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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말라기

[스크랩] 말라기(1): 제사장의 타락 (1:1-14)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8. 23:59

말라기(1): 제사장의 타락 (1:1-14)


말라기(형식적인 종교에 대한 책망)


1. 제사장의 타락

1-1. 말라기와 시대적 배경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1)."

  선지자들은 계속해서 메시아의 오심을 예고해 왔다. 말라기는 이러한 선지자들 중에 가장 마지막에 예언한 선지자였다. 말라기의 개인 경력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떤 사람은 "말라기"란 말이 "나의 사자"라는 뜻이며, 고유 명사가 아니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자유주의 비평가들은 이 책이 원래 익명으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에서 "사자"라는 말은 "천사"라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몇 몇 교부들은 말라기를 성육신 한 천사로 간주하기도 했다. 이 책은 특히 제사장에 대해서 두드러지게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말라기가 제사장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요나단의 아람어 탈굼은 에스라가 말라기를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박국과 오바댜처럼 말라기도 그 혈통과 출생지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다. 유대 전승은 말라기가(학개, 스가랴와 같이) 대회당에 속한 회원이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 익명으로 전달된 선지서는 없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우리는 말라기가 바로 이 책을 기록한 사람이었으며, 또한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선지자는 느헤미야가 다스리던 시기에 활동했다. 그는 분명히 포로기가 끝난 후에 활동했다. 당시에는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로 인해 성전이 재건되었으며, 제사장들을 통해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으로 침체해 있었다. 말라기는 학개와 스가랴보다 약 1세기 정도 지난 후에 활동을 했다. 학개와 스가랴가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격려하고 인도했던 것처럼, 말라기도 느헤미야를 격려하고 인도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주전 5세기 말 경으로 볼 수 있다. 말라기의 메시지는 대부분 죄의 선고와 책망이었다. 그 당시에 나타난 백성들의 정신은 후일 바리새주의나 사두개 종파로 발전되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도덕적, 영적 상태는 오늘날 기독교의 도덕적, 영적 상태와 같았다. 여기에는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 돌아온 남은 자들의 영적 생활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자기들을 향해 나타난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대해 무감각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뜻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 지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멸시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영적 인식력이 부족해서 자기들의 행위가 지적을 받을 때에도, 자기들이 왜 책망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을 책망하는 선지자들에게 다시 그 말의 의미를 묻고 있다.

  느헤미야를 격노케 했던 이스라엘의 죄는 말라기를 분노케 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말라기를 통해 보면 그들의 잘못은 1) 제사장들의 부패와, 2) 이스라엘 아내들과 이혼한 후에 이방 여인들과 재혼한 일과, 그리고 3) 십일조와 헌물을 소홀히 한 일 등이었다. 말라기는 그 백성 중에 있는 신실한 남은 자들의 위치와 전망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 책은 연속되는 일련의 설교이다. 말라기는 직접적이며 강력하고 신랄한 산문 문체를 취하고 있다. 이 책의 서문은 후기 유대교에 널리 알려진 변증법적 형태의 가르침이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일어난 여덟 번에 걸린 논쟁이 1:2,6,7, 2:14,17, 3:7,8,13에 나타나 있다. 그들은 죄 때문에 비난을 받을때마다 하나님을 대적했으며, 그 증거를 대라고 도전하였다.


1-2.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2-5)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2),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3).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찌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4), 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5)."

