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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말라기(2): 결혼과 이혼-성경적 결혼관- (2:1-17)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0:03

말라기(2): 결혼과 이혼-성경적 결혼관- (2:1-17)


말라기(형식적인 종교에 대한 책망)

 

 

2. 결혼과 이혼 -성경적 결혼관-(2장)

 

2-1. 범죄한 제사장(1-3)

  "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2).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3)."

  말라기 2장에서는 1:6에서 시작된 제사장에 대한 책망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말라기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제사장들의 죄악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말라기는 그들이 계속해서 범죄하고 회개하지 않을 때에 임할 심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명령은 2:2에서 포고, 선고, 또는 심판의 위협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한 제사장들에게 저주가 선포되고 있다. 모세는 이미 오래 전에 율법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저주가 내릴 것이라고 경고했었다(신 27:15-16, 28:15-68).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않으면 그들의 복을 저주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언급된 복은 제사장의 수입과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 그리고 제사장의 직무를 통해 백성들에게 주어질 모든 축복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에는 2:5에서 언급하고 있는 생명과 평강의 축복도 포함된다. 하나님은 이미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모독했기 때문에, 이러한 축복들을 거두어 가셨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계속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그들의 종자를 견책하시겠다고 경고하신다. 여기에 언급된 종자는 땅에 뿌려지는 종자 씨앗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땅에 뿌리는 종자 씨앗을 저주하시면, 백성들의 수확량은 크게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그들의 십일조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제사장들 역시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은 희생 제물의 똥을 제사장들의 얼굴에 바르시겠다고 경고하셨다. 희생 제물의  똥을 얼굴에 뿌리는 것은 극한 수치와 멸시의 대상이 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모독하면 그들이 극한 수치와 멸시를 받게 만드실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제사장은 가증하게 간주되어 쓰레기처럼 될 것이며, 결국 쓰레기와 함께 버림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고는 레위에게 주어진 평화의 언약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사장들이 계속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레위와 맺은 언약이 파기되고 그들은 제사장직을 잃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온전한 마음으로 제사장직을 수행하여 하나님께서 레위와 맺은 언약을 유지할 수 있게 해야 했다.


2-2. 신실한 레위(4-6)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줄을 너희가 알리라(4).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으로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5), 그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6)."

  여기에서 말라기는 말라기 당시의 제사장들의 불경한 행위와 그들의 조상 레위의 신실한 행동을 대조하고 있다. 시내산에서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황금 송아지를 섬겼을 때에, 레위 족속은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행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을 제거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레위와 그 후손들에게 제사장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언약의 본질은 생명과 평안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신실하게 행했던 레위 족속을 통해서 온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레위와 그 족속을 제사장으로 세우시고, 그와 그 후손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행하기를 원하셨다. 레위 족속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했다. 그때에 레위 족속은 편견이나 사심없이 진실하게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쳤다. 레위는 하나님을 경외했고 하나님과 동행했다. 여기에서 "동행했다"고 번역된 말은 친밀한 교제를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레위족속의 사역을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죄에서 떠나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다.


2-3. 신실치 못한 레위인들(7-9)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7),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파하였느니라(8). 너희가 내 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편벽되이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모든 백성 앞에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9)."

  제사장들은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기 위해 임명된 교사들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사자"라고 불리우고 있다(학 1:3을 보면 학개도 하나님의 사자로 불리어지고 있다). 이 말은 보통 천사를 언급할 때에 사용된 말이었지만, 여기에서는 이 말이 제사장들에게 적용되고 있다. 율법을 가르치는 제사장의 입술은 진리의 지식을 지켜야만 했다. 백성들은 그들의 입을 통해서 진리의 율법의 말씀이 흘러나오기를 구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초기 시대의 레위와 말라기 시대의 경솔한 제사장들 사이에는 참으로 큰 차이가 있었다. 그들은 2:6-7에 개괄된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고 말았다. 그들은 율법을 그릇되게 해석했으며, 악한 행실의 본을 보임으로서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을 벗어나 행동하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언약의 규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그 효력을 상실케 만들어서 레위의 언약을 더렵혔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봉사를 경멸했으며, 이로 인해(1:7,12) 하나님께서도 그들이 백성들에게 천시받게 만드셨다. 백성들이 볼 때에 그들의 타락은 일종의 징계였다. 그들은 편파적으로 직무를 수행했다. 그들은 뇌물을 받고 율법을 올바로 시행하지 않고 부당하게 일을 처리했다.


