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5장
1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ㅇ그때에(토테) - 마태가 즐겨쓰던(약 90회) 표현으로 다음
문장을 이어주는 연결사의 기능을 하는 말이다(2:7 참조).
ㅇ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 본문에 등장하
는 바리새인들과 서기장들은 지방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직접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종교 회의로부터 갈릴리로 파견된
일종의 종교 조사단이었다. 그들은 당시 전국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예수의 병고침과 가르침에 대해 조사하기 위
해 파견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의 목적은 예수
의 소문에 대한 실체를 조사하기 보다는 오히려 예수를 모해
(謀害)하려고 하는 목적을 띠고 그 모함의 구실을 마련하려
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유대 교권주의자들과 예수 사이에 심
각한 갈등은 날로 더해가도 있었으며 예수의 공생애 후반기로
가면서 이러한 갈등은 격렬한 신학 논쟁(神學論爭)을 통해서
더욱 더 첨예화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파견은 예수에 대
한 예루살렘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으며 예수에 대한 박해가
공공연히 모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ㅇ장로들의 유전 - 여기서 먼저 '장로들'(톤 프레스뷔테론)이
란 문자적으로는 연세가 많은 어른들을 일컫지만 구중에서도
특별히 율법에 능통한 자나 랍비 등의 종교 지도자를 가릴킬
때 흔히 사용되었다. 이들은 율법 해석의 권위를 공적으로 인
정받았는데 일르의 해석은 구전(口傳)으로 이어져 왔으며, 그
러한 해석이 기록된 율법보다 더 존중되었다. 여기서 '유전'
(파라도시스)이란 '넘겨주다', '전해주다'는 뜻의 원어 '파라
디도미'에서 유래한 말로서 조상적부터 구전으로 내려오는 일
종의 행위법(行爲法)을 가리킨다. 이러한 행위법은 '장로들의
유전'이란 말 외에 '사람의 유전'(막 7:8; 골 2:8), '너희의
유전'(15:3)', '조상들의 유전'(갈 1:14)등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한편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오경에 기록된
것 이외에도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로주신 구전 율법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유대교에서는 성경 율법은 원리만을 가르치
기 때문에 세세하고 복잡한 현실 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상세한 규범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
여 바벨론 포로생활 이후부터 유명한 유대교 랍비들이 고대의
전승 자료들을 중심으로하여 세세한 생활규칙들을 정비, 집성
(集成)하기 시작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장로들의 유전이었다
(Rabbi Judah the Prince C. A. D. 135-200). B. C.
300-A. D. 800년 사이에 이런 구전 율법을 집대성하여 문서화
한 것이 바로 탈무드(Talmud)이다. 탈무드는 내용상 (1) 율
법의 세부 규정을 담은 '미쉬나'(반복이라는 뜻)와 (2) 율법
규정의 교훈적 풀이 곧 미쉬나의 주석서격인 '게마라'(보완이
라는 뜻) 등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고 그 문체면에서는 (1)
법 규정을 다루는 '할라카'(규범이라는 뜻)와 (2) 각종 이야기
를 통한 지혜와 훈계를 주는 '학가다'(이야기) 등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또 본래 탈무드라는 것이 구전, 곧 입으로 전해
져 오던 율법을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그 편집자에 따라 약간
씩 내용상 차이가 생겨나기도 했다. 그 가운데서 현재 유명한
탈무드로는 '바벧론 탈무드'와 '예루살렘 탈무드'가 있다.특히
매우 미미(微微)한 점에 이르기 까지 상세히 사람의 행위를 규
제한 '할라카'는 율법 주위에 둘러쳐진 '울타리'라는 뜻으로서
일부는 모세로부터 개개인에 의해 전래되었고, 일부는 모세의
기록에 기초한 규칙으로서 전부 613개에 달하였다고 한다.장로
들의 유전은 외형상 별 문제가 없는듯이 보이지만 그러나 인간
의 생각을 하나님의 계시와 동일한 수준으로 생각하였다는 점
과 율법의 목적과 그 정신을 저버리고 외형적인 세부규칙들을
번거로울 정도로 상세히 규정해 놓음으로써 결과적으로는 하나
님께서 요구하시는 순종과 사랑을 버리고 인간의 위선과 교만
으로 나아갔다고 하는 점에서 장로들의 유전은 치명적 오류를
범했다. 따라서 비록 탈무드가 여호와 신앙이라는 대전제하에
쓰여진 것이기는 하지만 분명한 유대교적 한계를 갖고 있으므
로 이를 명확히 파악하고 대해야 할 것이다. 한편 더 자세한
이해는 막 7장 강해 '탈무드의 이해'를 참조하라.
ㅇ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 이는 직접적으로 하
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유전에 대한 신학적 농쟁이 계기가 된 말
이다. 식사 때에 손을 씻는 예법(禮法)은 먼지가 많은 팔레스틴
의 풍토와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는 풍속에 의해 위생(衛生)적
필요에서 마련 되었다. 또 한편은 이방인들과의 모든 접촉, 예
를 들어 길이나 시장에서 이방인들과 스치거나 이방인의 물건에
무의식적으로 닿는 일 따위는 성전이나 회당에서의 예배에 의식
적인 장애가 된다고 생각한데서 나온 장로들의 유전이었다. '야
다임'(Yadaim)이라는 소책자응 효과적인 정결 의식을 위해
서는 얼마만큼의 물을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상술하고
있는 '손'(hands)에 관한 행위법을 다룬 책자이다. 그 내용
의 일부를 보면 '만일 한 사람이 한 그릇의 물로 한쪽 손에 붓
는다면 그의 손은 정결하다. 그런데 만일 한 그릇의 물을 두 손
에 붓는다면 그 손이 불결하나 1/4통 이상의 물을 더 붓는다면
그의 손은 정결케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3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ㅇ어찌하여...범하느뇨 -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과 장로들의
유전과의 근본적인 권위의 차이를 분명하게 지적하시는 말씀이
다. 예수께서는 그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를 계기로 삼아 여호
와 신앙의 정수(essence)를 선언하셨는데 이는 율법을 인위
적으로 해석한 유전보다는 하나님의 계명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를, 형식보다는 내용을, 율법의 의식보다는 그 정
신을 더욱 더 증요시하시는 것이다. 실로 유전의 형식을 어기는
것이 부차적인 일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계명의 정신을 어기는
일은 근원적인 죄악의 문제인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범하느
뇨'에 해당하는 원어 '파라바이네테'는 '곁에'라는 뜻의 '파라'
와 '바다'는 뜻의 '바이노'의 합성어로서의 정도(政道)를 벗어
나 '곁길로 빗나는 것'을 의미한다.이는 결국 장로들의 유전은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벗어나 곁길로 가게하는 오류(誤謬)를
포함하고 있다는 강렬한 질책으로 볼 수 있다.
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ㅇ하나님이 이르셨으되 - 본절과 평행구인 막 7:10에는 '모세
가 말하기를'로 기술되었다. 이런 차이는 계명의 원계시자와
그 계시의 전수자를 상호 교호적(交互的)으로 이해한 데서 비
롯된다. 즉 계명은 그것을 전수받고 기록한 기자(記者)의 말인
동시에 그 기자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메시지이기도한 것이다
ㅇ네 부모를 공경하라...훼방하는 자는 - 이는 출 20:12에 기
록된 율법의 제 5계명과 출 21:17에 기록된 제 5계명의 실천적
법규이다. 예수께서 특별히 부모 공경의 율법을 거론하신 이유
는 손을 씻지 않는 일이 장로들의 유전을 어기는 것이라고 한
다면 부모를 거짓으로 공경하는 일은 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
하는 문제임을 지적하심으로써 제자들의 잘못을 힐난하는 바리
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약점을 확연히 드러내고자 하셨기 때문이
다. 사실 제 5계명은 대인(對人)게명 중 가장 으뜸이 되는, 약
속 있는 첫 계명(엡 6:2)로서 음식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보
다 더 중한 계명이다. 한편 훼방하는 자에 해당하는 '카콜로게
오'는 '욕하다', '악의로 말하다', '비난하다'등의 뜻으로 결
국 부모를 훼방하는 자란 자신의 부모의 은혜와 권위를 무시하
고 나쁘게 말하거나, 저주하는(curses)자를 의미한다. 그
런데 이런 패역(悖逆)한 자들은 예외없이 돌로 쳐 죽임을 당함
으로써 그 잘못을 보상해야만 했다. 이것은 하나님께 불경한
말을 하는 것(레 24:16)과 더불어 언어를 잘못 사용함으로 극한
형벌을 당하는 두 가지 죄 가운데 하나이다(레 20:9).
5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ㅇ내가 드려...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 - 유대인들의 서약의
한 형식으로 부모를 부양할 물질을 하나님께 바쳤다고 하는 뜻
이다. 이러한 경우 하나님은 부모보다 더 크시므로 부모에 대
한 의무는 면제가 된다. 막 7:11에는 히브리어 '고르반'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는 원래 하나님께 바쳐진 선물(제물)을 가
리키는 말 이었다. 그러나 이 봉헌의 맹세는 후대로 가면서 차
차 이기적 목적으로 이용되거나 왜곡되었다.즉 사람이 만일
고르반이라는 말을 써서 맹세한 경우 가령 그 가리켜 맹세한것
이 부모의 부양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절대 취하(取下)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조건들을 이용하여 '고르반' 맹세후 그 맹세한 것의 일부만 성
전에 헌납하고 나머지는 모두 자기의 탐욕을 채우는데 사용함
으로써 자신의 부모를 부양할 의무를 저버리는 사람들까지도
나타났다. 진정 이는 출 20:12의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違背)
되는 것이다.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ㅇ하나님의 맡씀을 폐하도다 - 여기서 먼저 '폐하는도다'(에
퀴로사테)는 말은 '권리를 빼앗다'라는 의미의 법률 용어로서
어떤 명령이나 유언을 취소 또는 무효화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3절의 '범하느뇨'라는 말보다 더욱 적극적이고 강렬한 범
죄상을 일컫는 말이다. 즉 조상의 유전을 절대시하는 것은 소
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긋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적극
적으로 하나님의 원뜻을 말살시키는 악행인 것이다.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ㅇ외식하는 자들아 -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가리
켜 위선자라고 불렀던 첫 번째 기록이다. 여기서 '외식하는
자'(휘포크리테스)란 원래 '대답자'란 뜻이었으며, 이것이 발
전하여 '배우'란 의미가 되었다. 물론 여기서는 자신의 본모습
과 겉모습이 다른 위선자란 의미이다(6:2). 한편 예수께서는
특별히 의식에 대해 단호히 책망하셨는데 이는 당시 형식주의
와 의식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유대교를 특징짓는 것이 바로 외
식이며 위선이었기 때문이다. 와식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의
원인에서 발생되는 것으로 살펴볼 수 있다. (1) 소극적 의미의
외식 : 이는 자신의 외식에 대해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
에 해당한다. 이들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으나 대개 선조
들의 유전이나 인습 등에 맹목적으로 순응하며, 종교적 의무를
완성하는 것이 최선의 삶인 것처럼 착각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江水)같은 기름 보
다도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
께 행하는 것이 여호와를 더 기쁘게 하는 것" 임을(미 6:7,8)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2) 적극적 의미에서의 외식 : 이는 자
신의 행위가 외식인줄을 알면서도 자신의 기득권(旣得權) 수호
나 기타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종교적 행사나 규례등을 적극적
으로 이용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로마 정부
와 밀착되면서부터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정신을 망각해 버리고
종교적 허울만을 내세워 자신의 위치를 수호하기에 급급하였다
ㅇ이사야가...잘 예언하였도다 - 예수께서 70인역(LXX)에 따른
사 29:13을 다순히 기계적으로 인용하신 것이 아니라 위선자들
에 대한 여호와의 묘사를 나타내기 위해 단지 4행(行)만을 선
별하여 축약 인용하셨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종교를 형
식주의 종교로 잔락(轉落)시켰다. 바로 이러한 점에 예수를 성
경의 증거를 들어 책망하고 계신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왜
이 말씀을 인용하셨을까?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이사야 당시나 예수 시대나 경고를 받은 사람은 유대인들이었
다. (2) 그들은 예루살렘(종교 중심지)에서 왔다. (3) 그들은
알맹이 없는 형식주의적 종교를 일삼는 자들이었다. (4) 더욱
이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조상들의 전통을 고수(固
守)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나,예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
는 자들을 향하여 그들은 실제로 고수하고 있는 것은 이미 오
래전에 이사야가 예리하게 비판을 하였던 위선과 가증한 것에
얽매인 조상들의 정신에 불과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ㅇ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 이는 마음은 이미 하나님을 완전
히 떠나 있으면서도 입술로만 공경한다고 하는 이율 배반적
(二聿背反的)인 신앙 형태를 꼬집는 말이다. 이런 신앙 형태
는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만 하나님을 섬기는 체하는 간교한 위선. (2) 율법의 근본 정
신이자 원목적인 진정한 회개와 사랑 없이 율법의 문자적 규
정만을 지키고서는 마치 의인인 것처럼 생각하는 형식적인 위
선 등이 그것이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ㅇ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 여기서 '계명'에 해당하는
'엔탈마타'는 종교 생활의 실천적 규칙 모두를 말한다. 따라
서 '사람의 계명'이란 인간 자신의 방법에 의해 즉 인본주의
적(人本主義的)인 발상애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의미한
다 실로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롤 무시한 채 아무리 외형이
화려한 경배를 드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헛될 뿐이다.
한편 본문에 대한 히브리 성경의 원의미는 '그들이 나를 경
외하는 것은 그들이 가르침을 받은 혹은 기계적으로 배운 사
람의 계명에 의한 것이다'인데 이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이
단순히 기계적인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
이 아니라 오히려 모독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ㅇ헛되이 경배하는도다 - 여기서 '헛되이(마텐)란 '열매가
없는', '아무런 목적이 없이'란 뜻으로 그릇된 목표를 위해
수고하는 것은 처음부터 목표가 없었던 것과 같이 공허하다
는 것이다. 실로 여호와 신앙에 근거하지 않은 외식적 경배
행위는 종교적, 윤리적 결과를 전혀 기대할 수 없는 허무한
경배일 뿐이다(말 1:6-10).
