문에 묘사된 4경은 '새벽 3시부터 6시까지'의 시간을 말한다.
ㅇ바다 위로 걸어서 - 예수의 만유의 주재로서의 초자연적 위상(位相)
을 나타내주는 부분이다. 사실 바다 위를 걷기 위해서는 세찬 바람과
거친 물결 및 지구의 중력을 모두 극복해야 하는데, 예수께서는 이
모든 자연의 사슬들을 지배하시고 그 위에 우뚝서신 것이다. 한편 예
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 사건은 그 결과가 바로 제자들의 최초
신앙고백, 즉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33절)라고 하는 참 신앙적
고백을 하게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다. 또한 그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생략된 누가복음을 제외한 마태, 마가, 요한복음의 서술이 모
두 오첨 명을 먹이신 급식 사건 다음에 기술되어 출애굽 사건을 연상
케 함으로써 모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바다를 건넜지만 예수는 스
스로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해 바다 위를 걸었다고 하는 것, 즉 모
세보다 탁월하신 예수의 신성(神性)을 나타내 보였다는 점에서 큰 의
미가 있다. 실로 예수(복음)의 새 시대는 모세(율법)의 옛시대를 포
함할 뿐 아니라 크게 능가(surpass)하고 있는 것이다.
26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ㅇ유령(팥타스마) - 이는 꾸며서 나왔다는 뜻인 '판타조'에서 유래한
말로서 실체가 없는 허상(虛像), 곧 망령 또는 귀신을 의미한다. 이
성적으로는 도무지 용납되지 않는 기(寄)현상 앞에 제자들은 그것을
하나의 환각 내지는 미신적 현상으로 오판(misjudgement)하였다.
적어도 그들은 '유령이라' 외치면서 그들의 눈앞에 직면한 죽음의 위
기에 몸이 굳어버렸을 것이다.
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ㅇ안심하라 내니 - 여기 '안심하라'(달세이테)는 말은 '담대하라',
'용기를 내라'는 뜻이며, '두려워 말라'(메 포베이스데)는 말은 즉시
'두려움에서 헤어나오라'는 뜻이다. 즉 두 용어는 결국 안심하라는 의
미의 중복적 권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안심하라', '두려
워 말라'는예수의 권고의 말씀은 '나다'(에고 에이미)라는 확신을 주
는 말씀에 의해 더욱 밑받침이 되고 있다. '나는 나다'라고 하는 것은
바로 여호화의 이름이기도 하며(출 3:14),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굶
주린 많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셨으며,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제자
로 삼으셔서 권능을 주신 분으로서의 예수 자신을 저들에게 확인시켜
주시기 위한 참으로 친근한 말씀이다. 이 위대한 위로의 말씀은 풍전
등화(風前燈火)와 같이 파선의 위기를 겪고 있는 제자듸 뿐만 아니라
압제자들로 부터 대박해를 당하여 신앙과 삶의 위협을 받고 있는 초대
교회의 성도들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며 오늘의 성도들에게도 동일
한 힘을 주는 것일 것이다.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ㅇ베드로가 - 물 위를 걸은 기록은 이곳에서만 나온다. 이 부분은 14-
17장 가운데서 베드로가 예수께 특별한 취급을 받는 세 경우(16:13-23;
17:24-27) 중의 하나로서, 베노이트(Benoit)는 이 기사에서 이미 베드
로가 수석 제자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ㅇ만일 주시어든(에이 쉬 에이) - 앞에 '에이'는 접속사이며, 뒤에 '에
이'는 '...이다, 있다'의 뜻인 '에이미' 동사의 2인칭 단수 현재 직설
법 형태이다. 그런데 접속사 '에이'는 가정적 조건문에서는 '...인지,
아닌지'의 뜻을 갖지만, 본문의 경우와 같이 결론이 확실한 내용에서
도출(導出)되어 직설법 동사와 연합되는 경우에는(직설법) 토론적으로
사용되어 '과연 주님이시므로'의 뜻을 갖는다. 따라서 '만일 주시어든'
이라는 말은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오는 사람이 주님이신가 아닌가를
시험하기 위한 의도에서 한 말이 아니라 예수께서 지금 물 위로 걸어
오신다고 하는 사실과 주님의 명령과 그 능력에 의해 그 자신도 물 위
를 걸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직설적이고 열정적인 베드로의 일면을 보여준다.
ㅇ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 베드로가 '나로 하여금 물 위로
걷게 하소서'라고 말하지 않고 예수의 '명령'에 초점을 맞춘 것은 그분
자신의 말씀보다 그분의 초자연적 능력을 더 신뢰하는 오류로부터 벗어
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친지를 창조하셨으며, 말
씀(로고스)이신 예수께서 육신이 되셔서 그 말씀으로 많은 병자들을 고
치고 천국 비밀을 선포해 주심과 같이 베드로는 예수의 말씀 한 마디에
의해 자신이 그 무엇이라도 할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물 위
를 걸으라고 하는 허락과 능력이 주어지기를 요구하는 베드로의 행동은
비록 순간적이기는 했지만 주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과 그분에 대한 열
렬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ㅇ오라 하시니...배에서 내려 - 예수의 '오라'는 명령에는 이미 당신
을 믿고 오는 자에 대해 보호와 안전을 마련해 두고 계신 권위에 찬
명령이다. 한편 신앙이란 하나님의 명령에 자신의 전인격을 복종시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모험과 같다. 아브라함도 그의 나이 75세에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오라' 부르시니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
며'(히 11:8),이스라엘 사람들도 '믿음으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다'
(히 11:29).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믿음으로 알지 못하는 세계(풍랑이
휘몰아치는 바다)로 나아갔다.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ㅇ바람을 보고 - 충동적인 성격의 베드로가 예수에게로 나아가는 동
안 관심의 대상이 달라졌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믿음'
의 고갈(枯渴) 상태를 의미하기 보다는 예수의 초자연적 능력을 믿었
지만 폭풍의 위험에도 침착히 인내할 수 있을 만큼의 더 큰 믿음이
없었다는, 즉 믿음의 수준의 문제인 것이다. 정녕 그는 예수(앞)만
바라봐야 함에도 불구하고 바람(밑)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을 삼킬듯이
달려드는 풍랑에 대해 두려워 하게 되었다. 정녕 온전한 믿음의 눈은
결코 두 개의 초점 (예수와 세상의 풍파)을 가질 수 없다.
ㅇ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 베드로는 예수와 그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
앙하는 믿음의 빛을 잃었을 때, 그 즉시 예수의 보호권에서 벗어나
중력에 의해 빠져드는 자연 현상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실로 신앙
세계에는 중간 지대가 없다. 물 위(완전한 믿음)가 아니면 물 아래
(완전한 의심), 둘 중 하나에만 머무르는 것이다.
ㅇ주여 나를 구원하소서(퀴리에 소손 메) - '구원하소서'의 뜻인 '소
손'은 '구원하다'란 의미인 '소조'의 부정 과거 명령형으로, 그때의
상황이 매우 긴박했음을 시사해준다. 물론 본문에서의 이 말은 물에
빠지게 된 베드로 자신의 몸을 구원해 달라고 하는 의미로 사용되었
지만 종종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영혼구원을 의미하는 것
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말은
하나님을 떠났던 죄인이 그 죄악의 구덩이에서 헤어나오기를 원할 때
부르짖는 소리이며,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상태를 벗어날 수 없
다고 하는 한계를 깨닫고 절망 가운데서 비로소 주님께 돌아설 때 하
는 첫 마디에 해당한다.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ㅇ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 주님의 신속한 구원행위를 나
타내는 말이다. 더구나 예수께서는 물에 빠지는 그를 건지기 위해서
는 단 한 마디의 명령으로 충분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친히 손을 내
밀어 그의 몸을 붙잡으셨다고 하는 이 말은 특별히 주의 '붙잡으시는
사랑'을 경험하게 하시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실로
거친 죄악의 세상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즉시 붙잡아 주시는 주 손님
에 의해 우리의 신앙생활은 보존, 유시될 수 있을 뿐이다.
ㅇ믿음이 적은 자(올리고피스토이) - 이 표현은 신약성경에 모두 다
섯 번 나오는데(6:30;8:26;16:8;눅 12:28), 항상 제자들에게 말할 때
사용되었다. 이는 가장 믿음이 깊어야 할 그들이 믿음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예수로 하여금 그들을 책망하게 하는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마태는 막 4:30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는 표현을 '믿음이
적은 자'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마태가 제자들이 이미 예수의 제자가
된 사실 자체가 어느 정도의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 때문이다. 더욱이 본문에서 베드로는 비록 충동적이나마 그리스도
와 그 능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소유했던 터였다(28절). 한편 예
수께서 베드로에게 원했던 것은 '오라'하신 당신의 말씀을 끝까지 전
적으로 신뢰하는 참 믿음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책망은 믿음의 양
(적다, 많다)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상황 중에도 그리스도께 대한 영
속적 신앙을 간직하는 것, 곧 그 믿음의 질적 측면을 강조한 말이다.