2-4. 가증스러운 결혼(10-12)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궤사를 행하여 우리 열조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10) 유다는 궤사를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유다는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11),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서 끊어 버리시리라(12)."

  제사장들의 죄는 이미 앞에서 언급된 것들만으로도 징계받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들의 죄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제사장들과 백성들은 자기 동족인 아내에게 가혹한 일을 자행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부정한 결혼을 했다. 말라기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가 되셨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은 같은 아버지를 둔 한 형제이며 자매였다. 또한 그들은 모두 창조주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피조물이었다. 이러한 점에서도 그들은 같은 기원을 가진 가족이었다. 하나님은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함을 보존하기 위해서 이방인들과의 혼인을 금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서 속임수를 써서 이스라엘 여자인 아내와 이혼을 했다. 이러한 잡혼에 대해서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2:11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욕되게 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과 동일하게 거룩하게 구별된 부인들을 가혹하게 대했다. 그들은 유대 아내들을 우상을 섬기는 이방 여인들보다 더 못하게 간주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이러한 죄는 크게 가증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러한 일을 행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가족을 모두 멸하시겠다고 경고하셨다. 하나님은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 즉 모든 자를 치실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깨는 자와 응답하는 자"ㅏ 밤에 성전을 지키면서 서로 부르고 응답하는 레위인들이나 교사, 또는 학자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말은 그런 뜻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이 말은 "모든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에서 이 말은 심판의 보편성을 언급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제물을 통해서 자기 아내에게 잘못 행한 죄를 깨끗하게 씻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결혼이라는 언약을 매우 귀중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5. 이혼죄(13-16)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게 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13), 너희는 이르기를 어찜이니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찌기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14).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찌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찌니라(1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궤사를 행치 말찌니라(16)."

  이스라엘 남자들과 우상을 숭배하는 여인들과의 결혼은 또 다른 죄악의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이방 여인들과의 재혼은 유대 여인들과의 이혼이 전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유대 남자들에게 버림을 받은 유대 부인들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와서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 그러므로 전 남편들이 제물을 가지고 제단이 나아올 때에 하나님은 그 제물을 받으실 수가 없었다. 하나님은 가슴 아파서 울부짖는 유대 부인들의 아픔을 돌아보셨으며, 악한 일을 행한 유대 남자들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 구약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이혼죄에 대해서 이처럼 강하게 언급한 적이 없다. 이러한 언급은 이혼이 만연한 오늘날의 시대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이혼죄를 범하면 이혼 당한 자가 울며 부르짖는 애통이 제단에 메아리를 치기 때문에, 그가 드리는 모든 제물과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을 받을 수가 없다. 그러나 말라기 시대의 유대인들은 왜 하나님께서 자기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 나아와서 왜 자기들이 드리는 제물을 받지 않으셨냐고 물었다. 그때에 하나님은 자신이 합법적인 결혼의 증인이 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버린 유대 부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결혼 서약을 하고, 젊었을 때부터 어려운 일을 함께 겪어온 친구요 동반자였다.