  이 예언의 표제는 하나님의 경고이다. 이 말은 이 메시지가 격래나 위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책망을 위한 것임을 보여준다. "경고"라는 말은 이 구절과 (슥 9:1, 12:1)에서 사용되고 있다. 말라기는 이스라엘, 즉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12지파 모두에게 이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이 예언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셨다는 영광스럽고 즐거운 사실을 지적함으로 시작하고 있다. 구약 성경의 마지막 예언이며, 거룩한 말씀의 마지막 페이지인 말라기서에서 하나님은 이라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하신 것은 야곱의 분에 넘치는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사람들을 선택하셨다는 교리는 변덕스럽거나 독단적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책임을 감소시키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선언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경건하지 못한 태도로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느냐?"고 물었다. 이스라엘의 모든 죄악의 뿌리는 하나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죄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인내로서 에서보다 야곱을 더사랑하셨다고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대조를 이루는 것은 에서에 대한 하나님의 미움이다. 많은 해석자들은 이 책에 사용된 "미워한다"는 말을 비교급으로 보고 있으며, 이러한 예로 (창 29:30-31, 신 21:15-16, 잠 13:24, 마 6:24, 10:37, 눅 14:26)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책망하기 위해서 주권을 행사하지 않으신다. 에서가 수 세상 동안 계속해서 하나님을 대적해 왔기 때문에, 에서에 대한 미움은 타당한 것이었다. 이것은 구약 성경의 끝에 언급되어 있다.

  1:4에는 책망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에서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드러내기 위해서 선택된 예는 산들이 황폐해지고 그 산업이 황폐케 되어서 시랑이 거하는 장소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이 구절을 나바티안이 에돔을 정복한 것이나, 바사와 애굽이 전쟁한 일, 그리고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이해하고 있다. 주전 586년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지 5년 후에 갈대아인들이 에돔을 침범했다. (사 13:22)과 같이 "황무지'와 병행하기 위해서는 이사야 13:22에서 처럼 "황무지"와 병행하기 위해서는 "시랑"으로 번역된 말을 "거처"로 변혁할 수 없다. 이러한 번역은 이사야서의 구절에서 그 의미를 잃게 되는데, 이는 '거처"라는 말의 어원이 좀 복잡하기 때문이다.

  에서가 교만하게 황폐해진 곳을 재건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들이 건축한 모든 것을 엎어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로 인해 그 땅을 재건하려는 모든 실행은 모두 실패하게 될 것이다. 1:4에서 하나님은 에돔이 그 지위를 되찾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전에 에돔의 지경, 즉 에돔의 땅이라고 불리웠던 곳을 사악한 지경이라고 불리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에돔의 황폐화된 상태가 죄 때문임을 알게 될 것이다. 선지자 말라기가 에돔의 이름을 완전히 없애는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간주할 필요는 없다. 에돔의 쇠퇴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될 것이다. 그 때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이 진실로 은혜스러운 것임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1-3. 더럽혀진 제사(6-8)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찐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찐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6).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8)"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랑에 대해 어떻게 응답했는가? 이제 선지자는 이야기의 초점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배은망덕한 것으로 돌리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자녀처럼 대해주셨다. 그러면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공경했는가?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와 자녀로 대하지 않고, 주인을 모신 종처럼 행동했다.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를 드렸는가? 이러한 경배는 제사장들의 신실치 못함으로 인해 실시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책임을 제사장들에게 돌리고 있다. 레위인들이 지은 첫 번째 죄는 성전에서의 직무 태만이었다. 이러한 행동으로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범죄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음 절들에 언급되어 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제단에 더러운 제물을 드렸다. (신 15:21)은 이 일에 대해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말라기가 사용한 떡이라는 말은 제사 제물, 즉 동물의 고기를 의미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1) 이것은 제단에 드려졌다. 2) 1:8의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  3) (레 21:6,8,18)에서 제물을 상징하는 떡이 나옴. 말라기가 말한 떡이 희생 제물을 의미한다면, 산은 제단이 아니라, 희생제물사를 드리는 제단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예배를 멸시하는 일은 결국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된다. 그들은 모세의 율버에서 금지하고 있는 것, 즉 눈 먼 것, 저는 것, 그리고 병든 것을 제물로 드려서 하나님을 진노케 만들었다. 그들은 항상 상황에 따라서 하나님의 명령과 법을 수정하려고 했다. 그들은 뻔뻔하게도 그들의 통치자, 즉 페르시아의 총독에게도 드릴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려고 했다. 말라기는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의 예절 감각에 호소해서 설명하고 있다. 어디든지 하나님의 칭찬보다 인간의 칭찬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1-4. 하나님의 불만(9-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10)."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얼핏 보며 이 말은 회개하라는 말을 간접적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불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부정한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정한 제물을 제단에 드리는 한, 그들의 기도는 전혀 응답을 받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특히 이러한 일을 저지른 사람이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말라기는 특히 더욱 강력하게 이야기 한다. 하나님은 그들이 드리는 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그들이 드리는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차라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이상 더러운 제사를 드리지 못하도록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언급된 "헛되이"라는 말은 "값없이"라는 말로도 번역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탐욕스러운 제사장들이 문을 열고 닫는 사소한 일을 위해서도 돈을 요구했다고 생각한다. 제사장들은 너무 게으르고 부주의해서 제 시간에 성전 문을 닫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가장 적절한 설명은 그들이 드리는 예배가 형식적이 되고, 진실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배를 그치게 하셨다는 설명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헛된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차라리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이 더 낫다. 하나님은 진심이 없는 제사장이나 제물, 그리고 제사를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1-5. 열납되는 예배(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11)."