ㅇ왜 의심하였느냐(에이스 티 에디스타사스). '왜'라는 말은 히브리
어 '레마'에 상당 하는 말로 대개의 일반적인 표현인 '디아 티'와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디아 티'는 '무엇 때문에'(because
of what)라는 의미의 '새'이며 '에이스 티'는 '무엇을 위하며'
(in order to wher)라는 의미의 '왜'이다. 즉 '에이스 티'는
'디아 티'의 물음에 비해 보다 호의적인 의도에서의 물음이다. 즉 예
수께서는 베드로가 왜(because of what) 의심하였는지 그 의심의
원인을 알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무슨 목적으로', 즉 '무엇을 위하
여'(to what end) 의심하였는가를 물으신 것이다. 예수가 손을
내밀면 잡을 듯한 가까운 거리까지 도달한 베드로는 무엇을 의심하
였는가(Turner)?한편 여기서 '의심하였느냐'란 말의 원뜻은 '이중적
으로 하다'는 의미로서 마음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어찌할 바를 몰
라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이는 다혈질적인 베드로의 심히 당황해 하
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표현이다.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ㅇ바람이 그치는지라 -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신 기적이 풍랑 중의
첫번째 기적이라면 배에 오르자 마자 즉시 바람이 그친 것은 두번째
기적이다. '수고', '고통', '피곤'을 의미하는 '코포스'에서 나온
'그치다'라고 하는 동사는 바람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그 고통 속에서 헤어나와 잠잠케 되고 평온함을 찾은 것을 의
미한다. 이에 대해 막 4:41은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
하는고"라고 표현하였다. 정녕 예수는 모든 만물을 지배하시는 만유
의 주이신 동시에 모든 혼란과 두려움을 잠재우시는 질서와 평화의
왕이시다(요 14:27). 그가 거하시는 장소, 그가 머무시는 인격에는
영원한 샬롬만이 있을 것이다.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ㅇ절하며(프로스퀴네오) - 헬라어의 이 말은 제자들이 예수를 신
앙의 대상으로 경배하였다고 하는 말로, 이번 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깨달아 알므로써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전적인
신앙 고백(16:16)의 준비가 마련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ㅇ하나님의 아들 - 이는 '메시야', '그리스도'라는 칭호에 상당하
는 용어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완전한 칭호로 예수를 불렀던
첫번째 경우이다(16:16;26:63;27:40, 43, 54). 물론 이 칭호는 3:
17에 나타난 하늘의 성에서 계시된 바 있고, 광야 시험 중 사단도
이 칭호를 사용한 적이 있다(4:3, 6). 또한 예수 자신이 스스로를
'아들'이라 부른 경우도 있다(11:25-27). 실로 예수께서는 하늘과
흑암의 세력과 또한 땅의 무리들 및 자신이 스스로인정하시는 완전
한 구주요 메시야이셨던 것이다(16장 주제 강해, '베드로의 신앙
고백' 참조).
34 저희가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ㅇ게네사렛 - 갈릴리 호수 서안(西岸)에 자리잡고 있는 기후가 온화
(溫和)할 뿐 아니라 비옥한 평야지대이며 북쪽에는 가버나움이, 남
쪽에는 디베랴가 위치해 있다. 한편 게네사렛 사람들이 즉시 예수를
알아보고 그에게 모여 들었다고 하는 사실은 예수의 사역 범위가 얼
마나 넓었는가를 말해준다.
35 그 곳 사람들이 예수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ㅇ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 '통지하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아포
스텔로'는 사자(使者)를 보내어 소식을 전한다고 하는 뜻으로 게네
사렛 사람들이 이웃과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일이 찾아 다니며
주님이 그들의 동리에 오신 사실을 가르쳐 주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또한 이는 마침내 예수의 공적인 사역의 범위가 온 유대 전역에까지
미치게 되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36 다만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ㅇ옷가에라도 손을 데게 하시기를 - 예수의 신성에 대한 엄청난 소
문은 9:20의 혈루증의 여인의 경우와도 같이 그분이 입은 옷을 손으
로 대기만 하여도 병을 낫게 한다는 믿음을 갖게 하였다. 따라서 너
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으므로 예수께서 한 사람씩 차례로 만져
주시리라고 기대할 수 없었던 그들은 비록 예수께서 만져주시지 않
는다고 하더라도 병자 자신이 그분에게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것
이라는 강렬한 믿음을 소유하였던 것 같다.
ㅇ나음을 얻으니라(디에소데산) - '완전히(디아) 구원을 받다(소조)'
의미로 병자들이 육신의 병에서 고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혼의
질병, 즉 죄된 세상의 여러 욕망이 주는 고통 속에서도 자유함을 얻
게 되었다고 하는 이중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1 그 때에 분봉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ㅇ그 때에 - 헤롯이 세례 요한을 처형시킨 A.D. 39년 이후이며,
갈릴리 전도의 후반기가 시작되는 때로 예수와 반대자들과의
갈등이 표면화되어 가는 시기이다. 개인적으로는 예수의 선구자
로서, 구속사적으로는 구약의 종말과 신약의 출발을 증언하기
위하여 특별히 부름받은 세례요한은 세례 행위와 예수에 따른
메시아의 등의 직접적 방법으로 선구자의 사명을 감당하였지만
동시에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예수의 메시아
로서의 삶을 예표하였다. 다시 말하면 세례 요한의 삶과 죽음은
그 전체가 예수의 모형(模型)이었다. 즉 그의 투옥(14:3)을 통해
서 예수의 수난의 삶이, 그리고 그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의 십자
가에서의 죽음이 예표(豫標)되었다. 한편 이 세례 요한의 죽음을
기점으로해서 예수의 사역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 예수께서 직접 당신의 선구자라고 지칭하였다. 요
한의 죽음 이후, 즉 의로운 말을 외치다가 세상 권력자에게 당하
는 죽음에서 조차 당신의 예표의 역할을 한 요한의 죽음을 목격
한 이후 예수는 본격적으로 스스로 당신이 메시야이심을 공개적
으로 드러내시고 수차의 수난 예고를 하시는 등 당신의 메시야직
의 절정인 십자가 고난을 준비하시게 된다. (2) 당시 팔레스틴 북
부, 즉 헤롯 안디바스의 관할 지역은 물론 전 유대 땅에서 가장
큰 사회.종교적 이슈(issue)의 주제이던 세례 요한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예수 한사람에게 전 사회적 억압에 시달리던 일반 대
중들은 예수에게 정치적인 기대를,주로 정치 기득권층은 예수에게
적대적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1),(2)의 사실을 종합래 볼 때, 예
수는 전 구속사적 관점에서 사역을 행하고 미래를 준비하셨다. 그
러나 세상은 예수의 행위의 참의미를 이해하지못하여 부단히 자신
들만의 편협한 시각으로 예수를 오해하고 있었다. 이런 오해는 예
수 부활 이후에야 비로소 해소되기 시작한 것이다.
ㅇ분봉왕 헤롯 - 여기서 분봉왕(테트라아르케스)이란 '네 개로 이
뤄진 한 벌'을 뜻하는 '테트라스'와 '통치'를 뜻하는 '아케르'의
합성어로 문자적인 뜻은 '한 나라의 1/4을 통치하는 자'이다. 다
시 말하면 이들은 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아 로마의 정복지역의 한
부분을 통치하는 괴뢰 정부의 왕을 가리킨다. 더 자세한 내용은
신약 개론 중 '정치적 배경'란을 참조하라. 본문의 헤롯은 헤롯
대왕이 죽은 B. C. 4년 부터 A. D. 39년까지 네 개의 통치지역으로
나뉜 유대 땅 가운데서 갈릴리와 베레아를 다스렸던 헤롯 안티파스
(Herod Antipas)이다. 따라서 이 시대를 주무대로 활동하셨던
세례 요한 및 예수와 관계가 깊었던 사람으로, 예수로부터는 그의
교활하고 간사한 성품 때문에 '여우'라고 불리우기도 하였다(눅
13:32).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그에게 심문(審問)을 받으
심으로써 그는 세례 요한 및 예수의 처형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되었다(눅 23:7).
ㅇ예수의 소문을 듣고 - 막 6:14에 의하면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
것'이며, 눅 9:7에 의하면 예수의 행한 '모든 일'에 대해서 헤롯에
게 보고(報告)가 된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마가와 누가의 두 복
음서에서의 예수에 대한 소문은 모두 그의 '제사 파송'과 관련된
것으로 편집되어 있다. 그러나 대략 A.D. 29년경, 즉 아무리 빨리
잡는다해도 주께서 죽기 1년전에 있었던 제자들의 전도 파송의 결
과, 제자들이 행한 사역과 능력에 의해서 예수에 관한 소문이 더욱
더 멀리 퍼져나갔다고 하더라도 헤롯이 지금 처음으로 예수의 소문
을 들었다고 하는 것은 이상하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이미 일년
이상 헤롯의 통치지역인 갈릴리에서 말씀을 전파하시고 이적을 행
해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롯은 갈릴리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고
주로 세례 요한을 가두어 놓았던 베레아의 마케루스(Machaerus)
궁전에 있었거나 또는 사치와 향락에 심취해 있었으므로(F.R.