10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ㅇ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 예수께 질문하러온 바리새파 사람
들과 서기관에 대한 존경과 계층적 차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
들과 조금 거리를 두고 서 있었음이 분명하다. 적대자들과의
논쟁을 마치신 예수께서는 그의 파격적(破格的)인 말씀에 의
해 당황하고 있는 무리들을 가까이 불러 더이상 그들이 바리
새인과 서기관의 말에 미흑되지 않도록 종교와 윤리의 본질,
즉 내적 정결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11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ㅇ입에 들어가는 것...입에서 나오는 그것 - 입에 들어가는
것은 음식을 의미하고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말을 통해 밖으
로 표출되는 인간의 정서(情緖)와 사상을 가리킨다(17-20절)
이러한 측면에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고 하는 것은
위생적인 불결함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도덕적 의의릍 가질
수는 없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을 더럽게 하는 것은 외
형(형식)적인 불결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발산되는 부도덕
한 언행과 인격 등 영적인 요인으로 그 해독은 오히려 아주
치명적인 것이다.
ㅇ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 '더럽게 하다'는 헬라어
동사 '코이노이'는 '저속하게 하다','품위를 떨어뜨리다'
(makes common)란 의미로 부정하다고 취급된 음식을
구분해둔 레위 제사법에서 유래한 종교적 용어이다. 한편 저
속한 일에 참여하는 것이 유대인들에계는 의식적으로 불결한
것이기 때문에 '더럽게 하는것'으로 번역됨다. 이처럼 유대
인들이 레위 제사법상 부정한 음식을 섭취함으로써 발생하는
더럽힘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그 음식 자체가 지닌 더러움 때
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을 어기는 불순종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사실 음식은 인간의 영적 순결과 도덕적
청결는 무관하다(딤전 4:3, 15). 실로 인간의 부정은 오직
인간의 불순종에 있는 것이지 물질적인 것에 연유하지 않는
다. 한편 11절의 말씀은 초대 교회 당시 이방인에 대한 선교
과정에서 야기(惹起)된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중요한
척도로서의 역활을 하였을 것이다(행 10:9-16:11;롬 14:13;
고전 8:10).
12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줄 아시나이까
ㅇ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 제자들이 이렇게 예수께 말
씀을 드린 것은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서 크계
화가 났음을 보여준다. 즉 그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러
했듯이 제자들 역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을 존
경했었으므로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을 그렇게까지 분노케 한
예수의 말씀을 정확하게 다시 듣고 싶어 한 것 같다.
ㅇ바리새인들이...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 공동 번역에는
그들이 "지금 하신 말씀을 듣 비위가 상한것을 아십니까?"로
번역하여 분노한 종교지도자들의 상태를더욱 생동감(生動感)
있게 전하고 있다. 여하튼 이 말은 그들이 자기들의 잘못된
율법관을 지적한 예수의 말씀을 참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분노를 터뜨리고 실족하여 진리의 대적자가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사실 진리를 말한 사람에 대한 분노는 다음
의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된다. (1) 지금까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해 오던 것에 대한 신뢰의 상실과 자신에 대한 배반감으
로 인해서 생성된 분노, (2) 자신의 판단이 거짓이었으며 불
의에 불과 하다는 사실을 끝까지 거부하고 진리를 말한 사람
을 오히려 이단(異端)시하는 태도에서 오는 분노로서, 이러
한 왜곡된 모습은 진리를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하고 진리에
대해 오히려 두려워하고 외면하려는 마음에서 나타난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ㅇ심은 것 - 이수라엘 민족은 종종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심
으신 식물(植物) 혹은 물댄 동산(사 58:11), 하나님의 밭 혹
은 토지(고전 3:9), 하나님의 포도원(사 5:7)으로 생각하여
왔다. 또한 선지자들도 이스라엘을 나무로 묘사하곤 했는데
(사 5:1-7) 특별히 포도나무로서 비유되었다(시 80:8). 어떠
한 상징이든지 중요한 것은 심기운 것이 무성하게 자라게 하
기 위해서는 심은 이가 하나님이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ㅇ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 위선자들의
종말을 선언하시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본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전통과 유전에 따른 모
든 그릇된 교리는 근절되어 버릴 것을 시사하셨다. 그 뿐만
아니라 유대 민족의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께서 심으신 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암시적으로 말씀
하셨다(3:9;8:11,12). 따라서 그들은 악한 자가 심은 가라지
(13:25, 39)와 같이 절망적인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
녕 하나님은 당신의 말쏨을 왜곡, 변조(變造)시킨 그들을 자
신이 심으신 식물로서 인정치 아니하신다(사 41:19;요 15:2).
한편 모든 거짓 식물은 대심판의 날에 의인의 자리에서 내어
쫓겨 최종적인 파멸을 당할 것이다(13:19, 40).
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ㅇ그냥 두어라(아페테 아우투스) - 직역하면 '그들을 가게하
다'(let them go), '포기하다', '버려두다'는 말로,
13:30의 가라지를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하는 말과 같은 맥락
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실로 이는 지대한 사랑의 관심에서가
아니라 철저한 무관심에서의 유기(遺棄,abandonment)
를 뜻한다. 더욱이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구덩이에 던져질 악한 자들에 대한 예수의 일반적인 태도로
서 결국 그러한 자들은 영원히 구제받을 수 없게 된다.
ㅇ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 - 이는 그 당시 널리 알려
진 속담적 경구(警句)였던 것 같다(23:16;요 9:39). 이와 유
사한 헬라 속담에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지 못하는 것은 어
리석은 자가 가르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라는 말
이 있다. 한편 여기서 진리를 분간치 못하는 영적 '소경'으로
일컬어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영적
소경이라 할 수 있다. (1) 율법의 문자와 그 정신을 분별하지
못하고 다만 문자적인 해석에 매어 달려 일평생 살아 간다.
(2)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러 오신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참
메시야로 알지 못하고 그를 대적했다. 따라서 그들은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 다녔다고 해도 영적인 안목(眼目)이 없었기 때
문에 결국 거짓의 길과 파멸의 길로 나아 갈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들의 영적 무지(靈的無知)는 그들이 백성을 가르치는
교사요 지도자라고 하는 데에 결정적이며 비극적인 요인이 되
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만 죽음의 길을 걸을 뿐만 아니라 그
들의 가르침을 의(義)와 진리(眞理)로서 받아 들이는 백성들
까지도 위험한 인도자요 멸망케 하는 자들이다. 영생의 삶으
로 인도하시는 예수만이 그리고 그 예수의 말씀을 전하는 자
들만이 안전한 인도자에 해당한다.
ㅇ구덩이(보뒤논) - 들짐승을 잡기 위해 들판에 파놓은 웅덩
이와같은 함정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파하트'와 동일한 의미
이다. 따라서 '구덩이에 빠지리라'는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불신케 하여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함으로써 함께
파멸당할 운명이 되게 하는 것이며 지옥 불을 던져지게 될 것
임을 상징하는 말이다.
15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ㅇ이 비유를 - 가장 충동적이며 적극적이었던 베드로가 제자
들을 대표해서 예수께 11절 말씀에 대한 어려움을 호소햇다.
여기서 '비유'는 광의적(廣義的) 의미로서 '이해하기 곤란한
말', '불가사의한 말'이란 뜻이다.
ㅇ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가르침
즉 장로들의 유전을 하나님의 계명과 같은 수준으로 생각하는
데에 익숙한 일반 백성들은 물론 예수의 제자들까지도 그들의
가르침을 비난한 예수의 말씀을 즉시 깨달을 수 없었다. 그러
므로 제자들은 그 수수께끼와 같이 이해하기 곤란한 예수의
말씀을 자세히 설명해 주실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그들
의 이해하지 못한 것은 예수께서 지나친 은유적 표현을 사용
하시거나 도무지 알아 듣지 못하는 말을 사용했기 때문이 아
니라 그들의 뿌리깊은 전통과 반(反)하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
이다. 그들은 옛부터 젖어온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
히 영(靈)적인 것과 의식(儀式)적인 것을 혼동하고 있었던 것
이다.
16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ㅇ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 제자들이 그 말씀의
의미를 모른다고 하는 사실은 예수께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혹시 깨달음이 없었다고 한다면 모르겠거니
와 지금까지 예수를 따라 다니며 그분의 이적과 교훈과 행
동들을 직접 보고 확인했던 제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
전히 그의 깨달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예수는 그들을 책망하고 있다. 그의 가르침에 대해 바리새인
은 걸림이 되어 분노하였고 제자들은 깨닫지 못하여 여전히
눈 먼 장님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의
마지막 순교 때까지도 완전한 영적 진리의 지식(知識)을 소
유하지 못했다. 그들은 성령이 임하신 후 성령의 조명
(illumination)을 통해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의
사람들이 된다(요 14:26).
17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ㅇ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 예수는 영적 둔감(鈍感)
상태에 놓인제자들을 향해 유치하리만치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진리를 설명하셨다. 즉 예수께서는 입으로 들어가는
식물은 배로 들어가서 소화 작용을 거친 후 결국 배설되어
버리므로 사람의 마음(인격)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하셨다.
한편 마가는 모든 식물이 그 식물 자체로만 볼 때 깨끗하
다고 기록하였다(막 17:19). 그렇다고 하면 이 말이 식물
에 관한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 율법의 폐기
(abolition)를 전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께서
는 진정 더러운 것이 무엇이며 깨끗한 것이 무엇 인지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촉구하면서 율법과는 다른 수준에 서
서 말씀하고 계셨다'(Banks). 초대 교회는 특히 음식물
에 관한 유대의 율법에 대해 처음에는 주저하고 분명한 입
장을 취하지 못하였으나(행 10:9-16), 본문에서의 예수의
행동 즉 형식에 사로 잡힌 유대인의 식사 예법을 질책하신
것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서 지나치게 까다로운 음식 규례
를 폐지하는 것이 점차 보편적 동의를 얻었으며, 이 본문
의 교훈이 기존의 유대 율법에 대한 문제에 접근하는 전혀
새로운 길잡이가 되었다.
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ㅇ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 입으로 나오
는 모든 말들은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근원인 마음
에서 나오는 것으로, 악한 생각들은 그것이 비록 무형태적
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을 더럽게 하고 결국 멸망에로
이끄는 것이다.
ㅇ마음에서 - 마음은 인간이 지뉜 지(知) . 정(情) . 의
(意)의 핵심적 좌소(座所)로서 인간은 바로 이것이 있기에
비지성적이고 무책임한 짐승과는 구별된다(롬 9:2;10:6,
8;고전 4:5).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
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ㅇ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 악한 생각의 목록(list)은 본문
에서는 6가지로, 막 7:21, 22에서는 12가지로 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대체로 십계명의 후반의 계명들을(제 6-9 계명)
예로 들었는데 이는 유대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장로의
유전은 쉽게 지키면서도 그 마음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계명
을 지키지 못함을 빗대어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다.
ㅇ악한 생각 - 문자적으로는 '나쁜 의견' '불건전한 대화'
를 의미하는 말로, 살인(제 6계명), 간음과 음란(제 7계명)
도적질(제 8계명), 거짓 증거(제 9계명), 그리고 신성모독의
죄에 해당하는 훼방(12:31) 등의 죄를 짓게 하는 근본 요소
가 된다(5:21-48). 이 사실을 익히 알고 있던 잠언 기자는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
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피력한 바 있다. 사실 예수
께서는 인간의 마음이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전제하예 본문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7:11). 그러나 예수께서는 내적 순수만
을 추구하고 외적인 것들에 대해 그 가치를 모두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궁극적으로 더럽히는 것은 본질적으로
악한 마음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다. 이처럼 예
수께서는 구약을 단지 영적으로만 해석하시는 데 관심을 가
지신 것이 아니라, 참된 종교는 인간의 본질(本質)을 다루어
야지 외형적인 것만을 다루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
하셨다.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ㅇ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 예수께서 외면
(外面)보다 내면(內面)을 그리고 형식보다는 내용을 강조하
신 것은 본문에서만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 전체를 통해 일관
되게 흐르고 있는 사상이다(8절;5:28;12:34). 예수께서는 불
완전한 율법을 완성하려고 오셨으나(마 5:17),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극도의 매너리즘(mannerism)과 위선에 빠져
있었기 때문애 율법의 형식과 내용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
한 것인지를 알지 못했으며, 내면적인 죄악보다는 늘 외형적
인 더러움만을 씻어 내려고 하는 일에 급급(汲汲)해 있었다.
이것이 새롭게 변화받지 못한 인격들이 지니는 한계이다.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ㅇ거기서 나가사 - 여기서 '거기'란 지금껏 영적 부정과 물
질적 부정에 관해 바리새인 및 서기관들과 논쟁을 벌였던 가
버나움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더욱 고조된 유대 종교 지도자
들과의 긴장을 직감하시고 유대인의 거주지와 헤롯의 관할권
에서 벗어난 안전한 처소로 피하셨다.
ㅇ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 예수의 활발했던 갈릴
리 전도 사역은(4:12-15:20) 이제 끝나고 은거(retirement)
및 베레아 사역이 이때부터 시작하여 20:34까지 계속된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호수로부터 50-60km 정도 떨어진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고 있는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나가셨다. 한편
막 7:24에 나타나 있는 '두로 지경'이라는 말때문에 예수께서
실제 그 지역내에 들어가셨느냐(Chrysostom)이 아니면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의 땅을 더럽게 생각하고 들어가지 않았
기 때문에 그 경계선 지역에만 가셨느냐(Bengel)하는 이
론이 있다. 그러나 21절과 막 7:31에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를
떠나 이방지역으로 돌아가셨음이 분명하다. 유대인들의 강한
반발에 부따히신 예수께서는 복음을 거절하는 유대인들을 떠
나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셨다.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ㅇ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명령형
'이두'('보라'는 뜻)가 언급되어 있다. 이는 아마도 이어지는
사건의 독특함과 돌발적인 성격을 강조하려 했기 때문에 사용
되었을 것이다.