  2:15은 이혼에 대한 강력한 논쟁으로서, 말라기 전체에서 가장 난해한 구절로 간주되고 있다. 이 구절은 유대교 해석자나 기독교 해석자들에게 항상 문제가 되어 왔다. 이 구절의 상반절은 비교적 해석하기가 쉽다. 그러나 하반절은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말라기는 유대 남자들이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고 유대 부인들을 잘못 대우한 일이 큰 잘못이었다고 경고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의 상반절을 다음과 같이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영의 나머지를 가진 자는 아무도 그렇게 행하지 않았다." 이것은 유대 남자들이 하나님의 영을 조금이라도 가졌다면, 무자비하게 유대 부인과 이혼하고 이방 여인들과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하반절의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다. 탈굼과 대부분의 랍비들은 "하나"를 첫 부인 외에 다른 부인을 취한 아브라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말라기 시대의 유대인들은 사라를 아내로 맞아들인 후에 다시 하갈을 취한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서 자기 행위를 정당화 하려고 했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이기적인 쾌락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후손을 얻기 위해서 하갈을 취했으며, 따라서 아브라함이 하갈을 취한 후에도 하나님의 영이 아브라함에게 머물러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아브라함이 하갈을 취한 것을 옳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또한 말라기 시대 유대 남자들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아니라 자기 정욕을 위해서 유대 부인들을 버리고 이방여인들과 재혼을 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이 구절을 아브라함에게 적용하여 자신들을 합리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선지자 말라기가 이혼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결혼의 언래적인 제도가 언급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창 2:24)에 나오는 "한 몸"과 여기에 있는 "하나"를 비교하라! 하나님은 결혼 관계 속에서 둘을 하나로 만드셨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많은 부인을 주실 수 있으셨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많은 여인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렇지 하지 않으셨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아담에게 한 여인만을 만들어 주셨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손을 원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경건한 후손들이 태어나기를 원하셨다. 일부 다처제와 이혼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행동은 약속된 메시아의 혈통을 유지하는 일에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경건한 자손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은 유대 남자들의 이방 여인과의 잡혼으로 인해 도전을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유대 남자들에게 자기 행위를 부지런히 살펴보고, 옳지 못한 행동을 삼가라고 촉구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은 아내를 버리는 이혼을 미워하신다. 이 말씀은 이혼을 허락한 (신 24:1)과 대치되는 것은 아니다. 신명기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워낙 완악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이혼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정상적인 상태에서 이혼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이다. 또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사람들도 가증하게 여기신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한 여인을 자기 아내로 주장하기 위해서 그 여인에게 옷을 던지던 당시의 관습을 반영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 아내를 위해서 옷을 펼치지 않고, 오히려 폭력으로 그 옷을 가리웠다. 옷은 결혼과 신뢰와 보호를 상징한다. 선지자는 다시 한 번 이러한 중요한 일에 대해서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2-6. 하나님을 괴롭힘(17)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행악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선히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17)."

  신실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한 세 번째 악한 일은 "회의주의"였다. 그들은 불경건과 불신앙으로 하나님을 괴롭혔으며, 그들의 계속된 악으로 인해 하나님은 그들을 참고 바라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들은 악인이 번영하고 의인이 고난을 받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이러한 일을 보고 하나님의 의로운 섭리를 부정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포로로 지냈으며, 그 후에도 많은 시련을 받았다. 그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형통하게 하시며, 이교도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번영을 주셨다고 말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의인에게 고난을 주시고, 악인을 엄격하게 심판하지 않으신다고 불평했다. 그들은 날마다 회당에서 전파되는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항의했다. 이러한 그들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3:1에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이 대답에 대해서는 3장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2-7. 축복이 저주로 변하다

  인간의 심령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축복을 잊고 살 때가 많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는다. 불경건한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 축복에 대해 감사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올바르게 사용하고 누릴 줄 몰랐다. 그들의 축복은 율법에 대한 순종 여부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처음에 그들에게 주어졌던 축복은 점차 저주로 변하고 말았다. 이러한 일은 어느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나타날 수 있는 일이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그들은 무한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하면 그들이 받은 축복은 저주로 변하게 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성령과 복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라고 주어진 것이다. 우리가 이 일을 잘 감당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은혜와 축복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게을리하면 하나님은 그 축복을 거두어 가실 것이다. 우리가 축복을 상실한 후에 후회하지 말고, 그 축복이 주어져 있을 때에 그 은혜에 감사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이 주신 풍성하신 축복을 체험하며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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