Fay, Homer A. Kent, Jr.) 갈릴리 지방에서는 그가 예수에
관해서 가장 나중에 알게된 사람 중에 속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한편 그의 신하들이 예수의 소문에 관해 언급하고 그 일을 문
제삼으려고 하는 일은 예수의 사역이 예수의 진의(眞理)와는 달리
그들에게 얼마나 큰 정치적 위협(威脅)으로 다가오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을 암시한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정의와 진리는 그것이 굳이
불의와 비진리를 정면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해도 물과 기름이 서로
갈라지듯이 서로 서로를 밀어내기 마련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2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 하더라
ㅇ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 누가는 이 부분에 대해 먼저 신하 중 몇
몇이 보고하고 헤롯이 곧 그 사실을 거부하는 듯한 인상으로 기술
하고 있다(눅 9:7-9). 이에 비해 마가는 헤롯이 신하들의 말에 동조
(alignment)한 것으로 기술했다(막 6:14-16). 아마 이러한 차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튼 심경의 변화를 표현한 것으로, 누가는 헤롯이
신하의 말을 듣고 난 즉시 일어난 상태를, 마태와 마가는 시간이 조
금 더 경과한 뒤에 헤롯의 감정이 가라일은 후 헤롯이 예수를 세례
요한으로 판단할 때의 일을 기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ㅇ이는 세례 요한이라 - 헤롯이 예수를 다시 살아난 세례 요한으로
오해한 원인은 (1) 그가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며, (2) 예수의 사역과 세례요한의 사역에 있어서 유사점, 곧
설교에 있어서의 회개 촉구와 하나님 나라 도래의 임박성 강조, 유
대 교권주의자들에 대한 책망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사실 헤롯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예수를 부활한 세례 요한으로 이해(16:14)는
예수를 유일무이(有一無二)한 메시야로 고백한 제자들의 신앙고백과
는 엄청난 질적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ㅇ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 이러한 결론을 내린 사실에서 적
어도 헤롯은 미신적이며 절충적인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바리새적인 부활관에 영향을 받은 듯, 자신이 살해한
요한이 부활하여 죽기 전보다 더욱 강한 모습으로 행동한다는 미신적
사고에 사로 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때문에 그는 훗날 예수
를 십자가 형(刑)에 처하도록 하는데도 묵시적 동조를 하게 된다.
한편 유대인들의 부활관은 신약 시대에 이르러 정립된 것이 아니다.
성경에는 구약 시대에도 이미 부활사상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몇몇 구
절들(욥 14:13-15;단 12:2-3;호 6:2)이 있다. 그러나 부활사상이 훨
씬 다양해지고 많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신구약 중간시기를 거친 신약 시대였을 것이다. 특히 바
리새파 사람들은 부활신앙의 열렬한 신봉자였고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사상을 전면 부정(否定)하였다.실로 여기서 죽은 자는 모두 부활
하여 심판을 받는다는 신약의 가르침과 달리 바리새파 사람들은 부할
은 의로운 유대인들에게만 해당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예수의 가르
침과 차이점이 있다.
ㅇ이런 권능이 - 세례 요한이 그의 사역 중에 비록 어떠한 표적도 해
하지 않았다(요 10:41) 하더라도 헤롯의 이 말에 의하면 많은 사람이
그를 권세(여수시아)와 능력(뒤나미스)을 갗춘 자로, 즉 적어도 그는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구러나 요한의 권위에 정도가 문제
가 아니라, 이런 자 심지어 11:11에 묘사한대로 여자가 낳은 자, 즉
사람의 피를 받고 태어난 자 중 가장 큰자가 예수에 대한 선구자로
서 예수의 메시야직에 대한 증거라는 점에서 마태는 이를 부각시킨
것 같다.
ㅇ운동하는 도다 - '운동하다'는 헬라어 '에네르게오'는 '활기를 돋
우다','움직이다'의 의미인 영어의 'energize'에 해당하는 말이
다. 즉 무엇인가 초월적 힘이 한 인격에게 영감(靈感)과 (動力)을
주는 상태를 가리킨다.예수는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다른 초자연적인 힘(바알세불 등)늬
도움으로 행한다고 생각했듯이 헤롯도 죽은 세례 요한의 영(靈)이
예수 안에서 그 권능들을 행하게 생각하였다.
3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ㅇ전에 - 이 말은 3-12절의 내용이 적어도 1, 2절의 시점 이전에 일
어났던 일의 회상(回相)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공관복음 모두 이 헤
롯의 공포와 세례 요한 살해의 사건을 12제자 파송 사건과 연결시키
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12제자 파송을 즈음하여 요한 살해가
있었고 12제자 파송으로 전국이 예수 소문으로 들끓자 헤롯이 두려워
하였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ㅇ동생 빌립 - 헤릇 빌립 1(Herod Philp 1)세를 말한다. 헤롯 대
왕과 대제사장의 딸 마리암네(Mariamne 2)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로, 헤로디아의 첫 남편이며 살로메의 부친이다. 한편 그와 헤롯 안
티바스와의 관계는 이복 형제간이었다<헤롯왕가의 가계 도표 참조>.
ㅇ헤로디아의 일 - 여기 헤로디아는 헤롯 안티바스의 이복 형제인
'아리스토블루스'(Aristobolus)의 딸이었다. 그녀는 헤롯 빌립,
곧 자신의 삼촌과 결혼하여 살로메를 낳았다. 그런데 사바티안
(Sabatian) 왕인 아레타스(Aretas)의 딸과 이미 결혼한 바 있
는 또다른 삼촌 헤롯 안티바스가 그녀를 유혹하여 남편 빌립을 버리
고 자신과 불법적인 재혼을 하게 했다.그런 까닭으로 인해 아레타스
의 딸은 본국으로 도망가게 되고 끝내 두 나라 간에 전쟁이 발발 하
게 된다. 결국 안티바스는 이 전쟁에서 참패하게 된다. 유대사가 요
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이때가 세례 요한을 참수(斬首)시킨
바로 직후였기 때문에 이 참패의 원인을 의인의 살해로 말미암은 징
벌이라고 간주한다. 한편 본문의 '헤로디아의 일'이란 헤롯 안티바스
와 헤로디아의 불법적인 결혼에 대한 세례 요한의 책망을 가리킨다.
이 일로 인해서 헤로디아는 신약의 엘리야인 세례 요한을 미워하고
죽이고자 계획하였는데(막 6:19), 이는 바알의 선지자를 죽인 일로
엘리야를 죽이고자 했던 이세벧의 경우와 좋은 대조가 되는 사건이었
다(왕상 19:1,2).
ㅇ옥에 가두었으니 - 요한은 유대인의 3대 요새(要塞) 중의 하나인 마
케루스에 있는 감옥에 갇히었다고 한다. 이곳은 헤롯과 헤로디아가 주
로 거처하는 베레아의 남부를 방어하는 요새로, 표고 736m의 사해 동
편 황량한 사정에 위치하고 있었다. 요한의 투옥 이후에 그의 제자들
중 일부는 별개의 집단으로 계속 존속하고 있었으며 그가 옥에 갇혀
있을 동안에는 계속해서 그의 지시를 받았던 것 같다(11:2).
4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ㅇ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 헬라어 동사 '엘레겐은 과거 미완료시상
으로서 '그가 반복해서 말하곤 했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요한이 헤롯
을 직접 만나 그를 책망했다고 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설
교 하는 중에 혹은 세례를 주는 등의 여러 행위속에서 헤롯과 헤로디
아의 불법적인 결혼에 대해 공공연히 비난하였음을 의미한다.
ㅇ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 '광야에서의 외치는 자의 소리'
였던 세례 요한의 '고발 내용'이다. 요한이 헤롯을 책망한 것은 그가
첫번째 부인인 아라비아 왕 아레다(고후 11:32)의 딸을 버림으로써
외교적 갈등으로 인하여 나라의 정치적 위기를 몰고 온 때문이라기 보
다는 이방인 출신(헤롯대왕은 이두매 사람이었다)인 헤롯이 자신이 유
대인이 되었음을 자처하면서도 유대의 율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율법(레 18:16;20:21)에는 형제의 아내와 결혼할 수 있는 조건은 그
형제가 아들이 없이 죽었을 때 뿐이다. 그러나 헤로디아의 첫 님편인
헤롯 빌립 1세는 여전히 살아있었으므로 그들은 간음죄를 범한 것이
며, 또한 헤롯파 헤로디아는 삼촌과 조카(헤로디아는 헤롯 대왕의 또
다른 아들 아리스 토블루스의 딸이다) 사이로 이들은 근친상간(近親相
姦)의 죄를 범한 것이 된다.
5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민중이 저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민중을
두려워하더니
ㅇ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 그 이유는 두 가지, 즉 (1) 도덕적
이유, 즉 요한이 자신의 비윤리성을 비난했기 때문에, (2) 정치적
이유, 세례 요한이 민중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너무 심각해졌기 때
문에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문제는 상호 연결된
것으로서 나누어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유대인 사가
(historian) 요세푸스(Josephus)등은 정치적 이유에 초점을
두고, 성경 기자들은 비교적 전자에 기울어진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
을 뿐이다. 사실 세례 요한에게 있어 헤롯가문이나 로마의 식민체제
등을 비판하는 것이 임무는 아니었다. 오히려 구속사적 입장에서 구약
의 종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인한 신약의 시작을 증언하는 것이
그의 주(主) 임무였다. 또한 그가 세속 정치인에게 오해를 받아 죽임
을 당하는 것은 예수께서도 정치적 오해를 받아 죽임을 당한 것과 연
결되어 다시 한 번 세례 요한이 예수의 선구자였음을 상기시켜 준다.