ㅇ가나안 여자 하나가 - 막 7:26에는 '수로보니게'(syrian
phoenicia)라는 고유 명사를 사용해서 이 여인의 혈통이
시리아에 거주하는 페니키아인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반면에
본문에서는 그녀를 페니키아에 복속(服屬)되기 전의 고대명인
가나안족으로 언급하였는데 이는 마태가 그녀의 옛 조상을(민
13:29;삿 1:30, 32, 33) 잊지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
스라엘의 옛 원수의 자손이 축복을 받기 위해 유대인의 메시야
에게로 왔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함이었다. 한편 2세기
말 콜레멘트(clement) 설교에 의하면 가나안 여인의 이름은
'유스타'(Justa)요, 그의 딸은'베레니케'(Berenice)였다고
전한다.
ㅇ그 지경에서 나와서 - '나오다'라고 하는 의미의 헬라어
'여셀두사'는 가나안 여인이 자기가 살던 이방 땅에서 나와서
주님을 만나러 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집
이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이나 혹은 그녀가 고향을 잠시 등지
고 예수가 계신 곳으로 나왔다고 하는 사실을 의미한다
(Lohmeyer, Bonnard).
ㅇ주 다윗의 자손이여 - 여인이 '주'란 말을 다윗의 자손이란
말과 결합시킨 것을 보면 이 여인은 '주'를 보다 고차적 의미
즉 메시야적 칭호((:27;12:23)로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여인은 이스라엘의 메시야적 소망(所望)에 대한 지식을 소
유하고 있었고 이 말들이 다윗왕의 약속된 후손으로서의 예수
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메시야로서
의 예수의 소문이 벌써 이곳까지 전파되어 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유대지도자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식하지 못하고
거부하였으나 그들이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들로 경멸하던 육
체적인 불구자들(9:27)과 이방인들이 오히려 예수가 메시야이
심을 알아보고 순종(順從)하였다.그러나 그 여인이 유대교의
개종자였다고 할 만한 근거는 아무데도 없다.
ㅇ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가나안 여인은 고통당하는 딸과 자
신을 동일시(identity)하여 애끊는 심정으로 예수의 '자비의
심정'에 호소하고 있다. 사실 그녀는 이방인으로서, 민족적
특권이나 공로를 내세울 수 없었다. 단지 예수의 자비한 성품
(性品)에만 기대했던 것이다. 여하튼 이방인으로서 유대인에
게 채아온 것도 파격적인 일이었지만 이처럼 자신의 절박한
사정을 호소한 것은 더더욱 놀라운 사건이다. 실로 참된 구원
을 소망하는 자는 이러한 인위적 장벽을 넘는 용기와 열심이
요구된다.
ㅇ흉악한 귀신 들렸나이다 - 여기서 '흉악히'에 해딩히는 원어
'카코스'는 '위험할 만큼 해로운'이라는 뜻으로 딸의 치명적
병세를 나타내 준다. 그녀는 아마 주위로 부터 질병과 귀신과
의 상관 관계에 대해 들은 바 있었던 것 같다.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ㅇ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 본뮨에서는 예수의 침묵은
단순한 거절이나 냉담의 감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적
중요성을 갖고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침묵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본문의 경우와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의
견해를 요구했을 때의 두가지 경우이다(요 8:6). 본문의 경우
에 예수의 침묵은 다음의 네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1)
뒤 따르는 말씀(24절)으로 보아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불신과
이 이방 여인의 환영을 비교하시면서 생각에 잠기셨을 것이다.
(2) 이 여인이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자신을 부른 것과 비교
하여 그것이 다만 예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아첨(阿諂)에 불
과한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참으로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알고
있는지 시험하시고 싶었을 것이다.(3) 구속사의 전개는 분명히
유대인 중심이다. 즉 구약성경이 유대인에게 주어졌고(요 4:22
-26) 예수께서도 유대인으로 나셨다. 그리고 천국 복음도 유대
인에게 먼저 전파되었다(10:5-40). 그런데 이제 예수께서는 유
대인의 굴레를 벗어나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문제에 직면하시게
됨으로써 잠시 침묵이 필요하시게 된 것이다. (4) 이방 여인의
인내와 믿음을 더욱 깊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한편 본문의 예
수의 침묵을 통해서 우리는 귀중한 영적 교훈을 깨달을 수 있
는데 (1)예수 그리스도의 침묵 속에는 우리의 복음과 열성을
시험하시려는 의도가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의 간
구가 쉽게 응답되지 않는다고 해서 곧 좌절(挫折)하거나 포기
해서는 안된다.(2) 우리의 소망하는 바에 대한 주님의 침묵은
단순한 거절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하는것이다. 잘못된 간
구야 당연히 거부되는 것이지만 올바로 구한 간구는 하나님이
계획하심에 따라 선한 결과를 가져온다.
ㅇ보내소서 - 제자들의 이 말이 '그녀의 요구를 늘어 주지말고
그냥 보내소서'라든가 아니면 '그녀의 요구를 빨리 들어주고
보내소서'(Meyer, Benoit)였든지 간에 이 말은 귀찮은 그
여자를 빨리 쫓아버리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말이었다. 따라서
침묵하는 예수 앞에 그들이 중재자로 나선 것은 그 여자에 대
한 진정한 동정심(同情心%) 에서가 아니라 단순한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분명하다.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 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ㅇ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 이 구절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10:6)고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
의 선교 명령의 반복으로서 예수께서 맡으신 사명이 어떠한 것
임을 보여준다. 한편 이것은 구원의 복음이 결코 유대인에게서
만 영원히 국한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고 하는 요 4:22 말씀처럼 (1)예수께서는
자신의 민족의구원 문제를 일차적으로 생각한 것 같다. 왜냐하
면 유대인을 중심으로한 구속사의 전개는 하나님이 직접 작성
하신 엄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사도인 바울
도'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롬 2:10)고 하였
다. (2) 유대인은 예수를 배척했어도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음을 보여준다. (3) 예수께서는 당신이 주로
유대인 사역에 힘쓰시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서 전도할 사
명을 제자들에게 주셨는 바, 제자들은 예수의 뒤를 좇아 힘써
선교해야 할 것이다(요 10:16;행 1:8). 한편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란 표현은 선민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양'이라
표현했던 선지자들의 메시지어서(겔 34:6) 유래한 것으로 이
스라엘이 그들의 참 목자되신 예수를(요10:11) 오히려 거부했
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잃어버린 양'이 된 것이다.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ㅇ와서 예수께 절하며 - 가나안 여자는 예수 자신의 무시
(無視)와 냉대(冷待) 그리고 그를 둘러싼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더욱 더 가까이 접근하여 무릎을 꿇고(2:2 ;8:2) 예
수께 경배하였다. 22절과 관련하여 언급된 두 가지 즉 그 여
자의 경건한 자세와 쓰라린 고통은 본절에서도 분명하게 드러
나고 있는데 마태는 '절하다'(프로세퀴네이)의 미완료형을
사용함으로서 그녀가 예수의 발앞에서 계속 연이어 절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ㅇ저를 도우소서 - '도우소서'의 헬라어 '보에데이'는 '부르
짖음'의 뜻인 '보에'와 '달리다'의 뜻인 '데오'에서 합성된
'보에데오'의 명령형으로 긴급한 구조를 요청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예수께서 침묵하시면 하실수록 예수의 침묵하시는
의도를 알지 못하는 가나안 여자는 더욱 더 간절하게 그의
도움을 구하였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ㅇ저녀가 떡을 취하여 -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축복을 가지고서'라는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
아들임에 있어서 유대인들에게 그 우선권이 있음을 상징하
는 말이다. 물론 이스라엘의 이러한 배타적(排他的) 특권이
영구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님을 말씀하시고 하
였다(호 1:9, 10). 그러나 복음 전파의 순서는 먼저 유대인
에게였고 그 다음은 이방인에게였으며(롬 2:9, 10), 본격적
이방 전도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후 그의 제자들 특히 사
도 바울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한편 바울도 이스라엘 민족
(民族)은 택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남보다 먼저 받
은 종교적 특권이 있음을 인정하였고, 민족적 구원의 문제
가 그에게 대단히 중요한 과제임을 인정하였다(롬 3:1, 2;
9:1,2).
ㅇ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 성경에서 '개'(퀴
온)라고 하는 말은 모두 악한 것을 상징하고 그것을 야유하
기 위해서 사용된 것으로서(출 11:7;삿 7:5;마 7:6;빌 3:2)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의 경멸의 대상인 이방인이나 이단자
를 가리키기 위해 자주 사용되었다(시 59:6). 그러나 예수
께서 사용하신 '개'라고 하는 말인 헬라어 '퀴나리온'은 경
멸적 의미에서의 '들개'나 거리를 어슬렁 거리며 다니아 사
납고 악한 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집 안에서 기르는'애
완용 개'나 '강아지'를 의미한다. 따라서 '개'라는 표현은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부를 때 사용하던 경멸적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이방인들이 '자녀' 곧 하나님의 선택
된 민족이 아니라고 하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다.
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
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ㅇ옳소이다마는 개들도 - 반의 접속사(but even) '마는...
도'(카이 가르) 는 '그러나...조차도'의 의미로, 본문에서
는 앞사람의 딸을 일단은 긍정하면서도 그 말에 완전히
승복(submission)하지 않고 또 다른 의견을 개진(改進)
하는 경우에 사용되었다. 가나안 여자는 하나님의 질서에
의해 유대인들에 비해 이방인인 자신들이 선택되지 못한 족
속이요 권리를 갖지 못한 자, 즉 개들임을 인정했다. 이처
럼 자신을 개로서 인정하는 것은 성경에서는 가장 큰 겸손
의 행위로 여겨졌다(삼상 24:14;하 8 :13). 특히 사람들은
자신을 극도로 비하(卑下)시켜 표현할 경우 바로 '죽은 개
' 또는 '개 같은'이란 말을 사용하였다(삼하 9:8;16:9).
ㅇ제 주인의 상에서...먹나이다 - 팔레스틴근방의 지역들에
는 식사하는 주인 곁에서 부스러기를 얻어 먹기 위해 개들
이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었다고 한다.
특별히 그 지역들에서의 식사법을 보면 주로 손으로 찢어
먹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자연 부스러기가 많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여하튼 가나안 여인은 사실상 자신이 개의
취급을 받는 이방인 으로서 메시야가 베푸시는 구원과 은혜
의 식탁에 참예(參預)할 수는 없다고 하여도 최소한 하나님
의 무한하신 자비의 일부를 힘을 수는 있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tasker, Schlatter). 실로 그녀는 자
신에게 적용된 비유를놓치지 않고 유효 적절히 선용한 것이
다. 한편 본문의 내용을 의역해 보면 "주님 당신이 저를 개
로 취급한 것은 결국 저의 요구를 당신께서 들어주신 것과
같습니다. 정녕 당신은 당신의 법을 어기지 않고도 충분히
저의 요구를 채울수 있습니다. 저는 그 정당한 일에 따를
뿐입니다. 저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는 아무런 권리 주장
도 못할 뿐 아니라 하지도 않을 것 입니다. 저는 다만 가장
비천한 피조물의 몫으로 할애 된 것만을 위하겠습니다. 진정
당신은 그것이 없다 해도 아무런 손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Pulit Commentary)로 풀어볼 수 있다. 그녀는 하나님의
은헤가 비록 적으나마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지는 것임dmf,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의 독점된 하나님이 아니라 만
민의, 열방의 하나넘이심을 믿고 있었다(롬 3:29).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
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
라
ㅇ여자야 - 헬라어 성경에는 '여자야'라는 말 앞에 감탄사
'오'가 붙어있다. 이는 눅 22:57;요 2:4;4:21과같이 '오'
없이 단순히 호격으로 '여자여'라고 부르는 것과는 전적으
로 다르다. 호격과 함께는 드물게 사용되는 '오'는 말하는
사람의 감정을 드러내 주는데 본문의 경우에는 예수의 놀람
과 감탄이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ㅇ네 믿음이 크도다 - 여기서 '믿음'이란 그녀의 신뢰
(trust), 확신(confidence)과 아울러 겸손(modesty)
과 인내(patience)까지를 포함한 말이다. 이 가나안
여자는 예수 께 칭찬을 받은 두번째 이방인이다(8:10). 이방
인 백부장의 이야기와 본문의 이야기는 몇가지 공통되는 요
소가 있는데 (1) 두 경우 모두 이방인에게(백 부장의 하인,
가나안 여자의 딸) 예수의 병고침의 능력이 베풀어졌다고 하
는 점 (2) 두 경우 모두 이방인 자신의 큰 믿음이 예수에게서
칭찬을 받았다고 하는 점인데 앞에서는 이스라엘 중에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만한 것이 없으며, 이곳에서는 '네 믿음이 크도
다'라고 강조가 되어 있다. (3) 두 경우 모두 예수의 병치료는
병자를 현장에서 만나보지 않은채 멀리서 말씀으로 고치신 '원
거리 치료'였다고 하는 점이다. 따라서 이방인 백부장과 가나
안 여자의 기사는 유대인들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를 배척했으
나 오히려 이방인들은 믿고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에 대
한 구약적 개념이 신약적 개념으로 옮기워졌음을 의미하는 것
이다. 즉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유대인에 국한 되었으나
신약에 와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전 세계의 사람들은 모
두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는 광의적이며 영직인 선민론(選
民論)을 암시하고 있다(행 7:6).
ㅇ네 소원대로 되리라 - 여자의 첫번째 말에 침묵으로 일관하
시고, 두번째 말에는 냉정한 말로 그녀를 무시하셨으며, 마침
내 세번째 말에 이르러 칭찬과 함께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신
예수께서는 비유에 나타난 불의한 재판관처럼 끈질긴 간청에
못이기어 그녀의 소원(所願)을 마지못해 이루어주신 것이 아
니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그녀의 큰믿음을 알고 계셨었다.