  그러나 하나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예배가 있다. 하나님은 장차 이러한 예배에 대해서 온 세상에 계시할 것이며. 또한 사람들이 이러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다. 해뜨는 곳에서부터 해지는 곳까지라는 말은 온 세상을 의미한다. 이 예언은 장차 온 세상에 이루어질 것이다. 에스겔의 마지막 장(48장)을 보면, 재건된 성전에서 온전한 예배가 드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예언이 이방인들이 온전한 예배에 참여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지금은 온 세상에 하나님의 이름이 알려지고 수많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신령과 진리의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보다 더 세계적이고 온전한 예배를 드릴 때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하나님의 이름이 각처에 알려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각처에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며, 하나님은 온 세상 사람들로부터 참된 예배를 받으시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부정하고 열심히 없는 이스라엘의 예배를 기뻐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장차 하나님은 만국 백성들로부터 깨끗한 마음으로 성심을 다해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게 될 것이다.


1-6. 성전 모독(12-14)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1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13).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14)."

  1:12에서 말라기는 제사장들의 죄,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위엄을 멸시했다는 주제로 돌아온다. 여기에서는 1:7에서 했던 책망이 반복되고 있다. 그들은 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나님의 위엄을 더렵혔다. 여기에서"더럽힌다"는 말은 분사로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이 분사로 상요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행동을 습관적으로 행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제단과 제사를 멸시하고 모독했다. 진실된 마음이 담기지 않은 제사는 귀찮고 짐스럽게 느껴질 뿐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일을 무시하고 코웃음을 쳤다.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폭력으로 빼앗은 것과 저는 것과 병든 것을 제물로 드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속임수와 모독이 담긴 제사를 받으실 분이 아니다. 그들이 좋은 제물을 드리지 못한 것은 그들이 가난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마음에 탐욕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서원을 할 때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그들이 정작 제물을 드릴 때가 되면 좋지 못한 것을 선택해서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은 이러한 일을 행한 영적 사기꾼들에게 저주를 내리실 것이다. 병들고 허물 많은 제물을 드리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중에서 멸시받고(1:6), 그 이름이 더렵혀졌다(1:2). 그러나 위대하신 왕이신 하나님은 이방인 중에서 높임을 받으시게 될 것이다(1:11).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고 모독하는 일을 속히 버리고 신령과 진리로 위대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


1-7.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다!

  이것은 보잘 것 없는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나타내는 아름다운 선포이다. 어떤 사람은 야곱이 하나님의 징계와 분노의 대상일 뿐이며, 그 이상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들의 거역과 범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야곱과 그의 후손, 즉이스라엘 민족을 진심으로 사랑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하늘의 가장 값진 보화이신, 독생자, 즉 이스라엘을 구속할 메시야를 보내주신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고심판을 선포하셨지만, 한 편으로는 그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고 그들을 용서해 주실 독생자를 준비해 주셨다. 이러한 선포는 우리들에게도 적용된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멸시하고, 그 이름을 더럽히는 일을 많이 저질렀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무한한 사랑과 은혜로 덮어주신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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