ㅇ민중을 두려워하더니 - 막 6:20에서 헤롯이 요한을 두려워하여 그를
처형하지 못하고 있었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이
때 헤롯이 요한을 단번에 처형치 못한 것은 백성들의 폭동을 우려했기
때문이라 전한다. 여하튼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지도자들을 제외한 민
중의 태도는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매우 호의(好意)적 인 것이었다(3:5,
6;11:7-4). 그에 대한 민중들의 신뢰와 지지의 원인은 다음과 같이 생
각해 볼 수 있다. (1) 유대지도자들과 율법주의자들의 죄악을 고발하
고 그들을 책망하였기 때문이다. (2) 적국(敵國)인 로마를 등에 업고
민중들을 억압하고 있는 헤롯왕가를 비판하였기 때문이며,(3) 예수께
서도 그를 크게 칭찬하셨으므로 예수를 따른 자들도 세례요한을 참선
지자요, 예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한 선구자로서 인식하고, 사실을 사
람들에게 전했기 때문이며, (4) 헤롯이 세례 요한을 불법적으로 감금
한 것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와 동정으로 인해서 세례 요한의 인기가
더욱 더 고조되고 전국민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6 마침 헤롯의 생일을 당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7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대로 주겠다 허락하거늘
ㅇ헤롯의 맹세로 - 살로메의 육감적 독무에 심취한 헤롯 안티바스는
탐욕스럽고 권세있는 제왕(帝王)으로서의 기분을 맘껏 누렸다. 그는
분위기에 도취되어 마치 고대 페르시아 군주들이 하던 식으로 호언장
담을 늘어 놓았다(에 5:3, 6;7:2).헤롯은 자기 어리석음에 도취되었
던 것이다.
ㅇ허락하거늘 - '호몰로게오'는 '확언하다', '공언하다' 등의 의미로,
맹세와 다짐을 동반한(메타) 허락으로서 반복될 수 없는 약속이다.
물론 왕이 기쁜 날을 맞아 신하에게 훌륭한 선물을 내리는 것은 일상
의 일이었지만 헤롯은 자신이 이행해야 할 내용을 알지도 못하면서
기분에 도취된 채 호언 장담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과오(過誤)를
저지르게 된다.
8 그가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ㅇ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 그 당시 살로메는 육체적으로는 뭇남성의
시선을 집중시킬만큼 성숙했는지 모르나 정신적으로는 아직 제 어미에
게 의존해야 할 만큼 미숙한상태였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악의 도구
로 전락하게 된 크나큰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본문의 '시킴'에
해당하는 원어 '프로비바스데이사'는 '선동하다', '권면하다'는 뜻으
로 헤로디아의 집요하고도 악의에 찬 일면을 보여준다. 여하튼 본문은
세례 요한의 죽음이 바로 헤로디아의 사주(使嗾)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말이다. 요한의 죽음은 그녀의 간계(奸計)에 의한 것이
었다. 헤로디아는 분명히 요한의 처형에 대해 끊임없이 헤롯을 졸랐을
것이다. 그러나 결심을 못하는 헤롯의 행동을 통해서도 자신의 요구를
포기하지 않던 헤로디아는 어린 딸을 이용하여 눈에 가시와 같이 자신
의 부정(不貞)을 고발하던 요한을 제거하려 하였다.
ㅇ세례 요뱐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 헤로디아의 횹혈귀적인 완악상을
드러내 준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에 의하면, 이때 헤로디아는
자신의 부정한 결혼을 고발하던 요한의 칼날같은 혀가 침묵하고 있는
모습을 보기 원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요한을 마음껏 저주하고
조롱하기 원했기 때문에 참수(斬首) 당한 요한의 머리를 요구했다고
한다. 한편 여기 언급된 '소반'은 타원형으로 된 얇고 큰 접시를 가리
킨다.
ㅇ여기서 내게 주소서 - '여기서'라는 말은 유대의 정치, 종교지도자
와 로마시의 군관들이 모인 잔치 자리로서 연회석이자 공식적인 모임
의 장소이다. 헤로디아는 헤롯이 그의 딸에 대한 맹세를 깨뜨릴 것을
염려하여 모인 사람들의 눈과 귀를 담보(擔保)로하여 그(헤롯)를 위협
하고 요한의 처형을 더이상 지체치말고 즉각 실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9 왕이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 명하고
ㅇ왕이 근심하나 - 헤롯의 근심이 무죄한 자를 죽이는 것에 대한 양
심의 가책 때문인지 아니면 요한의 죽음으로 인해서 일어날지도 모를
민란 대문인지 확실치는 않다. 어쨌든 그의 근심은 '양심의 최후 투쟁'
(plumptre)이었으나 그는 의가 아니라 자신의 위치에 집착, 선택함
으로써 악에게 굴복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ㅇ자기의 맹세한 것 헬라어 '호르쿠스'는 맹세의 뜻인 '호르코스'의
복수형으로, 맹세가 여러 번 반복되었거나 아니면 그 맹세가 확정적일
만큼 강력했던 것임을 의미 하는 말이다. 헤롯이 세례 요한을 처단하도
록 허락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첫째, 고대 근동에서의 맹세는 율법
에서도 평시되어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특히 성경적인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거짓없음과 약
속이행의 의지를 엄숙하게 맹세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위반할 경우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향 처벌을 받더라도 이의(異意)가 없는 것을 의미
한다(민 30:1-8, 강해 '서뤠과 맹세에 대하여') 신약 시대에 이르러 맹
세는 하나님 대신에 신의 인격, 예배에 관련된 물체, 우주만물, 성전
등을 가리켜 맹세가 행해졌다. 그러나 맹세의 남용(남용)으로 인해서
예수께서는 일체(일체)의 맹세를 반대하시기도 하였다(마 5:34-37). 한
편 구약의 인물 중에서도 경솔한 맹세로 인해서 절망적인 상태에 빠지
게 된 사람으로 입다(삿 11:31-39), 사울(삼상 14:38ff)등이 있다. 둘
째, 헤롯은 그의 왕으로서의 권위 때문에 맹세를 깨뜨릴 수 없었을 것
이다. 고대 사회에서 왕의 말은 곧, 국법이었다. 그 예로 다니앨을 사
자굴에 집어넣었던 메대 나라의 다리오 왕의 금령을 들 수 있다(단 6
:14-15).
ㅇ그 함께 앉은 사람들 -막 6:12에 의하면 이곳에 초대된 사람들은 대
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듸이다. 이 사람들은 왕의 잘못을 제
지하는 얼리야김의 방백들과는(렘36:25) 달리 헤롯의 불의를 조장하고
촉구하는 자들이었을 겻이다. '같은 깃털을 가진 새들이 함께 모이듯'
헤롯의 주위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모두 헤로디아와 같이 부정하고 사
악한 자들로서 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대신에 그의 비위를 맞추고 아첨
함으로써 세례 요한의 참수를 결단하게하는 결정적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들이 바로 어리석은 헤롯의 맹세의 증인이 되었고 사악한 헤로디아
의 살인에 동조자(同調者)가 되었다.
10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 베어
ㅇ사람을 보내어...옥에서 목 베어 - 심문이나 재판의 판결없이 사람
을 처형하는 것과 더구나 모세 율법에 따르면 목을 베어 죽이는 일은
종교적, 신앙 공동체에 대한 공적 범죄이외에는(출 32:27;신 13:6-18).
참수헝은 그리이스나 로마의 관습을 따른 것이다. 헤롯과 그를 따르는
자들은 이러한 이방적 태도를 반율법적이고 반민족전인 것이어서 그가
아무리 유대인임을 자처한다고 하더라고 민중의 미움을 받는 이유가
되고 있다.
11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여아에게 주니 그가 제 어미에게
가져가니라
ㅇ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 헤로디아는 그녀의 부정과 불의를 끝없
이 고발하던 세례요한의 혀가 잠잠해졌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의 머
리를 요구한 것 같다. 그러나 요한의 처형이 정의를 부르짖던 그의
'소리'를 결코 잠재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ㅇ여아에게 주니 - 여기서 '여아'(코라시온)란 혼기(婚期)가 가까운
처녀를 가리킨다. 사실 그 당시 증근동 지방에서는 조혼(早婚)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십대 중반에 이른 살로메에게 이 용어를 붙인 것은 무
리가 아니었다.
ㅇ제 어미에게 가져 가니라 -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한 뒤
얼마지나지 않아 그의 목을 받아들 수 있게 되었다. 실로 악인은 피흘
리기를 좋아하며, 그것을 신속히 행한다. 한편 루핀(Rufin)의 제롬
(Jerome)은 이때 헤로디아가 뽀족한 바늘로 피로 젖은 세례 요한의 혀
를 사정없이 찔렀다고 전한다. 한편 무고(誣告)한 피를 흘리게 한 헤
롯은 얼마 후 그의 전처의 본국이었던 페트라(Petre)의 아레타스
왕과의 전투에서 참패하여 도주하였고, 또 로마 황제의 진노를 사게
됨으로써 로마 원로원에 의해 프랑스 리용으로 추방되어 거기서 비참
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또한 살로메는 겨울에 얼음 위를 걷다가
얼음이 꺼져 그만 날카로운 얼음에 목이 찔려 죽었다고 한다
(Josephus). 정녕 하나님은 요한이 아닌 헤롯과 그 일당의 목을
요구하신 것이다.
12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고하니라
ㅇ요함의 제자들이...장사하고 - 하나의 조직체로서의 요한의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
이 살아있을 때에 스승과 연락이 잦았으므로(11:2) 스승의 참수 소식을
곧바로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그들은 머리없는 스승의 시신을
안치한 후 곧 예수께 나아갔다. 즉 그들은 스승인 요한의 증언, 곧 예
수가 하나님의 어린 양(요 1:35-40)이라는 말을 듣고 점차 예수를 신뢰
하게 되었는데, 이제 그 스승이 죽자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예수에게로
와서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하였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요한은 생전 뿐
아니라 사후에도 그의 영향력이 대단했는데, 그 결과로서 요한의 제자
들은 팔레스틴을 벗어나 지역에서 여전히 작은 분파로서 존재하였었는
데 그들은 대부분 예수를 중심한 복음의 충만한 지식을 지니지 못하고
단지 편협한 신앙적 지식만을 소유하고 있었다(행 18:24-19:7).