그러나 (1)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조차도 부정한 메
시야를 참메시야로 올바르게 인식한 그녀 자신의 내면의 지혜
와 믿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냄으로써 유대인들을 부끄럽게
하며 회개를 촉구하시기 위해서, 그리고 (2) 유대인들이 거부
한 구원의 축복이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이방인들도 그 축복의
자리에 참여할 수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예수께서는 그녀의
소원을 외면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
신 말씀은 그녀를 위허 이미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 결정되어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소원대로'(호스 델레이스)란 직역하면
'원하는 만큼'으로 각종 난관(難關)을 인내로 극복한 그 여자
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시겠다는 예수의 강한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2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ㅇ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 막 7:31은 예수
가 두로에서 나와 북쪽에있는 시돈으로 가선 다음에 다시
헤롯의 통치 영역의 밖, 즉 갈릴리 호수 남동 쪽에 위치해
있는 데가볼리를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러한 여정(旅程)은 예수께서 사악한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의 관할 지역을 의도적으로 회피하셨음을 보여준다
아무튼 이곳은 아직까지 유대 지경이 아뉜 이방인의 땅이라
고 하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곳에서의 병고침과 4천명의 급
식(supply of food) 사건은 가나안 여자의 사건을 통해
서 이방인들이 자신들에게는 부스러기, 즉 한정된 축복 밖
에는 돌아갈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을 염려하신 예수
께서 이제 구원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도 본격적으로 전과
되었고 그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게 되
었음을 알리시기 위한 목적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할수 있다.
ㅇ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 이는 산상수훈의 장면(5:1)
을 연상케 한다. 예수께서는 선교 여행자로서의 여독(餘毒)
으로 인해 잠시 휴식 하셨다. 그러나 이 휴식은 정적(靜的)
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며 동적(動的)인 휴식이었다. 즉
본 기사를 영적으로 살필 때,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신 것은
모든 사람이 당신을 잘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왜냐하
면 예수는 모든 자의 바라 볼 소망이시며 만인의 구원자이시
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께서 앉으신 것은 당신 찾아오시는
자를 은혜롭게 맞아 주시기 위하여 모든 문제가 해결될 때
까지 안정되게 자리를 잡으심을 의미한다.
30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ㅇ큰 무리가...여럿을 데리고 - 평행 구절인 막 7:31-37에는
귀먹고 어울한 자를 고치시는 장면만을, 즉 여러 치유 기사
중 극적 장면만이 선택 기록되어 있으나 본서에는 각종 질병
을 치유하시는 종합적인 장면이 기술되어 있다. 사설 그 당
시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의학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했던 소외된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만성적(慢性的)
이고 고질적인 각종 질병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중 본문의
'불구자'(퀼루스)는 신체 중 일부가 손상되었거나 기능이 마
비된 자를 가리킨다. 아무튼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가 위대한
의사로서 영.육의 질병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심을 계속적으
로 보여주고 있다.
ㅇ예수의 발앞에 두매 - '두다'라고 하는 헬라어 '마토'는
사람이나 무거은 물건을 마치 경쟁하듯이 서둘러 내려 놓는
다고 하는 말이다. 본문의 경우 사람들이 병자들을 예수 앞
으로 인도해 와 진지한 열성(熱誠)으로 그의 발 앞에 내려
놓고 당신의 뜨거운 사랑을 호소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담
고 있다. 더구나 '두다'의 미완료형 '엘마산'은 병든 사람
을 예수의 발 앞에 내려놓는 행위가 한 번에 끝난 것이 아
니라 계속 반복해서 진행되고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이 말
은 무수히 많은 병자와 불구자들이 이곳 저곳에서 모여 예수
앞에 앉아그의 만져심과 고쳐주심을 기대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31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ㅇ벙어리가 말하고...소경이 보는 것 - 마태는 이사야가 언
급했던(사 35:5, 6) 병의 종류들 즉 절뚝발이, 불구자, 소경,
벙어리와 그 완치(完治)를 그대로 언급함으로써 이방에서의
예수의 병 치료도 역시 이사야 예언의 성취이며 따라서 '이
방의 땅 갈릴리의 흑암에 앉은 백성들이 큰 빛을 볼 것'(사
9:1, 2)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예언도 역시 이루어지고 있음
을 보여주고 있다.
ㅇ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 현재 예수께서 머
물러 계신 곳이 바로 유대인들이 잘 지나 다니지 않는 곳인
이방 땅 갈릴리 호수라고 하는 점과 병고침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말을 통
해서 그들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님을 간접적으로 암시한
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지금 이방인들과 함께 계시고 그 이방
인들을 고쳐주신 것이다. 한편 이방인들이 예수의 기적을 보
고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는 이러한 표
현은 오히려 유대인들로 하여금 놀라게 하는 요인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그들도 역시 예수의 기적을 보고서 하나님께 영광
을 돌린 적이 있었으나 대부분의 경우에 예수의 권능은 바알
세불 등의 힘에 의한 것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며 그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될
수 있는 대로 그러한 사실을 부인하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ㅇ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 5천명을 먹일 때는 제자들이 나
아와 무리들의 먹을 것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반(反)해서 여기
서는 예수가 먼저 나서서 그들을 먹이기 위해 제자들을 부르
셨다.
ㅇ내가...불쌍히 여기노라 - 이번 이적의 동기를 보여 준다.
즉 예수는 무리들에 대해 뜨거운 동정심으로 인해 그들의 필
요를 채워 주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
는 뜻의 헬라어 '스프랑크니조마이'는 '내장', '심장'이란 뜻
의 '스프랑크논'에서 유래한 것으로 피부 깊숙이서부터 표출
된 깊은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나타내 준다. 실로 바로 이 예
수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인간 구원과, 인생 문제 해결의
궁극적인 원인이 된다(14:14;눅 7:13).
ㅇ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 '함께 있다'라는 뜻의 헬라어
'프로스메노'는 '함께 머물다', '집착하다' 등의 의미로, 행
11:23에서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보낸 바나바가 안디옥 교인들
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고 권고하는 말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지금 갈릴리 호숫가에 밀집
해 있는 무리들은 그들이 비록 예수를 영혼의 질병을 구원하
는 참메시야로서 알지 못하고, 단순히 굶주림과 병(病)에서
놓여나게 하는 구원자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예수에
대한 그의 기대와 신뢰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
실을 의미한다,
ㅇ이미 사흘이매 - 이는 예수의 병고치는 사역이 그 각각의
병자의에게 계속 진행되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 무리들이
가져왔던 음식이 모두 바닥났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한편 팔
레스틴 주민들은 보통 두터운 겉옷을 걸치고 다니면서 싸늘한
밤 기후에도 길가에서 노숙(露宿)할 만큼 먼 여행에 익숙해
있었다.
ㅇ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 헬라어 성
경에서 쓰인 '메포테'는 '혹시 '하지나 않을까'라는 뜻으로,
조건문을 이끄는 종속 접속사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예수께
서 '혹시 그들이 길에서 지쳐 쓰러지지나 않을까'하는 염려
때문에 그들을 집으로 보내지 못하고 있음을 잘 드러내고 있
다. 이는 그들에 대한 예수의 사랑이 마치 자녀에 대한 부모
의 사랑 같은 것임을 나타내 주는 표현이다. 한편 학자들에
따르면 그 당시 민족적 축제로 인해 각지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일 때는 그중에 상당한 사람들이 지쳐 기진하거나 심하면
객사(客死)했다고 한다.
33 제자들이 가로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ㅇ어디서...떡을 얻으리이까 - 제자들의 이 물음이 필요한
양의 떡을 공급하는 일은 자신들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예수
께 달린 것임을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이 조금
씩 받게 할지라도'(요 6:7)라는 오천 명 먹일 때와 같은 식
의 계산도 하지 않고 오히려 군중들의 배부름을 예상하고 있
다고 하는 점에서 그들이 오천 명의 급식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고 예수께 대한 신앙을 간직하였다는 평가가 있다(R.
C. H. Lenski).반면 제자들의 이 물음은 어찌 할 바를 모르
고 당황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고 판단하여 그들이 여전
히 무지하고 불신앙적이라고 하는 비판이 있다(D.A.
Carson, William Handriksen). 그중 후자의 견해가 더욱 타
당한 듯하다. 즉 제자들은 고질(痼疾)적인 불신앙으로 예수
의 무한하신 권능과 과거의 이적들을 외면하였던 것이다.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ㅇ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불
신앙적 태도를 책망치 않으시고 대신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권능을 기대하도록 하시려는 의도에서 이 같은 질문을 던지
셨다. 예수의 이 물음은 다음의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1) 현재 너희가 가지고 있는 물질, 재능, 소질에 대한 참
된 가치는 신앙의 힘에 의해서 만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다. 예수께서는 언제나 현재 가진 것을 변혁을 위한 놀라운
가능성(可能性)으로 바라보셨는데 이는 말씀만으로도 친지를
창조하실 수 있었던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뢰(信賴)에서
생겨난 것이다. (2) 영적인 의미에서, 인간 영혼의 떡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가 지금 어느 정도인가를 물으시는 것
이다. 그리고 그 믿음이 비록 겨자씨만한 것 혹은 보리떡 일
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
기에는 절대 부족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믿음을 기초로 하
여 더 큰 믿음을 이루시겠다고 하는 의지가 담겨져 있는 것
이다.
ㅇ일곱 개 - 이 '일곱' 이라는 숫자는 성경 문학적으로 하나
님의 수, 승리의 완전수를 가리키는데 본문에서는 그러한 영
적 측면에서보다 그 당시 실재했던 물고기의 숫자에 관심을
집증시키는 것이 좋다.
ㅇ작은 생선(잎뒤디온)- 이 말은 당시 주식으로 사용했던 건
조한 조그만 물고기였을 것이다. 그런데 특별히 본문에서는
적어도 하찮은것, 별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조금은 과소평가
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35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ㅇ땅에 앉게 하시고 - 이 때의 계절을 짐작하게 하는 말이다.
14:19에서 푸른 잔디(막 6:39)에 앉게 하셨을 때의 계절이 우
기(雨基)가 막 지나고 유월절이 가까와 오는 봄이었다면 이방
땅에서의 전도 여행을 끌맺음하려는 이때는 유월절이 훨씬 지
난 건조기의 여름에 해당한다.
36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ㅇ축사하시고(유카리스테사스) - 이는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
께 대화(기도)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유대인들은 음식을 먹
기 전에 이러한 감사의 기도를 습관처럼 드렸다(14:19).
37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ㅇ배불리 먹고 - 같은 동사 '코타조'가 5장의 산상수훈(山相羞
訓)에도 나온다. 즉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
희가 배부를 것임이요'(5:6). 이 동사는 주로 '만족을 채우다'
라는 의미로, 각 사람들이 각자 만족한 만큼의 넉넉한 음식을
받았음을 암시한다.
ㅇ광주리 - 유대인들이 여행시에 이방인의 지역을 지나가게 되
더라도 이방인들의 음식을 먹지 않기 위해 자신들의 음식을 담
아 가지고 다니는 주머니를 가리키는 말인 바구니(코피노스 ;
14:20) 와는 달리 광주리 '스퓌리스'는 흔히 이방인들이 물고기
나 과일을 담는 데 사용하기 위하여 갈대로 만든 큰 그릇이다.
어떤 것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큰 것도 있었다고 한다
(행 9:25). 따라서 본문의 남은 떡 조각은 5,000명 급식 때보다
더 많은 양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한편 롤린슨(Rawlinson)
에 의하면 최소한 유대인들도 정결한 음식물을 나르기 위해서는
광주리가 아니라 바구니(코피노스)를 사용했다고 한다. 따라서
'광주리'라고 하는 표현도 아무리들이 역시 유대인이 아닌 사람
들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38 먹은 자는 여자와 아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ㅇ사천 명이었더라 - 이는 예수의 이적이 지닌 탁월성을 보여주
는 동시에 미구(未九)에 그가 베푸실 메시야 잔치의 풍성하고도
충만한 상태를 예시해 준다. 향편 여기서 사천 명이라는 수에서
'넷'이라는 숫자는 천지 사방 (天地四方)을 가리키는 것이며
'천'이라는 숫자는 크고 많다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4,000
(4*1,000)이란 영으로 세게성, 보편성, 및 광대성을 암시하는
숫자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결국 전세계는 생명의 떡이신 주님
을 필요로 하고 주님은 이 세상 모두를 만족게하고도 남을 만큼
의 풍성한 영적 생명력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준다고 할수 있다.
39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에
가시니라
ㅇ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 주님과 함께 오랫동안 지내던(프로
스메노;32절) 사람들을 이제 '풀어 보내시다'(아폴뤼오)는 의
미로, 예수께서는 자신의 곁에 더 머무르려고 하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강제로 집에 돌려 보낸다고 하는 뜻이 들어있다. 예
수께서 이들을 강제로 돌려보낸 사실에는 다음의 두 가지 의미
가 담겨져 있을 것이다. (1) 우선 이들은 12제자들과 같이 집
이나 전토(田土), 부모, 형제, 처자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christian)이 아니라 단순히 예수님의 이적 행위만을
기대하며 그를 좇아 다니는 사람들(Christ follower)
이기 때문이다. (2) 이들이 광야에 남아서 예수릍 그들의 임금
으로 옹위(擁衛)하려는 정치적 모의를 할 수 없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흩으시고 강제로 집에 가게 하셨던 것이다. (3) 더욱이
이들이 집이나 마을로 돌아가서 이 엄청난 사건을 사람들에게
전함으로써 예수의 소문은 더욱 더 크게 퍼져나갔고 혼히 이들
은 이방 교회 구성하는 사람들이 되었을 것이다.
ㅇ마가단 지경 - 막 8:10에는 '달마누다지방'으로 되어 있는데
유대의 어떤 사본(바질 사본, 오전시스 사본)에는 '막달라 지
경'으로(KJV에도 이를 따름) 나와 있기도 하다. 그리고 라틴
벌게잇 역(Vulgate)에는 '마게단'(Magedan)으로 표기되어
있다 여하튼 '마가단'의 이름의 뜻은 '망대'로 그 위치는 불명
확하나 아마도 디베랴의 북쪽5km 지점의 게네사렛 평야의 남단
에 있었던 성읍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곳은 막달라 마리아의
고향으로 추정되고 있다.