ㅇ예수께 고하니라 - 막 6:30에 의하면 이 보고는 사도들의 선교 활동
에 대한 보고였다. 그러나 마태는 이 보고가 요한의 처형에 관한 것임
을 서술하는 가운데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흡수되었
을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옥에 있는 요한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
을 보고한(11:4 ff)제자들이 요한의 처형 소식을 주님께 알렸다는 사
실은 이미 그들이 예수와 스승 사이의 사상의 일치를 알고있었을 뿐만
아니라 요한의 가르침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은자들이 많았을 것임
을 의미한다.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ㅇ예수제서 들으시고 - 본문에서 예수께서 들으셨다고 하는 내용은 '
요한의 처형'에 관한 소식이 아니라 예수의 권능에 대한 소문이 신하
들에 의해 헤롯에게 보고되었고 헤롯이 그를 다시 살아난 세례 요한
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하는 소식이다(1절). 따라서 3-12절의 내
용은 부록적(附錄的) 설명임에 분명하다. 3절에 보면 요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헬라어 '가르'(왜냐하면)로 시작되는데, 이 '가르'는
어떤 사실에 덧붙여 설명하고자 할 때 쓰이며, 반면에 3절의 초두에
나타나는 '데'(그리고)는 어떤 일을 새롭게 전개시코고자 할 때 사용
되는 말이다(L. Cope).
ㅇ따로 빈들에 가시니 - 세례 요한의 사후(死後) 헤롯이 이번에는 자
신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는 것과 헤롯의 미신적인 두려움
과 그가 자신을 만나보기를 간절히 기대한다(눅 9:9)는 사실을 아신
예수께서는 해롯의 관할지역을 떠나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 벱새다
광야로 가셨다. 이때부터 예수의 사역은 주로 제자들을 염두에 두고
그들을 훈련하기 위한 것이 되었는데, 이는 그가 자신이 앞으로 나
아가야 할길이 바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
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역 주위에서 발생한 여러 사건과 이적
들은 예수의 공생애에 있어서 그 절정에 속하는 것이며 그 이후의 사
건들은 수난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하는 의의를 갖는다.
ㅇ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 예수께서는 전에도 바리새인
들의 적의(敵意)를 피해 떠나신 적이 있는데(12:15), 이제는 헤롯 안
티바스를 피해 안식과 묵상을 위해 떠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피하신 또 다른 이유는 12제자들이 선교 여행을 마치고 막 도착했기
때문이다(막 6:30;눅 9:10). 그 제자들은 영.육의 휴식기가 필요했고
자신들의 선교 방법에 대한 검토 및 예수께 복음의 비빌을 좀더 깨우
침 받아야 했다. 한편 누가는 예수가 가신 빈들이 벱새다(눅 9:10).
즉 갈릴리 북동쪽 해안에 위치한 벱새다 율리우스(Bethsaida
Julius) 지방에 속한 곳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갈릴리 호수
해변을 따라서 도보(徒步)로 예수를 좇아갔을 것이다. 무리들은 선지
자로 여기던 세례 요한의 처형소식을 듣고 목자 잃은 양처럼 방황하
다가 예수 계신 곳을 듣고 그분에게서 영혼의 쉼을 얻고자 찾아 나선
것 같다.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ㅇ예수께서 나오사 - 예수께서는 자신이 공개됨으로써 대적자들의 표
적이 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자들과 조용한 무리를 향해 나아오
셨다. 이것은 바로 인간 자신의 자유 의지에 의한 결단에 대해 선택,
구원하시기 위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의지가 응답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ㅇ큰 무리 - 직역하면 '많은 무리'라 된다. 한편 이 사람들의 수(數)
를 21절과 막 6:44에서는 남자만 '오천 명'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
당시 숫자 계산에 들지 않는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포함한다면 이 무
리는 적어도 만 오천내지 이만 명은 넘었을 것이다.
ㅇ불쌍히 여기사 - (스플랑크니조마이). 헬라어의 이 동사는 유대인
들이 참으로 애끓는 아픔의 세월을 보낸 디아스포라(Diaspora)상
태로 살아가기 시작할 때 생겨났다고 한다. '불쌍히 여기다'라고 하
는 말은 내장 혹은 심장 등 인간의 내부로부터 그 아픔을 느끼는 것
을 의미한다. 이는 히브리인들이 '내장'(스플랑크나)을 인간의 깊은
감정이 거하는 곳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실로 '인간에 대한 긍휼'은
예수의 전인격성을 대표하는 속성으로, 자식에 대한 어버이의 간절한
정(情)이상의 애틋한 긍휼의 마음이다. 한편 예수의 인간에 대한 최
대한의 긍휼은 바로 십자가 상에서의 대속의 행위로써 드러나고 있
다. 그런데 예수께서 병을 고쳐주시는 경우 사람의 믿음을 보고서 행
하시는 적도 있지만 흔히는 그 자신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심'으로
병고침의 이적을 행하셨다.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ㅇ저녁이 되매 -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은 저녁(옵시아스)을 두 가지
로 나누어서 이해하였는데, 제 1저녁은 늦은 낮, 주오후 3시부터 시
작되고, 제 2 저녁은 일몰 이후 부터 시작되었다. 본문의 구절은 제
1저녁을, 23절에서는 제 2저녁시간을 가리킨다.
ㅇ이곳은 빈들이오 - 빈들을 가리키는 말인 '에레모스'는 광야 혹은
한적한 곳으로,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던 곳도 이러한 곳이었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
나와 메뚜기로 매일의 양식을 삼았던 곳도 바로 이러한 곳이었다.
따라서 마을이 없고 인적이 드문 이러한 곳에서 자연식품인 메뚜기와
석청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에 의해서 마련된 만나를 제외한
다른 떡이나 음식을 기대한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헤롯은 그의 찬란한 궁전에서 귀족들과 연회릍 벌렸지만 그 연회는
살인과 범죄의 현장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의 제자와 큰
무리들과 함께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 '빈들'은 바로 하나님
의 축복과 인간의 감사가 넘쳐나는 은혜의 땅이며, 천국잔치의 전례
(前例)가 행해진 곳이다.
ㅇ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때가 벌써 지났으니'
가 된다. 그렇다면 이 '때'란 어떤 상황을 말하는가. 이에 대해 예수
께서 가르침을 마칠 때, 식사할 때, 무리들을 돌려보낼 때, 밝은 시
간이 지나는 때 등으로 해석하는데 이 여러 견해들은 모두가 큰 차이
가 없는 것으로 어느 것을 취하더라도 거의 동일한 의미일 것이다.
ㅇ무리를 보내어...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 어쩌면 현대에 만연
하고 있는 금전만능적이고 지극히 타산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처럼 들
리는 제자들의 무책임한 발언이다. 사설 제자들 중에는 (아마 가릇유
다일 것이다) 예수와 제자들에게 필요한 돈이 얼마쯤 남아 있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며, 그 돈으로는 약 2만여명의 무리를
먹이기에 역부족임을 또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은 무
리를 자기들에게서 떠나게 하는 것 밖에 다른 방도(方途)를 찾지 못
했던 것이다.
1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ㅇ갈 것 없다 - 문자적으로 '가게 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서, 부정
어 '우'가 사용되어 강압적인 부정문이 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꽤 합
리적이고 설득력있는 것과 같은 제자들의 주장을 이 한 마디의 말로
단호히 거부하셨다. 예수께서는 해산(解散)하기를 종용하는 제자들의
말에 따라 힘없이 돌아가는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을 보고, 깊은 연민
과 애정으로 돌아가려는 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것이다. 실로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그리스도에게서 떠나는 일은 결코 필요치 않다. 정녕 예수께서는 지
금도 인간이 안고 있는 그 어떤 문제 일지라도 외면치 않고 당신의
넓은 품 안으로 받아 들이고 게신다(요 14:1).
ㅇ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 제자들은 '스스로 사 먹게하소서'라고
말하였고 예수는 '너희가 그들에게 그것을 주라'고 하셨는데,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참으로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 명
령에 쓰인 동사 '도테'는 '주다'란 뜻의 '디도미'의 제 2 과거형으로,
즉각적이고 긴급한 행동이 요구됨을 의미 한다. 실로 경제적으로 풍
요롭지 못했던 제자들에게는 무리들에게 음식을 대접해야 할, 그것도
지금 당장 수행해야 할 의무가 주어졌다. 물론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거의 만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능력이나 수단을 가지
고 있지 않음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굶주린 군중들에 대
한 그들의 책임감을 일깨워 주는 것과, 또한 자신에 대한 제자들의
신앙의 정도를 시험하기 위한 의도에서 행해진 것일 것이다. 물론 여
기서의 책임은 무리들에게 물질적인 양식 뿐만 아니라 영적인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할 사명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사도 베드
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고 세 번이나 거듭 부탁하셨
듯이(요 21:15-17) 본문에서도 제자들에게 그들의 사명을 잊지 않도록
당부하고 계신 것이다. 이러한 제자들의 책임은 현존하는 교회의 사명
이기도 하다. 교회는 굻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에게 육의 양식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심령이 굶주리고 메마른 자에게 영원한 생명수를 마시게
할 책임이 있다.