1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ㅇ그때에(토테) - 마태가 즐겨쓰던(약 90회) 표현으로 다음
문장을 이어주는 연결사의 기능을 하는 말이다(2:7 참조).
ㅇ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 본문에 등장하
는 바리새인들과 서기장들은 지방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직접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종교 회의로부터 갈릴리로 파견된
일종의 종교 조사단이었다. 그들은 당시 전국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예수의 병고침과 가르침에 대해 조사하기 위
해 파견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의 목적은 예수
의 소문에 대한 실체를 조사하기 보다는 오히려 예수를 모해
(謀害)하려고 하는 목적을 띠고 그 모함의 구실을 마련하려
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유대 교권주의자들과 예수 사이에 심
각한 갈등은 날로 더해가도 있었으며 예수의 공생애 후반기로
가면서 이러한 갈등은 격렬한 신학 논쟁(神學論爭)을 통해서
더욱 더 첨예화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파견은 예수에 대
한 예루살렘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으며 예수에 대한 박해가
공공연히 모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ㅇ장로들의 유전 - 여기서 먼저 '장로들'(톤 프레스뷔테론)이
란 문자적으로는 연세가 많은 어른들을 일컫지만 구중에서도
특별히 율법에 능통한 자나 랍비 등의 종교 지도자를 가릴킬
때 흔히 사용되었다. 이들은 율법 해석의 권위를 공적으로 인
정받았는데 일르의 해석은 구전(口傳)으로 이어져 왔으며, 그
러한 해석이 기록된 율법보다 더 존중되었다. 여기서 '유전'
(파라도시스)이란 '넘겨주다', '전해주다'는 뜻의 원어 '파라
디도미'에서 유래한 말로서 조상적부터 구전으로 내려오는 일
종의 행위법(行爲法)을 가리킨다. 이러한 행위법은 '장로들의
유전'이란 말 외에 '사람의 유전'(막 7:8; 골 2:8), '너희의
유전'(15:3)', '조상들의 유전'(갈 1:14)등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한편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오경에 기록된
것 이외에도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로주신 구전 율법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유대교에서는 성경 율법은 원리만을 가르치
기 때문에 세세하고 복잡한 현실 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상세한 규범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
여 바벨론 포로생활 이후부터 유명한 유대교 랍비들이 고대의
전승 자료들을 중심으로하여 세세한 생활규칙들을 정비, 집성
(集成)하기 시작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장로들의 유전이었다
(Rabbi Judah the Prince C. A. D. 135-200). B. C.
300-A. D. 800년 사이에 이런 구전 율법을 집대성하여 문서화
한 것이 바로 탈무드(Talmud)이다. 탈무드는 내용상 (1) 율
법의 세부 규정을 담은 '미쉬나'(반복이라는 뜻)와 (2) 율법
규정의 교훈적 풀이 곧 미쉬나의 주석서격인 '게마라'(보완이
라는 뜻) 등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고 그 문체면에서는 (1)
법 규정을 다루는 '할라카'(규범이라는 뜻)와 (2) 각종 이야기
를 통한 지혜와 훈계를 주는 '학가다'(이야기) 등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또 본래 탈무드라는 것이 구전, 곧 입으로 전해
져 오던 율법을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그 편집자에 따라 약간
씩 내용상 차이가 생겨나기도 했다. 그 가운데서 현재 유명한
탈무드로는 '바벧론 탈무드'와 '예루살렘 탈무드'가 있다.특히
매우 미미(微微)한 점에 이르기 까지 상세히 사람의 행위를 규
제한 '할라카'는 율법 주위에 둘러쳐진 '울타리'라는 뜻으로서
일부는 모세로부터 개개인에 의해 전래되었고, 일부는 모세의
기록에 기초한 규칙으로서 전부 613개에 달하였다고 한다.장로
들의 유전은 외형상 별 문제가 없는듯이 보이지만 그러나 인간
의 생각을 하나님의 계시와 동일한 수준으로 생각하였다는 점
과 율법의 목적과 그 정신을 저버리고 외형적인 세부규칙들을
번거로울 정도로 상세히 규정해 놓음으로써 결과적으로는 하나
님께서 요구하시는 순종과 사랑을 버리고 인간의 위선과 교만
으로 나아갔다고 하는 점에서 장로들의 유전은 치명적 오류를
범했다. 따라서 비록 탈무드가 여호와 신앙이라는 대전제하에
쓰여진 것이기는 하지만 분명한 유대교적 한계를 갖고 있으므
로 이를 명확히 파악하고 대해야 할 것이다. 한편 더 자세한
이해는 막 7장 강해 '탈무드의 이해'를 참조하라.
ㅇ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 이는 직접적으로 하
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유전에 대한 신학적 농쟁이 계기가 된 말
이다. 식사 때에 손을 씻는 예법(禮法)은 먼지가 많은 팔레스틴
의 풍토와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는 풍속에 의해 위생(衛生)적
필요에서 마련 되었다. 또 한편은 이방인들과의 모든 접촉, 예
를 들어 길이나 시장에서 이방인들과 스치거나 이방인의 물건에
무의식적으로 닿는 일 따위는 성전이나 회당에서의 예배에 의식
적인 장애가 된다고 생각한데서 나온 장로들의 유전이었다. '야
다임'(Yadaim)이라는 소책자응 효과적인 정결 의식을 위해
서는 얼마만큼의 물을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상술하고
있는 '손'(hands)에 관한 행위법을 다룬 책자이다. 그 내용
의 일부를 보면 '만일 한 사람이 한 그릇의 물로 한쪽 손에 붓
는다면 그의 손은 정결하다. 그런데 만일 한 그릇의 물을 두 손
에 붓는다면 그 손이 불결하나 1/4통 이상의 물을 더 붓는다면
그의 손은 정결케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3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ㅇ어찌하여...범하느뇨 -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과 장로들의
유전과의 근본적인 권위의 차이를 분명하게 지적하시는 말씀이
다. 예수께서는 그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를 계기로 삼아 여호
와 신앙의 정수(essence)를 선언하셨는데 이는 율법을 인위
적으로 해석한 유전보다는 하나님의 계명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를, 형식보다는 내용을, 율법의 의식보다는 그 정
신을 더욱 더 증요시하시는 것이다. 실로 유전의 형식을 어기는
것이 부차적인 일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계명의 정신을 어기는
일은 근원적인 죄악의 문제인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범하느
뇨'에 해당하는 원어 '파라바이네테'는 '곁에'라는 뜻의 '파라'
와 '바다'는 뜻의 '바이노'의 합성어로서의 정도(政道)를 벗어
나 '곁길로 빗나는 것'을 의미한다.이는 결국 장로들의 유전은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벗어나 곁길로 가게하는 오류(誤謬)를
포함하고 있다는 강렬한 질책으로 볼 수 있다.
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ㅇ하나님이 이르셨으되 - 본절과 평행구인 막 7:10에는 '모세
가 말하기를'로 기술되었다. 이런 차이는 계명의 원계시자와
그 계시의 전수자를 상호 교호적(交互的)으로 이해한 데서 비
롯된다. 즉 계명은 그것을 전수받고 기록한 기자(記者)의 말인
동시에 그 기자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메시지이기도한 것이다
ㅇ네 부모를 공경하라...훼방하는 자는 - 이는 출 20:12에 기
록된 율법의 제 5계명과 출 21:17에 기록된 제 5계명의 실천적
법규이다. 예수께서 특별히 부모 공경의 율법을 거론하신 이유
는 손을 씻지 않는 일이 장로들의 유전을 어기는 것이라고 한
다면 부모를 거짓으로 공경하는 일은 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
하는 문제임을 지적하심으로써 제자들의 잘못을 힐난하는 바리
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약점을 확연히 드러내고자 하셨기 때문이
다. 사실 제 5계명은 대인(對人)게명 중 가장 으뜸이 되는, 약
속 있는 첫 계명(엡 6:2)로서 음식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보
다 더 중한 계명이다. 한편 훼방하는 자에 해당하는 '카콜로게
오'는 '욕하다', '악의로 말하다', '비난하다'등의 뜻으로 결
국 부모를 훼방하는 자란 자신의 부모의 은혜와 권위를 무시하
고 나쁘게 말하거나, 저주하는(curses)자를 의미한다. 그
런데 이런 패역(悖逆)한 자들은 예외없이 돌로 쳐 죽임을 당함
으로써 그 잘못을 보상해야만 했다. 이것은 하나님께 불경한
말을 하는 것(레 24:16)과 더불어 언어를 잘못 사용함으로 극한
형벌을 당하는 두 가지 죄 가운데 하나이다(레 20:9).
5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ㅇ내가 드려...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 - 유대인들의 서약의
한 형식으로 부모를 부양할 물질을 하나님께 바쳤다고 하는 뜻
이다. 이러한 경우 하나님은 부모보다 더 크시므로 부모에 대
한 의무는 면제가 된다. 막 7:11에는 히브리어 '고르반'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는 원래 하나님께 바쳐진 선물(제물)을 가
리키는 말 이었다. 그러나 이 봉헌의 맹세는 후대로 가면서 차
차 이기적 목적으로 이용되거나 왜곡되었다.즉 사람이 만일
고르반이라는 말을 써서 맹세한 경우 가령 그 가리켜 맹세한것
이 부모의 부양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절대 취하(取下)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조건들을 이용하여 '고르반' 맹세후 그 맹세한 것의 일부만 성
전에 헌납하고 나머지는 모두 자기의 탐욕을 채우는데 사용함
으로써 자신의 부모를 부양할 의무를 저버리는 사람들까지도
나타났다. 진정 이는 출 20:12의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違背)
되는 것이다.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ㅇ하나님의 맡씀을 폐하도다 - 여기서 먼저 '폐하는도다'(에
퀴로사테)는 말은 '권리를 빼앗다'라는 의미의 법률 용어로서
어떤 명령이나 유언을 취소 또는 무효화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3절의 '범하느뇨'라는 말보다 더욱 적극적이고 강렬한 범
죄상을 일컫는 말이다. 즉 조상의 유전을 절대시하는 것은 소
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긋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적극
적으로 하나님의 원뜻을 말살시키는 악행인 것이다.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ㅇ외식하는 자들아 -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가리
켜 위선자라고 불렀던 첫 번째 기록이다. 여기서 '외식하는
자'(휘포크리테스)란 원래 '대답자'란 뜻이었으며, 이것이 발
전하여 '배우'란 의미가 되었다. 물론 여기서는 자신의 본모습
과 겉모습이 다른 위선자란 의미이다(6:2). 한편 예수께서는
특별히 의식에 대해 단호히 책망하셨는데 이는 당시 형식주의
와 의식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유대교를 특징짓는 것이 바로 외
식이며 위선이었기 때문이다. 와식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의
원인에서 발생되는 것으로 살펴볼 수 있다. (1) 소극적 의미의
외식 : 이는 자신의 외식에 대해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
에 해당한다. 이들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으나 대개 선조
들의 유전이나 인습 등에 맹목적으로 순응하며, 종교적 의무를
완성하는 것이 최선의 삶인 것처럼 착각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江水)같은 기름 보
다도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
께 행하는 것이 여호와를 더 기쁘게 하는 것" 임을(미 6:7,8)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2) 적극적 의미에서의 외식 : 이는 자
신의 행위가 외식인줄을 알면서도 자신의 기득권(旣得權) 수호
나 기타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종교적 행사나 규례등을 적극적
으로 이용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로마 정부
와 밀착되면서부터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정신을 망각해 버리고
종교적 허울만을 내세워 자신의 위치를 수호하기에 급급하였다
ㅇ이사야가...잘 예언하였도다 - 예수께서 70인역(LXX)에 따른
사 29:13을 다순히 기계적으로 인용하신 것이 아니라 위선자들
에 대한 여호와의 묘사를 나타내기 위해 단지 4행(行)만을 선
별하여 축약 인용하셨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종교를 형
식주의 종교로 잔락(轉落)시켰다. 바로 이러한 점에 예수를 성
경의 증거를 들어 책망하고 계신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왜
이 말씀을 인용하셨을까?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이사야 당시나 예수 시대나 경고를 받은 사람은 유대인들이었
다. (2) 그들은 예루살렘(종교 중심지)에서 왔다. (3) 그들은
알맹이 없는 형식주의적 종교를 일삼는 자들이었다. (4) 더욱
이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조상들의 전통을 고수(固
守)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나,예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
는 자들을 향하여 그들은 실제로 고수하고 있는 것은 이미 오
래전에 이사야가 예리하게 비판을 하였던 위선과 가증한 것에
얽매인 조상들의 정신에 불과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ㅇ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 이는 마음은 이미 하나님을 완전
히 떠나 있으면서도 입술로만 공경한다고 하는 이율 배반적
(二聿背反的)인 신앙 형태를 꼬집는 말이다. 이런 신앙 형태
는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만 하나님을 섬기는 체하는 간교한 위선. (2) 율법의 근본 정
신이자 원목적인 진정한 회개와 사랑 없이 율법의 문자적 규
정만을 지키고서는 마치 의인인 것처럼 생각하는 형식적인 위
선 등이 그것이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ㅇ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 여기서 '계명'에 해당하는
'엔탈마타'는 종교 생활의 실천적 규칙 모두를 말한다. 따라
서 '사람의 계명'이란 인간 자신의 방법에 의해 즉 인본주의
적(人本主義的)인 발상애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의미한
다 실로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롤 무시한 채 아무리 외형이
화려한 경배를 드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헛될 뿐이다.
한편 본문에 대한 히브리 성경의 원의미는 '그들이 나를 경
외하는 것은 그들이 가르침을 받은 혹은 기계적으로 배운 사
람의 계명에 의한 것이다'인데 이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이
단순히 기계적인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
이 아니라 오히려 모독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ㅇ헛되이 경배하는도다 - 여기서 '헛되이(마텐)란 '열매가
없는', '아무런 목적이 없이'란 뜻으로 그릇된 목표를 위해
수고하는 것은 처음부터 목표가 없었던 것과 같이 공허하다
는 것이다. 실로 여호와 신앙에 근거하지 않은 외식적 경배
행위는 종교적, 윤리적 결과를 전혀 기대할 수 없는 허무한
경배일 뿐이다(말 1:6-10).