17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18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ㅇ내게 가져 오라 - 마태만이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분명히
떡의 끝없는 분배 사건이 예수의 손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암시하
는 말이다.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의 명령을 이해치 못한 제자들의
연약한 믿음에서 기적이 형성된 것이 아니라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는
예수의 마음에서부터 그것은 발생되었다. 따라서 제자들은 기적의 공
동 창조자가 아니라 기적의 분배자(分配者)에 불과하였다. 실로 제자
들의 이러한 연약한 믿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까지 계속되
었다. 따라서 예수의 '내게 가져오라'라고 하는 이 말은 인간의 근본
적인 문제를 해결키 위해 제자들에게로, 교회 자체에게로가 아니라
오로지 교회의 머리 이신 주님에게로만 자신을 가져가야 한다고 하는
사실을 암시한다.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ㅇ잔디 위에 앉히시고 - 눅 9:14에 의하면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
히셨다고 하였고, 막 6:40에 의하면 혹 백씩 혹 오십씩 알았다고 하였
다. 여기서 '알았다'의 뜻인 '아나클리노'는 물론 이스라엘인들의 보
통의 식사 때의 자세와 마찬가지로 비스듬히 기대어 눕는 것을 의미한
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신령한 이적을 행하시기에 앞서 그 이적에 참
여하게 될 무리들에게 먼저 '순종'과 '질서'를 요구하다. 한편 본문의
'잔디'에 관한 언급으로 보아 이때는 대략 3, 4월 경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팔레스틴에서는 우기(雨期)가 막 끝나가는 2월 중순 경부터
빈들에 잔디가 돋아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요 6:10). 더욱이 요한은
이때가 유월절(니산 월 14일)이 가까운 때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요
6:4). 참고로 유월절 기간이 다한 이후로는 잔디가 푸른 기운을 잃고
시들기 시작한다.
ㅇ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 이러한 행동은 유대 가정에 있어서 가
장(家長)이면 누구나 하는 평범한 일이었다(롬 14:6; 딤전 4:5). 유대
인 탈무드(Talmud)에 의하면 '감사없이 무엇을 즐기는 자는 하나님께
강도짓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정도로 감사의 일상화(日常化)를 가르쳤
다. 바로 예수께서 이 날의 잔치를 주관하시는 주인이시며, 제자들은
그의 시중꾼이며, 무리들은 잔치에 초대되어 온 손님들이다.여기서
'축사하다'의 뜻인 '유로게오'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을 말
한다. 무엇을 먹기 전에 하는 유대인들의 공통된 기도의 내용은 '땅으
로부터 양식을 얻게 하시는 우주만물의 왕이신 우리 주 하나님이시여
감사하나이다'였다. 본분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기도의 내용 역시 그들
앞에 적은 양이나마 음식이 놓여진 것에 대한 감사이지, 그 음식의 무
한정한 증가를 간구한 기원에 집중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예수께서
평소에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실때 드리던 기도 그대로였을 것이다(26:
26;눅 24:30).
ㅇ떡을 떼어 - 떡을 떼시며 그것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예수의
손으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장정 5천명과 여자, 어린아이가
먹을 수 있었던 기적의 근원지요, 기적이 일어난 현장이며, 떡을 떼시
는 그 순간이 바로 그러한 기적이 발생한 시점(時點)이다.예수가 행하
시는 기적은 이상한 주문(呪文)이나 신기한 동작이 필요치않는 일상적
인 자연스런 행동 속에서 이루어졌다. 조각이 계속해서 불어나며 떡덩
어리가 결코 없어지지 않는 이 기적을 나타내는 말이 바로 '떡을 떼며'
라는 이 단순한 한 마디의 말이다. 그런데 이 뗀 떡은 그것이 바로 인
류의 영적생명을 위해 찢기울 생명의 떡이신 예수와 그분의 육체의 모
형이라고 하는 점에 그 큰 의의가 있다(요 6:26, 27). 예수께서는 그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게하기위하여 끊임없이 손으로 떡을 떼셨다.
오늘도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께서는 우리의 육과 영의 양식을
위해서 여전히 떡을 떼어주신다.
ㅇ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 제자들은 언제나 예수의 사건을 다른 사
람보다 더 가까이, 더 먼저 경험한 목격자들이며 그 목격한 사실들을
전달해 주는 증인들이다. 떡과 물고기가 전해지는 이러한 과정은 생
명의 양식인 그리스도의 말씀이 먼저 복음에 사로잡힌 자들에 의해
세상에 전달되는 과정과 동일하다.
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ㅇ다 배불리 먹고 - 겨우 목을 축이고 한 끼니를 때우는 정도가 아니
라 사람들이 멀리 떨어진 자신의 집을 찾아 갈 기운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게 떡과 물고기가 배급(配給)되었다는 말이다. 특히 '배
불리 먹었다'고 하는 말은 아마도 미래에 있을 메시야 왕국의 잔치의
풍성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이는 그리스도의 몸
은 온 인류의 영적 양식이 되며 모든 죄인의 죄악을 모두 사(赦)할 수
있는 큰 사랑의 힘을 지녔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ㅇ남은 조각 - 기름으로 모든 빈 그릇을 채운 이적(왕하 4:1-7)과 스
무 개의 보리떡과 자루에 담은 채소로 100명을 먹인(왕하4:42-44) 엘
리사의 기적과 신약에서 나오는 예수의 모든 기적들의 공통점은 바로
'사용하고도 남았다'고 하는 사실에 있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기적에서도 병자는 그 자신의 병을 고쳤을 뿐만 아니라 몸이 완전히
건강해지는 것을 체험한다. 이러한 차고 넘치도록 후히 주시는 사랑
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이다. 따라서 남은 조각들은 바로 주님이 행하
신 기적의 조각들이며 주님의 사랑의 파편(破片)들이다. 한편 여기서
'남은 조각'은 단지 먹다가만 부스러기만을 의미하지 않고 예수께서
나눠주시기 위해 손으로 떼 놓은 조각듸까지를 포함한 말일 것이다.
ㅇ열 두 바구니 - 열 두 제자가 각각 한 바구니씩 거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그 남은 조각들은 12제자들의 계속되는 식량이 되었을 것
이다. 한편 바구니를 뜻하는 헬라어 '코피노스'는 유대인들이 사용하
는 버들가지로 만든 음식담는 그릇으로서 여행자들의 휴대용 주머니
로 활용된 것이었다. 그에 비해 예수께서 4천명을 먹인 이야기에서
나오는, 일급 광주리는(15:37) 헬라어 '스퓌리스'로, 흔히 이방인들
이 물고기나 과일을 담는데 사용하는 갈대로 만든 광주리였다. 그리
고 오천 명, 떡 다섯 개, 열 두 바구니 등의 5와 '12'라는 숫자는
'모세 오경'과 '열 두 지파'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유대인들에게 의
미 있는 슷자로 이해된다. 결국 이러한 점들은 많은 학자들로부터 오
천 명을 먹인 기적은 유대인에게, 4천명을 먹인 기적은 이방인들에게,
예수가 생명이 됨을 나타내기 위해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ㅇ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 - 오병 이어의 기적 사건은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만 1년전인 유월절이 임박한 기간에 베풀어진 것으로 보
인다(요 6:4). 따라서 그 당시 무리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이었
기 때문에 많은 숫자가 한꺼번에 운집(雲集)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
편 이때 모인 무리는 성인 남자만을 계수(計數)하는 유대인의 계산법
에 따라 '오천 명'이었기 때문에 여자와 아이 (파이디온, 조그마한
아이란 뜻)까지를 합산하면 1만 5천명에서 2만명 정도로 추산(推算)
된다. 예수의 공생애 중에 최대의 군중이 운집한 것이다.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ㅇ즉시...재촉하사 - '재촉하다는 '억지로 시키다'의 뜻이다. 예수께
서 오천 명이 넘는 무리들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부르게
하신 후에 급히 서둘러 제자들을 무리로부터 멀리 떠나가게 한 이유는
다음과 갈이 추측해 볼 수 있다. (1) 주님은 한적한 곳에서 홀로 기도
하기를 위하셨다(23절). (2)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 뿐만 아니라 동
요하고 있는 무리들을 피하여 한적한 곳에서 잠시 쉬시기를 원했다
(막 6:31-32). (3)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먼저 해산시킴으로써 자
신을 왕으로 삼으려하는 백성듸의 의도와 분위기를 잠재우려고 하였
다(요 6:15). 왜냐하면 그의 제자들은 주님을 도와 무리들의 잘못된
기대를 올바로 잡아줌으로써 주님을 돕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정
치적 욕망을 성취하려는 기대에 빠져 있었으므로 그들이 남아있는 일
이 예수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막 8:27-9:1
주제 강해, '메시야 사상 전개' 참조).
ㅇ앞서 건너 편으로 가게 하시고 - 음식을 먹은 벱새다 광야의 건너편
은 갈릴리 호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게네사렛일 것이다(34절).한
편 요 6:17은 가버나움이라는 마을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웨스트코트(Westcott)와 모리스(Morris)는 다음과 같이 주장
하였다. 예수께서는 벱새다 율리우스에 근접해 있는 동쪽 해안에서 자
신을 기다리라는 당부와 함께 제자들을 보내어 호수를 건너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내는'이라는 가정법 과거 동사와 함께 쓰인 '동
안에'란 뜻의 '헤오스 후'는 '때까지'(until)로 번역되어야 한다.
따라서 건너펀으로 가게 하셨다고 하는 의미는 주님께서 무리들을 해
산시킬 때까지만 제자들이 앞서 가다가 그 후에 예수께서는 기도하시
고 다시 제자들과 만나 건너편으로 건녀가시려고 했다는 것이다.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ㅇ무리를 보내신 후에 예수께서 이제부터 그와 함께 하려는 많은 군중
들을 집으로 돌려 보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생각될 수 있다. (1) 여러
가지 이적, 특히 오병이어 사건에서 그가 참 메시야이심이 드러났음에
도 불구하고 무리들에게 옹위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으며(21장), (2) 비록 그가 유대인들이 고대(苦待)하던
참 메시야이시라고 하더라도 메시야가 올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들
을 시켜 생선과 육류를 준비하여 잔치를 배설(排泄)할 것으로 생각하
던 그들의 예측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온 인류가
고대하는 구원자로서 오히려 유대인들에게는 배척당하고 수난당하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예수께서는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리들의 갈채와 소란은 마귀의 유혹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먼저
여기서 '산'은 혼잡한 무리들과 격리된 영적 교제의 장소이다. 더불어
이곳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항해 모습을 주시(注視)할 수 있었을
것이다(막 6:48). 한편 예수께서는 자신이 행한 기적을 둘러싸고 중대
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종종 한적한 곳을 찾아나섰으며 그곳에서 기
도와 명상을 하곤 하셨다(막 1:35;눅 5:16;6:12). 예수의 능력의 비밀
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에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성부 하나님과 계속적으로 교제를 나눈 것에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사역을 가능케하는 예수의 내적인 삶의 본질이었다. 기도
와 이적 행위 사이의 바른 관련성은 행위가 일차적으로 중요하고 기
도로써 그 행위를 돕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최고로 중요한 것이며 행
위는 그 기도를 입증하는 것일 뿐이다(Archbishop William Temple).
ㅇ저물매 - 두번째 저녁을 의미한다(15절 참조).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ㅇ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 헬라어 성경에서 이 표현은 '메손 테스
달라세스'로, '바다 한 가운데'를 의미한다. 이곳과 평행구절인 요
6:19에는 '십여 리'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는 25-30 스타디온쯤 되는
거리이다. 그렇다면 1스타디온(stadion)은 184.85m 이므로 따라서
육지에서 배까지의 거리는 4.6km 내지 5.5km에 해당한다(제 1권 성경
총론 '성경의 도량형'란 참조).
ㅇ바람이 거슬리므로 - 갈릴리 오수에서 부는 바람은 폭퐁우를 동반
한 돌풍으로 급격한 기후 변동과 고난의 위험성이 있다(막 4:37;요
6:18). 한편 성경 문학적으로 바람은 생의 덧없음(시 78:39), 하나님
의 심판(렘 18:17), 사람들을 흩어지게 하는 재난(렘 49:36), 사람을
미혹하는 교훈(엡 4:14)등을 상징하다. 따라서 본문의 이 말은 환호,
열광하는 군중들을 뒤로하고 예수로부터 떠밀려 배를 타고 있는 제자
들이 이미 마귀가 가져다 주는 시험, 즉 세상 권력에 대한 미련이 여
전히 그들을 괴롭혔을 것이라고 하는 상상을 가능케 한다. 실로 그
들의 배는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거슬리고, 그들의 영혼은 그들
을 향해 불어 오시는 성령의 바람을 거스렸다.
ㅇ고난을 당하더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바사니조'는 '시금석으로
시험하다', '고통을 주어 심문하다', '동요케 하다'등의 뜻으로, 제
자들이 풍랑으로 인해 육체와 정신의 급격한 위기에 봉착(逢着)했음
을 암시하는 말이다. 한편 제자들이 이러한 곤란을 경험하는 이 시간
에 예수께서도 협곡(峽谷)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시면서 역시 고
난 중에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셨다. 물론 예수에게 있어서 고난은
바로 유대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 사이의 음모 구상과 박해공작
(plot)에 대한 예견(foreknowledge)과 자신을 이 세상의 왕으로
삼으려는 군중들의 오해와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내면서도 예수 자신을
올바로 이해하고 평가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지 등등의 사유로 인해
서 생겨난 것일 것이다. 이처럼 예수와 제자들은 그 시간에 함께 고
통을 당하였으나 주님께서는 기도틀 통하여 그 고난을 스스로 극복하
시고 능히 물리치셨다. 그에 반하여 제자들은 주남님 도우심으로써만
그 고난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다. 그들은 배 가까이 오신 예수 주님
으로 확신할 때까지 배에서 고난을 당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때 예수
께서는 그들의 고난을 친히 목격하고 계셨으나 즉시 그들을 찾지 않
으셨다. 이는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훈련시키기 위한 조처로서
(Chrysostom), 예수께서 육신으로 그들과 더불어 계시지 않더라도
그분의 보호하시는 능력이 여전히 그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다는(8:
23-27) 사실을 확신시키기 위해 이런 시련의 기간을 두셨던 것이다
(Homer A. Kent, Jr.).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ㅇ밤 사경에 - 유대인들은 밤을 3경으로 아누었으나(일경을 4시간씩,
막 6:48) 그이이스나 로마에서는 밤을 4경으로 나누었는데, 여기서
마태는 로마식을 따른 것 같다. 따라서 1경은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이며, 2경은 9시부터 12시까지, 3경은 12시부터 새벽 3시까지,그리고
본문에 묘사된 4경은 '새벽 3시부터 6시까지'의 시간을 말한다.
ㅇ바다 위로 걸어서 - 예수의 만유의 주재로서의 초자연적 위상(位相)
을 나타내주는 부분이다. 사실 바다 위를 걷기 위해서는 세찬 바람과
거친 물결 및 지구의 중력을 모두 극복해야 하는데, 예수께서는 이
모든 자연의 사슬들을 지배하시고 그 위에 우뚝서신 것이다. 한편 예
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 사건은 그 결과가 바로 제자들의 최초
신앙고백, 즉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33절)라고 하는 참 신앙적
고백을 하게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다. 또한 그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생략된 누가복음을 제외한 마태, 마가, 요한복음의 서술이 모
두 오첨 명을 먹이신 급식 사건 다음에 기술되어 출애굽 사건을 연상
케 함으로써 모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바다를 건넜지만 예수는 스
스로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해 바다 위를 걸었다고 하는 것, 즉 모
세보다 탁월하신 예수의 신성(神性)을 나타내 보였다는 점에서 큰 의
미가 있다. 실로 예수(복음)의 새 시대는 모세(율법)의 옛시대를 포
함할 뿐 아니라 크게 능가(surpass)하고 있는 것이다.
26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ㅇ유령(팥타스마) - 이는 꾸며서 나왔다는 뜻인 '판타조'에서 유래한
말로서 실체가 없는 허상(虛像), 곧 망령 또는 귀신을 의미한다. 이
성적으로는 도무지 용납되지 않는 기(寄)현상 앞에 제자들은 그것을
하나의 환각 내지는 미신적 현상으로 오판(misjudgement)하였다.
적어도 그들은 '유령이라' 외치면서 그들의 눈앞에 직면한 죽음의 위
기에 몸이 굳어버렸을 것이다.
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ㅇ안심하라 내니 - 여기 '안심하라'(달세이테)는 말은 '담대하라',
'용기를 내라'는 뜻이며, '두려워 말라'(메 포베이스데)는 말은 즉시
'두려움에서 헤어나오라'는 뜻이다. 즉 두 용어는 결국 안심하라는 의
미의 중복적 권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안심하라', '두려
워 말라'는예수의 권고의 말씀은 '나다'(에고 에이미)라는 확신을 주
는 말씀에 의해 더욱 밑받침이 되고 있다. '나는 나다'라고 하는 것은
바로 여호화의 이름이기도 하며(출 3:14),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굶
주린 많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셨으며,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제자
로 삼으셔서 권능을 주신 분으로서의 예수 자신을 저들에게 확인시켜
주시기 위한 참으로 친근한 말씀이다. 이 위대한 위로의 말씀은 풍전
등화(風前燈火)와 같이 파선의 위기를 겪고 있는 제자듸 뿐만 아니라
압제자들로 부터 대박해를 당하여 신앙과 삶의 위협을 받고 있는 초대
교회의 성도들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며 오늘의 성도들에게도 동일
한 힘을 주는 것일 것이다.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ㅇ베드로가 - 물 위를 걸은 기록은 이곳에서만 나온다. 이 부분은 14-
17장 가운데서 베드로가 예수께 특별한 취급을 받는 세 경우(16:13-23;
17:24-27) 중의 하나로서, 베노이트(Benoit)는 이 기사에서 이미 베드
로가 수석 제자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ㅇ만일 주시어든(에이 쉬 에이) - 앞에 '에이'는 접속사이며, 뒤에 '에
이'는 '...이다, 있다'의 뜻인 '에이미' 동사의 2인칭 단수 현재 직설
법 형태이다. 그런데 접속사 '에이'는 가정적 조건문에서는 '...인지,
아닌지'의 뜻을 갖지만, 본문의 경우와 같이 결론이 확실한 내용에서
도출(導出)되어 직설법 동사와 연합되는 경우에는(직설법) 토론적으로
사용되어 '과연 주님이시므로'의 뜻을 갖는다. 따라서 '만일 주시어든'
이라는 말은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오는 사람이 주님이신가 아닌가를
시험하기 위한 의도에서 한 말이 아니라 예수께서 지금 물 위로 걸어
오신다고 하는 사실과 주님의 명령과 그 능력에 의해 그 자신도 물 위
를 걸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직설적이고 열정적인 베드로의 일면을 보여준다.