10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ㅇ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 예수께 질문하러온 바리새파 사람
들과 서기관에 대한 존경과 계층적 차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
들과 조금 거리를 두고 서 있었음이 분명하다. 적대자들과의
논쟁을 마치신 예수께서는 그의 파격적(破格的)인 말씀에 의
해 당황하고 있는 무리들을 가까이 불러 더이상 그들이 바리
새인과 서기관의 말에 미흑되지 않도록 종교와 윤리의 본질,
즉 내적 정결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11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ㅇ입에 들어가는 것...입에서 나오는 그것 - 입에 들어가는
것은 음식을 의미하고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말을 통해 밖으
로 표출되는 인간의 정서(情緖)와 사상을 가리킨다(17-20절)
이러한 측면에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고 하는 것은
위생적인 불결함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도덕적 의의릍 가질
수는 없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을 더럽게 하는 것은 외
형(형식)적인 불결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발산되는 부도덕
한 언행과 인격 등 영적인 요인으로 그 해독은 오히려 아주
치명적인 것이다.
ㅇ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 '더럽게 하다'는 헬라어
동사 '코이노이'는 '저속하게 하다','품위를 떨어뜨리다'
(makes common)란 의미로 부정하다고 취급된 음식을
구분해둔 레위 제사법에서 유래한 종교적 용어이다. 한편 저
속한 일에 참여하는 것이 유대인들에계는 의식적으로 불결한
것이기 때문에 '더럽게 하는것'으로 번역됨다. 이처럼 유대
인들이 레위 제사법상 부정한 음식을 섭취함으로써 발생하는
더럽힘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그 음식 자체가 지닌 더러움 때
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을 어기는 불순종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사실 음식은 인간의 영적 순결과 도덕적
청결는 무관하다(딤전 4:3, 15). 실로 인간의 부정은 오직
인간의 불순종에 있는 것이지 물질적인 것에 연유하지 않는
다. 한편 11절의 말씀은 초대 교회 당시 이방인에 대한 선교
과정에서 야기(惹起)된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중요한
척도로서의 역활을 하였을 것이다(행 10:9-16:11;롬 14:13;
고전 8:10).
12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줄 아시나이까
ㅇ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 제자들이 이렇게 예수께 말
씀을 드린 것은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서 크계
화가 났음을 보여준다. 즉 그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러
했듯이 제자들 역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을 존
경했었으므로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을 그렇게까지 분노케 한
예수의 말씀을 정확하게 다시 듣고 싶어 한 것 같다.
ㅇ바리새인들이...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 공동 번역에는
그들이 "지금 하신 말씀을 듣 비위가 상한것을 아십니까?"로
번역하여 분노한 종교지도자들의 상태를더욱 생동감(生動感)
있게 전하고 있다. 여하튼 이 말은 그들이 자기들의 잘못된
율법관을 지적한 예수의 말씀을 참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분노를 터뜨리고 실족하여 진리의 대적자가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사실 진리를 말한 사람에 대한 분노는 다음
의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된다. (1) 지금까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해 오던 것에 대한 신뢰의 상실과 자신에 대한 배반감으
로 인해서 생성된 분노, (2) 자신의 판단이 거짓이었으며 불
의에 불과 하다는 사실을 끝까지 거부하고 진리를 말한 사람
을 오히려 이단(異端)시하는 태도에서 오는 분노로서, 이러
한 왜곡된 모습은 진리를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하고 진리에
대해 오히려 두려워하고 외면하려는 마음에서 나타난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ㅇ심은 것 - 이수라엘 민족은 종종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심
으신 식물(植物) 혹은 물댄 동산(사 58:11), 하나님의 밭 혹
은 토지(고전 3:9), 하나님의 포도원(사 5:7)으로 생각하여
왔다. 또한 선지자들도 이스라엘을 나무로 묘사하곤 했는데
(사 5:1-7) 특별히 포도나무로서 비유되었다(시 80:8). 어떠
한 상징이든지 중요한 것은 심기운 것이 무성하게 자라게 하
기 위해서는 심은 이가 하나님이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ㅇ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 위선자들의
종말을 선언하시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본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전통과 유전에 따른 모
든 그릇된 교리는 근절되어 버릴 것을 시사하셨다. 그 뿐만
아니라 유대 민족의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께서 심으신 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암시적으로 말씀
하셨다(3:9;8:11,12). 따라서 그들은 악한 자가 심은 가라지
(13:25, 39)와 같이 절망적인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
녕 하나님은 당신의 말쏨을 왜곡, 변조(變造)시킨 그들을 자
신이 심으신 식물로서 인정치 아니하신다(사 41:19;요 15:2).
한편 모든 거짓 식물은 대심판의 날에 의인의 자리에서 내어
쫓겨 최종적인 파멸을 당할 것이다(13:19, 40).
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ㅇ그냥 두어라(아페테 아우투스) - 직역하면 '그들을 가게하
다'(let them go), '포기하다', '버려두다'는 말로,
13:30의 가라지를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하는 말과 같은 맥락
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실로 이는 지대한 사랑의 관심에서가
아니라 철저한 무관심에서의 유기(遺棄,abandonment)
를 뜻한다. 더욱이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구덩이에 던져질 악한 자들에 대한 예수의 일반적인 태도로
서 결국 그러한 자들은 영원히 구제받을 수 없게 된다.
ㅇ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 - 이는 그 당시 널리 알려
진 속담적 경구(警句)였던 것 같다(23:16;요 9:39). 이와 유
사한 헬라 속담에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지 못하는 것은 어
리석은 자가 가르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라는 말
이 있다. 한편 여기서 진리를 분간치 못하는 영적 '소경'으로
일컬어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영적
소경이라 할 수 있다. (1) 율법의 문자와 그 정신을 분별하지
못하고 다만 문자적인 해석에 매어 달려 일평생 살아 간다.
(2)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러 오신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참
메시야로 알지 못하고 그를 대적했다. 따라서 그들은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 다녔다고 해도 영적인 안목(眼目)이 없었기 때
문에 결국 거짓의 길과 파멸의 길로 나아 갈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들의 영적 무지(靈的無知)는 그들이 백성을 가르치는
교사요 지도자라고 하는 데에 결정적이며 비극적인 요인이 되
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만 죽음의 길을 걸을 뿐만 아니라 그
들의 가르침을 의(義)와 진리(眞理)로서 받아 들이는 백성들
까지도 위험한 인도자요 멸망케 하는 자들이다. 영생의 삶으
로 인도하시는 예수만이 그리고 그 예수의 말씀을 전하는 자
들만이 안전한 인도자에 해당한다.
ㅇ구덩이(보뒤논) - 들짐승을 잡기 위해 들판에 파놓은 웅덩
이와같은 함정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파하트'와 동일한 의미
이다. 따라서 '구덩이에 빠지리라'는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불신케 하여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함으로써 함께
파멸당할 운명이 되게 하는 것이며 지옥 불을 던져지게 될 것
임을 상징하는 말이다.
15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ㅇ이 비유를 - 가장 충동적이며 적극적이었던 베드로가 제자
들을 대표해서 예수께 11절 말씀에 대한 어려움을 호소햇다.
여기서 '비유'는 광의적(廣義的) 의미로서 '이해하기 곤란한
말', '불가사의한 말'이란 뜻이다.
ㅇ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가르침
즉 장로들의 유전을 하나님의 계명과 같은 수준으로 생각하는
데에 익숙한 일반 백성들은 물론 예수의 제자들까지도 그들의
가르침을 비난한 예수의 말씀을 즉시 깨달을 수 없었다. 그러
므로 제자들은 그 수수께끼와 같이 이해하기 곤란한 예수의
말씀을 자세히 설명해 주실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그들
의 이해하지 못한 것은 예수께서 지나친 은유적 표현을 사용
하시거나 도무지 알아 듣지 못하는 말을 사용했기 때문이 아
니라 그들의 뿌리깊은 전통과 반(反)하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
이다. 그들은 옛부터 젖어온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
히 영(靈)적인 것과 의식(儀式)적인 것을 혼동하고 있었던 것
이다.
16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ㅇ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 제자들이 그 말씀의
의미를 모른다고 하는 사실은 예수께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혹시 깨달음이 없었다고 한다면 모르겠거니
와 지금까지 예수를 따라 다니며 그분의 이적과 교훈과 행
동들을 직접 보고 확인했던 제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
전히 그의 깨달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예수는 그들을 책망하고 있다. 그의 가르침에 대해 바리새인
은 걸림이 되어 분노하였고 제자들은 깨닫지 못하여 여전히
눈 먼 장님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의
마지막 순교 때까지도 완전한 영적 진리의 지식(知識)을 소
유하지 못했다. 그들은 성령이 임하신 후 성령의 조명
(illumination)을 통해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의
사람들이 된다(요 14:26).
17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ㅇ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 예수는 영적 둔감(鈍感)
상태에 놓인제자들을 향해 유치하리만치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진리를 설명하셨다. 즉 예수께서는 입으로 들어가는
식물은 배로 들어가서 소화 작용을 거친 후 결국 배설되어
버리므로 사람의 마음(인격)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하셨다.
한편 마가는 모든 식물이 그 식물 자체로만 볼 때 깨끗하
다고 기록하였다(막 17:19). 그렇다고 하면 이 말이 식물
에 관한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 율법의 폐기
(abolition)를 전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께서
는 진정 더러운 것이 무엇이며 깨끗한 것이 무엇 인지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촉구하면서 율법과는 다른 수준에 서
서 말씀하고 계셨다'(Banks). 초대 교회는 특히 음식물
에 관한 유대의 율법에 대해 처음에는 주저하고 분명한 입
장을 취하지 못하였으나(행 10:9-16), 본문에서의 예수의
행동 즉 형식에 사로 잡힌 유대인의 식사 예법을 질책하신
것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서 지나치게 까다로운 음식 규례
를 폐지하는 것이 점차 보편적 동의를 얻었으며, 이 본문
의 교훈이 기존의 유대 율법에 대한 문제에 접근하는 전혀
새로운 길잡이가 되었다.
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ㅇ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 입으로 나오
는 모든 말들은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근원인 마음
에서 나오는 것으로, 악한 생각들은 그것이 비록 무형태적
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을 더럽게 하고 결국 멸망에로
이끄는 것이다.
ㅇ마음에서 - 마음은 인간이 지뉜 지(知) . 정(情) . 의
(意)의 핵심적 좌소(座所)로서 인간은 바로 이것이 있기에
비지성적이고 무책임한 짐승과는 구별된다(롬 9:2;10:6,
8;고전 4:5).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
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ㅇ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 악한 생각의 목록(list)은 본문
에서는 6가지로, 막 7:21, 22에서는 12가지로 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대체로 십계명의 후반의 계명들을(제 6-9 계명)
예로 들었는데 이는 유대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장로의
유전은 쉽게 지키면서도 그 마음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계명
을 지키지 못함을 빗대어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다.
ㅇ악한 생각 - 문자적으로는 '나쁜 의견' '불건전한 대화'
를 의미하는 말로, 살인(제 6계명), 간음과 음란(제 7계명)
도적질(제 8계명), 거짓 증거(제 9계명), 그리고 신성모독의
죄에 해당하는 훼방(12:31) 등의 죄를 짓게 하는 근본 요소
가 된다(5:21-48). 이 사실을 익히 알고 있던 잠언 기자는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
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피력한 바 있다. 사실 예수
께서는 인간의 마음이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전제하예 본문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7:11). 그러나 예수께서는 내적 순수만
을 추구하고 외적인 것들에 대해 그 가치를 모두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궁극적으로 더럽히는 것은 본질적으로
악한 마음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다. 이처럼 예
수께서는 구약을 단지 영적으로만 해석하시는 데 관심을 가
지신 것이 아니라, 참된 종교는 인간의 본질(本質)을 다루어
야지 외형적인 것만을 다루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
하셨다.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ㅇ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 예수께서 외면
(外面)보다 내면(內面)을 그리고 형식보다는 내용을 강조하
신 것은 본문에서만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 전체를 통해 일관
되게 흐르고 있는 사상이다(8절;5:28;12:34). 예수께서는 불
완전한 율법을 완성하려고 오셨으나(마 5:17),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극도의 매너리즘(mannerism)과 위선에 빠져
있었기 때문애 율법의 형식과 내용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
한 것인지를 알지 못했으며, 내면적인 죄악보다는 늘 외형적
인 더러움만을 씻어 내려고 하는 일에 급급(汲汲)해 있었다.
이것이 새롭게 변화받지 못한 인격들이 지니는 한계이다.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ㅇ거기서 나가사 - 여기서 '거기'란 지금껏 영적 부정과 물
질적 부정에 관해 바리새인 및 서기관들과 논쟁을 벌였던 가
버나움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더욱 고조된 유대 종교 지도자
들과의 긴장을 직감하시고 유대인의 거주지와 헤롯의 관할권
에서 벗어난 안전한 처소로 피하셨다.
ㅇ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 예수의 활발했던 갈릴
리 전도 사역은(4:12-15:20) 이제 끝나고 은거(retirement)
및 베레아 사역이 이때부터 시작하여 20:34까지 계속된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호수로부터 50-60km 정도 떨어진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고 있는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나가셨다. 한편
막 7:24에 나타나 있는 '두로 지경'이라는 말때문에 예수께서
실제 그 지역내에 들어가셨느냐(Chrysostom)이 아니면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의 땅을 더럽게 생각하고 들어가지 않았
기 때문에 그 경계선 지역에만 가셨느냐(Bengel)하는 이
론이 있다. 그러나 21절과 막 7:31에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를
떠나 이방지역으로 돌아가셨음이 분명하다. 유대인들의 강한
반발에 부따히신 예수께서는 복음을 거절하는 유대인들을 떠
나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셨다.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ㅇ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명령형
'이두'('보라'는 뜻)가 언급되어 있다. 이는 아마도 이어지는
사건의 독특함과 돌발적인 성격을 강조하려 했기 때문에 사용
되었을 것이다.