ㅇ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 베드로가 '나로 하여금 물 위로
걷게 하소서'라고 말하지 않고 예수의 '명령'에 초점을 맞춘 것은 그분
자신의 말씀보다 그분의 초자연적 능력을 더 신뢰하는 오류로부터 벗어
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친지를 창조하셨으며, 말
씀(로고스)이신 예수께서 육신이 되셔서 그 말씀으로 많은 병자들을 고
치고 천국 비밀을 선포해 주심과 같이 베드로는 예수의 말씀 한 마디에
의해 자신이 그 무엇이라도 할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물 위
를 걸으라고 하는 허락과 능력이 주어지기를 요구하는 베드로의 행동은
비록 순간적이기는 했지만 주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과 그분에 대한 열
렬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ㅇ오라 하시니...배에서 내려 - 예수의 '오라'는 명령에는 이미 당신
을 믿고 오는 자에 대해 보호와 안전을 마련해 두고 계신 권위에 찬
명령이다. 한편 신앙이란 하나님의 명령에 자신의 전인격을 복종시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모험과 같다. 아브라함도 그의 나이 75세에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오라' 부르시니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
며'(히 11:8),이스라엘 사람들도 '믿음으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다'
(히 11:29).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믿음으로 알지 못하는 세계(풍랑이
휘몰아치는 바다)로 나아갔다.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ㅇ바람을 보고 - 충동적인 성격의 베드로가 예수에게로 나아가는 동
안 관심의 대상이 달라졌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믿음'
의 고갈(枯渴) 상태를 의미하기 보다는 예수의 초자연적 능력을 믿었
지만 폭풍의 위험에도 침착히 인내할 수 있을 만큼의 더 큰 믿음이
없었다는, 즉 믿음의 수준의 문제인 것이다. 정녕 그는 예수(앞)만
바라봐야 함에도 불구하고 바람(밑)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을 삼킬듯이
달려드는 풍랑에 대해 두려워 하게 되었다. 정녕 온전한 믿음의 눈은
결코 두 개의 초점 (예수와 세상의 풍파)을 가질 수 없다.
ㅇ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 베드로는 예수와 그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
앙하는 믿음의 빛을 잃었을 때, 그 즉시 예수의 보호권에서 벗어나
중력에 의해 빠져드는 자연 현상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실로 신앙
세계에는 중간 지대가 없다. 물 위(완전한 믿음)가 아니면 물 아래
(완전한 의심), 둘 중 하나에만 머무르는 것이다.
ㅇ주여 나를 구원하소서(퀴리에 소손 메) - '구원하소서'의 뜻인 '소
손'은 '구원하다'란 의미인 '소조'의 부정 과거 명령형으로, 그때의
상황이 매우 긴박했음을 시사해준다. 물론 본문에서의 이 말은 물에
빠지게 된 베드로 자신의 몸을 구원해 달라고 하는 의미로 사용되었
지만 종종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영혼구원을 의미하는 것
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말은
하나님을 떠났던 죄인이 그 죄악의 구덩이에서 헤어나오기를 원할 때
부르짖는 소리이며,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상태를 벗어날 수 없
다고 하는 한계를 깨닫고 절망 가운데서 비로소 주님께 돌아설 때 하
는 첫 마디에 해당한다.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ㅇ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 주님의 신속한 구원행위를 나
타내는 말이다. 더구나 예수께서는 물에 빠지는 그를 건지기 위해서
는 단 한 마디의 명령으로 충분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친히 손을 내
밀어 그의 몸을 붙잡으셨다고 하는 이 말은 특별히 주의 '붙잡으시는
사랑'을 경험하게 하시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실로
거친 죄악의 세상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즉시 붙잡아 주시는 주 손님
에 의해 우리의 신앙생활은 보존, 유시될 수 있을 뿐이다.
ㅇ믿음이 적은 자(올리고피스토이) - 이 표현은 신약성경에 모두 다
섯 번 나오는데(6:30;8:26;16:8;눅 12:28), 항상 제자들에게 말할 때
사용되었다. 이는 가장 믿음이 깊어야 할 그들이 믿음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예수로 하여금 그들을 책망하게 하는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마태는 막 4:30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는 표현을 '믿음이
적은 자'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마태가 제자들이 이미 예수의 제자가
된 사실 자체가 어느 정도의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 때문이다. 더욱이 본문에서 베드로는 비록 충동적이나마 그리스도
와 그 능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소유했던 터였다(28절). 한편 예
수께서 베드로에게 원했던 것은 '오라'하신 당신의 말씀을 끝까지 전
적으로 신뢰하는 참 믿음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책망은 믿음의 양
(적다, 많다)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상황 중에도 그리스도께 대한 영
속적 신앙을 간직하는 것, 곧 그 믿음의 질적 측면을 강조한 말이다.
ㅇ왜 의심하였느냐(에이스 티 에디스타사스). '왜'라는 말은 히브리
어 '레마'에 상당 하는 말로 대개의 일반적인 표현인 '디아 티'와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디아 티'는 '무엇 때문에'(because
of what)라는 의미의 '새'이며 '에이스 티'는 '무엇을 위하며'
(in order to wher)라는 의미의 '왜'이다. 즉 '에이스 티'는
'디아 티'의 물음에 비해 보다 호의적인 의도에서의 물음이다. 즉 예
수께서는 베드로가 왜(because of what) 의심하였는지 그 의심의
원인을 알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무슨 목적으로', 즉 '무엇을 위하
여'(to what end) 의심하였는가를 물으신 것이다. 예수가 손을
내밀면 잡을 듯한 가까운 거리까지 도달한 베드로는 무엇을 의심하
였는가(Turner)?한편 여기서 '의심하였느냐'란 말의 원뜻은 '이중적
으로 하다'는 의미로서 마음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어찌할 바를 몰
라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이는 다혈질적인 베드로의 심히 당황해 하
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표현이다.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ㅇ바람이 그치는지라 -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신 기적이 풍랑 중의
첫번째 기적이라면 배에 오르자 마자 즉시 바람이 그친 것은 두번째
기적이다. '수고', '고통', '피곤'을 의미하는 '코포스'에서 나온
'그치다'라고 하는 동사는 바람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그 고통 속에서 헤어나와 잠잠케 되고 평온함을 찾은 것을 의
미한다. 이에 대해 막 4:41은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
하는고"라고 표현하였다. 정녕 예수는 모든 만물을 지배하시는 만유
의 주이신 동시에 모든 혼란과 두려움을 잠재우시는 질서와 평화의
왕이시다(요 14:27). 그가 거하시는 장소, 그가 머무시는 인격에는
영원한 샬롬만이 있을 것이다.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ㅇ절하며(프로스퀴네오) - 헬라어의 이 말은 제자들이 예수를 신
앙의 대상으로 경배하였다고 하는 말로, 이번 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깨달아 알므로써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전적인
신앙 고백(16:16)의 준비가 마련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ㅇ하나님의 아들 - 이는 '메시야', '그리스도'라는 칭호에 상당하
는 용어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완전한 칭호로 예수를 불렀던
첫번째 경우이다(16:16;26:63;27:40, 43, 54). 물론 이 칭호는 3:
17에 나타난 하늘의 성에서 계시된 바 있고, 광야 시험 중 사단도
이 칭호를 사용한 적이 있다(4:3, 6). 또한 예수 자신이 스스로를
'아들'이라 부른 경우도 있다(11:25-27). 실로 예수께서는 하늘과
흑암의 세력과 또한 땅의 무리들 및 자신이 스스로인정하시는 완전
한 구주요 메시야이셨던 것이다(16장 주제 강해, '베드로의 신앙
고백' 참조).
34 저희가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ㅇ게네사렛 - 갈릴리 호수 서안(西岸)에 자리잡고 있는 기후가 온화
(溫和)할 뿐 아니라 비옥한 평야지대이며 북쪽에는 가버나움이, 남
쪽에는 디베랴가 위치해 있다. 한편 게네사렛 사람들이 즉시 예수를
알아보고 그에게 모여 들었다고 하는 사실은 예수의 사역 범위가 얼
마나 넓었는가를 말해준다.
35 그 곳 사람들이 예수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ㅇ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 '통지하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아포
스텔로'는 사자(使者)를 보내어 소식을 전한다고 하는 뜻으로 게네
사렛 사람들이 이웃과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일이 찾아 다니며
주님이 그들의 동리에 오신 사실을 가르쳐 주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또한 이는 마침내 예수의 공적인 사역의 범위가 온 유대 전역에까지
미치게 되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36 다만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ㅇ옷가에라도 손을 데게 하시기를 - 예수의 신성에 대한 엄청난 소
문은 9:20의 혈루증의 여인의 경우와도 같이 그분이 입은 옷을 손으
로 대기만 하여도 병을 낫게 한다는 믿음을 갖게 하였다. 따라서 너
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으므로 예수께서 한 사람씩 차례로 만져
주시리라고 기대할 수 없었던 그들은 비록 예수께서 만져주시지 않
는다고 하더라도 병자 자신이 그분에게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것
이라는 강렬한 믿음을 소유하였던 것 같다.
ㅇ나음을 얻으니라(디에소데산) - '완전히(디아) 구원을 받다(소조)'
의미로 병자들이 육신의 병에서 고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혼의
질병, 즉 죄된 세상의 여러 욕망이 주는 고통 속에서도 자유함을 얻
게 되었다고 하는 이중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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