ㅇ가나안 여자 하나가 - 막 7:26에는 '수로보니게'(syrian
phoenicia)라는 고유 명사를 사용해서 이 여인의 혈통이
시리아에 거주하는 페니키아인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반면에
본문에서는 그녀를 페니키아에 복속(服屬)되기 전의 고대명인
가나안족으로 언급하였는데 이는 마태가 그녀의 옛 조상을(민
13:29;삿 1:30, 32, 33) 잊지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
스라엘의 옛 원수의 자손이 축복을 받기 위해 유대인의 메시야
에게로 왔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함이었다. 한편 2세기
말 콜레멘트(clement) 설교에 의하면 가나안 여인의 이름은
'유스타'(Justa)요, 그의 딸은'베레니케'(Berenice)였다고
전한다.
ㅇ그 지경에서 나와서 - '나오다'라고 하는 의미의 헬라어
'여셀두사'는 가나안 여인이 자기가 살던 이방 땅에서 나와서
주님을 만나러 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집
이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이나 혹은 그녀가 고향을 잠시 등지
고 예수가 계신 곳으로 나왔다고 하는 사실을 의미한다
(Lohmeyer, Bonnard).
ㅇ주 다윗의 자손이여 - 여인이 '주'란 말을 다윗의 자손이란
말과 결합시킨 것을 보면 이 여인은 '주'를 보다 고차적 의미
즉 메시야적 칭호((:27;12:23)로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여인은 이스라엘의 메시야적 소망(所望)에 대한 지식을 소
유하고 있었고 이 말들이 다윗왕의 약속된 후손으로서의 예수
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메시야로서
의 예수의 소문이 벌써 이곳까지 전파되어 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유대지도자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식하지 못하고
거부하였으나 그들이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들로 경멸하던 육
체적인 불구자들(9:27)과 이방인들이 오히려 예수가 메시야이
심을 알아보고 순종(順從)하였다.그러나 그 여인이 유대교의
개종자였다고 할 만한 근거는 아무데도 없다.
ㅇ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가나안 여인은 고통당하는 딸과 자
신을 동일시(identity)하여 애끊는 심정으로 예수의 '자비의
심정'에 호소하고 있다. 사실 그녀는 이방인으로서, 민족적
특권이나 공로를 내세울 수 없었다. 단지 예수의 자비한 성품
(性品)에만 기대했던 것이다. 여하튼 이방인으로서 유대인에
게 채아온 것도 파격적인 일이었지만 이처럼 자신의 절박한
사정을 호소한 것은 더더욱 놀라운 사건이다. 실로 참된 구원
을 소망하는 자는 이러한 인위적 장벽을 넘는 용기와 열심이
요구된다.
ㅇ흉악한 귀신 들렸나이다 - 여기서 '흉악히'에 해딩히는 원어
'카코스'는 '위험할 만큼 해로운'이라는 뜻으로 딸의 치명적
병세를 나타내 준다. 그녀는 아마 주위로 부터 질병과 귀신과
의 상관 관계에 대해 들은 바 있었던 것 같다.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ㅇ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 본뮨에서는 예수의 침묵은
단순한 거절이나 냉담의 감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적
중요성을 갖고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침묵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본문의 경우와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의
견해를 요구했을 때의 두가지 경우이다(요 8:6). 본문의 경우
에 예수의 침묵은 다음의 네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1)
뒤 따르는 말씀(24절)으로 보아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불신과
이 이방 여인의 환영을 비교하시면서 생각에 잠기셨을 것이다.
(2) 이 여인이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자신을 부른 것과 비교
하여 그것이 다만 예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아첨(阿諂)에 불
과한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참으로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알고
있는지 시험하시고 싶었을 것이다.(3) 구속사의 전개는 분명히
유대인 중심이다. 즉 구약성경이 유대인에게 주어졌고(요 4:22
-26) 예수께서도 유대인으로 나셨다. 그리고 천국 복음도 유대
인에게 먼저 전파되었다(10:5-40). 그런데 이제 예수께서는 유
대인의 굴레를 벗어나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문제에 직면하시게
됨으로써 잠시 침묵이 필요하시게 된 것이다. (4) 이방 여인의
인내와 믿음을 더욱 깊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한편 본문의 예
수의 침묵을 통해서 우리는 귀중한 영적 교훈을 깨달을 수 있
는데 (1)예수 그리스도의 침묵 속에는 우리의 복음과 열성을
시험하시려는 의도가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의 간
구가 쉽게 응답되지 않는다고 해서 곧 좌절(挫折)하거나 포기
해서는 안된다.(2) 우리의 소망하는 바에 대한 주님의 침묵은
단순한 거절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하는것이다. 잘못된 간
구야 당연히 거부되는 것이지만 올바로 구한 간구는 하나님이
계획하심에 따라 선한 결과를 가져온다.
ㅇ보내소서 - 제자들의 이 말이 '그녀의 요구를 늘어 주지말고
그냥 보내소서'라든가 아니면 '그녀의 요구를 빨리 들어주고
보내소서'(Meyer, Benoit)였든지 간에 이 말은 귀찮은 그
여자를 빨리 쫓아버리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말이었다. 따라서
침묵하는 예수 앞에 그들이 중재자로 나선 것은 그 여자에 대
한 진정한 동정심(同情心%) 에서가 아니라 단순한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분명하다.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 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ㅇ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 이 구절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10:6)고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
의 선교 명령의 반복으로서 예수께서 맡으신 사명이 어떠한 것
임을 보여준다. 한편 이것은 구원의 복음이 결코 유대인에게서
만 영원히 국한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고 하는 요 4:22 말씀처럼 (1)예수께서는
자신의 민족의구원 문제를 일차적으로 생각한 것 같다. 왜냐하
면 유대인을 중심으로한 구속사의 전개는 하나님이 직접 작성
하신 엄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사도인 바울
도'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롬 2:10)고 하였
다. (2) 유대인은 예수를 배척했어도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음을 보여준다. (3) 예수께서는 당신이 주로
유대인 사역에 힘쓰시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서 전도할 사
명을 제자들에게 주셨는 바, 제자들은 예수의 뒤를 좇아 힘써
선교해야 할 것이다(요 10:16;행 1:8). 한편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란 표현은 선민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양'이라
표현했던 선지자들의 메시지어서(겔 34:6) 유래한 것으로 이
스라엘이 그들의 참 목자되신 예수를(요10:11) 오히려 거부했
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잃어버린 양'이 된 것이다.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ㅇ와서 예수께 절하며 - 가나안 여자는 예수 자신의 무시
(無視)와 냉대(冷待) 그리고 그를 둘러싼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더욱 더 가까이 접근하여 무릎을 꿇고(2:2 ;8:2) 예
수께 경배하였다. 22절과 관련하여 언급된 두 가지 즉 그 여
자의 경건한 자세와 쓰라린 고통은 본절에서도 분명하게 드러
나고 있는데 마태는 '절하다'(프로세퀴네이)의 미완료형을
사용함으로서 그녀가 예수의 발앞에서 계속 연이어 절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ㅇ저를 도우소서 - '도우소서'의 헬라어 '보에데이'는 '부르
짖음'의 뜻인 '보에'와 '달리다'의 뜻인 '데오'에서 합성된
'보에데오'의 명령형으로 긴급한 구조를 요청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예수께서 침묵하시면 하실수록 예수의 침묵하시는
의도를 알지 못하는 가나안 여자는 더욱 더 간절하게 그의
도움을 구하였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ㅇ저녀가 떡을 취하여 -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축복을 가지고서'라는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
아들임에 있어서 유대인들에게 그 우선권이 있음을 상징하
는 말이다. 물론 이스라엘의 이러한 배타적(排他的) 특권이
영구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님을 말씀하시고 하
였다(호 1:9, 10). 그러나 복음 전파의 순서는 먼저 유대인
에게였고 그 다음은 이방인에게였으며(롬 2:9, 10), 본격적
이방 전도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후 그의 제자들 특히 사
도 바울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한편 바울도 이스라엘 민족
(民族)은 택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남보다 먼저 받
은 종교적 특권이 있음을 인정하였고, 민족적 구원의 문제
가 그에게 대단히 중요한 과제임을 인정하였다(롬 3:1, 2;
9:1,2).
ㅇ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 성경에서 '개'(퀴
온)라고 하는 말은 모두 악한 것을 상징하고 그것을 야유하
기 위해서 사용된 것으로서(출 11:7;삿 7:5;마 7:6;빌 3:2)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의 경멸의 대상인 이방인이나 이단자
를 가리키기 위해 자주 사용되었다(시 59:6). 그러나 예수
께서 사용하신 '개'라고 하는 말인 헬라어 '퀴나리온'은 경
멸적 의미에서의 '들개'나 거리를 어슬렁 거리며 다니아 사
납고 악한 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집 안에서 기르는'애
완용 개'나 '강아지'를 의미한다. 따라서 '개'라는 표현은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부를 때 사용하던 경멸적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이방인들이 '자녀' 곧 하나님의 선택
된 민족이 아니라고 하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다.
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
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ㅇ옳소이다마는 개들도 - 반의 접속사(but even) '마는...
도'(카이 가르) 는 '그러나...조차도'의 의미로, 본문에서
는 앞사람의 딸을 일단은 긍정하면서도 그 말에 완전히
승복(submission)하지 않고 또 다른 의견을 개진(改進)
하는 경우에 사용되었다. 가나안 여자는 하나님의 질서에
의해 유대인들에 비해 이방인인 자신들이 선택되지 못한 족
속이요 권리를 갖지 못한 자, 즉 개들임을 인정했다. 이처
럼 자신을 개로서 인정하는 것은 성경에서는 가장 큰 겸손
의 행위로 여겨졌다(삼상 24:14;하 8 :13). 특히 사람들은
자신을 극도로 비하(卑下)시켜 표현할 경우 바로 '죽은 개
' 또는 '개 같은'이란 말을 사용하였다(삼하 9:8;16:9).
ㅇ제 주인의 상에서...먹나이다 - 팔레스틴근방의 지역들에
는 식사하는 주인 곁에서 부스러기를 얻어 먹기 위해 개들
이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었다고 한다.
특별히 그 지역들에서의 식사법을 보면 주로 손으로 찢어
먹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자연 부스러기가 많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여하튼 가나안 여인은 사실상 자신이 개의
취급을 받는 이방인 으로서 메시야가 베푸시는 구원과 은혜
의 식탁에 참예(參預)할 수는 없다고 하여도 최소한 하나님
의 무한하신 자비의 일부를 힘을 수는 있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tasker, Schlatter). 실로 그녀는 자
신에게 적용된 비유를놓치지 않고 유효 적절히 선용한 것이
다. 한편 본문의 내용을 의역해 보면 "주님 당신이 저를 개
로 취급한 것은 결국 저의 요구를 당신께서 들어주신 것과
같습니다. 정녕 당신은 당신의 법을 어기지 않고도 충분히
저의 요구를 채울수 있습니다. 저는 그 정당한 일에 따를
뿐입니다. 저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는 아무런 권리 주장
도 못할 뿐 아니라 하지도 않을 것 입니다. 저는 다만 가장
비천한 피조물의 몫으로 할애 된 것만을 위하겠습니다. 진정
당신은 그것이 없다 해도 아무런 손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Pulit Commentary)로 풀어볼 수 있다. 그녀는 하나님의
은헤가 비록 적으나마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지는 것임dmf,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의 독점된 하나님이 아니라 만
민의, 열방의 하나넘이심을 믿고 있었다(롬 3:29).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
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
라
ㅇ여자야 - 헬라어 성경에는 '여자야'라는 말 앞에 감탄사
'오'가 붙어있다. 이는 눅 22:57;요 2:4;4:21과같이 '오'
없이 단순히 호격으로 '여자여'라고 부르는 것과는 전적으
로 다르다. 호격과 함께는 드물게 사용되는 '오'는 말하는
사람의 감정을 드러내 주는데 본문의 경우에는 예수의 놀람
과 감탄이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ㅇ네 믿음이 크도다 - 여기서 '믿음'이란 그녀의 신뢰
(trust), 확신(confidence)과 아울러 겸손(modesty)
과 인내(patience)까지를 포함한 말이다. 이 가나안
여자는 예수 께 칭찬을 받은 두번째 이방인이다(8:10). 이방
인 백부장의 이야기와 본문의 이야기는 몇가지 공통되는 요
소가 있는데 (1) 두 경우 모두 이방인에게(백 부장의 하인,
가나안 여자의 딸) 예수의 병고침의 능력이 베풀어졌다고 하
는 점 (2) 두 경우 모두 이방인 자신의 큰 믿음이 예수에게서
칭찬을 받았다고 하는 점인데 앞에서는 이스라엘 중에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만한 것이 없으며, 이곳에서는 '네 믿음이 크도
다'라고 강조가 되어 있다. (3) 두 경우 모두 예수의 병치료는
병자를 현장에서 만나보지 않은채 멀리서 말씀으로 고치신 '원
거리 치료'였다고 하는 점이다. 따라서 이방인 백부장과 가나
안 여자의 기사는 유대인들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를 배척했으
나 오히려 이방인들은 믿고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에 대
한 구약적 개념이 신약적 개념으로 옮기워졌음을 의미하는 것
이다. 즉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유대인에 국한 되었으나
신약에 와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전 세계의 사람들은 모
두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는 광의적이며 영직인 선민론(選
民論)을 암시하고 있다(행 7:6).
ㅇ네 소원대로 되리라 - 여자의 첫번째 말에 침묵으로 일관하
시고, 두번째 말에는 냉정한 말로 그녀를 무시하셨으며, 마침
내 세번째 말에 이르러 칭찬과 함께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신
예수께서는 비유에 나타난 불의한 재판관처럼 끈질긴 간청에
못이기어 그녀의 소원(所願)을 마지못해 이루어주신 것이 아
니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그녀의 큰믿음을 알고 계셨었다.
그러나 (1)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조차도 부정한 메
시야를 참메시야로 올바르게 인식한 그녀 자신의 내면의 지혜
와 믿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냄으로써 유대인들을 부끄럽게
하며 회개를 촉구하시기 위해서, 그리고 (2) 유대인들이 거부
한 구원의 축복이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이방인들도 그 축복의
자리에 참여할 수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예수께서는 그녀의
소원을 외면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
신 말씀은 그녀를 위허 이미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 결정되어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소원대로'(호스 델레이스)란 직역하면
'원하는 만큼'으로 각종 난관(難關)을 인내로 극복한 그 여자
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시겠다는 예수의 강한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2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ㅇ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 막 7:31은 예수
가 두로에서 나와 북쪽에있는 시돈으로 가선 다음에 다시
헤롯의 통치 영역의 밖, 즉 갈릴리 호수 남동 쪽에 위치해
있는 데가볼리를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러한 여정(旅程)은 예수께서 사악한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의 관할 지역을 의도적으로 회피하셨음을 보여준다
아무튼 이곳은 아직까지 유대 지경이 아뉜 이방인의 땅이라
고 하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곳에서의 병고침과 4천명의 급
식(supply of food) 사건은 가나안 여자의 사건을 통해
서 이방인들이 자신들에게는 부스러기, 즉 한정된 축복 밖
에는 돌아갈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을 염려하신 예수
께서 이제 구원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도 본격적으로 전과
되었고 그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게 되
었음을 알리시기 위한 목적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할수 있다.
ㅇ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 이는 산상수훈의 장면(5:1)
을 연상케 한다. 예수께서는 선교 여행자로서의 여독(餘毒)
으로 인해 잠시 휴식 하셨다. 그러나 이 휴식은 정적(靜的)
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며 동적(動的)인 휴식이었다. 즉
본 기사를 영적으로 살필 때,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신 것은
모든 사람이 당신을 잘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왜냐하
면 예수는 모든 자의 바라 볼 소망이시며 만인의 구원자이시
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께서 앉으신 것은 당신 찾아오시는
자를 은혜롭게 맞아 주시기 위하여 모든 문제가 해결될 때
까지 안정되게 자리를 잡으심을 의미한다.
30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ㅇ큰 무리가...여럿을 데리고 - 평행 구절인 막 7:31-37에는
귀먹고 어울한 자를 고치시는 장면만을, 즉 여러 치유 기사
중 극적 장면만이 선택 기록되어 있으나 본서에는 각종 질병
을 치유하시는 종합적인 장면이 기술되어 있다. 사설 그 당
시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의학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했던 소외된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만성적(慢性的)
이고 고질적인 각종 질병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중 본문의
'불구자'(퀼루스)는 신체 중 일부가 손상되었거나 기능이 마
비된 자를 가리킨다. 아무튼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가 위대한
의사로서 영.육의 질병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심을 계속적으
로 보여주고 있다.
ㅇ예수의 발앞에 두매 - '두다'라고 하는 헬라어 '마토'는
사람이나 무거은 물건을 마치 경쟁하듯이 서둘러 내려 놓는
다고 하는 말이다. 본문의 경우 사람들이 병자들을 예수 앞
으로 인도해 와 진지한 열성(熱誠)으로 그의 발 앞에 내려
놓고 당신의 뜨거운 사랑을 호소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담
고 있다. 더구나 '두다'의 미완료형 '엘마산'은 병든 사람
을 예수의 발 앞에 내려놓는 행위가 한 번에 끝난 것이 아
니라 계속 반복해서 진행되고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이 말
은 무수히 많은 병자와 불구자들이 이곳 저곳에서 모여 예수
앞에 앉아그의 만져심과 고쳐주심을 기대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31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ㅇ벙어리가 말하고...소경이 보는 것 - 마태는 이사야가 언
급했던(사 35:5, 6) 병의 종류들 즉 절뚝발이, 불구자, 소경,
벙어리와 그 완치(完治)를 그대로 언급함으로써 이방에서의
예수의 병 치료도 역시 이사야 예언의 성취이며 따라서 '이
방의 땅 갈릴리의 흑암에 앉은 백성들이 큰 빛을 볼 것'(사
9:1, 2)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예언도 역시 이루어지고 있음
을 보여주고 있다.
ㅇ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 현재 예수께서 머
물러 계신 곳이 바로 유대인들이 잘 지나 다니지 않는 곳인
이방 땅 갈릴리 호수라고 하는 점과 병고침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말을 통
해서 그들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님을 간접적으로 암시한
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지금 이방인들과 함께 계시고 그 이방
인들을 고쳐주신 것이다. 한편 이방인들이 예수의 기적을 보
고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는 이러한 표
현은 오히려 유대인들로 하여금 놀라게 하는 요인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그들도 역시 예수의 기적을 보고서 하나님께 영광
을 돌린 적이 있었으나 대부분의 경우에 예수의 권능은 바알
세불 등의 힘에 의한 것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며 그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될
수 있는 대로 그러한 사실을 부인하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ㅇ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 5천명을 먹일 때는 제자들이 나
아와 무리들의 먹을 것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반(反)해서 여기
서는 예수가 먼저 나서서 그들을 먹이기 위해 제자들을 부르
셨다.
ㅇ내가...불쌍히 여기노라 - 이번 이적의 동기를 보여 준다.
즉 예수는 무리들에 대해 뜨거운 동정심으로 인해 그들의 필
요를 채워 주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
는 뜻의 헬라어 '스프랑크니조마이'는 '내장', '심장'이란 뜻
의 '스프랑크논'에서 유래한 것으로 피부 깊숙이서부터 표출
된 깊은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나타내 준다. 실로 바로 이 예
수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인간 구원과, 인생 문제 해결의
궁극적인 원인이 된다(14:14;눅 7:13).
ㅇ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 '함께 있다'라는 뜻의 헬라어
'프로스메노'는 '함께 머물다', '집착하다' 등의 의미로, 행
11:23에서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보낸 바나바가 안디옥 교인들
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고 권고하는 말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지금 갈릴리 호숫가에 밀집
해 있는 무리들은 그들이 비록 예수를 영혼의 질병을 구원하
는 참메시야로서 알지 못하고, 단순히 굶주림과 병(病)에서
놓여나게 하는 구원자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예수에
대한 그의 기대와 신뢰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
실을 의미한다,
ㅇ이미 사흘이매 - 이는 예수의 병고치는 사역이 그 각각의
병자의에게 계속 진행되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 무리들이
가져왔던 음식이 모두 바닥났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한편 팔
레스틴 주민들은 보통 두터운 겉옷을 걸치고 다니면서 싸늘한
밤 기후에도 길가에서 노숙(露宿)할 만큼 먼 여행에 익숙해
있었다.
ㅇ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 헬라어 성
경에서 쓰인 '메포테'는 '혹시 '하지나 않을까'라는 뜻으로,
조건문을 이끄는 종속 접속사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예수께
서 '혹시 그들이 길에서 지쳐 쓰러지지나 않을까'하는 염려
때문에 그들을 집으로 보내지 못하고 있음을 잘 드러내고 있
다. 이는 그들에 대한 예수의 사랑이 마치 자녀에 대한 부모
의 사랑 같은 것임을 나타내 주는 표현이다. 한편 학자들에
따르면 그 당시 민족적 축제로 인해 각지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일 때는 그중에 상당한 사람들이 지쳐 기진하거나 심하면
객사(客死)했다고 한다.
33 제자들이 가로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ㅇ어디서...떡을 얻으리이까 - 제자들의 이 물음이 필요한
양의 떡을 공급하는 일은 자신들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예수
께 달린 것임을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이 조금
씩 받게 할지라도'(요 6:7)라는 오천 명 먹일 때와 같은 식
의 계산도 하지 않고 오히려 군중들의 배부름을 예상하고 있
다고 하는 점에서 그들이 오천 명의 급식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고 예수께 대한 신앙을 간직하였다는 평가가 있다(R.
C. H. Lenski).반면 제자들의 이 물음은 어찌 할 바를 모르
고 당황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고 판단하여 그들이 여전
히 무지하고 불신앙적이라고 하는 비판이 있다(D.A.
Carson, William Handriksen). 그중 후자의 견해가 더욱 타
당한 듯하다. 즉 제자들은 고질(痼疾)적인 불신앙으로 예수
의 무한하신 권능과 과거의 이적들을 외면하였던 것이다.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ㅇ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불
신앙적 태도를 책망치 않으시고 대신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권능을 기대하도록 하시려는 의도에서 이 같은 질문을 던지
셨다. 예수의 이 물음은 다음의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1) 현재 너희가 가지고 있는 물질, 재능, 소질에 대한 참
된 가치는 신앙의 힘에 의해서 만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다. 예수께서는 언제나 현재 가진 것을 변혁을 위한 놀라운
가능성(可能性)으로 바라보셨는데 이는 말씀만으로도 친지를
창조하실 수 있었던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뢰(信賴)에서
생겨난 것이다. (2) 영적인 의미에서, 인간 영혼의 떡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가 지금 어느 정도인가를 물으시는 것
이다. 그리고 그 믿음이 비록 겨자씨만한 것 혹은 보리떡 일
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
기에는 절대 부족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믿음을 기초로 하
여 더 큰 믿음을 이루시겠다고 하는 의지가 담겨져 있는 것
이다.
ㅇ일곱 개 - 이 '일곱' 이라는 숫자는 성경 문학적으로 하나
님의 수, 승리의 완전수를 가리키는데 본문에서는 그러한 영
적 측면에서보다 그 당시 실재했던 물고기의 숫자에 관심을
집증시키는 것이 좋다.
ㅇ작은 생선(잎뒤디온)- 이 말은 당시 주식으로 사용했던 건
조한 조그만 물고기였을 것이다. 그런데 특별히 본문에서는
적어도 하찮은것, 별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조금은 과소평가
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35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ㅇ땅에 앉게 하시고 - 이 때의 계절을 짐작하게 하는 말이다.
14:19에서 푸른 잔디(막 6:39)에 앉게 하셨을 때의 계절이 우
기(雨基)가 막 지나고 유월절이 가까와 오는 봄이었다면 이방
땅에서의 전도 여행을 끌맺음하려는 이때는 유월절이 훨씬 지
난 건조기의 여름에 해당한다.
36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ㅇ축사하시고(유카리스테사스) - 이는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
께 대화(기도)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유대인들은 음식을 먹
기 전에 이러한 감사의 기도를 습관처럼 드렸다(14:19).
37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ㅇ배불리 먹고 - 같은 동사 '코타조'가 5장의 산상수훈(山相羞
訓)에도 나온다. 즉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
희가 배부를 것임이요'(5:6). 이 동사는 주로 '만족을 채우다'
라는 의미로, 각 사람들이 각자 만족한 만큼의 넉넉한 음식을
받았음을 암시한다.
ㅇ광주리 - 유대인들이 여행시에 이방인의 지역을 지나가게 되
더라도 이방인들의 음식을 먹지 않기 위해 자신들의 음식을 담
아 가지고 다니는 주머니를 가리키는 말인 바구니(코피노스 ;
14:20) 와는 달리 광주리 '스퓌리스'는 흔히 이방인들이 물고기
나 과일을 담는 데 사용하기 위하여 갈대로 만든 큰 그릇이다.
어떤 것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큰 것도 있었다고 한다
(행 9:25). 따라서 본문의 남은 떡 조각은 5,000명 급식 때보다
더 많은 양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한편 롤린슨(Rawlinson)
에 의하면 최소한 유대인들도 정결한 음식물을 나르기 위해서는
광주리가 아니라 바구니(코피노스)를 사용했다고 한다. 따라서
'광주리'라고 하는 표현도 아무리들이 역시 유대인이 아닌 사람
들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38 먹은 자는 여자와 아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ㅇ사천 명이었더라 - 이는 예수의 이적이 지닌 탁월성을 보여주
는 동시에 미구(未九)에 그가 베푸실 메시야 잔치의 풍성하고도
충만한 상태를 예시해 준다. 향편 여기서 사천 명이라는 수에서
'넷'이라는 숫자는 천지 사방 (天地四方)을 가리키는 것이며
'천'이라는 숫자는 크고 많다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4,000
(4*1,000)이란 영으로 세게성, 보편성, 및 광대성을 암시하는
숫자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결국 전세계는 생명의 떡이신 주님
을 필요로 하고 주님은 이 세상 모두를 만족게하고도 남을 만큼
의 풍성한 영적 생명력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준다고 할수 있다.
39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에
가시니라
ㅇ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 주님과 함께 오랫동안 지내던(프로
스메노;32절) 사람들을 이제 '풀어 보내시다'(아폴뤼오)는 의
미로, 예수께서는 자신의 곁에 더 머무르려고 하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강제로 집에 돌려 보낸다고 하는 뜻이 들어있다. 예
수께서 이들을 강제로 돌려보낸 사실에는 다음의 두 가지 의미
가 담겨져 있을 것이다. (1) 우선 이들은 12제자들과 같이 집
이나 전토(田土), 부모, 형제, 처자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christian)이 아니라 단순히 예수님의 이적 행위만을
기대하며 그를 좇아 다니는 사람들(Christ follower)
이기 때문이다. (2) 이들이 광야에 남아서 예수릍 그들의 임금
으로 옹위(擁衛)하려는 정치적 모의를 할 수 없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흩으시고 강제로 집에 가게 하셨던 것이다. (3) 더욱이
이들이 집이나 마을로 돌아가서 이 엄청난 사건을 사람들에게
전함으로써 예수의 소문은 더욱 더 크게 퍼져나갔고 혼히 이들
은 이방 교회 구성하는 사람들이 되었을 것이다.
ㅇ마가단 지경 - 막 8:10에는 '달마누다지방'으로 되어 있는데
유대의 어떤 사본(바질 사본, 오전시스 사본)에는 '막달라 지
경'으로(KJV에도 이를 따름) 나와 있기도 하다. 그리고 라틴
벌게잇 역(Vulgate)에는 '마게단'(Magedan)으로 표기되어
있다 여하튼 '마가단'의 이름의 뜻은 '망대'로 그 위치는 불명
확하나 아마도 디베랴의 북쪽5km 지점의 게네사렛 평야의 남단
에 있었던 성읍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곳은 막달라 마리아의
고향으로 추정되고 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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